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는 지극히 종교적인 세기였다. 종교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학문과 생활 전반을 지배하고 있어서 종교를 떠나서는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16세기는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을 단행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시기였다. 종교적인 사회라고 다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며, 종교적 허식에 사로잡힌 교회는 오히려 기독교를 더욱더 타락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종교적 상황은 이러했다.
사제가 아닌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고,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가 어느 때보다 더 성행했으며, 성자 숭배, 특히 성모 마리아와 그녀의 어머니 성 안나에 대한 숭배가 극적으로 번창하였다. 또한 성자 유골의 수집이 차고 넘쳤고, 면죄부의 판매가 격증하였으며, 성지 순례가 그 어느 때보다 성행하고 있었다.
또한 교황들은 이탈리아에서의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분수에 넘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교황청은 파산 직전에 이르게 되었고, 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교황청은 새로운 세금과 요금과 벌금들을 고안해 내었다. 이것은 고위 성직자들에게 무거운 부담이 되었고, 이것은 다시 하위 성직자들에게 전가되었으며, 결국은 평민들이 이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재정상의 문제는 이것과 함께 복합적으로 성직 매매, 친족 등용, 성직 겸직, 부재 성직자 등의 문제를 야기시켰고, 축첩 등과 같은 도덕적 파탄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은 생각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패하고 타락한 싸구려 종교가 아니라 보다 나은 종교를 갈망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보다 성경적인 교회, 곧 신약성경에 묘사된 순수하고 사도적인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도 성경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의 오랜 갈망을 통하여 종교개혁을 준비하도록 하셨다.
I. 종교개혁의 선구자들
1. 왈도파
12세기 초에 프랑스의 론 골짜기에 있는 도시 리용에 피터 왈도(Peter Waldo)라는 부유한 상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1170년경 한 사제를 고용하여 라틴어로 된 4복음서와 성경의 일부 책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사제나 주교 또는 교황의 말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말은 믿음의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또한 오직 한 분의 중보자가 계실 뿐이며, 성인들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음도 깨달았다. 또한 성례에는 오직 두 가지, 곧 세례식과 성찬식만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왈도는 이러한 진리와 그밖에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진리들을 받아 들였다. 그는 1177년 자기를 도와서 성경의 진리를 전파하고자 하는 남녀 회원들을 모아서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교회사에 그들의 지도자였던 왈도의 이름을 따서 왈도파(Waldeneses) 또는 ‘왈도파 사람들’(Waldensians)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은 또한 예수님이 70인의 제자를 파송하셨던 것에 기초하여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나무로 된 신발인 사보트(Sabots)를 신고 다녔다고 해서 ‘사보타티’(Sabotati)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들은 행상처럼 가장하여 각 지방을 다니면서 자질구레한 장신구들을 팔았다. 그러나 방문하는 집집마다 반드시 ‘값비싼 진주’(복음)을 소개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전통과 사제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공공연하게 공격하였고 열린 귀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고 솔직하게 전파하였다.
그들은 남부 프랑스의 각 지역을 방문했으며, 스위스와 이태리 북쪽에까지 침투했고, 대개 환대를 받았다. 그들은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따로 모여 예배를 드렸으며 각 가정들을 방문하여 말씀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항상 번역된 성경책들과 경건 서적들을 보급하였다.
처음에 교회 당국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관대했으나 그 운동이 자기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왈도파를 법으로 금하였다. 1229년의 발렌시아 회의(The Council of Valencia)에서는 사제가 아닌 사람들은 라틴어로든지 각 나라 언어로든지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단지 일반인들도 시편이나 예배용 소책자 또는 성모 찬송집 등은 가질 수가 있었는데,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성경 그 자체가 금서 목록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왈도파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부패한 교회를 공격하는 다른 종파들에 대해서도 온갖 박해가 일어났다. 종교 재판이 제기되었으며, 수 백년 동안 살육 작전이 감행되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들의 고향은 황폐하여 사막처럼 변해갔다. 심지어 임산부를 돌에 깔아 죽이기도 하였고, 400여 명의 부녀자들이 피신해 있던 동굴에 불을 질러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저들을 완전히 진멸하지는 못하였다.
저들은 로마 교황청의 잔혹한 박해 속에서도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살아남아 중세의 칠흑같은 어둠을 밝히도록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등불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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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죤 위클리프
죤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1320년부터 1330년 사이에 영국의 요크셔(Yorkshire)에 있는 리치몬드(Richmond)에서 출생하였다.
