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장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확실히 된다 : 더욱이 사악한 자들은 그들에게 운명지워진 공정한 파멸을 스스로에게 초래한다
(선택된 자들은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가입된다. 1-5)
1. 소명은 선택에 의존하며, 따라서 전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택된 자들이 부르심을 받는 것과. 악한 자들의 눈이 어두워지며 마음이 굳어지는 데 대해서 논의해야 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약속의 보편성이 모든 인류를 동등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를 반박할 때 이미 다소 말한 바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을 자신 안에 감추어 두시지만, 부르심으로 그 선택을 나타내실 때에는 무차별적으로 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부르심은 선택의 "증거"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 8:29).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롬 8:30). 이것은 그들을 후에 영화롭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주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실 때에 이미 자녀로 정하셨으나, 그들이 부르심을 받지 않으면, 그 위대한 복을 소유하지 못한다. 반대로, 부르심을 받으면, 이미 선택에 어느 정도 참여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받는 성령을 바울은 "양자의 영"(롬 8:15)이라고도 하고, "인치심"과 "미래의 기업에 보증"이라고도 한다(엡 1:13-14, 고후 1:22, 5:5 참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증거하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속에 장차 양자가 되리라는 확신을 확고하게 인치시기 때문이다.
복음의 선포는 선택이라는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이런 선포는 악인들도 함께 듣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서는 선택을 완전히 증거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효과적으로 가르치신다. 이런 뜻으로 하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말씀을 우리는 이미 인용했다.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6:45).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 다른 곳에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신다(요 6:44). 어거스틴은 현명하게 이 구절을 설명했다. "진리(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는 것이(요 6:45) 사실이라면, 오지 않는 사람은 배우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올 수 있는 사람도 오겠다는 뜻을 품으며 그대로 행하지 않는 한 그가 실제로 오리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께로부터 배운 사람은 올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실제로 온다. 그리고 이 결과에 이미 가능성의 유익과 의지의 움직임과 행동의 결과가 나타나 있다." 다른 곳에서는 더욱 분명한 표현을 사용한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는 말씀은(요 6:45),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우고서 내게 오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운 사람은 모두 온다면 오지 않는 사람은 확실히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우지 않았다. 만일 듣고 배웠다면 왔을 것이다‥‥‥아버지께서 말씀하시며 우리가 아들에게로 오도록 가르치신다는 이 가르침은 육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조금 뒤에, "그러므로 이 은혜는 사람의 마음 위에 비밀히 베푸시는 것인데, 강퍅한 마음은 이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은혜를 주시는 목적은 우선 마음의 강퍅함을 제거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서 들을 때‥‥‥하나님께서는 강퍅한 마음을 없애주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겔 11:19, 36:26)‥‥‥이와 같이 그들을 약속의 자녀의 그릇으로 만드시며, 영광을 위하여 예비하신다(13장).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오도록 가르치시지 않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람은 모두 긍휼로 가르치시고, 가르치시지 않는 사람은 심판으로 가르치시기 때문이 아닌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기' 때문이다"(롬 9:18, 14장)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택하신 사람들을 자녀라고 부르시며, 스스로 그들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심으로써 가족 안에 받아들이시고 자신과 연합하여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신다. 성경은, 부르심과 선택이 연결될 때, 이 일에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긍휼 이외의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충분히 보여준다. 누구를 왜 부르시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그가 선택하신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선택에 대해서 묻는다면, 어느 모로 보든지 긍휼만 나타난다. 여기서 바울의 말은 참으로 의미가 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이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원하고 달음박질하는 것 사이를 나누는 사람들이 보통 이해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사람의 소원과 노력은 하나님의 은혜가 돌보지 않으면, 그 자체로서는 어떤 의미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의도움을 받으면, 구원을 얻는 일에서 그 의미가 부여된다고 한다.
그들의 이 너절한 반대에 대해서 나는 어거스틴의 말로 반박하겠다. "만일 사도가 말하는 것이, 주께서 긍휼히 여기시지 않으면 사람의 소원과 달음질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에 불과하다면, 이 말을 돌려서, 사람의 소원과 달음질이 없으면 긍휼만으로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하게 불경건한 말이다.
그렇다면 사도는 모든 것을 주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로 돌리고, 우리의 소원과 노력에는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는다. 우리는 이 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이 거룩한 분은 이렇게 썼다. 나는 그들이 여기서 제기하는 궤변을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노력과 원하는 것이 없다면, 바울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사람에게 있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구원의 일부를 사람의 노력에 돌리는 것을 보고, 그들의 오류를 이 문장의 전반부에서 비난하고, 후반부에서 구원의 전체를 하나님의 긍휼에 돌린다. 또 예언자들도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부르심만을 끊임없이 선포하지 않는가?
2. 부르시는 방법은 오로지 은혜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준다
그뿐 아니라, 부르심의 성격과 적용까지도 이 사실을 분명히 증명한다. 부르심은 말씀의 선포일 뿐 아니라, 또한 성령에 의한 조명이다. 우리는 예언서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1).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 자비가 이방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셨을 때에 그를 어떤 곳에서 취하셨는가를 회상시키신다. 즉, 아브라함은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다고 하신다(수 24:2-3 참조). 하나님께서 가치 없는 자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셔서 말씀의 빛을 비추어 주실 때 그의 인애가 거저 주시는 것임을 충분히 또 분명히 보여주신다. 여기서 이미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하심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증거를 배척하기 때문에 더욱 엄중한 심판이 그들 위에 내려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악인들에게는 그의 영의 효과적인 역사를 허락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내적인 소명은 우리를 속일 수 없는 구원의 보증이다. 여기 요한의 말이 해당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4:13 참조).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값없이 자신을 내어 주셨을 때에, 육은 적어도 응답했노라고 하여 그 일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 주시지 않으면 육에는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없다고 밝히신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은 각 사람의 감사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선택 때문이라고 하신다. 이 점에 대한 현저한 실례를 누가의 보고에서 볼 수 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를 들었다. 모든 사람이 꼭 같은 말씀으로 교훈을 받은 후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하였다(행 13:48). 부르심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택만이 주관하고 있는데 부르심이 값없이 주시는 것임을 부정한다면, 이 얼마나 파렴치한 짓인가?
