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3
1 장 교 회
우리는 각 교리가 얼마나 놀라울 만큼 필연적으로 다음 교리와 연결되는지 다시 한 번 인식하여야 한다. 진리는 하나이며, 하나님의 목적은 총체적이다.
1. 교회론을 고찰해야 하는 이유
1) 성경이 교회론을 강조한다.
교회론은 성경의 다루는 책에서 완전히 빠져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대부분의 신약 서신들은 교회를 대상으로 씌워진 것이며, 그 가르침은 교회에 대한 것이 많다. 성경 자체의 특성이 이 교리를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2) 교회사가 교회론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영국의 역사에서도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전환점인 종교개혁과, 17세기에 일어난 모든 사건- 청교도 혁명의 일부 측면도 포함- 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우리 선조들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교리를 지켜 내가 위해서라면 큰 역경을 견디고 모든 것을 잃을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어떠한 핍박이 와도, 시미지어 목숨을 걸고라도, 비밀 집회소를 만들어 함께 모일 것을 고집하였다. 옛 선조들의 이름과 위대함을 존중한다면 그것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대수롭지 않은 일의 진리와 대의를 지키기 위해 그토록 고난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 오늘날 교회의 상황 때문에 교회론이 필요하다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교회에 대한 신약의 교리를 알아야 한다.
이 운동의 대표자들은 20세기 교회의 특별한 기능은 교회의 본질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바른 복음 증거를 위해 교회론이 필요하다.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의 원인은 복음주의자들이 특히 지난 육, 칠십년간 교회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직전 세대들은 단체를 조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교회적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결과 큰 교단들의 복음 증거는 희석되었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아닌 단체에서만 모이게 되었다. 교회에 관한 교리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다. 복음의 메시지와 그것이 오늘날 세상에서 가진 중요성에 깊은 관심이 있다면 교회론을 살펴 보야야 한다.
2. 교회론
교회론은 대단히 논란이 많은 주제이다. 역사만 살펴보더라도, 교회론이야말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주제였다. 가능하면 열린 마음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려 애써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가 쉽게 빠져드는 편견들로부터 건져 주시길 기도하면서.
1) 교회와 하나님나라와의 관계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이 두 주제에 대해 상당히 혼란을 느낀다. 이는 데체로 로마 카톨릭교회가 이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로마가톨릭의 가르침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또한 교회가 모든 면에서 삶 전체를 지배하고 통치할 권리가 있다고 일관성 있게 주장한다. 중세시대 때 로마 교회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이며 최상의 존재라는 주장을 근거로 왕과 군주와 방백과 나라들을 통치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가장 훌륭한 정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1:20),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11:20)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의 통치로 간주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주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을 때 여기 있었다. 그 나라는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으로 인정되는 곳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그 나라는 모든 사람과 만물이 우리 주님의 주 되심을 인정해야만 하는 그 때 더욱 충만하게 임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나라가 왔으며,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고, 또한 하나님 나라가 장차 오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현이지만 그 둘이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더 넓고 더 크다. 참된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인정되고 인식되며 주님은 거기에 거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순간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분이지만 단지 부분일 뿐이다. 하나님은 교회 바깥,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도 통치하신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동일하지 않다.
2) 교회의 의미
“교회”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이며, 이것은 “불러 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 에클레시아는 ‘집회’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다. 행 7장에서 스데반은 모세가 “광야교회”(38절)에 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교회, 모임, 집회였다. 그들은 에클레시아, 즉 구약의 교회였다. 그것이 “교회”라는 말의 근본적 의미이다.
“교회”라는 단어는 ‘주인’을 의미하는 헬라어 퀴리오스에서 유래했으며 ‘카이저’나 ‘시저’도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 두 가지 의미를 결합시켜야 한다. 즉, 교회는 주님께 속했으며, 함께 모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역적 모임으로서의 교회
성경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용되었을 때는 일반적으로 지역적인 모임을 지칭한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거의 언제나 이런 지역적 의미로 사용된다. “저의 교회”(롬 16:5),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에 모였으며, 사도 바울은 그러한 지역 모임을 주저 없이 교회라 부른다. 그는 교회를 거대한 것으로 보는 에큐레니칼적 이상에 따라 생각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그의 편지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보낸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교회” 아닌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갈1;2)을 향해 기록했다.
바울은 교회를 여러 개의 지부로 나누어진 하나의 단일체로 보지 않고, 여러 교회들, 즉 수많은 단일체가 갈라디아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의미 있고 중요한 점이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 보면, 이것이 사도가 교회라는 주제를 다루는 일반적인 방법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교회들”이라는 말 대신 “교회”라는 말이 사용된 두세 번 정도 있는데, 그중 한 경우는 다소 흥미롭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행9;31). 이 구절은 “교회들”과는 구분되는 “유일한 교회”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기 보다는 여러 장소로 흩어져 평안 가운데 있는 하나의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고전 12:28에도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교회들 중에”가 아니라 “교회중에” 세우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교회
“교회”라는 용어는 또다른 식으로 사용된다. 에베소서의 저 위대한 구절들과 같은 몇몇 본문에서 바울은 분명 교회가 지상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족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엡1p:22-23). "이는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3:10).
보다 큰 의미로서의 교회
몇몇 경우에는 “유일한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더 광범위한 개념을 보여 주기도 한다.
3) 교회를 설명하기 위한 성경의 예화들
그리스도의 몸
몇몇 신약 서신서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나온다. 고전적인 예는 고전 12장이지만 롬 12장, 엡 4장 및 다른 곳들에서도 그런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성전 혹은 건물
바울은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에 비교한다.(고전3:10) 엡 2:20에서는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신부
엡 5장에서 그렇고 그 이미지는 계시록에 다시 등장한다.
제국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엡2:19). 로마 제국의 각 부분이 널리 흩어져 있으면서도 중앙의 단일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전투하는 교회 혹은 승리하는 교회
지상의 교회는 자신의 생명과 교리와 그 모든 것을 위해 싸우고 있다. 휘장을 지난 교회는 기뻐하며 승리를 누리고 있다. 이것을 장엄하게 표현한 것이 히 12:22-24이다.
4) 결론과 요약- 교회란 무엇인가
분명 교회는 영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 교회라는 단어가 단수로 사용된 모든 예는 교회가 보이지는 않지만 영적 실재로 존재함을 알려 준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는 가시적이어서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고, 고린도나 로마, 혹은 다른 특정한 장소에 존재한다고 묘사할 수도 있다. 그 두 가지를 염두에 두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지역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중요한 유추는 영혼의 유추이다. 사람의 영혼은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각 사람이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 사실이 몸을 통해, 행동과 삶을 통해 표현된다는 것을 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지역의 교회들과는 별도로 유일한 교회가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실체이며, 참으로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유일한 교회의 일원이 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다. 당신은 눈에 보이는 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교회의 일원이 될 수는 있다. 눈에 보이는 외적으로 나타난 교회의 일원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교회의 일원은 아닌 경우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성경이 그리스도의 몸인 우주적 교회와 그것의 눈에 보이는 지역적 나타남을 구분한다는 사실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임재와 주권이 인정되는 성도들의 지역별 모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에 더하여, 지역 교회에 있는 참으로 거듭나고 신령한 사람들은 동시에 보이지 않는 영적 교회, 즉 그리스도의 참된 몸의 일원이다.
5) 교회의 연합
교회의 연합은 영적 연합이며 생명의 연합이다
성경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연합은 영적인 연합이라는 사실에 즉각 동의해야 한다. 요 17장이 잘못 인용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사람들은 문맥을 무시하고 한 구절만 떼어 낸다. 21절을 인용해 ‘그들도 하나가 되어“라고 말하고는 그걸로 끝이다. 그들은 교회의 분열은 가장 큰 죄라고 주장한다. 분열이 유감스러운 일이며 분파주의가 분명 죄라는 사실에는 물론 동의한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과는 그가 어떤 형태의 그리스도인인지에 상관 없이 무조건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요 17장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이다.
요 17장은 이 연합의 특성이 어떠한지 아주 명백하게 밝혀 주고 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1-22). 그것은 모두 영적인 연합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8절), 그러므로 연합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말씀은 특정한 교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예수님은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저는 그런 사람들과는 하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연합의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 연합은 영적인 연합이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 고전 12장
몸의 유추가 옳은 것이 되려면, 본질적이고, 유기적이고, 영적인 연합이 있어야 한다. 각 지체들이 서로에게 속해 있지 않고 같은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그들에게 같은 피가 흐르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조화롭게 일할 수 없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8). 그러므로 첫째로 강조해야 할 것은 성령이다. 연합은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기관들의 합병이나 서류상의 합의가 아니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연합한 것도 아니다. 성경에는 그런 개념이 나오지 않는다. 이 연합은 신비하고, 영적인 연합이다. 지극히 중대한 생명의 공동체이다.
교회 연합은 교리적 연합이다
두 번 째 원리, 그것은 연합은 반드시 교리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합은 교리적이어야 한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 17:17-18). 그 “말씀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 성육신,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 동정녀 탄생, 주님의 기적들, 초자연적인 것들, 자신의 죽음의 목적-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는 것- 그리고 성령의 위격에 대해 자신이 하신 말씀 등을 말한다. 이 말씀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하고 연합할 수는 없다. 그들은 이 풍성한 교리들을 부인한다. 그들은 대리적 속죄나 성령의 위격을 믿지 않고, 기적은 불가능하며 전설일 뿐이라고 한다. “저희가 다 하나가 되어” 라는 구절만 뽑아낼 뿐이다. 그런 사람들과 연합하는 것은 요 17장을 부인하는 것이다.
연합이 교리에 근거해야 한다는 진리는 행 2:42에도 나와 있다
오순절 직후에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doctrine)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 성경은 축자적으로 영감된 책이다. 한 단어 한 단어가 중요하며, 한 구절 내에서 단어의 위치는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교제가 있기 전에 교리적 공통성이 있어야 한다. 교제는 같은 믿음, 같은 진리, 같은 이해에 기초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의 의미가 같지 않고서는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없다. 믿음의 공통성이 있어야 한다. 행 2:42에서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먼저 나온 후에 교제가 나온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교제가 먼저이다. 사람들은 “자, 모두 같이 모입시다. 모이고 나면 믿음의 문제에 대해 결정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교리의 하나 됨이 없이는 교제를 나눌 수 없다.
요한이서에는 더욱 강력한 진술이 나온다. “누구든지 이 교훈(doctrine)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10-11). 요한일서에서도 그는 “우리에게서 나간” 적그리스도들과 그 추종자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을 우리와 함께 있었지만 나갔다. 그들은 분명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요일2:19). 그것이 교리에 대한 문제임을 기억하라. 교리는 참된 교제를 위해 본질적이고 중대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교회 연합의 문제를 논의할 때, 언제나 연합의 영적 교리적 특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특별하게 믿는 것이 없는 사람들과 연합하는 것은 전혀 어려울 것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연합이 아니다. 연합이란 적극적인 것이다. 연합은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믿는지는 신경 쓰지 않고 모여드는 것이 아니다. 연합은 생명이며, 능력이며, 열정이다. 연합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해 결합하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교회의 연합은 그런 연합이다.
교회의 긴 역사를 되돌아보면, 하나님이 영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마음을 같이한 소수의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크게 사용하신 사건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붙잡아 사용하셔서 큰 일을 행하셨다. 하지만 서유럽 전체에 단 하나의 교회만 존재했을 때, 그 교회가 사람들을 어디로 인도했는가? 암흑 시대이다. 제가 보기에는 이 역사의 위대한 교훈이 현재 완전히 잊혀지고 무시되고 있는 듯하다. 저는 성경에서 발견한 진리에 대한 열심 때문에, 그리고 참된 연합이 아닌 연합에 관심을 가진 나머지 성경이 왜곡되고 곡해되는 것이 비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다.
6) 교회와 국가의 관계
로마 카톨릭의 개념은 교회가 국가이며 국가의 모든 일을 주관한다는 것이었다. 반대의 극단은 소위 “에라스투스주의적” 관점이다. 에라스투스는 교회가 국가의 한 부분이라는 창안한 사람이었다. 에라스투스주의는 교회가 국가의 한 조직이며 국가에 의해 통치되고 지배된다는 믿음이다. 영국국교회는 에라스투스주의를 신봉하며 대부분의 루터파 교회들도 같은 견해를 채택한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두 영역 주의’라고 묘사할 수 있는 제 삼의 견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소유하셨다. 하나님은 교회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우주의 주인이시다. 국가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바울은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한 바라”(롬13:1). 권세 잡은 자들과 모든 다스리는 자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명하신 것이다. 하지만 교회라고 하는 다른 영역이 존재한다. 이 두 영역은 나란히 존재한다. 전자가 후자를 주관하지 않는다. 그 둘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둘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이것이 신약 성경이 묘사하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신약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교회를 암시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초대 신자들은 정부와 독립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임재 안에서 모였다. 모임의 바깥에는 그들이 속한 큰 국가가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그 국가의 시민이었지만, 어떤 의미로는 국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영역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지난 수 세기 동안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개혁주의적 견해였다.
성경은 민족교회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와 정 반대이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골3:11). 교회는 뭔가 다르다. 그것은 거듭나고 영적 생명을 가진 사람들,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지체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지역적으로 함께 모이는 것- 그것을 교회라고 부를 수도 있고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다-이다. 사회적 인종적 구분이나 국적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으며, 교회에서는 그런 것들을 절대 언급하면 안 된다. 그런 자격 조건들을 덧붙이는 것은 분명 성경적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이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똑같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교회였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한 논증이 아니다. 그때는 그러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은”(마21:43) 시대이다. 베드로가 벧전 2장에서 입증하듯이 남은 것은 교회이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말씀을 교회에 적용시킨다. 교회는 이제 초국가적이다. 모든 민족 안에 교회의 백성이 있다. 교회는 이 땅의 다양한 나라에 살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제 2 장 교회의 표지와 정치
1. 교회의 세 가지 표지
1) 말씀 선포
교회의 일차적 임무이다. 교회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고 생겨났다.
가. 교회에서 성도들을 세우고 견고하게 하기 위해 선포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머리 되심과 주 되심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교제이며, 말씀은 이들이 믿음 안에서 강건해지도록 하기 위해 선포된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되었으며, 사도들과 선지자들도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선포했다. 사람들이 회심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기로 태어났으며. 교훈을 받아야 했다. 오류에 대해 경고를 받고 이단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했다. 그래서 교회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나. 복음 전도
주님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제자들도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가지고 오셨으며, 우리도 같은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을 받았다. 외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각하고,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명력 있는 믿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의 사역의 일부이다.
2) 성례 집행
교회는 말씀 전파와 관련하여 성례가 올바르고 참되게 시행되는 곳이다.
3) 권징
이 교리가 심각하게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교회가 왜 그 모양인지, 왜 교인들의 수는 줄어들고 교회가 사람들에게 능력도,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는지, 왜 교회가 세상적 여흥이나 놀이 같은 것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주장을 펼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지, 왜 교회가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지 설명해 달라고 한다면, 저로서는 권징을 시행하는데 실패한 것이 궁극적 원인이라고 말씀 드릴 수 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징계가 소홀히 여겨지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은 그렇게 된 것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 주제를 충분히 자세히 다루고 싶다.
권징이 시행되어야 하는 근거는 성경이다.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화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권징은 고전 5장 전체의 주제이다. 마지막은 이런 말로 끝난다.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을 것이다.
고후 2장, 특히 바울이 징계 받은 사람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5절에서 10절까지에 이 문제가 다시 언급된다. 규모 없는 삶을 사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침을 주는 살후 3장에서도 이 문제가 등장한다. 디도서 3:10에는 분명한 명령이 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요한이서 10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계시록에 실려 있는 각 교회들에게 보내는 여러 편지에도 권징의 시행에 대한 권고가 담겨 있다.
권징 시행에 반대하는 자들이 범하는 오류
이런 정당화하는 근거를 마태복음 13장의 가라지 비유에서 찾는다. 이것은 성경을 극도로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가라지의 비유는 분명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보다 크다. 우리 주님 스스로 이 비유를 해석해 주시면서 곡식과 가라지를 뿌린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좋은 씨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가라지의 비유는 지역 교회내의 권징 문제와 아무 상관도 없다.
가라지의 비유를 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로마카톨릭과 동일한 오류에 빠지는 것이며, 로마 교회를 따르는 대부분의 교회들 역시 같은 오류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권징은 두 가지 주요한 방침에 따라 시행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권징은 교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3:10). 요한은 참된 교리를 전달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집으로도 결코 영접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를 그들의 집에 절대 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잉 아니다. 그런 말이 절대로 아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일 뿐 아니라 교사라고 주장하면서도 거짓을 가르친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절대 집에 들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고전 5:11에서 바울은 이것을 명쾌하게 사실상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모든 권징의 문제에서 나는 바깥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너희를 지키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단지 형제인 어떤 사람이 이런 죄를 저지르면 그와는 사귀지 말라는 말이다.”
저는 독일로부터 치명적인 고등비평이 유입되기 시작하던 19세기에 우리 선조들이 마땅히 해야 했던 권징을 시행하는 데 실패했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잘못된 관용과 가라지 비유에 대한 오해로 인해 그들은 상황이 곧 나아지기를 소망하며 이 잘못된 가르침을 허용했다. 그들은 긍정적으로 증언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범한 그 끔찍한 잘못의 결과를 우리 세대가 거두고 있다.
신자의 삶도 권징의 대상이다.
신자가 모순 되고 죄악된 삶을 그리스도의 대의에 헤아릴 수 없는 해를 끼친다. 그가 아무리 정통적인 교리를 주장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기질과 욕구와 감정과 육욕을 통제하고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가 전파하는 믿음을 말과 행동으로 부인하는 자요, 외인들에게 장애물과 거치는 것이 되는 사람이다.
성경은 불순종하는 형제가 돌이켜 징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는 실제로 교회에서 쫓겨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자를 사탄에 내주어”야 할 수도 있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고전5:5)하기 위해서이다.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사탄에게 내어주면 사탄은 그의 육체에 고통을 줄 것이다. 곤고하고 비참한 상태가 됨으로써 제 정신이 들어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부흥과 각성이 일어난 시기의 교회사를 읽어보라. 시대와 관계 없이 그런 시기에는 언제나 권징이 두드러지게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웨슬리가 도착했을 때 육백여명의 사람이 보여 있었다. 그가 교인들을 한 명씩 점검하기 시작했으며, 며칠 후 그가 점검으 F다 마치자 교인 수는 삼백 명으로 줄어 있었다. 존 웨슬리가 오늘날 다시 돌아온다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한 생각이 든다!
부흥과 각성의 기간에는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이 언제나 정결함에 관심을 가졌다.그들은 신약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가르침에 따라 살기만을 힘썼다. 신약은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 도구, 통로는 반드시 깨끗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모인’ 교회가 아니라 ‘정결한’ 교회를 가르치는 것이다. 여러 면에서 세상과 섞인 교회가 어떻게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일은 거의 생각할 수도 없다! 교회의 세 번째 표지는 권징이다.
2. 교회의 정치
신약 성경이 교회 정치에 대해 그리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릴 수 있었던 때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스스로 언제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는 뭔가를 덧붙이기 시작했다.
