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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사 : 교황제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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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제 쇠퇴

 

교황제 절정

교황 이노센트 3(Innocent III, 1198-1216)의 보직 둥 교황제는 세속 권력의 꼭대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직위는 캐도릭교회가 영적 사상들의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렀던 공포적이고 끈질긴 투쟁의 결과였다. 세속적 야망들은 영적인 부분을 희생했을 때 가능했다. 이런 야망을 위해 정치적 음모가 펼쳐졌다. 하지만 절정에 달한 교황제는 이미 지평선에서부터 쇠퇴가 예기되었다. 절정의 행로는 곧 쇠퇴로 이어졌다. 세속적 일들은 교황제를 위한 적절한 환경이 아니었기에 교황적 지상권은 매우 짧은 시기만 유지했다. 일세기도 되기 전에 교황은 정치적 영역에의 권력 투쟁에서 몰락하고 만다.

세속 권력에 군림하는 교황의 지상권은 이노센트 3세 이전부터 지속되었지만 실제로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노센트와 그 후계자들은 세속군주들간 농간을 통해 교황 지상권 이론을 강요하려고 노력했다. 사용했던 수완은 정치적 주장권을 내세우는 교황의 후원을 받기 위해 야망적 세속 군주가 교황의 그늘아래 들어오는 것이었다. 만일 세속 군주가 약속을 어길 때-이따금 일어났지만-교황은 경쟁자 세속 군주를 후원하여 갈아치웠다. 교황은 이 때에 출교나 파문 등과 같은 무기를 사용했다. 파문(interdict)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지역에서 성례나 성직이 수행되지 못하는 것이다. 출교(excommunication)는 성례를 부인하고 신실한 자들만 참여하는 성찬식에서 제외된다. 출교는 개인들에게 해당된다면 파문은 모반적인 군주들의 영역에 해당되었다. 실제적으로 그들의 영역 내에 종교적 예배가 금지되었다. 정말 가공할만한 위력있는 교황적 무기였다. 이노센트 3세가 불복종하는 군주들에 대해 85회나 파문을 내렸다는 것을 보아 그가 어떤 성격을 지닌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노센트와 투쟁을 치른 유명한 군주는 신성로마제국의 독일 황제들이었다. 이노센트는 자신의 요구에 응하는 사람이 발견될 때까지 제국직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양도했다. 성공적으로 교황권을 유지했고 제국직을 갖는 자들을 주도했다. 또 다른 영주들을 비천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필립 2세는 이혼했던 아내를 돌아오게 하라고 강요받을 정도였다. 리온의 알폰소 9(Alfonso IX of Leon)는 깊은 관계를 가졌던 아내와 별거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아라곤의 피터와 영국의 존은 자신의 주권이 교황권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노센트는 군사적 십자군을 조직하여 카타르들과 그들의 후원인들을 분쇄하였다. 이노센트가 후원했던 정책들과 교리들은 교회법이 되었고 교황권을 더욱 강화시켰다.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콘스탄틴노플의 몰락(1453)은 헬라교회를 로마교회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이런 정치력에 덧붙여 13세기동안 캐도릭 교회는 유럽의 1/3의 땅을 차지하였다.

 

보니파세 8

보니파세 8(1294-1303)는 교황직에 올랐던 어느 선배들보다 교황직 지상권에 강한 집착을 가졌던 교황이었다. 불행하게도 로마 캐도릭 교황권은 가장 밑자리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했다. 13세기는 교황권의 정치력을 손상시켰던 시기였다. 성장하는 민족주의(nationalism), 로마법의 영향, 평신도 법률가들(성직자들을 대신했던 왕들의 조언가들), 그리고 교황들이 세속 일에 관련되지 말아야한다는 확신들이 그러한 상황을 엮어나갔다. 결과적으로 교황직은 대중적 지지를 잃고 있었다.

프랑스의 필립 4(1285-1314)는 보니파세의 무시무시한 적대자였다. 필립이 모반죄를 적용하여 교황의 사절단을 체포하자 보니파세는 그들을 석방하고 필립과 프랑스 감독들을 로마로 소환했다. 필립은 성직자들, 귀족들, 상류계층의 사람들을 불러 자신의 입지를 지지해 달라고 했다. 보니파세는 이에 대해 우남상툼(Unam sanctum)을 발하였는데 그 안에는 세속권보다 교황권이 우위에 있다는 강력한 주장이 담겨있었다. 세속권력은 교황에게 종속되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교황을 통해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로마 교황제는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필립은 보니파세를 가리켜 이단, 부도덕이라는 죄목을 씌우고 그를 처단하는 범종교회의의 개최를 명했다. 필립의 압력은 결국 1303년 보니파세는 체포되었다가 석방 후에 곧 죽고 말았다. 교황권은 강력한 세속권에 대한 모든 힘을 소유했다가 그 일로 패하고 말았다. 결국 교황의 정치적 야망에 크나큰 타격을 안겨다 주었다.

 

아비뇽 유수

아비뇽(Avignon, 1309-1377)으로 옮겨진 교황청은 프랑스의 속박을 받게 되었다. 모든 교황들이 프랑스인들이 되었는데 최초의 아비뇽 교황은 필립에 의해 선출되어 보니파세가 내렸던 필립에 대한 출교, 파문을 철회케 했고, 우남상툼을 수정토록 했다. 아비뇽에 있는 동안의 시기를 가리켜 교황제의 바벨론 포로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세속권력 위에 군림했던 교황직의 지상권을 변호하거나 반대하는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교황권력을 점점 무력하게 만들었다. 아비뇽 교황들은 프랑스 꼭두각시들로 인정하면서 교황권에 도전하는 여러 국가들이 일어났다. 아비뇽 교황제는 사치스런 삶을 영위하기 위해 국가들의 세금납부를 강요하고 응하지 않는 자들에게 출교를 내렸다.

1377년 로마로 되돌아온 교황제는 추기경들은 교황을 선출했지만 자신들의 견해를 수렴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의 선출을 무효화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자 무효화되었던 교황은 아비뇽으로 가서 스스로 교황임을 자천했다. 이에 대해 로마 교황은 퇴위할 것을 거부하면서부터 대 분열”(Great Schism)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아비뇽과 로마에 적대적 교황들이 존재하면서 유럽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국가 이익에 걸맞은 교황들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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