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재판
이단적 종파
1) 카타르. 12세기는 정통교리로 여겨지는 것에서 극단적 대중성과 급진적으로 벗어나서 로마 캐도릭교회에 심각한 도전장을 던진 두 이단 종파가 일어났다. 그들의 형성은 캐도릭교회의 자라나는 세속성과 도덕적 문란이 원인이었다. 두 단체는 극단적 금욕을 지향하면서 도덕적 청결을 강조했다. 그 첫 번째 단체가 ‘카타르’(Cathari)인데 헬라어로 kathalos는 ‘청결’(pure)을 의미한다. 카타르들은 프랑스 남부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던 알비에서 유래된 알비파(Albigenses)로도 알려져 있다. 카타르들의 기본적인 교리적 특징은 이원론(dualism)이다. 이는 두 개의 영원하고 지상적 세력이 있다는 신앙이다: 하나는 악마(evil)이고 다른 하나는 선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영속적 투쟁을 하고 있다. 카타르들은 물질관에 있어 영지주의에 가깝다. 그들은 물질적 세상이 마음을 주도하는 악마의 세력의 창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선한 세력은 영을 주도한다. 그래서 물질, 특별히 육체 그리고 먹고, 마시고, 세속적 재산들을 소유하는 것 등은 모두 악한 것이고 거부해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카타르들은 어류를 제외한 육식을 금지했고 심지어 계란과 치즈까지고 금지했다. 그 이유는 이러한 것들이 육적 성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결혼과 부부생활은 카타르들이 강력하게 부정한다. 육체적 세상은 선한 하나님의 영역으로부터 영들을 가두어 두는 감옥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재생산, 즉 아담과 하와의 원죄와 같은 것은 감옥의 수를 성장시켰다. 사탄은 이러한 것들과 엄격한 금욕주의적 삶을 거부했다. 어떤 카타르들은 ‘엔두라’(endura)와 같은 예식, 즉 죽음에 이르는 자발적 절식을 강조했다. 또 세례, 성체, 동물 살해, 전쟁, 사형, 맹세, 수많은 절기, 장식물, 캐도릭교회의 교리들, 그리고 악한 하나님의 사역과 같은 구약성경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카타르들은 두 계층으로 나뉘어지는데: ‘완전한 자“(perfect)과 신자들이다. 완전한 자들은 카타르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금한다는 것을 엄격히 고수하는 자들이고 신자들은 대부분이 이에 속하는데 세상의 형식들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만일 엄격한 고수를 행치 않고 세상을 떠나게되면 그들이 구원을 얻을 때까지 다시 성육신 된다.
2) 발도파. 발도파(Waldenses)는 카타르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고 대부분 같은 지역에 거주했다. 두 단체가 신앙 면에서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발도파들은 프랑스 리용의 부유한 장사꾼, 발도(Vadez 또는 Waldo)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떠도는 복음 전파자의 노래와 부유한 젊은 군주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마 19:21)으로 충격을 받았기에 모든 재산을 다 팔고 가족과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었다. 사도들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가르침(마 10장)을 따르기로 굳게 마음먹은 발도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모직으로 만든 망토와 신발을 신고, 구걸해서 얻는 것으로 생활하면서 두 명씩 짝을 지어 복음을 전파했다. 카타르들과는 달리 발도파들은 대부분의 캐도릭 교리를 준수했고 캐도릭교회로부터 분리하지 않았다. 발도와 그의 조력자들은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자 1184년 출교를 당했다. 그리하여 그들과 캐도릭인들간 교리적 격차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독특한 원리들은 믿음의 유일한 법칙으로 성경을 강조했고, 복음 전파를 강조했고, 그리고 교황 권위를 강력히 부인했다.
탁발 수도회
1) 도미닉칸들. 도미닉 수도회는 1170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도미닉(Dominic)으로부터 시작한다. 1203년 남부 프랑스로 여행하면서 그는 카타르들의 행위에 깊은 감동을 받았는데 그들이 캐도릭 선교사들이라고 생각했다. 캐도릭 선교사들로 인해 사도적 가난으로 열정을 갖게 되었고 카타르들처럼 복음 전파가 그들을 개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게 되었다. 도미닉의 충고를 따르는 자들을 가리켜 ‘복음 전파자들의 수도회’(Order of Preachers) 또는 ‘도미니칸들’(Dominicans)이라 부른다. 그들은 1216년 교황의 인준을 받았다.
2) 프란시스탄들. 아싯시의 프란시스는 중세에서 가장 뛰어난 성자로 손꼽힌다. 다른 선배들처럼 프란시스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닮는 최상의 길이 가난하게 살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프란시스칸들은 1223년 교황적 인준을 받았다.
도미니칸들과 프란시스칸들은 많은 면에서 닮은 점들을 갖고 있으며 하나의 수도회로 연합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 탁발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가난, 복음전파, 동료를 돕는 것, 그리고 스콜라적 연구에도 동일하게 전념했다. 마침내 그들은 교황적 권위에 종속하게 되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교황에게 헌신할 것을 맹세했고, 교황제를 위한 성체가 되었다. 교황제의 강력한 변호자들인 그들은 이단 종파들을 타파하는 종교재판자들로 역할했다.
종교재판
캐도릭교회의 선교적 노력이 카타르들과 발도파들의 물결을 이길 수 없게 되자 강력한 조치가 강구되었다. 이런 이단적 종파들은 성경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1229년 툴루제의 교회회의에서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했고 번역하는 모든 작업까지 금지했다. 이단 조사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를 종교재판이라 부른다. 이단 혐의를 가진 자들은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고 종신형을 받거나 조금 경감한 형벌을 받았다. 정죄받고 철회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은 세속권력으로 넘겨져 화형에 처해졌다. 군사적 십자군들과 핍박의 다른 형태들은 카타르들과 발도파들에 대해 일어났다. 카타르들이 철저히 일소되고 발도파는 상당한 피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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