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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4권.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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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 거짓 교회와 참된 교회와의 비교

 

(참된 교리와 예배를 떠나면 카톨릭이 주장하는 참된 교회란 무효가 되고 만다. 1-6)

 

1. 근본적인 구별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을 우리는 특히 존중해야 하며 교회의 특색을 나타내는 영원한 표식으로 만들 정도로 이 일을 공경해야 된다는 것을 이미 설명했다. , 이 일이 건전하고 순결하게 유지되는 곳에서는 도덕적 과실이나 병폐가 있더라도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둘째, 교회 내에 사소한 과실이 있더라도 그 때문에 그 합법성을 부정할 정도로 교회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용서해야 될 과실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 , 중요한 교리를 손상시키지 않고 모든 신자들이 인정해야 하는 신조들을 말살하지 않는 과실 그리고 성례에 대해서 주의 합법적 제도를 폐지하거나 전복시키지 않는 과오는 용서해야 된다. 그러나 종교 생활의 요새에 허위가 침입해서 필수적인 교리의 핵심과 성례의 효험이 파괴될 때에, 분명히 교회는 죽게 된다. 목을 찔리거나 심장에 치명상을 입은 사람이 죽는 것과 같다. 교회의 기초는 사도와 예언자들의 교훈이며 모퉁이의 머릿돌은 그리스도시라고 가르치는 바울의 말에도(2:22) 이 점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교회의 기초는 예언자와 사도들의 교훈이며 그들은 또 구원은 그리스도에게만 맡기라고 신자들에게 명령하는데, 이 교훈을 없애버린 후에 교회가 어떻게 서 있을 수 있겠는가? 교회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경건의 이 핵심뿐이므로 이 핵심체가 죽으면 교회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요 또 그 기초라고 한다면(딤전 3:15) 거짓말과 허위가 지배하게 된 곳에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2. 로마 카톨릭교회와 그 주장

 

교황 제도하의 이러한 상태, , 거기 얼마나 많은 교회가 남아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말씀 대신에 거짓말을 섞은 사악한 조직이 교회를 지배하며, 이 조직이 순수한 빛을 꺼 버리기도 하고 희미하게 만들기도 한다. 주의 성만찬은 가장 추악한 모독 행위로 대체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참을 수 없는 여러 가지 미신으로 더렵혀졌다. 기독교는 교리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음에도 교리는 완전히 매장되고 제거되었다. 공중 집회는 우상 숭배와 불경건을 가르치는 곳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많고 치명적인 비행에 참여하지 않아야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멀어질 염려가 없다. 교회와의 교통은 그것이 우상 숭배와 불경건과 하나님께 대한 무지와 기타 악행에 우리를 빠뜨리는데 이바지 해야 한다는 조건 위에서 확립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리에 순종하는 생활을 유지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조건 위에서 확립된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교회를 극찬하여 세상에는 그들 외에 다른 교회는 없다는 듯이 선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문제가 결말이 난 것처럼, 자기들의 교회의 자랑거리인 복종을 감히 버리는 사람은 분리주의자이며 그 교리에 감히 반대하는 사람은 이단자라고 단정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근거로 자기들에게 진정한 교회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그들은 고대의 기록을 근거로 과거 이탈리아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있었다는 일들을 이야기한다. 건전한 교회들을 창설하고 피를 흘려 그 교리와 교회의 건물을 설립한 저 거룩한 분들을 자기들의 뿌리로 삼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교회는 영적 은사와 그들 가운데 있었던 순교자들의 피로 성별되며 주교들의 연속적인 계승에 의해서 보존되고, 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어거스틴 등이 이 계승을 중히 여겼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나와 함께 이러 주장들을 잠깐 생각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이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고 천박한 것인가를 곧 깨닫게 해줄 수 있다. 사실, 그들도 나에게서 배워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나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그들에게 권고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들의 주장을 옹호하려고 할뿐이므로, 나는 몇 가지 점만 이야기함으로써 선한 사람들과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기만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우선, 나는 그들이 왜 아프리카와 이집트와 아시아 전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느냐고 묻겠다. 그것은 그들이 교회를 유지해 왔다고 자랑하던 주교들의 계승이 이 여러 지방에서는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교들의 계승이 끊어진 일이 없고 애당초부터 줄곧 주교가 존재한 자기들의 교회가 진정한 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그들 앞에 희랍을 들이댄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나는 다시, 그들은 왜 희랍 사람들 사이에서 교회가 소멸됐다고 하느냐고 묻겠다.(그들이 교회를 유일하게 보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주교들이 희랍에서는 계속해서 계승되지 않았는가? 그들은 희랍 사람들을 분리파라고 하는데, 무슨 권리로 그렇게 말하는가? 사도 교구에서 떨어졌으므로 특권을 잃었다고 대답한다.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들은 더욱 특권을 잃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따라서 조상들의 손에서 받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건전하고 순수하게 보존하고 그 진리대로 삼지 않는다면 계승을 구실로 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3. 거짓 교회는 자존심이 강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표시 난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 교인들은 옛날 유대인들이 맹목, 불경건, 우상 숭배 등으로 하나님의 예언자들에게 책망을 받았을 때 하던 주장을 지향하고 있을 뿐이다. 로마 카톨릭 교도와 같이, 유대인들은 성전과 의식과 제사장들의 활동을 굉장히 자랑하며 그것을 표준으로 교회를 확실히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이,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교회 대신에 겉모습을 자랑하지만 그런 것은 교회와는 거리가 먼 것이며 또 없어도 교회는 훌륭히 존립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논박하기 위해서 예레미야가 유대인들의 미련한 자신감을 꺾는데 썼던 논증을 사용하려고 한다.

