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1권- 성경론, 신론, 인간론, 그리스도론
1 장 교리 공부의 목적과 방법
우리는 교리에 대해 별로 많이 들어보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심지어 어리석게도 자기들은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매우 딱하고도 유감스러운 태도이다.
1. 성경 교리란 무엇인가?
1) 성경은 일반 세계사가 아니다
2천년의 긴 기간이 창세기에서는 단 열한 장 안에 들어가 있다.
2) 성경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역사도 아니다
성경의 목적과 계획을 드러내는 데 도움 되는 특정한 사실들만 골라서 기록한다. 사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전기가 아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몇몇 진리를 제시하는 데 관심이 있다.
3) 성경은 거대한 구속 이야기다
성경은 사람들이 죄를 지은 결과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하신 일의 역사이며, 다른 모든 것은 부수적이다.
4) 교리의 분류
① 성경론- 성경이 무엇이며, 성경이 성경에 대하여 스스로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다룬다.
② 신론- 다른 모든 교리보다 우선해야하는 위대한 교리가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다.
③ 인간론- 성경의 임무는 우리의 구속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다.
④ 그리스도론- 우리 주님이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⑤ 구원론- 구속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가를 말해주는 교리.
⑥ 교회론- 구원 받은 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된다. 교회에 관한 교리.
⑦ 종말론- 우리와 교회와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교리.
2. 어떻게 성경 교리를 공부할 것인가?
1) 교리 공부는 신학 공부와 다르다
교리 공부는 반드시 성경이 말하는 것, 그리고 성경만이 말하는 것에 국한시켜야 한다.
신학은 더 넓은 분야를 다룬다. 신학은 인간의 생각과 철학도 도입한다.
2) 교리 공부는 변증학과 다르다
교리를 변증하는 것이 변증학이다. 성경 교리는 계시된 일들에만 우리 자신을 국한시켜야 한다.
3. 왜 우리는 성경 교리를 공부해야 하는가?
1) 성경이 교리를 말하고 있다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다는 말은 교리에 대해 숙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의 선지자들, 주님, 사도들이 이 교리를 설교했다.
신약서신서 기자들이 교리를 말했다. 서신서 저자들은 교리를 취해 그것을 실제적인 방식으로 적용했다.
2)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 말한다!
주님 당시 유대인들의 진짜 문제는 말(word)을 안다는 데 만족하여 말씀(Word)은 결코 깨닫지 못했다.
성경을 공부하고 나서도 교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연구가 전혀 유익이 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3) 교회는 수십 세기 동안 필수적으로 성경 교리를 강조했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등을 만들게 되었다. 교리들에 대한 정의가 신경이다.
종교개혁-교리를 분명하고 명확하게 진술하는 것의 절대적 필요성.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성경 교리를 진술한 것일 뿐. 모든 장로교회의 신앙고백.
지금 현재 교회 안에도 교리가 존재하지 않고, 성경 교리 공부의 긴급한 필요성을 말해준다.
4) 성경 교리 공부의 목표는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고찰은 언제나 예배이며, 다른 교과서들에 대해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 교리를 배우는 목적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더 온전한 방식으로 바라보게 됨으로 인해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과 경배로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이로 인해 모든 교회가 소생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2장 계시
1. 하나님에 대한 의식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의식 또는 느낌이 있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기본이 되고 근본이 된다.
2. 하나님을 찾는 두 가지 방법
1) 인간의 노력과 추구에 의지하는 방법
본능과 직관
사람들은 “내적인 빛”에 대해 말하며, 당신은 그 빛이 인도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많은 사교 집단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성적 추론
자연과 창조에서부터 시작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역사의 과정을 추론함으로써 또는 순전한 추론과정에 몰입함으로써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죄 때문에 이 방법은 반드시 실패한다
사도 바울,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고전 1:21).
- 하나님의 무한하심, 완전한 거룩하심 자체가 이성이나 직관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도록 만든다.
- 죄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특성과 본성으로 인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2) 계시에 의존하는 방법
오직 하나님이 자신의 은혜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길 기뻐하실 때에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성경 계시의 원리이다.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께 의존해야만 한다.
계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분 자신, 그분의 성품, 뜻, 혹은 목적에 대한 진리를 전달하는 행동이며,
우리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진리를 감추는 모든 베일을 벗기는 것이다.
3. 계시의 방식
1) 일반 계시
- 모든 창조물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한다.
(롬 1:19-20).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시 19:1)하신다는 메시지가 성경 전체를 관통(행 17:24).
- 섭리의 질서도, 역사도, 하나님의 계시이다. 섭리란 만물을 질서 있게 보존하며 유지하는 것.
- 일반계시만으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2) 특별 계시
성경에 나타난 특별계시는 매우 독특하고 명확한 목적을 가진다.
그것은 특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과 본성을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이다.
4. 성경에 나타난 특별 계시의 방법
1) 신적 현현- 신인동형론 -출애굽기 33장. 2) 언약의 사자- 주 예수 그리스도.
3) 직접적인 말씀 4) 기적과 표적과 기사 5) 꿈과 환상
6) 영감- 영감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시고, 이해하게 하시고, 메시지를 주셨다.
5. 특별 계시를 통해 알려진 하나님의 구원
1)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적 행동을 보여 준다
노아의 홍수, 아브라함을 부르심, 모세를 부르심, 홍해사건
예수 그리스도- 구원 계시의 중심
가장 중요한 사실, 모든 역사의 초점, 인류의 모든 과정의 중심점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갈 4;4-5).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자기 아들 안에서 말씀하신다.
주님의 부활은 또 하나의 위대한 구속 행위로 강조해야 한다.
오순절 강림
성령께서 이미 이루신 구속을 적용하시기 위해 교회에 임하신 중대한 행동이었다.
2) 구원에 대한 계시는 오직 성경에만 주어졌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구속 행동에 대한 기록을 본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이 행동들에 대한 하나님의 해설, 하나님의 주석, 구원의 방법 자체와 그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이 주어졌다.
3장 성경의 권위
1. 계시와 영감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성경의 권위는 이 하나님의 영감에 기초한다.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이 계시는 아니지만 성경의 모든 것은 영감을 받은 것이다.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는 계시가 아닌 것도 많이 있다.
성경은 성경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이 영감된 기록이며, 따라서 무오하고 틀림없는 것이라 주장한다.
2. 영감의 의미
1) 영감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
성경의 특정 부분들만 영감을 받았고 다른 부분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 시인은 영감을 받았어”하는 영감이 아니다. .
2) 성경의 영감은 축자적 영감
영감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 메시지들을 사람들에게 그리고
사람들을 통해 불어넣으셨으며 성경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행하심의 결과라는 것이다.
축자 영감의 의미
성경을 기계적으로 받아 썼다는 의미는 아니다. 저자들간에 문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축자 영감이 의미하는 바는 성령께서 저자들을 심지어는 특정한 단어를 선택하는 일에서조차 이와 같이 지배하고 통제하고 인도하여, 오류를 범하는 것을 막으시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결과를 산출해 내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3. 축자 영감의 증거
1) 성경은 영감에 대해 명확한 주장을 한다
- 성경은 ‘거룩한 글들’을 칭한다. 범상한 글들이 아니라 특별한, 거룩한 글이라는 것이다.
- 성경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묘사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길”,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또는 이와 비슷한 표현이 놀랍게도 구약 성경에서만 3,808번 사용되었다.
- 예레미야는 종종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강권을 받았다(렘1:6-7).
- 선지자 자신이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단12:18,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라고 말한다.
- (벧전110-12) “이 구원에 대하여는 --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 사도 바울도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한 것으로서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한다고 말했다(고전2:13).
2) 축자 영감을 지지하는 결정적 구절들
디모데후서 3장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베드로전서 1장20-21절,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3) 성경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
주님은 성경을 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한 글자까지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신약과 구약을 둘 다 성경이라고 주장한다.
신약은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한다.
4) 성경의 일관성
구약에는 한가지 정신, 즉 메시아의 소망이 스며들어 있다.
신약에도 오직 하나의 위대한 주제가 있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이다.
5) 가장 중대한 증거-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그분은 단지 “기록하였으되”라고만 말씀하셨으며 그것이 최종적인 결론이었다(눅19:46,요6:45).
그분은 분명 구약 전체를 권위 있고, 최종적이며, 최고의 것으로 받아들이셨다.
6) 성령의 조명 외에 영감성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성경이 무오한 진리이며 신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완전히 수긍하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말씀으로,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면적 역사의 결과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Ⅰ:Ⅴ)
4장 우리는 어떻게 교리를 발견하는가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소요리문답)
1. 왜 이 주제를 살펴보아야 하는가
성경은 진술된 교리의 모음이 아니다. 사이비 종교들도 “우리 가르침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라고 한다.
초대교회 시절에도 이단들이 있었다(요일2:19).
2. 이성과 지성의 역할
1) 우리의 최종적 권위는 성경이다
계시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우리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권위라는 사실에 동의해야 한다.
2) 우리는 성경에 완전하게 복종해야 한다
① 성경의 교리는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다. 이성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② 이해되지 않는 진리도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이 기록하지 않은 것은 몰라도 만족한다.
③ 철학과 계시를 섞지 말아야 한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진리라면 이해하든 못하든 받아들여야 한다.
3) 자신의 논리와 체계를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철학자이다. 체계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서 버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성경의 모든 진술을 존중해야 한다. (강경 칼빈주의자의 잘못- 성경으로 증명할 수 없는 사실들을 주장). 4) 이성과 지성의 역할에 대한 일반적 규칙
성경의 권위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켜야 할 뿐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영감, 조명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3. 교리에 도달하는 방법
특정한 주제를 언급하는 모든 성경 구절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들을 서로 대조해 본 후 그 기저에 놓여 있는 교리를 발견하려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 모든 구절에서 공통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 교리이다.
1) 교리를 발견해 나갈 때 지켜야 할 일반적 규칙
① 교리는 성경에 명확하게 기술된 것이어야 한다. 성경으로 그 교리를 증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② 교리는 오로지 성경으로부터 온 것이어야 한다. 교리의 근원은 순수하고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성경이어야 한다. 뒷문을 통해 슬금슬금 들어오는 철학을 경계해야 한다. (심리학, 마케팅, 뉴에이지와 휴메니즘)
③ 교리는 명료해야 한다. 참된 교리는 언제나 평이하고 명백해야 한다. 성경은 노예들과 평민들, 보통사람들에게 쓴 것이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요일2:27). 오직 카톨릭 교회만이 성경을 바르게 해설할 수 있다는 로마카톨릭의 주장을 거부한다. 지난 일백 년 간의 신학중 많은 부분을 거부한다.
2) 실제적인 지침
연역법; 성경구절들로부터 의미를 쉽게 끌어내는 방법.
귀납법; 특정한 구절들로부터 교리를 세워 나가는 방법(예, 삼위일체교리는 성경에 진술된 곳은 없다.)
단 한 구절만으로 교리를 이끌어 내면 안 된다. 한 구절의 절반에만 의존하여 교리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다른 성경과 모순을 일으키는 결론을 끌어내면 안 된다. 언제나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야 한다.
4. 교리에 대한 의견의 차이
1) 의견차가 발생하는 이유
① 잘못된 방법으로 이끌어낸 교리(위의 규칙을 지키지 않음)
② 기존의 이론에 교리를 끼워 맞추는 경우/ 선입견이나 편견, 철학적 이론들을 개입시키지 않도록 주의.
③ 확실치 않은 사실에 대한 독단적 주장
④ 지나친 문자적 해석
⑤ 분파주의와 편견.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들어왔고, 또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2) 성경에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들이 존재한다
3) 반드시 알아야 하는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교리도 존재한다
그것은 구원의 길에 필수적인 교리들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문자적, 육체적인 부활에 대해서는 어떤 이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어떤 논쟁도 있을 수 없다. 이 교리는 최종적이며 또한 절대적이다.
5장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
1. 하나님에 대한 교리의 중요성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 이것을 강조하고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교리의 총합이다. 이 위대한 중심이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교리가 없이는 다른 모든 교리에는 아무런 뜻도 목적도 없다.
2. 하나님의 존재
1)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선언한다
2)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들
논증을 통해서는 결코 믿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믿음이 없이는, 믿음으로 이끄는 성령님의 내적 사역이 없이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3.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
1) 우리의 최고의 필요이자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대하는 어떤 축복들보다도 더 중요하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2)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능한가
성경은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가르친다
하나님은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에 거하신다. 영원하시고 절대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은 불가해한 분.
불가해한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셨다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지식은 그것이 부분적인 것이라 해도 진정한 지식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이것이 성경의 모든 가르침의 요점이자 목적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무한하신 은헤와 인자하심과 겸손하심에 의해 알려지실 수 있는 분이시다.
4. 하나님의 본성
1) 이 주제에 접근하는 합당한 자세
지적인 즐거움을 위해서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발을 벗으라”(출3:5).
우리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한다.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다(히12:28).
2) 무한하심
하나님은 절대적인 존재이시며 다른 무언가로부터 유래하지도, 다른 무언가에 의해 영향을 받지도 않는 분이라는 뜻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3:14). 하나님의 무한성은 그분이 다른 모든 것의 원인이며, 모든 실존, 모든 존재가 그로부터 유래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모든 구속과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만물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높으심, 장엄하심, 위엄, 탁월하심 등을 보라.
3) 영이심
주님이 영단번에 진술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하나님의 본성에는 물질에 속한 특성은 전혀 없다.
육체적인 감각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인지할 수 없다. 가장 놀라운 증거는 그분의 편재하심일 것이다.
* 하나님의 모습을 언급하는 구절들의 이해- - 하나님은 원하실 때는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실 수도 있다는 것. -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신뢰하도록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말씀하셨다.
4) 인격이심
인격은 마음, 지성, 의지, 이성, 개별성, 자의식, 자기 결정 등이 있는 곳에 존재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격이시라고 단언한다. 하나님을 단지 에너지, 의식이 없는 에너지, 의식이 없는 권능, 힘, 활력 등으로 묘사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인격이시라는 성경적 증거
간접적 증거- 성경은 피조물 안에 하나님 자신의 표지와 하나님의 지성과 감성의 표지를 남겨 놓으셨다.
직접적 증거- 하나님의 임재가 언제나 인격적인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나는 -- 이다”
최종적인 증거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인격 안에서 자신이 인격적이심을 나타내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5) 통일체이심(삼위일체)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6:4).
6장 하나님의 절대적 인격의 속성들
1. 하나님의 속성과 이름들
1) 이 교리를 고찰하는 목적
우리로 하여금 올바르게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도록 하려는 것.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2) 이 교리에 접근하는 방법
이름보다 속성을 먼저 다룬다
전적으로 성경의 계시에 의존해야 한다. 이 교리를 고찰하는 것은 과학적인 분석과 다르다
지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타락으로 인해 매우 위험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기뻐하신 것들을 받아들일 뿐이다.
2. 하나님의 속성
1) 하나님의 속성의 의미
하나님의 완전성의 일부분, 하나님의 덕의 일부분을 의미한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속성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고 어느 정도는 우리가 이해할 수도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실들, 하나님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영원한 본성의 몇 가지 측면들을 의미한다.
2)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 - 도덕적 속성들은 다음 7장에서 다룬다.
3. 하나님의 인격적(비공유적) 속성
하나님은 절대적 의미에서 인격적 존재이시다.
1) 영원성과 불변성
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시다. 그분은 영원하시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90:2).
불변성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여호와- 스스로 있는 자-의 의미는 ‘나는 언제나 동일하다’, ‘나는 변치 않는 자이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인격적 존재로서의 불변성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본성은 언제나 영원토록 동일하시지만, 하나님이 사람과 관계를 맺으실 때는 그 사람들이 회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다양한 행동을 취하신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절대적으로 완전하신 존재의 불변성이다.
영원성과 불변성의 교리는 신자에게 큰 위로를 준다
2)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체적인 의미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이 모든 곳에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임하시는 특정한 장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해야만 한다. 범신론은 하나님이 만물 안에 영원히 갇혀 있는 일종의 포로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인한다. 렘 23:23-24,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참조 시 139:7-10),
당신이 어떤 환경에 처하든 하나님이 여전히 당신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깨닫는 것은 놀라운 위안이 되지 않겠는가? 당신이 있는 곳 중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3) 전지하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하나님의 지식은 언제나 절대적인 지식이다. 그것은 완벽한 지식이며,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다. 시 147;5,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잠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시147;4).
인간과 인간적인 경험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밝히 아시오며”(시139:2). “나의 모든 길과 --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3).
과거와 미래의 모든 인간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완벽한 지식; 단 2장은 장차 올 나라들에 대한 예언이다.
4) 전능하심
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다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하심을 통해 뜻하시는 모든 것을 이루어지게 하신다. 전능하심이란 실행에 옮겨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18;14).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 그분의 힘, 그분의 능력, 그분의 강력함은 무한하다. 성경은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을 만드셨으며, 말씀하시면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창1:3) 빛이 있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능력은 무엇보다도 창조와 구원과 섭리라는 세 가지 방법으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5) 절대적 복되심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즐거워하시며 완벽하고 절대적으로 자족하신 분이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분 자신과 그분의 영광스러운 존재 안에서 기꺼이 만족하신다.
6) 영광
영광은 성경에서 그분의 위대하심, 그분의 광휘, 그분의 엄위하심을 묘사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왕상8:11),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사람들에게 희미하게 나타난 기록을 볼 수 있다.
7장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
1. 하나님의 도덕적(공유적) 속성
1) 거룩하심
소극적 의미- 하나님께서 죄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관계 없으시다는 것.
적극적 의미- 본질적이고 완벽한 순결.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거룩하심을 말한다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는 마치 하나님을 본 것 같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압도되었다.
욥과 이사야, 에스겔도.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하심에 감명을 받았다.
성경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이’(사40:25)라 부르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6)라고 명령하신다. 구약은 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거룩하심의 결과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계시이다. 그 목적을 위해서 율법을 주셨다.
성막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위대한 가르침을 실제적인 방법으로 가르쳐 주기 위해 설계되었다.
의식법들과 정결하고 부정한 짐승들에 대한 규정들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가르침의 일부이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합1:13).
주님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아버지’(요17:11)라고 부르셨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시71:22), ‘거룩한 종 예수’(행4:27), ‘거룩한 이’(행3:14)라 부르고, ‘성령(거룩한 영)에 대해 말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거룩하심에 대한 가장 숭고한 선포이며 계시이다.
하나님은 완벽하게 거룩하시기 때문에 갈보리에서의 끔찍한 죽음이 없이는 우리를 용서하실 수 없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우리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히12:28)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친애하는 하나님’과 같은 표현은 없다.
불타는 떨기나무의 모세(출3장), 웃사의 사건(삼하6장),
율법이 주어질 때 산이 불타고 아무도 거기 접근하도록 허락되지 않은 기사(출19:16-25).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의 참된 개념을 가르쳐 준다
죄가 무엇인지, 내 죄성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야 한다.
찰스 웨슬리는 ‘비열하고 죄로 가득한 나여’라고 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속죄의 필요성을 보여 준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거룩하심을 보여 주지만, 동시에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죄에 대한 속죄를 요구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2)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의는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의와 공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실행하는 것이며, 세상을 통치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의는 하나님의 입법적 거룩하심의 표현이고, 공의는 사법적 거룩하심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의로운 요구들을 부과하시기 위해 율법을 제정하셨고, 공의에 의해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어기고 죄를 범한 죄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신다. 의는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공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이 혐오이다.
하나님의 의와 공의가 드러나는 다양한 영역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는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며 하나님의 진노는 이것의 표현이라는 것.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에도 의와 공의를 드러내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을 제공하심으로 죄사함의 길을 준비해 놓으셨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5).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말씀을 지키신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의과 공의가 나타난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들을 상 주신다. 하나님은 의롭다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다. 그것이 우리의 성화이다. 이 일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책망할 것이 없게 되고, 심지어 그분 자신처럼 의롭고 거룩하게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3) 선하심과 사랑
순서에 주의하라. 거룩함, 의와 공의/ 선하심과 사랑이다. 두 단어는 어느 정도 상호 교환이 가능하다.
선하심과 사랑의 구분
선하심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모든 피조물을 관대하고 친절하게 다루도록 하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145:9).
사랑은 그분이 자신을 다른 존재에게 영원토록 전달하도록 만드는 속성이다(삼위일체 교리).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선하심과 사랑을 일반적인 방법으로 나타내신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5).
은혜는 하나님이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이다
은혜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 혹은 사랑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복의 원천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가르친다. 모든 것은 영원하고 끝없는 은혜의 샘에서 나온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딛2:11). 딛 3장은 하나님의 은혜의 가장 장엄한 진술이다.
자비는 하나님이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이다.
