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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4권.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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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이끌고, 그 곳에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외적인 수단 또는 보조 장치

 

1 장 모든 경건한 자의 모체(母體)가 되는 진정한 교회 : 우리는 이 교회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모체가 되는 거룩한 보편적 교회. 1-4)

 

1. 교회의 필요성

 

먼저 편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가 복음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고, 우리는 그가 가져오신 구원과 영원한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키우며 목적지까지 향상시키려면 무지하고 게으르고 또 경박한 우리들에게는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약점을 대비해서 필요한 보조 수단도 첨가하셨다. 또한 복음 전파가 활발하게 전개되도록 이 보물을 교회에 맡기셨다. 목사와 교사들을 임명하셔서(4:11)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가르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권위를 주셨고 마지막으로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질서를 위해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우선 성례를 제정하셔서 성례에 참가한 우리는 그것이 신앙을 자라게 하며 돈독 하는데 매우 유익한 보조 수단임을 느낀다. 우리는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어서 아직 천사들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놀라우신 섭리로 우리의 능력에 적절한 방법을 취하셔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가 자신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을 지시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을 가르치는 계획에 의하면, 이제부터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교회 정치와 교회 직제와 권세를 논하며 다음에는 성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시민 정부를 논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일이 교황 제도에서 사탄에 의해 더럽혀진 그 부패한 상태를 경건한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그것을 버리도록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우선 교회를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의 품속으로 자녀들을 모으시기를 즐거워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유아와 어린아이 시절 동안만 교회의 도움과 봉사로 양육 받을 뿐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 어른이 되고 드디어는 믿음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므로"(10:9 참조)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사람에게는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율법 하에서 이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이러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라고 말한 바울의 가르침의 증거와 같다(4:26).

 

2. 교회와 신조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신조에서 우리가 "공회를 믿는다"라고 하는 조항은 보이는 교회뿐만이(현재 우리가 본 제목 하에서 논하는) 아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들 죽은 사람들까지를 의미한다. "믿는다"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불신자들을, 하나님의 양떼와 사나운 짐승들을 다른 말로 구별할 수 없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전치사 in("안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맡긴다"라는 뜻을 첨가하는 전치사)을 넣는 사람이 많으나 그럴 필요는 없다. 고대에는 이것이 일반적이었고 또 증거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교회사에 기록된 니케아 신조도 이 전치사를 붙였다. 그러나 교부들의 글을 보면 초대 교회에서는 "교회를 믿고 의지한다"라고 하지 않고 "교회를 믿는다"라고만 해도 아무런 문제없이 인정되었다. 어거스틴이 그렇게 말했고 키프리아누스의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신조 해설(On the Exposition of the Creed)을 쓴 사람도(그가 누구였든 간에) 그렇게 말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전치사를 붙이는 것은 부적당한 표현이 된다고 분명히 말하며 상당한 이유를 첨가하여 자기들의 견해를 지지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을 신실하시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믿고 의지한다"라고 하는 것은 "죄의 용서를 믿고 의지한다" 또는 "몸의 부활을 믿고 의지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적절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나는 말에 대한 논쟁을 원하지는 않지만은 바른 용어를 택하고 싶다. 공연히 애매모호한 말을 쓰기보다는 보다 적절한 표현법을 원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마귀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하고 하나님의 원수들도 그것에 못지않은 잔인한 분노로 격분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멸시킬 수는 없으며 그리스도의 피를 아무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지도 못할 것이고 오히려 어느 정도 유익을 주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과 그의 내적 부르심을 생각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을 아시며"(딤후 2:19), 바울의 말과 같이 그들에게 모두 인을 치셨기 때문이다(1:13). 그들은 하나님의 훈장을 달고 있어서 버림받은 자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거대한 군중 속에 보잘 것 없는 작은 무리가 숨어 있고 몇 개의 밀알이 쭉정이 더미 속에 묻혀 있으므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께만 완전히 맡겨야 한다.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이다. 우리가 교회의 연합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 연합된 교회에 분명히 접붙임을 받은 자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선택받은 무리를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에서 모든 다른 지체들과 연합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앞으로 다가 올 기업을 받으리라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를 보편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누어지지 않는 한(고전 1:13참조)이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교회도 둘이나 셋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선택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었으므로(1:22-23 참조) 한 머리를 의존하며 서로가 한 몸이 되고 한 몸에 달린 지체들같이(12:5, 고전 10:17, 12:12,27) 서로 단단히 결합된다(4:16 참조).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또 같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함께 살기 때문이다. 그들을 부르심은 영생을 다 같이 받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한 하나님과 한 그리스도께 참여시키기 위함이다(5:30).

우리 주위에 있는 우울하고 황폐한 광경은 교회의 남은 자가 하나도 없다고 외치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교회를 숨겨두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엘리야에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 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하신다(왕상 19:18).

 

3. 성도가 서로 교통함

 

신조의 이 항목은 또한 어느 정도 외면적인 교회에 적용된다. , 우리는 각각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형제적 일치를 유지하며 교회가 당연히 가져야 할 권위를 교회에 부여하고 말할 필요도 없이 양떼의 일원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따라서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고 덧붙였다. 고대인들은 대개 이 구절을 빼놓았지만 그것은 옳지 않은데, 그 구절은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잘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무엇이든 서로 나눈다는 원칙 아래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소집되었다고 하는 것이 이 구절의 뜻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은혜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로 서로 다르게 나누어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시민 사회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 시민 사회에서는 각 사람의 사유재산이 허락되는데, 이는 사람들 사이의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서 재산 소유권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한 바와 같이(4:32) 신조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공동체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은 바울이 에베소 신자들을 향해서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4:4)고 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바로 그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시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모든 믿는 자들의 머리시라는 것을 참으로 확신한다면 그들은 서로 형제애로 묶어지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들이 받는 은혜를 서로 나누지 않을 수도 없다.

여기서 우리가 이 일에서 어떤 유익을 받게 되는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교회를 믿는 근거는 자기가 교회의 지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튼튼한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따라서 전 세계의 조직이 무너지더라도 교회는 동요되거나 넘어질 수가 없다.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존립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와 똑같이 동요하거나 파멸될 수 없다. 둘째, 교회는 영원불변하시는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지체가 찢기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과 같이 믿는 자들이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교회의 품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진리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끝으로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되는 약속들이 있다.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2:32, 1:17),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46:5). 교회에의 참여는 힘이 강하며 우리를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머물게 한다. "서로 교통함"이란 말 자체에 풍성한 위로가 있다. 주께서 그 지체들에게 주시는 모든 것과 우리의 것은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확신할 때, 신자들이 받는 모든 은혜는 우리의 소망을 굳세게 만든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의 연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런 교회를 꼭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하는 교회를 눈으로 분명히 볼 수는 없을지라도 교회는 신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은 교회를 여전히 존중해야 된다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버림받은 자와 선택받은 자를 구별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할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자신의 소유가 되었으며, 우리도 그 일원이 될 때에는 그와 같은 위대한 은혜를 나눠 받게 된다는 것을 진심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4. 눈에 보이는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는 교회를 논할 생각이므로 교회를 아는 것이 얼마나 유용하고 얼마나 필요한가를 "어머니"라는 단순한 칭호에서 배워야 한다. 이는 이 어머니가 우리를 잉태하고 낳으며 젖을 먹여 기르고 우리가 이 육신을 벗고 천사같이 될 때까지(22:30) 보살피고 지도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으로 들어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연약한 우리는 일평생 교회에서 배우는 자로 지내는 동안 이 학교에서 떠나는 허락을 받을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죄의 용서나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이것은 이사야와(37:32) 요엘이(2:32) 말한 것과 같다. 에스겔도 그들과 같은 뜻으로, 하늘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거절을 당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호적에 기록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13:9). 그와는 반대로 진정한 경건 생활을 향상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등록된다고 한다(56:5, 87:6 참조). 그러므로 시편의 다른 곳에서,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106:4-5)라고 말한다.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은총과 영적 생명의 특별한 증거를 그의 양떼에 제한시킨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언제든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역자들을 멸시하지 말라. 5-6)

