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청교도 운동
① 엘리자베스 시대
엘리자베스 여왕은 1570년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했다. 그때부터 가톨릭은 영국에서 반역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성공회) 안의 가톨릭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메리 여왕의 치하에서 추방당하거나 망명한 이들, 또 자발적으로 제네바에 가서 대륙의 개혁 교회 신학을 배웠던 이들은 엘리자베스 시대가 오자 대거 귀국해서 개혁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칼빈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리고 영국을 제네바처럼 거룩한 도시로 만들기 원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개혁 신앙이나 설교를 통해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목회에 별 관심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모든 종교 행사는 국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따를 것을 선언하였다. 그녀는 가톨릭과 방불한 여러 가지 의식들을 통해서 영국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성경대로 확실한 종교 개혁을 진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불만이었다.
청교도들이 논쟁에 나서게 된 것은 성직자들이 예배드릴때 입는 예복 문제부터였다. 성직자들이 가톨릭의 신부들처럼 입는 것을 불평하였다. 그리고 세례를 줄 때 성호를 그린다든지 무릎을 꿇고 성찬을 받는 행위, 종교 축일이나 휴일이 너무 많은 점, 교회에서 오르간을 사용하는 것, 심지어는 결혼식할 때 반지를 사용하는 것 등을 가톨릭의 잔재라고 비난하였다.
청교도들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청교도로 불린것은 그들이 신앙의 순결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가장 온건한 파들은 감독 제도만 반대하였다. 더 나아가서 장로교인들은 장로회에 의해서 교회가 움직여질 것을 요구하였다. 분리파들은 국가와 교회가 분리됨은 물론 교회와 교회도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중에는 침례를 주장하는 침례파도 있었다.
캠브리지 대학의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를 비롯한 청교도 지도자들은 1572년, 성공회식 감독제도 대신에 장로교식으로 조직을 개편하자고 주장하였다.
카트라이트는‘대주교와 주교의 명칭 및 직제는 폐지되어야 한다.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감독(목사와 장로를 의미함)과 집사직을 두어야 한다. 감독은 순수하게 영적 기능만을 발휘해야 하며 집사는 빈자의 구제에만 종사해야 한다. 목사는 자기가 목회하는 지교회를 가져야 하며 신도를 거느려야 한다. 목사의 인사와 주교의 임명에 있어서 주교 한 개인의 청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지교회의 선거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교회정법의 권위를 목사와 장노회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칼빈의‘기독교 강요’에서 가르친 교회 체제를 따라서 당회를 조직할 것과 회중들이 목회자를 위임할 것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배 형태도 거의 외형상 가톨릭과 비슷한 예배를 대폭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결코 혁명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왕과 주교들은 이러한 주장들이 안정을 위협한다고 보았다. 즉시 처벌이 내려졌고 카트라이트 교수는 교수직에서 해임되자 1572년부터 1574년까지 2년간 제네바로 가서 직접 칼빈주의 개혁운동을 목격하면서 당대의 개혁가들과 교제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지하 운동은 계속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무서운 벌을 가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운동을 근절하고자 결심했던 것이다. 지하 조직책들이 색출되면서 장로교 운동은 1592년 경 일단 수그러들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일단 국교에 머물면서 왕에게 충성하며 개혁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칼빈도 영국 성공회의 체제를 특별히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철저한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인사들이 천대를 받으면서도 국교회에 계속 머물 수 있었다. 그러나 좀더 과격한 청교도들도 있었다.
최초의 분리주의자는 캠브리지에 거주한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 1550-1633)이었다. 이들은 국교회를 떠나기를 주장했다. 이들은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독립파 또는 분리주의자로 불리었다. 1580년경 브라운은 노르위치에 이러한 교회를 설립하였다.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분리주의는 재침례파처럼 급진적인 형태였다. 정부는 놀라고 진노하였다. 이들에 대한 박해는 비할 데 없이 잔인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여러 번 대주교를 바꾸었다. 확실하게 자기 명령대로 집행하는 이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캔터베리 대주교인 존 휫기프트(Whitgift)가국교회에서 벗어나려는 청교도들을 벌하는 역할을 맡았다. 1583년 그는 청교도들이 국가의 질서에 순응해야 할 것을 선언했다. 그 해 발표된 6개 조항은 교회에서도 국왕의 수장령을 인정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이를 거스른 이들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 결과 200여 명의 교구 사제들이 그 직에서 쫓겨났다. 1586년에는 신학서적을 검열하여 극단적 청교도들의 활동을 억제하였다. 청교도들은 이런 일들 때문에 여왕이 가톨릭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때때로 그녀는 동정녀에게 기도한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후에 이런 억측은 더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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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제임스 1세 시대
1603년 엘리자베스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헨리 7세의 증손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 단리 경(Lord Darnley)의 아들인 제임스 1세(1603-1625)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미 스코틀랜드의 왕(제임스 6세)이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제임스를 통하여 비로소 연합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을 다스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그를 항상 외국인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또한 엘리자베스 치하에서 세력이 강해진 상인 계급은 귀족만을 우대하는 제임스를 싫어했다.
제임스 왕은 요한 낙스(John Knox)와 조지 부커넌(George Buchanan)과 같은 이들로부터 장로교인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에 오자 국교회의 원리를 받아들였고 감독들과 대주교를 존경했다.
그는 청교도들의 교회에 대한 더 많은 개혁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1063년 토마스 카트라이트를 비롯한 천 명의 성직자들이 교회 개혁을 위한 청원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청교도 목사들은 교회 내 가톨릭적 요소를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영국도 스코틀랜드처럼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이듬해 회의를 소집했다. 왕이 의장인 회의에서 청교도들이 장로교에서 쓰는 ‘노회’라는 말을 사용하여 왕을 화나게 했다. 감독들이 장로가 되면 왕은 물러나야 한다고 이해한 것이다. 회의는 중단되었다. 곧 300명의 성직자들이 국교회에서 직책을 박탈당했다.
제임스 왕은 이 때부터 왕권의 사도적 계승과 왕권신수설을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1604년 로마 천주교회와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기 위하여 스페인과 평화조약을 맺는 등 반개혁적인 입장을 천명하였다.
