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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 : 루터의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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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터의 종교 개혁

1) 개혁적 발견을 하기까지의 루터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한스 루터(Hans Ruther)와 마가렛 루터(Margaret Luther)의 여덟 명의 자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친은 본래 농부 출신이었으나 루터가 출생한 이듬해에 동광(銅鑛) 중심지인 맨스펠트(Mansfeld)로 이주하여 주물 공장을 경영하면서 가업이 날로 번창하여 1491년에는 이 도시에서 시민의 권리를 변호할 수 있는 4명의 대표 중의 한 사람으로 선출될 정도로 부유해졌다.

루터는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 인문학부에 입학하였다. 에르푸르트 대학은 매일 아침 기도와 미사로 하루를 시작할 정도로 엄격하였다. 이러한 금욕적인 훈련을 통하여 루터는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반쯤 공부한 것과 같다”는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루터는 대학 생활 동안 결코 늦잠을 자거나 강의에 빠진 적이 없는 근면한 학생이었다.

루터는 1502년 9월 에르푸르트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505년 1월에 문학 석사 학위를 얻었고, 1505년 5월에는 법률가가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동 대학의 법과에 진학하였다.

그런데 루터의 생애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사건은 1505년 7월 2일 루터가 친구와 함께 맨스펠트시에서 에르푸르트시로 오던 도중 폭풍 속에서 일어났다. 천둥이 치고 친구가 벼락에 쓰러지는 것을 본 루터는 “성 안나여 나를 살려주소서! 그러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하고 서원하였고, 무사히 에르푸르트시로 돌아온 그는 즉시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성경 연구와 고행주의로 이름난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갔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무엇보다도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애썼다. 루터는 하나님을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어떻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하여 철야 기도는 물론, 금식과 기도와 선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06년 사제 수업을 시작하여 1507년 4월 사제 서품을 받았고, 5월에는 생애 처음으로 미사를 집례하였다. 사제 서약 후에는 금욕과 고해성사를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추구하였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다.

1508년 비텐베르그 대학으로 옮겨 그곳에서 윤리학을 가르치면서 신학을 연구하여 1509년 신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509년 10월 에르푸르트 대학의 전임강사가 되어 1511년까지 롬바르드의 문장론 강의를 계속하였다.

1510년 루터는 수도원의 일로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다. 루터는 로마 순례가 그의 죄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였다.

중세인들에게 로마는 순교자의 무덤과 성물(聖物) 등의 많은 보화가 보존되어 있는 성지였다. 칼릭스투스(Calixtus) 성당 지하실에는 40여 명이 넘는 교황들의 유해와 7만 6천여 명의 순교자들이 묻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성당에는 소위 모세가 본 가시 떨기나무, 헤롯에 의하여 죽임 당한 아이들의 뼈가 300개나 있으며, 바울의 쇠고랑, 로마 황제 도미티안(Domitian)이 사도 요한의 목을 잘랐다는 가위,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여 받았다고 하는 동전 하나가 전시되고 있었다. 교황청에서는 성자들의 유해를 숭배함으로 큰 은덕을 입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로마 순례는 하나의 큰 축복이었다. 심지어 교황 레오 10세는 각 유골에는 4,000년의 연옥 형기를 감해 주는 효과가 있고, 심지어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 때 받은 동전 하나를 소유하면 1,400년의 면죄 효과가 있다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성지 순례를 통하여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1510년 11월 로마로 향하였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거룩한 계단’이라고 불리는 라테란 성당의 28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순례의 걸음을 내디뎠다. 당시의 관례를 따라 계단을 기어오를 때마다 주기도문을 한번씩 외웠고, 계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루터는 그곳에서 사죄의 평안을 얻을 수 없었다.

로마에서 돌아온 루터는 수도원장 슈타우피츠(Johannes Staupitz)의 권유를 따라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가 되어 성경을 연구하여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1513년부터 2년 간 시편을, 1515년에는 로마서를, 1516년에는 갈라디아서를, 1517년에는 히브리서를 강의하였다.

