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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3권 - 마틴로이드존스 (요약본 / 과제용 / 강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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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3

 

 

1장 서론적 분해

 

 

(6:1-2)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를 분해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인기있는 방식은 1-5장은 칭의, 6-8장은 성화, 9-11장은 유대인과 종말의 문제, 12-16장은 실제적인 권면과 적용의 방식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기계적일 뿐 아니라 로마서가 말하지 않는 것을 로마서에다 갖다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온 힘을 기울여 밝힐 것이다.

 

 

사람들은 여러 제목 밑에 이러한 모양으로 아주 교묘하게 구분짓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모든 것을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결국에 가서는 문제를 보다 복잡미묘하게 할 뿐이다. 성경 해석의 철칙은 본문 말씀이 가는 대로 따라가고, 말씀 속에 없는데 우리 마음 속의 어떤 틀을 거기에다 부과하지 않는 것이다.

 

단순하게 정돈하고 알파벳 글자수와 같게 하는 것 등은 도움이 되겠지만 성경 말씀 자체를 희생시켜 가면서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전제해야 하는 것은 6장이하에서 새로운 대목을 시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로마서를 그럴듯하게 쉽게 세분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은 바로 이 점에서이다. 6;1에서 성화의 주제를 다루기 시작한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그런즉 무슨 말을 하리요?”. 이제껏 말해 왔던 것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그 문제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이제 그가 말할려고 하는 것은 이제까지 말해 온 것에서 야기되는 문제이다. 5장 전체의 주제를 재음미해봐야 한다.

 

(로마서의 장 구분도 16세기경에야 된 것이며 정확하지도 못하며 독자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5장에서 사도가 말하는 주제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주제였다. 처음 네 장에서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위대한 교리를 말했고 5장의 주제는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칭의가 아주 완전한 의미에서 우리의 최종적인 구속을 보장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5장 내내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통치 아래 있음으로 해서 우리의 장래는 확실히 보장되었고, 모든 축복으로 인도하는 동기가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는 그 문제에 대하여 종결지은 것이 아니고 8장 마지막에 가서야 끝을 낸다.

 

 

6장에서부터 무언가 잠깐 멈출 필요를 느꼈으며, 극히 중요한 질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진로를 바꾼 것이다. 5:20-21은 대번에 두 가지 특별한 난제를 야기시킨다. (5:20-21)“(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둘 다 율법에 관한 문제이다. 첫째는, 율법을 제치고 은혜 일변도의 진술이 사람들에게 죄를 짓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닌가? 율법폐기론으로 무율법주의롤 인도하기 쉬운 교훈이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는, 율법은 이제 전혀 가치없고 쓸모 없지 않은가?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계획과 체계에 있어서 율법이 차지하는 기능과 위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6장과 7장에서 행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장은 5장과 8장 사이의 삽입구적인 장이다. 5장과 8장의 주제는 동일한 것이요, 계속되는 것이다. 8장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 시작한다. 이 진술은 5장 마지막과 연결되는 것이지 7장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8장은 5장이 끊긴 자리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6장과 7장은 본 주제를 벗어난 탈선이 아니라 삼입대목이다. 5장에서 야기되는 난제들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6장은 첫 번째 난제인 율법폐기론의 위험성을 다루고, 7장은 두 번째 난제, 율법의 위치와 기능을 다룬다. 그런 다음 칭의의 결국에 대한 위대한 주제로 다시 넘어가게 되어 8장 초두에서 마지막까지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6,7장에 나오는 말씀들이 성화를 다루고 있다는 견해를 철저히 배격한다. 6장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14절과 15-23절이다. 첫 부분에서, 순수하고 교리적인 방식으로 율법폐기론의 위험을 다루고 둘째 부분에서 실제적이고 체험적으로 다룬다. 첫째 부분을 세분하면 1-2절은 문제를 제기하고 보편적인 답을 한다. 3-11절은 보다 상세한 답변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설명한다. 12-14절은 이상의 모든 것을 비추어서 개관적인 호소를 한다. 성경을 해석할 때, 부분으로 들어가기 전에 전체를 마음 속에 넣어두는 것이 언제나 좋다. 전체의 개념에 상응하지 않게 부분을 해석해서는 결코 안된다.

 

 

1절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즉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이 특별한 오해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교리가 전해질 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면 이런 오해나 질문은 생길 수가 없다. 잘못 이해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매우 위험하다.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로 되어진다는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나는 주장한다. 만일 우리의 설교가 그런 오해와 도전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참으로 설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에 대하여 이런 반기를 든 적이 없다. 그러나 마틴 루터에게는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 형식적이고 죽은 기독교는 언제나 그런 식의 도전을 해왔다.

 

 

2절의 답변, “그럴 수 없느니라”. ‘결코 아니다’,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의 뜻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신칭의를 이해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울이 1-5장에서 말한 모든 것을 파악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칭의 뿐만 아니라, 우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 은혜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으며, 그렇게 행동하기는 더욱 어렵다. 은혜의 임무는 우리들을 죄의 문제와 왕노릇 아래에서 건져 내어 은혜의 왕 노릇 아래로 옮겨주는 것이다. 5;21,“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이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여기서 우리는 로마서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위대한 진술들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진술을 비슷한 형태로 반복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절에서, 6-8절에서, 10,11절에서, 그리고 11절에서는 권면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살리요라는 진술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죄에 대하여 죽은은 부정과거형 동사로서 한번 일어나서 다시는 변개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자로서의 우리의 과거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일단 일어나고 변동될 수 없는 사실을 말한다. 6,7,8,10,11절에서도 같은 동사형을 쓰고 있음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여기에 너희에게 영원하며 단번에 일어난 일이 있노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아담 안에있는 것을 중단하고 그리스도 안에있기 시작할 때에 일어난 것이다.

 

 

 

 

 

2장 우리의 신분

 

 

(6:1-2)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1절의 질문에 대하여 2절은 완벽한 대답을 주고 있다. 2절은 기독교 교리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진술 중 하나이다.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구원교리 전체를 완전히 이해하는 열쇠이다.

 

 

우리”. 우리의 신분을 알 때 은혜를 더하게 할려고 죄에 계속 거한다는 것이 어떻게 있을 법하다고 상상조차 할 수 있겠느냐? 그러한 존재가 된 우리-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하여 그 가운데서 더 이상 살겠느냐?” 그것은 강조이다. 전체 강조점은 우리의 독특성, 우리의 특수한 지위, 현재 우리가 처한 우리의 존재 등에 주어지고 있다.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은 칭의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진정한 고민은 자기들이 누구이며 자기들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같이 더 이상 죄에 거하겠는가? 1절의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5:12에서 21까지의 논증을 추종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부정과거 동사 사용. 언제나 일단 일어나고 다시는 변개될 수 없는 한 사건이나 행동을 지시한다. 죄책과 형벌에 관한 한 우리는 죄와 관계를 끊었고 율법이 우리를 어찌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죄의 왕노릇에 대하여 죽었다. 5:21에서 사도는 죄의 왕노릇과 은혜의 왕노릇을 서로 대조시키고 있다. 그가 말하여 왔던 것은 우리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신자의 경우에 있어서 죄의 왕노릇을 종결지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죄의 왕노릇은 죄의 법, 죄의 권세, 죄의 체계를 의미한다. 은혜의 왕노릇도 정확히 그와 같다. 은혜의 세력과 은혜의 영향, 은혜의 힘, 은혜의 권능, 은혜의 원동력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 - 그것이 우리의 체험에서 실제로 일어난 까닭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우리는 죄의 왕노릇에 대하여 완전히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의 영토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21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죄를 짓고 있으며, 시험과 죄의 세력이 있음을 느끼는데요? 하는 반대 의견에 대해.

 

우리는 죄 아래 있든지 은혜 아래 있든지 이다.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다. 우리는 완전히 죄와 악의 통치와 왕노릇에 대하여 죽었다. 이제 더 이상 그것은 우리의 지위가 아니다. 우리는 영단번에 그 위치에서 벗어났다.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옮겨졌다.

 

 

내가 너를 저희에게 보내어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리라”. 옮겨지는 일, 이동하는 일이 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느니라”(3:20). 앞으로가 아니고 지금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 시민권에 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2:19). 변동이 있고 우리의 신분이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단번에 우리의 나라를 바꾸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영토에 있지 않으며 죄의 권세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조종을 받지 않으며, 죄가 더 이상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지 못한다. 이제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는 아담에게서 벗어나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졌다.

 

 

더 나아가 우리는 죄의 왕노릇에 대하여 죽었을 뿐만 아니라 은혜의 왕노릇에 들어갔다. 확실한 결과들을 산출할 만큼 강력하다. 은혜의 통치는 무한정하게 더욱 권능이 있다. “죄가 넘친 곳에 은혜는 더욱 넘쳤다”. 훨씬 더 확실하게 보증한다. 나의 온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이 절대적으로 확실함을 보증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떤 결심을 하고 이것 저것 하기 원하는 사람 정도로만 생각하지 말라. 결코 아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은혜의 왕노릇의 모든 권능이 여러분에게 임한 것이며, 여러분 안에서만 역사하고 있으며 완전에 이르게 해줄 것이다.

 

 

아담과 죄와 죄의 통치에 대하여 죽은 우리인데 어떻게 거기서 더 살겠느냐?”. ‘살다라는 말은 분명히 중요하다. 그것은 계속 거주한다는 말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범하다는 말은 그 영역에서 계속 산다는 의미이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4-36). 이것이 아들이 관계하는 곳에 있는 절대적인 자유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9). 그것은 절대적인 완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짓다라는 말은 습관적으로 행하다’, ‘계속 행하다’,‘그 안에서 산다는 의미요, 삶의 주요 경향이다 라는 의미이다. 죄의 개별적인 행동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 난 사람이 계속해서 죄의 체계 가운데서 거주하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죄의 체제에 대하여 죽었으며, 더 이상 거기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수 없다란 말을 되풀이 하고 있다.