 

5. 교회를 통한 교육과 그 가치 및 의무

 

이제 우리는 이 논제에 관한 문제점들을 제시하도록 하자. 바울의 서신에,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고"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썼다(4:10-13).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순간에 그의 백성을 완전하게 만드실 수 있지만 그들이 교회에서 교육을 받음으로써 장성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 하늘 교리를 전파하라고 목자들에게 명령하셨다. 모든 사람을 똑같은 규정 아래 두셔서, 모든 사람이 온유하고 배우겠다는 정신으로 이 일을 위해서 임명된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게 하셨다. 이사야는 이미 오래 전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구별하는 표지를 말했다.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59:2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회의 손을 통하여 주시는 영적 양식을 무시하는 사람이 모두 굶주려 멸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복음만을 도구로 사용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불어넣으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바울의 말과 같다(10:17).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는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데(1:16),(역시 바울이 증거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복음 전파에 의해서 나타내신다(ibid).

이 계획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옛날에 거룩한 회중이 성소 앞에 모이기를 원하셨으며, 거기서 제사장의 입을 통하여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믿음의 일치를 얻게 하시려고 하셨다. 성전을 하나님이 "쉴 곳"(132:14), 지성소를 하나님이 "거하는 곳"(57:15)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곳이라고 한다(80:1). 이런 영광스러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다만 하늘 교리를 전파하는 일이 존경과 사랑과 경의와 위엄을 얻게 하려는 의도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시를 받는 죽을 인간이 나타남으로써 성전과 성소의 가치가 많이 낮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평가할 수 없는 귀한 보물을 질그릇인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고후 4:7) 우리들에게 알리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며 또 이 질서의 창시자이신 하나님께서 그가 만드신 곳에 계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그의 백성이 점이나 요술이나 초혼술이나 기타 미신에 빠지는 것을 금하신 후에(18:10-11, 19:31) 그들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만한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 그들에게는 항상 예언자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18:15 참조). 옛날에 백성을 천사들에게 맡기시지 않고 땅에 교사들을 세워서 천사의 직책을 신실하게 수행하도록 하신 것과 같이 지금도 인간을 사용하여 우리를 가르치고자 하신다. 옛날에 율법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제사장들을 해석자로 삼아 사람들이 율법의 참 뜻을 그들의 입을 통해 배우도록 하신 것과 같이(2:7 참조), 지금도 우리가 율법을 정독하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도울 교사들을 임명하신다.

이 일은 이중으로 유익한데, 한 편으로는 우리가 목사의 말을 하나님자신의 말씀같이 들을 때 이것을 아주 좋은 수단으로 삼아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신다. 또 한 편으로는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하셔서, 스스로 우리를 향하여 우레 같이 말씀하시면 우리가 도망할 것이므로 사람인 해석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참으로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압도될 것을 두려워하며 이와 같은 친근한 교수 방법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비천한 사람들이 교사로 부르심을 받음으로 인해서 말씀의 권위가 손상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기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입과 혀를 성별하시고 그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음성이 들리게 하셨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입으로 선포되는 구원의 교리를 기꺼이 그리고 공손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권능은 외면적인 수단에 매이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평범한 교수 방법에 매이게 하셨다. 광신자들은 이 방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치명적인 올무에 걸린다.

자만심이나 증오심, 경쟁심으로 인하여 단독으로 독서하고 명상하더라도 충분한 유익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그들은 집회를 무시하며 설교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연합의 거룩한 관계를 끊기에 전력을 다하므로 이 신성하지 못한 분리에 대한 당연한 벌을 면하지 못하고 반드시 극악한 오류와 추악한 망상에 빠지게 된다. 우리 사이에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이 풍성해지려면 우리는 이 신앙생활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높이 평가하셨다. 광신자까지 포함해서, 하나님께 대해서 귀를 막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예언자와 경건한 교사들은 불경건한 무리와 어려운 투쟁을 했다. 이 자들은 완고해서 사람의 말과 전도를 통해서 배워야 하는 멍에를 메지 못한다. 이것은 전도를 통해서 우리 위에 비취는 하나님의 얼굴을 지워버리는 것과 같다.

옛날 신자들은 성소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105:4), 이런 명령이 율법에서 자주 반복된 것은(27:8, 100:2, 105:4, 대상 16:11, 대하 7:14) 옛 사람들은 율법의 교훈과 예언자들의 충고를 하나님의 살아 있는 형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이것은 바울이 자기의 복음 전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비췬다고 말한 것과 같다(고후 4:6).

더욱이 가증한 것은 배교자들의 태도다. 그들은 교회들을 분열시키는데 온힘을 기울이며, 결과적으로는 양들을 우리에서 몰아내서 이리들의 입에 던진다. 우리는 이미 인용한 바울의 태도를 지켜야한다.

, 교회는 오직 외면적인 복음 선포에 의해서만 성장하며 성도들은 한 결속에 의해서만 결합된다. 그리고 성도들은 배우고 증진함으로써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질서를 지킨다는 것이다(4:12 참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옛날 율법 아래에서 모든 신자가 성소 앞에 모이라는 명령을 받은 목적은 특히 여기에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신 곳을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라고 부른다(20:24 참조). 분명히 그는 경건에 대한 교훈이 없는 곳은 무익하다고 가르친다. 확실히 다윗도 그와 같은 이유로 원수들의 포학과 잔인성 때문에 하나님의 장막에 가지 못하는 것을 애통해 한다(84:2-3). 이런 불만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다른 즐거움만 남아 있으면 성전에 가지 못하는 것쯤은 매우 하찮은 일이며 즐거움에 손실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윗은 속을 태우며, 이 한 가지 곤란과 불안과 슬픔 때문에 괴로워 거의 죽을 지경이라고 탄식한다. 분명히 이것은 신자들에게는 공중 예배보다 더 큰 도움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중 예배에 의해서 자기의 백성을 단계적으로 향상시키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의 교훈을 거울로 삼아 그 속에 자신을 족장들에게 나타내시며 영적으로 알리려고 하신 것을 깨달아야한다. 따라서 성전을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42:2 참조), 미신을 없애기 위해서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도 한다(132:7, 99:5, 대상 28:2).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머리를 앙모할 때 거기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일치는 참으로 아름다울 것이다(4:13 참조). 이 원칙을 떠나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위해 지은 신전은 모두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모독할 뿐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처럼 저속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그들과 같은 모독 행위를 저질렀다. 스데반은 이사야의 말을 빌려,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라고 그들을 책망했다(7:48, 66:1-2). 하나님만이 그의 말씀으로 성전들이 자신에게 올바르게 사용되도록 성별하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지 않고 경솔하게 일을 시작한다면 기이한 조각품이 이 잘못된 출발에 달라붙어 한없는 해독을 퍼뜨리게 된다.

