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시리즈 2 성령하나님과 놀라운 구원
1장 성령의 인격
서론
성경은 장별로 죽 읽어나가라고 권장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위대한 교리들을 구원의 계획에 따라 살펴보는 것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교회는 처음부터 그렇게 해왔으며, 요즘의 교회가 이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비극이다.
성경을 통독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나무 때문에 숲을 보지 못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성경의 목적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해 주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를 연구하는 것만큼 성경의 독특하고 신적인 영감을 놀랍게 증거해 주는 것은 없다.
교리 연구를 통해서 성경이 하나의 책인 것을 알게 되고,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저자들에 의해 쓰여졌지만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의 메시지에는 놀라운 일관성이 있어서 한 가지 주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다.
인류가 타락한 순간부터 하나님은 구원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하셨으며,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을 단계별로 보여준다.
성령의 교리도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교리이며,
성경의 두 번째 구절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가르침은 이후 계속해서 나온다.
이 놀라운 통일성은 성경의 독특하고 신적인 영감성과 무오성의 증거이다.
1. 성령에 대한 교리
위대한 구원계획에서 성령은 구원의 적용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수행하신 그 위대한 구원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고
우리 안에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실행자이시다.
1) 성령의 교리 역사
기독교 초기 수세기 동안은 성령의 교리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성자의 인격에 공격이 가해졌고, 교회는 성자의 교리를 수호하고 확증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느라 그랬다.
종교개혁은 성령의 교리를 재발견한 시기이기도 하다.
워필드는 존 칼빈을 위대한 성령 신학자라고 하였다.
로마 카톨릭의 체제에서는 성령이 무시되고,
사제직, 신부, 교회, 마리아, 성인들이 성령의 자리에 놓여졌다.
종교개혁은 이 위대한 교리를 재발견했으며,
성령의 교리를 가장 철저히 연구한 사람들이 17세기에 영국에 살았던 경건한 청교도들이었다.
성령의 교리에 대한 존 오웬이 저술한 두 권의 책보다 더 훌륭하게 기술한 작품은 지금까지 없었다.
토마스 굿윈과 다른 청교도들 역시 그랬으며,
성령의 교리가 그토록 철저하게 연구된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결코 없었다.
2) 성령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태도와 그 이유
오늘날 사람들은 성령의 교리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잘못된 방법으로 강조 또는 과장하는 입장을 취한다. 후자가 전자의 원인이 된다.
위조와 거짓과 과장을 싫어한 나머지 성령에 대한 모든 것을 멀리해 버린다.
예언, 종말, 재림에 대한 교리를 무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3) 성령의 교리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
복되신 삼위일체의 위대한 교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가 진실이라면 우리의 사고와 교리 속에서
성부와 성자께 드리는 것과 똑같은 열심과 경의를 성령께도 드리지 않는 것은 대단히 큰 죄이다.
오늘날, 어느 때든지 교회의 영적 생활이 저급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많은 사람이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과 성령의 사역에 대한 위대한 교리를 나타내는 찬송가들이 대단히 적은 것이 그 표시이다.
4) 성령의 이름들
성부와 관련시키는 이름들; 하나님의 영, 주의 성령, 하나님의 성령, 주 여호와의 영, 아버지의 성령.
성자와 관련시키는 이름들;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 주의 영.
직접적이거나 개인적인 호칭들; 성령, 성결의 영, 거룩하신 자, 생명의 성령, 진리의 영, 보혜사.
이름이 보여주듯 성령의 사역은 거룩함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적용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거룩함과 질서를 만들어 내시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 때문이다.
성령의 궁극적인 사역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다른 영들, 즉 악한 영들과 구분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2. 성령의 인격성
1)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이유
왜 성령을 하나의 힘이나 영향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가?
① 성령의 사역은 무언가 신비스럽고 은밀하기 때문에 성령을 영향력으로 생각한다.
성령은 은혜와 열매들을 만드시고 우리에게 은사들과 각종 능력들을 주시기 때문이다.
② “영”이라는 단어의 의미 때문에 성령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오해한다.
같은 단어가 숨결 혹은 바람, 능력 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③ 성령의 상징들로 인해 성령을 비인격적 존재로 오해한다.
비둘기 모양으로, 기름과 물과 불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④ 성령이 성부 및 성자와 함께 언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⑤ 헬라어의 “영”은 중성명사다.
그래서 영어 번역에서 himself가 아닌 itself로 번역하는 실수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2) 성령의 인격성의 증거
① 중성명사인 성령을 남성대명사 “그”로 지칭한다.
(요16: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② 성령을 성부 및 성자와 같이 동일시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이것은 세 위격의 하나됨, 하나 안에 계신 세 분을 말한다. (고후13:1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③ 성령이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언급된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행15:28).
④ 성경은 성령께 인격적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지식을 가지고 계심.
(고전12: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 성령은 주권적 의지를 갖고 계심.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성령은 마음을 갖고 계심.
“성령의 열매는 사랑”-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심.
“성령을 근심케 말라”-성령이 슬퍼하실 수 있음.
(고전6: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성령이 내 안에 인격으로 계심- 성화와 거룩함을 촉진함.
3. 성령에 대한 교리의 중요성
이 교리를 우리와 동떨어진 이론적인 문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교리는 실제적인 교리이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디에 있든, 어디로 가든 성령이 당신 안에 계신다.
또한 정말로 구원의 복을 누리기 원하신다면, 그 일은 당신의 몸이 성령의 전임을 앎으로서 가능해진다.
2장 성령의 신성
1. 성령의 인격성(계속)
1) 성령에게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었으며 “그가”
2) 성령이 성부 및 성자와 동일시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3) 성령이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언급됨으로써 “성령와 우리는”
4) 성령이 인격적 속성들을 가짐으로써 “지, 정, 의”
5) 인격적인 존재만이 행할 수 있는 행동들을 행함으로써
(고전2:10)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통달하는 것은 인격적인 존재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다. 성령이 말씀하신다.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이 간구하신다. (롬8:26)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증언하신다. (요15:26)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인도하신다. (요16:13)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허락하지 않으신다. (행16:6-7)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6) 성령의 직무는 인격적 직무다
성령은 보혜사라고 묘사된다. 주님은 요14:16에서 “또다른 보혜사”라고 하셨다. 보혜사란 우리의 옆에 서서 도와주는 분을 말한다. 동일한 단어가 대언자(요일2:1)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성령은 우리 주님 대신 오신 분이다. 성령은 우리를 지도하고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 거하신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요16:7).
7) 성령은 인격적인 대우에 반응하신다
① 우리는 성령께 거짓말할 수 있다. (행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② 성령을 모독할 수 있다. (마12:31-32)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③ 욕되게 할 수 있다. (히10:29)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
④ 근심하게 할 수 있다.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2. 성령의 신성
1) 성령의 신성의 증거
① 성경이 성령의 신성을 명확하게 주장한다.
아나니아의 사건에서 “(성령을 속이고)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② 성령의 이름이 하나님과 결부되어 있다. (고전12:4-6)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③ 하나님의 속성이 성령께 돌려진다.
“영원하신 성령”(히9:14), 편재성(시139:7), 전능하심-“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전지하심-(고전2:10)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14:26),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
④ 성령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신다.
창조-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새로운 창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살리는 것은 영이니”(요6:63).
영감을 주시는 일- (벧후1:20-21)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모든 성경은 성령에 영감되고 무오하게 통제된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진리를 주시고 사람들을 영감시키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부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롬8:11).
2) 성령과 다른 위격들과의 관계
①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위격이 영원히 동등이시고 공존하신다.
삼위일체 문제에 대하여 가장 지혜로운 처신은 그 분명한 진술을 인정하여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지만 그 복되신 신성 안에는 세 위격이 존재하며, 이 세 위격은 동등하시고 영원히 공존하신다고 말하는 것.
② 성자는 성부에게서 낳았으며,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온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③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
기독교회의 초창기에도 분열과 분리가 있었다. 첫 번째 중요한 분열은 11세기에 이 가르침 때문이었다. 전체 서방 교회(로마카톨릭과 개신교를 포함)는 이 가르침을 주장하였고, 동쪽 지역의 교회(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아들로부터 나오는 것”을 거부한다.
성령이 성부뿐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나온다고 말하는 이유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으로 불린다는 사실과 함께, 성령의 신성의 증거로 제시한 모든 논증이 이를 말한다. 주님은 성령을 보내실 분이 바로 자신이라고 하신다. 주님은 성부와 함께 하시며, 또한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과 똑같이 주님 자신도 성령을 통해 일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더 나아가 성경은 성령이 게신 곳은 어디든지 성부와 성자도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우리 주님은 그가 “보혜사를 보내실” 것이며, 그 결과 성부와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세 분은 언제나 함께 일하신다.
④ 성령은 언제나 성부와 성자에게 스스로 종속되신다.
(요16:13-14)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이것이 복종이고 사역의 분담이다. 성자는 자신이 성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하며, 성령의 사역은 성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서로가 상대의 영광을 반영한다. 그리하여 복되신 삼위일체라는 이 놀라운 교리의 신비를 엿보게 된다. 성령은 스스로를 가리고 숨기시는 것처럼 보인다. 성령은 언제나 성자에게 초점을 맞추신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지 시험해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성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알고 있는지 자문해 보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성령은 언제나 우리에게 성자를 가리켜 보여 주심으로써 간접적으로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성령 자신에게 과도하게, 비성경적 방법으로 집중한다면 쉽게 잘못된 길로 가 이단이 될 수 있다.
⑤ 결론.
성경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있는 위와 같은 역할의 분담,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한 종속의 관계에서 성부는 형체가 없으시고 보이지 않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시라고 가르친다.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도 볼 수 없는 이” 이 분이 바로 성부이시다. 성자는 볼 수 있게 나타난 신성의 모든 충만이시다. “그 안에서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이분이 바로 성자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피조물에게 즉시 작용하시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시다. 우리는 성령이 그의 능력으로 아들의 형상 가운데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셨다고 말할 수 있다.
성부는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분이시다. 성자는 눈에 보이는 분이 되셨으며, 성령을 통해 나에게 실제가 되셨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성부께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간다. 성자 하나님은 계시된 하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힘을 행사하시는 분이시다. 또는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 주님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3. 성령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
성령이 무엇을 하시는지에 대해서만 생각지 말고, 그분이 누구이신지 깨닫도록 하자. 성자가 베들레헴에서 아기로 태어나셨을 때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낮아짐과 겸손의 행동이었는지요! 하지만 복되신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 거하기 위해 오신 것 역시 마찬가지로 겸손의 행동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아지 못하느냐”(고전6:19).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그분을 근심하시게 할 수 있다. 성육신과 더불어 이 사실을 통해,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고, 구속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낮아지심을 기억하도록 하라.
복되도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여! 아멘.
3장 창조와 일반은총
1. 오순절 날 이전의 성령의 역사
1)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
오순절 성령강림은 하나의 전환점이다. 두 가지 위험이 있다.
오순절의 의미를 과도하게 중요시하거나, 과도하게 경시하는 것이다.
오순절 이전 성령의 활동에 대한 상반된 기록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한 구절들이 있는 반면,
한편으로는 오순절 날 이전에도 성령의 능력있는 역사가 벌어졌다고 말해주는 듯한 구절도 있다.
아래 진술은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았다는 것, 성령이 오시리라는 것, 이제 곧 성령이 오시려 하고 있다는것, 그리고 드디어 성령이 오신 위대한 날이 이르렀다는 것을 암시한다.
① 요엘서2장28절 이하에는 오순절에 대한 구약 성경의 예언이 있다.
베드로는 행2장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다. 겔32:26-27에도 예언이 있다.
② 눅3:16-17에서 세례 요한은 성령이 오실 것을 이야기한다. 요7:39,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행1:4,“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③ 행2장에 있는 오순절 사건 자체에 대한 기록
2) 오순절 이전 성령의 활동
① 창조.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성령은 세상의 창조에 관여하셨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를 통해, 성령에 의해 모든 것을 만드셨다. 복되신 삼위일체는 언제나 모든 사역에 함께하시지만 역할을 나누셨다.
② 창조의 유지와 보존. 사40: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시104편은 여호와께서 피조물로부터 자기 자신이나 자기 영의 능력을 거두신다면 모든 피조물은 쇠하고, 기울어지고, 소멸되어 죽는다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자기 영을 보내시면 만물이 소생한다. 성자도 성령을 통하여 이 일을 하신다.
③ 일반 은총. 일반 은총을 책임지고 있는 분은 성령이시다. 일반 은총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일반적 복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일반 은총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없이 성령이 행하시는 일반적 작용의 의미한다. 이를 통해 성령은 도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여 죄를 억제하고 사회생활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적 의를 증진하신다. 성령은 맨 처음부터 활동하고 계셨으며, 구원받지 않고 지옥으로 떨어진 사람들에게도 영향력을 발휘하셨다.
2. 일반 은총
1) 일반 은총이 나타나는 방식
“참 빛 곧 --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요1:9). 그 빛은 자연적 빛으로서 자연적 오성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양심에 있는 빛이며,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이 양심의 빛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일반 은총이라고 부르는 성령의 작용 중 하나이다. 이 빛은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그가 인류의 머리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빛을 태어나는 각 사람에게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정부와 국가. 동일한 일반적 빛이 정부, 법률, 롬13장의 “권세들”에도 나타나 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하나님은 국가들의 경계를 나누셨다. 통치자들, 지배자들이 있어야 한다고 정하셨으며,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않도록 정하셨다(롬13:4).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며,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이 모든 일을 하시고 유지하신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성령의 이런 영향 아래 있다.
여론.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여론, 일반적으로 일치된 의견이 존재한다. 사람에게는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의식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일반 은총의 표시이다. 만일 성령이 사람들 안에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인류는 타락과 죄의 결과로 인해 오래 전에 사라져 잊혀진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문화. 문화란 예술과 과학, 그리고 정신, 문학, 건축, 조각, 회화, 음악 등에 대한 관심을 말한다. 예술이 사람을 구속해주지는 못하지만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해준다. 셰익스피어나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들도 성령의 일반적 영향력, 일반 은총의 작용에 의해 그 재능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가진 재능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래서 문화로부터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찬양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문화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그런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가 아니라, 작품을 산출해 낸 사람들에게 예배와 찬양과 경배를 바치는 것이 문제이다. 하지만 일반 은총이란 관점에서 예술 작품들을 바라보면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인류에게 이런 일반적인 재능을 나누어 주셨기 때문이다.
특정한 행동에 따르는 악한 결과들. 사45장,“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이 말은 하나님이 죄의 창조자라거나 악의 창시자라는 뜻이 아니라 특정한 행동에 따르는 악한 결과들을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제하신다. 특정한 행동들이 특정한 고통스럽고 악한 결과들로 귀결되도록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런 것들이 일반 은총이 나타나는 방식들이다.
2) 일반 은총의 결과
① 죄인들에 대한 심판의 시행이 연기 된다. 어떻게 세상이 죄 가운데 계속 존재해 나갈 수 있는가? 그 답은 세상은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계속 돌아가도록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인간의 생명은 전체적으로, 또 각 사람에게 있어서 연장되고 있다. (롬2:4)“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벧후3:9)“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최종 심판을 선언하시는 대신 성령에 의해 세상이 유지되게 하신다.
② 죄가 억제되고 일정한 한계 내에 가두어진다. 성령이 사람들과 더불어 다투신다(strive with)는 것이다.
이 말은 “계속 존재하게 하다, 유지시키다”라는 의미와 동시에 하나님이 사람들이 너무 늦기 전에 자기들의 죄와 행위가 얼마나 극악한 것인지 알게 되도록 성령을 통해 간절히 권고하고 계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스데반은 “너희도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죄가 가장 추악하게 표현되는 것을 억제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러한 일에 내주시는 시간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성령은 특별히 죄를 억제하신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정부들과 다스리는 자들과 권세들을 세우셨다. 이것은 죄를 일정한 한계 안에 가두기 위함이다. 어떤 사람을 종교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일반 은총의 작용이다. 이것은 죄를 죄를 억제하여 일정한 한계 내에 가두시는 하나님의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리스 철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도덕과 의와 종교에 대한 관념들, 선함과 아름다움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모두 성령이 작용하신 결과이다.
(롬2:14)“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③ 하나님이 주시는 일반적인 복들이 전달된다. 우리는 일반 은총 아래에서 해나 비와 같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반적 복들을 받게 된다. (마5:44-45)“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행14:15-17)“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딤전4:10)“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영혼이 구원받는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인자하고 선하게 유지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순절은 전환점이다. 성령은 오실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세상에서 일하고 계셨다.
4장 오순절의 의의
1. 오순절 날 이전의 성령의 역사
앞 장에서 성령이 창조, 우주의 유지, 일반 은총에서의 역사의 세 측면을 보았다.
1) 오순절 이전의 성령의 활동(추가)
④ 특정한 사람에게 특별한 은사를 나누어 주심. 삼손, 모세와 70장로, 브살렐, 여호수아
⑤ 예언. 엘닷과 멜닷, 발람, 사울, 구약의 선지자, 모든 성경,
⑥ 신자에게 임하심. 다윗과 구약의 모든 성도들. 세례 요한, 엘리사벳, 사가랴, 제자들의 사역,
2) 규명해야 할 문제
어떤 구절들은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고, 어떤 구절들은 성령이 활발하게
활동하셨으며 놀라운 일들이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 일어나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2.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
1) 오순절 이후 일어난 변화
①주님이 오신 이후 성령의 사역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신약에 들어서는 순간, 주님의 오심을 이야기하는 순간 뭔가 새롭고, 특별하고, 추가적인 일이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세례 요한은 주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을 예언한다(마3:11).
②오순절에는 성령이 광범하게 부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은사의 부어짐, 광범위함, 값없음, 충만함이 강조된다.
③오순절 이후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었다.
(요14:17)“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④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커다란 하나됨이 일어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형성되었다.
행2장의 하나됨은 거대했다. 다양한 민족의 하나됨이 있었다. 사도들 또한 하나됨이 있었다.
같은 하나됨을 고넬료의 집(행10장), 사마리아 사건(8장), 에베소 사건(19장)에서도 볼 수 있다.
오순절에 일어난 일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로 결합된 것이다.
이 일은 우리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만 일어날 수 있다.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행20:28)는 주님이 하러 오신 일을 완수하기 전에는 존재할 수 없었다.
승천하신 순간 주님은 교회를 사시기 위해 필요한 일을 완성하셨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주님이 자신의 몸인 교회에게 성령을 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머리이신 주님께 성령이 주어진 것이다. 승천하신 후 열흘이 지나, 이제는 몸된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자기 영을 그 몸의 안과 위로 보내어
충만하게 하신 것이다. 성부가 약속하신 것이 그 일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사역을 완수하신 성자에 의해 보내졌다. 오순절 날 교회는 하나의 연합체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립되었다.
(고전12: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 모든 신자가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 날이 바로 오순절 날이었다.
2) 오순절과 교회
오순절 날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공적으로 출발한 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넬료 집의 성령 부어주심은 그들이 세례를 받아 예루살렘의 동일한 몸에 들어오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교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다루는 중요한 주제이다. 이전 세대로부터 감추어졌던 비밀은 이방인들이
함께 상속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며,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고, 이 세상에서는 그들을 통해 주님이 일하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히11:39-40)“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도 신자였으나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지는 못하였다.
그리스도가 아직 승천하지 않으셨고, 사역을 완수하여 아버지께 돌아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그들은 뒤로 밀려나 유보되어 있었던 것이다.
교회는 하나이며 그 이후 언제나 하나였다.
이것이 오순절 날에 일어난 일의 진정한 의미이며 중요성이라 할 수 있다.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의 의미(8장)-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함. 불완전한 종교를 바로잡기 위함.
에베소에서 일어난 사건의 의미(19장)- 복음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요한의 세례)를 바로 잡기 위함.
3) 오순절 사건의 핵심 의의
①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구주시라는 사실에 대한 최종적 증거를 주는 것이었다.
②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③ 교회에 더하여진 여러 민족이 이 몸의 지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주는 것이었다.
④ 신약 성경에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거하신다. 구약에서 성령은 사람들에게 임하셨다 다시 떠나셨다. 신약에서는 성령이 오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이며, 또한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 그의 충만한 가운데 계시다가, 전체 몸을 통해 그리스도로부터 오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몸의 지체이기에 성령은 완벽하게 우리 안에 거하신다.
4) 오순절 사건과 성령충만의 차이
오순절 날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이 동시에 성령으로 충만해졌고 그 결과 증거를 할 수 있었으며,
이 일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는 사실로 인해 종종 혼란이 일어났다.
오순절 날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나타난 것은 성령충만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한 몸으로 연합되는 것과 교회의 시작을 강조한 것이다.
특별한 현상이 일어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은 반복해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일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일어난 일이었기에 반복될 필요가 없었다.
성령충만은 반복될 수 있고 또 종종 반복되지만, 오순절 날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성령 충만이 아니었다. 거기서 일어난 일은 우리 주님이 자기 백성을 위한 사역을 마치고 부활하사 교회의 머리가 되셨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교회는 그의 몸이 되었으며 몸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 성령이 주어졌다.
(이 견해는 존스의 초기 견해인 것 같다. 후기의 책들에서는 오순절을 성령의 특별한 부으심으로, 부흥은 오순절의 재현이라고 강조한다.)
5장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
1. 주님 자신에 대한 성령의 사역
1) 주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눅 1:35)
2)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였다”(행 10:37-38)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으며”(눅 3:22)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마 4:1)
3) 주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셨다.”(히 9:14)
롬 1:4,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다.”
4) 주님은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셨다.(행 1:2)
2. 성령의 일반적 사역
성령의 일반적 사역: 모든 사람에게 구속을 적용하는 것.
성령의 특별한 사역: 구속받은 사람들에게만 구속을 경험적으로 적용시키는 것.
요 16:8-11에 나타난 성령의 일반적 사역
(요 16:8-11) 『[8]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성령이 오셔서 교회와 세상 안에 존재하시는 것 자체가 일반 사역의 일부이다.
위 구절은 대단히 중요한 구절이며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종종 이 구절들은 각 개인을 구원에 이르기 하기 위해 그들의 영혼 속에서 행하시는 것인양 해석된다. 간접적으로는 이런 의미일 수 있다.
