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동시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던 비범한 사람 존 웨슬리는 청교도적 신앙유산을 양친 모두에게 물려받았지만 특히 어머니 수잔나에게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녀는 라틴어, 헬라어, 철저한 규율, 엄격한 경건생활, 영적 성장 등을 웨슬리에게 교육시켰다. 웨슬리는 17세기 청교도 책을 많이 읽었지만 그들의 가르침에 다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는 칼빈주의이지만 잉글랜드는 알미니안주의가 강하게 들어왔다. 특히 웨슬리 시대에는 이신론의 영향으로 인해 교회가 인간의 선행을 강조하고 있었다. 1720년 웨슬리는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했고 학교에서 경건운동을 일으키며 회원들과 함께 규칙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728년에 잉글랜드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리스도의 의와 내적 체험의 증거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1738년 웨슬리는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열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저녁집회에 참석했는데 누군가 마틴루터의 로마서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 그는 그때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와 믿음만이 능력의 원천임을 깨닫게 되었다.
회심 체험 이후 웨슬리의 중요한 관심사는 오직 사람의 영혼구원이었다. 불붙은 복음전도에 대한 열기로 그의 마음이 매우 뜨거워진 웨슬리는 복음전도 사역자로서 말을 타고 다니면서 오직 영혼 구원하는 일에만 모든 시간을 보냈다. 더 나아가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자랑하는 100명의 용사만 있으면 온 세계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온 세계의 복음의 불길이 타오르기를 갈망하던 존 웨슬리는 그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2시간씩 기도하였다. 또한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에,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 매일 하루에 몇 시간씩을 따로 떼어 부지런히 말씀을 읽었다. 웨슬리는 회심 후 한달만에 옥스퍼드대학에서 ‘믿음으로 인한 구원’이라는 주제로 담대하게 설교하였는데 이것이 그날로부터 일생동안 웨슬리의 설교 주제가 되었다. 복음에 불붙은 웨슬리는 1738년부터 런던시내나 시외를 막론하고 어디든지 강단을 빌려주기만 하면 열심히 설교하였다. 웨슬 리가 설교할 때마다 청중들 가운데 다수는 크게 감명을 받고 눈을 흘렸는데 특히 소외된 계층에서 새롭게 예수님을 믿기로 한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많이 나타났다. 웨슬리는 하루에도 30km나 말을 타고 가서 설교하기를 4-5번씩 하였다. 어떤 때는 그가 설교하기로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여 보면 30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기다리는 일도 있었다. 꺼져가는 등불처럼 메말라가는 영국교회에 부흥이 일어나면서 영국의회가 살아나고, 정치, 경제, 문화, 도덕, 윤리가 다시 살아났다. 이것이 18세기 영국교회 부흥이며 웨슬리는 부흥의 주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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