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중세교회사 : 스페인 종교재판

본문

반응형

스페인 종교재판

 

15세기말에 이르러 유럽 국가들 중 프랑스, 영국, 그리고 스페인은 강력한 국가적 정체와 연합을 갖추게 되었다. 이런 국가에 있는 로마 캐도릭 교회들은 점점 민족화가 되어갔고 국가 주권자들과 영합하고 교황의 권한에서부터 점점 이원화해갔다. 특히 스페인은 국민적 연합을 이룩하는데 매우 어려운 점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711년 이후 모슬렘인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3세기에 이르러 모스렘인들(또는 Moors)은 그라나다(Granada) 왕국에 제한되었다. 나머지 스페인 지역은 4지역의 캐도릭 왕국으로 구분되어 있었지만 가장 큰 왕국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카스티야의 아사벨라가 1469년에 연합하므로 이루어졌다. 이제 강력한 스페인 왕국을 건설한 그들은 1492년 그라나다에서 무어인들을 추방시켰다. 모슬렘인들과 오랜 갈등의 결과로 스페인 민족주의와 캐도릭주의는 서로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되었다. 캐도릭 정통과 애국주의는 스페인들에게는 동일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므로 확고한 캐도릭인이 아닌 자들은 대체적으로 유대인, 모슬렘, 이단자, 프로테스탄트, 아니면 마술사들이었고 교회만 아니라 국가에 위협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사벨라 여왕이 독실한 캐도릭 신자였기에 스페인을 정통 캐도릭주의가 아닌 다른 종교적 견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종교재판 절차

1480년 왕의 권위와 교황의 허락으로 이룩된 종교재판은 로마 캐도릭 교회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것들 중 하나가 되었다. 스페인에서 거짓 추종자들을 처결하기 위해 고안된 종교재판은 먼저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무거운 압박이 가해졌는데 이는 그들의 종교를 비밀리에 준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유대인들을 찾기 위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예를 들면, 돼지고기를 먹게 한다든지, 동정녀와 그녀의 형상을 가지고 시험하여 범죄자들을 가려냈다. 종교재판은 고소된 자들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때까지 범죄자라는 혐의를 지우지 않았다. 서로들을 감시하는 상황이 되었다. 한번 검거되면 친구들의 방문까지 거절당했다. 고소자들의 이름과 증거들까지 혐의를 받는 자들에게 제시되지 않았다. 오로지 열렬한 정통 캐도릭 신앙을 가진 자들이나 친척이 아닌 자들만이 고소 받은 자들을 위해 증인으로 채택되었다. 고문은 이단의 혐의를 받고 있는 자들이 고백을 할 때까지 가해졌다. 고문의 형태는 대체로 물을 붓거나 목을 조르는 것, 눕힌 뒤 사지를 당기는 것, 턱을 쥐어트는 것, 헝겊은 목구멍으로 쑤셔 넣는 것, 등이었다. 특히 strappade는 사람을 공중에 매달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는 것인데 매우 큰 고통을 주는 것이었다. 더욱이 여러 가지 형벌을 가했는데 재산 압수, 종신형, 공개적 수치, 추방, 그리고 사형 등이었다. 고소받은 자들은 auto de fe(“믿음의 행위라고 직역되지만 종교재판의 사형집행으로 보는 것이 좋다)으로 알려진 공개적 행사를 받게 되었다. 주로 공휴일에 거행되었고 지도자들의 혼인식이나 병자들이 낫게 되는데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정해진 날 감옥에 갇힌 자들은 사제들과 종교재판자들에 의해 공중 장소에 나오게 된다. 설교가 행해지고, 사람들과 지도자들이 종교재판을 지지한다는 맹세가 행해진 후, 선고가 발표된다. 종교재판들이 사형을 명할 수 없기 때문에 감옥에 갇힌 자들은 형벌을 받기 위해 세속 군주들에게 넘겨졌다. 교회 직분자들은 세속 군주들에게 자비를 요청하며 피를 보지 않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형식적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당연히 화형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자들은 가장 첨예한 문제를 들고 나오고 종교재판의 기록을 낭송한다. 이러한 절차로 인해 1480-1524년 동안 14,344명이 화형을 당했고, 1,368명이 형상을 만들어 화형을 당했고, 195,937명이 다른 형벌을 받거나 참외의 형벌로 사형을 면했다. 스페인 종교재판은 마침내 1834년에 이르러 중단되었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