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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 : 종교개혁 운동의 확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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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종교 개혁 운동의 확산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쯔빙글리와 칼빈에 의해 발전된 개혁주의 신학 운동은 칼빈과 파렐의 고국인 프랑스에도 전개되었다. 프랑스의 개혁 운동은 인문주의자들에 의하여 시작되어 16세기 중반 칼빈주의자들에 의하여 절정에 이르렀으며, 네덜란드에서는 16세기 중엽부터 칼빈의 제자들에 의하여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 네덜란드는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종교개혁의 성공으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개혁주의 국가가 되었다.

1) 프랑스의 개혁 운동

프랑스의 개혁 운동을 세 시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초기의 개혁 운동은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혁자들 사이에 일어났는데, 그들은 로마 교황이 주교와 수도원장의 임명권을 프랑스 왕에게 양보하기로 조약을 맺은 1516년부터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개혁 운동을 이끈 인물로는 르페브르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이었다. 두 번째 시기는 칼빈주의자들에 의하여 개혁 운동이 일어났는데, 연대적으로는 1536년부터 1560년까지로, 칼빈의 영향을 받은 위그노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프랑스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던 시기이다. 마지막은 박해와 살육의 시기로 1560년 이후 프랑스의 교회는 로마 천주교의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1) 칼빈 이전의 개혁 운동

프랑스의 개혁 운동은 파베르 스타풀렌시스(Faber Stapulensis)라는 라틴어 이름을 가진 르페브르(Jacque LeFevre d''Etaples, 1450-1537)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는 중세의 신비주의를 수용하여 제도적인 로마 천주교회에 도전하였다. 신비주의는 파커가 지적한 것처럼, 그의 삶을 풍성하게 해 주는 믿음이었고 성경을 푸는 열쇠였다. 그는 신비적 신앙을 통하여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게 되는 것이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된다고 보았고, 이러한 사상을 1512년 출판한‘바울 서신 주석’에 진술하였다.

르페브르는 1522년에는‘복음서 주석’을 출판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 복음, 자유, 희락,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한 삶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찬양하였고,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극찬하였다. 성경에 대한 무지가 미신을 초래한다고 확신한 그는 1523년 프랑스어로 신약 성경을 번역하였고, 백성들 가운데 널리 보급하여 프랑스인의 가슴속에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심었다.

르페브르의 영향으로, 성경에 근거하여 믿고 생활하자는 운동이 지성인들 사이에 번져갔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기욤 브리소네(Guillaume Briconnet), 피에르 카롤리(Pierre Caroli), 루셀(Gerard Roussel),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등이 있었다. 그들은 르페브르의 성경 중심적 사상에 감화를 받은 후, 설교와 강의를 통하여 로마 천주 교회의 고질적인 악습, 분별 없는 성인 숭배와 성물 숭배를 비판하였고, 성부와 성령 하나님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을 정죄하였다.

인문주의적인 개혁 운동은 급진적인 개혁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개혁 사상의 보급과 함께 많은 무리가 로마 천주교회의 미신적인 예배와 폭정을 급진적으로 개혁할 것을 촉구하였다. 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일어나자, 프랑스 왕실은 1525년부터 개혁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브리소네는 소르본느에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박해를 피해 국외로 떠났다.

종교개혁에 대하여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Francis I)와 그의 누이 마르그리트(Marguerite)는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통치권이 약해지자,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로마 천주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복음주의자들을 박해할 것을 요청함으로, 무력한 왕은 교회 당국의 압력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마르그리트의 딸 쟌느 달베르(Jeanne d’Albert)는 개혁운동을 지지하였고, 그녀의 아들인 나바르의 앙리(Henry of Navarre)는 개혁 운동의 후원자가 되었다.

1530년대에 접어들면서, 기독교인의 수가 늘어나고 개혁에 대한 과격한 주장들이 나타났다. 개혁을 촉구하는 시위는 1534년 10월 18일에‘플래카드 사건’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고, 수백 명의 개혁자들이 투옥되었고, 35명이 화형을 당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칼빈의 동생과 칼빈의 친구 에띠엔느 드 라 포르쥬도 끼어 있었다. 박해가 심해지자,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피신하여야만 했다.

박해로 인해 피난민이 늘어나자, 프랑스 당국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심지어 로마 교황 바울 3세도 프랑수와 1세에게 비인간적인 행동을 중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내적, 외적인 압력에 직면한 프랑수와는 1535년 7월 15일 꾸시 칙령(Edict of Coucy)을 선포하여 개혁자들에게 종교적인 관용을 허락하였다. 왕은 누구라도 개혁 사상을 철회하고 귀국하는 자는 용서할 것이며, 쯔빙글리파를 제외하고는 박해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로마 천주교회로 돌아가지 않았고, 개혁자의 진영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실책을 깨닫게 된 프랑수와는 결국 종교적 관용을 철회하고 박해를 택하였다. 그는 1540년 개혁자들을 재판하고 처형할 수 있는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고, 1545년에는 추기경 프랑수와드 뜨르농의 주장대로 왈도파 교인 3,000명을 처형하였다. 이러한 박해가 한창 전개되던 1546년 모(Meaux)에 최초의 기독교 교회가 세워졌으나, 얼마 후 박해로 인하여 폐쇄되었다.