성경 연구를 통하여 루터는 로마 천주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회의를 품고, 복음에 대한 각성을 하게 되었다. 루터는 시편의 여러 곳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예언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어찌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을 당하여야만 하였는지에 대하여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한 루터는 로마서를 읽는 가운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는 말씀 때문에 고민하던 중 그 말씀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려고 갈망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라는 그런 의미인 줄로 생각했다.… 나는 주야로 생각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은혜와 긍휼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의(예수=복음)를 의미하는 것이요, 또 우리가 그 의(복음)를 믿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 17절의 의미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능동적으로 계시하시고 그 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신앙이라고 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뜻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받았으며, 크게 열려진 문을 통하여 바로 천국으로 들어간 듯 했다.”고 하였다.

루터는 비텐베르그 수도원의 탑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는 진리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이를 ‘탑의 경험’이라고 부른다.
루터의 탑의 경험은 결국 종교 개혁의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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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루터와 95개조 항의문

루터는 1517년 2월 24일 마태복음 11장 25절 이하의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면죄부의 해악에 대하여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루터의 설교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루터는 다음 단계로 마이센(Meissen), 프랑크푸르트(Frankfurt), 짜이츠(Zeits)의 주교와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흐트에게 면죄부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누구도 루터의 편지에 답하지 않았다.

설교나 편지로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루터는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들에게 면죄부의 성격과 효과, 그것이 교회에 미치는 심각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토론을 요청하였으나, 교수들 또한 교황청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루터는 먼저 ‘95개조의 항의문’을 작성하여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흐트에게 그 사본을 보냈다. 그는 대주교에게 면죄부의 해독을 지적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면죄부는 영혼의 구원과 성화에 공헌하지 못하고, 다만 교회 법에 부과된 일시적인 형벌을 사면할 뿐이다.…그리스도는 어디에도 면죄를 증거하라고 하지 않았고,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였다. 주교들이 복음보다 면죄를 더 중히 여기며,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 면죄만 뻔뻔스럽게 선포하도록 용납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그러나 알브레흐트에게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교회의 무반응에 지친 루터는 보다 강력한 방법을 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95개조 항의문’을 1517년 10월 31일 정오 경에 비텐베르그 성곽 교회 앞에 게시하는 것이었다.

그 글의 서문에 루터는 ‘진리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밝게 드러내려는 열망에서 아래의 논제들은 문학사요 신학사요 신부인 마틴 루터에 의하여 비텐베르크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루터는 그곳에서 이 주제들에 대하여 강의를 하도록 공식적으로 임명받은 바 있다. 그는 토론에 참여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서신으로 토론하기를 요청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썼다.

이 항의문은 공개된지 2주만에 전 독일을 불질렀고, 4주만에 전 구라파를 불지르고 말았다. 이 항의문이 이같이 짧은 시간 내에 그토록이나 큰 영향력을 독일과 구라파에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인쇄술의 발명 때문이었다. 1450년 구텐베르그(Guttenberg)에 의하여 개발된 인쇄술에 의해 루터의 ‘95개조 항의문’은 삽시간에 전 구라파로 퍼져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루터의 항의문은 주로 다음의 세 가지 문제를 다루었다.

첫째로, 교황의 면죄권에 대한 문제였다.

루터는 항의문 1조에서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고, 6조에서는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셨다는 것을 선언하거나 혹은 시인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힘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황의 면죄로써 인간은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되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면죄증 설교자들은 모두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21조)라고 했고, ‘면죄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32조)라고 했다. 또한 ‘어떠한 크리스챤이고 진심으로 자기 죄에 대해서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증서 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사함을 받는다.’(36조)고 하였고, ‘참다운 회개는 형벌을 달게 받는다. 그러나 면죄증에 대하여 관대한 것은 형벌을 등한시하게 하고 슬퍼하게 하며, 설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40조)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루터의 지적은 한 마디로 교황은 죄를 면제할 자격도 권한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에게 면죄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교황의 면죄권을 돈으로 사면 인간의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을 받는다고 주장하며, 면죄증을 파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더 나아가 면죄증을 샀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거나 죄에 대한 형벌을 등한시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이라고 하였다.

