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장 이 교리를 항상 거짓되고 부당히 평가해온 그릇된 비난들에 대한 반박
(유기는 선택과 하나님 뜻의 작용이 동시에 일어난 결과이다. 1-3)
1. 선택이 있을 뿐 유기란 없단 말인가?
그런데 인간의 오성(五性)은 이런 말들을 들을 때에, 그 교만을 억제할 수 없어, 전투 나팔이나 들은 듯이 함부로 날뛰며 소동을 일으킨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지 않으려는 듯이 선택을 용인하면서도 누군가 정죄받는 자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무지하고 유치한 짓이다. 버림과 대조되지 않으면 선택은 성립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사람들을 따로 구별하신다고 말하면서, 선택만이 소수에게 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우연히 또는 자기의 노력으로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하시는 것은,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예정하신 기업에서 그들을 제외하고자 하시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 천사들까지도 찬양하는 하나님의 불가해한 계획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칠 때에, 그 말씀을 듣고도 제재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은 용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자비가 하나님의 손과 뜻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퍅하게 만드는 것도 그의 손과 뜻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롬 9:14이하). 또 바울은 내가 말한 사람들과는 달라서,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서 거짓 구실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고, 진흙이 토기장이와 언쟁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경고할 뿐이다(롬 9:20). 그런데 하나님께 정죄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마 15:13)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말씀의 뜻은 분명히,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농장에 거룩한 나무로서 심어주시지 않은 사람들은 멸망을 받기로 작정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 말씀은 유기의 표가 아니라고 한다면, 아무리 분명한 일이라도 그들에게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논란을 그치지 않는다면, 건전한 믿음은 바울의 충고로 만족해야 한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한편으로는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롬 9:22-23) 하나님과 싸울 까닭이 없다고 한다. 독자들은 바울이 모든 수군거리는 중상의 기회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권능에 대한 궁극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데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이는 우리의 모든 지력을 삼켜버리는 깊은 판단을 우리의 결정에 예속시키려고 하는 것은 사악한 짓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하나님께서는 그 관대하게 용인하시는 사람들을 전적으로 배척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할까 해서 그들에 대한 심판을 보류하시는 것이라고 무가치한 대답을 한다. 이것은 "멸하기로 준비된"(롬 9:22)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심하기를 기다리면서 참으신다고 바울이 생각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어거스틴은, 권능과 인내가 결합될 때, 하나님은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권능으로 주관하신다고 이 구절을 바르게 설명한다. 그들은 또 다음과 같이 첨가한다. 진노의 그릇들에 대해서는 "멸하기로 준비되었다"고 하며, "하나님은 긍휼의 그릇들을 예비하셨다"고(롬 9:23) 말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울이 이렇게 함으로써, 구원의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동시에, 멸망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하여,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다른 표현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앞에 있는 문구의 가혹한 점을 완화한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멸하기로 준비된 일을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 이외의 어떤 것에 옮긴다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짓이다. 이 점은 바로 앞에 있는 문맥에서도 언급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셨다고(롬 9:17)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하게 하신다"고 하였다(롬 9:18).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이 강퍅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결론이 된다. 적어도 나는 어거스틴이 가르친 것을 지지한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이리를 양으로 만드실 때에,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극복할 만한 더 강력한 은혜로 그들을 개조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완고한 자들을 회심시키시지 않는 것은 더욱 강력한 은혜를 나타내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은혜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첫째 반대론 : 선택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폭군인 셈이다. 2-3)
2. 하나님의 뜻이 곧 의의 표준이다
경건하고 온건한 사람들과 자기가 사람인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발언들만으로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악독한 개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내뿜는 독은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우리는 필요한 대로 그 하나하나에 대답하려 한다.