이처럼 회의는 중단되었지만 전혀 쓸데없었던 것은 아니다. 왕이 새로운 성경 번역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1611년 소위 흠정역이란 성경이 나왔다. 요즈음에‘킹 제임스’역본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영어로 나온 번역판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으로 모든 계층 사람들이 읽었다. 여기의 표현들은 영어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청교도들은 교회 개혁에 대한 청원이 왕에 의해 거부되자, 교회 개혁에 대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교회 개혁을 막는 영국 교회 안에 있으면서 교회를 개혁할 것인가, 아니면 영국 교회를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새로운 교회를 세울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칼빈주의 신학 전통에 서 있어서 영국 교회 안에 교회의 표지가 있는 한 떠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교회의 표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은 개혁이 아닌 개악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헨리 야곱(Henry Jacob, 1563-1624)을 비롯한 분리주의자들은 그릇된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며 분리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들은 회중에 의한 각 지교회의 목사 선택, 정책 결정에 있어서의 지역 교회의 자율성, 교회와 교회 사이의 평등 등을 내세워 새로운 교회를 세울 것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로버트 브라운의 분리주의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와 감독들의 입장은 청교도적인 입장에 있었던 의회에 점점 더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왕은 얼마간의 국정경험이 생기자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통치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세금을 새롭게 더 부과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인준을 받아야만 했다. 1614년 재정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구성된 의회는 전보다 더 상대하기 힘들었다. 이 사실을 안 제임스는 다시 의회를 해산했다. 그리고는 전과 같은 세금만으로 버텨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주교들과 귀족들에게 막대한 금액의 돈을 빌려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독일에서는 3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국토와 왕위를 빼앗긴 개신교도 보헤미아 국왕 프레드릭은 그의 사위였다. 그러나 아무런 지원도 하지않았다. 그는 영국민들에게 비겁자로 보였다.
더 나아가 제임스는 태자를 가톨릭교도인 스페인 공주와 결혼시키려고 계획하였다. 황제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청교도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악이었다. 제임스는 재정의 압박으로 두어 번 더 의회를 소집했으나 소득은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청교도 지도자들을 박해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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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찰스 11세와 내란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사람은 아들 찰스 1세였다. 그도 아버지처럼 왕실의 강력한 중앙 집권을 원했다. 그러므로 의회와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프랑스 공주와 결혼했다. 결혼을 위해서 영국의 가톨릭들에게 많은 양보를해야만 했다. 그리고 새 왕비와 수행원들은 가톨릭으로 의식을 행하도록 허락받았다. 왕비는 구약의 음녀 이세벨로 비유되며 영국민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청교도적이던 의회는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찰스는 계속 모든 문제에서 의회와 충돌하였다. 1629년 그는 의회를 무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나라를 이끌어 나갔다. 그렇게 11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물가는 오르고 귀족들만 입장이 좋아졌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경제적인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왕의 자문인 윌리엄 로오드(Laud)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였다. 그는 청교도 성직자들이 국교회에 대항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특별한 형벌을 마련하였다. 큰 벌금을 부과하고 뺨에 선동자의 약자를 낙인으로 찍는 것이었다. 그밖에 귀를 자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1645년 이러한 형벌을 받은 법률가 한 사람이 꾸민 조서로 말미암아 처형을 당하게 된다.
영국의 국교회를 장악한 로오드는 스코틀랜드에도 자기의 정책을 강요하였다. 스코틀랜드는 이미 강력한 장로교를 시행하고 있었다. 1637년 그는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를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도 읽도록 명령을 내렸다. 반박은 즉각적이고 강력하였다. 두 지역은 즉각 전쟁 상태가 되었다.
찰스 왕은 스코틀랜드에 성공회를 심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재정난으로 군대를 일으킬 수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의회를 소집하였다. 소집된 의회는 왕의 뜻에 대항해서 왕을 독재 혐의로 기소하였다. 그리고 로오드를 체포하였다. 왕은 의회에서 자신에게 항거하는 주동자들을 체포하려고 몸소 부하를 거느리고 나갔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늦었다.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1642년부터 6년간 의회파와 국왕파는 전쟁을 하였다. 국왕을 지원한 이들은 귀족들이었고 의회를 지원한 이들은 그 동안 고통을 겪어 온 계층들이었다. 양측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전투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의회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왕은 아일랜드인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모든 청교도 분파는 단합하여 왕에게 대항했다.
이 와중에 의회는 스코틀랜드와 보조를 같이 하기 위해 감독 제도를 폐지했다. 그리고 그들의 재산을 압수해서 군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면서 신앙 문제에 자문을 담당할 수 있도록 신학자들을 소집했다. 이것이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Westminster Assembly)이다. 여기에는 의회에서 임명된 121명의 성직자, 30명의 평신도 그리고 8명의 스코틀랜드 대표들이 참석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칼빈주의 정통 신학의 정신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제 의회와 스코틀랜드는 영국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개혁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이 법령은 1644년 실행에 옮겨졌다. 다음 해에는 윌리엄 로오드가 처형되었다. 차츰 전투가 시작되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역사의 앞부분에 나타났다.
그는 여러 해 전부터 청교도가 되어 열심히 성경을 읽고있었다. 그는 국왕의 주력 부대가 기병대임을 알고는 여기에 맞서는 군대를 조직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기병대를 조직했다. 그의 기병대는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정예부대였다. 그들은 거룩한 전쟁에 임한다는 확신으로 시편을 노래하며 전투에 나섰다. 차츰 의회파의 전체 군대는 같은 확신으로 용기 백배하여 내스비 전투에서 국왕의 군대를 물리쳤다.
의회 군은 왕의 본거지를 점령하였다. 그들은 왕이 외국 가톨릭 군대와 손잡은 것을 폭로했다. 다급한 찰스는 스코틀랜드인들과 협상을 위해 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왕을 사로잡아 의회 군에게 넘겨주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청교도 군은 의회를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찰스에게 동정적인 의원들을 제외시킨 뒤 왕의 재판을 진행하였다. 찰스는 1649년 참수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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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호민관 시대와 왕정 복고
찰스의 처형으로 영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때 권력을 잡은 이는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다.
올리버 크롬웰은 국왕 헨리 8세의 측근이던 T. 크롬웰의 혈통을 이은 헌팅던 지방의 지체 높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시드니 칼리지에서 공부하면서 청교도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161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영지관리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했고, 그 후 40년까지 그는 헌팅던에서 적극적으로 농업경영에 힘쓰는 한편, 치안판사로서 늪지대를 개척하는데 반대하고 있던 농민 편에 서서, 베드퍼드 공작의 대리인과 싸웠다. 그 사이 20년에 결혼하고, 또 28년에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두드러진 활동은 하지 않았다. 40년 케임브리지에서 단기의회 및 장기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자, 국왕 반대파 입장에 섰으나 결코 그 중심 인물이 되지는 않았다. 42년 국왕 찰스 1세와 의회 사이에 무력항쟁이 시작되자, 크롬웰은 국왕파에 대항하여 주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그는 에지힐을 비롯하여 그밖의 전투를 통해 의회군의 훈련 부족을 통감하고, 동부 여러 주에서 열렬한 청교도들을 모아 엄격한 훈련을 시켰으며 몸소 기병을 거느리고 싸웠다. 그 효과는 마스턴 무어(1644)와 네이즈비(1645)의 두 전투에서 유감없이 나타나 철기대(鐵騎隊, Ironside)라는 명칭과 함께 그 명성을 드높였다. 그 결과 제1차 내전이 끝난 시점에서 크롬웰은 가장 유력한 의회파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당시 사회의 불안을 정돈시켰다. 우선 아일랜드의 반란을 평정하고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국왕파의 폭동도 진압했다. 크롬웰은 내친 김에 개혁 작업을 시작했다. 어쩔수 없이 국가의 권력을 손에 쥘 수밖에 없었던 그는 호민관의 칭호를 채택했다. 이제 그의 시대가 열렸다.
