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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 : 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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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30년 전쟁
(Thirty Years'''''''' War, 1618-1648)

종교 개혁 시대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끝없는 갈등 속에서 흘러갔다. 이미 유럽의 여러 나라들, 특히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등이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올 더 무서운 전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종교 전쟁 가운데 가장 처참하고 가장 긴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30년 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끝났을 때에야 비로소 종교 개혁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1) 전쟁 발발의 원인

1555년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맺었던 아우그스부르그 강화조약이 겨우겨우 약속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조약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문제 때문에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란 이 조약이 가톨릭과 루터교도에게만 적용되고 다른 개신교도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과 각 지역 통치자들이 자기 구역의 종교를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은 많은 문제를 야기 시켰다.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기에 전 지역이 작은 영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혼란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가 가톨릭이 되면 전체가 가톨릭이 되었고 다시 루터교도가 되면 모두 다 루터교도로 개종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지역을 떠나야만 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25년 동안 3번이나 종교가 바뀌는 일도 있었다. 다른 종교는 곧 박해와 불이익을 의미했다.

독일 사람들 가운데는 칼빈주의자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수는 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국의 아무 곳에서도 예배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아우그스부르그 조약에 그들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들을 비롯한 다른 개신교도들은 제국에서 계속 이단으로 간주되어 박해를 면할 수 없었다. 종교적인 편견이 강하게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우그스부르그 조약에는 보류 조항이 있었다. 그것은 몇몇 지역에서는 주교나 영주가 개신교로 개종하더라도 여전히 그 지역은 계속 가톨릭으로 남아 있는다는 약속이다. 이러한 약속은 악용되었고, 대체로 가톨릭 측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상황을 살펴볼 때 당시의 정황은 어느 때라도 한 쪽이 강해지면 다른 쪽을 밀어붙일 분위기였다. 이 불안한 평화 속에서 크고 작은 종교적 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 50년가량이 흘렀다.

그러다 1606년 도나우베르츠라는 황제 직할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이 도시는 이미 개신교를 택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가톨릭 세력은 단지 수도원 하나뿐이었다. 이 도시의 수도사들은 수도원 안에서만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런데 수도사들이 수도원 밖으로 행진해 나온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돌을 던지며 이들을 다시 수도원 안에 몰아넣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는 이 도시에 인접한 바바리아라는 큰 주의 영주 막시밀리안이었다. 바바리아는 강력한 가톨릭 지역이었다. 이 사건 후 일년 뒤 막시밀리안이 군대를 거느리고 도나우베르츠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는 시민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명령했다. 황제 직할시는 당연히 황제의 종교를 따라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주민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그들은 개종은커녕 대항하기 위해서 힘을 모았다. 그 결과는‘복음주의 동맹’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상대방은‘신성 동맹’을 만들었다. 언제고 두 파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질 참이었다. 그러나 가톨릭은 교황과 황제의 지원을 받는 데 비해서‘복음주의 동맹’은 개신교 전체를 포함하지 못한채 단지 루터교도들로만 이루어진 약점이 있었다.

보헤미아에서도 그 갈등이 심했다. 지금의 체고슬로바키아인 이 지역은 존 후스 시대부터 개혁의 정신이 강했던 곳이다. 이 지역 주민의 90퍼센트는 칼빈주의자였다. 때문에 독일의 칼빈교도들이 이곳으로 많이 이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황제가 볼 때 여기 주민들은 가톨릭도 루터파도 아닌 이단들이었다. 페르디난드는 국왕이 되자 이 지역의 이단을 뿌리 뽑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로마 교회가 멸시당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내 몸이 찢어져 죽는 것을 택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을 아주 잔인하게 다루었다. 주민들은 즉각 반발하며 프라하로 갔다. 그리고 왕실 위원회에 항의하였다. 모든 진정이 허사로 돌아가자 이들은 항의를 듣던 왕의 신하들을 창 밖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것이 30년 전쟁의 출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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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쟁의 시작과 가톨릭의 만행

보헤미아 사람들은 페르디난드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팔라틴의 선제후 프레드릭을 왕으로 선출하였다. 반란은 곧 동부로 퍼졌다. 인근의 실레시아와 모라비아에도 미쳤다. 마침 사촌인 황제가 죽자 페르디난드는 황제가 되었다. 그는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에게 보헤미아를 정벌하라고 명하였다. 그는 신성 동맹군을 이끌고 엄청난 힘으로 보헤미아로 진격했다.