미련한 자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의 비난을 들으셔야 하는 듯이 여러 가지로 항의한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아직 아무 죄도 짓지 않고 그를 노엽게 한 일도 없는데, 무슨 권리로 그들에 대해서 노하시는가? 원하는 대로 사람을 멸망에 내어 주신다는 것은 재판장의 합법적인 선고라기보다 폭군의 변덕과 같다"고 의문을 갖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의 공과와는 별도로 하나님의 결정만으로 영원한 죽음에 예정된다면, 사람은 하나님과 쟁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만일 이런 생각이 경건한 사람의 마음에 떠오른다면, 한 가지 점만 고려하더라도 이런 생각을 충분히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즉, 호기심만으로 하나님의 뜻의 원인을 추구하는 것은 심히 악한 짓이라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존재의 원인이며 또 그러해야 마땅하다. 만일 하나님의 뜻에 어떤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보다 먼저 무엇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은 그 먼저 있는 것에 지배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합당치 않다. 하나님의 뜻은 의의 최고 표준이기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 일은 그가 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무엇이든지 의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왜 그것을 원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이 질문은 하나님의 뜻보다 더 위대하고 더 높은 어떤 것을 찾으려는 것이며, 그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사람은 자기의 경솔한 생각을 억제해야 한다. 없는 것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있는 것까지 발견하지 못하게 될 염려가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곰곰이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효과적인 제지력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저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자의 대담한 태도에 대해서는, 주님 자신이 우리의 도움도 받음 없이 그의 의로 충분히 자기변호를 하실 것이다. 즉, 그들의 양심에서 모든 궤변과 구실을 빼앗고 그들의 유죄를 선언하시고 정죄하실 것이다.
또 우리는 "절대적 권력"이라는 허구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세속적인 개념이므로 우리에게는 당연히 가증한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법인 무법한 신을 상상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말과 같이, 정욕에 흔들리는 사람에게는 법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은 아무 허물도 없을 뿐 아니라, 완전성의 최고 표준이며 모든 법의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답변하실 의무가 있다는 생각과 또 우리에게 우리의 생각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해서 판단할 만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따라서 우리는 허용된 범위를 넘으려고 할 때에는 시편에 있는 말씀 곧 죽을 인생이 하나님을 판단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항상 승리자가 되시리라는 경고의 말씀에서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시 51:4)
3. 하나님께서는 버림을 받은 자들에 대해서 공평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지키심으로써 원수들을 억제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태연하게 조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도록,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무기로 주신다. 만일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사망의 심판을 받을 일을 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어떤 사람들을 사망에 예정하셨느냐"고 우리에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대답 대신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본성에 따라서 사람을 심판하시려고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빚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죄로 더럽혀졌으므로 하나님께는 극히 가증할 뿐이다. 이것은 폭군적인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공의의 입장에서 가장 공평하게 평가한 결과일 것이다. 주께서 사망으로 예정하시는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본성의 상태에 의해서 그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어떤 불공평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나오게 하여, 그들이 나기 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가 그들을 묶어 영원한 재난에 넘겼다고 해서,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쟁론하게 해 보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리어 그들의 책임을 추궁하신다면, 하나님의 이 변호 방법에 대해서 그들은 어떤 항변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 전부가 썩은 덩어리에서 생겨났다면, 당연히 정죄를 받아야 한다. 자기들의 본성이 자연히 자기들을 사망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그들은 싫든 좋든 간에 느끼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으로 사망에 예정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공정하시다고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항의하는 그들의 심사가 얼마나 패악한가는 그들이 정죄의 원인을 고의로 은폐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들은 스스로 정죄의 원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을 비난함으로써 자기들을 정당화해보려고 한다. 하나님은 정죄를 내리시는 당사자라고 내가 백 번 말할지라도 이것은 옳은 말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양심에 새겨져 자꾸만 눈에 띄는 죄책을 신속하게 씻어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公義)는 우리의 의문에 귀속하지 않는다. 4-7)
4. 하나님의 정의 속에는 역시 하나님의 법령이 숨겨져 있다
그들은 다시 다음과 같이 항의한다. 즉, 지금 그들의 정죄의 원인이라고 하는 그 부패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미 그렇게 되도록 예정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그들이 부패 속에서 멸망할 때에, 그들은 아담이 하나님의 예정으로 타락하여 불행에 빠지고 그 후손들까지 끌어넣은 그 불행의 벌을 치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자신의 피조물들을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속이는 이는 공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한다. 인류가 지금 빠져 있는 이 비참한 상태에 아담의 모든 후손이 빠진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 일이라는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또 우리는 결국 항상 하나님의 뜻의 단독 결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과, 그 결정의 이유는 하나님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런 비난을 받으셔야 한다는 결론은 여기서 직접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0-21).
그들은 그러한 대답으로는 하나님의 의가 참으로 변호되지 않으며 우리가 정당한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궤변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시고 싶은 대로하시는 힘이 있으며, 그 힘을 막을 수 없다고 하는데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과는 전연 다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생각하라고 할 때보다 더 강력한 이유를 말할 수 있는가?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어떻게 불의를 용인하실 수 있는가?(창 18:25 참조). 심판하시는 것이 당연히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 일이라면, 하나님은 본성에 따라 의를 사랑하시며 불의를 미워하신다.
