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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 사도시대의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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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시대의 마무리

 

사도시대(70-100)에 관련된 역사는 너무나 역사적 자료가 미미하기 때문에 교회사 중 가장 희미한 시대라 말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95-98) 신약성경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70)에 쓰여졌다. 그리하여 성경에 기록된 적은 정보만이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성경 외에 자료도 희박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사도시대가 마무리되면서 교회역사에 과도적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에 기독교인들의 다음 세대가 시작되고 교회는 사도들의 직접적인 감독과 영향으로부터 멀어지고 점점 독립화 되어갔으며 초대 교회적 모습에서 점점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이 시대를 가리켜 후기 사도적 교회시대라 부르고 사도들이 떠난 상황에서 직면되는 여러 문제들을 맞이하게 된다.

 

사도들의 사역과 죽음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사역과 죽음에 대한 전설들이 있지만 성경적 성격과는 거리가 멀게 보인다. 사도들이 말년에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여러 가지 심각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50년 예루살렘 회의(conference) 때까지 적어도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다고 여겨진다(8:1; 15:6).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44년 아그립바 왕에 의해 살해당했다(12;1-2). 베드로, 요한, 유다, 그리고 바울을 제외하고 다른 사도들에 대해서는 50년 이후에 거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초의 사도들, 즉 베드로와 요한은 유다를 떠나 여행하며 사역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먼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교훈에 따라 온 세상으로 나아갔다(28:19; 16:15); 2) 바울이 58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장로들과 모임을 가졌다고 되어있는데 사도들이 이미 예루살렘을 떠난 후라고 여겨진다(21:17-8). 초대 사도들, 즉 베드로와 요한은 유다를 떠나 사역을 행하므로 영향을 끼쳤다(고전 1:12; 9:5; 벧전 1:1; 5:3; 1:9). 로마 카톨릭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가 로마 교회 감독이었는지는 문제가 되지만 로마에 들어갔다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한 증거가 없다. 전통에 의하면 베드로가 64년에 거꾸로 매달려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순교적 죽음을 예언하신 것을 관련시키기 때문일 것이다(요한 21:18-9). 68년 바울은 로마 밖에서 목베임을 당했다(딤후 4:6-8, 16-8). 요한은 말년에 아마 에베소에서 활동했을 것이고 자연사를 당한 유일한 분일 것이다. 나머지 사도들의 삶, 사역, 그리고 죽음은 알 수 없다.

 

교회의 발전

교회는 초창기에 상당한 성장을 했다. 수천 명의 유대인들은 복음이 유대 내에 전파되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다(2:41; 4:4; 6:7). 이러한 급성장은 이방국가들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일어났다(16:5). 바울은 이방인들과 소아시아, 마게도니아, 그리고 아가야(Achaia)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그 혼자만의 사역은 아니었다. 강력한 교회는 그가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설립되어 있었고 바울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베드로는 바울이 방문하지 않았던 지역, 즉 소아시아의 북서부 지역에 흩어져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서신을 쓸 수 있었다. 바울은 자신이 일리쿰(Illyricum, 마게도니아 북서부지역)까지 먼곳 까지 복음을 전파했고 스페인까지 갈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15:19, 24). 크레타 섬(Crete, 그리스 동남부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지만 말년에 디도를 그 곳에 보내면서 각 도시에 임명된 장로들에게 지침을 주었다(1:5). 또 디도를 달마티아(Dalmatia, 딤후 4:10)로 보내기도 했다. 감옥에 갇혀 있는 그는 로마에서 골로새 형제들에게 편지를 써서(61-3년경) 복음이 하늘 아래 온 피조물들에게전파되었다고 말했다(1:23). 이와 같은 급성장은 1세기말에도 계속되었던 것이 확실한데 그 이유는 초대 기독교인들이 복음전파에 열정이 이를 잘 반영한다. 사실 요한이 계시록을 쓸 때(95) 아시아에만도 10교회 이상 알려진 교회가 있었다.

하지만 먹구름이 서서히 지평선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울이 예언한 것처럼 마지막 성경은 변절자들이 생기게 된 것이다(20:29; 딤후 4:1-3; 딤후 3:1-9; 4:3-4).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 억압을 가하게 되었고(39-10), 1세기말에 이르러 계시록에 언급된 7교회들 중 두 교회만 영적으로 건강했을 뿐이다(2:3). 평범한 기독교인들은 그들 가운데 있는 거짓 교사들과 부도덕으로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2:14-5; 20-24). 아시아 교회들의 조건들은 1세기말 모든 교회들의 전형적인 문제들을 반영했다. 요한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시작된 이단과 전투를 의미하는 듯하다. “적그리스도들은 이미 요한이 세상을 떠나기 전 등장했다(12:18; 4:3; 27). 그리스도의 주요한 적들은 수년 안에 도래했다.

 

유대주의와 로마정부와의 관계

기독교인들과 불신 유대인들간의 관계가 처음에는 친숙했지만(2:47), 불신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 핍박을 가했다. 이러한 핍박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마침내 교회를 향한 편협과 적대감이 유대인들이 갖게 되었다.

로마정부와 교회와의 관계는 처음에는 매우 호의적이었다. 교회는 유대주의 분파로 처음에는 로마인들에게 인식되었다. 하지만 교회에 대해 유대인들의 공격이 가해지고 독특한 교리들과 예전들이 알려지면서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다. 기독교인들은 64년 로마 시를 불태울 때까지 로마인들에게 핍박의 대상은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가장 잔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네로의 핍박은 간헐적이고 지역적이었다. 도미티안(Domitian, 81-96) 때에 이르러 로마정부에 의한 기독교인들의 전반적 핍박이 시작했다. 이 때부터 핍박은 4세기 초 콘스탄틴 대제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해와 와전된 소문으로 인해 편협성이 일어났고 로마정부의 적대감은 본질상 정치적이었다. 신성시화는 로마황제에게 향을 피우는 것을 기독교인들이 거부하자 기독교인들이 보기에는 우상숭배이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충성과 애국심이 다른 것으로 보였기에 그들은 그들을 반역죄로 다루었고 사형으로 다스렸다. 요한의 계시록은 기독교인들이 도미티안 핍박에 당할 고통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볼 수 있다.

 

신약성경의 완성

사도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기 시작할 때, 기독교인들 가운데 나타난 이적능력들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고전 13:8-10). 하지만 이와 동일한 것이 남아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약성경이었다. 신양성경은 8명의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 요한의 저서를 제외한 모든 책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 50-70년에 쓰여졌다고 확실시된다. 요한의 책들은 1세기 말에 쓰여졌다(95-98). 신약성경은 기독교인들 무오류하게, 충족하게, 그리고 불멸의 안내서이다.(딤후 3:16-17; 벧전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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