아하수에로(XerXes, 크세록세스) 왕이 현자들의 권면에 따라 경솔하게 희랍에 있는 모든 신전을 불사르거나 파괴한 것은 어디든지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신들이 벽과 지붕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내려오시며, 그러면서도 우리와 자리를 바꾸거나 우리를 땅에 속한 수단에 국한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실 능력이 없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속한 수단으로 무리를 마치 병거에 싣듯이 해서 그의 하늘 영광에 올리신다. 곧 무한하여 모든 것을 충만케 하며 하늘보다도 더 높은 하늘 영광에 올리시는 것이다.

 

6. 목회의 의미와 한도

 

우리 시대에 들어서 목회의 효력에 대한 큰 논쟁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의 위엄을 대단히 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죽을 인간들에게 옮기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목사나 교사들이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통찰하여 어두운 생각과 완고한 마음을 시정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논쟁을 바르게 평가해야 한다.

양쪽의 쟁점들은 두 가지 성경 구절들을 분명하게 지적함으로써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의 주축자로서 전도에 성령을 결합시키시며 전도의 유익을 약속하신다. 또 어떤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외면적인 보조수단을 구별하시며 신앙의 출발점과 그 모든 과정을 자신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하신다.

1. 말라기에 의하면 제 2 엘리야의 임무는 사람들의 생각을 밝혀주며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하는 것이었다(1:17, 4:5-6).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수고한 열매를 얻도록 그들을 보내신다고 언급하신다(15:16). 베드로는 이 열매를 간단히 정의해서, 우리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라고 한다(벧전 1:23).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으로써" 고린도 신자들을 "낳았으며"(고전 4:15) 그가 사도됨을 그들이 "인친다"고 자랑한다(고전 9:2). 그뿐 아니라, 자기는 의문의 일꾼이 아니며 말로 사람들의 귀에 호소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자기의 가르침이 무익하지 않게 하노라고 한다(고후 3:6). 이 같은 뜻으로 그는 다른 곳에서, 자기의 전도함은 지혜의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능력으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고전 2:4). 또 갈라디아 사람들은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3:2). 간단히 말하면, 바울은 여러 구절에서 자기를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할뿐만 아니라 자기는 구원을 나누어주는 일을 하노라고 한다(고전 3:9이하).

2. 이 모든 말을 하면서도 바울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티끌만큼도 자기의 공적을 주장하지 않았다.이 점을 그는 다른데서 간략하게 설명한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1:29)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살전 3:5). 또 이처럼 덧붙인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2:8).

그뿐 아니라 다른 구절들을 보게 되면 그가 사역자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마찬가지로,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확실히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지성을 조명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자기가 하는 일이라고 하시며, 사람이 이 두 가지 일의 일부라도 자기의 공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경고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이 임명하신 교역자들 앞에 배우겠다는 정신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교육 방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당연하며 이 온건한 멍에를 신자들에게 지우신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그 결과에 의해서 알게 될 것이다.

 

(보이는 교회 :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과 교회의 표식. 7-9)

 

7.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

 

우리가 알 수 있는, 보이는 교회를 어떻게 판단할 것이냐 하는 것은 앞에서 논한 것으로 이미 명백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성경에는 두 가지 교회가 있다고 말했다. 성경에서 "교회"라고 하는 말은 어떤 때에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이 교회에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과 성령의 성화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지체가 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의 교회는 현재 지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천지 창조 이후 지금까지 선택받은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그러나 "교회"라는 이름은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고백하는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때가 많다.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며,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교리와 사랑에 의한 우리의 연합을 증거하고, 주의 말씀 안에서 일치하며,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성직을 보존한다. 이런 교회 안에는 이름과 외형만 있고 그리스도는 전혀 없는 위선자들이 많이 섞여 있다. 야심과 탐욕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 또한 중상하는 사람들이 심히 많고 아주 불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얼마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잠시 허용되는 것은 자격이 있는 재판 기관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기 불가능하거나 강력한 규율이 언제나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교회는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눈에만 보인다고 믿어야 한다. 그와 같이 우리는 나중 말한 것, , 사람들과 관련한 "교회"라고 하는 것을 중히 여기며 그 교회와의 교통을 계속해야 한다.

 

8. 우리의 판단의 한계

 

따라서 주께서는 분명한 표시와 증거로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을 지적하셨다. 이미 바울의 말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특권이다(딤후 2:19). 이것은 사람들의 경솔한 판단을 억제하시려는 조치였다. , 평상시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하나님의 은밀한 판단은 우리의 이해력이 도저히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완전히 멸망해서 아무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부름을 받아 바른 길로 돌아오며, 누구보다도 굳건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넘어 진다. 그러므로(어거스틴이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따라 "밖에도 양이 많고 안에도 이리가 많다" 주께서는 주를 모르고 자신도 모르는 자들을 아시며 표를 해 두셨다. 주님의 눈만이 주의 휘장을 달고 다니는 자들 가운데서 진정으로 거룩한 사람들과 구원의 종점에 이르기까지(24:13) 참고 견딜 수 있는 자들을 알아보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께서는 누가 그의 자녀로 간주될 것인지를 우리가 아는 것이 다소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 주께서는 자신을 우리의 능력에 적응시켜 주셨다. 그리고 믿음의 확신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그 대신 사랑의 판단으로 대치하셨으며, 그것으로 우리는 믿음의 고백과 삶의 모범과 성례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와 더불어 같은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을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몸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더욱 분명한 표식에 의해서 그 지식을 뚜렷하게 하셨다.