따라서 사도는 자기의 주장이 곤란을 당한 것같이 도피하는 구실을 찾지 않고,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표준으로 측량하거나 사람의 약한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것임을 밝힌다. 사도는 하나님의 판단에는 심히 깊은 기초가 있어서(롬 11:33), 사람의 마음이 그 깊이를 알려고 하면 완전히 삼켜버려지고 말 것이라는 것까지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또,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어떤 법으로 판단하려 하며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때는 그 일을 비난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미한 짓인가를 가르친다. 비록 올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만, 솔로몬의 말은 잘 알려져 있다.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는 미련한 자들과 범법하는 자들에게 각각 그 삯을 주시느니라"(잠 26:10 제네바 성경 참조). 솔로몬은 여기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과 죄인들에게 그의 영을 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그의 결정에는 그들에 대한 벌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자기에게 있는 이성(理性)이라고 하는 극히 약한 척도로 무한자를 측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서운 정신 착란에 빠진 자들이다! 바울은 고결한 지조를 지키는 천사들을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이라고 부른다(딤전 5:21). 만일 그들의 변함없는 충성이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에 근거한 것이라면, 다른 천사들의 반역은 그들이 버림을 당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사실에 대한 원인은 그들이 버림을 받았다는 것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버리심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안에 숨겨져 있다.
5. 하나님의 감추어진 법령은 샅샅이 파헤쳐 질 것이 아니라, 순종하며 경외되어야 한다
그러면 여기에 마니(Mani)나 콜레스티우스(Coelestius)의 제자, 즉, 하나님의 섭리를 훼방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나는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섭리는 지극히 위대하여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하므로(롬 9:19-23 참조) 섭리에 대한 이유를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일인가! 이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이 제한되어, 그가 생각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도 하실 수 없기를 원하는가?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말한다. 주께서는 멸망으로 갈 줄을 분명히 미리 아신 사람들을 창조하셨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고자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하고자 하셨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 물을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의 논쟁에 끌어내리는 것은 합당치 않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의로우신 최고 지배를 동시에 의미하기 때문이다. 의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왜 불의를 문제 삼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바울을 본받아 악한 자들의 입을 막으며, 그들이 감히 떠들 때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 9:20). 하나님께서 그의 위대한 사업을 그대들의 무지에 맞도록 조절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일들이 육에 대해서는 감추어졌다고 해서 악하다는 말인가? 그대들은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하나님의 판단은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판단은 "큰 바다"라는 것을(시 36:6) 그대들은 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결정하신 일을 그대들의 좁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지를 생각해보라. 그대들의 정신 착란에 빠진 탐구욕으로 그 "바다"에 뛰어든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 그대들 자신의 멸망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대들의 이성이 말한다.
욥기와 예언서들이 하나님의 알 수 없는 지혜와 무서운 권능을 선포하는데, 그대들이 적어도 두려운 마음으로 자기를 억제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만일 그대들의 마음이 괴롭거든, 부끄러워 할 것 없이 어거스틴의 충고를 들으라. "사람인 그대는 내게서 대답을 들으려 한다. 나 역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대와 나는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라고(롬 9:20) 하시는 이의 말씀을 듣자. 믿는 무지는 경솔한 지식보다 낫다. 공로를 구하라. 그대는 형벌만을 발견할 것이다. '깊도다!'(롬 11:33). 베드로는 모른다고 하며, 도적은 믿는다. '깊도다!' 그대는 이유를 찾는가? 나는 깊음 앞에서 떤다. 그대는 이론을 말하라. 나는 찬탄하겠다. 그대는 변론하라. 나는 믿겠다. 나는 깊음을 본다. 그러나 밑바닥에는 미치지 못한다. 바울은 놀라운 일을 발견했기 때문에 쉬었다. 그는 하나님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라고 하는데, 그대는 측량하려고 하는가? 그는 하나님의 길을 찾을 수 없다고 하는데(롬 11:33), 그대는 찾아내려고 하는가?" 더 계속하더라도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성급한 그들도 만족할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이미 성령을 통해서 바울의 입으로 하신 변호 이외에 다른 변호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말하기를 중지할 때, 우리는 바른 말을 잊어버린다.
