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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3권.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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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장 최후의 부활

 

(최후의 부활에 대한 교리 주장 1-4)

 

1. 부활의 소망의 중요성과 이 소망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

 

의의 태양이신(4:2)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빛나시며 죽음을 정복하시고,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셨다(딤후 1:10)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며"(5:24), "이제부터‥‥‥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다"(2:19).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독생자와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2:6), 이것은 완전한 행복을 위하여 우리에게 아무 부족함도 없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승리에서 아무 유익도 받지 못하는 것처럼, 어려운 싸움 가운데서 심한 괴로움을 당하지 않도록, 다른 곳에서 소망의 특성에 대해서 배운 것을 굳게 잡고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며(8:25),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므로(11:1), 이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우리가‥‥‥주와 따로" 거하기 때문이다(고후 5:6). 그러므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한다(3:3-4). 그러므로 우리의 놓인 처지는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이다(2:12-13). 따라서 우리는 피로하여 우리의 길을 돌아가거나 또는 우리의 위치를 버리는 일이 없도록, 비상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높이 하늘로 향하여 끌어올리는 것이며,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그런 기쁨 속에서 지내다가 마침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벧전 1:8-9).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의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있는 소망을 주목한다고 바울은 말한다(1:4-5).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시하면서 하늘을 의지하며, 지상에 있는 것에 조금도 끌리지 않고 약속된 복을 바라볼 때,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말씀이 참으로 실현된다(6:21).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믿음이 드물다. 우둔한 우리들이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것처럼(3:14) 어려운 일은 없다. 태산 같은 불행이 우리를 거의 압도할 뿐 아니라, 우리가 현세의 복의 유혹을 기꺼이 물리치고, 지나가는 그림자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세속 인간들은 우리를 조롱한다. 끝으로, 우리의 상하, 전후에는 무서운 유혹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땅 위의 일들에서 해방시켜 멀리 있는 하늘 생활에 붙들어 매놓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올바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복된 부활을 끊임없이 명상하는 습성이 생긴 사람만이 복음의 유익을 완전히 받는 것이다.

 

2. 하나님과의 연합을 사모하는 것이 부활 소망에 동기를 준다

 

고대 철학자들은 최고선을 열심히 논하며, 심지어 서로 논쟁까지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최고선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것을 인식한 사람은 플라톤뿐이었고, 플라톤도 그 연합의 성격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 못하였다. 또한 그는 그 연합의 거룩한 유대에 대해서 배운 것이 없었으므로, 그의 무지는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지상의 나그네 생활에서도 유일하고 완전한 행복을 안다. 그러나 이 행복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갈망하도록 매일 더욱 더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인다. 연합이 완전히 실현되어 우리가 만족할 때까지 이것은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위에서 부활을 향하여 마음을 끌어올리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이 목표를 보여주며(3:8), 자기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3:13) 이 목표를 얻기까지 노력한다고 말하였다. 우리도 이 목표를 열심히 추구해야 하며, 세상에 붙잡혀 태만 죄로 심한 벌을 받지 않도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따라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신자들의 특색은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한다(3:20).

그리고 신자들이 이 경주에서 용기를 잃지 않도록,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그들의 동반자라고 한다. 그는 도처에서 형태도 없는 폐허를 보므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를 고대한다고 한다(8:19). 아담의 타락이 자연의 완전한 질서를 혼란에 빠뜨린 후에, 사람의 죄로 인해서 피조물들이 받게 된 속박은 그들에게 중대한 슬픔이 되었다. 그들에게 지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연히 타락 전의 완전한 상태를 동경한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이 "탄식"하며 "고통"한다고 하였다(8:22). 이것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8:23) 자신의 부패 속에서 쇠약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또 적어도 사람의 죄로 인해서 벌을 받는 무생물들을 모방하지도 못하는 자기를 부끄러워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우리에게 더욱 세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 바울은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부른다(8:23 참조). 우리의 부활의 모든 부분이 이미 완성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단번에 제물이 되셨으므로(10:12),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죄와 상관없이‥‥‥두 번째 나타나시리라"(9:28). 어떤 곤란이 우리를 괴롭힐지라도 우리는 이 구속을 생각함으로써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힘을 내야 한다.

 

3. 바라는 부활은 육신의 부활이다 :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원형이다

 

이 문제는 중대한 것이므로 우리는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이에 대한 바울의 논증은 정당하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고전 15:13-14).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미움과 비난을 받는 우리는 언제나 위험에 직면하여 있으며(고전 15:30 참조) 참으로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기 때문이다(8:36, 44:22). 따라서 우리가 양자가 되며 우리의 구원이 실현된다고 하는 복음의 권위는 그 일부뿐만 아니라 전체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가장 중대한 문제에 주의를 집중하여 아무리 시간이 들더라도 싫증을 내서는 안 된다. 내가 이 간단한 논의를 이때까지 연기한 것은, 완전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독자들이 더욱 높은 곳에 오를 줄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생과 영광을 입으셔서, 온 몸이 그 머리(그리스도)와 같이 되게 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부활의 실례로서 우리에게 몇 번이든지 보여주신다.

