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제 6 권 성도의 견인(8:17-39)
제 1 장 구원의 궁극적 목적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도다”(롬8:17-18)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와 표적은 영화이다. 사도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영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몸과 영과 영혼이 다함께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게 될 것이고 완전한 사람, 평화롭게 된 사람들이 될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영화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결과이다. 바울은 5:12-21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의 이 위대한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 영화의 교리에 대해서 명백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되 자기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지으셨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은 마귀의 유혹을 청종하고 죄를 짓고 타락했다. 그 타락의 무서운 결과는 인간이 자기가 전에 가졌던 원래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것이다(3:23). 이것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비극이며, 이것이 인류의 참된 문제이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이 이런 모양으로 된 것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방식이다.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전에 처해 있었던 그곳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고, 자기는 성공을 하고 있다고 자신에게 설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것을 얻지도 찾아내지도 못한다. 안식이 없다는 바로 그 점이 죄인의 가장 특징적인 사실이다(사57:20).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바에 만족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야망과 경쟁의식과 질투심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만이 옛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님은 요한복음 5장 41절에서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던 하나님께로부터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영광을 추구하고 있다. 이 내적 욕구는 그를 쉬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은 크게는 시련들과 고통들과 환난들과 인생의 불행들을 설명해 준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자기는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영장이요, 통제자로서의 지위를 지명받았었는데 이제는 자기가 다스려야 할 피조물의 희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불가능했던 그것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물로서 값없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또한 아담이 전에 가지고 있던 것보다 훨씬 우월한 복락을 허락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울이 17절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바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아직 영화롭게는 되지는 못했지만 그것에 대한 맛을 조금 보았다. 멀리서 그곳을 보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고후3:1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죄가 우리의 죽을 몸에 아직도 남아 있어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8:13). 아직도 투쟁과 싸움이 있다. 이것이 영원한 영화의 상태에 들어가기 위한 예비 단계인 성화의 단계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현재 위치가 그러하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확실한 증거들을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고 있다(14절). 둘째, 우리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가지고 있다(15절). 훨씬 더 확실한 증거는 셋째,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나니”(16절). 마지막으로 이제 고난까지 들어서 그 점을 증거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 사도바울이, 다른 모든 사도들이 영광을 말할 때 동시에 고난을 언급하지 않고는 직접적으로 그 영광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했는가? 그들은 영광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은 언제나 고난에 대해서 말해 나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르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7-18)
영광과 고난! 그들은 언제나 함께 있다. 이 분명하고 명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수 세기에 걸쳐 내려오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넘어지게 하는 가장 큰 거침돌 중의 하나가 이것이었다. 거의 모든 신자들은 아직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그들은 결코 더 이상의 고난과 시련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빛을 얻어 마귀와 그의 모든 궤계와 교활함에 쉽게 동요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는 진정으로 다가올 영광의 빛에 비추어 고난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목화자적인 심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화와 고난의 문제를 그저 슬쩍 지나쳐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새롭고 놀라운 개념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영화가 오직 전 우주를 포함하게 될 더욱 장대하고 더 큰 영화의 일부분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개인의 구원에 절대적인 확실성과 확신에 대한 또 다른 증거를 제공한다. 만일 그가 우리에게 온 우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화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써 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에 참여하게 될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다.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한 본질을 가지고 있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참아내야 된다는 권고를 받고 있는 그 고난에 비추어서 이다. 그것은 바로 8장 마지막까지의 주제이기도 하다. 바울은 우리의 영화가 임박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확신하기를 바라고 있고 또한 감격과 황홀감을 가지고 그것을 고대하기를 바라고 있다. 고난으로 인한 마귀의 간사한 궤휼에 대처할 방안을 제시한다.
현재의 고난과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한, 영광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이 가르침을 반드시 이해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복락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행복과 무엇보다도 오늘날과 같은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가 해야 할 간증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제 2 장 신자의 고난의 의미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그리스도인들이 이 고난의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만 되는가?
첫째, 그리스도인은 그 고난을 보고 놀라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 하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고난에 의해서 요동되지도 말아야 하고 또한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때문에 넘어지고 요동된다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점검할 것이다. 사자에게 던져졌던 초대교회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영광의 최종적인 면류관은 순교라고 했으며 ‘순교의 피가 교회의 씨’라고 말했다. 우리가 고난을 받고 있다고 해서 결코 그것 때문에 구원의 진리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의 구원관에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며, 또는 우리가 전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찾아오게 될 것이다. 만일 마귀가 여러분에게 그러한 생각들을 돌린다면 믿음의 방패로 즉각 소멸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결코 환난이나 시련에 요동되어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의식을 느끼기까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도는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사도의 말을 들어 볼 때, 상황이 나아지게 될 것이라는 어떤 암시도 전혀 없으며, 또한 멀지 않아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하는 암시도 없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주님께 와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을 때 우리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마8:20)고 하셨다. 주님은 그가 자기를 진정으로 따르기를 희망한다면 많은 시련과 고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성경의 가르침은 보편적인 인류의 위안을 제공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마약의 일종’으로 좀 더 행복을 느끼고 좀 더 자기들의 고통을 잊어보려고 하나님의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천만에! 여러분은 마태복음 24장을 읽어 보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여러 모양과 형태의 고난과 환난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1-4)에서의 말씀은 오늘날의 인생을 얼마나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가?
세상이 점점 나아지기는커녕 세상이 죄악과 고통과 악의 처소가 되어 갈 것이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은 이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여러 짐승들로 비유될 수 있는 강한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세상에 처하여 있음을 가르쳐 주는 책이다. 이미 그들은 지금 활동하고 있으며, 교회는 국가와 동맹을 맺게 되고 세속화되고 말았다. 교회와 기독교 이름으로 거짓된 낙관론이 설교되어 왔고, 그러한 위안이 자주 주어져 왔다. 그러나 거짓된 낙관론은 요한계시록에서도 로마서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조건을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도록 노력하라는 부름이 여기에는 없다. 이것은 현대에 있어서 중차대한 이슈가 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동맹하여서 어떤 일을 하여 고난을 적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지도 않다. 로마서 13장은 그리스도인은 법을 준수하는 사람이어야 된다는 것이고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입법이라든지 그러한 활동을 방편으로 해서 고난의 원인들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지는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또 시원찮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통치자에게 영향을 행사하고 그에 따라서 조직해 나가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고통을 가져오는 요인들을 종식하도록 설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세상을 개혁하기 위한 개선책이 아니다.
사도는 고난을 당했을 때 그저 체념하라고 대답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거짓된 추측이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로 하여금 ‘넉넉히 이기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단순한 체념의 사상이 교회의 사상 속에 자주 끼어들었다.
사도는 적극적이다.
첫째, 바울의 가르침은 절대적으로 독특한 것이다. 세상에서 그 문제를 그런 식으로 대처하는 가르침은 그것밖에 없다. 당시에 매우 인기 있었던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소망 없는 체념이다. 반면에 사도의 가르침은 적극적이요, 승리에 차 있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도 궁극적으로는 도피주의에 불과하며 철저하게 비관적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가르침 속에 있는 비관의 요소와 스토아주의나 또는 불교 또한 세상에서 크다는 종교들의 비관주의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그을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물체는 악하며 오직 유일한 소망은 물체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소망 없고 비관적이고 용기를 꺾어 버리는 관점이다. 불쌍한 것은 교회를 자기들의 고통을 잠시 잊기 위한 도피처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떠한 다른 것도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교훈을 제시하지 않는다.
둘째, 바울의 독특한 가르침은 전체 기독교의 교훈에서부터 유출되어 나온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생각컨대”라는 말씀 속에서 그 점을 명백히 진술한다. “내가 신앙에 대한 모든 교리들을 파헤쳐 나온 결과로써 나는 이러한 필연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바울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난을 받음으로 인해서 불행을 느끼고 있는 그리스도인, 그 사람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리들로 인해서 주어진 위안은 스스로 그 교리를 깊이 생각한 결과로써 나오는 하나의 유추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단순히 어떤 위안을 주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의 임무란 여러분으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혹독해 지기도 해야 하며, 징책을 해야 하기도 하고 또 그들의 생각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해야 한다.
셋째, 그 교훈이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 어떠한 위로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우리가 로마서에서 지금까지 강해해 온 교리에 관해서 분명하지 못하면 사도가 ‘생각컨대’라고 말할 때에 그 사도의 말을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전체 교리와 우리의 복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계획하고 계신 모든 목적에 관하여 명백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로부터 약속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뿐이다. ‘생각컨대’ 곧 이 말은 모든 앞에서 제시했던 교리들에 비추어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그것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전체적인 방식에 인도하여 준다. 기독교는 ‘여러분이 잡는 하나의 정신’이 아니다. 기독교는 믿고 체험하는 바의 믿음이다. 또한 그런 다음에 이치를 따져서 생각하는 그러한 믿음이다. 그러한 일에 실패하면 다른 어떤 것도 얻지를 못한다. 이 원리가 명백한가?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 둘, 셋, 넷’ 하는 요점을 살펴보는 것은 쓸모가 없다.
여러분은 고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마귀가 여러분을 참소할 때, 여러분은 그를 털어 내려고만 애쓰는가? 그것은 참된 기독교적인 방식이 아니다. 여러분은 마귀를 다루는 방식을 생각하고, 이치적으로 따져 보고, 논리적으로 논증해 보고, 여러분이 믿는 교리들을 꼼꼼히 보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컨대’ 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마귀를 다루는 방식이다, 고난이나 환난이나 시련을 다루는 방식은 그 방식 밖에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독특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 그 가르침은 언제나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근본적인 교리들에 관한 믿음과 확신의 결과이다.
제 3 장 바울의 확신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을 살아 있는 동안에 그들의 분깃이 되는 시련과 환난을 정확히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아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환난과 시련과 절망과 고난 가운데서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것 가운데서 넉넉히 이긴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첫째, 사도는 이 세상에서 정확한 시대관과 자기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현세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전 인생이요, 이 세계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들의 전체 사고방식은 전적으로 잠시적이요, 현세적이요, 보이는 것이요, 본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들의 관점은 사람이 이 땅에 와서 살다가 이 땅을 떠나가는 것, 그것뿐이다. 이것이 그들의 시간관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이 잘못되었을 때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개선되기를 바라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 일들이 잘되어 나가지 않을 때, 전적으로 위로를 찾을 길이 없다.(엡2:12) 또한 기대할 만한 것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하나의 구분을 알고 있다.
“현재” - ‘당분간’ 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것은 ‘이 현재’ ‘우리가 사는 전체 시대’ ‘이 현존재’ 라는 의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부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사이를 의미한다. 현세는 내세가 오게 될 때에 끝이 나는 것이다. 우리는 현세를 살고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현세만이 아님을 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시간에 대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장차 나타날’이라는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 점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의 전체 생각은 ‘현재’와 ‘장차 나타날’ 두 촛점에 의해서 통제를 받아야 한다. ‘나타날’ 이것은 장차 올 것이며 성경 전체가 고대하는 위대한 사건이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 전체에서 또한 마가복은 13장과 누가복은 21장에서도 ‘장차 나타날 영광’을 나타내시며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세상에서는 ‘환난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그들 앞에 들어 보이신 것은 장차 올 영광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처소가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느니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0-21)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 )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 5:10 )
분명히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으로서 철저하게 그 주제를 할애하고 있다. 마지막의 부르짖음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이다. 그리스도인은 큰 갈망을 가지고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부르짖는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나타나심과 강림하심 안에서 밝혀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분은 단순한 나타남으로만 오실 것이 아니다. 영광의 몸을 입고 오실 것이다. 모든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 현세’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역사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사도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말한다. 그는 어느 의미에서 그 영광은 되어질 어떤 것이 아니고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위대한 날이 오게 될 때, 존재하는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 명백해질 것이며 보여질 것이다. 그는 그 영광에 대한 어떤 희미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고후12장) 다메섹 도상에서 그는 영광 중에 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고 결코 그것을 잊지 못했다. 바울이 고대하고 있는 것은 그를 다시 보는 것, 그를 영구히 보는 것, 그것이다.
성령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증거하신다. 성령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인쳐 주신다. 성령은 그것에 대한 보증이다. 성령께서는 그 영광 자체에 대한 제 1차적인 몫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나타날’ 이라기 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관망자가 되는 특권만 가지지 않고 우리는 거기에 참예하고 누리게 될 것이다. 전 우주에 나타날 영광의 일부가 우리에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말로 할 수 없는 영광으로 이 ‘장차 오는 세대’를 발하게 되시는 그 때에 우리로 그 자신의 강력한 영광의 일부가 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시간의 문제처럼 어려운 것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자기로 하여금 마땅한 방식대로 시간을 요리 할 수 있게 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세상에 살고 있다. 40년, 50년, 70년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그것이 엄청나 게 길어 보인다. 그러나 영원을 생각할 때 모든 것은 변한다. 여러분은 100만년을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것을 100만 배, 또 다시 100만 배로, 그런 다음 영원토록,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여러분이 그 영원을 생각할 때 우리의 인생이란 무엇인가? “너희의 인생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이니라”. 그것은 숨을 한번 들이키고 내 쉬는 것과 같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교훈이요 우리를 돕는 방식이다.
우리의 “환난의 경한 것이” - 그것은 말하자면 한번 번쩍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살다가 내일 가버린다. 그러나 ’나타날 영광‘이 있다. 이 생각을 꼭 잡으시기 바란다. 곧 우리는 이 현세에 속해 있지 않고,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제 4 장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18-23)
우리는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 고난과 시련과 환난과 고통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있다.
첫째, 이미 알아본 바와 같이 ‘현세’와 ‘나타날’ 오는 세대로 바울이 구분하는 시간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였다. 현재의 고난과 고통과 난제들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전체 세계에 나타나게 될 이 영광스러운 상태에 비추어 살펴보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생각함’의 과정을 실천에 옮김으로써만이 기독교의 위안과 위로를 즐길 수 있다.
둘째, “비교할 수 없도다” - 이 구절은 가치와 값을 가리키는 문구이다. 어떤 것은 다른 것과 비교할 때, 전혀 무게를 지니지 못한 것이 있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아무리 여러분이 지금 감당하고 있는 고난의 짐이 무겁다 할지라도 장차 여러분의 것이 될 영광의 무게와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기독교의 방식이다. 고난을 받을 때, 세상은 “힘내라 곧 잘 될꺼야”라고 말을 하나 그것은 하등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단들의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이단들은 마약과 같이 이 무게를 실제보다 가볍게 보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그 문제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다만 사실에 대한 자기의 반응을 변화시키는 데 불과하다. 일종의 어리석은 자의 낙원 속에 있는 것이다.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고난의 실제적인 성질이나 구체적인 성격을 극소화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난이 무서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볼 때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실제적으로 고통의 진상 그대로를 대처하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라. 그런 다음에 더 이상 그것이 참아낼 수 없이 무섭다고 느껴질 때, 다른 쪽을 보라. 나타날 영광을 보라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것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결국 오직 유일한 한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고난이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나게 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위안을 주는 기독교 방식의 진수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 고난을 받아야 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세우신 터를 가진 한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세의 비결은 ‘보상의 상급에 두었으며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더 좋게 여기는’ 그것이었다.
우리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고뇌와 수치와 고난을 당하시도록 한 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우리들이 확신해야 하고 그리스도인들로서 주의를 집중시켜야 하는 것은 장차 올 영광의 지극히 큼에 대한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활을 좌우하는 교리이다. 삶 속에서 ‘넉넉히 이기게’ 되는 방식은 그것 밖에 없다.
셋째, 주요한 교리는 우주의 현재 상태에 대한 설명이다. 진화를 말하던 사람들은 오늘날을 설명할 수 없다. 바울이 여기에서 그 해답을 주고 있다. 첫 번째 진술은 모든 피조 세계가 장차 올 이 영광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진술은 어째서 전체 피조물이 그런 식으로 고대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라” - ‘피조물’은 비이성적인 피조물인 동물, 식물, 땅, 하늘, 눈에 보는 것들을 의미하며, 사도는 이 비이성적인 피조물들을 의인화시켜 말하고 있다. 사도는 하나님의 이 창조의 부분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매우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영광은 너무나도 커서 모든 피조물들이 목을 길게 빼고 그것을 갈망하며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그것을 이렇게 고대하는 것은 피조물의 운명이 사람의 운명과 불가분해적인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가 피조물의 현재 상태를 가져왔다. 20절에서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한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람의 타락으로 피조물 전체가 무익하거나 쓸데없는 것, 허무한 데에 복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1절에서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말함으로써 더욱 잘 설명해 준다. 피조물은 썩어져 가고 있고 사망과 멸망에 굴복하여 있다. 바울은 피조물 그 자체로서는 부패와 자기 속에 있는 썩어지는 요소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를 구분하는 요점들 중에 하나를 대하게 된다. 비그리스도인은 인생을 바라보고 “인생은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피상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더 깊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세상에 나오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세상을 빠져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첫 번째 호흡이 마지막 호흡과 연관되어 있다. “너희 인생이 무엇이뇨? 그것은 안개와 같으니라”. 모든 것이 부패하여 가고 있다. 그것은 어느 시점에 “굴복케” 되었다.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땅과 피조물이 인간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창3:17-19) 피조물은 이러한 결과를 낼만한 하등의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가져 오게 한 것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였고 ‘만물의 주가 타락했을 때’ 그의 당하는 형벌의 일부가 그가 영장 노릇을 하던피조물에게 주어져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고 썩어짐에 종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살라고 조성해준 낙원을 누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사도는 이제 하나님의 계획 속에 긍정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열심히 기대하며, 열렬한 기대감을 가지고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제 5 장 피조물이 고대하는 것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18-23)
- 우리가 이제까지 알았던 것으로부터 유추를 해보면
첫째, 세상의 상태는 진화론으로 설명되지 않고,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진화론에 의하면 현재의 모든 피조물의 상태는 불완전한 발전 상태라고 한다. 피조물이 이러한 상태에서 고통 받고 있는 것은 그 피조물 자체가 행한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행한 일 때문인 것이다.
둘째. 창세기의 처음 몇 장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창세기 몇 장들이 신화를 모아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그것이 구원 교리를 붙잡는 것에는 변화가 없다고 주장한다. 여러분은 그것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고는 성경적인 교리를 참으로 붙잡을 수 없다.
셋째, 진화론의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이나 피조물이나 우주 전체에 대해서 어떠한 소망도 없다는 것이다. 진화론과는 달리 과학은 모든 우주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열역학 제2법칙)
넷째, 오직 한 가지 밖에 소망이 없으며, 그 소망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목적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이다. 피조물이 허무한 상태나 신음하며 고통당하는 상태로 영구히 계속되어 나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존영은 세상을 이와 같은 상태대로 내버려 놓지 못하게 한다.
피조물은 ‘소망을 가지고’ 굴복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창세기 3장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사람은 범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오셔서 죄의 결과로 땅을 저주하실 것이며,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며 자연과 투쟁해야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연 곧 피조물은 저주를 받을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약속하고 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그것이 소망이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한 구원의 소망이 약속되어 있다면 그것은 피조물의 구원의 소망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된다.
-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 사도는 우리가 이것을 안다고 말하고 있다. 피조물 전체가 함께 이 ‘탄식하고 고통하는데’ 휩쓸려 들어 있다는 것이다. 온 피조 세계가 모든 부분에서 자기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더 좋은 것을 산출하려는 시도 속에서 해산의 고통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다.(갈 4:19) 매년 자연은 무엇인가 영구적인 것을 산출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봄은 여름을 불러오고 가을, 겨울을 불러올 뿐이다. 자연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피조물은 지금까지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해 나오고 있다.