6. 둘째 반대론 : 선택 교리는 사람에게서 죄책과 책임감을 제거한다
그들의 불경건은 또 다른 반대론을 제기한다. 이것은 직접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죄하신 죄인을 정당하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심판자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경한 자들은 지껄인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정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만들어 놓은 일들을 왜 사람들에게 죄로서 전가하는가? 그들은 어떻게 해야 좋은가? 하나님의 결정에 반대해서 싸울 것인가? 그것은 전연 불가능한 일이므로 해보아도 무익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원인이 하나님의 예정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교회의 저술가들이 보통 사용하는 변호법을 피하려 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견하신 악은 사람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예지는 사람이 죄인으로 인정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런 변호를 하면 궤변은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계속되어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 예견하신 악을 막고자 하셨다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시지 않았으므로, 그의 예정된 계획에 의해서 사람을 지상에서 그렇게 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현재 하고 있는 일을 모두 하도록 창조되었다면, 그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피할 수 없이 하는 일 때문에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이 어려움을 바로 해결할 것인가를 살펴보아야겠다. 우선, 모든 사람은 솔로몬이 한 말에 찬성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보라, 만사의 처리가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며 구원과 사망의 결정도 그의 권한 내에 있으므로, 그는 그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죽기로 결정되어 출생하여서, 그 멸망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도록 정하셨다. 만일 누가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섭리에 의해서 그들에게 필연성을 부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악행이 있을 것을 미리 예견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일부를 말하는 것이요 전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 학자들도 간혹 이런 해결책을 사용했으나, 주저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스콜라 학자들은 이것을 의지하고서, 이에 대해서는 어떤 반대도 있을 수 없는 듯이 말한다. 사실, 나도 예지만이 피조물들에게 필연성을 부과하는 것이 아님을 선뜻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예지도 사물의 원인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왈라(Valla)가 거룩한 일들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 주장에 대해서 더욱 명쾌하고 현명한 견해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주장은 유익하다고 했다. 그리고 생사는 하나님의 예지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상황을 예견하시기만 하고, 그의 결정에 의해서 배치하시거나 제한하시지는 않는다면, 그의 예견과 인간의 상황의 필연성과의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묻는 것도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래의 사건들을 예견하시는 것은 그런 사건들이 생기도록 자신이 결정하셨기 때문이므로, 그들이 예지에 대해서 논쟁을 일으키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만사는 하나님의 결정과 명령으로 발생하는 것이 분명하다.
7. 하나님께서는 죄로 타락하는 것을 예정하셨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반역으로 멸망하도록 결정하셨다는 말씀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결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고(시 115:3) 선포하는 그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 중의 가장 고귀한 존재를 목적이 불확실하게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들은, 사람에게는 자기의 운명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 공과에 따라서 처리하시겠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정하신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만일 이런 무익한 조작이 용인된다면, 아무 것도 의지하시지 않고 자신의 비밀한 계획에 따라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은 어디 있을 것인가? 그들이 싫든 좋든 간에 예정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나타난다. 한 조상의 죄 때문에 모든 후손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은 저절로 생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인류 전체에 관해서 마지못해 인정하는 것을 왜 한 사람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못하는가? 왜 그들은 이런 핑계로 그들의 노력을 낭비하는가?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한 사람으로 인해서 영원한 사망에 예속되었다고 선언한다(롬 5:12이하 참조). 이 일은 자연에 돌릴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의를 변호하려는 이 훌륭한 사람들이 어리둥절하여 지푸라기 하나에 매달려 있으면서, 높은 지붕을 뛰어넘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다시, 만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 아니라면, 아담의 타락이 무수한 후손을 어린아이들까지 불가피하게 영원한 사망으로 끌어넣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이것이 무서운 결정이란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 되리란 것을 예견하셨으며, 따라서 스스로 그렇게 결정하고 명령하신 것이므로 미리 아셨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하나님의 예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경솔하고 부주의하여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장차 있을 일을 모르시지 않았다고 해서 하늘 심판자를 비난할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정당한 또는 명백한 불평이 있다면, 그것은 예정에 적용된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해서 후손이 멸망할 것을 예견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렇게 되도록 마련하셨다.
이는 장차 있을 일을 모두 예견하시는 것이 그의 지혜의 일부분인 것과 같이, 그의 손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며 주관하는 것은 그의 권능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문제들과 같이 이 문제도 훌륭하게 처리한다. "우리가 바르게 믿으며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지극히 건전한 일이다. 즉, 만물의 주이신 하나님, 만물을 지극히 선하게 만드신 하나님(창 1:31 참조), 또 선에서 악이 생기리란 것을 미리 아셨으나, 악한 일이 생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보다 악에서 선을 만들어내는 것도 자신의 전능한 선하심의 일부임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천사들과 사람들의 생활을 정하실 때에, 그들의 생활에서 우선 자유 의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이시며, 그 다음에 자신의 은혜의 복과 자신의 공의의 결정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이시도록 마련하셨다."
