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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3권.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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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장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증

 

(선택은 공로에 대한 예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인 목적에서 온다. 1-6)

 

1. 선택과 공로에 대한 예지

 

지금까지 우리가 서술한 입장과 특히 신자들이 값없이 선택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반대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공로를 미리 아시고, 그것에 따라서 사람들을 구별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예지하시는 사람들을 자녀로 선택하시고, 악한 의도와 불경건한 생활로 기울어질 성향을 가지리라고 보시는 사람들을 죽음의 저주를 받도록 결정하신다고 한다.

이렇게 예정을 예지의 보자기로 덮음으로써 그들은 예정을 모호하게 만들 뿐 아니라, 예정의 근원이 다른 데 있는 것같이 주장한다. 이런 생각은 일반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각 시대의 중요한 학자들도 품은 것이었다. 내가 이 사실을 솔직하게 말해 두는 것은 학자들의 이름이 나오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입장이 큰 타격을 받는 것같이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는 너무도 확실하고 명백하여 사람의 권위가 그것을 움직이거나 압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잘 모르고 권위도 없으면서 이 건전한 교리를 사악하게 공격하므로 나는 그 불손한 태도를 그대로 버려둘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결정에 따라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버리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비난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들이 하나님과 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분께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를 값없이 베푸신다고 하는 말은, 경험의 뒷받침이 없는 말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했느냐 하는 문제도, 그 평가의 원인을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무엇 때문에 소나 나귀가 아니고 사람이 되었는가를 대답하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개로 만드실 권능도 있었지만,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들은, 짐승들이 자기들의 처지에 대해서 마치 부당한 차별 대우를 받는 듯이,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는 것을 허락하려는가? 반대론자들도 아무 공로 없지 특권을 얻은 사실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판단의 표준에 따라 은혜를 다양하게 베푸시는 것보다 더 공평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논쟁을 개인들의 문제로 돌려, 그들이 거기서 불평등을 발견하고 따라서 이 교리를 더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적어도 그리스도의 예를 생각하고 떨며 이 숭고한 신비에 대해서 무책임한 지껄임을 그쳐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을 인간으로서 잉태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태중에서 당연히 천사들의 머리와, 하나님의 독생자와, 아버지의 형상과 영광, 그리고 세상의 빛과 의와 구원이 되셔야 했던 것은(1:2이하 참조) 어떤 덕행에 의한 일이라고 그들은 말하려는가?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지혜롭게 언급하였다. "우리에게는 교회의 머리 자신께서 하나님의 거저 주신 선택의 가장 분명한 거울이 되어주신다. 따라서 지체인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도록 하셨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의로운 생활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되신 것이 아니라, 값없이 그 영광을 받으셔서,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선물을 나눠주시게 되었다." 만일 여기서 누군가가, 왜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지 않았는가, 왜 우리는 모두 그와의 거리가 이렇게 먼가, 왜 우리는 모두 부패했는데 그만순결 그 자체이신가 라고 묻는다면, 그는 자신의 정신 이상뿐 아니라 파렴치까지 폭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과 제외됨의 고유한 권한을 박탈하고자 한다면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것도 빼앗게 해 보라.

이제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성경이 선포하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우리는 "창세 전에"(1:4)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았다고 가르칠 때에, 그는 우리 편에 있는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가 한 말을 바꿔 말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 중에서 그의 선택을 받을 가치가 있는 자를 하나도 찾으실 수 없기 때문에 그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에게 눈을 돌려, 생명의 교제에 받아들이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그의 몸에서 지체로 선택하셨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는 영원한 기업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고귀한 기업을 받도록 택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도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들을 성도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한 자로 삼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고할 때에(1:12), 이것을 언급하였다. 만일 장차 올 생명의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우리를 만드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 은혜보다 선택이 선행한다고 하면, 지금 우리를 선택하시도록 그를 움직일 만한 무엇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발견하실 것인가? 바울의 다른 말이 내가 말하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한다. "곧 창세 전에" "우리로‥‥‥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1:4-5) 그는 말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기쁘심"과 우리의 공로를 대조시킨다.