,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7:4) 주께서는 주의 말씀이 전파되고 양심적으로 지키는 곳이 아니면 어떤 성전도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성소의 그룹들 사이에 머무르며(10:4) 이곳이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가 되리라고 백성들에게 약속하셨지만, 제사장들이 사악한 미신으로 예배를 타락하게 만들었을 때 하나님께는 그의 영광을 다른 곳으로 옮기시고 성소에서 거룩한 성격을 빼앗으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로서 성별된 듯 하던 성전까지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세속적인 것이 되었으니,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람과 장소에 매이며 형식적인 행사에 끌리고 교회라는 이름과 외형만 있는 곳에(9:6) 항상 계셔야 한다는 듯이 선전하는 것은 아무 근거도 없다.

또 바울이 로마서 9장부터 12 사이에서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점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듯이 보이면서도 복음의 교훈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복음을 핍박한다는 사실이 연약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교리를 설명한 다음에 이 문제를 처리한다. 유대인들은 교회의 외형에 필요한 것은 다 가지고 있었지만 진리를 대적했기 때문에 교회가 아니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가 이렇게 부정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말한다. 이스마엘과 이삭을 비교해서, 자유인인 어머니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기업을 받지 못할 사람이 많다고 한다(4:22이하). 바울은 더 나아가 두 예루살렘을 비교한다. 율법이 시내산에서 전해진 것같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나왔다. 그래서 종으로 나서 자랐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회의 자녀라고 서슴지 않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서자이면서 하나님의 참 자녀들을 교만한 태도로 멸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으며(21:10), 이 신성한 명령을 믿고 그들의 무미건조한 자랑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들의 외형적인 고백을 자랑한다면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었고, 그들이 연대가 오래 되었다고 자랑한다면 그는 맏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제외되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바울은 교리적으로 순수하고 합법적인 근원에서 난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다고 대답한다(9:6-9).

