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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4권.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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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 교회의 교사들과 목회자 : 그 선정과 직분

 

(하나님이 주신 직분 : 이 기능은 고귀하고 필요하다. 1-3)

 

1.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봉사를 필요로 하시는가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통치하기 위해서 쓰시는 교회의 교직 제도를 말해야 하겠다.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배하시며, 교회 안에서 권위 또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셔야 한다. 그리고 이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 그러나 그는 눈에 보이게 우리들 중에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26:11). 우리는 그가 사람들의 봉사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우리들에게 말로 분명하게 선포하신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고 다만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에 도구를 쓰는 것과 같다.

나는 먼저 설명한 것을 한 번 더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도움이나 도구가 없어도 사업을 친히 하시거나 천사들을 시켜서 하실 수 있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을 방편으로 삼아 일하시는 편을 택하신다.

이런 방편으로 우선 우리에게 대한 관심을 나타내신다. 사람들을 택하여 세상에서 그의 사자가 되게 하시며(고후 5:20 참조) 그의 비밀한 뜻을 해석하게 하신다. 그를 대표하게 하신다. 이것으로 우리를 그의 성전이라고 부르시는 것이(고전 3:16-17, 6:19, 고후 6:16) 하찮은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신다.

사람들의 입들 통해서 마치 성소에서 말씀하시는 것같이 사람들에게 대답을 주시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겸손을 위한 가장 훌륭하고 유익한 훈련이 된다. 우리와 같거나, 때로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가 말씀에 복종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신다면, 모든 사람이 즉시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다해 경건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누가 그의 능력의 임재에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누가 그렇게 위대한 위엄을 보고 놀라지 않을 것인가? 누가 그 끝없는 광채에 당황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흙에서 나온 보잘것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가 우리보다 나은 점이 없을지라도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겨 배우는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을 가장 잘 나타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 지혜의 보화를 약한 질그릇에 숨기신 것은(고후 4:7) 우리가 얼마나 그 보화를 귀중히 여기는가를 시험하시려는 의도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서로 합하여서 사랑을 보다 올바르게 양육하는 한 끈이 있다. 그것은 곧 한 사람이 목사로 임명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며, 제자가 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한 입에서 공통된 교훈을 받는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만으로 만족해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이렇게 인간이 교만하다) 서로가 남을 멸시하며 또 멸시를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의 교회를 한 끈으로 묶으시고 이것이 연합을 유지하는 가장 힘 있는 수단이라고 미리 알고 계셨다. 그래서 구원과 영생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맡기시고 그들의 손을 거쳐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하셨다. 이 점을 숙지하면서 바울은 에베소서에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4:4-7)라고 기록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말한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4:8,10-16).

 

2. 교회를 위한 성직의 의의

 

바울은 사람의 목회는 신자들을 결속해서 한 몸을 이루게 하는 힘줄이라는 말로 사람의 목회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바울은 교회를 손상 없이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도 보여 주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교회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만드신 안전 대책으로 교회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바울은 말한다(4:10). 이 일이 실현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이 직책을 목회자들에게 위임하시고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통해서 선물을 교회에 분배하시며, 그는 이 제도 안에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스스로 임재 하신다는 것을 어느 정도 보이심으로써 그 제도가 허망한 것이나 무익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신다. 성도들의 갱신은 이렇게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의 몸은 이렇게 세워지며(4:12), 이렇게 우리는 범사에 머리이신 그에게까지 자라여(4:15 참조) 서로 함께 자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 사이에서 예언 활동이 활발하고 사도들을 영접하며 우리에게 전하는 교리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행함으로써 우리는 모두그리스도의 연합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이 질서와 이런 교회 정치를 폐지시키려고 하든지 또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해서 무시하려고 하는 사람은 교회를 파멸시키며 파괴하려고 힘쓰는 사람이다. 현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태양의 빛과 열이 또 음식이 필요하지만, 지상의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도적 및 목회적 직분이 더욱 더 필요하다.