때로는 성경에 반하는 전통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1) 교회 정치를 인정하지 않는 견해
모여든 모든 구성원이 성령에 순종하기 때문에 정치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교회지상주의 또는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 되었을 때, 교회는 스스로를 ‘기독교 국가’라고 부르기로 결정했으며, 제도와 정치를 포함한 많은 개념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차용했다. 성경에서는 현대 로마카톨릭 교회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 드린다. 그들은 전통은 성경과 대등한 것이다.
조직은 언제나 영혼을 죽이며, 기관은 영혼을 소멸시킨다고 한다. 교회가 너무 복잡해지고, 편협해지고, 경직된 나머지 성령이 역사하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역사적으로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거의 언제나 새로운 교단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너무 살아 있고 기존 질서를 뒤집는 것이었기에, 옛 교회 조직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배제 되었다.
어떠한 지도력도 믿지 않는 것과, 실제로 교회에 지도자가 없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지도자는 불가피하게 있어야 하며, 그것을 공식화해 놓지 않으면 반드시 누군가가 자칭 지도자로 나설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와 교회의 제도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한 것이 되도록 하자.
2) 에라스투스주의적 견해
교회는 국가의 한 부분이며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교회를 다스린다는 견해이다.
국가는 교회의 성직자들, 특히 고위 성직자들을 임명하며, 그들이 또다른 사람들을 임명한다. 루터파 교회와 영국 국교회의 견해이다.
3) 감독 정치
감독 제도로서 감독들에 의한 정치를 그 신념으로 한다. 이들은 교회를 돌볼 책임을 그리스도가 직접적인 영적 후계자인 성직자단 혹은 감독단에게 위임하셨다고 가르친다.
교회 정치는 오로지 감독들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이트풋 감독은 신약 성경에서 감독과 장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만족스럽게 증명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1:1). 큰 교구 전체에 하나의 감독이 있어서 그 한 사람의 감독이 여러 교회를 책임지는 것과는 달리, 신약에서는 한 교회에 여러 명의 감독이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의 감독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 지위와 기능을 부여받은 나이 든 남자들, 즉 장로들이었다.
감독제도는 신약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학자들’과 전적으로 의견이 일치한다.
이것은 1세기로부터 수 세기의 시간이 흐른 후 키프리아누스라는 사람에 의해 생겨난 개념이다.
4) 로마가톨릭의 견해
감독제도의 기원을 사도 베드로에게서 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감독에 의한 교회의 다스림을 믿는다면 논리적 결론은 다른 모든 감독단을 지배하는 하나의 감독직이 있으며 그 감독직을 맡은 사람이 최종 권위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는 권위를 가지고 말하며, 무오하고, 그의 모든 말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로마카톨릭의 주장이다. 교황은 감독의 우우머리일 뿐 아니라 사도 베드로의 직접적인 후계자이며, 따라서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역사적으로 정당한 논거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한다.
5) 장로교의 견해
장로회주의자들은 먼저 지역 교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실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질서와 형식을 위해, 그리고 혼란을 피하기 위해, 지역 교회들이 모두 인정하고 모두 따를 만한 하나의 조직체를 만드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노회(presbytery)를 결성했다. 노회의 결정에 따를 것을 엄숙히 동의한다. 더 나아가 노회들을 묶어 총회를 구성한다. 최고법원인 충회의 결정에 노회는 따른다. 이 제도는 장로교회, 그리고 존 녹스와 종교개혁 시대 이후일반적인 스코틀랜드 교회의 정치 방법이 되었다.
6) 회중파(혹은 독립파)의 견해
모든 지역교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실체이며,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주님의 임재와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심을 믿는,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기다릴 때 주님이 성령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교리와 권징 등을 결정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주시리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다. 지역교회는 자율적인 존재로서 스스로를 다스리며, 감독단이 노회나 총회나 그 밖의 어떤 상위 기관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원래 17세기에 소위 회중주의자들과 침례교도들은 그랬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교회가 얼마나 있는가? 그들도 모두 교회 유지 기금과 그 기금을 통해 지역 교회를 통제하는 일에 있어서 장로회적 개념을 받아들였다.
7) 성경적인 이상은 회중파의 지역교회 개념이다.
이 문제를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독립적인 지역 교회의 개념이 가장 성경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역 교회들이 모여서 교제를 나누는 것은 좋다. 회의를 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제가 신약 시대에 주어진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한 바로는 어떠한 회의도 구속력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도 지역 교회들을 향해 권공의 말을 전했을 뿐 법률적인 권한은 없었다. 단순히 “성령과 우리는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라”(28절)라고 말했을 뿐이다.
저는 독립적인 지역 교회의 견해를 지지한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신약에 나타난 형태에 가장 가까운 듯하다. 각각의 지역교회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이지만 같은 마음을 가지고 같은 영을 소유한 사람들과 언제라도 모여서 교제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다른 견해를 받아 들이면, 교리 면에서나 실천 면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감독기관에 속해야 할 것이고, 단지 그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틀렸다고, 그리고 위험하다고 믿는 그 가르침을 재정적으로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은 역사상 언제나 일어났으며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가 이런 입장에 처해 있다. 분명 믿음을 부정하는 목회자나 사역들을 위해 재정지원을 하는 자유교회에 복음주의자가 소속되어 있기도 하다.
반복해 말하지만, 신약의 가르침과 지난 수 세기에 걸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상적인 것은 지역 교회라고 생각한다. 의견이 일치한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의견의 일치를 본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가지되 아무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개개의 교회에 무엇을 강요하거나 양심을 구속할 권리는 없는 상태이다. 같은 마음을 가진 신자들이 자기 자신과 자신들의 영적 삶을 성장시키기 위해 모이는 이 교제는 서로를 돕지만 자유롭고 자발적인 방법으로 돕는다. 어떤 교회도 자신의 견해나 심지어 양심에 반하는 일은 하라고 강요 받지 않는다.
이 문제들은 제게 대단히 중요하다. “교회정치는 나와 상관 없어요. 나는 영적인 사람이니까요.”라고 말한다면, 대단히 비성경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어느 모로나 우리 주님 자신의 교리, 주님이 우리로 보관하고 지키게 하신 그 교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여러분의 일이자 임무이다.
제 3 장 성례: 표징과 인
우리의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서 세워지고, 강건해지고, 격려받고, 견고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성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다룰 때는 이런 식으로 접근함이 필수적이다.
1. 은혜의 방편
1) 은혜의 방편에 대한 다양한 견해
로마가톨릭 교회- 은혜는 단 하나의 은혜의 방편만을 인정하는데 그것이 성례이다. 모든 은혜는 성례, 즉 세례와 성만찬과 다섯가지 다른 성례들을 통해 신자에게 기계적으로 임한다는 것이다.
퀘이커교도- 오직 신자 안에 계시는 성령의 내적 작용만이 유일한 은혜의 방편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내적인 빛’의 역사를 경험하면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믿는다.
일부 종교개혁자들- 둘 다에 대한 반작용으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 외에는 다른 어떤 은혜의 방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개신교의 전통적 견해- 성경과 성례가 은혜의 방편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성령이 성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심으로써 은혜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성례는 말씀-성령의 조명과 인도 아래 행해지는 설교, 가르침, 말씀 읽기- 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2. 성례
1) 어원
성례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 세기 후 교회와 그의 가르침 속에 도입된 것이다. ‘성례’(sacrament)라는 단어는 라틴어 ‘sacramentum'에서 유래했다. 법정에서의 공탁금을 의미했다.
2) 성례의 정의- 내적 은혜의 가시적 표징
영국 국교회 39개 신조의 제25조에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의 표지 혹은 증거일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신 뜻의 확실한 증거이자 효과적인 표징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일깨우실 뿐 아니라 또한 강화하고 확증하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례는 은혜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중보가 주는 유익을 표시하고 인 치고 보여 주기 위해, 그들의 믿음과 모든 다른 은혜를 증가시키기 위해, 그들이 순종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서로에 대한 사랑과 교제를 증거하고 간직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외인들과 구분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 안에서 제정하신 거룩한 의식이다.” 이어서 성례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친히 제정하셔서 사용되는 외적이고 감지할 수 있는 표징”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의미하는 내적이고 영적인 은혜”이다.
이 정의들은 성례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자기 백성에게 이러한 일들을 행하라고 명하신 분은 주님 자신이다. 내적 은혜로 인도하는 외적이고 가시적인 무언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3) 외적 표징과 내적 은혜의 관계는 무엇인가?
성찬식 때 쓰이는 떡과 포도주, 그리고 세례 시의 물과 받은 은혜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것은 수 세기 동안 엄청난 논란과 논쟁을 불러 일으킨 질문이다.
로마 가톨릭의 견해- 은혜가 성례의 구성요소 자체에 들어 있다는 것. 즉 은혜가 떡과 포도주, 그리고 물 안에 있다는 것. 기계적인 일이어서 마치 주입되는 것과 같다. 전문용어로는 은혜가 事效적으로(ex opere operato) 작용한다고 말한다. 은혜가 스스로의 힘과 존재에 의해 작용한다는 말이다. (화체설)
쯔빙글리의 견해- 단지 외적인 표징 혹은 상징에 불과하다. 가톨릭에 격렬하게 반발.
개혁주의적 견해- 은혜의 표징이자 인이다.
롬 4:11,(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 친 것이니”
인 이란 약속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결혼반지도 그것이 인이라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성례는 은혜를 전달하는 역할도 한다.
결론- 성례는 은혜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이 주는 유익을 나타내고, 인 치고,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4) 성례는 우리가 교회의 일원임을 보여 준다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은 그들이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상징 혹은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5) 성례는 반드시 필요한가
로마 카톨릭의 견해- 성례가 없이는 은혜를 받을 수 없다.
퀘이커 교도의 견해- 성례는 전혀 필요치 않다.(구세군)
개혁주의적 견해- 성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명령하신 것이다.
우리는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워진 존재이다.
성례는 결코 말씀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성찬식만을 위한 혹은 세례식만을 위한 예배는 결코 있을 수 없다. 가톨릭의 위험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모든 요소가 갖추어진 예배가 있어야 하고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성례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성례는 믿음에 인을 치고 믿음을 확증해준다.
6) 성례의 종류
가톹릭의 견해- 칠성례, (세례, 견진, 성체, 고해, 병자, 성품, 혼인)
개신교의 견해- 세례와 성찬
7) 성례는 하나님이 우리는 위해 정하신 은혜의 방편이다
교회 역사상 설교 강단에 서는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 진리와 복음적 믿음은 빼놓고 일종의 휴머니즘이나 도덕주의, 심지어 교회를 전파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가? 그럴 때에도 다른 방법, 즉 시각적 방법으로 복음이 조금이라도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여전히 섶포된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러므로 교회에 나왔으나 선포된 말씀으로 배를 채우지 못한 ‘배고픈 양’들은 떡과 포도주에서 혹은 세례의 물에서 영적인 양분을 찾을 수 있었고, 스스로 성경을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이 설교뿐 아니라 이런 방법으로도 말씀하실 수 있음을 상기했다. 참으로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지각을 뛰어 넘으며 언제나 완벽하다.
제 4 장 세 례
1. 세례에 대한 논쟁
1) 세례에 대해 독단적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
2) 세례는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시행하는 것이다. 성례는 은혜를 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은혜를 가리켜 보이고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 안에 그 은혜를 가져다 준다.
3) 세례에 대한 주요 견해들
유아세례론자, 침례교도, 구세군 및 퀘이커교도
유아세례는 주후 175년까지 명확한 언급이 없었다.
2세기 말 터툴리안에게서 중요한 증거를 발견하지만 그는 후에 세례 반대론자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수 세기 동안 종교개혁 때까지 오직 유아세례만 존재했었다.
주요 종교개혁자들도 그 관행을 시행했다.
16세기 말에 재침례파가 나타나 신앙고백을 하기에 충분한 나이가 되었을 때 그 고백에 근거해 다시 세례 줘야 한다고 했다.
2. 세례의 의미
1) 세례는 연합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몸으로 세례받으며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 받는다.
특정한 상황에 동일화되고 특정한 분위기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우리는 복되신 삼위일체,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로 세례를 받는다고 했다.
2) 세례는 깨끗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죄책으로부터 깨끗하게 된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행2:37-38).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행22:16),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3:21)
세례는 우리가 죄책과 오염에서 해방된다는 보증이다. 고전 6:11,“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에서 ‘씻음’은 세례를 의미한다. 디도서 3:5의 “중생의 씻음”도 세례이다.
세례의 의미는 우리를 연합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죄책과 죄의 오렵으로부터 씻음 받고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
3. 세례의 목적
1) 세례의 목적은 우리를 원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가르침은 가톨릭의 것이다. 루터파와 영국 국교회의 일부 분파에서도 세례의 목적은 우리를 원죄로부터 깨끗하게 하고 중생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세례적 중생을 말하는 것이다.
2) 세례는 죄사함과 칭의에 대한 표징이자 인이다
그들은 세례 받았기 때문에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세례 받는 것이다. 세례는 그들이 죄사함 받고 의롭게 되는 수단이 아니라, 그에 대한 보증이다.
3) 세례는 중생,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의 내주하심에 대한 표징이자 인이다
4) 세례는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표징이다.
4. 세례의 대상
1) 유아 세례를 지지하는 논증들과 그 반론들
2)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논증들과 그 반론들
3) 결론- 세례가 인이라면 성인 신자에게 행해야 한다
5. 세례의 양식
1) 세례 양식에 대한 논쟁의 역사
물을 뿌리는 것과, 물에 몸을 완전히 담그는 것.
2) 세례 양식에 대한 논증들
3) 중요한 것은 세례의 의미이지 양식이 아니다
확실한 것은 완전히 물에 잠그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넘어서는 일일 뿐 아니라, 이단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단에 가까워지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양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결코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며 구약 시대에 일관되게 행해지던 관행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6. 세례 문제에 대한 강의자의 결론
세례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성인 신자들이다. 유아 세례를 찬성하는 정당한 논겨는 찾지 못했다. 양식에 대해서는 물을 뿌리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침례가 될 수도 있고, 둘이 결합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방법이 더 성경적이며 역사적으로 많은 증거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돌아보사, 우리의 믿음을 인준해주시고, 우리에게 확신과 힘을 주시며, 우리가 불신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마귀의 공격을 받을 때 우리를 굳세게 하신다. 세례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며, 방식은 어떻든 그것이 의미하는 것, 그것이 인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도록 하자.
제 5 장 성 찬
1. 성찬에 대한 견해들
1) 가톨릭의 견해
화체설- 사제의 행위로 인해 떡이 실제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물리적인 몸으로 변화된다고 믿는 것. 로마가톨릭은 화체설을 중심으로 방대한 철학을 엮어 냈다.
개신교가 생명력을 잃고 무기력하게 될 때는 언제나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성례주의적 가르침, 즉 자신은 아무 할 일이 없고 단지 떡을 먹으면 그 떡이 거의 자동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가르침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견해는 떡의 흰색은 떡의 실체가 아니라 우유성(accidents)에 속한 것이며 감촉이나 맛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우유성에는 영향을 주지 않은 채로 실체가 바뀌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떡의 실체는 더 이상 같지 않으며 기적에 의해 주님의 실제 몸이 된다고 믿는다. 떡이 실제로 주님의 몸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떡을 특별한 용기에 담아 경배하고, 그것을 향해 기도한다. 그들은 떡을 “성체”라고 부르면서 성체를 들고 행진한다.
화체설에 대한 반론- 화체설은 성경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들도 인정한다. 그들은 주님이 “이것은 나의 몸이라”(눅 22:19)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대단히 강조한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어야 한다고 한다. 이에 대한 명백한 대답은 주님이 그 자리에 육체 가운데 서 계셨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 있는 떡이 실제 주님의 몸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시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또 하나의 설득력 있는 대답은 주님이 계속해서 하신 말씀이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눅 22:20). 떡의 경우에 “--이라”는 말을 강조했다면 여기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그것을 담고 있는 잔이 되고 만다. 주님이 “ 잔 안에 있는 포도주”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 잔”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한 단어를 근거로 하여 화체설을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실로 비합리적이다. 사실 이 교리는 단지 사제의 지위와 신분을 향상시키기 위해 교회에 들어 왔다. 이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제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제는 더욱 중요한 존재가 된다.
2) 루터파의 견해
공재설- 그들은 가톨릭의 주장은 잘못되었으며, 떡의 실체는 변화가 없다고 말한다. 떡은 여전히 떡이지만 주님의 몸이 그 떡에 결합된다. 그래서 그들은 떡과 주님의 몸이 동시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 주님의 몸이 떡과 함께, 그리고 떡 아래에 있는 것이다.
3) 종교개혁자들의 견해
츠빙글리는 성찬은 단순히 표징과 기념일 뿐이라는 입장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개혁주의 관점에서의 성례는 표징일 뿐 아니라 동시에 인이다. 성찬도 마찬가지다.
2. 성찬의 의미
1)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보여 준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떡을 떼는 것과 포도주를 붓고 마시는 것은 우리 주님의 찢어진 몸, 흘린 피를 나타낸다. 강단이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성찬은 여전히 주님의 죽으심을 선언하고, 선포하고, 전파했으며 사람이 전파하는 것과 성찬대의 떡과 포도주가 전파하는 것 사이에는 모순까지는 아니더라도 종종 큰 불일치가 있어 왔다. 주님의 놀라운 예비하심이다.
2)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및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기시킴으로써 우리가 그의 죽으심에 참여했다는 것을 상기 시켜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렇게 때문에 그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
3) 성찬은 우리가 새 언약에 참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5), 성찬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신자들과 새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다. 그리스도는 이 새 협정, 하나님이 사람들과 맺으신 이 놀라운 새 언약에서 인류의 머리이며 대표이시다.
4)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받아 신자의 삶을 산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요한복음 6장이 성찬식에 대한 말씀은 아니지만 적용할 수 있는 진리가 56,57절에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주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너희는 나를 먹어야 한다. 너희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 즉 너희는 나를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고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며 너희는 나를 인하여 살아야 한다.” 그것은 영적인 참여였다. 주님은 자신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실체를 문자적으로 먹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개념이다. “내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63절).
5) 성찬은 신자들 사이의 연합도 보여 준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10:16-17) 우리는 성찬식을 하면서 떡을 뗄 때, 부분과 전체를 동시에 상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찬식에서 성찬이라는 용어는 우리와 주님의 교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이의 교제도 나타낸다.
6) 성찬은 위의 모든 사실을 우리에게 인쳐 준다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이 새 언약이 주는 유익들에 참여하는 자라고 말씀해 준다. 성찬은 이 모든 것을 인쳐 준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을 인 쳐 준다.
성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포하시는 자리다. 성찬식 때 우리는 언제나 감사해야 하며 이렇게 말해야 한다. “지금 하나님은 나에게 내가 새 언약 안에 있으며,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양자 삼으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의 모든 복과 유익들이 나의 것이고 나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 순간 나는 이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3. 누가 성찬에 참여할 것인가
1) 오직 신자들만 성찬에 참여한다
성찬은 오직 신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연약한 신자들, 심지어 죄 가운데 있는 신자들도 참여한다. 완벽한 상태가 되어야만 성찬식에 나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자신을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을 살피려 하지 않으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고 적지 아니하니”(고전11:30). 바울은 우리가 스스로를 판단하면 판단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고 벌하실 때, 이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다.(32절) 이것은 우리가 설교와 권면을 듣지 않으려 하면 우리는 약해질 수 있고, 병에 걸릴 수 있으며, 죽음을 상기하고 두려워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11:30)라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문구가 나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자신을 판단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 구절은 그들이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죽었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그들이 멸망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죽음이라는 수단까지 사용해 징계하셨다는 것이다.