프레드릭은 왕의 직책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 개신교는 프라하 근처의 하얀산에서 벌인 전투에서 졌다. 재위가 너무 짧아서‘겨울 왕’이라 불린 프레드릭은 네덜란드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보헤미아는 무서운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페르디난드는 극악한 조처를 취했다. 보헤미아 사람 네 명 가운데 셋을 죽였다. 그리고 한 명은 노예로 팔았다.

보헤미아는 페르디난드에게 돌아가고 팔라틴은 막시밀리안에게 충성의 대가로 주어졌다. 두 지역에서 개신교도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지도자들의 재산은 몰수당하고 그들은 처형되었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가 되지 않을 사람들은 그 지역을 떠나거나 처형당해야 했다. 개신교도들은 이렇게까지 심하게 하지는 않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만행은 거의가 가톨릭에 의해 자행되었다.

페르디난드의 득세는 유럽의 개신교도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또한 유럽의 영주들 모두는 황제의 가문인 합스부르그의 융성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에 대항해서 1625년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등은 개신교 동맹을 조직하였다. 그리고는 독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프레드릭을 다시 팔라틴의 영주로 복권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황제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일부 가톨릭 영주의 지원도 받고 있었다.

페르디난드는 막시밀리안 외에 또 다른 자신의 군대를 소집하였다. 그리하여 덴마크의 크리스천 4세와 전투를 벌였다. 독일은 그 두 군대의 전쟁터가 되었다. 가톨릭의 지휘관이었던 발렌스타인의 알베르트 공은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었다. 결국 크리스천은 그에게 패배하여 도주했고 독일 땅은 황폐해졌다. 전쟁에 진 결과 다시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고 가톨릭으로의 개종이 강요되었다.

황제는 의기충천했고 가톨릭교도들은 기쁨에 찬 반면, 개신교도들은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으셨다. 동트기 전은 절망적으로 어두운 법, 구원은 스웨덴 왕을 통해서 왔다. 이 위대한 왕은 죽기까지 싸움으로써 유럽의 개신교도들을 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싸움은 너무도 고통스럽고 오래도록 진행되었다.

스웨덴 왕 구스타브 아돌프스(Gustavus Adolphus,1594-1632)는 루터교를 믿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 경건한 왕이었다. 자기 나라 말 외에도 독일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스페인어, 영어, 폴란드어, 러시아어도 알아들었다. 그가 17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을 때 스웨덴은 약한 나라였다. 덴마크가 대부분의 땅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능한 왕이었다. 국토는 분열되어 있었고 왕위는 대단히 약했지만 그의 현명한 정치는 나라를 점차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는 비서관 옥센스티에르나(Oxenstierna)의 지원을 받아 사법체계를 개혁하고, 학교들을 세우고, 공업을 장려하고, 강력한 경제를 구축하였다. 그는 또한 역사상 위대한 군사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데, 그의 야전 전술들은 잘 훈련되고 기동성 있는 소규모 머스킷총 부대들을 운용한 것을 포함하여 가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는 곧 덴마크 사람들을 스웨덴에서 몰아냈고 황제를 배출하고 있는 합스부르그가 세력과 맞서게 되었다. 결국 그는 합스부르그 가문의 끝없는 야심과 야만적인 행위를 중단시키고 개신교도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소명에 불타게 되었다.

1630년 구스타브 아돌프스는 발트해를 건너 독일에 상륙했다. 그의 군대는 1만 8천 명의 잘 훈련된 군사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상대할 적은 숫자적으로 훨씬 우세했다. 가톨릭 군은 틸리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와 그의 군대는 이미 30여 차례나 치열한 전투을 하고 승리를 얻어낸 전문가들이었다. 황제와 신하들은 또 하나의 겨울 눈사람 왕이 나타났다고 비웃었다.

더 어려웠던 것은 독일의 개신교도들이 구스타브 아돌프스왕과 합세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 개신교도들은 황제의 무자비한 처벌을 두려워하였다. 보헤미아가 초토화되지 않았던가! 이 악한 인간은 지옥의 사자였다. 또한 그들은 스웨덴 왕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비록 복음적인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군대까지 믿을 수는 없었다. 이미 덴마크군도 패하고 도주하였기 때문에 더욱이나 믿을 수 없어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구스타프 아돌프스를 통하여 개신교도들을 가톨릭의 만행으로부터 구원하실 계획을 착실히 진행케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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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신교 군의 승리

스웨덴 군은 모범적이었다. 왕은 뛰어난 무장이었고 전략이 출중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틸리 군을 분쇄하면서 들어왔다. 거듭되는 승리는 그를 전설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그의 군사들은 전에 독일을 쳐들어왔던 다른 군대와는 달랐다. 친절했고 주민들을 존중했다. 그들은 가톨릭교도나 칼빈교도들에게 자기들의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사였다.