(2) 칼빈주의적 개혁 운동

칼빈은 제네바에 망명해 있으면서도 그의 동족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1536년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에게 ‘기독교 강요’를 헌정하면서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를 그치고 종교적 관용을 베풀 것을 호소하였고, 프랑스가 성경이 왕 노릇하는 국가로 개혁될 것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이 일을 위해 수많은 개혁자를 파송하였다. 그리고 복음적인 신앙에 호응하거나 이미 복음 편에 서 있는 시민과 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개혁 운동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나바르의 앙리(Henny of Navarre), 콩드의 왕자(Prince of Conde), 콜리니 제독(Admiral Coligny) 등에게 서신으로 개혁 운동을 독려하였다.

1547년 프랑수와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알리 2세(Henry Ⅱ, 1547-1559)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는 심해졌다. 프랑스 전역에 있는 성직자들, 종교재판소, 세속 법정, 최고 법원까지 동원하여 종교 개혁자들을 색출하고 투옥시켰다. 특히 최고 법원인 빨레망(Parlement)은 500여명의 개혁자들을 화형에 처하여 ‘불붙는 방’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앙리는 1551년 싸
토브리앙 칙령을 선포하여 성경과 관련된 책이나 제네바에서 출판된 책들을 금서로 정하였고, 개혁자들이 화형 당할때 소리 지르지 못하도록 혀를 자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교회는 성장하였다. 1550년경부터 제네바에 망명 중이던 칼빈의 제자들이 귀국하여 브르조와 계층을 중심으로 복음 운동을 시작하면서 개혁 운동은 점차로 확산되었다.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프랑스의 개혁자들을 위그노(Huguenots)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세력은 농민보다는 지식층을 중심으로 퍼져 나아갔다. 무지와 미신 가운데 살던 농민들은 무지하여 개혁 운동에 대하여 적대적이었으나, 대학 교수, 의사, 변호사와 같은 지식층은 개혁 운동이 프랑스를 살릴 수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하면서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위그노들은 로마 천주교회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야간에 모이고, 헛간이나, 수풀, 들, 동굴 또는 인적이 없는 시골에서 예배를 드렸다. 위그노들은 목사의 지도없이 개인의 집에서 성경 공부와 예배를 위하여 모이기도 했다. 파리에 사는 라 페리에(La Ferriere)라는 사람은 유아가 로마 천주교 신부에 의해서 세례를 받는 것보다는 기독교 목사에 의해 세례 받기를 원하였으나, 파리에는 기독교 목사가 없어 300마일이나 떨어진 제네바에 가야만 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페리에는 1565년 9월 동료들과 함께 모여 조심스럽게 교회 조직의 필요성을 타진한 후, 회중 가운데서 목사, 장로, 집사들을 선택하고, 목사로 하여금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하였다. 이 사건은 프랑스 안에 칼빈주의적인 교회가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인 수가 많아지자, 위그노 지도자들은 제네바에 있던 칼빈에게 더 많은 목회자를 파송하여 줄것을 요청하였다. 제네바에서 훈련받은 일꾼들이 칼빈의 사촌 올리베땅이 번역한 프랑스어 성경, 제네바에서 출판한 시편, 칼빈의 글들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개혁 운동은 점차로 모(Meaux), 뿌와띠에(Poitiers), 부르쥬(Bourges), 뚜르(Tour)와 같은 지역으로 퍼져 갔고, 교회마다 제네바에서 훈련을 받은 목사들로 채워졌다. 참신한 목사들이 교회를 담임하게 되자, 지도적인 사회 인사들이 속속 교회로 돌아왔다.

1559년 앙리 2세가 사망하고, 그 해 3월에는 샤토 칼브레지(Chateau Cambresis) 평화 회의가 스페인의 펠리페 2세, 프랑스의 캐더린 메디치(Catherine de’Medici), 영국의 엘리자베스 사이에 조인되었다. 이 조약으로 이태리를 손아래 넣으려던 프랑스의 노력이 실패하자, 프랑스 왕실은 국내 문제 해결에 주력하면서 교회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개혁 교회의 교인들은 굳건한 조직체를 구성하여 힘을 키워 나아갔다.

개혁자들은 1559년 파리에서 최초의 전국 대회를 결성하였다. 대회 조직 구상은 이미 1557년 크리스마스에 칼빈의 제자인 앙뜨안드 샹듀(Antoine de Chandieu) 목사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그는 뿌와띠에를 방문하여 개혁 교
회가 성장하려면 대회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샹듀의 노력으로 1559년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파리에서 50여 개의 교회 대표들이 참석하여 대회를 개최하였다.

파리 대회는 앙뜨앙느 샹듀의 ‘신앙고백’과 ‘권징 규칙서’를 프랑스 교회의 신조와 헌법으로 채택하였다. ‘신앙 고백서’는 칼빈의 ‘35개조 신조’, ‘권징 규칙서’는 ‘기독교 강요’와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그 교회의 모형을 따라 작성되었다.