둘째는, 교황의 내세권에 대한 문제였다.

루터는 ‘참회에 관한 교회법은 산 사람에게 부과되는 것이며 임종에 처한 사람에게는 어떤 부담이든지 그 법(제벌<諸罰>에 대한 교회 규정)에 의하여 부과되어서는 안된다.’(8조)고 하였고, ‘임종(死)에 처한 자에 대하여 연옥 문제를 내세워서 종교상 속죄를 보류하는 사제들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며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이다.’(10조)라고 했다. 그리고 ‘사실상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형벌은 교회법에 의하여 현세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22조)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루터의 지적은 한 마디로 교황은 내세 문제에 대하여 관여할 권세가 없고, 죄의 면책권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세를 결정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도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므로, 교황에게 내세권과 사죄권과 연옥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고 하는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면죄부를 팔아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는 것에 대한 문제였다.

루터는 ‘만일 교황이 면죄증 설교자들의 행상 행위를 안다면, 자기 양의 가죽과 살과 뼈로써 성 베드로 성당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것을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50조)고 하였고, ‘어떤 면죄증 설교자들에게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게 교황은 필요하다면 성 베드로의 교회당을 팔아서까지라도 그 자신의 재산으로 갚아주려고(당연하기는 하나) 한다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51조)고 하였다. ‘또한 오늘날 제일 부자의 재산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 행하는 대신 차라리 자기의 돈으로 성 베드로 교회당쯤은 세울 수 있지 않는가?’(86조)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루터의 지적은 베드로 성당의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는 로마 교황청과 교황권에 대한 강력한 항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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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루터의 개혁 논쟁

95개조의 항의문이 소개되자, 로마 교황청이 면죄부라는 이름으로 독일 교회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독일인들 가운데 루터의 항의문에 동조하며 로마 교황청을 반대하는 운동이 확산되어 갔다.

그 반대로 루터의 강력한 적대자도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잉골슈타트 대학의 교수요, 한 때 루터의 친구였던 요한 에크(Johannes Eck, 1486-1543)였다. 그는 루터의 95개조 항의문이 나오자마자 ‘날카로운 기둥들’(Obelisci)이라는 논문을 써서 루터를 이단으로 기소하였고, 1518 년 초에는 대주교 알브레흐트와 도미니칸 수도회가 루터를 로마에 정식으로 고소하였다. 교황은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였으나 루터는 이에 불응하였다. 이 일을 조정하기 위하여 색소니의 선제후 프레드릭이 나서게 되었고, 교황은 추기경인 카제탄(Cardinal Cajeta)를 시켜서 루터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러자 카제탄과 로마 교회는 루터를 체포하려고 하였지만, 이를 감지한 프레드릭이 루터를 아우구스부르그로부터 피신시킴으로써 저들은 실패하였다.

루터의 개혁 운동이 교회 당국에 의하여 쉽게 제어될 수 있는 성격이었음에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루터의 개혁 운동이 일어났을 때 교회 지도자들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고, 정치 지도자들은 권력 투쟁에 눈이 멀어 있어서 종교적인 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1519년 초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맥시밀리안(Maximillian)이 사망하자, 유럽 여러 나라는 루터보다는 맥시밀리안의 후계자를 선택하는데 더 신경을 썼다.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Francis Ⅰ)와 스페인의 카를 5세(Karl Ⅴ)가 신성로마 황제의 자리를 놓고 대결하다가, 1519년 6월 18일 카를 5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 이후, 카를 5세는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와 장기적인 전쟁에 돌입하여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터어키(Osman Turky)는 프랑스와 호응하면서 독일의 변경을 위협하였다.