(하나님이 아담의 타락과 버림받은 자들의 유기를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결정하신 일이다. 그러나 이를 공의로 하셨다. 8-11)
8.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허락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들은 뜻과 허락은 서로 다르다는 것에 의지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악한 자들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 때문이지, 그것을 뜻하시기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는 것을 뜻하시지 않았다면, "허락"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만 하고 아무 것도 뜻하시지 않았는데 사람이 자기 힘으로 멸망을 초래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의 영장이 어떤 상태에 있으리란 것을 원하고 확정하시지 않았다고 하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하나님의 뜻은 사물의 필연성이며"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것은 필연코 발생하는데 이는 그가 예견하신 일들이 참으로 발생하는 것과 같다고 서슴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런데 펠라기우스주의자나 마니교도나 재세례파나 에피큐로스파는(우리의 상대는 이 네 파이다) 자기들과 악인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예정 때문에 강압을 받는다고 하여 필연성에 항의하지만 그들은 이 문제에 적용될 만한 논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예정이 하나님의 비밀의, 그러나 흠 없는 공의를 집행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들이 이 상태에 예정될 만하다는 것은 확실하므로, 그들이 예정에 의해서 당하는 멸망이 정당하다는 것도 그것에 못지않게 확실하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멸망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존하되, 그 원인과 기회는 그들 자신 안에 있다. 첫 사람이 타락한 것은 주께서 그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판단하셨는지 우리에게는 감추어진 일이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충분히 나타나리라고 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영광이 화제에 오를 때는 그의 공의를 생각해야 한다. 찬양할 만한 것은 모두 반드시 정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가 정한대로 넘어지지만, 자기의 허물 때문에 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셨다(창 1:31).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한다고 하는 그 악은 어디서 왔는가? 창조에서 왔다고 우리가 생각하지 앓도록,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나온 것에 대해서 시인하시는 도장을 이미 찍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자신의 악한 의도에 의해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순결한 천성을 더럽혔다. 그리고 그의 타락에 의해서 모든 후손을 자기와 함께 멸망으로 끌어넣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더 가까운 인류의 부패한 본성에서 정죄에 대한 명백한 원인을 보아야 하며, 감추어진, 전연 알 수 없는 원인을 하나님의 예정에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 우리는 우리의 이해력을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에 복종시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며, 그 지혜의 수많은 비밀 앞에 굴복해야 한다. 아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무식한 것이 유식한 것이며, 변태적인 지식욕은 일종의 정신 이상이다.
9. 둘째 반대론에 대한 반박을 요약함
내가 아직 이 사악한 구실을 침묵시킬 만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혹 있을 것이다. 나는 불경건한 사람들의 불만을 완전히 막을 만한 증거를 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미리 말한 것은 모든 반대론의 이유와 구실을 배제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악한 자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용서를 받을만하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자기들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으며, 특히 이 필연성은 하나님의 결정으로 자기들에게 부과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당연히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멸망하도록 예정했다고 그들 자신이 불평하는 그 하나님의 결정에는 그 자체의 공정성이 있어서,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아주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받는 모든 재난은 하나님의 지극히 공정한 심판이 내리는 벌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그들이 자기들이 정죄 받은 원인을 찾기 위해서 감추어진 성역인 하나님의 계획으로 시선을 돌리고, 정죄의 진정한 원천인 자기들의 부패한 본성은 못 본 체하는 것은 패악한 행동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비난을 막으시기 위해서 자신의 피조물에 대하여 증거하신다. 사람은 현재 당하고 있는 재난을 당하도록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서 창조되었지만, 재난이 생기는 근인(根因)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순결하게 창조하신 상태에서 부패하고 불순하고 패악한 상태로 타락했다는 것이 그가 멸망하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10. 셋째 반대론 :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편파적이라는 견해가 된다
하나님의 예정을 반대하는 자들은 셋째 어리석은 이론으로 예정을 중상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의 상속자로서 받아주시는 사람들이 보편적인 멸망에서 면제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된 일이라고 우리가 주장하기 때문에, 반대론자들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시는 것인데 성경은 각처에서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느냐고 항의한다. 그들은 또 성경에 모순이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택에는 공로에 대한 고려가 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결론을 내린다.