부활에 관해서 마치 겨울이라는 죽음 뒤에 오는 봄과 같다고 설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비관적이 되지 말고 모든 것이 결국은 잘될 것이라고 확신시켜 준다. 바울은 이 자연의 탄식과 고통이 급기야 완전한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정반대로 모든 투쟁과 고통과 해산하는 수고는 결국 아무것도 낳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 그것은 모든 피조물 전체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인간 스스로에게도 해당된다. 사도가 말하고 있는 바는 피조물 그 자체에는 어떠한 소망도 없으며 피조물 자체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피조물에게 ‘행해질’ 무엇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저주하셨듯이 그 피조물을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다. 바울은 ‘우리도’ 그것을 고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그 영광은 주님 자신 속에 제일 먼저 드러나 보이며, 다음 우리 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며, 그 다음에 피조물 자체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이해하기만 하면, 곧 그들은 “현재의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생명이 없는 자연도 무엇인가 이 점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라. 그는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
“스테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7:55-56)
요한계시록은 특별히 이 영광에 관심이 높다. 1장 12절에서 시작되는 상세한 묘사들과 5장 6-8절, 17장 14절, 19장 1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위대하고 고상한 묘사들을 보시기 바란다. 이 구절들은 주님께서 나타나시게 될 때, 온 우주가 그를 볼 것이다. 그는 지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살후1장).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가 오심이 두려움이 될 것이다(계6:15-). 임박하고 있는 그 큰 날에 그의 영광 뿐 아니라 우리의 영광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우리는 그의 영광의 일부이기 때문이다(마13:41).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가? 여러분이 시련과 환난과 고난을 받고 있을 때, 여러분은 넘어져 실의에 차서 절망에 빠지지는 않았는가? 그렇다면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라.
그리스도인이여!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든지 그 큰 날에 나타나게 될 것이며, 여러분은 ‘햇빛처럼 빛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상태와 환경과 조건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제 6 장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이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18-23)
장차 올 영광 속에서 우리의 분깃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도가 23절에서 ‘양자’ 라고 부르는 바이다. ‘양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이 아들들의 지위로 들어가게 됨을 의미한다. 사도는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사도는 바로 그 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어떠할 것인가를 생각하도록 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39-54절에서 ‘썩을 것이’ 없어지게 될 것이고 우리는 ‘썩지 않게’ 될 것이다. ‘육신적인 것’에 불과한 모든 것이 더 이상 육신적이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영적인 것이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몸이 부활할 뿐 아니라 변화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다.
고린도후서에서 같은 교훈의 진수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고후 3:18)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몸을 벗으므로 자기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있는 장막 집으로 옷입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현재의 상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이 모양인 것은 교회의 대부분이 그 진리를 믿기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교훈이다. 오늘날 스스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서 부활과 몸의 영화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믿기를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약간 희미하고 불분명한 영적인 상태와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의 중요한 부분으로 몸의 부활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우리들 스스로에 대해서 인식해야 되는 것은
첫째, 우리의 몸들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우리 주님 자신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화로운 몸이 될 것이다. 에베소서 5장 26-27절에서 영적인 완전에 대한 바울의 묘사를 살펴보라.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계시록 7장 13절 이하에서 우리가 어떠할 것인가를 묘사해 준다. 더 이상 슬픔이나 애곡하는 것이나 죄짓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또 21장 2-4절 말씀에서 살펴 보라. 우리는 그것을 능가할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완전하고 철저하게 될 것이고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육체적으로, 몸의 차원에서까지도 완벽하게 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우리는 완벽한 만족을 누리게 된 것이다. 모든 궁핍이 충만하게 채워질 것이고, 우리는 우리로 비참과 불행과 고통과 슬픔을 겪게 하였던 것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고난과 비교시켜 보아야 한다.
둘째, ‘의의 면류관’과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자녀이면 후사요 하나님의 후사니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라”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8)
‘의의 면류관’ 거기다가 우리는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 1:3- ). 모든 사도들이 같은 교훈을 가르친다. 그것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고 더럽지 않을 것이다. 모든 어리석음과 악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만질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보류시켜 두신 것이다.
셋째, 우리는 거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과 하나님의 천사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고전 6:1-3) 우리들이 세상을 판단하고 천사를 판단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이것이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의지하며 사는 진리이다. 그들이 그들의 핍박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으며, 이것이 그들을 대적하는 모든 것을 참고 견디고 이겨내는 비결이었다.
넷째, 또한 모든 피조물도 역시 그것에 동참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서 피조물은 모든 썩어짐의 요소에서 완전히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낙원이 다시 건설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위대한 구원의 일부이다. 그것은 신자들이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 만이 아니고 그들이 영적인 형태를 가지고 하늘로 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낙원이 다시 되 찾아지는 것이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바울은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라고 말하고 있다. 온 옛 우주의 깨끗케 하는 위대한 일이 있게 될 것이고 죄악의 모든 잔재는 불타 없어지게 되며,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 새 땅’이 있게 될 것이다.(벧후 3:7) 우리들에게 사망이 멸해지게 될 것이며 악에 속한 모든 것들이 영원한 멸망의 상태로 던져지게 될 것이다.(계20:11) 어떤 방식으로든지 우리를 해치는 것이 결코 없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시편 8편에서 예언된 것의 성취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여호와여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8:) 이것이 바로 우리 앞에 제시된 위대한 약속이다. 우리가 “현재의 고남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유추를 끌어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비추어 생각할 때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주님의 이적들은 영광과 그날을 예고하여 비추어 주고 있는 그림자이다. 모든 피조물이 날들 중에서 그 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현재 이러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처럼 용기를 잃고 좌절당하는 것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떠한 일이 세상에서 우리를 넘어지게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가? 여러분은 다시 불평하고 불만을 가질 것인가? 여러분은 사람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줄까에 대해서 매우 걱정하겠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말로 할 수 없는 영광을 위해서 예비되고 있다. 이것은 나타나게 될 것이고 장차 드러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머리를 들고 가슴을 펴고 믿음을 가지고 장차 올 영광을 주시하시기 바란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세상은 지나가 버리고 잠시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요동될 수 없는 나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자녀들을 위해서 ‘창세 전부터’ 예비한 그 나라에 우리가 속해 있는 것이다.
제 7 장 영원한 상태와 천년왕국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리라”(롬8:18-23)
본문의 말씀은 장차 올 어느 날에 모든 피조물 전체에 이루어질 사실을 최종적이고 영구적인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저는 이 구절들이 어떤 상상적인 천년왕국에 대해서 어떠한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역설한다. 이 지상에서 천년왕국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이 천년까지만 계속되다가 그 다음에 마귀가 다시 풀려 나오게 되는 죄악과 혼돈의 상태가 뒤따를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요한계시록 20장 이외에는 천년기간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이 없다. 그리고 거기에는 피조물의 상태에 대해서 하나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주목하라.
요한계시록은 상징과 비유와 은유들로 가득한 책이다. 일반적으로 열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으로 완전한 것을 나타낸다는 것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그러므로 열의 세제곱은 분명히 긴 기간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상징을 물량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고집하고 문자 그대로 천년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계시록 20장에 있는 구절이 말하는 것은 오랜 기간동안 주님께서 왕노릇 할 것이고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왕노릇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 뿐이다. 성경 전체 어느 곳에서도 주님과 그의 성도들이 이 땅 위에서 왕노릇을 하게 되는 문자 그대로 장차 올 천년을 고대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지 않다.
만일 문자 그대로 천년왕국 같은 것이 온다면 분명히 로마서 8장에 있는 이 구절은 모두가 천년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로마서 8장에는 그러한 구절이 하나도 없다.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의 서신들에서도 그러한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 주님 자신은 더 더욱 그러한 언급을 하시지 않으셨다. 모든 혼란과 고통은 성경에 나오는 한 가지 진술만을 가지고 떠드는 데서 오는 것이다. 여기 로마서 8장 본문은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심으로써, 마지막 심판으로 인하여 죄와 악에 속한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멸망시킴으로써,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 새 땅이 들어옴으로 완성되게 될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속 받은 자의 영원한 상태와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죽을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것은 현세의 세상은 끝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하여 최종적인 심판이 있을 때에 되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 신자가 죽으면 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빌1:21-24) 8장 본문에서는 그것을 다루고 있지 않고, 몸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 사람의 완전한 구속이란 몸과 영혼이 다 구속받는 것을 말한다. 또한 피조물의 충만한 구속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사단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실패를 요구하며, 구속받은 자들의 완전한 회복을 요구하며 더욱 더 영광스러운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잠시 잠깐 있는 것이 아니고 최종적이고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고 영구한 것이다. 빌립보서 1장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좋으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보다 더한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라는 말의 의미를 질문할지 모른다. 그 의미는 매우 어려운 주제이다. 제가 이해하기로 성경에서 ‘하늘’이라고 묘사되는 것은 보통 우리가 중간 상태로 여겨야 되는 것이지 최종적이고 영원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3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이것이 더 좋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몸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중간 상태요, 구속받은 사람들이 몸의 부활과 그 몸의 최종적인 영화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이고 조건이다. 계시록 20장 4절에서 ‘영혼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영혼들’이지 몸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자는 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불완전한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쓰여진 용구라고 생각한다. 영화로운 상태에 들어가게 될 때에 그 몸은 활동하게 될 것이다. 현세가 용해되어 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 영화로운 땅에서 영화로운 몸을 입고 거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영적인 차원에서의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의 부활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우리가 다른 영역에서 계속해서 살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사단을 물리치시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구속과 구원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몸과 영혼으로 만드시고 물리적인 우주 속에 살도록 지으셨다.
결론적으로 첫째,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어떠한 것이라도 놀라서는 안 된다. 달라지게 될 것도 기대하지 마라. 여러분은 그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을 사람이 세상적인 조건을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어떤 일에 걸어서도 안 된다. 그 세상 중심에 와해의 원리, 헛됨과 썩어짐의 원리가 있다. 어떤 개선점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개선은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도 소망을 가지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라.
우리의 지위는 나는 지금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아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힘을 받았다. 영혼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나 그러나 내 몸은 아직 구원받지 못하고 죄가 내 몸 속에 있다. 몸은 죄의 몸이다. 나는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 바울은 그 결과 우리가 현재 ‘우리 속에 탄식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탄식하는 주요한 이유는 ‘그 안에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처해 있는 상태를 알기 때문에 만이 아니라 다가올 일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기다리는 것은 더욱 고통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 쓰여 졌으며,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에게 고난을 참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고난을 극복하고 ‘넉넉히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오고 있는 이 영광에 대하여 확실해야 한다. 실제적이 되도록 하라. 이제 여러분은 아주 정직하게 “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제 8 장 구원의 과거, 현재, 미래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롬 8:24-25 )
이 논증은 우리가 현 세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진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고통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시대의 역사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들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통찰력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 이 교훈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행복에 있어서 진실로 진수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즐거워하면 할수록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은 더욱 속으로 탄식하게 된다. 탄식하는 것과 즐거워하는 것은 함께 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진정으로 즐거워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현재 처해있는 상태에도 불구하고 지금 기뻐하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 ‘소망으로 말미암아’가 아니라 ‘소망 안에서’이다. 구원을 세 가지 국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첫째, 구원을 과거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은 ‘나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가 이미 죄책과 죄의 형벌에서 구원받은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제 정죄와는 관계를 끊은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모두 우리의 과거가 청산되었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옛 사람’은 죽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관하여 상관할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롬7:6)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일에 대하여 명확하지 못하면 나머지의 논증을 따라갈 수 없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이제는 연합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옛 사람’의 종말이다. 여러분이 용서받았다는 그 문제에 되돌아가지 말라. 여러분이 죄를 지을 때라도 여러분은 반드시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다시 들어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했고 상심시켰다. 그러므로 탕자가 했던 것처럼 다시 돌아가면 모든 것이 다 잘 되게 될 것이다.
둘째, 구원의 현재적인 측면은 우리는 죄의 권세에서 구원받고 있다. 여러분이 죄의 세력에서 구원받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다시는 죄 짓지 않을 것이고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우리는 죄의 세력과 죄의 오염과 비열함에서 구원받고 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예비되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인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이런 면에서 구원은 계속되는 하나의 국면이다.
셋째, 구원의 미래적인 측면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무엇이 있다. 우리의 최종적인 영화, 몸까지도 구원 받아 영화롭게 될 때 오게 될 영광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미래에 되어지는 일이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우리가 가진 것은 처음 익은 열매뿐이다. 더 충만한 수확을 할 때가 올 것이다.
언제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딪쳐 오는 위험이 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너무 작고 하잖다고 외치는 것이다. 그들은 “나는 어느날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소원하고 있다.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가정으로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는 여러분이 구원을 절대적인 확실성과 확신을 가져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는 반대로 우리가 아주 대단하다고 지나치게 주장하는 위험이 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거룩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완전히 죄에서 해방되며 완벽한 사랑으로 충만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 그들의 거룩함이 이 두 번째 체험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병들지도 아프지도 말아야 된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사도는 우리는 아직도 완벽한 성취의 단계에 들어가 있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소망이라는 용어를 너무 적게 주장해서도 안 되며, 반면에 너무 지나치게 주장해서도 안 된다. 그 구원의 시제들을 분명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서 ‘소망’ 이라는 말의 의미는 정확히 무엇인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에서 ‘투구’로 묘사되어 세상과 육신을 막아내기 위해서 머리에 쓸수 있다. 히브리서 6장 19절에서는 ‘영혼의 닻’이라고 말하며 강하고 확고한 것이며, 흔들리지 아니할 무엇이라고 한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서 소망과 믿음의 관계를 본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이 증거니” 믿음이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것들을 우리가 신뢰할 근거와 이유들을 제공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소망은 더욱 더 한 단계 나아간다. 많은 사람들은 소망을 우리가 믿음이 약해질 때 우리를 뒤에서 받쳐주는 무엇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소망’을 ‘소망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믿음은 소망을 유발한다. 믿음은 우리에게 이러한 일들에 관한 확신을 주고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기다리면서 발돋움을 하고 서 있게 한다. 소망은 믿음보다 더 강한 것이고, 믿음으로 믿어지고 수납되는 복락들을 너무나도 확신케 하는 것이다.
소망은 참된 기독교의 척도이다. 참된 기독교는 내내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안에서 즐거워한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은 다만 맛보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런 일로 넘어지지 말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세상이 아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세상은 그것을 도피주의로 부를 것이다. 세상이 무슨 말을 하든지 내버려 두라. 사도는 ‘두 사이에 끼여’ 있었으나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 위해서 떠나는 ‘이것이 더 좋다’ 고 말한다. (빌 1:21-24)
제 9 장 소망을 가진 참된 인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가다릴찌니라”(롬8:24-25)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 장래에 속하고 소망해야 하는 어떤 것을 자기들의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붙잡을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는가? 만일 여러분이 약속된 것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소망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인식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마귀가 와서 여러분을 충동시켜서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능하다고 유혹한다. 만일 우리가 이 원리를 진정으로 포착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로도 결코 놀라지 말아야 한다. 절망적이가나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전5:7).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그리고 소망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어떤 일이 약속의 차원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이 오기까지 기다릴 준비를 한다. 그것은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로서 진리가 된다.
“이 원리를 포착한다면 그것을 참음으로 기다리라” 이 진술은 하나의 교훈과 도전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동시에 커다란 위안과 용기를 붇돋아 주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 권면은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극적인 권면이다. 우리는 단순한 소극적인 체념의 상태로 떨어지는 위험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은 체념의 문제가 아니다. 고린도후서 5장 2-4절에서 “...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은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이 바울의 가르침은 단순히 소극적이거나, 이 세상에서 떠나고 싶은 욕망을 하나의 도피적이고 해방적인 무엇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의 자세는 본질적으로 적극적이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그리스도인은 일차적으로 현재의 ‘입은 것’을 제거하는데 관심을 두지 말아야 된다. 그가 바라는 것은 ‘덧입고자’하는 것이어야 한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그의 원하는 것은 ‘몸을 떠나는’ 것이라기 보다는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주와 함께’ 거하기를 원하며, “덧입고자 하며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되는” 것을 원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 여기에 ‘기다린다’는 것과 ‘참음’의 두 요소가 있다. 잘못된 번역은 모든 강조점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훌륭한 인내에 주어져 있다. 그러나 사도의 의도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우리 자신의 참음에다가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이 사건의 영광에 두고 있는 것이다. 곧 우리가 열심히 고대하고 기다리고 있는 이 위대한 사건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첫째, ‘기다리라’ 이 말의 충분한 의미는 ‘기쁘게 열심히 기다리는 것’이다.
“...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하도다”.(시130편5-6절)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좇아가노라”(빌3: )
더 나아가서 사도는 우리가 열심히 참음으로 기다려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참음’의 의미는 ‘지치지 않고 참으며 견디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지치지 않고 견뎌내고 참고 부단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수동적이 아니고 매우 강하고 능동적인 덕행이다. 그것은 환난의 결과로 인해서 더 자라나고 발전한다. “소망이란 동시에 인내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딸이기도 하다”(어느 청교도). 여러분은 소망에서부터 인내로, 인내로부터 연단으로 그런 다음에 다시 소망으로 되돌아 간다. 이러한 단계를 산출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환난의 효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진리는 하나의 원과 같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리스도인은 열심과 인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시112:6-8)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격을 특징지을 수 있는 완벽한 균형을 보게 된다. 그는 부단하고 믿을 만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사람과 신령한 사람 사이의 차이를 예증하여 준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광을 말하자면 그의 머리는 하늘에 있고 발은 땅을 든든히 디디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간절히 기다리고 갈망하는 것의 본질은 이론적이거나 학문적인 것이 아니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관심만을 가져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망은 사람의 삶과 삶의 방식에 영향을 주는 어떤 실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어떠한 이론적인 문제를 붙잡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이 영광을 진실로 갈망하고 있느냐이다.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가하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을 강렬하게 원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시는 것”을 고대했던 것이다. 만일 우리의 이러한 일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우리로 하여금 똑같은 갈망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는 지체없이 자기를 살펴보는 작업을 착수해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열심히 참음으로 어떻게 기다릴 수 있는가?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을 간절히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바란다면 이 현대에 관한 정확한 진리를 인식하라. 세상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것에 사로 잡히지 않아야 한다. 세상에 대해서 통찰하고 있어야 하며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도록 하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그것들을 제거하고 그것들과 결별하라.
둘째, 여러분이 누구이며 여러분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상고하라.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살리심을 받았다. 우리는 율법과 관계를 청산하였고, 죄에 대하여 죽였고, 새로운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생각하고 묵상해야 한다. 여러분은 더 나아가서 “이것이 내게 진리인가?”라고 생각하고 묵상하라. 그것이 여러분에게 실질적인 것이 되기까지 그것에 대한 빛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여러분은 주님 자신을 추구해야 한다. ‘주를 아는 것’ 그것이 그 모든 것의 비결이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다.
여러분에게 오고 있는 것을 묵상해 보라. 이것이 기독교이다. 이것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알았던 방식이다. 어째서 그들이 모든 사람들을 흔들었고 모든 세상을 뒤엎었는가? 그들이 위엣 것에 대하여 생각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여러분들에게 현실적으로 생각되게 될 때까지 계속 생각하고 간구하라. 성령께서는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으신 것이다. 여러분이 그 다른 체제를 ‘의식’하게 되어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그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 될 때까지 이러한 일을 계속해 나가시기를 바란다.
“그의 누이는 매우 어렸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날에 이렇게 써 놓았던 것입니다. - 오늘 아빠가 우리를 떠나셨다. 그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가신 것이다”(웨일즈 옛 설교자의 자서전에서) 10-12세 되는 작은 소녀가 그것도 지난 60년대에 그런 식으로 쓸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소녀가 그런 차원에서 생각을 했었으며, 그의 가족이 그런 분위기 가운데서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그처럼 쓸 수 있겠는가?
