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설교자 / 로이드 존스 / 서문강 역
제 1 장 설교의 우월성
“그 모든 것보다도 이 강의를 할 용의를 가진 데 대한 나의 궁극적인 이유는 설교사역이란 내게 있어서 어떠한 소명보다도 가장 높고 위대하고 영광스런 소명이라는 점이다”(로이드 존스) 좀 더 부연해서 로이드 존스는 주저하지 않고 말하기를 “오늘날 기독교회의 가장 절실한 요구는 진정한 설교이며, 그것은 역시 명백하게도 세상이 가장 크게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가장 절실한 필요성에 대한 진술은 설교자가 함께 논의해야 하는 첫째 과제이다. 설교가 어떤 필요성이 있느냐? 현대교회와 세상에서 설교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아니면 설교란 시대에 아주 뒤떨어진 것이 되어버렸는가? 그런 질문을 던져야 하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현시점의 교회 상태가 어떻다는 것을 가장 잘 반영해 준다. 로이드 존스 바로 그 점이 현대교회의 위험한 상태와 무기력함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설교의 필요성에 대한 전체 문제, 목회에 있어서 설교의 위치가 이 시간에 다룰 문제이므로 그것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이 설교에 대한 강의나 특강을 요청할 때, 얼른 설교방식, 설교방법, 설교수단, 설교기술을 생각한다. 로이드 존스는 그것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설교자는 먼저 전제조건, 배경, 보편적인 원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한다는 것이 참으로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데서 중요한 난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는 특정한 조항에 들어가기 전에 그 문제를 일반적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다루려고 하는 중대한 문제는 이것이니 - 우리가 설교의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는가? 현대세계에 있어서 설교의 필요성은 과연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러분도 알겠지만 이것은 더 큰 문제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설교하는 문제 뿐 아니라 교회 자체까지도 의문시되는 세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설교에 대해 반동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인가? 왜 설교가 전에 교회생활에서 차지하였던 위치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서 떨어져버렸는가? 基督 敎會史를 아무리 건성으로 읽는다 해도 설교가 교회생활, 특히 프로테스탄트의 경우에 가장 중추적이고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이처럼 설교의 위치와 능력이 하향 길을 걷고 있으며 왜 이 설교가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입니까?
로이드 존스는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두 가지 객관적인 제목으로 나눈다.
첫째는 이 사실을 설명하는 일반적인 이유요
둘째는 교회 자체 내의 특수한 이유이다.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 밖의 세상에 유행하는 어떤 보통의 사상들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대영제국에서 이 문제를 생각한다면 주로 볼드윈이즘을 들 수 있다. 영국 스탠리 볼두윈이라 이름하는 20대에 수상을 지낸 사람은 별 신통한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만 연설과 웅변의 가치에 관한 국민의 생각에 영향을 끼쳤던 사람이다. 그는 연설과 웅변의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성공하려면 연설과 웅변의 가치와 중요성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는 단순하고 정직하고 평범한 영국인으로 등장했다. 자기는 위대한 연설가가 아니라고 말하며 어떤 위대한 웅변가라면 그는 국민들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며 아주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시사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대조법으로 표현했으며 그가 취하는 노선은 웅변이나 상상의 큰 재능에 깊이 심취될 수 없으면서 단순하고 평이하고 정직한 진술을 하는 평범한 영국인의 자세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웅변과 말의 권능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아주 뚜렷하게 영국 정치가들 사이에서 유행 되었으나 그 영향은 교회에까지 파급되었다. 이렇게 해서 웅변과 설득력과 명목상의 가치를 말하는 것에 대해 새로운 태도가 존재하게 되었다. 세계에 알려진 몇몇 위대한 활동가들은 역시 위대한 연설가요 웅변가였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 금세기의 양차 대전 동안, 영국의 뛰어난 두 위대한 지도자는 공교롭게도 위대한 웅변가였다. 사람이 말하려면 그저 단순한 대화를 해야 한다는 인상을 주었던 다른 지도자들은 속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인해 평가를 받았다. 가장 위대한 활동가는 역시 위대한 웅변가였다. 물론 그것은 민중을 감격시키고 일깨워 행동으로 옮기게 할 수 있는 지도자적 역량의 한 부분이며 그것은 지도자가 반드시 구비하고 있어야 하는 요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설교의 위치가 하락된 이유를 설명하는 교회 자체 내의 이유와 태도에 대해 좀 더 많은 관심이 있다. 로이드 존스는 이 방향에서 주요 동인이 몇몇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주저 없이 맨 첫 자리에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심 상실, 진리에 대한 신앙의 감소 등을 놓는다. 이것을 첫째로 꼽는 것은 그것이 주요 동인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 권위가 없으면 절 말할 수 없고 설교할 수 없다. 위대한 설교는 위대한 주제에 달려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위대한 주제는 언제고 어떤 차원에서든지 위대한 웅변을 산출하며 물론 이것은 특별히 교회의 경우에서도 진리이다. 사람들이 성경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권위에 입각해서 말하는 동안에는 위대한 설교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거기서 떠나 사색하고 논리화하고 억측을 부리고부터는 웅변이나 구변의 위대성은 여지없이 하향 길을 걷게 되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시야가 넓어야 한다. 나는 “대설교꾼”이라 불려지는 자들에게 사람들은 반감을 가졌다고 믿는다. 그들은 설교 꾼의 주요 특성들을 완벽하게 나타내 준다. 그 말 자체가 매우 재미있고 또 매우 정확한 것이라 믿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설교자라기보다는 설교꾼들이었다. 내가 뜻하는 바는 그들은 강단을 점령해서 그것을 지배하고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위인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직업적인 사람들이다
또 다른 요인은 참된 설교내용과 설교행위에 대한 그릇된 개념이다. 그것은 같은 형식에 관한 문제인데 내가 언급해 온 조잡한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설교집의 발행이 설교하는 일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믿는 것이다.
이상의 결과로 설교에 대한 새로운 사상이 침투해 들어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사람들이 예배에서 설교를 “연설”이라고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설교가 퇴색해 감에 따라 예배에 의식적 요소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 나쁜 것은 공적 예배에 흥미본위의 요소가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영사기를 사용한다든지 더욱더 많은 노래를 도입하여 말씀을 읽거나 기도하는 시간은 사정없이 짧아져 버리고 찬송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여기에다가 간증이 또 주어진다. 이와 관련해서 또 다른 전체적인 추세는 “개인 대 개인 간의 사역”, 소위 “상담”이란 것을 점점 더 강조해왔다는 것이다. 교회나 기독교 목사의 제일 첫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택한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맨 먼저 “ 내 증인”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 점은 그들에게 있어 제일 위대한 임무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다른 권능을 주려 하셨으나 그들의 주요 임무는 역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순절 날에 성령이 충만해지자 즉시 설교(전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일에 전무하리라.”우리는 말씀을 전하는 그것이 제일 되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에서 권위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제일 첫째의 임무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들 가운데서와 마찬가지로 디모데에게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을 환기시키고 있다. 교회는 사회단체도 정치적, 문화적, 공회도 아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그러므로 말씀전하는 일이 교회의 제1차적인 임무라는 진술에 대한 해명과 정당성은 그처럼 성경의 증거와 나의 진술을 지지해 주며 일치하는 교회의 역사적 증거에 기초하고 있다.
제 2 장 대체할 수 없는 말씀 증거
로이드 존스는 1장에서 말씀 증거하는 것이 교회와 교회 목사의 최우선적 임무이며 그 외의 모든 일은 이것을 보좌하며 매일매일 이 일을 수행하는 외적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명제를 전제해 놓았다. 이제 나는 좀 더 나아가서 교회역사를 통해 지지받고 예증 받았던 신약의 이 증거가 우리들로 하여금 말씀 증거의 우위성을 역설함에 대한 궁극적인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것이 신학적이라는 결론을 얻게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 전체의 메시지는 이 점을 역설하며 이 결론에 이르게끔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 말을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의미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인간의 진정한 필요와 성경에 나타나고 공언된 구원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교회의 최우선적 임무는 말씀을 가르치며 선포하여 사람의 참된 필요와 그에 대한 유일한 처방을 보여주는 일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말씀 증거의 중요성을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것은 이상의 문제들에 대해 오늘날의 거짓된 견해가 횡행하기 때문이라 본다.
인간의 참된 고통은 그가 하나님께 반역했고 그래서 부단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인간에 대한 성경의 진술이며 본래적인 인간성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이다. 사람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영적 세계에 대하여, 사람 위에 임한 모든 은혜로운 세력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 그리고 “사람은 눈이 멀었다”고 하는 사실이다(고후4:3-4).
사람의 고통이란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도다”라고 바울은 엡4:18절에서 말하고 있다. 성경적 인간관에 따르면 불행이나 참상, 육체적인 질고까지도 그리고 우리들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다 원죄와 아담의 타락의 결과이며 열매이다. 문제는 그것들이 원초적이고 궁극적인 질병의 결과요, 표증이요, 증거라는 데 있다.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곤경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결과인 무지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이것에 관해서 듣는 것이며, 자신의 처지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이것이 처리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교회와 목사의 고유한 임무라고 주장한다. 설교자(강도자)만이 이것을 할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오직 그만이 세상의 가장 큰 요구를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할 수 있는 곳은 교회뿐이며, 그것을 알게 하는 사람은 오직 설교자뿐이라는 것이다. 목사는 이 특별한 기능을 봉사하기 위해서 교회에서 별도로 세움을 입었다. 그리고 이 임무는 우선권이 주어지고 강조받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필요를 깨닫고 거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을 아는 순간, 이러한 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缺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된다.
세상에는 인류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기관이 있다. 내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의료기관, 정부, 다른 여러 교훈들과 정치기구, 심리학, 심지어는 타종교까지를 포함해서 말씀드리는 것이다. 이상의 것들은 모두 인간의 조건을 도와주어 일시적으로 생기 있게 하고, 또한 생활의 고통과 문제를 안전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좀 더 조화 있게 삶을 영위하도록 하고, 더 큰 규모로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그것들은 그런 일을 위해 세워졌으며 우리들은 거기에 대해 그것들은 전혀 쓸모없다고 말할 아무런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들은 사상들을 관찰해 보아야 하며 그것들이 선을 행할 수 있고 많은 유익을 준다는 것을 긍정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은 다소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원초적인 고통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
그 뿐 아니라 그것들이 그들 나름의 모든 일을 해냈을 때 또는 교회까지도 그 차원으로 내려가서 그 차원에서만 활동하여 일을 완수하였을 때라도 원초적인 고통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나는 교회의 최우선적인 임무가 사람을 교육하는 것도, 사람을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치료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한다 해도 그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서 사람을 교육하고 육체적, 심리적 치료가 사람을 선하게 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구원에 수반하는 것들이다. 교회가 그의 진정한 임무를 수행할 때 알게 모르게 사람들을 교육하고 지식과 정보를 주게 되며, 사람들을 행복으로 인도하고 또한 사람들을 본래 상태보다 훨씬 선하게 만들게 된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요지는 그런 것들이 교회의 제1차적인 목표는 아니다. 교회의 제1차적인 목적은 이런 것 중 어느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람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이끌어주고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교회가 1차적인 임무를 떠나서 다른 어떤 일을 할 때 동기야 아무리 순수하고 훌륭하다 할지라도 결과는 뻔하다.
현대의 사회 상태에 대한 대부분의 책임은 여러 방면으로 생각할 때 교회가 말씀 전파의 임무를 떠난 데 있다고 본다. 교회는 복음이 없는 도덕심과 윤리를 강론하려고 애써 왔다. 즉 경건 없는 도덕을 가르쳐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절대로 쓸모가 없다. 그 결과 교회는 자기의 진정한 임무를 포기해 버림으로 품위를 잃어버려 끝내 방임상태에 빠질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교회가 자기의 제1차적인 임무를 수행할 때 다른 것들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봉사적인 입장에서까지라도 말씀 전파를 우선적이고 중심적인 위치에서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이제 개인적인 문제의 영역으로 넘어가자. 사람들은 설교자가 강단에 서서 그들의 설교를 전하지만 그들 앞에는 개별적인 문제들과 고통을 안고 있는 개개인들이 앉아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주장은 설교는 좀 덜하고 대인적인 일과 상담, 대화를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고 맹렬하게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한 나의 태도는 여전히 설교를 최우선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참된 설교는 개인적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며 그럼으로써 그만큼 설교자의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교는 언제나 우선순위 여야 하며 어떤 것에도 자리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강력히 주장한다.
이 시대는 복음전파에 문을 활짝 열어준 바로 그 시대가 아닌가?
교회는 선교단체이다. 그리고 우리는 전교회가 복음과 복음진리, 복음의 말씀에 대한 증인의 신분이라는 이 개념을 포착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함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바로 그것은 그 자체 내에 하나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결국 말씀 전파자는 스스로를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위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 전도자는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에 모인 이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며 왜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여러분들은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 점을 아주 분명히 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현재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그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들 교회는 자기의 전도를 크게 도와주었다고 말한다.