 

3. 복음 선포의 직책은 특히 풍요하다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성직제도를 옳게 보시고 온갖 가능한 방법으로 그 위엄을 칭찬하시는데, 이는 성직이 우리 사이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으며 심지어 가장 훌륭한 일로 인정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교사들을 세우신 것은 그들에 대한 특별한 은혜라고 증언하신다. 예언자에게 명령 하셔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외치게 하시며(52:7), 사도들을 "세상의 빛""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신다(5:13-14). 그리고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찬사로,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10:15).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이 문제를 마치 고의로 논의하듯이 했을 때 기록한 구절이 가장 확실하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성령과 의와 영생을 제공하는 일이므로 교회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한다(고후 4:6, 3:9). 이 구절들과 그 밖의 유사한 구절들의 뜻은 성직자들을 통해서 교회를 다스리며 유지하는 방식, 곧 주께서 영원히 제정하신 이 방식이 우리들의 무시와 멸시 때문에 폐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성직이 확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뿐만 아니라 실례로 공포하신다. 고넬료에게 진리의 빛을 더욱 풍부하게 비추려고 하셨을 때, 하늘로부터 천사를 보내어 그를 베드로에게 인도하셨다(10:3-6). 바울을 불러 자신을 알게 하시며 교회에 접붙이고자 하셨을 때, 친히 그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그를 사람에게 보내어 그 사람에게서 구원의 교리와 세례에 의한 성결을 받게 하셨다(9 :6). 하나님의 대변자인 천사가 하나님의 뜻을 발표하지 않고 그렇게 할 사람을 부르도록 명령하신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신자들의 유일한 교사이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사람에게 맡겨 배우게 하시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는 이 바울을 셋째 하늘로 이끌어 가 말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놀라운 계시를 받을 만하게 만드시기로 이미 정하셨다(고후 12:2-4) 그러면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께서 이런 증거로 그 유용성을 증명하신 성직을 멸시하거나 또는 무용지물이라고 해서 폐지할 것인가?

 

(성경에 있는 직분들을 설명한다. 4-9)

 

4. 에베소서 4장에 있는 여러 가지 직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교회 정치를 주관하는 사람들을 바울은 첫째로 사도, 다음은 선지자, 셋째는 복음 전하는 자, 넷째는 목사, 끝으로 교사라고 부른다(4:11). 이중에서 끝에 있는 둘만이 교회 내의 평상직이요, 처음 것은 주께서 그의 나라의 초창기에 세우셨고 필요에 따라 가끔 부활시키신다.

사도들이 하는 일의 성격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16:15) 명령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사도들에게는 아무 제한도 두지 않으시고 전세계를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라고 하셨는데, 이는 각 국민 사이에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을 증명하기위해서, 자기는 어느 한 도시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여기 저기 전파하였고 다른 사람이 놓은 터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고 주의 이름을 듣지 못한 곳에 교회들을 세웠노라고 한다(15:19-20). 그러므로 사도들이 파견된 목적은 반역하는 세상을 돌이켜 하나님께 올바르게 복종하게 만들며 복음을 전해서 세계 각지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교회의 창설자로서 온 세계에 그 터를 닦아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전 3:10).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사람을 모두 "선지자"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계시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불렀다(4:11). 이러한 자는 현재 없거나 아니면 옛날같이 흔히 볼 수 없다.

나는, "복음을 전하는 자"는 사도들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그들 다음에 있으면서 그들을 대신해서 활동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디모데, 디도 및 그 외의 비슷한 사람들이 전도자였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다음 두 번째로 임명하신 70인의 제자들도 아마 전도자들이었을 것이다(10:1).

이렇게 해석한다면(이 해석은 바울의 말과 의견에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이 세 가지 직책은 교회 내의 항구직으로서 정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없는 곳에 새로 세우거나 교회를 모세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야 한 당시에 한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주께서 그 후에 간혹 사도들을, 적어도 그들 대신에 전도자들을 일으키신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바로 우리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 적그리스도의 반역으로부터 교회를 돌이키기 위해서 이런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직책이 바르게 조직된 교회 내에는 자리가 없기 때문에 "임시직"이라고 부른다.