우리 자신이 언젠가는 떠나게 될 터인데, 만일 우리의 머리로 아는 지식이 모두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곳으로 인도함을 받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얼마나 가련한 그리스도인의 세대인가? 저는 지난 100여년 동안에 무엇이 잘못되어 나갔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 저는 두려움을 가지고, 그 대답은 우리가 너무나 주관적이고, 언제나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진리를 생각하고 묵상하고 그것을 생각지 않았다는데 원인이 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바란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시고 계신 것을 바라보기 바란다. 그것이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제게 있어서 우리가 “참음으로 열심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복된 소망을 기다리는‘ 방식은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제 10 장 성령의 더 많은 역사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6-27)
‘이와 같이’ - 이 말에 의해서 연결 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첫 번째, 그들은 ‘소망’이 우리를 도와서 시련을 대처하도록 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역시 우리를 돕고 우리를 이끌어 주어서 특별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믿음만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우리의 기도 생활과 관련하여 성령의 역사로 제공되는 이보다 더 많은 도움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진리이다.
두 번째, 이 연결고리에 정확한 해석은 사도가 이제까지 말해왔던 것을 계속하거나 부가적인 위로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 자신에 관해서 행했던 일련의 진술들을 계속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존재하는 환난과 시련에 관해서 말해왔던 것에 첨가해서 어떤 것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확신과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또 다른 다른 측면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8장의 중추적인 테마는 구원의 확신이기 때문이다. 이 확신에 대한 다른 모든 국면에 있어서 가장 주도적인 요인은 성령의 역사였다.
2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4절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한다”고 말한다.
10절에서 우리가 지금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며 영적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에 대한 보증이다.
11절에서 사도는 몸의 부활의 입장에서 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3절에서 실제적인 차원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영으로 말미암아서 이다.
14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와 완전한 구원에 대한 영광스러운 증거들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가장 고차원적인 확신의 형태이다. 이러한 모든 방식으로써 성령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의 보증이 되신 것이다.
23절에서는 성령께서는 그 영광에 대한 ‘처음 익은 열매’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완전한 보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한 1차적인 계약금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성격이 그 서약 속에 내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또 다른 면이 있다. 특별히 기도와 관련하셔서 성령께서 또 다른 일을 하고 계신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순례자로 나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과 늘 가까이서 접촉하는 방식을 아는 것이 아닌가? 기도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연약한 것 가운데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연약은 영적인 것으로 아담의 원죄의 결과로 오는 여러 가지의 제한들을 의미한다. 그것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무식하고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고민은 ‘우리가 마땅히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른다’는 데 있다. 그것은 일반적인 기도의 문제가 아니고 어떤 주어진 특별한 상황 가운데서 특별하게 기도할 바를 모른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을 안다. 그러나 문제는 ‘합당히’ 기도해야 할 바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신명기 3장 23-26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행사를 감탄하며 그래서 간구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강하고 엄중한 책망을 하신다. “여호와께서...진노하사 내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모세는 드리지 말아야 될 간구를 드렸던 것이다.
고린도후서 12장 1-10절은 로마서 8장 이 구절에 대한 완전한 주석이다. 사도는 육체 속에 있는 가시로 인해 걱정하며 사람의 차원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였다. 자기의 일을 방해할 것으로 느꼈고 자기의 능력에 제한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주님께 그것을 제거하여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였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았다. “내게 이르시기를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그래서 그는 그의 상황을 보다 영적인 방법으로 살펴보기 시작했고 주님의 방식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전에 그가 하나님께 없애 달라고 기도했던 것을 자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누가 바울에 있어서 육체의 가시가 유익한 것이라고 상상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 생각없이 마구 뛰어 나가는 어리석음에 대해서 인식하라. 우리는 입심 좋게 ‘그것에 대해서 기도하라’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하라.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 바울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곤란했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그런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당황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여 주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하는 것이 훨씬 좋고 현명한 것이다.
요한복음 12장 27절의 말씀으로 인자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마저도 이 당혹함을 아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는 그런 지위에서 눈물로 기도하며 간구하였다. 그가 그러한 체험을 한 결과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일하시게 더욱 더 합당하게 되셨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위기와 당황에 처하여 있을 때 우리를 돕고 북돋아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온전한 확신과 거룩한 담대함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지성소로 나갈 수 있음을’ 안다. 문제는 어떻게 정확히 간구하고 어떠한 축복을 구하느냐하는 것이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해가 될 수 있다. 내가 이것저것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다시는 그런 일로 내게 고하지 말라’ 고 하시며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고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사도는 우리에게 그 문제에 대하여 영광스러운 해답이 있음을 알려 주기 위해서 그것을 거론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알리운 바 됨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의 한 과정으로서 주어진 것이다.
제 11 장 성령의 탄식하는 중보기도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8:26-27)
사도의 논점은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으로부터 떠오르는 어려움들 때문에 절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첫째, 저는 여러분들에게 연약함이란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드린다. 그것은 태초에 사람이 타락한 결과로 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여러분이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 때때로 처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표증은 아니다. 연약은 도리어 우리가 사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대한 가장 놀라운 증거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첫째, 우리는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돕다’는 ‘함께’ ‘극복하다’ ‘들다’라는 의미이다. 두 사람이 서로 극복할 어떤 것을 함께 드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할 것을 일일이 다 지시한다고 하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고 우리에게 보조적인 역할을 해주고 우리의 짐을 들어주시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말 없이’라는 뜻이다. 말로는 표현을 않거나 또는 어떤 뜻을 나타내지 아니하는 탄식이나 신음을 의미한다. ‘말하지 않고 탄식으로’라는 의미이다. 사도는 우리가 가진 느낌이 너무나도 깊고 오묘하여서 우리가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도는 단순히 우리가 그러한 당혹에 빠진 나머지 스스로를 표현해 낼 수 없고 우리의 원하는 것을 나타낼 수 없다고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누가 탄식하는가? 하나님은 탄식하지 아니하신다. 성령께서 지식이 부족한 일이란 있을 수가 없다. 탄식은 우리 속에 있다. 이 말로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탄식하는 것은 우리이다.
성령께서는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발견하신다. 우리는 그릇된 간구를 드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당황해 한다. 성령께서는 하나의 대변자로 오셔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변호인의 임무는 그 사람의 입에 말을 넣어 주는 것이고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그는 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입은 두 대변인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곁에 계셔서 우리의 대변인이 되신다. 또한 성령의 변호가 우리 속에 있어 우리가 할 말을 알려 주신다. 둘은 완벽한 병행을 이룬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며, 우리가 행한 일은 모두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그러나 사도가 여기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 속에 처해 있을 때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은 특별한 사역이다.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그러한 상황에서 대처해야 되는 특별한 유형의 기도이다. 그러므로 어느 의미에서 성령께서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탄식이 어떤 가치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 탄식을 들으신다는 것이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렘 17:9-10) 그러므로 말이란 언제나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할 때에 필요하다면 말없이 대할 수 있다. 그는 우리의 느낌과 우리의 소원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신다. 저는 이 인식보다 위안이 되고 더 큰 위로를 주는 것이 없음을 안다. 심지어 그것이 너무나도 작은 신음이라서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속삭임을 들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탄식을 들으실 뿐 아니라 그 탄식들을 이해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아신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표현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이해하실 뿐 아니라 그 생각들을 인정해 주시고 그것들을 환영하시고 그것들을 좋아하신다. “그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우리는 그보다 더 놀라웁게 나아갈 수 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간구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간구들이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성령께서 좇아 오셔서 우리의 짐을 거들어 주고, 우리 속에서 우리의 변호인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행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계획의 일부이다. 이것은 우리의 성화의 일부이고 우리를 지탱해주는 하나님의 방식의 일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지쳐 있다는 것을 아신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가 당황하게 될 때 성령을 보내신다.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가련한 백성들이 이 시간 세계를 지나는 동안에 그 백성들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해석하시고 이해하시는 이 탄식을 산출하도록 성령을 보내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성도들 안에서만 이 일을 행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만이 성도들에게 그의 성령을 보내신다. 만일 여러분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러한 탄식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그것은 여러분이 성도라는 적극적인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라는 적극적인 증거가 되는 것이다. 탄식들은 여러분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이고 완벽한 구원에 대한 절대적인 증거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보증이다.
여러분은 당혹함으로부터 출발하여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여러분은 탄식하고 신음한다. 마귀는 여러분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고 넌지시 말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제 그를 대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한다고 해서 좌절되거나 침체되지 말고, 여러분의 머리를 쳐드시기 바란다.
언뜻 보기에 절망적이고 사람을 침체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참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들 가운데 하나로 끝을 맺는 것이다.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구원인가! 그것을 기뻐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탄식과 신음하는 것 때문에라도 하나님을 찬송하시기를 바란다.
제 12 장 기도의 비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8:26-27)
기도에 대한 문제는 흔히 많은 사람들에게 곤혹케 하는 어려운 문제이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하다면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의의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떠오르게 된다. 거짓된 주장으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연유된 까닭에 우리가 전적으로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첫째, 이에 대한 대답은 분명히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의미를 이해하든지 못하든지 기도하라는 분명한 계명을 대할 때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우리는 결코 계명과 다투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정하실 뿐 아니라 목적에 이르는 수단들도 정하신다. 태양을 주시고 비를 주시고 열매를 얻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농부들이 밭을 갈고 땅을 파도록 정하셨다는 것을 안다. 여기서 기도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궁극적인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정하시고 결정하신 방편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방식이다. 주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에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 주님께서 기도하셔야만 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욱 더 그것이 필요했을 것인가? 불행히도 은혜의 교리를 거의 분명하게 이해하는 사람들조차도 기도를 쉬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사도의 교훈에 대해서 바로 이해하면 그전보다 더욱 더 기도를 많이 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다. 사도의 류에 속한 교사들은 수 세기에 걸쳐서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둘째, 모든 사람에게 기도하라고 충고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 이다. 성경에서는 성령께서 기도의 문제에 있어서 불신자들을 도우신다는 가르침이 어느 곳에도 나와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듣지 아니하신다”(요9:31). 오늘날 유행하는 개념은 우리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즉각 기도부터 하라고 말해야 된다는 개념이 있다. 위기를 만났을 때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지 어느 때든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어야 한다.
먼저 우리는 그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첫 번째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감을 얻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전에 인도할 어떤 것이나 어떤 이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의 전체 메시지이다. 복음의 첫 번째 메시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하심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면 참된 기도는 있을 수 없다. 히브리서 10장 19-22절에서 발견되는 진수를 생각해 보라. ‘주 예수의 피’가 아니고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 것이다. ‘성령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나니’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실상은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으면서도 기도하고 있다고 상상하게끔 심리적으로 유도하고 기만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셋째, 가장 고차원적이고 참된 기도의 형태는 탄식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거짓된 추론이다. 흔히 마귀는 전혀 기도에 참석한 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의 훌륭한 핑계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기도를 보라. 시편은 거의 기도들이고, 그 시편들은 말로 되어 있고, 매우 훌륭하고 아주 웅변적이다. 선지자들의 경우도 말로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간청하고 하나님께 이치를 수리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논증을 사용한 것을 보게 된다(사 63:15, 64:1-2).
사도의 가르침은 예외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을 때에, 환란과 시련에 빠져 있을 때에 우리는 탄식하거나 신음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아버지께 말해야 되며, 아버지와 교제해야 되며,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것이 기도이고, 그것이 참된 예배이다.
마귀가 이 점에서 우리를 속여서 우리가 기도할 때 자유로움을 가지지 못하고 기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위대한 영성의 표지라고 느끼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람이 신령할수록 더 기도할 것이고, 기도에 있어서 더 큰 자유를 알게 될 것이고, 그럴수록 더 큰 해방과 더 큰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덧붙여 탄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 적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표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되는 체험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참된 복락의 성격을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이 탄식과 신음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기도에 관한 일반적인 원리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 - 성령의 중보는 우리가 ‘극한 상황’ 에 처해 있을 때 최종적인 위안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부터 출발해서는 안 된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
첫째, 여러분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떠한 분이신가를 인식하는 일부터 하라. 사도행전 4장 23-31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크게 위협을’ 받았고 ‘만물의 마지막’을 만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처지들 가운데서 “저희가 듣고 열심히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그들은 기도했다. 그들의 문제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했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서 출발을 했다. “대주재요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이시오” 여러분의 당황함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라도 모든 영광과 찬미를 다 그에게 드리라.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바를 행함으로 시작하라.
둘째, 신령한 간구들은 언제나 옳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나라의 성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언제나 옳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더 많은 지식을 위해서 기도 하는 것,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기 위한 기도는 언제나 안전하다. 그러한 기도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쁘신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 앞에 수리하는 것은 언제나 옳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하나님 앞에 아뢰라. 성경을 인용하라. 그 아버지로 하여금 약속하셨던 것을 생각나도록 하는 것을 아버지가 반대하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거기에 대해서 주저할 필요가 없다.
넷째, 단순히 개인적인 간청을 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큰 주의와 조심을 해야 된다. 우리는 모세의 경우나 바울의 경우에서 그것을 보았다. 시편 106편 15절에 무서운 경고가 있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특별하고 개인적인 물질적 요구 사항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괴롭힌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것을 가지도록 허락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것을 심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여러분의 최고의 바램임을 말씀 드리라. 그렇게 한 다음에 요구사항을 아뢰라. 여러분의 요구사항은 오직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의탁하는 것이라고 아뢰라. 그런 다음에 여러분의 간구 내용들을 하나님께 아뢰라. 여러분은 여러분 속에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 줄을 절대적으로 확인하라. 만일 여러분이 평강을 누리고 있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온전히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다섯째, 하나님께 어떤 것을 주장한다든지,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것을 요청하거나 명령조로 요구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두려움과 경건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질병치료도 사랑하는 사람의 구원도 심지어 부흥도 주장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이러해야 됩니다. 그러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입장에 빠지지 말라.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라.
여섯째, 당혹한 입장에 처하여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옳은 것이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은 우리에 관해서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알지 못하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겸손한 죄인의 신음을 좋아하신다. 자기 속에 성령의 간구하는 사실을 즐거워하는 겸손한 죄인의 탄식을 좋아하시는 것이다.
일곱째, 때때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떤 기도를 넣으시고 우리 생각에 어떤 기도를 하게 하신다. 그것을 주시면서 그 기도가 응답받을 것이라고 말씀하는 경우의 기도가 있다. 사도행전 3:4-6에서 베드로는 어떤 체험을 하거나 위대한 믿음을 일으키려고 노력하지 안 는다. 베드로는 하나의 임무를 부여 받았던 것이다. - “주목하여 가로되” - 사도들은 결코 미리 자기들이 이적을 행하겠노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그것을 받게 될 때 절대적으로 그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또 명령에 의해서 임무가 주어진 것이기에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그것은 ‘믿음의 기도’이다(약5:15, 막11:24). 그것은 자신을 설득시키거나 ‘스스로 어떤 일을 일으키려는’는 시도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절대적인 확신이다. 그 기도가 복되신 성령께서 친히 주신 것이고 그 기도에 대한 확신이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제 13 장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의 위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또한’(우리말 개혁 성경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음) 중요한 접속사로, 앞의 문단과 관련하여 더 크고 더 높은 무엇을 암시하고 있다. 그 말은 우리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확실성을 증거하는 또 다른 증거이다. 28절은 하나의 포괄적인 진술을 하고 29-30절에는 28절의 진술을 정교화 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이 진술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 어떠한 위로도 발견할 수 없다. 여기에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위로를 체험하는 오직 유일한 길은 복음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삶의 방식을 좇아가는 것이라고 말해 줄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진리를 포착하는 것은 중요하다. 때때로 사람들은 포용적인 자세를 가지고 보편적으로 말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세상의 거짓된 낙천주의와 성경의 특별한 진술들 가운데 커다란 차이가 있다.
모든 것을 합하여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주는 자동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선을 위해서 우주 전체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가? 만약 여러분이 그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좌절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것’ - 어떤 해석자들(존 칼빈)은 이 말이 시련과 환란만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저는 문자 그대로 모든 것, 좋은 일도 나빠 보이는 것도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도 의미한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하여 궁극적으로 우리의 유익을 이룰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해결해야 되는 문제는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선이 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들은 먼저 우리를 붙잡고 깨우는 일부터 한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모든 것이 잘 되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가장 나쁜 상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상태요, 단순히 모든 것을 그저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일상적인 틀에 박힌 투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다. 그는 게으르게 되고 나태하게 되고 결국 잘못되어 간다.
시련의 첫 번째 효과는 우리가 쇼크를 받고 깨닫게 되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과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쓸모없음과 우리가 작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전에는 삶을 우리의 체계에다 맞추었고 우리의 지식에다 맞추었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성과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알게끔 한다. 그것들이 우리를 겸비케 한다. 우리가 겸손하지 않을 때 위험한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겸손이란 영적인 삶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방법이다.(고후12:7)
우리가 잊기 쉬웠던 수많은 것들을 바라보게 되고, 다시 용서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만든다. 우리는 마땅히 어떻게 기도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나 우리는 탄식하면서 울부짖는다. 우리는 전에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에 관한 것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은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방식이 그러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하심과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것을 이론적으로는 알 수 있다. 급기야 여러분이 이런 체험을 통과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훨씬 더 깊은 방식으로 알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데 있다. 시련과 환난이 필요하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죄가 우리에게 행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마땅한 바대로 진리를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취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지식에 대한 감각을 가지게 하고, 예비케 하기 위해서 쓰라린 체험을 통과해야 되는 것이다.
환난과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있는 인생의 본질을 인식하게 만든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과 영혼을 아는 지식과 우리 사이를 막고 서있는 것들이지만, 그러나 또한 땅에 속한 것들로부터 더욱 더 우리가 떨어져야 된다고 가르친다. 여러분이 잘되고 있을 때에는 이 세상과 인생으로부터 자신을 멀리하기가 매우 어렵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여러분은 인생의 참된 진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잠시 동안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고 있는 영광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스스로 결국 영혼의 순례자들이라는 것을 상기하기 시작하면 죽음이라는 것이 끝이 아니고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 영광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좋은 것이다. 어렵고 고통스럽고 또 어떤 때는 잔인하게 보이는 것이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인들로서 ‘넉넉히’ 이기게 되어 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이다.
여러분은 반대 방향으로 역사하고 있는 일들이 내게 좋은 것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는가? 100여년 전의 어느 옛 설교자의 예화에서 “손목시계를 열어 속을 보면 바퀴 하나가 시계가 도는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돌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바퀴는 도는 방향으로 도는 바퀴와 연결되어 있다. 시계를 만든 사람은 이 시계를 질서 있게 만들고 모든 바퀴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하나의 중심이 되는 스프링을 그 중심에다 넣어 두었다. 그 모든 바퀴들이 시계 바늘을 움직이기 위해서 함께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같은 목적을 향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금방 결론을 내리지 말라. 만일 여러분이 영적인 안목으로 그것을 바라본다면 여러분은 곧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목적이 있음을 알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계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라는 시계를 감아 놓았다. 그리고 그 시계가 계속 가도록 하신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의 선을 이루게 하고, 우리의 즉각적인 유익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나 더욱 더 우리의 궁극적인, 최종적인 선을 위하여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제 14 장 모든 것을 선하게 이용하심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게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29)
이사야서 45장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어두움도 창조하며”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악까지도 통제하며 그것을 사용하여 그의 위대하고 장엄한 목적인 그의 백성을 그들의 궁극적인 영화로 인도하는 목표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이용하여서 그리스도인이 약하고 넘어지기 쉬운 연약과 쓸모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 신뢰는 가장 큰 위험 중에 하나다. “앉아 있는 사람은 넘어질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낮은 사람은 교만해질까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존 번연)
동시에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를 용서할 용의가 있음을 보여준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기 전보다 집으로 돌아 온 후에 아버지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았고 아들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더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기가 끊임없이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알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지고 타락자가 될 때라 할지라도 그가 다시 돌아오면 그것은 결국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역설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실패마저도 결국 우리의 유익이 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어떠한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허락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자기의 종 욥을 시험하고 테스트하도록 허락하셨다. 허용하시는 것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그러한 일들을 행하시기도 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은 언제나 미소를 짓고 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절을 당하게 될 때, 벌이 가해지게 될 때 그들은 매우 슬프고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행하신 일은 전형적인 실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들을 대적하는 원수를 일으키셨고, ‘왕벌’을 보내셨으며, 그들에게 ‘온역’을 일부러 보내셨다. 히브리서 12장6절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1장29-30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그들은 죄의 행동을 저질렀고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병이 들고 약하게 되었으며 죽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구원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은 그들이 지은 특별한 실수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인 것이다. 이것은 두려운 교리이다.