데살로니가전서1:6절에서 사람들이 한 몸이 되어 있다는 바로 그 자체가 전도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며 이것은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이런 영향들은 순수한 지적인 논증보다 영적 의미에서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을 대할 때 그 사람은 정말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어떤 생각을 얻게 되고 저네들이야말로 수십 세기를 걸쳐 모든 세대와 모든 시대에 알려졌던 것의 현대적 모본이구나 하는 느낌을 갖는다. 이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 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그저 새 이론이나 새 교훈, 또는 새 사상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는 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사상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제 3 장 설교 내용과 전달행위
우리는 설교하는 일이 교회와 목회자의 최상의 임무라고 하는 전제를 확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에 대한 증거를 성경 안에서와 더 나아가 기독교회 역사로부터 도출해 내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다루는 주제의 성격으로 보아서 우리 신학이 이 점을 어떻게 고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신학적인 논증을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그 다음에 이 모든 것에 대한 몇몇의 반론을 생각해 보기 시작한 것이다. 첫째는 “시대가 변하지 않았는가?” 둘째는 “독서나 텔레비전 시청, 라디오 청취로써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가?”
이제 세 번째 반론으로서 “그 모든 것이 그룹토의에 의해서 더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는가? 구태여 설교하여야만 하는가? 이 설교가 대화, 소위 의견교환 등으로 대치될 수는 없는가? 설교가 끝날 무렵 더 많은 문제를 내놓고 교회 안에서 이제까지 그 설교를 들어온 모든 사람들과 설교한 목사가 대화를 나누어서는 안 될까?” 이 주장은 그 모든 것이 역시 텔레비전의 토론을 통해서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주장은 몇몇의 그리스도인과 몇몇의 비그리스도인들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토론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훌륭한 전도방법일 뿐 아니라 성경의 메시지를 인식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며, 그 방법이 현대에 있어서는 설교하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한다.
이 주장이 다른 세기보다 현대에 굉장히 큰 지지세력과 인기를 차지하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 숙고해 보도록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에 열거할 구체적인 이유들이다.
첫째는, 내가 보기에 그 자체로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으로 하나님은 토론되거나 논박될 분이 아니라는 점, 하나님은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계신 분이며 자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불신자는 그 점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것은 완벽한 진리이다.
둘째는, 이런 문제를 토론하는 데서 우리는 생의 가장 심각하고 가장 중대한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다루게 될 것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우리와 관계되는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도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셋째로, 영적으로 무식한 자연인, 즉 비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러한 토론이나 논쟁, 또는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이런 문제를 토론해 나갈 수 없다고 단언한다. 자연인이 영적인 일에 소경으로 어두운 상태에 있다는 이유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2:14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다. 그런 일들은 영적 진리의 영역에 속해 있으며, 영적 용어로 진술되었고 이미 영적이 된 마음으로라야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넷째는, 자연인이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겸손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비그리스도인과 무엇을 할 수 있기 전에 꼭 필요한 것이다.
진리는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조명을 통해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진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문제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거나 토론, 논쟁하고자 하는 모든 견해는 바로 그 복음 자체의 성격과 본질에 반대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나는 설교를 대신하려는 이 현대의 모든 대체물을 거절하며 오직 한 길만이 있을 뿐이라고 역설한다. 그 한 길은 사도 바울 자신이 아덴에서 채용한 길이다. 나는 이미 그 말씀을 인용한 적이 있다.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이 선언은 중요하다. 이것이 맨 처음으로 와야 한다. 이 선언이 행해지지 않고 또한 사람들이 일정한 정도의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유익한 대화란 있을 수 없다. 이 “선언”이야말로 우리 교회와 설교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설교자가 해야 하는 가장 우선하는 일이다.
그러면 설교란 무엇인가? 내가 설교라고 할 때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강단에 서서 말을 하는 사람과 청중석에 앉아서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합시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것이 무엇인가? 왜 그 사람이 설교단에 서는가? 그 설교자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사람은 그것을 통해 무엇을 하려고 의도하고 있는가? 그가 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내게 있어서 커다란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기교와 방법 그리고 “의사전달의 문제”로 성급하게 나아가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모든 잡다한 것과 변론에 빠지는 것은 이들 원초적인 문제들을 생각지 않거나·그 문제들을 접해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설교단에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큰 문제이며 모든 것을 통괄하는 문제이다.
어떠한 정의이든지 그것이 진정한 설교의 정의가 되려면 반드시 설교단에 선 사람은 거기서 하나님의 메시지, 곧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바울의 말을 원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신”이다. 바로 그 점이 그 사람의 신분이 무엇인가에 대한 저의이다. 그는 보냄을 받았으며 임명받은 사람이요, 그가 강단에 서 있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변자로서 거기 참석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함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가 거기 서 있는 것은 그들에게 그저 담화하거나 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결과를 산출하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함이다. 그저 그들의 한 부분, 즉 감정이나 마음이나 의지 중 한 부분에 감화를 끼치거나 어떤 하나의 행동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인을 다루는 것이다. 그의 설교는 바로 생명의 중심인 전인에 영향을 주는 데 목적이 있다.
설교에는 언제나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서 생사문제와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져야 한다. 설교는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무엇이다. 전인은 양측에다 관계된다. 만일 우리가 이 점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설교는 실패할 것이다.
설교란 전인을 다루는 것이고, 듣는 이가 감복하게 되어 이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루시고 계시며 자기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그 설교를 듣는 자 안에서 일어나고 무엇인가가 체험되며 그렇게 되어 설교가 전 인생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설교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이상과 같다. 그러나 이 설교자는 강단에서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로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표적이요 목표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기서 나는 설교의 두 가지 요소를 구분 지어야 한다.
첫째, 설교의 내용, 혹은 메시지 - 즉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둘째, 설교행위이다. 즉 “전달, 혹은 흔히 말하는 “전파”라고 하겠다. 이 “전파”란 말이 메시지의 전달행위하고 표현할 수 있는 두 번째 측면에만 한정되어 쓰여지지 않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메시지와, 메시지의 분배 혹은 메시지의 전달 사이에 진정한 구분을 강조하고 싶다.
로이드 존스는 한번 더 이 제목을 두 항목으로 나눈다. 설교 자체로서 맨 먼저 내용, 즉 메시지를 생각한다. 둘째, 그 내용이나 메시지에 주어진 형태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구별이다. 설교내용, 곧 메시지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1-6). 이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 말씀이 그 점을 극적으로 지적해 준다. 설교내용은 신약에서 “말씀”이라 칭한 것이다. “말씀을 강론하다”, “복음을 전하다” 또 그것을 해석하면 “성경의 메시지”를 의미한다.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받은 바요 가지고 있는 바다 -“내게 있는 것.” 나는 이것을 받았고 그것은 내게 맡긴 바 되었다. 나는 내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나타내지 않으며,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생각하고 추측하는 것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받은 바를 전해준다. 나는 매개체요 도구요 대리자이다.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두 가지 요소 항목으로 나뉜다.
첫째, 구원의 메시지라 할 수 있는 케리그마로서 전도설교를 결정하는 것이다.
둘째, 교훈적인 면으로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정립시켜 주는 것인 디다케, 즉 성도의 덕성함양이다. 이것은 우리가 설교를 준비할 때 하나의 중요한 지배요인이 되어야 한다.
첫째, 구원의 메시지, 복음전도 설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데살로니가전서의 단 두 절 말씀 속에서 이에 대한 완변한 요약이 있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1:9-10).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행20:17-21)이다.
설교형식은 맨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선언한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이름 있는 전도설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사심과 능력과 영원에 대한 선언으로 이어져 나간다. 여러분은 신약 어디에서나 그 점을 발견하실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바울이 아덴에서 행한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알리리라.”누구를? “하나님을”우상과 대조하여 하나님에 대해 설파했고 우상의 허무함과 아무것도 아님을 파헤쳤다.
그 다음 율법을 말하게 된다.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의 율법을 얘기하게끔 한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 관계, 이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여 그들을 회개하도록 인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 다음에 오직 유일하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구원의 메시지이다. 그것이 소위 전도설교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요한복음 3:16에 나와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또 다른 면이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을 견고히 세워주는 교훈”이다. 이것을 두 항목으로 나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더욱 체험적인 면에 치중한 것과 순전히 교화적인 설교를 뜻하는 것이다.
모든 설교는 사실상 최소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눠질 수 있다. 원초적으로 전도적인 설교는 일주일에 최소한 한 번은 있어야 한다. 주로 체험적인 것으로서 교훈을 주는 설교는 주로 주일 아침에 전했다. 그리고 보다 순수한 교훈적인 설교가 있는데, 나 개인적으로 볼 때 주간의 어느한 날 밤을 택하여 그 설교를 했다. 이 구분들이 너무 엄격하게 그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설교자가 메시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편적인 안내역으로서는 그 세 가지 구분이 좋다고 생각한다. 불신자들에겐 전도설교를, 신자에 대해 체험적인 면을 심어줄 때는 그 다음을, 직접적으로 교화적이고 교훈적인 식으로는 세 번째 경우를 적용하면 좋으리라 본다.
제 4 장 설교의 형식
세 가지 유형들 간의 상호 관계성은 어떻게 유지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 길은 신학과 설교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로이드 존서는 설교란 언제나 신학적이어야 하며 신학적인 토대를 보편적인 명제로 함을 전재해 둔다. 어떤 본문을 따로 택하여 설교할 때라든지 본문들을 서로 분리한 채로 다룰 때는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물론 그 이유는 자신도 모르게 모순된 일을 범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본문을 두고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다른 본문과 전체적인 진리에 관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본문을 취급하게 될 때 첫 번째 설교에서 말한 바와 모순되는 것을 말할 수가 있다. 그것을 피하고 이 세 가지 유형의 설교 사이에 합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길은 언제나 설교가 신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신학적이어야 하는 따위의 설교는 없다.
때로는 아니 오늘날 가장 흔하게 비신학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설교유형은 전도설교이다. 나는 전도설교야말로 여러 방면에서 볼 때 덜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어느 것보다 더욱더 신학적이어야 함을 역설할 용의가 있다. 여러분이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왜 여러분은 그들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부르짖는가? 인간의 교리, 타락과, 죄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를 다루지 않고서 회개를 정당하게 다룰 수가 없다. 그 다음 여러분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자신들을 그에게 드리라고 명할 때 그리스도가 누구인줄도 모르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으며 무슨 근거로 그들이 그에게 올 것을 초청하는가? 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모두 신학적이라는 것, 신학적이지 않은 복음전도는 결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복음전도가 아니다. 그러한 신학이 없는 전도가 결심을 요청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종교를 가지라고 요망할 수도 있다.
또한 하나의 보다 나은 생활을 할 것과 어떤 심리적인 유익을 끼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정의한다 할지라도 기독교적인 전도로 간주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커다란 신학적 원리를 떠나서 전도할 참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유형의 설교는 반드시 신학적이어야 하며 전도설교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동시에 설교가 신학이나 신학의 어떤 국면을 강의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함은 매우 중대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란 반드시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또 그것은 신학강의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설교와 신학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설교자란 전체적인 성경 메시지를 포착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 메시지는 물론 통일성이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자는 조직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신학에 매우 정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설교자에게 있어서 신학을 갖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며 또한 조직 신학을 알고 그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것만큼 더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성경에서 추려낸 진리의 뼈대인 이 조직신학은 설교자의 설교배경을 이루고 설교의 영향을 조정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어느 특정한 성경본문이나 말씀에서 나오는 각 메시지는 반드시 언제나 이 진리의 총체의 일부분이거나 한 국면이어야 한다. 설교란 결코 따로 떨어진 것이나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어느 특정 본문 안에 있는 교리는 보다 큰 전체 진리나 전체 신앙의 일부분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성경으로 성경을 비추어 본다”는 말의 의미이다. 우리는 어느 한 본문을 따로 고립시켜 다루어서는 안 된다. 한 편의 설교를 위한 우리의 모든 준비는 바로 이 조직신학을 배경으로 통제를 받아야 한다.
나의 취지는 우리의 제1차적인 요구란 이 전체 메시지, 곧 이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전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특정한 메시지나 부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설교해야지 복음에 관하여 설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임무란 복음을 학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는 복음을 분석할 수 있고 복음의 부분들을 보여줄 수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를 보여줄 수 있다.
설교에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원리를 말하는 면과 그 원리를 상황에 적용시켜 주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항상 전체를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한다. 비록 그가 그 순간에 어떤 개별적인 문제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할지라도 그러하다.
이제 우리는 설교의 형식을 알아보자. 내 견해로는 이 문제가 우리가 다루어야 할 문제 중에서 최고의 난제가 아닌가 한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이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설교란 수필이 아니다. 수필은 읽도록 쓰여진 것이고 설교는 맨 먼저 말로 전해질 것과 들을 것을 의도한 것이다. 수필에는 문학적인 격조와 독특한 형식이 있긴 하지만 설교에 있는 제일 되는 절실한 요구가 하나도 없다.
수필은 반복은 금물이다. 그러나 설교는 반복하는 것이 좋다. 반복은 가르침과 설교의 진수가 된다. 수필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사념들을 다루어야 하며 대체로 그것들을 밝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은 우아하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 수필은 관심과 흥미와 읽은 즐거움을 가지게 하는 문학의 한 장르이다. 그러나 설교는 그런 것이 아니다.