위그노 운동은 교회의 조직과 함께 프로방스(Provence), 도핀느(Dauphine), 노르망디(Normandy), 오르레앙(Orleances), 나바르(Navarre) 등으로 확산되었으며, 1561년경부터 공개적으로 회집할 수 있었고, 목사들은 매주 4회 이상 공적으로 설교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개혁 운동은 종교 개혁이 번성하던 영국이나 네덜란드에 가까운 리용(Lyon)과 부르타니(Brittany)에서 더욱 흥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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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교적 갈등 시대

칼빈이 지적한 것처럼, 1559년 박해자 앙리 2세의 죽음은 프랑스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였다. 앙리의 죽음으로 프랑스 안에서 개혁주의 운동이 힘있게 전개되자, 칼빈은 잘 훈련받은 목사들을 보냄으로 개혁 운동을 후원하였다. 1555년부터 1572년 사이에 칼빈에 의하여 훈련된 120명 이상의 설교자들이 프랑스에 도착하여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572년 캐더린 왕비의 명령에 의해 작성된 통계에 의하면, 프랑스에는 2150개의 개혁 교회와 150만 여명의 신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캐더린이 교황에게 보고한 것처럼 “그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아서, 로마 교회에서 이탈하여 나간 자들을 창이나 칼 법률로서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하게되었다.”

위그노의 세력이 커져가면서 위그노와 로마 천주교 사이의 갈등도 깊어갔다.

앙리 2세를 이어 프랑수와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1년 만에 죽고, 그의 아우 샤를르 9세(Charles Ⅸ, 1560-1574)가 왕위에 오르자, 캐더린은 직접 섭정에 나서서 진보적인 인물 미쉘 드 로피탈(Michel de L''Hopital)을 재상으로 등용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였다.

로피탈은 1562년 위그노에 대하여 관용적인 정책을 펴도록 캐더린 메디치를 설득하였다. 기즈 가문에 대항하던 세력이 위그노의 도움을 얻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자, 캐더린은 정국의 안정을 위하여 1560년 1월 생 제르멩 앙 레이(St. Germain-en-Laye)에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위그노의 실체를 인정하였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칙령을 선포하였다. 이 칙령에서 캐더린은 위그노들이 점령하고 있는 교회당들을 반환할 것을 명령하였고, 위그노의 예배는 도시 밖에서 허용되며, 도시 안에서는 개인 집에서만 가능하다고 명시하였다. 칙령이 발표된 지 2개월이 채 안되어 로마 카톨릭 측이 칙령의 준수를 거부하면서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프랑스의 종교적 내분은 30년 이상 계속되었다.

로마 천주교회 측은 스페인으로부터 원조를 약속 받은뒤, 기즈 가문의 사람들과 합세하여 위그노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1562년 3월 샹퍄뉴 지방의 바시(Vassy) 계곡에서 예배를 드리던 위그노를 습격하여 300명 이상을 살해하였다. 위그노들은 콜리니 제독, 나바르의 앙리와 콩드를 중심으로 무력 항쟁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1월에 여왕이 선포한 칙령을 지킬 것을 요구하면서 캐더린과 샤를르 9세를 종교개혁에 반대하던 기즈 가문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애썼다. 한편,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여 지교회 책임자를 대위, 노회의 책임자를 대령, 각 지역의 최고 책임자를 장군으로 세우도록 하여 교회를 군사 조직화 하였다.

내란의 조짐이 일어나자, 캐더린은 위그노를 진압하기 위해 스위스와 독일 출신의 용병들을 고용하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위그노들은 오를레앙, 리용과 같은 도시들을 함락하였고, 개혁 운동의 거침돌이 되던 기즈 가문의 프랑수와 공을 살해하였다. 전쟁을 통해 서로가 이득을 볼 수 없음을 깨닫자, 위그노와 프랑스 정부는 1563년 암보아즈 평화조약(Peace of Amboise)을 맺음으로 휴전을 선언하였다.

암보아즈 조약으로 칼빈주의적인 귀족들은 그들의 지역에서 예배할 수 있게 되었고, 일반 시민들도 자신들이 소속된 교회를 섬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과 콜리니는 이러한 화해의 내용에 대하여 비판적이었고, 교황과 샤를르 9세 역시 불만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러한 불만은 1567년 전쟁으로 이어져, 위그노 지도자 콩드는 3만 명의 위그노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는 1569년 3월 자느낙(Jarnac) 전투에서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내란의 와중에서도 위그노들은 크게 성장하였다.. 그들은 성경이 왕 노릇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교회 정치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1564년에서 1572년 사이 장로 정치와 회중 정치에 관한 토론을 벌였고, 그 결과 칼빈의 교회 정치 사상을 받아들임으로 장로 정치를 채택하여 분열의 위기를 넘겼다. 점차 교회가 안정되면서, 개혁 교회의 교인 수가 급속히 증가하여, 두메르쥬(Emile Eoumergue)의 통계에 의하면, 1572년 당시 프랑스 인구 2000만 가운데 300만이 위그노가 되었다.

위그노의 세력이 커가자, 캐더린은 위그노 지도자 콜리니를 암살하고자 하였다. 살인 계획이 폭로되자, 위그노들이 정부에 진상 조사를 요구하여 캐더린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위그노에게 사과하거나 그들의 세력을 뿌리째 뽑아내는 것뿐이었다. 캐더린은 콜리니 만이 아니라 모든 위그노들을 처치할 음모를 세우게 되었다.