인자하심과 긍휼도 같은 표현이다. 자비는 자신들의 죄의 결과로 비참함 혹은 괴로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공로와는 상관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이다. 각 서신서의 인사말에서 자비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시편 특히 103편에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영광스러운 진술이 나온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9:18).
인내와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이 오래 참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모두 진멸되어 버렸을 것이다. 하나님이 완악하고 악한 자들을 참으신다는 의미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2:4).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3:15).
4) 신실하심
그분이 당신이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하늘에까지 미친다고 말한다(시36:5). 성경은 하나님이 언제나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며 언약을 결코 어기지 않으신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성경은 시련과 시험과 갈등의 모든 시기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실 것이며 분명 자신의 종들을 지키시고 구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9).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5:23-24).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신의 궁극적 운명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매달리는 것
허드슨 테일러, ‘하나님을 믿으라’(막11:22)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매달리라’로 번역해야 한다고 했다.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당신이 어디에 있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매달리라.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2.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때 주의할 사항
하나님의 속성들 중 어느 하나라도 따로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하나의 속성을 다른 속성과 대치시켜서는 결코 안 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자비를 대조시켜서는 결코 안 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면서 언제나 그리고 동시에 자비로우시다. 이 일에 오류를 범하여 멸망에 이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속성 안에 전체로 거하시며, 하나님은 이 모든 속성을 동시에 소유하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라.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그분의 공의와 대립시키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인가!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균형의 완전성을 우리의 사고에도 항상 유지해야만 한다.
8장 하나님의 이름들과 삼위일체
1. 하나님의 이름
1) 이름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성품을 상징하는 경우를 시편 22:22에서 볼 수 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에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17:6),‘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26절).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사람들이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이름들과 그 의미
엘, 첫 번째, 최고라는 의미이다. 힘과 능력, 즉 강력함이라는 개념을 전달한다.
엘로힘(복수형태). 하나님이 강력한 분일 뿐 아니라 두려워해야 하는 분이라는 개념을 전달하며,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와 관련하여 자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시는 이름이다.
엘룐. 높고 고귀한 분이라는 의미이다.
아도나이. 전능하신 주, 만물이 복종하며 모든 사람이 섬기는 통치자라는 의미이다.
샤다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의 권능만이 아니라, 특별히 그분의 은혜와 자비, 그리고 사람들과 맺으시는 관계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통제권을 강조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언약의 이름.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는 분-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이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신다는 의미이다.
여호와 사바오트-‘만군의 여호와(삼상1:3)’. ‘만군’은 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안전하다.
여호와 이래-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창22:14).
여호와 로페- 치료하시는 여호와(출15:26).
여호와 닛시- 여호와 나의 깃발이라는 의미. 이스라엘의 정복과 승리를 위함.
여호와 샬롬- 기드온에게 계시한 이름(삿6:24). 여호와는 우리의 평강이시라는 의미.
여호와 로에- 여호와 나의 목자(시 23)
여호와 치드케누- 여호와 우리의 의(렘23:6).
여호와 삼마- 여호와가 계시다의 의미(겔48:35).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며 하나의 인격으로서 행동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신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임마누엘
아들은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권능의 통치자,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2. 삼위일체
1) 삼위일체 교리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삼위일체 교리는 가장 신비롭고 어려운 교리다
이 교리는 성경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다른 무언가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다.
그 누구도 이 교리를 생각해내지는 못했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가장 독특하고 영광스러운 교리다
그럼에도 이 교리를 강조하지 않는 현상은 편안하고자 하는 바람, 경험에 안주하는 경향, 지적인 수고를 요구하는 일은 무엇이나 회피하려는 경향으로 등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게으름의 또다른 예가 아닐까.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
해와 해에서 나오는 빛에 비유. 씨와 땅과 꽃에 비유. 성경에 계시된 신비 앞에 서 있다.
우리의 이해나 능력을 완전히 초월한다. 경이와 경외감과 예배함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놀랄 뿐이다.
성경은 삼위일체 안의 세 복된 위격이 영원무궁토록 서로를 완벽하게 사랑해 왔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삼위일체는 성경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는 교리다
성경에는 이 교리에 대한 명백한 진술이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2)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삼위일체 교리는 세 하나님이 있다는 의미-이것을 삼신론이라고 부른다-가 아니다. 구약 전체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오직 유일한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계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6;4). 이스라엘은 다양한 신들을 믿는 민족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스라엘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유일성과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시다는 사실을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 주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하신 것도 같은 내용을 말씀하신 것이다. 둘이 아니다. 야고보 역시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약2:19)고 말했다.
우리는 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님을 계속해서 말해야 한다.
한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가장 깊은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신성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계시다. 이 셋은 한 하나님으로서,
본질상 동일하시고, 능력과 영광이 동등하시다.’
3) 삼위일체 교리의 성경적 증거
성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성부가 하나님이신 것처럼 말씀도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두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신성만이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그리스도--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9:5).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딛2:13)을 기다리라.
복음서들을 읽어 보면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질 수 있는 속성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지고 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5;26)-하나님의 영원성.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5:26).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17:2).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불변성.
전능하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편재성. 예수님은 전지하시기에 모든 것을 아셨고 아무것도 그에게서 숨지 못했다(요2:25).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 주님은 자신에게 심판할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시며(요5:27), 심판자가 되실 것이다.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의 증거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3-4).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12;31).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또한 우리 주님이 자신과 성부께서 보내실 ‘또다른 보혜사’(요14:16)를 언급하셨다.
위격은 양태의 변화가 아니라는 사실의 증거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세 위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위격만 있으며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신다. 하지만 그 한 하나님이 자신을 여러 다른 방식으로 계시하실 수 있다. 그분은 어떤 때는 자신을 성부로 계시하시고, 다른 때에는 자신을 성자로 계시하신다. 그리고 또다른 어떤 때는 자신을 성령으로 계시하신다’. ‘같은 사람이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설교자가 될 수 있다’. 성경은 그 모든 것을 부인한다. 성부, 성자, 성령은 단순히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는 양태들이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 성경이 세 위격을 함께 지칭하고 있기 때문에 세 위격의 존재는 확고하게 증명될 수 있다. 예, 동정녀 마리아에게 아들의 탄생을 고지할 때,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 태어나실 성자의 능력이라는 말로 세 위격이 언급되었다.(눅1:26-38). 세례 때도 확인하게 된다. 성자가 물 속에 계실 때 성령이 비둘기의 형태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으며 성부 하나님의 음성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마3:13-17). 요한복음 14, 15, 16장을 주의깊게 연구해 보라.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15;26).
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증거
성자가 성육신하시고 성령을 보내시기 전까지는 삼위일체의 교리가 완벽하고 분명한 형태로는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구약에는 이 교리가 기록되어 있다. 엘로힘은 복수형이다. 하나님 자신을 복수 형태로 말씀하신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창3:22).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창11;7).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6:8). 이 용어들 자체가 삼위일체를 시사한다. 구약에 나타나는 언약의 사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현현이었다.
창세기 처음 부분에 ‘성령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한다. 선지자들에게 말하도록 하신 분은 성령이셨다. 성막을 지을 때 브살렐에게 임하셔서 정교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신 분도 성령이셨다(출31:2-5)..
4) 세 위격의 관계
성경 도처에 나와 있는 대답은 그들이 영원히 공존하신다는 것이다. 종속의 관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자라는 사실은 그분이 성부와 대등하시다는 의미이다.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거나 성부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 ‘그 본체의 형상’(히1:3)이시다.
요약. 삼위일체는 영원 전부터 신성 안에 존재해 오셨다. 아타나시우스 신조, ‘성부는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며, 성령 역시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세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신다. 성부는 주님이시고, 성자도 주님이시며, 성령 역시 주님이시다. 그러나 세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주님만 계신다. 기독교의 진리에 의해 각각의 위격 자체가 하나님이시며 주님이시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듯이, 그 동일한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세 하나님과 세 주님이 계시다고 말하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경륜적 삼위일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삼위 간에 구분이 존재함을 말한다. 이것은 삼위일체 교리의 가장 영광스러운 측면이다. 세 위격 간에 구분이 이루어지며, 이러한 구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세 위격 사이에 일종의 주종관계가 발생한다. 성부께서는 창조하시고, 선택하시며 구원의 계획을 세우신다. 성자는 성부께 보내심을 받아 이 구원을 이루신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 의해 보내심을 받아 구원을 적용하신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생각이다. 복되신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사역을 나누셨다는 것이다. 성자는 자신을 성부의 뜻에 맡기셨고, 성령은 자신을 성부와 성자의 뜻에 맡기셨다. 성령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를 증거한다. 성자는 성부와 동등하고 영원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과 사역을 성부로무터 받으셨다. 이것이 경룬적 삼위일체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가장 고귀하고도 가장 장엄한 진리이다. 이 모든 것을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마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우리는 겸손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자세로 이 진리를 계시된 그대로 받아들여서 경배와 놀라움으로 예배하는 자리에 나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지만 진리이다. 특별히 우리를 위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참된 진리이다.
제 9장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1. 작정 교리를 살펴봐야 하는 이유
하나님의 모든 역사의 근저를 이루며 그것을 특징짓는 몇몇 위대한 원리가 있다. 하나님은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시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일들을 생각하시고, 결심하셨으며, 결정하셨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혹은 방법에 대한 성경의 묘사를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의 교리라고 부른다. 이 교리가 가장 어려운 이유는 영원하신 분의 마음, 즉 우리의 유한한 이해력을 초월하고, 우리의 보잘것 없고 왜소한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교리에 집중하는 이유는 1) 그것이 성경에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작정의 교리는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준다. 3) 이 교리는 우리를 많은 오류로부터 구해 준다. 4) 개인적으로 이 교리는 커다란 위로를 준다. 미미한 존재일 뿐인 나의 배후에 하나님의 자신의 영원하신 작정이 있다는 것보다 더 위안을 주는 것은 없다.
2. 작정의 교리에 접근하는 자세
1) 편견들과 모든 당파심을 버려야 한다. 특정한 입장을 취하고 이미 믿어 왔다고 생각하는 일을 고수하는 것을 말한다. 2) 철학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큰 저주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이해는 것, 그것이 철학의 목표이다. 이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측면들이 있다. 3)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성경의 계시를 넘어서는 질문은 하기 않겠다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믿음은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즉각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교리는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 그 외 성경에서 발견되는 다른 모든 것에 비추어 모순을 일으키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말하지 않도록 대단히 주의해야 한다.
3. 작정 교리의 기본 명제들
1)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의 피조물에 대해 변치 않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성경은 “창세전에”(엡1:4)와 같은 문구를 계속해 사용한다. “때가 차매”(갈4:4)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는 불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지 않으신다. 그 어떤 것도 우연이거나 우발적이거나 불확실하거나 뜻밖에 일어나는 일은 없다. 하나님은 창조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구원에 대해, 이 세상의 모든 삶에 대해, 이 모든 것의 마지막과 궁극적 운명에 대해 명확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 그 분이 일어나게 하신 모든 일은 그분 자신의 영원한 계획에 따른 것이며, 그 계획은 고정되어 있고, 확실하고, 변하지 않으며, 절대적이다.
2) 하나님의 계획은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일과 사건들을 포괄하고 결정한다.
하나님이 특정한 결과를 계획하셨다고 믿는다면, 그 결과로 이끌어 가는 모든 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신다고 믿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의 교리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고 정해진다고 말한다.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동들도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0-11). 우리에게는 아주 우연한 사건처럼 보이는 일들을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통제하시고, 결정하신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었나니”(마10:29-30).
악한 행동까지도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박아 죽였으나”(행2:23).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주목하십시오-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4:27-28). 요셉,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 ”(창45:8). 형들의 악한 행동들도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영원하신 작정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도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악을 유발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악을 승인하시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한 행위자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허용하시며, 그분 자신의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악을 지배하신다. 죄를 금하고 벌하는 도덕법을 정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 또한 죄의 발생을 허용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악에 한계를 설정하여 그 악이 벗어나지 못할 정확한 궤도와 이루게 될 결과를 결정하며, 결과적으로 선을 이루도록 지배하신다. “당신들은 나를 헤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사건도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동이었으나 그럼에도 하나님의 위대한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의 일부였다.
3)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무조건적이고 주권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그분 자신의 거룩하심 외에는 어떤 것에도 좌우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삶에 원인과 결과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교리가 말하는 것은 모든 원인과 결과, 자유로운 행동들은 하나님 자신의 작정의 일부라는 것이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4:3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2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이 교리가 가장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는 곳은 로마서 9장이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11).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13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9:14).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9:15-18).
4) 하나님의 작정은 효력있는 작정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전능하심과 그분의 능하심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들은 결코 실패할 수가 없다. 결정하시고 뜻하시는 것은 틀림없이 일어나야만 한다. 아무것도 막을 수가 없다.
5)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본성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그분 자신의 최고로 지혜롭고, 자비하시고, 거룩한 본성과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일치한다. 하나님 안에는 모순이 없다. 두 가지 사실을 확신하고 항상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은 결코 죄의 원인이 아니시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합1:13).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둘째,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의 피조물의 본성 및 행동 양식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궁극적인 조화가 존재한다. 하나님은 자유를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궁극적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지배하신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도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3).
6) 하나님은 창세 전에 구원을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그분의 선하신 듯과 은혜로 말미암아 이 일을 하신다. 마 11:25-26을 다시 읽어보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요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절). “영생을 주시리고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2:13).
7)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롬 9:20-23을 다시 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역사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작은지, 얼마나 유한한지, 타락의 결과로 얼마나 죄악된 존재가 되었는지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가 이 영광 가운데 들어가기까지는 궁극적인 이해를 보류해 두어야 한다. 지금 이곳,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일관성이 있으심을 믿고, 하나님이 그의 영원하신 작정과 창세전에 결정하신 일들에 대해 명백하게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제 10 장 선한 천사들
1. 천사의 교리를 고찰하는 이유
성경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 사람과 관련하여 무언가를 만드시기 이전에 천사라고 하는 하늘의 지적 존재를 생겨나게 하셨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천사들에 대한 성경교리를 주제로 하는 설교나 강연을 들어보셨는가? 얼마나 자주 이 교리를 고찰하거나 묵상해 보았는가? 왜 그리도 성경의 일부분을 무시해 버리는 걸까? 심지어는 복음주의자들조차도 최소한의 교리로 만족할까? 오로지 구원의 교리에만 흥미를 느낄까? 풍부한 진리를 빼앗기고 만다. 교리에 도달하지 않는 성경공부는 결국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2. 천사에 대한 일반적 사항들
‘천사’라는 용어는 ‘사자(messenger)’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아들 자신에게도 쓰여졌다. ‘언약의 사자’로. .
1) 천사는 피조된 존재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기 이전에 하나님의 의해 창조된 존재들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권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 천사들을 묘사하는 용어들임-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2) 천사는 영적인 몸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 인간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영적인 몸을 입게 되는 것과 같이, 부활 이후 우리 주님의 인간의 몸이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영적인 몸이 된 것과 같다. 이것으로 천사들이 여러 사람에게 출현했던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 창18장에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3) 천사들에게 성별이 있는가? 예수님은 마 22:29-30에서 “부활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하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셨다. 천사들이 언제나 남성인 것처럼 “그”라고 지칭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4) 천사는 죽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눅20:36). 히브리서는 주님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분으로 묘사했다. 5) 천사는 사람보다 우월하다. 그들이 하나님보다 못하며 성자보다 못하지만 인간보다 우월한 영역에 있으며 여러 면에서 사람보다 위대하다. 6) 천사의 이름과 칭호. 그들은 “영들”이라고 언급된다. 엡 1:21에서는 그들이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이라고 묘사되고 있다. 엡 6:12에서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싸움을 말할 때, 그는 악한 천사들을 언급하고 있다. 다른 용어는 “거룩한” 천사들이다(눅9:26). 딤전 5:21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이라고 한다. 종종 “섬기는 천사들”이라고도 묘사된다.
“그룹”(시 99:1, 겔10:1-10) 또는 “스랍”(사6:2), 계 4장의 “생물”- 아마도 같은 존재를 가리키고 있다. 동의어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동물의 모양을 하고 있다. 적어도 모양에 있어서는 혼합된 존재인 것 같다. 특별한 천사들이다. 그들은 피조된 생물의 최고의 특성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들의 주된 기능이 우리를 섬기는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궁극적으로 구원이 완성될 때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거하게 될 만큼 고귀하게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요! 그들이 언제나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 거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이것이 여러분과 나의 미래의 운명이라고 가르쳐 준다. 그들은 우리의 궁극적 구원과 영화 그리고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직접적 임재 안에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에 대한 상징이다.
7) 천사의 조직. 천사의 수는 셀 수 없는 만큼 많다. 예수님은 열두 군단 되는 천사들을 불러 자신을 지키도록 하실 수 있다고 하셨다(마26:53). 주님 탄생시 “수많은 천군”의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눅2:13). 계시록 5장에서 만만이요 천천의 크고 강력한 천사의 무리라고 했다(11). 천사들은 지위와 사역 모두에 구분이 있어 보인다. “천사장”이라는 표현은 두 번 나타난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살전4:16).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유9). 미가엘은 이스라엘의 보호자였고 바사국 군에 대항하여 싸웠다(단10:13).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전달해야 할 말씀을 기다리며 서 있다고 했다. 마리아에게 보내졌으며(눅1:26), 스가랴에게도 보내졌다(눅1:19). 천사들간에는 모종의 질서, 모종의 구분이 있다. 악한 천사들, 즉“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6:12) 사이에도 질서가 있고 등급이 있다. 천사들은 큰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한다(시103:20). 인간의 능력보다 크다.
3. 선한 천사들의 임무
선한 천사들의 거주지는 하늘의 하나님 보좌 주변임이 분명하다.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1) 일반적 임무.
-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함. 계시록 5장을 보라. 이것이 가장 우선적인 일이고, 그들이 기뻐하는 일이고,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들은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장).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의 지시에 주목하고 있다.
- 우리의 구원을 탐구함. 베드로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1:12). 바울은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통치자들과 권세들, 즉 천사적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경이를 보여 주시려 하신다고 말한다(엡3:10).
- 성도들 가운데 임함.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고전11:10).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만날 때, 그들이 기도로 함께 모일 때,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자리에 임한다고 가르치며, 여자들은 공기도에 참여할 때 천사들의 임재로 인해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
-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됨. 율법은 천사들의 중개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히2:2). 하나님의 목적들을 계시함.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그분의 목적을 천사를 통해 계시하셨고(창18장), 야곱에게 자신의 뜻을 천사를 통해 계시하셨고, 기드온 역시 천사를 통해 그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들었다. 요셉에게 마리아의 일로 염려하지 말라고 한 것도 천사였고, 애굽으로 도망가라는 것도, 거기서 나오라고 한 것도 천사였다.
2) 성도를 섬김- 가장 큰 임무.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1:14).
-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용 받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시간 동안, 그들은 우리를 준비시키는 일을 돕는다. 고낼료의 회심이야기를 보면(행10장) 그가 기도하고 있을 때 한 천사가 갑자기 그에게 나타나 그의 구원에 대한 ‘예고편’을 보여주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준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예배 장소에 가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우연히 누구를 만나게 되는 일들이 벌어진다.
- 성도를 보호함.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91:10-11). 다니엘,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다”(단6:12).
- 성도를 인도함. 천사가 준 지시의 결과로 에티오피아 내시의 회심사건이 일어난다.
- 성도를 위로함.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천사)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행27:23-24). 겁먹어 떠는 엘리사의 종에게 보이지 않는 군대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해준 것도 천사였다(왕하6장).
- 성도를 구해 냄.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 벗어지더라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로 하거늘”행12장).
- 성도가 죽을 때 낙원으로 인도함. “이에 죽어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눅16:22-23). 결단코 그리스도인들이여, 자신이 죽을 때 육체에서 분리된 영으로서 어떤 미지의 세계로 가는 무시무시한 외로움에 빠지게 되리라는 생각은 다시 하지 말라.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당신을 받아주고 안내해 주고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있도록 데려가기 위해 거기 있을 것이다. 부자는 "죽어 장사되었고“고만 나와 있다. 어떤 천사도 그를 영접하기 위해 나와 있지 않다. ‘수호 천사’의 교리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3) 심판
- 하나님의 원수에게 심판을 행함.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게 되었다(행12:23). - 최후의 심판을 수행함.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마13:40-42).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49).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24:30-31).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6-8).