 

 

사도의 논증인즉, 그리스도인에게는 죄 안에 산다는 사실이 불가능한 것은 그 사람이 은혜의 권능 아래 있기 때문이다.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14). 죄가 아무리 악하게 군다 하여도 여러분을 주관하지 못할 것이다. 은혜가 무한히 더욱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사도는 단순히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죄에 계속 빠져서는 안된다고 하지도 않는다. 사도는 죄의 체계와 죄의 궁극적인 세력에서 계속 살 수 없고 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나니어째서 인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가? 바울은 우리가 죄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죄의 나라와 영토와 체제와 왕노릇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주어진 지위 안에 들어 있는 것과 그 지위 안에 있는 것을 깨닫는 것에는 전혀 차이가 있다.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아직 노예일 수 있다. 법적으로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닌데도 말이다. 사실상 지위에 있어서 완전히 해방이 되었는데도 느낌으로는 노예일 수 있다. 지위는 종보다 위에 있지만 종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런 일이 있다.

 

 

내가 시험에 넘어지는데 나는 죄의 왕노릇과 세력과 체제에서 건져냄을 받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하나의 길로 나누어진 두 밭을 생각해보라. 왼쪽에 있는 밭은 죄와 사단의 나라요 영토요 그것의 제국이다. 그러나 거기서 우리는 오른쪽 밭으로 옮겨졌다. “마귀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나니”(요일5:18). 마귀는 길 저편에서 우리를 향해서 고함을 치며 위협하고 있다. 죄에 빠지는 그리스도인마다 다 어리석다. 어째서 사단에게 주의를 기울이는가? 우리는 더 이상 그에게 속해 있지 않으며, 그는 우리를 만질 수도 없다.

 

 

성경은 우리의 자유에 대해 하나의 사실적인 것으로 역설한다. 그러나 옛 습관과 옛 영향으로 인하여 해방된 노예들이 빠졌던 것처럼 우리도 그것을 잊는 경향이 있고, 마귀가 우리에게 말할 때, 그의 말을 듣고 그의 주문에 걸리는 수가 많다. 우리는 그를 저항해야 한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피하리라”(4:7).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6장에서의 사도의 전체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너희 자신은 죄에 대해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아마 여러분에게는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사실로서 진리이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체험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사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도는 여러분의 것이 되어진 어떤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즉 성령에 의해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여러분을 옮겼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으라고 강권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연적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었다.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이 더 강하여졌다”. 우리도 이와 같아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지 간에 우리의 체험이 어떠하든 간에 하나님은 여기서 우리에게 그의 믿음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일진대 더 이상 우리는 아담 안에 있지 않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왕노릇과 통치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는 은혜의 왕노릇과 통치 아래 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는 더욱 넘쳤나니’.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행하는 바대로 죄에 빠진다면, 그것은 단순히 내가 누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 그것을 깨닫고 그렇게 여기시기 바란다. 여러분은 은혜의 통치와 왕노릇 아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에 더 이상 계속 살 수도 살지도 않을 것이다.

 

 

3장 그리스도와의 연합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2절의 엄청나고 놀라운 진술에 대한 대답을 3-11절에서 하고 있다.

 

5:12-21에서 우리가 전에는 아담 안에 있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그 개념을 함축했다. ‘어떻게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단 말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로 인하여서이다.

 

3-11절은 그것을 상세하게 풀이하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는 기독교 진리 가운데서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심오하고, 가장 극적이고, 가장 위안을 주는 것 중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 6장을 읽으면서도 이 교리를 놓치는 것은 세례 받은이란 말만을 보고

 

다른 것은 보지 않기 때문이다. ‘세례 받은에 대한 해석;

 

 

성례주의자 해석. 세례를 받아야 중생한다는 가르치는 교리. 세례행위 자체가 수세자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합시킨다고 한다. 이것은 마차 뒤에 말을 갖다 놓는 격이다. 이것은 사제주의와 교회를 추겨 세우게 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만인제사장주의를 가르친다. 세례는 생명과 연합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에 인치는 것이다. 에디오피아의 내시의 경우, 고낼료의 경우, 빌립보 간수의 경우가 그랬다.

 

 

서약의 세례. 죄의 생활을 뉘우치고 동시에 새 삶의 길을 서약한다는 것.

 

 

그리스도의 영향권 내로 세례 받았다는 주장. 조상들이 홍해를 지날 때 ,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세례는 영향권 차원 에서만 아니라 연합, 영적 연합의 차원에서이다.

 

 

세례는 구원하는 효과임을 믿는 우리의 믿음의 표라고 주장. 그러나 세례는 어린 가지를 원목에 접붙일 때 일어나는 류의 연합을 의미한다.

 

 

세례란 연합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 장사하는 표로 물 아래로 내려가고, 부활하는 표로 물 위로 다시 나온다는 것. 그러나 바울은 세례로 말미암아 그것이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세례는 어떤 일을 성취한다.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끌어 준다.

 

 

우리를 그리스도에 병합시키고 연합시키는 세례는 고전12:13이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장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이다. 그리스도는 머리요, 우리는 몸이다. 우리는 모두 그에게 연합되어 있고 우리는 서로 모두 연합되어 있다. 그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성령에 의한 세례로 이루어졌다. 성령의 세례(baptism with the Spirit)가 아니다. 그것은 놀랍고 신비로운 성령의 사역이다. 중생시키시는 성령의 사역과 같다.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도 동일한 연합 교리를 말해 준다. 세례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키고 접붙일 때 성령에 의해서 수행되어지는 세례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키는 이는 성령이시다.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세례도 바로 그것이다. 구원 중 가장 영광스러운 국면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사활을 좌우하는 연합이다.

 

 

알지 못하느냐”.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지식임을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교리를 높은 수준의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원에 관한 영광스러운 사실은 내가 아담에게서 건짐을 받고 그와의 관계를 끊고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나에게 오는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 우리에게 새생명의 씨를 주시고 중생케 하시는 성령은 동시에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영이시다. 이 구절들을 체험의 차원에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체험이 아니라, 신분과 조건과 지위 문제를 다루고 있다.

 

두 지위만이 있을 뿐이다. 중간지대는 없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없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지 않았으면 구원받은 사람일 수가 없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게로 세례를 받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 전체에게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우리가 그 안에서 충만해졌다”(2:10)고 말한다. 언제 그랬다는 말인가? 지금이다! 앞으로 충만하여질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안에서 충만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체험을 생각지 말아야 한다. 느낌과 체험이 어떠하든지 간에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해 있다. 그리스도는 지금 여러분의 의와 지혜와 거룩과 구속함이 되시는 것이다. 지금이다.

 

 

이러한 것들은 더욱더 체험하여 나갈 수 있다. 또 그래야만 한다. 사도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하다. “너희는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 또한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에게 사실인 것은 너희에게도 사실이다. 너희는 그것을 점차적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너희에게 사실이 되어 있다.” 여러분의 최종적인 구원과 완전한 구속의 보증은 바로 그것이다.

 

 

티나 주름잡힌 것 등 그러한 모든 것에서구원 받을 것을 보증하는 것도 그것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지금 나의 거룩함이 되시는 것이다. 내가 이 순간에 죽는다 하여도,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고, 의롭다 함을 입는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그 모든 것이 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행하신 모든 것은 나의 것이 된다. 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살으심 안에 있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4장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함축하는 것들

 

 

(6:3-4)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것은 우리가 그에게 연합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에게 일어난 일들에 우리는 동참자가 된 것이다.

 

 

1. 우리는 그의 죽으심에서 함께 연합되었다.

 

우리가 겪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아담이 실제적인 죄를 지었으나 우리는 모두 그 안에서 죄를 지었으며, 그와 함께 죄를 지었다고 말한다. 이제 여기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함께 죽은 것이다. 그가 행하신 것은 우리가 행한 것이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에 있어서 함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며 그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강조해야 할 것은 이것은 주관적이거나 체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 6장을 강해할 때 그릇되게 나가는 것이 이 점에서 이다. 그들은 체험적인 차원에서 그것을 생각하고 고집한다. 그 때문에 이 롬 6장은 성결집회에서 부단하게 쓰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가 취급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는 거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취급하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 되어진 것이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던 것과 같이 우리에게 기정사실화 된 것을 말한다.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었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의 신분은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무엇이 아니다.

 

그것이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다. 또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나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인기있는 가르침은 여러분은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으니 더 깊은 영적 생활과 더 큰 축복을 원한다면 여러분은 이제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고 말한다.2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하여라고 말한다. 그는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그가 죽을 때 우리도 죽었다. 이것이 논증의 전체 요점이다.

 

 

2:20보다 더 자주 잘못 해석되고 잘못 적용되는 성구가 없다. 여기에서는 칭의 외에 다른 것을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화와 관련해서 이 구절을 사용한다. “너는 구원받았으나 삶 가운데서 승리를 얻지 못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충만한 체험을 하고 있지 못하다. 너는 제 2단계로 들어가기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충만한 축복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성화의 일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라고 강권한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이다. 바울은 어떤 비상한 성자나 두 번째 단계에 이른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칭의에 관하여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음과 이것을 떠나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6장의 가르침과 정확히 같다.

 

 

10절에서 그 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죄의 체계와 영역과 통치에 대하여 영단번에 죽으셨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도 역시 죄의 체계와 영역과 통치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같이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연합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과는 하등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죄의 왕노릇과 맺고 있었던 우리의 관계와 같다.