다음이 목사와 교사로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직책들이다. 나는 둘 사이의 차이점이 다음과 같다고 믿는다. 교사들은 제자 훈련이나 성례 집행이나 경고와 권면을 하는 일을 맡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만을 맡았다. 이는 신자들 사이에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목사직은 이 모든 의무를 겸한다.

 

5. 임시직과 항존직

 

우리는 이제 교회 조직에서 어떤 것이 임시직이며 어떤 것이 항존직으로 제정되었는가를 생각하겠다. 전도자와 사도를 한 덩어리로 뭉친다면 우리는 상응하는 두 쌍을 볼 수 있다. 현대의 교사들은 고대의 선지자에 그리고 목사는 사도에 해당한다. 선지자의 직분은 그 탁월한 특수 계시의 은혜 때문에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나 교사의 직분도 성격이 매우 비슷하며 그 목적이 똑같다. 그래서 새로운 복음을 세상에 널리 선포할 목적으로 주께서 택하신 열두 제자들은 가장 높은 서열에 있었다(6:13, 1:1). 그런데 "사도"라는 말은 원래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주께서 자기의 사자로서 파견하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듣지 못한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세상이 확실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열두 제자에게(후에 바울이 첨가된 그들에게) 특별한 칭호를 주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바울은 다른 장소에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이 명칭을 적용하고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던" 사람들이라고 했다(16:7). 그러나 그가 엄밀히 구분해서 말하고 싶을 때에는 처음 등급에만 이 말을 적용한다. 또 이것이 성경의 일반 용법이다(10:1). 그러나 목사들은(각각 그에게 맡겨진 교회를 다스린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사도들과 똑 같은 책임을 맡았다. 이제 그 책임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더 분명하게 듣기로 하자.

 

6. 사도들과 목사들

 

주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셨을 때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복음을 전파하며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죄 사함을 얻게 하라고 명령하셨다(28:19). 그러나 주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자기를 본받아 그의 몸과 피의 거룩한 상징인 떡과 잔을 분배하라고 명령하셨다(22:19,20). 여기서 사도의 자리에 앉는 사람들에게 신성불가침의 영원한 법이 부여되었고, 이 법에 의해서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며 성례를 집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사도를 사칭한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목사들은 어떤가? 바울은 자기뿐만 아니라 그들 전체에 대해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한다(고전 4:1).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도 감독은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다"(1:9)고 말한다. 이 구절들과 흔하게 자주 나타나는 비슷한 구절들을 보아서, 우리는 목사의 직분에는 복음을 전하며 성례를 집례 한다는 두 가지 특별한 기능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가르치는 방법은 공개적인 강론만이 아니라 각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가르칠 수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을(20:20-21) 그들도 안다고 말하였고, 조금 뒤에 자기는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다고 했다(20:31). 그러나 나는 지금 선한 목사의 은사를 자세히 알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목사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보이려는 것뿐이다. , 그들이 교회 위에 임명된 것은 무위도식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사람들에게 진정한 경건을 가르치며 거룩한 성례를 집례하고 올바른 치리를 유지하며 실시하라는 것이다. 교회의 파수꾼으로 임명된 모든 사람을 향하여 주께서는 만일 그들의 태만으로 인해서 또 어떤 사람이 무지 때문에 멸망한다면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3:17) 선포하신다. 바울이 자신에 관해서 한 말은 그들 모두에게 해당된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 9:16-17). 끝으로, 사도들이 전세계를 위해서 한 일을 목사들은 각각 자기가 맡은 양떼를 위해서 해야 한다.