죤 위클리프는 전 생애 동안 옥스퍼드 대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았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수학했고, 그곳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그 인근 대학에서 강의하였고, 그 지역에서 목회하였다.
1366년 왕이 교황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거부한 사건과 관련하여 위클리프는 에드워드 3세의 눈에 띄게 되었다. 위클리프는 교황이 영국 국왕에게 영국 교회의 돈을 모아 로마로 보내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교황 우르반 5세가 그동안 밀렸던 세금을 받으려고 하자 1360년에 에드워드 3세는 의회를 소집하였고, 그 결과 그 세금은 완전히 거부되고 말았다.
1370년대 초에 위클리프는, 어떤 특정 상황들 아래서 국가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주권(dominion)과 통치권(lordship)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위클리프의 이러한 주장은 아주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의 무절제한 아들인 랭카스터(Lancaster)의 공작 죤(John of Gaunt)과 그의 탐욕스러운 귀족 패거리들은 위클리프의 이 주장을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여 치부하는데 사용하기를 원했다. 또한 그것은 오랫동안 탐욕스런 교권주의에 대해 거리낌없이 비판해온 많은 평민들의 흥미를 끌었다. 나아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언제나 사도적 청빈을 옹호했던 탁발 수도회도 이 의견에 동조하였다.
이 일로 1377년 런던에서 열린 성 바울 교회의 성직자 회의에 위클리프가 소환되었을 때, 그는 반대자들로부터 혹독한 공격을 받았으나 랭카스터의 공작 죤과 궁정당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위클리프 생애의 가장 큰 위기는 1378년 그가 모든 정치적 싸움터에서 물러나 신학의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면서부터 오기 시작하였다.
이유는, 그의 저술들이 중세 교회의 전통적 구조 전체를 거부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저서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On the Truth of the Holy Scriptures, 1378)에서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지고의 권위이며 신앙의 기준이고 모든 인간적 완전함의 기준”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위클리프의 표현은 “오직 성경”이라고 하는 종교 개혁의 모토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 사상의 기초 돌을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그의 저서 「교황의 권력에 대하여」(On the Power of the Pope, 1379)에서 “세상의 권력을 거머쥐고 부에 혈안이 된 교황은 아마도 선택된 자가 아닐 것이며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이다. 여하튼 간에 교황직은 그 기원에 있어서 인간적-즉 그리스도가 아니라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에 의해 창설되었다-이며, 그것의 관할권은 엄밀히 영적 문제에 국한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위클리프는 교황제의 폐지와 교회의 총체적 재산 몰수를 요구했다.
이에 이어서 위클리프는 「성찬에 대하여」(On the Eucharist, 1380)를 저술하였는데, 이 저술에서 그는 화체설 교리를 비논리적이고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이라고 거부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그가 탁발 수도회를 ‘가인의 자식들’로 비난한 것과 연결되어, 그동안 그를 지지했던 곤트의 죤, 궁정당, 탁발 수도사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의 동조자들까지도 그를 극렬히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했다.
위클리프의 적들은 1381년에 일어난 농민 반란의 원인이 위클리프 이단들에게 있다고 고발했다. 그 결과로 교회와 국가는 화해하였고, 새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코티나이(William Courtenay, 1381-1396)는 런던에서 회의를 소집하여(1382), 그의 저술들 중에서 24개의 명제를 골라 정죄했다.
이 일로 위클리프의 추종자들과 동료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그를 지지하는 일반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위클리프를 소환하거나 그 이름을 정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위클리프는 1384년 숨을 거둘 때까지 조용하면서도 활동적인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
위클리프가 이루어 놓은 업적 중에 가장 큰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어서 그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그의 협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성경 전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는 ‘가난한 전도단’을 조직하여 번역 성경의 일부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도시나 촌락에 사는 남녀들에게 읽어 줌으로써 백성들이 무지와 영적인 맹목성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었다.
그 다음 세기 초에 의회와 교회는 두 가지의 괄목할 만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 하나는, 이단들(롤라드, Lollards, 위클리프 추종자들)을 화형시켜야 한다는 법을 1401년 통과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성직자 회의에서 위클리프의 성경 번역을 정죄한 것이다.
