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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사 : 교황제 개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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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제 개혁운동

 

개혁을 위한 종교회의운동

1. 피사 종교회의(1409)1378년 로마 캐도릭 추기경들은 대중의 성화에 의해 이태리인 우르반 5(Urban V, 1378-1389)를 교황으로 선출하였지만 불만을 그에게 계속 표현했다. 4개월 후, 우르반의 선출이 협박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며 부정당하다고 하였다. 또 추기경들을 다른 교황 클리멘트 7(Clement VII, 1378-1394)를 선출하여 우르반을 대신하였다. 선출된 두 명의 교황은 일치 양보가 없고 서로 정통성과 교황의 지상권을 주장하므로 두 경쟁 교황이 하나는 아비뇽에 다른 하나는 로마에 존재하므로 대 분열이 시작된 것이다. 교회는 과거에도 이러한 분열을 경험한 바 있지만 지금의 상황은 각자가 추기경 모임을 통해 선출되었다는 점과 그것에 따른 국가들의 후원을 받는 점에서 달랐다.

대분열은 하나의 지상의 지도자 아래 연합된 하나의 참된 교회임을 주장했던 캐도릭 교회에 크나 큰 수치를 안겨다 주었다. 이 사건을 교황들의 선출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도록 인도했다. 하지만 대 분열은 그렇게 생각만큼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여러 학자들은 교회의 범종교회의가 개최되어 대 분열을 해결해야만 한다는 상황의 실천적 필요성을 간파하였다.

이런 목적으로 결국 범종교회의가 각 교황의 인준 없이 1409년 피사에서 개최되었다. 종교회의는 두 교황들을 파직시키고 알렉산더 5(Alexander V, 1409-1410)를 선출하였다. 종교회의의 결정은 교황제 위에 종교회의의 우월성을 선포했다. 이것을 가리켜 종교회의주의론(conciliar theory)이라 한다. 종교회의는 대 분열이 유럽의 강국들에게 인준 받지 않고 강행하므로 알렉산더의 선출이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를 직면했다. 피사의 종교회의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었다. 로마 캐도릭 교회는 이제 세 명의 교황을 거느리면서 여러 국가들의 세력의 이권들이 간섭하게 되었다.

2. 콘스탄스 종교회의(1414-1418)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알렉산더의 후임으로 선출된 교황 존 23(John XXIII, 1410-1415)에 의해 소집되어 중세의 종교회의 중 매우 중요한 의미, 즉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대규모를 참석했던 종교회의가 되었다. 교황 위에 종교회의의 우월성을 주창하고 교황직의 절대적 권력을 박탈하고, 종교회의의 규율에 복종할 것을 법으로 제정했다. 23세와 베네딕 13세는 파직을 당하고 세 번째 교황인 그레고리 12세는 사임하였다. 그리하여 종교회의에서 선출된 마틴 5(Martin V, 1417-1431)를 선출하므로 대 분열의 막을 내렸다.

3. 바젤 종교회의(1431-1449)는 콘스탄스 종교회의의 칙령에 따라 모였지만 교황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제한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바젤 종교회의는 도덕적 행정적 개혁을 선언했지만 종교회의 우월성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종교회의 시작부터 교황 유진 4(Eugene IV, 1431-1447)를 둘러싼 여러 모략이나 음모가 일어나면서 교황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대 분열로 상실한 교황권의 재탈환을 성공시켰다. 제국을 위협하는 터키인들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후원을 얻으려는 비잔틴 황제만 아니라 헬라교회 지도자들은 헬라와 라틴교회간의 재연합을 위해 섭외를 자청했다. 바젤 종교회의가 섭외의 장소로서 이태리 도시보다 아비뇽으로 할 것을 주장하자 유진은 그 종교회의를 페라라(Ferrar)로 옮겨 소규모의 종교회의를 주도했다. 페라라에서 다시 장소를 옮겨 플로렌스(Florence)에서 개최된 종교회의는 라틴과 헬라교회가 여러 가지 점에 있어 타협점에 이르고 재연합을 이루게 되었다. 바젤에 그대로 남아 있던 다수의 사람들은 계속 회의를 진행했지만 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선출된 교황도 그 힘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소규모 종교회의는 교황 유진을 이어 니콜라스 5(Nicholas V, 1447-1455)를 선출하므로 대표성을 갖게 되었다.

 

르네상스

현대를 위한 발판은 14세기에 시작하여 약 200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동안 문화적, 예술적 부흥이 있었던 시기뿐만 아니라 철학적 변화도 있었다. 인문주의적 새로운 세계관이 나타나시기였다. 또 이생의 쾌락과 만족을 강조했고 내세를 기대하지 않았다. 구원과 멸망에 대한 것 주제들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지상의 삶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사람들은 쾌락을 위해 무엇이든 감행했다. 고전적 고대성과 이교도주의가 다시 일어났고 세속화의 영향은 더해갔다. 사회의 변형은 역시 교황제에도 영향을 끼쳤다. 15세 후반, 10세기부터 시작된 이래 가장 어두운 시대가 되었다. 교황들은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친척들과 가족들을 요직에 세웠다. 어떤 이들은 구역질날 만큼 부도덕했고, 사치했고, 사생아들을 낳았다. 교황제는 뇌물로 연맹되었다. 교황제는 일시적 극적인 세속화가 되어 사치를 삶을 유지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지웠고 교회직들을 매매했다. 율리우스 2(Julius II< 1503-1513)는 특별히 전쟁광이로서 말을 타고 직접 전투에 임하곤 했다. 식스투스 4(Sixtus IV, 1471-1484)-그의 이름을 따라 시스틴 채플이라 부르는데-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면죄부들을 판매하는 자로 유명세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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