 

7. 목사는 자기 교회에 매여 있다

 

우리는 목사를 각각 그 교회에 파송하지만, 동시에 한 교회에 매여 있는 목사가 다른 교회를 돕지 못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분란이 생겨서 그가 있어야 한다든지 어떤 애매모호한 문제에 대해서 그의 조언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는 일정한 질서가 필요하다. , 목사는 각각 모든 일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를 진다. 일정한 임지나 목적이 없이 돌아다니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보다 목사 자신들의 이익을 생각해서 마음대로 교회를 버리고 함부로 한 곳에 모이는 것은 혼란을 일으킨다. 따라서 목사는 각각 자기의 한계로만족하며 다른 사람의 영역에 침입하지 않는다는 이 결정을 될 수 있는 대로 전체적으로 지켜져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제정하신 일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에 세운 교회들에 각각 처음으로 장로들을 임명했고(14:22-23) 또 바울은 디도에게 명해서 각 도시에 장로들을 임명하게 했다(1:5).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감독들에 대해서(1:1) 또 골로새 교회의 감독 아킵보에 대해서(4:17) 말한다. 그리고 누가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한 주목할 만한 설교를 기록했다(20:18-19).

그러므로 교회를 다스리며 돌보는 일을 담임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이 법에 자기가 구속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법률가들의 말과 같이) 교회 소유지에 매이지 않았다. , 꽁꽁 묶여 그 땅에 매여 있어서 공공의 복리가 요구하는 때에도 그리고 그 요구가 정당한 방법과 순서를 밟아 온 때에도 그 땅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곳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자기에게 유리하다고 해서) 그곳을 떠나거나 그곳에서 놓이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유익하다 할 때에도 자기의 사사롭게 개인적인 결정으로 할 것이 아니라 공적인 인정을 기다려야 한다.

 

8. 말씀을 전하는 직분 : 장로

 

내가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을 "감독", "장로", "목사" 또는 "사역자"라고 부른 것은 성경이 이 말들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모두 "감독"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디도에게 각 도시에 장로들을 임명하라고(1:5) 명령한 직후에, "감독은‥‥‥책망할 것이 없고"라고 한다(1:7, 딤전 3:1참조). 다른 데서는 한 교회에 있는 여러 감독에게 문안하였다(1:1). 사도행전에는 그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이야기한 기사가 있는데(20:17), 그는 그들을 "감독"이라고 부른다(20:28).

지금까지는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만을 생각했다는 것을 여기서 지적해야 하겠다. 우리가 인용한 에베소서 4장에서(4:11) 바울은 다른 직분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로마서와(12:7-8) 고린도전서에서(고전 12:28)는 다른 직분들을 능력, 병 고치는 은사, 통역, 다스리는 것, 구제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 가운데서 두 가지는 일시적인 것이며 길게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생략하겠다. 그러나 다스리는 일과 구제하는 일 두 가지는 영구적인 것이다.

다스리는 사람들은(고전 12 :28) 신자들 사이에서 선택된 장로들이었으며, 감독들과 함께 도덕적인 견책과 권징을 시행하는 일을 맡았다고 나는 믿는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할 것이라는 바울의 말을(12:8) 달리 해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각 교회에는 경건하고 근엄하고 거룩한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된 장로회가 있어서 잘못을 시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후에 말하겠다. 그런데 이런 직분이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은 경험상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다스리는 직분은 모든 시대에 필요하다.

 

9. 집사

 

구제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12:8) 두 가지 종류에 관해 언급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공적인 직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집사직에는 두 가지 다른 등급이 있었을 것이다. 만일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바울은 처음 문장에서 구제 물자를 나누어주는 집사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둘째 문장은 빈민과 병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말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과부들도 두 번째에 속하였다(딤전 5:9-10). 여자들이 맡을 수 있는 공적 직분은 구제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뿐이었다. 이 해석을 인정한다면(또 인정해야 한다), 집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교회를 위해서 구제 사업을 관리하는 집사들과 직접 빈민들을 돌보는 집사들이다.(섬기는 일:집사직)라는 말에는 더 넓은 의미가 있지만, 성경에서 집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교회가 구제 물자를 분배하며 빈민을 돌보고 빈민 구제금을 관리하는 일을 맡긴 사람들이다. 그들의 기원과 임명과 직분에 대해서는 누가가 사도행전에 기록했다(6:3).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과부들은 매일 구제에서 제외된다는 소문을 터뜨렸기 때문에, 사도들은 자기들은 말씀 전하는 일과 공궤를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정직한 사람 일곱 명을 선택해서 이 일을 맡기라고 신자들에게 부탁했다(6:1이하). 그러므로 사도들의 교회에는 이런 종류의 집사들이 있었고 우리도 그것을 본받는 것이 마땅하다.