로마 교회가 위클리프를 얼마나 미워했는지는 그의 유해를 파내어 화형시킨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로마 교회는 콘스탄스 회의의 결정(1415년)에 의하여 1428년 죤 위클리프의 무덤을 파헤치고, 위클리프의 유해를 꺼내어 화형에 처하였다.
로마 교회는 죽은 지 40여 년이 지난 위클리프의 유해를 꺼내어 화형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가 그의 가난한 전도자들을 통해 외친 성경의 진리는 화형시키지 못하였다. 그는 종교개혁의 여명기에 하나님께서 밝혀두신 종교개혁의 샛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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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요한 후스
요한 후스(Jan Hus, 1373-1415)는 보헤미아(Bohemia)의 남부 후시네츠(Husinec: 아마도 그의 이름이 이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프라그(프라하) 대학에서 공부했고, 1396년 그곳에서 문학석사가 되었으며, 그곳 문학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400년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402년에는 체코 개혁운동의 중심지인 프라그의 베들레헴 기념 예배당의 주임 사제이자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체코어로 하는 그의 열띤 설교들을 통해 후스는 곧 거대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그는 1409년에 프라그 대학(Prague University)의 학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415년 로마 교황청에 의해 ‘이단의 괴수’로 정죄되어 화형당했다.
요한 후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죤 위클리프였다.
1401년경에 위클리프의 신학 작품들이 프라하에 들어왔다. 요한 후스는 위클리프의 저서를 읽는 중에 두 가지의 그림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하나는 주 예수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교황은 금 면류관과 값비싼 자주색 비단옷을 입고 있는 그림이었다. 두 번째의 그림은 예수께서 여인에게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었다. 그 뒤편에는 교황이 백성들에게 면죄부를 파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들이 보여주는 진리는 후스의 눈을 열어 교회의 비참한 상태를 밝히 보게 하였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성경주의’에 공감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교회법의 비성경적인 전통들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1403년 위클리프에 해당하는 45개 조항이 프라하 교수들 다수에 의해 정죄되었을 때, 후스는 체코인 교수들과 함께 위클리프를 옹호하였다. 그동안 베들레헴 성전에서의 후스의 설교는 처음에는 젊은 대주교 하젠부르크의 츠비네크 차이잎(Zbynek Zajic of Hasenburk, 1401-1411)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성직에 대한 후스의 통렬한 비판과 정죄된 위클리프의 가르침들에 대한 그의 동의로 인해 점차로 반대를 받게 되었으며, 결국 피사 공의회(1409)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12세를 폐위하고 알렉산더 5세를 선출한 일을 둘러싸고 최종적인 관계 단절이 발생하였다.
대주교 츠비네크는 알렉산더 5세(1409-1410)를 지지했다. 츠비네크는 그 교황에게 보헤미아에 위클리프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있다고 설명하고, 그에게서 그들의 근절을 위임받았다. 후스는 이에 대해 저항했으며, 이 일로 인해 츠비네크에 의해 파문당하였고(1410), 로마 교황청에 의해 취조받게 되었다. 그 결과로 프라그(프라하)는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프라그에서 후스는 대중적 영웅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1411년과 1412년 두 차례에 걸쳐 알렉산더의 뒤를 이은 교황 요한 23세(1410-1415)가 면직된 그레고리 12세와 그의 지지자인 나폴리 국왕 라디슬라스(Ladislas, 1386-1414)에 대항하는 ‘십자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면죄를 약속했을 때, 후스는 이 ‘십자군의 면죄’를 비난했다.
교황은 물리적 힘을 사용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으며, 돈의 지불은 진정한 용서에 유효하지 않고, 용서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값없이 주어지기 때문에 인간이 행하는 면죄는 필요 없다는 것이 후스의 주장이었다.
후스의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 후스를 지지하던 프라그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교황의 교서들이 그들에 의해 불살라졌다. 이 봉기로 인해 세 청년이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참수되었다. 1412년에 교황청에서 후스에 대한 심리가 재개되었고, 추기경 스테파네스키는 후스가 중대한 파문 상태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프라그는 후스가 있다는 이유로 성사금지령을 당하였으며, 이후로 후스는 망명 생활을 하게 되었다.
보헤미아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한 콘스탄스 공의회가 1414년 11월 1일에 개최되었다. 지기스문트 황제는 후스를 초청하였고, 후스의 안전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콘스탄스에 도착한 직후에 후스는 체포되어 시내 하수도의 출구 근처에 있는 도미니쿠스회 수도원의 지하 감옥에 감금당했다.