둘째로, 설교하는 것이 강의하는 것과 혼동되지 않아야 한다. 강의는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여 이 특정 주제에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주게 된다. 설교의 호소는 거의 전부 마음을 향한 것이다. 강의의 목적은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실들을 진술하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강의의 제일 되는 목적이요 기능이다.
설교는 교리와 테마를 내포하고 있는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바로 그 교리는 본문의 특정한 배경 가운데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설교는 항상 해석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해 둔다. 설교란 주석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요 단순히 한 절이나 문구나 문단의 의미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근본적인 취지는 설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란 규정된 형식을 가지는데 이 형식이 강해로 하여금 설교가 되게 한다.
설교는 강해를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반드시 강해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과 그 메시지를 나타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언제고 우리가 말하는 것이 성경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이 언제나 그렇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바로 그 성경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의 원본이요 메시지를 받은 원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강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설교자는 땀과 노동을 필요로 한다. 설교는 준비해야 한다. 그가 어떻게 설교를 행하든 그 설교는 완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설교자가 맨 처음 생각해야 할 점이다. 이 문제는 오직 시작에 불과하며 반밖에는 되지 않는다.
제 5 장 설교행위
이제 우리는 “설교내용의 전달”, 혹은 “설교행위”, 또는 설교내용과 구별되어 설교 그 자체로 불리워지는 것으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야겠다. 이 문제가 본서의 두 번째로 큰 국면이다. 먼저 설교한다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에 대한 일반적인 윤곽을 말씀드리고, 다음에 좀더 세분화된 고찰로 나아가자. 구체적인 것을 논의하기 전에 명확한 개관을 파악하는 것이 좋다.
이제 전달하는 일, 때로는 설교로 불리워지는 일을 규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확실히 그것은 법칙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설교를 하나의 훈련이나 일종의 규제나 금지하는 일로 보아 버린다. 그렇지 않다. 난제는 그것에 대한 정의를 실제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설교행위란 들음으로써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것에 대해 어떤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이상 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참된 설교를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점들이 있다.
첫째, 설교자의 전인적 품격이 반드시 수반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점은 필립 브룩스의 유명한 정의 가운데서 나타난 것이다. “설교는 설교자의 품격을 통해서 존재되는 진리이다.” 그 정의는 옳다. 설교자의 모든 기능이 설교하는 일에 관계되며 전인이 관계된다는 것이다. 나는 신체까지도 설교에 수반된다고 생각한다. 전인격이 동원되어야 한다. 제스처, 행동, 태도, 등등.
둘째, 권위로서 청중을 압도하고 진행해 나가는 지각력이다. 설교자는 결코 변명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마치 회중들의 양해를 얻어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결코 안 된다. 어떤 추측이나 생각을 실험삼아 말하는 것이 되어도 안 된다. 그것은 정말로 설교자가 취할 자세가 아니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확실한 일을 선언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사명을 띠고 권위로 서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보냄을 받은 사자로서 회중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분명히 이것은 자기 확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설교자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이다.
셋째, 자연스러움의 요소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 점에 대해 매우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설교내용이 앞에서 말한 방식대로 주의 깊게 준비되었다 할지라도 설교자는 반드시 설교를 수행할 때 설교를 전하는 데 있어서 자유스러워야 한다. 자기가 준비한 것에 너무 매이지 않아야 한다. 이 점은 죽고 사는 문제처럼 중대한 문제이다. 이 점은 설교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진수가 되는 정곡이다. 나는 그저 설교단에 원고를 가지고 올라가는 문제만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원고를 가지고 있지 않고도 얽매일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설교자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자유로움은 순간적인 영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이다. 설교하는 일이란 성령의 감화와 능력을 뒷받침한 행위이고 설교준비란 것이 설교내용의 준비를 끝마쳤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점을 강조해야 한다. 주목할 만한 일들 중의 하나는 설교자가 한 말 중에서 가장 훌륭한 말이 미리 생각하지도 않고 설교준비를 할 때까지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실제로 설교를 하는 동안에 얻은 말이라는 것을 흔히 발견하게 된다.
넷째, 설교자가 말하는 동안 어느 의미에서는 회중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끌어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중가운데는 영적인 사람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 기회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설교에는 상호교환의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이 점은 수필과 강좌가 설교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길이다. 자기의 수필을 낭독하는 사람은 자기의 청중들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 사람 앞에 있는 것은 쓰여진 것이 전부이다. 거기에는 새롭거나 창조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어떤 주고받는 일도 없다. 그러나 설교자가 - 비록 아주 조심스럽게 준비를 하였다 할지라도 - 이 영적 자유의 요소 때문에 아직 회중으로부터 어떤 것을 받을 수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다. 상호작용과 행동, 반응이 있게 되고, 종종 이것은 아주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 자유로움의 요소는 아주 중요하다. 설교는 언제나 성령 - 그의 능력과 지배 - 아래에서 행해져야 한다. 또한 설교자는 무엇이 일어날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항상 자유로우시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설교를 준비할 때 도우셨던 성령께서 설교를 행하는 동안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도우시며 셜교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열어 보여 주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다섯째, “진지함”의 요소이다. 설교자는 반드시 진지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결코 설교한다는 것이 가볍거나 피상적인 또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설교자란 항상 그가 강단에 나타나는 순간에도 거기서 행하는 일에 대한 심각함의 인상을 창조하고 풍겨야 한다. 설교자는 반듯이 생기에 넘쳐 있어야 한다. 박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진지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결코 흐리멍텅하거나 지루해서는 안 된다.
여섯째, 열심, 열정감이다. 열심이라 말할 때 그 의미는 설교자는 반드시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자기 스스로 붙잡힘을 당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자기가 그것에 붙잡히지 못하였으면 아무도 그 진리에 붙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점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설교자는 반드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붙잡힘을 당하고 끌려있다는 사실로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한다. 그는 그 문제로 충만해져서 그것을 나눠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야 한다. 그는 스스로 그것으로 너무 감동되고 감격한 나머지 이것을 다른 사람들이 나눠갖기를 갈망해야 한다. 설교자는 회중들을 걱정하는 사람이다. 그들을 돕는 것을 간절히 소원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힘과 열심과 뚜렷한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진리에서 이탈된 것처럼 보이면서 그 자체로는 아주 훌륭하며 진실하고 탁월할지도 모를 몇몇 일을 말하는 것만으로 족하는 설교자는 결단코 설교자가 아니다.
설교자는 결코 냉담해서는 안 된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거의 옳고 정말 거의 완벽하다. 그러나 그것이 인상적이지 않고 살아있지 못하며 차갑고 감동이 없는 것은 자기 스스로 감동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 만일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것으로 감동을 받기 마련이다.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뜨거움을 유발한다. 사도 바울은 “눈물로써”말씀을 전파했노라고 말합니다.
끝으로 로이드 존스는 말씀의 능력에 대해 언급한다. 능력이 없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결국 참된 설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설교는 사람이 지껄여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다. 그는 성령의 세력 아래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에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하였다”고 한 말이 그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1:5에도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되어 있다. 참된 설교에는 바로 그 진수가 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을 압축한다면 참된 설교는 이 두 요소, 즉 설교내용과 설교를 전하는 행위가 많은 비율로 결합되어 이루어진다. 이 행위는 설교내용에 첨가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른 설교이다. 두 가지 다 강조되어야 한다.
설교의 주요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존전에 있다는 생각을 주는 것이다.
손웰 자신이 설교에 대해 무어라고 말했는지 설교자인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들어 보라.
“설교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며 설교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큰 일이다. 효과적인 설교내용들은 연구와 훈련, 기도, 특별히 성령의 감동의 필연적 열매이다. 그 설교들은 전달을 위해 의도된 설교를 구성하는 모든 다른 부분의 특징적인 장점들과 결합한다. 그것은 믿음의 성실성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하나님의 인애하심을 힙입어 선포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여야 한다. 설교 내용에만 매달려 보라. 그러면 세상에 보잘것없는 설교밖에는 안 된다. 우리가 설교를 직업적으로 전하는 많은 목사들의 자질을 고려해 볼 때, 세상에서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것이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은혜와 신적 능력에 속한 신비이다. 직업적인 방식으로 일을 수행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한다. 나는 내 생애에 있어서 한 편의 설교도 작성하지 않았다. 다소 전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절망하기 시작한다. 주께서 여러분에게 더 많은 지식과 은혜를 주시고 목적에 성실할 수 있게 하시기를 원한다.”
제 6 장 설교자
우리는 말씀 증거의 모든 중요성을 보여 주었고 말씀 증거하는 일이 교회의 최우선적인 과업이요 임무라는 것을 알아본 다음에 설교하는 일의 양대 국면을 계속해서 숙고해 왔다. -즉 설교내용과 실제 설교내용의 전파행위의 국면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다음에 논리적으로 오는 물음은 “누가 이런 일을 하는가? 누가 설교하는 자인가?” 또는 성경에 있는 대로 하면 “누가 이런 일을 감당하겠느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의한 바대로 이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리고 특별히 오늘날엔 교회가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고 “신조”없는 기독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내에 믿는 사람 사이에서라도 이 설교하는 일을 해 낼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던져질 필요가 있다.
내가 전제하려고 하는 제1원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을 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남자 기독교인 가운데서라도 모두 설교하는 일에 종사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자 기독교인들에겐 그 비율이 더욱 낮다. 달리 말한다면 소위 “평신도 설교”라는 것을 숙고해 보아야 한다. 나는 이것이 설교에 대한 비성경적인 견해라고 주장한다. 거기에는 물론 이것이 필요할지 모르는 예외적인 환경이 있긴 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실제적으로 “평신도 설교”인가에 관해서는 의문을 가진다. 내가 예외적인 환경이라고 하는 뜻은 교회의 상태나 수준에 따라 온전한 시간을 목회에 바치도록 (특별히 설교를 하는 데) 한 사람을 지원할 처지가 아닐 때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예외적인 처지는 목회의 소명을 느끼고 전 생애를 거기에 바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으나 내가 지적한 환경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이 문제를 소명에 대한 다음의 질문의 차원에서 살펴보자. 설교자의 직업이 무엇인가? 여기 분명히 설교자는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처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다. 그 점이 기본적이고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는 그것 이상이다. 또 다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소명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가 여기에서 문제가 된다. 한 설교자는 설교하기로 결심한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하기로 결심하지 못한다. 그는 심지어 설교하는 일을 소명으로 보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
“내가 설교자(전도자)로 부름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나는 몇 가지의 확실한 시금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명은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형태로 출발한다. 즉 어떤 압력이 자기의 심령에 가해지는 것 같은 것을 느낌을 받게 되고 영계에 어떤 혼란이 일어나는 것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마음이 전도한다는 모든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그 사람은 그것을 일부러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고의로 그 가능성을 검토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여러번 검토하고서 그는 이것에 응하기로 결정한 것다. 그것은 고의로 된 일이 아니다. 이것이 설교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다루고 계시는 것이다. 그의 성령으로 그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는 무엇이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나타나게 되고 이런 식으로 줄곧 거의 강권적으로 역사한다. 그런 다음에 영계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 그 사람에게 말하며 질문들을 던지는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통해서 확실하게 되고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이게 된다. 사람들이 설교자로 부름 받는 것은 흔히 이러한 방식이다.
진정한 소명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 즉 그들의 타락을 뼈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하며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말하고 구원의 길을 알려 주어야겠다는 소원을 포함하게 된다. 이것이 소명의 진수 부분이다.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설교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은 이 압도적인 소명감과 강제적 강박의식밖에는 없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이 사람을 설교하도록 강단으로 밀어 넣는 제일의 일이다. 나는 이것도 점검되고 확증해 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인다. 이것은 교회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한 사람이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기 전에 그의 인품이 교회에 의해 확증되어야 한다. 반드시 그것은 교회에 의해서 입증되어야 한다. 더욱 일반적인 경우는 소명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소명 받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것을 살펴보고 상황을 조정하는 것은 교회의 임무이다.
설교자는 반드시 경건한 자라야 한다. 그리고 그는 지혜로운 자여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이것은 가장 중요한 점이다. 재능의 문제를 맨 처음에 놓는 경향은 내가 보기에는 현대교회의 비극 중 하나이다.
그 다음에 거기에다가 말의 재능을 첨가하려 한다. 설교자란 어떤 사람인가? 분명히 그는 말하는 사람이다. 그는 일차적으로 책을 쓰는 사람이나 수필가나 문인이 아니다. 우선적으로 그는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 지망자가 말하는 은사를 받지 않았다면 다른 어떤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설교자는 될 수가 없다.
이상은 소명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을 교회가 테스트하는 방식이다. 내가 말하는 의도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 자신을 통해서나 교회의 소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둘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은 같은 분이다. 그 둘 사이의 의견 상의 일치를 보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소명이라고 가정해 보는 것이 옳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알아낼 수는 없다. 또한 단지 교회의 압력으로도 목회에 부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제풀에 우쭐대는 사람들을 안다. 역시 목회에 강제로 끌려들게 된 경우도 많이 안다. 그 사람들은 목회에 종사할 의사가 전혀 없었는데도 교회 측에서 잘못 가르침으로써 일어나는 경우이다. 반드시 두 가지 일이 보조를 맞춰야 한다.