 

2. 선택은 창조 이전의 일이며 공로에 대한 예지와는 관련이 없다

 

더욱 완전한 증명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 구절의(1:4-5) 각 부분을 살펴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각 부분을 종합하면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선택된" 자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신자들을 상대로 말하는 것이 틀림없고 그도 곧 이렇게 언명한다. 그러므로 "선택된"이란 말을 복음이 선포된 시대에 국한되는 것으로 그릇 해석하는 사람들은 비열한 허위로 이 말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고(1:4) 말함으로써 가치에 대한 고려를 전적으로 배제한다. 아직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과 또 후에 아담 안에서 동등한 인간들이 될 사람들을 서로 구별할 조건은 무엇인가? 그런데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다면, 각 사람이 그 자신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 중에서 분리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우리가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하반절)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선택의 원인을 예지라고 생각하는 과오를 반박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덕은 선택의 결과라고 바울이 언급하기 때문이다. 더욱 고차원적인 원인을 묻는다면, 바울은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하셨으며, 이 일은 "그 기쁘신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1:5상반절). 이런 말로 그는 사람들이 자기 안에 있다고 상상하는 선택의 수단을 일체 배제한다. 영적 생활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는 다만 바울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사람들을 택하셨고 그들에게 주고자 하신 은혜를 그들이 나기 전에 그들을 위해서 각각 간직해두신 것이라는 이 한 가지 근원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3. 선택받음으로써 거룩하게 되는 것이지 거룩하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 결정이 지배하는 곳에는 행위에 대한 고려가 있을 수 없다. 물론 바울이 여기서는 이 대조법을 전제하지는 않으나, 그가 다른 데서 설명하는 것과 같이, 여기서도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그리고 "우리로‥‥‥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는 말에 의해서(1:4), 우리는 모든 의혹에서 풀린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밝혔다. 만일, "우리가 거룩하리란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한다면, 바울이 말하는 순서를 뒤집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가 거룩하게 되도록 우리를 택하신 것이라면,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택하신 것이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선택받음으로 해서 거룩케 된다고 하는 생각과, 행위 때문에 선택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두 가지 생각은 서로 일치할 수 없다. 그들은 자주 궤변을 사용하여, 주께서는 이미 있은 공로에 선택의 은혜를 보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공로에 선택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말에는 정당성이 없다. 신자들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선택을 받았다고 할 때에는, 동시에 그들에게 있을 거룩은 선택에서 유래했다는 뜻이 암시된다. 선택에서 유래한 것이 선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고 하겠는가?

바울은 자기가 말한 것을 확인하는 듯이 후에 "그 기쁘신 뜻대로"(1:5), "그 기쁘심을 따라"(1:9)라고 말한다. "그 기쁘심을 따라"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정을 내리실 때에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고려를 하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은 곧 부언하여,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오로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찬양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한다(1:6 참조). 우리가 선택된 데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만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말은, 확실히 그 은혜를 값없이 주신 경우에 한해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택하실 때에 각 사람의 행위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고려하신다면, 그 선택은 거저 주시는 은혜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라고(15:16) 하신 말씀은 모든 신자들에게 전반적으로 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공로를 배제하실 뿐 아니라, 만일 그가 먼저 제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에게는 선택될 아무 이유도 없었으리라는 것을 지적하신다. 또 바울이,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한말은(11:35)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앞지르시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그의 은혜를 받을 만한 것을 과거에나 미래에나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신다는 것이 바울이 밝히려고 한 것이다.

 

4. 로마서 9-11장과 유사 구절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논법을 더욱 깊이 반복하여 더욱 자세히 전개한다. 그는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한다(9:6). 비록 모든 사람이 상속권에 의해서 복을 받았지만 그 상속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 논의는 유대 사람들이 교만하며 거짓된 자랑을 하는 데서 생겼다. 그들이 자기들을 "교회"라고 주장했을 때에, 그들은 복음에 대한 믿음을 자기들의 결정에 의존시키려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 교황주의자들은 이 거짓된 구실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한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언약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중에는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적자(嫡子)의 지위에서 서자(庶子)로 전락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 모든 사람 위에 엄연히 있어서 그들을 지배하며, 독자적으로 양자됨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들은 그의 경건 때문에 구원의 소망이 확보되고, 어떤 사람들은 그의 배반 때문에 상속권이 말살된다면 바울이 그의 독자들에게는 이 비밀의 선택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전연 불합리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그 원인은 하나님 자신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밖에서 구할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자손 모두가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인 것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의 상태가 그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바울은 야곱과 에서의 예를 들어 논의를 더욱 전개해 나간다. 두 사람이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었고, 어머니의 태중에 함께 있었지만, 맏아들의 권리는 에서에게서 야곱에게로 옮겨졌다. 이 변경은 하나의 전조(前兆)와 같은 것으로 야곱의 선택과 에서의 유기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주장한다. 이 일의 근원과 원인을 묻는다면, 예지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덕성과 죄악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들의 피상적인 논법의 요점은, 야곱이란 사람에게서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신다는 것을 보이셨고, 에서에게서는 무가치하다고 예견하시는 사람들은 버리신다는 것을 보이셨다고 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들은 이렇게 대담한 주장을 한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9:11-13, 25:23 참조). 만일 두 형제 사이에 차이를 둠에 있어서 예지가 그에 어떤 관련을 가졌다면, 여기서 때를 말한 것은 확실히 부적당했을 것이다.