스웨덴 왕은 자국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그는 그 본보기로 독일 땅을 한치도 요구하지 않으리라 선언했다. 프랑스가 그를 지원하려고 할 때도 그 나라가 독일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위대한 구원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어떻게 하겠는가? 차츰 독일의 개신교 영주들은 그를 진심으로 원조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힘은 점점 더 강화되어 갔다.

가톨릭 군은 그를 지지하는 가장 큰 도시를 포위하였다. 그것은 막데부르그였다. 틸리의 군사들은 도시를 포위하고 함락시켰다. 살육이 벌어질 때 아무도 탈출할 수 없었다. 어린이들은 루터의 찬송을 부르며 행진했다. “우리를 지키소서. 악한 교황이 칼로써 당신의 나라를 빼앗고 당신이 행하신 모든 일을 허사가 되게 합니다.” 그러나 도움의 손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분노한 틸리는 그 어린이들 전체를 죽여 버리도록 명령했다. 도시의 모든 건물들은 불탔다. 일부 성당을 제외하고는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3만이나 되었던 인구는 4천 명도 채 안되게 남았다. 이 무서운 만행을 행한 틸리는 의기양양해서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대승리였습니다. 폐하와 황궁의 귀부인들이 오셔서 그 광경을 지켜보지 못한 것이 유감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황제의 전성기는 지나가고 있었다. 막데부르그의 대학살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가톨릭 군에게 오히려 손해가 되었다. 이 사건은 개신교도들을 무섭게 단합시켰다. 가톨릭 앞에는 지옥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단결된 개신교도들은 구스타브 아돌프스의 깃발 아래 행진했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스웨덴 군사들에게 걸었다.

황제는 남쪽 삭소니의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 삭소니 사람들은 명령을 듣는 대신 스웨덴 사람들과 합류했다. 구스타브 아돌프스는 남쪽으로 내려와 틸리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여기서 가톨릭은 참패하였다. 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사령관 틸리는 심한 부상을 입고 도주하였다. 그는 이듬해 회복해서 다시 스웨덴 군과 맞붙었다. 그러나 다시 패하고 치명상을 입고 죽고 말았다.

이제 반대로 남부의 바바리아가 위협을 받았다. 이 지역은 가톨릭측 신성 동맹의 심장부였다. 견디다 못한 가톨릭 지도자들은 평화 조약을 애원하였다. 스웨덴 왕은 몇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가톨릭과 개신교도 누구에게나 종교의 자유를 줄 것, 보헤미아 왕국을 본래의 주권자에게 돌려줄 것, 팔라틴을 다시 프레드릭에에 돌려줄 것, 그리고 제국 안에서 예수회원을 축출할 것 등이었다.

이를 접한 페르디난드는 절세의 지휘관 발렌스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발렌스타인은 황제와 전에 싸운 적이 있어서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그는 도와주는 조건으로 자기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독일의 통치자가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는 프라하를 점령한 개신교도를 몰아내고 신성 동맹의 잔여 병력을 모아서 진군하였다. 드디어 스웨덴 군과의 대접전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1632년 11월 두 군대는 뤼첸에서 회전하였다. 스웨덴 군은 왕과 함께 주의 축복을 간구하였다. 그리고는 루터의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불렀다. 왕은 “어린 양떼여 원수를 두려워 말라”라는 찬송을 부른 뒤 무릎을 꿇어 부하들과 다시 기도하였다. 전장을 덮고 있던 안개는 오전 10시쯤 걷히기 시작했다. 위대한 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적과 격돌하였다.

전투의 소용돌이 속에 양측은 무서운 싸움을 벌였다. 다시 안개가 끼어 왕은 전장도 자신의 군사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적군들이 몰려와서 그를 보고 누구냐고 묻자 그는 대답한다. “나는 스웨덴의 왕이다. 오늘 내 피로써 독일 민족의 신앙과 자유를 보장한다.” 적군은 이 말을 듣고 총으로 그의 머리를 쏘았다. 이렇게 그는 신앙의 제물이 되었다.

