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루터포드”
언약도의 성자 사무엘 루터포드는 1617년 에든버러 대하에서 성경과 라틴어, 헬라어, 교회사, 개혁교회 신학, 논리학 및 수사학 등의 교육과정을 공부하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기를 열망하였다. 신학자인 루터포드는 종교개혁을 통해 기독교가 얻어낸 것들이 위협받던 시대에 살았다. 1627년 루터포드는 스코틀랜드 앤워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교회에 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그는 부임하여 성경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본격적인 목회 사역을 시작하였고 복음을 증거한 복음 전도자로서 그의 목회 사역은 그의 수고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들을 신앙의 바른 지식과 실천으로 이끌었다. 그는 목회 사역하는 동안 가르치는 일과 설교하는 일, 심방하는 일, 저술하는 일이 항상 그의 일이었다. 그는 항상 새벽 3시에 일어나 정오까지 기도와 말씀 묵상과 연구를 하였다.
그런 반면에 루터포드는 앤워스에서 목회하는 동안 인간이 경험하는 슬픔과 고난을 겪게 되는데 13개월동안 투병 생활을 하다가 주님의 품으로 간 아내의 고통스런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으며, 또한 딸 한명을 제외하고 사랑하는 두 자녀을 잃게 된다. 나중에는 어머니마저 하나님의 나라로 보내는 큰 시련을 겪에 된다. 폭풍처럼 밀려온 뼈아픈 일들로 인해 그는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깊은 동정심을 갖게되는데 곧 사랑의 선한 목자로 성장하게 된다. 또한 그는 1645년 또 하나의 큰 시현이 다가오는데 신학적으로 알미니우스파 시드세르프가 겔로웨이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감독주의를 열렬히 옹호한 알미니안 감독이었기 때문에 개혁 신앙의 후예이며 장로교주의자였던 루터포드에게 독을 뿜어대면서 감독권을 인정하라는 압력을 가하였다. 이때 루터포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하시는 은혜요 불가항력적인 은혜임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는 남부 스코틀랜드의 주된 옥외집회 설교자로 나섰다. 옥외집회를 감행한 루터포드는 종교법원에 소환되었고 목회직 박탈과 설교금지령을 당하였다. 결국 그는 스코들랜드 아버딘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는 형벌을 받게되며 9년동안 섬겼던 교회와 교우들을 주님께 밭기고 그 당시 감독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의 요새였던 아버딘을 향해 출발하였다.
루터포드는 유배지 아버딘에서 가장 가혹한 핍박을 받는 가운데서 서한집을 기록하였으며 총 365편의 편지 가운데 220편의 편지를 약 2년에 걸친 유배중에 썼다. 그 편지 주제들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과 혐오스러운 죄의 죄 됨에 대한 깊은 의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향한 위로와 권면으로 가득하고 근심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깊은 동정과 양떼들의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천국에 대한 그의 불타는 열망이 가득하고, 개혁주의 교리와 신자의 영적 경험들을 아름답게 조화시키고 있다. 또한 루터포드는 성도들의 실천사항으로서 신앙생활의 핵심인 주일성수와 성만찬 준수, 기도생활, 말씀생활에 순종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이처럼 그의 편지 속에는 말씀을 적용하며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내용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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