4. 성찬은 말씀의 은혜를 확증하는 것
성찬이 말씀 선포보다 더 많은 일을 하지는 않는다. 성찬에서 새롭거나 추가적인 은혜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성찬이 하는 일은 말씀의 효력에 대해 인을 치고 우리가 은혜를 받았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특별한 은혜는 없다. 오직 성찬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교회 안에 있는 최고의 은혜의 방편은 말씀, 선포되고 가르쳐진 말씀이다. 성찬은 단지 은혜를 전달하는 또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성찬이 놀랍고 특별한 것이긴 하지만 추가적이고 특별한 은혜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하는 일은 은혜를 강화시키고 더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례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성찬을 통해 믿음 안에서 강건해지고 세워지고 견고해짐을 느끼며, 위대한 구원을 기뻐하는 가운데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제 6 장 죽음과 불명성
1. 종말론은 무엇이며 왜 연구해야 하는가
1) 종말론이 다루는 내용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운명, 개인적 미래를 알고 싶어하고 동시에 세상 전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이 주제들은 모두 대단히 실제적인 것들이며, 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익숙지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2) 오늘날 종말론에 대해 새로운 관심이 일어나고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가 초에는 종말론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이생에서의 삶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 즉 이 세상의 사회적 상황을 개선시키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그 중 중요한 것 하나는 물론 과학 지식의 진보와 그 지식을 기반으로 한 잘못된 추론이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삶은 없으며, 이생에서의 삶과 세상만 있을 뿐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낙관론은 1차와 2차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불확실성과 불안정을 느끼게 되었다. 인생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끝날 것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내세에는 희망이 있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이 불안정의 시대에 그들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도록 돕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도록 돕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대해 성경이 어떻게 가르치는지 알아야 한다.
2. 죽음- 개인적 관점의 종말론
1)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
죽음은 존재의 단절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성경은 절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일 뿐 절대로 존재의 단절이 아니다. 내가 죽을 때 내 영혼은 육체를 떠날 것이며 게속 존재한다.
아주 중요한 두 본문이 이 문제 전체를 매듭지어 준다.
1 눅 12:4-5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마 10:27,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
2 눅 16장에 나오는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은 같은 내용을 가르쳐 준다.
그들은 둘 다 육체를 남겨 두고 떠났지만 그들의 영혼은 다른 영역에 존재한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다. 그것이 죽음에 대한 성경의 근본적 정의이다.
2) 우리는 왜 죽는가
인기 있는 철학적 견해는 죽음은 삶에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서 삺의 과정의 일부라는 것이다. 생명이 만들어질 때 그 안에 죽음의 배아, 죽음의 씨앗도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성경에 따르면 죽음은 삶의 일부로서 삶 안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형벌이다. 죽음은 죄로 인해 들어왔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죽음은 죄로 인해 왔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사람이 죄를 짓기 전에는 죽음이 없었고, 그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죽음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성경의 원리이며, 절대 다수의 사람의 가르침을 지배하는 인기 있는 현대 철학과 완전히 배치된다.
3) 왜 그리스도인도 죽어야 하는가
내가 예수를 믿었다면 내 죄는 사해졌고, 나는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목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했는데 왜 그리스도인이 죽어야 하는 걸까? 많은 사람은 같은 논리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논증이 사이비종교들 뿐 아니라 오늘날 인기 있는 신유 운동의 기초를 이룬다. 그들은 마 8:17(사 53:4의 인용)를 인용하여 그리스도가 우리 질병을 담당하셨다고 한다. 속죄가 그런 식으로 죽음을 해결하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육체적 죽음에 대해 말하자면, 그리스도인 신자도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죽어야 한다. 우리는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 이는 몸이 죽음으로부터, 죄로부터,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다. 그것들은 모두 같은 범주에 들어간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도 질병과 죽음과 죄가 남아 있도록 기꺼이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셨더라면 우리를 즉시 완전하게 만드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망과 모든 질병을 즉시 없애 버리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이에 대해 성경은 대단히 명확하게 가르친다. 자세한 설명 없이 속죄가 죄의 모든 결과를 해결했다고 말하는 것은 질병 및 죽음과 관련하여 속죄를 오해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경우는 즉시 그렇게 되었다. 궁극적으로는 모두에게 그렇게 될 것이다.
질병과 죽음은 성화 과정의 일부다
그리스도인들이 성화 과정의 일부로서 여전히 고난과 질병과 죽음을 겪도록 남겨졌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 히12:3-13- 의 일부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시편 기자가 119편에서 말한 것처럼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71,67절)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질병은 하나님의 징계 과정의 일부이다. 모든 병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 또한 죽음도 질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 중 하나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종종 그리스도인들에게 축복이 되어 왔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에 도취되어 하나님 및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고 타락하기 시작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그들이 아프거나 누군가가 죽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죽음을 상기함으로써 그들은 다시 회복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타락을 치유해 주셨다.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죽음에 종속되어 있지만, 죽음에 대한 견해는 불신자들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달라야 한다. 우리는 죽음에 당당히 맞서,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56,57).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과 그가 율법을 만족시키셨다는 것 때문에 사망의 쏘는 것이 제거되었음을 안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죽음이 유익이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안다.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은 일이나”(빌1:21-23)라고 말한다. 한편 계 14:13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4) 불멸성
성경은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명백하게 진술하지 않는다. 그러나 편견 없이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성경이 인간의 영혼을 불멸의 존재로 간주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영혼의 불멸을 반대하는 논증
딤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를 근거로 오직 하나님만이 불멸하신다고 한다.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오직 하나님께만 해당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멸이라는 선물을 사람들에게 주기로 결정하신 일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무한하신 지혜로 불멸성이라는 선물을 인간의 영혼에 주기로 하셨다. 하나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기로 하셨다.
구약에서는 인간의 영혼이 불멸하다는 암시와 가르침을 찾을 수 없다는 논증
전도서 저자는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9:4)라고 했다. 마치 죽음은 마지막이고 우리도 끝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논증에 대한 대답은 성경에는 일종의 점진적 계시가 나타나 있으며, 구약보다는 신약에 더 분명한 개념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 보면 교리가 발전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죽은 자들이 가는 스올이라는 장소가 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구약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이 계속해서 살아간다고 가르친다.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누구나 스올-헬라어로는 하데스-로 내려간다. 성경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부활에 의해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다”(딤후1:10)라고 말한다.
구약의 몇몇 구절은 구체적으로 영혼의 불멸을 가르친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을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0-11)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17:15).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신다”(시73:24).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구약 성경이 죽은 자의 영혼과 접촉하지 말라고 경고한다는 사실이다. 이 금지령은 소위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언급했다. 구약 성경에는 죽은 자의 영혼과 접촉하는 것과 강신술을 금지하는 많은 가르침이 있다. 이러한 금지 자체가 영혼의 불멸성을 지지하는 강력한 논증이다. 사람들의 영혼이 육체의 죽음 이후에 존속하지 않는다면 그런 금지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약 성경의 가르침은 이미 언급했다. 변화산상에서 일어난 일에도 증거가 나타나 있다. 모세와 엘리야가 존재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마22:32)고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하나님은 지금 그들의 하나님이시라고 논증하신 것이다. 눅 16장의 부자와 나사로도 죽었지만 의식이 있고, 보고 있고, 근심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는 대단히 명확하고도 구체적인 증거이다.
제 7 장 조건적 불멸설과 제2의 기회
1. 중간 상태의 교리
이생에서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우리는 어떠 상태로 있는 것일까? 그것을 중간상태의 교리라고 한다. 연옥에 대한 카톨릭의 가르침은 논하지 않겠다. 성경에는 그에 대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로마가톨릭이 추가한 교리들 중 하나이다.
2. 중간 상태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
1) 모호한 존재 상태로서의 중간 상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헌에는 영혼이 어떤 모호하고 불명확한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는 믿음이 나타나 있다. 성경적 가르침과는 전혀 관계 없는 개념이다.
2) 공통 장소로서의 스올
두 개의 구획이 존재한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품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받는 장소이다. 스올이라는 단어는 여러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단순히 ‘무덤’일 때도 있고,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문맥상 형벌의 장소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3) 영혼 수면설
죽을 때 수면상태로 들어가 무의식이 되며, 부활 때까지 이 상태로 있을 것이라고 한다.
성경적 근거로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고전15:51),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시115:17)를 든다. 이것은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의식을 가진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하나의 구절만 떼어 내서 교리를 만들면 절대로 안 된다. 죽음 이후에 의식을 지닌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더 중요한 확증은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이다.“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계시록 6장에도 핍박을 당해 죽은 자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서 종말이 임해 그들을 잔인하게 억압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신원하여 주시기를 간청하고 기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혼은 잠들어 있지 않다. 신자와 불신자 둘 다 의식이 있다. 신자는 말할 수 없는 복락과 기쁨을 누리고, 불신자는 고통의 상태에 있을 것이다.
4) 조건적 불멸설(멸절설)
불신자의 영혼은 완전히 멸망하여 존재가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사람들은 원래 불멸의 존재가 아니며 죽어야 하지만, 부분적으로 불멸성의 선물로 해석되는 영생의 선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은 그 존재가 사라질 것이다. 일정 기간 살아서 고난과 형벌을 받은 후 마침내 멸망하여 영원토록, 그리고 완전히 존재가 사라진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가르침은 상식과 성경 모두에 반하는 옳지 않은 가르침이다. 창세기 첫 구절부터 시작해서 성경을 죽 살펴보면, 세상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즉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으며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과 멸망을 겪게 된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는 인상은 절대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그 본능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소멸과 멸절을 믿는다면 많은 사람은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가르치듯이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며, 영원무궁토록 계속될 고난과 형벌이 있다는 믿음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종 노릇한다.
마 25장은 말한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46절). 성경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신자와 불신자의 운명을 대조하며, 그 때마다 정확히 똑같은 단어가 사용된다. 형벌도 영원하며 생명도 영원하다. 그러므로 영원한 멸망이 없다면 영원한 생명도 없으며, 신자들에게 약속된 모든 것은 잠시 동안만 지속되다가 끝나 버릴 것이다.
주님 자신이 영원한 형벌을 묘사하셨다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다. “꺼지지 않는 불”“구더기도 죽지 않고”(막9:43-48). 벌을 받는 상태로 영원히 존재함을 시사한다.
조건적 불멸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잘못된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와 같은 일을 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상상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는 유한할 뿐 아니라 죄된 존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은 충분히 넓지도, 똑바르지도, 깨끗하지도, 순결하지도 않다.
3. 제 2의 기회
1) 제2의 기회를 주장하는 근거
불신앙 가운데 죽은 자들에게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지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주된 논증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그들이 가진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고 마귀까지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데까지 발전한다.
주장의 근거는 벧전 3:18-20과 벧전 4:6이다.
(벧전 3:18-20)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2) 제2의 기회에 대한 반론
성경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이 세상에서 결정된다고 말한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부자에게 일말의 희망도 제시되지 않는다.
주님 자신의 완벽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개의 구절만 가지고 교리와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벧전 3:18-20의 올바른 해석
이 본문에는 우리 주님이 죽으심과 부활 사이의 기간에 어떤 일을 하셨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육체 가운데 있던 우리 주님과 영적 상태에 있던 우리 주님 간의 차이이다. 이 땅에 계실 때 우리 주님은 육체 가운데 계셨다. 세상에 오시기 전과 세상을 떠나가신 후에는 영적인 상태로 계신다. 분명 이것이 본문의 가르침이다. 주님은 육체를 따라 죽으셨지만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며, 영으로 거하시는 것은 살리심을 받은 후라는 말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도 베드로가 고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힘과 격려를 주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7절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하고, 17절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한다.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겠습니까?
베드로는 사실상 다음과 같은 위로와 격려를 주고 있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보라. 사람들은 육체를 따라 예수를 죽였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너희의 육체를 죽일 수 있을 뿐 영혼은 손대지 못한다.” 그것이 18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첫 번째 진술이다.
이어서 베드로는 우리 주님은 육체 가운데 행하셨던 일을 영으로 계신 지금도 여전히 행하고 계시다고 주장한다. 주님은 육체 가운데 계셨을 때 사람들을 도와 주셨으며, 격려하고 힘을 주셨다. 베드로는 “주님은 여전히 그 일을 하고 계신다. 그렇다. 주님은 여전히 그 일을 하시고 계실 뿐 아니라, 이전에도 그 일을 하셨다. 심판이 인류에게 임하고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던 또 한 번의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홍수 때였다. 홍수는 온 세상이 심판을 받고 최종적 분리가 일어났던 유일한 사건이었다.”
왜 사도 베드로가 노아 시대와 노아 방주를 준비하는 일에 대해 언급하는지 이제 아시겠는가? 그것은 고난이라는 문맥을 떠나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베드로는 말한다. “옛 일을 돌아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마치 육체로 거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전파하고 계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때에도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홍수에 대해 경고하시기 위해 노아를 사용하여 방주를 만들게 하심으로써 120년에 걸쳐 계속해서 경고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부했다. 믿는 사람들, 즉 노아와 그의 가족 단 여덟 사람은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믿고 방주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은 구원 받았으며, 대홍수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베드로는 “지금도 그와 똑같다.”고 말한다. “그 방주는 세례를 나타낸다.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들은 육체 가운데 계시던 그리스도를 죽였던 것처럼 너희도 죽일 수 있을 것이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너희 영혼은 안전하다.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으며 너희는 그 분과 함께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으로 계속 살아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그들이 너희 육체는 죽일지 모르지만, 방주(세례가 의미하는 것) 안에 있으면 너희 영혼은 완전히 안전하여, 사람들은 너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벧전3:13)
이것이 본문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전체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극복하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홍수 전에 주님의 말에 귀 기울이고 홍수를 극복했던 노아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불같은 시련이 우리에게 닥칠지라도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안전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비록 육체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영으로 살아계시며 지금도 다스리시는 만유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벧전 4:6의 올바른 해석
비슷한 논증이 설득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이 구절은 표면적으로는 죽음 이후에 복음 전파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들은 그 말을 복음이 죽은 자들에게도 다시 전파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려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누구에게든지 죽은 이후에 복음이 전파 되었다고 말할 내용이 전혀 없다.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복음이 특정한 사람들, 즉 지금은 죽었지만 복음이 전해질 당시에는 살아 있었던 어떤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둘은 전혀 다르다.
그들을 핍박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또다른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들 이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완전히 엉뚱한 이야기다. 말이 안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듣고 믿은 그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육체로는 심판-정죄-을 당했다. 하지만 괜찮다. 그들은 영으로는 살아 있다. 그러니 지금까지 죽어 간 너희의 사랑하는 자들로 인해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
베드로의 논증은 계속 이어진다. “불신자들과 관계하지 말고 더 이상 그들처럼 살지 말라. 더 나아가 그들을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들이 너희 육체를 멸할 수는 있어도 영혼은 건드리지 못한다. 너희는 그들이 죽였으나 그 영혼은 건드리지 못한 그리스도께 속한 존재다. 그들과 관계하지 말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너희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으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그리스도 및 그리스도와 너희의 관계를 분명히 하라. 그러면 어느 누구도 너희를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제2의 기회에 대한 결론
두 본문에는 죽음과 음부 너머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또다른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 전파가 그토록 중대하고 긴급한 이유는 이생과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주위 사람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기억하도록 하자.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의 영원한 복락과 기쁨 혹은 그들의 영원한 불행과 비참함이 이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을 믿느냐 거부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고후5;11). 주여 우리가 이 일을 하게 하소서.
8장 재림: 서론
1. 재림에 대해 고찰해야 하는 이유
1) 성경이 수없이 재림을 언급하고 있다
재림은 엄청나게 중요한 주제다.
- 성경의 30분의 1은 재림에 대한 언급이다.
- 초림에 대한 언급 1번에 재림에 대한 언급은 8번의 비율이다.
2) 주님 자신이 재림을 가르치셨다
마 24장과 25장은 이 교리만을 다룬다.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는 오직 이 주제를 위해서 쓰여졌다?
주님 자신이 재림을 강조하셨으며, 자주 언급하셨다.
마 24, 25장, 막 13장, 눅 21장.
알베르트 슈바이쳐-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서 복음서는 재림에 대한 예수님의 묵시적 가르침을 끊임없이 강조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19세기 말 20세기초에 유행한 신학적 분위기는 모더니즘 혹은 자유주의로서 ‘예수’를 ‘역사적 예수’와 ‘바울의 그리스도’로 대비시켜 말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묵시적 요소들을 빼버렸다. 예수는 도덕과 윤리, 행동과 행위만 가르쳤다고 했다.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고 있다고 하면서 모든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들을 제거해 버렸다. 이에 대해 슈바이처는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고, 이후 교회의 역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소위 ‘역사적 예수’를 뒤엎어 버렸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복음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3) 사도들도 재림을 가르쳤다
사도행전 첫 장부터 이 주제를 만나게 된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질문에 답하였다(7절).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서신서에서도 주님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을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베드로는 벧후 3장에서 바울에 대해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주님의 날이 임함에 관하여 말하였으되”라고 한다. 그들은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바울서신, 야고보서도 요한서신과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다.
이 교리는 모든 시대의 교회에서 순교자들과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을 격려해 주었다.
그것은 복된 소망이자 교회가 고대하는 것인 동시에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가장 큰 동기가 된다. 베드로,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7).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11-12)
2. 재림의 교리가 소홀히 여겨지는 이유
1) 영적 무기력
우리는 삶과 환경에 희생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낙심시키고 우리 삶을 다른 일들로 가득 채워서, 이 복된 소망을 잊어버리게 하려 애쓰는 원수와 대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교리는 핍박과 환난의 때에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이 세상의 헛됨을 알게 될 때만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2) 재림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들
거짓 관점과 개념들 때문이다.
1설, 재림- 죽음 가운데 데려가시기 위해 오시는 것(요 14:1-3)
2설, 재림- 오순절날 교회 위에 그리고 교회 안에 임했을 때 일어난 일.(요 14:17-18)
주님이 성령을 통해 영적으로 오신 것으로 해석.
3설,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파괴 사건으로만 해석하는 것. 주님의 오심을 유대 민족의 국가가 멸망하는 것에 국한시킨다.
3) 그리스도인들의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
터무니 없는 가르침에 대한 소심함과 신중함.
수세기 동안 재림의 날자를 독단적으로 예언하곤 했다. 이런 가르침들의 별난 생각과 과장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재림의 교리를 전혀 고찰하지 않고 내버려 둠으로써 논쟁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말하게 되었다.
이론을 만들어 내어 그것을 정통성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베드로의 말처럼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일이다(벧후 3:16).
3. 재림의 문제에 접근하는 바른 자세-균형
신중한 것이 옳은 일이기는 하지만, 신중함이 그 문제를 완전히 피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주제에 대해 균형 있게 읽는 것이 지혜롭다. 먼저 성경을 읽으라.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읽으라. 양쪽 입장 혹은 모든 입장의 글을 읽으라. 한쪽 입장의 글만을 읽는 것은 대단히 비극적인 일이다.