그는 장로교, 침례교 그리고 일부의 온건한 감독파들까지 공존할 수 있는 종교 체제를 만들어 보려고 하였다. 경건한 청교도였던 그는 주일 성수, 경마, 투기, 극장에 관한 여러가지 입법을 통해서 영국의 풍속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세운 경제 정책은 중산층을 위한 것이어서 귀족층과 극빈자들은 자연히 호민관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크롬웰은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평안하게 영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전의 왕들처럼 의회와는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왕좌를 권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공화정을 주장하였다. 거룩한 왕국을 추구했던 그는 1658년, 자기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셋째 아들인 리처드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같은 능력을 가지지 못한 아들은 이 자리를 지킬 수가 없었다.
크롬웰의 죽음과 함께 청교도의 시대도 끝이 났다. 그리하여 청교도들이 소망하던 나라는 사라지고 옛날 상태로 다시 돌아갔다. 영국인들은 너무도 경건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은 제네바가 아니었다. 그들은 옛 왕조를 그리워했다. 그리하여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청교도에 대한 강한 반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의회는 장로교의 제도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감독 제도를 다시 도입하였다. 그리고는 반대파들을 처벌하기 위한 법률을 만들었다. 이제 국교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교회에 발붙일 수가 없게 되었다. 다시 장로교 목사들은 그 자리에서쫓겨나기 시작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있던 크롬웰의 묘는 국왕 살해의 장본인이라 하여 파헤쳐졌다. 얼마 안되어 반란과 폭동이 발생하였다. 장로교 측 반란군은 처절한 살육전 끝에 완전히 전멸하고 말았다.
찰스 2세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의 동생이며 나중에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 2세도 그리하였다. 영국인들은 장로교도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영국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렌지 공 윌리암을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다. 제임스는 통치 3년 만에 프랑스로 도주하였다. 얼마나 오랜 투쟁과 투쟁의 연속이었던가!
이제 영국에서는 누구든 왕실에 충성하고 1520년의 39개 조항에 서명하면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결국 성공회가 국교로 남은 것이다. 스코틀랜드는 장로교를 국가의 공식 종교로 삼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교리로 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청교도의 이상은 계속 남아 영국 사람들의 전통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신대륙에 미국을 건국하는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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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
(1) 개혁의 선구자들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은 많은 선구자들의 헌신에서 비롯하였다. 1407년에는 영국의 위클리프파 신부였던 제임스 레스비(James Resby)가 퍼스(Perth)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화형에 처하여졌고, 1433년에는 보헤미아 출신의 의사요 후스파 선교사인 폴 크라바르(Paul Crawar)가 성경을 가르친 일로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처형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이 대륙의 전역으로 번져 나가자, 1525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루터의 신학 사상을‘추하고 악한 교훈’이라고 비난하면서 종교 개혁의 확산을 금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1526년부터 영국의 개혁자 윌리엄 틴데일의 종교개혁 사상이 스코틀랜드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① 패트릭 해밀톤의 순교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운동은‘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계명성’(The Morning Star of Scottish Reformation)이라고 불리는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 1504-1528)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는 왕손으로 귀족 출신이었으므로 14살의 어린 나이에 페른(Fern)의 수도원장에 임명되었다. 파리에서 유학할 때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루터의 글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패트릭은 1526년부터 공개적으로 루터파의 사상을 옹호하기 시작하였고, 1527년 이신득의 사상을 설교한 일로 대주교 제임스 비튼(James Beaton)의 소환을 받았다. 그는 대륙으로 피신하여 비텐베르그에서 루터와 멜랑톤을 만났으며, 개혁자들이 새로 세운 대학을 살펴보기 위해 마르부르그를 방문하였으며, 복음적인 신앙에 고무되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1527년 말경 귀국하였다.
해밀톤은 귀국과 동시 공개 토론과 설교를 통해 교회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공개 토론의 대상은 알레시우스(Alesius)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해밀톤에게 설득 당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해밀톤은 설교를 통하여‘성지 순례, 연옥, 성자에게 기도하는 것,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비판하고, 순수한 초대 교회 신앙으로의 환원을 주장하였다. 이일로, 1528년 대주교 제임스 비튼의 출두 명령을 받았고, 2월 28일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 정문 앞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한다는 이유로’화형에 처하여졌다.
복음을 사랑했던 순교자 해밀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그를 태우던 연기는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을 소위‘이단의 보금자리’로 만들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한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의 말처럼, 패트릭의 순교 이후 스코틀랜드 지성인 사이에 그의 화형 이유를 밝히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로마 천주교회에 정면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1534년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수장령으로 교황청의 편에 서있던 스코틀랜드와의 평화가 깨어지자, 많은 개혁자들이 박해를 두려워하여 영국과 대륙으로 피신하였다. 대주교 비튼은 데이빗 스트라턴(David Stratton)과 노만 굴레이(Norman Gourlay)와 같은 종교 개혁자를 화형에 처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탁발 수도사 알렉산더 시튼(Alexander Seton)은 설교를 통하여‘교황청의 부패한 교리’를 비난하였고, 상인들과 선원들은 과감히 종교개혁 사상을 스코틀랜드에 소개하였다. 왕실의 개혁자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고, 성화를 손상시키거나 개인적 예배를 금하는 법이 1540년에 통과되었다.
1542년 제임스 5세가 전사하자, 백작 얼(Earl of Arran)이 섭정하였는데, 그는 종교 개혁자들에게 호의적이어서 복음적인 설교를 허용하고, 성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하였다.
비튼의 반대로 스코틀랜드와 영국과의 동맹관계가 깨어지자, 헨리 8세는 1544년 스코틀랜드를 침입하여 에딘버러와 남부 스코틀랜드 도시들을 불살랐다. 영국의 침략으로 사회가 혼란해지고 추기경 비튼의 학정이 계속되자,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프랑스와 로마 천주교회를 지지하는 무리와 영국과 개혁운동을 지지하는 이들로 나누어졌다. 이러한 시기에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든 인물이 바로 조지 위샤트이다.
② 조지 위샤트의 개혁 운동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의 소년 시절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1538년 몬트로즈(Montrose)에서 헬라어를 가르치다가 교회 당국에 소환되었고, 1539년 영국으로 피신하였으나 동일한 이유로 정죄를 받아 스위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사상과 하인리히 불링거의 영향을 받고, 스위스 신앙고백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그 후, 영국 케임브리지의 코르푸스 크리스티 대학(Corpus Christi College)에서 공부했으며, 154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몬트로즈와 던디(Dundee)에서 설교하면서 성
경대로 교회를 개혁하자고 주장하였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스코틀랜드 지역을 순회하며 개혁 사상을 증거하고, 로마 천주교회 당국의 교권 남용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1546년 1월 체포되어 에딘버러 감옥에 투옥되었고, 1546년 3월 1일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추기경 데이빗 비튼(David Beaton)에 의하여 화형에 처하여졌다.