11장 마귀와 타락한 천사들
1. 이 교리를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
우리의 가장 큰 적인 다른 천사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를 반대하고 우리에게 대항한다. 성경이 말하는 이 타락한 혹은 악한 천사들을 살펴보지 않고는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실수의 핵심은 그들이 마귀와 그의 천사들에 대한 성경의 교리를 살펴보지 않는데 있다. 자기들을 대적하고 있는 권세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모르니까 심리학자나 정신분석가에게 가는 것이다. 치료의 핵심은 그들이 깨닫는 것이다. 즉, 그들이 자신 및 자기의 개인적 죄와 실패의 탓으로 돌리던 일들이 사실은 성경에 마귀라고 묘사된 이 강력한 대적자의 탓일 뿐임을 보게 하는 것이다. 마귀와 그의 천사들에 대한 성경의 교리가 우리에게 가장 위안이 되고 해방을 주는 교리가 될 수도 있다. 마귀와 그의 포로들은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한다. 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교리를 그처럼 잘 연구하지 않고, 살아가면서 그것에 적절히 주의를 기울이는데 실패할까? 마귀는 우리를 잘못된 열심히 가득 차게 해서 육적인 일과 영적인 일을 혼동하게 만들고, 원수의 영향을 최고로 받도록 할 수가 있다.
2. 마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 마귀를 지칭하는 이름들
“사탄”-‘적대자’의 의미. “마귀”-‘중상자’의 의미. “바알세블”- 마귀들의 왕이라는 의미.
“아블르온”- ‘무저갱의 천사’, “이 세상 임금”, “이 세상 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2:2). “용”,“사자”, “계명성”, “옛 뱀”. “악한 자” 요일 5:19,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성경에서 ‘악’으로 번역했으나 ‘악한 자’일 가능성이 높은 경우가 많다. “악에서 구하옵소서”(마6:13)는 “악한 자에게서 구하옵소서”의 의미다. 요 17장도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를 위함이니이다”도 “악한 자로부터 보전하시기를”이라고 번역하여야 한다.
2) 마귀는 인격이다.
적어도 지난 한 세기 동안 마귀를 인격으로 믿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기 때문에 현시대에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성경은 마귀를 인격이라고 가르친다. 복음서의 우리 주님이 시험받으신 기사 자체가 이 사실을 분명히 증거해 준다. 주님을 시험한 것은 인격적 존재였으며 주님도 그를 인격적 존재로 호칭했다. 욥기 1장에도 마귀는 인격적 존재로 나타나 하나님께 말을 하고 하나님도 그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8:44).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마13:19).
마귀의 속성은 그를 따르는 자들의 속성이기도 하다. 이들은 “귀신” 또는 “타락한 천사들”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 그리고 타락의 결과로 우리의 본성이 지닌 악과는 별개로, 우리를 따라다니고 있는 외부의 인격적 존재와 우리가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 인격적 존재는 대단히 잘 조직된 왕국의 소유자이자 우두머리이며,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하나님의 역사를 파괴하는 것이다.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엡6:12). 인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창세기의 초반부에서부터 마귀가 인격이라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볼 수 있다. 그가 다가와 하와를 유혹하여 타락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성령”이라는 말 자체가 그 반대말인 “악한 영”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 그리고 그 나라에 속한 모든 것을 대항하는 이 인격적 존재가 있음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3) 마귀의 기원
성경은 많은 것을 알려 주지 않는다. 에스겔 28:11-19가 거의 의심의 여지 없이 마귀에 대한 설명으로 본다. 처음에는 사람에 대한 묘사로 시작했지만 결국 사람 이상의 존재를 묘사하고 있다. 예언은 보통 이중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부분적으로는 어떤 왕 혹은 군주에 대한 예언이지만, 메시아에 대한 암시를 준다. 현재의 사건과 미래의 사건을 동시에 진술하고 있다. ① 그가 창조되었다는 것.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13절). 마귀는 영원전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다. 악은 영원하고 사탄도 영원하며 두신 곧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 강조해야 할 부분이다. ② “기름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14절). 그룹들은 가장 높은 존재 형태이며 그들의 직무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전체 우주의 예배를 바치는 것이다. 성경의 많은 구절을 통해 그가 모든 천사들 중 가장 뛰어난 존재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가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었다는 겔 28:13의 표현은 창세기의 그것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첫 번째 창조에 대한 언급으로 봐야 한다. 창 1장은 두 번째 창조로 보아야 한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15절).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17절).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일을 이끄는 대신 스스로 예배를 받고 싶어했고, 하나님과 대등하게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하나님께 죄를 범했으며 하나님에 의해 내던져지고 말았다.
이사야 14장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12-15절). ③ 성경은 악의 궁극적 기원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는다. 믿음이란 주어진 계시에 만족하는 것이다.
4) 마귀의 능력
마귀는 천사보다도 우리보다도 큰 능력을 가지고 있다. 천사장 미가엘조차도 마귀에게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했다(유다9절). “우는 사자”(벧전5:8), “리워야단”(사27:1), “용”이라 표현된다. 마귀는 우리 몸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이다. 주님은 “마귀에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행10:38)
① 마귀는 모든 악의 기원이다. “이 세상의 신”(고후4:4),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2:2). 그는 악한 자, 악의 결정체이다.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히2:14) “마귀와 그 사자들”(마25:41). 교훈은 마귀에 대해 절대로 막연하게 , 혹은 경솔하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마귀는 농담의 대상이 아니다. 성경은 결코 마귀를 그런 식으로 가볍게 언급하지 않는다. 성경은 마귀의 능력과 그의 지위를 강조한다. ② 마귀는 허용적 의지 안에서만 활동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하신 지혜 안에서 마귀가 마지막까지 어느 정도의 권능을 유지하도록 허락하셨지만, 그 능력은 결국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다. 그것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허용적 의지였으며, 마귀는 욥의 경우에서 보듯이 오직 허용하신 만큼만 행할 수 있었을 뿐 그 이상은 하지 못했다(욥1:12, 2:6). ③ 마귀는 유한한 존재다. 마귀는 “하늘”에 거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지만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다닌다는 기록도 있다. 마귀는 한 번에 한 장소에만 있을 수 있다. 그는 편재하지 않는다. 수가 많고 모든 곳에 그의 대리자들이 있기 때문에 모든 곳에 있는 것으로 우리를 속인다.
5) 마귀의 특성
속이는 자, 거짓말쟁이, 비방하는 자, 살인자,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 교활함과 교만으로 가득 찬 자이다.
6) 마귀의 일
① 요한은 그리스도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고 말한다(요일3:8). 하나님의 일을 멸하고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이는 것이다. ② 마귀가 죽음의 권세를 지배하는 자가 되었다는 말의 의미. 히 2:14은 어려운 구절. 궁극적으로는 죽음의 권세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 사람이 마귀의 말을 들었던 순간에 그는 자신을 마귀의 권세와 지배 아래에 놓았으며, 그럼으로써 죽음이 그에게 선고되었다. 마귀는 이 사망선고를 당당하게 청구한다는 의미이다. ③ 마귀는 불신자들의 삶을 지배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했다”(요일5:19).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2:2). 불신자들이 진리에 눈이 멀게 하고, 이 사람들의 삶을 명령하고 통제한다.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고후4:4). 그는 불경건한 자들의 삶에 있는 모든 형태의 정욕과 욕망과 악의 아버지이다.
④ 마귀는 신자들을 대적하고 낙심시킨다. 우리의 하나님께 우리 자신에게 참소자이다. 그는 우리의 일과 활동을 방해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 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3:1). 단 10:3은 바사 국왕이 천사장 미가엘을 방해했다고 말한다.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2:18). 사탄은 우리를 낙심시킨다. 우리를 속이려 하고 삼키려 한다(벧전5:8).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눅22:31). 사탄은 그의 간계와 그의 올무와 그의 불화살과 그의 간사함과 그의 암시로 우리를 시험한다. 그는 우리의 정욕을 자극하고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언짢은 마음, 우리의 우울함, 우리의 절망감, 우리의 자포자기하는 마음 대부분은 그의 책임이다. 자기 생각에 파묻혀 스스로 자신의 약점, 실패, 무능력함 등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들에 집중하는 것들은 마귀로 인한 것들임을 확신할 수 있다. 마귀는 질별을 걸리게도 한다. ⑤ 마귀는 타락한 천사들을 자신의 사자로 사용한다.
7) 우리는 마귀를 대적할 수 있다.
마귀의 능력은 하나님 아래에 제한되어 있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이미 마귀를 이기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 힘을 받아 마귀를 대적할 수 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야고보).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마귀를 패배시키고 대적할 수 있다. 성도들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하는 말씀으로서 그를 이기었다”(계12:11). 두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절대 가볍거나 경박해서는 안되며 무모해서도 안된다. 하지만 그 대적이 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겁쟁이처럼 두려움 속에 우리의 삶을 보낼 필요가 없다.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4:4).
12 장 세상의 창조
1. 창조에 대한 일반적인 사항들
1) 창조에 대한 완벽한 설명이나 근본 원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주어진 창조에 대한 설명은 완전히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단언한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2) 하나님은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 세상은 별개의 존재지만 언제나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7). 물질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범신론에서는 물질이 하나님이다. 이원론은 하나님과 물질이 영원하다고 한다. 세상은 또다른 조물주인 적대적인 영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3) 창조는 그분의 영광에 따른 자유로운 행동이었으며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4) 창세기에는 하나의 창조기사만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4절이하에 서로 다른 기사가 절대 존재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 --내력이니”라고 시작하고 있다.
2. 창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 창조는 삼위 하나님의 역사다. 일반적으로 창조는 성부께서 하신 일로 여겨지지만, 성경은 성자의 일임을 말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요1:3). 창조는 또한 성령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2) 시간은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
3) 창조에 관련되 성경의 용어. ① “바라” 기존의 선재하던 물질의 도움 없이 만드는 것. 창 1장에서 단 세 번만 사용. 1:1(천지), 21(동물), 27(사람). ② “아사” 이미 존재하는 물질로부터 준비하는 것, 창조의 날들에 하신 일. 1:7,16,25,26,31. ③ “야찰” 선재하던 물질로부터 만들어내는 것. 2:7,
4)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의 관계. ① 한 과정의 두 단계라는 설. ② 두 구절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설.
1절은 원창조. 사탄과 천사들이 살았을 하늘과 땅의 창조. 그후 천사들의 타락으로 재앙과 파멸이 이르렀다. “혼돈하고 공허하며”는 황무함과 파멸을 시사한다.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 엎으시고”(사24:1).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렘4:23). 지질학상의 지층문제를 해결해 준다.
3. 창조의 세부 사항
1) 창조의 날들.
첫째 날, 빛 창조. 빛과 어둠이 나뉘고 낮과 밤이 형성. 빛은 빛을 내는 창공, 또는 전기를 의미하는 것 같으며, 해는 빛의 전달자이다.
둘째 날, 위의 물과 아래 물을 나눔. “위”는 구름, “궁창”은 드넓은 공간을 말함.
셋째 날, 바다와 마른 땅의 나눔. 초목으로 이루어진 식물계가 생김. 풀과 씨맺는 채소, 씨가진 열매로 구성되고, “각기 종류대로” 생김. 종(種)들이 각각 분리되어 있으며 진화되어 나온 것이 아님을 의미.
넷째 날, 빛의 전달자인 해와 달과 별의 창조.
다섯째 날, 새와 물고기의 창조. “그 종류대로” 강조.
여섯째 날, 먼저 동물 창조. “그 종류대로” 강조. 사람의 창조. 처음 세 날과 다음 세 날간의 유사점.
첫째 날 |
넷째 날 |
빛의 창조 |
빛의 전달자의 창조 |
둘째 날 |
다섯째 날 |
궁창의 창조와 물의 분리 |
궁종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창조 |
셋째 날 |
여섯째 날 |
물과 마른 당의 분리 인간과 짐승이 살 땅 준비 |
땅의 짐승가 육축, 기는 모든 것과 사람을 창조 |
2) “날”의 의미
① 스물 네 시간이라는 설. 히브리어 단어의 일차적 의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문구의 중요성.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출20:8,11) ② 장기적인 기간이라는 설. 특히 앞의 세 날. 동일한 단어가 불확정적인 시간을 의미. “재난의 날”(렘51:2). “여호와의 날”(사13:6, 욜3:14).
4. 창조와 현대과학
1) 창조 교리와 확증된 과학적 사실은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문제의 대부분은 오류를 사실로, 가정을 진리라고 고집한다는 사실 때문에 발생한다. 단순한 가정과 의견에 불과한 것들이 과학인 것처럼 가장하고, 성경적이라고 간주되는 것들이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세기를 생명 및 세상과 인간의 기원에 대한 이집트와 바벨로 문헌의 기사들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나다. 그것들은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런 신화와 미신, 과장과 저속한 진술들이 나와 있다. 욥기에 벌써 지구가 하나의 구(球)라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26:7) 하나님 자신이 계시하신 것이다. 그것은 최신 정보요 현대과학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순서가 현대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순서와 일치한다.
혈액형은 네 가지, 인류는 네 가지 집단으로 분류하는데 단 두 명의 사람에게서 유래함이 금세기에 밝혀졌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행17:26).
지질학적 문제에 답하는 방식 중 하나는 1절과 2절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보는 것. 대부분의 난점에 답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타락 자체가 커다란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는 가정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지층의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일이 홍수 때에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다.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만이 정직하고 안전한 태도이다. 이론과 사실, 가설과 증거의 차이를 언제나 주의 깊게 구분해보아야 한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사실들이 우리 앞에 제시될 때 그 사실들을 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몽매주의(사실에 어둡고 어리석음)의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실이 우리를 곤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그 사실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결코 사실들을 꾸며 내려 해서는 안되며, 명백히 사실이 아닌 이론들을 주창해서도 안 된다. 사실 과학자들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고집 센 집단이다.
교조주의는 설교단에만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실험실과 라디오, 책들에서도 교조주의를 만날 수 있다.
2) 창조와 진화의 문제. 많은 젊은이들이 학교와 대학, 그 외 여러 곳에서 마치 진화가 한 점 의혹의 여지도 없이 입증된 것인 양 배워왔다. 진화의 정의는 생명은 스스로 발생한다는 것. 생명은 그 자체가 힘과 능력이며 이미 존재하는 유형으로부터 다른 유형을 생산한다. 처음에는 극도로 단순하고 분화되지 않은 존재로 시작하지만 여기서 더 복잡하고 복합적인 존재가 생성된다는 것. 진화론자도 여러 유형. 무신론적 진화론, 이신론적 진화론, 유신론적 진화론 등.
진화는 하나의 이론일 뿐이다. 어느 누구도 입증할 수 없다. 서로 일치하지 않는 많은 이론들이 있다. “당신은 진화론 중 어느 분파를 믿는 분인가요?” 물으면 십중팔구 그 사람은 진화론에 하나 이상의 이론이 있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중 어느 이론도 모든 것의 기원을 정말로 설명해 주지 못한다. 화석들이 종의 불변성을 보여 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종은 언제나 같았다. 새로운 종의 등장은 언제나 완전한 형태로 갑작스러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점진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소위 “빠진 고리”에 대한 증거가 희박하다. 지층 내에서 중간 단계의 증거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빠진 고리는 강력한 논증이다.
제 개인적인 견해. 성경의 영감성과 권위에 대한 믿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과학적인 근거만으로도, 저는 진화론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진화론을 받아들일 때 생기는 난점들이 성경의 기록을 받아들일 때 생기는 몇 가지 난점보다 훨씬 많다. 진화론을 믿는 들라주라는 생물학자, ‘어떤 사람이 순응자인가 아닌가(진화론을 믿는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자연의 역사로부터 추론해 낸 동기보다는 개인적인 철학적 견해에 기초한 동기로 결정된다.’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과학적 견해라는 것. ‘오직 사실만을 근거로 판단한다면 한 종이 다른 종으로부터 형성된다는 것은 전혀 증명되지 않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른 과학자, ‘다윈주의는 과학이라가 보다는 종교다’. 어떤 사람이 지닌 궁극적 견해의 문제라는 것.
왓슨교수, ‘동물학자들이 진화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진화가 일어나는 것을 관찰했기 때문이거나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증거로 사실임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유일한 대안인 특별 창조가 분명히 터무니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한 학술회원, 생물학자가 진화를 공격하는 것은 ‘직업적 자살’이다.
진화론은 일종의 교조주의, 반하나님적 종교이다. 대중 매체들은 반진화론적 견해가 실리는 것을 거부한다. 과학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과 태도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과학적 이론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진리를 양보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자. 한때의 이론이나 소위 과학적 견해의 풍조에 의해 우리의 입장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계시된 진리를 굳게 붙들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사실들에 항상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라. 하지만 종종 참된 과학적 정신의 모습으로 가장하고 나타나는 사이비 과학적 교조주의로부터는 완전히 몸을 빼내자.
13장 섭리
섭리의 교리는 하나님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아신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속적인 활동과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고 계신 일, 그리고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일 이래 끊임없이 하고 계신 일에 대한 묘사이다.
1. 섭리 교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1) 현재 세상의 정세로 인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사랑의 하나님과 두 전쟁의 참혹함.
2) 특별 섭리에 대한 잘못된 주장은 섭리 교리에 대한 오해로부터 발생한다. 군대나 개인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특별 섭리’라고 한다.
3) 소위 ‘과학적 견해’는 섭리를 부정한다.
4) 섭리가 없다면 기도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
2. 섭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 섭리의 교리는 불가해한 교리다.
경외심과 겸손함으로 해야 하며, 성경이 데려가는 곳 이상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2) 성경은 하나님이 만물을 통제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시 104편만으로도 이 교리를 확증하기에 충분하다. 시 103:19,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섭리 교리는 이신론(시계공은 태엽을 감아 내려놓았을 뿐 시계는 스스로 가고 있다)과 범신론(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있기 때문에 구분할 수 없다)을 배격한다. 섭리 교리는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날마다. 매시간마다, 매분마다, 매초마다 하나님이 스스로 조종하시는 큰 배와 같다고 말한다.
3) 성경의 직접적 진술, 예언, 기도, 기적을 통해 섭리 교리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수백 년 전에 예언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예언은 단순한 예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시기 때문에 예언된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보증이다.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신론자도 범신론자도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섭리 교리를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기도한다. 섭리 자체가 즉각 기도로 이끌기 때문이다. 기적들도 하나님이 주관하지 않으신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
4) 섭리의 세 가지 요소.
정의, “섭리는 창조주가 자신의 모든 피조물을 유지하시는 신적 에너지의 끊임없는 실행으로서,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 안에서 작용하고 있고, 모든 것을 정해진 목적을 향해 가도록 인도한다는 것이다”.
① 보존. ‘자신이 창조하신 것들을 그것들에게 부여하신 속성들 미치 능력들과 함께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작업’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그것이 계속 살아있게 하신다. 그는 만물을 붙드시며, 만물은 하나님의 신적 권능이 적극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발휘된 결과 존재하고 있다.
행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골 1:17,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히 1:3,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② 통치. ‘하나님의 신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물을 분명한 목표를 향하여 통치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시97:1).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103:19). 하나님은 온 세상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사40:15).
③ 협력. ‘종속적 권능들이 정확하게 행하도록 하기 위해 미리 정해진 법칙에 따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신적 권능이 종속적인 권능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가지 일이 다른 일을 발생시킨다. 이것이 이차적인 원인이다. 하나님은 이차적인 원인들을 통해 일하신다. 이차적 원인들은 나름대로의 작용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작용을 지배하신다. 자연에는 힘과 법칙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하나님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연의 힘 및 법칙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계시며, 그것들을 사용하시고 명령하시며 조종하신다.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암3:6).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5).
5) 섭리의 목적.
<일반 섭리>;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세상이 운행되도록 하시며 주관하고 계시는 것.
<특별 섭리>; ① 세상의 각 부분들을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살피시는 하나님의 돌보심. 시 104편, 우주, 시냇물과 개울, 나무와 채소. ②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들, 즉 짐승들과 인간들을 특별히 돌보신다는 것. 악인들과 죄인들까지도. ③ 하나님 자신의 백성에 대한 특별한 돌보심과 행하심.
6) 섭리가 작용하는 영역들
① 우주 전체에서 섭리가 실행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 땅아래 모든 곳에 있는 만물을 주관하고 계신다.
② 자연 세계에서 발휘된다. 시 104편과 마5:45.
③ 짐승들을 통치하심. 마 6:26.
④ 민족들 사이의 문제에서도 실행됨. 욥 12:24.
⑤ 사람의 탄생과 이 세상에서의 그의 운명을 섭리적으로 주관하심. 삼상 16:1, 갈 1:15-16.
⑥ 인간 삶의 외적 성공과 실패들을 결정하심. 시 75:6-7.
⑦ 우연인 것처럼 보이는, 혹은 겉보기에 하찮아 보이는 사건들을 주관하심. 에스더 6:1. 불면증을 일으킴.
⑧ 의로운 자들을 보호하심. 시 4:8.
⑨ 그의 백성의 필요를 공급하심. 빌 4:19.
⑩ 성경에 나타난 모든 기도의 응답.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만물을 섭리적으로 주관하심을 보여줌.