3.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며, 선택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오류에 주의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은 선택에 동의함으로써 하나님의 협력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사람의 의지가 하나님의 계획보다 우위를 점한다. 이는 우리가 받는 것은 믿는 능력뿐이고, 믿음 자체는 아니라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은 생각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혜를 그렇게까지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어떤 이유로 선택을 믿음에 의존시킨다. 마치 믿음에 의해서 확인되지 않으면 선택은 의심스럽고 효력이 없게 된다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우리에게 관계된 범위 내에서는 선택이 확인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이 감추어져 있다가 밝히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이 말의 뜻은 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지금 확인된다는 것, 이를테면, 지금 인침을 받는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라야 선택이 효과를 나타내며, 여기서 그 타당성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물론 복음에서 확신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에까지 파고 들어가려고 한다면, 그 깊은 바다가 우리를 삼켜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결정을 우리에게 밝히 보이실 때, 우리는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며 결과가 원인을 압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대로 우리는 비추임을 받는다고 성경이 가르치는데, 이 찬란한 빛에 눈이 부시어 선택을 생각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이상 어리석고 부당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동시에 우리는 자기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면, 말씀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믿고 간구하리만큼 우리의 신뢰하는 마음이 순수하고 강렬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가까우며 우리 입과 마음에 있는(신 30:4) 하나님의 계획을 확인하기 위해서, 구름 위를 떠돌아다니려는 잘못된 갈망을 품었다. 그러므로 이런 경솔한 태도를 침착한 믿음으로 억제하며, 하나님께서 외면적인 말씀으로 우리에 대한 그의 감추인 은혜를 충분히 증거하실 수 있게 해야 한다. 다만 우리에게 풍부하게 물을 배급하여 마시게 하는 그 수도관이 우리가 그 원천에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막지 않아야 한다.
4. 선택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하는 올바른 방법과 그른 방법
선택이 우리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느끼게 하는 믿음, 즉, 복음에 대한 믿음에 선택의 힘을 의존시키는 것은 잘못이므로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확신을 얻으려고 할 때에 가장 좋은 순서를 따르려면 선택을 확실히 증명하는 표징들, 즉, 부수적인 표징들을 굳게 잡고 놓치지 않아야 한다. 사탄이 신자들을 낙심시키려고 할 때에 사용하는 가장 중대하고 위험한 유혹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릇된 곳에서 선택을 탐구하겠다는 악한 소원을 일으킨다. 내가 "그릇된 곳에서 탐구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 불과한 자가 하나님의 지혜의 깊은 내부로 침입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최고의 영원에까지 침투해서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자기에게 대한 어떤 결정이 있었는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간은 밑이 없는 소용돌이 속에 몸을 던져 그것에 삼키우고 말 것이다. 그는 풀려날 수 없는 무수한 올무에 걸리며, 볼 수 없는 암흑 속에 묻혀버릴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높은 데까지 올라가려고 할 때에, 어리석은 그의 이해력이 무서운 파멸의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또 이 유혹은 우리의 거의 전부가 다른 어느 유혹보다도 가장 많이 빠지기 쉽기 때문에, 그만큼 더욱 치명적이다.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면 나의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내가 선택되었다는 어떤 계시가 있는가? 이런 생각을 자주 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한 번 이런 생각을 마음에 가지면, 그 사람은 끊임없이 견딜 수 없는 고민으로 불행에 빠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생각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만다. 이런 경험은 이런 사람들이 예정에 대해서 얼마나 비루한 공상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양심을 점령하여 동요를 일으키며, 하나님과의 평화와 평온을 잃게 만드는 오류가 사람의 마음을 침범하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선을 면하려면, 우리는 조심스럽게 이 바위를 피해야 한다. 여기 부딪치고서 멸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예정에 대한 논의를 험한 바다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고의로 위험한 곳에 뛰어들지만 않는다면 그 바다를 건너는 뱃길은 안전하고 평온하며 심지어 상쾌하다고도 하겠다. 자기들의 선택을 더욱 확신하려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그의 말씀과 별도로 탐구하는 사람들이 치명적인 심연에 빠져버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대로 선택을 바르고 합당하게 검토하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위로의 열매를 거둔다. 그러므로 우리의 탐구 방법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출발점과 종점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매일 받는 은혜가 저 은밀한 선택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느끼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사야서에서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고 한 것과 같다(사 25:1).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일종의 증거품같이 쓰셔서, 우리가 허락되는 범위 내에서 그의 계획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알도록 우리에게 확인하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증거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한가를 생각해보아야겠다. 베르나르드가 이 문제에 대해서 적절한 말을 했다.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서 말한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의 결정은 움직이지 않는다. 주의 평화의 목적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위에 여전히 있어서 움직이지 않으며, 그들의 악을 용서하고 그들의 선행을 갚아준다. 그래서 주의 자비의 놀라운 방법으로 선한 일뿐만 아니라 악한 일까지도 서로 협력하여 선한 결과를 나타낸다‥‥‥‥'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롬 8:33). 나의 의를 위해서는 하나님만 내 편에 계시면 충분하다. 나는 그에게만 죄를 지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전가하시지 않기로 결정하신 모든 일은 마치 그것이 없었던 것과 같다." 그리고 조금 뒤에, "오, 진정한 안식처로다! '거할 곳'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합당하도다. 오, 하나님을 뵙는 곳, 성내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나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산란한 하나님이 아니라, 인자하고 다정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의 감화를 체험하는 곳이로다! 이 환상은 공포심을 일으키지 않고 도리어 위로를 준다. 불안한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고 도리어 진정시킨다. 우리의 감각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고 도리어 안정시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느낀다. 평화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평화로운 것을 제공하신다. 그리고 안식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곧 우리들의 진정한 안식이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5. 선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하며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자비하심과 인자하신 마음을 찾으려면, 우리는 우선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은 오직 그리스도 위에 머무신다(마 3:17참조). 우리가 구원과 생명과 천국의 영생을 구하려면, 그리스도 이외에는 다른 곳이 없다. 그만이 생명의 샘이며, 구원의 닻이며, 천국의 상속자이시다. 