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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 전 니케아 시대 - 교회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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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국가

 

교회가 정치적 세력들을 경험하면서 발생한 갈등들을 겪게 된 것은 313년에 이르러 교회는 여러 면에서 신약성경이 말하는 순수하고 단순한 형태로부터 방황했다. 교회가 핍박의 증오대상으로 여겨졌던 복음의 기본 원리들은 이제 공식적 관용이 허용되면서 지켜야하는 규율이 되었다. 2-3세기 교회의 이야기는 최종적 승리와 종교적이고 정치적 세력에 대한 마지막 갈등’(final struggles)의 이야기이다. 터툴리안의 유명한 문구가 기억난다: “기독교인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the blood of Christian is the seed of the church).” 비록 이 문구가 정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맞는 의미를 갖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씨앗이 된다는 의미로서 기독교인들의 땀, 눈물, 그리고 피에 의한 것이다(8:11). 교회는 잔인한 억압을 직면하기 시작하면서 성장했다. 복음의 성격과 복음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성격은 불신자들의 적대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딤후 3:12).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교회가 세상과 평화를 즐기거나 추구하면 언뜻 보기에는 교회의 타협이라고 보여진다. 신약성경은 핍박을 피하는 방법을 말하지 않고 그것을 직면하는 법을 말해준다(5:10, 12). 문제는 교회가 핍박을 원하는 것이 아니가 그것이 요구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가장 적대적 환경 가운데서라도 번영한다는 것이 신적 본질의 분명한 증거이다. 더욱이 그 어떠한 것으로도 핍박만큼 불신앙을 제거하고, 신실한 자들을 고무시키고, 기독교인들을 연단시키는 것이 없다(1:2-4; 벧전 1:6-7; 4:12-13). 신약성경은 결코 핍박이 교회의 안녕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시하지 않는다(cf. 8:1-4; 2:8-10).

네로 핍박이 있기 전에 제국 내에 있는 본토인들에 대한 로마정책은 관습적 종교를 거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로마 시민권을 전향시키지는 않았을 뿐 아니라 제국 내에 새로운 종교들을 들여오는 것을 간과했다. 이러한 규율에 위배되지 않는 종교들을 종교 허용’(religio licita)이라 불렀다. 유대주의는 여기에 속했다. 로마정부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구별을 교회가 존재했던 초기에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법적 보호를 즐기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반만 아니라 교회를 파악하고 난 후 기독교인들을 신흥종교며 이색종교(different religion)를 추종하는 자들로 구분했다. 황제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64년 로마 시에 일어난 방화범으로 몰아갈 수 있었던 것도 당시에 기독교인들이 그 도시에 상당한 수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정부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게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1) 기독교인들이 복음전파의 열정을 가졌다는 것이다. 유대인들과 이교도들과는 달리 기독교인들은 이웃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개종시키려고 했다. 2) 옛 신들과 전통적 이교들을 부인했다. 로마제국인들이 다신 종교를 따르고 있지만 이교신들의 존재를 인정했고 다른 신앙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그들에게 종교는 단순히 개인적 문제나 관습으로 여겼다. 기독교인들은 전혀 달랐다. 유일 종교였고, 유일한 참 종교였다. 흥미 있는 것은 이교신들을 부인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들(atheists)로 불렀다는 것이다. 3) 기독교인들은 은둔적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삶의 모든 면에 잘 반영되었다: 기독교인들이 황제 숭배나 국가 종교에 참석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반역자들로 보였다; 기독교인들은 공직을 가지며 정치적 활동을 거부했다; 기독교인들은 로마군들에 가입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로마사회의 주변에 살면서 로마인들이 즐기는 유희들을 거부했다. 3) 이러한 기독교인들을 로마정부는 핍박했다. 교회가 조직화된 후부터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공권력을 직면했다. 교회는 네로부터 콘스탄틴에 이르는 시기동안(64-313) 간혈적인 핍박으로 환난을 당했다. 잔인한 핍박들은 황제가 누구냐에 따라 달랐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관용을 베풀었던 황제들도 있었다. 가장 잔인한 핍박을 일삼았던 황제들 중 한 사람은 데시우스(Desius, 249-51)였다. 248년 로마제국의 설립 1,000주년은 쇠퇴를 직면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쇠퇴의 원인을 옛 신들을 거부하는데서 비롯되었다는데서 원인을 찾았다. 그래서 데시우스는 교회에 대해 잔인한 핍박을 거행했다. 아마도 가장 처절한 핍박은 디오클레티안 시대(284-305)였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건물들과 성경이 불에 탔고 교회 지도자들이 살해를 당했을 뿐 아니라 평범한 기독교인들도 사냥, 고문, 또는 죽임을 당했다. 4) 마침내 복음이 승리했다. 로마의 핍박이 교회를 없애지 못했다. 교회는 여전히 성장했다. 디오클레티안의 폐위되고 죽은 후 신흥 로마 공직자, 콘스탄틴은 제국의 유익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기로 굳게 마음먹고 포용하기로 했다. 결정적인 전투를 앞두고 전설에 의하면 한 꿈을 꾸었다: “이 상징을 통해 너는 정복할 것이다.” 이 상징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의 첫 두 글자를 의미했다. 313년 콘스탄틴은 유명한 밀라노 칙렬’(Edict of Milan)을 내리고 교회에 법적 자유를 베풀었다. 복음은 잔혹한 적들 가운데서 살아남아 승리를 신자들에게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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