콘스탄스 공의회는 1413년 로마 종교회의에서 이미 채택된 대로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오랜동안 묻혀있던 그의 유해를 파내어 화형 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단의 우두머리인 위클리프의 헌신적 제자로 추정된 후스는 자신을 성삼위 가운데 제4위로 선언하였다는 신성모독죄 외에 30여 개 항목의 날조된 죄목으로 고발되었다. 이에 대해 후스는 몇 개의 고발은 잘못된 전달에 기인한 오류라고 선언했고, 나머지 것들도 성경과 고대 교부들에 의해 그 잘못이 확인되지 않는 한 자신의 견해를 바꾸거나 철회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1415년 7월 6일 콘스탄스 공의회는 최종 선고를 내렸는데, 그것은 후스와 그의 저서들 모두를 불태우는 것이었다.
후스에게는 모욕적인 면류관이 씌워졌고, 그 이마에는 ‘이 사람은 이단의 괴수이다’라는 글자가 씌어졌다. 후스는 무릎을 꿇고 앉아 “주님, 주님의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을 반복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장작과 짚들이 쌓여지고 그가 계속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동안 불이 붙여졌으며, 후스는 연기에 질식하여 곧 숨을 거두었다.
“나는 복음과 말씀 전파를 위하여 이처럼 무섭고 수치스럽고 잔인한 죽음을 달게 받겠다.”라고 한 것이 그의 최후 고백이었다.
로마 교회는 요한 후스를 불태움으로써 이 사건을 일단락 시키려 했다. 그러나 후스를 지지하고 따르던 보헤미아의 많은 귀족들이 애꾸눈 지스카(Ziska)를 필두로 프라그에서 종교적 관용과 옥에 갇혀 있는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고, 이 요구가 거절되자 지기스문트 황제의 군대와 15년 간에 걸친 전쟁을 하였다.
저들은 비록 전쟁에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후스주의자들(Hussites)이 그들의 믿음을 지켰다. 저들은 처음에는 다볼산에 그들의 본부를 두었다고 해서 다볼파(Taborites)라고 불리었으나 나중에는 보헤미아 형제단 또는 모라비안 형제단(The Moravian Brethren) 등으로 불려졌다.
요한 후스가 죤 위클리프의 성경주의를 이어받아 로마 교황청에 맞서 싸웠듯이, 많은 후스주의자들이 후스의 신앙을 이어받아 로마 교황청에 항거하며, 종교개혁의 초석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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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롬 사보나롤라
왈도는 프랑스인이었고, 죤 위클리프는 영국인이었으며, 요한 후스는 보헤미아인이었고, 종교개혁의 또 다른 선구자인 제롬 사보나롤라(Jerome Savonarola)는 이태리인이었다.
왈도와 위클리프와 후스는 모두 로마 카톨릭 교회의 비성경적인 교훈들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지만, 사보나롤라는 교리적인 면에서의 개혁가는 아니었다. 그는 자기 동포인 이태리인들의 부도덕한 습관과 악한 생활을 공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보나롤라로 하여금 힙포의 어거스틴의 글들을 보도록 섭리하셔서 이태리 교회 내의 윤리적 배교성을 직시하도록 하셨다. 사보나롤라는 그의 지위 면에서나 지적 자질 면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보나롤라는 1452년 이태리의 페라라(Ferrara)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의사가 되려고 하였다가 도미니쿠스회에 가입하였고(1474), 이탈리아 북부 여러 도시에서 사역하였다. 사역 초기에는 설교자로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으나, 브레시아에서 행한 요한계시록 설교들(1486)을 통해 웅변가로, 설교가로 신망과 명성을 얻었다. 1490년 피렌체에 정착하였고, 그곳에 메디치가가 설립한 산마르코 수도원에서 설교자로 일하면서 피렌체 지도자들에게 회개를 요구하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돌아볼 것을 호소하였다. 그후 산마르코 수도원장으로 선출되고 주교좌 성당에 초빙되어 설교를 하게 됨으로써 그의 영향력은 증대되었다.