먼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는 분"이 아니라고 하는 뜻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사람"(person)이란 말은 사람(ma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는 것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 보통 호감, 품위, 권위 등의 인상을 주거나, 또는 미움, 경멸, 치욕 등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것은 예컨대 재산, 권위, 가문, 지위, 조국, 육체적인 미(美) 등등이며(신 10:17 참조), 또 빈곤, 곤궁, 비열, 사악, 치욕 등이다. 그래서 베드로와 바울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아니하신다고 가르친다(행 10:34, 롬 2:11, 갈 2:6 참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유대 사람이나 헬라 사람을 구별하시지 않으며(갈 3:28),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 편을 받아들이고 다른 편을 물리치시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야고보도 하나님의 판단에는 재산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것을 선언할 때에(약 2:5), 같은 말을 사용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판단하심에 있어서 자유인이나 노예를 차별하시지 않는다고 한다(골 3:25, 엡 6: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공로를 전연 고려하시지 않고, 다만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만 어떤 사람들은 자녀로 택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버리시며 정죄하신다고 우리가 말할 때에, 아무도 이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더욱 만족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공로가 다르지 않는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을 버리시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선택을 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도록 하는 무엇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아무 것도 없다고 그들이 대답한다면(또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고려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선대하시는 이유를 자신의 선하심에서 찾으신다고 추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은 물리치시고 다른 사람은 선택하신다는 사실은 한 사람만을 고려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자유로 나타나는 것이다. 다른 구절에서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육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사람의 외모에 매이지 않는다.
11. 예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의로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같은 태도로 예정하시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편파적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고 사악한 비난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보시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벌하실 것이며, 결백하다고 보시면 그 엄격한 심판을 모든 사람에게서 철회하셔야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지 말든지, 그렇지 않으면 긍휼을 베푸시고자 할 때에 그의 심판을 일체 포기하셔야 한다는 것과 같다. 그들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모든 사람이 함께 같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도 죄책이 공통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몇 사람을 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벌을 주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공평한 심판자가 되시는 것이 옳다고 대답한다. 그들이 이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베푸시는 능력을 빼앗으려는 것이거나, 베푸시는 것을 용인하더라도, 적어도 심판을 전적으로 포기하셔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거스틴의 말이 여기에 가장 합당하다. "첫 사람으로 인하여 인류 전체가 정죄를 받았으므로‥‥‥그 중에서 귀하게 쓰이도록 만들어진 그릇은 그 자신의 의의 그릇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다. 그러나 다른 그릇이 천하게 쓰이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은(롬 9:21 참조) 이유를 탐구할 문제가 아니고 심판에 돌릴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정죄하시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벌을 주시지만 부르시는 사람들에게는 받을 이유가 없는 은혜를 분배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 비난도 받으실 이유가 없다. 마치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는 빚을 탕감해주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빚을 받아낼 권리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자비하시므로 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실 수 있으며, 공정한심판자이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지는 않는다.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 주심으로써 그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나타내실 수 있다‥‥‥모든 사람에게 주시지 않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할 것이 무엇임을 나타내실 수 있다." 바울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갈 3:22)라고 기록할 때에, 그는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빚진 분이 아니시라는 말을 첨가하여,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하였다(롬 11:35).
(예정을 선포하는 것은 유해하지 않고 도리어 유익하다. 12-14)
12. 넷째 반대론 : 선택 교리는 곧은 생활에 대한 열정이 모두 파괴되어 버린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예정론을 뒤엎기 위하여 만일 그것이 옳다면 선행에 대한 관심과 열의는 전적으로 파멸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 자기의 생사(生死)는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명령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들을 때에, 누가 하나님의 예정은 자기의 노력으로 막을 수도 없고 진전시킬 수도 없으므로,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즉각적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포자기에 빠지며 정욕에 끌리는 대로 무모한 생활을 할 것이라고 한다. 분명히 그들이 전연 거짓말만 하는 것은 아니다. 추악한 모독적인 언사로 예정설을 더럽히는 돼지들이 많으며, 그들은 이런 구실로 모든 충고나 책망을 회피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대해서 일단 결정한 처리 방법을 알고 계신다. 구원으로 결정하셨다면 적당한 때에 우리를 그리로 데려가실 것이요, 사망으로 예정하셨다면 우리가 반대해서 싸운들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이 위대한 신비를 더욱 경외하는 마음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동시에, 신자에게는 훨씬 다른 태도를 가르치며, 이런 사람들의 범죄적인 미친 태도를 효과적으로 반박한다.