 

9. 교회의 표식과 우리가 이를 판단에 적용하는 것에 대하여

 

여기서 교회의 얼굴이 나타나며 우리의 눈에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며 또 듣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를 지킬 때에 거기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2:20 참조).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고 하신 주의 약속은 반드시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요점을 명백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보편적 교회는 모든 나라에서 모은 큰 무리다. 그 보편적 교회는 나누어져 여러 곳에 퍼져있지만 거룩한 교리의 한 진리에서 서로 일치하며 같은 종교 생활의 유대로 연합되었다. 이와 같이 보편적 교회 아래 개교회가 포함되며, 그 개교회들은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여러 도시와 촌락에 설립되어 각각 교회라는 이름과 권위를 정당하게 가진다. 각 개인이 신앙 고백에 의해서 이런 개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될 때, 비록 그들이 보편적 교회를 알지 못할지라도 공적인 재판에 의해서 출교되지 않는 이상 그들은 보편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개인과 개교회에 관한 판단의 기준은 조금 다르다. 경건한 무리에 참가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그들을 용납하고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는 교회의 전반적 합의에 의해서 우리는 그들을 형제로 대접하고 신자로 인정해야 할 경우가 있다. 우리는 표결로 그들을 교회의 회원이라고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그들이 차지한 자리가 합법적으로 그들에게서 빼앗기기까지는 그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회원 전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달라야 한다. 한 단체로서 말씀을 선포하고 공경하며 성례를 집행하고 있다면 물론 그것은 교회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런 일들에는 결실이 있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마귀들이 분열시키려고 애써 온 보편적 교회의 통일을 유지한다. 동시에 우리는 각 지방의 필요에 따라 설립된 합법적 회중에게서 그 권위를 빼앗지도 않는다.

 

(이런 표식을 지니고 있는 교회는 아무리 결함이 많아도 버려서는 안 된다 : 분열의 죄. 10-16)

 

10. 교회의 표식과 권위

 

말씀을 선포하며 성례를 지키는 것을 우리는 교회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표식으로 결정했다. 이 일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반드시 결실이 있으며 또 반드시 성공을 거둔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마다 즉시 결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아들이고 언제나 말씀이 거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효과가 나타난다. 어쨌든, 복음 선포에 경건하게 귀를 기울이고 성례를 경시하지 않는 곳에서는 우선 교회의 형태가 보이며, 그것은 속임수도 아니요 모호한 것도 아니다. 아무도 그 권위를 멸시하거나 경고를 무시하거나 또 그 지도를 반대하거나 그 징계를 경시해서도 안 된다. 그 교리를 버리고 그 단결을 파괴하는 것은 더욱 용인할 수 없다. 주께서는 그의 교회의 교통을 심히 중요시하시므로, 교회가 말씀과 성례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떠나는 교만한 사람을 배반자와 배교자로 여기신다. 주께서는 교회의 권위를 존중히 여기시므로 그것이 침범을 당할 때에는 자기의 권위가 떨어지게 된 것으로 믿으신다.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하나님의 집"이라고(딤전3:15) 부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바울이 사용하는 이런 말의 뜻은,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진리의 충실한 파수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봉사와 수고에 의해서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기를 원하셨고, 영적 양식과 구원에 유익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스스로 한 가족의 아버지이심을 보이고자 하셨다. 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자기의 신부와(5:27) "그의 몸이니‥‥‥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으로(1:23) 택하여 세우셨다고 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평범한 찬사가 아니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이러한 악한 분리를 회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전복시키려고 전력을 다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벼락을 맞아 분쇄되는 것이 당연하다. 또 우리가 모독적인 불충으로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와 맺어주신 혼인을(5:23-32 참조) 피한다면 그보다 더 무서운 죄악은 상상할 수도 없다.

 

11. 표식이 가지는 신성한 효험

 

그러므로 우리는 이 표식들을 깊이 명심해서 주의 뜻에 따라 존중해야 한다. 두 표식 전부를 혹은 그중 하나를 제거하고 말살하려고 사탄은 최대의 음모를 꾸민다. 때때로 그들은 교회의 진정하고 참된 특색을 없애기 위해서 이 표식들을 없애버리며 파괴하려고 한다. 또 어떤 때에는 이 표식들을 대대적으로 멸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교회를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떠나게 만들려고 한다. 사탄은 그 간계에 의해서 어떤 시대에는 말씀에 대한 순수한 선포를 없애 버렸으며, 지금도 변함없는 악의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고 교회의 발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성직을(4:12) 타파하려고 애쓴다. 주께서 주의 교회의 특색을 충분히 나타낸다고 생각하신 표식들이 보일 때 그런 집단에서 탈퇴하려는 유혹을 받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위험한 아니 치명적인 유혹인가? 우리는 두 가지 방면으로 깊이 유의해야 한다. "교회"라는 이름에 속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를 자칭하는 모든 집단에 이 표준을 시금석으로 적용해야 한다. 만일 말씀과 성례에서 주께서 인정하신 규칙을 지니고 있다면 그 집단은 거짓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집단이 교회에 바칠 존경을 확신있게 드려야 한다. 그러나 말씀과 성례가 없으면서 교회를 자칭한다면, 우리는 반대 방면에 대해 경솔과 교만을 피해야 되는 것과 같이 여기서도 세밀한 경계심으로 이런 거짓에 대처해야 한다.

 

12. 표식에 주의를 기울이면 경솔한 분리를 막을 수 있다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하고 성례를 순수하게 집행한다면 이런 표식이 있는 단체를 교회로 인정해도 좋다는 충분한 보장이 된다. 이 원칙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는데, 이 표식을 보존하고 있는 한 다른 결점이 많더라도 우리는 그 공동체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에 어떤 과오가 끼어들 수도 있지만 이런 사태가 우리를 교회와의 교통에서 멀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진정한 교리의 모든 조항이 똑같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모든 사람이 종교의 진정한 원칙으로 확신하고 의심을 하지 말아야 한다. ,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달렸다는 것 등이다. 교회들 사이에는 다른 신조들에 대한 논쟁이 있으나 그것이 신앙에 의한 연합을 깨뜨리지는 않는다. 가령 한 교회는(경쟁심으로 날뛰거나 자기 의견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육체를 떠난 영혼은 곧 하늘로 날아간다고 주장하고 다른 교회는 어느 곳이라고 단정하지는 못하면서도 주를 향하여 사는 것으로 확신한다고 할 때, 어느 교회가 사도가 말한 이 한 점에서 생각이 일치하지 않을 것인가? ,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3:15).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바울은 충분히 알려 주지 않는가? 맨 먼저, 우리는 모든 점에서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무지로 인해서 마음이 다소 어두워졌으므로, 우리는 어떤 교회도 남겨두지 않거나 아니면 신앙생활의 본질에 손상이 없고 구원도 상실하지 않을 문제들에 있어서는 그릇된 생각을 용서하거나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극히 적은 오류라도 그것을 지지하려는 것이 아니며, 아첨과 묵계로 조장하려는 생각도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소한 의견 충돌 때문에 경솔하게 교회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건 생활을 건전하게 유지하며 성례전의 집행을 주께서 제정하신 대로 지키는 교리를 안전하고 순수하게 보존하는 곳은 교회뿐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시정하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이 이 점에 해당된다.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전 14:30). 이것을 보면 각 교인은 그 받은 은혜의 정도에 따라 회중의 덕을 세울 책임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책임을 이행할 때에 예절과 질서를 지켜야 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교회의 교통을 버려도 안 되고 교회 안에 머무를 때에 교회의 평화와 합법적 권장을 깨뜨려도 안 된다.

 

13. 교회 내의 물의가 생긴다고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인생의 결함을 참는 점에서 우리는 보다 깊은 사려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내려가는 길이 매우 미끄럽고 사탄이 비상수단으로 매복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는 완전히 성결하다는 잘못된 신념으로, 이미 낙원의 천사라도 된 양 인간의 본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있었다. 옛날 카타리(Cathari)파가 그러했고 도나투스(Donatists)파도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일부의 재세례파가 다른 사람들보다 고상한 체한다.