이 이론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레위를 자신의 사자 또는 통역자로 삼는다고 언약하셨다고 해서 자신이 그의 자손인 사악한 제사장들에게 매이는 것은 아니라고 하신다. 참으로, 제사장 계급의 존엄성을 특히 존중해야 된다고 하면서 항상 예언자들에게 반항하는 제사장들의 거짓된 자랑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돌려 대신다. ,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주장을 기꺼이 인정하시면서, 자신은 언약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으나 그들 편에서 응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계승자들이 연속적으로 또 진심으로 선인들을 본받지 않는다면 이 계승에 무슨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자기들의 근본에서 타락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모든 영예를 박탈당한다(2:1-9). 가야바의 선조에 경건한 제사장이 많았고(참으로 아론으로부터 그에게 이르기까지 중단되지 않고 제사장직이 계승되어 왔기 때문에) 저 사악한 무리가 "교회"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고 한다면, 문제는 다를 것이다. 세속적인 정치에서도, 브루투스나 스키피오나 카밀루스 같은 사람들을 계승했다고 해서 칼리굴라, 네로, 헬리오가발루스의 무리가 행한 폭정을 용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특히 교회 기관에서 진리를 무시하고 인간의 계승 관계만을 중시한다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주교들이 계속 계승되는 곳에서 일종의 상속권에 관한 것처럼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거룩한 학자들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증명했다. 또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학자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잘못이며, 학자들이 그런 생각을 한 일도 전혀 없다. 처음부터 학자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교리에 변동이 없었던 것이 확실했으므로 그들은 모든 새로운 오류에 대한 충분한 방어책으로서 한 원칙을 채택했다. , 그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만장일치로 확고하게 보존되어 온 교리로 모든 새로운 오류에 대항하여 싸웠다. 따라서 지금에 와서 사람들이 우리가 공경하는 또 공경해야 하는 교회의 이름으로 세상을 더 속이려고 애쓸 이유는 없다. 그들이 교회를 정의하려고 할 때, 속담에 있듯이 그들에게 물이 붙어 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의 자리에 추악한 창녀를 앉히기 때문에 그들은 진창에 빠져 버린다. 우리는 이런 것들로부터 속지 않기 위해서(다른 이들도 있으나) 어거스틴의 권면을 생각하기로 하자. 그는 교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산적한 추문에 가려지는 것처럼 희미해지고 때로는 평온한 때를 만나 평온무사하며 혹은 고난과 시험의 파도에 휩쓸린다." 가장 강력한 기둥들이 믿음을 위해서 용감하게 추방을 감수하며 혹은 세계 각지에서 숨어 지낸 일이 많다는 것을 그는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

 

4.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설립되었다

 

이와 같이,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일 큰 대적이면서도 교회의 이름으로 지금 우리를 괴롭히며 무식한 사람들을 위협한다. 그러므로 비록 그들이 성전과 사제 계급과 그 외의 외부 장식을 내놓지만, 단순한 사람들의 눈이나 현혹시킬 헛된 외화에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 이는 아래와 같은 말씀들이 주께서 그의 백성에게 인치신 영원한 표식이기 때문이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18:37)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느니라"(10:1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10:27) 그러나 조금 전에 주께서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10:4-5)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틀림없는 표식으로 교회를 교시하셨는데 왜 우리는 교회를 찿느라고 미친 사람같이 행동하는가? 표식이 보이는 곳에는 틀림없이 교회가 있으며, 표식이 없는 곳에는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줄 만한 것이 전혀 없다. 교회의 기초는 사람의 판단이나 사제 계급이 아니라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교훈이라고 바울은 우리의 기억을 환기시킨다(2:20). 참으로 예루살렘과 바벨론, 그리스도의 교회와 사탄의 권모술수의 차이점을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8:47). 요약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만으로 지배하시므로, 그리스도의 말씀 홀로, , 그의 지극히 거룩한 말씀과는 별개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존재하듯이 상상하는 것은 거짓말이란 것을(7:4 참조) 어느 누가 분명히 깨닫지 못할 것인가?

 

5. 종파 분립과 이단의 비난에 대하여

 

그들은 우리에게 분파와 이단의 죄를 뒤집어씌우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그들과 다른 교리를 선포하며 따로 기도 집회를 갖고 세례를 베풀며 성만찬과 기타 거룩한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대한 비난이지만 길고 어려운 변호가 필요하지는 않다. 논쟁을 일으켜 교회와의 교통을 끊는 사람들을 이단자 또는 분리론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교통을 유지하는 유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곧 건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이단과 분파를 구별해서, 이단자들은 잘못된 교리로 건전한 믿음을 부패하게 만들지만 분리론자들은 이따금씩 같은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교제를 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랑의 결합은 믿음의 일치에 달려 있으므로, 이 후자는 전자의 출발점과 종점과 유일한 법칙이 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연합을 우리에게 권고할 때 요구 조건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 우리의 지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할 때 우리의 의지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상호간의 호의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의 연합을 권하면서, 그 기초가 되는 것은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라는(4:5) 입장이라고 한다. 참으로 바울은 우리에게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고 가르칠 때마다, "그리스도 안에"(2:1-5) 또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라고(15:5) 첨부한다. 주의 말씀을 떠나서는 신자간의 일치가 없고 오직 악한 사람들의 갈라지는 파당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6. 그리스도가 머리됨이 연합의 여건이다