1520년에 오스만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술레이만 1세는 유럽을 상대로 정치를 하면서 반(反) 합스부르크 정책(카를 5세 일가)을 시종일관 유지하였다. 술레이만이 이런 정책을 취하게 된 것은 1526년에 손에 넣은 헝가리 문제 때문이었다. 술레이만은 헝가리를 장악하고서 사포야이 야노슈를 왕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는 자신의 아우 페르디난트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서 집요하게 간섭하였다. 이후로 사사건건 대립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 틈을 비집고서 프랑스가 오스만제국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술레이만은 더 나아가 카를 5세가 눈의 가시처럼 여기던 종교개혁 운동에 대해서 원조를 약속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적의 적인 종교개혁자들을 지원함으로써 유럽의 분열을 유도해내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무튼, 당시 유럽에는 ‘투르크인들이 종교개혁의 동맹자’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교회 개혁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논쟁은 1519년 7월 4일에서 14일까지 라이프찌히(Leipzig)에서 열렸다. 라이프찌히 논쟁은 칼슈타트(Andreas Carlstadt)가 1518 년 에크에 반대하여 성경 본문이 전 교회의 권위보다 우선된다고 주장하자, 에크가 공개 토론을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로마 천주교회 측에서는 에크를 비롯한 잉골슈타트(Ingolstadt) 대학의 교수들이 참석하였고, 루터 측에서는 루터, 칼슈타트, 멜랑톤 등의 비텐베르그 대학 교수들이 참석하였다. 초기 논쟁은 에크와 칼슈타트가 이끌었고, 후반에는 루터가 논쟁을 주도하였다.

루터와 에크의 논쟁 주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교황의 권위에 관한 것이었다.

에크는 교황의 권위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루터는 교황의 권위가 인간의 전통에 근거한 것이며 교황도 인간이기 때문에 많은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직 성경만(Sola Scriptura)이 교회의 교리와 규범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에 따라 교회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루터가 이와 같이 성경 중심의 개혁을 주장하자, 에크는 ‘오직 성경’ 사상이 중세 말의 현대주의 사조(via moderna)를 따르는 이단들의 주장이라고 하면서 루터를 이단으로 몰아세웠다. 루터의 사상은 콘스탄스(Constance) 교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위클리프(John Wyclif)와 보헤미아의 개혁자 후스(John Hus)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루터는 위클리프나 후스가 이단적인 사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개혁자들을 정죄한 교회 회의가 잘못을 범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둘째로, 연옥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에크는 연옥이 마카비2서(Macabee Ⅱ) 12장 45절에 나오므로 연옥 교리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루터는 마카비서가 외경일 뿐 성경이 아니라고 하였다. 외경의 교훈은 신적인 권위가 없으므로 신뢰할 수 없고, 그러한 외경에 근거한 연옥 교리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셋째로, 면죄부와 고해 성사가 다루어졌다.

에크는 면죄부와 고해 성사가 교회 전통에 근거한 것이므로 교회가 따를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루터는 교회의 전통이 인간의 고안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잘못될 수 있고, 오직 성경만이 무오하므로 면죄부와 고해 성사는 성경의 교훈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루터는 라이프찌히 논쟁을 통하여 ‘오직 성경’ 사상을 주장하면서 에크의 교회 전통 사상을 비판하여 반로마 교황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독일의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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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루터의 파문과 문서를 통한 개혁 운동

라이프찌히에서 행한 루터의 발언에 대해, 교황 레오 10세(Leo X, 1475-1521)는 1520년 6월 15일 ‘주여 다시 일어나소서’라는 교서를 발표하고, 루터의 논제에 41가지의 오류가 있다고 반박하며, 루터의 주장을 철회하지 아니하면 파문하겠다고 하는 파문 위협 칙령을 내렸다. 이 칙령이 루터에게 도착한 날짜는 1520년 10월 10일이었다. 그로부터 유예기간으로 주어진 60일이 경과하는 마지막 날인 1520년 12월 10일에, 루터는 비텐베르그 대학 교정에서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로마 천주교회의 교회법과 중세의 교서 등을 불사라 버림으로 교황청에 대항하여 전쟁을 선언함으로써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도 못된 이듬해 1월, 로마로부터 루터에게 파문장이 발부되었으나 아무도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아니 하였다.

