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운동과 시토 수도회
십자군 운동
1) 원인: 십자군 운동은 모슬렘인들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을 재탈환하려는 군사적 원정이었는데 중세에 퍼져있었던 환경과 조건들을 전형적으로 잘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십자군들은 종교적 열정에서 시작했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강력한 종교적 열정은 수도원제도, 금욕주의, 광야 생활과 자기 희생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로마 캐도릭주의는 유골, 순례 등을 숭배하면서 영적 보화들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십자군들을 크게 감동시켰던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take the cross), 즉 모험심, 지역 확장, 재물 확장, 종교적 증오심과 같은 것이었지만 참된 종교적 열정은 순수한 종교적 열정도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지 못했을 것이다. 십자군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두 가지였다: ① 모슬렘인들이 638년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그 곳으로 순례하는 자들을 허용했지만 셀루크 터키족들(Selijuk Turks), 즉 모슬렘들은 1076년 팔레스타인을 정복하여 순례자들을 금지시켰다. 이것은 유럽인들을 자극시켰다. ②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Alexius I)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청원하여 자신의 지역을 위협하는 모슬렘들을 물리쳐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1095년 클레몽(Clemont) 종교회의를 열어 교황 우르반 2세는 웅변적으로 설교하며 모슬렘인들의 손아귀에서 팔레스타인을 회복하자고 호소했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큰 혜택이 약속되었다. 우르반은 참여하는 모든 자들에게 면죄부를 베풀었다. 다른 교황들은 영생까지 약속하였는데 참여자들만 아니라 십자군 운동을 후원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베풀었다. 십자군들에게 주어진 지상적 혜택은 빚에서 면제를, 세금에서 자유를, 그리고 이자의 부담에서 자유를 제공했다.
2) 십자군 운동의 규모. 1095년부터 1270년까지 모두 7차례의 주요한 십자군 운동이 있었을 뿐 아니라 적은 규모의 운동도 있었다. 1차 십자군 운동(1095-99)를 제외하고 모든 운동은 대대적 실패를 경험했다. 1차 십자군 운동은 예루살렘으로 떠나 1099년 7월 15일 그 도시의 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난 후 탈환하였다. 1187년 모슬렘인들이 재탈환할 때까지 그 도시에 왕국을 세우고 유지했다. 6차 십자군 운동을 이끌었고 출교 당했던 황제 프레데릭 2세(Frederick II)는 협정을 맺었으나 1244년 모슬렘인들에게 영속적으로 빼앗기고 말았다.
3) 영적 모순들. 그들의 목적들을 통해 본다면 십자군 운동은 전적으로 실패였다. 가장 큰 실패는 도덕적 영적인 면에서 일어났다. ① 신성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물건들과 장소들을 이교도들의 손아귀에서 구원하려는 욕망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잘못이다. 특별한 영적 혜택들을 소유했다고 하는 장소들로 순례하거나 그러한 것들을 숭상하였던 것이다. 신약성경은 그러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사실 정반대의 것을 가르친다. 육체적 대상들을 따르거나 숭상하는 일은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다(엡 5:5; 고전 10:14; 요1서 5:2). 유골, 성상, 또는 성지 등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헌신과 관련이 깊지도 않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헌신했던 것이지 사물도 아니고 성골을 숭상하거나 순례에 대한 특별한 보상을 약속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성부께 예배드리는 것이 예루살렘이 아니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리스도 자신은 성지(holy places) 사상을 물리치셨다(요 4:19-24) ② 그들은 잔인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잘못된 점이 많았다. 1차 십자군 운동의 일원들은 라인지방(Rhineland)의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했고 헝가리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벌였다. 예루살렘이 마침내 탈환되자 그들은 거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신약성경 도적적 규범에 비추어본다면 십자군 운동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마 5:7, 43-48; 야 2:13) ③ 신약성경이 최상의 사랑실천을 가르치기 때문에 무기를 사용한다는 것,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리스도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에 원천적으로 잘못된 것이다(요 18:36; 고후 10:3-4; 엡 6:10-18).
시토 수도회
초기 2,000년의 종교적 열정은 십자군 운동에 집중되었다. 1차 십자군 운동이 시작된 직후 또 다른 수도회가 1098년 프랑스 시토(Citeaux)에서 시작되었다. 수도적 원리를 갈구했던 베네딕 수도승 로벗(Robert)에 의해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시토 수도사들은 과도한 금욕주의, 세상과 등짐, 침묵의 교리, 명상, 그리고 ‘사도적 가난’(apostle poverty)을 강조했다. 가장 큰 강조는 농사적 수고와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시토 수도승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세례 주는 일이 금지되었다. 주거지, 옷, 예배 장소, 그리고 식이요법 등은 당연한 것이었다. 병약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육식은 금지되었다(딤전 4:1-5). 시토 수도사들은 짚으로 엮은 침대에서 잠을 취했다.
베르나르(Bernard, 1090-1153)는 시토 수도회의 강력한 변호자였으며 당대에 종교적으로 가장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었다. 아이러닉칼하게 그는 복음을 전파하고 쓰는 일로 유명하게 되었다. 다른 전파자들은 시토의 원리들을 채택하여 보다 극단적으로 흘렀다. 브레스키아의 아놀드(Arnold of Brescia, ?-1155)는 문자적으로 모든 재물과 세속 권력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가르쳤다. 12세기 초 브로이의 피터(Peter of Bruys)는 엄격한 금욕주의와 함께 유아세례 부인, 성찬, 교회 축일과 건물,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십자가 등을 거부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도구라는 의미를 나타내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들은 중세 성직자들의 부귀영화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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