어떤 사람들은 광적인 자만심보다 의에 대한 그릇된 열성 때문에 죄를 짓는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생활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은 즉시 거기에는 교회가 없다고 단정한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불평이며, 이 극도로 비참한 시대에 이런 불평이 생긴 원인을 우리 편에서 너무도 많이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의 저주받을 게으름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주께서는 반드시 이 게으름을 벌하실 것이며 이미 무거운 채찍으로 징벌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므로 죄악된 자포자기와 방탕으로 약해진 양심들에게 상처를 입힌 우리는 어떻게 화를 면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말한 사람들은 자기의 불쾌한 생각을 억제할 줄 모르는 점에서 역시 죄를 짓게 된다. 주께서는 인자하라고 요구하시는데, 그들은 인자한 생각을 버리고 완전히 극단적인 엄격주의에 열중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순결하고 성실한 생활이 없는 곳에는 교회도 없다는 생각으로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합법적인 교회를 떠난다. 그들은 악인의 무리에서 떠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거룩하다고(5:26)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에는 악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비유를 들어보아야 한다. 교회는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아서, 물가로 끌어낼 때까지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지 않는다(13:47-48). 교회는 좋은 씨를 뿌린 밭과 같아서, 원수의 속임수로 가라지도 뿌려졌으나 추수 때가 되어 타작마당에 모아들일 때까지 뽑지 않고 버려둔다(13:24-30). 교회는 곡식을 모아 놓은 타작마당과 같아서, 키로 알곡을 가려 곡간에 들일 때까지 알곡은 쭉정이에 덮여 있게 된다(3:12). 교회는 이런 재난 밑에서 수고하게 되리라고심판의 날까지 악인이 섞여 있어서 큰 짐이 되리라고 주께서 언급하신다면 그들이 아무 오점도 없는 교회를 찾는 것은 헛된 노력이다.

 

14. 문제가 많은 교회에 대한 바울의 태도

 

그러나 그들은 죄악이 두루 창궐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외친다. 여기서도 사도의 의견으로 그들에게 대답할까 한다. 고린도 신자들 가운데는 타락한 사람이 적지 않았으며, 사실 거의 회중 전체가 감염되었다. 한 가지 죄가 아니라 아주 많았으며, 그것도 경미한 과실 정도가 아닌 무서운 비행이었다. 도덕적인 것과 교리적인 면에까지 부패가 있었다. 성령의 도구요 그의 증거에 의해서 교회의 존망이 결정될 저 거룩한 사도 바울은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그는 이런 교회에서는 손을 떼라고 하는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들을 몰아내는가? 최종적인 저주의 벼락으로 그들을 때려 부수는가? 그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의 공동체라고 인정하며 선언한다(고전 1:2). 고린도 신자들 사이에는 분쟁과 분열과 시기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으며(고전 1:11, 3:3, 5:1, 6:7, 9:1이하) 언쟁과 탐욕이 함께 싹트고 있었고 이교도들조차 미워할 악행을 버젓이 시인하고 있었다(고전 5:1). 아버지처럼 존경해야 할 바울의 명예를 무례하게 깎아 내리고 있었으며 어떤 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조롱하여 복음 전체까지 부수려고 하였다(고전 15:12).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재능은 야심에 이용되었고 사람을 돕지 못했다(고전 13:5 참조). 여러 가지 일을 예절이나 질서 없이 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선포와 성례 집행은 반대 없이 계속했으므로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교회가 존속했다. 그러면 누가 감히 이런 비행의 십분지 일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교회"라는 명칭을 빼앗을 것인가? 현대 교회들을 반대해서 야비하게 날뛰는 사람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떻게 대접했겠는가? 그들은 거의 복음을 버린 자들이었지만 바울은 그들 사이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1:2).

 

15. 사악한 자들과의 교제

 

그들과 또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이 파렴치한 사람을 교회에서 물리치지 않았다고 해서 엄중하게 책망했으며(고전 5:2), 다음에 일반적 원칙으로서 파렴치한 생활을 하는 사람과는 식사를 하는 것조차 잘못이라고 단정한다고(고전 5:11) 항의한다. 여기서 그들은 "보통 식사를 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데 주의 만찬을 나누는 것이 어떻게 허락되느냐"고 외친다.

만일 개와 돼지들이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것이 큰 수치란 것을 나는 인정한다. 만일 그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 팔린다면 그것은 더욱 큰 수치일 것이다. 물론 교회의 질서가 잘 잡혀 있다면 교회 안에 있는 악인들을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합당한 자와 합당치 못한 자들을 무분별하게 저 거룩한 잔치 자리에 앉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목사라고 해서 경계심이 항상 강렬한 것이 아니며 때로는 보다 관대하거나 또는 엄격하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못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드러난 악인들도 성도의 무리에서 반드시 제거되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이런 사태는 바울이 고린도 서신에서 날카롭게 책망했으므로 나는 그것이 과오임을 인정하며 변명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교회가 의무를 게을리 하더라도 각 개인에게 즉시 떠날 결심을 할 권리는 없다. 악인들과 친밀히 지내지 않고 일부러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하는 것이 경건한 사람의 의무인 것을 나는 물론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들과 친밀하기를 싫어하는 것과 그들이 밉다고 해서 교회와의 친교를 거부하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악인들과 함께 주의 떡을 나누는 것을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들은 바울보다 훨씬 엄격하다. 바울은 성찬을 거룩하고 깨끗하게 지키라고 권고할 때, 각각 서로 검토하라든지 또는 전교회를 검토하라고 하지 않고 각 개인에게 자기를 살피라고 요구한다(고전 11:28). 만일 합당치 못한 사람과 함께 성찬을 받는 것이 불가하다면 회중 가운데 우리를 더럽힐 불결한 사람이 있는지를 조사하라고 바울은 틀림없이 명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각각 자기 자신만을 살피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는 합당치 못한 사람이 끼어 있더라도 우리에게 아무 해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사도가 그 다음에 한 말은 이런 뜻과 부합한다.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7-29).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라고 하지 않고 "자기에게"라고 한다. 이것은 옳은 말이다. 누가 용납되고 누가 배제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위는 개인들이 가져서는 안 된다. 이 판단은 교회 전체에 속한 것이며 합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는 행사할 수 없다. 이 점은 후에 자세히 말하겠다. 그러므로 합당치 못한 어떤 개인의 성찬 참가를 자기가 금지할 수 없고 또 금지해서도 안 된다. 그 사람으로 인해서 자기가 더럽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악한 생각일 것이다.