완전히 썩어버린 몸이 때가 오면 드디어 부활하리라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러므로 영혼 불멸을 말한 철학자는 많아도 육신의 부활을 인정한 사람은 적다. 이런 견해에 대한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으나 이 사실은 사람의 마음이 이 일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 큰 장애물을 믿음이 극복할 수 있도록, 성경은 두 가지 도움을 준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비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눈앞에 그려야 한다. 그는 우리에게서 취하신 본성으로 죽을 인간의 생애를 마치시고, 지금은 영생을 얻으면서 우리의 장차 올 부활을 보증하신다. 우리를 둘러싼 불행 가운데서(고후 4:8-9 참조)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그를 우리에게서 분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일이며, 또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예수를 쥐어 떼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라고 추론한다(고전 15:16).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나 다시 사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하나의 기존 원리로 인정했다.

오히려 각 지체의 지위와 계급에 따라 모든 지체에 완성되어야 할 것이 머리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모든 지체들이 모든 점에서 머리와 동등해진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었다. 시편에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한다(16:10, 2:27 참조). 우리도 받은 은혜의 정도에 따라 이 믿음의 일부를 가질 수 있지만 그 완전한 결과는 모든 부패를 면하고 완전한 몸을 다시 받으신 그리스도에게서만 나타났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복된 부활에 참여할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이 보증으로 만족하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앉아 계신다고 언급하며(1:20 참조), 끝날에 심판자로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그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한다(3:20-21).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3:4),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은 자신의 권능을 단 한번만 나타내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자들에게도 성령의 동일한 역사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생명"이라고 부르며,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죽을 것을 소생시키시려는 것이라고 한다(8:11 참조).

나는 지금 간단하게 취급할 뿐이나, 이것은 더욱 자세히 취급할 수 있으며 더욱 찬란한 해설을 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다만 이 얼마 되지 않는 말에서 경건한 독자들은 각자의 믿음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넉넉히 얻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내세의 동참자로 삼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 아버지께서 그를 다시 일으키신 것은 그가 교회의 머리시요, 교회와 그가 분리되는 것을 결코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우리를 함께 살리시는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다. 끝으로 그는 "부활과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11:25). 이 거울에서 부활의 산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우리가 말한 것과 같이, 이 오랜 기간에 싫증이나 초조를 느끼지 않는다면, 부활은 우리의 마음을 지탱하는 견고한 기초가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생각대로 분초를 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나라를 회복하시는 것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바울은 이 점에 관해서,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그에게 붙은 자"라고 충고한다(고전 15:23).

우리 모두의 부활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번 또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입증되도록 하신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복음서 기자들이 사실이라고 한 것을 유치한 이야기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겁에 질린 여자들이 전해준 이야기, 또 공포심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제자들이 확인했다는 이야기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왜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빛나는 기념품을 성전이나 공개된 장소에서 전시하시지 않았는가? 왜 빌라도 앞에 그 두려운 자태를 나타내시지 않았는가? 왜 제사장들과 온 예루살렘에 자신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명하시지 않았는가?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이 정당한 증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대답한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약하다고 해서 경멸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서 이 모든 일이 주관되어, 공포심에 압도되었던 자들이 무덤으로 가게 되었다. 얼마만큼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경건한 열성 때문에, 또 얼마만큼은 믿지 않기 때문에 갔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사실에 대한 목격자가 될 뿐 아니라, 그들이 눈으로 본 일에 대해서 천사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여인들이 한말을 하나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다가 스스로 사실에 직면하게 된 사람들의 신실성을 우리는 어떻게 의심할 수 있는가? 일반 사람들과 총독이 풍성한 증거가 제시된 후에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나 다른 표징들을 볼 기회를 빼앗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덤을 인봉하고 파수꾼이 지켰지만(27:66), 사흘째 되는 날에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24:3, 28:6,11, 27:24 참조). 뇌물을 받은 병정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28:12-13,15). 이는 마치 제자들이 한 군대라도 제압할 수 있다거나 또는 무기로 무장을 했다거나, 심지어 이런 짓을 할 만한 충분한 경험이 있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군사들에게 제자들을 쫓아버릴 용기가 없었다면, 그들은 왜 그들을 쫓아가서 민중의 도움으로 그 중에서 몇 명이라도 잡지 않았는가? 빌라도는 참으로 자기의 반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하였고,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침묵이나 거짓말로 그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한편으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하는 천사들의 소리가 울렸다(28:6, 24:6 참조). 하늘 광채가 그들이 사람이 아니고 천사임을 명백하게 알려주었다.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아직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의심을 제거해주셨다(24:38).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여러 번 만났고, 그 손과 발을 만져보기도 하였다(24:40, 20:27 참조). 그들의 의혹이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고(1:3), 드디어 그들의 눈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1:9). 이 광경은 열 한 제자에게만 보여진 것이 아니라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여졌다"(고전 15:6).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면서 자신이 살아나신 것뿐만 아니라 최고의 주 되심을 확실히 증명하셨다. 이것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라고(16:7) 이미 예언하신 바와 같다. 그리고 바울을 노상에 엎드러지게 만든 것은 죽은 사람의 힘이 아니었으며, 바울은 자기가 공격하고 있는 분이 최고의 권능을 가지셨다는 것을 느꼈다(9:4).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이유로 스데반에게 나타나셔서 생명에 대한 확신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하셨다(7:55). 이렇게 많은 증거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불신앙일 뿐만 아니라, 부패하고 어리석은 고집이다.

