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교황제
10-11세기 로마 캐도릭 교황제는 가장 어둡고, 가장 슬픈 시기들 중 하나였다. 교황제의 절하는 교황직이 세속적 세력을 장악하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세속적 세력을 가진 결과였다. 교황들은 영적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상실되어갔고 일시적 지도자로 변해갔다. 교황제의 이러한 변화는 세속적 군주들을 교황들이 인준하면서 그것에 대한 답례로 교황들에게 지역들을 헌납하면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교황들은 영적 지도자들뿐 아니라 세속 군주들로 여겨지는 때가 도래하면서 가장 높은 직위는 교황직이었다. 교황제가 정치적 우수성과 능력 면에서 확장되어가면서 교황직을 장악하는 것이 정치적 알력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황들은 로마의 성직자들과 사람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실제에 있어서 교황제는 어떤 당파가 로마를 장악하느냐에 달려있었다. 교황들은 정치적 전당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897년과 955년간 17명의 교황들이 갈렸다. 이러한 상황은 존 12세(955-964)가 독일왕 오토 1세(Otto I, 936-973)의 군사력을 빌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오토 1세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962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관을 썼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은 독일 황제들의 영향 아래로 교황제가 들어가는 결과를 안겨다 주었을 뿐이다. 교황직에 오르는 사람은 독일 황제에 의해 선택되고 후원을 받는 사람이 가능했다. 정치적 음모는 늘 교황제 주위에 감돌았고 이로 인하여 질적 저하는 말할 수 없었다. 어떤 때는 12세 어린 나이로 교황직에 오른 베네딕트 9세(Benedict IX, 1033-1048)도 있을 정도였다. 그는 교황권을 소유한 자들 중 가장 형편없는 자로 여겨진다. 다른 교황적 알력에 위협을 느낀 그는 교황직을 1-2,000 파운드에 팔고 교황권을 포기했다. 그리하여 로마에는 3명의 교황들이 있었다. 다시 한번 강력한 독일 황제 헨리 3세(Henry III, 1039-1056)가 세명의 교황들을 폐위시키고 독일 감독을 대신하여 교황직에 올렸다. 1059년 로마 종교회의(synod)에서 교황 선출에 대한 규례들을 규정했다. 교황들의 선출은 추기경들이 성직자들과 사람들의 의견들을 수렴하여 결정토록 했다. 더욱이 그 종교회의는 교황이 어느 지역 출신에 구애를 받지 않도록 했다. 이런 규례는 교황 선출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성직 수임권 논쟁
힐데브란드(Hildebrand)는 수년동안 교황제 뒷면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진 자이었으나 마침내 그레고리 7세(Gregory VII, 1073-1085)가 되었다. 그는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황이었다. 그는 어떤 강력한 사상을 가졌다. 그레고리 7세의 원리들은 로마 감독이 우주적 주권을 가졌다는 것, 감독들을 폐위할 수 있다는 것, 감독들을 복귀시킬 수 있다는 것, 황제들을 폐위할 수 있다는 것, 누구에도 판단을 받지 않는 것, 누구든 석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들이 만일 영향을 끼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원리들은 캐도릭교회의 개혁에 도움이 되었다. 그들이 원했던 개혁은 일시적 정치권에서 교황권이 독립하는 것이었다.
교황권과 세속권은 늘 갈등 속에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성직 수임권 논쟁’(investiture conflict)이었다. 성직 수임은 성직 수임에 따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 독일 황제들은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지역 내에 높은 교회직책에 임명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개혁파는 이러한 세속 군주들의 권한에서 독립하기를 원했다. 독일 황제 헨리 4세는 대감독을 임명하였는데 그는 그레고리로부터 출교를 당하고, 제국적 권위로부터 배제 당하고, 부하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헨리는 그레고리를 더 이상 교황이 아니라고 응답했다. 헨리가 연합된 독일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상황은 교황 쪽으로 기울였다. 독일 귀족들은 헨리의 출교가 해결이 나지 않으면 그를 폐위시키려고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교회권력 앞에 세속권력이 위축당하게 되자 헨리는 교황이 머물고 있는 카노사(Canossa)의 성문 앞에서 눈오는 날 3일 동안 맨발로 서있었다. 마침내 헨리는 출교에서 벗어났고 황제직도 보존했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수임권 이슈는 교황과 황제의 정치적 세력 때문에 좀처럼 해결되지 못하였다. 마침내 헨리 5세와 교황 칼릭스투스 2세(Calixtus II)간에 1122년 보름스 협약(Concordat of Worms)을 맺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의하면 교황과 황제는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도록 하며 황제는 성직 수임권한을 이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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