 

16. 완벽에 대한 그릇된 주장은 왜곡된 의견에서 나온 것이다

 

의에 대한 잘못된 열성 때문에 착한 사람들도 이런 유혹에 빠지는 일이 있지만, 이런 신경과민은 진정한 거룩과 거룩에 대한 진정한 열성에서 생기기보다는 자만심과 교만 그리고 거룩에 대한 그릇된 생각에서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대담하게 교회 탈퇴를 선동하며 기수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모든 사람을 경멸하며 자기가 제일 잘났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는 것 외의 별다른 이유가 없다. 어거스틴은 현명하고 적절하게 말했다. "교회의 규율을 경건하게 유지하려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4:3) 항상 유의해야 한다. 이 상호 관용의 교훈을 지키라고 사도는 명령했다. 지키지 않는다면 그 시정책으로 처벌을 하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며 따라서 시정책이 아니다. 이 악의 아들들은 다른 사람들의 불의를 미워한다기 보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세우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좋아하는 평범하고 약한 사람들을 끌고 가거나 적어도 분열시키려고 한다. 자만심에 부풀고 미친 듯이 완고하며 거짓말로 중상하고 음모로 문제를 일으키는 이 악한 무리는 강직, 엄격한 체해서 그들에게 진리의 광명이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없게 한다. 성경은 형제들의 죄악을 시정하되, 더욱 온유하고 조심스럽게 대하며 성실한 사랑과 평화로운 단결을 유지하라고 명령한다. 그들은 이 원칙을 모독적인 분파 행위로 더럽히며, 형제들을 공동체에서 제거하는 구실로 삼는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경건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시정할 수 있는 것은 인자하게 시정하라. 시정할 수 없는 것은 끈기 있게 참으며 사랑으로 애통하라. 하나님께서 시정하시거나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으며 쭉정이를 키질하실 때까지 기다리라"(13:40, 3:12, 3:17).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이 갑옷을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힘차고 용감하게 의를 옹호하는 듯 하면서도 유일한 의의 나라인 하늘나라를 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의 교통을 이 눈에 보이는 공동체 안에서 유지하시기를 원하셨으므로, 악인들이 밉다고 해서 이 공동체의 표지를 깨뜨리는 사람은 성도의 교통에서 탈락하게 되는 길을 걷게 된다.

그들은 큰 무리 가운데 주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거룩하며 순진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그들의 눈에는 뜨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또 그들은 병든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도 자기의 과오를 결코 기뻐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주를 깊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재삼 분발하며 더 고결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지극히 성결한 사람도 심히 유감스러운 과오를 범하는 때가 있으므로 사람을 한 가지 행동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말씀을 선포하며 거룩한 신비에 참가하는 것은 이 모든 권능이 일부 불경건한 사람들의 죄로 인해서 허비될 가능성보다 교회의 집회를 위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끝으로, 그들은 진정한 교회를 평가하는 데는 사람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가 완전치 못한 거룩으로 분열의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고 도리어 교회 내에서 죄의 용서를 실천할 기회를 준다. 17-22)

 

17.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

 

또한 그들은 교회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아무 근거 없는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므로 교회는 특히 어떤 의미에서 거룩한가를 검토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점에서 완전하지 않은 한 교회라고 인정하지 않게 되고 결국 교회는 하나도 남기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은 옳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5:25-27). 그러나 주께서 주름 잡힌 것을 펴며 티를 씻기 위해서 매일 수고하시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는 아직 완전히 거룩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매일 전진하면서도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 하루하루 전진하지만 아직은 거룩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다른 곳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하겠다.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3:17),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35:8, 52:1 참조)라고 예언하였다. 모든 교회 회원이 흠이 없다는 뜻으로 이 예언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과 완전한 순결을 열심히 갈망하기 때문에,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아직 완전히 성취하지 못한 순결을 그들에게 인정하신다. 또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성화의 증거를 보기 어려운 때가 많을지라도 우리는 천지 창조 이후로 주의 교회가 없는 때가 없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시대가 마지막으로 완성될 때까지도 주의 교회가 없는 때는 없을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류 전체가 처음부터 부패하고 타락했지만 주께서는 이 오염된 덩어리 속에서 어떤 그릇은 귀히 쓰도록 항상 성별하셔서(9:23이하) 주의 자비를 받지 않는 시대가 없도록 하신다.

이 일은 확실한 약속으로 다짐하셨다. 예컨데,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89:3-4),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132:13-14) 그리고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내가 말하노라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31:35-36) 등이 그것이다.

 

18. 예언자들의 실례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모든 예언자들이 여기에 대한 실례를 제공한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요엘과 하박국이 기술한 예루살렘 교회의 참상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었다. 백성과 관리와 제사장들이 모두 심하게 부패하자 이사야는 주저치 않고 예루살렘을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고 했다(1:10). 종교는 멸시를 당하며 정말로 부패하기도 했다. 도덕적으로는 절도, 강도, 배신, 살륙, 기타 악행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었을지라도 예언자들은 자기들의 교회를 새로 세우지도 않았고 새로운 제단을 쌓고 따로 제물을 바치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 사이에 말씀을 두시고 그들 사이에 의식을 제정하셔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셨다고 예언자들은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악인들이 모인 한가운데서 깨끗한 두 손을 들어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이런 의식들에 의해서 자기가 더럽혀진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그런 곳에 끌려가기 보다는 차라리 백 번 죽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분파를 만들지 않은 것은 오직 연합을 열망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크고 많은 비행을 저질렀어도 거룩한 예언자들이 교회에서 자신들을 분리하는 것을 불가한 것으로 생각했다면 일부 사람들의 도덕 생활이 우리의 표준에 맞지 않거나 심지어 기독교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이유만으로 우리가 감히 교회의 교통에서 즉시 탈퇴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요구일 것이다.

 

19.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보여준 예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에는 세상 형편이 어떠했는가? 그때에도 바리새인이 말할 수 없이 불경건했고 일반 사람들이 방종한 생활을 했지만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일반 백성과 함께 같은 의식에 참여하며 같은 성전에 모여 공중 예배를 실천했다. 깨끗한 양심으로 같은 의식에 참가하는 사람은 악인들과 함께 있다고 해도 감염되지 않는다고 믿지 않았다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만일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보고도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적어도 그리스도의 권위에 굴복하라. 키프리아누스는 적절한 말을 했다.

"교회 안에 가라지나 불결한 그릇들이 있는 것 같더라도 우리 편에서 교회를 떠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알곡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금그릇과 은그릇이 되도록 전력을 다해야 한다. 질그릇을 부수는 것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며 주께는 철장도 맡겨져 있다(2:9, 2:27). 아무도 하나님 아들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며, 쭉정이를 키질하고 짚을 타작하거나(3:12, 3:17 참조) 인간적 판단으로 모든 가라지를 갈라내면 충분하다고(13:38-41 참조) 하지 말라. 사악하고 미친 생각은 이런 완고하고 불경건하고 무례한 행동을 취하므로 참으로 오만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확립해야 한다. 첫째,(하나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집행되는) 교회의 보이는 교통에서 의식적으로 탈퇴하는 사람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둘째, 소수의 죄악이나 다수의 죄악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교회 의식에서 우리가 신앙을 적합한 방법으로 고백하지 못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목사나 또는 평신도인 다른 개인이 무가치하다고 해서 경건한 양심이 상처를 입지는 않는다. 성례를 불결한 사람들이 집례한다 해도 거룩하고 고결한 사람에게는 여전히 깨끗하고 유익한 것이다.