 

 

2.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사지냄에서 연합되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뿐 아니라 그의 장사지냄에 있어서도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장사는 죽음에 대한 적극적인 증거이다. 장사는 이생과 이 세상에 대한 관계가 종결되었음을 선하는 선언장이다. 우리 주님께서 장사되셨을 때, 그가 이 세상과 그가 탄생하였을 때 가지신 삶에 대하여 가잔 관계, 즉 율법 아래 속하고, 죄의 체계와 권세 안에 들어오셨던 삶의 관계가 종결되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자기가 자원하여 고의적으로 가지셨던 죄의 통치와 죄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우리도 세례 받음으로 그와 함께 연합되었으므로 함께 장사되었다. 죄의 왕노릇과 체제로부터 장사된 것이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해석해 준 것이다. 우리가 죄의 왕노릇과 통치와 그 체제 아래 있던 우리의 신분이 끝났음을 표명하는 것이다.

 

 

3. 우리는 그의 부활하심에도 그와 함께 연합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라고 하였다. ‘아버지의 영광이란 아버지의 권능을 말한다. 이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데서 가장 놀랍고 특이한 방식으로 나타낸 바 되었다는 것이다. (1:19-20)“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부활이 선포하는 것은 나타난 바 된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이다. 부활은 이 엄청난 능력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부활이 말하는 주는 바는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의 권능과 왕노릇에 의하여 붙잡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2:24)“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주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죄와 그 통치를 완벽하게 이기셨다고 하는 궁극적인 증거이며, 죄에 대한 관계를 청산하셨다고 하는 궁극적인 증거이다.

 

 

주님은 부활의 결과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신다.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우리에게도 같은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2:5-6)“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나는 그와 함께 죽었고, 장사지낸 바 되었고, 그와 함께 살아났다. 나는 새 체제 안에 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삶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통치와 체제에 대한 관계를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청산하셨듯이, 우리도 역시 그러하다. 사도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으며, 우리가 사력을 다하여 십자가에 달려 스스로 죽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났다. 우리는 이 지위에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3:20). 그것은 되어질 것이 아니다. 현재 되어져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죄의 왕노릇 아래에도 있지 않다. 우리는 그것과 영원히 관계를 끊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보좌에 앉은 바 되었다(2:6).

 

 

3,4절은 2절의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는 것의 반복이다. 이것이 얼마나 정확히 일어났으며, 어째서 그것이 필연적으로 사실이어야만 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어느 누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논박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면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장사지냄과 함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부활에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다. 너희는 더 이상 죄의 통치와 죄의 체계에 대하여 하등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사실이라면 어찌하여 우리가 죄 가운데서 더 거하겠는가?

 

 

믿는 우리를 향한이 지극히 큰 능력과 이미 우리 안에서 역사한 부활의 능력으로 폐해진 죄의 통치와 왕노릇이 다시 우리를 사로 잡을 수가 결코 없다. 우리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토록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죄의 삶을 살게끔 허락되어 있지 않다.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장치 못하리니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세례의 결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죽음 뿐 아니라 그의 부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동참한다. 우리는 새생명 가운데로 들어간 것이다.

 

 

 

 

 

5장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음

 

 

(6:5-6)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바울이 말하는 구조를 정확하게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2절에서 전제를 설정하여 놓고 3,4절에서 그것을 단단하게 확정시키고, 5절에서 아주 미소한 차이로서 그것을 재진술한다. 6,7절에서 첫 번째 항목을 8-10절에서 두 번째 항목을 보다 상세하게 다시 풀어나간다.

 

 

만일은 의문이 아니라 때문에의 뜻이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우리가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 사실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연합하다의 뜻. ‘함께 자라다즉 본질적인 연합으로서 함께 자람을 의미한다. ‘연합된 성장의 의미이다.

 

본받음’. 우리의 죽음과 부활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동일하지 않다. 그에게 일어난 일은 독특성과 고유함을 지니고 있다. 사도는 마음으로 이 구별을 하라고 본받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본받은 것이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같은 구별이 8:3에 있다. 주님이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오신 것이지 죄있는 육신으로 오시지 않은 것과 같다. 그에게 문자적으로 일어난 것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그와 함께 죽지 않았고 그가 죽으실 때 겪으신 고난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와 가진 영적인 관계 때문에 그의 실제적 죽음이 가져온 결과와 귀추가 우리에게 미쳤다는 것이다. 아담과의 관계에서와 동일한 병행이다. 죽음과 부활의 결과와 모든 덕을 우리는 전부 가지고 있다. 그것이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의 부활하심을 본받아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연합한 자가 되리라’. 되리라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말한다. 11절에서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한다. 언제요? 지금이다. ‘되리라도 그와 함께 죽은 우리가 그와 함께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죽고 살아났듯이 우리도 죽고 산 것이다. 미래사가 아니다.

 

 

그의 부활을 본받아’. 4절 끝에서 말한 새생명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으로 살아난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지배와 죄의 폭군 밑에 있는 옛 생명에 속하지 있지 않다. 10절의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심,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11절에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술은 미래까지도 포함한다. 우리의 구원은 몸의 영화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3:20-21“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하였다하고, 그것을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에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이라고 더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이미 못박혔다.

 

알거니와’. 우리가 친숙하고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어야 할 어떤 것을 연상케 하기 위한 것, 강한 어조이다. 사도가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로마교인들에게 이 말을 썼다. 찰스 핫지는 이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한다고 한다. 정반대이다. 이것은 체험적인 지식이 아니요 믿음의 지식이다. 성경에서 밝혀진 지식이요, 믿음이 있으면 확신하고 있는 지식을 의미한다. (체험의 지식이라면 기다리게 될 것이고, 믿음의 지식이라면 지금 살게 될 것이다.)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이다. 이 용어처럼 자주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없다. 성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이 우리 옛사람을 죽이고 옛 사람을 제거시키려고 기를 쓰며 산다. 골방이나 산의 은둔자로 살게 한 것이 바로 이 투쟁이고 몸의 지체를 절단하기까지 하는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옛사람은 무엇인가? 그것은 육체적 본성과 육체적인 모든 기질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육체적인 본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하지 않는다. 중생 이전에 있었던 도덕적인 존재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정욕을 가진 육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전 사람을 의미하지도 않다. 그러한 것을 의미하면 다른 성경들에 비추어서 반드시 절망적인 혼란에 처하게 된다. 5:12이하의 문맥을 보면 그 뜻이 분명해진다. ‘옛사람은 아담 안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것은 내가 전에 있었던 사람이요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아담 안에 있었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누누이 말하고 있다. 내가 되돌아 볼 수 있는 옛 사람은 내가 아담 안에 있을 때의 사람이다. 그것은 나의 옛 인간이다. 그것은 나의 육체나 죄의 본성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도 내게 있다. 그러나 옛 사람이 가버렸고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리스도께서는 영단번에 죽으셨다(10). 나의 옛 사람도 그와 함께 죽은 것이다.

 

 

4:22-24, 3:9-10, 5;24. 이 진술들을 손상시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엣 사람의 내가 아담 안에 있었던 나의 옛 인간 존재, 율법 아래 있었고, 정죄 아래 태어났고, 아담과 함께 죄를 지었고, 그래서 아담의 죄의 결과들을 다 함께 거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나는 더 이상 그 옛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첫 열매가 되신다. 그는 새 종족의 머리이시다. 나는 이 새 종족의 한 성원이다.

 

 

그래서 옛 사람을 벗으라옛 사람의 특성을 벗으라는 말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뜻일 수 밖에 없다. 이미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벗으라고 할 리가 없다.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만일 너희가 옛 사람이 죽었으면 그 옛 사람처럼 살지 말라. 그러니 그것을 벗어버리고 옛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계속 믿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어떤 존재인 줄 알라. 너는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고 새 사람이다. 그러므로 네 신분이 새 사람이니 새 사람답게 살라.’는 것이다. 성년에 이른 사람을 예로 든다.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말한다. ‘당신은 어른이니 어른답게 구시오’. 5:24에서 바울이 아주 분명하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이는 나와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다.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옛 사람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옛 인간존재 아담 안에 있었던 사람을 의미한다. 그 사람은 영단번에 죽었다. 이 진술의 객관적인 성격을 꼭 붙들어야 한다. 체험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부름받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는 요청이 없다. 내가 하라고 요청을 받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아담 안에 있는 것 같이 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성화방식이다. 옛 사람을 제거하려는 일을 결코 하지 말자. 옛 사람은 가버렸다. 이는 체험해야 하지 않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체험이 승리가 될 때는 여러분이 그것을 믿을 때만이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은 것처럼 해야 한다. 99세의 남자와 90세된 그의 아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체험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 뿐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비체험적인 성령의 하시는 일이다. 성령께서는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세례받게 하시고 연합시키신다. 나는 말씀에서 그것을 발견하므로 그런 줄 아는 것이다. 내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아는 것은 말씀이 나에게 말씀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는 전혀 체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이다. 나는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믿은 대로 그것을 믿어야 한다. 나는 내가 죄인이요, 죄가 내 안에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는다. 나는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다. 나에겐 그러므로 이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먼저 말씀을 믿으면, 그 결과로서 영광스러운 체험이 따라 온다. 먼저 말씀을 믿으면 그것이 진리라는 증거를 가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기초하여 서라. 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약속 위에 발을 올려 놓고 서라. 그 약속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앙의 지위상 매우 본질적인 것이다. 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셨다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취하고 믿는다. 나를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셨다고 하신다. 나는 그와 함께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그와 함께 다시 살아 그와 함께 새생명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깨닫고, 새생명의 증거를 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붙들어야 할 것은 옮겨졌다는 것과 이런 일들이 나의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6장 자유함을 입음

 

 

(6:6-7)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죄의 몸이 죽는(멸하는) 과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 위함이다. “죄의 몸이 죽어죄의 몸이 효력을 잃고 꼼짝 못하게 하고 무능하게 하기 위하여라고 해석해야 한다.