 

4.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육신 부활에 대한 근거이다

 

부활을 증명하려면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생각해야 한다고 우리는 이미 말했다. 바울은 간단하게 이 점을 가르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3:21). 여기서 우리 앞에 제시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기적이며, 우리의 지각을 압도하는 위대한 기적이다. 따라서 부활에 대해서 어떤 자연 현상을 상상하는 것은 가장 부적당한 생각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연계에서 증거를 빌려,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논박한다.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전 15:36). 씨를 뿌리면, 썩은 것으로부터 곡식이 돋아나므로, 부활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만일 우리가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는 기적에 올바르게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 사실은 그다지 믿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이감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권능에 그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아니면, 장차 올 부활을 참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사야는 이 신념에 고무되어 이렇게 부르짖는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26:19). 다윗은 절망적인 처지에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라고 한다(68:20). 욥은 사람이라기보다 시체같이 되었으면서도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그날이 오면 자기가 완전한 사람으로서 일어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그의 권능을 보이시려고)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라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19:25-27),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 구절을 부활에 적용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듯이 교묘하게 왜곡하지만, 그들은 논박하려는 점을 도리어 확인한다. 거룩한 사람들은 곤란을 당할 때에 무엇보다도 부활의 비유에서 위안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에스겔에 있는 구절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약속을 믿지 않고, 그들 앞에 길이 열리리라고 하는 것은 죽은 사람들이 무덤에서 나오리라는 것과 같다고 했을 때에, 에스겔은 한 환상을 보았는데, 그 환상 중에 들에 마른 뼈가 가득하고 그 뼈에 힘줄과 살이 붙으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다고 한다(37:1-10), 예언자는 이 비유로 백성이 돌아갈 소망을 가지게 하였지만, 그 소망의 근거는 부활에 있었다. 이는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구원에 대해서도 부활이 그 모형이 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음성이 생명을 준다고 가르치신 후에, 유대인들이 그 음성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즉시 다음과 같이 첨가하셨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5:28-29)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을 본받아 전투 중에도 개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에게 내세를 약속하신 분은 우리가 맡긴 것을 지켜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딤후 1:12). 의의 면류관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되었고, 의로우신 심판장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실 것이므로,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딤후 4:8).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우리에게 미리 내세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권능의 천사들과 함께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고통으로 갚으시며, 부당한 핍박을 받는 우리에게 안식으로 갚아주시는 것은(살후 1:6-8) 하나님의 본성에 합당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곧 그 다음에 첨가하는 말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그의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며 모든 복음을 믿는 자로부터 기이히 여기심을 받으실 것이다(살후 1:10).

 

(이 교리에 대해 반대하는 다양한 계층의 반대가 논박되었음. 5-9)

 

5. 이교도들의 반대론을 장례 의식으로 반박함. 천년 왕국론자들의 오류

 

사람들은 부활을 항상 생각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일체 잊어버리게 하려는 신중한 계획이나 세운 것처럼, 죽으면 만사가 끝나고 인간은 소멸한다고 하였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고 한 솔로몬의 말은(9:4) 당시의 일반적인 상식을 표현하였다. 다른데서는,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한다(3:21). 모든 시대에 이 동물적인 어리석은 생각이 널리 퍼졌고, 교회 내에까지 침입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공언했고(12:18, 20:27, 23:8), 영혼은 죽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무지를 변명의 구실로 삼지 못하도록, 본성의 놀라운 충동에 의해 사람들은 그들의 눈앞에 항상 부활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매장 풍습을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인정한 것은 그것이 새로운 생명에 대한 보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도 이런 풍습이 오류에서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거룩한 조상들도 매장 의식은 엄수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같은 풍습이 이방인들 사이에도 존속하여, 그들 앞에 놓인 부활의 형상으로 그들이 깨우쳐지기를 원하셨다. 매장 의식은 유익하지 못했지만, 만일 우리가 그 목적을 현명하게 통찰한다면 우리에게는 유용한 것이 된다. 아무도 믿지 않은 것을 모든 사람이 함께 고백했다는 것은, 그 불신앙에 대한 중대한 반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시체와 함께 부활의 기억도 묻어버리도록 사탄은 그들의 감각을 마비시켰을 뿐 아니라, 부활론의 이 부분을 각종 거짓말로 혼란시켜 결국 부활론 말살하려고 하였다. 바울 시대에 사탄이 그 작업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겠다(고전 15:12이하 참조). 그러나 조금 후에 천년 왕국론자들이 뒤를 이어,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을 천년 동안으로 제한하였다. 그들의 조작은 너무도 유치해서 논박할 필요나 가치가 없다. 그들의 오류에 구실을 준 것이 계시록임이 분명하나, 그 계시록도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천이라는 수는(20:4) 교회의 영원한 복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에 당할 각종 곤란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도리어 성경 전체는 선택된 자들의 복이나 악한 자들의 벌이 영원하리라고 선언한다(25:41,46).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우리의 시력으로 볼 수 없으며 지력으로도 이해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내세의 생명의 기업을 향유하는 기간을 천년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얼마나 큰 비난을 던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그들이 그의 영광으로 변모하게 될 그리스도 자신도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시지 못하기 때문이다(고전 15:13이하). 만일 그들의 복이 유한하다면, 그들의 복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나라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게 된다. 요약하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한 일을 전혀 모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권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려는 악의를 품고 행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권능은 죄가 말소되고, 죽음이 삼켜지고, 영생이 완전히 회복되는 때에 비로소 실현된다.