그런데 선택의 목적은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로 삼아 주신 우리가 그의 은혜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선택의 목적을 아무리 이모저모로 생각해보아도, 결국은 이 한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녀로 삼으신 사람들은 그들 자체로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한다(엡 1:4).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실 수 없었다면, 따라서 그들을 미리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자들로 만드시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그의 나라를 상속하는 영예를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안에서 선택되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선택의 보증을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하지 못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도 선택의 보증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의 선택을 보아야 하는 거울이며, 우리가 이렇게 보는 데는 아무런 자기기만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으로 영원 전부터 정하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시기로 예정하셨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인정하시는 사람들을 그의 자녀로 삼으려고 하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계속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계 21:27 참조) 너무나 분명하고도 확고한 증거가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의 확실한 친교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즉, 자신과자신의 모든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복음 선포를 통해서 증거하셨다(롬 8:32). 우리는 그로 옷 입으며(롬 13:14), 그에게까지 이르러(엡 4:15), 그가 살아 계시므로 우리도 살 게 하려 하신다고 한다. 성경에서 자주 반복되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셔서(롬 8:32, 요 3:15 참조)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게 하셨다는(요 3:16) 것이다. "이를 믿는 자는‥‥‥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한다(요 5:24). 이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시며(요 6:35), 이 떡을 먹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하신다(요 6:51,58). 다시 말하거니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모두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로 인정하시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 인정되는 이상의 무엇을 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초월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라면, 그의 안에서 이미 얻은 것, 그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그의 밖에서 찾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미친 짓인가?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원한 지혜이며, 불변의 진리이며, 견고한 계획이시므로, 우리는 그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 우리가 구하는 아버지의 뜻과 조금이라도 다를까봐 염려할 필요가 없다. 도리어 그리스도께서는 그 아버지의 뜻의 처음부터 영원까지를 우리에게 충실히 계시해 주신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도 이 생각을 항상 가져야한다. 선택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기도를 촉진시키지만,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 "오 하나님, 만일 저를 선택하셨으면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하는 태도를 취하거나, 조건을 붙여 흥정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만족하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겠는지를 다른 데서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기록된 바른 생각을 바르게 이용할 줄을 안다면, 이 지혜는 우리를 여러 가지 함정에서 구해낼 것이다. 일정한 한도 내에 두어야 할 일을 이리저리 끌어내는 것은 삼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호 하에서 선택된 자들의 인내는 안전하다 : 반대론자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해석함. 6-11)
6.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그들의 선택이 불변하고 영속하다는 확신을 주신다
우리의 선택의 확고성이 우리가 부르심을 받는 일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우리의 확신을 든든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을 아는 지식으로 비춰주시고 교회의 품에 안겨 주신 사람들을, 또한 그가 돌보시며 보호하신다고 한다. 그가 받아 주시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셨고, 영생을 얻도록 보호하게 하셨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모든 사람을 그의 보호 하에 두셨다고 선언하신다(요 6:37,39, 17:6,12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셨는지를 알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맡기셨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 위에 세우신 유일한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의 보호 하에 받아들이셨는지를 아직도 의심한다면, 이 의심에 대한 대답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기꺼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시며, 우리가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의 양떼에 넣어 주시겠다고 선언하신다(요 10:3).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는 인자하신 마음으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셨고 우리를 맞이하러 오신다. 그는 우리를 그의 양떼에 넣으시고 그의 우리 안에 두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의 상태에 대한 불안이 몰래 숨어든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선택된 자들이 부르심을 받는다고 가르치며(롬 8:30) 그리스도께서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하시기 때문이다(마 22:14). 참으로 바울은 과도한 자신을 가지지 말라고 권고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또한 그대는 하나님의 백성에 접붙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찍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접붙이실 수 있기 때문이라(롬 11:21-23 참조)고 한다. 끝으로 견인을 첨가하지 않으면 부르심과 믿음도 무가치하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또 견인은 모든 사람이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런 불안에서 해방시키셨다. 확실히 미래에 적용될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마찬가지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7-29).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라고(마 15:13)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 뿌리를 박은 사람들은 결코 구원에서 뽑히지 않으리라는 뜻을 역으로 암시하신다. 요한의 말은 이 뜻과 부합한다.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요일 2:19). 그리고 바울이 생명과 죽음, 현재와 미래의 일을 이겼노라고 당당하게 발언을 하는 이유도(롬 8:38)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의 자랑은 견인의 은사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확실히 이 생각을 모든 선택된 자들에게 적용한다. 다른 곳에서도 같은 생각을 말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다윗도 믿음이 약해진 때 이와 같은 도우심을 의지했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138: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선택받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신 것과 같이 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다는 것은(눅 22:32)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일을 보아서 우리는 그들의 경건이 변함없기를 기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거부를 당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된 사람들은 떨어져 나갈 위험성이 없다고 추론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 일에서 무엇을 깨닫기를 원하셨는가? 우리는 이미 그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앞으로 영원히 반전하리란 것을 확신하라는 것이 아닌가?