 

 

죄의 몸이 무엇인가? 옛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죄를 갖고 있는 우리의 육체인 몸을 의미한다. ‘현재 육체적인 상태에 있는 우리 안에 거하는 죄를 의미한다. 여전히 죄와 사망이 우리 안에 다스리고 있는 형태로서의 몸을 말한다. ‘인격으로서의 나 자신죄의 몸과의 구별이 있어야 한다. ‘죄의 몸이라는 의미는 그 죄가 여전히 왕노릇하며 다스리지만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하지는 않고 단지 나의 몸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죄는 그를 지배하는 완전한 지배력을 얻었다. 5:11-21에서 그것을 명백히 살펴보았다. 즉 그의 전체인 몸, 정신, 영을 지배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아닌 모든 사람에게 그렇다. 그는 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아담 안에있는 사람이다. 죄가 다스리고 있다. 그에게 속한 육적, 동물적 부분이 그를 다스리고 있다. “전에 우리도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육체의 유혹에 순종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지위는 무엇인가? 나 자신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장사되어 그와 더불어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왕노릇과 다스림으로서의 죄에 대해 죽었으며 그것과 단절했으며 죄는 나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죄가 아직도 나의 몸과 상당히 관련이 있다. 나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혀졌다. 옛사람은 지나갔으며,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이다. 그것이 나에 관해 참된 것이다. 그것이 나에 관해 참된 진실일지라도 나의 몸, 나의 육적 몸에 관해서는 진실이 아니다. 죄는 나의 육적 몸에, 나의 지체에 아직도 있다. 죄는 나의 육체의 율법으로 역사하며 나의 기관인 몸의 부분과 나의 지체에 그것의 영향이 있다.

 

 

죄는 몸에 그 영향력을 남겨두고 있다. 나는 스스로 하나의 영적 존재로서 철저하게 영원히 죄의 영향권 밖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내셨다. 그러나 그 약속된 땅에 어떤 민족들 남겨 두셨고, 그의 백성들은 그들과 싸워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옛 백성들을 그 수준에서 다루셨던 방방식과 그의 백성들은 지금 영적 수준에서 다루시는 방식 사이에는 놀라운 균형을 이룬다. 몸은 아직 죄와 타락의 영향에서 구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구원 받은 것이다.

 

 

몸이 본질적으로나 천성적으로 죄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해둔다. 몸 자체에 죄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전에 나의 인성 전체를 지배하였던 죄가 지금 나의 몸의 지체를 주관하고 있을 따름이요, 그렇게 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 안에 있는 나, 영혼으로서의 나, 나의 인격으로서의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몸은 본능과 성향 등을 가지고 있다. 그 자체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성 본능, 식욕 등 자연적 본능들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우리의 몸의 차이. 그리스도의 몸은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모든 본능과 모든 기능과 능력과 성향이 온전한 조화와 바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나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우리를 지배하고, 폭군과 같이 압제하며, 우리를 휘몰아가는 몸의 요소들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욕을 채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욕을 가진 피조물이며, 그렇게 태어났다.

 

그것은 우리가 아담 안에태어났기 때문이며 그의 타락한 본성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죄는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있는 자에게도 몸에게 그 세력을 행하고 있다. 인간 자체는 구원받았는데 , 그의 몸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으며,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8:23)고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아직 체험되지 않았다.

 

 

죄의 몸은 뒤에 나올 육신과 같은 의미다. ‘육신은 몸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고 죄와 악에게 지배되고 사용되어지는 것으로의 몸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삶 동안 죄가 거하는 것으로서의 몸이다. 그러므로 6:6에서 사도는 사실상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뒤에 궁극적인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내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가 아직 지배하는 몸에서까지 구원받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그러하니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죄의 노예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그는 자기 몸을 죄가 다스리게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 12, 13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다. ‘옛 사람죄의 몸사이의 구별은 명확하고 중요하다.

 

 

옛 사람을 반대하여야 한다는 사람은 엄청나 넌센스이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이다. ‘점차적으로 옛 사람에 대하여 죽는다하는 사람도 넌센스이다. 이미 죽어서 영원히 가버린 사람이 죽어가다니요. 어떤 이는 우리의 죽어가고 있는 사람으로부터의 점차적인 구원을 말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옛 사람이 영단번에 죽었을 뿐 아니라 장사지낸 바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저 위대한 아브라함 카이퍼까지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의 이 세상의 삶이 끝날 때까지 옛 사람의 무덤을 파는 사람입니다고 말했다. ‘옛 사람은 죽음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며, 그를 위하여 무덤을 팔 필요가 없다. 그는 이미 무덤 안에 장사지낸 바 되었다. 옛 사람을 죽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구원받고 풀려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죄에 대하여 영단번에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옛 사람은 옛 본성의 의미하지 않는다. 옛 본성이 의미하는 바는 죄의 몸이다.

 

 

하이델베르그 신조 제43장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온 더 많은 결과들은 무엇이냐?” “그의 죽음으로 해서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와 함께 장사 되었다.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육신의 부패한 성향들이 더 이상 우리 가운데서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옛 사람은 육신이 아니다. 옛 사람은 부패한 본성이 아니다. 옛 사람은 아담적 본질이요, 옛 인간이다. 육신은 죄의 몸이요, 죄가 아직도 폭군노릇을 하고 있고 아직도 죄가 남아있는 몸이다. 그러나 은혜의 왕노릇 아래서는 몸까지도 구원을 받을 보장을 받았다.. 그러나 몸이 영화되는 날까지는 이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 다른 말로 해서 몸, 육신 안에 있는 죄를 다루는 방식은 지금이라도 여러분 자신에 관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7장 죄에서 벗어남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6:6과 엡 4:22-24의 조화의 난제가 있다. 6:6에서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한다.

 

그것은 옛 사람에게 이미 일어난 일이요 영원히 끝난 일이다.

 

그러나 엡 4;22-24에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한다.

 

같은 어휘라 할지라도 같은 의미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은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그는 이미 영단번에 죽어 버려 사라져 버린 것을 벗어 버리라고 권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4:22너희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에서 옛 사람은 옛 사람의 특징이 되는 언행심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벗어야 할 것은 옛 사람의 언어 생활또는 행동 양식이지 옛 사람 그 자체가 아니다.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거듭났다. 너희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마치 옛 사람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인양 행동하지 말라. 너희답게 살라. 더 이상 너희답지 않게 살지 말라”. 그래서 롬 6:4과 엡 4:22-24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문맥이 그 점을 아주 명확하고 분명하게 한다.

 

4;22은 행동과 윤리에 관심이 있고 롬 6;6은 옛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다.

 

 

6절의 가르침은 내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는 죄가 내 몸을 여전히 사용하는 것을 무능케

 

하고 무력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가르친다. ‘죄의 몸의 좋은 해석은 옛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옛 사람과 죄의 몸 사이의 차이는 나의 옛 자아와 나의 옛 본성사이의 차이이다.

 

아더 웨이는 옛 사람을 전의 자아로, 죄의 몸을 옛 본성으로 번역하였다. 아주 훌륭한 번역이다.

 

우리 자신이 우리 본성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사도의 논증을 따라 갈 수 없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진리는 우리의 자아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내 옛 자아가 사라졌으며 나는 새로운 자아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때 만이 나의 옛 본성을 다룰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결정적이고 경이로운 진리이다.

 

 

나의 옛 본성의 문제는 내가 내 옛 자아가 가버렸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훨씬 쉬워진다.

 

내가 새 사람이란 것을 깨닫는 순간 내 몸, 즉 바울이 죽을 몸이라고 부른 내 몸에

 

아직 남아 있는 이 옛 본성을 다루기에 더 좋은 위치에 있게 된다.

 

죄는 더 이상 내 안에 있지 않고 내 지체 속에만 있다.

 

듣든 중 가장 자유를 주는 말이 아닌가! 그것이 사도의 주장이고, 그것이 구원방식이라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떨어질 때마다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의문을 가짐으로써 불행해한다. 사도는 여기서 그런 식의 의문이 잘못이라고 못박고 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죄를 지을 때마다 너희의 구원 문제를 들먹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8장 마지막의 장엄한 클라이막스).

 

나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혔다. 나는 의롭다 함을 받았고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이다.

 

하나님의 양자이다. 죄는 나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나는 다시 회심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어째서 죄를 짓는가? 죄가 내 지체 속에 있으며, ‘죄의 몸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죄의 몸을 나에게서 제거시킬 구원을 누리고 있다. 바울은 우리 옛 사람’, 옛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인인지를 의심함으로써 다시 한 번 그 옛 사람을 다시 불러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어 심지어 장사되어, 영원히 사라진 옛 사람을 다시 불러오는 것에 불과하다.

 

 

6절이 확실해야 7절에 나아갈 수 있다. ‘죽은 자가 그리스도일 경우 그분은 의롭다 함을 받을 필요가

 

없는 분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는 흠정역 번역대로 자유함을 얻었음이라로 해야 한다.