 

20. 죄의 용서받음과 교회

 

그들의 심술궂음과 교만은 한도를 넘어서, 사소한 결점이라도 있을 경우에는 교회라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사실 고결한 교사들이 신자들에게 향상되어야 한다고 권고하며 일평생 죄 짐을 지고 신음하면서 용서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가르칠 때에, 그들은 그런 교사들을 비난한다. 사람들은 이런 방법에 의해 완전성에서 멀어지게 된다고 우리의 논적들은 항의한다.

우리가 사람들을 향해서 완전하게 되라고 권고할 때, 우리의 노력이 게으르거나 열성이 없어서는 안되며 노력을 포기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지상에서 경주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 자신이 완전하게 되었다고 믿는다면 이것은 우리의 마귀적인 공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교회를 말한 다음에 죄의 용서를 말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예언서를 보면, 교회 안에 있는 백성과 권속만이 죄의 용서를 얻는다(33:14-24). 그러므로 우선 하늘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일이 있어야 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그곳으로 오는 모든 사람의 불의를 도말되게 해야 한다. 내가 하늘 예루살렘을 우선 건설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죄의 용서가 없는 교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는 성도의 공동체에서만 자비를 베푸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에 들어가는 첫 어귀는 죄의 용서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언약도 없고 하나님과의 결속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그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편안히 눕게 하리라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2:18-19)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자신의 자비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시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다. 다른 곳에서도 주께서는 진노로 흩으신 백성을 다시 모으셨다고 선포하시면서,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라고 말씀하신다(33:8) 따라서 우리는 세례라는 표징에 의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처음으로 가입을 허락 받으며, 세례는 우리가 우선 하나님의 인애로 우리의 누추함을 씻어 버리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가족에 가입하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21. 교회의 일원들에게는 용서가 계속된다

 

주께서는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우리를 단번에 교회 안에 받아들이고 양자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교회 안에서 보존하며 보호하신다. 아무 소용도 없을 용서라면 그런 용서를 제공하시는 의미가 무엇인가? 경건한 사람들은 주의 자비를 한 번만 주신다.

그것은 무익하고 허망하리라는 것을 모두 자신들의 경험으로 아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여러 가지 약점이 일평생 붙어 다닌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체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특히 자신의 가족들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분명히 공연한 일이 아니다. 화해의 소식을 매일 그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하시는 것도 공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일평생 죄의 흔적을 가지고 다니므로, 우리 죄를 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우리를 붙들어 주지 않는 다면 우리는 일순간이라도 교회 안에 머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영원한 구원을 주시려고 그 자녀들을 부르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든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라는 몸에 접붙임을 받은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관용과 중재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에 의한 성화에 의해서 용서를 받았고 또 매일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굳게 믿어야 한다.

 

22. 열쇠의 힘

 

이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려고 교회의 열쇠를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라고 명령하시고 또 그 권한을 주신 것은(16:19, 18:18, 20:23) 믿지 않다가 회심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에게 사도들이 그 죄를 용서해 주기를 원하셨다기 보다는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항상 이 직책을 다하라는 뜻이었다. 바울이 교회의 교역자들에게 화해의사명이 맡겨졌다고 하며 그 직책에 의해서 그들에게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반복해서 권면하도록 한 것은(고후 5:18,20) 이 점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교통에서 우리의 죄는 교역자들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용서된다. , 이 직책을 받은 장로들이나 감독들이 복음의 약속으로 신자들의 양 팀에 힘을 주어 용서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혹은 공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이 일을 실천한다. 개인적으로 위로를 받을 필요가 있는 약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또 바울은 공중 앞에서 전도할 때나 각 가정에서나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의 신앙을 증거하며 각 사람에게 구원의 교리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충고했노라고 말한다(20:20-21).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세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무리 남달리 거룩하다고 하더라도 죽을 몸을 쓰고 사는 이상 여전히 죄의 용서를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둘째, 이 은혜는 교회에 속한 것이어서 교회와의 교통을 유지하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다. 셋째, 이 은혜는 교회의 사역자들과 목사들을 통해서 혹은 복음 선포로 혹은 성례 집행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열쇠의 권한은 주로 여기에서 두드러지며 주께서는 이 권한을 신자들의 단체에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각각 주께서 용서를 두신 곳에서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공적 화해는 권징과 관계된 것이므로 적당한 곳에서 논하겠다.

 

(신도들의 공동사회 내에서 용서받는 사례를 설명해 주는 서건들. 23-29)

 

23. 모든 신도들은 자기의 죄가 용서되기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말한 광신자들은 교회에서 구원의 유일한 닻을 빼앗으려 하므로 우리는 이 유해한 견해에 대항하도록 양심의 무장을 더욱 튼튼해야 한다. 과거에는 노바티아누스(Novatianists)파가 이런 사상으로 교회를 흔들었으며, 지금은(노바티아누스파와 별로 다름이 없는) 일부의 재세례파가 이같은 광증에 빠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례로 거듭나서 아무 육적인 오점도 없는 순결하고 천사 같은 생활을 하는 것같이 말한다. 세례를 받은 후에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냉혹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한다. 요컨대, 그들은 은혜를 받은 후에 타락하는 사람에게는 용서받을 소망이 없다고 하며 처음 중생했을 때 받은 용서 이외의 다른 용서를 용납하지 않는다.

비록 이 오류를 성경보다 명백하게 반박한 것은 없지만(노바티아누스를 따랐던 자들이 많았던 것과 같이) 이 자들로 하여금 이 오류를 믿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우리는 그들이 자기와 남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광분하고 있는가를 간단히 알려 주려고 한다.

첫째, 주의 명령에 따라 성도들은 매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6:12) 반복해서 기도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의심 없이 고백한다. 또 주께서는 자신이 주실 것만을 구하라고 명령하셨으므로 그들의 기도는 허사가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확언하시지만 이 죄의 사면에는 특별한 약속으로 인을 치셨다. 우리는 무엇을 더 원하는가? 주께서는 죄를 고백하라고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며 또한 일평생 계속 고백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면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하거나 또는 죄를 범하면 은혜를 전연 닫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주께서는 우리가 누구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시는가, 우리의 형제들이 아닌가?(18:21-22)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를 그의 자비를 본받으라는 뜻이 아닌가? 그러므로 주께서는 한두 번만 용서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놀라 주를 부를 때마다 용서하신다.

 

24. 옛 언약 하에서 하나님이 죄 많은 신자들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 : 율법

 

교회의 초창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족장들이 자기 동생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을 때(37:18) 그들은 이미 할례를 받았고 선택을 받아 언약에 참여했으며 근면한 조상들에게서 의와 정직에 대한 교훈도 받고 있었다. 그들이 범하려고 한 죄는 가장 타락한 도적들조차 꺼려할 것이었다. 나중에는 유다의 말을 듣고 마음이 누그러져서 동생을 팔았지만(37:28) 이 역시 참을 수 없는 잔악한 행위였다. 시온과 레위는 그들의 누이동생의 일로 세겜 사람들에게 불법전인 복수를 하여(34:25) 자기 아버지에게 정죄를 받았다. 르우벤은 추악한 정욕으로 자기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다(35:22).