사보나롤라는 1494년까지 하나님의 심판이 피렌체에 홍수처럼 쏟아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한 사건은 사보나롤라가 예언한 대로 피렌체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처럼 보였다. 사보나롤라는 왕을 두 번 찾아가 피렌체 시를 약탈하지 말도록 설득하였고, 마침내 샤를은 그 도시에 큰 타격을 주지 않은 채 철수하였다. 프랑스 군대가 몰려올 때 메디치 가의 ‘대부’(大父) 피에로(Piero)가 도시를 떠났고, 그 뒤 샤를이 철수하자 사보나롤라는 그 상황을 하나님의 은총이 피렌체를 위해 개입한 결과로 보았다.
당시 피렌체는 메디치가의 로렌쪼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로렌쪼는 사보나롤라의 고상한 가르침과 윤리에 대하여 동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로렌쪼는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잠재워 보려고 선물 공세를 하였으나 허사였다. 로렌쪼가 44세 되었을 때 중병을 앓게 되었는데, 로렌쪼는 자기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사보나롤라를 청했다. 그러나 전혀 자신의 죄를 회개하려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사보나롤라는 그를 축복해주기를 거절하였다(사보나롤라는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늘 축복을 해주었다).
로렌쪼의 아들이 그를 계승하였으나 백성들이 그를 추방하고 만장일치로 사보나롤라를 피렌체의 통치자로 뽑았다. 사보나롤라는 자기의 개혁 활동을 쉽게 수행하리라는 생각에서 그 제의를 받아들였으나 그것은 큰 실수였다. 사보나롤라는 3년 동안 피렌체를 다스렸으며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엄격한 통치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사보나롤라는 피렌체를 도덕적으로 바짝 조이고, 조세 개혁을 단행하고, 빈민들을 구제하고, 법원들을 개혁함으로써 느슨하고 부패하고 쾌락을 좋아하던 도시에서 금욕적이고 수도원적인 도시로 바꾸어 갔는데, 이러한 통치를 절대 다수의 시민들이 싫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역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사람인 알렉산더 Ⅵ세(알렉산더 보르기아)가 교황이 되어 사보나롤라를 공격하였다.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자기의 권세를 이용하여 그들의 현세적 부귀를 도모하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 교황이 그 자녀들의 진로, 결혼 등에 있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가의 문제가 온 유럽의 정치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목표를 추구해 나갔다. 그는 양심이 완전히 마비되어 살인도 서슴지 않았으며, 자기의 계획이 성취되는 일이라면 독극물의 사용도 서슴지 않았다.
교황은 사보나롤라를 매수하려고 뇌물을 주었으나 사보나롤라는 이를 거절하였다. 또한 교황은 사보나롤라에게 추기경의 직위를 제안하였으나 사보나롤라는 이것 역시도 거절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수도승들을 설득하여 그를 비방하고 그의 권위를 해치도록 유도하였으며, 마침내 그를 파문하여 투옥시켰다. 전에는 사보나롤라에게 박수를 보내던 시민들도 이제는 그의 가르침을 철회하도록 고문을 가하라고 촉구했으며, 마침내는 그를 단죄하라고 함께 소리를 높였다.
1498년 5월에 사보나롤라는 결국 화형을 당했다. 수많은 군중들이 피렌체 중앙 광장에 모여들었으며, 사보나롤라는 친구 두 사람과 함께 화형대 앞으로 끌려갔다. 후스 때처럼 사제의 옷을 벗길 때 군중들은 “선지자여, 너의 권세를 보이고 기적을 행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침묵을 지켰다. 교회의 한 주교가 그에게 다가와서 “나는 그대를 전투적 교회(지상 교회)와 승리의 교회(천상 교회)로부터 분리시키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전투적 교회에서 이제 떠나지만 승리의 교회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이제 내가 들어가려는 승리의 교회로부터 나를 분리시켜 놓을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사보나롤라의 사역은 사회 도덕의 개선에 한정된 것이었으므로 그가 죽은 지 20년 후에 시작된 교리의 개혁과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루터는 사보나롤라를 종교개혁의 한 선구자로 간주하였다.
이유는, 사보나롤라가 피렌체 시를 경건한 도시로 개혁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당시 부패할 대로 부패한 로마 교황청과 교황에 대한 강한 항거를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더 나아가 사보나롤라가 “나는 전투적 교회에서 이제 떠나지만 승리의 교회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이제 내가 들어가려는 승리의 교회로부터 나를 분리시켜 놓을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항거한 것은, 로마 교회가 가지고 있던 천국 열쇠의 권한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보나롤라는 몸으로 직접 개혁을 실행하였던 종교개혁의 선구자였음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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