야곱에게 장차 있을 덕에서 오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선택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바울은 왜 그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말을 하는가? 그가 아직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경솔한 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하나님께는 숨길 수 없고 따라서 야곱의 경건도 하나님 앞에 나타나 있었다고 곧 대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위가 은혜를 얻게 한다면,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야곱이 나기 전에, 그가 성장한 것 같이, 이미 당연히 확정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사도는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야곱의 선택은 행위에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온다고 가르친다. 사도는 행위를 말함으로써 미래나 과거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행위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연히 대립시킨다. 그 한 편을 확립함으로써 다른 편을 교묘하게 부정하고자 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고려할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셨는가 하는 것이고, 사람들 자신이 무엇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끝으로, "선택""목적"이란 말들을 보면(9:11), 사람들이 보통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과는 별도로 안출해 내는 원인들이 모두 이 원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확실하다.

 

5. 야곱과 에서의 경우는 행위에 대한 주장을 반박한다

 

선택에는 행위도 관여한다고 하는 사람은 이 점들을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구실을 사용할 것인가? 이는 그들의 입장이 사도의 주장을 직접 회피하려는 것이기 때문인데 사실상 두 형제 사이의 구별은 그들이 나기 전에 확정된 것이므로, 그것이 행위에 의존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만 의존된 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주장이다. 그들의 궤변에 조금이라도 진정한 그 무엇이 있다면 사도가 그것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자신께서 선택의 은혜를 통하여 주시기를 이미 결정하신 것 이외의 선한 것을 사람에게서 조금도 예견하실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선행을 그 원인 앞에 두는 어리석은 짓으로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신자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정만을 기초로 한 것이며, 이 은혜는 행위에 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부르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말이다. 우리는 이를테면 눈앞에 그에 대한 실례를 보고 있다.

에서와 야곱은 같은 부모의 자식으로서, 아직 같은 태중에 있으며, 세상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모든 점에서 서로 꼭 같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한 쪽은 받으시고, 다른 쪽은 버리신다. 한 가지 나은 것은 다만 장자 상속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무시하시고, 장자의 것을 빼앗아 아우에게 주셨다. 다른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계획적으로 장자의 권리를 멸시하시며, 육신의 자랑거리를 일체 박탈하시는 것같이 보인다. 이스마엘을 제외시키시고 이삭을 사랑하신다(21:12). 므낫세를 제쳐놓으시고 에브라임에게 더 큰 영예를 주신다(48:20).

 