7. 참으로 믿는 사람은 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백성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다시 떨어져 멸망으로 급행하는 것은 매일 있는 일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은 하나도 멸망시키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에서도 "멸망의 자식"만은 제외하셨다(요 17:12).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에게 매달린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진심으로 신뢰해야만 우리는 선택을 굳게 확신할 수 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라고(요일 2:19) 요한은 말한다. 선택된 자들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표징이 그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신자들에게 복음의 말씀에서 구하라고 권고하는 것과 같은 선택에 대한 확신이 그들에게 있다고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예가 있다고 해서 주의 약속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감을 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진정한 믿음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들이며, 그가 그들의 보호자와 목자가 되시므로,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요 3:16, 6:39 참조). 우리는 조금 뒤에 유다에 대해서 말하겠다.
바울은(고전 10:12 참조) 신자들의 단순한 확신을 금하지 않고, 순전히 우둔하고 육적인 자신을 금한다. 이런 자신은 거만과 자만과 타인에 대한 멸시를 낳으며,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경외심을 없애며,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게 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가르칠 때, 유대인들이 제외되고 그 대신에 자기들이 용납되었다고 해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무정하고, 교만한 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한다(롬 11:18이하 참조). 그는 또 두려움을 품으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겁을 내며 마음을 흔들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하게 받으려고 준비할 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감이 결코 약화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신자들을 개인적으로 상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파벌들을 상대로 말한다. 교회가 두 파로 갈려서 경쟁과 분열이 생겼기 때문에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특별하고 거룩한 백성의 자리에 놓였으니, 두려움과 겸손한 마음을 품는 것이 마땅하다고 경고한다. 그들 중에는 교만해진 사람이 많았고, 그들의 그러한 자만은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곳에서 우리의 희망이 미래에 곧 죽음의 저편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알았으며, 우리의 장래를 의심하는 것은 우리가 품은 소망의 성격과 가장 반대되는 생각이란 것을 알았다.
8. 일반적인 소명과 특별한 소명(마 22:2이하)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신(마 22:14)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매우 큰 오해가 있다. 위에서 분명히 말한 점을 굳게 지킨다면, 이 말씀에는 모호한 데가 없을 것이다. 즉, 소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일반적인 소명으로 하나님께서는 외면적인 복음 선포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자신에게로 부르신다. 복음을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서(고후 2:16 참조), 또 더욱 엄격한 정죄의 기회로서 제시하시는 사람들도 부르신다. 다른 종류의 소명은 개별적인 것이며, 대개는 신자들에게만 주신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으로 신자들의 마음속을 비추시어, 선포하신 말씀이 그들의 마음속에 머물게 하신다. 그러나 간혹 신자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비추어 그도 참여하게 하시지만, 후에 그들의 배신으로 인하여 그들을 버리시며 더 심한 맹목으로 벌하시는 일도 있다.
그런데 주께서는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소수 사람들에게만 바르게 존중될 것을 아시고, 하나님을 어떤 임금에 비유하여 말씀하신다. 왕은 장중한 연회를 베풀고자 사자들을 사방에 파견하여 많은 사람을 초청하나, 수락하는 사람이 심히 적다. 각각 일이 있어서 올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이 거절하기 때문에 왕은 할 수 없이 네 거리에서 만나는 대로 누구든지 부르기로 한다(마 22:2-9). 여기까지는 이 비유를 외면적인 소명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주께서는 후에 첨부해서, 하나님을 좋은 주인으로 비유하신다. 주인은 이 식탁 저 식탁으로 돌아다니면서 손님들에게 다정한 인사를 한다. 그러나 혼인 잔치에서 입어야 할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면, 합당하지 않은 옷을 입은 사람이 그 부정한 옷으로 연회의 기쁨을 모욕하는 것을 묵인하지 않는다(마 22:11-13). 나는 이 말씀이, 믿노라고 하면서 교회에 들어왔으나 그리스도의 성결을 입지 않은 사람들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이런 치욕을, 이런 암적 존재를 언제까지나 참으시지 않고, 비열한 그들에게 합당한 처분을 내려 그들을 쫓아버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초청을 받은 사람은 많았으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었다(마 20:16 참조). 그러나 이것은 신자들이 자기의 선택에 대해서 생각할 소명은 아니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 소명은 악인들에게도 공통된 것이지만, 또 다른 종류의 소명은 중생의 영이 동반한다(딛 3:5 참조). 중생의 영은 장차 있을 기업의 보증이며 확인하는 인인데(엡 1:13-14), 그는 주의 날이 올 때까지 이 인을 우리의 마음속에 거두신다(고후 1:22). 요약하면, 위선자들이 진정한 경배자들과 같이 경건을 자랑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부당하게 차지한 자리에서 그들을 쫓아내실 것이다(마 22:13). 이것은 시편에 있는 말씀과 같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시 15:1).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시 24:4, 15:2이하 참조).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시 24:6) 이와 같이 성령은 신자들에게 참으라고 역설하신다. 또한 이스마엘 자손이 교회 안에 섞여 있어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 사람들은 결국 가면을 벗고 수치스럽게 쫓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9. 유다의 예는 반대 증거가 되지 않는다
