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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 : 종교개혁의 여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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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종교개혁의 여명기

자연계에 있어서도 동이 트기 전에 어두움이 가장 짙은 것과 같이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도 종교개혁이 있기 전인 15세기 말과 16세기 초가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1. 경제적 배경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의 유럽의 경제는 매우 혼란하였다.

십자군 전쟁, 백년 전쟁, 전염병과 기근 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전염병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로 인해 1500년대의 유럽의 인구는 1300년대의 인구와 거의 비슷해져서 노동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 평화 시대가 열리면서 인구의 급속한 증가가 이루어졌다. 인구의 증가로 노동력이 풍부하여지자, 영주들은 농지에 대한 임대료를 인상하여 농민들을 억압하였으며, 그로 인해 많은 실업자가 생겨났다. 일자리를 잃은 농민들은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진출하든지 용병으로 나가야만 했다.

또한 무역업의 발전과 신대륙의 발견으로 인하여 인구의 도시로의 유입이 빨라지면서 대형 도시들이 등장하였다.

15세기부터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해상 무역이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는 경제계의 변화를 가속화하였다. 1세기에 로마제국의 군대들이 가는 곳마다 길을 놓아 여행자들이 쉽게 여행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14세기 중엽 포르투갈인에 의한 조선술과 해양 기술의 발전이 국제 무역 시대를 열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서남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 금, 직물, 향료, 목재, 양곡, 가죽 옷, 소금, 포도주를 실어 날랐고, 인도에서는 후추와 상아를, 중국에서는 비단을 가져왔다. 이러한 무역업의 발전으로 유럽은 경제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서구 세계를 온통 흔들었다.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데 대하여 사람들은 두려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세의 미신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게 되었고, 가치관의 혼란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대륙의 발견은 수송업과 무역량의 증가에 크게 공헌하였다. 무역량이 증가하면서 노동력이 요구되자, 노예 무역이 성행하였고, 노동력이 필요한 도시로의 인구 유입이 더욱 가속화 되었다.

노동력이 도시로 이동하자, 넓은 토지를 소유한 영주들은 노동력의 빈곤을 체험하여, 이를 해소하기 위해 기계화를 촉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산업이 발전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협동조합과 은행들이 생겨났으며, 은행의 출현과 함께 신용 제도, 지폐, 할인 제도 등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경제 구조가 등장하였다. 이는 자본주의적인 경제 구조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고, 자본주의는 경제력의 집중화를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경제 구조의 급속한 변화는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특히 물가 불안은 절정에 이르렀다. 16세기 중엽부터 신대륙에서 금과 은이 유럽에 수입되면서 물가가 급등하였으며, 17세기 초반 영국에서는 양곡의 도매 가격이 5배나 올랐고, 프랑스에서는 7배, 스페인에서는 그 이상으로 높아졌다. 그래서 당시의 신학자와 설교자들은 설교와 강의를 통하여 전매업자, 고리대금업자, 상인, 특히 양곡 상인들의 농간에 대하여 비난을 퍼부었다. 또한 물가 상승으로 인하여 식량 폭동이 일어나 전매업자, 고리대금업자, 상인들의 창고와 집은 공격의 주된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인 혼란은 사람들로 하여금 개혁이든 혁명이든 간에 변화를 요청하게 만들었다.

2. 정치적 배경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장원 제도와 함께 봉건 군주제가 무너졌다. 이러한 정치 구조의 변화는 산업 구조의 변화를 초래하였고, 그 결과 무역으로 치부한 상인들이 중산층으로 일어났다. 왕은 경제력을 가진 상인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들의 후원을 받아 권력을 신장하였다. 왕의 권한이 점점 커져가면서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절대 왕조들이 일어났다. 이와 같이 시작된 절대 군주들은 다른 왕에게 도전하므로 전쟁을 일으켜 국토를 확대하거나, 왕권 신수설을 주장하면서 교회권에 대항하여 왕권을 확장하였다.

절대 군주들은 국가 권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재산의 해외 유출을 금하는 등, 교회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재정 정책을 폈다. 특히 로마로의 재산 유출은 국가 재정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교황청이 유럽 땅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소작인들로부터 물질을 긁어모았기 때문에, 해외로의 재정 유출을 막는 것은 국가 재정을 든든히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특히 국민 총수입의 40%가 로마로 나가고 있던 독일의 경우, 재정의 해외 반출을 금지하는 것은 국가 부강의 기초를 놓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정부는 재산의 유출을 막아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종교개혁을 지지하여야만 했다.

경제적인 면이나 정치적인 면은 종교개혁과는 별개로 나름대로의 필요에 의해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종교개혁의 물꼬를 트시기 위해 저들의 배후에서 섭리하셨다.