위샤트의 처형으로 시민들의 항거가 일어났다. 그들은 위샤트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증거하였음에도 범죄자처럼 처참하게 살해되자, 추기경 비튼에 대하여 반발하였다. 이는 가난한 시민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귀족, 지주, 명예로운 직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로 확산되었다. 한술 더 떠서, 공공연하게 조지 선생의 피에 보복해야 한다거나,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자고 하는 맹세들이 행해졌다. 이러한 맹세는 1546년 5월 시민들이 추기경의 관저를 습격하여 살해함으로 실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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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존 낙스의 개혁 운동①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순교자들과 시민 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순교자의 신앙을 계승하며 시민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존 낙스(John Knox, 1505-1572)이다. 낙스는 에딘버러에서 가까운 하딩톤(Haddington)에서 존경은 받
았으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글라스고우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25세에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될 때까지 낙스를 인도한 것은 스콜라 철학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어 교부들의 글을 읽기 시작했고, 거기서 깨달음을 얻었다. 주로 제롬과 어거스틴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제롬으로부터 성경만이 하나님의 진리의 순수한 원천이라는 것과 원어로 읽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다. 어거스틴에게서는 하나님의 은총인 성경의 내용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종교개혁의 원리인‘성경의 권위’와 ‘신앙 의인’의 기초를 터득한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 교회의 가르침이 너무나 미신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종교심을 가지고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힘껏 선행하라는 식의 사고는 종교마다 공통적이다. 그렇게 해서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다 죄이다. 겉으로 선행을 해도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이다. 마음으로부터 계명을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선행도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낙스는 도달하였다.
그러던 중 존 낙스는 죠지 위샤트의 후견인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위샤트를 만나 종교개혁 사상을 직접 접하게 되었으며, 그와 나눈 대화를 통해 크게 감화를 받게 되었다. 그 이후 죠지 위샤트의 지지자가 된 존 낙스는 그가 설교할 때면 칼을 들고 그를 호위하곤 하였다. 이때가 1545년에서 1546년으로 넘어가던 겨울이었다. 그 후 6주가 지난 어느 날 죠지 위샤트는 체포되어 세인트 엔드류스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위샤트가 순교한 후에 존 낙스는 적극적으로 종교개혁 운동에 가담하여 전 생애를 스코틀랜드의 개혁에 바치게 되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상황은 모든 면에서 종교 개혁을 요청하고 있었다.
나라 전체 부의 반 정도를 성직자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것도 소수의 지도자들 손에 있었다. 탐욕과 야심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여 세속 권력과 다투고 있었다. 사제들은 모든 면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타락하였다. 신앙은 완전히 미신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이 망할 때의 상황과 다를 바 없었다.
기도는 성모를 비롯한 성자들에게 드려졌고, 미사는 예배가 아닌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참여한 자들에게는 공로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마음 속의 신앙은 외형적인 행위로 대치되었다.
영국의 북쪽에 있었던 스코틀랜드는 역사적으로 영국과 적대 관계인 프랑스와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영국의 헨리 7세가 자기 딸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와 혼인시키면서 두 나라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다
시 헨리 8세가 개신교로 전향하자 왕실은 다시 프랑스와 전통적인 동맹 관계로 선회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이 두 나라는 교회의 개혁과 교황과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 반대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교황과 결별한 영국과는 달리 스코틀랜드는 프랑스를 따라서 확실하게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개신교 사상이 스코틀랜드에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전부터 이미 후스의 사상이 퍼지고 있었고 독일에 유학했던 사람들이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의 글을 가지고 고국에 돌아왔다. 의회는 이러한 서적들을 법으로 금하였고 개신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이들을 처벌하였다. 1528년 최초의 순교자가 발생하였고 그 수는 계속 늘어났다. 무서운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봉자들은 불어났다. 특히 왕실의 세력이 강화되는데 대한 반감으로 많은 귀족들이 개신교를 따르게 되었다.
영국의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가 사망하자 왕위 계승자인 메리 스튜어트가 아직 젖먹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들 에드워드와 결혼시키려고 하였다. 친영파인 개신교도 귀족들은 이 결혼을 찬성하였다. 하지만 가톨릭을 신
봉하는 왕실은 메리를 프랑스로 보내 교육시키고 프랑스 왕자와 혼인시키려고 하였다. 결국 친불파가 성공하여 개신교도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개신교 열성파들은 세인트 앤드류 성을 점령하고 대주교를 살해하였다. 왕실은 군대를 파견하였지만 당시의 내부 분쟁으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던지라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철수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스코틀랜드의 개신교도들은 이 성을 신앙의 본거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은 그 후에 이 성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모아 싸우게 된다.
낙스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는 세인트 앤드류 싸움을 통해서 개신교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그는 세인트 앤드류 성의 점령을 계획하던 두 귀족의 아들들을 가르치던 가정교사였다. 본래 그는 개신교도들이 이 성을 점령했을 때 자기가 가르치던 소년들을 이곳으로 데려다 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단 성에 도착하자 그는 그 사건에 깊숙이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신학 공부를 위해 독일로 가려던 계획은 중단되고 그곳에서 개신교도들의 목회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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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존 낙스의 개혁 운동②
낙스가 세인트 앤드류 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왕실과 프랑스가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그곳 수비대에 남아 프랑스와 투쟁할 것을 결심하였다. 영국과 스코틀랜드 모두가 내정 문제로 골치를 썩는동안 개신교도들은 이 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여유를 얻자마자 응원군을 파견하였다. 스코틀랜드 왕실도 이 성에 강력한 군대를 파견하였다. 개신교도들은 모든 힘을 다해 대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힘으로 볼 때 너무 열세였다. 결국 얼마 못 견디고 1547년에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낙스는 세인트 앤드류의 수비대에서 당시 스코틀랜드의 최고 지식인들인 세이트 앤드류 대학의 교수들과 일반대중 앞에서 최초의 설교를 하였다. 그의 스승 존 메이저도 이 청중들 속에 있었다. 낙스는 다니엘 7장 24-25절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하였다. 그는 로마 교회를 적그리스도라 해석하였는데 그 이유는 교황청의 교리 이탈과 역대 교황들의 문란한 사생활 때문이었다. 이 첫 설교를 통해
우리는 낙스의 소명에 대해 몇 가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첫째, 낙스는 성경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음으로써 자신의 주장들을 정당화하였다. 둘째, 그는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중의 하나로 인정하였다. 셋째, 예배의 근간은 성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설교는 심장을 쪼개는‘파괴력’이 있었다. 어떤 자들은 교황제의 가지들을 쳤으나 그는 뿌리를 쳤다.