성경이 예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불경건하고 경솔하게 하나님의 알 수 없는 비밀을 찾아 덤비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목적은 도리어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교만을 꺾고 항복하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떠는 동시에, 그의 자비를 존중할 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신자들이 목표로 삼는 것도 이것이다. 그러나 이 돼지들이 꿀꿀거리는 데 대해서는 바울이 적당하게 침묵하게 만든다. 그들은 아무 걱정 없이 죄악 생활을 계속하노라고 말한다. 그들도 선택된 사람들 사이에 들어 있다면, 죄가 그들의 궁극적 구원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선택된 목적에 대해서, 그것은 우리가 거룩하고 흠 없는 생활을 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엡 1:4). 만일 선택의 목표가 거룩한 생활에 있다면, 선택은 아무 선행도 하지 않는 구실을 우리에게 준다기보다, 도리어 우리의 마음을 거룩한 생활에 집중하겠다는 열의를 일으키며 자극할 것이다. 구원을 얻기에는 선택으로만 충분하다고 해서 선행을 중지하는 것과, 선택을 해주신 목적인 선의 추구에 몸을 바치는 것, 이 두 가지가 얼마나 서로 다른가를 비교해 보라. 그리고 이런 신성 모독적 언행을 일소하라. 그것은 선택의 질서 전체를 뒤엎는 악한 행위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모독 행위를 확대함으로써 하나님께 정죄 받은 자가 결백하고 정직한 생활을 하여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더라도(딤후 2:15), 그것은 헛수고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주장은 전연 파렴치한 거짓말이다. 이런 노력이 선택 이외에 어디서 올 것인가? 버림을 받은 자들은 천하게 쓰도록 만든 그릇이므로(롬 9:21 참조), 아무리 심판에 대해서 무익한 저항을 계속하더라도, 그 끊임없는 범죄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킬 뿐이며 분명한 표지로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그들 위에 선언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여 마지않는다.
13. 다섯째 반대론 : 선택 교리는 모든 충고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정론이 마치 경건한 생활에 대한 모든 충고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악의에 찬 파렴치한 훼방을 한다. 이 문제 때문에 혹자가 어거스틴을 크게 악평한 적이 있었다.
그는 책망과 은총에 관하여 발렌티누스에게 보냄(Rebuke and Grace, to Valentinus)이라는 글을 써서 그 악의를 일소하였다. 경건하고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 만족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정칙하고 양순한 사람들을 만족시킬 만한 몇 가지 점을 간단히 말하겠다. 바울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택을 분명한 말로 공공연하게 선포했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경고와 훈계를 하는 데 대해서 냉담하였는가? 선량한 열성가들에게 그들과 바울의 열의를 비교해 보게 하라. 바울의 강렬한 열의에 비하면 그들은 얼마나 냉담한가를 깨달을 것이다. 사도는 모든 의심을 제거하는 원칙을 말하였다.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살전 4:7),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살전 4:4),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요컨대, 바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긴 설명이 없더라도, 그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일들을 사도가 잘 조화시켰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으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요 6:65) 말씀은 거짓도 아니며, 그의 명령에 상반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를 계속하여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며, 그들을 믿음 안에서 보존하여 끊임없는 유익을 얻게 해야 한다. 그러나 예정에 대해 인식함을 막지 말라. 그래야만 복종하는 자들도 자기의 힘으로 되는 일같이 자랑하지 않고 주를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마 13:9) 하신 말씀에는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귀를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가 권고하며 전도할 때에, 그들은 기꺼이 순종하지만, 귀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응한다(사 6:9).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러나 왜 이 사람들은 귀가 있고 저 사람들은 없는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롬 11:34). 감추어진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명백한 것을 부정할 것인가?" 나는 어거스틴의 말을 충실히 옮겼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말보다 그의 말에 더 강력한 권위가 있을것이므로, 그의 글을 인용하기로 하자. "만일 이 말을 듣고 무감각하고 태만하게 되어, 종래의 노력을 버리고 마음대로 정욕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예지에 관해서 한 말을 거짓이라고 여겨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이 선해질 것을 예지하셨다면, 그들이 빠져 있는 악이 아무리 깊을지라도 그들은 착하게 될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그들이 악하리라고 예지하셨다면, 그들이 지금은 아무리 선한 점이 보일지라도 악하게 될 것이 아닌가?" 이런 이유가 있다고 해서, "그러면, 예컨대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다른 오류들을 범하게 되는 때에,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말을 부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류해야 하는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 이유와 진실을 말할 필요성은 문제가 서로 다르다. 