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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 니케아 시대 - 교황제와 수도원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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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제와 수도원 제도

 

교황권(papacy) 성장

로마제국의 공적종말은 독일 장군 오도아케르(Odoacer)에 의해 476년 마지막 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의 폐위로 여긴다. 하지만 제국의 쇠퇴는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로마제국의 붕괴는 어두운 시대’(dark ages)라 알려진 불경기와 혼란의 기나 긴 세월이 서방세계에 이미 불을 당겼던 것이지만 로마교회는 제국의 운명과 함께 하지 않았다. 제국 붕괴가 있기 전에 약탈을 일삼는 야만족들은 교회를 정치적 문화적 난국에서도 여전히 안전하고 견고한 제도로 보았기에 로마교회의 관심에 복종했다. 사람들이 안내자와 안정된 세력으로 여겨지는 로마교회에 의존하면 할수록 교회는 쇠퇴해 가는 정치제도에 영향력을 더욱 많이 끼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로마 멸망은 로마감독의 우수성(primacy)을 향해 한 걸음 성큼 다가가도록 했다.

콘스탄틴의 아들들은 343년 사디카(Sadica)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아리안주의에 의해 발생한 논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 실패한 종교회의였지만 폐위된 감독이 로마감독에게 자신의 경우를 청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것을 결정했다는 것은 주위를 기울여야 한다. 로마감독은 로마에서 결정이 날 때까지 교구권과 공직을 책임지고 재심할 수 있었다. 로마감독의 우수성은 로마감독들로 활약했던 열정적인 몇 명의 변호자들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이노센트 1(Innocent I, 420-427)는 로마교회가 사도적 전통의 보관자였다고 주장했고, 로마감독이 우주적 사법권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레오 1(Leo I, 440-461)은 베드로가 수제자였으며 그 우수성은 계승자들에게도 주어졌다고 주장했다. 이런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칼케돈(Chalcedon) 종교회의(451)는 콘스탄틴노플을 로마와 동일한 위치에 놓았다. 이러한 결정은 동방과 서방간의 분열의 조짐을 낳는데 촉매역할을 했지만 로마감독의 우수성은 아직도 확실하게 증명되기에는 일렀다.

로마교회와 그 감독의 우수성 이론이 발전하기까지에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이 요구되었다. 1) 성경은 아직 베드로가 사도들 가운데 우수하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20:20-28; 23:8-12; 15:1-29; 2:1-14). 2) 성경은 사도직의 영구성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 특별히 사도들이 예상된 베드로의 우수성에 대한 후예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부활후 예수님께서 나타나 보이신 사람이 사도성을 계승한 자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1:21-2).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마지막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고전 15:8). 그렇다면 바울이 사도로서 마지막 자격을 가진 인물임을 의미한다. 맛디아(Matthias)가 유다를 대신하여 선출되었을 때 사도들이 제비를 뽑았지만 삽시간에 선출을 받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은 아니었다(1:21-26). 3) 만일 베드로가 사도들 가운데 우수성을 소유했고 다른 사람들이 그 우수성을 계승받았다고 하더라도 성경은 분명하게 그러한 계승자가 반드시 로마에 있는 교회 감독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베드로가 로마교회의 감독들 중에 한 사람임을 말하지도 않는다. 성경과 다르든지, 성경에 덧붙여지든지간에 로마교회가 사도적 가르침의 보존자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교황제(papal system)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

 

수도원제도 성장

수도원제도(monasticism)는 본질적으로 종교적 목적을 위해 세상을 등지며 금욕적 실천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에서 수도원제도의 시작은 이집트의 안토니(b. 250)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본다. 그는 어릴 때 재산을 모두 팔고, 황량한 곳으로 가서 기도와 엄격한 자기부인적 삶을 살았다. 어떤 파초미우스(Pachomius)는 최초의 수도원들을 설립하므로 수도원제도를 발전시켰다. 수도원제도에 두 형태가 있는데: 1) 은둔자(hermitic)로서 다른 사람들과 등지며 살아가는 것이고; 2) 수도사(cenobitic)로서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6세기 초반 베네딕(Benedictine) 수도회가 세워져서 공동적 예배, 노동, 그리고 연구를 강조하였다.

수도원적 삶이 개인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7가지 이유가 있었다: 1) 로마인들의 핍박이 감소됨에 따라 많은 개종자들이 생겨났고 그 가운데 세속적 삶을 여전히 간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교회로부터 육체적으로 분리하여 영적인 높은 수준에 이르기를 갈망했다; 2) 순교의 휴식기간은 수도원제도를 가장 높은 영적 수준에 이르도록 했다; 3) 어떤 사람들에게는 수도원제도가 세상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4) 고대인들은 활동적인 봉사보다도 명상적 삶을 보다 높은 덕으로 삼았다; 5) 예배의 형식주의가 팽배함에 따라 수도원제도를 통해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을 갈구했다.

수도원제도는 성경적으로 볼 때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1) 수도승과 평범한 교회 일원들간 이중 구조를 창출한다. 왜 평범한 교회 일원이 수도승에게 잘못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이 왜 옳을까?; 2) 덧붙여 수도원제도는 평범한 교회 일원들에게 표준이하의 성화를 고무시킨다; 3) 수도원제도는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세상과 분리는 정죄 받아야할 일이다(17:14-16; 고전 5:9-11). 기독교인들은 세상으로 들어가서(16:15) 그들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5:13-16; 9:10-13). 그들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닫아버린다면 어떻게 이런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더욱이 수도원제도의 금욕주의는 무가치하고 거룩하지도 않는 것으로 정죄 받는다(2:23; 딤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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