루터는 그의 개혁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인쇄술을 적극 활용하였다.

1520년 5월에 저술한 ‘선행론’(The Sermon of Good Works)에서, 그는 믿음과 선행의 관계, 믿음과 율법의 관계를 설명함으로 로마 천주교회와 성경적인 기독교의 차이점을 비교하였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최고의 선행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하였다.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Sola Fide)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기초로서, 로마 천주교회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공로 사상은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인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선행을 좁은 의미로 규정하여 오직 교회에서 기도하거나 금식과 자선을 하는 것으로 한정”하는 이들을 비난하고,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들, 즉 장사 등을 포함한 모든 직업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바로 선행이라고 하였다.

루터는 같은 해 8월 18일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The Address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German Nation)를 써서 니콜라우스 암스돌프(Nikolaus von Armsdorf)에게 보냈다. 루터는 이 글에서 황제와 영주 및 여러 귀족들에게 철저한 개혁을 호소하며, 교회의 개혁을 방해하는 세 가지 벽을 지적하였다.

루터가 이 글에서 지적한 첫 번째 벽은, 성직이 세속 권력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로마 천주교회의 교권 우위 사상이었다.
그는 교권 우위 사상의 기초가 되는 사제주의 사상을 비판하고 만인 제사장주의를 주장하였다. 루터는 교황, 주교, 사제, 수도사 그리고 수녀들을 종교 계급이라 칭하고, 제후, 군주, 장인(匠人) 그리고 농부들을 세속적인 계급이라 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루터는 두 번째로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사상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성경은 인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만인이 읽고 묵상하며 교리와 생활의 원리로 삼아야 할 교재이다. 성경은 일부 계층이 아닌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쓰여졌고, 성경의 내용은 명확하며 확실하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이를 읽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루터는 교황만이 종교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는 세 번째 벽을 허물었다.
그는 사도행전 15장 6절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 회의를 소집한 사람은 첫 번째 교황이라고 불리는 베드로가 아니라, 사도와 장로들에 의하여 회집되었으며, 초대 교회 시대에도 콘스탄틴(Constantine)과 같은 평신도가 교회 회의를 소집한 적이 있으므로 교황만이 종교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고 하는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구체적인 교회 개혁안을 전개하였는데, “교황이 그리스도의 후계자가 되려면 우선 청빈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세속 권력을 지배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교황은 독일을 재정적으로 착취하지 말아야 하며 독일 교회는 로마 교회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수도원 생활과 성직자 독신주의, 죽은 이를 위한 미사, 면죄부, 탁발 수도를 금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2개월 후,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저술했는데, 이는 교회 안에 들어온 미신을 비판하는 글이었다. 로마 천주교회는 미사, 견진, 종부, 결혼, 고해, 성찬(성체), 세례 등 일곱 가지의 거룩한 의식을 가르쳤으며, 이 의식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며 연옥의 형기가 단축된다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 주장을 일축하면서 고해, 세례, 성만찬만 유용하다고 말하였다. 그것도 믿음으로 하는 것만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후에 고해는 멜랑톤에 의해 취소되었다.

루터는 11월 초에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Treatise on Christian Liberty)를 독일어와 라틴어로 저술하였다. 루터는 고린도전서 9장 19절, 로마서 13장 8절, 갈라디아서 4장 4절, 빌립보서 2장 6-7절과 같은 바울 서신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속 사람, 곧 신앙에 의하면 모든 것에 대해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겉 사람 곧 행위에 관해서는 모든 것에 봉사하는 노예이며, 모든 사람들의 종이다”라고 하였다.

