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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사 : 전 종교개혁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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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종교개혁시기

 

존 위클리프

종교개혁 전의 종교개혁자들”(Reformers before the Reformation)로 불리는 유럽의 여러 각처에서 일어난 신학자들과 존 위클리프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실제로 발발하기 약 100년 캐도릭 교리들에 항거했던 인물들이다. 얼마나 그들이 종교개혁에 공헌했는지는 아직도 논쟁적이지만 그들의 교리들과 정신은 그러한 이름을 받을 만 하다고 여겨진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f, 1328?-1384)는 초기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성직자들의 부와 세속 정부에 대한 간섭에 대하여 1376년 부상했던 영국 신학자였다. 교회직을 청지기직으로 인식하지 않고 남용하는 모든 성직자들은 그의 공직과 재산들을 몰수하여 세속권한에 두게 했다. 교회 권위는 세속 권위보다 우위에 있다는 팽배했던 교황적 개념을 정면으로 반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위클리프의 견해는 많은 영국민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영국 귀족들은 위클리프의 견해를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교회를 희생해서라도 세속권력을 확보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직자들의 부, 위장, 그리고 외식에 식상해 있었고 모든 수도승들은 위클리프가 사도적 가난을 주창했기 때문에 그를 따랐다. 위클리프의 대중적 인기, 즉 귀족들에게 받았던 인기로 인해 로마 캐도릭 교회는 1377-78년에 그를 소환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위클리프는 교회의 법률로서 성경에 매우 강조했기 때문에 영국민들을 위해 자국어로 성경을 읽도록 했다. 스스로 이 일을 감행했는지 감독했는지 간에 그는 1382-84년 불가타에서 영어 성경을 출판했다. 이것이 최초의 영역 성경이 되었고 캐도릭 교회에 의해 금지서가 되었지만 널리 퍼져나갔다. 15세기 초 이러한 영역 성경을 읽는 자들에게 엄한 형벌을 내렸다. 위클리프의 또 다른 영향은 맨발로 겉옷만 걸치고 복음을 전파했던 가난한 사제들에게 성경에 평신도들이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롤라드(Lollards)로 알려진 그들은 위클리프의 가르침은 가는 곳마다 알렸다. 대대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15세기 초 심한 핍박을 받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화형에 처해졌다. 롤라드 운동은 종교개혁 때까지 생존하였다. 위클리프의 인기도는 1376년 화체설에 대한 도전을 던지는 가운데 시들어지기 시작했다. 성찬을 위한 사제들의 인간 대리자들로 역할 한다는 것을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화체설을 정면으로 반대한다는 것은 큰 희생을 치러야했고 교회의 근거를 흔드는 처사였다. 하지만 귀족의 보호를 받은 그는 체포되지 않고 살다가 1384년 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교회회의들은 그의 저서들을 불태우라고 명했고 후에 유골까지 불태웠다.

 

존 후스

위클리프의 가르침은 보헤미아, 즉 영국 밖에서 꽃피게 되었다.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던 존 후스(John Huss, 1373-1415)는 보헤미아의 설교가, 신학자, 민족의 지도자였다. 교황이 1412년 나폴리 왕에 대한 십자군을 일으키자 후스는 정면으로 무력을 사용하고 면죄부를 발행하는 교황의 처사를 비난했다. 이로 인해 교황 칙서가 그에게 내려졌지만 국민들은 이것을 불태웠다. 결국 프라하는 교황의 파문 하에 있게 되었고 후스는 출교와 추방을 당했다.

후스는 후에 콘스탄스 종교회의에 소환되어 안전 보호”(safe-conduct)를 받았으나 무시당하고 콘스탄스에 도착하자마자 검거되어 141576일 화형을 맞이했다. 후스를 따르는 자들은 평신도들에게도 잔을 제공해야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후사이트(Hussites)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우트라퀴스트(Utraquists)라 불리는 자들은 성경에 정죄된 예식들을 거부했다. 또 타보라이트(Taborites)는 성경에 명시되지 않는 모든 예식들을 거부했다. 자연히 그들은 화체설, 성자숭배,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맹세, 면죄부, 사제적 고백(priestly confession), , 그리고 다른 오락들을 거부했다. 결국 우트라퀴스트들은 로마 캐도릭 예식을 수용했다. 우트라퀴스트와 타보라이트간의 분열을 일으켰던 전쟁으로 인해 타보라이트는 1434년 대패 당하고 거의 소멸 당하였다. 후에 모라비안들은 후사이트 운동의 영적 후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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