똑같이 경건하고 똑같이 학구적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면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읽고 최선을 다해 검토해 보아야 한다. 경고- 이 교리에 관해 균형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라. 배타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거룩함에 관련된 운동을 조직하거나 재림과 관련된 운동을 조직하는 사람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다. 모든 교리는 결합되어야 한다. 한 가지만 전파하기 위한 운동을 조직한다면 당신은 결국 균형을 잃을 수 밖에 없다. 교회는 언제나 모든 교리를 전파해야 하며 특정한 교리들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4. 재림에 대한 서론적 접근
1) 재림과 연관해 사용한 용어들
묵시(apocalypse)- 계시, 수건을 벗기는 것, 벗겨진 수건의 개념
현현(epiphany)- 나타남 혹은 드러남
묵시는 우리 주님이 서 계시고 그 앞에 장막이 쳐 있다가 그 장막이 거두어져 우리가 주님을 보게 된다는 개념이다. 현현은 주님의 오심, 주님의 나타나심을 강조한다.
파루시아(parousia)- 임재. 주님이 그의 백성에게 다시 오셔서 임재하시는 것.
하나님의 날- 벧후 3:12, 주의 날- 살전 5:2, 벧후 3:10
주 예수의 날 혹은 그리스도의 날- 고전 3:13
이 용어들은 상호 교환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2) 재림이 일어나는 방식
1 인격적인 오심이다.
2 영적인 것일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 오신다.
영적인 오심- 오순절날 성령을 통해 오심,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시에 심판 가운데
“주님의 오심”, 지금도 여전히 영적으로 오심, 부흥의 때에 특별한 방식으로 교회에
오심,
육체적 오심- 재림 교리. “이 후에 인자가 --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0-11).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초림과 재림은 둘 다 육체적인 것이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계 1:7)
3 재림은 가시적인 사건이다.
비밀스럽고 보이지 않는 사건으로서의 재림은 완전히 비성경적이다.
4 재림은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번개의 번쩍임에 비유(마 24:27). 도적이 밤에 오는 것에 비교(마 24:43).
5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이다.
영광 중에, 하늘 구름을 타고,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다. “나팔 소리가 나매”(고전 15:52)
왕의 왕, 주의 주로 오실 것이다.
재림에 대한 연구는 우리를 경건으로 인도한다.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거룩한 삶을 촉진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3) 재림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당부의 말
그 연구가 여러분을 겸손하게 만든다면 당신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쭐하게 되고 지성과 열정이 자극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연구 방식이다.
그 연구가 당신으로 하여금 무릎 꿇고 에배와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방식의 연구이다. 그 일을 해냈다는 자기 만족감을 불러 일으킨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연구방식이다. 이것은 지성만이 아니라 전인격을 위한 주제이다. 그것은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진리에 올바른 방법으로 접근하게 되기를 빈다.
9장 재림의 시기: 징조들
1. 재림의 시기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자세
1) 재림의 시기에 대한 연구는 우리를 거룩함으로 인도해야 한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라는 견지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하며, 그 관심을 통해 거룩해지고 그 위대한 날을 위해 준비되고자 하는 열망이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우리의 접근법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2) 재림의 날짜를 확정하려 시도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사를 보면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사용하셨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갔다. 과거를 큰 교훈으로 삼아 주님을 더 잘 알고, 더 참되게 섬기며, 진리를 아는 지식을 향해 정직하게 힘쓰고자 하는 큰 소망을 가지고 이 주제에 접근하라.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구절
살전 5:1-2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막 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강좌가 끝났을 때 처음보다 더 불확실해졌다면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기뻐할 것이다.
재림의 시기를 확정하는 일에 집착한 나머지 영적인 삶이 메마르고 무미건조하게 된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2. 재림의 시기 연구에서 유념해야 할 원칙
1) “때”라는 용어를 사람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들은 재림이 그들이 살아 있을 때, 그들의 세대에 일어날 일이라고 믿었을까요?
암시가 나타나 있긴 하지만 그들이 글로써 그렇게 가르친 구절이 단 하나라도 있는지 찾아보라. 표면적으로는 그런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나님 편에서 어떤 진술을 할 때에는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같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벧후 3:8)
2) 우리는 이미 말세에 살고 있다.
신약에서 사용되는 “말세” 혹은 “말일”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우리 주님의 초림부터 시작해서 재림까지 이어지는 신약시대 전체를 말한다.
3) 예언적 원근법
구약의 예언들을 읽어보면 선지자들이 주님의 초림과 재림을 한 호흡으로 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주의 깊게 확인해야 한다.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파괴와 세상 끝의 심판 날에 대한 언급이 서로 중복되어 있다. 마 24장과 25장 혹은 마가복음 13장이나 누가복음 21장과 같은 본문을 읽을 때는 이 원리를 유념해야 한다.
3. 재림의 징조
성경은 주님이 오시기에 앞서 특별한 징조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1) 이방인을 부르심
마 24:13-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막 13:10, 롬 11:25“이방인의 충만한 수”)
2)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모여듦
- 유대인의 민족적 회심이 일어날 것인가?
- 민족적 회심에 대한 논거들, 마 19:28, 눅 21:24,
- 민족적회심에 대한 반론들-, 마 8:11-12, 마 21:28-32, 43. 마 22:1-14, 눅 13:6-9.
벧전 2:9-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하신 말씀(출19:6)의 반복.
롬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의 세 가지 해석
①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 선택받은 사람들의 전체 숫자
②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회복되는 것
③ 선택받은 유대인의 총 수, 즉 구원받을 유대인의 총 수
10장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마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벧전 2:9<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하신 말씀(출19:6)의 반복.>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 “온 이스라엘”은 교회가 아니다
롬 9, 10, 11장에서 교회가 아닌 유대 민족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유대인의 민족적 회심이 일어날 것인가
유대인들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을 것이며 특별한 지위에 놓이게 되어 종말에는 교회와 유대 민족이 있게 되리라고 말하는 것일까?
구약의 예언들이 그것을 지지한다고 주장.
장차 도래할 위대한 축복의 날을 고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받을 때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1) 이 해석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이 다른 방법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율법과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에 의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2) 민족적 회심에 대한 반론
신약 성경을 읽음으로써 구약만 읽었을 때는 오로지 유대인들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보이는 예언을 신약에서는 교회에게 적용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예,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에서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행2:16)
요엘 2장을 보면 유대 민족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베드로는 그것이 교회에 적용된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 성취이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그것은 성취의 시작이었으며 그 이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교회가 속해 있으며 재림으로 인도하고 있는 이 시대 전체에 대한 것이다.
- 구약의 예언들은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행 15:14-18, 아모스의 예언이 성취된 것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야고보는 아모스가 말한 “다윗의 장막”이 다윗의 더 위대한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예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영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에스겔 40장에서 마지막 장까지의 예언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 전체를 다시 차지하고 예루살렘에는 실제로 성전이 다시 세워질 날이 온다고 믿어야 한다. 다시 번제와 속죄제가 드려져야 한다.
한 제사가 영 단번에 드려졌고 그것을 기념하는 떡과 포도주가 있는데도 다시 모형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 주님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이 유대인들이 거룩한 땅으로 회복될 것에 대해 말씀하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코 없다.
마 8:11-12,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사도 바울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다고 말한다.
골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바울은 더 이상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다고 말한다. 영단번에 끝났다.
엡 2:14, 18,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하셨다.
- 롬 11장의 가르침만으로도 입증할 수 있다.
바울의 전체 논증은 오직 하나의 뿌리만 존재하며 구약과 신약의 교회는 하나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지가 아니라 이 한 뿌리이다. “뿌리가 거룩한 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6절)
이 본질적 하나됨과 연합, 그리고 연속성이다. 유대민족만의 특별한 위치는 불가능하다.
- 바울은 롬 11:25-26에서 연대기적 순서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은 연대기적 순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라는 말은 그런 식으로 , 그렇게 해서라는 의미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게 해서, 즉 그가 기술한 방법대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3. 로마서 11장 26절의 해석
성경의 난해한 구절을 다룰 때 언제나 좋은 원칙은 그 구절에 너무 집중하지 않는 것, 말하자면 현미경으로 들여보듯 뚫어지게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 더 낳은 방법은 뒤로 물러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9장 첫 부분에서 시작한 주제를 11장 마지막까지 이어가고 있어요”
1) 로마서 9-11장이 말하는 이스라엘은 남은 자, 즉 영적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
-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영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다.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의 약속들은 문자적인 의미의 전체 이스라엘 민족에게 적용된 일이 결코 없으며, 언제나 남은 자, 즉 외적 할례가 아니라 마음과 영혼에 내적 할례를 받은 영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 항상 존재한다.
2) “온 이스라엘”은 유대인 가운데 부르신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있다. “유대인의 충만한 수”도 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 가운데 부르신 모든 사람, 하나님이 유대인 가운데 부르신 모든 사람, 그들은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다.
3) 지금도 이스라엘을 민족적 의미로 이해하는 오류가 벌어지고 있다
육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 오신 그리스도를 거부함
4) 모든 믿는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갈라디아서 3장의 구절들
7-9절,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29절,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민족적, 육체적 이스라엘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모든 믿음의 자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닌 모든 사람, 예수님께 속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구속을 받은 모든 사람이다.
5)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방법은 동일하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의 결론적인 해석은 하나님이 모든 시대의 믿는 유대인들 총원, 하나님이 미리 아신 그들은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인들과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종말이 되기 전에 유대인의 많은 수가 회심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특별한 지위를 지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도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나라에 들어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다른 길은 없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 그것이 영원한 복음이며 다른 복음은 결코 없다. 롬 8장을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를 통해 지금도 여전히 성취되고 있다.
11장 적그리스도
1. 적그리스도와 관계 있는 성경구절들
요일 2:18,
살후 2:1-12
단 7:8, 15-28
계 13:1-8
1) 단 7장, 살후 2장, 계 13장에 나타난 적그리스도
모두 적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증거
① 그들의 기원이 같다. 단 7:8에서는 작은 뿔이 네 번째 짐승에게서 나오고, 계13에서는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마지막 단계이고, 살후의 불법한 자는 로마제국이 제거된 후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② 나타난 시기가 같다. 작은 뿔은 로마 제국을 나누어 물려받은 후계자 중 하나. 짐승은 이교의 로마로 행진해 가는 용(사탄)으로부터 그의 능력과 큰 권세를 받는다.
③ 그들의 종말이 같다. 마지막 심판 때에 멸망당한다.
④ 종교적이고 동시에 정치적인 권세를 휘두른다.
⑤ 신성모독을 전제로 한다.
⑥ 통치기간이 똑같이 3년반이다. “한때와 두때와 반때” “마흔 두 달”
⑦ 하나님의 백성과 전쟁을 벌인다.
⑧ 큰 권세를 가지고 있다.
⑨ 신에게 바치는 충성을 요구한다.
2) 이 본문들에 나타난 적그리스도의 특징(특정한 일들)
① “베도하는 일”, 즉 배교가 있을 것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배교가 일어난 후 드러남
②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의 나라와 역사에 대적한다.
③ 하나님의 성소에 앉는다.
④ 스스로를 신격화한다.
⑤ 영적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계시되는 비밀
⑥ 위장과 거짓 기적으로 가려져 있다.
⑦ 막는 자에 의해 지연되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멸망당할 운명.
2. 적그리스도에 대한 세 가지 해석
1) 이 일이 이미 일어났다는 것.- 유대인들의 배교와 그리스도의 거부.
2) 전적으로 미래에 일어나는 일이며, 예루살렘의 회복된 성전에서 자신을 높이고 성도들과 전쟁을 하는 유대인 혹은 이방인이라고.
3) 교황 제도를 말한다.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의 견해.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살후2:4)-교회의 교황석. 로마 제국 몰락 후 교황의 권력이 시작되었다는 것. 교황이 경배를 요구할 뿐 아니라 정치적이자 종교적인 요소까지 가지고 있다. 복음에 반대한다. “거짓 기적”은 로마가톨릭이 주장하는 수많은 기적들, “거짓 것을 믿는다”는 기적을 믿는 것, 트렌트 공의회가 참된 믿음을 저주한 사건이다.
개혁주의자들은 “막는 자”가 로마 황제들이고, 살후 2:8의 “그의 입의 기운”은 개신교 종교개혁이고, 계 11:13의 무너진 “성 십분의 일”은 프랑스 혁명이다.
3. 적그리스도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내용들
1) 적그리스도는 이미 사도 바울과 요한의 시대에 활동하고 있었다.
2) 이 세대가 끝나기 직전에 최고의 힘을 발휘할 것.
3) 끔찍한 정치적 권세에 뒤이어 똑같이 끔찍한 종교적 권세가 나오는 것.
4) 적그리스도가 궁극적으로는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5) 택함 받은 자들까지 속일 정도의 기적과 표적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다.(엡 6:12)
12장 다니엘서 9:24-27의 해석
1. 앞으로 다룰 내용
나의 해설이 유일하고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문제에 대해 흔히 나타나는 경솔함과 독단적 주장을 조금이나마 흔들어 놓을 수 있다면 그 이상 기쁜 일이 없겠다.
사람들이 이 문제를 새롭게 고찰할 징조가 나타난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그것은 교회 역사에서 축복의 시기의 전조가 될 것이다.
1) 연구의 대상이 될 성경 본문들
다니엘서 9장
마태복음 24장과 25장
살전 4장과 5장 일부
살후 몇 구절
요한 계시록
2) 다양한 견해를 비교해 보아야 하는 이유
가능한 한 서로를 돕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하고 싶은 한 가지 해설만 제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다른 견해들도 제시하고 그것들을 평가해 볼 수 있도록 가능한 많은 지침과 도움을 드린다.
2. 에드워드 어빙과 다비가 제시한 새로운 해석
1830년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해석학파
무디는 다비의 가르침을 채택했고 즉시 유행하게 되었다.
스코필드 성경의 출간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복음주의 진영들이 이 견해를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3. 다니엘서 9장의 배경
단 9: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그후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알고 싶어한다. 천사 가브리엘이 그에게 대답을 준다. 22-27절까지에 기록되어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구약학자인 에드워드 영의 해설을 주로 따른다.
구약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본문 중 하나이다.
4. 일흔 이레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1) 일흔 이레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레”라고 언급된 기간이 있으며, 장차 그 특정한 “이레”가 일흔 번 있을 것이다.
일흔 이레는 490일을, 예언서의 하루는 1년이므로 490년을 의미한다는 사람도 있다.
2) 예언을 해석할 때는 ‘감추어진 명확성’에 주의해야 한다
“일흔”과 “이레”를 정확한 용어로 간주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는 것이 저의 결론이다.
예언에서는 숫자가 상징적인 것임을 말씀드리고 싶다.
그것은 정확한 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념을 전달하고 있다.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한 복음주의 주석가 헹스텐베르크의 말을 인용하려 한다.
그의 책을 만나게 되거든 무조건 사서 탐독하시라!
이 숫자들이 '감추어진 명확성'(concealed definiteness)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놀라운 문구다. 그 숫자들은 명확하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언제 시작하여 언제 끝나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는 의미의 명확성은 아니다. 일종의 확실함이 있지만 동시에 불확실함도 있다. 사람들이 명확성의 숨겨진 부분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석의 역사에 등장한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도출한 명확한 결론이 역사에 의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었음이 드러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 때가 언제인지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는 명확하다는 것, 우리 주님의 재림은 명확한 시간에 일어나리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과 저는 절대로 정확한 날짜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원하신다. 그 정확성이 우리에게는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사람들의 땅에 떨어진 명성의 파편들이 예언의 역사 위에 흩날리고 있다.
3) 일흔 이레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성경에서 일곱은 언제나 완전한 수를 상징하며 열이라는 숫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칠 곱하기 십, 곧 일흔은 완전한 시대, 완전한 기간을 나타내며, 그것은 다시 일곱이라는 숫자가 나타내는 완전한 기간들로 나뉘어진다. 이 숫자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대신 상징적인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개념을 고수할수록, 성경을 읽을 때 더 기쁨을 느낄 것이며, 오류에빠져 예언 전체를 욕되게 할 위험이 더 적어진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다.
4) 일흔 이레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24절)
세 가지 소극적인 일.
① “허물이 그치며”-허물을 치우다
② “죄가 끝나며”- 죄가 사함을 받으리라. 죄가 해결되어 끝날 것이다. 봉인될 것이다.
③ “죄악이 용서(화해)되며”- 그 결과이다. 죄악을 치워버려 사람과 하나님이 화해한다.
적극적인 일
①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의가 나타나야 한다.
②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이상과 예언이 끝날 것이다.
③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5) 이 일들은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25-27절)
25절,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영이 날 때부터”- 고레스 원년이면 주전 538년, 아닥사스다 왕 20년이며 주전 445년?
우리가 아는 것은 명령이 내려졌을 때 이 일이 시작했다는 것뿐이다. 가장 분명한 해석은 하나님이 고레스에게 처음으로 명령을 내리신 때라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 때 그 명령이 시행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니다. 정확한 날짜를 정하려 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스런 일인지요! 우리가 아는 것은 이에 대해 처음으로 말이 나온 때로부터 메시아 곧 왕이 오시기까지는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의 기간이 지나야 한다는 것뿐이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라는 말에 주목하라.
일흔 이레는 일곱 이레, 예순두 이레, 한 이레로 나누어진다.
처음 일곱 이레는 파괴된 예루살렘 성을 실제로 재건하는 데 걸리는 기간이다.
이어서 왕이신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예순두 이레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강림.
26,27절에 대한 엇갈리는 해석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그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것. 그것은 메시아가 끊어지고 죽임을 당할 때 그분은 완전히 혼자라는 것을 시사한다. 모두가 그를 버린다.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전통적인 개신교와 개혁주의적 해설은 이것이 분명 주후 70년 디도 황제 치세 때 로마군이 예루살렘성을 멸망시킨 사건을 말한다고 한다. 26절에서 메시아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 직후에 이 말이 나오는 것을 주목하라. 하지만 1830년에 시작된 새로운 학파에 의하면 이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어떤 일에 대한 언급이다.
27절,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여기서 시사하는 것은 언약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그가 그 언약을 굳게 하리라는 것이다. 그는 언약을 확증할 것이다. 그것을 효력있게 만들 것이다.
27절,“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니라”
“미운 물건의 날개 위에” 혹은 “미운 물건의 꼭대기에”라는 말은 분명 성전의 파괴에 대한 언급이다. 제일 꼭대기로부터 시작해서 성전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6) 논쟁의 핵심: 일흔 번째 이레
26절은 일흔 번째 이레에 일어날 사건을 묘사한 것인가
“예순 두 이레 후에” 일어난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본문은 그 사건들이 일흔째 이레에 일어난다고 말하지도, 그 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본문이 말해 주는 것은 단지 그 일이 예순아홉 이레가 지나간 후에 발생한다는 것 뿐이다. 그것이 일흔 번째 이레를 의미할까? 중대한 질문이다.
27절의 “그”는 누구인가
26절에 나오는 메시아인가, 아니면, 26절 후반부에 나오는 왕을 말하는가
7) 에드워드 어빙과 다비의 견해
유대인들이 특별한 지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견해다.
“이레는 한 주 더 정확히는 칠 년으로 구성된 한 주다. 즉, 각각 칠 년을 의미하는 이레가 일흔 번이라는 뜻이다. 이 이레들 안에 민족적 징계가 끝나고 나라는 영원한 의로 회복되어야 한다.” 즉시 의문이 생겨난다. 영원한 의 가운데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유대인들이 특별한 방법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유의 이론에서 보면 그렇게 도입할 수 밖에 없다.
“교회시대가 끝나고 일흔 번째 이레가 시작될 때 --” 이 말은 예순 아홉 이레의 끝과 일흔 이레의 시작 사이에 적어도 이천 년이라는 거대한 간격이 있다는 것.