7) 기적, ‘비범한 섭리’
평범한 섭리에서 하나님은 이차적 원인들을 통해, 하나님이 자연에 정해 놓으신 법칙들에 따라 일하신다. 비범한 섭리에서 하나님은 이차적 원인 없이 즉각, 직접적으로 일하신다. 기적은 하나님이 자연을 거슬러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기적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규칙에 의해 제한되거나 구속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법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로 전락시킨다. 또 자신이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적들만 믿는 사람들도 있다. 기적은 일상적인 자연 법칙 혹은 이차적 원인의 작용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기적은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행동이다. 사람들이 기적을 믿기 어려워하는 진정한 이유는 그들이 전능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과학이나 자연의 관점에서 기적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금세기의 위험은 자연을 신격화해서 심지어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절대적 힘을 지닌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3. 사람들이 섭리 교리에 대해 갖는 어려움
1) 특별 섭리를 인정할 수 없다.
위대하고 전능하신 분이 우리의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을 쓰겠는가? 자연법칙은 그런 간섭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삶의 세세한 부분들에 관심을 갖고 계심을 가르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 섭리를 분명하게 가르치며, 기적은 이에 대한 완전한 증거이다.
2) 하나님의 섭리와 죄는 어떤 관계인가.
❶ 죄된 행동들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에 따라서만 일어난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경우.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8).
❷ 하나님이 죄를 억제하시고 통제하신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76:10).
❸ 하나님이 죄를 선으로 바꾸신다. 우리 주님의 죽음에서도 그러셨고, 요셉과 형제들의 경우도 그러셨다.
❹ 하나님은 결코 죄의 원인이 되지 않으시며, 죄를 승인하시도 않으신다.
자신들의 죄에 대한 책임은 오직 사람에게 있다.
4. 섭리 교리에 대한 두 가지 권면
1) 섭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임을 알라. 커다란 위로를 주는 내용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섭리의 관심은 구원이며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2) 어떤 사건을 특별 섭리라고 주장할 때는 신중히 생각하라. 어떤 사건을 특별섭리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점을 경고하고 싶다.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에 비상하고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확신하는 것은 대단히 쉽다. 어리석고 분별 없는 주장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불명예스럽게 만들지 않도록 주의하자. 섭리의 교리는 명확하다. 하지만 특별한 사건을 하나님의 특별 섭리라고 주장할 때에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에 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라.
14장 사람의 창조
1. 사람 창조의 독특성
뭔가 특별한 것, 뭔가 독특하고, 뭔가 강조되어야만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인상을 명백하게 준다.
1) 삼위 하나님의 협의가 있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1:26).
2)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사람의 창조에 대해서는 “그 종류대로”라는 문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3) 사람의 구성요소는 독특하다
2: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육체와 영혼, 물질적 부분과 비물질적 부분 간에 구분이 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4) 사람에게는 높은 지위가 부여되었다
모든 피조 세계, 모든 자연, 모든 피조물, 모든 짐승의 지배자로 임명되었다.
2. 진화론
진화론은 사람이 원래 어떤 동물에서부터 만들어졌다고 말함으로써 창조 교리를 부정한다.
1) 성경은 사람의 창조 전에 삼위의 협의가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진화를 부정한다
성경에는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 잠시 동안의 멈춤이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 사람이 짐승에게서 진화했다면 짐승의 창조와 사람의 창조 기사간에 이 같은 중단이 없이 바로 넘어갔을 것이다.
이것은 뭔가 특별한 일, 즉 삼위일체의 세 위격 간의 협의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2) 성경은 사람이 다른 생물이 아닌 흙으로부터 만들어졌다고 말함으로써 진화를 부정한다
사람이 이미 있던 생물로부터 진화했다면 성경이 왜 그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3) 성경은 사람에게는 동물에게 없는 본질적인 특징들이 있다고 말한다
사람은 자의식과 도덕적 자유가 있고 추상적 사고를 할 능력, 종교를 갖고 에배 행위를 할 능력이 있다.
4) 성경의 타락 교리는 진화론의 가르침과 정반대다
진화론은 진화의 과정은 항상 상향적이라고 말한다. 즉 원시적이고 단순한 것으로부터 고도로 조직화되고 복잡한 것으로 완벽함을 향하여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이 꼭대기에서 출발한 후 거기에서 떨어졌다고 가르친다. 구원에 대한 전체 성경의 주장은 완전하게 만들어졌던 사람이 타락하여 불완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5) 유신론적 진화론 역시 비성경적이다
사람의 몸은 동물로부터 진화된 것이나 영혼은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집어넣어진 것이라 말하는 이론. 과학으로 포장한 자신들의 이론을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시키려고 하는 이 이론은 쓸모가 없다.
6) 성경은 인류가 하나라고 말한다
성경은 인류 전체가 아담과 하와 두 사람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한다. 창세기 처음뿐 만이 아니다.,
신 32:8. 창 11장의 바벨탑과 연관된 사건 역시 하나의 집단이 여럿으로 나뉘었음을 말한다.
사도바울,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행17:26).
모든 인류가 하나이기 때문에 아담의 타락은 모든 인류의 타락이다
과학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만큼 믿음에 위험하고 치명적인 일은 없다. 한 가지를 타협하면 다른 교리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 로마서 5장의 전체 교리는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8).
성경 외의 증거도 인류의 하나 됨을 증거한다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인류가 오직 하나의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인종은 다양하지만 종(種)은 단 하나뿐이다. 인류학자들은 인종들이 아무리 떨어져 있고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대부분의 인종은 공통적인 전승, 홍수 전승이나 타락 전숭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 같은 공통적인 전승들을 결합하면, 중앙아시아 어딘가에 모든 인류의 공통 조상이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언어학적 증거도 있다. 인도 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들의 대부분이 공통의 원시 언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언어학자들은 이 모든 언어의 공통되는 기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인류가 원래 하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심리학’으로부터 나온 강력한 논증도 있다.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언제나 동일한 본능과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유형 또는 같은 종류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3. 사람의 구성적 본질
1) 이분설과 삼분설
이분설- 사람은 육체와 영혼(soul)으로 되어 있다는 것.
삼분설- 사람을 물질적인 부분인 육체와 동물적 삶의 기본인 혼(soul),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된 이성적이고 불멸하는 요소인 영(spirit)으로 나누는 이론.
이분설을 지지하는 논거는 ① 성경에서 사용된 “혼”이라는 말과 “영”이라는 말은 상호교환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② “영”이라는 단어와 “혼”이라는 단어는 둘 다 동물에게 사용되었다. ③ 요한계시록에서 육체에서 분리된 자들을 “영들”이 아닌 “혼들”이라고 지칭했다. ④ 신앙과 예배의 최상의 시행은 영이 아닌 혼으로 기술되었다. ⑤ 죽은 자의 비물질적 요소는 혼으로 때로는 영으로 묘사된다.
이분설에 대한 반론과 답변
살전 5:23, “영과 혼과 몸”, 히 4:12,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 이 구절들은 성경 전체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한다고 한다. 전체 성경이 혼과 영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시사한다면 이 구절들 역시 둘을 구분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의자의 견해
어느 설에 속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성경이 혼과 영이 서로 다르다고 이야기하지는 않으면서도 둘의 구분을 명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영은 우리 각 사람 안에 있는 영적인 혹은 비물질적인 부분으로서 하나님과 관계 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작용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하며 성령이 우리에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한다. 만일 우리 안에 비물질적 요소가 단 하나만 존재한다면, 그 요소의 일부분은 영이라 불리며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는 일을 한다. 반면에 비물질적 요소의 또다른 부분인 혼은 육체에 생기를 주는 역할을 하여 사고와 의지와 감각을 갖도록 해준다. 우리를 육체와 연결시켜 주어 육체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부분이 바로 혼이다. 이것은 절충안이다. 결국 사람은 영을 가진 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과 혼으로 구분된다는 사실은 유익하다.
2) 육체와 영혼의 관계
육체와 영혼은 유기적이고 필수불가결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혼은 비물질적인 것으로서 해부하여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혼은 존재하며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영혼은 육체를 도구로 사용하지만, 육체와 분리되어서도 존재할 수 있으며, 육체가 무덤에 장사지내질 때, 영혼은 계속 존재할 수 있고, 육체 없이도 활동할 수 있다. 영혼은 육체를 이용하긴 하지만 육체의 일부가 아니며 육체에만 의지하지도 않는다. 육체와 영혼간의 유기적 관계가 정확하게 무엇인가는 신비로 남아 있다.
3) 영혼의 기원
기원을 모르면 원죄의 교리를 다룰 수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영혼선재설-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다가 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함. 플라톤의 가르침이다.
신앙에는 플라톤주의와 철학의 혼합물이 들어와 있는 경우가 많다.
영혼유전설- 영혼도 육체와 함께 생식에 의해 유전된다고 함. 근거로는 첫째,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신 사건이 반복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단 한 번 물어넣으신 후 사람에게 세상에 번성하라는 명령을 하셨다는 것. 둘째, 하와의 영혼이 특별히 창조되었다거나 하나님이 아담의 옆구리에서 육체를 만드신 후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는 것. 반대이론은 첫째, 영혼유전설은 영혼을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영혼은 부모 어느 쪽으로부터? 영혼이 부모 안에 선재하고 있다면 어떤 상태로? 둘째, 우리 주님의 영혼이 인간에게서 받은 것이라면 주님의 인격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영혼창조설-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에 의해 생겨난다고 함. 육체는 부모로부터 오지만 영혼은 어느 한 시점에 우리 안에 들어온다는 것. 심각한 반론은 죄와 악을 향하는 영혼의 성향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이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도덕적 악의 창시자임이 분명해진다. 영혼창조설은 영혼의 본성에 대해서는 올바른 견해이지만 원죄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에 심각한 어려움이 있다. 영혼유전설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그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에 아담으로부터 직접 타락한 본성을 물려받았다.
강의자의 결론- 겸손함과 경외심이 필요하다. 성경이 말하는 것 이상으로 나가지 않도록 대단히 주의해야 한다. 명확한 사실은, 하나님이 악한 것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신다는 것. 하나님은 죄있는 영혼을 창조하실 수 없다. 인간의 부패성이 유전되는 사실도 성경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혹은 인간적 본성은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어떤 의미로도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도 확신할 수 있다.
사람은 얼마나 신비한 존재인가! 구원에 필수적인 문제들은 절대적으로 명확하게 나와 있다.
15장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1. 이 문제를 고찰해야 하는 이유
1) 성경이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말한다
창 1:26~27, “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9:6,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다.
약 3: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성경을 읽으려고 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내려는 시도를 반드시 해야 한다. 주제가 어렵다는 것은 핑계가 되지 못한다.
2)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교리가 있어야만 설명할 수 있는 다른 교리들이 있다
사람에 대한 모든 교리를 이해하려면 사람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교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기원, 본질적 성품과 존재에 대해 명확히 하지 않고서는 이 세상과 그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알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개념을 갖지 않고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명확해질 수 없다.
중생 때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중생한 사람과 안한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 중생한 사람과 아담의 차이는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으며 우리를 어떤 신분으로 만드셨는지를 알게 해준다.
3)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접촉점이다
계시를 받아 들일 수 있고, 각 사람이 구속과 혁신, 해방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접촉점’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일반적 원칙
1)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존재다
“형상”과 “모양”의 말 사이에는 실제적인 의미의 차이가 없다. 서로 교환해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두 단어를 동시에 사용한 것은 이 주제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존재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가장 큰 비극들 중 하나다. 진화론은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에 대한 철저한 모욕이다. 거울과 반사의 개념을 본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은 신적 영광의 일부를 나타내는 일종의 반사체였다.
2)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 이후에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인용된 성경 구절들은 “형상”이라는 용어가 타락 이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사용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타락 후에도 본질적인 무언가가 여전히 남아 있다.
3) 중생은 타락 이전 상태로의 회복이 아니다
그 이상이 되는 것이다. 구원, 구속, 중생은 우리를 아담이 있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있게 된다.
4) 최초의 사람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같지 않다
그리스도는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 영광의 모든 광채가 그분 안에 있다.
사람은 창조된 복사본이며 그리스도는 그 형상이다.
5) 하나님의 형상의 두 가지 요소
자연적 형상과 영적 형상. 자연적 형상은 사람을 동물과 구별되게 만들어주는 모든 것이다. 거기에는 지적이고 도덕적 본성이 있다. 영적 형상은 원래 가진 도덕적 완전성, 도덕적 탁월성, 또는 원의(original righteouness)을 말한다.
3.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의 구체적 모습
1) 본질적 자아의 불가시성과 불멸성
우리의 혼 또는 영, 즉 우리의 영적 본성 또는 우리의 영성을 의미한다. 우리의 본질적 자아는 보지 못한다. 당신이 누군가를 볼 때 그것은 발현 된 모습을 보는 것이지 진정 그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닮았다. 우리의 혼이나 영도 보이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불멸의 존재이기도 하다.
2) 영혼의 활동들
우리는 이성적이고 도덕적 존재이며, 지성을 가지고 있어서 사고할 수 있고, 의지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 안에 영원토록 존재하는 동일한 능력의 반영이다. 사람만의 독특한 능력이다. 우리는 또한 자아의식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이다. 스스로를 성찰하고 분석할 능력이 있다.
3) 지적, 도덕적 완전함
사람은 지적인 면과 도덕적인 면에서 거짓된 것이나 불완전함,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이 온전하게 만들어졌다.“의와 진리의 거룩함”(엡4:24)을 통해 자신을 들어냈다.
4) 몸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
우리의 육체적 존재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부분적으로 나타나 있다. 영혼에 적합하고 영혼의 도구가 되며 영혼과 인격의 통로로서의 몸, 특히 동물들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도구로 작용하는 몸에 대해서이다.
5)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과 통치권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반영한다.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과 통치권은 영광과 존귀의 일부분이다.
6) 하나님 형상의 본질적 요소와 비본질적 요소
형상의 본질적 요소들이 없어진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일 수 없다. 그 요소들은 언제나 남아 있는 인간 영혼의 특성이자 능력이다. ‘비본질적 요소’는 사람이 잃어버리더라도 여전히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요소들이다. 사람이 타락했을 때 모든 형상이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비본질적 요소들만 잃어버렸다.
사람 안에 있는 형상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의와 거룩함에만 국한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교리들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심지어 죄 가운데 있는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적 요소 또는 측면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요소들은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이성적이며 지적이며 일반적인 요소들은 타락 이후에도 남지만 죄를 범한 후 사람과 하나님의 도덕적 유사성은 잃어버렸다.
4. 사람의 원래 상태
1) 아담의 상태
아담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도덕적이고 영적인 존재였다. 아담은 지성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친교 교제 교통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아담의 몸과 영혼은 완벽하게 조화되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정죄한다는 것은 사람이 원래는 죄가 없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아담은 백지 같은 상태로 있지 않았고, 그에게는 참된 의와 거룩함이 배아의 형태로 내재되어 있었다.
완전할게 발달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는 시험대에 올려져 있었다. 그는 무한히 더 큰 존엄과 여오강에 이를 수도 있고, 아니면 타락으로 끝나 버릴 수도 있는 최초의 상태에 있었다.
2) 최초의 사람에게 주어진 두 가지 가능성
하나님은 사람을 이런 상태로 에덴 동산에 두시고 언약을 맺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계속 성장하고 발전하여 그 최종적인 완전함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반면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금지하신 일을 한다면 그는 타락하여 축복들을 잃어버릴 것이다.
사람에게는 원의(原義)와 거룩함이 있었다.
16장 타 락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할 때는 반드시 다음의 질문을 가장 먼저 던져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왜 필요한가?”
사람과 죄에 대한 교리는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1. 현재의 상태를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들
저의 모든 관심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해설하는 일에만 있기 때문에 제가 반드시 해야 할 일 외에는 시도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다른 이론들과 개념들을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 문제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이론들보다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는 일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성인들’도 깨달았으면 한다.
1) 이원론. 기독교 시대 이전까지 올라가는 대단히 오래된 이론.
인생에는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라고 하는 두 개의 똑같이 중대한 원리들이 있다는 것.
선과 악이 인생의 정수라고 말하며 선을 주관하는 신과 악을 주관하는 신도 있다고 한다.
2) 진화론. 인간은 단지 동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과 세상에서 목격하고 있는 일들은
동물적 특성의 표현일 뿐이라는 것.
3) 기타 이론들. ①성경이 악과 죄라고 부르는 것을 인간 본성의 필수적인 부분인 일종의 저항성이라고 설명하면서 우리가 이를 극복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이론. 무게의 저항은 근육을 개발시킨다는 이치. ②죄를 단순히 어떤 긍정적 특질의 부재, 지식이나 이해력의 부재라고 하는 이론. 많은 지식을 갖게 되고 더 많은 교육과 교회를 받으면 잘 훈련되면 모든 죄와 악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성경의 명백하고 분명한 가르침을 피하려 안간힘을 다 쓴다.
2. 사람과 세상의 현 상태에 대한 창세기 3장의 설명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의 타락에 대한 교리, 사람과 세상의 현 상태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이 개념은 다양한 다른 종교들, 심지어 민간 전승에까지 침투해 들어가 있다.
인류의 하나됨과 사람의 타락에 대한 성경의 역사를 확증해 주는 것이다.
1) 창세기 3장의 역사성. 이는 풍유나 신화가 아닌 역사다.
풍유(슬며시 나무라는 뜻을 붙여 타이름)이지 실제로는 기록된 대로 사건이 발생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신화란 종교적 진리를 표현하는 이야기. 신화가 실제적 역사는 아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개념은 참된 것이라고 한다. 창세기 3장의 기록은 명백하고 꾸미지 않은 사실로서 우리에게 제시된다.
14, 15절에는 아담과 하와의 죄에 따른 벌이 나오는데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성경의 상당 부분을 잘라내야 한다. 사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 기록이 사실임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마귀를 믿는 순간 여러분에게는 기적과 초자연적인 사건을 기대하게 된다.
하나님을 성경이 묘사하는 대로 믿는 순간, 사실상 기적들에 대해 전혀 문제를 느끼지 않게 되며
그것은 뱀이 말을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마귀를 성경에서 묘사하는 그대로 믿는다면,
그가 뱀을 말하게 만들 능력까지도 가지고 있음을 믿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어야 한다.
2) 창세기 3장의 역사성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들
“내가 언제 다른 사람처럼 내 악행을 숨긴 일이 있거나 나의 죄악을 나의 품에 감추었으며”(욥 31:33)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호 6:7)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고후 11:3)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딤후 2:14)
성경의 어느 한 가르침에 대해 불확실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면 전체 구조가 흔들리게 된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몇 가지 사실이 있긴 하지만 저로서는 창 3장을 문자적이고 실제적인 역사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3) 타락의 원인과 단계
- 첫 번째는, 죄는 외부로부터 와서 불순종의 행위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뱀을 통해 사탄으로부터 왔다. 사람 자신에게는 타락하여 죄를 범하게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시험은 전적으로 외부로부터 온 것이며, 사람은 그 시험에 대해 어떻게 행동할지 완벽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요점이다. 우리는 몸, 즉 인간의 골격 또는 인간의 육신 안에 있는 어떤 형태의 본능적 욕구가 인간을 타락하도록 이끌었다는 개념들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 뱀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공격했다. 여자는 하나님에 대한 마귀의 중상모략에 귀를 기울여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바라보고 그 열매가 먹음직하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을 바라고 갈망하기 시작했으며, 이 갈망은 다음 순간 분명한 불순종의 행위로 그녀를 이끌었다. 여자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이 그녀와 아담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했다. 여자가 열매를 주자 아담은 그것을 받아 여자와 함께 먹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모두 죄를 범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런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는지는, 사탄 자신이 어떻게 해서 타락했는지, 완전한 설명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탄이 타락한 것도 사람이 몰락한 것도 지름길에 대한 추구였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향해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교제를 발전시켜 결국 궁극적인 목표 지점에 이르도록 하려는 계획을 세우셨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길이 너무 느리고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마귀는 “그 긴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어. 내가 말하는 대로 하기만 하면 즉시 목표에 도달하게 될거야”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교집단들은 쉽고 빠른 방법을 제시한다는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그들은 언제나 성경적인 방법보다 더 빠르고 단순하며 직접적인 방법을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교묘하게 스며들었다는 사실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자신들의 삶의 가는 길을 결정하시도록 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기로 결심한 행동이었다. 이 사건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에밀 부룬너). 열매에 대한 욕구, 귓가에 속삭여져 그 욕구를 더욱 불타오르게 한 하나님에 대한 의심, 그리고 모든 상황을 변화시켜 버린 야심.
요일 2:15, “육신의 정욕(욕망의 등장)과 안목의 정욕(열매가 보기에 좋았다) 이생의 자랑(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야심)”.
-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만이 죄를 지을 수 있다.
자유로운 인격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짐승은 죄를 지을 수 없다.