같은 이유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예외, 즉,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라고(요 17:12)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예외에도 해당한다. 이 표현은 정확하지 않으나 모호한 것은 아니다. 유다가 그리스도의 한 양으로서 뽑혔던 것은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양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에서 다른 곳에서 그가 사도들과 함께 선택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직무에 관련된 말씀이었다.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하신다(요 6:70). 바꿔 말하면, 그를 사도직에 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위한 선택을 말씀하실 때에는 선택된 자들 중에서 그를 멀리 버리신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요 13:18). 만일 누가 이 두 구절에 있는 "택한다"는 말을 혼동한다면, 그는 심한 곤란에 빠질 것이나, 그 차이에 주의한다면 사태는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레고리가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알뿐이고, 선택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고 한 것은 위험한 오류이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두려워하며 떨라고 권고하며, 그 이유로서는 우리는 오늘 우리가 무엇인지를 알지만, 앞으로 무엇이 되겠는지는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말은 그가 이 돌에 걸려 넘어졌다는 것을 충분히 알려 준다. 그는 선택을 행위의 공로에 의존시켰기 때문에, 사람들이 낙심할 이유를 충분히 제공하고, 그들의 마음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을 그들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신뢰로 전환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자들은 우리가 처음에 한 말의 뜻을 어느 정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바르게 이해하면 예정은 믿음을 조금도 흔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장 견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가끔 우리의 이해 수준에 맞도록 말씀을 조절하신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예컨대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겔 13:9).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 속한다고 인정하시는 사람들을 생명책에 기록하기 시작하셨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거에 의해서(눅 10:20)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이름이 처음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빌 4:3). 그러나 에스겔서의 말씀은 선택된 사람들 가운데 지도자같이 보이던 자들이 버림을 당한다는 것을 표시할 뿐이다. 시편의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시 69:28, 계 3:5 참조)라는 말씀과 같다.
10. 부름받기 전에 선택된다. 따라서 선택의 씨앗은 없다
선택된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양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출생 직후도 아니며, 모두 동시에 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데 따라서 되는 일이다. 그들이 저 최고의 목자에게로 모아지기 전에는 모두 다 같이 황야를 헤맨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궁극적인죽음의 멸망으로 돌입하는 것을 특별한 자비로 막아 주시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들도 아담의 후손이요, 인류에 공통된 부패한 냄새를 피운다. 그들이 순전한 불경건으로, 심지어 절망적인 불경건으로 끌려가지 않는 것은 그들의 천성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안전을 돌보시며 손을 그들에게 뻗쳐 주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날 때부터 일종의 선택의 씨가 심어져 있어서 그 힘으로 그들은 항상 경건과 하나님께 대한 경외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성경의 권위에 의하여 지지되지 않으며, 우리의 경험 자체로도 부정한다. 그들은 몇 가지 예를 들어, 선택된 사람들은 비추임을 받기 전에도 경건 생활을 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흠 없는 생활을 하였고(빌 3:5-6) 고넬료는 구제와 기도로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사람이었다고 한다(행 10:2). 바울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지만 고넬료에 대해서는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바이다. 그는 그 때에 이미 성령의 조명을 받아 중생했고, 다만 복음의 분명한 계시만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이 소수의 예에서 무엇을 얻어내려는 것인가? 선택된 사람들은 모두 항상 경건한 정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리스티데스(Aristides), 소크라테스(Socrates), 크세노크라테스(Xenocrates), 스키피오(Scipio), 쿠리우스(Curius), 카밀루스(Camillus) 등의 고귀한 생활을 보고, 이 사실을 근거로 우상 숭배의 암흑 속에 버림을 받은 사람들도 모두 거룩함과 순결함을 성의껏 추구했다고 추론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참으로 성경에는 그들을 명백하게 부인하는 곳이 한 둘 뿐이 아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중생 전의 상태를 묘사한 것을 보면, 이 씨는 한 알도 보이지 않는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그 때에 너희는……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9).
그러나 그들은 이런 말이 참되신 하나님께 대한 무지를 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을 것이다. 그들도 선택된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그런 무지 속에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다시는 거짓말이나(엡 4:25) 도적질을(엡 4:28)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의 말은 파렴치한 무고죄가 될 것이다. 또 그들은 다른 구절들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고린도서에는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고전 6:9-10) 말한 후에 즉시 이어, 그들도 모두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바로 이런 죄를 짓던 자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았고 그의 영에 의하여 해방을 얻었다고 첨가한다(고전 9:11). 마찬가지로 로마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롬 6:19).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롬 6:21).