“그 기간은 칠년이어야만 한다.”
그들은 27절의 “그”를 26절에 언급된 장차 올 왕이자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
“그의 백성인 로마가 주후 70년에 성전을 파괴했다. 그는 7장에 나오는 작은 뿔과 같은 인물이다. 그는 한 이레 동안 성전의 제사를 회복하기로 유대인들과 언약을 맺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간의 중간에 그는 언약을 어기고 단 12장과 살후 2장을 성취할 것이다. 메시아가 끊어진 예순아홉이레와 단 7장의 작은 뿔이 무시무시한 일을 진행할 일흔 번째 이레 사이에 교회 시대 전체가 들어간다. 27절은 일흔 번째 이레의 마지막 삼 년 반을 다루는데, 그것은 마 24장에 나오는 대환난, 단 12장에 나오는 환난의 때, 그리고 계 3장에 나오는 시험의 때와 동일한 기간이다.”
8) 일흔 이레 해석의 핵심 쟁점들
24절에 개략적으로 나와 있는 계획은 이미 수행되었는가?
26절에 나온 일들은 어떠한가?
27절 첫 머리에 나오는 “그”는 누구인가?
26절에 묘사된 사건들은 일흔 번째 이레에 일어났는가? 아니면 예순아홉 이레의 끝과 일흔 이레의 시작 사이의 간격이라고 추정되는 시기에 일어났는가?
예순아홉 이레와 일흔 이레의 시작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는가?
다비의 해석 체계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다가오는 천국에서 유대인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질 것과 피의 제사가 다시 한 번 도입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적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미래의 일로 간주하며 이것을 계시록에 대한 비슷한 해석과 연결시킨다.
13장 다니엘서 9장의 결론과 휴거
1. 간격이론
1) 27장의 “그”는 누구인가
“그”가 26절에 나오는 왕이라고 말한다.
2) 27절은 미래의 사건인가
이 모든 것은 미래에 속한 일이며, 일흔 번째 이레 때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일흔 번째이레의 처음 삼 년 반 동안 이 왕은 하나님의 백성과 언약을 맺을 것이다. 그 때쯤에는 유대인들은 모두 팔레스타인에 돌아와 그들의 성전을 다 지었을 것이며, 짐승 제사를 재도입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왕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과 언약을 맺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레 중간에 갑자기 그는 자신의 말을 취소할 것이다. 끔찍하게 핍박할 것이며 삼년반 동안 계속해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때 주님이 다시 오셔서 그 왕을 멸망시키고 그의 백성을 구해내며, 천년왕국으로 인도할 것이다.
3) 예순아홉 이레와 일흔 이레 사이에 긴 간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성경해석이 아니다
성경은 간격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라고 할 뿐이다. 예순아홉 번째 이레와 일흔 번째 이레가 나누어진 것과 똑같이 예순아홉 이레도 나누어져 있다. 그들도 예순두 이레가 일곱 이레 직후에 이어진다는 데에 동의하며, 그 일곱 이레는 아마도 예루살렘 재건을, 그리고 예순두 이레는 그 재건이 끝날 때부터 왕이신 메시야가 오실 때까지의 기간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갑자기 예순아홉 이레와 일흔 이레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말한다. 그 간격은 아미 거의 이천년이나 연장되어 왔는데 더 길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공정한 해석이라고 보이는가? 자연스레 도출되는 이론이라고 생각되는가? 고백하건대, 저로서는 그런 견해를 받아들이기가 극히 어렵다. 예순두 이레와 일곱 이레 사이의 관계는 예순아홉 이레와 마지막 일흔 번째 이레 사이의 관계와 똑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다니엘서 9장 24-27절에 대한 다른 해석
1) 24절의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이 해석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며 예언이 정확하다는 증거가 된다.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일흔 이레 후에 백성들과 성에 뭔가 절정에 이르는 일이 일어나리라고 한다. 첫째, “허물이 그치며”, “죄가 그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
이 모든 것을 신약에서 볼 수 있지 않은가?
“허물이 그치며”- 최종적인 심판이 주후 70년에 임하였다. 주님이 경고하신 그 심판이 이르렀다. “네 백성과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백성과 성은 그 때 심판을 받았으며 그 이래 계속해서 심판을 받았다.
“죄가 끝나며”- 복되고 영광스러운 복음이 아닌가? 죄와 부정함을 씻는 샘이 갈보리 언덕에서 열렸다.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그 다른 견해는 이스라엘 나라의 의가 영원히 확증될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단지 영원한 의가 나타날 것이라고만 기록돼 있다. 그 영원한 의를 가져오신 분은 완전한 삶을 사시고, 자신을 죄를 위한 제물로 드리신 우리 주님이시다.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그리스도는 예언의 성취이다.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주님은 자신의 사역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저는 24절이 전적으로 메시아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온전하신 사역을 하러 오셨을 때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다. 25절은 명확해서 문제가 없다.
2) 26절은 AD 70년의 예루살렘 파괴에 대한 예언이다
“예순 두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그 일이 정확하게 일어난 것을 안다.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 일은 문자적으로 일어났다. 그 왕의 이름은 디도였다. 요세푸스, “ 이 땅에 그와 같이 큰 파괴는 일
찌기 없었다. 그 전쟁의 고통과 고난과 잔인성은 역사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것이다.“
3) 27절의 “그”는 은혜의 언약을 확증하시고 제사와 예물을 그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메시야가 그 일을 하셨다. “맺고” 가 아니고 “확증하겠고”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언약을 굳게 할 것이다. 은혜와 구원의 언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를 뿌려 언약을 비준하셨다(히9장). “그가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위대한 원형이 왔기 때문에 모형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성전은 없으며 제사는 더 이상 드려지지 않는다. 한 번의 최종적인 제물이 영단번에 드려진 것이다.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결과, 즉시 그들의 성이 공격을 당하고 완전히 황폐하게 되었다.
26절과 27절에는 유사점이 있다. 두 부분씩으로 되어 있다. 26절의 전반부에서 메시아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와 관련하여 끔찍한 홍수와 온통 황폐케 하는 전쟁이 나오는데 그것은 주후 70년에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27절에서도 똑같은 두 가지가 정확하게 반복된다. 우선, 메시아 자신이 언약을 확증하고 비준하며, 자기의 죽음으로 제사를 끝낸다. 이어지는 후반부에는 황폐와 전쟁과 파괴가 나타난다. 그 모든 일은 주후 70년에 문자적으로 일어났다.
4) 이 본문은 성취된 예언이며 예순아홉 이레와 일흔 이레 사이에는 간격이 없다
주의 깊게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펴보라고 권하고 싶다. 저는 다니엘서의 이 부분에서 오백 년 이상 지난 후에 문자적으로 성취된 놀라운 예언을 발견한다. 다니엘은 메시아와 영원한 의, 속죄, 화해, 그리고 구원의 모든 영광에 대해 듣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로서는 예순아홉 이레와 일흔 이레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볼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일흔 번째 이레는 예순아홉 이레 바로 다음에 이어진다. 이 일들은 이 본문에서 가르친 바로 그 순서대로 차례차례 일어났다.
3. 성도의 사전 휴거
1) 사전 휴거, 혹은 은밀한 휴거란 무엇인가 두 단계의 재림
이 가르침은 1830년 이전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워스코트(다비의 친구) 예언집회”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주의 날”, “주님의 나타나심” “주님의 현현” 등의 주님의 나타타심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오심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것일 뿐, 세상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주님은 오직 성도들을 위해오실 것이다. 구약 성도들은 부활할 것이고, 이미 죽은 그리스도인 성도들 역시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 남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변화되어 다른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공중에서 주님을 만날 것이다. 교회가 사라지고 성령 역시 교회와 함께 떠나신 다음 유대의 남은 자들은 이 땅에 남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다시 거룩한 땅으로 갈 것이고, 성전이 건축될 것이고, 제사가 드려질 것이다. 그 다음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언약을 맺고, 그 모든 일을 행할 것이다. 이 일은 우리 주님이 성도들과 함께 다시 오시는 주님의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성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것이다. 주님은 적그리스도를 멸망시키고 위대한 천년왕국 시대를 여실 것이다.
주님의 재림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로 오직 성도들을 자기에게로 영접하기 위해 오신다. 은밀하게 오신다. 성도들 외에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한다. 두 번째로는 성도들을 거느리고, 적그리스도를 멸망시키고 천년왕국 기간을 시작하기 위해 오신다.
2) 이 가르침의 유래
플리머스 형제단에 속한 트레겔레스, “우리 주님이 은밀하게 오실 때 교회의 은밀한 휴거가 일어나리라는 가르침이 어빙 씨의 교회에서 방언의 형태로 발표되고, 성령의 음성이라고 받아들여지기 이전에도 정말로 존재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계시로 간주된 어빙의 말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에드워드 어빙 목사- 스코틀렌드 출신의 뛰어난 설교자, 그의 인생사는 읽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재치 있는 지성을 지닌 위대한 연설가였으며,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토머스 차머스 박사의 동역자였다. 이후 런던으로 옮겨서 경이적인 사역을 하였으며, 그 도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설교자가 되었다. 놀라운 웅변술, 특이한 관점 때문에 사교계의 사람들과 기타 온갖 종류의 사람이 그의 설교를 들으러 몰려 들었다. 그러다가 가르침에 균형을 잃게 되었던 듯하다. 그는 자신이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으며 하나님이 자기에게 환상을 주셨다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도교회(Apostolic Church)라는 새 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가 여전히 사도적이라고 주장했다. 사도직과 선지자직은 초대 교회가 끝난 후 없어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존재하며, 그들은 지금도 계시를 받고 예언의 말을 하고, 환상을 보고, 방언을 하는 등의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추종자들을 자신들이 그런 모든 것을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때문에 자신들을 가톨릭사도교회라고 불렀다. 그에게는 얼마 동안 많은 추종자가 있었으나, 점점 지지자들이 줄어들고 사라져 버렸다.
스스로 계시라고 주장하는 가르침의 위험성
오늘날 몇몇 형태의 가르침들이 스스로 매우 영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으며, 그 가르침은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에게 주셨다고 추정되는 계시에 근거하고 있다. 제가 신약성경을 이해하는 바로는, 우리는 언제나 소위 ‘계시’라는 것에 기초한 가르침을 의심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제칠일 안식교의 기원은 제칠일 및 다른 여러가지에 대한 가르침이 화이트부인이라는 사람에게 계시로써 임한 것이다.
그것이 신약의 가르침과 맞는지 살펴보는 것은 여러분의 몫이다.
로마카톨릭교회는 자신들이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았으며, 하나님이 신약 정경 형성 이후에도 자신들에게 게시를 주셨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와 몽소승천 등을 가르칠 수 있다. 성경과는 별도로 계시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뉴턴이나 로버트 채프맨, 조지 뮐러는 어빙이 방언, 환상, 사도들 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와 완전히 관계를 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거에 대한 가르침은 지속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3) 이 가르침의 근거와 반론
살후 2:8,“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그의 파루시아의 현현, 혹은 그의 오심의 나타남-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그들은 그의 “오심”과 “그의 나타나심” 사이에는 구분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죄인의 멸망과 영화가 함께 일어나는 1장 9절과 10절이 분명하게 답을 준다. 살후 2장1절은 파루시아를 주님의 오심과 동일시한다.
살전 4:15-17,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그들이 칠 년전에 이미 휴거되었다면 어떻게 준비되어 있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마 24:40-41,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 최후의 심판 때 분리가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행 1:11, “본 그대로”- 그분이 육체적으로 눈에 보이게 오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고전 15:23, 52,
요 5:28-29
요 6:39-40
결론- 성경은 단 한 번의 재림만을 말한다.
부활도 단 한 번만 있다. ‘은밀한’ 혹은 ‘사전’ 휴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주님은 아무 때나 오시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일들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
4. 권고: 종말의 문제를 연구하는 동기를 점검하라
흥미 본위의 육적인 정신이 아니라 무릎으로 다시 말해 성령의 인도와 기름부음과 조명을 위해 기도하면서 살펴보자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주님의 나타나심을 고대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는 복된 소망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이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고 밤과 어두움의 자녀와는 분명히 다른 빛의 자녀로 살아가길 추구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임을 분명히 하도록 하자.
14장 요한계시록: 서론
1. 요한계시록 연구의 주의사항
요한계시록이 저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책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피해버리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없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예 읽어보지도 않는다. 그 책에 대한 터무니 없는 해설들과 과도하게 몰두하는 행위를 비웃는다.
요한계시록을 대할 때는 올바른 정신을 갖는 일에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배우기 위해 열린 이성과 정신과 마음으로 함께 진리를 상고하고자 한다. 많은 명망 높은 사람이 요한계시록을 다루는 데 실패했다. 마르틴 루터같은 위대한 사람도 요한계시록을 쓸모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고 분별 없는 행동을 저질렀다.
2. 요한계시록의 세 가지 해석법
1) 과거주의적 견해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모든 것이 과거에 사실상 4세기 초의 기독교 시대에 이미 일어났다는 가르침이다. 먼저는 유대인들로부터, 나중에는 이교의 로마 제국으로부터 겪어야 할 일에 대한 예언이라고 말한다. 로마 제국이 어떻게 기독교화되는 영광스러운 시대로 끝맺음했는지 보여 줌으로써 우리를 격려할 뿐이다.
이 견해는 1614년 경 알카자르라고 하는 예수회 사제가 최초로 제안했다. 개신교의 선구자들은 예외 없이 교황제가 분명 적그리스도며,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이고, 다니엘서 7장의 뿔이라고 가르쳤다. 이에 대해 로마카톨릭은 주의를 분산시키고자, 요한계시록 내용 전체가 교황제나 로마가톨릭 교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단지 기독교 시대의 첫 세 세기를 다루고 있을 뿐이라고 한 것이다.
2) 미래주의적 견해
예수회 사제인 리베라가 1603년 경 제안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으로 교황제 및 로마교회를 공격하는 것을 막고 그 내용을 미래와 연결시키려 한 것이다. 여기에 묘사된 사건들은 교회가 세상에서 옮겨진 후에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교황제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 견해는 1830년대에 이르러 유명해졌다. 다비의 예언 집회 이후 대중화되었으며, 최근에는 스코필드 성경 주석에 의해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미래주의자들은 일곱 교회는 교회의 역사이며 4장 이후는 일흔 번째 이레에 일어날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들은 교회의 역사에서 일곱 개의 연속적인 기간 혹은 시대에 대한 예언들이다. 오늘날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에 해당하며 사데 교회는 아마도 종교개혁 시기일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의 예언적 본문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미래주의적 견해와 사전휴거설
두 개의 주요 학파가 있다.
먼저, 성도들이 사전에 휴거한다고 믿는 사람들. 2장과 3장이 기독교 교회사의 연속되는 기간들을 나타내며, 교회시대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참담한 상황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이어서 3장 마지막과 4장 시작 사이에 교회는 휴거된다고 한다. 그 순간부터 이 책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교회나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4장 이후부터 요한계시록은 소위 환난당하는 성도인 다시 모인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된다.
성도들의 사전휴거를 믿지 않는 미래주의자들. 이들은 4장 이후의 모든 사건이 전적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는 말에는 동의했지만, 교회와 신자들이 환난과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일들을 겪어야 한다고 믿었다.
미래주의적 견해의 근거
요한계시록 1:19와 4:1. 그들은 이 이론이 다니엘서 9장과 살후 2장에 대한 그들의 견해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고 말한다.
3) 역사주의적 견해
요한계시록을 과거나 미래에 국한시키지 않고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대한 예언이라고 가르친다. 몇 가지로 세분화된다.
① 교회역사적 견해- 루터와 종교 개혁가들의 견해. 요한계시록은 교회의 상세한 역사가 아니라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교회사의 단계들에 대한 일종의 개략이다.
② 연속적 역사적 견해 -더 대중적인 분파. 중단없는 역사책이다. 교회의 상세한 역사에 대한 예언이며, 여러 환상들은 서로 중복되어 있지 않다. 6장의 여섯 개의 인, 8장의 일곱째 인, 8장부터 11장까지 일곱 나팔, 16장의 일곱 대접의 사건이 연대기적이며 역사적으로 일어난다. 우리는 지금 여섯째 대접의 기간에 살고 있음이 틀림 없다. 그들은 여섯 인과 여섯 나팔에서 예언된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 모든 일들을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과 동일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수 세기에 결친 교회의 역사를 죽 훑어 나간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이 일어나 모든 것의 종말이 올 주님의 문턱에 서 있다고 한다. 근래에 많은 인기를 얻고 있으며,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현재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에 영향받은 사람들이 이 관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③ 영적 역사주의적 견해
요한계시록이 개략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상세한 연속적 역사적 과정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 아니다. 개혁주의자들이 가르쳤던 것처럼 교회사를 요약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초림과 재림 사이에 교회의 삶과 역사를 지배하는 원리들에 대한 설명이다. 요한계시록의 진정한 기능은 교회가 이 땅에서 견뎌내야 하는 원리와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15장 과거주의적 견해와 미래주의적 견해
1. 요한계시록의 해석법을 평가해 보아야 하는 이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시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것들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 우리와 대결하고 있는 원수, 이미 싸우고 있는 싸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들과 대적하기 위해 이 주제를 연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 일들로부터 최대한의 은혜를 얻는 일에 관심이 있다.
2. 과거주의적 견해
이 책이 마귀와 그의 모든 권세와 그가 사용하는 용과 짐승의 최종적인 멸망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이 초기의 교회가 직면한 사건들과 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기독교화 되었을 때 끝나게 될 일들만을 다루고 있다는 말은 분명 옳지 않다. 예수회 사제가 개신교의 교황제의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3. 미래주의적 견해
그들은 계 1:19의 “네 본 것”은 1장에 기록된 환상을 가리키고, “이제 있는 일”은 2장과 3장에 나와 있고, 이것은 교회 시대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연속적 역사이고, “장차 될 일”은 교회 시대라는 엄청난 기간이 지난 후 일어날 사건들이다. 4:1도 논증의 근거.
1) 미래주의적 견해에 대한 일반적 반론
요한과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위로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 책은 분명히 그 글의 수신자들을 위해 씌어졌다.
미래주의적 견해는 예언의 일반적 기능과 목적에 반대된다
예언의 목적은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미래주의적 견해는 믿음을 강화시키는 예언의 임무를 완전히 부인하는 듯하다.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데려감을 당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인이 이로부터 무슨 도움을 받겠는가?
성경의 유추, 성경의 질서와 모순된다
계 13장의 첫 번째 짐승이 단 7장의 네 번째 짐승과 동일한 존재인데, 이 견해는 네 번째 짐승이 로마 제국이라고 한다. 로마 제국이 복원될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납득할 수 없다. 또 다니엘서에 나오는 짐승들 및 짐승들이 대표하는 나라들은 생겨나고 발전하고 기능하다 사라지는 데에는 상당히 오랜 세월이 걸린다. 하지만 미래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요 13장에 묘사된 짐승들은 약 칠 년 혹은 심지어 그것도 안 되는 기간에 생겨나고 그 모든 일을 해야 한다.
미래주의적 견해는 요한계시록의 단일성을 무너뜨린다
요한계시록을 “내 본 것”, “이제 있는 일”, “장차 될 일”을 기록한 세 권의 책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 책의 단일성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 사이에는 거의 이천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적 간격이 있다. 이는 부자연스럽다.