이 사람들은 악한 자들이 영원한 벌을 받는다면, 하나님께 극심한 잔인성을 돌리게 될 것이 두렵다고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소경에게도 들여다보이는 어리석은 이야기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배신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스스로 잃은 자들에게서 하나님이 그 나라를 빼앗으시는 것은 참으로 불공평한 처사이며 그들의 죄는 일시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들이 범죄함으로 침해한 하나님의 위엄과 공의는 영원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허물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벌이 죄의 정도를 넘는다고 그들은 말하지만 이런 모독적인 언사는 참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을 공경할 줄 모르고 도리어 경멸하면서, 한 영혼이 멸망하는 것을 더 큰 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박한 자들이 떠드는 것에 우리가 논박할 가치를 인정하는 것같이 되어, 앞에서 한 말과 다르게 되겠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겠다.

 

6. 육신은 부활하고 영혼은 불멸한다

 

그뿐 아니라, 호기심이 병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두 가지 망상을 제기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전인이 죽는 것같이, 영혼이 몸과 함께 부활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의 불멸을 인정하면서, 영은 새로운 몸을 입게 되리라고 주장하였다. ,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였다.

이 두 가지 생각 중에서 처음 것에 대해서는 인간의 창조를 논할 때에 다소간 언급한 것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독자들에게 이 생각이 얼마나 동물적인 오류인가를 다시 한 번 경고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영을 이 무상한 인생에서만 몸을 살려 주는 덧없는 호흡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고, 성령의 전을 말살하며, 결국 우리에게서 신성이 가장 빛나며 영생 불사의 증거가 분명히 보이는 이 영에게서 불멸이라는 은사를 빼앗는다. 그 결과, 몸의 처지가 영혼의 처지보다 좋고 더 탁월하게 된다.

성경의 교훈은 훨씬 탁월하다. 성경은 우리의 몸을 집에 비유하고, 우리는 죽을 때에 이 집을 떠나며, 이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죽음이 임박한 것을 "장막""벗을" 때가 왔다고 말했다(벧후 1:14). 그러나 바울은 일반 신자들에 대해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하고(고후 5:1), 이어서 우리가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고후 5:6),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갈망한다고 한다(고후 5:8). 만일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이 살아 있지 않는다면,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도는 "의인의 영들"이 모인 곳에 우리도 모였다고 함으로써(12:23) 모든 의심을 일축한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는 저 거룩한 조상들과의 교제에 들어갔으며, 이 조상들은 비록 몸은 죽었으나, 우리와 같이 경건한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그들과 결합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몸을 벗은 영혼이 그 본질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복된 영광을 받을 자격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도적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도 이런 분명한 증거를 믿고, 죽을 때에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슴지 않고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거나(23:46), 또는 스데반을 본받아 믿는 자들의 신실하신 "목자와 감독"이라고 불려 질 수 있는(벧전2:25) 그리스도께 맡겨야 한다(7:59).

그런데 우리의 영혼의 중간 상태에 대해서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은 마땅하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다.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이미 하늘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가 등의 문제로 공연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모르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 이상으로 더 깊이 알려고 하는 것은 미련하고 경솔한 짓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이 위로를 얻도록 낙원으로 영접하신다고 하였고(12:32 참조), 한편에서는 버림받은 자들이 그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 이상의 말씀은 없다. 하나님께서 숨기신 일을 어떤 선생이 우리에게 나타낼 것인가? 장소에 대해 묻는 것도 미련하고 무익한 일이다. 영혼은 몸과 같은 차원을 가진 것이 아님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영이 모인 복 받은 곳을 "아브라함의 품"(16:22)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여정을 마친 후에 믿는 자들의 공통된 조상의 영접을 받으며, 그의 믿음의 결실에 우리도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을 넉넉히 보증한다. 동시에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라고 명령하며, 영광의 면류관을 그 때까지 연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신 한계, , 경건한 자들의 영혼은 그 어려운 싸움을 마친 후에 약속된 영광을 즐길 때를 기쁘게 기다리던 복된 안식으로 들어가며, 모든 일은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보류된다는 한계를 지키고 만족해야 한다. 버림받은 자들의 운명은 확실히 유다서에 있는 마귀들의 운명과 같다. , 마귀들은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혀져 있을 것이다(1:6).