이 비보를 들은 스웨덴 군은 눈물을 뿌리며 더욱 분발하여 모든 힘을 다해 황제의 대군을 물리쳤다. 안개가 걷히면서 전장은 처참한 모습을 드러냈다. 발레스타인 군은 참패하였다. 스웨덴 군은 왕의 시신을 거두어 승리 가운데 왕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의 몸은 스톡홀름 교회에 안장되었다. 하나님은 그 위대한 종의 희생을 통해 개신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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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베스트팔렌 조약

그 후에도 전쟁은 18 년이나 지루하게 계속되었다.여기 저기서 살인과 약탈이 자행되었다.전쟁에서 여러 해를 보낸 군인들은 이제 전투가 직업이 되었다.이제 프랑스도 전쟁에 참여했다.지친 발렌스타인은 스웨덴,프랑스,독일의 개신교도들과 협상을 시도했다.황제는 그를 배반자로 생각했다.얼마 후 발렌스타인은 아일랜드의 한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스페인은 황제를 지원하기 위해서 군대를 보냈고 가톨릭인 프랑스는 황제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개신교도들을 지원했다.이제 전쟁의 동기는 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주도권과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변했다.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이들은 전쟁터에 거주하는 독일 사람들이었다.이제 전쟁을 찬양하던 이들까지도 지쳐버리고 말았다.

1637년 페르디난드 2세는 죽었다.얼마나 악한 황제였던가!뒤를 이은 그의 아들은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부친처럼 광신적이고 악하지 않았다.스웨덴 군은 철군을 원했다.프랑스는 가장 휴전하기 유리한 시기가 되었음을 알았다.유럽인 전체가 전쟁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들 있었다.

1643년 이래 베스트팔렌 지방의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종교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회의가 개최되어 오다가 1648년 10월 24일 오스나브뤼크에서 베스트팔렌조약이 조인되었다.

‘베스트팔렌 ’또는 ‘웨스트팔리아 ’(The Peace of Westphalia)조약으로 불리는 이 휴전 협정으로 30년 전쟁은 그쳤다.가만히 앉아 있다가 막판에 뛰어든 프랑스가 가장 큰 이익을 보았다.라인 강까지 영토를 넓혔기 때문이다.스웨덴은 오랜 싸움의 대가로 발틱해와 북해의 넓은 땅을 얻게 되었다.독일의 영주들은 황제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실제적인 권력을 얻어냈다.

영토의 광범위한 변화와 함께 여러 가지가 달라졌다. 종교적 관용에 대하여 어떤 기본 원칙이 선언되지는 않았지만 종교 전쟁은 완전히 그치고 말았다.아예 그런 문제로 싸우는 데 진력이 나 버렸기에 언급도 하지 않은 셈이다.황제는 독일에서 가톨릭교를 강요하려는 계획을 완전히 포기했다.칼빈주의자들도 루터교나 가톨릭과 동등한 입장에서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 나타난 종교의 자유의 원칙은 상대방을 이해한다든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를 받아들여서가 아니었다.이제 종교 문제 때문에 목숨을 걸고 전쟁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물론 시작은 순
수한 종교적 열정 때문이었다.그러나 전쟁은 언제나 사람을 거의 미치게 해서 마귀의 도구로 만들었다.하나님을 위해서 살인하고 약탈하고 강간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신앙에 대한 열정이 전보다 많이 식었다.우리 것이 옳으면 우리가 압도적으로 이겨야 할텐데 저쪽 편도 이기는 것이었다.그리고 우리 편이 옳으면 우리는 끝까지 신사적이어야 할텐데 우리도 전쟁 중에 똑같이 악한 행동을 일삼지 않았던가.도대체 우리가 옳고 우리가 믿는 신앙이 옳다고 어떻게 주장하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그 동안의 전쟁을 통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전 시대에는 당연하던 문제들이 이제는 회의의 대상이었다. 신학자들의 가르침이 옳은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30년 전쟁의 참화를 만들어 낸 그들의 교리는 무엇이었던가? 과연 광신자들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인가? 그리고 다른 종교의 사람들은 마귀 취급해야 바른 신앙인가? 여기서 더 나아간 사람들은 생각했다. “과연 우리가 믿는 종교가 올바른 것인가?”

그리하여 유럽인들이 종교 개혁 시대에 가졌던 신앙의 열정은 많이 가라앉아 버렸다.그리고 차츰 이성을 신봉하는 계몽주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많은 지성인들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되었다.어떠한 경우라도 종교 문제를 전쟁을 통해 해결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이 일어나면서 다른 신앙에 대해서도 관용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전쟁에 참여한 모든 영주들은 종교 문제보다는 자신이나 자기 국민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실리주의로 흘러갔다.전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살인도 전쟁도 불사했다.그러나 이제는 모든 정책이 신의나 신앙보다는 자기 나라의 정신적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 결정되어야 했다.이로부터 근대 세속 국가의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종교 개혁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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