우리는 이제 신학공부 문제로 나아가 보자. 이것은 이미 우리가 말해 오고 있는 것을 살펴볼 때 명백하다. 그저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서 성경 신학의 진수를 얻어내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립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다. 설교자는 자기의 모든 설교를 그것의 통제를 받게 하는 데 아주 익숙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교회사 연구를 놓으려 한다. 여기서 나는 이단에 빠질 위험성을 배우는 것이 중요함을 특별히 강조하려 한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린다면 설교 학이다. 이것은 내게 있어서 거의 증오거리에 가깝다. 설교 작성의 기술, 설교예화의 기술 등의 제목을 붙인 책들이 많이 있다. 내가 볼 때 그것은 매춘행위이다. 설교하는 일 , 설교행위가 무엇이라고 말씀드렸는가? 여기에 대해서 오직 한 가지밖에는 말할 수 없다. 설교하는 일이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설교자는 낳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절대적이다.
그러면 주요 과제는 무엇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영혼에 대한 사랑이요, 진리에 대한 앎이요,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이다. 이것이 설교자를 만드는 것이다. 만일 설교자가 그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하나님을 위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진리를 안다면, 그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설교(전도)할 것이다. 그것이 카다란 문제이다.
제 7 장 회중
우리는 이미 설교자와 그의 소명과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일반적으로 살펴 보았다. 이제는 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살펴보아야 함이 역시 중요한 일로 본다. 결국은 설교자는 그들에게 설교하고 있다. 설교단에 서서 그저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들 중 어떤 것을 소리 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성경의 교훈에 대한 일종의 신학적인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 서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거기에 있는 것은 첫째로 그의 설교와 그가 해야 하는 것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회중석과 강단 사이의 관련문제를 생각게 한다. 즉 설교를 듣는 사람과 설교를 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성 문제이다. 분명히 회중석과 강단 사이의 관계는 설교자의 수련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그 점은 점점 명백하게 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새로운 움직임은 회중석에 커다란 강조점을 두고 있다. 과거에는 회중석과 거의 분리하여 거의 별도로 강단에만 너무 지나친 강조를 하는 경향성이 있었다. 그리고 회중석에 있는 사람들은 설교자를 거의 우상에 가깝도록 존중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너무 짙었다.
또 다른 형태는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적 전문용어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칭의나 성화나 영화 같은 용어는 그들에게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 지식층으로 가보면 이렇다. 그들은 이제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진화론과 3차원 세계를 무색케 하는 완전한 과학적 전망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성경만이 구원과 신앙적 체험과 삶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명백히 입증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성경과 자연이 서로 보완적이고 동등한 계시의 권위 있는 모양임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 사회의 현대 지식인들을 방해하게 되어 그가 복음을 듣기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에 행했던 바와 같은 식의 세상과 사람 타락과 기적, 역사 안에 있는 초자연적 역사 등에 관한 말을 그만두고 종교적인 메시지에만 관심을 집중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점점 강조되고 있는 또 다른 점은 현대인, 즉 이 지식적인 타입의 현대인은 너무 현학적이라서 현대문학이나 현대예술이나 현대의상, 현대소설 등의 차원에서 문제를 생각하므로 우리가 그들에게 아주 친밀한 이러한 어휘로 말씀을 전달할 수 없다면 그들에게 어떤 감화를 끼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사상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또 다른 방식은 현대의 현학적인 사람은 교위적인 주장에 특별히 염증을 느끼고 있어 옛날의 교의적 설교형태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현대인은 학식 있는 사람으로 “말로 압도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상으로 나는 그 입장의 개관과 그들이 말하는 가장 일반적인 투를 말씀드렸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회중이 강단을 조정하는 것을 어느 범위까지입니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이상의 새로운 사상은 전적으로 그릇됨을 주장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이다. 나는 개괄적으로 , 또는 보다 특정한 범주로 나누어서 대답해 드리도록 하겠다. 먼저 일반적으로 그 입장은 그릇되다. 왜냐하면 사실과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틀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황을 이해하는 전체적인 심리가 잘못되어 있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 앞에서 우리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다루는 것이다. 나는 내 마음속에 어떤 이상적인 설교자상을 가지고 강단에 서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3백 년 전의 청교도 설교자, 혹은 100여년 전의 설교자상을 가지고 설교단에 서거나 마치 아직도 그런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손해를 볼 것이다. 그것은 현대의 교인들에게 혐오감을 일으킬 것이다. 그것은 설교를 듣기가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그것은 메시지의 주요임무가 아니다.
나는 과거의 설교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을 그대로 모방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진리에 대한 그들의 지식과 그들의 성경해석으로도 도움을 얻는다. 그러나 단지 그들의 설교에 우연하게 있었던 일, 지나가 버리고 임시적인, 또한 단순한 습관이나 당시의 유행이었던 일-나는 그 일들을 고수하지 않아야 하며 그것들을 그냥 진리 자체인 것처럼 중요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진리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통주의 이다.
두 번째로, 우리의 방법들은 언제나 우리의 메시지와 일치하며 조화되어야지 어긋나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다시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아주 진지하고 순진하고 정직하고 모든 동기가 말할 것도 없이 선하고 그의 관심이란 온통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인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점을 떠나서 사람들이 메시지와 접촉하게 하고 메시지를 더 쉽게 믿도록 하려는 그들의 욕구에서 내가 자주 메시지 자체와 상충된다고 암시했던 일들을 저지르곤 한다. 방법이 메시지와 충돌되는 점까지는 가지 마십시오.
이것은 성경의 원리 면에도 해당될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에 있어서도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까지 하다. 현대적인 방법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애처로울 정도로 인간심리에 대한 무지이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은 세상이 우리가 다르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결국 당신들 모두가 세상과 아주 유사하여 거의 다를 바가 없고 다만 한 가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이 생각-이것은 신학상으로 뿐 아니라 심리학상에 있어서도 -이것은 기본적으로 틀린 것이다.
내가 끝으로 덧붙일 것은 이 현대적 사고방식에 있어서 진정한 난제는 성령과 그의 능력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심리학적 이해에 있어서나 사람들을 여러 그룹으로 즉 심리학적, 문학적, 민족적 차원 등으로 나누는 데 전문가가 되어 한 사람에게 옳은 것이 모든 사람에게는 옳지 않다는 결과에 이룹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복음을 부정하는 죄를 짓게 된다.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야만인이나 미개인이나 종이나 자유자가 없다. 오직 한 복음만이 있을 뿐이다. ” 그것은 모든 세상을 위하여 모든 인간을 위한다.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는 진리를 회피하고 때로는 메시지를 외면하고 우리에게 전하라는 특권이 부여된 메시지와 일치되지도 조화되지도 않는 방법들을 정당화하는 데까지 현대의 심리학상 이론을 받아들이는 중대한 오류에 빠져 버렸다.
제 8 장 메시지의 성격
회중석과 강단, 혹은 청중과 설교자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아마도 최대로 중요한 것에 속할 것이다. 이 문제를 함의하는 고린도전서 9장에서 사도의 교훈을 살펴보았으므로 나는 하나의 결론을 내려야 겠다.
나는 결코 회중석이 강단을 좌우하거나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해 놓으려 한다. 현시점에서 이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럼에도 설교자가 청중의 상태와 지위를 평가하여 그것을 메시지 준비와 전달과정에서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함을 동등하게 강조하려 한다. 내가 그 점을 어떻게 지적하는지를 유의하십시오. 청중들이 조장한다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청중의 상태와 위치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 주장을 함에 있어서 성경적인 뒷받침을 제시한다. 고전 3장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히5:11-14절에 있는 예이다.
자기의 설교를 들을 회중의 수준을 평가하는 일은 설교자의 의무이며 직무임과 동시에 그 평가가 참되고 정확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강조할 필요조차 없는 분명한 일이다. 위험은 설교단이나 회중석에서 다 일어난다. 설교단에서 회중석을 잘못 평가할 수도 있고 회중석이 자신들을 잘못 평가할 수 있다. 나는 두 가지 오류가 분명하게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들의 현재 상태를 설명하고 현재 상태에 빠진 주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설교자가 직면하는 주요 위험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모든 이들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인 모든 이들이 그 점으로 보아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일 것이라고 가정하는 일이다. 이것은 내가 볼 때 사활을 좌우하는 가장 치명적인 실패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흔한 일 중의 하나이다. 교회의 구성원인 이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인일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위험스럽고 잘못된 것은 다음 이유다. 만일 그렇게 가정한다면 모든 예배에 기성신자에게 적합하게 설교하는 방향으로 치우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의 설교는 항상 교훈적 이여서 복음전도적인 요소와 요점은 무시되어 아마 거의 완전히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착각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거짓된 판단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지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말씀의 능력 아래로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그들은 한 번도 말씀의 능력을 체험한 적이 없고 순전히 지적인 교훈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한 번도 말씀의 능력을 접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으로 회개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교회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의 능력 아래로 인도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복음이란 그저 단지 지적인 것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가령 우리의 설교가 언제나 강해나 하고 덕성을 고취하고 교훈만을 주는 것이라고 하면 딱딱하고 냉랭한 교인들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거칠고 자기만족에 빠지고 마는 교인들만을 낼 것이다. 그것보다 더 쉽게 바리새인 회중을 만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러한 잘못된 태도의 좀 더 심한 결과는 매주 마다 그런 사람들만이 참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일에 한번 참석하는 것으로 족하다. 더 이상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다. 그들은 주로 주일 오전 예배만 참석한다. 그리고 그들은 소위 “1회 교인”들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정말 비통한 일이다. 내가 강조하려는 첫째 요점은 그것이 설교자나 회중들 자신이 회중들을 그릇되이 평가한 데서 근원되었다는 것이다. 설교자고 회중석이고 청중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진단에 동조함으로 회중들은 자기들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게 할 만한 형태의 설교를 결코 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수정하는 길은 내가 말했듯이 일주일에 한 번씩은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전도예배려니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바로 그 핵심이다.
그 다음에는 반드시 다음 질문으로 연결시켜야 한다. 왜 어떤 그리스도인이고 자기가 충분히 얻을 수 있는 만큼을 갈망하지 않는가? 이것은 분명 아주 이상한 일이다. 그것이 비성경적임은 틀림이 없다. 그들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연극을 볼 때는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너무 짧아 탈이지요. 축구나 야구, 또는 그들을 흥미롭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안타깝게도 너무 빨리 끝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 예배드리는 데는 그와 다릅니까? 이 질문은 가장 심각한 질문이다. 다른 일을 할 때는 시간을 재지 않는다. 그것을 즐기고 좋아해서 더욱 더 길었으면 한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의 경우엔 같지 않습니까? 다시 나는 단지 그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단정해 버리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설교시간을 제한하려 한다면 자기네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거나 영적 생활에 궁핍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고백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그렇게 자주 말씀을 듣는 열의가 없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들은 흔히 설교자에게 자기들의 허락을 받고 설교해야 하며 설교가 짧아야 한다는 조건하에서만 허락을 해 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문자 그대로 육신적인 의미에서 설교를 들어주길 포기한 사람들까지도 있다.
신약의 설교자들인 사도들은 집을 심방하면서 예배에 참석하라고 사람들을 강권하지 않았다. 사도들에게 직면되는 어려움은 그들을 집으로 보내는 일이다. 그들은 나머지 시간을 이런 분위기로 있기를 원했다. 그들은 받으면 받을수록 더 많이 받기를 원했다. “날마다” “힘쓰니라” 여러분은 이 말씀을 떼내 버릴 수 없다. 이것은 모든 개혁시대나 부흥운동시대에 있어서 교회의 특징이다.
내가 말하는 의도는 사람들이 예배당에 나오지 않는 것은 그릇된 설교형태를 유발하는 그릇된 평가 때문이라는 것이다. 설교가 나쁘든지 듣는 사람이 틀렸든지 간에 둘 다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는 최소한도의 권면을 하려 한다. 즉 만일 그들이 교회의 모든 예배에 참석하는데 이의가 없는지 물어보고 그렇다면 그들은 거기에 커다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어쨌든 인식해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들을 생각하는 것을 그만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의무감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뿐이고 자기들의 의무를 이행했기 때문에 좀 낫다고 느끼는 것뿐이다. 예배에 대한 그런 태도는 분명히 절로 풍겨 나와 방문자들이 이런 것을 느끼고는 정규적인 참석자들의 태도가 이렇다면 이곳에도 별것이 없구나 하는 결론을 내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하면 거기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느끼기 때문에 사람들이 참석하는 예배당에 들어올 때 아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정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것이 그들을 진리의 지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생각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말하는 바는 설교단에서 필요한 것은 권위, 위대한 권위라는 것이다. 회중석은 메시지나 방법을 결정하거나 설교단을 지시하는 위치에 있지 못하다. 나는 그 점을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한다. 설교단이 회중석을 평가하되 권위를 가지고 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 최대로 필요한 것은 설교자에게 이 권위를 회복시켜 주는 일이다.