캐더린은 그의 딸 마르그리트와 개혁 교회의 지도자 나바르의 왕자 앙리를 결혼시킴으로 음모를 실천에 옮겼다. 두 사람의 결혼이 선포되자, 로마 천주교인들과 개혁 교회 교인을 막론하고, 모든 프랑스 사람들은 내란이 끝나고 평화의 시기가 올 것을 예견하였다. 종교 전쟁의 종식을 기대하는 수많은 인파가 결혼 축하를 위하여 몰려들었으나, 축하연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살해 극이 시작되었다. 캐더린 메디치가 샤를르 9세에게 1572년 8월 24일 바돌로뮤 축제일 밤에 생 제르멩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모든 위그노를 살해하도록 위그노에 대한 대대적인 살육이 시작되었다.

살인자들은 교회당 주변을 포위하여 결혼 축하 예배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을 전멸하였다. 콜리니를 비롯하여 약 30,000명에서 70,000명의 위그노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서 성경 중심적인 개혁 운동을 벌이던 위그노의 개혁 운동은 기가 꺾였으나, 원수들은 축배를 높이 들게 되었다. 캐더린은 “하나님과 샤를르 9세에게 반항하던자들을 깨끗이 소멸시켰다”고 부르짖었고, 로마 교황 그레고리 13세는 Te Deum이라는 성가를 부르며 축하하였고, 기념 메달을 주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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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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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은 루터란 시대(1520-1525), 성례주의자 시대(1525-1530), 재침례주의자 시대(1530-1540)를 거쳐 칼빈주의자들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1) 칼빈주의적 개혁 운동

칼빈주의적 개혁 운동은 카를 5세가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을 억누르면서 더 강력하게 진행되었다. 카를 5세는 1550년 네덜란드에서“루터, 외코람파디우스, 쯔빙글리, 부쳐, 칼빈과 혹은 거룩한 교회가 이단으로 지정한 자들의 책이나 글을 인쇄하거나 보급하는 자를 화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그리고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여 경건한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는데, 1561년에는 100,000명이 넘는 개혁자들이 단지 성경적인 신앙을 고백한다는 이유로 처형당하였다. 카를 5세의 잔인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종교 개혁 운동은 수그러들지 않고 네덜란드 전역으로 번져 나아갔다.

1543년 칼빈은 황제인 카를 5세에게 종교 개혁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저들은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개혁 운동을 계속하여 밀고 나갈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나 기타 다른 이적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개혁 역시 하나님의 역사이며 단지 인간들의 소망이나 동기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를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호의를 가지고 협력하기를 기다리거나 상황이 면하기만을 고대하고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절망의 한가운데를 뚫고 나가는 용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파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여 그가 우리를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도록 해야겠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우리가 물을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카를 5세는 신교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카를 5세는 자신이 신교를 용납하는 것은 1세기가 넘는 동안 자신의 왕조가 충성해온 로마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칼빈주의적 개혁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칼빈의 직접적인 노력의 결과로, 그는 스트라스부르그나 제네바에 있을 때에도 네덜란드인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곤 하였다.

칼빈의 네덜란드인에 대한 관심은 그의 가족적인 배경에 기인하였다. 칼빈의 어머니는 네덜란드에서 가까운 프랑스의 국경 지대에서 살았고, 그의 아내 이델레트는 네덜란드 남부 왈룬 사람으로 리제에서 첫 남편과 스트라스부르그로 피난 왔던 재침례교도였다.

칼빈은 네덜란드 출신의 개혁자 요한 스트룸과 개인적으로 교제하였고, 네덜란드에 편지 또는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애정을 표현하였다. 특히 그는 1543년 친필로 ‘교황주의자들 사이에 있을 때 복음 진리를 아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될 것을 보여주는 소논문’을 써서 네덜란드의 교회 개혁을 고무하였다.

1544년에는 네덜란드의 복음화를 위하여 설교자 피에르 브룰리를 파송하였고, 1545년에는 라틴어 교리문답을 써서‘동 프리슬랜드 전역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들에게’헌정하였다.

칼빈의 제자 기오도 드 브레스(Giodo de Bres, 1522-1567)는 1561년 네덜란드 전역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위해‘벨직 신앙고백서’를 통하여 개혁주의 신앙과 재침례파의 신조와의 차이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 신앙고백서는 1571년 엠덴에서 열린 네덜란드 개혁 교회 총회에서 가장 성경을 잘 해석한 신앙고백서로 인정받았으며, 1619년 도르트 회의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37개조 신조로 개역되었다.

1563년 4월 23일 투코잉(Turcoing)에서 네덜란드 최초의 대회가 조직되었고, 그 후 교회의 성장과 함께 여러 지방에서 대회와 전국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1568년 베셀(Wesel)에서 전국 대회가 열렸고, 2차 대회는 1571년 엠덴에서 개최되었다. 엠덴 대회는 교회 정치와 신앙고백을 채택하여 네덜란드 교회의 신앙적 성격을 결정하였다. 엠덴 대회에서 네덜란드 교회는 목사, 장로, 집사의 의무와 같은 교회의 직제, 그리스도인의 결혼, 가정 문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 성례를 시행하는 문제들을 다루었다. 교회 행정 문제를 논하면서, “어느 교회나 어느 목사, 장로, 집사라 할지라도 다른 교회나 다른 목사, 장로 집사를 지배하거나 우월한 자세를 취해서는 안된다.”고 선언하여 평등의 원리를 채택하였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교회들을 위해 제네바 교리문답서를,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네덜란드인을 위해서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를 사용하도록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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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미니우스 논쟁과 도르트 신조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네덜란드 교회는 알미니우스 논쟁으로 분열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알미니우스는 1560년 네덜란드의 오우더바터(Oudewater)에서 태어나 개혁주의 신앙 가문에서 양육되었다. 그는 우트레흐트와 마르부르그에 유학하여 공부하는 가운데 그의 친척들이 스페인 군대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로테르담으로 피신하였다. 얼마 후 레이든 대학에서 공부한 후, 제네바로 가서 베자 밑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1587년 암스텔담으로 돌아와 이듬해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1589년 교회 당국으로부터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던 쿠른헤르트(Dirk Coornhert)의 글을 논박하고 칼빈의 예정론을 변호하는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러나 쿠른헤르트의 글을 읽는 가운데 그의 주장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 침묵하였다.