 

7. 현세에서 입고 있던 몸으로 부활함

 

어떤 사람들은 영혼은 현재 입고 있는 몸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다른 몸을 받는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이것도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극심한 오류 중의 하나다. 마니교도들은 이 생각에 대해서 불결한 육신이 부활한다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무가치한 이유를 말했다. 그들은 영혼의 하늘 생활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으니, 그 영혼은 불결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들의 생각은 "죄로 더러워진 것은 하나님의 힘으로도 깨끗이 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육은 마귀가 만든 것이므로 본성이 불결하다고 한 그들의 망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내가 여기서 밝히려는 것은,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것이 지금 우리 안에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부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뿐이다. 우선 바울은 신자들에게 육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라고(고후 7:1) 명령하므로, 그가 다른 곳에서 "우리가 다‥‥‥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한 판단은 이것의 결과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이 말과 부합하는 말을 했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1).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영과 혼과 아울러 그들의 몸을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까지 완전하게 지켜주시기를 기원한다(살전 5:23).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전으로 성별하신 몸이(고전 3:16) 부활의 소망이 없이 썩어버린다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일일 것이다. 신자들의 몸은 또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가?(고전 6:15) 하나님께서는 몸의 각 부분을 그에게 성별하라고 명령하시지 않는가? 사람의 혀가 그를 찬양하며,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며(딤전 2:8), 몸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시지 않는가?(12:1)

사람의 이 부분에 대해서 하늘 심판자께서 이렇게까지 빛나는 영예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시는데, 죽을 인생이 그것을 회복될 소망이 없는 흙으로 돌린다는 것은 얼마나 미친 짓인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영혼은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영혼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주를 섬기라고 우리에게 충고한 바울은(고전 6:20),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물이라고 확실히 주장한 그것이 영원한 부패의 운명을 당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성경은 우리가 현재 입고 있는 이 몸이 부활하리란 것을 무엇보다도 분명히 가르친다. 바울은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고 한다(고전15:53). 만일 하나님께서 새로운 몸을 만드신다면, 이 성질의 변화는 어디서 생길 것인가? 만일 성경이 우리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했다면 이 모호한 표현이 그들에게 너절한 반대를 할 구실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입고 있는 육체를 가리키면서 이 육체가 썩지 않으리라고 약속하므로, 새 몸이 생긴다는 것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부인한다. "참으로, 그가 자기의 손에 피부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이 이상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터툴리안은 말한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실 것이라고 말하고, 이사야의 증거를 인용한 사실을(14:11) 잔소리꾼들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49:18)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라는(45:23, 14:11) 말씀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그의 글을 받을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이 각각 일생 동안 한 일을 고해야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만일 새 몸들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이런 말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니엘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12:2) 한 말에는 모호한 점이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네 가지 원소에서 새로운 재료를 불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을 무덤에서 불러내시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 명백한 이유가 나타난다. 죽음이 인간의 티끌에서 생겨난 우발적인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회복은 그 죽기 시작한 육체에 속한다. 바울이 부활을 주장했을 때 아덴 사람들이 웃은 것을 보면(17:32), 그가 어떤 전도를 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또 그들이 웃었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10:28). 만일 우리가 현재 입고 있는 몸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두려워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다른 말씀도 이와 꼭 같이 분명하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8-29) 우리는 영혼들이 무덤 속에서 쉬고 있으며, 거기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할 것인가? 오히려 그의 명령이 있을 때 몸이 그 잃었던 힘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 아닌가?

그뿐 아니라, 우리가 새 몸을 입게 된다면 머리와 지체들이 어떻게 어울리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새 몸을 입으셨는가? 그렇지 않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그는 말씀하셨다(2:19). 그는 전에 입으셨던 죽을 몸을 다시 입으셨다. 속죄 제물로 바친 몸이 소멸되고 새로운 몸이 대치되었다면, 우리에게 큰 유익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한다고(고전 15:12이하) 사도가 선포한 이 연관성을 우리는 고수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사는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점은 현저한 예를 보아서 분명하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을 때에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무덤에서 나왔다"고 한다(27:52-53 참조). 이 일이 우리가 대망하는 부활의 전조 또는 보증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일은 이미 에녹과 엘리야에게 있었던 일과 비슷한 것이었다. 터툴리안은 그들을 "부활의 후보자"라고 불렀다. 이는 그들이 몸과 영혼의 부패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보호 안으로 영접되었기 때문이다.

 

8. 육신을 존중하는 장례의 의미

 

나는 이렇게 분명한 문제를 길게 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악하고 대담한 자들이 단순한 사람들을 속일 틈을 남겨 놓지 않기 위해서, 독자들은 귀찮겠지만 불편을 참기 바란다. 내가 지금 논의의 상대로 하는 이 경박한 사람들은 부활이 있을 때에는 새 몸이 창조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해야 되겠다고 느끼는 것은, 오랫동안 부패하여 없어진 시체가 원상으로 회복된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같이 보이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들의 생각은 오직 불신앙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성령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몸의 부활을 대망하라고 역설한다. 바울은 세례를 우리의 미래 부활에 대한 보증이라고 한다(2:12). 성만찬은 우리가 입으로 영적 은혜의 상징들을 받을 때에, 부활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촉구한다. 우리의 지체를 의에 순종하는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6:13,19) 바울의 충고는, 그가 그 후에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한 말과(8:11)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전체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발과 손과 눈과 혀를 하나님의 섬기는 일에 바치더라도, 그 봉사의 열매와 보상에 참여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울은 직접 이 점을 확인한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3,14). 더욱 분명한 것은 그 다음에 있는 말이다. ,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전이며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하였다(고전 6:15,19). 그리고 조금 뒤에 구속의 값을 우리의 몸에까지 확대하는 것과 같이(고전 6:20), 바울은 부활을 정숙과 거룩에 연결시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바울의 몸(6:17), 그리스도의 영광을 많이 나타낸 그의 몸이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합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랑하였다.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3:20-21).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14:22),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기치 하에 훈련시키시고 승리의 찬사로 장식하시는 몸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 사이에서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소망을 품는 데 대해서 아무 의혹도 생기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이 시험하는 모든 환난을 맡으시고 환난에는 생명을 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외면적인 의식을 통해서 율법 하의 거룩한 조상들에게 이 믿음에 대한 훈련을 실시하셨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매장하는 몸들을 위해서 새로운 생명이 준비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장례는 왜 생겼겠는가?