낙스의 열정적인 설교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으로 모인 훈련되지 않은 시민들과 조직 없는 수비대는 가톨릭과 왕실을 당해내지 못했다. 스코틀랜드 왕실은 섭정, 기즈의 메리(제임스 5세의 미망인)를 통해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다.
프랑스 제독 레옹 스트로찌(Leon Strozzi)의 지휘 아래 도착한 20여 척의 갤리선 대포가 성을 포격하였고, 낙스를 포함한 전수비대원들이 포로가 되었다. 낙스는 19개월 동안 프랑스 갤리선‘노트르담’(Notre Dame) 호에서 노 젓는 노예로 일했다. 노트르담이 소속한 함대는 여름엔 루앙(Rouen)에 주둔하여 영국 해적들의 침략 행위를 방어하였고, 겨울에는 본거지인 낭트(Nantes)에 주둔하
였다.
낙스는 노예 생활을 통해 인간의 가혹성과 잔인성을 보았다. 그가 치룬 노예 생활은 참담한 것이었다.
보통 갤리선의 길이는 일백 오십 피트에 달하였으며, 길이가 오십 피트 가량 되는 돛대를 달고 있었다. 선미에는 선장용 객실 하나와 창고가 있었고 노예들이 앉아 있는 의자들 한가운데는 우뚝 솟은 복도가 자리잡고 있어서, 감독이 이 위로 왕래하며 게으름을 피우는 노예들을 말로, 또는 폭력으로 다스렸다. 한편에 대개 스물 다섯 개의 노가 있었고, 한 노에는 여섯 명의 노예들이 배당되었다. 보통 삼백 명 정도의 노예가 한 배에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쇠사슬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항해 중에 이들은, 밤에는 의자에 묶인 채 잠이 들었으며, 낮에는 뜨거운 태양, 비, 바람, 추위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배를 수선하거나, 청소할 때, 혹은 겨울에는 육지에 있는 오두막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갖가지 곤경을 당해야 했을것이다…낙스와 그의 동료들은 프랑스에서 가장 악질적인 죄수들과 함께 섞여 살게 되었다.
그러나 낙스는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름 없는 사람으로 갤리선에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젠가 자신을 쓰시기 위해 훈련시키신다고 믿었다. 아울러 이 고통의 시기에 그는 낭트 주위에 살고 있는 프랑스 개혁주의자들과 산발적으로 친교를 나눌 수 있었다. 1549년 영국 정부의 교섭으로 낙스는 극적으로 해방되었다. 영국
에서 낙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포로 교환의 방법으로 그를 구해낸 것이다.
영국 왕실의 후원을 받은 낙스는 잠시 스코틀랜드의 귀환을 보류한 채 5년 동안(1549-54), 베릭(Berwick)과 뉴캐슬(New castle)에서 목회로, 런던에서는 설교로 그리고 대주교 크랜머와는 따뜻한 우정을 나눔으로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노예 생활로 인해 생긴 위궤양과 신장염도 목회 기간 동안 치료되어 갔다. 성경 연구와 좋은 주석을 읽는 데도 열심을 내었다. 후에 그의 아내가 된 노햄성(Norham castle) 장군의 딸인 마조리 보우즈(Marjory Bowes)도 이때 알게 되었다.
에드워드 6세는 낙스의 탁월함을 인정하고 그를 여섯 명의 궁정 목사 중 한 사람으로 지명하여 설교를 시켰다. 영국 체류 기간에 낙스는 모든 삶의 원리와 신앙을 성경에서 찾으려 했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낙스를‘청교도의 창시자’로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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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존 낙스의 개혁 운동③
제네바에서의 낙스
장로교를 지원하던 에드워드 6세가 죽자 그는 칼빈이 있는 제네바로 도망하였다.
거기서 그는 생애 가장 위대한 스승을 만났다.
낙스가 칼빈주의를 알게 된 것은 프랑스 갤리선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로 추측된다. 낙스는 프랑스 해군의 갤리선 노트르담호에 강제로 승선되어 중도동을 했지만, 이 배가 루앙과 낭트에 정박할 때는 육상 근무를 할 수 있었다.
1548년에는 이 지역에도 칼빈주의가 널리 전파되어 있었다. 낙스가 프랑스 개혁주의자들을 만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의 신빙성 있는 증거는, 낙스가 칼빈이 쓴 예레미야 주석을 이미 1549년에 알고 있었고, 1550년에 간행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었다는 점이다. 이런 것을 보아서 학계는 낙스가 영국에 들어가기 전에 제네바를 방문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러한 학계의 연구가 신빙성이 있다고 볼 때, 영국 체류 때 낙스의 신앙은 상당 부분이 칼빈주의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제네바에 도착한 낙스는 칼빈이 목회하는 제네바 교회 바로 옆 건물에서 약 200여 명의 영국 피난민들을 돌보게 되었다. 이 때 낙스는 칼빈의 예배 모범서를 본따‘기도의 형식과 성례의 집행’(The Form of Prayer and Ministration
of the Sacrament)을 작성하여 성도들에게 사용하도록 했다. 예배 순서는‘죄 고백과 시편 낭송, 주의 강림을 간원하는 기도, 설교 및 그 후의 질의 응답, 목회자의 기도, 축도’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찬식은 한 달에 한 번 혹은 성
도들이 원할 때 실시했고, 세례식은 순서 중에 기도와 설교가 포함되어 은혜롭게 행해졌다.
교회 행정은 목사, 장로, 집사의 세 직분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 직분들은 매년 선거를 통해 주어졌다. 매주 목요일 세 직분자들은 함께 모여 교회 일을 의논하고 치리를 행했다. 치리는 개인적 권면, 공개석상의 꾸지람, 파문 등의 절차를 밟았다. 치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보호하기위해 부득이한 경우에만 실시했다.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상황을 돌아보기 위해 일 년 정도 그곳에 가 있다가 1556년 9월 13일 다시 제네바에 돌아왔다. 이번에는 영국에 있는 장모와 아내까지 데리고 왔다. 그는 가장으로서, 목회자로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칼빈과 낙스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접촉을 밀접하게 나누었다. 칼빈은 낙스의 후견인이 되었다. 제네바에서 낙스는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신사 계급인 지도층 위그노들과 그들을 따르는 상인들, 인쇄업자들 그리고 학자들이 칼빈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영국, 폴란드, 스페인에서도 뛰어난 지식인들이 칼빈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낙스는 직접 간접으로 그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
으면서 자신의 사상 체계와 신학의 폭을 넓혔다. 낙스는 그들과 어울리며 지내는 제네바 생활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저는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채, 이곳이야말로 사도 시대 이후 지상에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도덕과 종교가 이처럼 신실하게 개혁되어 가는 모습은 어느 곳에서
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낙스는 4년 동안(1555-9) 이곳에서 영국인들을 돌보았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등극하면서 개신교에 대한 종교 탄압이 수그러져 제네바의 영국 피난민들이 속속 귀국하였기에 낙스도 새로운 일감을 찾아야 했다.