그러나 바른 의미는 이 구절들이 성령이 오시는 것과 그분이 오신 결과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이라고 단언한다. 주님은 성령이 오셨을 때 개개인 신자들이 아닌 세상을 판결하실 것이라고 주의 깊게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서 세상은 신자가 된 사람과 되지 않은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주님은 성령이 죄에 대하여 세상을 판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는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해설하신다. 성령이 죄에 대한 모든 진리를 가르침으로써 세상을 판결하시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는 한 가지 특별한 사실만 구체화하고 계신다. 마찬가지로 “의”와 “심판”에 대해 해설하실 때에도 우리 주님은 그것을 매우 특정한 일로 제한하신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은 성령이 교회에 계시다는 사실 자체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판결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언제나 우리 주님께 집중시키시며,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사역 전체의 특징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면 어떤 것도 우리에게 주실 수 없다. 성령 스스로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시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안에 있는 충만을 우리에게 전달하시고, 중재하시고, 우리 안에 재현하시고, 실현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전적으로 성령이 주님에 대해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의 관점에서 이 세 가지를 해설하신다.
1) 성령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 때문에 “죄에 대하여” 세상을 판결하실 것이다.
적절한 설명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오순절 날 성령이 교회에 오신 것과 이 때 따른 표적들, 그리고 성령이 사도들을 사용하신 방법 등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세상이 나사렛 예수를 거부하고 “그를 없애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외친 것이 완전히 잘못된 일이었음을 선고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오신 것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구주시라는 명확하고 최종적인 증거이다. 성령이 교회에 오심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며, 따라서 그를 거부한 세상의 죄가 선고된다. 즉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고 못박은 것이 죄라는 판결을 받는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성령이 특별히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 때문에 세상을 판결하신다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2)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선포한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은 그의 다시 살아나심 안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완벽하고 흠 없는 순종의 삶과
십자가에 달리신 수동적 순종을 통해 사람들이 지은 모든 죄의 죄책과 형벌이 해결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분으로 받아들이셨다는 궁극적 증거는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확증하신 분에게만 그분의 몸인 그분의 백성, 곧 교회를 위해 성령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이다. 오순절날 성령이 오신 것 자체가 의의 길은 오직 하나이며 그 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정하신 의의 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는 하나님 자신의 아들의 의이다. 성령은 이 사실을 선포하신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셨을 때 성령은 세상에게 의가 무엇인지 선고하고 계셨다.
3)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오순절 날 성령이 오신 것은 사탄의 패배와 그에게 선언된 심판의 최종적인 증거였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골 2:15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공개적인 수치를 당하게 하시고 이기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요 12:31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탄을 심판하고 패배시키셨다는 의미이다.
우리 주님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의 사역이 받아들여졌고, 그리하여 사탄의 지배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실 위대한 구속의 사역이 완수되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오순절 날 성령이 오신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판결 혹은 심판이다. 특히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의 결과 세상이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의 위대한 선포였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사탄은 더 이상 세상을 주관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주관하고 다스리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께 있으며, 그분은 성령에 의해, 그의 사역자들과 제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예언하신 것과 같이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신 것 자체가 세상에 심판을 판결한다.
성령이 행하시는 외적 부르심
성령은 구속받은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모두에게 특별한 예비적 사역을 하신다.
이것은 성령이 오신 이후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일반적인 부르심이 주어졌다는 의미이다. 불신자로 남는 사람들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강경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은 오직 구속받은 사람들에게만 제시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구원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행 17;30)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 20:21)을 증언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복음은 보편적인 선포이다.
복음의 선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령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 많은 사람이 성령이 직접 역사하신다고 주장한다. 퀘이커가 청교도의 주류에서 이탈한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말씀은 필요 없고, 성령이 각 사람에게 어떤 신비한 방식으로, “내적인 빛”에 의해 직접 말씀하신다고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다. 성령은 언제나 말씀을 사용하신다.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5).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성령이 말씀을 통해 하시는 일
1) 성령은 말씀을 통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계시하신다.
2)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제시하시며, 그의 백성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을 진술하신다. 설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 주님의 삶과 죽음, 부활, 그리고 부활후의 타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3) 성령은 우리를 불러 회개케 하신다.
4)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부르신다.
제 6 장 구속에서의 성령의 사역
1. 성령의 일반적 사역에 대한 보충사항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 그분이 진실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오시는 분이며, 선지자이자 교사이자 하나님의 계시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라는 최종 증거이자 표시가 된다. 성령의 임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보여 준다.
2. 외적 부르심에 대한 상반된 반응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일반적 부르심이 주어졌지만 그 반응은 달랐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1) 펠라기우스주의
원죄란 없다. 사람들은 일종의 중립적 상태에서 태어나 살아가며, 모든 사람은 완벽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선이나 악을 선택할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거나 거부할 능력이 있다. 성령은 사람 안에서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다.
2) 반펠라기우스주의
성령은 사람들을 도우시지만 사랑은 사람들 자신에게서 생겨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소망하고 진리를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성령이 그들에게 오셔서 도우신다. 펠라기우스는 너무 극단적이었다. 사람들 스스로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고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이 이런 소망을 나타내면 성령이 도우실 것이다. 일종의 협력적 은혜를 가르치고 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진리와 구원의 지식에 이르도록 우리와 협력하여 은혜로 도우시는 것뿐이다.
3) 아르미니우스주의
이것은 17세기 초 네덜란드 사람인 아르미니우스에게서 비롯되었다. 그의 위대한 제자 중 한 사람인 존 웨슬리와 마찬가지로, 아르미니우스는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그렇게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어서 성령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받아들여 믿을 수 있도록 충분한 분량의 은혜를 주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그 은혜에 협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부만 그 능력을 사용하기로 선택하고 나머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사람이 먼저 소망하면 성령이 와 그를 돕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적 견해는 사람은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고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전적으로 부패했지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모든 사람에게 소망하고,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고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성령과 협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협력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4) 루터파
역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중생의 초기 단계에서 은혜 역시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이 은혜에 저항하면 그는 불신자로 남아 정죄를 받는다. 저항하지 않으면 은혜로 인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사람이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루터파는 사람에게는 능동적으로 협력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거부할 능력이 있다고 한다.
5) 개혁주의적 견해
사람은 역시 전적으로 부패했고 완전히 무력하고 무능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한 사람은 구원받고 다른 사람은 멸망하는 일이 벌어지는가?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특별한 사역 때문이라고 한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성령이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 안에서는 행하시지 않는 일을 구원받는 사람들 안에서는 행하신다고 한다. 선행적 은혜, 즉 사전에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여 그들이 믿도록 하는 은혜를 말한다. 이 견해는 궁극적으로는 다른 모든 일에 앞서는 중생의 절대적 필요성의 교리를 말하는 것이다.
타락의 교리를 바로 이해하면 개혁주의적 견해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 교리를 다룰 때는 우리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고 열린 마음으로 성경에 다가가며 우리 자신의 개념이나 철학에 너무 이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히도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이해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도 있을 것이 분명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도, 루터파도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고, 구원의 길 혹은 과정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믿음을 강화시켜 주고, 확신을 세워 주며, 앞으로 주어질 복된 소망의 확실성을 알게 해주는 것은 없다.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엡4:14) 사람들은 너무 게을러서 교리를 연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는 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이 잘못된 교리를 믿는 이유이다. 조만간 그들은 최신 사이비 종교나 이단을 따라가게 된다.
3. 구원의 순서
‘구원 받을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행해지는 특별한 사역이 있다면 성령은 어떤 순서에 따라이 사역을 행하시는가?’ 성경 자체는 어떠한 정확한 순서도 제시하지 않는다. 가장 근접한 구절은 로마서 8장 28-30절이다.
(롬 8:28-30)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또 다른 본문은 행26:17-18이다. 루터파는 즐겨 이 구절을 사용한다.
(행 26:17-18)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구원의 순서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단 두 사람도 의견이 일치하는 것을 보기가 매우 어렵다.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순서를 전혀 다르게 제시하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발생한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는 두 가지 주요한 방법이 있다. 구원의 순서를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생각할 수 있다. 즉, 거룩하심 가운데 타락의 결과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며 구원의 계획을 생각하고 계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와는 정반대 되는 것으로서 시간에 따라, 즉 이 일들이 시간과 경험 속에 나타나는 방식에 따라 사고하는 것이다. 아니면 이 순서를 순전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어서 주관적인 관점을 취해서 접근할 수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견해 역시 타락에 대해, 그리고 타락의 결과 죄 가운데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느냐에 좌우될 것이다. 그 교리에 따라 여러분 나름대로 구원의 순서를 정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유용한 영적 훈련이 되리라 생각한다.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칭의, 중생, 믿음, 양자됨, 회심, 성화, 견인.
주관적 요소를 더 강조하면서도 신학적 순서를 유지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효력있는 부르심, 중생과 믿음, 칭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회개와 회심, 양자됨, 성화, 견인.
순전히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죄의 자각, 회심, 믿음, 칭의, 중생, 양자됨, 성화, 연합과 견인.
구원의 순서를 다룰 때 주의 할 점
시간적 요소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이 요소들이 서로 대단히 엄격하고 기계적인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며 언제나 오류에 빠지게 만든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은 시간에 제한 받지 않기 때문이며 바로 그 때문에 우리에게 어려움이 발생한다. 구원의 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문제지만 반드시 탐구해야 한다. 한가지 순서가 다른 것보다 필연적으로 완전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고찰하고 파악해 나가면서, 그 순서가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자 의무이다.
제 7 장 효력있는 부르심
1. 효력있는 부르심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복음의 부르심이 오직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유효하다.
우리는 외적 부르심 외에도 이런 효력있는 부르심이 존재하며, 어떤 사람이 구원받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복음의 부르심이 유효하게 임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확증해 주는 성경 구절은 로마서 8:28-39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고전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그들은 단순히 성도로 불리우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되도록 부르심 받았다.
고전1:23-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벧전2:9-10,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들이 구원받은 사람이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효력있게 부르신 것이다.
교회를 의미하는 에클레시아는 ‘부름 받은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교회라는 단어 자체가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음을 확증한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내적이고 영적인 부르심이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외적 부르심에 덧붙여 그리스도인이 될 사람에게 오는 내적인 부르심이 있으며, 그것이 바로 효력있는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과 내적이고 영적인 것이 대조를 이룬다.
내적이고 영적인 부르심의 존재를 보여 주는 성경 구절들
(요 6: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그리스도께 오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배운 사람들이다. 성령에 의해 아버지에 대해 배운 사람들, 오직 그들만 그리스도께 온다.
(요 6:63-65)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외적 부르심에만 반응했을 뿐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껍데기인 외적 말씀에만 매달렸을 뿐, 성령을 받지 못했다. 다른 이들을 오게 하셨고, 그들은 남아 즐거워했다. 이것은 영적이며 내적인 부르심이 있다는 증거이다. 부르심을 효력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성령의 이러한 역사가 없이는 그런 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한다.
(딤후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하나님이 하시게 되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효력있는 부르심의 필요성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 역사 없이는 어떤 사람도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이 성령의 역사는 절대 필요하다.
본성상 하나님의 원수인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사역이 필요하다.
(롬 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후 4:3-4)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효력있는 부르심의 본질
내적인 부르심이란 영혼 안에서 성령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성령이 직접 작용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즉각적이고, 영적이며,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이다. 이 부르심은 우리 안에서 새로운 양식의 영적 활동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 작용이 없이는 우리는 어떤 참된 영적 행동도 할 수 없다.
진리의 도덕적 영향을 받게 되는 정도가 아니다. 부르심은 성령이 사람들 자신의 깊은 곳에서 작용하시는 것이다. 단순히 성령이 우리의 타고난 재능과 능력을 고양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영혼에 작용하시는 것이며, 우리 안에 새로운 영적 행동의 원리를 만드시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자연적 지성인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육에 속한 사람”이다. 한 위격 안에 있는 두 본성이라는 놀라운 진리, 삼위일체에 대한 엄청난 교리, 성육신과 속죄에 대한 모든 교리 등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영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능력, 새로운 원리가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은 우리 안에 이 새로운 영적 원리, 영적 활력과 활동의 원리를 심어주며, 그 결과 복음의 일반적인 부르심이 우리에게 효력있게 임한다.
이 부르심이 영혼에 직접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성경 구절들
(행 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주님은 그녀의 마음에 뭔가 내적인 역사를 일으키셨다. 외적인 부르심이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변했다.
(고전 2:10-15)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효력있는 부르심의 결과는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성령이 영혼에 내적 작용을 하실 때 그 결과는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불가항력적 은혜라고도 한다. 강요당하는 것 같아 이 용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성령은 내 생애 처음으로 이 영광스럽고 놀라운 진리를 분별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어떤 원리를 내 안에 심으신다. 성령은 나의 의지에 역사하신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령은 나를 때리거나 강요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내 의지에 작용하여 나로 하여금 이 일들을 바라고, 기뻐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령은 인도하시고, 설득하시고, 나의 의지에 작용하셔서 복음의 부르심을 효력있게 만드신다. 이 일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 실패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실 때 그 역사는 효력이 있다.
제 8 장 중생: 새로운 성향
1. 중생 교리의 중요성
1) 효력있는 부르심과 중생의 관계
일반적인 부르심을 효력있게 만들기 위해 성령은 정확하게 무엇을 하시는가? 그 답은 중생이다. 어떤 의미에서 중생은 유효한 부르심보다 선행한다. 다시 말해 부르심이 효력 있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중생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2) 오늘날 중생에 대한 이해의 문제점
중생의 교리는 속죄의 교리와 더불어 비교할 바 없이 중요한 교리이다. 중생의 교리를 분명히 하지 않고는 기독교의 교리와 진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교리가 심각하게, 그리고 한탄스러울 정도로 무시되고 있다. 대부분의 찬송집이 성령에 대한 강력한 교리적 찬송을 담고 있지 않다. 중생의 교리는 절대적으로 중추적인 교리이다.
2. 중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 중생을 묘사하는 용어들
① “중생의 씻음”(딛3:5)
② 낳다 혹은 다시 낳다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일2:29,3:9)
③ 낳음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다른 단어들
(약 1:18)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엡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④ 살리다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골 2: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2) 중생의 의미
이 용어가 막연하게 또는 일관성 없게 사용되어 큰 혼란이 있어 왔다. 로마 카톨릭 저자의 경우 신자에게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중생은 회심과 구별되어야 한다.
회심은 우리가 하는 것인 반면, 중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다.
회심은 어느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실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만,
중생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사람들이 회심할 때 혹은 돌아설 때 그들은 자신들이 중생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회심은 중생 이후에 온다. 사람들 안에서 먼저 위대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그들의 외적인 삶과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씨를 뿌리는 것과 그 씨뿌림의 결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중생은 생명의 씨를 심는 것을 의미하며, 그로 인해 생기는 결과와는 명백하게 구분해야 한다. 발생과 출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발생은 출생이 있기 오래 전에 일어난다. 발생은 특정한 과정이 진행된 후 실제 출생의 과정으로 귀결된다. 중생은 출생이 아니라 발생이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실제 출생시에 일어나나, 이것은 발생의 과정, 즉 생명의 씨뿌림이 이미 일어났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생은 영혼에 새로운 생명을 심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것이 중생의 본질이다. 중생은 사람 안에 새 생명의 원리가 심어지는 하나님의 행동으로써 그 결과 영혼을 지배하는 성향이 거룩해진다. 그리고 실제 출생은 이 성향이 첫 번째로 발휘되는 증거를 보여준다.
3) 중생시에 일어나는 일의 본질
중생은 인간 본성의 실체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생은 실재하는 물질적 실체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변화이다.
중생이 인간 본성 전체가 완전히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중생한다고 해서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생은 영혼의 기능이나 본질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혼의 기능은 지성, 기억, 감정, 의지, 양심이다.
중생은 단순히 도덕적 개혁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의 의지가 변화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스스로를 개혁시켜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① 중생은 새로운 영적 삶의 원리가 심어지고 영혼을 지배하는 성향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성향의 전체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혼의 기능들 외에 배후에서 그들을 통제하는 무언가가 있으며, 우리는 것을 성향이라고 부른다. 성향은 우리의 행동과 인격을 결정하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똑같은 재능을 갖고 있을지라도 선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악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 그 기능들의 배후에 있으면서 그 기능들을 통제하고 사용하는 이 선한 성향이 그로 하여금 자기의 기능들을 선한 방향으로 사용하도록 만든다. 사람들의 기능들과 능력들을 주관하여 한 사람은 예술적이 되게 하고 다른 사람은 과학적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성향이다.
중생은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우리의 근본적 성향을 변화시키시는 것이다.
나의 인격과 행위, 그리고 나의 기능들을 사용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성향 속에 하나님은 거룩한 원리, 새로운 영적 생명의 씨앗을 집어 넣으신다.
중요한 예는 사도 바울의 경우이다. 다소의 사울 시절의 그는 능력이나 이해력, 의지, 기억력에 있어서 탁월하다. 자신의 모든 능력을 사용하여 그는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교회를 핍박하였다. 하지만 잠시 후 그가 전무후무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보라. 동일한 능력 동일한 재능, 동일한 인격,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정반대의 뱡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무엇이 변화되었는가? 변한 것은 바울의 영혼의 기능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똑같은 열정, 똑같은 논리, 똑같은 철저함,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동일한 담대함 등 그는 분명 이전과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전체 방향성, 전체 경향, 전체 사고방식이 변했다. 그는 다른 사람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새로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을 이해해야만 중생과 심리학적 변화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중생할 때 그들이 마치 우표처럼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심리학 운동의 희생자가 되면 똑같은 사람들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분이다. 중생이 하는 일은 모든 것의 배후에 있으면서 방향과 방식과 방법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성향을 다루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중생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성향의 변화임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② 중생은 우리 안에 있는 성향의 힘 때문에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전인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의 성향이 바뀔 때 나는 새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처럼 된다. 성향이 변화되었다고 해서 이전보다 더 많은 지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똑같은 지성,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지배하는 성향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다른 영역에서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며, 그래서 새로운 마음처럼 보인다. 감정면에서도, 의지면에서도 마찬 가지다.
③ 중생은 즉각적인 변화라는 것이다. 발생은 그 정의상 언제나 즉각적인 행동이다. 생명의 씨앗이 수태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한 번의 순간적인 행동이다. 중생에는 중간 단계가 없다. 생명은 심어졌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다. 점진적이지 않다. 중생이 즉각적이라고 할 때 우리의 자각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 자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각은 분명 시간의 영역에 속해 있는 반면, 생명을 심는 행동은 초시간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즉각적이다.
생명의 씨를 심는 발생과 성향의 변화는 잠재의식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직접 감지할 수 없는 비밀, 측량할 수 없는 작용이다. 중생에 대해 우리가 첫 번째로 알 수 있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근거를 제시해 보겠다. 니고데모에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다. “니고데모여, 그건 몇 가지 특별한 사항을 변화시키거나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다.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너의 삶을 지배하는 성향이다. 너는 거듭나야 한다. 그것은 네가 사용하려 하는 이 모든 기능의 배후에 있는 어떤 것이다.” “바람이 임으로 불매 --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발생한 것을 알아차려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바람을 깊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결과는 볼 수 있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④ 중생은 분명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으로서 사람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그 어떤 기여도 하지 않는다.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여러분은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났다. 하나님은 이 원리, 영적 생명의 씨를 심으신다. 우리는 스스로 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발생시킬 수 없다. 중생은 전적으로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 영적 생명의 원리, 성향에 생긴 이런 변화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그로 인해 완전히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향이 변하기 때문에 전체 사람이 마치 새로운 피조물처럼 되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이다.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 근본적인 것이 그들 안에서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능들은 여전히 이전과 같다. 절대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려 노력하지 말라. 하나님은 당신이 당신답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모습대로 만드셨으며, 그 모습 그대로일 때 하나님을 최고로 영화롭게 할 수 있다. 항상 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거의 모든 면에서 똑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주의하라. 그것은 영적이기보다 심리적인 변화일 가능성이 크다. 각 개인이 자기 모습을 간직했기 때문에 수 세기 동안 사도들과 교회에 영광스러운 다양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모두 함께 같은 구세주와 같은 은혜, 같은 중생과 같은 성향의 변화를 증언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들과 재능들과 성벽들과 능력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얼마나 놀라운 구원이며, 얼마나 영광스러운 구속의 방법인가?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께 합당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제 9 장 새로운 출생
1. 중생의 본질과 특성에 대한 예화
(정리)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의 결과로 사람들 사이에 부르심이 효력있게 된다.
부르심이 유효하게 되는 것은 이제 이 사람들 안에 자기들에게 주어진 이 영적 진리, 혹은 신적 진리에 반응할 수 있도록 하는 이전에 없던 원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생은 단순히 영혼의 기능 중 일부가 변한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람의 근본적인 성향의 변화로 규정했다.
성경은 우리가 "새 마음“(겔 36:26)을 받았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마음“이라고 할 때는 요즘처럼 단순히 감정이 거하는 곳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이 거하는 가장 중심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새 마음 혹은 청결한 마음이 주어지는 것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제가 근본적 성향이라고 묘사한 것, 즉 다른 모든 것을 통제하고 결정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이며, 변화는 바로 거기에서 일어난다.
중생 문제 전체는 분명 큰 신비이다. 그것은 기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이다.
주님은 그것을 바람에 비유했다.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1) 접붙임 예화
가장 훌륭한 예화이다. 성경 자체에도 등장한다.
특정한 유형의 배를 키우기 원할 때 흔히 이런 방법을 쓴다. 키우기 원하는 자그마한 접붙일 어린 가지가 있다. 다음에는 흔한 야생 배나무를 골라 칼자국을 내고, 만들어진 상처에 어린 가지를 끼워 넣고 묶는다. 그러면 당신은 원하는 종류의 배만 열리는 놀라운 배나무를 갖게 될 것이다. 바로 바로 가지치기를 해 준다면 마침내 이 나무에서 여러분이 원하는 좋은 배만 열리는 때가 오게 될 것이다.
새생명을 심으면 첫 단계에는 하나의 나무에 재배된 본성과 야생의 본성이 모두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한 나무에 두 성품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옛 가지를 쳐내면 새 가지가 점점 전체를 지배할 것이며, 결국에는 여러분이 원하는 열매들만 생산하는 배나무가 될 것이다. 저는 이것이 중생에 대해 지금까지 사용된 최고의 예화라고 생각한다.