요점은 첫째,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허용하신다. 둘째, 허용하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일을 우리에게 보내신다. 셋째, 그들로부터 복락을 철수해 가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얼굴은 우리에게서 돌리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가 볼 수 없다고 느끼게끔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때때로 메마르고 황무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간이 있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주의 얼굴의 빛을 보여 주소서 우리를 바라 보소서 어찌하여 우리로부터 얼굴을 돌리셨나이까” 라고 묻고 있다. 그것은 우리로 선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식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그렇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 비가 내려 흠뻑 젖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뒤에 보내시는 ‘깨끗한 햇빛’이 비치는 기간에 얻는 체험에 비해서는 매우 적은 대가에 불과한 것이다.
마귀가 와서 “너희에게 일어나는 일을 보라. 네 신세가 어떠한지 보란 말이야”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눈앞에 있는 것에 대해서 거의 불확실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궁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이 진술의 진정한 비밀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위로와 위안이 되는 것이다.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은 너무나 당혹한 나머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 그가 오직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성령에 의해서 그 안에서 나오는 탄식 밖에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내게 선을 이루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위안과 위로가 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궁극적인 일에 대해서 혼란을 겪도록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26절의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과 28절의 ‘우리가 아나니’ 라는 말이 조화되는 방식이다. 마귀는 끊임없이 언제나 작은 문제에 집착하도록 한다. 여러분은 ‘원수를 대항하고’ 여러분의 눈을 마지막 목표에 맞추고 나아가야 한다. 여러분의 대장이 누구인지 기억하라. 최종적인 결과에 대한 절대적 확실성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 눈동자’ 같다고 말씀하셨다.(신32:10, 슥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6:25-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29-31)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그러나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함에 참예케 하시느니라”(히12:6-10) 이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교훈이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라. 욥의 인내를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기록하고 있으며, 같은 이유로 인내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다웟의 체험은 시편 119편에 기록되어 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71절) 이것은 이론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체험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여러 번 넘어지고 당황한 후에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주의 말씀을 받을 상태로 되었다. ‘사단의 사자’는 하나님의 목적의 일부였으며 “네가 약할 때에 곧 강함이니라”를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핍박받고 단련을 받을 때 일반적으로 최선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순교자들, 기독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성도들의 체험들, 그들은 말한다. “연단의 시기는 치료하는 시기요 그들은 그때마다 자라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제 15 장 유효적인 부르심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게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진술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로 이것이 내게 해당되는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것이 해당되는 사람은
첫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한 것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대조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에는 두 가능성만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미워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지적으로 찬동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적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고도 유신론자일 수 있다. 주님께서는 “네 마음과 영혼과 성품과 네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첫째 되고 가장 위대한 계명을 요약하셨다. 마음과 생각과 혼과 힘이 모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론적인 사랑이란 없다. 사랑은 언제나 실제적이다.(요14:21) 이것이 사랑을 테스트하는 시금석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그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고, 그의 계명을 지키기를 소원하고, 그와 같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러한 참된 소원을 내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들 중에 하나는 역경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우리가 욥을 많이 닮았는지, 아니면 욥의 아내를 더 많이 닮았는지 살펴보라.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할 것이니”(욥13:15)
모든 것이 여러분을 대적해 나가고 있을 때, 시련을 당하고 좌절을 당하게 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머리를 숙이고 “나는 하나님의 손에 있사오니 나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견디어 낸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줄을 안다.
둘째,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한 오직 유일한 설명이 그 말이기 때문이다.(롬8:7)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까닭이다. ‘부르다’는 성경에서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인 부르심’과 ‘효과적인 부르심’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복음의 부르심을 어느 의미에서는 다 듣는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부르심이다.(마22:14, 행17:30) 이 부르심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응답을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효과적인 부르심”이라는 말이 바로 그 점에서 필요한 것이다. 복음의 부르심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효과를 약속하지 않았다. 그들은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갈 것이라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30절은 이 점을 매우 명백하게 한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해야 되는 시금석은 “내가 부르심을 입었는가?” 라는 것이다. 체험적인 입장에서 여러분은 솔직히 말해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는가? 여러분이 여러분된 것과 여러분이 이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놀랍지 않은가?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이해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여러분의 삶이 방해를 받았고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인가를 행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사람들은 사도가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잡힌 바 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간섭하신다. 여러분이 그것을 저항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투쟁하고 싸우고 그 다음에 여러분을 방해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살전2:13) 결국 이것은 우리 자신이 전적으로 무능하며 궁핍한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게 만든다. 자기는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자기는 전적으로 무능하다고, 죄를 뉘우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신약의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려 함이라”는 묘사에 일치되지 않는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죄인을 불러서 회개케 한 다음에 주님 자신의 구원의 위대성을 그 사람에게 펼쳐 보여 주신다. 이러한 부르심을 행한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다음에 우리는 우리의 복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충만함과 충족성을 알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고 그 분을 그렇게 믿는다. ‘부르심’을 입은 사람만이 이러한 것들을 믿는다.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그의 가장 큰 소원은 주님을 더욱 더 아는 것이다. 그는 이 복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손을 대시고, 사랑의 줄로 여러분을 묶었는가? 그 필연적인 결과로 그 사람은 사도 바울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것은 29절의 위대한 약속이 해당되는 사람의 위대한 특징이다. 만일 복음의 진리가 여러분의 마음을 황홀하게 하지 않거나 여러분이 들었던 것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국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아니다.
사랑이신 그분이 여러분을 내버려 두지 않고 간섭하심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계속되는 하나의 과정이다. 여러분은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119:71) 그렇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제 16 장 성도들의 견인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게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어째서 필연적으로 진리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이다.
성도의 끝까지 견디어 냄의 교리(성도의 견인)는 종교개혁 시대에 정의 되었고 그것이야 말로 우리의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유산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목적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의 선을 이루어 줄 것이라는 보증, 언제나 그렇게 되었으며, 지금도 그렇게 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보증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위대한 목적의 일부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진술을 이러한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원의 확신에 대한 궁극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29절과 30절 말씀은 28절의 “그 뜻대로”라는 문구에 대한 강해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부르심, 영화 등의 위대한 교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목적에 있어서의 각각의 특별한 요소들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미약하고 연약하고 무가치하고 죄투성이인 사람들로서 이 특별한 하나님의 계시를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도 백성들과 그들의 짐승들은 접근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더 높은 무엇을 하시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생각과 목적에 대한 관점과 통찰력을 주시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소극적으로 지적인 태도로만 접근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의 문제가 아니다. 논쟁적인 방식이나 변론적인 정신으로 접근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죄악적인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러한 교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큰 문제를 접근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생각이므로 만일 우리 자신의 이해력을 접근의 기초로 삼는다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만큼 위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 교리는 신자들만을 위한 교리이며, 자연인은 도저히 그것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불신자와 토론을 벌이거나 다투어서는 안 되는 주제이다. 나는 그러한 일을 하느라고 삶의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러한 것이 잘못임을 알고 있다. 불신자를 향한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그로 하여금 자신을 대면하여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선택이나 예정에 관하여 논쟁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삶과 그들이 주 예수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여야 한다,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선택의 교리나 예정을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자주 망각되는 것이 문제이다.
- 옥타비어스 윈슬로우 - (프로테스탄트의 신앙고백으로 순교 당함)
“여러분은 타락된 죄인이라고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택된 죄인으로 느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냇물 줄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정이 아니라 회심이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사슬의 끝입니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내려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회개이다. 불신자로 하여금 이러한 깊은 문제를 토론하도록 허용하지 말라.
- 존 브래드포드 - (스미스휠드에서 화형 당함)
“만일 너희가 믿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예정이란 여러분이 논의하기가 너무나 높은 문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회개와 칭의의 학교는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예정과 섭리의 종합대학을 입학하기 전에 거쳐야하고 배워야 하는 문법학교인 것입니다.” 불신자는 먼저 다시 나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고 자라나야 한다. 저는 때때로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회만을 위한 책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교리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하였다는 증거는 여러분이 그 교리 속에서 성결과 거룩하여짐에 대한 가장 위대한 강권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만일 이 교리들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성결하고 싶은 충동을 주지 않는다면, 이 교리들이 여러분에게 자만에 빠져서 안일하게 한다면, 여러분은 그 교리들을 진정으로 안 적이 없는 것이다. 순전히 철학적인 데에 관심을 두고 성결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은 철학적 결의론을 믿는 신자이지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아닌 것이다. 실로 그것은 가장 높은 진리이기 때문에 모든 진리들 중에서 가장 겸비케 하는 진리이다.
이 교리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은 어떠한가? 여러분은 선택이나 예정을 논의하기 위하여 참고 기다리는가? 우리는 이 교리에 오기 전에 생각과 영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야 하며, 그 다음에 이 교리들을 그 배경과 문맥에 맞추어서 취급해야 한다. 이 교리들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시련과 환난을 당한 신자들을 위로하는 교리들이다. 본문의 진술은 한 사슬 안에 들어 있다. 그것들을 이해하는 비밀은 전체에 비추어서 각각의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28절은 단순히 위로를 주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말씀이다. 또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우리들의 궁극적인 구원의 일부라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의 각 단계가 ‘미리 정하여졌듯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선을 이루도록 다스린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28절만으로도 영광스런 위안이 있기 때문에 29절과 30절의 말씀을 첨가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을 설명하고자 그 사슬 안에 있는 여러 가지 고리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하심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결론은 곧 ‘모든 것’은 ‘합력하여’ 우리의 선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목적은 수행될 수 없는 것이다. 예정보다 선택보다 미리 아심보다 부르심보다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 오는 것이다.
17 장 창세 전의 하나님의 계획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인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함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첫째, “그의 뜻대로”는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부르심, 의롭다 하심, 영화롭게 하심 등의 용어들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정하셨으며 계획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실로 성경 전체의 위대한 주제이다. 성경은 그 테마를 선언하고 그것이 역사 속에서 이행되어 나가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저는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이 가르침을 진정으로 이해하기까지는 성경과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강력하게 역설한다.
둘째, 언제 구원이 계획되고 목적을 정하셨는가? 그것은 ‘창세 전에’ 되어졌다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2장 6-7절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구원의 계획이 인간이 타락한 뒤에 하나님의 생각에 떠올라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하나님은 그러한 약속을 하시면서 그의 목적하심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때 그것을 발설하신 것 뿐이다.
셋째, 그 하나님의 계획이 누구를 통하여 이행되는가? 매우 분명하게 궁극적으로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바울은 다섯 차례나 로마서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말하였다. 많은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마친다. 영광이 복되신 삼위일체께 다 함께 돌려져야한다. 성자를 보내서 성자께서 하시고 지금도 하시고 계신 것을 하도록 하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성령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내신 분도 성부 하나님이시다.(:33)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오심을 예비하시는 그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이며, 신약에서는 그 성자께서 어떻게 오셨으며 그만이 할 수 있었던 그 엄청난 일을 어떻게 행하셨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아 오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에 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적용시키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서 이행되어 나가고 있다. 그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성자께서 다시 오시는 때에 성취될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 그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시작하신 이도 성부요, 그 모든 일을 통제하시는 이도 성부요, 그 장엄한 목적이 완성을 보게 되도록 보증하는 이도 성부 하나님이시다.
바울의 논증은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들어 있으면 여러분에게 모든 것이 잘된(이루어진) 것임을 말하고 있다. 30절 끝의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만으로도 이 점을 확증하기에는 충분하다. 만일 여러분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여러분은 영화롭게 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에서 가장 하기 힘든 진술이지만 이것이 바울의 논리이다. 9-11장은 이 테마에 대한 설명으로, 어떠한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이 위대한 목적을 이행해 나가는 데 방해를 하도록 허락하지를 아니하실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9-11장의 목적이다. 구약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라. “하나님께서는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그를 이상히 여기는 이들을 감동케 하시어 일을 이루시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구약 전체가 가르치는 가르침의 요약이다.
선지자들은 주님이 오시기 800여년 전에 주님의 오심에 관한 것을 예언하였고, “때가 찼을 때에” 일어나게 되었던 상세한 일들을 예고하였던 것이다. 예언은 하나님의 뜻의 일부였다. 하나님의 뜻이 안전하고 확실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러한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일은 창세전에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 에베소서 1장 9-10절은 그 얼마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지시하는 놀라운 구절인가?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을 아신다. 그는 실패하는 일이란 없다. 하나님의 성품이 이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패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3:10)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이 구원의 과정을 통하여 하늘에 있는 정사들과 권세들에게 그의 각종 지혜를 알려 주시고 있으며, 장래에도 보여 주실 것이다.
‘-대로’, ‘ 때문에’, ‘따라서’ 라는 표현들은 이러한 최종적인 구속의 확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계획이며, 하나님의 결심과 의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일이든지 하시기로 뜻을 세우시면 그것은 이미 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빛의 아버지시요,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11:9)라고 말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여 나가는데 있어서 일어나는 어떠한 실패도 그것은 하나님의 자신의 실패요,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구원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변호하고 온 우주에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은 실패할 수 없으며 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이 뜻을 이루는데 다 동원된다는 것을 늘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변호하시며, 하늘에 있는 정사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이다. 오는 세대들이 그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 앞에 절을 해야 할 것이며, 그는 “만유 안에 계신 만유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머리를 숙이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외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머리를 숙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았다”
제 18 장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오직 그들, ‘부르심을 입은 자들’, ‘미리 아신 자들‘, ’의롭다 하신 자들‘, 영화롭게 된 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에는 어디에서고 ‘보편구원론’이라는 가르침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람이든지 영원토록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설교의 오직 목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그를 믿든지 안 믿든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철학적인 것이다. 그 개념이 오늘날(1961)에 있어서 가장 잘 알려진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요, 교황에 의하여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에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묘사된 사람(칼 바르트)으로 하여금 ‘보편구원론’을 가르치게 만들었다. 그는 신학자라기 보다는 철학자였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복종하든지 복종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들로 또한 그 아들이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용서하여 주시는 것만이 아니다. 심지어 의롭다 하심, 또한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 더한, 구원의 모든 복락들을 확실히 받을 것을 근본적이고 최종적으로 보증하여 주는 그 무엇이 구원이다. 궁극적인 복락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음으로써 그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그 아들의 영광이다. 그 가장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목적이 가입되어 있는 것이다.
먼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이 높이에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죄사함을 받는 것이나 인도하심이나 위안이나 또 다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복락들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어둡고 어려운 세대에 그 모든 것들을 더욱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넉넉히 이김을’ 원하고 느끼기를 갈망한다면, 바울처럼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이 진리를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들만을 생각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이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시선을 놓치는 경향이 있다.
형상 - ‘형상’은 ‘닮을 것’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연히 닮은 것이 아니다. 그 닮음은 우리가 본받는 대상물에서 직접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아버지를 본뜨는 것은 그의 아들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야 된다”는 것을 들을 때에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받다’는 말은 겉모양만 일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적인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본질이 같은 것이다. 우리의 본질 속에 그를 닮은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우리의 전 인격 속에 닮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본질상 아담의 자손으로서 한 형제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
히브리서 2장 10절에서 진술하고 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함을 입는 자가 본질에 있어서 한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형제들로 만든 것은 이 본질이 닮은 것이다. 내가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내가 아들의 형제들 중에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영화롭게 하심을 입었다’고 말하는 다른 방식이다. 이모든 것이 충분한 의미로써 우리에게 해당될 것은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때이며 그의 형상을 본받게 되는 때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는 말씀을 듣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신들이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독생자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듯이 우리가 그러한 의미에서 아들들이 되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의 아들됨과 우리가 하나님과 이러한 식의 관계를 맺은 것은 양자로 받아들임으로써 되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내 아버지’라고 말씀 하셨지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그는 우리에게는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는 구분을 하셨다. - ‘내 하나님’, ‘너희 하나님’ 등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진술이 의미하는 것은 그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두 번째 아담’이 되었을 때의 주님을 언급하고 있다.(히2:14-17) 여기서 성육신의 교리가 설명되고 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참 사람이시다. 그 안에 두 본성을 한 인격 속에 지니고 있다. 그는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다. 그는 사람의 아들로서 새 인류의 시조이다. 여러분이 본받아야 하는 형상은 ‘마지막 아담’의 형상인 것이다. 영원한 자격과 신성에 연합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 충만한 인성을 본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거듭남을 통해서 이 새 본성의 씨앗을 받았으며 받아야 한다. 우리는 그에게서 낳고, 그는 머리요,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이다. 성령께서 이것을 이루어 주신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만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완성될 때에 우리는 바로 그 형상을 완전히 본받게 될 것이다.
이 역사의 결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이며, 그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 있게 될 때에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와 함께 노래할 것이며, 영원토록 영광의 상태를 누리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으며, 교회를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성경과 기도함을 통해서 그밖에 많은 것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다.
그 분이 그처럼 낮아지고 힘없는 어린아이로 내려 오신 것은 여러분이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되고 몸 안에서 그의 형상을 본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 아담이 오셔서 곤욕을 치르시고 싸우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궁극에 가서는 자신과 같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러분 마음의 맨 위에 이것을 늘 두라. 여러분이 주님을 보게 될 날이 이를 것이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 함이니”
제 19 장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의 영광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로 또한 의롭게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8-30)
우리는 구원을 우리의 차원에서만 생각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이 가지신 궁극적인 목적은 그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그가 ‘많은 형제 중에 맏아들이’ 되는 것이므로 만일 형제가 하나도 없으며 따르는 자가 없으면 거기에는 하등의 영광이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사도는 우리가 이점을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와 그의 모든 형제들이 우주에 나타나 보이게 될 때에 그의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온 우주가 하나로 모아지게 될 것이며 그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엡 1:10)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확실하고 안전하며 보장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실패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이 목적에 들어 있다면 여러분의 궁극적인 영화는 보증되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하신 모든 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은 그의 영예와 영광에 기여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이러한 진술을 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시느라고 어떠한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생각과 시작도 완벽하며, 집행하는 과정도 모두 완벽한 것이다.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모든 일은 작은 일까지도 다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가 이룩하신 일과 성취하신 일을 적용받는 자들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 이다. 사도는 이 29절에서 그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장엄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목적이 상세하게 이루어지는 국면에서 다섯 단계가 있다.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부르심, 의롭다 하심, 영화롭게 하심, 순서를 보면 부르심을 중심에 놓고 두 요소로 각각 나누어 놓을 수 있다. 주어진 순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있던 순서인 것이다. 첫 번째 쌍은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 두 번째 쌍은 의롭다 하심과 영화롭게 하심이며, 부르심은 두 쌍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이다. 부르심(“잡힌바 되었다”-빌3:12)의 결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며,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부르심은 하나님의 목적이 실제로 우리에게 적용되는 시점이다.
‘미리 알다’ - 다섯가지 용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다.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은 전지하시며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복음을 믿고 믿지 아니할 것을 미리 아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말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신약성경에서 일곱 번 쓰여 지는데, 두 번은 사람을 아는 것을 위해서 쓰여지고 다른 다섯 번의 경우는 하나님 자신에 관한 것이다.