제 9 장 설교자의 준비
설교자가 매주 마다 실제적으로 어떻게 준비하는가에 대한 전문적인 문제를 다룬다.
설교자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준비과정이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전제로 그가 항상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이다. 그가 항상 책상에 앉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준비하고 있다. 영적인 일에는 휴일 같은 것이 없다. 그는 그의 정상적인 업무로부터 떠나있는 시간이나 휴가를 가진다. 그러나 그의 소명의 본질과 성격 때문에 그는 자기의 사역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그가 행하는 일이나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이 위대한 사역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모든 일은 그의 준비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어떤 특수화된 문제로 시선을 돌림에 있어서 설교자에게 제일되고 가장 중요한 일은 그의 설교(내용)가 아니라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다. 목회로 어느 정도 오랜 경험이 있는 자는 이에 관해서 발 벗고 나서서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질 것이다. 그것은 경험으로 배워야만 한다. 처음에는 생각하기를 설교를 준비하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의 준비이다.
어느 의미에서 설교자는 한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에 관해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제일의 대법칙은 그의 생활에서 아주 주의를 기울이는 어떤 일반적인 훈련을 쌓아야 한다. 목사의 생활 속엔 많은 위험들이 있다. 전문 직업이나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달리 집무시간이나 다른 규칙이나 그 자신이 결정한 것 외의 다른 조건에 꼭 얽매일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그가 곧 자기의 주인이다. 나는 일반 사람들과 비요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가 자기의 주인이 아니다. 그러나 목사의 생활과 다른 사람과의 생활 사이에는 이러한 명백한 구분이 있다. 일들이 자기 장중에 있기 때문에 아주 특수한 모양으로 자기에게 도전해 오는 어떤 심각한 위험과 시험이 있다는 것을 목사는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해가 갈수록 더욱 더 느끼는 것은 설교자를 위한 대규칙 중 하나는 아침을 보전하는 것이다. 이 법칙을 절대적인 것으로 삼으라. 계획표를 만들어서 아침에 전화로 방해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
나는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다음 사항에 있어서 보다 더 실패하기가 쉽다고 생각한다. 즉 기도하는 일이다. 기도는 설교자의 생활에 절대적으로 중차대하다. 교회사를 통해 위대했던 설교자들의 전기나 자서전을 읽어보라. 그러면 여러분은 그들 생애의 두드러진 특징은 언제나 기도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위대한 기도의 용사들이었다. 그리고 기도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사람들은 기도가 절대적인 요건이며 하면 할수록 기도할 거리가 더 많아진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모든 입장에서 볼 때 목사, 즉 설교자는 기도의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은 목회서신이나 다른 곳에서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했듯이 그것은 오랜 교회역사에서 풍부하게 증명이 되었다. 특히 걸출한 설교자들의 생애에서 그렇다.
설교자의 생활에 그 다음 문제되는 중요한 것은 성경을 읽는 문제이다. 설교자가 매일 정규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함을 분명하다. 내 주요 좌우명은 이렇다. “성경을 조직적으로 읽으라” 되는 대로 성경을 읽는 것은 위험하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들은 자기가 애호하는 구절만을 읽으려는 경향이 있다. 성경을 전체로 읽는 것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아무리 강하게 강조한다고 해도 지나칠 수 없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모든 설교자들은 최소한 일년에 한 번 정도는 전체 성경을 완전히 통독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을 더욱더 강하게 강조한다. 설교자가 빠질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습관 중 하나는 설교본문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위험하다. 그것은 힘이 닿는 데까지 막아야 하고 물리쳐야 하는 일이다. 설교본문을 찾으려고 성경을 읽지 마십시오. 성경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에 제공하신 양식이기 때문에 ,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편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이 생명의 떡이요 여러분의 영혼의 양식과 영혼의 잘 됨을 위해 공급된 만나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순서상 다음으로 말씀드리려는 것은 “경건한 독서”이다. 같은 조항 아래 설교 집을 읽는 것을 집어넣으려 한다. 다음 순서는 변증 학에 대한 독서이다. 그 말은 신학과 철학에 조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조류는 왔다가 간다. 이 모든 것을 익히 아는 것은 설교자의 임무이다.
이 모든 독서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독서의 목적은 첫째로 설교를 하는 데 필요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은 또 다른 가공할 만한 위험이다. 설교본문을 얻으려고 성경을 읽는 경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는 것도 설교 자료를 얻으려는 의도에서 되기가 쉽다. 나는 이 점을 목회자의 직업병으로 간주한다.
그러면 독서의 주요 목적과 기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보를 제공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독서가 가장 훌륭한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언제나 필요로 하는 것은 자극입니다.
어느 의미에서 설교자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는 책으로 가지 말아야 한다. 책의 임무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축음기판이 아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설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각의 결과이다. 사상을 단순히 옮기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란 단순히 물이 흘러가는 수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샘같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독서의 기능은 주로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도록 자극시키는 것이다.
독서에 관해서 하나만 더 생각해 보자. 일반적인 독서는 역시 중요하다. 왜? 예, 만일 별다른 이의가 없다면 단순히 마음의 휴식을 위해서이다. 마음의 휴식을 필요로 한다. 너무 긴장해 있거나 그의 마음을 과중하게 쓴 사람은 금방 고통을 당한다. 마음은 안위를 받고 쉴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을 휴식시킨다는 것이 독서를 중단하는 것을 단순히 의미 하지만은 않다. 좀 무엇인가 다른 것을 읽으십시오. 아주 다른 무엇을 읽으십시오. 그렇게 할 때 심령이 풀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변화는 휴식만큼 좋은 것이다.
목회자는 언제나 이런 균형을 유지하면서 스스로 계획한 독서를 해야 한다.
음악이 모든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나 어떤 사람에겐 크게 도움을 준다.
이 장을 시작할 때 말한 여러분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함으로써 긑맺으려고 한다. 여러분의 생애에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알라. 여러 국면과 체험을 통해 다양한 상태를 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어디서든지 설교할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상상력이 풍부한 상태에 있는 때를 알게 될 것이다. “나무들이 말하는 소리와 급하게 흐르는 시냇물 속에 있는 책들을 그리고 돌 속에서 교훈을, 모든 것 속에 선한 것을”발견하게 될 것이다.
제 10 장 설교준비
우리는 부족하나마 설교자 자신의 준비를 다루려고 노력했다. 아무도 이것을 완전히 해 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해야 하고 우리들의 남은 생애 동안 그것을 위해 계속 투쟁해야 한다.
이 장에서도 설교하는 일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재강조 한다. 어떤 이는 “심방에 관하여는 어떻습니까?” 하고 질문을 제기한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목회사역의 모든 국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설교하는 일을 다루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설교하는 일이 제일 우선적인 일이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말씀 증거하는 일은 목회자의 다른 모든 활동을 위한 길을 준비한다. 내가 보여드렸던 바와 같이 그것은 인격적인 사역을 위한 길을 준비하고 동시에 심방을 위한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설교란 모든 일을 조정하고 그 밖의 모든 일의 성격을 결정짓는 것이다.
우리가 설교준비로 시선을 돌릴 때 우리는 즉시 내가 서론 부분에서 이미 개괄적으로 언급했던 큰 결정에 우리 자신이 직면하게 된 것을 발견한다. 어떤 유형의 설교여야 하는가? 무엇이 복음적인 설교인가? 교회 기성신자의 건덕과 위안과 강건함을 위해서 하는 설교인가? 그렇지 않으면 성경의 메시지 가운데서 보다 보편적인 교훈형태의 설교인가? 등의 문제이다. 이것은 명백하게도 하나의 대결정이다.
어떤 유형의 설교를 할 것인가를 결정한 다음에 실제적인 준비라고 하는 아주 실천적인 문제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 문제에 있어서 절대적인 법칙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음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내 자신의 이해와 체험에 기초해서 몇 개의 시험적인 제안을 제시할 뿐이다.
대체로 나는 설교자란 그러한 과제들에 관해 설교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몇몇 비평을 받을지도 모를 모험을 하겠습니다. 대체로 나는 교리문답을 통해 하는 설교는 믿지 않음을 분명히 해둔다. 사람들에게 교리문답 집을 가르치는 것을 신빙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다른 기회에 다른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다. 사람들 스스로가 교리문답 집을 읽어 연구하도록 하고 토론회로 모여서 숙고하게 하는 것이 좋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내가 지적해 온 바와 같이 설교에 있어서 메시지는 언제나 성경에서 직접 나오는 것이지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형식화한 것에서 나오지 않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것을 조직화한 사람들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렇다. 결국 이러한 교리문답서들은 그들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어떤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교리문답의 기능이란 궁극적으로 설교자료를 제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교의 정확함을 보좌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그들의 성경해석의 올바른 진로를 표시하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바로 그것이 신조와 교리문답서의 주요 기능이므로 여러분 앞에 늘 열려진 성경 자체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직접 증거하지 않고 거듭해서 교리문답서에 의존하여 설교하는 것은 분명히 그릇된 것이다. 사람들의 심령은 교리문답서를 이해하려는 것보다 성경에 입각한 말씀 증거를 더 좋아 한다.
성령께서 한때는 따로 떨어진 본문에 입각해 설교하게도 하시고 어떤 경우에는 연속된 설교를 하게도 하신다. 임의로 부는 성령의 역사와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를 배우라.
어떠한 특별 절기든지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이용하는 것을 신빙한다. 그러므로 내가 언급했던 절기와 더불어 신년 첫 주를 늘 유용하게 사용했다. 하나의 설교를 준비하는 일로 돌아가서 보면 거기에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있다. 새해가 시작될 때는 인생의 덧없이 흘러감을 깨우쳐 주는 좋은 기회이다. 신학적이고 지적이고 철학적인 큰 문제들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죽을 것이라는 것은 잊어버리기 쉽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락이다, 사업이다, 가정이다 하여 그런 일에 파묻히다 보면 “이 생의 일들의 덧없음을”역시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이럴 때에 이 세상 삶의 덧없음을 모든 이에게 명심시키고 감히 누구도 설교자와 설교를 평가하고 감독하는 자세로 앉아있을 수 없도록 그들을 깨우치는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필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종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과, 최후 심판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줄 수 있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는 설교자는 어리석어 강단에 서기에 적합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의 설교를 준비하는 일로 돌아가서 보면 거기에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있다.
하나는 여러분이 성경을 연구해 나가되 조직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성경 중 한 책의 한 부분을 세밀히 검토해 나가는 것이다. 즉 산상보훈이나 또는 그 밖에 그와 같은 부분들 말이다. 한 장 내에 있는 일부분까지라도, 이런 점에서 많은 가능성들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전에 지적했던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특정 국면을 다루는 연속설교를 할 수도 있다.
이 방법은 그 자체로 옳은 것일 뿐만 아니라 목회자의 부담과 노력을 크게 덜어준다. 주일날 할 설교본문을 찾느라고 미친 듯이 애를 쓰는 그러한 처참한 처지를 면하게 해 준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 이 모든 일을 하는 동안 여러분들은 언제나 본문을 파헤치는 강해자가 되어야 한다. 언제나 강해적이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그 방식을 따른다면 본문들이 여러분들에게 부딪쳐 올 때 여러분은 거기서 멈춰서 그 본문들을 유심히 살펴보았을 것이며 한번 시험해 보고 설교 대지들을 뽑아냈을 것이다. 연속설교는 짧을 수도, 긴 기간을 요할 수도 있다.
이제 여러분들은 실제적인 매 설교준비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것에 접근해야 할까요? 확실한 것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해당 본문의 의미를 취급하는 것이다. 이 면에서 하나의 황금률, 하나의 절대적 요청이 있는데 그것은 정직이다. 여러분은 해당 본문에 대해 정직해야 한다. 내가 말하는 의미는 여러분을 즐겁게 하는 한 사상만을 잡아내어 그것을 여러분 스스로 다루기 위해 본문을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본문에 부정적인 행위이다. 우리는 우리가 택한 본문에 정직해야 한다. 본문을 언제나 문맥 가운데서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법칙이다. 여러분들은 설교본문을 문맥에서 찾아야 하고 본문에 정직해야 한다. 전체 진술 가운데서 말씀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현시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 절이나 구절의 영적 의미이다. 첫째는 정확해야 한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의미이다.
설교자가 맨처음 배워야 할 일 중 하나는 그이 본문과 얘기하는 것이다. 본문을 여러분에게 말하고 여러분은 본문에게 말해야 한다. 그러나 회중에게 질문을 던지십시오. 이것은 가장 유익하고 좋은 것을 자극해 주는 절차이다. 이 일후에 또는 이러한 일을 하는 동안 원어사전이나 주석들을 참고하여 얻은 본문에 대한 이해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내가 알려주고 싶고 관심이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사실상 해당 본문이나 진술의 주요 메시지와 주요 핵심, 요점을 얻으려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하라는 것이다.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이런 일을 어떻게 회피할 수 있는지 주목해 보면 아주 가관이다. 나는 그 사람들이 설교를 많이 함으로써 설교에 대해 더욱 알게 되었는지 다른 사람의 설교를 들음으로써 그리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나는 양면이 서로 합해져서 된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본문의 주요 핵심에 확실히 도달해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것이 드러나게 하라.