두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의 자아이다. 하지만 새 본성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 우리는 땅에 있는 우리의 지체를 죽이도록 부르심 받았다. 옛 본성에 속한 것을 계속해서 가지치고 억제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이 새 생명은 자라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고 새 본성이 점차 더 분명히 보이게 될 것이다.
중생에서는 우리 안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진리 혹은 사람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가 변하는 것 이상의 일이다. 변화는 우리의 바깥에서만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어린 배 가지를 배나무에 접붙이는 것만큼 분명한 변화이다.
2) 잘못된 예화
부지깽이의 예화
부지깽이가 불 속에 있는 동안에만 붉게 달궈지고 부드러워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에 대한 예화이며, 그 안에 거할 때만 새로운 생명, 새 삶의 방식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저는 이 예화가 중생의 교리를 부정하고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다. 그리스도인이며 거듭난 사람도 타락할 수 있다. 신비적 의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을 수 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거듭났다. 그들 안에는 새로운 원리가 있다.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 변화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이 이 변화를 충분히 보여 주고 있지는 않지만, 변화는 존재하며 이 사람들이 완전히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고 묘사해서는 안 된다.
구명대의 예화
구명대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물에 떠 있다. 구명대를 벗어 버리면 이 사람은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이 예화 역시 중생의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변화도 없었던 것처럼 이전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생의 교리는 이 변화가 단순히 주님과 우리의 관계 혹은 진리와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어떤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우리 안에 심어진 새로운 생명이며, 삶과 순종의 새로운 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자라고 발전하여 점점 더 커지게 된다. “우리는 영광으로부터 영광으로, 하늘나라에 이를 때까지 변화됩니다.”(찰스 웨슬리) 그 일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며 우리는 변화되고,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
2. 중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
무엇보다도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1) 성경의 명시적 진술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 재출생은 절대적으로, 전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고사하고 그것을 볼 수조차 없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만이 중요하니라”(갈6:15).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본문 가운데 하나는 히12:14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거룩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함은 단순히 여러분이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는 성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거룩함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주를 보지 못하고 볼 수도 없다. 이 거룩함은 중생을 통해 우리 안에 심어진다. 새로운 삶은 거룩한 삶이며, 거룩한 원리가 우리 안에 심어지는 것이다.
2) 성경의 암시적 진술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우리 주님은 자신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요10:10) 오셨다고 말한다. 이 사실 자체가 중생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내가 그에 합당한 본성을 가져야 한다. 영적인 것이 있고 육에 속한 죄된 것이 있는데 그 둘을 결합할 수는 없다.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 영적으로 변해야 한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성품과 죄의 결과물인 사람들의 성품이 중생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내가 진리를 인식하고 소원할 능력과 분별력을 이미 가지고 있다면 나는 중생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실은 나는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육적인 마음을 갖고 있고, 그들은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그래서 중생이 필수적일 뿐 아니라, 그것도 처음부터 필수적이다. 중생이 없이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중생이 일어나기까지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
3. 중생은 어떻게 생기는가?
1) 중생은 도덕적 감화가 아니다
이것은 진리의 도덕적 영향력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복음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그 영향력과 능력 아래 나아올 때 복음이 그들을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자기들 안에서 위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다루는 것은 그런 변화가 아니다.
우리는 인격 저 밑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변화를 일으킨다.
2) 중생은 세례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례라는 도구를 통해, 그리고 오직 세례를 통해서만 중생이 발생하고 성취된다고 가르친다. 세례시에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우리 안에 있는 도덕적 본성이 변하여 새롭게 된다고 한다. 루터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중생을 세례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며,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미 거듭났다는 증거를 보인 사람들이었다는 성경적 증거가 사도행전 한 곳에만도 수없이 많이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실로 그들은 거듭났기 때문에 세례를 받았다. 그들이 새로운 출생의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표적과 인침으로 세례가 주어진 것이다.
4. 중생과 말씀과의 관계
1) 말씀은 중생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중생으로 심겨진 생명의 씨를 싹트게 한다.
중생이 말씀을 통해, 그리고 말씀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시사하는 많은 본문이 있다.
“그가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제가 중생이라는 행위와 출생을 구분했고, 둘 사이에 오랜 시간의 간격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위 두 본문은 모두 출생에 대한 것임을 말씀 드리고 싶다. 말씀은 발생의 행위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심어진 생명이 태어나게 하는 데에 사용된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향이라고 부르는 근본적인 부분이라는 점이다. 성향이 변화되고 올바르게 되었다면 말씀이 임했을 때 효력있게 될 것이다. 말씀은 결과를 내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6:65,“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루디아가 바울의 말을 청종하고 말씀을 들었던 것은 주님이 “그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을 연 것은 말씀이 아니라 주님이셨다.
2) 구약의 성도들과 갓난아기들의 경우는 중생과 말씀의 관계를 확증해 준다
옛 세대와 새 세대에는 단 하나의 언약만 있다. 우리가 믿음의 자녀이기 때문에 여러분과 저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은 우리 조상이다. 우리 주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 나라에 있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동서로부터 오는 반면 유대인들은 바깥에 쫓겨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13:28-29). 다시 말해 구약 성도들은 거듭났다. 다윗은 거듭났다. 그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었다. 족장들도 선지자들도 마찬가지다.
만일 그 구약성도들이 거듭났다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중생의 행위를 실제로 수행하는 것은 말씀이 아님이 분명하다 중생은 말씀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것이다. 그들을 다루고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셨다.
갓난 아기들에 대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아이들과 갓난아기들이 하늘나라에 갔으며, 앞으로도 갈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것이라 믿는다. 중생이 언제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만 일어난다고 주장한다면 갓난아기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물론 어린아이도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중생한다는 것이다. 중생은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 성령을 통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각이 없는 갓난아기에게도 성인에게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생명의 씨를 심으실 수 있다.
5. 중생은 잃어버릴 수 없다.
당신이 중생했다면, 언제까지나 중생한 채로 있을 것이다. 저는 이것이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생은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중생이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 자신이 행하시는 역사이며, 하나님의 역사는 영원하다고 말해 준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 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그는 중생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하나님에게서 끊을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 생명을 내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요한 일서의 다음 구절들을 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그런 사람은 계속해서 죄에 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왜 그런가?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 즉 중생한 사람은 결코 죄의 삶 안에 거하지 않으며 거할 수도 없다. 일시적으로 죄에 빠질 수는 있으나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것이 어떤 사람이 거듭났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시금석이다.
요일2: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그들은 중생한 사람이 아니었다.
히 6장과 10장도 그 사람들이 중생했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고 대답해 드리겠다. 그들은 놀라운 경험을 했지만 그들이 거듭났음을 말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생한 사람은 그 안에 거한다. 죄에 빠져 타락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으나 그 안에 거한다. 생명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온전히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안에 생명이 없다면, 그는 거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은 스스로를 나타내고 자신의 존재를 증거한다.
제 10 장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
중생에는 어떤 수단도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것은 우리 영혼에 행하시는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역사이다. 중생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이며 영원한 역사이다. 궁극적으로 신자의 안전은 이 위대한 중생의 교리애 달려 있다.
제가 교리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데 교리가 가장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중생으로 인한 결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중생했다는 사실의 증거들을 다루고자 한다. 많은 사람이 이 문제로 인하여 곤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며,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룬다. “내가 중생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중생했음을 아는 것은 중생 교리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1. 영적 생명의 표지
중생은 우리 안에 영적 생명의 원리가 심어지는 것이다. 생명은 언제나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 문제에 대한 고전적인 본문은 요한 일서이다. 요한일서에 대한 책을 쓰면서 <생명의 시금석>이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매우 적절한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팔복 또한 생명과 중생에 대한 시금석이라고 생각한다. 요한 일서에는 영적 생명 혹은 우리가 중생했다는 사실에 대한 이 네 가지 중요한 시금석에 따라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서신서이다.
(1)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4:1-2).
당신이 그리스도는 진실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복되신 성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심을 믿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심지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치 않다. 그리스도는 여호와이시며, 그가 성부와 동등하시며 영원히 공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로 오셨다는 것, 즉 복되신 삼위일체 의 두 번째 위격이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5:1)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어떤 사람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내용을 담아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말한다면, 그는 자기 안에 성령이 계시고 자신이 중생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2) 계명을 지키는 것.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2: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하는 방법이라고 요한은 말한다. 그뿐 아니라 계명 지키는 것을 즐거워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계명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이 복된 새 생명을 받은 자인지 아닌지를 즉시 드러내 준다.
(3)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바울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시는 “양자의 영”이 있다고 말한다(롬8:15).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3:6). 성령은 “양자의 영”이며,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는 느낌, 의식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4) 형제를 사랑하는 것.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3:14).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고 서로에게 결합되어 있다면,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때 그들을 알아 본다. 그들은 우리와 한 가족이며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다른 모임들보다도 그들과 교제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뭔가 공통적인 것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 우리는 우리가 같은 곳에 속해 있음을 안다. 그 어떤 것도 결코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다.
(5) 육체와 성령의 충돌
제가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며, 또 오랜 시간 동안 저에게 큰 위로가 되어 준 시금석이 있다. 그것은 제 안에 있는 투쟁에 대한 인식이다. 이것은 지극히 귀중한 시금석이다.
바울은 갈5:17에서 이것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과 육체, 이 둘은 서로 싸우고, 혹은 “거스리고”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그 안에 큰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성령은 하나님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원하고 있지만, 마귀가 역사하는 다른 영역인 육체는 어두움의 나라를 위해 그들을 원한다. 그래서 그 둘은 서로 소유권 다툼을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충돌의 장소라는 것, 일종의 대격전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아주 주의하시라. 저는 단순히 선과 악,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하기 전의 옛 생활에서는 당신은 자신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고 모든 일은 당신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안다. 당신이 그 투쟁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당신 안에 당신 자신과는 별도로 또 하나의 영이 있어서 당신을 다루고, 당신 안에서 역사하고, 당신을 세상과 떨어지게 하고, 당신에게 진리를 가리켜 보여 준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성령의 작용을 인식하며,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탄의 권세를 인식한다. 육체와 성령의 충돌은 중생의 증거이다.
(6)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소망.
그들은 선물보다 그 선물을 주시는 분에게, 복보다는 복 주시는 분에게 더 관심이 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시42:2)에 대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 무엇인지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들의 영혼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 당신이 어떤 상태에 있든 당신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면 당신은 자신이 중생했음을 알고 기뻐할 수 있다. 그것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7)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함.
마지막 시금석은 하나님의 자녀는 단순히 죄사함을 받고 죄의 결과들을 피하기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안다는 것이다. 죄인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죄의 결과를 싫어하고 죄로 인해 벌받기를 원하지 않지만 죄에 대한 의식이라곤 전혀 없다. 그들은 죄를 미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를 미워한다. 우리 주님이 그들에 대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마5:6)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적극적인 의에 대한 적극적인 주림과 목마름을 갖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그들은 책에서 읽은 성도들과 같이 되길 원한다. 청결한 마음을 원한다. 그들은 순결해지고 싶어 한다. 거룩해지고 싶어 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한다.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한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
연합의 교리는 중생의 교리와 분리할 수 없다.
이보다 저 중대하고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교리는 없다.
(1)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잘못된 개념
신비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이 있다. 우리가 엄청난 거룩함과 신성함에 이르렀을 때에만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영적이기 보다는 철학적인 신비주의자, 혹은 성경적이기보다는 철학적인 신비주의자들이다. 위대한 영국의 윌리암 로조차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도 초기에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관계를 끊었다. 그가 지나치게 철학적일 뿐 아니라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철학적 신비주의자들은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일종의 영원으로의 흡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많은 동양 종교의 가르침의 특징이기도 하다. 불행한 사실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잘못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직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자신을 죽여 나가도록 훈련해 결국 신비적 연합에 도달한, 비교할 수없이 엄청나게 거룩하고 성화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정말로 경험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교리이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의 중요성
그리스도가 하신 구속사역의 모든 유익은 이 연합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지 않는 한, 그와 연합하지 않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부터 어떤 복도 얻을 수 없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1:3).
연합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지 못한다. 무엇이든 받기 위해서는 원천에 결합되어야 한다.
중생조차도 논리적으로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결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 연합하는 순간 우리는 거듭난다.
그리스도께 결합하는 순간 우리는 이 생명의 원리를 받는다.
성령의 특별하고도 독특한 사역은 분명 이 연합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합에 대한 가르침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시작한다.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하는 순간, 연합에 대한 말씀도 시작하신다. 우리를 성부 및 성자와 연합시켜주며 주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고, 이 교제와 연합의 사역이 성령의 특별한 직무라고 할 수 있다
.
(3)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성경의 설명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골로새에 있는”,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16:5)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불가능하다. 몇 가지 사실들을 믿고 그저 “계속 이렇게 나가다 보면 언젠가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고 그분께 연합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결코 불가능하다!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주님은 이 연합을 가지와 나무 간의 연합에 비유하신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이 연합은 나무 줄기와 그 나무의 생명력 있는 부분인 가지 사이의 신비적 연합이다.
성경은 또한 머리와 몸의 지체들 사이의 연합을 말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엡 4;15-16도 같은 말을 한다.
엡5:30-32는 신자와 주님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연합이라고 말한다.
벧전 2:4-6도 그 관계가 건물에 비유된다. 계속해서 6절에서 베드로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모퉁잇돌과 개개의 벽돌 사이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불신자와 아담 사이의 연합과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의 연합을 대비시킨다.
이것은 로마서 5장의 중요한 논증이고, 고전 15:22-49에서 반복된다.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아담의 모든 후손이 아담과 맺었던 관계와 같은 종류의 연합이자 관계이다.
(4) 중생과 연합은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거듭날 수 없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거듭난다. 중생을 분리된 것으로 간주하거나 연합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어떤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중생과 연합은 언제나 함께 고려해야 한다. 둘은 서로 돕는 관계이다.
제 11 장 그리스도와 연합
1.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
⑴ 실체의 융합이 아니다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일종의 인격의 혼동이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연합을 우리의 실체 혹은 존재의 본질이 우리 주님의 실체 혹은 존재의 본질과 합쳐져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비주의자들은, 당신은 사라지고, 신성과 영원에 흡수됨으로써 당신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완전한 구원은 영원 속에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여러분과 제가 영원의 끝없는 시간 동안 개인들로 존재하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우리는 사라지거나 하나님께 흡수되어 합쳐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은 언제나 개인들로서 존재할 뿐 아니라, 지극히 복된 광경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그의 영광스러운 임재 안에 있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의 두 본성도 별개로 구분되어 있지만, 서로 결합되어 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이시다. 부분적으로는 인간이고, 부분적으로는 신적인 새로운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둘은 분리되어 있으며 또한 함께 있다. 물질적 의미에서 융합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신자와 주님과의 연합도 실체의 융합이나 뒤섞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⑵ 호감이나 흥미의 연합이 아니다
이 연합은 우연히 동일한 흥미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구성한 느슨하고, 일반적이고, 외적인 연합이 아니다. 베토벤 동호회 등등. 이것도 연합은 연합이다. 이것은 신비주의의 오류를 피하려다 나온 표현 방식이다. 우리의 연합은 이보다 훨씬 더 크고 더 깊은 것이다.
⑶ 영적인 연합
성령에 대한 교리가 대단히 중요해진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것은 성령의 기능, 특별한 사역이며,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임재에 의해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다. 물질적인 연합이 아니라 영적인 연합이다.
고전 6:16-17,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이라”“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전 12:13, “우리가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⑷ 신비적 연합
에베소 5장에서 바울은 주님과 그리스도인 신자 간의 연합이 남편과 아내의 연합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신비적 연합이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여기 하나의 연합이 있다. 신비적이라는 말보다 이 연합을 더 잘 묘사하는 용어를 찾을 수 없다. 둘이 합하여 한 몸이 될 뿐 아니라 그 둘은 친밀한 방법으로 묶여 있어서 둘이 정말로 하나가 된다. 이것이 신비적 연합이다.
⑸ 생명의 연합
이 말은 우리의 영적 생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나온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에 의해 유지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이 생명의 연합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이 연합은 그야말로 생명의, 영적인 연합이다.
요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그리스도의 충만함과 생명 일부가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받고 있다.
요 14:19-20,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 모든 일은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생겨 난다.
요 17:22-23,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
이것은 주님 자신이 주신 진리이다. 주님은 자기 백성이 이 생명의 영적인 관계의 의미를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아버지가 주님 자신 안에 계신 것같이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
갈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이것이 생명을 주는 관계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연합이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⑹ 유기적 연합
‘유기적’이라는 말은 양방향의 통행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생명의’라는 말과 차이가 있다.
즉 이 연합에서는 우리가 받기만 할 뿐 아니라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엡 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라고 말하는 것을 주목하라. 우리는 모두 능동적인 지체들이다. 몸의 각 부분은 몸의 생명에 대해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머리뿐 아니라 각 지체들도 활동을 하고 생명력을 지닌다.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기여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엄청난 개념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 놀랍고 고귀한 진리를 인식하는 것보다 더 우리의 믿음을 자극하고, 실제로 거룩해지도록 격려하고 자극해 주는 것은 분명 아무것도 없다. 저는 교회의 영적 수준이 이토록 낮은 주된 이유는 이런 교리들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주관적인 견지에서 생각하며, 뭔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는 나머지, 거룩하게 되는 길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고 우리의 고귀한 부르심과 특권적 위치를 인식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⑺ 개인적 연합
우리 모두는 각각 별도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은 우리는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그리스도에게 연결될 뿐, 개인이 직접 우리 주님과 연합하는 일은 없다고 주장한다.
복음주의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모두 개인적으로 우리 주님과 관계를 맺으며, 우리가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은 오로지 이 관계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동시에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며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에 속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올바른 순서는 우선 개인을, 그 다음 두 번째로 집단을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로 인해 난 것이 아니라-교회는 우리의 영적인 어머니가 아니다- 성령으로 났다. 이렇게 태어난 순간 보이지 않는 신비적 교회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적 측면을 강조하도록 하자. 교회를 통해 주님께 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사람씩 개인적으로 주님께 나갈 수 있으며, 집단적으로만이 아니라 단독으로도 주님께 연합되어 있다.
⑻ 분리될 수 없는 연합
연합은 단 번에, 그리고 영원히 이루어지는 일이다. 들어왔다가 나가고 들어왔다가 나가는 일을 반복하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분리될 수 없는 연합이다.
롬 8:38-39,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2. 연합이 이루어지는 방법
⑴ 성령과 믿음
연합은 분명히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엡2:5) 살리신다. 그것이 연합이다. 그러므로 효력있는 부르심과 중생, 그리고 우리가 살펴 본 모든 일에서 주된 사역은 성령이 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과 우리의 믿음이 작용하기 시작하며, 우리의 믿음이 이 연합의 중대한 부분이라는 사실도 강조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이 연합이 유지되고, 발전되고, 강화되도록 돕는다. 오직 믿음이 활성화될 때에만 이 연합과 우리의 중생, 기타 우리가 살펴본 모든 일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신자와 주님과의 연합을 다루는 성경 본문에서는, 이 믿음이라는 요소가 필연적으로 강조된다. 성령은 연합을 이루시고 믿음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믿음은 점점 더 연합을 바라고 그 연합이 유지되게 한다. 믿음은 점점 더 주님의 충만하심에 다가가며, 우리가 연합의 진리를 더 많이 깨닫게 될수록 점점 더 그 충만함에 다가가게 된다.
⑵ 연합은 교회나 성례를 퉁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은 모교회가 없이는 결코 거듭날 수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바로 이 점에서 교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견해를 단호히 부인한다. 성경에는 이렇게 말하는 구절이 없다.
마찬가지로 연합은 성례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합은 세례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세례를 통한 중생을 말하는 어떤 가르침도 믿지 않는다. 또한 성만찬 의식을 통해 연합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이 두 가지 성례는 연합을 유지하고 그 연합이 길어지고 커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망을 자극하는 데에는 커다란 가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성례가 연합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3. 연합의 결과
⑴ 객관적(언약적) 결과
주님과 우리의 연합으로 인해 우리의 경험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는 몇 가지 일이 생겨나고, 이 일들은 우리의 지위, 상태, 신분에 영향을 준다.
언약적이라는 말은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용어이다. 본성상 우리 모두는 아담에게 언약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는 언약의 머리이다. 미국의 모든 주는 연방적 연합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는 모든 인류가 아담과 이와 같은 언약적 연합안에 있다는 것이다.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아담에게 언약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법적인 의미에서 그가 행한 것은 우리에게 적용된다.
아담이 범죄했기에 우리도 범죄했다. 그가 타락했기에 우리도 타락했다.
이것이 원죄와 원죄책의 교리이다.
그러나 이제 다른 한 편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똑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언약적으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의미이다. 롬 6:6을 주관적으로 혹은 경험적 의미에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객관적인 의미이다. 내가 언약적으로 그리스도와 결합했기 때문에, 그가 못박혔을 때 나도 못박혔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기신다.
이 언약적 관계로 인해 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믿어야 한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나 역시 죄를 범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나도 십자가에 못박혔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와 함께 살아났다. 엡 2;6을 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바울은 지금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바는 우리가 여전히 땅위에 있지만, 언약적으로, 그리고 이 관계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골 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이 말씀 역시 분명히 언약적 진술, 법적 혹은 법정적 진술이다. 물론 이 용어들은 어렵다. 하지만 가치 있는 것은 모두 어려운 법이다. 어렵다고 해서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우리는 하늘에 앉아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진다.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이 일은 이미 일어났다. 물론 이 일이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면에서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구속되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칭의에서 바로 영화로 넘어가 부르심 받은 사람들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연합으로 인해 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강조해야 할 사항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결합되었기 때문에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에 나는 그분이 한량없이 받으신 성령을 받는다.
이 연합의 다음 결과는 우리가 양자 됨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사항은 우리는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다. 그리스도가 상속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 상속자들임이 분명하다.
⑵ 주관적(영적) 결과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제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7장과 요한일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요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와 (고후3:18)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같은 의미다.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롬8:29)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목적이다. 물론 저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닮는 것을 말한다.
