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독일의 개신교
1526년에 카를 황제는 스파이에르(Spires)에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여기에서 복음적인 운동에 호의적이 ㄴ조처가 취해졌는데, 다음 회의로 모일 때까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자유가 허용된 것이었다. 이는 카를 5세가 종교 개혁자들에게 베푼 관대하고 온건한 조처였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를 유감으로 여겼다.
3년후에 스파이에르에서 또 다른 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지난 번 회의에서 채택되었던 조처가 역전되어 황제는 교황이 지우는 멍에에 대해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제후들은 분열되었고, 그들 중 6명이 수많은 독일의 도시들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공경할 것을 양심이 요구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들은 황제의 요구에 승복할 수 없었다. 그들의 이러한 항의 때문에 그들과 그 추종자들은 '항거하는 사람들'(Protestants)로 불리게 되었다. 이 때 기독교회의 입장을 대신한 사람이 필립 멜랑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이었다.
멜랑톤은 종교 개혁운동이 로마 천주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이단적인 운동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운동임을 밝히기 위하여 1530년 루터의 도움을 받아 '아우구스부르그신조'를 작성하여 의회에 제출하였다.
회의에 루터는 참석하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아직도 그가 제국의 파문령 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루터가 삭소니의 프로테스탄트 선제후의 영토를 벗어나는 것은 안전한 일이 못되었다.
황제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전체 회의석상에서 라틴어로 낭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삭소니의 선제후 요한은 "안됩니다. 우리는 독일인이며 독일 땅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하도록 전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 신앙고백서가 독일어로 낭독되었으며, 그 결과로 라틴어를 모르던 수많은 참석자들이 이신칭의의 교훈을 비롯한 성경의 위대한 교리들을 생생하게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 신앙고백서를 듣고 대단히 감동되었다. 또한 개신교가 그 모든 근거를 오직 성경에만 두고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요구하는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진리가 사람들이 이해하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로마교의 신학자들은 교부들의 말을 인용하여 개신교의 신앙고백서를 논박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듣고 제후들 중 한사람인 사소니의 공작 게오르그(George)는 루터의 적수였지만 "그러면 루터주의자들은 성경에 뿌리박고 있고 우리는 성경밖에 서 있는 셈이군요."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올바른 지적이었다.
그 회의에서의 심의는 연장되었으나 마침내 황제는 1531년 4월까지 개신교도들에게 그들의 입장을 재고해 보라는 결정을 내렸다. 황제는 압력을 가하면 멜랑톤이 반대자들에게 항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제후들은 항복하지 않고 카를에게 대항하는 공동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슈말칼트 동맹'(The League of Schmalkald)을 결성하였다. 이에 대 황제는 터어키족과 프랑스인들이 자기의 군대와 교전 중일 때는 또 다시 그들(제후들과 동맹 세력) 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 대신 독일에 있는 카톨릭 세력으로 하여금 카톨릭 동맹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530년대에 이 두 개의 동맹 세력은 서로 대치하였으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1546년 루터가 죽을 때까지 불안한 평화가 계속되었다. 그 때는 황제가 프랑스 왕을 격퇴시킨 후였으므로 개신교도들의 도전을 능히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보기에는 개신교 제후들의 세력은 미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섭리는 역사의 방향을 역전시켰다. 카를 5세는 그의 아들 필립(Philip)을 제위 계승자로 선출시킴으로써 스페인과 항구적으로 결합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야욕이 노출되자 독일 내의 시신구교를 망라한 제후들은 스페인에 예속되는 것을 반대하여 반황제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1552년 봄 신교 제후들은 재집결하여 카를 5세의 군에 반격을 가하였다. 이에 당황한 황제는 이탈리아 북쪽의 티롤 산중으로 도망하고 말았다. 이싸움을 끝으로 카를 5세의 전제적 독재정치는 그의 야욕과 함께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 후 카를 5세는 정치에서 손을 뗀 후 실의에 빠져서 스페인의 한 작은 수도원에서 은거하다가 1558년 9월에 죽고 말았다.
신구교 양측의 대표자들은 1555년 아우구스부르트시에서 평화회의를 개최할 것을 합의하고, '아우구스부르트 강화'를 체결하였다.
'아우구스부르크 강화'는 한 나라에는 하나의 신앙, 한 명의 왕, 하나의 법만이 존재한다는 개념에 따라 통치자의 종교를 백성의 종교로 인정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통치자가 카톨릭 신자이면 백성들도 카톨릭 신자가 되어야 하고 통치자가 개신교이면 백성들도 개신교가 되어야 했다.
독일에서의 개신교란 곧 루터교를 의미했다. 이로 인해 독일 내의 여러 국가들과 도시들에 잠정적인 평화가 깃들었다. 독일은 평화를 얻었지만 분열된 상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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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쯔빙글리와 스위스의 종교개혁
독일에서 루터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스위스에서는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에 의한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쯔빙글리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부터 로마교회의 많은 가르침과 의식들이 성경에서 말한느 교훈들과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확신하였다. 그의 이러한 확신을 초기 교부들의 저술들과 후스와 위클리프의 저술들을 읽음으로써 더욱 분명해졌으며, 종교개혁을 갈망하게 되었다.