 

(사역자들의 소명과 위임과 안수. 10-16)

 

10. 소명에는 일정한 절차가 있어야 한다

 

성회에서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했지만(고전 14:40) 질서가 가장 잘 지켜져야 할 때는 교회 정치를 확립할 때이다. 여기서는 무슨 일을 불규칙하게 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썽을 일으켜 떠드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일이나 다스리는 일을 경솔하게 맡지 못하게 하려고(주의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있으므로) 소명을 받지 않은 사람은 교회의 공적 직분을 맡지 못하도록 특별히 주의했다. 진정한 사역자로 인정되려면 먼저 합당한 방법으로 소명을 받아야 하고(5:4), 다음에 이 소명에 응해야 한다. , 명령을 받은 일은 책임을 지고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바울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는 자기의 사도직을 주장하려고 할 때에는 거의 언제나 자기가 소명을 받았다는 것과 자기 직분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을 암시한다(1:1, 고전 1:1). 그리스도의 이 위대한 일꾼도 자기가 주의 명령으로 사도직에 임명됐다는 것과 위임된 일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만 교회에서 발언할 권위를 감히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중의 한 가지도 없는 사람이 이런 영예를 가지겠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이 직분 완수의 필요성에 관해잠깐 언급했으므로 지금은 소명만을 논하겠다.

 

11.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는 네 가지 점을 이해해야 한다. 어떤 종류의 사역자가 될 건인가?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임명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임명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나는 교회의 공적 질서에 관련된 외형적인 엄숙한 소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비밀한 소명은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각 일꾼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아는 일이며, 교회는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제공된 직책을 받는 것은 야심이나 탐욕이나 그 밖의 이기심 때문이 아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려는 소원 때문이라는 것은 우리의 속마음이 더 잘 증거한다.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의 인정을 얻으려면 우리 각 사람에게 이런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은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비록 깨끗지 못한 양심으로 이 직분에 임하는 사람도 그의 사악한 심사가 알려지지 않았으면 교회 앞에서 합당하게 부르심을 받는다. 또한 사람들은 평신도에 대해서 그들이 성직에 적당하고 유능하리라고 생각할 때에는 흔히 소명을 받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좋은 목사의 경건을 겸한 학식과 그 밖의 은사는 확실히 이 직분을 위한 일종의 준비가 되기 때문이다. 주께서 이런 높은 자리에 예정하신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선 그 직분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아무 준비도 없이 빈손으로 임직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이 여러 가지 직책을 논할 때, 각 직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특히 가져야 할 은사를 먼저 열거했다(고전 12:7-11).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제목 중의 첫째이므로 이제부터 그것을 논하고자 한다.

 

12. 누가 어떻게 사역자가 될 수 있는가

 

바울은 두 구절에서(1:7, 딤전 3:1-7) 어떤 감독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충분히 논한다. 요약하면, 건전한 교리를 믿으며 생활이 거룩하고, 그들의 권위를 빼앗거나 그들의 사역에 수치가 될만한 허물이 없는 사람이라야 한다(딤전 3:2-3, 1:7-8). 집사와 장로들에 대해서도 같은 요구를 한다(딤전 3:8-13). 우리는 항상 그들이 맡은 직무에 합당하고 충분하도록, , 그 직분 수행에 필요한 기능을 알고 있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그들에게 필요한 무기와 도구를 주셨다(21:15, 24:49, 16:15-18, 1:8). 그리고 바울은 선하고 진정한 감독을 그려 보인 다음에, 그렇지 않은 사람을 선택해서 자기를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디모데에게 충고한다(딤전 5:22).