요한계시록의 단일성은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1장에 나오는 환상은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들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 각 편지에는 주님에 대한 묘사가 나와 있다. 그 각각의 묘사를 1장의 환상에서 차용하여 왔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그 동일한 용어들이 19장의 세 구절에서도 사용된다는 점이다. 12절의 “그 눈은 불꽃 같고”는 1:14절에서 따온 것이며, 15절의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와 21절의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는 1:16을 언급한 것이다.
미래주의적 견해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의 일로 간주한다
그들은 하나님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았으며 지금은 교회시대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미 나라가 되었으며, 그 나라는 이미 임했다. 계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9절의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교회는 그 나라의 일부이다. 우리는 이미 그 나라 안에 있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지금도 오고 있다. 장차 눈에 보이게, 외형적으로 나타날 것이지만 이미 여기에 있다.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곳이며, 그리스도는 그의 모든 백성의 마음 속에서 다스리신다.
2) 미래주의적 견해에 대한 구체적 반론
요한은 이천 년 후에 일어날 일이 아닌 속히 될 일을 기술했다
이 책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세 번째 구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 이 말이 요한 시대의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기억하라-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요한은 덧 붙인다.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 계시록을 세 단계로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책 내용의 전체를 말한다. 환상을 보기 전에 이 지시가 주어졌다는 사실은 이것이 환상과 교회를 향한 메시지와 기타 내용을 포함하는 요한계시록 전체의 일반적인 서론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미래주의적 견해는 2장과 3장의 설명에서 스스로 모순을 일으킨다
2장과 3장의 견해는 어느 구절도 일곱 교회를 향한 편지들이 점진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장차는 엄청난 시간의 간격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한이 들은 말은 분명 “이 일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는 것이었다. 잠시 뒤에 일어날 일이라는 말이다.
12장은 미래가 아닌 성육신 사건을 묘사한다
12장은 과거 역사에 속해 있다.
요한계시록을 인봉하지 말라는 명령은 이 책의 사건이 속히 일어날 것임을 보여 준다
마지막 장인 22장에는 대단히 결정적인 표현들이 있다. 6절과 10절에서 극히 중요한 진술을 발견하게 된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1:1과 같은 말), “이 두루마기의 예언들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다니엘이 들은 말과 대조해 보라.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12:4). 그 일들이 5세기가 지난 후에야 일어났다.
3) 미래주의적 견해를 거부하면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를 준다.
이 위대한 책은 시작할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끝난다. 이 책에 있는 일들은 속히 될 일이며, 가까이 있으며, 문턱에 있으며, 이제 막 일어나려 한다. 1장의 서론에서 그것을 말해주며 마지막 22장의 요약에서도 같은 내용을 반복한다. 요한계시록은 하나의 책이며, 완전한 단일체이다. 요한계시록 전체는 요한과 동시대의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으며, 그들에게 적절한 것이었다. 또한 이 책은 그 이후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록되었으며, 그들에게 적절한 것이었다. 교회사가 이를 확실히 증명한다.
16장 영적 역사주의적 견해
1. 교회 역사주의적 견해
일종의 교회사 개요에 불과하다고 한다. 종교개혁가들 대부분의 입장이다. 저는 이 견해를 받아 들일 수가 없다. 지나치게 간략한 설명이며, 연속적 역사주의적 견해가 가지고 있는 약점 중 일부를 이 견해 역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 연속적 역사주의적 견해
이 견해는 이 책에 기록된 요한에게 주어진 환상들이 실제로 일어날 일들을 상징한다고 가르친다. 인, 나팔, 대접들은 연대기적으로 꼬리를 물고 일어나 결국 종말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들을 나타낸다. 현재 우리는 계 16장에 묘사된 여섯째 대접의 시기에 있다고 한다.
반론- 저로서는 이 견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12장만으로도 이 견해가 옳을 수 없음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10장과 11장은 최후의 심판과 만물의 끝을 묘사한다. 12장은 성육신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연속적 역사주의적 견해가 옳다면 다시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견해의 또 한 가지 결함은, 이 견해를 위해서는 수 세기에 걸친 역사를 상세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하여 전문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대상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며, 수 세기 동안 이 책을 통해 유익을 얻었던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위대한 역사가나 전문가가 아니었다.
이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그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끝없이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 견해는 대단히 위험한 곳으로 가는 문을 열어 놓는다
성경의 특정한 진술들을 특정한 사실들에 대응시키는 것이 혼란을 일으킬 뿐 아니라 계시록 자체의 명예를 떨어뜨린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계시록 읽기를 그만두는 이유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해설들 때문이었음을 점점 더 확신하고 있다. 사람들은 수 세기에 걸쳐 이런 일을 해 왔으며 언제나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특정한 사건들이 나폴레옹이라 했고, 20세기에는 그것이 히틀러를 의미한다고 단연코 확신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해석법은 어떤 것도 참된 해석이 될 수 없다.
이 책의 가르침들은 특정한 사람이나 사건에 결부시키려 하는 순간, 영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심각한 위험에 빠진다. 이런 견해들은 대부분 영적이기 보다 정치적인 것처럼 보인다. 때와 시기, 특정한 사건들과 정치적 사건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이 책의 내용보다는 이런 것들을 더 강조하게 된다. 성경으로 <타임>지를 해석하고 성경뿐 아니라 타임지도 전하면 안 된다. 요한계시록은 영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적인 책이다.
3. 영적 역사주의적 견해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우리 주님이시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겪는 삶과 싸움과 최후의 승리에 대한 영적 원리를 제시해 주는 책이라고 가르치는 견해이다. 정확한 역사적 세부 사항들이 아니라 큰 원리들을 보여 준다. 이 원리들은 초대 교회 시절에 적용되었고, 지금도 적용되며, 마지막 최후의 심판에 이를 때가지 유효할 것이다.
1) 요한계시록은 교회를 향해 기록되었다
이 책은 요한이 받은 계시로부터 출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계1:1-2). 그것은 위대한 주제이다. 이 책의 도처에서 그것을 보게 된다.
교회를 향한 기록이고, 교회를 돕고, 위로하고, 자극하고, 세우기 위해 기록되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3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엄청난 도덕적 권면이 여기에 있다.
2) 요한계시록은 계시의 책이다
묵시, 곧 드러내는 것이다. 그 책 안에서 휘장이 벗겨지고, 우리는 특정한 일들에 대해 통찰과 이해를 갖게 된다. 이 사실을 꼭 강조하고 싶다. 지금까지의 해석들은 정반대 결과를 가져오고 너무 큰 혼란에 빠뜨린다. 초대교회는 핍박을 받고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은 당혹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장차 일어날 일들에 대해 그들의 눈을 열어 주기 위해 특별히 이 책이 주어진 것이다.
3) 요한계시록은 상징과 표징을 사용하여 진리를 드러낸다
명확하고 직접적인 의미가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계시이지만 동시에 부분적으로 감추어진 계시이다.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보다 “지시하신(signied)”이 원어에 가깝다. 지시하다(signify)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여기 사용된 헬라어 단어가 표징(sign) 혹은 상징(symbol)을 의미하는 헬라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계시록의 가장 첫 부분에 이 계시가 표징들을 통해 주어진다고 진술되어 있다. “하늘에---다른 이적(sign)을 보매”(계15;1)와 같은 표현을 책 전체에서 만나게 된다. 요한은 끊임없이 표징들을 언급한다. 계시록의 해석에 있어서 이것은 분명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계시록은 촛대로 시작하여 인과 나팔과 대접과 짐승 등을 언급한다. 진리가 전달되지만, 시각적 방법을 통해 전달된다. 또한 상징적 숫자들을 사용한다. 숫자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일곱의 숫자는 54번 사용된다. “한 때 두 때 반 때”, 삼 년 반, 마흔두 달, 열둘에 열둘을 곱한 수인 일백사십 사, 열, 열의 세제곱인 천 등의 숫자들도 상징이라는 수단을 통해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 숫자들은 분명 글자 그대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잊어 버리고 숫자들, 예를 들어 일천 혹은 “그것은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이니라”(계13:18) 등이 정확한 수를 뜻한다고 말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계시록 전체를 읽어 보면, 어떤 지점에서는 그 숫자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구원받은 사람이 144,000명만 있지는 않다. 그것은 100의 세 제곱인 일천과 마찬가지로 12를 곱한 완전수이다. 완전함의 숫자도 있고 칠 년의 절반인 삼 년 반처럼 부분적인 특성의 숫자들도 있다. 이것은 예언적 본문들이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언제나 사용하는 방법이다. 기계적이고 문자적인 정확성이 아니라 상징적 방법을 사용해 정확한 진리를 전달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상세하고 정확한 지식이 아니라 원리들이다.
우리의 복된 주님이시자 구세주께서 비유를 사용하실 때 하신 것과 똑같은 일을 요한계시록이 하고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다. 비유는 진리를 계시하지만 동시에 감추기도 한다. 비유는 진리를 직접적으로 말해 주지만 외인에게는 그 의미가 분명치 않다. 그림이나 숫자, 표징 등 상징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비유를 읽을 때 모든 세부 사항을 다 강조해서는 안 된다. 탕자의 비유에서 살찐 송아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는 따위는 어리석고도 얼빠진 입장에 도달하는 흔한 예이다.
이제 주님이 요한계시록에서 진리를 밝히시되 특별한 방법을 선택하셨다는 이 위대한 원리를 붙잡도록 하자. 요한은 로마 제국에게 고통을 받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 주제를 원리적으로 다루어야 했으며, 이를 위해 상징을 사용했다. 진리는 이 책 안에 원리의 형태로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특정한 사실들에 적용할 수 있다. 그 책이 특정한 사실들을 다루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하지만 교회에 반대하고 우리 복되신 주님께 대적하는 세력들에게는 공통의 원리가 있다.
4) 요한계시록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에게 교훈을 주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단순히 우리를 즐겁게 하고 호기심과 흥밋거리를 제공하고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책이 아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거예요. 현대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여기서 발견할 수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누가 적그리스도이다. 그 얘기 들어봤어요? 정말 대단해요”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수 세기에 걸쳐 그런 일들을 해 왔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그들을 위로하고, 위안하고, 교훈을 주고, 권면하고, 지지하기 위해 씌어졌다. 그 대상은 초대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그 이후 이 책을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이다. 이 책은 무서운 박해의 시기를 경험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강건하게 하고 지지하며 버티게 하는 힘이 되어 왔다. 종교개혁자들과 스코틀랜드의서약파와 청교도들 등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라. 그들이 이 책에서 자기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원리를 발견했기 때문에 전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4. 요한계시록의 개요
인위적인 구분이 아니라 자연적인 구분이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1) 1-3장 교회 가운데 나타나신 그리스도
이 세 장이 결합하여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가운데 계신 것을 본다. 교회들 가운데 계신다고 말할 수도 있다. 교회는 교회들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먼저 교회를 상징한다고 하는 촛대들 사이에 주님이 계신 위대한 환상이 나온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1:20). 일곱 교회가 일곱 개의 특정한 교회를 의미한다고 생각할 위험이 있다. 숫자들은 상징적인 것을 기억하라. 일곱은 완전수이다. 일곱 교회는 전체로서의 교회를 나타낸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또한 이 첫째 부분이 기독교시대의 전체 역사를 망라하는 듯이 보인다는 점에도 주목하라.
1:5에는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죽음과 부활로 시작된다. 하지만 이어서 7절을 본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기독교시대의 시작은 우리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다. 기독교시대의 끝은 마지막 심판이다. 그뿐 아니라 여기에는 구속받은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과 멸망한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이 나온다.
2) 4-7장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이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
여기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는 것에 주목하라. 4장과 5장에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묘사가 나온다. 4장에는 하늘에서의 위대한 장면이 나오며, 5장에는 하늘이나 땅에 능히 책의 인을 뗄만큼 위대한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스스로 놀라는 모습이 나온다. 그 때 천사가 선포한다.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5절). 두 번째 부분에서도 그리스도는 중심에 계신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십자가에 달리시고 살아나신 그분을 바라보게 된다.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6절). 또한 그분은 다시 살아나신다. 승리하셨다. 이번에도 교회를 위한 메시지를 가지고 계신다. 주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분만이 역사의 인을 뗄 수가 있다. 그분이 역사의 인을 떼고 역사를 펼치시는 것을 본다.
6장에서 우리는 곧바로 시대의 종말과 최후 심판으로 연결되는 역사임을 알게 된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6:12-17)
시대의 종말은 7장 3-17절에서도 나온다. 여기에는 5장에서 이미 살펴본 구속받은 자들의 놀라운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에서 나와 그들의 옷을 씼었다.
두 번째 부분이 본질적으로 첫 번째 부분의 정확한 반복임을 알 수 있지 않는가?
3) 8-11장
8장 1절에는 반 시간이 흐른 후 하늘에서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8장 전반부에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간구와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놀라운 장면이 펼쳐진다. 그 결과 특별한 일들이 벌어지고 우리는 일곱 나팔의 엄청난 환상을 만나게 된다. 나팔은 언제나 경고이며, 그 일곱 나팔은 심판의 경고이다.
8장의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10장 7절과 11장 15-19절에서 다시 한번 최후 심판의 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10장과 11장에서는 교회에 대한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 똑같은 일들을 다루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주님과 그의 교회, 세상에서 교회에 일어날 일들과 최후의 심판, 그리고 구속 받은 자와 멸망한 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4) 12-14장
여기에서 우리는 “아들”(12:5)이라고 표현된 우리 주님의 탄생에 대한 놀라운 묘사와 함께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주님의 첫 모습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님이 당하신 반대,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어떻게 하늘로 올리우시고 기독교 시대가 시작했는지 보여준다. 이어서 마귀와 마귀가 권세를 준 짐승, 바벨론 등 교회를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이야기는 마지막 심판으로 곧장 진행한다. 14장 8절에는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다시 한 번 같은 일을 바라보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중심에 계시고, 그의 백성, 그의 자손과 대적자, 최후의 심판, 구속받은 자들과 멸망한 자들이 등장한다.
5) 15-16장
이 부분 역시 하늘에서 시작된다. 다시 한 번 어린 양과 그의 백성이 나온다. 16장에서는 심판의 대접, 쏟아부어진 진노의 대접과 아마겟돈에서의 최후의 큰 전쟁에 대한 놀라운 묘사를 만나게 된다. 다시 한 번 최후의 심판에 도달하여 구속받은 자들과 최종적으로 멸망한 자들 사이에 동일한 구분이 지어지는 것을 본다.
6) 17-19장
바벨론, 두 짐승과 그들의 모든 추종자의 최종 멸망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반면에 구속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나타난다. 성대한 혼인잔치가 열린다. 다시 한 번 최후의 심판에 도달한다. 19장에서는 주님이 백마를 타고 입에서는 검이 나오는 모습으로 영광 중에 나타나신다. 그러므로 여섯 째 부분도 다시 한 번 본질적으로 동일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7) 20-22장
여기서도 같은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마귀의 심판과 파멸,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교회의 최종적 승리, 영원한 영광의 도래,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성이 이 부분만의 특징이다. 모든 일이 끝나고 완성된다 어린 양이 그 성 가운데 계시고 그의 빛, 그 얼굴의 광채만으로 충분하여 해나 달은 쓸데없어진다.
8) 결론-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와 마귀 및 그 권세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을 말해 주는 책.
세부 사항들에 과도하게 집중하지 않고 전반적인 인상에 마음을 연 채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이상의 내용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의 여러 부분들에는 반복의 원리, 즉 일종의 대구법이 존재한다는 것과, 책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공통의 형상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다. 그러므로 제가 말씀드린 방법을 따라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어 보시기를 부탁 드린다. 이론들과 세부 사항들은 잊어 버리고 전체적인 인상이 생겨나도록 노력해 보라. 그렇게 하면 여러분도 저처럼 그 책이 다른 어떤 의도로 기록되었든 간에, 분명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마귀 및 그의 권세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에 대해 말해 주려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시라라 생각한다. 그 싸움은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들어오실 때 시작했다. 헤롯으로부터 시작된 그 싸움은 그 이후 계속 되었으며, 주님이 마지막 승리를 거두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고도 확정된 승리이다.
17장 구속받은 자들의 고난과 안전
1.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반복의 원리
요한계시록이 자연스럽게 나누어지는 부분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1-3장, 4-7장. 8-11장, 12-14장, 15-16장, 17-19장, 20-22장이다. 이 각각의 부분에 병행구가 존재한다는 것, 즉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교회 이야기의 몇몇 요소가 반복되어 등장하는 것이다.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 그리스도, 그들이 겪는 특정한 경험들,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이 등장하고 각 부분의 마지막은 최후의 심판으로 마무리된다.
1)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병행 구절들의 예
여러 부분들에 병행구가 존재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반복되는 것이 더 있다. 시간을 나타내는 동일한 상징들이 8장부터 11장까지와 12장부터 14장까지에서 사용된다. 예를 들어, 계시록 11:2은 마흔두 달을 언급하고 있고, 3절에서는 1,260일이 나오는데 그것은 실제로 마흔두 달이다. 이어서 12:6에서 1,260일을 다시 언급하며, 14절에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즉 일년, 이년, 반년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또한 삼년 반, 마흔두 달 혹은 1,260일이다. 그리고 13:5에도 마흔두 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러므로 제가 같은 사건이라고 말씀드린 일들에 대해 동일한 숫자, 동일한 기간이 적용된다. 반복하건데, 병행구가 존재한다. 한 가지 형태로 아미 말한 일을 다른 형태로 다시 말하고 있다.
반복의 원리에 대한 또 하나의 예는 장차 있을 큰 전쟁에 대한 언급들이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이것을 그 전쟁(the battle)이라고 부른다. 계시록 16:14, 19:19절, 그리고 20:8에서 그에 대한 언급들을 찾아볼 수 있다. 배경은 다르지만, 세 번에 걸쳐 같은 전쟁이 언급된다.
또 하나의 인상적이며 아마도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8장과 9장의 나팔을 부는 사건과 16장의 대접을 쏟는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어보면 똑같은 일들이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나팔에서의 땅과 첫 번째 대접에서의 땅, 두 번째 나팔에서의 바다와 두 번째 대접에서의 바다, 세 번째 나팔에서의 강과 샘과 세 번째 대접에서의 강과 샘, 네 번째 나팔과 네 번째 대접에서의 해가 대응한다. 다음 다섯 번째 나팔과 다섯 번째 대접에서는 짐승의 보좌가 등장하며,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나팔과 여섯 번째 대접에서는 유브라데 강이 나온다. 이것은 즉각 주의를 기울여야 할 사실이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주장을 지지하는 대단히 강력한 논증이다. 첫째, 요한계시록에는 반복, 혹은 대구의 원리가 있다. 둘째, 이 책의 여러 부분은 진리의 특별하고 다앙한 측면을 전달하기 위해 동일한 일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다.
2) 예언서가 대구법을 사용하는 이유
다니엘서 2장에는 머리, 가슴, 팔 등의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큰 형상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이것은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네 짐승과 똑같은 것에 대한 묘사이다. 이 두 장은 분명 똑같은 거대한 제국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 말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니엘서의 반복은 인정하면서도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왜 다니엘은 두 가지 묘사를 했을까요? 왜 같은 것을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했을까요? 2장에서 한 말에 뭔가를 덧붙여 해야 할 말이 7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선지자들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그들은 뭔가에 대해 담대하게 진술한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서 약간 다른 용어 혹은 상징들을 사용해 이미 말한 내용에 뭔가를 덧붙인다.
