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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 니케아 시대 - 예배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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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변화

 

전 니케아 시대(100-325)는 교리와 예배에 변화가 있었고 니케아 시대(325-600)에는 더 가속화되었다. 교회의 공적예배는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첫 부분은 누구든 원하는 사람은 성경을 읽고, 찬양을 부르고, 설교를 듣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4-5세기 동안 위대한 몇 명의 설교가들이 있었지만 대규모 도시 교회들에 제한적이었다. 지방의 교회들과 몇몇 도시들에서는 설교가 일반적이지 못했다. 설교 전이나 후에 있는 기도조차도 기도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공중예배는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예배 중 가장 엄숙한 순서이지만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배제되었다. 성찬의 극적인 의식화는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께서 신비적으로 임재 하신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는데 이 점에 있어 동방과 서방은 이견, 즉 두 성분들 안에 임재하시는 시기에 대해 이견을 가졌다. 동방에서는 성상(iconostasis)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성상들(신성한 형상이나 성화들)이 대치된 구획이 있었다. 동방교회는 성찬식을 거행하는 동안 회중들로부터 사제들이 있는 장소였다.

 

성일과 절기

가장 오래된 축제일들, 즉 부활절과 오순절은 세월이 가면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외 다른 절기들이 더해졌다. 부활절은 금식과 회개의 시간, 40일간의 사순절 다음에 왔다. 4세기에 이르러 승천이 기억되기 시작했지만 주요한 축제로서 성탄절과 예수 공현날(epiphany-성탄절 후 12째 되는 날)이 더해졌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례를 축하하는 공현날을 지켰던 날은 부활절이었다. 공현날은 16일에 지켜졌고 성탄절 1225일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일로 서방에서 시작되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동방과 서방은 강조점을 달리하는 절기를 지켰다. 동방은 공현날을 그리스도의 세례를 축하하는 날이라 했고 서방은 동방박사들이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날이라고 했다. 성탄절의 기원과 관련된 관습들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들이 난무했지만 그겋을 준수하는 것은 이교적 풍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Sol Invictus(태양의 비침을 기념하는 날)Satumalis1225일에 일어났는데 이런 풍습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교회에 접목되었던 것이다.

 

성자, 성물, 그리고 성상

순교자들과 그들의 유골들을 숭배하는 것은 점점 보편화가 되었다. 그들의 유품들만 아니라 그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귀하게 다루어졌다. 이러한 성물들이 안치된 장소로 순례하는 일은 경건을 위해 특별하게 다루어졌다. 순교자들의 죽음은 교회 예배에서 추모되어졌고, 그들을 기도 속에서도 기억하였다. 그리하여 추모가 자연스럽게 순교자들과 성자들에게 청원하는 기도로 변천되었던 것이다. 4세기말에 이르러 순교자들과 성자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중재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을 보호하고, 치유하고, 그리고 도울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들은 도시들의 수호자들이 되었고, 상업의 보호자들이 되었고, 병들의 치유자들이 되었다. 성자들과 순교자들은 옛 이교 남신과 여신들을 대치시켰을 뿐이었다.

가장 신성하게 숭배된 인물들 가운데 마리아, 예수님의 모친을 빼놓을 수 없다. 마리아를 공적으로 숭상하는 것은 그의 형상을 모시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자연스럽게 주님의 모친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어느 순교자들, 사도들보다 위대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베푸는 그 어떤 축복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베푼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동방의 이교적 여성신을 축출하고 그 자리를 채운 것에 불과했다. 니케아와 전 니케아 시대 동안 그녀의 동정녀에 대한 교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그녀가 예수님을 낳고난 후 남편 요셉과 성적 관계를 가졌다고 말한다(cf. 1:24-5; 2:7; 고전 7:1-5; 3:31-32; 6:3; 2:12; 7:3-5;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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