3. 종교적 배경

변화를 요구하는 물결은 경제적인 면이나 정치적인 면보다 종교적인 면에서 더 심각히 요청되었다. 이유는, 로마 천주교와 교황청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그 마음을 어둡게 하여 교회를 무지와 미신 가운데 표류하도록 만듦으로써 기독교를 비기독교화 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1) 교회의 신앙적 타락이 종교개혁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① 로마 교황청은 1229년 평신도들이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중세인들을 말씀에 무지한 상태로 만들어 미신에 빠지게 하였다.
프랑스 리용의 피터 왈도(Peter Waldo)가 라틴어로 된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평신도들에게 보급하면서 말씀 운동을 전개하자, 그 말씀 운동으로 인해 교회가 개혁되어지는 것을 두려워 한 로마 교회가 왈도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100만 명 이상 살해하였고, 평신도들이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는 것을 금지시켰다.

② 말씀에 접하지 못하는 무지와 미신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왜곡되자, 중세인들은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저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고행과 금식 등 종교적인 공로를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일례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거닐던 성지를 고행하면서 순례하면 한평생 범한 모든 죄가 감면된다는 면죄 사상, 지옥의 공포에서 벗어나 종교적인 안위를 얻기 위하여 새로운 기도문을 작성하여 암송하는 풍습, 분위기 있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고 하여 촛불 예배가 생겨났다. 그리고 불교인들이 현세의 고뇌를 잊기 위하여 사용하는 묵주가 얼레인 로쉬(Alain de Roche)에 의하여 교회에 소개되어, 많은 사람들이 묵주를 만지면서 그들의 소원을 아뢰기 시작하였다.
또한 임종을 앞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죽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저들은 인간이 천국의 복락이나 지옥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보다는 죽음의 순간에 임종자가 내리는 결정에 달려 있다고 본 것이다.

무지와 미신의 또 다른 대표적인 예가 성자(聖者) 숭배 사상이었다.
말씀의 빛이 가려지자 중세인들은 하나님을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으로만 간주하여 감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존엄하신 하나님보다는 성자들을 통하여 기도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성자 숭배 사상을 고안한 것이다. 특히 중세 말기에는 마리아 숭배도 급증하였는데, 마리아는 대표적인 성자로 간주되었으며, 결국 마리아 무죄 잉태 사상을 정통적인 교리로 선언하였다.

성자 숭배는 성물(聖物) 숭배로 이어졌다.
중세인들은 성물에 죄를 면케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믿고 성자들의 유물이라는 것은 모두 다 수집하였다. 성물 숭배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색소니(Saxony)주 지배자였던 프레데릭 현인(Fredrick the Wise)은 성물에 대한 신앙심으로 5,000 종류 이상의 성물을 모았다고 한다.

2) 교회의 경제적인 타락이 종교개혁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교회의 재정적 타락은 성직을 가진 자가 사망할 경우 그의 성직록(benefice)을 교황이 마음대로 재 할당할 수 있다는 교회법이 13세기에 제정되면서 가속화되었다. 교황의 교회 재정에 대한 입지가 강화되면서 교황들은 다양한 세금 제도를 고안하였다. 성직자가 유고될 경우를 고려하여 후임을 약속하는 예약세(reservation), 성직자로 임직한 뒤 1년간의 수입을 교황청에 내는 성직 취임세(annates), 특정 교회의 성직 자리를 놓고 기다리는 대기세(expectation) 등을 고안하고, 성직 매매(simony) 등의 방법을 통하여 축재했다.

성직 매매는 교황 레오 10세(1513-1521) 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는 돈으로 팔 수 있는 성직의 자리를 많이 만들어 매매하였으므로 그의 치하에서 금전으로 거래된 성직의 수는 사상 최고에 달하였다. 그는 일곱 살 때에 성직에 입문하였고, 여덟 살 때에 대수도원장직을 받았으며, 열 세 살 때에 추기경이 된 인물이었다. 로마 교황청과 교회 지도자들이 이와 같이 돈만 밝히자, 교회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항간에서는 로마 교황청의 탐욕을 빗대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라틴어(Radix Omnium Malomum Avaritia)의 첫 번째 글자를 따서 ROMA라 조롱하기도 하였다. 곧 교회의 중심지였던 로마를 탐욕의 도시라고 풍자한 것이다.