-사도행전 2장 22절-23절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 베드로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아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 이었고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미리 아심’이란 말의 의미는 ‘미리 정하심’이란 의미인 것이다. 두 용어는 함께 가는 것이다. 그것은 ‘정해진 미리 아심’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 것은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보냈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9절
-로마서 11장 2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그들에 관한 어떤 일들을 아셨다는 것만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택하시고 나서 버리신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2절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그들이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20절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어린 양은 그의 아들이 될 것이라는 점을 아셨다는 의미가 도저히 될 수가 없다. 그의 아들을 어린 양되게 정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그 일을 위해서 특별하게 떠나 보내셨다는 의미에서 그의 아들을 아셨던 것이다. ‘미리 아심’이라는 말의 의미는 오직 하나 미리 규정하심이다.
‘알다’라는 말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하여 쓰여 질 때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말이 전능하심의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아시고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이 특별한 사람들(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그 말은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 그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보이고 그들에 관한 어떠한 일들을 계획하시고 목적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서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암 3:2) 하나님은 그들에 관하여 단순히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말씀은 내가 너희들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는 의미이다. 그 말씀은 “내가 너희만을 백성으로 선택했다 - 그러므로 나는 너희들에게 예외적인 방식으로 형벌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여기서 ‘알다’라는 말이 전지전능의 의미에서 아는 것의 문제라면 그 진술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이다. 주님은 “너희는 나와 이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코 특별한 관심도 가져본 적이 없다”는 의미이다. 성경에서 사용된 이 ‘앎’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그런 의미가 붙여지는 것이다.
미국 챨스 윌리암스 번역은 이 문제를 분명히 해준다. “그가 미리 그 마음에 둔 자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미리 정하셨으니”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은 ‘미리 아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고정시켰고 그들을 위하여 어떠한 일들을 정하셨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말이다.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 사아에는 매우 작은 차이 밖에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예외 없이 그 말들이 함께 쓰여 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리 아심’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창세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아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아셨고 우리에 관한 이 일들을 결정하셨다. 여러분이 이보다 더 큰 확신의 근거를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것을 아는 것이 게으름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무율법주의로 인도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 진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식으로 영원 전에 우리를 ’아셨고‘, 저와 여러분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고‘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며, 끝내는 영화롭게 되도록 작정하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 20 장 구원의 사슬 속의 중간 고리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게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8-30)
우리가 이 용어들을 연구하고 있는데, 그 용어를 이해하는 것이 구원을 얻는데 진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구원과 이 시점에서 사도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구원의 확신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은 이해가 모자란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용어들을 잘 이해되면 문제들이 해답을 얻게 되고 난제들이 풀리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진리를 명확하고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더 알고 더욱 진실되게 사랑하게 되는 간절한 소원으로, 겸손함을 가지고 진리에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저는 그러한 것들을 완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누가 궁극적인 의미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미리 정하심’ - 헬라어 원어는 합성어로서 ‘프로(pro-)' - 앞서서. ’호리즌(horizon)' - 수평선. 수평선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갈라내는 것이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미리 아셨고 어떠한 범주 안에 두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삶들을 특별한 뜻과 목표를 위하여 따로 세워두셨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하나님은 그들을 한 원 안에 놓았으며 그들을 위하여 어떠한 특별한 운명을 그려 놓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용어는 ‘미리 정하심’이 아니라 ‘미리 아심’이다. 미리 정하심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위하여 정해 놓으신 목적을 묘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부르셨다’ - 그리스도인은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로 유효적인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이 우리에게 실제로 연결되는 것은 이 시점에서부터 이다. 이 말이 어째서 ‘의롭다하심’보다 먼저 나와 사슬의 중간 지점에 오는 것인가? 성경에서 ‘칭의’는 언제나 믿음과 관련을 맺고 있다. 우리는 믿음 없이는 결코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 없다.
‘부르심’은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믿음을 가지라고 부르시는” 또는 “믿음으로 부르시고”라고 진술될 수 있다. 부르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얻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데 있어서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무엇이 그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는가?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우리가 갖는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바울은 우리가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었다는 것과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궁극적인 목적으로 인도하여 나가는 상세한 단계들까지 미리 정하셨다는 것을 알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단계들 중의 하나인 ‘부르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된 복음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에게 권능으로 오게 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린도 전서 2장을 통해서 어떤 사람의 이성으로 밝혀 주고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이는 오직 성령 뿐임을 진술하고 있다. 만일 ‘부르심’에 있어서 성령으로 오는 이 능력이 없다면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거듭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성령으로 나야 되고 위로부터 나야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을 수 있으려면 먼저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고전2:14)
놀라운 일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다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위해서 미리 정하신 것은,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로써 우리를 살리시고 성령의 효과 있는 부르심으로 우리를 각성시키는 일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혼에 역사하여 새 생명의 씨를 넣었고 새로운 의를 넣어 주셨다. 이런 결과로 하여 우리는 진리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더 나아가 진리를 소원하게 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더욱 이해하기를 바라게 된 것이다. 이것이 효력 있는 부르심의 의미이다.
효과적인 부르심의 방식은 의지에 억지를 부려 끌고 가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이전에는 미워하고 배척하던 것을 그 사람의 의지가 바라고 소원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도가 이 29절에서 강조하는 바는 이것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아무도 그것을 소원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것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심이 유효하도록 하시고, 효과 있고 확실한 방법으로 그렇게 하신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요 6:44)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들만 믿는다.
많은 사람들은 회개가 전적으로 사람의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심지어 회개까지도 선물인 것이다.(행11:117-18) 어떠한 사람도 ‘효과적인 부르심’이 아니라면 아무도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다소 사람 바울의 회심의 경우,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그를 본다. 사울처럼 복음을 어리석은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철저하게 여긴 사람은 없었다. 영광의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즉시 그는 믿었고 그를 소원하게 되었다. “주여 내가 무엇을 행해야 하오리까?” 이는 효과적인 부르심의 완벽한 모습이다. 그의 회심은 그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보았을 때에 피할 수 없는 반응이 일어났던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도 신령한 방식으로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셨다. 어느 사람이든지 믿을 수 있으려면 바로 그 일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사울에서 바울이 되는 변화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 주시지 않고 우리들에게만 보여주신다.(고전 2:9-12)
하나님은 성령에 의해서 효과적인 방식으로 부르셔서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하시고 믿음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제 21 장 칭의와 영화의 관계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의롭다하심을 얻는다’ -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는다” 이 용어는 언제나 믿음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의롭다하심을 받은 상태에 있는 이들은 믿음을 행사하는 사람들이다. 어떠한 그리스도인도 ‘칭의’에 대하여 어려움을 느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로마서 처음 넉 장에 걸쳐 그 주제를 상세하게 논증하고 있다. 칭의는 그 본질에 있어서 법정적이고 법률적인 용어이며, 율법의 법정에 속한 용어이다. ‘의롭다고 선고하는’ 것이고 정죄 받는 것의 반대이다. 그리스도인은 ‘정죄’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칭의’의 상태로 옮겨진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선언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믿음은 도구이다.
칭의는 단순히 죄 용서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율법이 우리에 관하여 선언할 수 있는 어떠한 선언에 대하여도 답변을 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죄와 죄책을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계산하시어 그 안에서 그것들을 벌하였다고 우리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아들의 완벽한 의를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켜 주셨고 우리의 계산장에 기록하여 주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되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보시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사람으로 보신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새로운 지위로 서게 된 것이다. 이 진리가 단순히 우리가 용서를 받은 것이라면,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다시 죄 있는 사람으로서 죄책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변화 없이 회복과 떨어져 나가는 반복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칭의’는 ‘영 단번’에 일어난 일이다.
칭의의 온전한 내용을 인식하는 우리로부터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빼앗아 갈 것이 없다. 만일 여러분이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며, 그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아들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의롭다하심을 얻는데서 연유되어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분명한 개념을 가지기 위해서 그 용어들을 구별해 보지만, 그들이 사실로서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도는 우리들이 이 모든 복락들이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무엇에 달려 있지 않음을 인식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우리가 우리의 이해를 기초하여 구원받지 않음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함에도 구원을 얻은 것이다.
‘영화롭게 하시고’ - 우리는 영의 차원에서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몸은 아직 구속받지 않았다. 그 일은 반드시 될 것이다. 그것이 궁극적인 영화이다. 우리는 몸과 영과 혼이 전부 구원받게 될 것이다. 바울은 모든 용어들을 사용할 때에 부정과거형을 사용하여 모두 과거에 일어난 일로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으며, 그것이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사도가 일부러 이 부정과거 시제를 사용한 것은 우리들에게 최종적인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미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의 칭의 만큼 우리의 영화도 확실한 것이다. 어떠한 것도 그 일을 취소시킬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은혜와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는가? 어떠한 것이 우리의 지위를 바꾸어 놓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면, 그것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엮은 사슬의 여러 교리들로서 모두 불가분해적으로 매어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을 아는가? 여러분이 죄인이며, 지옥 밖에는 가지 못할 가치 없는 사람이라는 여러분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을 받아들이는가? 있는 힘을 다해서 경건한 삶을 살려고 발버둥을 친다 하여도 결국에 가서는 지금과 같이 타락한 상태일 것이라는 것을 아는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새 생명을 주신 것을 아는가? 그러하다면 부르심을 받은 것을 믿으라.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선언을 받아들인다. 여러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세상이나 육신이나 마귀나 지옥의 권세가 여러분에게 온다 하여도 여러분의 지위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다.
30절에서 ‘거룩하게 하심(성화)’이라는 말이 빠져 있음을 발견한다. 성화는 사도가 이 시점에서 다루는 논증에 있어서는 사활을 좌우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대답이다.
첫째, 성화는 칭의가 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의 지위와 입장에 대하여 전혀 중요한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 성화는 하나의 단계가 아니고 하나의 과정이다.
둘째, 사도는 성화는 칭의로 인하여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 순간에 성화는 시작되는 것이다. 성화는 칭의에 함축되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의에 대하여 살았다’는 사실이 성화를 보증하는 것이다.
셋째, 성화는 영화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필연적이다. 성화가 우리의 영화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궁극적인 영화를 믿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성화에 관심을 갖고 거룩하게 되려고 애쓸 것이다.(요일 3:3) 성화와 영화는 나눌 수 없다.
넷째, 성화를 하나의 개별적이고 구별되는 단계로 만드는 것은, 매우 분명히 잘못되었고 비성경적이라고 제안한다. 거룩의 설교가 ‘나의 느낌’이나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까 하는 설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 오히려 칭의와 영화를 설교하는 것이 거룩을 위한 설교가 될 수 있다.-(요약자) 어떤 사람들이 칭의와 영화에 대한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성화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이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인기 있는 대중 교훈이 성화되는 것이 없이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하며, 성화도 믿음으로 받으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영화를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각과 모든 행동에 있어서 지배받고 통제를 받아야 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제 22 장 성도의 견인 교리의 난제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근본적인 진리는 창세전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서 이 궁극적인 구원을 계획하였으며, 이 최종적인 영화를 계획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을 계획하신 것이다. 여기서 성도의 최종적인 견인이라 불리우는 교리를 대하고 있다. 이 보다 더 영광스러운 진리가 없다. 이 세상에서는 이 진리보다 더 확실한 구원의 확신을 주는 것은 없다. 이 최상의 교리가 주는 확신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교리를 참아내지 못한다. 궁극적인 ‘성도의 견인’ 교리가 언급되는 순간 분을 내며 조롱 섞인 말로 그것을 배척한다. 그들에게 매우 심각하게 조심하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어떠한 것에 대하여도 억지의 선입견을 붙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것에 대하여 강한 선입견이 있다는 것은 정말 슬퍼해야 할 일이다. 어떤 사람들이 이 교리를 반대하는 고로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 교리를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너무 자주 너무 강하게 말하여 불필요할 정도로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데 까지는 나아갈 필요는 없다. 목회자가 목표하는 진정한 균형 있는 자세는 다른 교리들과 같이 이 교리에 대하여 탁월성과 중요성을 정확히 부여하는 것이다.”(찰스 시몬)
어리석은 극단은 둘 다 피해야 하는 것이다.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에게도 긍휼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 사람은 자기의 철학 때문에 이 교리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자기의 철학적인 관과 이 교리 사이를 조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은 가장 현대적인 주석들 속에서 발견된다. 그들은 자기들의 철학과 이지와 지식을 가지고 성경으로 나아온다. 만일 성경에 자기들의 그것들과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책이라는 일반적인 기초 위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거짓이며 옛날 율법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 랍비적인 가르침이라고 한다. 인기 있는 보편구원론의 주장은 어떠한 사람이든지 결국에 가서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사람들과 다투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교회 내에서 잘 몰라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의 난제들을 보면
- 그러면 필연적으로 어떠한 사람들은 정죄하기로 미리 정하셨다는 것인가?(이중적 예정)
저는 이중적 예정을 믿지 않는다. 성경 전체에는 정죄함을 받기로 예정되었다는 진술은 하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7-8)
그것마저도 미리 정죄 받을 자를 정하였다는 것을 믿게 하는 데는 충분치 못하다.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다. 여기 28-30절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 관한 진술이다. 이 진술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연적으로 어떠한 삶들은 정죄를 받아 저주를 받을 것이 미리 정해졌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필연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 어떻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애정을 두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애정을 두시지 않는 일이 가능할 수 있는가?
이것을 이해할 필요성이 없다.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지 않는 것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신 29:29) 믿음이란 ‘어린 아이같이 되는 것이다.’ “나는 유한하고 작고 죄 있는 사람이다. 나는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믿는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죄는 지적인 교만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해야 되며, 이해를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만족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만일 모든 인류를 지옥에 가도록 내버려 두시고 영원한 멸망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하여도 누구도 불평을 토할 수 없는 것이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어떠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람이든지 간에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나 같은 사람이 구원을 얻다니...
- 그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 짓도록 충동질하고 무율법주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이 문제들에 관해서 논쟁이 있어 왔다. 이 주장에 대한 대답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솔직히 인정하여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났다. 지적인 의미에서만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들의 삶에 그것을 적용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교리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교리의 남용인 것이다. 성경의 모든 교리는 각각 남용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이 교리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율법주의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교회에 있다. ‘안일한 신앙주의’에 빠져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구원을 받을 것이며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죄를 깨닫는 설교를 싫어하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불안한 감정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설교가 전해지면 ‘정말 복음인가’ 의심을 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믿지 않으며 무율법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남용하는 것이다.
목회 경험을 통해서 주저 없이 말하는 것은 자기 영혼과 삶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효과적인 부르심’을 믿을수록 여러분의 영혼에 관하여 더욱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자기들의 영혼에 관해서 가장 소홀히 하는 사람들은 교리를 가장 무시하는 사람들이며 이 교리들의 심오함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거의 생각하거나 묵상하는 일이 드물고 독서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자기들의 결심이나 자기들의 전에 하였던 체험들을 의지한다. 과거 경험을 보면 그것들이 알미니안들이 칼빈주의자 만큼이나 무율법주의를 발생시킨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딱지들을 떼어버려 주시기를 바란다.
성경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이 교리와 충돌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진술들 -
제1그룹 은혜에서 떨어질 가능성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
*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밭에 뿌리운 씨가 싹은 났으나 결실하지 못한 경우
*귀신이 처음에는 나갔으나 나중에 집이 청소되어 있는 것을 보고 다른 일곱 귀신들을 데리고 들어와 더 악하게 된 상태.(눅11:24-26)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은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침을 받을 것이다.(마18:23-35)
* 열매 없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2)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쓰러진 이스라엘 백성들(고전10“1-14)
* 벧후2:1-22, 벧후3:16-17, 요일5:16, 계3:15
제2그룹 행위 여하에 달려 구원이 불확실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
* 마24:13, 빌3:12-14, 골1:20-23, 히5:8-9, 약1:12, 2:20, 4:4-10
제3그룹 경고의 말씀들
*롬11:21, 고전9:29, 11:29-32, 15:1-2, 갈5:4, 6:7-9, 히2:1-3, 3:17-19, 4:1-16, 6:1-9
이상의 구절들은 사람들을 당황케 하는 성경 구절들이다. “이런 구절들은 성도의 궁극적인 구원에 관한 교훈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느냐?”라고 논증할 것이다.
우리는 겸손한 정신으로 우리의 견해는 옳고, 다른 사람의 견해는 틀렸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교훈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또한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이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말씀들의 진술들을 묵상하여 나가기로 하자.
제 23 장 난해구절들의 해석원리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겉으로 보기에 견인 교리가 충돌 되어 보이는 구절들을 일일이 다루어 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특별한 성구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도움을 줄 어떠한 원리 또는 정칙을 설정하여 놓는 것은 가능하다. 영국의 신학자이자 설교자였던 존 길의 ‘하나님의 뜻과 진리’라는 책의 큰 도움을 받았다.
모든 정직한 강해자는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 어떤 것들을 해석하는 데 어려운 난해점이 그대로 남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너무나도 위대하여서 어떤 사람도 그것을 끝내 완벽하게 설명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제가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토마스 칼라일이 ‘무한성과 광대함’이라고 칭한 것을 더욱 더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그것들이 구원에는 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리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제 1 해석 원리, 성경만을 가지고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의 차원에서 논리를 전개하여 철학이 끼어들도록 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필연적으로 여러분이 다루는 논제를 혼란시킬 뿐 아니라 계시의 충족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제 2 해석원리,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정확무오한 것이다. 성경은 성경과 모순되지 않는다.
제 3 해석 원리, 성경 중에서 위대한 궁극적인 진술들로부터 시작해야한다.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교부들과 17세기의 청교도들, 18세기의 복음전도에 교부들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은 언제나 그들의 ‘증거 장절’이라고 불렀던 것을 언급하고 했다. 소위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은 반명제이고 그들은 이전시대의 신앙고백들을 조롱한다. 성경에는 모호하지 않은 명명백백한 진술들이 있다. 그러한 확실한 구절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현명한 해석 원리이다. 예) 요한복음10:27-30, 주님은 자기의 백성들, 자기의 양들이 결코 멸망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보증을 주셨다. 17:11-12,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실패하지 않을 것이며 할 수도 없다는 증거이다.
로마서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고린도전서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별함이니라”
에베소서2:1-3, 베드로전서1:3-5, 요한일서5:18-19,
제 4 해석원리, 어렵고 불분명하게 보이는 진술들을 다룰 때는 제가 인용한 바와 같은 위대한 진술들에 비추어 다루라. 먼저 성경으로부터 시작하라. 철학이나 다른 어떠한 것도 배제하라.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라. 그리고 이러한 근본적인 진술들로부터 출발하여 나가라. 그런 다음에 난해한 구절들을 생각하는 데 명백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진술된 이러한 근본적인 원리가 되는 말씀에 비추어서 그것들을 숙고하라. 성경의 근본적인 원리들과 일치하는 설명을 그 난해 구절들을 대하려 애쓰라. 우리가 어떤 해석에 도달하였든지 그 해석들이 성경의 근본적인 진술들과 일치하게끔 해야 하는 것이다. 따로 독립된 본문을 기초하여서 교리를 세우고 진리의 체계를 세우는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다. 교회사를 볼 때에 이런 일은 언제나 이단으로 나아가는 고속도로이다. 특히 겉으로 잘 알 수 없는 난해한 구절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일은 극히 삼가야 한다.
제 5 해석 원리, 특별한 구절을 다룰 때에 정확히 무엇이 말해지고 있는지 주의깊게 관찰하고 문맥을 숙고하라. 이는 매우 초보적으로 들릴 것이나,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일을 거부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야기되는 것이다.