11. 씨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속하신 것이다
그러면, 악에 철저하고자 하는 듯이 가장 추악하고 가증한 죄 속에서 뒹굴면서 평생을 여러 가지 더러운 생활을 하던 사람에게서 어떤 선택의 씨가 싹텄다는 말인가? 만일 바울도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말할 생각이었다면(고전 6:9-11 참조), 그들을 이런 추악에 빠지지 않도록 구해주신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가 얼마나 컸느냐 하는 것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베드로도 그의 추종자들이 선택의 영원한 씨에 대해 감사하도록 권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의 정욕을 따른 것이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경고한다(벧전 4:3). 실례들을 든다면, 기생 라합에게는(수 2:1) 믿기 전에 어떤 의의 씨가 있었는가? 예언자들의 피로 온 예루살렘이 거의 적셔졌을 때의 므낫세(왕하 21:16), 죽는 최후 순간에 회개를 생각한 도적(눅 23:42)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선택의 씨가 있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호기심이 강한 사람들이 성경에 없는 일을 꿈꾼 이런 주장을 버리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즉, 멸망으로 갔다. 이 멸망의 구렁에서 구출하기로 결정하신 사람들을 주께서는 적당한 때까지 연기하시며, 그 동안은 다만 그들이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의 죄는 저지르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자들을 처리하시는 방법. 12-17)
12. 타락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처리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심으로써 영원한 계획으로 그들에게 예정하신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과 같이, 타락한 자들에 대한 계획도 그들에 대한 심판으로 시행하신다. 그러면 현세에서 치욕을 받으며 사후에는 멸망하도록 창조하신 사람들, 그의 진노의 도구가 되며 준엄성의 실례가 되도록 창조하신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이 예정대로 되어지도록 하나님께서는 흑은 말씀을 듣는 능력을 빼앗으시며, 혹은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지각을 마비시키신다. 듣는 능력을 빼앗으시는 예는 무수하므로 그 중에서 가장 명백하고 현저한 것을 하나만 택하겠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약 4천년이 경과하였고, 그 동안에 그 분께서는 구원의 교리의 빛을 모든 이방인들에게 숨기셨다. 그들을 무가치하다고 보셨기 때문에 이 위대한 은혜를 나눠주시지 않았더라도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후손들 또한 조금이라도 더 가치가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경험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말라기가 유력한 증인이 된다. 그는 그들의 불신앙과 심한 모독적인 행위를 폭로하면서 구속자가 오리라고 선언한다(말 4:1이하). 그러면 왜 구속자를 전자에게는 주시지 않고 후자에게만 주셨는가? 여기서 하나님의 은밀하고 측량할 수 없는 계획을 넘어 더 깊은 원인을 추구하는 사람은 쓸데없이 고통만 당할 것이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하지 않으면, 포피리(Porphyry)의 어떤 제자가 하나님의 공의를 태연하게 헐뜯을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아무도 부당하게 멸망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들이 멸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인애 때문이라고 주장하면, 우리는 궤변을 사용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말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최고 심판자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정죄하시고 그의 빛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눈을 어두운 상태에 버려두심으로써 그의 예정을 이루어 나가신다. 눈이 먼 예는 매일 볼 수 있고, 성경에도 증거가 많다. 같은 설교를 백 명이 들을 때, 20명은 곧 순종하는 믿음으로 그 설교를 받아들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거나 비웃거나 싫어한다. 이런 차이는 그들의 악의와 타락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여전히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받아들이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시지 않는다면 그 본성은 다른 자들과 똑같은 악의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라고 묻는(고전 4:7) 바울의 질문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심중에 혼란을 느낄 것이다. 그의 말의 의미는,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것은 그들 자신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이다.
13. 말씀의 선포가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내리시고 다른 사람들은 버리시는가?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누가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라고 그 이유를 말한다(행 13:48).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라는(롬 9:21-22) 이유 외에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어거스틴과 같이 다음의 말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악인들의 뜻을 선하게 만드실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러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하시지 않는가? 그의 뜻이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왜 다른 데 있는지는 그만이 아신다." 즉, 우리는 분에 넘치는 지혜를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크리소스톰과 같이, 원하는 사람, 손을 뻗치는 사람은 하나님이 끌어당기신다고 모호한 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적절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차이는 하나님의 판단에 있지 않고, 온전히 사람의 결정에 있는 것같이 될 것이다. 사실, 사람의 마음 자체에는 그런 충동이 없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도 성령의 자극이 필요하다. 자주 장사 루디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부인이었으나, 바울의 말을 듣고 유익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실 필요가 있었다(행 16:14). 이것은 한 여인에 대한 기록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경건의 길에서 전진하려면 성령의 은밀한 역사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다.
주께서 말씀을 보내셔서 사람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고자 하시는 일이 많다는 것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주는 왜 바로에게 그렇게 많은 요구를 하시는가? 사자를 자주 보내심으로써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기를 바라셨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을 보내시기 전에 결과를 아셨고 또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애굽으로 돌아가라"(출 4:19),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출 4:21).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일으켜 세우셨을 때에도, 완고하고 배반하는 백성에게 보내신다고(겔 2:3) 미리 경고하셔서, 그가 귀가 먹은 자들을 상대로 노래하게 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셨다(겔 12:2). 예레미야에 대해서도, 그가 전하는 말이 불같이 되어 백성을 나무같이 멸망시키며 흩어버리리라고 하신다(렘 1:10, 5:14 참조). 이사야의 예언은 이 점을 더욱 철저하게 주장한다. 그를 보내시면서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신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마 13:14-15, 막 4:12, 눅 8:10, 요 12:40, 행 28:26-27, 롬 11:8 참조).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시되 그들의 귀를 더욱 막히게 하시려는 것이며, 빛을 비추시되 그들의 눈을 더욱 멀게 하시려는 것이며, 진리를 가르치시되 그들을 더욱 우둔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약을 쓰시되 그들을 낫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은 이 예언을 적용해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능히 믿지 못한 것은(요 12:39) 하나님의 이 저주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비추어 주고자 하시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씀을 수수께끼에 싸서 보내심으로써 그들이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하고 더 심한 우둔에 빠지게 하신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신비유를 사도들에게만 해석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실 때에,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하신다(마 13: 11). 알아듣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것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누구의 허물인지를 생각하고, 더 묻지 말라. 말씀에는 모호한 점이 많을지라도, 악인의 양심을 정죄할 만한 빛은 언제든지 충분히 있다.