 

죽은 자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죽은 사람에 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며 자명한 진술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은 사람이 죽을 때, 그가 죽음으로써 그는 죄에서 벗어나 방면되며, 죄에 관한 한 절대적으로 자유롭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 사람이 죽을 때 그는 죄의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죄와 함께 일하는 율법의 관할에서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죽은 자는 죽는 순간 죄의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흠정역이 옳다. 죽은 자는 자유롭다. 죄에서, 죄의 모든 영역과 체제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자유롭다.

 

 

그래서 6,7절을 함께 놓을 수 있다.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은 모든 방면에서 죄에게 종노릇하는 데서 벗어나 구원받기 위한 것이다. 죽은 사람마다 죄의 권능과 죄의 왕노릇과 죄의 노예제도와 죄의 폭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기 때문이다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2절로 돌아가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는 우리가 죄의 통치와 왕노릇에 대하여 죽음을 의미한다.

 

그는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죄는 아직도 죽을 몸에 거한다. 그러나 나의 참된 자아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나의 지체 속에 거하는 것이다. 내 몸, 내 육신 안에 거하는 것이다. 나는 죽은 사람과 같다.

 

죄의 관할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이다. “죄가 사람에게까지 왕노릇하였다”. 사망까지만 이다.

 

사도바울이 계속해서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고 강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벧전 4:1-2는 로마서 6장의 대목과 정확히 병행하는 말씀이다. (벧전4:1-2)“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죄를 그쳤다는 더 이상 죄의 지배나 죄의 통치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라고 완벽하게 표현한다. 바울과 베드로는 모두 다 같은 일,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은 단번에 하나의 존재, 하나의 영혼과 전인으로서 죄와의 관계를 끊었다는 것이다.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비록 우리가 여기 몸 안에 있지만, 비록 우리는 죄가 몸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죄에 떨어지지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나는 구원받은 것이다.

 

내가 지금 분명히 구원받은 것같이 영광 중에서 분명히 거하게 될 것이다.

 

 

침체를 극복하고 실패를 극복하는 길은 우리가 안전하다는 것과 우리가 그리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우리의 구원을 의심케 하는 마귀에 대한 처방은, 우리가 죄를 짓거나 말거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 죄가 한 인격(신분)으로서의 우리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 죄가 여러분을 다시 자기의 왕노릇 밑에 끌고 가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죄는 다만 우리의 몸에 남아 있다. 그 몸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완전히 해방될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라. 나는 한 사람, 한 존재, 한 인격으로서 한 전인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나는 이미 죄의 지배와 왕노릇과 죄의 통치와 관계를 끊었다.

 

죽은 사람은 누구든지 자동적으로, 정한 이치에 따라 필연적으로 자유-“죄에서 벗어나 자유케 된다”.

 

 

8장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6:8-10)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열쇠가 되는 구절은 5절이다. (6: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7절은 5절 상반부에 대한 해설이요, 8-10절은 5절 하반부에 대한 해설이다.

 

죽음은 소극적이요 부활은 적극적이다.

 

 

8절은 5절 하반부의 반복에 불과하다. 아주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는 표현 때문에 넘어져서는 안된다.

 

부활의 믿음을 붙잡으라는 것이 아니다.

 

믿는다는 말은 사실상 나는 그 사실을 안다’, ‘확신한다말 대신에 온 것이다.

 

8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반드시 우리는 그와 함께 살 것이라는 의미이다.

 

만일 우리가 그와 함께 연합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반드시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반드시 그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살 줄을 (믿노니)’의 미래시제의 문제.

 

우리의 장래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전혀 잘못된 것이다.

 

사도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에게 되어진 것이다.

 

현재 우리 가운데 되어진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더 이상 죄의 체제와 영역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에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그와 함께 살았다는 것도 현재 우리의 것이다. 병행 구절들을 본다.

 

 

4,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 이 세상에서의 삶 가운데서이다.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언제? 미래 부활까지 미루어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한다.

 

이것이 전체 요점이다.

 

 

2:1-4, “(1)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것을 행하셨으며)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육체적인 의미에서는 미래이다.

 

현재 되어진 것을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다.

 

 

2:19--20도 마찬가지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내가 부활한 후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그러하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현재 말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그것은 정확히 여기 롬 6장에서 보는 바와 같다.

 

 

요약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전적으로 새생명을 향하여, 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새 체제 안에 있는 새생명에 대하여 살아났다는 것이 보편적인 전제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뿐 아니라, 새롭고 부활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9-10절은 많은 사람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우리와 우리의 체험을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의 체험에 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사실인 것만을 숙고해야만 한다.

 

또한 이 죄악의 관계 문제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일어난 일만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진리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우리의 현재 지위가 이 시점에서 사도의 관심이다.

 

체험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11절에 가서야 체험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이 분명하기까지는 우리 자신의 지위에 대해서 결코 명확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사셨으며”. 누가 살리신 것인가? 4,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아버지의 영광아버지의 영광스런 능력이란 의미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만족하셨다는 적극적인 증거이다. 부활은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 사명하신 일을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는 것을 전 우주에 선포하심이요 공포하심이다.

 

 

그는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신다”.

 

그 이유는 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영단번에 그것을 행하셨다.

 

부활이 그것을 증명한다. 부활은 그가 일을 마치셨으며 목적이 이루어졌음을 증거한다.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이것은 엄청난 진술이다.

 

죽음이 더 이상 그를 지배하거나 세력을 부리지 못한다.

 

그가 율법을 마치셨기 때문에 사망이 더 이상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

 

죽음은 그가 율법 아래 있는 동안만 간섭할 수 있었다. 율법을 떠나서는 그럴 수가 없다.

 

그의 부활은 그가 율법을 다 이루셨으며,

 

결국 율법이 사망 안에서는 더 이상 그를 접촉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는 그가 전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복종하여 들어왔던 죄와의 관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의 권세로서의 죄, 왕노릇하는 것으로서의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단번에죽으셨다. 그 의미는 오직 단 한번’, ‘영단번에’, ‘단번에 영원히이다. 반복함이 없다는 의미이다. 죄에 대하여 죽었을 때 그는 그것을 영단번에 행하셨다. 그리고 그 일이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결코 그가 다시 그것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였다. 대제사장도 일년에 한 차례씩 같은 일을 행하였다.

 

 

여기 주님께는 그렇지 않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가 그런 분으로 그런 일을 하셨기 때문에 또한 그가 그 일을 완성하신 방식 때문에, 그는 한 행동으로서 그것을 영단번에 이루셨다. 반복이 필요 없다.

 

앞으로도 반복이 있을 리 없다. 이와 같은 나는 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아는 것이다.

 

9장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

 

 

(6:10-11) (10)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죄의 사망의 관계에서 구원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영단번에 이루셨다. 그는 둘째 아담이 아니다. 마지막 아담이다. 다른 아담이 필요치 않다. 그는 마침이 되셨다. 그는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는 영단번에 죽으셨고, 죄와 사망에 대하여 영단번에 그 관계를 청산하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심이니”. 그리스도께서 지금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체제에서 살고 계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좌와 사망의 체제에 계셨었던 적이 있었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그는 지금 다른 체제에,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 체제에서만 살아계신다. 10절 상반절과 하반절은 대조를 이룬다. 우리 주님은 짧은 기간 동안 영광의 체제에서 벗어나 죄와 사망의 체제로 들어오셨다. 그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체제에 있지 않다. 그는 영광 가운데 올리우셨다’(딤전3:16). 그는 완전히 그의 영원한 영광을 되찾으셨으며, 그가 나오셨던 영역과 체제 속으로 다시 들어가신 것이다. (1:18)“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20-23)“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 진술의 상세한 해석에 나아가기 전 명심해야 할 세 가지 원리들이 있다. 첫째 원리,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리인 것은 우리들에게도 진리라는 것. 우리와 그는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함께 장사되었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다. ‘이와 같이 너희도이라는 두 말이 그 점을 증거한다.

 

둘째 원리, 11절의 진술은 비체험적이라는 것. ‘여기라는 말 자체가 그 점을 분명히 증거한다.

 

셋째 원리, 이 구절이 거룩한 삶과 성화의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

 

 

여기다”. ‘네가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라’ ‘너희 앞에 가져다 놓으라’ ‘결론짓다의 의미. 쿠에이즘(자기 자신에게 계속 말하면 더 좋게 느끼기 시작할 거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우습게 만들고 만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설득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결론이요 추론이요 하나님의 논리적 귀결이다. 쿠에이즘의 반대요, 우리는 거짓된 개념을 제거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에서 피할 수 없는 추론을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친히 이루실 수 있다고 결론 지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정직성에 기초한 논리이다.

 

 

너희 자신”. 우리의 본질적 인격의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별된 인격, 우리 모두를 구별되고 다른 사람으로 만든 인격, 우리라는 개인들을 의미한다. 나는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것도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문제. 내가 결론지어야 되고 여겨야 되고 항상 내 안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첫째,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이 구절처럼 남용되고 잘못 해석하는 구절이 없을 것이다.

 

이 구절이 의미하지 않는 것이 다섯 가지. 그리스도인들로서 나의 의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너희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죄를 위하여 죽었다고 믿으며, 그가 죄를 위하여 죽었기 때문에 너희가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았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에 대하여 즉는 것이 너희의 의무임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나에게 사실인 것은 그리스도에게 사실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말은 순전히 불가능하다.

 

죄에 대하여 죽으라는 명령도 아니요, 죄에 대햐여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으니 그리스도인들도 죄에 대하여 죽으라는 강권적인 명령으로 해석하였다.