내가 "어떻게"라고 하는 것은 선택하는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때에 갖추어야 할 종교적 경외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누가는 신자들이 장로를 세웠을 때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기록했다(14:23 기타) 그들은 무엇보다도 엄숙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반드시 최고의 경의와 주의를 가지고 그 일을 시도했다. 그러나 특히 기도에 전념했고 지혜와 분별의 영을 하나님에게 간구했다(참조, 11:2).

 

13. 누가 사역자들을 택할 것인가

 

우리가 논할 셋째 점은 어느 누가 사역자들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소명은 다른 것들의 경우와 다르기 때문에 확실한 표준 이 될 수 없다. 사도직은 특별한 직분이었고 그 자리를 더욱 현저한 표식으로 뚜렷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도가 될 사람들을 친히 주의 입으로 임명하실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사람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주의 명령만으로 임명되어 임무 수행에 나섰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유다의 후임자를 구했을 때에도 감히 한 사람을 확정하지 않고 두 사람을 내세워서 주께서 제비로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을 결정하시게 했다(1:23-26). 바울이 자기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자라고 한 말도(1:1,12 참조)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람으로 말미암은"이라는 첫 말씀은 모든 말씀 선포자들과 공통되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이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말씀은 바울에게 독특하고 또 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이 점을 자랑한 것은 합법적인 목사가 가질 것을 가졌다는 자랑뿐만이 아니라 사도직을 표시하는 휘장까지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는 바울의 권위를 깎아 내리기 위해서, 그는 보통 제자이고 처음 사도들만이 사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자기의 전도가 암암리에 공격을 받는 것을 알고는 그의 전도의 위엄을 보호하기 위해서 부득이 자기는 모든 점에서 다른 사도들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는 것을 밝혔다. 따라서 자기는 보통 감독같이 사람들의 결정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입과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으로 선택되었다고 언명했다.

 

14. 사람을 통해서

 

건전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사람들이 감독을 임명하는 것이 합법적 소명과 모든 점에서 조화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는 이 관습을 증명하는 구절이 많다. 방금 인용한 바울의 말에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한 것도 이 관습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평상시에 사역자를 선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도들에게 특유한 점이 자기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특권을 행사하셔서 바울도 임명하셨지만 동시에 교회를 통한 소명이라는 규율을 이용하셨다.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13:2). 성령께서 자신의 선택을 확인하신 후에 이렇게 따로 세우며 안수하신 목적은 사람들을 통해서 사역자들을 임명한다는 교회 규율을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하셨다고 언급하신 후에 교회가 그를 지명하게 하심으로써 가장 명백한 실례로 이런 질서를 시인하셨다. 맛디아를 선택했을 때에도(1:23) 같은 점을 볼 수 있다. 사도직은 심히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한 사람을 사도로 선택하지 못하고 두 사람을 세워서 그 중 한 사람이 제비로 뽑히게 했다. 이와 같이, 이 선택은 하늘의 명확한 확인을 얻었지만 조금도 교회 질서를 무시하지 않았다.

 

15. 평신도의 투표

 

사역자를 선택하는 것은 교회 전체인가, 또는 그의 동료들과 도덕적 책망을 맡은 장로들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의 권위로 임명되는가 하고 혹자는 사역자 임명에 대하여 물을 것이다.