3) 성직자의 윤리적인 타락이 종교개혁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당시에는, 교황은 물론 대부분의 성직자가 첩을 두고 자녀를 낳았으며, 이 일이 아주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16세기의 순시 보고서에 의하면, 화란의 성직자의 4분의 1, 남부 라인 지역의 성직자의 3분의 1이 첩과 동거하였고, 성직자 전용의 창녀촌이 있었으며, 첩을 데리고 살던 성직자에 대한 벌금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로마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16세기 초 그 최고 절정에 이르렀으며, 중세의 어두움은 끝간데 없이 계속 될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움같이, 하나님께서 중세의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한 줄기 빛을 비추셨으니 바로 마틴 루터을 통해 종교개혁의 포문을 여신 것이었다.

4) 면죄부 판매가 종교개혁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로마 교회의 부패는 면죄부 판매로 말미암아 그 절정에 달하였다.
면죄부는 13세기 스콜라 철학의 ‘공덕의 창고’란 교리에서 나왔다. 이 교리는 예수와 마리아가 선행을 통해서 이룩한 공덕이 하늘에 다다랐고 성자들도 큰 공덕을 가지고 있는데, 이 덕은 선행을 행한 자신을 구원함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교황은 성자들의 공덕에서 일부를 떼내어 일반 신자들의 죄를 면제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면죄부가 처음에는 십자군 병사나 자선가들에게만 주어져서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이미 9세기에 불신자들과의 전쟁에서 죽은 군인들은 죽기 전 참회와 연옥형을 사면한다는 제도가 생겨난바 있었다.
그러나 차츰 면죄부가 교황의 재정적인 부족을 보충하는 데 사용되면서 본래부터 잘못된 교리는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2세기 이래 십자군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도 돈으로 죄의 사면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이때부터 죄의 사면은 교회의 수입원으로서 대단히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로마를 순례하여 얻어지던 면죄부도 역시 돈으로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죽은 자들을 위한 면죄부도 생겼다.

당시 교황청은, 성당들 특별히 베드로 성당을 증축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였다.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성당 완공을 위하여 막대한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속죄권 판매를 강권하였다. 그래서 100년 동안 끌어오던 공사비용을 메우기 위해 1506년부터 속죄권 판매를 재개하였던 것이다. 판매 수입고를 올리기 위해서 그 수입의 반액은 지방 감독이 차지하도록 했고, 또 판매 책임자는 그 판매량에 따라 보상을 받도록 했으며, 나머지를 교황청으로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판매업자들은 자신들의 수입을 높이기 위하여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감언이설로 무지한 사람들을 속여서 면죄부를 팔기에 혈안이 되었다.

저들은 “자, 여기 면죄부가 왔습니다. 이 한 장이면 당신은 물론 당신 부모의 죄도 사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부모님의 고통 소리를 듣지 못합니까? ‘얘야 우리는 너를 낳았다. 너를 힘들게 키웠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 뜨거운 불 속에서 신음하는데 너는 편안히 살고 있느냐. 살려다오. 우리를 구해다오. 면죄부를 사서 여기서 벗어나게 해다오.’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당신은 짐승입니까? 부모를 외면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한 ‘속죄권(면죄부)을 사면, 살아 있는 사람은 즉시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하여 속죄권을 사면, 그 은화가 헌금함 속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 곧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하였다. 면죄부 판매업자들로부터 위와 같은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죄사함을 사야한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가장 유능한 면죄부 판매 책임자는 마인즈의 대주교 알베르트(Albert)의 파송을 받은 도미닉 교단의 수도사 테첼(Johann Tetzel 1465-1519)이었다. 그의 언변은 실로 뛰어나서 그에게서 면죄부를 산 사람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면죄부 판매를 못마땅하게 여긴 작센의 통치자였던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Frederick)는 그의 영토 내에서 테첼의 면죄부 판매를 금지시켰다. 그가 이같이 한 이유는 신앙적인 이유라기보다는 대주교 알베르트가 대표하는 브란덴부르크 가에 의해 행사된 권력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은 몇 마일 떨어져 있는 이웃 도시에서 테첼이 설교하는 것을 듣기 위해 성 경계를 넘어 갔으며, 그에게서 면죄부 사기를 즐거워하였다. 이유는,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에 있던 중세 교인들에게는 이 면죄부가 천국에 들어가는 통행증처럼 느껴졌으며, 이 면죄부를 산 사람은 더 이상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에 저들은 손쉬운 구원의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면죄부 판매에 대해 당시 비텐베르그 대학의 성경교수였던 수도사 마틴 루터는 오랜 동안 고민하였다. 그리고 분연히 일어나 비텐베르그 교회 문에 면죄부에 대한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붙였다. 그 내용은 교황을 반대하거나 로마 교회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악한 면죄부 판매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본래의 바른 신앙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이 행위은 거대한 종교개혁의 물꼬를 트는 행위가 되어서 종교개혁의 거대한 봇물이 쏟아져 세계 역사를 새롭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유는, 그의 배후에 종교개혁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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