 

내 안에 있는 하나의 세력으로서의 죄가 죽었다고 여기라는 의미도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죄와 완전히 관계를 끊었다고 하는 의미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체험에서 그와 같은 하나의 세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도의 진술은 죄가 죽었다든지, 죄가 우리 밖으로 근절당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죄는 아주 생생하게 살아 있다. 죄는 근절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체질 밖으로 뿌리 뽑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몸과 육신 안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죄에 대하여 승리를 얻는 동안만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해석이다. 이들은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정말로 죽어 있는 것으로 여기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는 한 승리를 얻게 될 것이고, 승리를 얻는 동안은 죄는 실로 여러분이 관심을 두는 정도까지 죽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승리를 얻는 길은 이 구절을 되뇌이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죄는 사실상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계속해서 그렇게 말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이것은 체험적인 면으로 넘어간 것이며, 우리 주님과의 병행구 때문에 체험적일 수 없는 것이다. 이 구절은 나의 체험과 일상생활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나를 죄에 대하여 죽게 만드는 것은 이 사실을 나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 ‘만일 네가 여기는 이 일을 계속하게 되면, 여러분은 죄에 대하여 정말로 죽게 될 것이다’. 사도는 실제적으로 그 정반대를 말하고 있다.

 

 

정확히 사도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적극적인 이 말씀은 권면이다.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인정하고 여기라고 하고 있다. 주 예수 자신에게 진리인 것이 우리에게도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그러기를 바라는 것을 여기는것이 아니고 사실인 것을 그렇게 여겨야 한다. 나를 위하여 이미 이루어진 하나의 사실인 것을 여겨야 한다. 그 사실이란, 내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율법과 죽음 그 자체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이것-나의 죄에 대한 죽음과 하나님에 대하여 산 것-은 단번에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나를 위하여 성취된 일이다. 나는,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합하여 세례받게 한 성령의 역사 때문에 이 지위로 오게 되었으며, 나는 그리스도 안에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모든 결과들을 거두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구절은 어떤 일을 성취하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위하여 영단번에 이루어진 일을 깨달으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것은 나의 체험에 관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있는 영역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나도 죄와 사망의 체제 가운데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전에 잠깐 동안 그 체제에 들어오셨다가 이제는 아닌 것처럼,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나는 더 이상 그것에 속하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 밖으로 나왔다.

 

 

이것이 우리가 이제 상세히 다루어 나갈 큰 원리이다. 우리는 이렇게 여겨야한다. 이 사실을 우리에 관한 진리로 여겨야 한다. 그것은 체험이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영원토록 죽었던 것과 같이, 나도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여기고 그것을 내 앞에 끊임없이 견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영역 가운데서 살지 않고 다른 영역에 속하여 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이다.” 이것은 나의 체험이 아니라 나의 서있는 위치요, 나의 지위요, 나의 신분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삶”, 이것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체제이다.

 

10장 죄의 왕노릇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죽음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해석의 원리; 1)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리인 것은 우리들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

 

2) 이 구절이 체험인 진술이나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의 죄의식의 차원에서부터, 죄를 어떻게 제거할까 하는 문제부터 시작하면 안 된다. 이미 우리들의 지위나 신분으로 확정된 사실을 깨닫고 부단히 우리 앞에 가져다 놓고 기억하라는 권면이다. 죄에 관하여 어떤 일을 하라는 권면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우리가 단호히 믿어야 할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위를 체험하지않는다. 듣고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했던 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믿고 그것에 복종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내 안에 죄를 의식하면서 죄에 대하여 참말로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아직도 가공할 죄인임을 느끼는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아브라함이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듯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죄와 사망의 체제와 왕노릇에 대하여 영원히 죽었음을 부단히 인식하여야 한다. 우리가 영단번에 그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믿고 인식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망이 그를 다시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듯이,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사망이 다시 그리스도인을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진술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라서 그리스도인들까지도 끊임없이 그것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 확정하는 말씀들이 있다.

 

(8: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5: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11:25-26)“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나 우리는 죽어야 한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죽었으며 장사되었다. 그런데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이 모든 구절이 바울이 여기서 사망이 다시 그리스도인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그의 진술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망은 우리 주님을 더 이상 지배하지 않으며, 사망은 우리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

 

 

이 중요한 교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통과한다 할지라도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망이 더 이상 우리 위에 주도적인 권리를 사용하지 못한다. 사망이 우리에게 법적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 죄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통하여, 우리는 사망의 지배에서도 역시 구원받은 것이다. (2:14-15)“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기만 한다면우리는 더 이상 결코 사망의 두려움에 매이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더 이상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났을 때 가지고 있었던 지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가 아직도 우리 몸 속에서 죄와 접촉하고 있지만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있지 않다. (8:1)“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좌함이 없나니라고 했다. 은혜에서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사망까지도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 재림 때에 지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살고 있는 우리들은 사망을 통과해야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법적 요구로는 되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 속에 어떤 비통함이나 어떤 고통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잠자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의 품에 잠들게 될 것이다. 죽음의 공포도 영원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 (8:38-39)“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나이가 들어 중추신경이 흐려지고 두뇌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키고 그런 상태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런 가운데 자기기 믿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모독할 수도 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그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우리는 사망을 통과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상 죽지 않는다.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순전히 육체적인 문제로 인하여 잘못 인도되는 일이 없기 바란다. 바울처럼 사망이 하나의 유익이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리라죽는 것이 유익하면, 죽음은 그에 대하여 어떤 지배도 가질 수 없다. 그는 죽음의 면전에서 미소지을 수 있는 것이다. 사망이 그를 그리스도의 존전으로 즉각 인도하기 때문에 그는 그것에 대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니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간주하여야 할 것들이요, 우리 자신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하는 것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러 저러한 모양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죄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차지할 영광이 무엇인지,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맨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실천적인 교훈을 얻는 것으로, 우리와 죄, 우리와 사망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죄가 다시는 나를 그의 노예나 포로삼지 못한다. (요일3:9)“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계속 죄 가운데서 거하며 죄를 계속 짓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는 것은 그가 노예로서 짓는 것이 아니고, 그릇된 것을 하기로 선택하는 자유인으로서 죄를 짓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노예로서 굴레에 매여죄지으며, 포로로 잡혀서 죄짓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났다. 새로운 영토에 속하여 있다. 그는 어둠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

 

 

엄청난 의미이다. 산을 3분의 2쯤 올라가다 넘어진 것이다. 산 아래서 넘어진 것과 같지 않다. 죄를 지었으니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다. 다시 산밑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다. 남은 높이를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죄에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정상에 가까이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지위이다.

 

그는 더 이상 그가 옛날에 있었던 곳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완전히 오르는 위치, 다른 체제에 속하여 있다. 그는 새 체제에서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다시 노예 신분으로 가지 않는다. 그는 노예로서 죄짓지 않고, 자유인으로서 죄짓는 것이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해방을 얻은 노예들에 관한 예. 노예 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났는데도, 특히 늙은 노예들은 자기들이 해방되었다는 것을 계속 잊곤 하였다. 습관과 관례에 따라 행동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익히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이 모든 악을 제거하는 방법은 우리 자신에 관하여 진리인 것을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이라고 자꾸만 말하는 것이다. 굴레가 없어졌고, 이제 그는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의 모든 지위와 조건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 교훈에서 진수가 되는 부분은 그것을 인식함에 따라서 체험속에서 점점 사실이 되어가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비그리스도인이었던 시절과 죄의 삶을 영위하였던 때를 돌이켜 보라. 죄에 대한 태도가 변하였다. 배교자도 하나님의 자녀요 타락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다르다. 그는 비참하고 정죄감을 느끼고 불안해 한다. 비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 즐기며 좋아하기만 할 것이다. 배교자는 돌아올 것이다. 죄를 계속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멈추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죽음과 무덤을 향하여 똑바로 서서 그들을 도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것들을 이기셨고, 우리가 그 안에 있으며, 그들이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청산하였으며, 죄와 사망에서 자유로워졌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11장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정말 죽었다는 사실을 꼭 붙잡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동시에 적극적인 진리인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고 하는 것을 붙잡아야 한다.

 

그것은 영역의 변화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체제와 하나님의 영역과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체제 가운데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은혜의 왕노릇이 작용하는 체제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5:21의 진술이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전적으로 새로운 영역과 새로운 체제 속으로 살리심을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는 바”(2:6) 되었다.

 

우리는 죄의 체제와 세력과 죄의 모든 왕노릇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은혜의 권세 아래 있게 된 것이다.

 

 

1)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우리가 이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것을 우리 앞에 부단히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에 들어섰다. 그것은 우리가 그의 존전에 살고 있으며 우리가 그의 존전에 나아감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의 자녀요, 그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요, 그의 아주 특별한 관심을 받는 자들이다. 이를 완전히 진술한 구절은 요17:23이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 진술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엄청난 진술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2) 그래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축복에 대한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5: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6:115:2에 대한 일종의 해석이다. 하나님의 최상의 선물과 하나님의 가장 값진 축복들이 우리의 것이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지극히 크고 값진 약속들’.

 

우리는 아담이 처음에 알았던 그 교제보다 더 큰 교제를 누리고 있다. 아이삭 왓츠,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의 후예들이 자기 조상 아담이 잃었던 것보다 더 많은 축복들을 자랑하네(찬송)”.