이 권위를 한 사람에게 주어야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디도에게 보낸 바울의 말을 인용한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1:5). 디모데에게도 비슷한 말을 한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딤전 5:22). 그러나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와 그레데에 있는 디도가 교회를 다스릴 때에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속은 것이다. 디모데와 디도가 다른 사람들 위에 있은 것은 건전하고 좋은 충고를 하려는 것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자기 생각대로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증거를 위조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나는 비슷한 예를 들어 나의 주장을 밝히겠다.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각 교회에 장로를 임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방법에 대해서 투표를 했다고, ,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라고 기록했다(14:23). 그러므로 이 두 사도는 장로들을 "택했다"고 하지만 당시의 헬라 사람들의 선거 풍속에 따라 교회 전체가 거수로 그 소원을 표명한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들도 어떤 집정관이 민회를 열고 새로 치안관들을 "택했다"고 기록한 것이 많은데, 이것은 투표를 받으며 선거를 주관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분명히 바울은 자기의 권리라고 주장한 것보다 저 큰 권리를 디모데와 디도에게 허락했을 리가 없다. 바울은 항상 신자들의 투표에 의해서 감독들을 "택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은 교회 전체의 권리와 자유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감독을 선정하며 공중의 결정과 증언에 의해서 감독이 적임자임을 증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서 유래한 일이라고 한 키프리아누스의 주장은 옳은 말이다. 사실 레위족의 제사장들에 대해서도, 그들을 성별하기 전에 온 백성 앞에 내세운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8:4-6, 20:26-27). 맛디아를 사도로 보선한 것도 같은 방법이었고(1:15이하) 일곱 집사도 신자들이 보고 찬성하는 가운데서 임명했다(6:2-7). 키프리아누스는 말한다. "이런 예들을 보더라도 성직자를 임명할 때에는 반드시 일반 신도들이 보고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야만 그 임명이 모든 사람의 증거로 검토되며 공정하고 합법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역자의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합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 적당한 듯한 사람들을 일반신도의 합의와 승인을 얻어서 임명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선거는 다른 목사들이 주관해야 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렇게 해야만 회중이 경박함과 악한 의도나 무질서 때문에 탈선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16. 임명

 

우리가 소명의 마지막 점이라고 한 임명식이 아직 남아 있다. 사도들이 사역자를 임명했을 때에 안수하는 것 이외의 다른 의식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이 관습이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복을 받고 성별 받기를 원할 때 그 위에 손을 얹음으로써 하나님께 바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려고 할 때에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40:14). 우리 주께서 어린아이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에도 이 관습을 따르셨다(19:15). 유대인들이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제물에 안수한 것도(8:12, 27:23, 1:4, 3:2,8,13, 4:4,15,24,29,33 기타) 같은 뜻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안수함으로써 그들이 사역자로서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눈에 보이는 은사를 신자들에게 베풀 때에도 이 방법을 사용했다(19:6). 여하간 이것은 교회의 사역자를 임명할 때마다 사용한 엄숙한 의식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목사와 교사와 집사들을 성별했다.

안수에 대해서는 일정한 가르침이 없지만 사도들이 항상 이 방법을 쓴 것을 보아서, 이 방식을 엄밀히 지키는 것이 곧 가르침을 대신할 것이다. 확실히 이 의식은 직분의 위엄을 교회에 알리는 징표로서 유용한 동시에, 임명을 받는 사람에게 대해서도 앞으로는 그가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기 위한 매인 몸이라는 것을 경고한다. 그뿐 아니라, 안수의 진정한 원래의 의미를 회복한다면 그것은 허무한 표징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어떤 것도 이유 없이 교회 내에 세우시지 않는다면 이 의식도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이므로, 미신적으로 악용하지만 않는다면 결코 무식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회중 전체가 사역자에게 안수한 것이 아니고 목사들만이 안수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항상 여러 목사가 안수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일곱 집사들과 바울과 바나바와 몇몇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여럿이 안수한 것이 분명하다(6:6, 13:3). 그러나 바울은 다른 곳에서, 여럿이 아니라 자기가 디모데에게 직접 안수했다고 회상한다. 그는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라고 말한다(딤후 1:6). 바울이 장로회의 안수에 대해서 디모데전서에서(딤전 4:14) 한 말을 나는 장로들이 안수했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고 임명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의 뜻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장로로 임명했을 때에 안수에 의해서 그대가 받은 은혜가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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