제가 강조하는 마지막 사항은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그리고 심지어 그의 죽으심에까지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얼마나 위대한 사상인가? 골 1:24에서 다르게 표현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사도 바울은 육체 가운데 있는 자신의 고난을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과 역경의 남은 것을 채우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신비적 연합의 결과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이와 같이 신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사53:3)이셨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보시고 마음이 상하셨으며 슬픔과 고통을 당하셨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 및 연합을 가장 민감하게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은 우리가 이 고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의 고통을 안다는 것은 언제나 영적인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죄와 그들의 상실된 상태 때문에 정말로 고통을 받는다. 우리와 주님과의 연합 때문에 우리는 주님처럼 영혼의 탄식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복되신 주님이자 구세주와 우리가 연합한 것의 주관적 결과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 성령을 통해 우리가 신자와 주님 간의 연합이라는 이 놀라운 교리에 눈을 뜨게 하소서. 우리가 힘을 다해 이 연합을 상세히 연구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며,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았습니다. 그것이 나의 상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와 연합했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입니다.”라고 말하게 하소서.
제 12 장 회 심
1. 회심이란 무엇인가?
회심은 새로운 본성이 옛 모양의 삶을 그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첫 번째 행위이다. 그것은 중생한 영혼이 무엇인가로부터 무엇인가를 향해 이동하는 첫 번째 행동이다. 회심은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식하는 첫 번째 단계이며, 중생을 통해 받은 새 생명이 처음으로 행동하고 나타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좋다.
회심은 분명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이것을 말해주는 구절이 많이 있다.
마 18: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육에서 나와야 한다. 육적인 상태에서 돌이켜 다른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회심이 필수적이다.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죄 가운데 태어났고, “죄 중에 잉태”되었으며(시51:5),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였다. 우리 모두가 원죄와 원죄책 아래 있기 때문에 회심을 경험해야 한다.
회심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회심의 동인은 무엇인가?
회심은 무엇보다도 성령의 사역이며, 성령은 효력 있는 부르심을 통해 그 일을 하신다. 그부르심은 우리를 다음 단계, 즉 우리의 행동으로 이끈다. 인간의 행동을 처음으로 언급한다. 회심을 무엇이라 정의하든 하나님이 하시는 일 뿐 아니라 사람의 행동도 언급해야 한다.
부르심은 효력있게 임하며, 부르심에 효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해 무언가를 한다. 부르심과 반응, 이 두 측면이 회심이다. 중생과 연합에서 우리는 완전히 수동적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마음 속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이다. 하지만 회심에서 우리는 행동하고 움직인다. 부르심을 받아 행하는 것이다.
2. 회심의 특성
일시적 회심의 문제
우리 주님은 ‘일시적인 뭔가가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셨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 문제를 다루셨고 사람들을 멀리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주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19-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13:20-21)
그는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는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한 일시적인 회심의 의미이다. 그는 말씀을 받은 듯이 보인다. 그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하지만 그의 안에는 뿌리가 없었고, 그 때문에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직접 주신 가르침이다. 이렇게 기쁨으로 회심하고서도 생명력 있고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수 있으며, 그 회심은 일시적이었음이 증명된다.
행 8장의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 13절에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23절에 “악독이 가득”했으며,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셔서 회개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낫겠다”고 베드로는 말한다.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
일시적 회심이 진정 무엇인지 성경의 가르침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딤후 2: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히 6장과 히 10장의 고전적인 본문의 경우
“한 번 빛을 받고 ---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히6:4,6)
이 사람들에게는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 깊이 생각해야 하고, 정의를 내려야 한다.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과 영감된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겉으로는 회심인 것처럼 보여도 분명히 회심이 아닌 경우가 있다.
거짓 회심도 존재한다.
일시적 회심의 경우는 그 회심이 성경의 진리가 전해진 결과 일어난다는 것이다. 거짓 회심의 경우에도 비록 그리스도인의 회심과 극히 유사해 보이긴 하지만, 이것은 진리가 아닌 다른 동인에 의해 발생한 현상이다.
오늘날처럼 이 구분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적은 없다. 어떤 사람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한 그것은 틀림없이 참된 회심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과 생활방식과 경험에 있어서 커다랗고 심오하고 극적인 변화를 한 삶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이것이 거짓 회심인 이유는 그들에게 회심의 필수적 요소인 진리와의 관계 맺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오로지 현상에만 관심이 있고,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삶 전체가 완벽하게 변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이 있다면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은 오직 심리학책을 보는 것뿐이다. 심리학은 요 몇 년간 큰 인기를 끌면서 기독교의 믿음을 아주 강력하게 공격한다. 그래서 제가 이 문제를 이토록 염려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다 미소를 지을 것이다. ‘우리는 당신에게 심리학적 변화와 경험이 일어났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일으키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계속해서 기독교 전체를 무시할 것이다.
3. 회심의 구성 요소
1) 모든 회심이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회심은 잡자기 일어나야 하는가?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한가?
시간의 요소는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2) 회심 사건은 언제나 극적인 것은 아니다.
행 16장 단 한 장만 읽어 봐도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빌립보 간수의 경우는 극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루디아의 경우는 극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극적인 성질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3) 회심에 수반되는 감정의 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가장 감정을 잘 드러내는 사람이 언제나 가장 감정을 많이 느끼는 사람은 아니다. 감정은 분명 존재하지만, 특정한 강도나 형태의 감정을 고집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4) 참된 회심은 나이에 관계없이 일어난다.
5) 회심을 규격화시키고 일정한 원리를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
만일 우리가 다양할 수 있는 문제를 하나의 변하지 않는 원리로 규정하고 그것을 고집한다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커다란 해를 줄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우리의 특정한 기준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회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성경을 넘어서서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일이 없도록 대단히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마음 속에 분명한 정의를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중대하고 필수적인 일이겠는가!
6) 회심의 영구적이고 필수적인 요소
그것은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다. 이 사실은 저를 정말로 전율하게 만든다. 성경의 가르침에는 놀라운 일관성이 있다. 모든 교리는 서로 일관성을 유지한다. 우리가 성경의 인도에 자신을 맡긴다면 앞에서 말한 것을 뒤에서 부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가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사 가운데 위대한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항상 반복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어느 세기에 일어나든지 그 일이 하나님의 역사라면 동일한 표식이 있을 것이다. 부흥의 역사를 읽어 보면 언제나 비슷한 특징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부흥은 바로 사도행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신앙의 참된 표식은 언제나 1세기의 신앙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다! 기준이 되는 형태가 존재한다. 역사는 언제나 부흥에 이러한 위대하고 본질적인 요소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회심한 성도 각 사람의 역사들 역시 그러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같다.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똑같아야 하며, 언제나 그러했다. 여러분은 초창기와 중세, 종교개혁의 시기, 청교도 시대, 18세기 복음주의자들 등 여러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읽어 보실 수 있다. 그들은 언제나 똑같다. 한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이 생각난다.
7) 회심의 유일한 필수 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회심에는 두 개의 필수 요소가 있으며, 이들은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등 성경 모든 곳에서 강조된다. 바울은 행 20;21에서 이것을 한 문장으로 말한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이것이 회심이다. 회개와 믿음, 즉각적이건 점진적이건 상관 없다. 회개가 있어야 한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 둘 중 하나가 없다면 회심이 아니다. 둘 다 필수적이다.
8) 회개가 믿음에 선행한다.
믿음이 회개보다 먼저 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제가 믿음이라고 말할 때는 일반적 의미의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사용한 의미 즉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회개하기 위서는 일반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해 특정한 일들을 믿지 않으면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며 회개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특별한 의미의 믿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 경우 회개가 믿음보다 먼저이며 바울은 그런 순서로 말한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왜 회개가 먼저 와야 하는가? 성경에서는 언제나 회개가 첫 번째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약의 첫 번째 설교자 세례 요한도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막1:4)를 선포했다.
두 번째 설교자 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권하셨다(막1:15). 베드로도 오순절날 행한 설교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7-38).
회심의 일차적 요점, 기독교 구원의 첫 번째 사항은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는 것이다. 저는 오늘날의 기독교가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만 다룰 뿐, 그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복시키기 위해 그 모든 일을 하셨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실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고후5:19) 분은 하나님이셨다. 저는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의 가장 큰 약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체험에, 행복에, 주관적 상태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모든 영혼의 첫 번째 필요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사람의 잘못된 점은 그들이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회개를 먼저 놓아야 한다. 그것이 워래의 문제이며 타락과 원죄의 주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제 13 장 회 개
1. 용어의 의미
1) 다시 생각해 마음을 바꾸는 것
메타노이아, 곧 회개는 다시 생각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결과를 가져온다. 에수님은 이것을 완벽하게 진술하는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마 21:28-32)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여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뇨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첫 단계이다. 당신은 되돌아가 이미 물리쳐 버린 일을 재검토해 본다. 다시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다르게 생각했다. 마음을 바꿨다. 전에는 거절했지만 이제는 포도원에 가서 일한다.
2) 후회
마음을 바꾸면서 당신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잘못된 관점과 그관점으로부터 나온 잘못된 생실에 대해 후회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회개에는 분명 이런 후회의 요소 역시 존재한다.
3) 행동의 변화
회개에 대단히 중대한 필수적 요소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행동의 변화이다.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행동은 회개의 일부였다. 우리가 이전에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던 일을 행하는 것이 회개의 과정에서 중대한 부분이다. 사람들이 복음의 효력있는 부르심을 듣고 그에 반응했을 때 생겨나는 새로운 무언가가 회개의 본질적 요소이다.
2. 회개의 근원
1) 하나님의 은혜
회개는 사람들 편에서 행동을 취하도록 이끄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스가랴 12:10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것이다. 은총과 간구 없이는 회개가 있을 수 없다.
신약성경에서는 베드로가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5:31)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죄사함을 주시는 것처럼 회개도 주신다. 행 11:18에는 고넬료의 회심에 대한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2:25). 회개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있다.
2) 말씀을 통한 복음 전파
회개는 우리 편에서 행동을 취하도록 하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전파하는 것을 통해 이 일을 하신다.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부르면서 복음이 전파되고, 말씀이 선포된다. “[하나님이]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17:30). 어떻게 그 일을 하시는가? 말씀 전파를 통해서이다. 그 중요한 예가 요나서에서 요나의 설교를 통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게 되는 장면에 나온다. 베드로가 오순절 예루살렘에서 설교하는 장면이다. 그가 설교하고 성령이 그 말씀을 적용하셨을 때, 사람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라고 부르짖었다. 이것은 회개의 표시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한 것은 전파된 말씀이었다. 이러한 회개의 상태는 진리가 전해짐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바울은 그가 전파한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 결과 그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살전1:5,9).
3. 회개에 관여하는 영역
1) 회개에는 전인이 관여한다.
오늘날 이 세상의 상태뿐 아니라 교회의 상태마저 이 지경이 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회개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개는 전인이 관여한다. 회개는 반드시 전인을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2) 회개는 지성이 관여되어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또는 ”교리의 본“이라고 번역해도 상관 없다-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롬6:17). 무엇보다도 마음, 곧 지성이 관여되어 있다. 청교도 들은 언제나 복음의 메시지를 적용하기에 앞서 소위 “철저한 율법의 작용”이 행하는 것의 가치를 믿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정말로 죄를 자각했는지에 대해 꼼꼼히 확인했다. 이러한 예비적 율법의 작용은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의 설교의 특징이기도 했다. 사실상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참된 복음주의적 설교의 특징이었다.
‘율법의 작용’이란 바로 이런 의미였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것이 율법의 기능이다. 율법은 “범법함으로 더하여 진 것”(갈3:19). 율법은 죄의 넘치는 죄성을 보여 주기 위해 주어졌다(롬7:13). 사람들은 이 죄라는 개념을 싫어하고 반항하며 미워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율법 아래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들은 죄를 자각할 필요가 있다. 자신들이 어떤 상태데 있는지 그 마음에 조명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에 대한 설교는 지성과 오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지성과 마음을 배제한다면 율법 역시 배제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끔찍한 일이다. 율법을 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은 바로 이 명확한 목적을 위해 그것을 주셨기 때문이다.
3) 회개는 감정이 관여한다.
이 율법의 작용은 심오한 감정으로 이끈다. 회개에는 마음과 감정이 포함된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감정이라고 하는 이 강력한 요소가 언제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감정이 없다면 참된 회개가 아니다. 일종의 고뇌, 두려움과 공포감이 있어야 한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후7:30)이라고 말했듯이, 회개에는 언제나 감정이 개입한다.
세리는 다만 “가슴을 치며”(눅18:13) 말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말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심령이 가난할 뿐 아니라 애통하는 자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왠지 간과했던 것이 아닌가? 오늘날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보는가? 우리의 회심자들 가운데 영혼의 고뇌에 대해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오늘날 자기 죄를 자각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얼마나 자주 볼 수 있는가? 자신의 죄성으로 인해 탄식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알고 계신가? 우리는 과연 어떠했는가? 하지만 성경에는 이 모든 사람이 등장한다. 욥은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시편 51편에 나타난 다윗의 깊은 감정의 표현도 살펴 보라.
4) 회개는 의지도 포함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사55:7)라고 한 이사야의 말처럼 우리는 버려야 한다. 단순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기의 죄를 인식할 뿐 아니라 거기서 떠나야 한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2:13). 뭔가를 행하십시오. 죄를 인식하고, 율법의 작용이 일어나고, 마음이 변화되고, 생각했다면 이제 행하십시오!
너무 활기차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이다. 우리는 자신의 죄성으로 인해 탄식해 본 일도 없고, 그런 감정을 느껴 보지도 못했다. 우리는 너무나 가볍다. 그것이 교회의 문제이다. 하지만 성경은 회개를 탄식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8).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세리에게는 “부과된 것 이외에는 거두지 말라”하고 군인들에게는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한다. 의지가 개입하여야 한다. 요한은 뭔가 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두 아들의 비유에도 회개의 필수적인 부분인 돌이킴이 나타나 있다. 의지가 작동하여 우리를 잘못된 것으로부터 옳은 것을 향하여 돌아서게 한다. 바울의 사명은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오게”(행26:18)하는 것이었다. 행동은 필수적인 부분이다.
4. 회개의 주제
회개는 어떤 문제들을 다루는가의 문제이다. 회개의 광범위함을 보게 된다.
1) 하나님 자신
회개의 주제는 먼저 하나님 자신이다. 회개는 하나님에 대해 변화된 견해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견해들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서도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갖는다.
2)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또 다른 주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우리는 이 관계가 얼마나 변해야 하는지 안다. 사람들이 회개할 때 이 관계에 대해 전혀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된다. 또한 삶 자체와 삶의 목적, 그리고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도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죽음과 영원을 바라보는 관점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 회개는 전인을 포함할 뿐 아니라 이생과 이 세상에서 가치 있고 관심을 가질 만한 모든 것에 대해 그 사람이 가진 견해 전체를 포함한다.
5. 회개의 결과
회개가 정확히 어떠한 경험으로 이끄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내가 회개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 하나님에 대한 견해와 생각의 변화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견해와 생각이 변화되는 것을 수반한다. 우리가 회개할 때에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진정으로 알게 된다.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회개한 것이다. 본질상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완전히 잘못되어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14:1).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없다. 그 하나님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개념을 투사하여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자신만의 하나님일 뿐이다. 잘못된 것이며 거짓된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변해야 한다.
사도행전에는 신자들이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행9;31) 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요즘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전혀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히12:28)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을 기뻐하면서 동시에 주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수 있다. 그것은 경건한 두려움이다. 그것은 “형벌이 있는”(요일4:18) 두려움이 아니다. 겁에 질린 두려움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수록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도 더욱 커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커진 개념은 우리의 겸손함 속에 반영될 것이다. 어쩐 일인지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우리 안에서 사라진 것 같다. 우리는 너무나 경솔하고 피상적이다. “회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사실은 잊어버린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렸으며, 따라서 삶 전체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에 대한 경외심도 잃어버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인자하심과 사랑에 대한 지식으로 이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한데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알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도 안다. 공의와 자비가 한데 만난다.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잡을 수 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공의가 온전히 만족되고 사랑이 흘러 넘친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며,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거룩한 기쁨이다. 모든 것은 거룩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회개한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갖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개념이다.
2) 죄의식과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자각
또 다른 변화는 그들이 이전처럼 자기만족에 빠지기는 커녕 이제 죄의식과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지었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자신들이 더러워졌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시51:5-7). 나는 씻겨져야 한다. 나는 더러워졌으며 부정하다.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7:18)라고 말했다.
이전에 이런 더러움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 사실을 깨달을 만큼 자신에 대해 잘 알고 계신가? 당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한 일이 있는가? 찰스 웨슬리는 “비열하고 죄로 가득한 나여”라고 썼다. 위대한 성도일수록 그 사실을 더 깊이 알고 있다. 그들은 더 깊이 회개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부패했다는 것과 타락과 원죄의 결과 자기들 안에 비열함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 모든 것에 더하여 그들은 자신의 연약함, 무력함을 안다. 자기 힘으로 산상수훈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지한 사람일 뿐이다.
3) 인생에 대한 관점의 변화-거룩함의 추구
또 다른 변화는 인생과 삶에 대한 관점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된 행동들과 죄된 본성을 알 뿐 아니라, 죄 자체를 미워한다. 다른 한 편으로 그들은 거룩함의 아름다움, 의의 아름다움과 온전함을 느낀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을 본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은 더 이상 무거운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미워하고 거룩해지기를 소망한다.
4) 구원을 열망하여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함
이 모든 일의 결과는 무엇인가? 요약해 보겠다. 회개는 죄로 인한 슬픔과 비탄을 낳아야
한다. 회개는 자기혐오, 즉 자신의 죄된 본성에 대한 미움을 포함한다. 우리는 과연 자신을 미워하는가?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4)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다. 회개는 또한 두려움을 일으킨다. 우리가 의롭고 공의로우시고 우주의 주인이시며 영원한
심판자이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에 비추어 우리가 갖게 되는 자기혐오는 구원에 대한 열망을 일으키고, 이어서 구원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하도록 만든다. 회개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 이어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타오르는 열망을 갖게 된다. 그들이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여 --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51:1).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것이 회개한 사람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간구한다. 어떤 의미로는 그것이 회개의 정의이다.
6. 회개와 후회의 차이
후회를 통해 당신은 실패에 대해 슬퍼할 수도 있고,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 자신에게 화가 날 수도 있다. 실로 한 걸음 더 나아가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까지 포함할 수도 있다. 후회가 이런 의미까지 포함할 수 있음을 결코 잊지 말자. 하지만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듯대로 하는 근심”이 아니다.
(고후 7:9-11)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회개에 이르지 않는 근심도 있을 수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바로 이것이다]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이 말에서 열정과 느낌과 감정을 보게 된다. 그들은 마음으로 그것을 보았고, 느꼈고, 뭔가를 했다. 참된 회개는 후회와는 달리 이러한 요소들을 포함한다. 회개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고,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으며 그분께 상처를 입혔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회개는 우리가 더러워졌으며 전적으로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회개는 죄를 없이하고자 하는 열망과 결단을 준다. 바울이 말하는 사모함과 활동력과 열심과 벌함,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이것을 다시 한 번 팔 복 가운데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이 참된 회개의 궁극적인 시금석이며, 후회와 회개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것은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회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고 점점 더 그분을 닮아 가기를, 의롭고 거룩하고 정결하게 되기를 갈망하게 한다. 후회는 소극적이지만 회개는 적극적이다.
제 14 장 구원하는 믿음
저는 성경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믿음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는 이유는, 구원의 모든 복이 믿음에 의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성화되며, 믿음으로 행한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위대한 종교개혁은 어떤 의미에서는 믿음에 대한 이 위대한 교리를 재발견하고 재정의한 것 뿐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1.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구원이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는 도구 혹은 통로이다. 믿음은 우리를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충만함에 연결시켜 준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⑴ “믿음”이라는 단어의 의미
이 단어를 구원하는 믿음이라는 단 한 가지 의미에만 국한시킬 것이다.
고전 12장의 믿음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시는 특별한 능력으로서, 그들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여 살도록 하기 위해 주시는 것이다. 조지 뮐러나 허드슨 테일러가 특별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믿음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⑵ 구원하는 믿음의 본질
믿음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기차에 앉아 부산역까지 가는 것은 믿음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수확적 확률법칙에 근거해서 뭔가를 하고 있을 뿐이다. 특정한 사실들을 일반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얻어지는 논증에 의거해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이 묘사하는 믿음은 독특하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탄생은 믿음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보여 준다. 믿음은 그가 언제나 갖고 있었던 자연적 능력이 아니다. 그것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있었다. 그는 수확적 확률 법칙에 의거해서 행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구십구 세였고 사라는 구십 세였다. 인간의 모든 경험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으며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 믿음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없다. 찰스 웨슬리는 “주님이 이 믿음을 이루셨으니”라고 말함으로써 이 사실을 완벽하게 표현하였다.
⑶ 믿음의 근원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것”은 구원이 아니라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믿음의 씨는 중생 때에 우리 안에 심어지며,
효력있는 부르심에 의해 활동하도록 부르심을 받게 된다.
믿음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성향이라고 불러 왔던 것에 의해 지배된다. 우리가 믿음을 갖고 있는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근본적인 성향이다. 우리가 믿음을 갖느냐 갖지 않는냐는 우리의 근본적인 성향에 의해 결정된다.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히3:12).
우리는 믿음을 더 이상 하나님 쪽으로 돌이킬 수 있는 일종의 자연적 능력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성경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생겨난다. 믿음은 진리를 통해 생겨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28:19)는 “모든 민족을 가르쳐”라고 해도 상관 없다. 그들에게 정보를 주고, 말씀을 선포하고, 그들 앞에 진리를 제시하라.
바울의 “그 눈을 뜨게”(행26:18)하는 사명은 그들을 가르쳐서 였다. 그들이 사탄에게 속해 있다는 것과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끔찍한 운명을 보여 줘야 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10:17)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진리에 의해, 복음에 의해, 선포된 메시지에 의해 불러일으켜진다.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성경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믿음은 언제나 말씀에 의해 생겨난다.
2. 믿음에 대한 자세한 고찰
⑴ 믿음의 구성 요소
믿음에는 신념이 포함된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동의, 우리 앞에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동의를 의미한다.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확신]”했다. 그들은 이 일들을 확신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이 신념을 의미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진리에 대한 인식 혹은 그에 대한 동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확신을 의미한다. 우리는 확신한다.
믿음에는 기꺼이 자신을 드리는 신뢰의 요소 역시 포함되어 있다. 진리에 대한 동의가 믿음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믿음 안에는 불가피하게 신뢰의 요소가 있다. 사람들이 신념의 요소만 인식할 뿐 신뢰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 생활에 문제가 일어난다.