 

 

3)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안에 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특별한 대상들이다. (8:28)“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창세전부터 가지신 하나님의 영원하고 위대한 계획 속에 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 답변은 엡1:4에 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구원계획의 전체 목적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흠이 없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4) 더욱 이 목적이 우리 안에서 역사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가장 신비스러운 방씩으로 그 안에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 지체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우리가 그에게 접붙여졌으며 그로부터 생명을 받고, 그 안에 있다. (4: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4:13)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라”(6:35)가 되는 것이다. 중국 내지선교의 개척자였던 허드슨 테일러에게 가장 많은 해방을 주는 말은 결코-아니라는 말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그의 계획을 내 안에서 이루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로 하여금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책망할 것이 없이하기 위한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을 두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2:12-13)“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는 의지를 지배하시고 우리를 자극하고 우리의 마음에 여러 가지 일을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모든 신자의 삶에는 그런 성령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부터 이 역사하심은 시작되고, 그로부터 계속되어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일어나실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같은 능력이다. (3:20-21)“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순간 우리는 이 능력에 대하여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룩함을 내기 위하여 의도되고, 주 앞에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게 하시기 위하여 의도된 능력이다.

 

 

그 목적이 완전히 이루어짐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확신함이라”(1:6). 어떤 것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만큼 확실하다. 어째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는가? “자기 앞에 영광스런 교회를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시려는목적 때문이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성령의 목적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것이 실패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능력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결과는 보증되는 것이다.

 

 

5)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긴다면, 그 효과는 다음 번에 죄에 빠지게 될 때에 내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자문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은혜 속에 있다가 또 밖으로 나가곤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구원받았다가 못받았다가 왔다 갔다 할 수 없다. 우리는 죄 지을 때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를 짓고 있는 것이지 율법을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훨씬 더 심각하다. 그러나 그것은 법적인 범법이 아니다. 죄에 대한 관계와 하나님께 대한 두 관계를 바르게 보게 될 것이다. 나의 느낌과는 상관 없이 나는 죄에 대하여 결별하였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체제 안에 살고 있다. 그 사실을 믿고 붙잡고 행동하라. 이것을 깨닫게 되면 죄의 가공할 권능 때문에 느끼고 알았던 옛 절망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 절망감을 제지하는 유일한 길은 로마서 6장 특히 이 11절의 가르침이다. 전체 그리스도인 삶 가운데서 가장 해방감을 체험을 알게 하는 것이 6장이다.

 

이 모든 것을 깨닫는 것은 기쁨과 소망감을 안겨 준다. 우리의 지위를 깨닫게 될 때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될 때 거룩한 웃음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될런지 모른다. 느헤미야가 그의 절망적인 백성들을 깨우쳤듯이 주의 기쁨이 오게 되어,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여러분의 힘이 되는 것이다”(8;10). 나는 머리되신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생명이 내 영혼에 있다. 나는 더욱 더 강한 힘으로 변할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

 

현재 나와 이 세상이 어떻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목표는 확실하고 명백하다는 것을 안다. 아무것도 그것을 정지시킬 수 없다. 이것이 로마서의 위대한 메시지이며, 성경 전체의 메시지이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았기 때문에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광을 향하여 가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나는 여러분에게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여러분이 죄의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마다 징계하나니라는 말씀을 그대로 적용당할 것을 준비하라. 그는 죄에 계속 거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요, 거기서 잡아 끌어 올릴 것이다. 질병으로 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자를 빼앗아 갈 수도 있다. 또한 사업을 무너뜨리실지 모른다. 또한 여러분이 가질 수 있는 어떤 밝은 희망과 전망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그는 여러분을 먼지처럼 만드실 수도 있다. 그대로 방치하여 두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실로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았다. 그것을 깨닫기만 하면 자신 앞에 그것을 항상 놓고 잊지 않기만 한다면 앞으로는 실패하지 않게 할 것이며, 모든 것을 새로운 가운데서 보게 하고 사도 요한과 같이 장래를 바라보면서 그 안에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가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게 하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자신을 정결케 할 힘을 주실 것이다.

 

12장 신약의 성결 교훈방식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바울서신에서 그러므로란 말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다.

 

1) 교리는 언제나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란 말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1-11절에서 개진한 교리들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13:17). 교리가 삶과 행동과 윤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심판 날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전13).

 

 

2) 실천적인 대목은 이전 교리적인 대목을 바로 이해하였는지를 점검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둘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하고 반드시 서로 상통하여야 한다.

 

3) 그리스도인과 죄와의 관계에 대하여 알게 한다. 너희와 너희 죽을 몸, 분명히 이 둘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 바울이 죄로 너희에게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지 않고 있음을 강조한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하고 있다. 죄의 몸은 우리 몸에 남아 있는 죄를 의미한다. 글자 그대로 육신적인 몸이다. 그것은 죄짓기 쉬운 우리의 본성이 아니다. 저 위대한 칼빈마저 죄있는 본성으로 해석한다. 우리 자신은 구원 받았다. 죄는 여전히 몸에 남아 있다. 우리 자신은 이미 죄의 영역과 죄의 체제에서 건짐을 받았다. 그러나 죄는 오직 몸에 남아 있다. 하지만 몸이 영화롭게 되고 죄가 완전히 끊어지고 영원토록 없어질 날이 온다.

 

 

바울의 모든 권면은 우리가 우리의 죽을 몸에 죄가 왕노릇하거나 통치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왕노릇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가 죽을 몸에 있을 동안에는 언제나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몸을 통하여 우리를 지배할려고 기를 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죄는 본능을 사욕으로 바꾼다. 자연적인 본능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러나 죄는 자연적인 본능들을 비정상적인 정욕과 사욕으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그것을 막고 제지하여야 하며,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처리하지 못하면 죄가 곧 우리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 성경에 우리 몸과 죄와의 관계에 대한 진술이 그렇게 많은 것은 이 진리 때문이다.

 

6:19, 7:18, 20, 23, 24, 8:23, 12:1, 고전6;13.

 

 

4) 성결과 성화에 관한 신학적 교리로 우리들을 안내해 준다. 신약의 성화교리에서 제1의 원리는 우리가 실천에 옮겨야 하는 무슨 일이라는 것이다. 권면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성화란 위로부터 받아지는 선물이 아니다. 2원리는 성화는 영단번에 이루어지는 갑작스런 구원의 체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결과 성화에 관한 신약의 교훈 방식은 포기하라고 하지 않는다. 행동하라는 권면을 한다. 그들은 말한다. “당신의 고통은 죄와 싸우고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물론 당신은 패배한다. 거기서 잘못된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포기할 것 밖에는 없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그로 하여금 네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도록 하라. 그분은 여러분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며 당신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어려움을 더 이상 겪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백여년 동안 복음주의적인 교단에서 일반화되고 편만된 가르침이었다. 그 가르침과 죄로 너희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과 어떻게 조화될까? 그것은 우리에게 적극적인 의지의 행동을 요청하는 권면이다.

 

 

그 가르침은 비성경적이고, 실로 많은 성경적인 교훈을 무시한다. 그것은 신약의 후반부를 필요없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투쟁을 멈추고 주님으로 하여금 그의 승리하는 삶을 우리 가운데 살게 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서신서마다 상세하게 실제적 권면을 한다. 도적질하지 말라. 어리석은 변론을 버리라, 서로 거짓을 행하지 말라고 한다.

 

 

어떤 이는 묻는다. 당신은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법 아래 있지 않으며, 죄의 권능 아래 있지 않으니 우리의 성화는 절대적으로 보장되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려 하실 거라고 우리를 설득하였다. 그것을 강조하여 놓고, 이제 당신이 말하는 것과 그것을 어떻게 조화시키려는가?”라고 묻는다. 조화시키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큰 일을 성취하신다. 그것이 성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2:12-13을 보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이것이 신약의 성화 방식이다.

 

 

성화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성화는 우리가 성령에 의하여 이끌림을 받아 교리로부터 추론들을 끌어냄에 따라 이루어져 나간다. 이미 설정된 교리의 결과로 어떤 것들이 필연적이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거룩하게 되기를 갈망하는가? 여러분의 죽을 몸에 있는 죄를 이기기를 갈망하는가?

 

첫째로 교리를 이해하라. 교리에 분명치 못하면 그러므로로 나아갈 수 없다. 1-11절의 말씀을 이해했는가? 교리를 이해하는 것-그것이 출발점이다. 교리를 이해한 뒤에도 그 교리를 부단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라’- 끊임없이 그런 것으로 간주하고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라. 그리고 나서 그것으로부터 필연적인 추론들을 끌어내라. “이제 나의 위치는 무엇인가? 나는 내게 일어난 이 모든 것에 비추어서 어떠한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즉각적으로 우리의 성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교리는 우리들에게 성결에 대한 참된 동기들을 제공한다. 어째서 내가 죄로 나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해서는 안되는가? 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목적은 거룩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 안다. 우리가 죄에 거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어떻게 죄와 동행할 수 있겠는가? 동기들은 그러하다. 이것이 내가 성화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명예,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가 나의 행동에 달려 있다. 내가 내 죽을 몸에 죄가 왕노릇하게 내버려 둔다면 나는 나의 하나님 아버지와 나의 구주와 내가 속한 하늘의 가정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다. 난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성화의 방식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7).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이러한 사람이며, 우리를 위하여 무엇이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우리의 손에 하나님의 가정의 모든 명예가 달려 있는가를 말해주는 진리이다. 그 진리를 이치를 따져보고 행할 것을 알라고 한다.

 

 

진리는 나로 하여금 나의 놀라운 지위를 부단히 생각하게 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았다. 내가 죄가 내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것들을 깨달을 때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적으로 모순되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기다리고 있노라고 고백하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죄의 왕노릇을 허용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계획을 스스로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이 목적을 하나님은 이루어가고 계신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고 적지 아니하니”(고전11:30). 고린도 교회에는 죄로 자기 죽을 몸에 왕노릇 하도록 내버려 두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12:6).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고, 그는 이 목적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 나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죄로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대적한다면 우리가 매맞고 징계당한다 하여도 놀라서는 안 된다. 그것이 병일 수도 있고, 사고일 수도 있고, 죽음일 수도 있고, 슬픔일 수도 있다.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어 어리석고 더 야비한 짓이 어디 있는가?