낙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국에 들어가 목회 사역과 궁중 목사직을 계속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완성으로 남겨 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을 재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국으로 가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1558년 낙스는 칼빈과 의논하지 않고, 「여인의 괴수 정부에 대한 첫 번째 나팔 소리」(The First Blast of the tur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라는 소책자를 출판하여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 이 책자는 개신교를 박해하는 스코틀랜드 섭정 기즈의 메리와 영국 여왕 메리 튜더를 염두에 두고 썼으며, 여인의 국정 관여와 통치행위의 부당성을 탄핵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1558년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가 즉위한 해였다. 여왕은 낙스로 인해 명예가 실추되었다. 칼빈도 낙스의 언어와 행동의 결렬함에 놀랐다. 낙스는 나중에 엘리자베스를 여선지 드보라와 같다고 일컫고 그의 언어를 순화시켜 여왕의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낙스가 영국에 오는 것을 반길 영향력 있는 왕실 인사는 없었다. 1559년 5월 2일 마침내 낙스는 하나님의 섭리가 스코틀랜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신하고 “오! 하나님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면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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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존 낙스의 개혁 운동④
개혁의 싸움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낙스를 귀족과 시민들이 환영하였다.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시민들이 낙스와 같은 개신교도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우선 신앙적 이유가 가장 컸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가 급속히 프랑스에 귀속되어 간다는 의구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섭정이며 가톨릭 교도인 기즈의 메리가 딸을 프랑스의 황태자와 결혼시켜 스코틀랜드를 프랑스에 예속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저들은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이들은, 개신교도가 된다는 것이 국가를 사랑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인식의 틀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낙스는 자신을 환영해 주는 이들로부터 깊은 감격을 느꼈다.
저들의 예상대로 스코틀랜드 왕족인 메리 스튜어트는 1558년 프랑스 황태자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일년 뒤에는 왕위에 올랐다. 그리하여 당시 16세였던 메리는 프랑스의 왕비이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되었다. 그녀가 결혼하던해 영국에서는 메리 튜더가 사망하자,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영국의 여왕이라는 공식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메리와 사촌 엘리자베스는 서로 친척이었지만 원수가 된 셈이다.
스코틀랜드는 실제로 메리의 어머니에 의해서 섭정되었다. 점점 친 가톨릭 정책이 강해지자 개신교 지도자들은 1557년 말에‘복된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회중’을 섬기겠다고 서약하였다. 그 후 그들은‘회중의 지도자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섭정은 이들을‘이단자’로 취급하여 박해를 가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꿋꿋하게 버텼고, 다음 해에는 교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스코틀랜드 의회를 비롯하여 지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559년 낙스와 회중의 지도자들은 퍼스(Perth)에 일단 집결했다가 에든버러에 진군하여 섭정에게 종교 개혁을 설득시키려고 하였다. 그러자 섭정은 4,000여 명의 정부군과 900명의 프랑스 지원 부대에게 전쟁 준비를 명령하였다. 이때 낙스의 군대는 훈련이 안 된 시민군 5,000여 명이 있을 뿐이었다.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낙스는 영국 여왕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영국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는 낙스의 여성관에 불만이었지만, 스코틀랜드가 가톨릭으로 남아 프랑스와 연합하여 영국을 위협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불편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10,000명의 군대 지원을 약속하였고, 실제로 윈터(Winter) 제독이 1560년 1월, 8척의 함대를 이끌고 낙스의 진영에 도착하였다.
1560년 1월 마침내 스코틀랜드에서 종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스코틀랜드의 국내 문제에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한 국제 전쟁이 되었다.
낙스는 같은 해 4월부터 성 자일즈 교회(St. Giles Church)를 담임했다. 낙스는 그의 후원자들이 이 전쟁에 소극적임을 알고 곧 승리할 수 있다는 전투 정신을 설교로 불어넣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했는지 엘리자베스 여왕의 특사 토머스 랜돌프(Thomas Randolph)는 여왕에게“낙스의 음성이 500개 나팔보다 더 효과적으로 스코틀랜드의 개신교도들 속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그의 설교를 들은 한 청년은, “그는 설교를 시작할 때는 보통 조금 구부정한 모습이다가 마지막 부분에는 얼마나 열정적인지 마치 단상을 산산조각 내며 솟아오르려는 것처럼 보였다. 청중들은 너무 강하게 마음이 찔려 설교 메모도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만큼 낙스의 설교는 청중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낙스는 마리아나 성자들의 화상과 조각을 강하게 배척하였고, 그의 설교를 들은 던디와 퍼스의 사람들은 가톨릭의 많은 성상과 건물들을 파괴하였다. 그는 아무리 크고 웅장한 건물이라고 해도 거기에 온통 성상으로 범벅이 되어 신자들이 우상 숭배할 가능성이 있을 때에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일부는 수도원이나 사원들을 마구 파괴하기도 하였다.
낙스군과 영국 연합군은 1560년 4월 4일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리스 지역도 장악해 버렸다. 프랑스군은 포위되어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하고 휴전을 요청하였다.
1560년 6월 11일 스코틀랜드의 섭정 기즈의 메리(메리 스튜어트의 모친)가 돌연히 사망하여 가톨릭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그녀는 한 때“존 낙스의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 개신교를 멸시하였으나, 임종시에는 개신교 목사 존 윌록(John Willock) 앞에서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고 숨을 거두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의 왕좌는 프랑스에서 과부가 된 메리 스튜어트에게 돌아갔다. 그리하여 낙스와의 싸움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메리는 새로 결혼한 남편을 죽이고 다른 이와 결혼했다는 혐의를 받고 영국으로 도망가게 되었고, 그곳에서도 엘리자베스를 제거하고 영국의 왕이 되려는 음모에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사형되고 말았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에서는 개혁이 급진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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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존 낙스의 개혁 운동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메리 스튜어트가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올 때까지 국사는 잠시 12명으로 구성된 추밀원에서 이루어지다가 1560년 8월 3일 의회가 소집됨으로 정치 주도권은 의회로 넘어갔다.
낙스는 즉시 종교 개혁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에 대한 찬반 토론이 있은 후, 스코틀랜드 의회는 낙스와 다섯 명의 목사들에게 신앙 고백서 작성을 요청하였다. 이에 낙스는 4일 만에 다섯 명의 동료 목사들, 일명 다섯 명의 존들(John Spottiswood, John Row, John Douglas, John Winram, John Willock)과 같이 신앙 고백서를 작성, 의회의 상임위원회에 제출했다. 상임위원회는 이 고백서를 인준하여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로마 천주교도들이 입법 과정을 살피려고 참석하였지만, 의회가 개혁자들이 제출한 신조를 동년 8월 17일 채택하므로 개혁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의회는 로마 교황청이 주장하던 사법권을 폐지하고, 미사를 불법으로 정죄하는 등 로마 천주교회의 모든 집회를 불법화하고, 프랑스와 단교를 선언하였다.