예) 씨 뿌리는 비유(마13:18-23)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 비유가 다시 타락하여 나갈 가능성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를 유심히 관찰하면 문제가 풀리게 될 것이다. 주님은 돌밭에서 씨를 받은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들은 “뿌리가 없어” 생명이 없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들은 “좋은 땅에 뿌리운” 자들이다. 위험한 것은 추상적으로 그 비유가 처음에는 순전한 열매가 있는데 종국에 가서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류의 사람들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었다가 떨어져 나가서 결국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이 있지 않는가?”라고 말한다. 우리 주님께서 이 마지막 그룹만이 그리스도인임을 명백히 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2:23-25,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셨으니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그들은 지적으로는 고백하였고 주님을 믿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실상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자신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았다. 6:60-66에서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예수께서 ---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그런데도 그들을 제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그들은 그저 주님을 따라다녔다는 것을 의미하여 하는 말이다. “이러므로 제자 중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그들은 따라 다님 것에 불과하고 참 신자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디모데전서1:19-20,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느니라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함이니라” 견인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이 사람들이 제자들이었고, 신자들이었는데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중단하였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다만 그들이 말로 할 수 없는 진창에 빠져서 파선하고 좌초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상징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는 그들을 ‘교정시키기 위하여’ 사단에게 내주었고 하나의 교훈을 배우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배교자가 아님을 암시한다. 결국 그들은 믿음을 ‘착한 양심과 함께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베드로후서2:1,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할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20-22,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중에 얽매이고 지면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리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었다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20절의 ‘더러움’ 이라는 말을 베드로후서1:4의 말씀과 비교해 보자. 그 곳에서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인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신자들에게 세상에 있는 ‘썩어질 것’에서 피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20절에서는 ‘썩어질 것’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더러움’ 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썩어짐은 그 안에 있는, 본질의 매우 깊은 곳에 있는 무엇이다. ’더러움‘은 겉을 변하게 하는 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로서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면서 ’더러움‘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이 사람들은 겉으로는 씻어 잠시 더러움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전혀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개는 개 되는 일이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토하였던 것을 도로 심키는 것이다.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에 관한 가르침이 전혀 없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2:1,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데스포테스)”
“데스포테스”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쓰여진 말이 아니라 하나님 곧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나타내려고 쓴 말이다. 이곳 외에 사용되는 곳들은 눅2:29, 행2:24, 딤후2:21, 계6:10 등이며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있다.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이 말하여지는 때마다 보통 값이 언급되거나 그 말의 의미를 결정하는 상황이 언급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고 사신”(행20:28),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6:20)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을 받은 사람은 결코 그를 부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타락되는 일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멸망을 자초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값은 헛되지 않으며 속량된 대가는 헛되지 않을 것이다. - 존 길
‘산’ 이라는 말은 잠시적인 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낸 것을 말하며,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사신 백성들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이다. 신명기 32:5과 비교하여 보라.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잇는 사곡한 종류로다”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참으로 속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건짐을 받기는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모두 ‘사신 바 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구속받아서 중생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는 의미에서 사신 바 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이 베드로후서2:1에 대한 설명이다. 성경과 성경을 비교하여 보라. 여러분이 ‘사셨다’는 말을 발견할 때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그 말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발견하라. 그러면 난제를 푸는 열쇠를 가지게 될 것이다.
제 24 장 성경해석상의 더 많은 원리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 각 개개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들을 상대로 하여 쓴 구절들
요한계시록2:5,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기서 각 개인을 다루고 있지 않고 교회(에베소)를 다루고 있다. 계1:20로 인하여 그 점은 분명하다.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 ‘촛대’는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 개개인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3:6,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그것은 어떤 특별한 교회(라오디게아)를 향하여 행하여질 수 있는 포괄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교회사를 이해하고, 오늘날의 교회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 경고의 편지를 받았던 교회들은 존재하지 않게 된 교회들이다. 오늘날의 로마 카돌릭 교회가 그러한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교회가 조직으로서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촛대가 옮기워지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 교회들이 한때에는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다 할지라도, 만일 그 교회들이 주님에 의해서 세워진 조건들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그 교회들은 촛대가 옮겨지고 주님의 입에서 토하여 낸 바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의도된 교훈을 각 개인들에게 적용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 개인의 구원보다는 직책이나 기능을 가리키는 구절들
고린도전서9:27,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 많은 사람들이 “사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많이 전파한 후에 결국 영원힌 심판과 징벌을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첫째, 이 9장은 전체가 전도자요 교사요 사도로서 그의 지위와 직무를 다루고 있다. 갑자기 마지막 절반을 떼어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마지막 절은 그의 전체 논증의 절정이요 그의 논리의 귀결이다. 둘째, 흠정역에서 ‘버린다’라고 번역된 말은 실제적으로 ‘칭찬받지 못한다’라는 말이다. 사도는 경주장에서 달리고 있는 사람들의 예를 들고 있다.(24) 그는 전도자와 사도와 목회자로서의 그의 모든 수고가 결국 소용없이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3:10-15에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의 공력이 나타날 것이라” 어떠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행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어떠한 사람들은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상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헛 수고’를 한 것이고 전도자로서의 상은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9:27에서 사도가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문맥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을 하느라고 자기의 일생을 보내지만 종국에 가서는 우리의 한 일이 하나도 남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 자신은 여전히 ‘구원을 받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불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 것 같은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난제들을 문맥이나 본문에 있는 용어들을 살펴 보는 일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문제에 빛을 던져주거나 병행구절인 성구는 어느 것이든지 살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철저하게 성경주해적인 방식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위대한 구절들과 명백한 구절들의 진술들과 일치하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여러분은 고린도전서9:27이 개인의 구원을 다루는 문제였다면, 위대한 사도 바울의 전체 서신들 중에는 그 구절과 병행되는 구절을 발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바울 서신 어디를 보더라도 자기 자신의 현재의 구원과 궁극적인 운명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보게 된다.(롬8:31, 딤후1:12, 4:7-8)
요한복음15:1-11,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2)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6) 여기서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의 문제보다도 교회 안에서의 직무나 역할에 관계된 또 다른 메시지를 보게 된다. 그 이유로는 14-16장에서 그 국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장차 교사들이요 설교자이요 전도자,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이 될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단순하게 ‘버리움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가지로서’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분명히 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맥 전체를 보면 모든 일을 위해서 의지해야 하는 나무의 지체로서의 가지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가지로서의 역할을 못하면, 버리워져서 불에 살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술들이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고 가정하면, 주님은 단순히 교회에는 참 그리스도인들과 겉으로 보기에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실 뿐이다. 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열매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다. 열매를 맺는 사람들도 있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해석은 정당한 것일 수가 없다. 15:3에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13:10에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주님은 자기의 제자들로서의 그들에 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유다도 그 자리에 함께 포함되어 있었지만, 유다는 6장 끝에서 이미 마귀라고 말씀하셨다. 그와 같이 13장에서 주님은 발 씻기시는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우리 주님은 15장에서 이미 깨끗함을 입은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신앙고백을 점검하는 일에 관해서 말하고 계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거듭나지 못하고 단지 교회 안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면, 여러분은 과실을 맺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의 종국은 멸망이다. 참다운 신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다.
제 25장 경계하는 구절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성도의 궁극적인 견인에 반대하여 책을 썼던 사람들은 언제나 이 경계하는 구절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경계하는 구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실례는 마태복음 25장에서 발견되는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민족들의 심판 비유 등이다.
경계하는 구절을 저는 여러 노선의 해석법을 제시할 수 밖에 없다.
첫 번째 - 절대적으로 진수가 되는 것으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의 상태와 조건을 보는 것이다. 성도의 견인 교리에 관하여 난해하다는 견해를 보이는 사람들은 이 가시적인 교회의 상태와 조건에 관한 요점을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들을 향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교회들을 향하여 쓰여진 것들이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교회에 속한 개개인들이 반드시 모두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거짓된 신앙고백자들에 관하여 많은 책을 썼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가나안을 향하여 순례길을 가고 있는 이스라엘 족속과 같이 ‘혼합된 대중’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단정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을 이해할 소망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롬 2:28-29, 유대인과 율법의 관계를 논증하고 있다. 유대인의 잘못은 자기들에게 율법이 주어졌으니 자기들은 율법을 만족시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데 있었다. 율법을 안다는 단순한 지식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문제는 순종하는 것의 차원에서 그 율법에 대하여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을 유대인 되게 하는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고 내적인 것이다.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에 있는 것이다.
믿는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교회 안에서 양육 받았으며, ‘입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개념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9:6) 바울은 11장에서 그 때에 참 이스라엘은 매우 적은 수의 남은 자, 곧 ‘은혜로 선택을 받아 남은 자’ 밖에는 없었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자기를 시험해 보라’는 권면이 그렇게 많은 것은 이 진리 때문이다. 또 우리는 교회의 영역에서 어떤 체험들을 가졌으니 그 체험들은 반드시 성령에 의한 것이라는 단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요일4:1) 여러분은 이러한 난해한 구절들을 다룰 때에 이러한 점을 명심하라.
두 번째 - 경계하는 구절들이 가진 첫째 목적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며, 거짓된 신앙고백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쪽을 강조해야 하는 데 그것은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앙고백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 그것의 진정성을 밝힐 수 있는 시금석은 계속성, 참을성 등 필연적으로 동반하여 나타나는 열매들이다.
믿음과 행위는 함께 가야하는 것이다.(약2:26) 야고보는 바울과 상충되기는커녕 같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성경은 언제나 완전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성경은 우리들이 두 양 극단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여 준다.
- 마태복음 25장
‘열 처녀 비유’ - 흔히 사람들은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떨어져 나가서 밖에 버리움을 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잘못된 해석이 일어나는 것은 두 종류의 처녀들이 동일하게 각각 등을 들고 혼인잔치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기만당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열 처녀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고 있다고 단정 짓는다. 그들 중에 다섯은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을 볼 때, 은혜에서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영구히 타락을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한 해석은 즉각적으로 성경의 다른 곳에서 가르치고 있는 명백한 가르침과 상충되는 것을 보여 준다. 두 그룹 사이의 차이는 기름을 준비하였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라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도가 로마서를 쓰게 된 것은 그러한 교훈이 거짓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이 비유의 요점은 가시적인 교회 안에 있는 열 처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같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한 신앙고백은 전적으로 이기적인 것이요, 자기중심적인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축복 받기를 원하고, 기독교의 모든 복락들을 탐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밖에 어떠한 책임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설교를 경청하지 않고 설교들이 불안하게 느껴지고 설교를 의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미련한 다섯 처녀의 문제는 자신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단정하고, 자기 자신들을 ‘점검하고’ 시험하는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진리에는 실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자신을 시험하고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만일 여러분이 구원에 대하여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다면, 이 비유를 기초로 하여 여러분은 ‘지혜로운 처녀’라고 하는 훌륭한 전제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후에 주님께서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너는 내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너는 진정으로 나에게 속하여 있지를 않았던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지막에서 이러한 권면을 듣게 된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너희 자신들을 시험하라)
‘달란트 비유’ - 특별히 한 달란트 받은 자의 태도를 주목해 보라.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달란트를 받았다. 처음 두 사람은 자기들의 주인의 유익을 위한 무엇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태도는 적대 감정과 두려움을 가진 것이었다.(24-25) 안타깝게도 자신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르면서도 하나님을 실제로는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좁다’는 것에 관해서 말을 한다. 그들은 거룩하라는 권고를 받을 때는 그것이 어려운 삶이라는 것을 느끼고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기독교회 성원들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생명을 가지고 있지를 않았던 것이다.
‘양과 염소 비유’ - 성도의 견인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양의 그룹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들이 주님의 형제들에게 선한 행실을 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우리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선을 행함으로 인한 것이라는 식의 해석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칭찬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목해야 할 흥미있는 사실은 그들이 자기들이 모든 선을 행하였음에도 그것을 모르고 있으며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거짓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한 일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이 가지는 주요한 특징은 자기를 의식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부족과 결함을 안다. 그러나 거짓된 신앙을 고백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의롭다 하려고 단단히 차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세 비유들이 모두 기독교회 내에 있는 모든 신앙고백자들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각 비유에서 모든 사람들은 처음에는 다 동일한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하여 시험하여 보면 우리는 매우 실질적인 차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사도는 너희 자신을 시험해 보라고 한다. 여러분이 의인의 부류에 들어 있는지를 확인하여 보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 3장 5절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견인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주장하기를, 그 진술은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움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름을 역시 부인할 수도 있음을 함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거짓된 것이고 전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
생명책이나 생명책에 있는 이름을 언급한 요한계시록 다른 구절들
13:8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흠정역)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우리말 개역 성경)
17:8 “--- 땅에 거하는 자들로써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여기에서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 이름들이 창세로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명백하고 분명한 진술이다.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
인용한 구절들을 통해서 추론된 것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들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 책에 적혀진 그 이름들만이 선택함을 받은 자들의 이름인 것이다. 만일 어떠한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기록 할 때에 실수를 한 것이 틀림없어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성경 어느 곳에서도 어떤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버림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진술이 없다. 여기서 대하는 말씀은 어떠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대화법이다.
제 26 장 히브리서 6:4-8과 10:26-29을 숙고함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성도의 궁극적인 견인의 교리를 자세히 다루는 것은 두 가지의 중요한 이유에서 이다.
첫째, 우리 모두가 이 교리의 적극적인 가치를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이다. 그것이 사도가 목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관심거리였다는 것을 확신한다. 우리가 이 위대한 교리를 분명히 아는 것은 구원을 진정으로 향유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둘째,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교리가 없으며, 마귀는 그 교리의 중요성 때문에 이 시점에서 우리를 강하게 공격하기 때문이다.
목회 경험에 비추어 두 구절들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고 고뇌를 가지게 하는 구절은 없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 6:4-8)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6-29)
잘못된 해석과 주해 -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전적으로 떨어져 결국 멸망당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에 대하여 명백한 가르침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히6:9)
‘비췸을 받다’ - 그들은 완전히 중생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용어는 다만 한 때 그들이 복음의 빛을 받았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보증이 될 수 없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 ‘맛보다’는 ‘친숙하게 된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의 어떠한 것을 체험한 것을 의미한다.
‘성령에 참예한 자가 되어’ - 그들은 성령에 의하여 거듭났던 사람이라는 의미로만 해석한다. ‘참예’라는 말은 ‘-을 따라가는 것’, ‘참석자’, ‘동업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그들이 어떤 국면에서는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 동행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울과 발람 선지에게 은사를 주어 어떤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그들을 동업자로 삼으신 것이다. 유다는 멸망의 자식이었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전도하는 능력과 귀신을 쫒아내는 능력을 주어 내보내셨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속한 자들은 아니었다.(눅 10)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은사들을 주실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성령의 참예한 자들’에서만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내세를 능력을 맛보고’ - ‘내세’라는 말을 그들은 ‘복음의 시대' 즉 현세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내세‘, ’메시아의 시대‘라는 말을 했다) 저는 그런 의미의 현세도 포함하지만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영원한 나라를 건설하는 시대를 언급하기도 한다고 믿는다. 성령께서 주시는 것은 어느 것이나 오는 세대에 대한 계약금이요 보증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내세의 능력에 속한 것 중 어떤 것을 맛보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 그들이 진리를 받지 못하였다는 것이 아니고 ‘지식을 아는 지식’을 받았다.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 - 이 난제에 대한 답변을 베드로는 후서 2장 1절에서 신명기 6장에 있는 진술들을 인용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있었으며, 자기들은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께 대하여 ‘구별함을 입었다’는 말을 하였으나 후에 그들은 자기들에게 그러한 것은 해당되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우리는 히브리서 6장, 10장의 용어들을 살펴 본 결과, 어디에서도 이 사람들이 ‘거듭난 사람들’이라는 말을 듣지 못한다. 그들을 교회로 끌어들여 그들은 자신은 참다운 신자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어떤 체험을 한 것이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이적적인 은사들에 속한 어떤 것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는 아닌 것이다. 그들은 정확히 요한일서 2장 19절에 기록된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저희가 우리에게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라” 그들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고 교회의 성원으로 받아들임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중생케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우리를 감동하여서 어떤 시점에까지 이끌 수가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이러한 일반적인 감화들은 복음전도를 하는 전도 집회에서 자주 보여 진다. 그들은 후에 가서 전혀 변화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심리적인 체험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강한 권능으로 역사할 때마다 언제나 조류에 밀려들어 온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히브리서 6장 7,8절이 바로 그 점을 실질적으로 증거해 주는 것이다. 4-6절에서 말하였던 것을 예증하기 위해서 예화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두 종류의 땅은 같은 비를 흡수 하지만 그들은 땅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자연적인 상태에서 내는 가시와 엉겅퀴 밖에는 내는 것이 없는 땅과 같은 류의 사람들이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 그들의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라고 말씀함을 받을 사람들이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신 오직 유일한 가치 있는 땅은 열매를 맺은 땅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땅이다. 우리의 임무는 성령께서 만이 더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고, 성령의 권능 안에서 씨를 뿌리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런 일을 하실 때는 언제나 그러한 일의 열매가 드러난다.
히브리서 기자가 ‘타락하면’ 이라는 말을 쓸 때 이 말은 죄를 짓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진리에서 떨어져 타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심각한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들이요,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메시지의 진수를 부정하고 있다. 6, 10장의 초점이 거기에 있다. 5장 끝에서와 6장 초에 사람이 만일 뒤로 다시 물러가서 복음의 근본적인 원리들을 부인한다면, 그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들의 목적은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제넘은 철면피 행실에 빠지지 않게 하고 지적인 신앙만을 가지지 말며, 무율법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시는 방식 중의 하나이다.
둘째, 우리의 견인을 확신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게으름에 빠질 때에 이러한 진술 중에 하나를 읽게 되고 두려움에 떨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통해서도 이 일을 완성하시기도 하시는 것이다. 거짓된 신자는 그런 대목의 말씀을 인하여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와 같은 말씀들을 읽을 때에, 우리들이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관심이 쏠리고 염려하는 것은 그 자체가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해 있고, 성령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 안에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제 27 장 끊어질 수 없는 사슬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여 그 아들로 하여금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자기의 백성으로 아셨다면, 그는 여러분을 향하여 이 위대한 결정을 내리신 것이다. 그 아들과 같이 영화롭게 하시려는 목적을 위하여 미리 정하심을 여러분은 알 것이다.
‘부르심을 받은’ - 미리 아심이 단순히 신적인 전지를 의미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타락하여 나갈 것을 미리 아셨다면 어째서 잠시 동안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부르시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순전히 혼돈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같은 논증이 ‘의롭다 하심을 입다’는 문제에도 적용이 되는 것이다. 칭의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신다. 만일 신자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일에 실수를 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결국은 타락하여 떨어져 나갈 것을 아신다면, 그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데 있어서 하등의 목적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 전체가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며, 혼란과 혼돈의 요소를 하나님의 계획과 행동에 도입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하심에 있어서 질서를 따라 하시는 분이시며, 후회가 없으시며, 하나님은 본질상 변하실 수도 없다.
이 진술들을 살펴 볼 때 많은 사람들이 빠져 들어가는 함정은, 성경이 우리들에게 가져다 주는 입장에서 우리 자신들을 보지 않고, 우리가 믿는 것이나 우리가 붙잡고 나가는 차원에서 자신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이 고통을 당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우리들은 ‘결심’, ‘받은 것’,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 등에 강조점을 둔 나머지 우리의 구원을 전적으로 우리의 행동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의 강조점은 하나님 편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속에 있다는 것에 주어져 있다. 이것이 로마서 5장의 강조점이며, 5장의 가르침을 포착한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8장 28-30절은 그 5장의 필연적인 귀결들이다. 5장 9절에서 만일 우리가 이제 “그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으면” 우리들을 위하여 예정된 그 최종적인 영광으로 완전하게 인도되는 일은 얼마나 더 확실하겠는가 라고 진술하고 있다. 5장 10절에서는 더욱 상세하게 만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죽으심을 인하여 우리와 화목하셨다면, 그 아들의 생명 ‘안에서’ 우리를 온전하게 구원하실 것이다 라고 한다. 제가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라는 점이다. 그것은 ‘나의 믿음’의 차원에서, ‘내가 붙잡는 것’의 차원에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영역에 있다.