2.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의의
계시록 전체를 상세하게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저는 단지 우리가 이 책의 일반적인 메시지, 특히 우리 주님이시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시기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지 이해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세부 사항들은 남겨 놓고 개요와 해석 방법만 제시하도록 하겠다.
1) 요한계시록의 두 단락
일곱 부분을 다시 두 개의 큰 단락으로 무리지을 수 있다. 그 분기점은 12장 초반이다.
첫 번째 주요 단락은 처음 세 부분, 즉 1-3장, 4-7장, 8-11장으로 구성된다. 두 번째 단락은 12-14장, 15-16장, 17-19장, 20-22장의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12장을 보자. 이 장이 우리를 기독교 시대의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만들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장은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여기에서 아들로 묘사되어 있는 분의 탄생으로 우리를 돌아가게 한다. 하지만 마귀는 성육신하기도 전에 그분이 탄생하는 순간 죽이려고 결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서들에서 마귀가 어떻게 해롯 왕을 통해 그 일을 하려 했는지 알고 있다.
단락 구분의 분기점- 12장
여기 12장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를 죽이려는 마귀의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어서 이 “아들”은 하늘로, 하나님과 그의 보좌 앞으로 올려간다. 이는 분명 우리 주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완벽한 설명이다. 그와 관련하여 하늘에는 전쟁이 있으며(7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9절) 큰 용이 쫓겨난다. 주님이 이미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12:31)고 말씀하신 바 있다. 둘의 대응관계를 알겠는가? 이 일은 그 때 정말로 일어났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수반하여 사탄이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나는 일이 일어났다. 이어서 계시록 12장은 마귀가 여자와 “여자의 남은 자손”(17절)에게 그의 원한과 분노를 돌린다고 말한다. 이 남은 자손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들, 여자가 낳은 성자께 속한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마귀는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12장에 대한 해석이다. 12장은 다시 한 번 우리를 처음으로 데려간다. 이 사실은 계시록을 첫 열한 장과 두 번째 열한 장이 두 단락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계시록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두 단락의 차이를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명확하고도 두드러진 차이가 있으며, 계시록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차이를 인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첫 번째 부분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인간 세상에 대항하여 싸우는 기사가 나온다. 그것이 첫 번째 부분의 메시지이다. 하지만 12장부터 시작되는 두 번째 부분에 이르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거의 교회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세상의 배후에 있는 악한 권세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보게 된다. 즉, 마귀와 그의 모든 조력자나 연합하는 세력과의 싸움이다. 12장까지는 마귀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는 물론 사람들의 배후에 있지만 12장에 이르기까지는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두 번째 단락은 더 깊은 차원의 투쟁, 즉 마귀와의 투쟁을 보여준다
두 번째 부분은 첫 번째 부분과 똑같은 역사를 다루지만 더 깊은 차원의 투쟁을 보여 준다. 그것은 같은 투쟁이지만 첫 번째 부분에서는 단지 사람들 사이의 싸움으로 나타나는 반면, 두 번째 부분에서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6;12)에 대한 싸움으로 나타난다. 교회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우리는 불신자들과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대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때로 이것들이 때로 우리의 삶을 얼마나 어렵게 만들 수 있는지 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그들 개개인이 단지 세상의 배후에 있는 큰 권세의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 마귀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각인시켜 준다.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래서 혼란에 빠지게 되고,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은 다른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커다란 영적 전쟁의 눈에 보이는 부분일 뿐이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말하자면 도구로 사용된다.
2) 요한계시록의 의의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의 최후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표면적 묘사와 보다 깊은 묘사가 모두 나와 있다. 그것은 같은 사건, 같은 역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복과 대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성경 전체에서 요한계시록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책도 없다는 것을 즉각 알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 주제는 큰 투쟁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요한계시록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의 최후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승리가 각 부분에 모두 나타나 있다. 승리를 위해 마지막까지 기다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 책은 우리에게 “그렇다. 이 일이 너희에게 일어날 것이지만 문제 없다. 주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고 너희는 승리할 것이다”라고 말해 준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우리의 것임이 분명한 그 승리의 영광을 드러내 보여 주고, 그 때까지 세상은 우리를 매우 잔인하게 다룰 수도 있고 심지어 우리를 죽이기까지 할 수도 있지만 결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실제적 교훈을 담고 있다
계시록은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한 것과 똑같은 내용을 특유의 회화적이고 극적인 방식으로 말해주는 책이다. 그것은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더 이상 성도들이 갑자기 휴거된 후 지상에 남아 있을 일부 사람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또한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때와 시기와 날짜들에 대한 일종의 직소 퍼즐이 아니다. 이 책은 모든 시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해 왔다. 그들 모두 이러한 일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은 살아 있고, 생생하며, 영적인 책이 된다. 이 책은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경험에 말하는, 그리고 여러분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도록 돕는 영적인 책이다. 이 책은 위로만이 아니라 경고와 교훈도 담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실제적이고 매일매일 꼭 필요한 책중 하나가 된다.
3. 1-3장의 내용 분석
1) 일곱 교회-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모든 교회의 상태에 대한 묘사
여기에 교회 가운데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묘사되어 있다. 일곱 교회는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일곱 개의 특정한 교회인가? 아니면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여러 시대와 시기의 교회의 일반적 상태를 묘사한 것인가? 둘 다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일곱은 완전수이므로, 여기에는 초림부터 재림까지 기독교 교회의 전체 상태에 대한 기사가 나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사 전체를 읽어 보면, 지상의 보편적 교회 안에서 일곱 교회들에 보낸 편지의 묘사와 일치하는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를 발견하게 된다. 라오디게아는 우리 주님이 오시기 전 끝 무렵에 있는 교회의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이 있기 전에도 더할 나위 없이 라오디게아 같은 교회가 있었으며, 그 이후 개신교 교회도 여러 차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줬다. 이백 년 전 복음주의적 각성이 있기 전의 영국 교회도 전형적인 라오디게아 교회였다. 이제야 교회가 라오디게아의 상태로 들어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말이다. 에베소 교와 같은 교회도 현재 존재한다. 서머나 교회 같은 교회도 존재하며 나머지 교회들도 마찬가지이다. 계시록 1장부터 3장까지에 나오는 모든 교회는 언제나 존재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의 어떤 모임이든 그 안에는 일곱 교회에 대한 묘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곱 교회를 향한 편지는 언제나 새롭게 느껴진다. 그것이 첫 번째 부분의 핵심이다.
4. 4-7장의 내용 분석
1)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
4장과 5장에는 하늘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장면이 나오며, 하나님의 영광과 힘과 엄위하심과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을 희미하게나마 보게 된다. 그 다음 세계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봉인된 책이 있는데 그 인을 제거할 만큼 강한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울기 시작한 요한에게 천사가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5:5)라고 말한다.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6절). 그렇다. 그 분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주님, 승리하신 주님, 영원하고 위대한 왕이신 주님이시다.
5장은 우리 주님이 역사의 주님이시라고 말한다. 주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 요한계시록은 우리 주님이 보좌에 계시며, 그분이 주인이시며, 모든 원수들이 그의 발등상 되기까지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2) 일곱 인의 환상
6장에서 요한은 우리를 인을 떼는 장면으로 인도한다.
첫째 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활을 가지고 흰 말을 탄 사람을 보게 된다. 19장에서 비슷하게 묘사된 바로 그 인물이다. 그분은 주 에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우리 주님이 말을 탄 자이며 그 때문에 그분의 말은 흰색이다. 그분은 복음을 시작하셨으며 자기의 말씀을 보내신다.
둘째 인- 핍박 받는 그리스도인
붉은 말이며 거기 탄 자는 “큰” 칼을 받는다(4절). 붉은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핍박을 받고, 심지어 죽임 당하기까지 하는 것에 대한 묘사이다. 여기서 칼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학살이라는 개념을 전달한다. 그것은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공격에 사용되는 짧고 넓은 칼이다. 그것은 큰 전쟁이 아니라 때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성도들의 핍박을 상징한다. 붉은 말을 탄 자가 흰 말을 탄 자의 뒤를 따른다. 그것이 순서이다. 말씀이 전해지고, 이어서 반대가 온다.
셋째 인- 그리스도인이 겪는 가난의 고통
밀과 포도주와 감람유가 있지만 오직 부자들만 그것을 살 여유가 있다. 기독교는 노예들과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시작되었으며, 어려움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포도주와 기름을 살 돈이 없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시사하는 모습은 결핍과 빈곤이며, 교회의 오랜 역사를 읽어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가난을 겪어야 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넷째 인- 전쟁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연루된 신앙의 대충돌 즉 종교 전쟁이다. 6장에 나오는 장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주님이 보내신 말씀을 받은 사람들의 고난을 묘사한다.
다섯째인- 순교 당한 성도들의 외침
어떤 영혼들이 제단 밑에서 “주여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10절)라고 부르짖는 모습이 나온다. 자신들의 믿음으로 인해 순교를 당한 그리스도인들이 외친다.
여섯째 인- 대적 자들에게 임하는 심판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에게 대적하는 권세들에게 임하는 장엄하고 극적인 심판이 묘사되어 있다.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같이 검어지고-예언서에서 심판을 묘사할 때 종종 사용하는 어휘이다- 달은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떨어진다. 이것은 하늘이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는 엄청난 대격변의 심판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이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우리를 가리라” 누구에게서 가리라는 말인가? 놀라운 대답이 이어진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계6:15-17).
3) 인침 받은 하나님의 백성
계 7:1-3,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이 마지막 심판이 임하기 전에 모든 그리스도인의 머리에 인이 쳐지고 하나님의 백성은 안전하게 지켜질 것이다. 다음 절에 ,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다. 9절을 읽어보라.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그러므로 4절에 나오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이다. 그것이 144,000명의 유대인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144,000명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들
성경에서 상징적 숫자에 관례적으로 부여되는 의미를 살펴 보자. 먼저 숫자 3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나타낸다. 네 짐승의 경우 등장하는 숫자 4는 온 땅, 인류 전체를 나타낸다. 삼과 사를 곱하여 얻어지는 열둘은 온 세상에 관심을 가지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나타낸다. 삼위 하나님은 옛 세상과 새 세상에 관심을 가지셨다. 구약에는 열두 지파가 있으며, 신약에는 열두 사도가 있다. 열둘에 열둘을 곱하면 144이다. 또한 성경에서 10은 언제나 완전의 수이다. 계시록을 연구할 때, 이 숫자를 유의해서 살펴보면 언제나 전체, 완성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10의 세 제곱인 1,000은 절대적인 완전함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144,000은 모든 것의 최고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복되신 성삼위일체의 구원사역, 즉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모두 함께 모인 온전함과 완전함을 의미한다.
18장 나 팔
1. 8~11장의 내용 분석
1) 일곱 나팔의 환상
일곱 째 인은 연속되는 나팔들의 도입부가 된다. 8장에서는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모습이 나온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공급하시는 향이 기도에 더해진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주님의 향으로 덮여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것이 된다. 주님의 인격과 그의 완전한 사역이라는 향을 통해 올라간다. 연속되는 나팔 소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결과로 시작된다.
나팔은 부분적인 파괴를 가져온다
자연환경과 배들의 삼분의 일에만 영향을 준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8:7)
다른 나팔의 경우에도 바다의 삼분의 일, 바다 속 피조물의 삼분의 일, 배들의 삼분의 일, 강과 샘의 삼분의 일이 영향을 받는다. 16장에서 대접이 쏟아질 때는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
나팔의 의미- 핍박자들에게 부어지는 심판
성경에서 나팔은 언제나 심판과 형벌에 대한 경고를 의미한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9:20-21)
나팔의 형벌을 내리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이 세상에서 불경건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취하신 행동의 결과로 일어난다.
첫째, 둘째, 셋째 나팔- 핍박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
우박과 불이 피와 섞이는 상징적인 방법으로 지진, 화산, 홀수 같은 재앙들이 하나님의 손 아래 있으며, 이들은 죄를 벌하시고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형벌이 있음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중의 일부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나팔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에 애굽에게 가해진 재앙들과 대비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되고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는 홍해에서 멸망했다.
주님의 초림이래 인간 세상이 교회를 핍박해 왔다. 그 세상에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다. 끔찍한 사건들과 재난들과 유행병들이 있었다. 어떤 것은 땅에서 일어났으나 어떤 것들은 바다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둘째 나팔이다. 어떤 일들은 강과 샘과 관련하여 일어났다. 그것은 세 번째 나팔이다.
넷째 나팔- 하늘에서 내린 재앙
“네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8:12)
예를 들어 유성들이 지구에 떨어져 수많은 사람들 태워 버린다. 천둥과 번개와 다른 끔찍한 재앙들이 하늘로부터 땅을 덮친다. 성도들을 핍박한 죄를 벌하신 이런 하나님의 심판들이 임했을 때 큰 무리의 사람들이 멸망당했다.
다섯째 나팔- 하나님이 마귀에 대한 억제 수단을 거두심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9:1-3)
우리 역사의 어떤 시기는 하나님의 모든 억제 수단이 거두어져서 마귀가 세상 사람들 가운데 마음대로 활동하도록 허락받은 것처럼 보인다고 말할 때 “마치 온 지옥을 다 풀어놓은 것 같다.”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로마서 1장에서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신 것과 같다. 하나님은 때로 이런 일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심지어 거의 일으키기까지 하신다.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 되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벌을 받아 정신을 차리도록 하기 위해 죄가 억제되지 않은 채 흘러가도록 허락하신다.
저는 20세기의 끔직한 도덕적 문제는 19세기에 사람들이 보여준 교만과 오만에 대한 하나님의 벌임에 틀림없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그들은 성경을 비평하고 자신들의 학문과 과학과 정치로 하나님을 대적하기 시작했으며, 하나님 없이도 낙원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금세기에 하나님은 억제 수단을 거두고 계신다.
여섯째 나팔- 끔찍한 전쟁
말들과 그 꼬리에 달린 해하는 것등을 읽어 보라(9:13-21). 말 혹은 황충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애처롭다 못해 비참하기까지 하다. 무기와 탱크와 장갑과 기타 현대 군사 장비를 사용한 현대전의 묘사와 거의 유사하다. 이 본문은 지난 수 세기 동안 많은 사람을 쓸어 없앴던 끔찍한 전쟁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 본문이 인류에게 그처럼 커다란 재앙을 가져온 이 큰 전쟁들이 때로는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사실을 가르친다는 것을 다시 강조해야 겠다.
여러분이 나팔들에 대한 기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커다란 위로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일어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설명할 방법은 오직 이것밖에 없다. 그 전쟁들은 독일 황제나 히틀러가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9장 끝부분의 말씀에 주목하라.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사람들이 재앙에 의해 회심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성령이 필요하다.
2) 복음에는 고난이 따른다
10장에는 흥미로운 말이 나온다. 요한에게 어떤 책이 먹으라고 주어지는데, 그가 그 책을 먹자 입에서는 달았지만 배에서는 쓰게 되었다. 구속의 은혜의 복음처럼 달콤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면 반드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복음은 고난과 핍박으로 인도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요. 다시는 인생에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리스도는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이전에는 우리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당혹해하거나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된다. 오히려 그런 일을 기대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증거다. 그들이 우리를 향해 가혹하게 구는 것은 우리가 변화되고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핍박받는 두 증인
11 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이 훨씬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두 증인을 본다. 그들은 말을 마친 후 어마어마하게 가혹한 핍박을 받는다. 저는 그 두 증인이 구약과 신약, 언제나 한데 결합되어 있는 율법과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율법은 복음을 준비하며, 복음은 그 광체를 율법에 비추어 준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11:8-10).
세상과 육신과 마귀가 복음에 강력하게 공격을 가할 때마다, 세상은 기뻐한다. 세상은 그것이 굉장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한다. 세상은 금세기에도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 종말이 오기까지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 사람들이 기독교가 끝장났다고 말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 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11:12-13).
4) 최후의 심판
11장의 결론부의 구절들은 다시 한 번 우리를 최후의 심판과 세상의 종말로 데려간다. 일곱 인들은 최후의 심판으로 끝났으며, 나팔들 역시 종말로 끝이 난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11:18-19)
5) 8-11장의 요약
여기에서는 일곱 인에서 다루었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역사적 시기를 다루었으나, 이번에는 하나님의 백성보다는 그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주로 살펴보았다. 경고와 위협과 심판이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을 것이며 결국 종말의 대절정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그 때, 그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그 때,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게”(살전5:3)될 것이다.
2. 12~14장의 개요
12장 첫 부분에서 우리는 여자, 즉 이스라엘에게서 난 아들의 성육신 사건으로 돌아간다. 주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롬1:3). 주님은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것이 주님을 낳는 여자의 의미이다. 즉시 주님을 죽이려는 시도가 행해지며, 결국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다. 하지만 주님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며, 그 다음에 그에게 반대하여 집결한 엄청나고 강력한 세력들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주님의 백성이 주님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여자의 다른 자손들인 주님의 자녀들을 대적한다.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엄청난 홍수가 몰려오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12장에서 14장까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적대자들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첫째는 용인데, 그는 다름 아닌 마귀 자신이다. 13장에서는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을 볼 수 있다.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넷째 짐승에 해당된다. 이것은 분명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에 반대하는 세상의 큰 세속적 권세이다. 즉, 그것은 지난 수 세기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한 세속 정부, 불경건한 세속 집권자들과 권세들, 왕들과 방백들, 왕조들과 제국들, 정부들을 나타낸다. 핍박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이래 어느 정도 계속되어왔으며,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다.
이어서 13장 11-18에는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새끼 양처럼 두 개의 뿔을 가지고 있고, 용처럼 말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거짓 종교이다. 짐승에게 권세를 주는 것은 바로 마귀이다. 첫 번째 짐승은 두 번째 짐승인 거짓 종교들에게 권세를 준다. 그들이 일으키는 모든 혼란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다.
14장에서 우리는 후에 “큰 바벨론, 음녀들의 어미”(17:5)라고 묘사된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기사를 읽게 된다. 바벨론은 분명 세상과 죄의 유혹하는 권세, 즉 세상에서 우리를 매혹하고 꾀어서 우리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떼어 놓는 모든 권세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오른 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은 모든 사람이 있다.(13:16-17). 그들은 교회의 반대자들이며, 용, 곧 마귀가 그들의 우두머리이다. 마귀는 세속적인 권세, 거짓 종교, 세상의 죄의 유혹하는 권세, 그리고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곧 오른손과 이마에 짐승의 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이용한다. 마귀는 상업을 지배한다. 성공하려면 그 표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당신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19장 최후의 심판
1. 요한계시록 후반부의 의의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한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 이것이 이 위대한 책 후반부의 주제이다. 후반부가 다시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특별한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를 그토록 위로해 주고 격려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핍박과 시련을 당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상태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볼 때 우울해진다. 불길한 예감들과 불확실함으로 가득차 있다. 그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이 바로 요한계시록, 그중에서도 특히 후반부의 메시지이다.