14. 마음이 강퍅해지는 원인
주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왜 이렇게 하시는지는 이제부터 알아보아야겠다. 사람들의 불경건과 사악과 배반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 즉, 왜 어떤 사람들은 굴복하여 순종하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강퍅한가의 이유는 아직 분명치 않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모세에게서(출 9:16) 주목한 점까지 전진해야 한다. 즉, 주께서 처음부터 모세를 세우신 것은 주의 이름을 온 천하에 알리시려는 것이었다(롬 9:17). 버림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복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의 악의와 사악한 마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첨부해야 할 조건이 있다. 즉, 그들이 그 패악한 상태에 넘겨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정당하고도 헤아릴 수 없는 판단이 그들을 세워, 그들의 정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에 엘리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유일한 훈계를 무시한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 때문이었다고 할 때에(삼상 2:25), 그 구절은 그들 자신이 사악해서 그런 완악한 태도가 생겼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동시에, 그들을 그 완악한 상태에 버려두신 이유도 언급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실 수도 있었지만, 그의 확고부동한 결정이 그들을 멸망에 예정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한도 이와 같이 같은 뜻을 말한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하였더라"(요 12:37-38, 사 53:1). 요한은 완악한 자들을 책망 받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면서도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성령께서 그 맛을 보게 하시기까지는 그 맛을 모른다는 이유로 만족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는 이사야의 말을(요 6:45, 사 54:13) 인용하시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버림을 받고 교회와 멀어진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 이외의 다른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는다. 바울의 말도 이 점을 확인한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참조) 복음이 선포될 때마다 그것이 어떤 사람을 노하게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배척을 당한다고 말하면서, 바울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복음을 귀하게 여긴다고 한다(고전 1:22-24 참조). 그는 조금 전에(고전 1:21) 이런 사람들을 "믿는 자들"이라고 불렀지만, 믿음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 당연히 차지할 자리를 부여하기를 거부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정정하는 의미로 두 번째 발언을 첨부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자기들의 믿음의 원인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돌리도록 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는 조금 뒤에 그들을 "하나님께서‥‥‥택하사"라고 가르친다(고전 1:27-28).
불경건한 자들은 이런 말을 듣고서, 하나님은 그 무절제한 권능으로 가련한 피조물들을 학대함으로써 잔인한 쾌락을 누린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일 천 가지 죄상에 대해서 한 가지도 만족한 변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악인들이 당하는 일은 하나님의 지극히 의로운 판단에 일치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이 일에 대한 이유를 우리는 분명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높은 지혜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무지를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15. 여기에서 말한 주장을 반박하는 듯한 성경 구절:⒜ 에스겔 33:11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은 성경을 인용해서 반대하는 버릇이 있다. 그런 구절에서는 악인들이 하나님께 대한 반대의 소리를 높여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악인들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멸망한다는 것을 하나님 자신이 부정하시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간단하게 설명하여, 그것이 우리가 위에서 표명한 견해와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에스겔서에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고 한 말을(겔 33:11), 그들은 인용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것을 인류 전체에 적용하기를 기뻐하신다면, 복종할 가능성이 있는 무수한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고무하시지 않고, 매일 불러도 마음이 점점 완악해지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시는 것과 같이, 복음 선포와 기적은 유대에서보다(마 11:23) 니느웨와(마 12:41 참조) 소돔 사람들 사이에서(마 11:23) 더 많은 효과를 나타냈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속하기를 원하신다면, 은혜를 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는 가련한 사람들에게 회개의 문을 열어 주시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므로 여기서 예언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받은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구별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대립시킨다면, 그것은 이 구절에 대한 극심한 곡해가 될 것이다. 예언자의 진정한 뜻을 찾는다면, 그것은 그가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만 용서의 소망을 전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죄인이 마음을 돌이키기만 하면 물론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용서해주신다는 것이 예언자가 전하는 소망의 요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의 회개를 원하시는 동안은 그가 죽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부르는 자들의 회개를 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의 경험은 가르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속임수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외면적인 부르심은 그것을 듣고도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들의 모든 핑계를 빼앗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신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베푸시는 은혜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예언자가 죄인이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목적은 신자들에게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보증하려는 것이며, 악인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의 큰 인자하심과 친절에 응답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이중으로 커진다는 느낌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긍휼은 언제든지 회개하는 자를 맞이하신다. 그러나 에스겔을 포함한 모든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어떤 사람이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친다.
16. ⒝ 디모데전서 2:3-4, 기타 유사한 구절들
둘째로 그들은 바울의 글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한 구절을 인용한다(딤전 2:3-4). 이 구절은 위에서 말한 이유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나의 대답은, 첫째로, 하나님이 어떻게 그 일을 원하시는 가는 문맥상으로 보아 분명하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점을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시며, 그들이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고 한다. 만일 반대자들이, 이 일은 그들이 구원의 교훈을 받아들이도록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확정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다음의 모세의 말을 그들은 어떻게 이해하는가?"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7). 하나님께서 어떤 백성들에게는 복음의 빛을 주시고 다른 많은 백성들에게서는 빼앗으신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어떤 사람들은 경건의 교훈을 겨우 그 희미한 초보라도 맛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순수한 인식에도 결코 이르지 못했으니,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이 점을 보아서, 바울이 추론하는 뜻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는 조금 전에 디모데에게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에서 엄숙한 기도를 드리라고 명령하였다(딤전 2:1-2). 그러나 거의 소망이 없는 종류의 인간들을, 즉, 그리스도의 몸 밖에 있을 뿐 아니라, 전력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파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 다소간 어리석게 보였기 때문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첨부한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시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3-4). 바울의 이 말은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층의 인간들에 대해서도 구원의 길을 막으시지 않고, 자비를 베푸셔서 아무도 그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셨다는 것을 표명할 뿐이다.