우리가 취급하는 본문의 주요 메시지나 핵심에 도달하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그것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인도하게 하고 여러분을 가르치게 하라. 본문이 말하는 바를 듣고 무슨 의미인지 본문에게 물어보라. 그것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인도하게 하고 여러분을 가르치게 하라. 본문이 말하는 바를 듣고 무슨 의미인지 본문에게 물어보라. 그런 다음에 그것이 여러분 설교의 핵이 되게 하라.
제 11 장 설교의 조직
본문의 주요 메시지와 주요 요점을 발견하였으면 그 본문의 실제적인 배경과 적용 가운데서 이 주요 메시지를 진술해야 한다. 본문의 원 배경과 그것이 어디에 적용되었던 것인가를 보여줘야 한다.
그런 다음에 이것이 언제나 타당한 근거를 가진 보편 원리의 진술임을 계속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그런 특별한 환경에서 진리였으며 언제나 적용되는 영적 원리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단순히 일시적인 그 지역에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보다 일반적인 진리임을 천명한다.
내가 이 점에서 언제나 느끼는 것은 성경의 다른 곳에 있는 대구에 주의를 돌림으로서 이것을 강화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아주 가치 있고 중요한 원리라고 믿는다. 한 본론에서 발견한 것이 성경의 다른 부분 안에 있는 유사한 진술에 의해 보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홀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이유에서 현명한 처사이다. 이단자들은 주로 잘못 해석한 진술에서 한 사상을 취해 내서는 그것을 성경의 다른 부분으로 점검해 보지 않고 그것 하나만으로 일관한 사람들이다. 다른 성경으로 비추어 보는 것은 청중들로 하여금 전해지고 있는 진리가 건전하고 성경적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데 언제든지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그 외 다른 곳에 이런 유사대구가 있는지를 살피고 같은 것이 다소 다른 환경 가운데서는 본질적으로 같으면서 어떻게 진술되었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한 다음 오늘날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상이 설교에 있어서 서론이다. 또한 여러분의 제목, 여러분이 발견한 원리나 주제로 유도하는 방법이다. 나는 이것이 설교자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이라고 믿는 동시에 때에 따라서는 좀 다르게 해도 그렇게 잘못될 것은 없다는 것을 부연한다. 때에 따라 상황진술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런 다음 여러분이 파헤치고 있는 구절이 바로 이 일을 취급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성경이 언제나 그 시대마다 적용하게 되어 있지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어떠한 상황이든지 간에 반드시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그 방법은 재차 여러분이 전하는 것이 늘 성경에서 나온 것임을 강조해 준다. 그러므로 습관이나 실제로 생각했던 것을 추정은 하지만, 한편에는 우리가 어떤 방법의 노예가 되지 않아야 된다. 우리는 언제나 자유로워야 하며 진리의 宣揚을 위해서 우리의 방식을 다르게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된다.
우리는 이제까지 설교자가 회중들에게 제시하고 싶은 원리 혹은 가르침 문제를 숙고해 보았다. 다음 단계는 이것을 명제나 대지 혹은 소제목으로 나누는 문제이다. 이 소제목에 대하여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본문 안에 있어야 하며 본문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소제목으로 나누는 일이 듣는 것처럼 그리 쉬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 문제는 대지들을 모두 함께 발표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그것을 하나 하나 취급하기 전에 한꺼번에 모든 대지들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것은 옛 전통이다. 나는 그것을 실천한 사람들에게는 존경심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 전통에 대해서는 도전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도 너무 기계적이 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회중들에겐 나쁘다고 느꼈던 것이다. 설교자가 설교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는 언제나 전투에 임하고 있다는 것과 그 전투가 설교요지와 설교형식 사이에 있는 것임을 누차 반복해서 지나칠 것이 없다. 물론 둘 다 중요하다. 그러기에 그 둘 사이에 이러한 팽팽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한 형식의 중요성을 강하게 역설함과 동시에 형식이 내용의 주인이 되도록 내버려두는 위험을 같은 강도로 역설하고 주장하길 원한다. 그것은 첫째로 대지를 취급하기 전에 처음부터 대지들을 전부 진술하는 것이 형식과 조직과 구성의 명석함을, 전할 진리보다 더 관심 있게 보는 이들에겐 흔히 용기를 주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나는 이 점을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전에서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주석들을 보고 얻은 것을 다시한번 점검해야 한다. 이미 어휘나 문맥 등의 정확한 의미에 관해 그 주석들을 참고 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나눈 방법을 점검하기 위해 그것들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좀 더 정확을 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설교의 골격을 준비한 다음 그 대지들이 절정과 결론적 적용에 이르도록 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그것은 설교준비의 전체 포인트요, 목적이요, 설교하는 일의 모든 초점이다.
한 편의 설교란 설교자를 통해서 증거 되는 하나님의 진리의 선언을 의도한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한 것을 연달아 인용하는 것을 원치 않다. 그들은 여러분의 설교를 듣기 위해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여러분은 목회에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여러분은 위임 받았다. 그래서 회중은 여러분의 모든 됨됨이를 불문에 붙이고 여러분을 통해 오는 이 위대한 진리를 듣기 원한다. 그들은 그것이 여러분의 생각과, 일부는 여러분의 체험을 통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확실한 근거가 있는 인격적 인용을 원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장담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의 설교가 일종의 인용구의 나열에 불과하다면 비교적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사람 많이 배웠군” 할 것이고 다른 이들 특별히 그 자리에 참석한 목사라면 누구나 여러분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정확히 알 것이다. 그러나 비할 수 없이 중요한 사실은 여러분의 설교에는 위대한 능력도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 말은 장담할 수 있다.
다음으로 경고할 것은 너무 세밀한 논리를 전개하려고 하지 말라. 특히 여러분이 설교를 쓰고 있을 때 말이다. 나는 설교의 진전, 논증, 전개의 중요성을 서론 부분에서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논증이 너무 자세하거나 세밀하거나 교묘하게 하지 않도록 하라. 왜냐하면 설교란 말해지기 위한 것이고 들을 때는 책을 읽을 때만큼 아주 세밀하고 세밀한 논증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들이 이 점에 있어서 너무 지나치면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즉흥설교에도 역시 적용 될 수 있으나 설교 문을 작성할 때 특별히 위험하다.
이제 다음 말로 이 장을 마치려 한다.
너무 완벽하려 하는 것은 위험하다. 여러분의 생각을 가지고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 그러나 설교내용 자체가 목적이 될 정도로 너무 과하게 준비하지 마라. 여러분은 어떻게 이것을 피할 수 있을까요? 해독제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사람들, 그것도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계속 기억하라. 여러분은 교수나 학자로 구성된 회중을 상대로 설교를 준비하지 않는다. 혼합된 회중들을 위해서이다. 회중 안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어떤 도움이라도 주어야 하는 것이 여러분과 나의 임무이다. 우리가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실패이다. 그러므로 지나친 학적 논리로 접근하지 말라. 실제적이 되라.
제 12 장 예화, 웅변, 유머
즉흥설교의 형태와 그 즉흥설교의 준비에 관해서는 할 말이 그렇게 많지 않다. 여기에는 위험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기 좋아하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내 경험의 결과에 비추어서 그러한 것이다. 주로 설교내용을 써가지고 올라가던 사람이 여러 이유에서 더 이상 그러지 않고 원고 없이 설교하는 사람이 될 때 위험이 발생한다. 그에게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은 부족하게 준비하고도 만족해하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사람은 만일 그가 설교를 모조리 기억하여 작성하지 않고 그저 가능한 최소한도의 설교 개요나 뼈대만 준비하는 것으로 끝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한 결과 설교단에서 아주 비참해지는 수가 있다. 성경을 읽고 있는 동안 한 생각이 떠올라서 여러분은 서둘러서 설교개요와 뼈대를 적는다. 그 당시에는 생각이 넘치는 것처럼 보여 그 내용을 설교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몇 날이나 몇 주 내에 이 설교개요를 들고 설교단에 올랐을 때에야 그 모든 생각이 모두 사라지고 조금밖에 할 말이 없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 보라.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오는 것을 다시 포착할 수 없다. 여러 개의 대지를 어떻게 이어 나갈까 조차 생각이 안 나서 고개를 갸웃거리기까지 할 것이다. 그것은 한번만 의미를 가졌었지 이미 사라졌다.
이러한 위험을 해결하는 길은 아주 분명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피나는 경험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 여러분은 반드시 요점을 정리해야 한다. 주요 대지와 여러 개의 항목과 세목을 자세히 정리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이 만족할 만한 말거리와 재료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된다는 말이다. 주요 대지는 여러 방법으로 정교화시킬 수 있고 조리있게 정리하고 예정될 수 있다. 설교 개요(뼈대) 자체에 관해 충고한 바 있듯이, 그것을 종이 위에 써서 설교할 때 생각나도록 하고 그 대지 아래에서 말할 것을 상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준비가 너무 간단명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법칙이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전할 말을 세목들로 자세히 구분해 놓으라. 그렇게 하면 부족해서 곤란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내가 묘사했던 방식대로 갑자기 오는 영감에 의지한다. 그리고 실제로 강단에서 설교하고 있을 때도 그 영감이 온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런 일이 언제나 일어나려니 하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시험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면밀한 준비는 불필요하다고 하는 망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체험해 보면 자기가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두 가지 주요 방법이- 설교를 완전히 쓰든지 원고 없이 설교하려고 노트를 준비하든지- 있긴 하지만 이 두 방법을 다양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역시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잘못된 것이 없다고 본다. 우리는 이제 설교내용의 실제적 전달과정에서 야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눈을 돌립시다. 어떤 이들은 강단에 서서 자기 설교 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내리 읽는다. 난 너무 독선적이길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것은 틀림이 없다. 그 방법이 좋지 못한 것은 뻔하다. 설교하는 일이란 처음 부분에서 말씀드렸듯이 회중들과 설교자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과 인격성과 심령과 마음의 상호작용을 수반합니다. 거기엔 주고받는 요소가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회중들을 바로 보는 것이 좋다. 그러나 사람들을 보면서 원고를 읽는 일을 한꺼번에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낭독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도 회중들에게도 나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주의를 놓쳐버리고 그들을 장악할 수 없게 되고 그들도 여러분을 주시하지 못하고 여러분이 말하는 것을 놓쳐버린다. 설교란 그 정의가 말해 주듯이 사람들에게 직접적이고 개인 대 개인으로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이론적이나 학적인 강의가 아니다. 살아있는 접촉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작성된 설교든 즉흥설교든 간에 설교하는 두 유형에 공통되는 어떤 문제에 이르렀다. 내가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사람들이 자주 나에게 그것들에 관해 묻기도 하고 사람들이 그것들에 관련된 논평과 비평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예화의 사용과 예증의 문제를 생각해야겠다. 이것은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예화의 사용과 성경의 한 부분을 영화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안다는 것을 전제한다. 여러분은 물론 여러분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회중들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하고 그 특정사건이 역사상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이 같은 원리가 영계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예화와 예증은 진리를 밝혀주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지 그 자체에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다. 예증이란 그 자체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나 그것에 어떤 관심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비쳐주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이 선포하고 있는 진리를 더욱더 분명하게 알도록 사람들을 이끌고 도와주는 한 방편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우선이요 그것이 크게 드러나야 되고 예화는 그 목적을 위해 아주 조심스럽게 약간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철학이다. 우리의 임무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설교내용과 설교행위에 있는 상상의 세계에 대해 약간의 고려를 해야 한다. 내 느낌으로는 어느 때보다 오늘날의 설교에서 이 상상의 문제가 큰 위험을 안고 있다. 우리는 모두 너무 과학적이 되어서 상상을 위해 조그만 여유밖에는 없다. 내게 있어서 이것은 가장 무시되는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설교하는 데 있어서 상상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익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잊지 말라. 상상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상상의 은사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렇게 많은 시들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문화의 모든 양태를 석권하는 것을 믿는다면 상상을 경멸하지 말라. 왜 상상이 비기독교인에게만 사용되어야 하는가 말이다. 아니다. 상상은 진리를 전파하는 데 진정한 위치를 점한다. 왜냐하면 상상이 하는 일이 진리를 생생하게 살아있게 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언제나 밝혀져야 하는 것보다 밝혀주는 상상력이나 일화 자체에 기쁨을 가질 때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점에 도달하는 순간 그만 멈춰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감동시키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진리가 그들을 감동시키고 감화시키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다.