루터가 신앙과 교리의 기초로 성경과 함께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성경이 명백하게 금하지 않은 것은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 하에 상당부분 로마 카톨릭의 의식을 받아들은 것과는 달리, 쯔빙글리는 오직 성경만을 신앙과 생활의 기준으로 삼고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 중심적인 신학은 제네바의 개혁자 요한 칼빈(John Calvin)에 의하여 계승 발전하게 되었고, 개혁주의 신학(the Reformed Theology)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이후 이 명칭은 루터파와 구별되는 명칭이 되었다.
1) 개종하기까지의 쯔빙글리
쯔빙글리는 1484년 1월 1일 스위스의 작은 도시 빌트하우스 (Wildhaus)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쯔빙글리의 부모는 영특했던 쯔빙글리는 아주 어릴 때무터 외지로 유학을 보냈다. 쯔빙글리는 베른 대학과 비엔나 대학을 거쳐 1502년 바젤 대학에서 토마스 비텐 바하(Thomas Wyttenbach)로부터 에라스무스이 개혁 사상을 소개받아 인문주의자가 되었으며, 1515년 에라스무스를 직접 만나 그와 학문적 교제를 나눈 후, 그는 더욱 철저한 인문주의자가 되었다. 쯔빙글리는 바젤 대학에서 1504년 문학사 학위, 1506년에는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점차 대학자로 성장하여갔으며, 그 해 로마 천주교회로부터 사제로 서품을 받게 되었다.
쯔빙글리는 글라루스 (Glarus)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여 10여년 간 그곳에서 사역하였는데, 그는 교인들을 돌보는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과 교부들의 글을 연구하는데 바쳤다. 이런한 가운데 쯔빙글리는 로마 천주교회가 과연 인가에게 구원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하여 회의하기 시작하였다.
쯔빙글리가 글라루스에서 목회하는 동안, 수많은 스위스 젊은이들이 용병으로 전쟁에 참가하였다. 1512년 무적의 스위스 연합군은 교황청을 돕기 위해 밀란에 진군하였다. 이 때 쯔빙글리는 관례에 따라 용병의 군목으로 차출되어 1513년 6월 참전하였다. 종군 생활을 통하여 쯔빙글리는 용병 제도의 폐해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많은 고민 끝에, 쯔빙글리는 1515년부터 용병 제도를 반대하는 설교를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그느 민족주의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쯔빙글리는 용병 제도를 반대하다가 1516년 교회에서 쫓겨나 아인지델른으로 목회지를 옮겼는데, 이곳에서 그는 보다 폭넓은 독서와 성경 연구를 통해 인문주의자에게 개혁주의자로 변신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516년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 성경이 출판되자, 쯔빙글리는 즉시로 구입하여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주야로 헬라어 성경을 애독하여 바울 서신을 암송할 정도였다.
쯔빙글리는 셩경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에 의하여 완전하게 영감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오직 성경에서만 신앙과 예배, 생활의 원리를 찾아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확신은 그에게 종교 개혁의 원리를 제공하였다.
쯔빙글리는 1518 년 12월 27일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청빙을 받아 취리히로 가게 되었다.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그의 개종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는 1518 년 8월 취리히를 강타한 흑사병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흑사병이 번지면서 쯔빙글리의 형제 안드레아스(Andreas)를 비롯한 취리히 시민 3분의 1이 생명을 잃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서둘러 취리히를 떠났으나, 선한 목자 쯔빙글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죽어가는 취리히 시민들을 간호하였다. 그러다 결국 그도 1519년 9월 흑사병에 전염되었고, 1년 가까이 죽음의 문턱에서 고생하다가 1520년 여름에 이르러서야 겨우 건강을 회복하였다.
투병 생활을 통해 쯔빙글리는 그의 전통적인 카톨릭 신앙, 곧 동정녀 마리아와 로마 천주교회에 대한 신앙에 회의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만이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분 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쯔빙글리는 교회와 사회 개혁을 기대하면서 1519년 1월부터 복음적인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마태복음을 본문으로 시작하여 사도행전, 바울 서신, 공동 서신 순으로 설교함으로 개혁운동을 펴 나갔으며, 1526년까지 신약 전부를 강해하였다.
특히 그는 복음서에서 사랑의 윤리, 그리스도인의 철학과 생활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성경적 기독교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종교의 차이를 설명하였다. 로마 천주교회의 종교적 남용을 비판하는데 앞장서면서 쯔빙글리는 일약 취리히의 종교적인 영웅이 되었다.
당시 그로스뮌스터 성당은 유럽에서 비교적 큰교회이며, 영향력 있는 교회였으므로 쯔빙글리의 개혁 운동은 스위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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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쯔빙글리의 최후
(1) 마르부르그 회의
취리히의개혁운동이 공개 토론으로 성공하자, 스위스의 여러 도시들에서도 같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1526년에는 루터의 대적 요한 엑크와 쯔빙글리가 로마 천주교 영지인 바덴(Baden)에서 4주간 동안 종교개혁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에바젤의개혁자 외콜람파디우스가 참석하여 로마천주교회를 곤경에몰아넣었다.