- 구원은 오직 사람에게만 주어졌다. 타락한 천사들이 구속되리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사람의 경우 유혹과 타락이 외부에서 왔다. 사탄의 타락은 내부로부터 왔다. 사람은 단지 타락한 천사의 교묘하고 기만하는 악한 능력에 굴복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비와 긍휼, 불쌍히 여기심을 베푸셔서 천사에게 주시지 않은 구원의 길을 주시지 않았을까요?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3) 타락의 결과
① 육체를 의식하게 됨. 수치심이 발동했으며,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려 애썼다.
② 죄의식.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던 하나님과의 교제, 교재의식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 도망갔다.
③ 영적인 죽음. 에덴 동산에서 바깥으로 쫓겨났으며 자신들의 의지로 돌아오는 것은 금지되었다.
④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 이제는 수고를 하고 땀을 흘려야 했다. 자연에서는 어려움들과 장애물들이 생겨 났다. 그는 자연을 경작하고 가시와 엉겅퀴와 다른 모든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⑤ 도덕적 성품의 왜곡. 가인의 성품 자체에도 자신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왜곡이 존재했다.
⑥ 육체적 죽음. 타락의 결과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성경은 아담이 그가 취함을 받은 흙으 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사망은 죄에 의해 죄의 결과로 들어왔다.
⑦ 타락의 육체적 영향은 시간이 흐른 후 나타났다. 그들이 즉시 지적 능력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죄의 결과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늦게 나타났다. 즉시 육체적인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죽었다. 그의 정신적, 도덕적 특성들에 대한 영향도 시간이 흐른 후 나타났다.
몇가지 법적 결과들은 즉시 일어났다. 축복만 받았던 사람이 이제는 즉각 정죄 아래 놓여 하나님에 의해 벌을 받았다. 영적인 면에서,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원의로부터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즉각 떨어졌다. 범죄한 순간 사람은 자신의 고결함, 즉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과의 교통을 잃어버렸다. 즉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고 두려움이 들어왔다.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이 사람들과 세상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된 이유이다.
처음에 위대한 모습으로 출발했으나 “한때 하나님이 사셨노라”(청교도 존 휴)로 끝맺음했다.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비참한가!
17장 아담의 후손과 원죄
1. 타락의 즉각적 결과(16장에서 계속)
현대 세계의 모습은 앞에서 살펴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져 에덴 동산, 곧 낙원에 있던 사람의 모습과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의 원인이 첫 번째 죄인 사람의 타락 때문이라고 말하는 창세기 3장의 설명을 고찰했다. 다음으로는 아담과 하와의 경우에 죄로 인해 발생한 몇가지 즉각적인 결과를 추적해 보았다. 하지만 이 일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뱀에게 선포된 저주가 있다.
창 3:14-15,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에게 내려진 저주가 있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땅에 내려진 저주가 있다.
창 3:17-18,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2. 타락이 아담의 후손들에게 끼친 영향- 죄의 보편성
1) 죄의 보편성에 대한 잘못된 설명들
사람에게는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비참함과 불행을 유발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성경은 이것을 죄의 보편성이라고 부른다.
아직 진화가 덜 되어서, 지식의 결여로, 좋은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뒷바침되지 않아서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설명들은 모순을 일으키며,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피상적이다.
2) 죄의 보편성을 확증하는 성경 구절들
죄의 보편성은 성경 전체에서 확증된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롬 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19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절).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되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성경의 교리를 참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중대한 교리이다.
죄는 사람의 모든 본성-몸과 혼과 영-에 영향을 끼쳤다.
3) 죄란 무엇인가
죄는 특별한 종류의 악이다. 성경이 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는 “과녁을 맞추지 못하다” 혹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다”이다. 또 다른 단어는 고결하지 못함, 참되고 온전하지 못함, 정직하지 않음, 정해진 길에서 떠남을 의미한다. 반란, 반역, 우리 자신을 적법한 권위에 종속시키기를 거부하는 것 등이다. 도덕적, 윤리적 악의 개념을 나타내기 위한 단어들이다.
죄는 절대적이다. 성경은 언제나 선과 악을 완전한 대립의 관계로 제시한다. 그 중간은 없다. 죄는 단순히 선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악으로부터 선으로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일은 없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규정된다. 죄를 죄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이다. 죄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죄는 마음 깊은 곳에 있다.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 등은 마음에서 나온다(마 15:19). 마음은 나의 인격의 한 가운데이자 근원이다. 성경은 죄가 이 마음에 거한다고 말한다.
죄는 행동이 아니라 상태이다. 우리는 죄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저지르고 있는 죄된 습관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습관 때문에 죄의 행실이나 특정한 행동에 탐닉하게 된다.
죄는 죄책과 오염으로 구성되어 있다. 죄책은 죄의 일부이며 죄책 자체가 죄이다. 죄는 상태와 성향과 행동, 그 어느 것에서든지 하나님의 도덕법에 복종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4) 죄의 보편성을 설명하는 이론
실재설- ‘사실주의적 관점’- 아담 안에 모든 인간의 본성이 있었다는 것. 그 안에 전 인간성이 있었고, 그 이후 모든 사람 속에 있었던 인간성은 그 전체 인간 본성의 부분이라는 것이다. 전체 내의 각 부분들은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할 때 저지른 그 범죄와 함께 저질러졌다고 한다. 히브리서 7:9~10을 근거로 한다. “또한 10분의 1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10분의 1을 바쳤다고 볼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아브라함이 그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칠 때 레위는 이미 그의 조상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던 것처럼 아담이 범죄하여 율법의 정죄와 그 벌 아래로 들어갔을 때 전 인류가 아담의 허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언약설- ‘대표적인 관점’- 아담은 우리의 연대적 머리요, 대표라는 것. 아담이 인류의 ‘자연적적인’ 머리일 뿐 아니라 그에 첨가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전체 인류의 총수요 대표로 여겨주셨다는 것이다. 만일 아담이 복종하면 아담 개인으로 큰 축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모든 그의 후손들도 그 축복을 누릴 것이고 만일 죄를 지을진대 그에게서 나올 모든 사람들은 아담에게 임할 파국과 비참에 휩쓸려 들어갈 것이다.
- 나름대로의 일리와 난점들이 있다. 그래서 두 견해를 모두 채택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5) 원죄의 교리
성경의 말하는 사실은 보편적인 죄는 아담으로부터 직접, 즉 아담의 첫 번째 범죄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일반적으로 원죄의 교리라고 부른다. “원”이라는 의미. 이 말은 죄가 사람의 원래의 구성 성분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의미할 수도 없다. 죄는 사람의 구성 성분에 원래부터 있었던 결함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원죄라는 말의 의미는 죄가 인류의 원래 뿌리인 아담에게서 유래되었으며, 모든 죄가 아담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에는 태어날 때부터 죄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죄의 상태에서 태어난다. 우리는 “죄악 중에서 출생”했다(시 51:5).
원죄는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의 뿌리다. 우리의 존재와 인격의 한가운데로부터 나왔다는 의미에서 “원죄”라고 할 수 있다.
원죄는 원 죄책과 원 오염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담과 그의 죄로부터 물려 받았다. 아담의 죄의 전가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고전적인 본문은 로마서 5장 12절부터 19절까지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에서 모세까지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은 그들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아담의 죄 때문이었다. 율법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고, 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죄가 전가 되지 않았지만 이 사람들은 그들에게 전가된 아담의 죄 때문에 죽었다. 그 반대로 그리스도의 위대한 행위가 영광스럽게도 나에게 전가되었다. 나는 어떤 일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나의 대표이시기 때문에, 또는 내가 그리스도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행위가 나에게 전가된다. 성경은 이와 같이 원 죄책의 교리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원죄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원 오염만큼이나 원 죄책을 강조해야 한다.
위대한 로마서 5장을 읽어보실 것을 다시 한번 권한다. 이 본문에는 우리의 구원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대단히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 논증은 우리가 원 오염의 교리뿐 아니라 원 죄책의 교리까지 받아들여야만 성립할 수 있다. 다시 한번 로마서 5장을 읽어 볼 것을 권고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대하실 때 나타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상고해 보시라.
18장 원 오염
1. 원 오염의 의미
아담이 죄를 범한 순간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아담이 죄책을 지게 된 것이고, 그의 안에 변화가 일어나 이전과 같지 않은 상태가 된 것이다. 원죄의 교리는 이 두 가지 결과가 다 우리에게도 넘어 왔다고 한다.
1) 원 오염이란 원의를 잃어버린 것을 말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 아담이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심에 상응하는 의를 소유한 의로운 존재였다. 아담은 이 의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모두도 원의를 잃어버린 채 태어났다. 그뿐 아니라 우리 안에 적극적인 악도 가진 채로 태어난다. 오염의 문제는 이 두 가지 측면이 있다.
2) 원 오염에 대한 주의해야 할 사항
오염은 불건전한 상태나 영혼의 본질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염은 죄이며 범죄한 상태이다. 우리는 오렴되었기 때문에 죄책이 있다. 법적인 개념이다. ‘영혼의 본질’은 영혼의 구성 성분을 말한다. 영혼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염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개념이다.
영혼에 뭔가 부족한 상태라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죄를 향해 나아가는 타고난 성향이다. 능동적이다. 우리가 마땅히 죄어야 하는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되지 말아야 하는 상태에 적극적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죄는 선함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악이 적극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오염의 표현
1) 전적 부패
전적 부패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
① 그들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상태까지 철저하게 악하게 되고 타락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② 타락한 상태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도 아니다.
③ 사람들이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도 아니다.
④ 전적 부패는 사람들이 미덕들을 상실하고 칭찬할 능력이 없다거나 공평무사한 감정과 행동을 할 능력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적 부패의 의미
타락한 상태의 사람은 선천적으로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부패는 사람의 존재의 모든 부분 즉 영호노가 몸의 모든 기능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또한 사람에게는 영적인 선이 전혀 없다는 의미이다. 사람에게 자연적인 선, 자연적인 도덕은 많이 있다. 사람은 무엇이 미덕인지 인식할 수 있다.
전적인 부패 상태에 있는 중생하지 못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대해 원수된 상태에 있다. 이들의 모든 능력은 오용되고 왜곡도 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로마서 7장은 전적 부패에 대한 전형적인 진술이다.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엡 4:17-18,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고 한다.
전적 부패를 설명하는 용어들
성경은 육신에 대해, 그리고 정욕과 옛 사람에 대해 말한다. 우리 지체 속에 있는 법, 죄의 몸과 사마으이 몸에 대해 말한다. 육신의 생각에 대해서도 말한다.
육신의 의미; 신체 즉 물질적 의미의 몸을 말한다. 전인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육신의 윤리적 의미, 혹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 문맥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 의미를 분별할 수 있다. 육신이라는 말이 윤리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때는 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성경은 육신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갈 5:19-21에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가 더러운 것과 호색과” 이것은 분명 우리의 신체적 부분인 육신과 관련이 있다.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이간은 신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영혼의 영역에 속한 죄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육체의 일”이라고 열거되어 있다.
성경에서 육신이라 거의 언제나 영, 특히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과 대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은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전적으로 자연적이며 성령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본성의 작용을 의미한다.
윤리적 의미로서의 육신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고 영을 거스려 싸우는 원리 혹은 원리가 거하는 곳”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 5:;17). 간단히 정의하면 “신적 생명과 분리된 인간 본성”이다. 육신이란 스스로 생겨나고 지속된 하나님의 성령이 없는 인류를 말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성령과 관계없이 “육신을 따라” 사고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전적 부패는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
죄는 균형을 깼다. “육신에” 거하는 상태는 균형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에는 성령이 모든 것을 주관했고, 균형을 유지했다.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는 그의 영과 혼과 몸이 완벽하게 기능을 수행했다. 몸은 제 자리를 지켰다. 죄를 짓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부끄러워하게 되고 가리려 했다. 몸이 즉시 균형을 잃었고 이것이 현대의 성에 대한 열광과 성 의식, 성에 대해 생각하고 읽고 말하고 바라보는 일들의 시작이었다.
엡 2:3,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에 지배당하는 죄를 지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영이 아닌 세속적인 마음과 자신의 생각, 사람의 철학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전적 부패의 상태의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자아를 위해 산다.
- 인생의 저주는 우리가 모두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이다.
전적 부패 상태의 사람은 자기 능력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
전적 부패 상태의 사람은 사탄의 종이다.
- 중생하지 않은 인류는 마귀의 소유물일 뿐이다.
2) 전적 무능
영적 능력에 대한 언급이다. 자연적인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외적인 종교행위를 할 수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혹은 하나님의 율법으ㅟ 요구를 충족시키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10,23).
전적 무능의 상태의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바꿀 수도, 영적 진리를 깨달을 수도 없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3. 정리- 원죄의 결과
원죄의 두 가지 결과는 원 죄책과 원 오염이다. 오염은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이다. 영적인 상태의 묘사이다. 아담의 죄가 얼마나 큰 재앙인가! 얼마나 끔찍하고 파괴적인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들이 사람에게 임했는가? 소망이 없는 걸까? 하나님께 감사 드리자. 이 무서운 상황에 십자가가 나타났다. 사람이 반역하였던 그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이 주어졌다. 이 약속이 사람이 반역한 직후에,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쫓겨나기도 전에 주어졌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무궁한 사랑으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을 지체 없이 주셨다. 하나님이 아들이 자신을 주셨으며,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하시려고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벧전2:24).
19장 구속: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 지금까지의 결론
타락과 타락에 따른 즉각적인 결과들, 그리고 먼 후일을 결과들까지 설명하고 있는 창세기 3장에서 소망을 발견했다.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쫓아내시기 전에 하나님이 약속을 주신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형태를 한 마귀의 말을 듣고, 스스로 마귀의 종이 되었으며, 마귀의 권세 아래 놓여 저항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은 뱀에게 저주를 선언하시고 뱀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싸움이 있을 것이며,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뱀은 머리가 박살날 것을 말씀하셨다. 구속 혹은 구원의 교리는 성경의 중심 주제이다.
2. 구속 교리의 개관
1. 구속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의 구속을 위해 하신 일에 대한 설명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고등비평가들은 진화론을 성경에 적용시켜 그런 주장을 해왔다. 지난 백 년 동안 교회와 교회의 가르침에 영향을 준 가장 중요한 이단이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하나님 스스로 행하신 일에 대해 말해 준다.
구속 교리는 하나님을 달래기 위해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5:19).
주도권을 지신 분이 하나님이셨다. 구속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며 성경은 하나님이 하신 일, 하고 계신 일, 그리고 앞으로 하실 일을 기록한 것이다.
2.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는다.
구원은 사람의 반역과 교만, 어리석음과 죄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바라보시고 은혜와 사랑으로 말씀하셨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이와 같은 은혜의 행동들에 대해 말해 준다.
3. 구원은 창세전에 계획되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구속이 고안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창조되기도 전에, 이 구속의 계획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었다. 우리는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시간의 순서에 따라 사건을 바라본다. 하나님은 시간 바깥에 계신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결말을 아시며 언제나 모든 일을 바라보고 계신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4. 구속은 삼위 하나님의 협의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다.
이 영원한 협의에서 세 위격이 구속의 사역에 대해 역할 분담을 하셨다는 것도 확실해 보인다.
성부를 창시자로, 성자를 실행자로, 성령을 성자가 이룬 일을 적용시키는 분으로 묘사할 수 있다.
성부는 성자에게 만물과 그것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성자는 “만유의 상속자”(히1:2)로 세우심 받으셨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그리고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성자의 지배 아래 있다.
성부는 성자를 인류의 머리와 대표로 세우셨다.
“아담 안에서 ---한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니라”(롬 5장).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그를 새 인류의 머리와 대표로 삼으셨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
성부는 마지막 날 다시 살리실 사람들을 성자에게 주셨다.
주님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것은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부는 성자에게 구속받은 자들을 위한 특별한 임무를 주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
히 10:5에는 “나를 위하여 몸을 예비하셨도다”. 성자를 보내신 것은 성부이셨다.
5. 구속은 확실하고 완벽한 계획이다.
구속의 계획은 완벽한 계획이며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완벽하게 계획되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모든 일이 하나님이 정하신 바로 그 때에 정확하게 일어났다.
완벽하게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4:4).
그 때가 그렇게 오랜 것은, 인간들의 철저한 무력함을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 같다.
율법이 주어진 이유는 그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헬라 철학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볼 기회가 주어져야 했다.
로마의 범과 공의 및 정치에 대한 사상에게도 기회가 주어져야 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시기 전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구하기 위해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이미 시도해 보았고 결국 실패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아셨다.
우리를 향해서도,“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11장).
6. 구속의 계획은 반드시 성취된다.
성경의 마지막 책은 구속이 성취되어 마귀 자신이 불 못에 던져져 영원토록 멸망당하게 되는 모습을 묘사한다. 눈에 보이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시기마다 때마다 아무리 상황이 반대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은 확실하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없으며 그 계획의 가장 세세한 부분까지 성취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것이 성경의 주요 주제이다.
우리에게는 시작뿐 아니라 마지막에 대한 설명도 주어졌다.
7. 구속 계획은 사람에게뿐 아니라 만물에게 적용된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1장). 구속은 전적으로 은혜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왜 그런가? “때가 찬 경륜” 때문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온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사탄은 최종적으로 멸망할 것이며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벧후3:13)이 올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의 결과는 이처럼 웅장하다.
8. 구속 계획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 어디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구원에 대한 언급은 없다. 오직 하나의 복음만 있다. 오직 하나의 길만 있다. 구약 성도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으며 다른 화목의 길은 없다.
구약과 신약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다. 구속의 계획과 목적, 방법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
9. 구속의 계획은 언약을 통해 인류에게 계시되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통치자께서 죄를 범하고 자신에게 반역한 사람들에게 오셔서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하려 하시는지 언약을 맺으셨다. 맹세로 보증하셨다. 분명하고 확실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하셨다. (히6:17-20).
20장 구약에 나타난 은혜의 언약
1. 언약
하나님은 사람과 맺으신 언약의 형태로 구속의 계획을 계시하셨다. 구속의 언약, 구원의 언약이라고 한다.
언약(covenant)은 어느 정도 대등한 위치에 있는 두 당사자가 맺은 협정 혹은 계약을 말한다.
언약을 맺은 두 당사자는 특정한 조건에 기초하여 특정한 약속들을 지킬 의무가 있다.
1) 하나님과 사람이 맺은 언약의 독특성
하나님의 우위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흠정역은 이 차이를 나타내기 위하여 '유언'(testament)으로 번역했다. 그래서 “구약”(Old testament)과 “신약”(New testament)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언약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확실하고, 신성불가침이며, 깰 수 없다. 하나님이 자기의 계획을 계시하기 위해 놀라운 사랑과 은혜와 겸손하심 가운데 선택하신 방법이다. 하나님이 사람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성경의 가르침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인자하심과 겸손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2) 은혜의 언약
행위 언약과 은혜의 언약.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 아담을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가 어떤 일을 행하면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담이 이 약속을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이 전적으로 그의 행위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행위 언약이라고 부른다. 아담은 언약을 깨뜨렸고, 자기 자신과 후손들을 끔찍한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새 언약을 맺으셨고, 이것을 은혜의 언약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과 또다른 행위의 언약을 맺으실 수 없다. 사람이 이상적이고 완전한 상태일 때에도 행위의 언약을 지킬 수 없었는데, 타락한 사람과 또다른 행위 언약을 맺을 수는 없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은혜의 언약을 맺으셨다고 말한다.
은혜 언약에서도 하나님은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셨다. 스스로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계시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요구하신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에만 이 약속들을 받아 누리게 된다. 그래서 이 언약을 은혜의 언약이라 부른다.
은혜 언약의 내용. 가장 중심이 되는 약속은 바로 자신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것은 위대한 약속이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출6:7). 아담으로 인하여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은혜의 언약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진수는 죄와 타락으로 인해 깨어졌던 것들이 회복되리라는 것이다. 최고의 복이자 궁극적인 복, 복 중의 복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내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구원의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영적인 복들 뿐 아니라 몇몇 현세적인 복들도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의롭게 되는 길도 약속하셨다. 내가 의롭게 됨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약속은 영생의 약속과 성령을 보내 주심, 그리고 나의 성화와 궁극적인 영화에서 구속이 완전히 적용되고 성취되리라는 것을 포함한다. 그 약속은 언약의 중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속죄에 근거하여 자신의 백성을 온전히, 그리고 값없이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이 구원을 받아 들인다.
2. 구약에 계시된 은혜의 언약
1) 원복음
하나의 위대한 언약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 곧 구약에 묘사된 방식과 신약에 묘사된 방식으로 시행되었다. 창3:15을 원복음이라고 부른다.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는데, 엄밀하게 나누려면 창1:1에서 3:14까지의 첫 번째 부분과, 창3:15에서 마지막까지의 두 번째 부분으로 나누어야 한다. 창3:14까지는 창조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최초로 맺은 행위의 언약, 행위 언약이 실패한 기사가 나온다. 창3;15부터는 복음과 은혜의 언약, 구원의 길에 대한 선포가 시작된다. 계시록 마지막에 이를 때까지 성경의 전체 주제는 이것이다.