다른 말씀들도 하나님께서 그의 감추신 판단 안에서 모든 사람에 대해서 어떤 결정을 하셨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인들이 돌이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모든 죄인을 용서하신다고 선언할 뿐이다. 만일 반대자들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신다는 말씀을(롬 11:32 참조) 끝까지 주장한다면, 나는 이의를 제기하는 뜻에서 다른 곳에 있는 말씀을 제시한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이 말씀은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하신(출 33:19) 말씀과 조화가 되도록 해석해야 한다. 자비를 반드시 베푸셔야 할 사람들을 택하시는 그 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기서 바울은 개인들이 아니고 사람의 계층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은 하나님께서 항상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눈이 어두워 극력 반대하는 자들이지만 왕과 고관들까지도, 복음에 참가하게 만드실 자유가 하나님께는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벧후 3:9) 한 말을 근거로, 그들은 더욱 강력한 반대론을 제기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곤란은 그 다음 구절에서 곧 해결된다. 왜냐하면 회개하여야 한다는 그의 뜻은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심은 분명히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강퍅한 마음을 주시되 소수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겔 36:26).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회심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하신 말씀은(슥 1:3) 부적당한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생각해주시지 않으면 죽을 인생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사람 편에서 회개를 선택한다면, 바울은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라고(딤후 2:25)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모든 사람에게 친히 회개를 권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은밀한 활동을 통해서 선택된 자들을 자신에게로 이끌지 않으신다면, 예레미야는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렘 31:18-19).
17. 다른 반대론들에 대답함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복음의 약속을 믿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복음의 약속이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증거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의 불가침의 결정과 반대되는 일을 원하신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구원의 약속은 그것이 아무리 보편적일지라도, 그 약속의 결과를 주의해본다면, 버림받은 자들이 예정되었다는 것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우리는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그것이 우리 안에서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믿음이 사라지면, 동시에 약속도 폐지된다. 이것이 약속의 성격이라면, 약속과 예정이 서로 어긋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으로 포옹하시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진노를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예정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무차별적으로 구원을 선언하신다. 나는 이 말씀들은 서로 완전히 합치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하나님의 자비를 찾으며 간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자비가 미친다는 뜻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조명해주신 사람들만이 그의 자비를 구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예정하신 사람들만을 조명하신다. 약속은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확실하고 신실하여 어김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그 분께서 신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증거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사람이라고 하시는가? 믿음만 있으면 죄인들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경건한 자들이 양심에 더욱 든든한 확신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피난처를 제공했는데도 그 은혜를 잊고 거절했기 때문에 죄의 속박을 피하여 숨을 만한 피난처가 없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는 복음을 통해서 이 두 종류 사람들에게 모두 제시되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과 불경건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믿음, 즉, 하나님의 조명이다. 그 결과 경건한 사람은 복음의 의사를 느끼고, 불경건한 사람은 복음에서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한다. 조명 자체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척도가 된다.
그들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는 그리스도의 비탄을(마 23:37) 인용하지만, 이 말씀도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사람의 자격으로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의 은혜를 계속 거절한 데 대해서도 책망하신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논제가 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정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보전하시려고 주도면밀하게 노력하셨다는 것과, 그들은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자기들의 욕망에 몰두하여 함께 모이기를 완강하게 거절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악한 의도가 하나님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중의 뜻을 가지셨다고 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 없다고 항의한다. 그들이 이 항의의 뜻을 바르게 해석한다면, 나도 그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과 같은 감정을 품으시고 그의 위엄 있는 자리보다 낮은 데까지 내려오신다고 하는 구절들이 많은데, 그들이 이런 구절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께서는 배반하는 백성을 부르시기 위하여 손을 뻗치셨으며(사 65:2),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려고 온종일 수고하셨다. 이런 표현이 비유적인 것임을 무시하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적용한다면 여러 가지 무익한 혼란이 생길 것이지만, 인간적인 것을 하나님께 옮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혼란은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데서 제출한 해결 방법이면 충분할 것이다. 즉,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여러 가지로 생각되지만, 하나님 자신은 이것이나 저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말하듯이(엡 3:10) 하나님의 각종 지혜에 따라 우리의 지각을 마비시키셨다가 마침내 일시는 그의 뜻에 어긋나는 듯이 보이는 일이 그가 놀라운 방법으로써 뜻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그들은 경박한 논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므로, 이미 죄를 지어 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 아닌 사람들까지 버리신다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이 돼지와 개들에게까지도 미친다는 것을 잊은 듯한 말이다. 그러나 인류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들은 대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한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겠다고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며, 그들 중에서도 꽃을 따듯 소수만물 택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나 이 훼방하는 자들이 악담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말씀이 있다. 곧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라고 하신 것이(마 5:45),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실 때의 그 소수에게(마 25:34) 기업을 맡기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을 그 어느 하나라도 미워하시지 않는다고 항의한다. 이 점을 나는 그들에게 양보한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하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나의 주장은 여전히 확고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을 빼앗긴 자들은 저주를 받을 일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롬 10:12) 첨부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한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하겠지만, 그들은 바울의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기뻐하심에 따라,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시며"(롬 9:24), 아무에게도 매이시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고 한 구절을 가지고 항의를 제출할 때(롬 11:32, 갈 3: 22의 융합), 우리는, 구원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받는 모든 사람이 그 구원을 그의 자비로 돌리기를 원하신다고 말하여 항의를 처리할 수 있다. 그러면 양편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제출될 때 우리가 내린 결론은 바울과 함께 이 심오한 비밀 앞에서 두려워 떠는 이것이다. 그러나 완악한 자들이 떠든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바울이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 9:20)라고 한 말을 외쳐야 한다.
이는 어거스틴의 올바른 주장과 같이, 사람의 공의를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의 공의를 측량하려는 사람들은 사악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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