알미니우스의 자유주의적 신학은 1590년에 가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로마서 7장과 9장의 예정 교리에 대하여 의문을 표하였다. 특히 어머니의 태 중에 있는 자의 구원 문제와 창세 전에 인간의 구원이 예정되었다는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영향력이 미미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그의 주장은 관심을 끌
지 못하였다.

알미니우스는 1603년 유니우스(Francis Junius)의 뒤를 이어 레이든(Leiden) 대학교의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602년 네덜란드를 휩쓴 전염병으로 유니우스를 비롯한 레이든 대학의 교수들이 병사하였기 때문이었다. 알미니우스는 전염병이 만연할 때 도시를 떠나지 않고 시민들을 간호한 일로 인정을 받아 레이든 대학의 신학 교수로 추천되었다. 그러나 알미니우스의 사상을 잘 알고 있던 고마루스(Francis Gomarus, 1563-1641)가 그의 신학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알미니우스 논쟁이 시작되었다.

고마루스는 부르게에서 태어나 스트라스부르그, 노이스타트, 옥스퍼드, 케임브리지와 하이델베르그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1587년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네덜란드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고, 1594년 레이든 대학의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고마루스의 지적에 대하여, 알미니우스는 자신의 입장을 타락 후 예정론자(Infralapsarian)라고 밝히면서, 고마루스를 당시 소수에 불과하던 타락 전 예정론자(Supralapsarian)라고 비난하였다. 1608년에는 그의 신학적 입장을‘감상적 선언’(Declaration of Sentiments)이라는 책을 통하여 표명하였는데, 그는 이 책에서 ①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한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
스도를 임명하기로 작정하였고, ②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한 모든 자를 용납하시며 구원하시고, 완고한 불신자들을 유기하기로 작정하였다. ③ 회개하고 믿는 자를 위하여 필요한 수단을 제공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리고 ④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개인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는데, 그들이 끝까지 믿고 참을 것을 예견하였기 때문이라고 진술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알미니우스는 바울, 어거스틴, 루터와 칼빈에 의하여 발전되어 온 예정 교리를 부인하고, 사람의 수납 여부에 따라 구원이 주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곧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할 뿐이지 결정적이게 하지 못하므로 인간의 구원에 관한 궁극적인 원인은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알미니우스에 의해, 선택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의 결과로 인한 하나님의 예지에 있게 되었다.

1610년 위텐보개르트(Uytenbogaert)를 중심으로 한 46명의 알미니우스주의자자들은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고우다에 모였다. 그들은 오랜 토론 끝에 ‘항거’((Remonstrance)라는 신앙 고백서를 작성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은 개개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를 믿고 순종할 자들을 단체로 선택하셨다. ② 그리스도는 만인을 위하여 죽으셨다. ③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④ 그러나 인간이 그 선물을 거절할 수 있다. ⑤ 성도의 견인에 대한 교리는 모호하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을 항론파(Remonstrance)라고 일컫게 되었다.

당시 정치 지도자였던 모우리스는 당면한 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618 년 11월 도르트에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제외하고는 개혁 교회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에큐네미칼적인 교회 회의였다. 모우리스는 회의에서 논쟁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영국, 독일, 스위스, 제네바와 같은 서구 여러 나라의 개혁주의자들을 초청하였고,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토론에 참여토록 주선하였다.

도르트 교회 회의에 참석하였던 개혁주의자들은 알미니우스 사상의 위험성을 지적한 다음, 항론파의 항론에 근거한 개혁주의 교회의 입장을 천명하고, 그에 대항하는 교리를 확정함으로써 칼빈주의 5대 강령이 탄생하게 되었다.

칼빈주의 5대 강령은 다음과 같다.

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부패와 속수무책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그가 가진 생래적인 빛은 구원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Total Depravity). ② 선택의 기초는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지않고, 창세 전부터 섭리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목적 위에 이루어졌다(Unconditional election). ③ 그리스도의 속죄 효과는 택자에게만 미친다(Limited Atonement). ④ 중생은 영혼과 의지의 내적인 갱신이며 강력하고 놀랍고 즐겁고 신비하고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이다(Irresistible grace). ⑤ 하나님은 택자들의 회개와 인내와 겸손과 감사와 선행을 새롭게 하심으로 그들을 보존하셔서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신다(Perseverance of the saints).