총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는 개혁주의자들의 교리, 즉 칼빈의 요리 문답과 1559년의 프랑스 신앙 고백, 폴란드인으로서 칼빈주의자인 존 라스코(John Lasco, 1499-1560)와 스위스 종교 개혁자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75)의 글들을 참조한 것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이 신앙고백서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산물이요, 낙스의 작품임에 틀림없다. 특히 신조가 채택하고 있는 세속 정부에 대한 입장은 낙스의 것으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행정 관료의 의무와 책임을 역설하였다.
이 신앙 고백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나오기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리적 표준이 되었다.
서문은“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우리가 고백해 오면서 수치와 위협을 받던 교리의 모든 것들을 만천하에 공포하기를 오랫동안 갈망해 왔습니다.”로 시작되어, “우리는 끝날까지 이 신앙 고백에 머물러 있기를 단호하게 천명합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그러나 샤프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고백서는 진리에 대한 진술들이 무오한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 안에서 수정과 개선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제20항은 교회 회의들의 무오성에 반대하면서“어떤 회의들은 분명히 과오를 범하였으며, 그것도 매우 중대한 내용에서의 과오였다.”고 지적하였다.
낙스는 1546년 트렌트 종교 회의(The Council of Trent)가 취한 가톨릭의 구원관에 기겁하였다. 트렌트 종교 회의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교회가 베푸는 성례전에 참여하여 신과 인간이 협동함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미사의 참석은 가톨릭의 구원관에서는 필수적이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미사는 구원 신비의 중심이며,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이며, 아울러 사실적이고 현재적 희생이었다.”라고 되어 있다.
낙스는 인간의 방법이 배제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으로 구원이 이루어짐을 믿었기에 미사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 제8장은 다음과 같이 담대히 선언한다.
동일하신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직 은총으로 이 세계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요, 형제요, 목자요, 우리 영혼의 위대한 감독으로 지명하셨다.
교회관에 대해서는 제18장에서 교회의 3대 요소, 곧 말씀의 참된 선포, 올바른 성례전의 집행 그리고 정당한 교회 훈련(권징)을 언급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는“정직하고 곧으며 남자다운 문체로 기록되었으되, 불평이나 아첨이 없고, 논리적 정확성과 학문적 수준에서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온종일 진리를 전파한 후 피곤에 지친 사람이 밤에 조용히 앉아 자기가 가르친 내용을 생각해 보며 마음에서 새 힘을 되찾는 것과 같다.”고 샤프는 그의 신조학에서 밝히고 있다.
이 때부터 스코틀랜드의 개혁은 완성 단계에 들어갔다. 이러한 개혁은 후세들에게도 이어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스코틀랜드의 개혁은 특별히 교육에 강조를 두고 있었다. 모든 교구에서 젊은이들에게 경건 훈련을 시켰고 주요 도시에는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낙스는 어느 지역에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과 복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하였다. 후에 칼빈은“이처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단시간에 이루어진 성공을 보며 이 나라를 특별히 사랑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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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존 낙스의 개혁 운동⑥
국가 개혁의 가르침
낙스의 신학은 전반적으로 칼빈의 것과 같다. 그는 칼빈의 충실한 제자였던 것이다. 단지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서 칼빈보다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종교 개혁 당시는 군주의 종교가 곧 국민의 종교였기에 낙스는 개신교도를
박해하는 가톨릭 여왕들과 싸워야 했다. 조국을 사단과 미신으로부터 해방하여 참된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이었던 것이다.
낙스가 개혁에 열중하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통치자인 메리 스튜어트가 1561년 8월 프랑스에서 귀국하였다. 그녀는 왕권 신수설에 근거하여 절대 왕정을 꿈꾸고 있었다. 낙스가 진행시켜 법제화된 가톨릭 미사 금지를 그
녀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낙스에 대항하여 스코틀랜드에 오자마자 왕궁의 홀리루드 하우스(Holyrood house)에서 미사를 드렸다.
낙스에게는 한 번의 미사가 만 명의 군대가 침공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낙스는 곧 여왕의 미사 행위를 설교로 규탄했다. 여왕과 종교 개혁자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여왕은“아름답고 우아하며, 용감하고 영리했다. 그
러나 성격에 안정이 없었고, 확신에 찬 남자들이 고분고분 하지 않는다는 것을”이해하지 못했다.
여왕은 프랑스 궁중에서 음모와 술수를 자연스럽게 배워왔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부드러운 화술로 스코틀랜드를 통치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낙스는 여왕의 미모와 화술에 넘어가지 않았다. 여왕이 가톨릭 의식에 따라 단리(Henry Darnley)와 재혼하려 할 때 낙스는 이를 공격했다(1563). 여왕은 분에 떨며 눈물을 흘리며 낙스에게 말했다. “나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서 당신의 호의를 얻고자 했습니다…이제 나는 복수할 것을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낙스는 연소한 여왕을 설득시키기보다는 다음과 같이 질책했다.
“여왕의 결혼이 당신(낙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씀하셨지요. 혹은 당신이 이 공화국에서 무엇인가? 라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여왕의 신하입니다. 그리고 비록 백작이나 남작이나 귀족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저를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단리가 살해되자 여왕은 보스웰 백작과 개신교식으로 다시 결혼하였다. 보스웰은 단리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때 낙스는 메리 여왕의 퇴위와 처형을 주장하였다.
낙스가 단순히 여성 통치자가 싫어서 이런 강경책을 폈을까? 이 부분을 바로 이해하려면 낙스의 정부론을 살펴보아야 한다. 낙스는 여성이 통치자가 되는 것을 확실히 싫어하였다. 더군다나 통치자가 가톨릭 군주로서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은 더 혐오하였다. 낙스는 영국에서 메리 튜더가 가톨릭을 국교로 하여 개신교를 탄압하고 스페인 왕과 결혼한 후 곧 사망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여왕의 잘못된 정책으로 비슷한 사건이 경험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낙스는 구약 특히 예레미야를 기초로 하여 독재하는 군왕이나, 우상 숭배를 주장하는 통치자에 대해 무력 항쟁을 인정하였다. 칼빈은 귀족층에 의한 질서 정연한 법적 저항을 인정하였지만, 낙스는 귀족층이나 하부 통치 계급이 독재자에 대하여 수수 방관할 때는 평민들도 개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개혁에는 군왕의 지위 박탈은 물론이고 사형 집행까지도 포함시켰다. 낙스는 칼빈보다 훨씬 더 과격한 혁명론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낙스의 강한 신념은 스코틀랜드를 장로교 국가로 만들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개개인이 하나님의 대행자인 군주에게 복종해야 하지만‘하나님께 반하는 명령은 듣지 말라’는 가르침을‘대항하라’는 것으로 확대 해석하였다. 낙스가 여
왕과 싸워 여왕을 넘어뜨렸음에도 칼빈이 비난하지 않고 칭찬한 것을 보면, 그도 낙스가 자신의 가르침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았다고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여하간 그의 이러한 신학은 종교의 자유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신장하는 데도 큰 원동력이 되었다.