루터가 저술한 글들은 인쇄되어져서 삽시간 내에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고 이 글에 동조하는 개혁의 동지들을 규합하는 동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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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보름스 의회 이후의 루터

1521년 1월 21일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된 후, 교회로부터 영원히 제외되는 출교 처분을 받았다. 이는 정부로부터 신변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권리의 박탈을 의미하였으므로 누구든지 원하면 루터의 생명을 자유롭게 해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루터가 출교 되자 카를 5세는 보름스에 국회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하였다. 독일 정부는 루터에게 신변 보장을 약속하였다. 그럼에도 프레드리히 선제후를 비롯한 루터의 친구들은 루터에게 의회에 나가지 말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만약 보름스의 지붕의 기왓장들만큼이나 마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해도, 나는 그 곳에 가겠다”고 말하면서 보름스로 향하였다.

보름스 의회는 1521년 4월 18일부터 22일까지 루터의 사상을 심의하였다. 이 의회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독일의 여섯 선제후, 24명의 공작들, 8명의 후작들이 참석하였고, 30명의 대주교들, 주교들과 수도원장들, 7명의 대사들, 교황 대사들 그리고 자유시의 대표자들 등 모두 206명이 참석하였다.

의회는 루터에게 지금까지 그가 주장해 온 사상들을 철회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루터는 24시간의 여유를 요청하고 무엇을 철회할 것인가에 대하여 기도하며 곰곰이 따져보았으나 결국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의회 앞에서 “나는 성경과 정상적인 이성에 의하여 정죄되지 않는 한 내가 말한 어느 것도 철회하지 않겠다. 그것은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는 교황이나 교회 회의들의 주장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바 되었고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 양심을 거스리며 어떤 일을 하는 것은 불안하고 위험스러운 일이다. 나는 여기에 선다. 나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외친 후, 그 자리에 꿇어 앉았다. 그러자 카를 5세는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을 국외로 추방할 것과 그들이 쓴 글에 대한 소각령을 내렸다.

루터가 보름스에서 비텐베르그로 돌아갈 때, 많은 백성들은 루터의 영웅적인 행동에 대하여 찬양하였지만, 로마 천주교회 당국은 루터를 살해하기 위한 교활한 음모를 세웠다. 이를 알게 된 프레드리히는 4월 24일 한 떼의 무장한 사람들을 보내어 루터가 튀링겐의 한 숲 속에 이르렀을 때 그를 납치하여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피신시켰다. 루터는 세상이 잠잠해질 때까지 10개월 동안 이 성에서 프레드리히 현인의 보호 가운데 많은 글을 썼는데, 특별히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것이 1522년에 출판되었고, 전체 성경은 1534년에 출판되었다. 루터는 1522년 3월 조용히 비텐베르그로 돌아왔다. 그는 과격파 칼 스타트를 쫓아내고 본격적인 개혁을 시행하였다.

강단에는 독일어 성경이 놓여지고, 사제들도 결혼하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의식들은 억제되었고, 사람들은 독일 찬송가로 예배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예식의 형태는 미사로부터 제사적인 언어를 제거했으며, 예식을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전환했고, 설교하는 기회를 많이 늘렸으며, 성찬을 주일과 성일들로 제한하고, 1521년부터 멜랑톤에 의해서 로마 천주교에서 빵만 주는 것과 다르게 빵과 포도주로 하는 개신교 성만찬이 시작되었다.

루터가 쓴 ‘독일 기독교 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가르침을 따라서 많은 수도승들과 수녀들이 루터의 개혁에 가담하였고, 몇몇의 신부들이 결혼함으로써 실제적인 개혁이 시작되었다. 캐더린 폰 보라(Catherine von Bora) 수녀도 루터의 개혁 사상에 감화를 받아 개종하고 수도원을 나와 루터의 지지자가 되었고, 1525년 6월 13일 루터와 결혼하여 종교개혁 운동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게 되었다.

루터는 왕성한 저술가요, 음악가요, 시인이었다. 루터가 지은 찬송시 중에 잘 알려진 것은 종교개혁의 군가(軍歌)로 불린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가이다.