도르트 회의에서 알미니우스 신학을 대변한 신학자인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3)는 도르트 회의에서 정죄를 받고 알미니우스 추종자들과 함께 쫓겨나 벨기에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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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국의 종교 개혁

(1) 튜더 왕조의 개혁 운동

종교 개혁이 일어날 즈음에 영국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 잉글랜드는 튜더가, 스코틀랜드는 스튜어트가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이 상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고 적어도 17세기 초까지는 계속될 참이었다.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고, 잉글랜드는 스페인과 그런
관계였다.

잉글랜드 왕 헨리 7세는 자신의 큰아들 아더를 스페인의 공주 아라곤의 캐더린(당시 15세)과 결혼시켰다. 하지만 아더는 몇 달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그러자 스페인은 이 어린 과부를 둘째 아들인 헨리와 결혼시킬 것을 제안하였고, 우호 관계를 감안해서 몇 년 뒤 재혼이 성사되었으니 헨리는 12세였고, 형의 부인은 19세였다.

본래 교회법은 형수와의 결혼이 금지되었기에 교황은 특별 윤허를 내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별로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교황에게 교회법을 중지시키고 형수와 결혼하게 할 권한이 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결혼의 합법성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1509년 헨리는 부왕의 뒤를 이어 헨리 8세가 되었다. 그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르네상스 가정 교사들의 교육을 받은 학자였고, 외국어 실력도 뛰어났다. 신학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다. 운동 선수였고, 사냥을 즐겼고 승마를 잘했다. 한편 어린 시절부터 우상처럼 대접받고 성장해 자기 본위의 이기적인 성격을 가졌으며, 고집이 셀 뿐 아니라 기회주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이런 기질들을
발휘해서 종교 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캐더린과 사이에 딸 메리 외에 더 이상은 자녀가 생기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자 후계자가 될 왕자를 얻기 위한 헨리의 노력은 더욱 가중되었다. 결국 그는 앤 볼린이라는 처녀와 연애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교황에게 요청하여 캐더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처음부터 교회 법에 어긋나게 억지로 이루어진 혼인이었으니 진정한 결혼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런 결혼 무효 칙령은 교황으로서 드문 일이 아닌 오히려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교황은 카를 5세의 숙모를 이런 식으로 폐위시키고 이 황제와 원수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결정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지연시키기만 하였다. 교황 측에서는 그저 비밀리에 첩을 두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권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헨리는 자기의 뒤를 이을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가 필요하였다. 헨리
의 자문인 크랜머는 당시 중요한 대학에 편지를 보내서 상의해 보았다. 그들 모두 처음부터 이 결혼은 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제 헨리 8세는 교황청과 관계를 끊는 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그는 성직자들을 국왕의 지배 아래 두었다. 하지만 그가 개신교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다. 대륙에서처럼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교황의 세력을 막아서 왕의 권리를 높여 보자는 것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 그가 루터에 대항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 라는 칭호를 받은 것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영국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루터의 사상은 영국에 밀려들어 이전의 위클리프의 사상과 연합하고 있었다. 개신교를 추종하는 이들은 왕과 교황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본래 위클리프는 세속 통치자가 교회를 감독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다. 그리고 헨리의 정책은 이것과 같았다. 여
러 가지 움직임이 진행되었다. 헨리가 위클리프의 사상을 따른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자문인 크랜머는 그런 식의 개혁을 갈망하였다.

헨리는 캐더린과 비밀리에 이혼한 지 6년이 된 1533년, 비밀리에 앤 볼린과 결혼하였다. 앤이 임신한 것이 확실하자 태어나는 아기의 합법성을 위해서 크랜머 대주교는 두 사람의 결혼을 합법적인 것으로 공포하였다. 앤이 정식으로 여왕이 되자 곧이어 헨리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그는 1534년 지존법을 통해 교회에 대한 왕의 통치권을 선포하고 교황청으로 가던 모든 헌금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일은 단지 교황에 대한 반항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개혁은 멀고도 먼 길이었다. 개혁의 주동자는 역시 토마스 크랜머였다. 그는 왕을 움직여 개혁을 일으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그는 헨리를 절대적으로 지원하면서 왕을 통한 영국의 개혁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헨리 8세는 종교개혁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의 관
심은 정치적인 이익이었다. 신앙 문제는 전통적인 교리 그대로
보수적으로 신봉했다. 그가 왕으로 있는 동안 종교 문제는 단지
정치 문제의 변화에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단지 로
마와 관계를 끊고 자신을 교회의 머리로 세우는 것으로 만족하
고 있었다. 신학이나 예식의 개혁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
지않았다.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 가톨릭 교도로 남아 있었다.

1536년 개혁 의회는 헨리에게 수도원을 탄압하도록 요청하였다. 수도원들이 왕의 강압에 의해 해산됨으로써 가톨릭의 전위대는 사라졌다. 대신 왕실의 연간 수입은 10만 파운드 이상 증가하였다. 수도원에 속했던 토지를 손에 넣은 신흥 귀족들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왕에게 대한 충성심도 그러하였다.