믿음은 또한 헌신의 요소를 포함한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믿고 신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을 드린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또 로마서 10장의 표현처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롬10:13-14). 신념은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게 한다.
진리에 대한 동의(역사적 믿음)는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 역사적 믿음이란 당신이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언제나 성경을 배웠기 때문에, 그리고 어려서는 주일학교나 다른 곳에 나갔기 때문에, 아마도 이 모든 것 때문에 지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모든 것을 행하고도 전혀 신뢰하거나 자신을 드리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지적으로는 받아들이지만, 한 번도 마음이 끌린 적도, 감동을 받은 적도 없는 성경 전문가들도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3:5) 사람들이다.
⑵ 믿음에 관여하는 영역
믿음과 관련해 내 안에 있는 무엇이 작용하는 것일까요? 씨가 뿌려지고 즉시 싹이 나오지만, 잠시 뒤 말라 버린다.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믿으나 뿌리가 없어 잠시 뒤 말라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히브리서 6장에도 일시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다. 믿음은 전인, 즉 지성과 마음과 의지가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가방에 짊어지고 다니는 어떤 지적인 신념이 아니다. 원할 때마다 만지작거리고 꺼냈다 다시 집어 넣었다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믿음은 여러분 전체를 사로잡는 그 무엇이다.
믿음은 지성과 관련되어 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롬6:17) 마음이 우선이며, 반드시 그래야 한다.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진리라면, 일차적으로 지성에 말해야 한다. 지성만을 강조한 샌디먼주의가 있다. 그는 믿음은 사람의 지성만을 다룰 뿐 다른 것들과는 관련이 없다고 하였다. 롬 10:9을 잘못 사용하여 “네, 저는 이것들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샌디먼에 반대하여 믿음은 이성과 지성을 포함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믿음에는 마음 역시 관여해야 한다.
주님에 의해 감동되지 않고는 그분을 믿을 수가 없다. 당신이 신념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신을 사랑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지적인 동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제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당신이 가진 신념에 의해 감동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감정주의에 대해 비판해야 하지만, 감정을 버리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또한 의지가 개입되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여전히 세상적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체험을 했는지에 대해 저로서는 관심이 없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시97:10). 악을 미워하지 않고 여호와를 사랑할 수는 없다. 반드시 그렇다. 악을 떠나 돌아서라. 시편 51편과 139편을 보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자기 고향을 떠났다. 믿음은 행동한다. 언제나 의지가 관여한다. 믿음이란 단순히 일종의 신앙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앙주의에서는 마음과 의지가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위험하다. 하지만 믿음에서는 전인이 관여한다. 그리스도는 전인을 구원해 주시며 어떤 부분도 빼놓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신념과 신뢰와 헌신에 상응하는 것은 지성과 마음과 의지이다.
⑶ 믿음과 이성의 관계
제가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답변은 믿음은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추론을 통해 기독교를 믿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히 비성경적인 말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이성도 함께 타락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믿음에는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요소들이 있다. 파스칼은 이성의 최고의 업적은 이성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라고 말했다.
믿음은 단순히 이성이 아니지만, 반면에 이성에 반하지도 않는다. 믿음은 비이성적이거나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믿음은 초이성이다. 이 말은 이성이 우리가 이성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지점에 이르도록 만든다는 의미이다. 그 지점에서는 계시에 굴복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이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스스로를 의도적으로 이 책, 성경에 가두는 것이다. 철학자처럼 행동하기를 거부한다. 특정한 질문들을 던지는 것을 거부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 마음과 이성으로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너무 위대하고, 너무 신적이고, 너무 영원하다. 그러므로 받아들이고 질문을 그치라. 사람들 안에 진정 믿음이 생겨났다는 가장 좋은 표지는 그들이 특정한 질문들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성은 여러분을 성경 안으로 데려가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성경 안에 있으면, 당신은 성경이 질서정연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은 위대한 복합체이다.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 모든 조각이 다 있다. 그 조각들이 마치 완벽한 모자이크처럼 들어맞는다.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것이지만, 이성은 절대로 우리를 그 안에 들어가게 만들지 못한다. 성경 안에 있을 때 오직 성경만이 지혜이며 다른 모든 것은 부당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계시를 받아들인 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믿음과 이성의 관계이다.
⑷ 믿음과 지식의 관계
믿음에는 지식의 요소가 있어야만 한다. 믿음은 진리가 작용한 결과 생겨나기 때문이다.
믿음의 첫 번째 요소가 신념, 즉 진리에 대한 신념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깨닫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완전히 이해하여 어떤 일을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개닫는 것은 마음으로 알아차린다는 의미이다. 믿음의 지식적 요소는 이해의 요소가 아니라 반드시 깨닫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믿는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롬10:17) 생겨난다. 이와 같이 믿음에는 지식과 이해의 요소가 있다. 여기서 이해는 이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서신서는 우리에게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호소한다.
그러면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가? 기독교 전반을 다 이해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저는 복음의 완전성과 믿음의 존재 자체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몇 가지 진리가 있다.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최소한의 것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필수적인 교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 공의롭고 의로우시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뿐 아니라 다른 속성들도 믿어야 한다. 우주의 심판자이신 이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 계시, 이것이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의 죄악되고 멸망하는 상태를 믿는 것 역시 필수적이다. 이것을 믿는 것은 절대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시고 유일하신 구속자이심을 알지 못한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교리와 우리의 잃어버린 지위와 무력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
바울도 고전 15장 서두에서 이런 필수적인 사항들을 제시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그것이 무엇인가?-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3). 우리 주님의 인격과 행하신 일, 즉 제사장적 사역, 중보자적 사역, 속죄가 첫 번째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바을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언제나 중심이었다.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위대한 교리의 몇 가지 측면도 그러하다. 중생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할 아무런 권리도 없다.
믿음은 막연한 느낌이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에게서 특정한 복들을 받고자 하는 막연한 욕구가 아니다. 믿음은 이 복음, 이 하나님의 말씀, 이 메시지, 사도들이 전하고 기록한 이 진리를 믿는 것이다. 믿음은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동의하는 것이다. 믿음은 나를 감동시켜 무언가를 하도록 만드는 확신이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으며, 그분에 대해 무엇을 믿는지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최소한이자 그야말로 본질적이며 믿음의 완전성에 속한 문제들이다.
제 15 장 확 신
1. 확신에 대한 다양한 견해
1)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견해
로마 카톨릭교회는 이 확신의 교리를 개신교의 가장 해롭고 못마땅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라고 여긴다. 그들은 이생에서 확신을 가질 수 없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모교회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내적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개념은 도저히 견딜 수 없고 위험한 이단이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칼 바르트도 그렇다. 그는 구원의 확신이라는 개념을 철저히 혐오한다. 그의 신학 체계에 비추어 보아 일관성 있는 행동이다. 바르트는 체험을 아주 싫어했으며 이 모든 일 중 정말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더 나아가 믿음을 표현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필연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2) 구원의 확신은 믿음의 본질이라는 견해
개신교의 선구자들-루터 칼빈과 그 동료들-은 이 모든 것에 반대하여 정반대의 극단으로 나가 믿음의 확신이 믿음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말했다. 카톨릭교회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사람들을 교회의 속박과 폭정에서 해방시키는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이 확신이 없이는 믿음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하기에 이르렀다. 존 웨슬리도 초기에 똑같이 가르쳤다. 후에 그는 수정했다. 이것은 종종 일어나는 극단적 반작용으로써, 특별히 모호하고 막연하고, 영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인 시기를 겪은 후에 잘 나타난다.
3) 구원의 확신이 믿음의 필수 요소는 아니지만 확신을 소망해야 한다는 견해
개혁주의 일반적인 가르침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나타나 있다. 확신은 믿음의 필수적 부분이 아니며 확신이 없어도 믿음을 가질 수 있지만, 동시에 확신의 가능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확신을 소망해야 하고 그것을 얻기까지 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2. 믿음과 확신의 관계
1) 의심의 문제
의심 자체는 믿음과 상반된 것이 아니다. 의심은 믿음에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확신에 대비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심각한 의심을 경험할 수 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0).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믿음을 잃어버렸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의심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믿음이 연약하거나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심은 죄로 인해 생길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지면 정죄감을 갖게 되고, 이어서 의심이 생길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잠시 동안 의심의 희생자가 된다.
의심은 믿음의 본질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생겨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때로 믿음이 능동적인 것이며, 적용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가 순전히 수동적인 상태에 머물러 뭔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만 있다면, 믿음보다 의심이 앞설 가능성이 높다. 믿음이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하며 진리를 붙잡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우리는 의심을 제거할 것이며 믿음은 더 강해질 것이다.
2) 확신이 없이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1:10). 우리의 부르심이나 택하심을 결정할 수 없지만, 우리는 굳게 할 수는 있다. 이 일에 힘쓰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은 분명 확신이 없이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우리에게 확신을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3) 객관적 확신과 주관적 확신
객관적 확신과 주관적 확신은 차이가 있다. 고전적인 예는 존 웨슬리이다. 마음에 ‘이상한 따뜻함’을 느꼈던 엘더스게이트 가에서의 사건 이전에도 존 웨슬리는 진리를 믿었고 그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객관적 확신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이 되도록 그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내면의 사건이 바로 주관적 확신이었다.
참된 확신은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진리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하지만 저는 나의 내면, 스스로의 확신에 대해서는 행복하지가 않아요.”
3. 참된 확신의 근거
여기서의 확신은 완전한 확신을 의미한다. 즉, 객관적일 뿐 아니라 주관적인 확신, 외부적일 뿐 아니라 내면적인 확신을 말한다.
1)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그 다음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5:10-11). 그러므로 나의 확신의 첫 번째 근거는 그것이 여기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여러 구절들은 믿는 자들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한다. 믿은 자들에게는 이미 영생이 있다는 것이다. 이 구절들을 접한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나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확신의 첫 번째 근거일 뿐이다. 애석하게도 성경 말씀만이 유일한 근거이며 더 이상은 필요없다고 말하면서 그 이상 나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는 그런 관점이 극도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요한 일서는 한때는 교회의 일원이었으나 진정으로 속한 자가 아니었기에 지금은 떠나 버린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해 준다.
2) 생명의 증거
성경은 만일 내가 믿으면 나에게는 영생이 있다고 말해 준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영생을 가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적용할 수 있는 특별한 시금석들이 있을까요? 요한 일서에 나온다. 첫 번째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그러면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아는가? 이것을 아는 것이 체험적 측면에서 중요하다. 성경은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이 장차 우리가 들어가게 될 기업에 대한 인 침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에서 몇 가지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참으로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속죄의 교리들을 참으로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게 성령을 주셨다는 첫 번째 증거는 나의 믿음이다.
둘째로, 내가 이 지식을 사모한다는 사실이 내가 성령을 갖고 있다는 좋은 증거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오직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들만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싶어하고 그분의 이끄심에 복종하고 싶어한다.
셋 째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이다. 그 사역은 죄를 드러내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더 강력해질수록 우리는 죄에 대해 더 민감해지고 이전에는 간과해 왔던 일들을 이제는 죄로 여기게 된다. 네 번째 증거는 성령의 열매이다. 다섯 번째는 양자 됨의 영이다.
3)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
믿음의 확신의 세 번째 근거는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하시는 증거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 성령은 추가적인 증인이시다. 바울은 여기서 “그 사실이 우리 영을 통해 증언된다.”라고 하지 않고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증언하신다”고 말한다. 우리 영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 하지만 그에 더하여 성령이 나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신다. 나의 영에 대해 증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영이 무언가를 할 때, 성령이 옆에서 다른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저에게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높은 경지 중 하나이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주님은 실재가 되신다. 주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자신과 성부가 우리에게 찾아와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령은 이 일을 하신다.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 오심으로 인해 성부와 성자가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게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주목하라-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22절). 이 사람에게 주님은 자신을 영적인 방식으로 나타내실 것이다. 이 일을 하실 분이 바로 지금 주님이 말씀하고 계신 성령이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이것이 무엇일까요?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이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명확하고 독특한 작용이다. 이 작용을 통해 성령은 우리가 살아계신 주님을 깨닫고 의식하게 만드신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믿는 것을 넘어서서 일종의 내재적 직관으로 그분을 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실재가 되신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허드슨 테일러의 기도를 인용하길 좋아한다.
주 예수여, 당신을 내게 생생한 실재가 되게 하소서.
바깥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믿음의 눈으로 더 생생하게 보도록
세상의 가장 달콤한 인연보다도 더 귀중하고 친밀한 가까움으로.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처음부터 이것을 증언해 왔다. 이것이 확신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근거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실재가 되시기 때문에, 약속대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이것은 확실한 지식이다. 성도들이 이 사실을 증언한 것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루터, 조나단 에드워즈, 휫필드, 웨슬리, 피니, 무디도 경험했다. 그들 모두는 성령이 자신들의 영으로 더불어 증언하심을 경험케 하셨다는 사실을 증언하였으며, 이 경험이 압도적인 것이었다고 느꼈다.
무디는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뉴욕 시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 경험의 영광과 장엄함과 탁월함 때문에 자기 육체가 짓눌리고 죽게 될 것 같이 손을 맞잡고 하나님께 멈추어 달라고 기도해야 했다. 수반되는 감정들은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이 확신의 궁극적 근거이다. 피니의 경우 이 경험은 계속해서 밀려드는 파도처럼 왔다. 그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 존 웨슬리의 경우는 이처럼 압도적인 경험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이상한 따뜻함’을 느꼈다. 이런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런 확신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성경이 가르치는 규칙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당신의 믿음을 확증하라. 만일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면 당신이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를 의지하고 있는 면은 없는지 확인하라. 자신의 모든 의를 더러운 옷과 같이 여기고 있는지 확인하고, 천 년을 산다 해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기에 결코 적합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라. 십자가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에만 오로지 의지하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의에만 오로지 의존하고 있는지 확인해보라. 성경 말씀을 스스로에게 적용하고, 말씀을 알아가며, 읽으시라. 제가 인용한 성경 구절들 위에 서서 그 말씀들을 자신에게 적용하시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성경이 그 사실을 말한다. 나는 그 말씀을 믿으며 그 말씀 위에 서 있다.”고 말하라. 그 삶을 사시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시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시라. 하나님께 그분의 약속을 성취하시고 여러분에게 자신을 나타내 달라고 구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P 272)
4. 참된 확신과 거짓 확신
1) 거짓 확신
거짓 확신은 일반적으로 나쁜 가르침, 잘못된 복음 전도, 사람들에게 결정을 내리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 아니면 성령이 역사하시는 과정이 일어나기 전에 그들을 거듭나게 하려고 애쓰는 것 등으로 인해 생겨난다. 마 7장의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 자들,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잘못된 확신이었다. 마 25장에 나오는 세 비유, 어리석은 처녀들, 자기 달란트를 묻어 놓은 사람, 자기들이 언제 주님께 이러 저러한 일을 행치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의 비유는 똑같은 것을 가르친다. 잘못된 확신이었다.
2) 참된 확신을 가진 사람의 특징
참된 확신의 특징은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이다. 참된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은 확신을 유쾌하기 그지 없는 것이라거나 흥분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항상 겸손하다. 또한 언제나 성품과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다. 언제나 요한일서에 묘사된 것과 같은 삶으로 이끈다.
자기 점검
또 하나의 대단히 좋은 시금석이 있다. 만일 여러분이 스스로를 점검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된 확신의 표지이다. 거짓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 점검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참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올바른 상태를 유지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점검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바울은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했으며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고 권고한다.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소망
참된 그리스도인은 경외심과 경건한 두려움 가운데 행한다. 그들은 진리의 빛 가운데 행하는 겸손한 사람들이다. 참된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소망이 계속 증가한다.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고 말한다.
5.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구원의 확신
휫트필드가 이 놀라운 확신, 성령의 이 직접적인 증거가 어떻게 그에게 주어졌는지, 묘사하는 말을 들어 보라. 그는 오랫동안 이 확신을 추구한 끝에 병에 걸렸다.
병은 칠 주 동안 계속 되었으며, 그것은 이 모든 기간 복되신 성령이 나의 영혼을 정결케 하시는 영광스러운 방문이었다. 나의 이전의 모든 천하고 악명 높은 죄들과 심지어 나의 마음 속의 죄들까지도 이제 절실히 느껴졌다. --칠 주가 끝날 무렵, 그리고 열 두 달 이상 육체와 마음의 말할 수 없는 압박 속에서 신음한 후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나를 자유하게 해 주셨다. 어느날 유난히 목이 타고 입안이 불쾌하게 끈적이는 것을 느끼고는 갈증을 가라앉히려 여러 가지를 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가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셨을 때, 그의 고난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침대에 엎드러져서 “내가 목마르다.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쳤다. 잠시 뒤 나는 나 자신이 치유됨을 알았으며 너무 무겁게 나를 누르고 있던 짐에서 해방되었다. 애통의 영이 내게서 제거되었고 내 구주 하나님을 참으로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며, 한동안 어디로 가든지 시편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기쁨은 점점 더 확고해졌으며,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 이후 간혹 중단되었던 순간을 제외하고는 내 영혼에 거하면서 더 커져 갔다.
구세군에 속한 어떤 사람도 같은 내용을 말했다. 이 사람 역시 진리를 믿은 사람이었다. 그는 객관적인 확신을 갖고 있었으나 주관적인 확신은 갖지 못했으며 그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의 기록이다.
나는 그날 아침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삶을 살고,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동으로나 하나님께 절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자 하는 열망으로 주리고 목마른 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한 없는 욕구를 갖고 깨어났다. 그런 요구를 갖고 나는 성경을 폈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읽는 중에 예수님은 나에게 이생에 사는 사람이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복을 주셨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계시였다. 천국의 사랑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내 영혼은 불 앞에 양초처럼 녹았다. 나는 흐느끼고 또 흐느꼈다. 주님을 향해 죄를 짓고, 주님을 의심하고 주님의 영광이 아닌 나를 위해 살아왔던 것이 혐오스러웠다. 자신을 위한 모든 야망은 이제 사라졌다. 타오르는 불이 나방을 태워 버리는 것처럼 순전한 사랑의 불꽃이 그 야망을 태워 버렸다. 나는 기쁨으로 울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아침 식사 전에 보스턴 코몬스에서 걸어 나왔다. 오, 나는 얼마나 그분을 사랑했는지! 그때 나는 예수님을 알았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 마음은 그 사랑으로 찢어질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분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다. 나는 작은 참새가 지절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사랑스러웠다. ---나는 낯선 사람도 사랑했고, 이교도들도 사랑했고, 온 세상을 사랑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하셨다. 복되도다.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이여, 나는 순결해지기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내가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얼마나 주리고 목말라했던가. 그분은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고 나를 만족시키셨다. 신중하게 말하건데 하나님은 나를 만족시키신다. 하나님은 나의 교사, 나의 인도자, 나의 상담자, 나의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되신다.
우리 주님은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성령을 통해 그 일을 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적인 나타남”(존 플레처)을 보게 될 때, 그들은 아무 것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절대적 확신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아직 이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면, 이제 가질 수 있다. 이 확신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세상보다 훨씬 높은 곳에, 우리의 영과 우리가 영들에 적용할 수 있는 시금석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시는 성령의 증거가 있다. 이 증거는 그 필요를 느끼고 그것을 갖고자 열망하고 추구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받을 유산이다. 주님께 허드슨 테일러의 짦은 기도를 올려 드리시라.
제 16 장 이신 칭의
1. 칭의 교리의 중요성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로 어떤 질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알기 위해 적용할 수 있는 시금석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것은 ‘칭의’라는 말에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위대한 마르틴 루터의 삶을 변혁시킨 것은 바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의 재발견이었다. 이로 인해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개신교 역사의 영광스러운 사건들은 모두 다 이 교리로부터 나왔다. 개신교라는 말을 들을 때, 특히 이 단어와 연관된 역사를 깨닫는다면 반드시 전율을 느껴야 한다.
2. 역사적 배경
루터는 회심 전에 왜 고민했는가? 문제는 그가 칭의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신칭의에 대해 전형적인 로마가톨릭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로마가톨릭은 그 교리를 가르칠 것을 주장하지만 절대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롭다 하심’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것을 개신교의 이단적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로마가톨릭의 오류의 핵심은 로마 교회가 칭의와 성화를 혼동한다는 것이다. 칭의가 죄사함의 의미를 포함한다는 것인데 이 말은 옳다. 그들은 이어서 칭의시에 우리에게 은혜가 능동적으로 주입되며 그 일은 물론 세례에 의해 일어난다고 말한다. 죄사함, 즉 죄가 제거된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그들은 세례시에 적극적인 의가 주입되고, 적극적인 의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역시 주입된다고 말한다. 또한 그들은 칭의가 점진적이라고 말한다. 소위 ‘대죄’를 지지르면 칭의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칭의를 잃어버렸을 때는 고해성사를 통해 다시 얻을 수 있으며, 그렇게 회복되는 과정은 연옥에서 완성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루터가 회심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견해이기도 했다. 그는 어느날 성경의 한 구절을 보게 되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1:17). 이 말씀은 그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의 전 생애가 변혁되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칭의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개념이 대단히 비성경적이고 전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알게 된 순간 영혼의 커다란 해방을 경험했다. 그는 이 진리를 선포하기 시작했으며, 그럼으로써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위대하고 엄청난 일을 시작했다.
루터가 깨달은 것은 칭의는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과 공로에 근거해 의롭게 여기신다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법적인 행위라는 사실이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고 우리의 것으로 돌리시며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에 의지한다. 그 결과로 바로 그 순간 자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로마 카톨릭의 방식으로 자신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 애썼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말씀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선포하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기에 그는 의롭다.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그의 것으로 삼아주시기 때문이다.
3. 칭의란 무엇인가
1) 법정적 선언인 칭의
칭의에 대해 우리가 흔히 범하는 큰 실수는, 마치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칭의가 우리가 의롭게 되거나 선하게 되거나 바르게 되거나 거룩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칭의에서 우리는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선포되는 것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르다. 칭의를 통해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성화와 혼동하는 것이다. 칭의는 법적인 혹은 법정적인 것이다. 칭의는 선언적 행동이다. 칭의는 우리에게 뭔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해 뭔가 말하는 것이다. 칭의는 나의 실제 지위나 내면의 상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의 나의 위치와 나의 지위,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와 관계 있는 것이다.