루터는 1546년 그가 태어났던 아이스레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만년에 건강이 나빠 고통을 당하였으나 운명할 때에는 별로 고통을 받지 않았다. 그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심히 기도하였으며 계속해서 세 번이나 일어나 “아버지여, 주님의 손에 나의 영혼을 맡깁니다. 진리의 하나님께서 나를 구속해 주셨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는 비텐베르그에 있는 교회의 묘지에 묻혔다. 그곳은 29년 전에 그 교회의 문에다 루터가 유명한 95개조의 항의문을 붙였던 곳이다.

그 이듬해 여름에 황제 카를 5세가 루터의 무덤을 찾아왔다. 그의 대신 중의 한 사람이 옆에 서 있다가 이단의 괴수의 뼈를 파내어 불태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카를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과 싸웠지 죽은 사람과는 싸우지 않는다. 이 사람은 부활과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여기에 잠들게 하라.”

루터의 육신은 그 날 이후 그곳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루터의 개혁 사상은 죽지 않고 살아서 중세를 깨우고, 오늘을 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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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루터의 신학(1)

루터의 신학은 칭의의 신학으로부터 출발한다. 수도사로서 루터는 “죄인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하여 고민하였고, 탑 속의 체험을 통해 그 해답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그의 생애는 칭의의 신학을 전파하는데 바쳐졌다.

또한 루터의 신학은 말씀(성경)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루터는 자신이 고민하던 문제의 해답은 물론 모든 신학적 문제의 해답을 성경을 통하여 발견했기 때문이다.

(1) 신관

루터에게 하나님은 감추어진 하나님이나,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는 계시적인 존재였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특히 성육하신 그리스도, 성경,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인류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 가운데 성령을 통해 계시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하였다. 그래서 루터에게 성령의 계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라고 하였다.

루터가 성경을 통해 발견한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인 인간을 사랑하시고, 감추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역설적인 하나님이시다.

(2) 성경관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은 동의어이며, 모든 성경의 기능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루터는 요한복음이 그리스도를 가장 정확하게 증거하므로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요한복음 다음으로 바울 서신과 베드로전서를 꼽았고, 공관복음, 히브리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순으로 성경의 우위를 정하였다. 반면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거나, 적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가 절하된다고 판단하여 한 때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더구나 그는 야고보서가 선행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싫어하였고, 요한계시록도 상징적인 내용이 많이 기술되었기 때문에 ‘계시적이 아니다’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구약 가운데 창세기, 시편, 요나서는 높이 평가하였지만, 에스더서는 유대인의 복수심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저급하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나중에 그의 이러한 편견을 회개하고, 야고보서를 비롯한 모든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였다.

(3) 기독관

개혁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3직을 주장한다. 곧 예수는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다만 화해자요 구원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로서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고난은 죄인이 하나님께 갚아야 할 만족을 드린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마귀와 싸워 이기심으로 택한 자를 구원하셨다. 이와 같이 루터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속죄, 십자가상의 그리스도 등의 사상을 그의 기독론의 중심으로 세우고 있다.

루터의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이다. 루터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12:11)라고 한 말씀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4-5)라는 말씀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고 하신 말씀을 좋아했다. 이러한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십자가 뒤에 영광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므로, 고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영광의 신학’만을 추구하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4) 율법과 인간론

루터는 복음 안에서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율법폐지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루터의 이러한 입장은 성경보다는 그의 경험에 근거한다. 루터는 칭의를 얻기 위하여 수도승으로서 고행하며, 기도하며, 금식하였지만, 영원한 죽음만을 보았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워지거나 성화 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고, 동시에 구원으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되는데, 곧 신자들에게는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사랑 표현이나,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와 같은 일반적인 율법관에 기초하여 율법과 복음이 서로 대치되는 것으로 보았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정결한 마음과 완전한 순종이나, 복음은 죄인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용서받았다고 선언하므로, 복음은 율법의 권세를 폐지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사상은 구원만 강조하고 성화를 등한시하는 율법폐지론(Antinomianism)의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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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택교리

루터는 성경에서 선택교리를 바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성경으로는 로마서 8장 28절,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이스마엘과 야곱의 이야기, 로마서 9장 15절, 17-18절의 토기장이이ㅡ 비유, 요한복음 10장 29절, 13장 18절과 6장 44절, 시편 115편 3절과 디모데후서 2장 19절 등으로, 이러한 성경들은 선택 교리를 확실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로마서 9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이 성도들을 악에서 구원하는 것, 선하고 유식한 자들을 버리고 사악한 자들을 회심하게 하심은 하나님의 선택을 증명한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적인 사람들은 예정 교리를 배척하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반론은 다음과 같다고 하였다.