내가 제시하려고 하는 유일한 철칙은 아무도 웅변적이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만일 설교자가 설득적이 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그것은 큰 가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을 수 있다. 사도 바울 그는 문학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진리가 그를 붙잡으면 그는 온 힘을 다 기울여 설득적이 되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그의 설득력은 언제나 자연스러웠고 필연적인 것이었다. 고안해내는 것이 아니였다. 그것이 필연적이 된 것은 그의 마음에 저절로 보여진 진리와 생각의 장엄함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제 기록하여 작성한 원고설교든지 원고 없이 하는 설교이든 간에 한 편의 설교에서 생각해야 할 여러 가지 것 중 또 다른 점에 시선을 돌려야겠다. 수위 유머의 위치이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이 모든 것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들이 본래적인 재능들이라는 것이며 야기되는 문제는 이 위대한 설교사역에서 자연적인 재능의 사용, 또는 자연적 재능의 위치이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설교의 길이 문제이다. 이 일에 있어서도 너무 기계적이거나 고정적이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 설교의 길이를 결정짓는가? 첫째로 설교자 자신이다. 설교의 길이란 경우에 따라 역시 다양해야 한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명을 받았지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최우선적인 관심은 진리와 그것에 대한 삶의 필요이다.
제 13 장 금기사항
가장 첫째 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 말씀 강론을 듣기 위해서 나와야 한다는 데 있다. 그 점이 우리의 심중의 최상층에 자리 잡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제를 발표하는 것이 나쁜 것은 그것이 사람들에게 해롭기 때문이다. 그것이 거짓된 주지주의를 북돋아준다.
기독교인 생활은 언제나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고 균형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우리는 이제 설교에 있어서 금해야 할 사항에 대해서 고찰해 보겠다. 설교자로부터 시작하여 그가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무엇보다 직업주의를 피해야 한다. 목회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그것이다. 설교자가 살아있는 동안 싸워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직업주의는 언제 어디서나 구역질나는 것이다. 의학계에서 일할 때도 나는 지금처럼 그 직업주의를 싫어했다. 지나치게 직업적인 사람이 의학계에도 있다. 그런 사람은 모든 호의와 친절을 베풀고 모든 해야 할 일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나쁜 의사일 경우가 흔하다. 의사가 위대하면 할수록 이런 순전한 직업주의 의식은 적게 나타난다. 기독교 목회세계에서 직업주의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심하다. 내가 뜻하는 바를 더욱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주일날에 설교하는 주요 이유가 설교한다고 미리 알려졌기 때문인 정도까지 이른다면 설교자에게 있어서는 그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그 의미는 그 설교자에겐 설교하는 일이 자기의 직업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원래 그를 감동시키고 그를 격려했던 것과 접촉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그 일이 습관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설교단에 오를 때 자신에게 왜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는가 하고 솔직히 묻는다면 그의 대답은 “이렇게 하도록 광고되었는걸, 그래서 난 그 일을 해내야 돼.” 그 말은 직업주의에 대한 고백이다.
그것은 역시 예배를 드릴 동안도 여러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사람은 주로 너무 형식적이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너무나 기교에 넘쳐 있다. 그것은 언제나 직업주의의 표다.
다른 말로 하면 직업적인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다. 동시에 그는 기교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거기서 아이디어를 뽑아내고 다른 설교자는 다른 여러 일을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기를 좋아한다. 그런 다음에 그는 그것들을 모방하고 그가 본 것을 자신의 기교에 도입시킨다. 나는 극장의 연극계에서도 이와 유사한 것이 일어남을 보았다.
설교자가 금해야 할 다른 문제들이 많이 있다. 하나가 지식의 과시이다. 설교자들의 끊임없는 죄악 중 하나는 자기가 폭 넓은 독서와 교양을 지니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는데 있다. 나는 독서의 위치와 가치를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만일 독서의 주요 이유가 그것을 전시하고 지식을 선보이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나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큰 위험은 준비하는 것에 위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교묘한 태도다. 모든 참된 설교자는 이 점에 있어서 나와 의견을 같이 하리라고 확신한다. 설교 준비를 마친 것이 어느 때든지 - 토요일 밤이든 그 이전이든 간에 - 또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 이제 난 내 일을 준비했어.”설교자는 준비를 마치고 이 설교는 좋은 설교라고 느끼고는 그것에 의지하기 쉽다. 설교와 관련된 위험 가운데서 이것보다 더 큰 위험은 없다. 그것 때문에 힘이 빠지고 기대에 어긋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서운 시험이다. 그토록 설교자 자신의 준비를 강조한 것은 그 때문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단에서 좋은 목소리에 의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억지로 짜내서 그것을 과시한다. 설교자는 많고 다양한 방면에서 언제든지 마귀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마귀는 여러분과 거기 같이 있어서 언제나 여러분을 넘어뜨리려고 한다. 마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여러분의 타고난 재능과 성향과 개성을 살펴보라. 내가 의미하는 바는 그것들이 여러분을 넘어뜨리기 쉽다는 것이다. 그 모든 말이 한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 여러분의 강점을 주의하라. 그렇게 많은 여러분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을 주의하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주시해야 하는 것은 여러분의 강점, 여러분의 탁월한 점, 여러분의 재능과 적성 등이다. 그것들은 여러분들을 가장 넘어뜨리기 쉬운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뽐내게 하고 자기를 자랑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지키라. 그리고 여러분의 개성도 지켜야 한다. 우리 모두는 다 이것들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언제나 특이하려고 하는 무서운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방호(防護)해야 한다. 사람들은 개성을 좋아한다. 그리고 사람을 개성 있게 만들기 쉬운 그 안에 어떤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면 - 보통 이상의 것으로 사람들이 매력적이라고 여기는 것을 - 조심해야 한다. 그의 위험은 이것을 뽐내어 그것을 치켜드는 것이다. 그는 결국 자신에게만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 어떤 이들은 특별나고 다르게 되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자기의 그 유별난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위험하다. 그러므로 이것을 재인식하라. 다시 특별히 여러분의 강점을 지키라.
이상의 모든 것을 요약해 보면 설교자를 공박하는 모든 시험은 자랑이라는 것이다. 자랑, 그 때문에 그가 거기서 높임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모든 사람들보다 높게 설교단에 서고 청중들은 그를 우러러 보고 있고 그는 교회에서 또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가장 큰 시험은 교만의 시험이다. 자랑은 아마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사악하고 가장 교활한 것일 거다. 그것은 많은 외모를 취한다. 그 외에도 설교자에게 부딪쳐 오는 특별한 몇몇 위험이 있다. 이번에는 설교내용에 관한 것이다. 설교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너무 지적인 것을 경계하라.
어쨌든 너무 감상적이거나 정서적인 것을 삼가야 한다고 충고를 들을 만한 분들이 있다. 첫째 타입은 이 요소에 결핍되어 있고 너무 지적인 데 치우친다. 그러나 너무 감정적이고 감상적인 설교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본문을 한 절만 읽고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감정이 지나쳐 흔히는 사적인 데 치우친다는 것이다. 좋지 않다. 그 반면에 전혀 권면을 하지 않는 분들이 있다. 그들은 명석한 지적인 논술과 강해를 한다. 그리고는 그만이다. 어떤 사람으로 눈물을 흘리고 행동하도록 하는 감동적인 면이 없다. 아무런 감정도, 아무런 느낌도, 아무런 권면도 없다. 이 모든 것은 분명히 그릇된 것이다.
끝으로 전달방법에 주의하라. 많은 문제들이 이 전달방법에 관련되어 일어난다.
그 모든 것보다 제발 목사다운 목소리를 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얼마나 가공할 일입니까?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젊은 사람들이 이 나쁜 버릇을 발전시킵니까? 그들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똑같은 소리를 내어서 목사다운 부자연스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역겨웁게 합니다. 거짓되이 경건하는 척하는 것은 더욱 나쁩니다.
또 수다스러움을 피하라. 소위 그저 편한 대로 얘기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을 이런 일들과 관련해서 볼 때 얼마나 무가치 한가? 다시 연극적이지 말라. 제스처를 생각해 내서 그것을 뽐내지 말라. 연극배우와 같은 것을 삼가야 한다.
그런즉 무엇이 철칙인가? 자유 하라. 자신을 잊으라.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에 열중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존전이라는 것을 의식하라. 여러분이 전하고 있는 진리의 영광과 위대성에 몰두하라. 여러분이 그렇게 됨으로써 여러분 자신을 완전히 잊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올바른 상태이다. 그것만이 평안의 장소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은 그것밖에는 없다. 자아는 설교자의 가장 큰 적이다. 사회에 있는 어떤 다른 인물보다도 더욱더 큰 적이다. 그리고 자신을 처리하는 오직 하나의 길을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의 영광에 붙잡히고 그것에 도취됨으로써 자신을 모두 잊는 것이다.
제 14 장 결심의 요청
우리가 전적으로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기 위하여 나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그 집회와 회중들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서 음악의 문제가 야기된다. 결국 설교자는 예배 책임자이며 그러므로 예배를 조정하는 것은 그의 권한 안에 있는 것이다. 현시대에 이 문제는 가장 중대한 문제일수 있다. 나는 많은 목회자들이 성가대 문제, 찬송을 부르는 문제, 성가대 4중창 문제에 대해 고민에 빠지는 것을 안다. 가끔 교회들은 성가대와 심지어 교회 회원이 아닌 성악가들을 써 크리스천으로 행세케 하여 노래를 부르게 한다. 그런데 거기에다 예배 전후 또는 도중에 행하는 오르간 독주의 문제가 있다. 보다 대중적인 형태로서는 계속 합창을 부르는데 결국은 “찬송 인도자”로 알려진 사람들이 그것을 끌고 나가는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골칫거리 오르가니스트 때문에 그의 목회에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특히 진리보다 음악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러므로 목사는 그가 그리스도인인지를 확실하게 하고서 반주자를 임명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만일 성가대가 있으면 성가대원들도 그렇게 임명해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은 목소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태도, 진리에 대한 사랑, 진리를 노래하는 데 대한 기쁨이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폭주나 말썽부리는 성가대원의 폭주를 피하는 길이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나의 첫 번째 논평은 여기서 다시 우리가 이미 숙고해 보았던 몇몇 일들과 같은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성가대를 완전히 없애버려야 한다는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회중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높여 찬양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기뻐하고 경배해야 한다고 한다는 이상에는 모두 다 찬성해야 한다. 그리고 회중들의 분위기를 일부러 불러일으키는 시도는 철저히 그릇 되다는 것에도 역시 동의할 것이다.
나는 또 하찮게 들리는 다른 일을 말씀드린다. 아직도 어떤 이들은 그것에 커다란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것은 예배당 안의 조명 문제인데 설교의 효과를 더욱더 내게 하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어떤 곳은 여러 색깔의 조명등이 비쳐지기도 하고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 그 조명등이 점점 옅어지는 경우도 있다. 또 어느 경우에는 설교자 등 뒤의 찬란한 빨간 십자가를 조명하는 것 외에는 하나의 등도 없는 곳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심리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뿐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더 쉽게 한다고 해서 정당화되고 있다. 설교자가 성령의 사역과 능력에 대해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신약교회와 신약교회의 영적 예배와 부합되기에 천부당 만 부당한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정확하게 그리고 체계적인 순서로 진술하지 않고 다만 두서없이 말씀 드린다.
첫째로, 의지에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은 분명히 나쁘다는 것이다. 사람은 이지와 감정, 의지로 구성되어 있다. 의지는 언제나 처음 理智를 통하여 그 다음에 감정을 통하여서 일어납니다. 의지의 행동은 그러한 영향 아래 결정되어야 한다.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성경적 근거는 롬6:17말씀이다.
두 번째로, 의지에 대한 너무 과다한 압력이나 너무 직접적인 강압이 위험하다고 하는 것을 주장한다. 물론 설교에는 이 요소가 필연적으로 있기 마련이지만 너무 과다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종국에 가서 진리 자체보다 전도자의 개성이나 희미한 두려움, 일종의 심리적인 영향을 받아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반응을 결정짓게끔 분위기를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말씀 증거나 결신의 요청이 우리의 사고에서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성례가 말씀 증거와 결코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똑 같은 원칙이 결신을 요청하는 일에도 적용된다는 것이 나의 의도이다. 그리고 결신에 대한 더욱더 가중된 강조를 하게 되어 그것 자체를 독립적인 무엇으로 간주하기 쉬운 경향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로, 요점은 분명히 이 방법은 죄인들이 처음부터 결신과 자기 회심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린도전서 2:14과 같은 성경적인 교훈과 일치하지 않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에베소서 2:1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외에도 다른 많은 말씀들이 있다.
다섯 번째로, 그것은 전도자가 성령과 그의 역사하심을 어떻게 해서 교묘히 조장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해 준다. 전도자는 호소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 결과 결신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으로 생각한다. 만일 경우에 따라 실패하면 또는 아주 작은 효과나 아무 반응도 없을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은 너무나도 흔하게 묘책을 부리는 사람들이 “결신자들의 수”를 좌우할 수 있다.