은혜 언약의 시작은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① 뱀이 여자 및 그녀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실 것이다.- 마귀와 원수가 되어야 구원 받을 수 있다.
② 하나님이 마귀와 싸울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주시리라는 것이다.
③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다고 하신다. 마귀의 후손과 그리스도의 후손사이에.
④ 하나님과 하나님의 길이 확실히 승리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져 있다. 갈보리가 예고 되어 있음.
2) 노아와 맺은 언약
이 언약은 홍수가 끝난 후에 주어진 것으로 창9장에 기록되어 있다. 물로써 땅과 모든 생물을 멸하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나아가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쉬지 않고 이어질 것을 보증하셨다. 노아 언약은 새로운 언약이 아니라 몇 가지 보충적인 약속과 명령을 제시할 뿐이다. 일반 은혜에 속한다.
3)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하나님은 처음으로 구속의 계획을 확실한 언약의 형태로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 특정한 가족을 택하셔서 오직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과 약속을 하셨다.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고 유익과 복을 받기 시작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믿음이 강조되는 것을 주목하라. 땅이나 다른 것들에 대한 약속을 넘어서서 아브라함에게는 영적인 씨에 대한 위대한 약속이 주어졌다. 즉 세상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씨 안에서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창3;15에서 어렵풋이 보여주셨던 것을 명백하게 표현한, 위대하고 분명한 최초의 약속이다.
4)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맺은 언약으로서 출19장 이하에 기록되어 있다. 커다란 특징은 율법의 수여가 이루어졌다는 것. 율법을 주신 것은 행위 언약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율법을 행위언약으로 착각하는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 삶의 규칙으로서의 율법은 중대하고 변하지 않는 도덕법과, 민법, 의식법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율법은 은혜의 언약과 충돌하지 않는다
시내 산 언약은 새로운 언약은 아니다. 이 보조적 언약은 아브라함의 은혜 언약과 조금도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갈3:17)“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율법을 주신 두 가지 목적
첫째, 율법은 죄의식을 증가시키기 위해 주어졌다. (롬5:20)“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넘치는 죄성을 보여주고, 사람이 자신의 죄성을 다루는 데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주어졌다. 둘째, 율법은 가정교사의 역할을 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갈3: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구원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최초의 언약, 즉 아브라함 언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언약이었다.
옛 세대에 대한 고찰은 우리를 새로운 세대로 인도한다. 새 세대에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시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 및 그 언약 안에 포함된 모든 것들을 계시하시고, 완성하시고, 다시 승인하시며, 성취하셨다.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알기 원한다면, 에덴 동산의 처음 시작부터 우리 주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추적해 나가야 한다. 복음은 마1:1이 아니라 창3:15에서 시작된다. 구약의 거의 모든 곳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난 복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1장 신약에 나타난 은혜의 언약
1. 은혜 언약의 새 세대
1) 은혜 언약이 옛 세대와 새 세대에 동일하다는 증거
① 오직 하나의 은혜 언약만이 존재하며 이 언약은 신약과 구약에서 동일하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8). 이 구약의 위대한 약속은 신약에서도 여러 차례 반복된다.
② 구약과 신약에서 똑같은 종류의 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51: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신약과 구약의 복의 유형과 종류는 완전히 같다.
③ 성경이 오직 하나의 복음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선포하신 복음,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모든 예표와 그림자들, 레위기 등에 묘사된 제물들, 성막의 여러 기구들도 복음을 전파한다. 선지자들의 위대한 구절들. 복음에 대한 진술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다. (갈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④ 많은 성경 구절이 구약의 성도들도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방법에 의해 그곳에 거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복을 우리와 함께 나눈다고 직접적으로 말한다는 사실이다.
(눅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롬11:16-18)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갈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⑤ 성경에 따르면 구원과 그 모든 복을 얻는 길은 오직 믿음의 길 하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는 사실.
(합2:4)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하박국을 인용해 말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4:23-25)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⑥ 옛 세대와 새 세대에 중보자는 “창세 이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계13:8)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뿐이라는 사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의 모든 모형과 예언들이 가리키고 있는 중보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다.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요5:39). (요5: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2) 옛 세대와 새 세대의 차이
① 새 세대가 동일한 언약을 가진 옛 세대보다 우월하다는 것. (히3:5-6)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② 옛 세대에서 진리는 부분적으로 게시되었고 부분적으로는 모형과 그림자들 안에 감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새 세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가 행하시고 가르치시고 성취하신 일들 가운데, 그리고 성령의 역사 가운데에 진리가 분명하게 계시된다.
③ 그 계시가 더 많아지고, 더 분명해졌다. (히1:1-3)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④ 옛 세대의 계시는 주로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형태였던 반면, 새 세대의 계시는 전적으로 영적이다.
(히9:10-12)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⑤ 옛 세대에는 단 한 백성만을 위한 것이었으나 세 세대는 온 땅의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다.
⑥ 옛 세대는 예비적인 반면, 새 세대는 최종적이라는 점. 십자가의 최종성.
⑦ 이 새로운 경륜에는 성령이 부어졌다. 옛 세대에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부어졌다.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부어진 결과 신약에서는 복의 규모가 더 커졌다. 옛 세대와 새 세대 간의 차이는 어린 아이와 성숙한 어른 간의 차이이다.
요약과 강조
오직 하나의 은혜 언약만 존재하며 이 언약의 모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다. 예 세대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새 세대는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우리에게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그리스도만이 창3:15 이후로 약속된 모든 것의 성취이다. 구속에 대한 최초의 언약은 분명히 그리스도와 맺은 것이었다.
2. 은혜 언약의 당사자
1) 우리의 대표로 언약에 참가하신 성자
오직 하나의 언약이 존재할 뿐 아니라 이 언약은 처음에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어진 것이다. 사람은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여러분과 저는 이 언약에 참여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대표이시며, 중보자이시며, 보증인이시다.
성자께서 약속하신 것
처음에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어긴 행위의 언약을 지키고 존중하고 성취하기로 언약하셨다.
성자는 사람의 타락과 죄와 오염의 결과를 해결하기로 언약하셨다.
성자는 행위 언약에서 우리에게 지워진 모든 의무를 우리를 대신하여 수행할 것을 보증하셨다.
2) 언약의 당사자에게 요구되는 조건
성자는 두 번째 사람, 두 번째 아담이 되셔야 한다. (고전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성자는 우리의 입장이 되셔야 한다. (갈4:4-5)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자는 우리의 모든 의무를 이행하셔야 한다.
은혜 언약을 고찰하면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 구속과 구원을 알 수 있다.
은혜 언약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모든 방향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인다.
22장 주 예수 그리스도
1.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의 중요성
1) 기독교 신앙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진 분이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극도로 중요한 존재이며, 만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가 사실이 아니라면 전체 기독교는 사라져 버린다. 기독교 신앙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며, 그가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하셨고, 또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가능케 하셨는가에 대한 신앙이다.
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는 독단적이고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다. 타협할 수 없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성경 자체가 이 교리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저자들을 인도하셔서 네 개의 복음서를 기록하신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가 정확하게 알려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요20:31). 요한일서가 기록된 주된 이유는 당시에 유행하던 가현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셨음을 부인하는 거짓 가르침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교리는 위대하고 신비로울 뿐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주의력을 집중시켜야 하는 주제이다.
서신서들은 우리의 주님이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과 거짓 개념들을 믿는 일이 우리의 영혼에 얼마나 무서운 위험을 끼치는지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세부 사항’들은 전혀 상관없다는 말처럼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말도 없다.
교회 역사가 이 교리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첫 3, 4세기 동안 이단들이 끊임없이 밀려 들어왔기 때문에 교회는 어떤 개념들을 정의하거나 거부하기 위해 모여야 했다. 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위대한 중심 교리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토론과 회의가 열렸다. 우리의 영혼과 구원이 소중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공부해야 한다.
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진술
1)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구약의 예언과 약속의 성취라고 말해준다.
(고후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에덴 동산에서 주어진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이다(창3:15). 창17장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후손에 대한 약속에 대해 바울은 말한다. (갈3:16)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창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해 유대인들이 흩어지 전까지 규와 치리자의 지팡이가 유다에 남아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모든 열방이 그에게 나아왔다.
(단9:24-26)“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일흔 이레는 490년을 의미한다. 먼저 일곱 이레 49년이 지난 후에 성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성의 재건후 예순두 이레, 즉 444년이 지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이어서 한 이레, 칠년의 기간이 지나는데 그 중간 삼년 반에 메시야가 끊어졌다.
미가 5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장소가 정확히 예언되어 있다. 렘23:5~6엔 유다 지파, 다윗의 집에서 나올 것으로 예언하였다. 사7:14엔 예수 그리스도가 처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라 예언하였다. 말3:1에는 메시야를 예비하는 자가 올 것이라고 했다.
메시야가 오실 때 그의 특성을 말하는 예언들도 있다. 시2:6, 45: 사9:6~7은 메시야는 우주적 제국의 왕이요 정복자로 기록하였다. 동시에 사53:3엔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이기도 한다. 예언은 메시야가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될 것이라고 한다(사42:6, 60:3외). 사53장은 메시야의 죽음이 대속적인 죽음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메시아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이고(슥9:9). 은 삼십에 팔릴 것이며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살 것이라고 하였다(슥11:12~13). 메시아의 옷이 제비뽑힐 것(시69:21), 슬픔 가운데 초를 마시우게 될 것(시69:21), 십자가에서 하실 말씀까지 기록되어 있다.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22:1). 그의 무덤이 악인과 그리고 부자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사53:9).
메시아가 하실 일에 대한 예언도 있다. 신18:18,“내가 그들의 형제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제사장이 되실 것(사53:10,단9:24). 왕이 되실 것(단2:44-45)도 기록되어 있다.
2) 성경은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고, 오직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히12:24,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말한다. 주님 자신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다. (눅24:46-47)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딤전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만물이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마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 (고전15: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엡1:22-23)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관 하에 있다. 예외는 전혀 없다. 그분은 영광의 주님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시며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가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요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행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3. 성육신 교리의 개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교리의 첫 번째는 성육신의 교리이다.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요1:14) 신비이다. 모든 시대의 가장 큰 신비이다.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성육신 교리가 말하는 바는 복되신 삼위일체의 영원하신 두 번째 위격께서 시간 속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오셔서 사람의 본성을 입으시고, 아기로 태어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셨다는 것,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롬8:3)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이 진술의 정수는 태어나신 분이 그 순간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육신의 형체를 지니고 세상 속 인간의 삶으로 들어오신 이 분은 바로 영원하신 위격,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 일은 베들레헴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영원으로부터 복되신 하나님 자신의 품으로부터 오셨으며 이 특별한 모습으로 인생과 시간과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
23장 성육신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운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기에 그분에 대해 분명하고 정확한 개념과 사고를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아무도 경솔하게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교리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1. 성육신 교리의 요점
1) 우리 주님의 인격의 교리, 특히 성육신의 교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다. 그는 구속의 교리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항상 자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성자의 인격을 논함으로써 알게 된다.
2)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가 육신이 되신 것이다
성육신 교리는 영원하신 삼위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우리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말해야 하며, 그 내용에 주의를 항상 기울여야 한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취하신 것은 진정한 육체이다
기독교 교회의 초창기에, 특히 영지주의자들은 주님이 단순히 육체의 모양만 가졌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4) 성육신에 의해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것이다. 이 영원하신 위격께서 스스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다.
5) 성육신에 의해 성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분은 언제나 동일한 위격이시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도, 무기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구유에 누워있을 때에도 그는 언제나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다.
6) 성육신은 성자가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되어’라는 문구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화했다고 생각하게 했다. was made가 아니고 became이다. 롬8:3에 예수 그리스도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고 한 표현이 더 낫다. (요일4: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다. 육신으로 오신 것은 이 영원하신 위격이다.
7) 성육신에서 성자는 모양만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천사들이 사람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그들의 본성이 변하거나 본성에 무언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단지 모양을 취한 것이다. 신의 현현과 성육신과는 완전히 다르다. 신의 현현은 천사나 신적 인물이 잠시 동안만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지만, 성육신 교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양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고 주장한다. (히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요이1: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성육신에서 성자는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다
성자는 영을 포함한 몸과 혼을 취하신 참된 사람이었다. 혼의 영적인 부분은 영원하신 위격에 의해 공급받았다고 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사람의 몸만 입으신 것도 아니다.
9)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취한 것이다
새로운 인성이 성자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성을 스스로 가지고 오시지 않았다. 이 본성은 마리아에게서 받은 것이다. 성경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다윗의 후손이다(마1:1). 특별한 인성이 창조되었다면 그는 다윗의 자손도, 아브라함의 자손도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의 구속에 대한 교리는 궁극적으로 성육신에 의해 좌우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입지 않으셨다면 그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성육신에 대한 진술이 정확하고 분명하고 확실하고 명확해야 한다. 이 교리를 소홀히 다루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2. 동정녀 탄생
1) 동정녀 탄생에 접근하는 자세
최초의 위대한 신앙고백이자 최초의 신경인 사도신경은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고 한다. 동정녀 탄생에 대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성경과 기적에 대한 교리에 대해서도 곤란을 겪는다. 자기들의 보잘 것 없는 이성을 모든 진리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문제가 사람의 이성과 이해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해야 한다. 우리는 계시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저는 이론들과 철학을 내세우지 않는다. 저는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선포하겠다는 전제를 가지고 출발한다. 전적으로 성경을 의지한다. 어린 아이와 같이 성경으로 나아오는 것이 제가 할 일이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고전1:21). 나의 작은 이성이 항상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나는 성경을 의지하고 그 권위를 인정하며 말씀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동정녀 탄생이라고 하는 이 신기하고 놀라우며 또한 영광스러운 교리를 고찰할 때 취하여야 할 올바른 마음과 태도이다.
2) 동정녀 탄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동정녀 탄생에 대한 교리의 기초가 되는 구절이 두 군데 있다.
눅1:26-38. 이 위대한 일 자체가 마리아에게 고지되고 있는 장면이다. 연관된 세부 사항들과 사실들, 천사가 어떻게 마리아에게 나타났는지에 주목하라. 마리아가 놀랐다는 기록에도 주목하라. 천사가 전한 이야기의 심각성을 이해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남자를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어떻게 아이의 어머니가 되겠는가? 천사가 그녀에게 설명한다. 천사는 이것이 성령께서 직접 행하실 일이라고 말했다. 마리아는 전능자의 “덮으심”을 받을 것이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35절).
마1:18-25. 요셉에게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요셉은 자기와 정혼한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셉은 선하고 의롭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와의 관계를 조용히 끊고자 했다. 그때 꿈속에서 천사가 나타났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20절). 요셉에게도 같은 설명이 주어진 것이다. 요셉의 놀라운 믿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 말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행동했다.
이것이 성경의 기록이다. 이 구절들이 가르쳐 주는 바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탄생하신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지상의 아버지가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뜻으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육체의 뜻과 힘으로 태어나지도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에 남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주님의 신성에 어머니가 없었던 것처럼, 주님의 인성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매우 훌륭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성육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리스도는 마리아로부터 인성을 취하셨으나 이것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동정녀 탄생은 성령이 행하신 위대한 신비다.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에게 임하셔서 마리아로부터, 그녀의 세포 하나로부터 우리 주님의 인성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이상은 말할 수는 없다. 성육신은 성령이 행하신 일이다. 성령은 성자가 취하신 인성이 죄가 없는 것이 되도록 일하셨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실 바 거룩한(죄없고 순결한) 이는’ 이라고 말한 것을 주목하라. 이 말은 마리아 자신이 죄없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인성이 죄 없고 타락의 결과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 마리아로부터 무언가가 취해져서 정결하게 되었고 모든 오염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사실 뿐이다.
3) 동정녀 탄생 교리의 의미
주님은 동정녀 탄생을 통해 죄없는 인성을 입게 되었다. 만일 주님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통상적인 방법으로 태어났다면 그도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직접적인 후손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고전15:22)라는 말씀이 적용되는 존재가 되어서, 원죄와 원죄책을 가진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성육신의 교리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음을 즉각 말해 준다.
우리는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라는 경건의 비밀 앞에 서 있다. 가장 신비롭고 놀라운 사건이다. 이 일은 실로 하나님이 하신 최고의 행위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마리아라는 동정녀에게서 나셨다. 남자는 전적으로 배제되었다. 요셉은 이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등장한다. 이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였다. 성육신은 우리l가 구원받고 우리 죄가 사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하자. 사람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
24장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증거
1.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
1)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여진 신적 이름들
약 열 여섯 개의 이름이 붙여졌다. 사십번에 걸쳐 “하나님의 아들”. “그의 아들” “나의 아들”.
다섯 번에 걸쳐 “하나님의 독생자”.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1:18).
악한 농부의 비유에서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마21:37).
“처음이요 마지막” “알파와 오메가”(계1:17,8).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행3:14).
수백 번에 걸쳐 “주”. 구약의 “여호와”에 대응하는 말. 여호와는 하나님께 돌려진 최고의 호칭들 중 하나.
“영광의 주”(고전2:8).
실제로 “하나님”이라고 호칭.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임마누엘”(마1:23).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딛2:13).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9:5).
2)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려진 신적 속성들
전능하심.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분”(히1:3). 만물이 “그 발 아래 있다”(고전15:27).
전지하심.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7).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시는 분”(요2:24).
편재하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
영원성. “태초에 말씀이 계시느니라”요1:1).
불변성.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히13:8).
선재하심.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RF1:17).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성육신 전에 하나님의 ”본체“이셨음(빌2:6).
포괄적 진술.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
3)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직무들
창조. “만물이 그로 말이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괸 것이 없으니라”(요1:3).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히1:3). “만물이 그와 함께 섰느니라”(골1:17).
죄를 사하시는 권세.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
몸을 변화시키는 권세. “우리의 낮은 몸을 나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1).
심판.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5:22-23)
영생을 주는 권세.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요10:28).
4) 여호와께 사용한 용어들을 예수님께도 적용함
시102:24-27(히1:10-12). 사40:3-4(마3:3, 눅1:76). 사6:1,3,10(요12:37-38).
5)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이 연결되는 방식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고후13:13).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약1:1)
6) 예수 그리스도께 신적 예배가 돌려짐
마28:9, 눅24:52. 고전1;2,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7:59).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실” 때가 온다.(빌2:10).
7) 주님 자신의 자의식과 신성에 대한 주장들
“내 아버지의 일”에 관계하여야 한다(눅2:41-52). 세례 요한에게 “이제 허락하라”(마3:15).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마귀에게 부인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막16:17).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
8) 동정녀 탄생과 부활
“성결의 영으로는 주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롬1:4)
2.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증거
1) 동정녀 탄생
마리아의 아들이시라는 것. 성육신 교리의 참된 본질을 밝히는 모든 논증.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침전2:5). 여든 번 이상 “인자”라는 말을 사용.
3) 육체적 본성을 지니심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그도 똑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다”(히2:14).
부활하신 후에도 여전히 사람의 몸을 가지고 계셨다(요20:27).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
4) 성장과 발달을 경험하심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눅2:40).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2)
5) 지상에서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으셨음
무화과나무 사건에서 열매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모르셨다(막11;13).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13:32).
6) 육체적 제한을 겪으심
주님이 피곤하셨다(요4장). 배의 고물에서 잠드셨다(막4:36-41). “내가 목마르다”(요19:28).
겟세마네 동산에 심히 고민하시며 땅을 피방울처럼 흘리셨다.
7) 시험을 받으심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8) 기도하셔야 했음
9) 성령으로부터 능력을 받으셔야 했음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니라”(행10:38).
10)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심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1) 예수님이 모든 면에서 사람이셨다는 성경의 주장들
(히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3. 죄 없으신 참 사람
“나실 바 거룩하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1;3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히9:14).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롬8:3). 육신에 한 존재라고 하지 않음.
성령의 작용으로 마리아에게서 인성을 취하심.