①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예정 교리는 성립되지 않는 다는 주장에 대하여, 루터는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없이 의작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고, "의지는 죄에 사로 잡혀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선을 택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찾아 나설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주장하면서 예정 교리를 반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하였다.

② 하나님의 의지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데 있기 때문에 예정 교리는 성립되지 않는 다는 주장에 대해, 루터는 성경에서 언급하는 모든 사람은 모든 선택된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하여"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여 제한 속죄를 주장하였다.

③ 예정론은 하나님이 죄를 원하고 죄인을 강퍅하게 하는 것처럼 말함으로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들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주장에 대해, 루터는 하나님이 자신의 공의와 자비를 보여주기 위하여 죄를 원하신다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궤변은 죄인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중심을 두고 생각하므로 나오게 된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루터는 선택에 대한 성도들의 자세를 3가지로 나누었다


ⓐ 자신을 선택한 하나님의 뜻에 만족하는 자들이 있고,
ⓑ 하나니이 자신을 유기된 자들로 간주하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자들이 있고,
ⓒ 하나님이 원한다면 지옥이라도 가겠다고 자신을 포가하는 선택받은 자들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정 교리는 인간이 싫어할지라도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수용해야만 하는 교리라고 하였다.

(6) 소명과 만인 제사장주의

중세 시대에 소명이라는 말은 성직자에게만 적용되었다. 수도싱으과 사제와 같은 성직으로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성소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이러한 소명 사상을 보편화하여,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도록 수명을 받았다고 주장하여 성과 속의 개념을 깨 버렸다.
그는 사제의 소명이 결코 다른 직업으로의 소명보다 더 신성한 것이 아니라도 주장하면서, 모든 직업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므로 신성하다고 하였다. 루터가 이와 같이 소명사상을 보편화 한 것은 소명을 수평적으로 이해한 데서 기인한다. 그는 수평적인 인간 관계를 통하여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룬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소명의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마하면서, 직업을 통하여 이웃을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루터의 직업 사상은 수도원적인 신학을 붕괴시키는 계기를 제공하였고, 노동 윤리관을 바꾸었다.

루터의 만인 제사장직은 소명론만이 아니라, 성경 번역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그는 만인 제사장설에 근거하여, 모든 신자들은 로마천주교인과 논쟁할 수 있도록 성경을 읽고 연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중세 시대에는 신부들이 사제의 권위로 신자들의 죄를 용서하곤 하였지만, 루터는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므로 죄를 위해 사제가 필요 없고 스스로 기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가정에서의 가장은 그 가정의 제사장이므로 온 식구를 말씀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루터는 가정마다 성경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게 하였고, 가정 예배를 위한 요리문답서를 작성하였다.
루터는 로마 천주교회의 사제주의를 배척하고 회중의 권위를 높임으로 교히 정치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목사의 권위는 그를 부른 회중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교리 문제, 목사와 교사의 시취 문제, 재정의 관리와 구제 문제, 권징과 파문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권세가 회중에게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루터의 이 모든 제안은 영주들과 시의회의 반대로 인하여 즉각적으로 실천되지 못하였지만, 루터파 신학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루터는 교회 회의의 결정이나 교황의 교서를 신앙의 기본으로 보지 않고 오직 성경에 근거한 것만을 교리의 기초로 삼고자 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신앙의 기초와 예배의 원리를 성경에서 찾고자 하였으나, 성경이 금하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포용한다는 입장을 취하여 칼빈이나 부쳐보다는 폭넓은 신학의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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