 

키프리아누스도 바울을 따라, 교회 전체의 화합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감독으로 모시는 경우에만 올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한다. "교회는 하나이지만 결실이 많으므로 널리 퍼져 많은 교회가 된다. 빛이 하나이면서 그 광선은 많은 것과 같다. 나무의 가지는 많으나 그 굳센 줄기는 하나이며, 줄기는 땅 속에 튼튼히 뿌리를 박고 있다. 한 샘에서 많은 시내가 흐르고 많은 시내가 각각 자체의 풍부함에서 넘쳐흐르는 것 같지만 근원은 하나이다. 태양에서 오는 광선을 보라. 태앙 자체는 갈라지지 않는다. 나뭇가지를 꺾어 보라. 꺾인 가지에서는 움이 돋지 않는다. 시냇물의 근원을 막아 보라. 시내는 말라 버린다. 그와 같이 교회는 주의 빛을 풍성하게 받아 전 세계에 퍼뜨리며, 그 빛 하나하나는 각지에 확산된다."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가 수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키프리아누스는 항상 우리를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게 한다. 따라서 이단설과 분파 행동이 생기는 것은 사람들이 진리의 근원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머리이신 분을 찾지 않고 하늘 교사의 교훈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단정한다.

이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교회를 떠난 우리는 이단이라고 외치도록 내버려두자. 우리가 떠난 유일한 원인은 진리를 순수하게 고백하는 것을 그들이 절대로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외에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저주하는 말로 우리를 추방한 것을 나는 말하지 않는다. 사도들도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었으므로, 그들이 사도를 분파주의자라고 정죄하고 싶지 않다면 그들의 행동은 우리에게 죄가 없다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그의 이름 때문에 회당에서 쫓겨나리라고 미리 경고하셨다(16:2). 주께서 말씀하신 이 회당들은 당시에 합법적 교회로 인정되었다. 이제 우리는 쫓겨났고 이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생긴 일이란 것을 우리는 언제든지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 대해서 좌우간의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이 점을 기꺼이 그들에게 양보하겠는데, 이는 나로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가기 위해서 그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배와 재판권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교는 고대 이스라엘과 비교된다. 7-11)

 

7. 로마 카톨릭 교회의 상태는 여로보암 때의 이스라엘과 비슷하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우상의 압제 하에 억눌려 있던 모든 교회들을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것은 예언자들이 기술한 고대 이스라엘 교회와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이 나타날 것이다.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법들을 지킬 때에는 그들 중에 진정한 교회가 있었다. , 하나님과 은혜로 교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을 모두 얻었다. 율법에서 진리의 교리를 얻었으며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교리를 선포했다. 그들은 할례를 받아 종교에 입문하며 그 밖의 성례를 실시함으로써 믿음을 강화시켰다. 주께서 교회에 주신 영예로운 칭호들은 확실히 그들의 사회에 해당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고 우상 숭배와 미신에 빠져 그 특권의 일부를 잃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의 성례를 집행하는 일을 맡기신 백성에게서 누가 감히 교회라는 이름을 제거했는가? 또 주의 말씀을 공공연하게 짓밟고도 벌을 받지 않으며, 교회의 가장 중요한 힘과 생명 자체가 되는 말씀 선포를 말살해 버리는 무리를 누가 감히 통 털어서 "교회"라고 불렀는가?

 

8.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교회는 남았다

 

그러면, 혹자는 유대 사람들이 우상 숭배에 빠진 후에는 그들 사이에 교회의 흔적이 조금도 남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첫째, 타락에도 몇 가지 정도가 있었다고 나는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유대 백성이 처음으로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경배에서 타락했을 때 그것이 같은 정도의 타락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여로보암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금송아지를 만들며 불법적인 예배 장소를 정했을 때에 그의 종교를 완전히 부패시켰다(왕상 12:28이하). 유대 백성도 종교의 외형까지 위조하기 전에 악하고 미신적인 풍습에 오염되었다. 여로보암 때에 이미 여러 가지 타락한 의식을 일반적으로 가르쳤으며 채택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는 여전히 율법을 가르쳤으며 제사장이 있었고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식들이 존속했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쓸 만한 교회가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합 왕 때까지 사태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고 그 후에 더욱 악화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혹은 아합과 같았으며 혹은(아합보다 조금 낫다는 것이) 여로보암을 본받았다. 그러나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가 불경건한 우상 숭배자였다. 유대에서는 가끔 변화가 있었다. 어떤 왕들은 거짓된 미신을 조작해서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타락시켰고 어떤 왕들은 쇠퇴한 종교를 재건했다. 드디어는 제사장들까지도 가증하고 모독적인 의식으로 성전을 더럽혔다.

