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권 신장
로마주의
동방교회의 성장이 7세기초 모슬렘인들의 진격으로 인해 주춤해지면서 중세(600-1500)의 교회성장에 두드러지는 현상은 서방교회의 성장이었다. 먼저 학문과 열정을 가진 아일랜드 수도승들은 선교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아일랜드 교회가 패트릭(Patrick, 389-461)보다 일찍 일어났지만 아일랜드 전역에 교회를 시작하고, 전파하고, 개척한 인물로 보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아일랜드의 사도’(Apostle of Ireland)라 부른다. 교회는 아일랜드에 확고한 뿌리를 두었기에 영국의 교회가 로마제국의 몰락과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으로 붕괴되었을 때에도 생존하고, 번영하고, 발전했다. 그 결과 아일랜드 수도승들은 영국 섬들-스코틀랜드와 영국-과 대륙-프랑크족과 독일왕국들-에 다시 한번 교회를 개척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아일랜드 수도승들은 ‘개인적 평신도 고백’(private lay confession)을 실천했던 분들이었다. 평신도 고백은 자신들의 죄를 성직자들에게 고하는 것을 말한다. 후에 이런 고백형태는 필수적 요소가 되어 실행하는 자들에게 혜택이 주어졌다. 신약성경은 성직자든 평신도든 구별을 두지 않지만(벧전 2:9), 평신도가 성직자에게 고백하는 형태로 바뀌었다(딤전 2:5). 죄 고백은 적절한 조건(마 5:23-24; 1:15; 눅 17:3-4) 아래 “서로에게”(야 5:6)하는 것이다. 최초의 ‘고해성사 지침서’(penitential books)는 아일랜드에서 시작되었다. 죄인이 자신의 죄들에 대해 만족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영원한 형벌만 아니라 ‘일시적 형벌’(temporal punishment)이 죄들로 인해 발생한다는 신앙이 깔려 있었다. 하나님의 용서는 영원한 형벌을 옮기시지만 일시적 형벌은 아니다. 일시적 형벌에 만족하지 못하면 영혼은 연옥(purgatory)으로 가게된다. 만족이 기도, 교회 참석, 금식, 순례, 구제, 또는 다른 선행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때는 완전히 용서하신다고 가르치신다(히 8:12). 하나님은 더 이상 형벌을 가하지 않으신다. 596-7년 교황 그레고리는 선교사들을 영국으로 파송했다. 아일랜드와 로마인들은 다른 형태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그들간에 충돌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이 정치적 권위들의 도움을 베풀어 마침내 영국섬들을 손에 넣었다. 그리하여 유럽 내에 로마 캐도릭주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교회와 세속권력의 연합
중세동안 로마 캐도릭교회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세속 권력 성장에 의존했고 그 독점에 따라 달랐다. 교회와 국가는 서로 후원하는 관계였고 서로 의존하는 관계였다. 각자는 서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세속 군주들은 교회 일에 관련되었고 교회 지도자들은 세속 일들에 깊은 연관을 맺었다. 이러한 상황은 서 유럽이 이론상 하나의 광대한 국가로 있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로마 캐도릭 교황들은 마침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되었다. 로마 캐도릭교회는 결코 중세시기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동방(비잔틴) 제국 황제들이 서 로마제국의 멸망(476)에서 생존했지만 야만족들의 침입으로 이태리로부터 분리되었고 로마를 더 이상 후원하지 못했다. 로마가 콘스탄틴노플에 종속되었지만 정치적으로 분리하기 시작했고 로마는 콘스탄틴노플을 독립성을 위한 방해자로 여겼다. 결과적으로 로마 캐도릭교회는 프랑크 왕들을 후원자와 보호자로 성원했다. 물론 프랑크 왕들은 이런 관계를 통해 큰 유익을 얻었다. 롬바르드족(Lombards)이 이태리 지역을 포위하고 751년 로마를 위협했을 때 프랑크족의 난쟁이 페핀(Pepin the Short)은 그들에게 정복지들을 이양하라고 압력을 가했고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아썼을 때 그것을 교황에게 돌렸다. 이러한 행위들은 많은 결과들을 불러 일으켰다. 1) 교황들에 의해 세속 군주들을 공식적으로 세우고 임명하는 전례를 세웠고; 2) 교황들이 실제로 정치적 지도자들이고 지역적 군주들이 되었다. 페핀은 정복한 이태리 지역을 교화의 소유권 아래 두었는데 이것을 ‘교회 국가들’(States of the Church)이라 부른다.
교회와 국가간의 밀접한 관계는 페핀의 아들 중 유명한 샤를마뉴(Charlemagne, 768-814)의 통치동안 더욱 강화되었다. 교회는 세속 군주들의 권위를 후원했고 세속 군주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칙령들을 강요하는데-예를 들면 십일조를 거두는데-그것을 사용했다. 샤를마뉴는 800년 교황 레오 3세(Leo III)에 의해 로마에서 황제관을 썼다. 황제직은 교황제의 선물로 여겨졌다. 프랑크 제국이 샤를마뉴가 죽는 동시에 쇠퇴하게 되었고 교황들의 권력과 독립성은 점점 성장해갔다. 넓어져 가는 그들의 권력은 신약성경의 하나님의 종에 대한 개념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마 22:21; 요 6:15; 18:36; 눅 17:20-21; 고후 10:3-4; 엡 6:12; 딤후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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