6. 야곱이 선택된 목적은 지상의 축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일 누가 나를 가로막고, 우리는 내세의 삶 전체에 관해서 이런 낮고도 사소한 유익들을 근거로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며, 장자의 영예를 받은 사람이 곧 하늘의 기업을 받기로 선택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고 가정하자. 이는 심지어 바울까지도 위에서 인용된 증거들을 사용할 때, 성경을 왜곡하여 생소한 의미로 해석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도가 경솔하게 잘못 말했거나 고의로 성경의 중언들을 오용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그는 우리의 반대자들이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 하나님께서는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대 안에 감춰져 있었던 야곱의 영적 선택을 지상적인 표징으로 표현하려고 하셨다는 것이다. 야곱에게 부여된 장자 상속권을 내세와 관련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무하고 어리석은 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으로 인해서 얻은 것은 각종 곤란과, 고통과 쓸쓸한 타향 생활과 많은 슬픈 일과 비통한 근심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을 위해서 그의 나라에 준비하신 영원한 영적 복을 외적인 복으로 증거하셨다고 확실히 깨달았을 때에, 바울은 서슴지 않고 그 외적인 복에서 영적 복을 증명하는 증거를 찾은 것이다(1:3이하 참조). 우리는 또한 가나안 땅도 하늘나라 처소의 증표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야곱이 천사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나누기로 되었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야곱은 에서에 비해서 공로에서는 다르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선택되었으며, 버림을 받은 에서와 구별되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사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하셨다고(9:15) 대답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주께서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이유를 그들 자신에게서 찾지 않으시고 자신의 긍휼에서만 취하신다고 하는 것이(9:16) 주의 분명한 선언이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의 구원은 오로지 주 자신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자신 안에서만 확립하시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로 내려가는가? 주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분의 긍휼만을 가리켜 주시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는가? 주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그의 긍휼 가운데 국한시키시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의 관심의 일부를 우리 자신의 공로로 향하게 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고 하는,(11:2) 소수의 사람들을 보아야 한다. 그들을 미리 아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반대자들이 상상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한가한 망대 위에서, 자신이 직접 하시지 않는 일을 다만 예지하실 뿐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이 말이 자주 사용되는 그러한 뜻에서이다. 누가가 전하는 베드로의 말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이란 말이 있다(2:23).

베드로가 말하는 하나님은 확실히 구경꾼이 아니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편지할 때에, 그들을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른다(벧전 1:2).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로 삼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정하시는 그 은밀한 예정을(벧전 1:2) 적절하게 표현한다. ""이란 말을 동의어로서 첨가할 때에 이 말은 보통 확고한 결심을 의미하므로 베드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주관하실 때에 자신의 외부로 나가시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같은 장에서 그리스도를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어린양이라고 말한다(벧전 1:19-20). 하나님께서는 어디에서 인류의 구원이 올 것인지를 보시려고, 하늘에서 내려다보신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무의미한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미리 알려진 사람들은, 바울이 보기에는 군중 가운데 섞인 소수에 불과하고, 군중이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스스로 가장 경건하다고 주장하는 위선자들의 교만을 억제하기 위해서,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라고 한다(딤후 2:19). 요약하면, 바울은 이런 말로써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후손 전체요, 또 하나는 그들에게서 분리되어 나온 사람들로서 사람은 올 수 없으나 하나님이 보시는 곳에 숨겨 있는 자들이다. 바울의 이 말이 모세의 말에서 왔다는 것은 틀림없다. 모세는,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언급한다(33:19). 이 말씀은, 외적인 상태는 같은 선민에 관한 것이었으나 마치 그가 일반적인 선택 안에 일부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은혜가 포함되어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더욱 거룩한 보화같이 여겨진다고 한 것과 또한 공통된 언약이 있다고 해서 소수 사람들이 일반 대중의 대열에서 분리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서 자신이 값없이 은혜를 나눠주시며 판단하신다는 것을 알리고자, 다만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또 원하시는 사람에게만 자비를 베푸신다고 단언하신다. 자비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거절을 당하는 일이 없이 자비가 내려진다.

이런 때에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예측하거나 그 일부를 취득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에 관하여 자기를 찬양할 것을 요구하신다.

 

(선택과 유기(遺棄)의 이 근거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함. 7-11)

 

7. 선택에 관한 그리스도의 증거

 

이제 이 문제 전체에 대해서 최고의 심판자시요 주이신 분의 발언을 듣기로 하자. 그는 청중의 마음이 완고하여 그들 앞에서 하시려는 말씀이 거의 다 수포로 돌아갈 것을 아시고, 이 장애를 극복하시려고 외치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6:37).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6:39).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증과 보호를 받게 되는 발단은 아버지의 선물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혹 어떤 사람은 여기서 논의의 방향을 돌려 믿음으로 자발적으로 복종한 자들만이 아버지의 자녀로 인정된다고 항의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무수한 군중이 배반하여 전세계를 뒤흔들지라도 선택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확고한 계획이 하늘보다도 더 견고할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선택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독생자를 주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것이 본래 그런 것이었느냐고 묻는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낯선 자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셔서 자기 백성을 삼으신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너무도 명백하여서, 어떤 궤변의 구름으로도 덮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6:44-45) 만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면 선택은 전반적인 것이 되겠지만, 현재 신자가 소수인 데서 분명한 차이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주신 제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소유였다고(17:6) 말씀하시고 조금 후에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고 하신다(17:9, 15:19 참조). 그러므로 전세계가 그 창조주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이 제한된 소수만을 저주와 진노와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어 멸망의 운명을 면하게 한다. 그러나 세상 자체는 그 예정된 대로 자멸하게 버려두신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자이시지만, 아버지와 함께 선택권을 주장하신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고 하신다(13:18). 어디서 택하셨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구절에서 "세상에서"라고 대답하신다(15:19).