 

9. 카톨릭 교회는 부패하였으며,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면, 교황주의자들은 여로보암 시대의 이스라엘에 못지않을 정도로 그들 사이에서 종교가 부패하고 타락했었다는 것을 부정해 보라. 그들의 과오도 될 수 있는 대로 변명해 보라. 그러나 그들은 추잡한 우상 숭배를 하고 있다. 교리 방면에서도 더 순수한 점은 조금도 없고 오히려 실제적으로는 더욱 불순하다. 하나님께서, 또 보통의 판단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증인이 될 것이다. 심지어 사태 자체까지도 나는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외칠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그들의 교회와 교통하도록 강요하고 싶을 때 그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일을 요구한다. 첫째는 우리가 그들의 기도와 성례와 의식에 참가해야 된다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주신 모든 명예와 권세와 재판권을 그들의 교회에 대해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점에 대해서, 나는 상태가 완전히 부패했을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예언자들은 모두가 개인적으로 제물을 드리지도, 따로 기도회를 드리지도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는 그들에게는 솔로몬의 성전에 모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12:13,11). 레위족의 제사장들은 그 직분에 머무를 가치가 없는 자들이었지만 성례를 집행하도록 하나님께서 임명하셨고(29:9) 면직하신 일이 없으므로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예언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 에언자들은 미신적인 예배에 참석하라는 강요를 받지 않았다.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무도 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람들-교황주의자들-에게는 어디에 유사점이 있는가? 그들과 만나기만 하면 우리는 거의 명백한 우상 숭배로 더렵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통의 중심 유대는 미사인데 이것을 우리는 가장 큰 신성 모독으로 혐오한다. 우리의 이 태도가 바른 것인지 또는 경솔한 것인지는 다른 곳에서 알려질 것이다. 지금은 우리와 예언자간의 경우가 이 점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악인들의 의식에 참석했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식 이외의 것을 보거나 또는 거기 참석하라고 그들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만일 모든 점에서 유사한 예를 원한다면, 이스라엘 나라에서 얻을 수 있다. 여로보암의 칙령에 따라 종전과 같이 할례를 행했으며 제물을 드렸고 거룩한 율법을 지켰으며 조상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금지된 가짜 예배 형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한 일을 모두 불가하다고 정죄하셨다(왕상 12:31). 벧엘에서 예배하거나 제사를 드린 예언자나 경건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누구든지 내게 보이라.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짓을 하면 반드시 신성 모독으로 몸을 더럽히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을 교회의 교통을 중요시하되 교회가 부패하고 모독적인 의식으로 타락했을 경우 그런 교회를 경솔하게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10. 우리가 부패한 교회를 멀리해야하는 이유

 