낙스는 교회가 정부의 일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사회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신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했고 그 일을 위해서 교회 안에 기구를 만들었다. 그리
고 가난하든 부하든 모든 어린이들이 교리를 배울 수 있도록 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혁명을 외치거나 민주주의를 주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칼빈의 가르침 안에 머물고 싶어했다.
낙스가 가르친 순수한 예배와 개신교의 원리를 보면 그가 청교도의 시조 중 하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폭군에 대항하여 반대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 것은 칼빈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장로교인들과 프랑스 위그노들의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적인 의지는 낙스 자신의 삶과 사상을 움직였듯이 후대 장로교인들의 삶과 사상의 분명한 원리로 남아 있다.
낙스는 제임스 6세가 스코틀랜드의 스틸링에서 즉위할 때 소년 왕 요아스(왕하 12장)에 관해 설교하였다. 1567년 12월 의회가 열렸을 때 낙스는 의회의 개회 설교를 하고, 그 의회가‘앞으로 모든 왕들은 개신교 신앙을 유지하겠다는 서약을 의무화하고 아울러 교회 모임의 자유와 권한을 인정한 새로운 입법 조항’을 세우는 것을 지켜 보았다.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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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낙스 이후의 스코틀랜드
앤드루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
낙스가 죽자 어린 왕 제임스 6세의 섭정이었던 모튼(Morton) 백작은 성공회식 감독주의를 소개하려 하였다. 모튼은 존 더글러스를 세인트 앤드류스 대주교로 임명하고, 대주교로부터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국가가 강력히 통제하는 성공회식 주교들이 임직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고위 성직자들은“툴칸(tulchan)의 감독들”로 불렸는데, 툴칸이란 게일어(Gaelic)로‘암소가 우유를 내게하기 위해 사용하는 속을 채운 송아지 가죽’을 의미한다.
이러한 배도의 시기에 칼빈의 제자이며 낙스의 후계자로 앤드루 멜빌이 등장하였다. 멜빌은 스코틀랜드의 몬트로스 근교에서 태어나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프랑스로 유학하였다. 그는 파리에서 신학 교육을 받은 뒤, 1569년 제네바로 가서 베자의 영접을 받았다. 제네바에서 멜빌은 아우구스부르그 은행가 퍼거(Ulrich Fugger)의 도움으로 헬라어와 히브리어 사본들을 구하여 연구하였으므로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베자의 임명을 받아 제네바 아카데미의 헬라어 강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시민법 학과의 과장이 되었다.
멜빌은 1574년 스코틀랜드에 돌아왔는데, 그 때 베자(Theodore Beza)는“제네바 교회가 스코틀랜드에 보여줄 가장 큰사랑의 표시는 앤드류 멜빌이다.”라고 편지하였다. 멜빌은 스코틀랜드에 귀국한 후 글래스고우 대학교의 총장에, 1580년에는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 총장에 부임하였다.
그는 제네바식 교육 행정, 교과 과정, 교수법을 스코틀랜드에 소개하여 대학 교육 제도를 크게 개선하였을 뿐 아니라, 낙스의 제1치리서를 1578년 개정하여 제2치리서를 만들었다.
멜빌은 제2치리서를 통해 보다 더 성경에 가까운 장로 정치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낙스가 감독자를 인정한 것과는 달리, 멜빌은 감독 정치가 불법적이며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합리화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는 칼빈처럼 교회 직분을 장로와 집사 둘로 나누고, 성경에 나오는‘감독들, 목사들, 그리고 목회자들(ministers)은 동일한 용어’로 장로 직분에 대한 묘사라고 하였다. 제2치리서는 1578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장로교 교육을 받은 제임스 6세가 영국에서 제임스 1세로 즉위하자마자 영국의 청교도는 물론 스코틀랜드 장로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제임스도 그의 어머니가 지지해온 왕권 신수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스코틀
랜드의 장로교 대의 정치는 왕권 신수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연히 마찰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멜빌은 제임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전에 여러 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지금도 말씀드립니다. 스코틀랜드에는 두 개의 왕국이 있고, 두 명의 왕이 있습니다. 이 나라의 머리인 제임스 왕과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임스 왕은 그리스도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는 왕도, 주도, 머리도 아니고, 하나의 지체일 뿐입니다. 우리는 귀하를 왕으로 섬기며, 귀하에게 합당한 예의로 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귀하는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제임스는 멜빌을 런던탑(London Tower)에 4년 동안 가두었다가 영국에서 추방하였다. 멜빌은 1611년 영국에서 추방되어 프랑스 세단(Sedan)으로 갔고, 거기에서 신학생들을 양육하다가 1622년 사망했다.
제임스 1세는 앤드류 멜빌을 추방한지 얼마 지난 1618 년 스팟티스우드(John Spottiswood)를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에 파송하여‘퍼스 5개 신조’(Five Articles of Perth)를 채용하도록 강요하였다.
‘퍼스 5개 신조’의 내용은 ① 성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을 것, ② 성일(聖日)을 엄수할 것, ③ 감독 교회식의 견신례(Episcopal confirmation)를 집행할 것, ④ 개인적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과, ⑤ 개인적으로 성찬을 베푸는 것을 중심 사상으로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제임스의 정책은 멜빌의 영적 지도를 받던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의 저항을 초래하였고, 종교적인 혼란을 가중시켰다.
제임스의 사망(1625) 후 찰스 1세(재위 1625-49)가 통치하면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더 힘든 수난을 맞게 되었다. 찰스는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윌리엄 로우드(William Laud)를 등용하였고, 로우드는, 영국에서는 청교도에 대한 박멸 운동을 전개하였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예배와 교회 정치에 있어서 성공회주의에 따를 것을 강요하였다. 그의 명령에 의하여, 스코틀랜드에서는 1637년 7월 23일부터 장로교회가 폐지되고 성공회 의식대로 예배가 드려지도록 되었다. 그러자 이 날에 아주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에든버러의 사제장이 세인트 자일스 교회당에서 성공회 의식을 따라 예배를 집전하려고 할 때, 제니 겟즈(Jenny Geddes)라는 여인이 큰소리를 지르면서 사제장을 향하여 의자를 집어던지는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들을 봉기시켰고, 장로교회들은 찰스의 종교 정책에 항의하면서 장로 정치의 수호에 목숨을 걸 것을 서약하였다. 그들은 에든버러의 그레이 프라야 교회당(Grey Friar’s Church)에 모여 장로교회 정치와 예배를 사수할 것을 결의하고, 찰스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국가 계약(National Covenant)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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