그후, 앤 볼린도 딸만 하나 낳았기에 캐더린보다 나은 입장이 못되었다. 1536년 캐더린이 죽은 해에 앤 볼린은 간통 혐의로 참수를 당하였다. 그 후 제인 세이모어가 왕비가 되어 에드워드 6세를 낳았지만 일년도 못되어 사망하자 헨리는 네 번째 신부로 앤을 맞아들인다. 몇 년 뒤 그녀와도 이혼하고 캐더린 하워드와 결혼하였으나 다시 간통 혐의로 처형하고, 마지막 캐더린 파르와 결혼하여 5년을 더 살고 헨리는 힘든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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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드워드의 종교 개혁

에드워드는 건강 면에서는 아버지를 닮지 못하고 병약했다. 12살에 즉위한 그는 겨우 6년을 더 살았다. 그의 재위 기간 처음 3년은 서머셋 공작이 그를 도와 섭정하였다. 이때 종교 개혁은 큰 진전을 보았다. 개신교식으로 평신도들에게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가 주어졌다. 성직자들의 결혼이 허용되었고 여러 가지 성상들은 철거되었다. 공동 기도서가 만들어짐으로 영국인들은 처음으로 자기 나라말로 된 예배 의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서머셋과 함께 크랜머도 조심하면서 전보다 훨씬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하였다다. 성경의 출판, 판매, 주석에 대한 모든 제한은 철폐되었다. 이로 인해서 에드워드의 재위 기간 중 개신교도들의 발언권은 강화되면서 높아지고 있었다.

서머셋의 뒤를 이은 노섬버랜드 공작은 더욱더 극단적인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크랜머는 대륙의 개혁자들을 초청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마틴 부쳐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 그는 1551년 이곳에서 죽었다. 존 낙스도 왔다. 기타 유럽 전역의 저명한 개혁자들이 영국에 왔다. 특히 라스코라는 목사는 칼빈과 쯔빙글리의 가르침을 따라서 신자로서의 생활과 품성 계발에 역점을 두어 목회하였다. 5천 명 가량의 신자가 그를 따랐다.

(3) 피의 여왕 메리의 반 개혁 운동

553년 에드워드가 죽자 캐더린에게서 난 메리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에드워드드 시대의 개혁은 끝이 났다. 메리는 영국을 자기 어머니의 종교로 되돌려 놓으으려고 굳게 다짐을 하였기 때문이다.

메리는 여왕이 되자마자 에드워드 시대의 개신교 관리들을 모조리 축출하였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주교들을 복직시켰다. 스페인 왕 필립 2세와의 결혼 생활이 불행해지자 개신교에 대한 탄압에 온 정력을 다 쏟아서 ‘피에 굶주린 메리’로 불리게 되었다. 존 로저스, 휴 라티머, 존 후퍼 등 저명한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죽음을 당하였으며, 약 300명 가량의 목회자들이 1555년 2월에 옥스퍼드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불길이 이들을 덮치기 시작할 때에 라티머(Latimer) 주교는 리들리(Ridley) 주교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위로를 하였다. “리들리 경, 담대하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영국에서 결코 꺼지지 않을 양초가 되어 불타게 될 것입니다.”

또 훌륭한 개혁가였던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는 회유를 견디지 못해서 압제자의 요구에 서명하고 취소하기를 일곱 번이나 거듭하다가 결국 1556년 3월에 화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1556년 3월 21일 토요일 아침, 옥스퍼드의 브로드 스트리트에 장작이 쌓여졌다. 모여든 군중들에게 설교가 행해졌는데, 궂은 날씨였기 때문에 만장한 대학의 교회당 안에서 설교가 행해졌다. 거기에 작은 단이 세워지고 그 위에 크랜머 대주교가 올라섰다. 설교가 끝난 뒤에 그는 청중들에게 자기가‘거룩한 어머니 교회’(holy mother Church, 즉 가톨
릭 교회)로 전향한 사실을 공표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자기의 옛 신앙을 반복·재확인하는 선언을 했으며, 자기의 손이 자기 중심의 뜻과는 달리 잘못된 사실을 서명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내 손이 맨 먼저 벌을 받아야 할 것이므로 나의 손부터 태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교황에 대해서는“그의 모든 거짓 교리와 더불어 적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원수”라고 단언하였다. 사제들은“저 이단의 입을 막아라.”고 소리쳤다. 주변의 구경꾼들도 그가 틀림없이 미쳤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곳 교회로부터 뛰어나와서 이미 맹세했던 대로 오른손부터 불 가운데 집어넣었다.

또한 후퍼는 복장으로 신도와 성직자를 구별하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사상과도 배치되는 것이요, “적그리스도의 복장”이며“우상에 바친 음식”과 같다고 비난한 일로 인하여, 1553년 로마 천주교 신앙을 따르던 메리 여왕의 등극과 함께 투옥되었고, 1555년 2월 9일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에 처하여졌다.

그가 처형당하기 직전 그를 방문한 한 사람이‘살아 있는 것은 즐겁고 죽음은 두려운 것임’을 깊이 생각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리고 만약 그가 여왕에게 굴복한다면 훨씬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죽음이 두렵고 살아 있는 것이 좋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아는 바이오. 그러나 내세의 죽음은 훨씬 더 두려운 것이며, 내세의 생명은 훨씬 더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올 영원한 생명에 대한 사랑과 갈망을 지니고 있으며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알고 있소. 나는 이 땅에서의 죽음이나 생명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소. 단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부인하기보다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내 앞에 놓여 있는 불타는 고통을 잘 견뎌 내기를 바랄 뿐이오.”