진실을 말하지 않을 이유를 모두 찾아내는 것은 지루한 일이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는, 이해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더하기 위해서 우리가 말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욱 악하게 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해도 이와 같은 사람들의 지식이 증가되는 것도 아니요, 더욱 악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진리를 우리가 말하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더 악해지고. 우리가 침묵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더 악해진다면, 그런 진리를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진리를 얻도록 말해야 할 것이 아닌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쪽도 진리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이해력이 더 있는 사람은 손해까지 보게 될 것이다. 그가 듣고 받아들인다면,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배우게 될 수 있다‥‥‥또 우리는 성경의 증거로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리를 말함으로써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을 넘어지게 말까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말하지 않음으로써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허위에 빠지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끝으로 그는 이 생각을 압축해서 더 명쾌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그 뒤를 이은 교회의 교사들이 두 가지를 다 했다면, 즉,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다루며, 동시에 신자들을 경건한 생활 훈련 하에 붙들어 놓았다면 왜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대적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진리의 구속력을 느끼면서도 '예정에 대한 말은 옳다고 하더라도 일반 사람들에게 선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을 옳게 생각하는가? 확실히 이 말씀은 선포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게' 해야 한다(막 4:9, 마 11:15, 눅 8:8). 그러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에게서 받지 않으면 누가 그에게 주겠다고 약속할 것인가? 받지 않는 사람은 거부할는지 모르나, 받는 사람은 받아서 마시고, 마시면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도록 경건을 선포해야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도록 이런 예정을 선포해야 한다."
14.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예정을 바르게 선포하는 데에 있어서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저 거룩한 분은 덕을 세우려는 비상한 열의로 진리를 가르치는 방법을 조절하여, 가능한 한 실족하게 하는 일을 현명하게 피하였다. 그는 진리를 말하더라도, 동시에 적당한 표현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회상시킨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신들이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들이 이미 하나님의 뜻으로 멸망하도록 예정되었기 때문이요"라고 말한다면, 그는 태만한 마음을 조장할 뿐 아니라, 악한 의도에 기회를 주는 것이다. 만일 미래에 대해서도, 그들이 이미 정죄되었으므로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가르치는 말이라기보다 저주하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이런 사람들은 미련한 선생이거나 악하고 불길한 예언자이므로 교회에서 물러나라고 정당하게 요구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 책망을 하지 않고서도 그가 원하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시는 분께서 긍휼을 베푸시며 도움을 주실 때, 사람은 책망에서 유익을 얻는 다는 견해를 주장한다. 그러나 왜 사람에 따라 방법이 다른가? 결정권이 토기장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진흙에 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후에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책망을 들음으로써 의로운 길에 들어오거나 돌아올 때에, 그들의 마음속에 구원을 실현하는 분은, 누가 심고 누가 물을 주든 간에, 오직 자라게 하시는 그 분이(고전 3:6-8) 아닌가? 한 번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정하시면 사람의 자유 의지가 그 결정에 저항할 수 없는 그 분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 곧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데서 다 행하시는 이'(시 135:6), 장차 있을 것들도 만드신 이(사 45:11)의 뜻에 사람의 뜻이 저항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사람이 방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의지를 이용해서 그 원하시는 일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인도하실 때에, "그들을 신체적으로 구속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내적으로 역사 하신다. 즉, 내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붙잡으시며 움직이시며 그들에게 내적으로 역사 하셔서 그들 자신의 뜻으로 그들을 이끄신다." 그러나 그 직후에 첨가하는 말을 빠뜨릴 수 없다. "우리는 누가 예정된 수효에 포함되며 누가 포함되지 않는지를 모르므로,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원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마다 우리의 평화에 참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평안은 평안의 자손들 위에 머물 것이다(눅10:6, 마10:13 참조). 따라서 우리의 입장으로서는‥‥‥건전하고 엄격한 책망을 의약품처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해서 그들 자신이 멸망하지 않도록 또는 그들이 다른 사람을 멸망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예지하시고 예정하신 사람들에게 책망이 유익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기독교강요 : 3권. 25장 (0) | 2017.06.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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