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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사상 : 토마스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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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찰스

 

1755년 태어나 신앙적으로 자랐지만 1773년이 되어서야 다니엘 로울란드의 설교를 들으면서 회심하였다. 그 이후 그의 가슴 가운데 복음이 확실히 새겨지면서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사역을 하기 위한 첫 발걸음으로 대학의 길을 선택하였다. 옥스퍼드대학 지저스 칼리지에서 공부하면서 지적능력을 연마하였다. 옥스퍼드대학에서 학위를 마칠 때 쯤 그의 고향 웨일즈에서는 자리가 열리지 않았다. 결국 그는 남 잉글랜드 서머셋에 있는 두 교회에서 부목사 자리를 찾게 되어 5년 사역을 하였다. 이 사역 기간 동안에 찰스는 수많은 고난과 훈련의 시간을 겪게 되었다. 1784년 가을 그의 설교 사역가운데서 곧 열매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토마스 찰스의 설교를 통하여 복음의 확장이 빠른 시간안에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장애물들이 많았다. 그는 설교만 해서 북웨일즈의 영적인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해결책으로 순회성경학교를 조직하게 된다. 그는 먼저 성경을 각 사람이 갖게하고 성경을 읽고 쓰고 암송하도록하였으며 성경교리를 많이 가르쳤다.

 

북웨일즈 감리교의 본부가 된 발라에서 토마스 찰스는 감리교들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는 목사들 중 하나로 사역을 계속하였다. 그는 성도들에게 변함없이 성경을 있는 그대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고 가르쳤으며 성도들이 성경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데 큰 힘을 쏟아 부었다. 이러한 신실한 그의 사역이 밑바탕이 되어 1791년 하나님은 발라 땅 가운데 잊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었다. 설여의 강력한 역사하심으로 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온 부흥 이후 찰스의 후반기 사역의 초점은 순회설교보다 교회와 성도들을 더욱 견고히 하는데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그리고 웨일즈에는 실로 놀라운 이들이 벌어졌다. 젊은이들이 길거리 어디서나 성경을 읽는 모습이 보였으며 노동자들은 일터로 성경을 가져가 기회가 날 때마다 성경을 꺼내서 읽었다. 성경을 향한 이런 격렬한 사랑은 아침이슬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매일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찰스는 여전히 많은 학교와 교회들을 관리하며 운영하고 있었다. 감리교 목회자들 모임에서는 그의 리더쉽 또한 필수적으로 필요하였다. 그의 이런 끊임없는 사역, 순회설교 여행 등은 그의 몸을 많이 상하게 하였으며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1799년 한 겨울날 웨일즈 산을 넘으면서 손에 동상이 걸려 왼쪽 엄지를 절당해야 했다. 목숨까지도 위태로웠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놀랍게 응답되어 찰스는 살아났고, 이후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아 다시 사역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814년 가을, 뛰어난 영적 지도자들 가운데 분명히 가장 무시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토마스 찰스는 하늘나라로 부름받았다.

 

토마스 찰스는 복음이 널리퍼지게하는 역헐을 했지만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할 것이 필요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쓰고, 암송하고를 반복시켰다. 그리고 성경교리를 많이 가르쳤다. 사실 나는 교리에 대해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교리가 중요하고 내가 가진 복음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교리공부를 시작하겠다고 다짐했다. 토마스찰스를 비롯한 청교도들은 교리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찰스목사는 성도들이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길 원했다. 그래서 성경교육에 힘을 쏟았다.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은 더 강한 일을 하시기 시작했다. 오직 성경이라는 말이 절대 틀린것이 아니다. 성경을 깊이 알고 묵상하고 깨달아 온전히 내것으로 만들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려야겠다. 토마스 찰스와 같은 뛰어난 엉적 지도자가 되기위해 먼저 준비되어야겠다.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미리미리 준비해서 훗날 하나님이 쓰시기에 불편함없도록 나를 잘 다듬는 과정을 거쳐야겠다. 성경중심, 교리중심 그리고 암송하기 등을 체계적으로 지켜나가 친밀한관계를 유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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