2) 칭의가 법정적 선언이라는 성경적 증거
먼저 구약에서, 출 23:7,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신 25:1,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이 재판관들은 두 당사자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선언을 한다. 이것은 법적인 행동이다. 잠 17:15,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칭의는 정죄와 대비 되어 있다. 여기서도 칭의는 법적인 문제이다.
신약에서,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눅7:29). 이는 하나님에 대해 선언한 것이다. 성경이 칭의에 대해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부분에서는 언제나 이런 의미를 전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행 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고전적인 본문인 롬 3:20-28,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이어서 28절에 엄청난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5: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8:30-34,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언제나 칭의는 법적이고 법정적이며, 성경을 계속 살펴보면 다른 곳들에서도 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고전6:11, 갈2:16,
3) 칭의의 두 가지 요소
하나님은 율법을 제정하신 분이시며, 그리스도가 그 율법을 만족시키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하나님은 이 선언을 하시며 그것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의 의미이다.
첫 번째 소극적 요소.
하나님이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고 선포하신다는 것. 율법은 우리 모두를 정죄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나는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나의 죄책이 어떻게든 해결되어야 한다. 칭의 의의 첫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나의 죄가 가리워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용서받았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나의 죄는 소멸되었다.
두 번째 적극적 요소
이는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적극적인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되었다는 것, 혹은 우리에 계정에 넣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지키셨고 존중하셨기 때문에 율법의 모든 요구에 대하여는 의로우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그리스도의 의를 나의 것으로 삼아 주신다.
칭의에 대하여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이다.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의를 나에게 돌리시며, 나의 것으로 삼으시며, 전가시키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의라는 흠없는 옷을 입는다.
4) 칭의와 성화의 차이
첫째로, 칭의는 성부 하나님의 행동이다. 성화는 본질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다. 의 롭고 합당하다고 선언하시는 분은 성부이시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둘째로, 칭의는 우리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마치 법정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같다. 반면에 성화는 우리 안, 즉 우리의 내적 삶에서 일어난다.
셋째로, 칭의는 죄책을 제거한다. 성화는 죄의 오염을 제거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한다.
칭의는 영단번에 이루어지는 행동이다. 칭의는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칭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영단번에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성화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우리는 수건을 벗고 완전하게 될 때까지 주님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계속 자라간다. 칭의가 법정적이고 외부적이며 선언적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지에 관계 없이 당신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5) 칭의와 믿음의 관계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믿음과 칭의의 관계는 중요하다. 이 말을 우리가 믿은 것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전적으로 이단적이며 철저히 부정되어야 한다. 만일 내가 나의 믿음 때문에, 혹은 내가 믿음을 발휘하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나의 구원은 분명히 행위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은 내가 믿음이라는 행위를 한 것 때문에 나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 된다. 하지만 성경은 나의 믿음 때문에 혹은 내가 믿음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내가 믿음으로(by faith)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믿음은 단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의를 받아들이는 도구일 뿐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의 믿음이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칭의의 근거는 우리에게 전가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이다. 나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의 의이다. 나를 구원해 주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믿음이 아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내 믿음을 구원의 근거로 간주하는 것의 미묘한 위험성을 이해하겠는가?
그러면 믿음은 어떤 일을 담당하는 것인가?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오는 통로이자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고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믿음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신다. 이렇게 믿음을 발휘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가하시는 의를 받는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우리가 믿음의 선물을 받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의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라 하고 야고보가 ‘행함으로’ 한 것은 모두 칭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두 사람은 믿음의 특성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바울과 야고보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두 가지 특정한 유형의 오류들을 바로잡고 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중대한 사실은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내게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게 믿음의 선물을 통해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이나 나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나의 의는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고전1:30)이 되게 하셨다. 내 믿음은 내가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하도록 만든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완벽하고 점 없고 흠 없는 의의 옷을 내 것으로 해 주셨다. 그것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성경적이고 개신교적인 교리이다.
제 17 장 양자 됨
1. 양자됨의 의미
1) 어원적 의미
양자 됨이라는 말은 원래 아들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고대에서 이 말은 한 가족에서 다른 가족으로 사람을 보내어 그렇게 보내어진 사람을 두 번째 가족의 아들이나 딸이 되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2) 성경에서 “아들”의 용례
이 말이 단수로 사용되었을 때는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아들이시다. 그 용어는 또한 복수형으로 천사들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세 번째 용례는 인간 관원들에게 사용되었다. 시 82:6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네 번째 용례는 신적 양자 됨의 대상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반적 양자 됨과 특별한 양자 됨을 구분해야 한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이 있고”(롬9:4)의 양자 됨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반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 용어는 특별히 영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사는 이 특별한 용례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영적인 방법으로 자기 아들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3) 양자 됨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과 반론
양자 됨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일 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가르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소위 하나님의 보편적 부성과 모든 사람의 보편적 형제됨을 믿는다. 그들은 행 17:25-29의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히 12:9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를 근거로 든다. 이에 대한 답은 이 성경 구절들은 오직 하나님이 창조와 섭리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관계만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창조주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영의 아버지이시다. 하지만 그것은 구속이나 하나님이 사람들을 자녀로 삼으시는 특별한 관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러한 구분은 특별히 신약에서 볼 수 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이 권세 혹은 권리 혹은 권위를 받은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오직 이 사람들만이 양자가 된다.
롬 8: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쓰고 있다. 우리 주님도 명확한 구분을 하셨다. 주님은 자신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했던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2,44).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모두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였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뿐이다.
하나님의 자녀와 이 세상의 자녀 간에는 명확한 구분이 있다.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존재라고 말한다(요일5:19). 이런 구분은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편적 부성과 사람들의 보편적 형제 됨이라고 하는 개념을 거부해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우리의 아들 됨과 우리 주님의 아들 되심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신인, 하나님 자신이시자 완벽한 사람 즉 완벽한 하나님이시며 완벽한 사람이시다. 우리가 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 스스로 이 둘의 구분을 매우 주의 깊게 강조하셨다. 주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6:9)에서 주님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으셨다. 이것은 여러분과 제가 기도하게 될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여”라고 말한다. 주님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으신다. 이 특별한 기도는 주님이 드리신 것이 아니었다.
부활하신 후에는 훨씬 더 명확한 진술을 하셨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20;17). 그 이유는 둘을 구분하기 원하셨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주님은 “내가 우리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로 올라간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주님은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발생에 의해 아들이 되신 반면, 우리는 양자 됨으로 인한 아들들이다. 이것은 대단히 본질적인 구분이다.
4) 양자 됨의 정의
양자 됨은 자녀의 지위, 혹은 신분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법적인 행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구속을 적용하시는 성령의 독특하고 특별한 활동 혹은 업무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고 싶다. 양자 됨은 다른 모든 행동과 반드시 구분되어야 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중생과 믿음과 칭의 등은 모두 함께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양자 됨은 칭의와 같은 것이 아니며 심지어 칭의의 일부도 아닌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양자 됨과 중생도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중생에서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받아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양자 됨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양자 됨은 칭의와 중생을 결합한 것이다. 양자 됨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양자 됨은 칭의 이상의 것이며, 중생 이상의 것이지만 둘 다를 포함한다. 새로운 본성을 받은 사람들은 율법과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로우며 적극적인 의미에서 의로운 존재라고 선포된다. 그렇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포된다. 어떤 의미로는 이 또한 사법적 행동이며 또 하나의 선포이다. 하지만 양자 됨은 뭔가 새로운 것, 다른 것을 선포한다. 양자 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들이 소유한 특권을 누리게 된다.
5)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양자 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사이에 구분이 있을까요? 이를 구분하는 사람들이 드는 성경적 근거는 마 5:9, 산상수훈의 45절, 눅 20:36이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아들이 되는 것은 은혜의 문제가 아니라 노력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등 적용의 문제이며, 우리가 이런 일을 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심지어 단순히 자녀이기만 한 그리스도인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직 아들들만 참여할 것이며, 주님의 임재 안에서 영원을 보내는 것은 오직 아들들에게만 주어지는 일일 뿐 자녀들은 이 특권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자녀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기는 하겠지만 우리 주님의 직접적 임재 안에 있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단어들과 구조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질 때 성경의 참 뜻을 왜곡하고 부당하게 다루 수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일 뿐이다. 위와 같은 구분은 극도로 인위적이고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세한 논지는 311면을 보라)
2. 양자 됨의 증거
1) 우리가 상속자임을 증언하는 성경 말씀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벧전 1:3-6,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우리는 상속자, 즉 자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2) 성령의 내주
확신의 두 번째 근거는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는 것이다(롬8:15).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5).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이 양자 됨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3) 성령의 인도하심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고 그 인도를 기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3. 양자 됨의 결과
1) 양자의 영을 가진 사람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롬8:15)을 잃어버렸다,
2) 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자유의 영이 주어졌다. 다시 말해, 우리는 더 이상 율법과 율법의 정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3)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이 양자의 영을 받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4)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됨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지닐 권리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26:12)고 말씀하셨다.
5) 하나님의 보호와 위로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완벽하게 공급하심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눅12:7). 하나님 없이는 아무 일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고 말씀하셨다.
6) 하나님의 징계
징계는 우리가 양자 된 것의 매우 명확한 결과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에 이르게 하시기로 결심하시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와 가르침을 듣지 않으려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애정을 지니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하실 것이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6).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
5) 상속권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롬8:17).
하나님의 가족으로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자녀라고 선포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6) 안전하고 확실한 보증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에 간직하신 유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벧전1:4) 그러므로 안전하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양자 삼으셨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의 운명은 안전하고 확실하다. 그것은 보증이다. 아무 것도 그 누구도 나에게서 유업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이것은 가장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는 교리이다. 양자 됨이야말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상기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놀라운 유업, 우리가 장차 받을 말할 수 없는 영광을 깨닫게 해주는 교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 아닌가?
단지 의롭다고 선포되는 것만이 아니다. 단지 새로운 본성을 받는 것만이 아니다. 그 위에, 거기에 더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상속자요, 하나님의 독생자와 함께한 상속자로 선포된다.
제 18 장 성화: 여러 견해들
지금까지 우리가 밟아온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갖게 된다 거듭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의롭다고 선포되어진다. 가족으로 입양된다. 하지만 죄의 문제는 어떻게 된 것일까? 우리는 갑자기 완전해진 것이 아니다. 신자의 삶에는 여전히 죄의 문제가 남아 있고, 성화의 교리는 하나님이 이 문제에 대해 무엇을 하시는가를 다룬다.
1.성화에 대한 논쟁
1) 논쟁의 역사
이 교리는 커다란 논란의 대상이다. 성화에 대해 수없이 많은 관점과 이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화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보다는 성화가 정확히 어떻게 일어나느냐에 대해 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상당한 논쟁이 특히 지난 이백 년 간 계속되어 왔는데, 그 일차적 원인은 다름 아닌 위대한 존 웨슬리가 제공했다. 존 웨슬리는 성화와 거룩함에 대해 하나의 이론을 주창했는데, 그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중대한 것으로 생각했다. 커다란 토론이 일어났고, 유감스럽지만 똑같이 선하고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신랄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문제에 대한 신학과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존 웨슬리와 그의 보좌관이자 조력자인 매들리의 존 플레처, 그리고 이에 대항한 조지 휫필드, 아우구스투스 토플레디 및 다른 사람들 사이에 벌어졌던 커다란 논쟁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이 논쟁은 역사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고찰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중요하다.
2) 이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자세
어느 날 오후, 휫필드의 대단히 강력하고 공격적인 지지자들이 그를 찾아가 물었다. “휫필드 씨, 우리가 천국에서 웨슬리 씨를 보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에 대해 휫필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매우 높고 고귀한 위치에 있어서 여러분과 저는 그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우리의 구원이 성화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따라 결정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성화에 대해 무엇을 믿든 아무 상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경을 연구해서 어떤 교리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이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신자들의 의무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런 일은 아무 상관 없다고, 그런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그런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상 진리가 무엇이든 상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당신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사이비종교에 문을 활짝 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신은 매우 그럴듯한 가르침이 갑자기 제시되었을 때, 그것을 평가할 기준이 없음으로 인해 그 가르침을 믿어 버리게 될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대중에게 인기 있는 여러 이단과 사이비종교가 번성하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배우려는 수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믿는 교리들을 모른다면 정말 부끄러운 노릇이다.
2. 성화의 의미
구약에 사용된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밝은 빛처럼 ‘빛나다’라는 의미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자르다’, ‘분리하다’라는 의미라고 말한다. 성화의 문제에는 그 두 가지 측면이 모두 포함된다. 잘라 냄이 있다. 분리가 있다. 하지만 참된 성화는 모세가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함께 있은 후 그의 얼굴에 나타났던 것과 같은 종류의 빛남을 포함한다. 거룩함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과 같은 일종의 밝음이 있다. 신약에 이르러서는 여러 단어들이 주로 분리의 개념을 의미한다.
1) 첫 번째 의미- 구분되어 하나님께 드려짐
성화는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따로 떼어 놓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구약 둘 다에서 성화의 중대한 의미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산은 “거룩한 산”, 혹은 거룩하게 된 산이라고 불린다. 그 산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따로 떼어졌기 때문에 거룩한 산이 되었다. 성전 건물을 거룩하다 말했으며, 그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다. 성전의 기구와 모든 기물 역시 구별되어 거룩하게 된 것으로 묘사된다(출28:29등).
구별된다는 것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불경하거나 부정하거나 불결한 모든 것에게서 분리된다는 것이다. 일단 거룩하게 되면 그것들은 일상적 용도에서 구별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적극적인 의미에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뜻대로 사용하실 수 있도록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이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 사용된 것을 보면 대단히 흥미롭다. 요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요 17: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와 같이 무언가로부터 구분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 이 용어가 무생물과 심지어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까지 사용된다.
“거룩하게 하다”라는 말이 같은 의미로 신자들에게도 매우 자주 사용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행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구분한다는 의미이다. 고전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성화가 칭의 전에 나오고 있다. 그것은 그린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즉 죄악된 고린도 사회에서 나와 하나님께로 구별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씻음 받고 거룩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께 구별되었다.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것은 구별되었다는 의미이다. 이 구절의 문맥으로 보아 다른 의미일 수는 없다. 14절도,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거룩하게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구별되었다는 말 외에 다른 의미일 수 없다. 벧전 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여기서도 역시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세상으로부터 나와 구별되어져서, 하나님께 맡겨진다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벧전 2:9, “너희는 ---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여기서 베드로는 출 19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사용된 것과 똑같은 용어를 교회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한다. 이스라엘 자녀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 거룩케 된 나라였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그들을 구별하셨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이미 거룩하게 되었다.
2) 두 번째 의미- 거룩하게 되는 내적인 변화
성화는 구별되었다는 것뿐 아니라, 그로 인해 우리를 새로운 지위에 합당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무언가가 우리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성화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서 우리를 점점 더 주 예수 그리스도와 닮아 가게 하고,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도록 우리를 주의 형상으로 바꿔 나가는 정화와 씻음의 역사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성화에 대해 말할 때 일반적으로 마음에 두고 있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이같은 내적 씻음, 내적 정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성화의 또 다른 훌륭한 정의
성화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죄인을 죄의 오염으로부터 건져 내고 그의 본성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새롭게 하며 그가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혜롭고 계속적인 작용”이다.
칭의와 성화의 차이점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적용시키시며, 그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신다. 이것이 전가된(imputed) 의이다. 하지만 성화에서 우리는 분여된(imparted) 의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나의 것으로 간주된 의가 아니라 내 안에서 창조되고 내 안에서 만들어진 의이다. 이것은 중대한 구분이다. 교부들은 전가된 의와 분여된 의의 차이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곤 했다. 17세기, 18세기, 심지어 19세기에도 이 용어는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이런 용어들에 대해 우리가 그들처럼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선조들에 비해 얼마나 퇴보했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이다.
성화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견지에서 규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화는 사실상 우리가 중생하고 칭의된 이후 하나님이 죄의 문제를 다루시는 방식이다. 우리는 언제나 성화를 우리의 도덕적 상태 및 상황이라는 견지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도덕적 상태 및 상화의 견지에서 규정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성화라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위라는 개념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성과 순결함 자체가 성화는 아니다. 성화에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상이 말하는 최고로 도덕적인 사람과 성화된 그리스도인 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3. 성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한 견해들
우리를 죄의 오염으로부터 정화시켜 순결하게 되도록 하고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도록 하는 이 과정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1) 완전주의자의 견해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일종의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견해로서 몇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죄가 완전히 근절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
성화란 주어진 매 순간에 가능한 한 최고의 완전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원에서 잡초 전체를 뿌리채 뽑아내 버리는 것과 같다. 일 년 후 혹은 십 년 후에는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완전함이란 이 순간에 가능한 최대한의 완벽한 삶을 사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완전함에 대해 가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다. 찰스 피니가 이에 속한다.
존 웨슬리의 완전주의는 그와 전혀 다르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순간에도 어떠한 알려진 죄도 고의로 짓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웨슬리는 완전함이 순간순간의 상태라고 말한다. 다음 순간에는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알려진 죄에만 적용된다. 모르고 죄를 짓고 있다면, 그 죄는 시간이 지난 후에 드러날 것이며, 알게 된 순간 그 죄 역시버려야 한다. 그러면 그 죄에 대해서도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화는 모종의 완전함을 의미하지만 절대적인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화를 깨끗한 마음, 죄에서 완전히 깨끗하게 된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
그들 역시 알려진 죄와 고의적인 죄만을 다룬다.
웨슬리는 “완전한 사랑”을 말한다. 그들이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이 이생에서 그리고 실제적인 면에서 정말로 완전하지는 않다 해도, 그들은 사랑 안에서 완전하다고 했다. 그들은 온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 이것이 완전한 사랑이라고 웨슬리는 말했다. 그는 완전함과 성화의 순간순간의 측면을 강조하는 데 대단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성화를 한순간에 받아야 하고 받을 수 있는 무언가로 본다는 점이 모든 완전주의자의 견해의 특징이다. 성화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그것을 바라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믿음을 발휘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당신은 칭의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성화도 받아야 한다”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하나의 경험이며, 순간적으로 완벽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2) 반작용의 원리에 의한 성화
이것은 1870년대에 유명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인기 있는 견해이다. 이들은 죄가 근절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들의 근거를 이루는 중요한 본문은 롬 8:2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들은 말한다. “그렇다. 죄는 신자 안에 남아 있다. 하지만 그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의지하면, 그리스도는 그가 죄를 짓지 않도록 지켜 줄 것이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이러한 죄의 권세가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은 그것을 역전시키고도 남는다.” 바로 여기서 반작용이라는 개념이 개입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예화가 부지깽이와 구명대의 예화이다.
완전주의자의 견해들과 마찬가지로, 이 가르침 역시 통상적으로 성화는 하나의 체험으로 시작되며 그 후 과정으로서 계속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성화는 받아야만 하는, 그리고 한순간에 받을 수 있는 것이며, 그후 당신이 할 일은 그 경험 안에 거하는 것뿐이다.
3) 거듭난 순간 시작되어 영화롭게 될 때 완성되는 성화
성화는 우리가 중생하는 바로 그 순간 시작해서 우리 삶 전체 동안 점진적으로 계속되며, 죽음 이후에야 완전해질 과정이라고 말한다. 커다란 차이점은 여기서는 성화를 칭의 이후에 받을 수 있는 체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우리가 거듭난 순간 성화가 시작되며, 이 성화는 계속 진행되어 우리 몸이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되고 부패로부터 건짐 받을 때에 이르러서야 완전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롬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몸이 최종적으로 구속될 때에야 우리의 성화는 완전하게 될 것이다.
저는 존 웨슬리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심지어 그의 거룩함에 대한 가르침에도 빚을 지고 있다. 제가 그의 가르침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며, 명백히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들도 있다. 하지만 저는 완전주의자들에 속한 사람들의 성화와 거룩에 대한 작품들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주된 강조점을 믿지 않고 거부하긴 하지만 그 작품들을 읽으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제 안의 성화의 과정이 격려 받고 더 촉진된다는 것을 기쁨으로 증거한다.
19장 성화: 하나님의 일과 우리의 일
성경은 몇 가지 원리를 대단히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는 이 원리들을 가지고 위의 세 가지 견해들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1. 구원의 전 과정의 목적인 성화
1) 성화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신약 성경 뿐 아니라 구약 성경 도처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중요한 원리는 성화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살전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이 구약에서 하신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성화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갈4:4) 목적도 역시 우리의 성화였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은 우리가 완전하게 되는 것이었으며, 성령을 주신 목적도 마찬가지였다. 실로 하나님이 우리와 우리의 구원에 대해 하신 모든 일의 목적과 목표는 우리의 성화이다. 요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9절,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이 일을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2) 피해야 할 오류들
첫 번째 큰 위험은 이 다양한 교리들을 개별화시켜서 잘못된 방식으로 서로 분리시키는 위험이다. 모든 교리 사이에는 중대한 연결성이 있으며 그 교리들은 모두 하나이다. 칭의와 성화를 구분해야 하지만 분리해서는 안 된다. 칭의와 성화는 같은 과정의 일부, 즉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활동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가 없이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다고, 즉 성화되지 않고도 칭의를 얻을 수 있다거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성화에 이른다고 말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것은 완전히 비성경적이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사도는 여기서 구원의 전체 과정은 하나이며 하나님이 어떤 사람 안에서 이 일을 시작하실 때, 전체 역사가 이미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칭의에서 영화로 바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이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두 번째 위험은 먼저 죄사함만을 구하고 성화는 나중에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죄사함을 구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하심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참으로 죄사함을 구하고 있다면, 그들은 자기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짓게 한 것으로부터, 그들을 이토록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한 것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하지 않을 수 없다. 죄사함이 그 모든 것을 포함한다면 그것은 이미 성화의 시작이다. 우리가 죄의 넘치는 죄성을 보고, 그로부터 분리되기를 갈망한다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기를 갈망하게 되는 순간, 그 자체가 성화, 즉 하나님을 향해 구별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위안과 해방을 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성화의 중대성을 강조하지 않는 그릇된 복음 전도는 대단히 위험하다. 죄사함에서 멈추는 복음 전도는 성경적 복음 전도가 아니다. 모든 복음 전파의 핵심은 죄의 본질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화목을 참되게 선포한다면 성화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며 값 주고 사신 바 된 존재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울의 논지이다. 그는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통해 성화를 가르친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6:19-20). 성화를 전파할 때 사도는 성령만이 아니라 동시에 십자가도 전파한다.