그러나 제자들을 아버지께 맡기시는 기도에서 그는 세상을 제외시키신다(17:9). 우리는 바로 이것을 믿어야만 한다. ,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택하신 자를 아신다고 말씀하실 때에, 인류가운데서 특별한 일부분 곧 그 덕의 성질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결정에 의해서 구별되는 일부의 사람들을 암시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선택의 창시자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 아무도 자기의 노력이나 근면에 의해서 탁월한 것이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유다를 "마귀"라고 부르시면서도 자신이 택하신 자라고 하신다(6:70). 이것은 그의 사도직에 관해서만 하신 말씀이다.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자주 말하는 것과 같이(예컨대, 1:16, 3:7), 사도직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있음을 명백히 증거해 주는 거울이지만, 그 자체에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다는 사도직을 충실히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보다 더 나쁠 수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자신의 몸에 접붙이신 사람은 아무도 멸망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10:28). 그 이유는 그들을 보존하시는 것이 그의 약속을 이행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만유보다 크신"(10:29)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다. 그가 다른 곳에서, "아버지여‥‥‥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여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17:11-12)라고 하신 말씀은 오용되기는 하지만 모호한 점은 없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임의의 선택으로 원하시는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로 만드신다. 이 일의 본질적인 원인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시는 은밀한 뜻으로 만족하시기 때문이다.

 

8.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교부들의 생각, 특히 어거스틴의 주장

 

그러나 암브로시우스와 오리겐과 제롬은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자기의 은혜를 선용하리라고 예견하신 대로 사람들 사이에 은혜를 나눠주셨다고 생각했다. 그뿐 아니라, 어거스틴도 오랫동안 이 견해를 가졌었다. 그러나 성경을 더 잘 알게 된 후에는 이 생각을 철회했을 뿐만 아니라 강경하게 반박했다. 사실, 그는 철회한 후에,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이 오류를 고집하는 것을 비난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도가 이 궤변을 간파하지 못했다면 누가 놀라지 않을 것인가? 그는 아직 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놀라운 말을 한 다음에,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라는(9:14)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시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공로를 예견하신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과 긍휼을 피난처로 삼았다."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선택 이전의 모든 공로를 일체 배제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립하는 하나님의 예지를 변호하는 사람들의 이론은 여기서 확실히 무력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창세 이전에 선택된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하게 되리라고 예견하셨기 때문이요, 우리를 선하게 만드시려고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15:16) 말씀하시는 분은, 선한 것을 미리 보셨다는 말씀을 전연 하시지 않는다. 만일 그가 우리를 택하신 것이 우리가 선하게 될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이라면, 그는 또한 우리가 그를 택하리란 것과 그 결과도 예견하셨을 것이다." 교부들의 권위에 의지하기를 원하는 우리들은 어거스틴의 증거를 중요시해야 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자기가 다른 교부들에게서 분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이 점으로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명쾌한 증명으로 이런 증상의 허위성을 밝힌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의 말을 인용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긍휼히 여기시는 자를 부르신다."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불경건한 자를 경건하게 만드셨을 것이다. 그러나 불러 주시고자 하는 사람을 부르시며, 원하시는 사람을 경건하게 만드신다." 만일 내가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하여 한 책을 만들려고 했다면, 그가 한 말 이외에 내가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곧 증명할 수 있을 것이지만, 장황한 말로 독자들을 괴롭히고 d?않다.

이제 우리는 교부들이 침묵을 지킨다고 생각하고, 문제 자체에 대하여 관심을 돌려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심에 있어서 그것이 옳은 행동이었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제기되었다. 바울은 행위를 고려할 것을 제의함으로써 한 마디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고, 바울은 여전히 곤란한 논의를 계속했는가? 그렇게 해서는 안되겠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께는 건망증이라는 허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간단명료하게,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따라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33:19) 하신 말씀이 문체를 결정한다. 이것은 마치 그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그가 자비를 베푸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고, 그밖에 아무 이유도 없다"라고 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기에 합당한 자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여전히 진리이다."

