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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사상 : 에반로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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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 로버츠

 

부흥 사역을 위해 선택된 에반로버츠는 어린 나이부터 영적인 일들에 대한 갈망과 목마름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 토마스찰스의 기독교지침, 존번역의 천로역정, 하지의 신학개요 와 그 시대의 중요한 신학 서적들을 읽었으며, 특히 부흥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3세에 회심한후 그는 교회 모임인 예배와 기도회, 주일학교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으며, 나중에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였고, 찬송을 인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11년 넘게 두 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울부짖었다. 자신을 성령으로 충만케 해주실 것과 웨일즈에 강력한 부흥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었다. 에반로버츠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설교자로서의 소명에 대해 눈을 뜨고 25세의 나이에 칼빈주의 감리교회 목사 후보생으로 뉴캐슬 엠린에 있는 예비학교에 입학했다. 에반로버츠는 성령을 강하게 체험한 후 웨일즈를 복음화하려는 열정으로 불타올랐으며 영혼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소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규 훈련과정을 포기하고 개인 성경공부와 기도, 찬양,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로버츠가 인도한 공적인 부흥전도 사역은 1904년 러훠의 모라이야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모두 17명이 모여 기도회를 시작하였던 첫 집회부터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로버츠와 모인 사람들은 새벽 3시까지 성령의 임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 결과 모라이야 교회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강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로버츠의 첫 집회 후 30일 만에 37천명이 주께 나아와 회개하였다. 에반로버츠가 도구로 쓰임 받았다. 설교는 별로하지 않았고, 찬송과 기도 그리고 간증이 집회의 주요 성격이었다. 집회를 위해 어떤 동원이나 광고도 없었지만 더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계속 진행되었다. 그 때 하나님이 또 가시 불같은 성령을 쏟아부어주셨다.

 

웨일즈 부흥의 불길은 여기저기서 엄청난 능력을 동반하면서 번져나갔다. 죄를 깨닫는 사람들의 억제할 수 없는 흐느낌과 통곡, 통회하는 사람들의 참회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말할 수 없는 기쁨의 환호들로 가득했다. 교회는 밤낮으로 가득찼으며, 충성되고 헌신된 사역자들을 얻게 되었다. 이 때 부흥은 모든 계층과 연령대에 영향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젊은 층과 여성들에게 많은 은혜를 부어주셨다. 부흥 시기에 웨일즈 신문에서는 매일 회심자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1904년부터 1905년에 기록된 사실 6개월의 기록된 회심자들의 숫자는 10만명이었다. 이와같은 영적 부흥의 불길이 타오를 때에 범죄 발생률은 크게 하락세를 보였고 극장가와 축구장도 숫자가 크게 감소했고, 술집과 도박도 크게 줄어들었다. 광부들이 회심하여 지하 갱도에서 기도모임을 가졌고 어린아이들도 가정과 헛간에서 기도모임을 가졌다. 하지만 웨일즈 부흥은 처음에는 많은 열매를 맺었지만 말씀의 부재로 인해 성도들이 깊은 영적 생활로 나아가지 못했다. 또한 로버츠에게서 정통 개혁주의, 칼빈주의의 신학을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회심자들을 교회의 신앙고백이나 기독교의 진리 안에 굳게 서는 방향으로 이끌지 못했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나면서 성도의 수가 감소하고 복음이 변질되었다.

 

에반로버츠에게 배울 점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두 가지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11년동안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은 끈기와 인내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계속해서 기도해야 할 기도제목이 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이 힘들다. 머리로는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이 힘들어서 때로는 잊어버리고 기도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모든 잘못이 나에게 있음을 인지하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겠다. 또한 집회를 통해서 찬송과 기도의 집회가 인상적이다. 기도를 통해서 새벽 3시까지 철야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철야기도를 해보았던 적이 있었는가를 되돌아보게 되면서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로만 하지말고 실제적으로 삶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다시금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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