그로부터 어떤 다른 일들은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다. 그것이 6장의 논증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에 우리는 그와 함께 죽었다.(6:2-6)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이다. 그 일은 일어난 일이다. 그 옛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이 되었다든가 죄에 빠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회심을 할 때까지는 죄와 사단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러한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타락할 가능성’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 점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와 인연을 끊어버린 것이고, 그 체제에 속한 것이 아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한다.(6:14)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법 아래 있지’ 않다. 이제는 ‘은혜’ 아래 있다. 7장 처음 몇 구절들은 그 진술을 더 설명해주기 위하여 쓰여진 대목이다.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7:2-3)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7:6)
우리는 완전히 율법에서 건짐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를 정죄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바울은 8장2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하신 일의 결과로 인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고통을 받는 것은 새로운 출생, 중생에 관한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구원이 용서하는 것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든지, 또한 구원이 그리스도를 향한 결심 여하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든지, 구원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의 문제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다시 낳음을 입었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중생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생명의 씨를 넣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육신을 쫒는’ 사람이 아니요, ‘영을 쫒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위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여러분 안에 성령이 계시므로 여러분의 몸의 구속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것이다. 중생의 교리 자체가 이 성도의 최종적인 견인의 문제를 정립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거듭난 사람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갑자기 무산될 수 있고, 실수를 할 수도 있음을 믿는 것이다.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함께 살리시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우리는 그의 죽으심에 수반된 사람이다. 그의 부활하심에 수반된 사람이다. 그와 연합이 되었다. 그리스도께 일어난 모든 일은 우리들에게 일어났다. 바로 그것이 옛 사람이 죽은 방식이고 내가 다시 산 방식이다. ‘살리심을 받은 것이’ 확실한 만큼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히신 바 되어 있다.’
언제라도 하나님의 자녀 중 하나라도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소치이다. 그와 불가분해적으로 연합하고 그의 지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소치이다. 우리는 끊어질래야 끊어질 수 없는 끈으로 그리스도에게 매어져 있다. 교회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지식적으로 잠시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거짓된 신앙 고백자들이다. 그러나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은 곧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용어들의 정의상 타락하여 나갈 수가 없다.
제 28 장 남은 자의 교리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이제까지 모든 것을 요약하면 ‘성도들의 궁극적인 견인’은 필연적이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맏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만으로도 성도의 견인을 증거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교리를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고 반대하기까지 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 교회의 본질에 기초한 것으로 논증하려 한다.
사람들이 어려운 생각을 가지는 주요한 이유는 구원을 너무 지나치게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려는데 있다. 우리는 모두 개인적인 구원의 확신을 누려야 한다. 그러나 구원을 전적으로 우리 각 개인의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우리들이 누리고 싶은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개인적으로 우리 각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더 큰 전체의 일부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우리는 따로 떨어져 있는 개별적인 존재들이 아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교리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우리는 교회의 지체들인데, 주님께 약간의 관계를 맺기 위하여 모아 놓은 느슨한 모임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들을 한 완전한 전체의 몸의 각 지체들로 생각해야 한다.
손가락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손도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손목에 붙어 있으며, 손목은 몸 전체에 붙어 있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개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 인도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국면은 전체 국면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곧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의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5-16) 우리는 이 그리스도 몸의 각 부분이다. 그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가 여러분 각 개인을 위해서 죽으신 것은 여러분들이 그가 위하여 죽으신 한 몸으로서의 백성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장의 거의 모든 구절들이 그 진리를 진술하고 있다.
“---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요한복음 17장은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이라 불리우는 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입장을 진술하는 것으로 이용되어 왔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는 연합은 단순히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이는 것이 아니다. 그 연합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연합이고, 그 연합은 우리들이 하나라는 의미에서 연합이다. 그것은 특별히 유기적이고 영적인 연합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은 살아계시는 머리인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있는 모든 사람들 사이의 연합과 같은 류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하여 죽으셨다.(엡 5:25) 그는 우리가 교회의 각 지체들이기 때문에 우리 각 개인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것은 개인들을 모아 놓은 교회가 아니라 신부로서의 교회를 뜻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몸의 지체이며 그 몸에 속한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한 몸이다. 그의 육체이며, 뼈 중의 뼈이다. 그 관계가 어찌나 친밀하든지 분리되는 일이나 떨어져 나가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교회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교회를 위해서 구속하고, 교회를 완전케 하고 결국은 그 교회를 자기 앞에 서게 하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 논증은 성도의 궁극적인 견인의 교리에 대하여 광대한 뒷받침을 하여 주는 것이다.
성도의 견인 교리는 징계에 관하여 말씀하여 주는 성경의 교훈에 의하여 철저하게 확증을 입게 된다. 징계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 예비하여 놓으신 영광을 위하여 자기의 자녀들을 예비하시는 과정의 일부이다. 하나님께서는 주께서 나타나실 때에 그의 영광에 그들로 참여하도록 그들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에 자기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징계를 하시는 일 자체가 성도의 궁극적인 견인을 증거하는 논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로 견디어 내게 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이며, 그들로 ‘견디어 내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유다를 다루시는 방식과 베드로를 다루시는 방식을 대조해 보라. 사도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고의로 주님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베드로의 하는 일을 다 아시고 미리 준비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4). 우리 주님은 베드로를 돌보고 계셨다. 우리 주님은 베드로와 유다가 하려는 일을 다 알고 계셨다. 그러나 유다는 같은 방식으로 다루시지 않으셨다. 유다는 자기의 갈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다. 그는 ‘멸망의 자식’이다. 그는 결코 주님께 속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이 우리의 깨달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이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시고 우리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사실에 달려 있다.
고린도전서 11장(30-32)에 있는 가르침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자기들을 시험하는 일에 부족 때문이다. 어느 의미에서 그들의 죽음마저 궁극적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징계의 일부이다. 그리스도인은 ‘육체를 멸하고 영혼은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사단에게 넘기워지는’ 사람이다.(고전5:5) 징계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전하시는 방식들 중의 한 방식이다. 그들을 온전케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위하여 예정된 궁극적인 영광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준비시키시는 방식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 교리를 증거하기 위한 또 다른 논증은 성경에 있는 남은 자에 대한 교훈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소돔과 같았으리로다”(롬9:29). 만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를 남겨 놓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들 중에서도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1-6절에서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끊지 아니한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은 한 사람만 남은 것이 아니다. 타락하지 않은 칠 천인을 “내가 나를 위하여 남겨 두었다”고 하신다. 사도는 그 점을 분명히 지적하기 위해여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으리라”라고 말한다. 유대인들 중에 남은 자들의 믿음은 그들의 어떠한 공로를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순전히 은혜이다. 그것은 택하심을 따라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이스라엘 중에서 남은 자를 두시는 것이다.
로마서 9장 6-7절을 적용해보면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폐하여 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이것은 나는 그리스도인입네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아신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 “참”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그 교훈은 하나님이 그 남은 자를 지키지 않으면 하나라도 남은 자가 없을 것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나의 영원한 장래가 나 자신과 나의 신실함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면, 나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지켜 주시고, 하나님께서 보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제 29 장 성도의 견인 교리를 부정하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만일 성도들의 궁극적인 견인 교리가 진리가 아니라면, 무엇이 우리를 지켜주고 무엇이 우리의 타락을 막아줄 것인가?
중생하고 거듭난 자들이 다시 멸망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믿는다면, 그들은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믿음을 붙잡고 끝까지 믿고 끝내는 영광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다른 쪽은 믿음을 붙잡은 손을 놓아 버리고 떨어져서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이든지 그가 가진 의지와 바램과 결심에 의해서 전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붙잡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담보다도 결심과 의지에 있어서 더 강하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가 문제를 이런 식으로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가지는 신실함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의지력과 결심하는 능력이라고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은혜의 교리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중생에 관한 가르침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이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목표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인식치 못한 결과이며, 그들은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을 단순히 “내가 구원받아 용서함을 받고 하늘에 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요한 목적이 아닌 부수적인 목적이다. 구원의 계획이 목표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변호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중심적인 주제이며, 그러하기에 그러한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마귀가 하나님을 이겼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분명하지 않다면, 우리들이 이러한 요점들에서 방황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은 온 우주가 이러한 현재의 타락하고 악하고 죄 있는 상태에 내버려 둘 수 없음을 요구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악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셨는지는 알지 못하며, 우리에게 계시로 보여주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에게 선택의 자유권을 주어 하나님의 영광은 그러한 상태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을 요구하며 주장한다. 그러므로 만일 이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인정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은 궁극적으로 우리들의 손에 달려 있고 우리들의 능력과 참아내는 능력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경의 모든 교훈에 대하여 반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 우주가 새로워지기를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실패할 수 없는 구원의 계획을 수립하셔야 되었다. 그는 ‘두 번째 사람’, 사람이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마지막 아담’을 보내신 것이다. 복음은 신인이신 분이 마귀를 이기고 사망을 정복하는 일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들의 대제사장이요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역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자 사람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구원의 역사는 십자가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의 최종적인 영화의 지점까지 그 일을 계속해 나가실 것이다. 그 일은 실패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그러한 일을 성취할 수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이 성공된다는 데 대한 보증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가 우리를 권능으로 붙잡고 계신다는 점이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요한복음 6장 37절에서 이 점을 매우 특별하고 명백하게 가르치셨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들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어떠한 사람도 이 문제에 관한 한 자랑할 수 없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사람은 어떠한 것도 자랑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하늘에 가게 될 때 그것은 다른 사람이 포기할 때에 우리는 붙잡은 것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나님 뜻에 들어 있고, 우리의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지켜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모든 일을 행하신 어린 양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경배하게 될 것이다. 찬양과 영광은 오로지 그에게만 돌려져야 한다.
여러분은 이 성도들의 궁극적인 견인의 교리를 믿는 불신자를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조롱하고 비웃어 버린다. 고등 비평자들, 자유주의신학자들,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이 성도들의 궁극적인 견인 교리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믿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철학과 미리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잘 맞아 들어가는 것만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궁극적인 견인의 교리는 성경에서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성 어거스틴은 이 교리를 믿었고 그 점은 어째서 그의 가르침이 그처럼 어두운 중세의 암흑을 조명하는 빛이 되었던가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의 교리였다. 자기 나라에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건설한 사람들은 이 교리를 믿었다. 그들은 교리의 중요성을 알았던 것이다. 그들은 로마 교회에 메달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교리에 의존하였던 것이다. 그 교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도 들어 있다.
사실상 로마 카톨릭이나 웨슬리 형제(특히 존 웨슬리) 같은 프로테스탄트, 알미니안 프로테스탄트들이나 그들의 추종자들을 제외하고는 이 교리에 대하여 큰 일치가 있었다. 감리교도들을 제외하고는 1860년까지는 이 교리가 영국의 자유교회 교단들이나 영국교회의 거의 모든 복음적인 교리들에 의하여 보편적으로 믿었던 교리이다. 금세기 이 현 시점에서 복음적인 사람들 사이에 마저 이 교리를 어떤 ‘새로운 생소한 교리’로 간주하는 것은 비극이다.
그 교리는 구원의 방식을 이해하였던 사람들이 자랑하였던 교리였으며, 그들이 흔히 다른 그 어떤 교리들보다도 높였던 교리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들과 같은 부류에 자신을 넣지 않도록 주의하라. 여러분은 여러분의 철학으로 이 문제로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영광스러운 계시를 향해서 여러분의 작은 마음을 대치시켜 놓지 않도록 조심하라. 요한복음에서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기억하라. 그의 대제사장 기도에서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감사어린 말씀으로 아버지께 말씀하시는 것을 보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진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그의 영광을 기뻐할 것이다.
제 30 장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그는 1장 16절에서 시작된 대량적인 교리 부분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그런 다음 17절에서 이신칭의 교리를 소개하였다. 그 지점으로부터 8장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논술하여 왔다. 8장 끝에서 위대한 구원의 교리를 완전히 진술하는 일을 마치고 있다.
8장에 있는 끝맺음을 하는 대목에서 다시 한번 교리를 적극적으로 진술하며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의 역설을 제시함으로 그것을 설명한다. 사도는 목회자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의 편지를 읽는 독자들이 자기가 의미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28-30절에서 전제를 진술한 다음에 이 교리들에 관해서 떠오르는 난제들을 진술함에 있어 그 전제들을 부정적으로 진술하는 것이다. 오늘날 복음적인 교단에서 “언제나 적극적(긍정적)이 되고 소극적(부정적)인 것은 말하지 말라”는 것이 슬로건이 되어있다. 그것은 바울의 방식과는 정반대가 된다. 그러한 진리를 적극적으로 뿐만 아니라 소극적으로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단 사설에 현혹이 되어 넘어가는 것이다. 우리들은 진리를 증거하고 밝혀 주어야 하는 것이다. 진리를 진술하고 반대 의견들을 생각하고 그 반대 의견들을 대처하는 대답을 하라. 그럼으로써 진리를 더욱 확고하게 확증할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우리들이 그 영화롭게 되는 지점에 이르는 길을 막고서는 선이 있을 수 있겠는가?(31절)
두 번째 질문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도전을 받아서 폐기될 위험이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질문이다.(32절)
세 번째 질문은 어떤 사람들이나 어떠한 것이 우리들의 죄를 고소하여 정죄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한가?(33-34)
네 번째 질문은 우리들이 시련과 인생의 환난을 만났을 때에 우리들이 연약함 때문에 실패하거나 좌절할 수 있다는 말인가?((35-37) 하는 것이다.
이 모든 도전을 진술하고 논박하고, 그런 다음에 38절에서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단언하는 영광스러운 진술이 뒤따른다.
31절의 첫 번째 도전 -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이 일(들)’ 이라는 말에는 구원의 방식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강해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사도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계획과 목적을 요약하고 있다. 1장 16절에서부터 말해 온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비추어 볼 때에 어떠한 결론에 이르게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오직 하나의 결론만을 제시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 ‘만일’은 의심을 나타내는 ‘만일’이 아니고 확신을 나타내는 ‘만일’이다.
사도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바는 우리들을 대적하는 무서운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 육체, 마귀 같은 것이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쉽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원수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들이 당한 문제를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식 밖에는 없다. 그것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우리 편이시고 우리들을 위해서 일하고 계시는 분과 맞부닥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이라고 도전하는 것이다.
그 메시지가 위로가 되는 점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위해서 모든 일을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신다. 우리들을 대적하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로다”(창15:1)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시27:1)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릴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한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사40:10,14)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귀인들을 페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사40:22)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함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고 곤비하여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18-31)
여러분을 대적하는 모든 것(휴매니즘, 물질주의 등)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통의 한 방울의 물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다. 자기들이 거인같이 뽐내며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과 황제들 지도자들을 메뚜기 같이 여기시며 그들을 폐하시고 헛되게 하신다. 우리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여러분의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여전히 말하겠는가? 이것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한 판단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구원을 확실히 믿는가?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면 이 위대한 진술들에 하등의 실제적인 즐거움이 없다. 세상이나 육신이나 마귀나, 여러분의 연약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문제이다. 여러분은 ‘나의 하나님’ 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사도나 수십 세기의 성도들과 같이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라고 말 할 수 있느냐 말이다.
제 31 장 하나님의 일이 성취됨의 확실성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여하한 경우에도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사도는 바로 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미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큰 일을 하셨다면 우리들을 궁극적으로 완전함과 영화로 인도하실 때까지 우리 속에서 역사를 계속하시는 일을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헬라 원어에서는 본문 초두에 ‘분명히’,‘진정으로’ 라는 말이 발견되는데 그 말을 첨가해야 한다.
모든 신자는 이 사실을 확실히 알 필요가 있다. 사도는 단순히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에 기초해서만 확신을 두는 것이 아니다. 여러 사실들에 기초하며,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는 복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한다. 그는 교리에 입각하여 위안을 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리는 그 사실들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사실을 말하고 나서 거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그리스도의 인격과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에 관한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들은 기독교 신앙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의 성경적인 방식이다.
오늘날 유럽 대륙에(대부분 독일 신학대학) 인기 있는 가르침이 있다. - 독일의 불트만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실제 부활하였는지 어떤지는 하등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체험과 그가 여전히 행하고 있는 감화력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사람인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동정녀 탄생, 대신속죄, 육체적 부활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다른 가르침은 영국에서 더 유행하는 것으로 복음적인 교단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그들은 “우리는 신학자가 아니다. 우리는 그저 복음적인 사람들일 뿐이다. 우리는 신학 때문에 골머리를 앓지 않는다. 선조들이 신학에 너무 시간을 허비한 결과로 서로 분리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
여러분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싶으면 기독교 교리를 꽉 붙잡으라. 그럴수록 확신은 더욱 더 클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중요한 것이며, 그 사실들을 설명하는 교리들은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사도는 둘 다 제공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는 교리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그들이 십자가에 관해서 믿느냐?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그들의 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예배 보러 오는 사람들, 위안의 말만을 얻기 위해서 오는 자들, 만일 그들이 교리를 이해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십자가의 논증을 전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도의 첫 번째 주장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일어났던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서 죽음에 자기 아들을 내어 주셨다. 그런데 필요한 다른 것,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을 싫어하실 리가 없다는 논리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본문 하반부에 관해서는 명백하다. 그러나 상반부의 하나님의 하신일의 말씀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에 관한 대중적인 교훈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 일은 사람들이 마귀에 의해 한일이다. 하나님이 모든 자에게 비록 너희가 그런 일을 내 아들에게 하였지만 나는 여전히 너를 용서할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모든 영광을 놓쳐 버리는 것이고 성경의 가르침과 전적으로 상충되는 것이다. 복음적인 가르침은 갈보리에서 행하신 이가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것을 행하신 그 분이 우리들에게 다른 것을 주시려 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으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요 19:1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정하시고 계획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을 따라 된” 일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것에 대한 하나의 보증서이다.
그 아들을 죽이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를 살리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십자가의 영광과 우리들이 가진 확신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하는 교사들은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도 없고, 사랑과 진노가 서로 대치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설명한다. 사람들은 그 분을 ‘자기 때가 되기 전에’ 죽은 선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독생 하신 분’ 이며,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는 태초에 계시던 말씀이다.(요1:1) 그는 하나님의 본체에 참여하여 계시는 분이시다.(히1:3)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아버지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송사를 당한 것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내어 주신 이가...” 그것은 논증의 중대한 부분이다.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서 아끼지 아니하신 분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양자로 받아들인 아들도 또한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의 아들’ 이셨다. 기이한 성육신 교리는 ‘자기 아들’ 이라는 두 단어에서 발견된다.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는 한,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의 죄를 깨우치는 사도의 논증은 설득력을 상실해 버리고 만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신성의 모든 충만으로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아버지 하나님이 바로 그러한 분을 아끼지 아니하셨다.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내어주신’ 분이 바로 그 분이셨다.
이 구절에 있는 모든 말들은 기독교 신앙의 영광스러운 교리로 가득한 것들이다. 그 말들마다의 의미와 영광을 박탈하여 버리고 “나는 교리로 골머리를 앓지 않겠다.” 라고 미련한 사람들이 말하는데, 그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만일 여러분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갖고 싶다면, 모든 글자 하나하나를 꽉 붙잡으라. 여러분의 구원을 하나님의 마음과 영원한 뜻의 차원에서 미리 보는 법을 배우라.
제 32 장 그리스도의 받은 고난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확신의 진술 속에서 사도가 사용한 용어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첫째, 갈보리 언덕에서의 죽음을 명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둘째, 거기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셨다. 인간적인 순교의 죽음을 죽은 것이 아니었다.