 

9. 자유로이 주어지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 같은 공적이 가능한 한, 선택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공로를 "예지"한 것과 관련이 없는가?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궤변에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로에 대한 예지는 예정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예정의 원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에게도 부를 수 있다. , 예정에 대한 특별한 평가에 의해서는 그렇게 부를 수 있다. 예컨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공로로 영광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로 때문에 사람에게 영광을 예정하셨다고 말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선택에 있어서 단지 그의 선하심만을 보기를 원하신다. 그 이상의 무엇을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지혜 있는 체하는 어리석은 자이다. 우리도 궤변으로 싸우고자 한다면 토마스의 궤변을 반박할 방법이 있다. 그는 선택된 자들에게 공로를 근거로 어느 정도의 영광이 예정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예정하시고, 그 은혜에 의해서 그들이 영광을 얻을 만한 공로를 세우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항의를 제시하여, 은혜를 받기로 예정되는 것은 생명을 받기로 선택되는 것에 종속되는 것 곧 후자에 대한 일종의 시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은혜가 예정된 사람들은 훨씬 전에 영광을 가지기로 결정된 자들이며, 주께서 그 자녀들을 선택에서부터 의롭다 하시는 데까지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영광에 이르도록 예정되는 것은 은혜에 이르도록 예정되는 것의 원인이고,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하지 않겠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만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논쟁은 무익한 것이다. 오래 전에 교회의 어떤 저술가가 "하나님의 선택을 공로에 돌리는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다"라고 바르게 말한 적이 있다.

 

10. 하나님의 부르심의 보편성과 선택의 특수성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보편적으로 부르시면서 몇 사람만 선택하여 받아들이신다면 자가 당착이 될 것이라고 항의한다. 이와 같이 이런 사람들이 보기에는, 약속의 보편성은 특수한 은혜의 구별을 배제한다. 또 어떤 온건한 사람들도 이렇게 말함으로써 진리를 압박하지는 않더라도 어려운 문제를 막으며, 여러 사람의 호기심을 억제하려고 한다. 이것은 대단히 좋은 생각이나, 모호한 회피는 용서할 수 없으므로 이 의도로 시인할 수 없다. 거만하게 선택을 욕하는 자들은 구역질이 날 정도의 궤변이 아니면, 수치스러운 오류를 말하고 있다.