여섯 번째로, 이 방법은 피상적인 죄의식을 산출하기 쉽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거기에 응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은혜를 받을 것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로, 이렇게 함으로써 여러분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후의 행위가 어느 정도 그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기저기서 행해짐에 틀림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그들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비록 아무것도 모르지만 앞으로 나왔으니까, 그가 이제 “구원선에 탄”것으로 느끼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여덟 번째로, 없음
아홉 번째로, 그것이 중생교리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느냐는 말이다. 내가 볼 때 이것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이것, 즉 중생의 사역이 성령의 사역이고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이다. 참된 죄의식의 역사, 즉 중생과 믿음의 선물을 주심과 새 생명을 주시는 참된 역사는 오직 성령만이 하시는 일이다. 그리고 그 중생이 성령의 사역이듯이 그 일의 전 과정도 그가 맡는다. 그 중생의 역사는 언제나 자연히 나타나게 되어 있다.
열 번째로, 어떤 죄인이라도 “그리스도를 위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결심하다”라는 어휘는 내가 볼 때 언제나 아주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나는 흔히 사람들이 나를 당황하게 하고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표현들을 사용하는 것을 듣는다. 그들은 주로 모르는 가운데서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한다.
어떤 사람도 그가 주님을 유일한 소망과 피난처요 또한 양심의 송사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로 알고 주님께로 피신하기까지는 그리스도에게 참으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호소력은 진리 그 자체와 메시지 속에 있기 마련이다. 설교를 전할 때 그 설교내용을 언제든지 적용시켜 나가야 하며 특별히 마지막 결론적인 적용이나 클라이맥스에 이를 때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호소는 메시지의 한 부분이다. 호소는 설교 전체를 통해서 설교자가 행하는 모든 것 속에 깔려있어야 한다. 서슴없이 말씀드립니다만 끝에 막간을 가진 다음에 찬송을 부른 뒤에 하는 특별한 호소와 따로 떼어 하는 호소는 성령께서 그렇게 하도록 강력하게 설교자를 내리누를 떼에만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에 너무 지나친 염려로 압도당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그것이 정직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수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께 맡기는 것과 성령의 실 수 없는 역사에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제 15 장 함정과 낭만
아직도 내가 언급해야 할 몇 가지의 부수적인 문제들이 있다. 하나는 같은 설교를 반복하는 문제이다. 여기서는 아주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한 설교자가 같은 설교를 반복해서 한다는 것을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렇게 같은 설교를 반복하는 것이 거의 죄악스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한 편의 설교를 반복하는 것을 말할 때 물론 그 설교를 했던 같은 교회에서 같은 설교를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설교를 했던 교회에서 똑같은 설교를 다시 한다는 것이 될 법이나 한 일인지, 난 그런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교회에서야 다른 데서 했던 것을 설교한다고 하면 뭐가 어떻습니까? 여기에 관련되는 규칙이 있습니까? 독서와 대화를 통해서 나는 이 문제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이것에 예외를 취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스펄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문제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스펄전은 같은 설교를 되풀이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매번마다 새 설교를 준비하느라 애썼다.
한 편의 설교란 결국 단순한 진리의 진술이나 여러 가지 진리의 나열이 아니다. 우리가 설교를 정의했던 바와 같이 그것은 한 구절에 대한 해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만일 설교가 단순한 한 구절에 대한 해석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설교의 반복에 대한 그 태도가 좋은 것이라고 인정할 용의가 있다. 독특한 형식과 틀을 갖춘 하나의 메시지요 하나의 완전체요 완전한 메시지로서의 설교에 대한 규정을 인정한다면 같은 설교를 여러 곳에서 되풀이하는 데 대해 말할 것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모든 설교자의 체험에서 분명한 일, 즉 어떤 메시지는 설교자에게 임한다. 설교자는 요점들을 표현할 순서까지 부여 받는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는다. 그 뿐만 아니라 설교자는 이 메시지가 성령에 의해 어떤 이의 회개나 어떤 이들에 대한 특별한 축복수단으로 쓰여지는 것을 발견한다. 이에 대해 어떠한 이의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어째서 그러한 설교가 되풀이되지 말아야 합니까? 설교자는 언제나 가장 훌륭한 것을 전하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 설교 중 가장 훌륭한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은 분명히 합당한 일이다.
또 다른 논증이 있습니다. 설교내용과 설교행위에 대한 나의 주장을 따르면 설교내용이 전해진 결과로 더 나아지고 발전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연구 서재에서 준비하고 있을 때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설교하면서 더 많은 면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설교내용이 보충되고 발전되는 것이다. 이는 매우 흥미 있고 매력적인 일이다.
그 뿐 아니다. 그러나 또 다시 설교내용과 설교전달 행위사이의 관계가 문제된다. 내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것을 규정하기란 매우 힘이 든다. 그러나 설교내용에 더 익숙해질수록 설교전달의 효과 면에 더 크게 반영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경험해 본 결과 사실이다. 거기엔 긴장감이 덜하고 말할 것을 기억해 내느라고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덜해지는 것이다. 어느 정도 자연스러워지게 되는데 그것은 처음에 설교할 때는 그러지 못했던 것이 이제는 친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이유를 들어서 같은 설교를 또 전하는 것, 거기에 범상치 않은 것이 있으며 그 안에 참된 메시지가 있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로 사용된다고 느껴질 때 그것은 합당한 것이다. 참으로 그렇게 하면 그런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러한 설교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면 되겠느냐?”이것은 다소 어려운 질문이다. 같은 설교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지?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 단순한 통계나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 설교가 설교자를 더 이상 사로잡지 못하고 감동시키는 것을 중지했을 때 그 설교를 다시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설교가 여러분 자신에게 더 이상 축복의 수단이 되지 못할 때 그 설교를 더 이상 전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 설교를 전하게 될 때 기계적으로 되어 급기야는 하나의 “연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한 편의 설교를 꼭 반복해야 할 때 그런 유의 일은 피하시기 바란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설교에 그처럼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것은 부정직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내가 극히 흥미롭게 여기는 것에 눈을 돌려야겠다. 소위 설교내용의 특징이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한 설교자의 각각의 설교들이 그 나름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신비로운 문제이다. 설교를 준비하고 구성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그 나름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설교에 아주 분명한 특징이 있다. 반드시 여러분은 해야 할 설교를 알아내야 한다. 이것은 커다란 가치가 있는 요점이다. 여러분이 할 설교를 알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바른 설교를 알게 되고 어떠한 육신적인 조건에 처할지라도 바른 설교를 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동인들이 작용하여 나타나고 그것들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이제 훨씬 더 중요한 문제로 서둘러 나가야 겠다. 즉 설교하는 일의 낭만, 설교하는 일과 맞먹는 일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것은 세상에서 최대의 사역이며, 가장 벅차고, 가장 흥미 있고, 가장 가치 있고, 가장 놀라운 일이다.
이 낭만적 요소의 또 다른 국면은 한 예배의 끊임없는 가능성들이다. 다르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한 예배 내에 있는 불확실한 요소라고 할까요. 불확실한 것에 관해서조차 영광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진정한 설교자라면 여러분이 설교단에 올라갈 때 무엇이 일어날까를 정말 모르기 때문이다.
설교의 낭만에 또 다른 요소는 설교를 들을 사람이 누구인지, 그 듣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설교가 어떤 사람의 생에 있어서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그렇게 드물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제 16 장 영력 있는 증거
로이드 존스는 이 마지막 장을 설교하는 일에 관련되어 가장 커다란 진수가 되는 성령의 감동과 기름부으심에 대한 것으로 장식하려 한다. 성령의 감동만을 의지하는 오류에 빠져 준비를 통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성령의 감동을 바라는 바른 방법은 성령의 감동이 준비한 것에 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관계를 보여 주기에 마땅한 예증을 제공하는 구약의 한 사건이 있다. 갈멜산에서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과 맞선 엘리야의 이야기이다. 엘리야는 제단을 쌓은 다음 나무를 벌려 놓고 송아지를 잡아 각을 떠서 그것을 나무 위에 놓았다고 되어 있다. 그 모든 것을 한 다음에 하늘에서 불이 내릴 것을 기도했고 불이 내렸다. 바로 그것이 순서이다.
우리 모두 극단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의 준비에만 의지하여 더 이상은 바라지 않고, 어떤 이는 준비를 경멸하여 성령의 역사와 감동과 영감에만 의지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러나 어느 한 쪽만으로는 결단코 되지 않는다. 늘 둘을 겸해야 하고 둘이 함께 가야 한다. 성령의 감동이나 기름부으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아는데 가장 훌륭한 접근방식은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그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기 전에 나는 모든 설교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겠다. 여러분은 언제나 설교하기 전에 이 성령의 감동과 기름부으심을 기다리며 간구합니까?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의 최대 관심사였습니까? 설교에게 이보다 더 철저하고 노골적인 시금석은 없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설교자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임하는 것이다. 그것은 설교자가 사람의 노력과 열심을 초월하여 성령에 의해 쓰임을 당해, 그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시는 도구가 되는 위치에서 설교사역을 수행하도록 성령을 통해 설교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다. 이것은 성경에 아주 뚜렷하고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성경적인 가르침을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그런 다음에 역사적인 입장에서 그것을 보라. 그런 다음 몇 가지 주해를 가해 보라.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입증해 준다는 것이 성경에서 아주 분명히 나타나 있다. 눅1:15-17절 이 말씀은 구약 선지자들의 신분에 대한 훌륭한 요약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임한 영감을 감지했다. 성령께서 그들을 붙잡고 하나의 메시지를 주었고 그 메시지를 전하는 데 필요한 권능을 주셨다. 그것은 선지자들의 위대한 특징이었고 요한은 마지막 선지자였다. 그래서 그의 사역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이 그의 능력으로 그에게 부어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행적을 읽는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 그는 사람들에게 크게 회개할 것을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의 질문의 최우선적인 성격을 잘 알고서 언제나 자기의 임무는 예비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눅3:16).
다음에 우리는 우리 주님 자신의 경우에 있었던 것을 관찰해 보아야 한다. 나는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강에서 올라올 때 성령이 그에게 임하는 방식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요단강에서 주님에게 있었던 일은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사도행전에 이르러 특별히 1:8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 물론 그 말씀은 언제나 누가복음 마지막 장과 연결지어 생각해야 한다.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였던 이 사람들에게 임한 성령에 대해서 읽는다. 여러분은 그 즉석에서 그들에게 일어난 차이를 보실 것이다. 겁을 먹고 자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의 주를 부인했었던 베드로가 이제는 담대함과 큰 확신으로 충만해 진 것을 보게 된다. 그는 권위 있는 자세로 성경을 파헤쳐 나갈 수 있었고 그의 설교를 듣고 3천명이 회개할 정도로 권능으로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독교 설교자에게 임하는 권능이나 또는 권능의 발현은 단지 한 번만 있는 일이 아니라 반복될 수도 매우 여러 번 되풀이될 수도 있다.
나는 사도들이 이적을 행할 때나 어떤 아주 특별히 대처해야 할 일을 당할 때마다 언제나 이런 일이 일어났음을 더 주장하려 한다. 사도에 의해 행해진 이적과 오늘날 소위 어떤 사람들이 행한다고 하는 이적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하나의 큰 차이는 이것이니 즉 사도들은 어느 날 어느 시에 신유예배가 있으리라는 예고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 사도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을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시기를 결정하지 않았으며 또 그것은 그들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뜻하지 않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두 번째 차이는 이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사도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결코 실험해 보는 경우가 한 번도 없었고 시험 삼아 해본다는 식의 요소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알았다. 하나의 부탁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권위 있게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명령을 했고 그렇게 하고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되면 실패할 리가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용할 구절은 요한계시록 1:10절, 요한 자신에 대한 진술이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우리는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것은 요한이 그리스도인이 되고서 언제나 성령 안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그의 평상시의 상태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다. 요한은 말하기를 자기는 주의 날에 밧모 섬에 있었는데 갑자기 자신이 성령에 감동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가 큰 환상을 보고 교회들에 보내는 주의 전하는 말씀과 미래 역사의 되어질 것을 이해한 것은 바로 이 성령 감동의 결과인 것이다. 이것은 설교하는 일에 관한 정확무오한 성경적인 증거와 증언이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교회역사는 이 요지의 올바름을 입증한다.
성령을 구하라! 그를 찾으라! 그분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분을 구하라. 항상 찾으라. 그러나 그를 찾는 것 이상으로 구하라. 그를 기다리라. 성령께서는 여러분이 요구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넘치도록 풍성하게 하실 수 있다.
역자 후기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고 생각지도 못하는 일을 하고 계신다.
본서는 저자의 40여년의 목회사역 내지 설교사역에서 우러나온 체험담을 뒷받침으로 하여 성경적 원리의 꽃을 피워주었고, 현실적인 면(설교의 실제적 면)에서 큰 열매를 안겨다 주는 책 이었다 생각한다. 마치 한 그루의 꽃나무가 심어지는 데서부터 열매 맺는 면을 능숙한 정원사가 자연스럽고 부담 없이 기술해 주는 것 같다.
분명코 강단을 지키는 주님의 종들에게 하나의 정확하고 친절한 나침반이 될 것을 믿는다. 특별히 복음주의 및 칼빈주의적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보루인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초청을 받아 행한 강의내용이라는 데서 본서의 권위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정말 대목회자요 신학적인 저자의 간증적 설교원리 및 실천담이 여러분의 길을 분명히 제시할 것을 강력히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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