영생 불사의 상징인 향료와 기타 물질은 회생 제물과 같이 율법 하의 가르침의 모호한 점을 완화하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매장 풍습은 미신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성령은 앞으로 이야기하려는 장례에 대해서도 믿음의 중요한 여러 가지 신비에 못지않게 많이 유익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적은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신(26:10) 이유도 확실히, 장례는 모든 것을 썩히고 말살하는 무덤으로부터 우리의 눈을 돌려 갱신의 광경을 그려보게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례를 극히 엄숙하게 지키는 것을 족장들도 시인하였거니와, 그런 엄수는 그들이 장례를 믿음에 대한 가치 있는 도움으로 생각했다는 증거가 된다. 만일 아브라함의 눈앞에 이 세상보다 더 높은 가치와 종교가 보이지 않았다면 그는 그 아내의 무덤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세밀한 주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23:4,19). , 그는 아내의 시체를 부활의 표징으로 장식함으로써 자기의 믿음과 가족의 믿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은 야곱이 한 일이다. 그는 약속된 땅으로 돌아갈 희망이, 죽을 때에도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자기의 뼈를 그리로 가져가라고 명령하였다(47:30). 묻노니, 그가 새 몸을 입게 될 것이라면, 없어지고 말 흙에 관해서 지시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 대해서 권위가 있다면, 부활 교리와 같이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를 얻을 수 있는 교리도 없다.

어린이들까지도 "부활""다시 산다"는 말을 이런 뜻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방금 창조된 것에 대해서는 "다시 살아났다"고 하지 않는다. 더욱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9)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도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잔다"는 말은 몸에만 적용되는 것이므로, 같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묘지를 침소라고 부른다.

 

부활의 모양

 

이제 남은 것은 부활의 모양에 대해서 다소의 암시를 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울이 이것을 "비밀"이라고 부르고(고전 15:51), 우리가 절제하며, 너무 자유롭고 미묘한 사색을 하지 않도록 당부하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본체로 보면 현재 가지고 있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나, 그 성질이 다르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물로 바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는데 다만 전혀 다른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다른 특성에 있어서는 탁월하였다. 이 점을 바울은 잘 아는 예를 들어 주장한다(고전 15:39). 사람과 짐승의 육체는 본체가 같으나 성질이 다르며(고전 15 :39), 모든 별은 같은 재료로 되었으나 그 광채가 다른 것과 같이(고전 15:41), 우리는 우리의 몸의 본체는 보유하겠지만 변화가 생겨서(고전 15:51-52), 이 나중 상태는 훨씬 더 훌륭하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하기 위해서 우리의 썩을 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썩는 성질을 버리고 썩지 않는 성질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고전 15:53-54). 하나님께서는 모든 요소들 마음대로 지배하실 수 있으므로 흙과 물과 불에게 그것들에 의하여 소멸된 것을 모두 복구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도 이 점을 비유로 언급한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26:21)

그러나 죽은 지 오랜 사람들과 그 날 아직 살아 있을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다 변화하리니"라고 바울은 말한다(고전 15:51). 죽는 때와 둘째 생명이 시작하는 때의 사이에 간격을 둘 필요가 없다. "순식간에 홀연히"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죽은 자들은 썩지 않은 상태로 살아날 것이며, 살아있는 자들은 갑자기 같은 영광으로 변화할 것이다(고전 15:52-53).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죽게 될 신자들을 같은 말로 위로하며, 그 때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보다 앞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먼저 부활하리라고 한다(살전 4:15-16).

만일 사도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라고(9:27)한 말을 인용해서 반대한다면, 설명은 어렵지 않다. 본성이 변할 때에는 죽는 듯한 인상을 주며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죽을 몸을 벗어버린 때에 죽음에 의해서 모두 새로워지리라는 것과, 변화가 갑작스러운 경우에는 몸과 영혼이 분리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서로 잘 부합되는 일이다.