1554년 말 잉글랜드는 교황에 대한 충성을 다시 서약하였다. 헨리와 에드워드 시대에 내려졌던 여러 가지 조치들이 대부분 철회되었다. 결혼한 성직자들은 아내들을 내보내야 했다. 성자들을 위한 여러 축일들도 다시 회복되었다. 얼마나 많은 개신교도들이 해외로 도피했는지 모른다. 무서운 공포 정치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메리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1558년 메리는 그의 잔인한 삶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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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엘리자베스의 중용적 종교 개혁

엘리자베스 여왕의 재위 기간은 45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영국 전체는 완전한 개신교의 나라가 된 것처럼 보였으며,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앤 볼린의 딸로서 개신교도였음에 틀림없다. 메리 치하에서 그녀는 개신교도란 이유 때문에 고통을 당했고, 그녀는 커가는 개신교도단에 의해 그들의 옹호자로서 환호를 받았으며, 망명자들은 대륙으로부터 서둘러서 돌
아왔다. 그녀는 외교적인 수완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황과의 외교관계가 없었으며 예식 없이 로마에 있는 사절을 철수시켰다. 1558년 성탄절에 그녀는 칼라일의 주교에게 성체거양(聖體擧揚)을 못하도록 명령했고, 복음을 따라 그 교회를 떠났다.

1559년 1월 25일 의회 개회 때, 그녀는 당당하게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으로 들어갔으며, 촛불, 향 그리고 성수(聖水)를 든 대수도원장과 수사들에 의해 영접되었고, “우리가 잘 볼 수 있으니, 그 횃불들을 치워라”고 말함으로써 수사들
을 당황하게 하였다. 그는 개신교 설교가들을 불렀고, 개신교도 귀족들, 특히 이전의 서머셋의 주장관인 윌리엄 세실(William Cecil)이 그녀 주위를 에워싸게 했다.

이와 같이 엘리자베스는 출생, 교육 그리고 신념에 의해 개신교도임에 틀림없없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개혁에 극단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중용의 길을 추구하였다.

그녀의 정치적 이상은 영국을 주변 국가의 위협과 침입으로부터 막아내고 단시일 내에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는 데 있었다. 그와 같은 정치적 이상과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서는 민족의 총체적 통일과 단합을 도모하는 것이 그녀에게
는 급선무였다. 이러한 정치적 현실문제 때문에 엘리자베스의 종교정책은 중간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존 낙스는 그녀에 대해서 평하기를“확실히 교황주의자는 아니지만 훌륭한 개신교도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엘리자베스는 여러 번의 반대를 물리치고서 1559년 4월 29일 수장령(The Act of Supremacy)을 선포하여 그녀가 국가의 최고 책임
자임을 선언하였다.

영국 의회는 엘리자베스의 정책을 수용하여 수장령을 통과시키면서, “영적이나 세상적인 모든 외국의 침략적 권세와 권위가 이 나라 모든 영역에서 영원히 종식되고…무력화 시키는 것이 폐하의 뜻”이라고 선언하였고, 어떤 사람도 국
왕의 뜻에 반하는 법률, 법령, 관습, 제도를 주장할 수 없도록 조처하였다. 종교적 결정은 왕권에 위임하도록 하였고, 교직자나 왕의 녹을 받는 행정 관료는 그들의 신분 위엄, 권세에 상관없이 성경에 손을 얹고 다음과 같이 서약하도록
하였다.

“나는 양심을 걸고, 여왕 폐하가 영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또는 세상적으로 볼 때 이 나라의 유일한 통치자임을 서약합니다. 따라서 외국의 군주, 성직자, 권력자, 또는 외세가 이 땅에서 교회적으로나, 영적으로 지배권, 권력, 통치권,
통솔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모든 외국의 지배권, 권력, 통솔권 등을 부인하며, 그들에 충성하지 않으며, 이후로는 여왕과 그 후손과 합법적인 승계자에게만 진정한 충성을 바칠것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이렇게 해서 헨리 8세의 모든 권한이 엘리자베스에게 주어졌다.

한편 로마 교황청에서는 엘리자베스에 대한 파문을 미루다가 1570년 2월 25일 교황 피어스 5세에 의해서 발동시켰다. 심지어는 암살까지 허용한다고 하였다. 여기에 맞서서 엘리자베스는 반교황법을 통과시켰으며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벌하였다. 더 나아가서 1585년에는 예수회 사람들을 영국으로부터 추방시켰다. 이렇게 시작한 반대자에 대한 처벌은 엘리자베스의 45년 통치 기간에 221명이나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써 로마 교황권과 로마주의 신앙으로부터 영국을 보호하였으며, 동시에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화려했던 과거의 영국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엘리자베스의 개혁과 더불어 뿌리를 내린 영국 국교회는 엘리자베스의 대외 전략에 맞추어서 어느 한쪽으로도 완전하게 기울어지지 않았으며, 동시에 어느 쪽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국 교회는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를 따르지만 예배 모범과 교교회 조직에서는 가톨릭 모범을 많이 반영한 복합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개혁은 많은 개신교도들에게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의 재위 기간에 그녀의 종교정책에 대하여 비판하는 청교도인 수는 더욱 증가했다. 이들은 신약 성경에 나타난 순수한 신앙생활을 실천해 보려고 노력하였고 정책적으로도 이것이 반영되기를 원했다. 그들은 좀더 순수한 개혁이 진행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들에게 청교도(Puritans)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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