타락의 영향을 받지도 않으심. 죄를 범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
25장 신인: 교리
1. 성부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종
- 이 복종은 성육신 하신 주님께만 해당된다. 어느 항목도 주님의 탄생 전의 상태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크시다고 했다.(요14:28)
2)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서 낳으신 아들’.(시2:7)
3)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다.(요6:57)
4) 아버지에 의해 보내심을 받았다.(요6:39)
5) 자신이 행해야 할 일을 아버지께로부터 명령 받았다.(요14:31)
6) 자신의 모든 권세는 아버지가 주신 것이다.(요5:26-27)
7) 자신이 아버지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5:19)
8) 자신의 메시지를 아버지로부터 받았다.(요8:26)
9) 자신이 행하신 일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요14:10)
10) 주님의 나라는 아버지가 맡기신 것이다.(눅22:29)
11) 종말에 예수님이 나라를 아버지께 바치실 것이다.(고전15:24)
12)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스도의 머리이시다.(고전11:3)
13)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이다.(히2:10)
2. 신인 교리
1) 신인 교리에 대한 오류들
성경은 그리스도가 참으로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참으로 인간이시라고 말한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그것도 올바르게 주장하는 데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몇 가지 위험에 빠져들지 않도록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3, 4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논쟁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러 차례 공의회가 열려야 했다. 이 교리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은 대단히 무지할 뿐 아니라 엄청난 위험 가운데 처한 사람이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 초대교회의 이단들. 유니테리언 교도들, 여호와의 증인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는 일신론 교리에 몰두한 결과이다. 그리스도와 성령을 하나님이라 하면 두 하나님, 세 하나님을 주장하는 셈이라고 생각. 이를 피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극단으로 빠져 이단이 되었다.
요한이 복음서를 쓴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요20:31)이었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사람일 뿐인데 그가 세례를 받을 때 영원하신 그리스도가 그에게 임했다는 것.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까지만 있다가 떠나갔다. 결국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인간 예수일 뿐이다. 이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환영이라고 하고,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인간 예수를 구분하는 등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부정한다. (요일 4:2-3)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③ 신성과 인성의 완전성을 부인. 아리우스주의. 신성의 실체를 부인.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 중 첫째이며 최고의 존재라고. 그리스도는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존재라고. 인성을 부인한 사람들.
그리스도가 몸과 동물적 혼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과 영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고 함.
④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의 단일성을 부정. 네스토리우스 이단. 예수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지닌 한 인격이 아니라 두 개의 인격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이자 인격적인 사람이다.’ 그 반대의 극단은 두 본성이 섞여 하나의 본성을 이루었다고.
2) 예수 그리스도는 두 본성을 지닌 한 인격이심
주후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가 성명서를 발표.
우리 주님은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으로서, 온당한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계시며,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시고,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동질이시다.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으시되 죄는 없으시다. 신성을 따라서는 만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인성을 따라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어머니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그는 한 분이신 그리스도시오, 아들이시오, 주님이시오, 독생자이시다. 그는 혼합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나누어지지도 않는 두 본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연합으로 인해 두 본성의 구분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한 인격, 한 존재 안에서 각각의 본성이 보존된 채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두 본성은 분할되거나 두 인격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이며 동일하신 아들, 독생자, 하나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실 뿐이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장엄한 진술인가! 한 인격과 두 본성, 즉 연합하였으나 섞이지 않고 융합되지 않고
구분된 채 남아있는 두 본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분을 강조하고 있다.
3) 신성과 인성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
① 인성이 필요한 이유. 사람이 죄를 범한 이후 그 벌이 사람의 본성에 지워져야 하기 때문. 사람을 구속하는 유일한 길. 몸과 영혼의 고난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했기에 반드시 사람이 되어야 했다.
② 인성으로 인해 주님은 우리를 이해하실 수 있다. ‘우리를 이해하는 대제사장’.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신 분”(히4:15)이 되셔야 했다.
③ 그리스도인의 본보기가 되시기 위해 인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④ 신성이 필요한 것은 희생의 가치가 무한해지기 위해, 완전한 순종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율법을 완전하게 이행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성이 인성과 결합해야 했다.
3. 신인 교리의 신비
1) 신인 교리는 이성의 범주를 벗어난다.
우리의 할 일은 이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성경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유한하고 실로 죄악된 이성으로 무한한 것을 측량하려는 노력을 멈추어야 한다.
2) 신인 교리를 설명하는 유추들. 완벽한 설명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 강조하지는 말아야 한다.
사람의 몸과 영혼의 관계. 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별개이며 섞여 있지 않다. 두 본성에서 일어나는 일을 한 인격에 속한 것으로 여긴다.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옛사람”과 “새사람”의 개념. 한 인격이지만 두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다.
3) 빌립보서 2:5-8절을 통해 본 신인 교리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주님은 신성의 본체, 그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과의 동등성에 집착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자신을 비운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름 없는 존재로 만드셨다. 다른 본체를 취하신 것이다. 그는 자기를 낮추셨다. “종의 형체로 오셨다.” “사람이 되었고” 가 아니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주님이 여전히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동시에 사람도 되셨다는 것이다. 뭔가 버리신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덧입으셨다.
4) 신인 교리의 핵심
여전히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사람들과 같이 되었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영원한 하나님이신 분이 동시에 사람도 되신 것이다. 그리고는 이 세상에서 종으로 사셨고 종으로써 일하셨다. 워필드, “세상의 주님이 세상의 종이 되셨습니다. 세상을 다스릴 권리가 있는 분이 순종을 삶의 특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다만 스스로 사람의 본성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기를 선택하셨다. 자신을 낮추셨다. 의도적으로 자신을 제한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 주님은 자신의 신성의 일부 특성들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우리 주님이 성령의 선물을 한량없이 받으셔야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기도하셔야 했던 이유도 이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이시길 그만 두신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지금 너에게 말씀하시는 인자는 지금도 하늘에 계시다”(요3:13). 주님이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는”(눅2:52) 일이 가능했다. 때로는 특정한 일에 대해 알지 못하시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다른 때에는 자신의 신성과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확인하시고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셨다. 이 일들은 사실이었으며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셨던 우리 주님이 스스로 사람의 본성을 취하셨다.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본성을 가지신 이 나뉘지 않는 인격께서는 사람이 되기로 결정하시고 실제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셨다. 종의 형체를 가지고 자신을 낮추셨으며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이다.
5) 신인교리는 놀라운 구원의 신비다
우리 주님은 만물이 창조되도록 하신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면서도 마리아의 태에 들어가셔서 아기로 태어나시고 구유에 누이셨다. 심지어는 “죄인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히12:3)을 참으셨고, 침 뱉음을 당하셨으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다. 주님이 이 모든 일을 하신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유일한 길은 주님이 우리 죄의 형벌을 지시는 것이었다.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유일한 길은 주님이 사람의 본성을 취하시는 것이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이 새로운 성품을 주실 수 있고, 우리를 하늘나라와 영광을 위해 준비시키실 수 있었다.
26장 선지자이신 그리스도
1.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베드로의 표현처럼,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벧전3:15)하려면 이 성경 교리들을 알아야 하고 자세히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파스칼, “이성의 최고의 업적은 우리에게 이성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다.” 다른 곳으로부터 오는 빛이 필요하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고전1:21). 하나님은 기꺼이 자신을 계시하셨다. 역사와 자연과 피조물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 무한하신 인자하심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 자연에 나타난 계시 이상의 것을 주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성경에 바탕을 두고 주장한다. 성경 자체가 믿음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리는 우리가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쳐 주는 것이다.
1)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화해와 회복 사역
타락의 결과 하나님과의 화해, 그리고 아담과 함께 타락하기 전 상태로의 회복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화해와 회복의 사역이다. 주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해 오셨다. (딤전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2)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무
선지자, 제사장, 왕.
선지자가 필요한 이유; 죄에 대한 무지로부터 해방되고 구원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제사장이 필요한 이유; 죄의 죄책으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기 때문. 대신해 하나님께 나아갈 분이 필요.
왕이 필요한 이유; 죄의 지배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하기 때문. “흑암의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로”(골1:13).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우리에게 전한다.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께 말씀하신다.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를 대표하는 머리이시다.
그리스도의 삼중직.
구약에는 선지자들, 제사장들, 왕들이 각기 있었다. 오직 이 직무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합쳐진다는 사실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얼마나 크고 위대하며 존엄하신지 깨닫게 된다.
2.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1) 선지자의 역할
선지자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몽하도록 하나님께서 메시지를 받아 전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기능이 예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대한 견책과 책망을 했다. 예언 하는 것 외에 경고와 훈계와 책망,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2)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에 대한 성경의 증거
(신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이를 인용하여 베드로는 (행3:22-24)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고 하였다.
주님 스스로도 자신이 선지자라고 하셨다. (눅13: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요14: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8:26)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요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사람들도 주님이 선지자이심을 알았다.
(마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3) 주님이 선지자적 기능을 수행하시는 방법
성육신 이전. (요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이것은 로고스, 즉 지식과 빛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이다. 성경은 중생한 사람이건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건 모든 사람 안에 있는 빛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일반은총이다. 어떤 빛도, 어떤 지식도, 어떤 이해도 그리스도와 관계 없이는 오지 않는다.
구약에서 언약의 사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가르치고 교훈하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선지자들에게 주어진 모든 지식, 모든 빛과 교훈, 그리고 모든 능력은 그리스도로부터 왔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1:1). 그리스도는 선지자들에게 메시지를 주어 그들을 가르치신 그 선지자셨다.
성육신 이후. (요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시며, 선지자이시며, 가르치러 오신 분이시다. 아무도 보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교훈을 주셨다. 아들은 아버지를 선포하시고, 아버지를 계시하셨다.
주님이 주신 모든 가르침은 선지자로서 행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은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주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은 우리에게 적용된다. 또한 주님은 자신의 삶과 본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 주님은 사실상 “나를 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사랑과 참음과 다른 모든 속성들을 보여 주심으로 본을 남겨 주셨으며, 우리는 그가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 (벧전2:21-22)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승천하신 후.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성령은 자기 스스로 말하거나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시고, 무엇을 말할지 지시를 받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성령의 의해 직접적인 계시를 받는다. (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신약성경의 모든 책은 성령의 인도와 통제를 받아 오류가 없게 된 것이다. 성령을 통해 교회를 인도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지금도 선지자적 기능을 행사하신다. 주님은 지금도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영적인 것들을 가르쳐 주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세우시는 마지막 때까지 선지자적 기능을 계속해서 수행하실 것이다.
4) 이 교리의 의의
(요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죄는 무지와 어두움이다. 주님은 빛이 왔기 때문에 핑계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요15: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요12:47-48)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우리의 복되신 주님이시며 구원자가 선지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된다. 선지자이신 주님은 이 세상에 없었던 빛과 지식을 가져오셨다. 주님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할 수 있으며,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주실 수 있다. 무지와 죄의 어둠 가운데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마침내 모든 지식과 교훈을 가져다 주시는 분은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27장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1. 제사장의 직무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표하는 존재이다. 선지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사람에게 나아오고, 제사장은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
죄의 어두움과 무지에서 해방되어야 할 뿐 아니라, 죄책과 비참한 상태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1) 교리의 중요성
히브리서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아론보다 탁월하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심을 보여주고자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임을 설명하려고 했으나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고 했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그리스도의 교리의 ‘초보’에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어린 아이’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악을 분별하라고 주신 기능과 능력들을 사용하지 못하고 영적이고 종교적인 젖만 먹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태에 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많은 것을 놓쳐 버리고 무엇을 행하고 생각해야 할지 몰라 곤경과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그들이 어린 아이이기 때문이다. 이 교리에 대해 수세기 동안 많은 오류와 이단이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 교리를 연구하는 일이 중요하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우리 주위에 있는 거짓 가르침을 물리치기 위함이다.
2) 성경이 말하는 제사장의 직무- 화목과 중재
우선 구약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구약은 신약을 가리키며 원형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일종의 모형이다.
제사장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최고의 정의는 히브리서 5장의 첫 다섯 구절에 나와 있다.
① 제사장이 사람의 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라야 한다(1절)
② 제사장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임명된다. “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자라야 할 것이니라”(4절).
③ 제사장은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대해 사람들을 위해 활동한다(1절).
④ 제사장은 죄를 위해 예물과 제사를 드린다(1절).
제사장은 구별되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어떤 일들은 하지 말아야 했다.
제사장은 여호와께 전념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레21:6-8).
제사장의 직무는 요약하면 두 가지 주된 일을 하는 중보자이다.
제사를 통하여 화목하게 하고, 사람들을 대신해 중재의 역할을 하는 것.
화목에 대하여. 화목은 손상된 거룩함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이 손상되었을 때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드려지는 것을 말한다. (롬3:24-2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propitiation)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요일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예물과 제사의 기능
제사장은 예물과 제사를 통해 화목을 이룬다.
잘못된 견해들. ①은총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선물 역할을 한다-정령숭배에서 발전하여 하나님을 믿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②신과의 생명의 교류를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이다- 짐승의 피를 제단에 놓음으로 피라는 상징을 통해 신과 교류한다고. ③일종의 성찬이다- 짐승을 죽이고 먹을 때 자기들의 신을 멀고 그의 생명을 받아 그 신안에서 강하게 된다고. ④신에게 경외와 찬사를 바치는 방법이다.
우리 주님이 죄악된 사람과 하나님의 사이의 화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제사장으로서 하셔야 할 세 가지는
① 진노하신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려야 한다(화목).
② 죄책으로 인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고난받고 죽임당할 무죄한 누군가가 필요하다(속죄,expiation)
③ 진노하신 분과 진노케 한 자 사이에 생명의 공동체가 이루어져야 한다(atonement).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일을 이루셨다고 주장한다.
구약의 제사들은 위의 세 가지 일을 했다. 제사장들이 제물로 바쳐질 제물들에 안수한 것은 그들의 죄와 죄책을 전가시키는 것이었다. 단과 속죄소에 피를 뿌린 것도 피는 죄를 상기시키며 생명이 속죄소 위에 드려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여 사람이 범한 죄가 해결되었다.
번제와 제사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그들과 하나님과의 친교 및 언약,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들의 위치와 특권을 회복하여, 부주의와 번죄로 인해 빼앗겼던 하나님의 복들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한 제사와 번제들의 중요한 기능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들을 자신과 화해시키는 방법에 대한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2.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1) 구약의 제사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
구약의 대제사장은 자신이 바칠 제물로 양이나 다른 동물을 구해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과 제물이 하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이시다. 그는 자기 자신, 자신의 생명,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렸다.
2) 예수의 대제사장 되심의 증거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제사장이라고 묘사하는 책은 오직 한 권 히브리서이다.
3:1, 4:14, 5:5, 6:20, 7:26, 8:1.
물론 다른 구절에도 암시되어 있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전5:7)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벧전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히브리서 5장에 나와있는 제사장의 자격 요건을 모두 만족시키신다.
주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취하심을 받으셨다. 제사장의 직분을 스스로 취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불러 임명하셨다. 주님은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대해 사람의 대표가 되셔서 예물과 제사를 드린다.
3) 백성을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제사장으로서의 제사를 드리신 후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대신해 간구하신다. 주님은 돌아가시 직전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요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 또 주님이 하늘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히7:25).
주님은 우리의 대언자이시다. 그가 우리를 위해 탄원하실 때 주님의 존재 자체가 간구임이 분명하다. 주님의 존재는 속죄가 이루어지고 화목 제물이 바쳐졌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끝없이 간구하신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자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죄에 빠진다면, 이때 우리에게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있으며, 이 대언자는 영단번에 화목제물이 되신 분이고 지금도 여전히 화목제물이시라는 사실은 복된 일이다(요일2장).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우리 주님께서 모든 요구들을 만족시키셨다. 주님은 사람으로 태어나심을 통해 이 일을 하셨다. 제사장은 반드시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라야 하기 때문에 성육신이 꼭 필요했다. 그가 스스로 인성을 취하신 것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우리의 대표자가 되시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셨으면서도 죄는 없으시며,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셨기에 주님은 우리를 대표하고 대언하는 대제사장이시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께서 받으신 예물과 제사를 드리셨다. 이렇게 해서 우리 주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위해 언제나 간구하신다.
28장 속죄
1.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
1) 십자가 사건의 중요성
- 신약 성경 기자들은 십자가 사건에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신약성경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을 직접적으로는 175번, 간접적으로는 더 많이 언급한다. 사복음서는 주님에 대한 네 가지 묘사일 뿐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
복음서는 견본, 또는 초상화라 할 수 있다. 복음서 하나 하나가 비교적 짧은 책이지만 놀랍게도 각각의 책은 삼분의 일을 주님의 죽으심에 할애했다. 주님의 성육신과 생애와 가르침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지만, 이 모든 것보다도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명심할 것은 성령의 인도와 지도 아래 복음서를 기록할 때, 그들이 강조하는 십자가의 죽으심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전면에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사도행전 역시 주님의 죽으심을 강조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면 두 가지 일을 했다. “그리스도가 해를 받아야” 할 것과,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것(행17:3).
서신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15;3).
베드로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요한도,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2). 계시록도,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14)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한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우리도 살펴 보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는 무엇이며 이 사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오해와 무지는 커다란 문제를 낳는다
십자가의 교리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신약성경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는 우리의 이성을 최대한 사용하면서 주의 깊게 접근해야 하는 대상이다. 십자가는 중심이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의 원수이자 대적이 이 특별한 진리를 모호하게 하고 혼동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필요한 것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일 뿐 그 의미에는 관심이 없다고 한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은 십자가에 대해 나름대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해석이 틀렸을 경우의 위험성은 정말 끔찍하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인지 검토하고 우리가 성경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믿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십자가의 교리적 정의 따위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언제나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해서, 심지어 강단 위나 자기 교회의 어딘가에 십자가를 걸어 놓았다고 해서 그가 십자가에 대해 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철학적 사상이나 공상들을 덮어 씌운 사람들이 많이 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십자가를 무용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2) 십자가와 관련된 잘못된 개념들에 대한 반론
- 예수님은 죽음을 예상치 못하고 당하신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의 사건을 하나의 비극 혹은 사고라고 생각한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전혀 에상치 못하신 채 갑자기 당하셨고, 주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 끝장이다”라는 뜻이었다고 말한다. 주님의 삶은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셨으며, 자기 제자들을 준비시키셨다. 특히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시몬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한 이후 우리 주님은 즉시 십자가와 지신의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말씀하셨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은 법이 없느니라”(눅13:33). 히브리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이 세상에 오셨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2:14). 베드로,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2;23). 주님은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고 하심으로 죽으실 정확한 시점까지 아시고 사흘 전에 이미 경고하셨다.
- 예수님의 죽음은 순교자로서의 죽음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훌륭한 교사가 자기의 가르침을 철회하게 하려는 사람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기꺼이 순교자로서 죽어갔다고 한다. 순교자들은 승리와 기쁨 가운데 처형됨으로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번민을 느끼셨고(요12:27),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하셨다(마26;19). 주님의 죽음은 독특한 것이었으며 순교자의 죽음보다도 위대한 죽음이었다. 그것은 한 가지 방법으로만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죽음이었다. 신약 성경은 이 사건이 사람의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3) 십자가와 구원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들
속전설; 십자가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마귀에게 속전을 지불하셨다고.
만족설; 안셀무스.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의 명예-공의가 아님-가 손상되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명예를 보상했다고.
도덕감화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다.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믿도록 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놀라운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하나님의 공의가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하나님 편에서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고, 문제는 오직 사람에게만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중보자가 아니다.
모범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훌륭한 모범을 남기기 원하셨기 때문에 즉기까지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된 것이 아닌 것이 된다.
통치설; 데일, 그로티우스.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보존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이 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로 보내셨으며, 성자는 인류로 하여금 죄는 심각한 것이며 금지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로 가셨다고.
신비설; 에드워드 어빙. 그리스도의 인성이 완벽하다고 믿지 않았다. 그 인성에는 죄된 것이 있어서 성령의 능력으로 죄 없이 유지할 수 있었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인성으로부터 죄를 몰아내었다.
대리회개설; 20세기 초 인기. 주님이 십자가에서 정말로 하신 일은 인류를 대신해 회개를 드리는 일이었다. 사람은 죄에 대해 참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인류를 대신해 죄를 고백하셨다고.
- 십자가에 대한 올바른 설명은 대속적 속죄의 개념뿐이다
성경의 가르침인 대속적 속죄의 개념이 유일하게 모든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대속적 속죄의 개념은 십자가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여 준다.
29장 대속
1. 대속적, 형벌적 속죄의 근거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의 대리인이 되어, 백성이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을 대리적으로 받으셨다고 말한다. 성경적 속죄 교리에 대한 개혁주의적 견해라고 한다.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
특징 : 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리자로서 행하셨다는 것, ② 형벌적 측면이 나타나 있다는 것.
1) 주님이 하신 사역의 의미를 보여 주는 구약의 제사
신약성경은 주님의 사역은 구약성경의 제사에 대한 가르침과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은 구약 시대에 예물과 제사를 드렸던 제사장의 사역에 대한 기록과 모든 면에서 평행을 이룬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이것은 제사에 대한 레위기와 모든 율법이 다 포함되어 있다. 주님은 부활후에도 같은 주장을 하셨다. “또 이르시되 --모세의 율법과 선자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24:44).
- 구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히브리서는 이를 확증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구약은 원형을 가리켜 보이는 모형들을 제시해 준다.