 

9. 불신자의 부활

 

그러나 여기서 더 어려운 의문이 생긴다. , 무슨 권리로 불신자들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도 부활하는가? 부활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독특한 은혜가 아닌가 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죽음의 정죄를 받은 것을 안다(5:12, 고전 15:22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과 생명"으로서 오셨다(11:25). 그는 모든 인류에게 무차별하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는가? 하나님을 경건하게 경배하는 자들이 믿음으로만 받는 것을 완악하고 눈이 어두운 자들이 얻는다는 것처럼 부당한 일이 다시 있겠는가? 그러나 확고부동한 사실이 있다. 한쪽은 심판의 부활로, 또 한쪽은 생명의 부활로 나오리라는 것이며(5:29). 그리스도께서는 "양과 염소를 분별하러" 오시리라는 것이다(25:32). 나의 대답은, 우리가 여기 해당하는 일들을 일상 경험에서 보기 때문에, 이 일을 신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으로 인해서 전세계의 유업을 빼앗겼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된 것처럼 보통 음식도 먹을 자격을 빼앗겼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는" 것은(5:45) 현세 생활에 있어서 그의 무한하신 은혜를 끊임없이 풍성하게 베푸시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에게 속한 것이 악인들에게도 풍부하게 베풀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물론 인정한다. 그것은 그들의 당연한 소유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구실이 없도록 만드시려는 것이다. 악인들은 놀라운 증거에 의해서 하나님의 친절을 체험하는 일이 많고, 경건한 사람들이 받는 복을 훨씬 능가하는 때도 있지만, 이런 체험은 그들에게 더욱 엄중한 정죄가 된다.

덧없는 지상의 혜택에 의해서 부활이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들이 생명의 샘이신 하나님에게서 처음 단절되었을 때에 그들은 마귀의 죽음을 당하여 완전히 멸망했어야 마땅했을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에 의하여 중간 상태가 마련되었고, 그들은 생명에서 끊어져 죽음 속에서 살게 되었다. 악인이 우연히 부활하더라도, 그리고 그들이 지금 주와 선생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그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억지로 끌려가더라도, 그것이 더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심판주 앞에 끌려가지 않는다면, 죽음으로 멸망하는 것은 가벼운 벌이 될 것이다. 그들은 심판주에게서 완악한 죄로 벌을 받을 것이며, 끝도 한도 없는 이 벌은 그들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말한 입장을 지키며, 바울이 벨릭스(Felix)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다 같이 앞으로 있을 부활을 기다린다고 한 유명한 고백을(24:15) 고수해야 하지만, 성경은 부활과 하늘 영광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가르치는 일이 더 많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원래의 목적은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구원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경(信經)에서도 복된 생명에 관해서만 언급한다.

 

(사람의 내세 생활 : 하나님 앞에서 사는 영원한 즐거움 또는 하나님께로 부터 소원해진 영원한 불행. 10-12)

 

10. 영원한 복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릴 것이라는 예언은(25:8, 13:14, 고전 15:54-55) 그 때에 비로소 성취될 것이므로, 우리는 항상 영원한 행복을, , 부활의 목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행복이 얼마나 탁월하냐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말하더라도 그 가장 작은 부분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는 광채와 기쁨과 행복과 영광이 가득하리라는 말을 들으며, 또 그것은 옳은 말이지만, 그런 말을 하는 동안은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지각에서 아주 멀고, 또 희미한 것으로 둘러 쌓여있다. 그 날이 와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기까지는(고전 13:12 참조)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요한은 말했다(요일 3:2).

따라서 예언자들은 그 영적인 복을 그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물질적인 언사로 대강 묘사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감미로움을 조금이라도 맛보면 우리에게 강렬한 소원을 일으키므로, 우리는 특히 이 점을 잠깐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것을 자신 안에 보유하시며 다함이 없는 샘과 같으시다면, 최고선과 행복의 모든 요소를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은 성경이 여러 군데서 우리에게 가르친다. 예컨대, "아브람아 나는‥‥‥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5:1)고 하신다. 다윗의 말이 이와 부합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16:5-6). 다른 구절에서도 "나는‥‥‥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7:15)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신자들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다(벧후 1:4).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인가? 이는 그가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겠기 때문이다(살후 1:10). 만일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권능과 의를 그의 선택된 자들에게 나눠주시며, 아니, 자신을 그들에게 푸셔서 즐기게 하시며, 심지어 그들을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실 것이라면, 우리는 이 은혜 안에 모든 행복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 명상에서 상당히 전진했으나, 우리의 영적 능력을 이 신비의 높이에 비교할 때, 우리는 아직 가장 낮은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더욱 침착해야 하며, 우리의 한계를 잊어버리고 대담하게 솟아올라 하늘 영광의 광채에 압도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또 합당한 정도를 넘어서 더 알려고 하는 과도한 욕망의 유혹을 느낀다. 이런 상태에서 무가치하고 유해한 질문이 자꾸만 생겨난다. 무가치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종류의 질문들은 더욱 다르다. 왜냐하면 그런 질문을 즐기는 사람들은 위험한 사변에 빠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런 질문을 유해하다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선물을 분배하실 때 모든 성도에게 똑같이 빛을 비추시지 않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기장 좋은 선물을 주실 때에도 그 영광의 정도가 똑같지 않으리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날에(살전 2:19)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20) 한 바울의 말이나, "너희도‥‥‥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19:28)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영적 선물을 아낌없이 주시고, 하늘에서는 영광으로 그들을 장식하시리란 것을 안 바울은, 자기 수고에 해당하는 특별한 면류관이 하늘에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딤후 4:8).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그들의 직무가 존귀하다는 것을 가르치실 때, 그에 대한 결실은 하늘에 저장되어 있다고 하셨다(19:21 참조). 다니엘서에도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다(12:3). 자세히 연구해보면 성경은 신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할 뿐 아니라, 각 사람에게 특별한 보상을 약속한다. 그래서 바울은 "주께서‥‥‥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한다(딤후1:18). 이 점을 확인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19:29) 하신 약속이다.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의 몸의 영광을 각양각색의 선물로 나타내기 시작하시고 점점 그 영광을 증대하시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그 영광을 완성하실 것이다.