유다는 음행을 즐기고자 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며느리와 동침하였다(38: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택된 백성 사이에서 추방되기는커녕 족장으로 세움을 받았다.

다윗은 어떠했는가? 공의를 실시하는 최고 통치자로 있었을 때에 그는 무고한 피를 흘리면서까지 자기의 맹목적인 정욕을 만족시키고자 하였다(삼하 11:4,15). 그는 이미 중생한 사람이었고 중생한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칭찬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이방인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이런 죄를 범했고 또 용서를 받았다(삼하 12:13).(개인들의 예는 이만 하고) 율법과 예언서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가 약속될 때마다 여호와께서는 백성의 죄를 용서하실 용의가 있다는 것을 보이신다. 배교한 이 백성이 주께로 돌아설 때 모세는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는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너의 쫓겨난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30:3-4).

 

25. 옛 언약 하에서 하나님이 죄 많은 신도들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 : 예언서

 

그러나 나는 끝없이 예를 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무수한 죄로 뒤덮인 백성에 대한 이런 자비의 약속은 예언서에도 가득하다. 반역보다 중한 죄는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과 교회와의 분열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이 죄를 이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가령 사람이 그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본부가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않겠느냐 하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3:1).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 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3:12).

죄인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고 도리어 마음을 돌이켜 사는 것을 바라노라고 언급하시는 이에게 다른 감정이 있을 리가 없다(18:23,32, 33:11).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했을 때 그는 성전에서 죄의 용서를 빌며 기도의 응답이 있기를 원했다. 그는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성과‥‥‥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왕상 8:46-50)라고 기원했다. 그리고 주께서 죄를 위한 제물을 매일 드리도록 율법에 제정하신 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28:3이하). 주의 백성이 항상 죄의 질병으로 괴로워할 것을 예상하시지 않았다면 이런 치료 방도를 정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26. 새 언약 하에서 하나님이 죄 많은 신자들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그자들은 이 은혜를 빼앗겼는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충만한 은혜를 계시하셨는데도 주께 죄를 지은 신자들이 용서를 빌며 자비를 받을 길이 막혀 버렸다는 말인가? 구약시대에는 성도들이 죄의 용서를 위해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비가 그들에게서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멸망시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완전히 나타났으며 주께서 풍부한 자비를 베푸셨고(1:9, 3:4, 딤후 1:9)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해가 실현되었다고(고후 5:10이하) 성경은 명백하게 선언한다. 만일 우리가 이 성경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자비는 끊어지거나 감해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 위에 더욱 풍성하게 흘러내린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대한 증거도 없지 않다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천사들 앞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리란 말씀을 베드로는 들었으면서도(10:33, 8:38) 하룻밤 사이에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면서 저주까지 했다(26:7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서를 받았다(22:32, 21:15 이하). 데살로니가 신자들 가운데는 무질서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회개하라는 권고의 한 방법으로 징벌을 받았다(살후 3:14-15, 3:6 참조). 마술사 시몬에 대해서까지도 베드로는 기도하라고 권하여(8:22), 절망 상태로 몰아넣지 않고 도리어 희망을 가지게 했다.

 

27. 타락한 교회들에 대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온 교회가 가장 가증스런 죄에 빠지는 경우가 있었을 때 바울이 그 지도자들을 저주하지 않고, 온유하게 그들을 죄에서 풀어 주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의 이탈은 사소한 죄가 아니었다(1:6, 3:1, 4:9).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들보다 더 심한 죄를 지었는데, 보다 가증스런 죄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교회는 주의 자비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사실 불결하고 음란하고 방종한 생활로 다른 사람보다 더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에 대해서 회개하라고 분명하게 권고했다(고후 12:21). 진정한 솔로몬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에게 엄숙하게 확증하신 여호와의 언약은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 언약의 말씀은 이것이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89:30-33). 끝으로, 다름 아닌 사도신경의 순서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죄에 대한 은혜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배운다. 교회가 설립되면 죄의 용서도 첨가되기 때문이다.

 

28. 무의식적인 죄만 용서를 받는가?

 

좀더 사려가 깊은 일부 사람들은 분명한 성경 말씀에 의해서 노바티아누스 사상이 논박되는 것을 보고, 모든 죄가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인 허물, , 사람이 알면서도 기꺼이 빠진 죄만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모르고 지은 과오 이외에는 어떤 죄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신자들의 고의적인 죄를 대속할 제물과(6:1이하) 모르고 한 행위를 대속할 제물을(4) 각각 따로 드리라고 주께서는 율법에서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고의적인 죄에 대한 대속을 거부한다는 것은 심히 악한 생각이다. 주께서는 육적인 제물을 인으로 삼아 성도들의 고의적인 죄에 대한 용서를 확인하셨으므로, 이 용서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희생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명백하다고 나는 주장한다.

또 분명히 율법에 통달했던 다윗이 모르고 죄를 지었다고 누가 변명할 수 있는가? 백성의 간음죄와 살인죄를 매일 처벌한 다윗이 이런 것이 큰 죄라는 것을 몰랐던가?(삼하 11) 족장들이 동생을 죽이는 것을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했겠는가?(37:18이하)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정욕과 불결과 음행과 미움과 분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잘못 배웠던가?(고전 5) 신중한 경고를 받은 베드로가 자기의 선생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 줄을 몰랐던가?(26:74)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가 그렇게 관대하게 나타나는 데에도, 박정한 우리가 그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29. 고대 교회에 있었던 "두 번째 회개"에 대한 문제

 

고대 저술가들은 신자들이 매일 받은 용서는 가벼운 과실, , 육이 약하기 때문에 범하게 되는 가벼운 과실에 대해서 뿐이라고 해석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엄숙한 회개는 더욱 크고 가증스런 죄에 대한 것이며, 세례와 같이 한 번 이상 반복할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우리는 이 견해에 대해서, 그들은 첫번 회개 후에 타락한 사람들에게서 또는 소망을 빼앗으려고 했다든지 또는 다른 과실들을 하나님 앞에서 적은 것같이 경시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교부들은 성도들이 믿음을 잃고 비틀거리는 일이 많으며 때로는 공연한 맹세를 하고 가끔 화를 내며 심지어는 욕설을 터뜨리고 이 밖에도 주께서 심히 싫어하시는 악습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교부들이 이런 일들을 "경미한 과실"이라고 부른 것은 큰 추태를 부려서 교회에 알려지는 드러난 범죄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교회적으로 시정해야 할 만한 행위를 한 사람들이 용서를 받는 것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의 죄가 주 앞에서 용서를 받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엄격하게 처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교회에서 제명을 당할 만한 죄를 경솔히 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지도 법칙인 주의 말씀은 더욱 온화한 태도를 명령하신다. 권징 시행이 지나치게 엄격해서 권징의 중심 대상인 사람이 슬픔에 압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고후 2:7) 우리는 이 점을 위에서 매우 자세히 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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