- 제사의 목적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악된 사람들을 인자하게 바라보시고 기꺼이 그들을 받아들이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 제사를 통한 화목은 죄책의 속죄에 의해 이루어진다
- 제사를 통한 속죄는 희생제물이 대리 형벌을 받아 이루어진다
구약의 제사들은 짐승이 범죄자를 대신했고, 범죄자의 죄가 그 짐승 안에서 처리되었기 때문에,
죄책이 속죄되고 하나님은 범죄자와 화목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 제사의 효과는 범죄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히9:22,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구약의 위대한 메시지이다. 구약의 제사들은 장차 나타날 온전한 속죄제를 가리켜 보이고 있었다. 그 제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보여 주는 모형이었다.
2)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요1:29). 구약성경의 제물로 바쳐진 어린 양을 상기시킨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5:7). “이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3:25).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 몸을 주셨으니”(갈1:4).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3;18).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1:5)
우리의 구속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의해, 곧 그의 생명을 쏟아부어 주심에 의해 보장된다.
피가 없이는 구속도 없다. 피에 대한 사상을 싫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3) 주님의 사역을 묘사하는 단어들
속전, 구속;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속전은 다른 사람이 취하거나 소유한 사람 또는 물건을 해방시키기 위해 지불하는 값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죽음을 통해 갇혀 있던 우리의 속박을 풀어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는 값을 지불하셨는데, 그 값은 자신의 보배로운 피였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6:19-20). (벧전1:18-19)“너희가 알거니와 --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구속도 같은 개념이다. 무언가를 돌려받기 위해 지불하는 것이 구속이다. 그 물건은 우리의 것이 되었다.
화목제물; 노여움을 달래는 행위, 또는 수단이다. 이 제물은 하나님이 취하셨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수단이다. 이 제물은 하나님이 취하셨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드려졌다.
화해; (롬5: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4) 대속적 죽음의 의미를 강조하는 신약 성경의 용어들
죄의 전가; 구약에서 바쳐진 짐승들은 우리의 대리였다.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는 행위는 사람들의 죄책을 짐승에게 전가하는 것이었고 이 짐승들은 죽임을 당했다. 이것이 대속이었다. 우리의 죄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 되었고 주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갈3: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었다. 우리의 죄책이 주님께 옮겨졌고(전가), 주님은 그 죄에 마땅한 형벌을 받으셨다.
‘for’로 번역된 헬라어 3단어; ①“때문에”-“죄로 말미암아”(롬8:3),“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갈1;4) “죄를 위하여 죽으사”(벧전3:18) ②“대신에”-“모든 사람을 대신하여”(고후5:14), ③“많은 사람의 대리자”-“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막10:45). 이 모든 본문들은 대리적 요소를 강조한다.
5)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이 강조됨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온 인류가 아담 안에 있으며, 그래서 아담이 타락했을 때 우리 모두가 타락하였고,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주님이 하신 일이 가져다 주는 유익을 온전히 누린다. 주님이 죽으셨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도 죽었다. (롬6:3-4)“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행동하신다. 우리는 주님의 일부이고 주님과 하나이다. 주님과 동일시 된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었고, 주님과 함께 살며, 주님 안에 거주하고, 주님께 속해 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하고 절대적인 논증이다.
6)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대속과 형벌적 속죄를 통해 얻어짐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4).
주님은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구해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시키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 안에서 벌하셨고, 이제는 우리의 죄가 아니라 자기 아들의 의를 전가하신다(고후5: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2:19-20).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리스도는 나를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7) 주님의 죽음을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는 사실
성경은 우리 주님의 죽음이 창세 전에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 안에 있었다고 가르친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행2:23).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은 영원한 측면이 있다.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벧전1:20). 이 일은 창세전에 계획되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고후5:18-19)“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 일을 하고 계신 분은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이셨다. (고후5: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책을 그리스도에게 전가하셨다. 속죄에 대한 어떤 이론도 성부 하나님의 활동에 충분한 중요성과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30장 속죄의 필요성
1. 대속적, 형벌적 속죄의 증거(계속)
1) 십자가의 죽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을 강조하는 성경 구절들
- 대속적, 형벌적 속죄만이 죽음 앞에서 주님이 하신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다
주님은 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하시며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셨는가? 하신 말씀도 설명해야 한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주님은 분명히 요청하셨다. 이것이 단순히 육체적 죽음에 대한 것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제자 순교자들보다도 못한 분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주님이 지상에 계신 동안 이와 같은 요청을 한 것은 단 한 번뿐이며,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죽음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주님이 하신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것이 정말로 필요한 일입니까? 다른 방법으로 이 일을 하는 것도 가능합니까? 가능하다면 이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우리 주님은 피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순종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사실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상 죽음이 그 방법상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논증이다.
십자가에서 버림 받은 주님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부르짖음.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이런 부르짖음이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다. 십자가에서는 무언가 독특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님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주님과 영원하신 성부 사이의 교제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영원하신 품속에서 오셨으며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주님이 영원 가운데 오직 단 한 번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오직 한 가지 이유, 즉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했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논증이다.
- 대속적, 형벌적 속죄만이 롬 3:25-26을 설명할 수 있다
(롬3:25-26)“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주님의 죽음은 과거의 죄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죄를 덮으실 수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면서 엣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에게 하신 바로 그 일이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세우셔서 “자기의 의로움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을 보이시는 방법으로 그 일을 하셨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 안에서 죄를 벌하셨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 십자가상의 죽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음을 시사하는 다른 성경 구절들
(히2:9)“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의 모든 쓰라림과 공포를 맛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신 것이다. 그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으신 것이다. 그 때문에 주님은 그토록 빨리 돌아가셨으며 주님의 심장이 문자 그대로 터져 버렸다. 모든 일은 주님이 죽음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았다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 사랑하는 아들이 이런 일을 겪도록 허락하셨겠는가?
(롬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2) 보조적 논증들
-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에 대한 교리는 형벌과 대속의 필연성을 보여 준다.
- 죄책을 인정하면 형벌적 대속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 대속적, 형벌적 속죄만이 그리스도를 반드시 믿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3) 반론과 답변들- 죄책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 사랑의 하나님은 대속이 없이도 용서하실 것이라는 주장
우리는 대속이 없이도, 아무런 처벌이 없이도 서로를 용서해 준다. 훨씬 더 사랑을 갖고 계신 하나님은 훨씬 더 용서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실 뿐 아니라 빛이시고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다. 사람의 경우에 비추어 하나님을 판단하는 논증보다 더 큰 오류는 없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감상적이고 엉성하고 불공정하고 불의한 개념을 영원하신 하나님께 적용하는 것은 가장 큰 위험한 시도이다.
- 대속은 하나님의 속성들을 손상시킨다는 주장
하나님의 모든 위대하고 영원한 속성들은 분리시킬 수 없다.
- 대속의 개념은 바울이 만들어 냈다는 주장
(마20: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또한 쇱자가에서 속죄를 완성하시기 전에 충분히 설명하실 없었던 이유가 있다.
(요16:12)“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라는 궁극적 진리를 확신하도록 한 것은 부활이었다. 그리고 진리의 빛 아래 그들은 속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 대속은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을 설득하여 우리를 용서하시도록 했음을 의미한다는 주장
이것은 성경의 진리를 지독한 웃음거리로 만드는 행위이다. 이러한 구원의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속하여, 우리가 초래했고 우리가 받아 마땅한 율법의 형벌을 당하시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2. 속되 교리의 핵심
1) 예수님의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는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해야 한다. 율법은 존중되어야 하고 만족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주님은 그 죄책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주님께 지우셨다. 주님은 수동적이셨고, 하나님이 그 일을 하셨다. 그 일은 하나님의 행동이었고 그리스도는 수동적으로 순종하셨다. 하지만 주님은 자기의 삶 가운데 능동적으로 순종하셨다. 주님은 율법을 완벽하게 순종하심으로써 이 일을 하셨다. 주님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다.
(마5:17-18)“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2)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에게 전가된 의
바울이 로마서5장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 있었다. 아담은 우리의 대표이자 언약의 머리였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우리는 모두 그와 함께 타락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아담 안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께 해당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순종의 행위로 율법을 존중하고 지키셨을 때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한 행동일 뿐 아니라 나를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4)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우리의 구원이 율법의 준수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한 율법은 지켜졌고 존중되었으며, 의로 전가되었다. (고후5: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롬8:3-4)“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었다는 위대한 교리이다. 주님이 능동적으로 행하신 일이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수동적으로 행하신 일도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하나 된 우리는 아무런 두려움이나 떨림, 흔들임이 없이 율법을 바라볼 수 있다. “율법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나와 아무 관계 없네/ 내 구세주의 순종과 피가/ 내 모든 범죄 보이지 않게 숨기시네”(토플레디). 이 장엄한 교리를 말해주는 찬송가가 극히 적다.
31장 승리자 그리스도
우리 개신교의 속죄 교리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대속적, 형벌적 교리로서,
우리의 죄가 주님 안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몸에서 실제로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주님은 동시에 속죄의 일부분으로 몇 가지 다른 일도 하셨다.
1.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
1) 마귀를 정복하신 주님
우리 주님은 속죄의 사역에서 실제로 마귀를 다루셨다. 루터는 죄 가운데 태어난 사람에게는 이생에서
다섯 원수가 있다고 했다. 사탄, 죄, 사망, 율법,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이다.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 원수들을 처리해야 한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사탄과 그의 모든 세력을 처치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12;31).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2:15).
마귀의 일을 멸하고 마귀를 물리치신 주님
하나님의 율법에 완벽하게 순종하는 삶과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을 통해
우리 주님은 부수적으로 마귀를 공격하고, 궁극적으로는 물리치고 계셨다.
십자가와 부활로 입증된 주님의 승리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십자가는 원수의 생명이 멸해지고,
마귀의 일이 무력해지며, 마귀가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고 패주하게 된 장소였다.
2) 죽음을 정복하신 주님
(히2:14-15)“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
마귀는 오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의 세력만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죽음의 영역을 지배하는 권세이다. 그래서 마귀를 “이 세상의 신”(고후4:4).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불손종의 아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엡2:2)라고 묘사한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그는 즉시 사망의 영역으로 떨어져 사망을 지배하는 사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이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건져 내신다.
(고전15:56-57)“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사망을 끔찍한 것으로 만들고 쏘는 것을 그처럼 강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죄라는 것이다. 문제는 사망이 아니라, 그것이 죄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율법 아래에서 죄인이며, 이 사실이 사망을 끔찍한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우리는 마귀의 지배 아래, 그의 권세 아래 있다.
율법을 만족시킴으로써 율법의 사망 선고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신 주님
주님은 율법을 만족시키셨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따라서 더 이상의 사망 선고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의 영토, 즉 사탄과 죄의 영토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사망이라고 부르는 이 다른 원수로부터 해방된다. 사망은 더 이상 우리를 두렵게 하지 못한다. 더 이상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아니다.
3) 죄를 정복하신 주님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인 타락의 결과로 마귀의 지배 아래 떨어졌을 뿐 아니라 죄의 영역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죄는 자연인 안에서, 그리고 정욕과 욕망과 악을 추구하는 성향 안에서 지배력을 발휘한다. 마귀는 외부에서 사람을 지배하고, 죄는 사람의 내부에서 지배하여 사람은 죄의 지배 아래 있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가 죄의 지배에서 해방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10절)“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죄는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14절)“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사도요한, (요일3:9) 엣성품 안에 죄의 잔재가 남아 있고, 어리석게도 원수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영토 아래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주님은 우리를 죄의 폭정과 속박, 그리고 권세로부터 해방하셨다.
2. 주님의 사역의 진정한 결과
1)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일어난 변화
우리 주님의 사역의 결과로 하나님과 화목되었고 만족하셨으며,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롬3:26) 하셨다.
2) 천국에 일어난 변화
(히9:23)“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인 광야의 성막은 송아지와 염소의 피 물 등으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성막은 더 좋은 것으로 정결케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자신의 피로 정결케 된 것이다.
모든 악과 그 영향은 땅뿐 아니라 하늘에서도 제거되었다.
하늘의 성막은 사탄의 반역과 타락으로 하늘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주님의 능동적 사역의 의의
(요14:1-2)“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만족시키고 화목제물을 드려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하는 일 외에도, 주님이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그 장애물인 마귀의 일과 죄 및 죄의 지배, 그리고 사망과 무덤을 멸하셔야 했다. 장차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접해 주님 계신 곳에 함께 거하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 주님은 이 모든 일을 행하셔야 했다.
32장 새 언약의 복들
1. 새 언약의 비준
1) 피 흘림을 통해 비준된 새 언약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과 새 언약을 맺으셨으며, 그 언약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비준되었다. (히7:22)“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새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히8:6)“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히13:20-21)“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주님 자신의 예언. (눅22:20)“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고전11:23-25)“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피 흘림을 통한 언약의 비준은 성경의 원리다
하나님이 인류와 맺은 모든 언약은 피로 비준되었다. 최초의 언약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다.
(창15:9-10)“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이어서 (창15:17-18)“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언약이 이 짐승들의 피 흘림과 하나님이 이 때 아브라함에게 주신 놀라운 표적에 의해 비준되었다.
모세 언약에서도, (출24:8)“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새 언약은 예레미야를 통해 맺을 것을 약속하셨다(렘31;31). (히8:8-10)“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2) 새 언약의 복들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리는 모든 복들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다.
십자가는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이다. 모든 유익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부터 온다.
① 죄 사함이 영단번에 이루어짐.
(히10:1)“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히10: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행동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으며 단번에, 그리고 영원토록 용서하셨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십자가 위에서 영단번에, 완벽하게 해결되었다. (요일1:7)“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지금도 깨끗하게 하시며, 영원히 깨끗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 남의 죄를 잊기 어렵지만 하나님은 더 이상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일 가운데 그 죄들을 최종적으로,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해결하셨다.
②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룩한 담대함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함.
(히10: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만 갔던 그곳에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원할 때마다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이것이 새 언약이다. 이것은 거룩한 담대함이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거룩해야 한다. 우리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다가간다(히12:28). 하지만 우리는 거룩한 담대함으로 나아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확신과 신뢰로 믿음의 완전한 확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는지 의심하는 것은 겸손의 표시나 성도다움의 표시가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불신이며 믿음의 부족이다. 그것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죄가 사해졌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 복음의 경이로움을 훼손하는 것이다. 새 언약에서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8:10) 이것은 사람에게 주신 가장 영광스러운 말씀이다. 우리는 그분의 가족이고 양자이다.
③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은혜 가운데 율법을 이루어 나갈 힘을 주심.
새 언약의 결과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바울은 롬 6장에서 말한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왜 그런가?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전에는 율법 아래에 있었다. 주님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해 “여자에게서” “율법 아래” 나셔야 했다(갈4:4-5).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대하여 죽으셨을 때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롬7:4)“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십계명은 여전히 우리에게 적용된다. 율법을 지켜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사법적이고 법정적인 의미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율법대로 살고 그것을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율법과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하셨다. (롬8:3-4)“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해도 될까요? 사도는 속지 말라고 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가 율법에 따라 살고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지, 죄 지을 자유를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도덕률 폐기론이라고 하는 끔찍한 죄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힐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이단 중 하나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 우리의 삶에 결과를 나타내지 않는 신앙고백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새 언약은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8:10)의 일을 한다. 나에게 외부적인 율법을 주고 그것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대신, 그 율법을 내 생각에 두시고 내 마음에 기록하신다. 내가 율법에 순종하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내 안에 두시는 것이다.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우리 생각과 마음에 율법을 두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율법을 좋아하는 마음, 그것을 지키려는 소원을 우리 안에 만드시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빌2:12-13)“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것을 행할 힘과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그 모든 것을 이루고 계신다.
④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줌.
(히7:24)“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주님은 항상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주님은 항상 살아계심으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그 일을 해 나가신다. 우리가 흠 없고 점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까지 그 일을 계속 하실 것이다. 주님은 이 일의 영속성, 지속성을 보장하신다. 이 모든 것을 결과는 우리가 구원의 확신의 복을 누린다는 것이다. 주님은 원수들이 자기 발등상 되기까지 기다리고 계신다(히10:13). 우리와 주님의 관계로 인해,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미래와 영광이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33장 왕이신 그리스도
1. 십자가가 주는 일반적인 복들
1) 옛 세대의 사람들, 불신자들에게 미치는 십자가의 복
구약 세대에 백성이 저지른 모든 죄는 십자가에서 일어날 일 때문에 단지 가리워졌을 뿐이었다. 하나님이 옛 세대의 백성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장차 행해질 이 사역 때문이었다. 바울은 롬 3:25-26에서 하나님이 엣 세대의 죄를 간과하시는 것을 정당화시킨 장소가 바로 십자가였다고 말한다.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구한 것은 십자가였다. 어느 때든 죄를 범한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도 십자가, 오직 십자가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대적하며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참으실 수 있는 것은 십자가 때문이다.
일반은총이라는 부르는 복들도 마찬가지로 십자가로부터 나온다.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자에게 내려주시는”(마5:45). 부흥의 역사들을 보면 구원받는 사람들 뿐 아니라 일반적 복들을 동반했다. 그 나라 전체의 삶의 수준이 향상되었다. 공장법이 통과되었으며 많은 다른 유익이 실현되었다.
2) 천사들에게 주어지는 십자가의 복
사탄이 타락했을 때 천사들이 그들의 지도자, 그들의 우두머리를 잃어버렸다. 울리 주님이 구속을 완성시키시고 하늘로 돌아가셨을 때 자신이 모든 천사의 우두머리가 되셨다.
3) 십자가로 인해 일어난 우주적 결과
(엡1:10)“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골1: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사람이 타락했을 때 피조 세계까지 고통을 받았다. 전체 피조물이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한다고 말하고 있다(롬8:19-20).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모든 것 역시 해결하셨다.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결국 하나님과 다시 화해할 것을 생각하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2.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
1) 성육신 하신 주님이 받은 메시아적 영광
주님은 신인으로서 특별한, 메시아적 영광을 받으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요12:23). 성육신 하시기 전에는 영광 속에 인성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존재한다. 이것은 새로운 영광이다.
2)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위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신 주님
주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의 결과로, 주님이 머리가 되시는 교회의 형성을 위해 성령의 충만함이 주님게 주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7:39)“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행2: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주님은 이 성령을 부어주셔서 교회를 세우셨다. 이것이 주님의 속죄 사역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2-23)
3) 교회에 은사를 나누어 주심
(엡4:8)“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오직 주님의 사역과 높아지심 때문에 이런 은사들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승천하셨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받으시고 교회를 구성하는 자기 몸의 지체들에게 이 다양한 선물(은사)을 주신다. 고전 12장에는 이 은사들의 목록이 나온다. 엡4장에도 나온다.
3. 왕이신 그리스도
1) 중보적 왕권
우리 주님은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언제나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공유하셨다. 하지만 신인으로서의 주님은 중보적 왕권이라는 특별한 왕권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시행하기 위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주님의 권세를 말한다.
- 성자는 영원 전에 중보적 왕으로 임명되셨다. 창세전에 하늘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 간의 영원한 협의가 있어 그때 이 구원의 계획 전체가 충분히 논의되고 실행되었다. 이 특별한 사역이 성자에게 위임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 주님이 타락과 죄의 결과로부터 세상을 구원하실 책임을 스스로 취하신 것은 모두 사람이 창조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다.
- 주님은 타락 직후부터 중보적 왕으로서 다스리기 시작했다. 아담이 타락한 직후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주셨다. 이것은 이미 우리 주님이 중보적 왕으로 임명되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 주님은 이미 아담과 하나님 사이에 서 계셨으며, 아담이 그 자리에서 멸망하지 않도록 구원하신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주님이 나타나신 순간은 언제나 구원과 구속 사역의 일부였다. 주님은 사사들과 왕들을 통해 일하고 계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역사는 구원 계획의 일부이다.
- 주님의 중보적 왕되심이 승천 때에 공개적으로 선포되었다. (행2: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것은 공적인 선포이고 공식적인 의미에서 중보적 왕좌에 오르셨다. 빌 2:5-11도 마찬가지다.
2) 그리스도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는 주님의 통치 주님의 지배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통치가 인식되고 기쁘게 여김을 받는 곳이면 어디나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그곳에서 그리스도는 왕이시다.
- 그리스도의 왕권의 영적 측면.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과 교회를 왕으로서 통치하신다. 그는 교회의 머리시며 왕이시다. 주님은 그를 믿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다스리신다. 주님은 자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그의 나라를 통치하신다. 하나님나라와 교회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은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외적으로 표현된 것 중의 하나이다.
- 그리스도 왕권의 일반적 측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4-15). 이 중보적 왕권은 새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때까지, 즉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롬8:21) 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이 왕권은 고전 15장의 위대한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고전15:24-28)“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 교리강좌 1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613면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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