 

11. 무용한 질문들을 처리함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증명하기 때문에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인정한다. 동시에 그들은 방해가 되는 난문들을 피하여 정해진 한계를 넘지 않는다.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무익한 문제들을 공연히 연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문제에 대답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경박한 행동을 조장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무익한 지식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또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얼마나 다를까, 처녀들은 기혼 여성들과 어느 정도 다를까, 하고 묻는다. 요컨대, 그들은 하늘을 샅샅이 뒤져서 알려고 한다. 그리고 세상을 회복시킬 필요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영원한 복의 상징인 천사들과 같이 되었으므로(22:30) 이 위대하고 비할 데 없는 풍성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이 복은 보기만 해도 큰 즐거움이며, 알기만 하고 이용하지 않아도 큰 기쁨이며, 우리가 지금 향유한 모든 즐거움을 훨씬 초월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가령 우리가 이 지상에서 모든 쾌락이 구비된 가장 풍부한 곳에 있다고 상상할 때, 가끔 자기의 병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즐기는 일에 지장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자기의 무절제로 인해서 평탄한 생활에 자주 파동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므로 썩을 생명에 무익하다 하더라도 아무 악이 없는 맑고 순수한 즐거움은 행복의 극치이다.

어떤 사람들은, 금속의 찌끼와 그 밖의 퇴폐물은 회복과는 먼 것, 그것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고 계속 묻는다. 나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 점을 인정하지만, 바울처럼 이런 결함이 고쳐지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죄에서 시작한 결함이며, 그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 있기 때문이다(8:22). 그들은 계속해서, 후손들의 복도 그때에는 끝날 것인데 인류를 위해서 어떤 더 좋은 상태가 남아 있느냐고 묻는다. 이 곤란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성경이 자손의 복을 극구 찬양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손에 의해서 자연의 질서를 그 목표를 향하여 계속 전진시키는 데도 해당된다. 그러나 완성된 상태에서는 경우가 다르다. 그러나 유혹이 부주의한 사람들을 곧 붙잡아서 점점 깊은 미로로 끌어들인다. 그 결과로 각각 자기 의견에만 만족하고 논쟁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해결의 첩경은 우리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게 될 때까지 "거울"과 그 "희미함"을 만족하게 생각하는 것이다(고전 13:12). 어떻게 하면 하늘로 갈 것인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천만 명 중에서도 조금밖에 되지 않으나, 하늘에서 어떤 일이 있는가는 모든 사람이 알고 싶어 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태만해서 가상적인 승리를 미리 상상할 뿐, 실지로 싸우는 것은 싫어한다.

 

12. 버림받은 자들의 처지

 

악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의 중대성은 적당하게 형언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물질적인 비유를 쓰게 된다. 예컨대 어둠, 울음, 이를 갊(8:12, 22:13), 꺼지지 않는 불(3:12, 9:43, 66:24), 심장을 갉아먹는 죽지 않는 벌레(66:24) 등이다. 성령께서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려고 하신다. 예컨대 "도벳은 이미 설립되었고 또 왕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 깊고 넓게 하였고 거기 불과 많은 나무가 있은 즉 여호와의 호흡이 유황 개천 같아서 이를 사르시리라"(30:33). 이런 자세한 모사는 악인들의 처지를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게 하지만,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점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완전히 단절된 처지가 얼마나비참하냐 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도저히 그 압력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가도 우리는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진노는 접촉하는 모든 것을 맹렬한 불처럼 삼켜버린다. 둘째,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실시하는 데 이바지하므로, 주의 진노를 공개적으로 받는 사람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생물과 기타 만물이 자기를 향하여 무서운 분노로 타오르며, 자기를 멸망시키려고 무장했다고 느낄 것이다. 따라서 사도가 불신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은(살후 1:9) 무의미한 말이 아니다. 예언자들이 물질적인 비유로 우리의 공포심을 일으킬 때, 그들은 우리의 태만에 맞설 만한 과장된 언사를 사용하지 않지만, 해와 달과 우주 전체의 현상을 통해서(24:29 기타) 장차 올 심판의 예감을 그들의 교훈에 섞는다. 따라서 가련한 양심은 무서운 회오리바람에 괴로움을 당하며, 원수가 된 하나님께 찢기는 듯, 치명적인 창에 찔리는 듯, 하나님의 번개가 때리는 듯, 그의 무거운 손에 눌려 부서질 듯한 느낌으로 일시도 안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공포 가운데 한 순간이라도 서 있는 것보다 차라리 끝없는 깊음이나 구렁으로 내려가는 것이 오히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렇게 영원히 쉴 새 없이 하나님의 포위를 당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일인가? 이 점에 대해서 시편 90편에 잊지 못할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보시는 것으로 모든 죽을 인생들을 흩으시며 멸망시키시지만, 자신을 경배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격려하시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겁이 많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 그들에게 더욱 용기를 주셔서 계속 전진하게 하신다(90:7이하).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되는 날까지(고전 15:28) 전진을 계속하게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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