2. 12-14장의 내용 분석
1) 하나님의 일을 멸하려는 마귀의 시도
첫 번째 큰 반대자는 마귀 자신이다. 그는 12장에서 큰 용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늘에 또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3절). 12장 뒷부분에서 그는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묘사된다. 이것은 우리를 구약과 타락 이야기와 창세기의 타락 교리 전체와 연결시켜 준다.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께 대항하여 반역한 것은 마귀였으며, 그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와 계획을 망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 “둘째 아담을 그 싸움에” 보내신 것이다. 그리고 이 장에는 하나님의 일을 멸하려는 마귀의 노력들이 나온다. 여자가 “아들”(5절)을 낳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용이 그를 죽이려 했으나 그는 하늘로 올리워 간다. 우리 주님의 오심, 지상에서의 삶, 죽으심과 부활이 대단히 간결하게 묘사된 것이다. 이어서 마귀는 여자의 후손, 즉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서 그분께 속한 교회에게로 주의를 돌린다. 여기서도 우리는 위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백성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12:11) 마귀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보게 된다.
2) 마귀의 대행자들(13장)
첫 번째 짐승- 세속의 권력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더라”(13:1). 단 7장의 네 번째 짐승과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다니엘서에 기술된 네 마리 짐승의 모습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짐승은 하나님의 계획들을 좌절시키고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마귀가 사용하는 세상의 세속적 권력들을 나타낸다.
두 번째 짐승- 거짓 종교
이 짐승은 땅에서 나온다. 이것은 모든 형태의 거짓 종교를 묘사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새끼 양처럼 보이지만 용처럼 말한다. 참된 종교의 외양은 갖고 있지만 언제나 모순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세속적 권세와 영적 권세가 결합하여 하나의 종교적 권세를 형성한 것을 상징한다. 교회는 마귀와 직접 대결해야 하고, 정치적 권세들에 맞서야 할 뿐 아니라, 언제나 거짓 종교와 싸움을 벌려야 한다. 거짓 종교 혹은 기독교 신앙의 왜곡은 세속 권세만큼 위험하다. 로마 카톨릭 자체가 가장 큰 위험일 수 있다. 자유주의적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주요 신조들 대부분을 부인하면서도 공산주의가 종교의 가장 큰 적이라 말한다. 이 구절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이런 자칭 그리스도인들과 함께할 수가 없다. 거짓 종교와 제휴하는 것은 우리의 궁극적인 원수인 마귀의 진영에 합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로 다른 적대자들을 똑같이 사용한다.
이마나 오른 손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13:16). 이들은 눈멀고 무지해서 스스로 이 원수들- 세속적 권력들과 거짓 종교들-의 도구가 된 사람들이다.
큰 성 바벨론- 세속성
마지막 원수. 14장. 17,18장과 19장에 큰 음녀 바벨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그것은 세속성의 유혹하는 권세, 우리를 매혹시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지게 만드는 세상의 권세를 나타낸다. 바벨론은 마귀적이고 더럽고 추하고 해로우면서도, 너무 매혹적이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이는 피상적 매력을 나타낸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4:10). “노년의 사도 요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 교회사에는 화형당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고 공개적인 적대 행위는 견딜 수 있었지만, 재물이나 안락함, 즐거움 등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넘어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3) 성도들에게 주는 위로
14장에 위로가 나온다. 인침을 받고 “그 이마에 아버지의 이름을 쓴” 1444,000명을 기억하는가? 그들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 곧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14:4)이다. 이 본문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설은 롬 8장이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4) 최후의 심판
14장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묘사로 결론을 맺는다. 여기서는 심판을 땅을 수확하는 낫과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이라는 말로 묘사한다.
5) 12-14장의 요약 및 의의
12장에서 14장은 대단히 중요한 연속된 장면들을 보여 주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사를 이해하는 첫 발을 내디딜 수가 없다. 오늘날의 교회 혹은 미래의 교회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진정한 적대자들을 이런 식으로 묘사한 후 계시록은 이 적대자들이 어떻게 최종적인 심판을 받아 정복당할 것인지 말해 준다. 그것이 바로 15장이 이후 나머지 부분의 메시지이다. 위로와 위안이 가장 넘치는 부분이다.
3. 15-16장의 내용 분석
1) 심판에 앞서 성도에게 주시는 놀라운 위로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잔이 채워졌다. 그들의 멸망의 끝을 볼 것이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15:2). 불은 언제나 심판을 나타낸다. 같은 문맥에서 다른 장면도 보인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15:2-3). 적대자들의 궁극적인 멸망에 대해 기술하기에 앞서 충성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는 복된 확신을 다시 한 번 말해주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2) 최후의 심판
심판의 순서
가장 덜 중요한 자들로부터 시작한다. 이마나 오른 손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다. 이어 16장에는 하나님이 어리석게도 마귀의 노력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과, 그들을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끌어내어 멸망으로 이끌고 가는 마귀의 조력자들에게 마지막 형벌을 내리시는 장면이 기술되어 있다.
일곱 대접의 심판은 완전한 멸망을 가져온다.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16:1-2). 8장 9장의 순서와 같다. 이번에도 첫째 대접은 땅에, 둘째 대접은 바다에, 다음에는 강과 물 근원에, 그 다음은 해에 쏟아지는 식으로 진행한다. 완전한 멸망이 임한다.
나팔은 경고이지만 대접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진다
항상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경고하신 다음에 벌하신다. 하나님은 수 세기 동안 전쟁과, 역병과, 지독한 부도덕의 시대를 보내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가공할 충만함으로 벌을 내리실 것이며, 앞으로 세상에 일어날 파괴에 비하면 과거의 대참사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4. 17-19장의 내용 분석
1) 바벨론에 대한 심판
17장에서는 바벨론- 큰 바벨론 혹은 큰 음녀 바벨론, 비밀,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에 대한 최후의 심판에 이르게 된다. 이 심판은 17장과 18장을 차지하며 19장 초반에 있는 감사 찬양의 이유가 된다. 화려한 옷과 부와 사치와 세상의 자기 자랑, 그리고 자기 자신과 그 안에 속한 위대한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교만, 이들은 모두 세상의 유혹이며, 왕이나 부유한 상인이나 평범한 사람을 모두 불러들이는 큰 음녀의 행동에 의해 생겨난 결과들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에 대한 완벽한 묘사가 나온다. 하지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읽어 보라.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도 남김없이 멸망할지 읽어 보라. 오! 우리가 이 가르침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다시는 세속성에 유혹받지 않을 것이다!
등을 돌리는 바벨론의 추종자들
바벨론은 옷이 벗겨질 것이다. 조롱을 받을 것이고, 진짜 모습인 마녀의 더러움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화장과 분이 벗겨지고 벌거벗은 추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이 장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으라. 바벨론을 위해 살고, 바벨론을 신뢰하고, 바벨론이 전부라고 말했던 모든 사람의 좌절을 보라.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을 보고 기뻐하는 성도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18:20). 우리를 비웃고, 손가락질하고, 바보라 부르던 세상, 우리의 삶을 편협하고, 가증하고, 답답하고, 꽉 막혀 있다고 깎아 내리며 자신의 멋진 인생을 자랑하던 세상, 하지만 그 세상이 갑자기 멸망해 버렸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계18:20-22)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 하더라”(계18:23-24)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고 한다.
2) 두 짐승의 멸망
19장 마지막 부분.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땅에서 나온 짐승. 세속적 권력들과 모든 거짓 종교들이 불 못에 떨어지고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19:20).
5. 20-22장의 개요
20장에서 새로운 부분이 시작된다. 마귀 자신의 심판과 최종적인 멸망의 기사가 나온다. 그는 모든 것의 우두머리이자 기원이며 하나님의 궁극적 적대자인 사탄이다. 그 사탄마저도 영원무궁토록 멸망의 못에 던지운다. 마지막 적대자가 심판을 받고 멸망했다. 21장과 22장에는 “의가 있는 곳”,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백성, 그의 신부인 교회로 나타난다. 어린 양과 신부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에 영원토록 영광 중에 거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20장 전천년설
1. 전천년설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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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천년설의 일반적인 가르침
그리스도는 초림 때 유대인 왕국을 세우려 하셨다. 유대인들은 그 나라도, 왕이신 그리스도도 거부했다. 유대인들은 벌을 받아 열방 가운데 흩어졌다.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는 재림 때까지 미루어져야 했다. 교회라고 하는 비밀이 계시된다. 교회는 구약의 유대인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일 뿐 왕은 아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여 열방을 복음화 시켜야 한다. 전세계가 복음화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시기가 끝날 때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고, 교회의 휴거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일어난다. 이어서 환난과 적그리스도의 때가 올 것이며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들은 회심하고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환난이 끝나면 예수님과 그의 성도들은 원수들에게 심판을 내리기 위해 돌아올 것이며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이다. 이 때 살아있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양과 염소가 분리되고, 적그리스도는 멸망하며, 사탄은 천 년 동안 묶일 것이다. 환난 동안 죽은 성도들은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 그의 보좌를 세울 것이다. 성과 성전이 재건되고 단과 제사의 의식법이 회복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 땅의 모든 열방 위에 지극히 높은 분이 될 것이다. 죄의 결과는 제거되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울 것이다.
더 나아가 전천년설은 유대인들이 위대한 전도자가 되고 엄청난 회심이 일어나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될 것이라고 한다. 모든 이스라엘 역시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천 년이 끝날 때 사탄은 잠시 풀려 곡과 마곡이 하나님나라에 맹공격을 가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에 멸망할 것이며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 다음에 나머지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 심판을 받고 교회는 하늘로 옮겨 갈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지상에 남을 것이며 그리스도가 그들의 영원한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다.
2) 전천년 학파 내의 다양한 의견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기 전에 회심할 것이다.
돌아간 후에 회심할 것이다.
다비는 칠 년이 될 것이다.
벵겔은 이 천년이 될 것이다.
대부분은 일천 년을 주장하기 때문에 “천년설”이라고 한다.
2. 전천년설의 역사
원래 유대인들의 것이었으며, 기독교 시대의 첫 3세기 동안 보편적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상당히 흔하게 주장되었다. 성 어거스틴은 천 년을 교회시대로 해석함으로써 이 견해를 잠재웠다.
전천년설은 종교개혁 시대에 재침례파 사이에서 다시 나타났으나,
개신교의 모든 위대한 신앙고백들은 그 이론을 정죄했다.
이 이론은 17세기 제 5왕국학파(아시리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에 이어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다섯 번째 왕국이 도래해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천 년 동안 통치하리라고 믿었던 청교도 종파) 사이에서 다시 등장했으며, 19세기에도 나타났다. 그 이래 그것은 대단히 대중적인 견해가 되었으며, 많은 복음주의 단체는 전천년설을 재고의 여지 없는 신앙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3. 전천년설에 대한 일반적 반론들
전천년설은 적어도 두 번의 부활과 적어도 두 번의 심판을 가르친다.
사람들이 단 한 가지 견해만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한탄스러운 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그 견해가 겨우 일백 년 전에 생겨난 것이라는 점도 알지 못한다.
1) 전천년설은 복음서나 서신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 가르침은 계 20장에만 나온다. 성경의 통일성을 믿는다면 성경 전체가 하나로 움직인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2) 전천년설은 영적인 나라가 아닌 물질적인 개념의 왕국을 강조한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다스리신다는 왕국의 지상적 측면을 강조한다. 주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서와 주님 자신의 가르침을 읽어 보면, 그 나라는 영적인 나라라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신다. 서신서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강조된다.
3) 전천년설은 하나님 나라를 미래로 연기한다
그들은 우리가 교회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지금 이 순간에는 교회의 머리일 뿐 왕이 아니라고 말한다. 현재는 왕국이 존재하지 않지만 천년 통치 기간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 한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3).
4) 전천년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을 재도입한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영구적인 구분이란 영원히 없다. 영단번에 사라졌다.
5) 전천년설은 재림이 여러 차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주님은 적어도 두 번 오신다. 사전 휴거를 믿는다면 세 번이다. 하지만 신약 성경은 우리 주님의 재림이 딴 한 번만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죽은 자들이 모두 살아나고 최후의 심판이 벌어지는 그 재림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두 번의 부활, 즉 최소한 천 년의 간격을 두고 선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이 있는 것이 된다. 주님은 선인과 악인이 동시에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그러므로 두 번의 부활이 있으며 그 사이에 천 년의 간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명백한 가르침과 신약 성경 도처에 나타난 부활과 마지막 날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가르침에 모순된다.
6) 전천년설에서는 영화된 성도와 육체 가운데 있는 성도가 지상에서 동시에 살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 죽었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아 그 몸이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빌3:21) 변한 영화된 성도들과, 아직까지 죽지 않아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지상에서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7) 전천년설의 천년왕국에는 죄인들이 여전히 존재해야 한다
죄인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면, 계 20:7-9에 묘사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겠는가?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8) 천년왕국의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수많은 무리가 갑자기 생겨나야 한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천 년간 살고 다스린 후에 사탄이 갑자기 온 세상으로부터 바다의 모래와 같은 많은 무리를 일으켜 그리스도와 싸우고 주님을 격렬히 대적하도록 만든다는 것이 생각할 수 있는 일인가?
9) 전천년설은 베드로후서 3장의 가르침과 모순된다
- 베드로는 천 년 통치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베드로가 아는 것이라곤 주님의 날이 큰 불을 가져와 우리가 아는 세상이 멸망당하리라는 것뿐이다. 악과 죄는 세상에서 타 없어져 버릴 것이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주신 것이니라”(벧후3:7). 이 일은 동시에 일어난다. 그 다음에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13절)이 온다.
- 베드로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벧후3:10). 그리스도가 영광의 몸으로 지상에 천 년간 임재하신다면, 그 날이 어떻게 “도둑같이” 올 수 있겠는가?
- 베드로는 성도들이 심판과 멸망의 날인 하나님의 날을 고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날은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절)이 될 것이며, “물질이 뜨거운 물에 풀어지는”(10절) 대화재의 날이 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멸망할 것이다.
4. 요한계시록 20장 자체의 반론들
1) 요한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묘사했다
지상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번도 없으며, 팔레스타인에 대한 언급은 더더욱 없다. 예루살렘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2) 요한계시록 20장은 일관되게 상징으로 해석해야 한다
20:1-2,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쇠사슬은 상징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사탄은 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그들은 상징으로 해석하기를 거부한다.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모든 것은 분명 상징이다. 어떤 이론에 유리하도록 하기 위해 취사선택하는 것은 참된 해석의 방법이 아니다.
천 년은 완전한 기간을 상징한다.
천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기간, 총체적 기간을 말한다. 계시록에서는 “천”이라는 말을 여러 가지 용례로 사용한다. 이 숫자가 언제나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갑자기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인가?
3) 요한은 육체와 분리된 영혼들을 목격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4절).
4) 천 년의 기간이 최후의 심판보다 먼저 온다.
우리는 천 년 통치 기간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기다린다.
5) 사탄의 결박은 악과 죄가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21장 후천년설과 영적 견해
1. 후천년설의 내용
1) 후천년설의 내용
천 년의 기간이 지나간 후에야 재림이 일어난다는 주장.
지금 일어나는 일과 천년왕국에서 일어날 일 사이에 전혀 중단이 없으며, 현재의 시대가 이 엄청난 시대(비범하고 특별한 축복의 기간, 엄청난 성령의 부으심이 있고, 큰 선교와 전도 운동이 일어나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심함)로 연결될 것이다.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사11:9) 긴 시기가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회심하고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 영광스런 황금기가 끝날 때 마귀가 풀려나는 짧은 시기가 있을 것이다.
이어서 큰 핍박과 환난이 이어지고 그 끝은 우리 주님의 오심과 현재의 하늘과 땅이 멸망하고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최후의 심판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2) 후천년설의 역사
교회의 긴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나타난 견해지만, 18세기 초에 살았던 휫비라는 사람이 대중화시켰으며, 1720년부터 1830년경까지 단연 가장 인기 있는 견해였다. 사실상 19세기의 모든 위대한 개신교도들과 보수적인 복음주의 주석가들이 이 견해를 견지했다.
3) 후천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근거 구절들
다니엘 2장, 신상이 돌에 맞았는데 이 돌이 커지기 시작해 온 세계에 가득한 태산을 이루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가 오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다.
4) 후천년설에 대한 반론들
후천년설은 시대적 상황에 영향 받아 만들어진 이론이다
19세기에 그들은 멋진 선교 운동을 보았으며, 그들에게는 마치 교회의 황금기가 마침내 바로 가까이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성경은 종말이 오기 전 황금기가 아닌 환난의 시기가 온다고 가르친다.
후천년설은 종말이 대격변과 함께 오리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2. 계시록 20장의 영적 해석
1) 반복의 원리
요한 계시록은 동일한 사건을 반복해서 언급한다.
요한 계시록은 일곱 부분으로 나눠지고, 각 부분은 재림과 최후의 심판으로 끝맺음한다.
종말은 19장에 이미 묘사되어 있다.
20장은 특별히 마귀의 멸망을 기록했다.
2) 사탄의 결박은 무슨 의미인가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1-3절)
사탄의 결박은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시작되었다.
문자적인 구덩이나 그 덮게, 문자적인 쇠사슬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눅 10:18,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요 12:31-33,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주님이 십자가에 들리시고 죽으실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날 것이다.
히 2;4, “마귀를 멸하시며”, 요일 3:8,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멸하시는” 것은 효력이 없어지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탄의 “결박”은 분명 우리 주님의 초림 때 시작되었으며, 그것이 계 20:2의 의미이다.
주님의 초림 이후 복음 전파는 사탄이 더 이상 열방을 미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 28:18-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제자들을 보내어 성령의 능력과 권능과 권위로 모든 족속을 제자 삼게 하셨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족속이 그 이후로는 미혹을 받지 않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참이다.
복음의 빛이 퍼져 나갔다. 하나님 나라의 소식은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었으며 계속해서 전파되고 있다. 장차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저는 사탄이 결박당하여 던져지고 더 이상 이전과 같이 만국을 속일 수 없다는 구절을 기독교 시대의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복음 전파의 역사는 계시록 20장 3절을 증명한다.
3) 첫째 부활은 무엇이며 누가 참여하는가
첫째 사망은 자연적 사망을, 둘째 사망은 불 못에 던져지는 것을 말한다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니 이는 첫째 부활이라”(4,5절)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6절)
첫째 부활은 중생을, 둘째 부활은 육체의 부활을 말한다
4)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천 년 간의 왕 노릇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이 땅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그 일을 지금 하고 계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장차 그 권세를 가지게 되실 것이 아니다. 현재 가지고 계신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빌2:9-11)
후천년설은 이 영광스러운 진리를 손상시키는 이론이다
모든 것이 그분의 손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목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지금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고 있다.
천 년은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체 기간이다
그것은 완벽한 시간적 길이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그것은 문자적인 천 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이 자기 발등상 되기까지 다스리시다가 최후의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시기까지의 전체 기간을 말한다. 물론 이 기간이 끝날 때 매우 심한 핍박의 기간이 잠깐 있을 것이다.
계 20장은 특별히 주님이 사탄을 어떻게 붙잡으실 것인지를 설명해 준다. 사탄은 결박을 당할 것이며, “불과 유항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10절) 사탄은 멸망했다. 대심판, 최후의 심판은 벧후 3장의 큰 불 및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성도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원하고 영속적인 상태가 도래하게 한다.
5) 결론- 어느 해석이 성도들에게 가장 큰 위로를 주는가
세 가지 견해 중 어떤 견해가 이 책의 수신자인 1세기 성도들에게 가장 큰 위로를 주었을 것이며, 그 이후의 성도들에게도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지 생각해 보라. 오늘날 우리를 격려할 수 있는 것은 어떤 해석인가? 우리가 이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살펴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와 이해력을 주시기를, 그 무엇보다 겸손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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