셋째, ‘아끼다’ - 이 말은 창세기 22장 16절에 있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된 말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하나님이 갈보리 언덕에서 행하신 일에 대한 모형이다. 그는 우리들을 구원하는 과정의 일부로 그에게서 어떠한 것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다. 그는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필요한 고난을 받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들이 행하는 관례와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우리들은 아끼는 사람의 고난을 덜 수만 있다면 모든 일을 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그를 아끼기는 커넝 “그를 내어 주셨다” 우리 주님은 ‘어두움의 권세’에 내어준바 되신 것이다.(눅 22:53)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눅 22:41-46)에서, 십자가 위에서의 주님의 부르짖음을 들어보라.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이는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다”는 말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의 진수가 되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 12:2)
십자가에 대한 어떠한 관점이든지 이 구절들의 가르침을 내포하지 않은 것은 거짓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승리를 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떠한 슬픔도 없으며 어떠한 고뇌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 주님의 지식을 방호하려는 열의를 가진 나머지 십자가에서 일어났던 일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것을 박탈해 버린 것이다. 시편 22편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신 것, 육체의 고통, 그 밖의 일들을 상세하게 말해 주고 있다. 이사야 53장에 사용된 용어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매 맞다” “찔림” “곤욕을 당하다” 이와 같은 용어들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의 결과인 고통과 고난과 채찍을 당하셨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는 기도는 그를 성도들보다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그로 ‘죄’ 삼으시는 때가 있을 것을 아셨고,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실 때가 있을 것을 아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향하여 내리시는 진노아래서는 어떠한 영혼도 고통을 받으며 슬픔과 질고를 당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 주님이 그러한 것을 체험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억측과 어떠한 슬픔을 당하지 않으셨다는 억측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의 가장 중심 되는 영광을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사도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를 내어 주셨고, 어떠한 고통도 덜어주려고 아끼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향하여 쏟아 부으시는 모든 진노의 잔을 그에게 다 부으셨다. 저와 여러분의 죄가 하나님과 그 아들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래서 그는 곤고에 찬 울부짖음을 발하셨던 것이다. 가장 깊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신 것이다.
넷째, “위하여” - ‘누구 편에서’ 라는 의미이다. 주님이 자신의 몸에 우리들의 죄를 지고 나무에 달리신 것은 ‘우리 편에서’ 이다. 하나님이 우리 ‘대신’ 그를 내어 주신 것이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다. 바울은 우리가 연약할 때(5:6),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5:8), 우리가 원수일 때(5:10)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들에게 임해야 하는 모든 것, 죄책, 비열한 배역, 지옥에 밖에는 갈 수 없는 것, 그런 모든 것을 그에게 쏟아 부으셨다는 것이다.
다섯째, “모든 사람”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 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실 뿐만 아니라, 그는 역시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은사로’ 주셨다. 그 모든 일을 ‘값없이’ 하셨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그것만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재는 척도인 것이다. 대속의 교리를 부정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방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처할 입장이 얼마나 힘이 없고 불쌍한 것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척도는 “비록 너희가 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죽였지만, 나는 그래도 너희를 사랑한다. 너희를 여전히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하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깎아 내리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의와 공의와 거룩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죄를 묵과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십자가에서 그것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아들을 벌하실 정도로 사랑하셨다. 그를 하나도 아끼지 아니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하셨다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어떠한 것도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되어 진 일에 비추어서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분명코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실 것이다’ ‘모든 것’은 우리들이 궁극적인 영화에 이르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어떠한 말을 하든지 간에 우리를 포기하실 수 없으시며, 우리들에게 관심을 철회하실 수 없으시며, 우리를 사랑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이 그것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는 가장 큰 은사와 함께 내가 건강할 때나, 병들어 있을 때나, 고통을 받고 있을 때나,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필요로 할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실 것이다.
여러분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였다면, 여러분의 최종적인 견인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이해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과 깊이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여러분이 그 사실을 인식하게 될 때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 라는 피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제 33 장 하나님의 택하심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
성도의 궁극적인 견인 교리를 시험하는 질문을 하고 있다. 우리자신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물리침을 받는다든지 정죄를 받은 상태로 다시 떨어질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 대답은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이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하나로’ 습관적으로 생각하는가? 우리들이 겪는 많은 고통들은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그러한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결심한 사람’(선한 사람,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으로 생각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사신 소유된 백성이다. 우리 자신들이 그러한 차원에서 생각하기를 배운다면, 우리 삶과 모든 생각하는 것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사도는 그런 사실에 비추어서 ‘누가 능히 나서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송사하리요? 법정이 개정되어 있고 변론이 벌어지고 있다.(행19:40, 23:29) 성경은 사단이 법적인 차원에서 참소하는 자(계12:10) 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는 이미 우리를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 이라고 부름으로써 그 대답의 일부를 제공하였다. 사도는 사실상 이것이 법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은 법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 ‘의롭다 하시는 이인 하나님’ 이라는 것이다.
첫째로 인간이 하나님과의 가진 관계는 법적인 문건이다. 인간은 주어진 방식으로 행동해야하는 행위언약으로 인간을 다루시고 관계를 가지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둘째로 인간과의 관계를 주도하는 율법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법이지 인간의 법이 아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율법을 제정하신 분만이 아니라 재판자도 되신다.
네 번째로 사람을 송사하는 어떠한 송사라도 율법의 차원에서 행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생각들을 가지고 우리의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진술을 숙고하게 된다.
하나님은 나의 죄들을 그 아들에게 전가하셨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의 의를 나에게 전가 시키시고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법적인 공정한 방식으로 우리를 의롭다하셨다. 어떠한 사람도 나를 향하여 송사할 수 없다. 나는 의의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칭의가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 단번에 끝난 일이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모두 법적인 차원 안에 있는 것이므로 더 이상 율법의 관계로 어떠한 송사를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로 인하여 나는 ‘은혜’라는 새로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가 어떠한 법을 가지고 와서는 송사를 하려 들 때, ‘법정에서 나가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교리를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여러분이 안전감을 가지고 기쁨을 누리는 것은 여러분이 이신칭의 교리를 이해할 때 만이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가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게 되면 마귀는 곧 여러분을 흔들어 댈 것이다. 여러분이 마귀의 말을 듣고 자신에게 “ 나는 내가 마땅한 바대로 선하지도 못한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다시 정죄 아래 들어 있는 느낌을 금방 가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다시 행위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마귀에게 “하나님은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셨다. 난 나를 의지하지 않는다. 나는 절대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나를 위하여 하신 일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선언한 것을 의지하는 것이다”라고 말을 하라. 그것이 마귀에게 대한 최종적인 답변이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종교 개혁자들이 존재하게 된 방식이다. 이신칭의의 교리가 굳건한 교회인가 아니면 넘어져 가는 교회인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라고 말한 루터의 말을 이해하는가? 그것이 모든 것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카토릭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그가 거룩해졌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구원의 확실한 교리를 반대하는 모든 다른 교리들의 오류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하여 완벽한 확신과 절대적인 확실성을 누리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택하신 자들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도 나를 송사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율법을 제정하시고 재판하는 분이요, 자신의 율법을 만족하는 방식을 발견해 내신 분이요, 그 자신의 본성과 그 자신의 공의와 의를 만족시키는 법을 발견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곧 그의 독생하신 아들 안에서 그것을 발견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이 친히 내가 예수를 믿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고 나를 향하여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분명히 하라. 그것을 적용하라. 그러면 땅에서나 지옥에 있는 모든 원수들을 향하여 답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성도들은 구원의 최종적인 지점에 이르기 까지 견디어 내게 되는 것이다.
제 34 장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심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 사도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신분에 대하여 어떠한 의심도 가지지 말고 확신해야 한다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표현을 쓰고 있다.
사도는 본문에서 첫째로,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실로 그 일을 하셨다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둘째로, 우리들이 이 문제에 관하여 충분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밝혀 주려는 것이다. 그 진술들이 단계들을 밟아 나가고 있다.
“죽으신 이는 그리스도시니”, “다시 살아나신 이도 그리스도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그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니라” 그 진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보는 것은 우리 주님의 중보적인 사역을 완벽하고 놀랍게 요약하고, 그 각 요점들이 ‘우리를 위하여 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가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단순히 그의 일생에서 우연하게 일어난 일로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그 모든일에 있어서 우리들의 중보자요, 대표격으로 행동하신 것이다.
사도의 논증은 우리를 위해서 그의 아들을 보내시고, 이 일들을 하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벌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그런 일들을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정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요 3:17-18)
“죽으신 이는 그리스도시니” - 그가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책을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신 분이 어찌 우리를 정죄하겠는가? 우리들이 마귀를 퇴치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그러한 것이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두 가지 일을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하나님의 율법을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일과, 형벌을 받는 일이다. 그는 둘 다 이루셨다.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실 길은 오직 - 그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칭의는 우리가 더 이상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선언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공의가 온전히 만족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일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불공정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죄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 1:8-9 )
요한은 하나님은 약속에 대하여도 미쁘시며, 언제나 의로우신 분이시다. 만일 우리 믿는 자들이 죄를 짓고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의 신실성과 공의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지금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공포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고 가장 큰 위로가 되고 가장 큰 안보와 위안이 된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 교리와 성도의 견인 교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불의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같은 죄를 두 번 벌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시니” - 오히려 ‘다시 살리심을 받은’ 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의 죽으심을 이해하는 것은 부활의 빛 아래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활에 대하여 확실하지 않으면 죽으심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
부활의 사실이야 말로 우리들이 구원을 확신하는 데 절대적으로 진수가 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부활은 우리 주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는 증거를 주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고, 우리의 ‘칭의’ 때문에 다시 사신 것이다. 부활은 우리들이 의롭다 하심을 입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이심을 받았다는 것을 선언하는 선포적인 사실에 대한 확증이다.
바울은 그 점에서 멈추지 않고 부활은 죄의 모든 결과들이 구체적으로 해결이 되었다는 최종적인 증거를 해 주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하는 다섯 가지의 원수들이 있다. 곧 죄, 사단, 하나님의 율법, 사망, 지옥이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면 먼저 우리는 그런 것들이 최종적이고 결론적인 방식으로 처리되었다는 것을 온전하게 만족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에 대해서 승리 하셨다. 그는 그 사실을 선언하면서 다시 사신 것이다.
그는 결코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 오시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우리가 아니었다면 그는 다시 죽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우리가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다시 사시지 아니하셨을, 것이다. 죽음과 무덤과 지옥이 여러분을 위협치 못하게 하라. 그는 살아 계시고 우리는 그와 연합해 있다.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인을 정죄 아래로 이끌어 갈 수 없다. 그리스도께 일어난 일은 우리를 위해서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과 같이,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들이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신 이는 그리스도시니” 여러분은 여러분의 발을 그 토대 위에 단단히 세웠는가? 여러분은 여전히 그와 함께 있는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가? 만일 여러분이 그 의미를 인식하셨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들이 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하나님의 후사,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는 사실에 대하여 부당한 생각을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제 35 장 우리의 대제사장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사도는 “누가 정죄하리요” 라는 말로 성도들의 최종적인 구원에 대한 견인교리를 논증하고 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 논증의 세 번째 답변은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라는 것이다.
부활은 끝이 아니고 그는 승천하셔서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분이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씩, 모든 백성들의 죄를 지고 가는 사람이다. 그는 그 사람들의 대표로서 살해된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시은좌 앞에 뿌리는 것이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제물은 받으시는지 어떤지를 알려고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대제사장의 에봇 옷단에 달린 방울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다시 그들의 죄가 가리움을 받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하나님의 백성들로 계속 복 주실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주님 자신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실 일에 대한 예표인 것이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기 전에” 그 일을 먼저 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제물로 드린 다음에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늘로 들어가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간 것이다. - 그는 제물이자 대제사장이다. - 이것이야 말로 가장 위로를 주는 교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9:24)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심’ - 첫째,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후 일곱째 날에 ‘쉬셨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앉으신’ 것이다. 앉으신 것은 일이 다 끝난 것을 표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죄에 관한 어떠한 것도 더는 행해질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둘째, 우리의 서 있는 위치에 대하여 도전을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주님은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승귀’ 그가 행하신 일에 대한 보상으로 거기에 계신다는 것이다.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19), 그는 생각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계신다.(빌2:8)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구원과 여러분의 최종적인 견인에 관하여 확신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진정한 문제는 여러분이 바르게 생각할 수 없다는데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성경을 믿는다면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넷째,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주님은 거기에서 그 일을 하고 계신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하심이니라”(롬14:9)
거기에서 주님의 하시는 일은 중보적인 일이다. 그는 우리의 대표요, 우리의 중보자로서, 우리들의 몸의 지체인 머리로써 거기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복락을 위하여 모든 권세와 권위를 다 사용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정해진 때가 오기까지 계속 될 것이다. 그는 다시 오셔서 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그 날에 주님은 그의 영광스러운 위대한 나라를 선포하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나라에 영원토록 거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의 의미이다.
또 다른 단계는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고, 그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것만큼 확실하게 여러분은 하늘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은 바 되었다는 것이다.(엡2:4-5) 이 사실에 비추어서 볼 때에 여러분을 요동하여 넘어지게 할 자는 누구인가? 그러므로 여러분이 여러분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겸양이 아니다. 그것은 불신앙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이요” - 바울은 목자적인 심정으로 핍박받고 시련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절대적인 확신과 확실성을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하늘까지 올라갔다가도 예배를 드리고 나올 때는 “그러나...” 라는 말을 얼마나 잘 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설교자는 이 말씀을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로 묘사하여, 심판장이신 하나님, 검사석의 마귀, 그리고 변호석에는 우리 주님이 앉아 계신다.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 마귀가 송사를 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서 그 송사를 변호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 변호하는 말을 듣고는 선고를 내린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을 때마다 법정이 하늘에서 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로마서 8장 1절의 말씀과 상충하는 것이며 주님께서는 이미 ‘영단번에’ 그 일을 하신 것이다.(요5:24)
사도가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간구를 말하는 것은 우리들이 긍휼에 넘치는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히4:14-16)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는 언제나 그가 부활하시고 높아지신 후에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자기의 죽으심의 효력들을 안전하게 보장하는 일을 계속하신다는 것이다. 일 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목적은 그가 대표하는 백성을 위해서 어떤 유익들을 확보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하늘에서 바로 그 일을 하고 계신다. 하나님 우편에 우리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우리들이 긍휼을 입을 수 있다는 보증이다. 나는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 긍휼뿐만 아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바라보시어 그 안에 있는 우리를 보시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표자로 보시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주신다. 그것은 모두 ‘우리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주님은 거기서 우리의 대표자로 우리의 중보자로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거기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한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과 영화에 진수가 되는 어떠한 것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영원토록 그 일을 계속하신다. 나는 이러한 도전장을 낼 수 있다. “누가 정죄하리요?” - 어느 누가 무슨 말을 한다 할지라도!
제 36 장 넉넉히 이기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본문은 31절에서 시작된 논증을 요약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가장 놀라운 장의 장엄한 클라이막스와 끝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제 우리들이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를 생각하는 데서 나온 마지막 도전을 열거하고 있다. 환난, 곤고, 기근, 핍박, 적신, 위험, 칼 그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올 것이며, 온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우리들에게 안일한 삶을 약속하기는커녕 그 정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다.(시44:22)
사도가 제기한 질문은 우리들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참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이중적인 답을 주고 있다.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그는 질문 형식으로 답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요, 또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기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서’ 이다.
또한 과거형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이로”(우리말 개혁성경은 현재형으로 번역) 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논리는 우리가 아직 죄인들이요, 원수들이요, 반대자들인 채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면, 그의 살으심으로 말미암아서는 우리를 구원하여 나가는 일을 계속하는 일은 얼마나 더 하시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 “넉넉히 이기느니라” 사도는 우리를 그의 사랑에서 아무 것도 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끊으려고 하는 모든 것들에 ‘넉넉히 이긴다’ 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들어가려고 무진 애를 써서 간신히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시련을 견뎌내는 것만이 아니고 그 모든 것들을 없애 버리며, 그것들을 완전하게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봉착하는 가장 큰 위험은 세상이 주는 유혹이다. 세상이 우리를 핍박할 때에 “어째서 세상이 이렇지?”라고 물음을 던지게 된다. 그러나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될 것이니라”(:7)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기에 그리스도께서 받은 것과 똑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고, 우리는 세상이 미워하는 자들임을 상기케한다. 또 우리가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시련과 환란들은 우리를 기다리는 장차 올 영광에 대하여 우리로 더 강하게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8) 그 시련들과 환란들과 고난들은 우리의 마음을 돌려서 우리를 기다리는 영광을 바라보도록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넉넉히 이기느니라’
더 나아가서 시련들은 우리들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우리를 마음에 두고 계시고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참아낼 때 우리들에게 특별한 용기를 주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해서 미소를 지으시고 우리를 도와주신다. 거의 모든 성도들은 핍박을 받을 때가 자기들에게 축복의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환난의 도가니 속에서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시119:71)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어떠한 것인가?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바울 같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이 더 좋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 존전으로 즉각 들어가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마주하고 미소를 지를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자기가 누구이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가진 관계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는’ 것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노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3)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5)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9)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하고, 그 사랑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넉넉히 이기게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로 하여금 ‘환난 중에서 즐거워 할 수 있게’ 한다.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그 모든 것을 38-39절에서 위엄차고 장엄한 진술로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이 말씀 속에는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매일 설교단에서 말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닌 언제나 복음이다. 사도는 그 전에까지 말했던 것에다 더 이상 첨가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충분한 것 이상이다.
‘내가 확신한다’ 사도가 이 서신 전체에서 말해왔던 모든 것을 생각하고서 얻은 결론이라는 것이다. 다른 결론은 전혀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내린 결론은 환경들이 개선되리라는 확신을 하지 않았다. 자기가 당하는 시련들에서 건져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나도 암시 않고 있다.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어떠한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기를 끊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오직 유일한 관심거리이다. 그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모든 것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또한 그것을 확신하며, 그것이 그를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요, 의로운 사랑이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믿어야 하고 자기의 백성을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하신 일에 관하여 선언한 모든 것을 다 믿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두 그 안에 있다. 바로 그것이 그의 최종적인 확신의 기반이다. 내 구원이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에 달려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바울은 ‘사망’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며, 우리들의 생명의 주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생명’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그는 지옥과 사망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시다. 타락한 ‘천사들’, 마귀와 그 모든 세력들인 ‘권세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겠는가? 주님이 이미 그들을 다루셨다.(골2:15)
‘현재 일’도 그가 이기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이 말하는 것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요일5:4). ‘장래 일’은 우리 주님이 역사의 주인이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달려 있다. 그는 모든 것을 통제한다. 현재에 처한 것보다 장래 일에 관하여 더 두렵지 않는 것이다.
‘높음’은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자리로 그것은 가장 높은 곳이다. 그는 그곳에 계시므로 우리는 어떠한 높은 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깊음’은 그리스도께서는 땅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 가셔서 그는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으셨다.(엡4:8-9) 높음이나! 깊음이나! 모든 것이 가리워진다. ‘다른 피조물’ 그는 다른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그 모든 것을 말하였다. (사40:26-31)
여러분도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가? 만일 여러분이 나는 그 논리를 잘 모른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여러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을 바라보지 말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붙들고 있다. 어떠한 것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
바울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설득을 당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느낌이나 자신의 연약한 이해의 차원에서 생각하지를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행하신 모든 것들을 논리적으로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외에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영예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끝내 영화롭게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저 자신에 대해서는 확신을 하고 있다. 오래 전에 저는 자신을 포기했다. 나는 더 이상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따지고 ‘뭐라고?’ ‘그러나’ 또는 ‘만일’ 이라고 말하던 것을 하지 않는다. 저도 바울과 같이 확신 한다. 여러분도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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