둘째 점에 대해서는, 우리는 주장할 것이 더욱 많다. 만일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그 판단만을 공경하고 그 권위를 존중하며 그 경고에 순종하고 그 징계로 마음을 고치며 모든 일에 그 교통을 양심껏 보존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는 반드시 그 교회에 복종하게 되며 순종해야 할 것이다. 상황이 같거나 혹은 더 낫다면 예언자들이 당시의 유대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정한 것을 우리도 교황주의자에게 기꺼이 양보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에, 예언자들은 당시 사람들의 모임이 신성 모독이고(1:14) 그들에게 찬성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불법이란 것을 여러 번 공언했다. 만일 그들의 모임이 교회였다면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나 미가와 같은 사람들이, 유대에서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호세아와 그 밖의 종류의 사람들(당시의 예언자들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무할례자 보다도 더 나쁜 자들이라고 해서 미움을 받은 자들) 이 하나님의 교회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의 집회가 교회였다면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 아니라(딤전 3:15) 거짓의 버팀목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막(Taberacle)이 아니라 우상을 두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악한 음모에 불과한 그 모임들에서부터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와 미신과 불경건한 교리에 오염된 현대 회중들을 교회, , 그리스도인이 교리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와 완전히 일치해야 하는 교회라고 한다면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은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들이 교회라면 열쇠의 권한이 그들의 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열쇠는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그들 중에서는 그 말씀이 파괴되었다. 또 만일 그들이 교회라면 "네가 무엇이든지 매면" 운운하신(16:19, 18:18, 20:23) 그리스도의 약속이 그들 사이에서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종인 것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사람들과의 교통을 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약속이 헛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적어도 이 점에서 교회가 아니다. 끝으로, 그들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불경건을 가르치는 학교들과 각종 오류의 소굴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들이 교회가 아니거나,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의 합법적인 회중과 불신자들의 집회를 구별하는 표식이 없어지거나 할 것이다.

 

11. 교황 제도 하에 남아 있는 교회의 자취

 

옛날에는 교회의 일부 특전이 유대인들 사이에 남아 있었다. 그와 같이 지금도 하나님께서 파멸을 면하게 하신 교회의 흔적이 교황주의에 있는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언약을 한 번 맺으셨으나, 그것을 보존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언약이 그 자체의 힘으로 그들의 불경건과 싸우면서 생명을 유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언약이 그들 중에 존속한 것은 확실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한 것이다. 그들의 배반은 주의 진실을 말소할 수 없었고, 비록 그들의 불결한 손이 할례를 더럽혔을지라도 그것을 여전히 여호와의 언약의 진정한 표징이며 거룩한 성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난 사람들을 주께서는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셨으며(16:20-21), 이 사람들은 오직 특별한 복에 의해서 여호와께 속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언약을 세우신 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과 스페인과 영국에서도 같은 사태가 발생했다. 이 나라들이 적그리스도의 압제로 억압을 당할 때 주께서는 자신의 언약이 침범되지 않도록 두 가지 방법을 쓰셨다. 첫째, 언약의 증거인 세례를 유지하셨다. 사람들은 불경건하지만 여호와 자신의 입으로 성별하신 세례는 그 효력을 보존한다. 둘째, 교회가 완전히 죽지 않도록 여호와 자신의 섭리로 교회의 다른 흔적들을 남기셨다. 건물이 헐릴 때에 기초와 폐허가 남는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적그리스도가 교회를 기초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주의 말씀을 멸시한 사람들의 배은망덕을 징벌하시기 위해서 교회가 무서운 혼란과 분열을 겪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이렇게 파괴된 후에도 절반쯤 헐린 건물이 남도록 하셨다.

 

12. 건전한 요소가 있을지라도 타락한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절대로 교황주의자에게 유일한 교회라는 칭호를 주지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교회들이 있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만 신앙 고백의 표준인 성례뿐만 아니라 특히 교리에 있어서의 일치를 위해서 필요한 진정하고 합법적인 교회 제도를 주장한다. 다니엘과(9:27) 바울은(살후 2:4) 하나님의 성전에 적그리스도가 앉으리라고 예언했다. 우리가 보기에 저 사악하고 가증스런 왕국의 수령과 기수는 로마 교황이다.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그의 지배력이 그리스도나 교회의 이름을 말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압제 하에 있는 교회들이 교회라는 것을 우리가 결코 부인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그 교회들을 그의 모독적인 불경건으로 더럽히며 잔인한 지배로 괴롭히고 독약과 같은 악하고 치명적인 교리로 부패시키며 거의 죽였다. 그 교회들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거의 파묻혀 숨겨졌으며 복음은 타도되었고 경건은 추방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거의 말살되었다. 요컨대, 모든 일이 혼란에 빠져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보다도 바벨론의 모습이 보인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그 교회들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그 안에 그의 백성의 남은 자들을 비록 비참하게 분산되어 있지만 기적적으로 보존하셨기 때문이며, 표식 특히 악마의 간계와 인간의 패악도 파괴할 수 없는 교회의 표식이 다소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논의에서 특히 유의해야 하는 표식들이 없으므로 나는 그 교회들에게는 개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합법적인 교회 형태가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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