바덴 회의 이후 스위스 내에 기독교도에 대한 로마 천주교회의 압력이 가중되었지만, 1527년 2월과 3월의 바젤과 콘스탄스 논쟁에서 기독교가 로마 천주교회를 누르고 승리하였다. 루터와 쯔빙글리는 로마 천주교회의 공격에 대비한 상호 만남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쯔빙글리의 제안으로 1529년 독일의 마르부르그에서 두 사람이 만나 회의를 하게 되었다.
쯔빙글리와 루터는 3일간의 논의를 거쳐 그리스도의 중보사역, 믿음에 의한 칭의, 세례에관한문제등14개조항에대하여 의견일치를 보았다. 15조항의 초기 부분에서 화체설과 미사를 희생으로 보는 것을 배척하였고, 빵과 포도주두가지성찬의 요소를신자에게 주는 것이옳다고 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성찬에 대하여는 심각한 설전을 벌였다. 쯔빙글리는 빵과 포도주가 오직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식을 거행할 때마다 질적으로, 양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임하지는 않지만, 본질적이고 실체적으로 임재한다고 공재설을 주장하였다. 서로의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자 루터는 쯔빙글리와 화해하는 것을 거절하였고, 쯔빙글리를‘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정죄하였다. 결국 교회의 연합이 무산되었고, 개혁자들의 힘이 분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카펠전투
마르부르그 회의 이후 루터파와의 공조체제가 무너져 힘이 약화된 가운데서도 쯔빙글리는 모든 스위스 백성이 로마 천주교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기를 소원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을 지지하던 우리(Uri), 슈비츠(Schwyz), 운터발덴(Unterwalden)과 같은 산지의 주민들은 스위스에서 취리히가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은 1529년 4월 쭉(Zug), 루쩨른(Lucerne)과 힘을 합하여 스위스의 숙적인 오슨트리아의 합스부르그가의 페르디나도 공작과 동맹을 맺고 취리히에 대항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쯔빙글리는 1529년 6월 저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카펠(Kappel)로 진군하였다. 이 전투에서 쯔빙글리는 카톨릭 속한 주들이 페르디난드와 맺은 조약을 취소하고, 개혁운동에 대한 박해를 종식하며, 종교 선택을 자유롭게 허용하겠다고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제1차 평화조약에 서명하고 철수하였다.
그러나 이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자 1531년 1월에 열린 스위스 연맹 회의에서는 상호 비난의 소리가 높아갔고, 쯔빙글리는 개혁자들 사이의 내부 결속을 다지고 로마 천주교회를 지지하는 산지 주들을 고립시키는 정책을 세워 밀, 소금, 포도주, 철 등의 거래를 금하는 경제 봉쇄령을 내렸다. 이 봉쇄령으로 어려움에 빠지게 된 로마 천주교회에 속한 주들은 1531년 10월 11일 8,000명을 이끌고 취리히에 대항하여 카펠로 몰려왔다. 쯔빙글리는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1,5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카펠전투에 참여하였으나 수적 열세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쯔빙글리는 부상을 당하여 결국 숨을 거두었으며, 취리히 측의 전사자는 400명에 달하였고, 그 가운데는 26명의 시의회 의원과 25명의 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로마 천주교회 측은 쯔빙글리의 시체를 조각 내어 불에 태우고, 그 재를 공중에 뿌리면서 승리를 자축하였다. 이때 쯔빙글리의 나이 47세였다.
이 일로 인해 취리히의 개혁 운동은 심각한 위기를 맞은 듯이 보였다. 하지만 취리히의 저력을 의식한 로마 천주교 측은 11월 20일 취리히와 제2차 카펠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제1차 카펠 평화 회의를 무효로 하며, 개혁교회 지역에서는 로마 천주교회의 포교가 허용되지만, 산지에 속한 주에서는 개혁교회의 예배의 자유가 금지된다는 것이었다. 이 평화 조약의 결과 취리히에서 로마 천주교회의 활동이 허용되었고, 개혁운동에 대한 방해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취리히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로마 천주교도로 돌아간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개혁 신앙은 스위스는 물론 프랑스의 여러 도시들뿐만 아니라 독일에서도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였다.
쮜리히에서의 쯔빙글리의 계승지는 그의 사위인 볼링거(Henny Bullinger)가 되었으며, 그의 가르침 아래서 개혁에 동참하는 모든 도시들이 동일한 신앙고백을 받아들였다. 이 신앙고백은 ''헬베티아 신앙고백서''(Helvetic Confession)로 알려져있다(고대 로마 시대에는 스위스를 ''헬베티아''라고 불렀다). 이 헬베티아 신앙고백서에는 존 낙스(John Knox), 그 외 다른 스코틀랜드의 목사들, 화란 남부의 교회들, 그리고 폴란드와 헝가리의 개혁교회 회중들이 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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