나는 다른 곳에서, 성경이 이 두 가지 생각, , 외적인 전도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오도록 부르심을 받지만 회개와 믿음의 영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두 가지 생각을 조화시킨다는 것을 말했고, 곧 그 일부를 반복하겠다. 나는 그들의 주장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으므로 그것을 부정한다. 한 도시에는 비가 올 것이나 다른 도시에는 한발이 있으리라고 경고하시며(4 :7),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을 선언하시는 분은(8:11)모든 사람을 불러야 한다는 어떤 고정된 법을 만드심으로써 스스로를 구속하시지 않는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전도하는 것을 금하시고(16:6) 그를 비두니아로부터 마케도냐로 향하게 하신 분은(16:7),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이 보화를 분배하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이신다. 그의 구원의 약속을 선택된 자들에게 특별히 보내신다는 것을 이사야서에서는 더욱 명백하게 보여주신다. , 그들만이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지 인류 전체가 차별 없이 다 되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하신다(8:16). 그러므로 교회의 자녀들을 위해서만 그 개개인을 위해서만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 구원의 교리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도 실제로 똑같이 유익한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분명히 이 가르침을 그릇되게 저속화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지금은 복음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널리 전해지고 있으나 믿음의 선물은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사야는 "주의 팔"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53:1). 만일 이사야가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완고하여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의와 사악한 생각으로 복음을 멸시하는 결과가 생긴다고 했다면, 보편적인 소명의 이 측면이 어느 정도 인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사람들에게 팔을 나타내 보이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들의 눈이 어두워졌다고 가르치는 것은(53:1) 결코 사람의 죄책을 경감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는 다만, 믿음은 특별한 선물이므로 외면적인 가르침을 듣기만 해서는 무익하다는 것을 경고한다. 그런데 나는 설교만이 또는 믿음이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느냐고 이 교사들에게 묻고자 한다. 요한복음 1장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1:12)할 때, 확실히 여기에서는 뒤섞여진 무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신자들 곧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에게(1:13) 특별한 지위가 부여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말씀 사이에는 상호 일치가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씨가 가시덤불 속에나(13:7) 돌밭에(13:5) 떨어지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간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불복종의 태도를 고집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똑같이 보는 눈과 들을 귀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오지 않을 줄을 아시면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은 어떻게 모순이 없다고 할 것인가? 어거스틴의 대답을 빌리겠다. "그대는 나와 논쟁을 하려는가? 나와 함께 놀라며 ', 깊도다!' 하고 감탄하라.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두려운 마음으로 일치하여, 오류로 멸망하지 않도록 하자." 그뿐 아니라, 바울이 증거하는 것과 같이, 선택이 믿음의 모체라면, 선택이 특수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은 일반적이 아니라고 하는 논법을 그들에게 돌려보낸다. 그 이유는, 이 원인과 결과의 연쇄에서 우리는 곧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할 때에(1:3-4),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사람들만을 택하신 것이므로, 신령한 복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 바울은 선택된 사람들에게, 아무도 자기의 노력으로 신앙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 영광은 하나님께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미리 택하신 사람을 값없이 비추어 주시는 것임을 알라고 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권고한다(1:1). 베르나르드가 한 말은 옳다. "그리스도에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12:32).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라고(13:11) 말씀하실 때에, 그의 친구들은 각각 이 말씀을 듣는다. 그들은 누군가?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8:29), 또 하나님의 위대한 은밀한 계획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19)라고 하였고, 하나님께서 아신 일은 사람들에게 계시되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시고 자기 백성이 되도록 예정하신 사람들 이외에는 이렇게 위대한 비밀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조금 뒤에 그는 결론을 내린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103:17). 예정하셨으므로 영원부터요, 하늘의 복을 주시므로 영원까지이다. 전자는 처음이 없으며, 후자는 끝이 없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우리는 베르나르드를 증인으로 인용할 필요가 있는가? 주께서 직접하시는 말씀이 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6:46).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그의 얼굴의 광채에 놀란다는 것이다. 또 참으로, 믿음이 둘째 자리를 차지한다면, 믿음을 선택과 연결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이 순서는 그리스도의 다른 말씀에서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6:39-40).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하셨다면, 그의 아들을 그들 위에 두시고 모든 사람을 신앙의 거룩한 유대로 그의 몸에 접붙이셨을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특별한 담보 곧 하나님께서 양자로 삼으신 사람들을 위해서 보존된 담보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10:4-5).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양들의 귀를 주께서 뚫으셨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늘의 은혜에 의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그의 양이 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의 구원은 이길 자가 없는 하나님의 힘이 보호함으로써 영원히 확실하고 안전하다고 가르치신다(10:29). 따라서 불신자들은 그의 양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신다(10:26).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제자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람들 가운데(8:16, 54:13 참조), 그들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인용한 증거들은 견인을 의미하므로, 동시에 선택의 변함없는 항구성도 증명한다.

 

11. 제외되는 것도 행위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생기는 일이다

 

이제 버림을 받는 자들에 대해서 간단히 말하려 한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도는 동시에 관심을 보인다. 야곱이 아무 선행의 공로가 없이 은혜를 받게 된 것과 같이, 에서는 아직 범죄로 더럽혀진 일이 없으면서 미움을 받았다(9:13). 우리가 행위에 눈을 돌린다면, 우리에게도 분명한 일을 사도가 보지 못했다는 것같이 되어, 그를 모욕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사도가 행위를 보지 않았음이 증명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직 선악간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에 하나는 선택되고 하나는 버림을 받았다고 역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행위를 근거로 삼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다음에 그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는 문제를 언급하였을 때에도, 하나님의 의를 가장 화실하고 분명하게 옹호할 수 있을 듯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

, 에서에게는 그의 사악함에 따른 보상을 주신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버림을 받은 자들도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세움을 받는다고 하는 다른 해결 방법으로 만족한다. 그리고 끝으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는 결론을 첨가한다(9:18). 바울이 두 가지를 다 하나님의 결정에만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그렇게 하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 이외에 우리가 다른 이유를 확정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시는 데 대해서도 그의 뜻 이외에 아무 이유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하신 대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기도 하고 강퍅하게 만드시기도 한다고 하실 때, 이 말은 하나님의 뜻 이외에서는 다른 원인을 찾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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