3)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성화
성화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서 춢발하고자 하는 지극히 해로운 습관으로부터 생겨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자신의 문제들, 우리의 죄들과 필요들을 생각하며, 성화에 대해 말할 때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둔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오류이다.
사도 베드로는 성화에 대해 설교하면서 정반대의 순서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이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 이것이 이유이다-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3-16).
교회는 특정한 죄로 인해 고민에 빠졌을 때 찾아가야 하는 진료소가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두 성화되고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 데는 한 가지, 오직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나 우리의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속한 자가 아니다. 우리는 죄된 삶을 살 권리가 없다.
성화의 과정은 중생하는 순간 시작된다
내가 신성한 성품을 받는 순간, 내가 거듭나는 순간, 나를 죄로부터 분리시키게 될 뭔가가 들어온다. 약 4:5의 바른 번역은 이렇다. “하나님이 너희애게 주셔서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이 너희를 세상과 그 영으로부터 떼어내어 하나님께로 가게 하기 위해 심지어 시기할 정도까지 열망하시는 것을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내가 거듭나서 성령을 받는 순간, 이와 같은 구별의 과정은 이미 시작한 것이며, 성화의 과정이 내 안에서 이미 시작되지 않고는 중생할 수 없다. 육신과 성령의 갈등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모든 부분, 모든 단계에서 나를 세상으로부터 떼어 내어 하나님께로 구별하려는 싸움이다.
2. 성화의 주체 (두 번째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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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화를 이루시는 하나님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믿음을 표현해야 한다. 성화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능동적인 참여를 묘사하는 고전적인 본문은 빌 2장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12-13절). 이 구절에서는 완벽한 균형이 제시된다. 그러므로 성화의 주체에 대해 논할 때, ‘성화의 역사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수행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반드시 성화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말로 출발해야 한다.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이에 대해 대단히 명백한 입장을 취하며, 분명한 표현을 사용하여 표현한다. 성경에서 성화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일로 돌려진다. 살전 5:23은 성화가 성부의 역사라고 가르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히 13:20-21,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성경은 성화가 성자의 역사라고 말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5-26).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똑같은 방식으로 성화는 성령의 역사이기도 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6:11).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2:13). 그러므로 성화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특별히 세 번째 위격, 즉 성령의 사역임이 분명하다.
2) 성화를 이루는 우리의 행동
칭의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언적 행동이다. 하지만 성화에서는 우리의 행동이 요구된다. 성화 교리에서 대단히 중대한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서 혼란에 빠지는데, 특히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셨기 때문에, 이제 새 본성을 발휘하는 것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으며,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적용함으로써 그 일을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성화와 관련된 모든 일을 스스로 한다.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성화는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최초의 행동과 동기와 힘, 이 모든 것은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반대의 극단이 있다. 그들은 우리는 수동적으로 예수를 바라보고 그의 안에 거하는 것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으며, 그렇게 하면 모든 일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요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잘못 오해한다. 나무의 가지는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지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가지는 나무로부터 올라오는 수액을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것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수액이 공급되면 가지는 활력과 생명으로 가득 찬다. 가지는 공기로부터 뭔가를 끌어들이고 되돌려 보낸다. 가지의 잎사귀 하나하나는 대단히 활동적이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말한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처음에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지 않았다면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일하신다. 하나님은 나의 소원 안에서 일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원대로 행동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해 주신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나도 소원하고 행해야 한다.
성경의 예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나에게 호소하시는 성화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12절). 당신은 죄가 당신 안에서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절). 우리는 우리 지체를 드려야 한다. 그것이 적극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너희가 ---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절). 우리는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성령이 없이는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것이 수도원 제도의 오류였으며, 모든 도덕 규범의 오류이다. 하지만 성령을 받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면, 성령을 통해 우리는 우리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3:5)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굳게 서라”(고전16:13). “싸우라”(딤전6:12).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딤후2:22).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우리는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명령을 받는다(엡4:22,24). 가장 중요한 본문은 고후 7:1이라고 생각한다.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성경을 왜곡하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그로 인해 멸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명백하게 가르치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구원을 이루게 된다. 우리가 정말로 해야 하는 일은 이같이 여기고, 이해하고, 적용하고, 죽이는 것 등이다. 즉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대단히 균형잡혀 있다. 성화에서 일차적이고 가장, 극도로 중대한 것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이다. “갓난 아이”로서, “사랑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거룩하게 되라는 권면을 받는다.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며 그가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정말로 합당한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장 성령이 행하시는 강력한 과정
1. 성화는 단번에 받는 것이 아니다.
1) 성화는 주어지는 것이라는 주장
성화는 받는 것인가? 성화는 주어지는 것이라는 견해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칭의를 받은 것처럼 성화도 받으십시오.” 20세기 초의 유명한 교사는 말했다. “당신은 손에 지갑을 들고 있고 그 안에는 파운드 금화 두 개가 들어 있습니다. 먼저 금화 한 개를 꺼내는데 그것이 여러분의 칭의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금화도 꺼낼 수 있는데, 그것이 성화입니다.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이 첫 번째 금화만 꺼내고 두 번째 금화는 꺼내지 않는데 그것은 비극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칭의를 받습니다. 이제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성화를 받으십시오.” 그들은 성화가 이와 같이 한 번의 행동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행26:18)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거룩케 된”이라는 말은 성화의 두 가지 의미 중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내적인 청결과 정화의 과정이 아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불린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벧전1:2)에서도 거룩하게 하심이 믿음보다 먼저 나온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6:11)에서도 거룩함을 칭의보다 앞에 놓았다. 이 모든 예에서 그 말은 “구별하다”라는 의미이다. 행 26장도 마찬가지다. “믿어 거룩케 된”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방인들이 기업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의미이다.
2) 요한 일서 1:7, 3:8, 9절의 올바른 해석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또한 요한 일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나오는 1:7, 3:8, 9절을 즐겨 인용한다. 이 구절들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빛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 그러다 내가 죄에 빠지면 어떤 의미로는 교제가 깨어진다. 하지만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공의로우셔서 여러분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로부터 여러분을 깨끗케 하신다는 의미이다. 요한은 그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가르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뭔가를 받아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죄를 짓는다면, 화목제물이 되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해결책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3) 롬 8“1-2의 올바른 해석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구절은 롬 8:1-2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그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들은 두 개의 법이 있으며 바로 여기서 반작용의 법칙이 개입하게 된다고 해석한다. 내 안에는 죄와 사망의 법이 있어 나를 끌어내리고 죄를 짓게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라는 다른 법이 내가 그리스도께 의지하고, 그 안에 거하는 한, 첫 번째 법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준다는 것이다. 부지깽이와 구명대에 대한 예화와 같다. 그러나 이 해석은 심각한 오해이다.
바른 해석은 바울이 앞의 두 장에서 이미 몇 차례 말했던 요점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아담의 타락의 결과, 그리고 원죄를 물려 받은 결과 죄의 지배 아래 있다. 죄는 육에 속한 사람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주관한다. 그들은 죄의 종이다. 그들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죄는 그들의 주인이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죄에 대해 죽었다고 말한다. 두 번째 진술은 6:18이다.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것은 “너희가 이미 해방되었느니라”라는 의미이다. 이 일은 이미 일어났으며 영단번에 일어났다. 우리가 죄없고 완전한 존재라는 뜻일 수는 없다. 우리는 죄가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죄로부터 해방된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도 않고, 죄의 지배 아래 있지도 않다. 바울은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라고 말함으로써 이 사실을 이미 표현했다. 그리고는 이처럼 아주 흥미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그 말을 반복한다.
그는 20절에서 다시 한 번 말한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하지만 우리는 이제 의의 종이고 죄로부터 자유하다. 이 모든 구절들이 롬 8:1-2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7장으로 가서 매우 중요한 구절인 4-6절을 보자.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죽임을 당하였으니”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부정과거 시제로 되어 있으며 “영단번에”, 즉 최종적인 결과를 의미한다. 이 말은 의롭다 함을 받은 이후에 얻게 되는 어떤 후속적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과 이로 인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때, 여러분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며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다. 여자가 자기 남편과 연합하여 자녀(즉 열매)를 갖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함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 그것이 우리에게 들어온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 생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전에 우리를 속박했던 죄의 지배는 끝났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아직 롬 8:2의 위치에 이르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심각한 잘못인가! 그들은 이 구절이 사실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계속해서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울이 말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부정과거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이미 해방하였음이라” 그 일은 일어났다. 그는 과거의 일을 돌아보고 있다. 하나의 사건이 영단번에, 최종적으로 일어났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순간 나는 죄와 사망의 법과 관계를 끊었다. 그 일은 내가 이차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는 것의 심각성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새로운 남편인 그리스도에게 연합된다는 것은 옛 남편과의 관계는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은 더 이상 죄나 사탄의 지배, 혹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롬 8:1-2에서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요약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4) 성화는 이루어 나가는 것임을 보여 주는 성경 구절들
만일 우리가 성화를 받기만 한다면 바울과 사도들이 그토록 힘들여 논증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왜 그런 권면들을 한단 말인가?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우리가 성화를 받으면 이런 일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는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을 금하고 우리 자신을 지키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받기 위해 기다리며 인생을 낭비하고, 그러는 동안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지 않고 있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엡4:28). 이 일을 해야 한다. 뭔가를 받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적질 하기를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하는 말, 그 외 다른 부적절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엡5:4).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12:2). 뭔가 받기 위해 기다려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세상을 본받았다면, 이제 그러기를 중단해야 한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경하게 하라”(약4:8). 성화가 무언가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이런 명령들은 아무 의미 없는 잉크의 낭비일 뿐이다. 만일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다. 너희는 한 번의 행동으로 성화를 받을 수 있으며 그 후 해야 할 일은 그 성화를 유지하고 그 안에 거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신약의 가르침이 결코 아니다. 모든 신약 서신서에는 이런 위대한 교리와 윤리적 호소와 권면이 들어 있다.
2. 성화는 언젠가 얻게 되는 체험이 아니다
1) 극적인 체험과 성화가 동일시될 수 없는 이유다. 성미가 고약했던 사람 등등. 그들은 오랫동안 그 문제로 씨름했으나 해결할 수 없었고, 놀라운 체험을 하고서 다시는 화를 내지 않게 되었다. 담배나 술 등을 끊기 위해 노력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비슷한 이야기들도 있다. 우리는 이런 체험들을 주의 깊게, 그리고 공감하면서 검토해 보아야 한다. 물론, 저는 이런 체험들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 저 자신도 그런 체험을 몇 가지 했다.
그러면 그런 체험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저의 대답은 이것이다. 무엇보다도, 신약에는 그런 체험이 성화를 의미한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그런 체험이 성화의 일부일 수도 있고 성화에 크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성화는 아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저의 목회 경험 동안 모든 죄에서 해방되는 체험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극적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답이 되지 못한다. 자신을 굴복시키고 자발적으로 내드리려 애썼으며,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행했으면서도 이런 체험을 얻지 못한 정직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체험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면 그것은 일부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어야 한다. 또 하나의 논거를 말씀 드리고 싶다. 만일 한 가지 죄에 대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왜 모든 죄에 대해 그렇게 되지는 않는가? 왜 우리가 모두 죄 없고 완전한 상태가 되지 못하는가? 고약한 성질을 위와 같은 방법으로 제거할 수 있다면, 왜 즉각적으로 죄 없는 완전의 상태에 도달하지 않는 것일까요? 저는 우리가 그 같은 상태에 도달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한다.
이 점에 대해 제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육에 속한 사람이면서도 이와 비슷한 체험, 즉 갑자기 성격이 온순해졌다거나 음주에 대한 욕구를 상실하는 체험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체험은 사이비종교나 그와 비슷한 가르침에 의해 생겨 났다. 전기를 읽어 보면 갑작스럽게 예상치 못한 해방을 체험한 비슷한 이야기를 간혹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해방은 심리적 원인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그것이 일종의 영적인 표현일 가능성조차 암시되지 않은 채 말이다.
2) 체험과 성화의 관계
이 체험의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원리를 살펴 보자. 첫째로, 하나님은 특정한 죄들로부터 이런 식으로 갑자기 해방시켜 주실 수도 있고 그렇게 해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 체험을 일반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우리의 교리는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둘째로, 성화는 단순히 특정한 죄 혹은 심지어 특정한 죄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나와 하나님 사이의 전체적인 관계의 문제이다. 특정한 죄들로부터는 해방되었으면서도 성화는 여전히 매우 미미하고 미성숙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성화가 오락가락하고, 잃었다가 다시 찾기를 반복하는 변화무쌍한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3:18)라고 가르친다. 성화는 성장, 발전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체험과 성화를 혼돈하면 안 된다.
성화는 체험이 아니라 상태이다. 그것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이며 나는 “그(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고후3:18) 된다. 성화는 체험들을 포함하며 체험에 의해 도움을 받지만 성화 자체는 체험이 아니다.
성화는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 중생하는 순간 시작되는 생명이며 성장과 발전의 과정이다. 그 생명이 아주 작게 보이고 아무런 변화도 없어 보이는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복된 체험이 이어진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 체험을 성화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 체험은 심어논 식물에 비가 내리고 해가 비치는 것과 같다. 체험은 성화를 자극하고 촉진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성화 자체는 아니다 체험은 성장의 과정이 아니다. 하지만 성장을 돕고 촉진한다.
물론 체험은 갑작스럽고 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이차적인 특별한 복을 많이 받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저는 주저 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성화는 이차적인 복이 아니다. 체험들을 하면서 그들이 주님을 더 경험하면 할수록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과 주님을 실제로 사랑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우리의 성화는 촉진된다. 하지만 반복해서 말하건대, 체험이 성화는 아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진리의 한 측면을 깨달을 수 있고, 그 깨달음의 결과 그들의 삶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때까지는 그들이 성화되지 않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중생한 순간부터 성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감정은 변하고 체험은 오락가락하며, 만일 나의 성화가 나의 체험과 같은 것이거나 동의어로 여겨진다면 내가 성화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의심하게 될 때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성화는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성장이다
성화를 받아야 하는 체험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것이 갑작스럽게 일어난다고 믿는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거듭난 자”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고전3:10이다. 요한은 “자녀들,” “청년들,” “아비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요일2장). 이 말들은 태어나서 성인으로 갑자기 도약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성화이다. 여러분은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
1) 구약 성경으로부터 유추한 그리스도인의 삶
모든 이스라엘 자녀들의 역사는 영혼의 구원을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영단번에 해방되었으며, 애굽 사람들은 홍해에 빠져 죽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인들의 괴로움은 그 순간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가나안을 들어갔지만 거기서조차 골칫거리가 있었다. 그들은 성화된 지위에 있었지만 여전히 싸워야 할 적들이 있었고, 문제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방법이며, 하나님이 모든 영역에서 동일한 원리로 역사하신다. 우리 주님은 땅에 씨를 뿌리고 나서는 집에 돌아가 밤낮 자고 깨기를 반복한 농부를 묘사하셨다. 씨는 자라기 시작하고 계속해서 자랐다(막4:26-29). 하늘나라도 그와 같다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다.
2) 성화의 과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순간 우리를 완전하고 흠 없이 만드실 수 있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으로 알듯이 하나님은 분명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셨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사탄을 멸하실 것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멸망시키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셨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방법과 방식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왜 하나님은 죽음을 폐하여 버리지 않으셨을까? 유일은 대답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로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며, 우리의 성화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성화 방법은 중생의 순간 시작하는 이러한 과정이다. 성화는 계속 지속된다. 우리의 모든 체험은 성화를 촉진시키고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된다. 우리는 진보하고 발전하고 있다. 우리는 일년 전보다 지금 더 성화되어야 하며, 그 과정은 마침내 영광 가운데 우리가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온전하게 되기까지 계속 진행될 것이다.
21장 로마서 6~8장이 말하는 성화
1. 로마서 6장의 개요
우리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라고 기도하셨다. 말씀 전체,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이 우리의 성화를 돕는다.
1) 로마서 6~8장의 의의
성화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의 표준문구라고 부를만한 부분이다. 이 장들은 명확한 방식으로 성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첫 다섯 장에서 칭의라는 위대한 교리를 다루고 나서 로마 교회의 몇몇 성도들이 그 교리로부터 잘못 추론해 낼 수도 있을 법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2) 개략적 내용 분석
로마서 6~8장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려는 시도에 대한 논박이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계속해서 죄에 거하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함을 보여 주려한다. 이것이 불가능한 이유를 그는 기독교적 구원이 본질과 특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2). 그것이 주제이다.
전체적인 논지는 6장에서 진술하고 요약했다. 바울은 7장과 8장에서 이 논지를 더욱 상세하게 다룬다. 단지 심화된 내용일 뿐이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이 6장과 7장에 머물러 있으면서 8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극도로 위험한 오류이다. 사도 바울은 8장 5-9절에서 제 말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진술을 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8장에서 바울은 2차적 복을 받거나 추가적인 체험을 한 일부 특별한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하나하나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당신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당신은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육이 아니라 영에 속한 사람들이다. 회심하기 전에 그들은 육신에 있었다. 하지만 회심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향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상태일 리 없다. 여러분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을 영적인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의상, 필연적으로 영적이다. 거듭난 순간 우리는 신령하다. 우리는 성령을 받았다. 그리스도께 연합되었다.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 자이다.
2. 로마서 6~8장의 내용 분석
1) 죄의 타락의 결과
아담의 죄의 결과로 사람들이 죄와 사탄의 지배와 주관 아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죄된 본성을 갖고 있다. 타락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 우리의 영으로 육신을 주관하는 대신, 우리의 삶 전체가 육신과 그것을 주관하는 죄 된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엡2:3)에 지배받게 되었다. 그들은 죄와 사탄의 지배를 받는 육욕의 피조물이 되었다.
2)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구원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의 후반부에서 이 사실을 장엄하게 진술한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20절). 이 구원은 부분적인 구원이 아니라 전적이고 완전한 구원이다.
3)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
가장 중대한 구절은 로마서 6:14이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죄가 너희를 주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라고 말한다. 그런 일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가 여러분을 주관하지 못할 것이며, 바울은 이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 보여 준다. 근본원리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5장 후반을 보면, 거기서 말하는 논지는 우리가 아담 안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이 한 일의 모든 결과를 거두었고,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의 모든 결과를 거두었다. 그 두 가지가 대응을 이룬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께 결합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나눌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것은 6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
엡 2:6도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1:30).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과 연합했다.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전부를 소유한다. 우리는 이 점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율법과 죄로부터 해방되어 생명 가운데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스도가 죽으셨고 죄에 대하여 영단번에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 그래서 율법은 더 이상 나에게 정죄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을 뿐 아니라 죄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죽었다고 말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롬6:2). 부정과거시제로 표현할만큼 명확한 사실이다. 그 죽음은 영단번에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이미 죽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절). 우리의 옛 자아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 일은 이미 일어났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7절)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절).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죄로부터 이미 해방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22절). 그리고 나서 바울은 호소의 형태로 말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1절) 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새로운 생명 안에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혼했으며 선하고 성화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의 근본 진술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며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지위이다. 혹자는 말한다. “그럼 우리가 완전히 무죄하고 온전하다는 말인가요?” 그리스도께서 자아 전체에 대해 그렇게 하셨나요? 나는 이제 모든 모양과 형태의 죄를 전혀 짓지 않게 되었나요?“
4)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육체
바울의 대답은 이것이다. “그렇지 않다. 내가 방금 말한 모든 내용은 우리의 영혼에 해당하는 말이다. 우리 영혼은 이미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영적인 존재로서의 나는 죄에 대 죽었다. 나는 영단번에 죄와 관계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내 육체는 그렇지 않다.” 아담의 타락의 결과는 내 영혼과 육체, 전 인격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스도인이 구원 받는 순간 그리스도는 나의 영혼을 완전히 구속하셨다. 그것이 “새로운 자아”이다. 하지만 내 육체는 여전히 죄에게 속박되어 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죄와의 관계는 끝났다. 하지만 내 육체는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 있다. 증거를 제시하겠다.
6장에 나타난 증거
6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여 함이니”. 옛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혀 끝장났다. 죄의 몸이 멸하여지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2절을 보라. 11절에서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어서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을(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라고 한다. 13절도, “또한 너희 지체- 즉 나의 본능과 나의 수족, 나의 재능들과 내 모든 것-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그래선 안 된다. 바울은 반대로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한다. 이어서 19절에 최종 진술이 나온다. 거기에서 바울은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고 말한다. 이것이 나의 영혼은 해방되고 구속되었지만 육신은 아직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6장의 증거이다.
7장에 나타난 증거
16절에서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절에서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구속받았다. 그것은 내 안에 거하는 죄이다. 18절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는 내 안에 선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20절에서 다시 한 번 말한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같은 말이다. 하지만 이어서 23절을 보라. “내 지체 속에서- 내 속에서가 아니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이 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다시 그 죄가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죄는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지체 속에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24절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것은 논리적 결론이다. 바울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상태다. 나는 구원 받았고 속량받았다. 그렇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육신 안에 있으며 육신은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 있어서 나를 끌어내리려 한다. 누가 나를 이 몸에서 해방시킬 것인가?” “내가 어떻게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가?”
이것이 그의 질문이다. 25절에서도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것이 7장에 나오는 증거이다.
8장에 나타난 증거
10절에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이 말은 육신이 아니라 육체적 틀, 즉 소마를 의미한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그는 방금 이렇게 말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이것이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의 상태이다. 이런 여러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영적으로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차이를 알겠는가? 13절에서도 바울은 다시 한 번 말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바울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죄가 거하는 장소인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살 것이다.
8장의 마지막에는 이 모든 것을 요약하는 위대한 구절인 23절이 나온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이것이 무엇인가? 여기 답이 있다-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그리스도인인 나의 영은 이미 구속을 받았지만 내 몸은 그렇지 않다. 나는 내 몸도 영혼과 마찬가지로 구속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미 내 영혼을 구원하셨고 몸은 아직 구속받지 않았다. 나는 양자 될 것, 곧 내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5)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질 궁극적 승리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에게는 위대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7장 7-25절의 의미를 살펴 보자. 바울은 7장 첫 부분에서 우리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는 첫 번째 남편이 죽은, 그래서 다른 사람과 결혼할 자유를 갖게 된 여자와 같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매여 있지 않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으로 율법의 마침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결혼했으며, 율법과의 관계는 끝났다. “그렇다면 율법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말인가?”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 자체는 괜찮다. 하지만 율법이 여러분을 의롭게 하거니 거룩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실수이다. 율법을 수행하려는 자신의 노력을 통해 죄로부터 건짐 받으려 한다면 여러분은 정말로 멸망할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특유의 극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 때문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율법의 가치를 알게 되었으며 그것을 지키고 싶다. 하지만 내 몸이 나를 끌어내리고, 내 몸에 남아 있는 죄가 율법을 지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것이 전부라면 나는 실패자이고 곤고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의 상태는 그와 같지 않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리고는 자신의 질문에 즉각 대답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6장에서 그가 요약한 내용이 이 질문에 이미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에 그 곤고함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죄는 나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일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며, 실제로 허용되지 않는다.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은 6장 14절에서 처음으로 대답한 것이다. 그가 이 말을 즐겨 반복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7장 25절에서도 다시 한 번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어서 8장 10-11절에서도 대단히 특별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여전히)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은 몸도 살리시리라”. 그것은 재림 때에 있을 성도의 부활만이 아니라 이 죽을 몸 안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이미 진행 중이다. 이 얼마나 멋진 구절인가?
15~17절에서도 반복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여러분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피곤한 순례 여행을 하고 있다고, 모든 것이 여러분을 반대하고 끊임없이 패배하고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마지막 결과는 확실하다.
23절에서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 일이 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감과 좌절감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의 투쟁은 헛되거나, 절망적이거나, 무기력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위대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며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그리고 이 역사의 결과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을 이미 해방시키셨으며 우리의 몸까지도 해방시켜 나가고 계신다. 마지막에 우리 몸은 완전하게 해방될 것이다.
이 과정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진행된다
빌 2:12~13이 그 답을 준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그의 인도를 받는다. 성령은 우리 의지에 역사하신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마음을 창조하신다. 성령은 죄의 모든 더러움과 추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우리가 정결함과 하나님의 생명을 열망하게 하신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소원하는 것을 행할 힘과 능력을 주신다. 8:14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된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의의 무기로 드려야 한다
성령은 우리를 특히 진리를 통해 인도하신다. 성령은 진리의 창시자이시며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셔서 그 진리를 이해하게 하신다. 성령이 그렇게 하실 때, 우리는 거룩해지고 있다. 우리 영혼은 이미 속량 받았지만 몸에는 아직 문제가 남아 있다. 우리는 그 몸마저도 마지막에는 해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이 일이 일어날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보여 준다.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11). 그는 우리에게 궁극적 승리에 대한 확신을 준다. 나는 더 이상 패배감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내가 승리자의 편에 섰다는 것과 계속해서 전진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호소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6:12). 나는 이것이 지극히 정당한 호소라고 느끼며 그대로 실천할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으니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나는 “옳은 말입니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몸도 영화롭게 되는 영광스런 날이 오고 있다
이어서 바울은 나의 속량받지 못한 몸이 이전처럼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위대한 호소를 한다. 나는 내가 장차 영광 받을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식하고 나의 몸이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내가 이생에 있는 동안에는 완성되지 않고 계속해서, 끊임없이 진행될 과정이 있다. 죄는 몸에 남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 과정이 완성될 날이 오고 있다. 주님은 나의 낮은 몸을 변화시켜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되게 하실 것이다(빌 3:20).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구속의 과정을 시작하셔서 나를 영적인 존재로 구속하시고 죄에 대하여 죽도록 만드신 날이 있듯이, 나의 몸도 마찬가지로 죄에 대하여 죽고, 흠도 없고 점도 없이 완전하고 책망할 것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대면하여 서게 될 그런 날이 있다.
약속된 영광의 날을 바라보며 죄와 싸워 나가는 것이 성화다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지금이라고 했다-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3:2). 그 때에 우리가 주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주님과 같이 되고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고 그분의 형상을 반영한다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 역시도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된다는 뜻이다.
이 일은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생과 이 세상에 있으며 여전히 내 몸에 있는 죄와 싸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고 말한다. 이것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다.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9:27)이라고 말한다. 이 일 역시 스스로 해야 한다. 이 사람은 수동적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만 있지 않다. 나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인다(골3:5). 이 모든 진리,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나는 그렇게 행하라는 권면을 받고, 그 일을 행하기 원한다. 이것이 성화이다.
3. 성화에 대한 고찰의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든지, 이생에서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다고 하는 모든 이야기를 반드시 거부해야 한다. 성경의 이름으로 그런 말들을 거부한다. 우리는 반작용의 원리 역시 거부한다. 이 원리로는 나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내가 영적으로 이미 해방되었으며, 문제는 오직 육신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직면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말해 주지 않는다. 이 원리는 로마서 7장에 머무르는 그리스도인과 8장에 도달한 그리스도인 사이에 잘못된 구분을 만든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로마서 8장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화를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계획의 일부로 본다. 그리스도는 구속이시며 신자는 그리스도께 연합한다. 거듭남과 중생과 연합의 순간 이 강력한 과정이 시작하여 최종적으로는 완전한 구속과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은 심지어 우리의 몸, 즉 지금까지, 그리고 우리가 죽고 다시 살아날 때까지 계속해서 죄의 지배 아래에 있을 우리의 몸까지도 포함한다.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죄를 지배하고 점점 정복하게 될 것이며 그의 성화에 진보와 성장이 있게 될 것이다.
22장 세례와 충만
1. 성령 세례
1) 이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자세
우리는 지나치게 독단적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주의 깊게, 경외감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나아가야 한다. 구원의 능력을 깊이, 그리고 실제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교리에 대한 지식에 달려 있다. 우리가 올바른 방법으로 그 지식에 접근하고 그것이 우리의 경험을 풍성하게 해 주는 것임을 인식하는 한, 이 지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된다.
2) 성령세례라는 용어가 사용된 성경 구절
“세례‘라는 용어는 세례 요한이 사용한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6-17). 주님 자신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신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명백히 같은 내용을 말하는 다른 용어들이 많다. 롬 6장에서 “무룻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것이 물세례를 말한다고 생각하기는 매우 어렵다. 물세례는 분명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 일은 성령에 의해 일어난다.
고전12:13의 중요한 구절,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엡 4:5,“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이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받는 세례, 즉 성령세례를 의미한다.
명백히 같은 의미로 사용된 다른 용어들도 있다. 성령이 부어진다는 기록이 있다. 행 2:17에서 인용한 요엘의 예언에 나오는 말이다. 행 8:16에서는 성령이 아직 사마리아인들에게 “내리지” 않았다는 진술을 발견할 수 있다. 또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묻는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19:2). 고넬료의 가정의 사건에 대해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11:15).
이 모든 용어는 같은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3) 성령세례의 의미
단지 중생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울이 고전 12:13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중생하고 그리스도께 결합했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그 몸의 지체가 되고 성령에 의해 그 몸으로 세례를 받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성령세례는 단순히 중생을 말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저로서는 이 설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을 믿는다면 제자들과 사도들이 오순절 날까지는 중생하지 않았다고 믿어야만 하는데, 이것은 전혀 지지할 수 없는 가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단 한 명의 구약 성도도 영생을 소유하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전도자 빌립이 말씀을 전파했던 사마리아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내려갈 때가지는 중생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중생했으나 성령을 받지 않았다. 저로서는 세례가 단순히 중생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받아 들일 수 없다.
성령세례는 구약의 약속의 성취다
성령세례는 무엇일까? 세례 요한과 주님 둘 다 이것을 예언했음이 분명하다. 베드로는 이것을 “아버지의 약속”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행2:33). 다른 곳에서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눅24:49)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이것을 고대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이것은 그 약속의 성취이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그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오순절의 일차적 의미는 교회가 제정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선포된 것이었다. 오순절 날 한 성령에 의해 한 몸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에 비로소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
오순절의 부차적 의미가 있다. 그 사실을 자각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3:2) 그들은 자신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령이 인 치심과 보증에 대한 가르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령세례는 특정한 은사를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은사를 갖지 않았으면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것이라거나 성령을 받지 않은 것이라는 말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성령세례의 결과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실제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가의 여부에 대한 표지와 증거는 우리의 영적 체험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점이 중요하다. 성령이 임하신 사람들, 성령이 내리신 사람들, 혹은 갈라디아 교인들이나 다른 사람들처럼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신약의 기사를 읽어 보면, 그 결과 그들의 영혼에 불이 붙었음을 즉각 깨달을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전과는 다르게 생생하게 다가왔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영적으로 자신을 나타내 보여 주셨으며, 그 결과 그리스도를 향한 큰 사랑이 성령에 의해 그들의 마음 속에 부어졌다. 이 경험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타고난 권리이다. “이 약속은 너희와 -그뿐만이 아니다-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에게 하신 것이라”(행2:39).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들어오시는 것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존재의 실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실상을 자각하며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그들은 실제로 그러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너무 생생하고, 너무 귀하고, 너무 사랑스러워 보여서, 그분이 그들의 전부가 되었다.
성령세례의 역사적인 예
기록을 읽어 보면 수 세기의 성도들이 이것을 증거했다. 1738년의 런던의 엘더스게이트가에서 존 웨슬리에게 일어났다. 그보다 앞서 조지 휫필드에게 훨씬 놀라운 방식으로 일어났다. 무디도 그런 경험을 했다. 피니와 조나단 에드워즈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도 그런 경험을 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도 이 경험을 증언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실상에 대한 인식, 주님을 향한 사랑,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결론- 성령세례는 성부와 성자의 영광과 실상과 사랑에 대한 최초의 체험이다.
경건한 존 플레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기의 오순절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성령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신자들의 마음에 영적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주님이시오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실상을 아는 복된 지식, 이것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들을 위한 체험이다.(397)
2. 성령충만
1) 성령충만의 의미와 의의
오순절 아침의 위대한 사건이 있은 후 기록이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2:4).
4:31에 다시 이 말이 반복된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그들은 누구였는가? 똑같은 제자들과 사도들이었다. 그들은 오순절에 충만해졌으며, 며칠이 지난 후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충만해졌다. 충만이라는 단어의 또다른 용례는 엡 5:18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행6:3-5에도 나온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
성령충만은 참된 섬김을 위한 능력과 권위를 부여한다
이 충만은 참된 섬김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심지어 우리 주님 자신도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기까지는 사역을 시작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심지어 자신이 삼 년 간 훈련시키셨으며, 가까이서 주님의 기적을 보고 모든 말씀을 듣고 주님의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을 목격하는 특별한 기회를 가진 특별한 사람들인 제자들에게까지도 그들이 성령이 주시는 능력을 받기까지는 사역을 시작하거나 주님을 증언하려 하지 말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매혹적이 말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고전2:4)으로 전파했다고 말한다. 그는 그의 과업을 위해 성령으로 충만했다. 어떤 형태의 사역을 하고 있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동안에만 가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과업이든 시도하기 전에, 이 성령과 능력의 충만함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증인이 되는 것과 변호인이 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성령이 없이도 변호인이 될 수 있다. 증인이 될 수 있도록 해주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고 진리를 변호할 수 있지만 아무도 확신시킬 수 없다. 하지만 성령이 충만하여 당신의 삶을 통해 그 진리를 증언하고 있다면,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그 증거가 효력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충만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섬김에 필수적이다.
성령 충만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명령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우리의 은혜가 자라도록, 성령의 열매가 우리 안에서 자라나 모든 사람에게 명백히 보이게 하기 위한 명령이다. 이어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여“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충만한가 아닌가 시험하는 방법은 이렇게 물어 보는 것이다. 우리는 감사로 충만한가? 찬양으로 충만한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는가? 사적으로 뿐 아니라 공적으로도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는가? 찬양의 영, 감사의 영, 예배와 찬미의 영으로 가득차 있는가? 이것이 성령 충만함의 불가피한 결과들이다. 이것은 여러 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성령세례는 최초의 경험이며, 성령충만은 종종 반복될 수 있는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2) 성령충만과 부흥
부흥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이 엄청난 충만이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성령충만을 얻기 위해 부흥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우리 각자는 성령충만을 구하고, 소유하고, 성령충만이 실재한다는 것을 확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부흥의 때에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충만케 하신다. 성경이 그들에게 쏟아졌다고 말할 지경이다. 그것이 부흥이며,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필요는 바로 부흥이다. 오직 여러분과 제가 이 일들의 실상을 알고, 그 권능과 영광을 알며, 성령의 충만을 입는 일에 항상 관심을 가질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또한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이전 시대처럼 하나님이 교회 위에 임하시도록, 그리하여 꺼져가는 연기를 생명과 권능의 강력한 불꽃이 되게 하시도록 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필요한 일이다. 이 복된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참으로 이 일들에 참여하여 하나님이 그분의 역사를 부흥케 하시도록 중보하고 탄원하는 자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으로 우리 눈을 여사 성령세례와 충만에 대한 진리를 바라보게 하소서!(401)
23장 성령세례에 대한 추가적 고찰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교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사람들이 쉽게 과장하거나 옆길로 새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1. 성령세례를 탐구하는 올바른 자세
극단을 피하라
도에 지나친 주장들이 있어 왔다. 육적인 영이나 심지어 악한 영에 의해 생겨난 현상일 뿐임이 밝혀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 교리를 체험적인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이처럼 극단적이거나 왜곡된 주장이 생겨나기 특히 쉬우며, 실제로 교회사에서 그런 일이 대단히 많이 일어났다. 이 때에는 그런 극단과 잘못된 주장을 피하기 위해 정반대의 극단으로 흐르게 되는 위험이 즉시 생겨난다. 우리는 양자의 중간 어디쯤에 있을 진리를 지나쳐 다시 비성경적인 극단에 도달하게 된다. 저는 금세기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성령의 사역으로 오인되는 일이 많았던 극단들과 요란한 감정주의를 두려워한 나머지 성령을 소멸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다.
역사의 교훈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17세기 청교도주의에서 일어났다. 청교도주의는 하나의 학파로 시작했으나 둘로 나뉘게 되었다. 한 편에는 조지 폭스와 퀘이커 교도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존 오웬, 런던의 토마스 굿윈 같은 위대한 청교도 교사들이 있다. 성경에 비추어 불 때 저는 그 두 파가 모두 바른 방향 안에서 지나치게 멀리 나갔다고 확신한다.
조지 폭스는 분명 중요한 문제에 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었지만 너무 지나쳤다. 그는 성경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내적인 빛”과 성령뿐이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러다.
그 결과 현대 퀘이커주의는 거의 완전히 비교리적이 되어서 때로는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인지조차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퀘이커주의는 막연한 자비심과 선한 마음일 뿐이다.
하지만 위대한 인물들이 대표하는 다른 학파가 퀘이커파의 지나친 주장에 대한 두려움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인정해야겠다. 그들은 항상 오로지 지식적이 되어 생명과 성령이 없는 새로운 개신교 스콜라철학을 만들어 낼 위험에 처해 있었다.
위대한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두 학파를 결합시키는 일에 탁월한 기여를 했다. 그는 위대한 청교도 지도자들의 교리적 강조점을 고수하고 주장했으나, 동시에 퀘이커 교도들과 같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일에도 깨어 있었다. 그는 어느 한쪽 극단으로 완전히 치우치지 않고 둘을 결합했으며, 저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성령의 이름으로 지나치게 요란하거나 육적으로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하지만 성령을 소멸시켜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의도하신 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는 일에도 똑같이 주의해야 한다.
2. 성령세례와 구분해야 하는 것들
성령세례와 중생의 차이
고린도전서 2장에서 “육에 속한 사람”과 대조시키는 “신령한 자”는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이 사람들이 다시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고 바울은 강조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12:13). 대단히 중요한 증거가 요한복음에 나온다.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하신 말씀이다.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20:21-22). 이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과 다르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숨을 내쉴 때 중생하여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다시 말씀하신다.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그 일은 열흘 후에 일어났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이 체험 사이에 언제나 시간적 간격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님을 명확히 하고 싶다. 두 가지 일은 종종 함께 일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이 둘을 구별하도록 하자.
성령세례와 성화의 차이
제가 이해하기로는 지난 70년의 세월 동안 우리가 끊임없이 성화와 지금 다루고 있는 성령세례의 체험을 혼동했다는 사실보다 더 큰 해를 끼친 일도 없었다. 한 번의 체험으로 성화를 받게 된다는 말 때문에 수없이 많은 오해가 생겨났다. 성화는 체험이 아니다. 반면에 성령세례는 본질적으로 체험이다.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체험은 성화를 도울 뿐 성화의 필수적 부분은 아니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
이 둘은 같은 것이 아니며 같은 것으로 간주해도 안 된다. 엡 5:18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계속해서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 있으라”는 의미이다. 성령세례는 영속적인 상태의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특별하고 독특한 것이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부여된 어떤 특별한 과업을 위해 일어난다.
3. 성령세례의 올바른 의미
1)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타나심
요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저는 이것이 핵심 구절이라 생각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영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것은 확신 이상의 어떤 것이다. 사람들이 신자가 되고, 중생하고, 구원희 확신을 가지고서도 그리스도가 이같이 영적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2) 성령세례의 예를 보여주는 인물들
존 플레이블
그는 다소 조용한 사람으로 작은 영역에서 대단히 놀라운 방식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혼자 여행하였고 그의 마음은 자기성찰과 기도로 가득차 있었다.
하루 종일 여행하면서 그의 생각은 에스겔의 환상 속에 나오는 물과 같이 커지고 커져서 마침내 넘치는 홍수가 되었다. 그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하늘의 기쁨이 너무나 매혹적으로 다가왔고, 그 안에 있는 권리가 너무 큰 확신으로 다가 왔기에 그는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관심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관에 도착한 후에도 그 영향은 계속 되었으며 잠도 오지 않았고, 주님의 기쁨이 계속 흘러넘쳐 그는 마치 딴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후 그는 그 날을 천국의 날들 중 하나라고 불렀으며, 그가 이전에 읽었던 어떤 책들이나 즐겨 들었던 강연들보다도 그 날로 인해 천국의 삶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그는 아마도 이 세상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성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신앙감정론>에서 성령의 사역과 종종 성령의 사역을 흉내내는 육욕을 구분하는 법을 가르쳤다.
1737년 숲으로 말을 타고 나갔을 때, 걸으면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하기 위해 한적한 곳에서 말에서 내렸다. 그대 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성자의 영공이라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고, 그의 놀랍고 위대하고 충만하고 순결하고 달콤한 은혜와 사랑, 온유하고 친절한 겸손을 보았다. 그처럼 온화하고 감미롭게 나타난 은혜는 또한 하늘 위에 광대하게 나타났으며, 그리스도의 인격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나타나 그 탁월함이 모든 생각과 개념을 가려 버렸다.
무디
그들은 내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도록 마음을 쏟아 놓았으며, 그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큰 갈망이 내 영혼으로 들어왔다. 나는 이전 어느 대보다도 크게 울기 시작했고 갈망은 점점 더 커졌다. 나는 정말로 섬김을 위한 이 능력을 갖지 못한다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나님께 나를 그의 성령으로 채워달라고 계속해서 부르짖었다. 어느날 뉴욕시에서였다. 말로 하기에는 정말 신성한 체험이다. 나로서는 단지 하나님이 나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그분의 사랑을 너무 강렬하게 체험해서 하나님의 손을 멈추어 달라고 간구해야 했다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다시 나가서 설교했다. 설교는 전혀 다르지 않았고 새로운 진리를 제시하지도 않았지만 수백 명의 사람이 회심했다. 나는 그 복된 체험을 하기 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위대한 침례교 설교자인 크리스마스 에번스에게도 웨슬리에게도, 휫필드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성경에는 탁월한 사람에게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경험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오순절 날 베드로가 말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8-39) 이 말은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해야 할 체험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체험이 무엇일까요? 이것을 성령충만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이 한 번의 위대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성령충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충만에 대한 최초의 경험이거나, 또는 충만에 대한 예외적으로 탁월한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것을 “부어진다”는 말로 표현했고 성경도 그 용어를 사용했다. 피니의 경우는 계속되는 물결로 쏟아졌다고 말한다. 그것은 뭔가 비범한 경험으로서, 이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마치 천국으로 들려 올라가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후에도 여러 번 충만이 무엇인지 경험했지만, 이 체험은 뭔가 독특하고 특별한 것이었다. 그것은 신적인 일들의 실상이 전무후무한 방법으로 명백하게 나타나는 사건이었고, 그들이 그 일을 돌아볼 때마다 그 사건은 큰 영광 가운데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극단을 두려워한 나머지 결코 이런 체험을 추구하지 않으며, 이런 일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되고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3) 성령 세례와 감정- 참된 성령세례는 반드시 심오한 감정이 동반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부어 주실 때, 여러분은 그 사랑을 느끼고, 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나에게 사랑을 부어 주고 계셨으며 나는 그 사랑을 압니다. 내 마음은 사랑으로 하나님께 향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라고 기록한 것처럼 감정이 개입된다. 우리는 감정주의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우리의 감정을 억눌러 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의 사람들은 죄의식이 무엇인지,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자신들의 죄성에 대해 단 한 번도 울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경험을 하지 않고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저는 단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아는지, 그리고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으로 마음이 그리스도께 향하는 것을 느끼고 그로 인해 놀란 적이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일 뿐이다.
4) 성령 세례와 거짓 체험의 구분
가짜를 조심하라. 이 일을 추구하는 당신에게 사탄이 끼어들어와 진실이 아닌 체험을 전해 주려 하지 않는지 주의 하라.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최종적 시금석이 있다. 체험을 추구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추구하라. 그분을 알기를, 그분의 임재를 깨닫기를, 그분을 사랑하기를 추구하라. 오로지 주님 안에서, 주님을 위해 살기 위하여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죽기를 추구하라. 그리고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라.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신다면 여러분은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그저 경험만을 추구하고 있다면, 스릴과 흥분만을 찾고 있다면, 여러분은 거짓 경험이 들어올 문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언제나 겸손하게 하고 낮추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우리 자신을 끝까지 파헤쳐 죄를 드러낸다. 우리는 현재의 모습 그대로 성령의 권능과 위대한 체험들을 갖기 원하지만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성령께 완전히 굴복해야 하며, 성령은 우리를 우선 전시실로 데려가실 것이다. 우리가 완전히 절망적이라고 느낄 때에야 여기에 기록된 놀라운 병거를 제공하셔서 천국으로 데려가시고, 약속하신 대로 성자의 실재하심,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라는 영광스러운 체험을 하게 하신다. 이 체험은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놀라움과 사랑과 찬양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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