 

 

성화의 권면은 우리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게 한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다. 우리 속에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계속 추진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권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교리는 이미 우리에게 세상에 있는 자보다 너희 안에 있는 자가 더 크다고 말하였다. 어떤 핑계도 댈 수가 없다.

 

 

우리는 홀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죄의 왕노릇을 멈추게 할 지위에 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를 피하리라”“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라”(벧전5:8,9)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를 정복하고 물리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적할 힘을 주셨다. 1-11절의 영광스러운 교리에 비추어 볼 때, 그러므로 죄로 우리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아야 한다.

 

13장 우리를 하나님께 드림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너희 지체를 --내주지 말라는 우리의 의지를 향하여 주어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요, 할 수 있는 것이다. 성화하려면 무엇을 행하는 것을 멈추라고 하는 가르침과는 상충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죄를 이기려고 싸우는 것이 잘못이고, 길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한다. ‘다만 투쟁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길 뿐이라고 한다. ‘그럴 때 주께서 그 사람 안에서 그 일을 행할 것이라고 한다. ‘가장 큰 오류는 죄와 싸우려는 시도이며, 우리의 할 일은 그런 노력을 중단하는 것이다.“ 13절 말씀과 이 가르침은 합치되지 못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이 문제는 긴박하고 사활을 좌우하는 중요성을 가진 것이다. 스스로 굴복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모든 삶을 소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13절 말씀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의지를 행사하여 어떤 일은 행하고 어떤 일은 행하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13절 말씀은 소극적인 부분과 적극적인 부분으로 나눠 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내주지 말라”.

 

죄는 언제나 자기의 기회를 고대하고 있는 큰 원수이다. 반드시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죄라는 이 원수에게 내어 주어서는 안 된다. 지체는 죽을 몸의 부분들이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힘과 기능과 성향들이 내재하고 있다. 지능, 생각하는 힘, 논리적인 능력, 상상력, 정서를 포함한다. 12절에서 하나로 묶어 죽을 몸에 대하여 말한 다음에, 이제 그 죽을 몸의 성분이 되는 부분들을 말한다. 이 몸의 활동 가운데서 어떤 간단한 부분이라도 우리를 대적하는 세력인 죄에게 내어주어서는 안됨을 강조하고 있다.

 

 

내주다임의대로 하게 내버려 두다의 뜻이다. ‘불의는 영원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대하여 반대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 몸의 어떤 기능이든지 죄의 도구로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 힘과 에너지와, 내 말과, 내 욕구, 내 마음, 내 생각, 내 상상이나 내 감정이나-이 모든 것은 나의 부분들이고 내 인격의 표현이다. 어떤 것이라도 죄의 이용물이 되어서도, 죄를 위해서 쓰여져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한다. 죄와 마귀가 우리를 얻으려는 위협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우리 몸의 체제를 얻을 수 없으면, 마음을 얻을려고 할 것이고, 그것이 안되면 상상력을 통하여 하고, 그것도 안되면 교묘한 방식으로 정서를 통하여 그 일을 시도한다. 우리 자신을 전체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반드시 지체들과 부분들도 조심해야 한다. 우리 중 이 특정한 권면과 명령을 유별나게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몸으로 아니했을지라도, 상상속에서 즐기는 것도 지체의 부분을 죄에 넘겨 주어 죄가 불의의 도구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죄는 사람과 하나님의 큰 원수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능력들과 기능들과 성향들이 그 자체로는 선하고 해롭지 않다. 그것들은 선하게 혹은 악하게 사용될 수 있다. 과거에 자기의 마음과 두뇌와 재간, 상상력, 말과 웅변의 은사 등,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죄의 종으로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은, 이제 정확히 같은 힘들을, 의와 하나님께 대하여 무기들과 종들로 사용하여야 한다. 우리가 중생할 때 새 지체새 기능들을 받지 않는다. 그것들은 전과 같다. 차이는 그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죄의 편에서 사용되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사용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권면은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치 말라, 어떤 기능이나 힘도 죄가 애용하도록 결코 허락하지 말라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다. 1~11절에서 그리스도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같이 우리도 죄에 대하여는 영원히 죽은 자요, 사망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영원히 단번에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반복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드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 자신을 죄에게 드리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고,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우리는 은혜의 왕노릇 아래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다.

 

기독교와 도덕의 차이는, 도덕은 하지 않아야 할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기독교는 언제나 적극적인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죄에게 드릴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드릴 수 있다. 어째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진 것 때문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 같이”. 그리스도인 외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자는 없다. 불신자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기 땨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와 함께 부활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

 

 

드리라그를 봉사하는데 자신을 내어준다’, ‘자신을 그의 뜻에 맡긴다의 의미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임의대로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특권인지 알고 놀란 일이 있는가? 우리는 살았기에 하늘 군대의 성원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십자군에 종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후5: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16:24)는 말씀도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라는 말씀이다.

 

 

왜 자신을 드린 후에 우리 모든 지체들과 모든 기능들을 드리라고 하는가? 이것은 성화의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자신을 드렸어하고는 지체들을 드리는 것에 관해서는 무관심하기 때문에 율법폐기론으로 떨어지고 만다. 우리는 반드시 자신뿐 아니라 지체들 모두를 남김없이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의 모든 됨됨이,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 우리가 희망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맡겨져야 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그의 영광과 찬양을 위하여 산다. 하나님의 계획은 의로우시다. 우리의 지체는 의의 무기로 드려져야 한다. 적극적으로 또한 능동적으로, 우리는 이 의의 십자군, 하나님의 십자군인 진리의 십자군에 종사해야 한다.

 

 

성화와 성결 방식에 대한 신약적 교리와 관련하여 중대한 원리들이 이 구절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우리가 성결과 성화에 관심을 가지는 주된 이유는 우리가 죄와 극렬한 싸움과 전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성결 교훈이 우리의 주관성을 기초로 가르쳐지고 있다. ‘여기 투쟁하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패배하고 불행한 내가 여기 있노라하는 식이다. ‘진료소로 오라고 광고한다. ‘당신이 필요한 것은 진료소, 영적 병원으로 오는 것이며, 여기서 당신의 질병과 아픔이 치료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의 구절들을 볼 때 어떤 진료소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병원, 막사가 아니라 전쟁터를 발견한다. 의사가 아니라 주임상사가 필요하다. 연병장에서 단정치 못하게 걷고 있다. 비참하게 느끼고 자신의 연약에 대하여 말한다. ‘나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못하다.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소리쳐 알려주는 특무상사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이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을 일이 없다. 굳건히 서서 하나님의 군대에서 우리가 어떤 신분이며 어떠해야 하는가를 인식하자. 너희 자신을 바쳐라. 이곳은 진료소가 아니다.

 

 

오늘날의 기독교회의 주요 문제는 교회가 진료소나 병원과 같은 것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가 영혼의 볼거리와 홍역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느끼며 자신에 대하여 말하며 우리의 기분과 주관적인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와 악의 나라와 대항하여 싸우는 의의 왕의 생각을 잊었다. 사람들은 내가 구원받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말하기를 잘한다. 저는 대답한다. 위대한 (성경말씀의)켐페인을 바라보시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시오. 잠깐 동안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잠시 당하는 고통을 잊으시기 바란다. 군대 안에서 싸우시기 바란다. 필요한 것은 진료소가 아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우리가 전투장에 있으며 우리는 한 장엄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성화는 섬김의 문제이지 내 주관적 기분이나 상태의 문제가 아니다. 내 느낌, 내 실패, 내 성공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성결은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 섬김의 문제이다. 우리의 존재 전체를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 중 어떤 부분도 죄를 섬기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원수와 화친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성결을 가르치는 신약적 방식이다. 우리들 거의가 필요로 하는 것은 진료소가 아니라 자기 부하들을 통솔하는 특무상사의 말과 명령과 경고와 경계를 듣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교훈은 그처럼 오랫동안 성결과 성화교훈을 지배하여온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아주 단순하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성화는 쉽지 않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신약성경은 말한다. “담대하라, 남자답게 굳세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악한 일에 맞서라”. 이런 것들은 전부 군사적인 명령이다. 진료소와 병원을 생각하는 것을 없애야 한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개시하신 큰 작전의 차원에서 바라 보아야 한다. 그 작전에서 하나님은 승리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리로다”(8:37).

 

 

우리의 마음의 맨 윗층에 자리 잡아야 하는 생각은 왕과 그 왕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내 영혼의 상태와 조건은 나와 그와의 관계 만큼 크지 않다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의 나라에 내가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더 크게 생각해야 한다. 무기력하고 감상적인 생각,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는 병적인 생각, 우리를 돕는 것만을 생각하는 우리의 욕망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 접근방식을 전부 없애 버리시라! 그것은 비성경적이고 악한 것이다. 오히려 사도가 여기서 표현한 바대로 강하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위치를 바라보자. 사도 바울은 실로 어느 곳에서나 성화의 문제에 관련한 가르침에서 언제나 그것을 지적한다. 우리의 특권적인 지위를 확실히 인식하게 되면, 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죄가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도 못하게 할 것이며, 어떤 지체나 어떠한 기능이라도 불의의 무기로 죄에 드리지 않게 될 것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게 될 것이다.

 

14장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상기함

 

 

(6:12-14)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성결과 성화에 관련한 신약 교훈은 특징적인 원리들을 설정하고 있음을 알았다.

 

첫째 원리, 성결과 성화의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 자신부터 출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진료소, 병원으로 여기고 있다. 오히려 교회는 병영 막사와 같은 곳이다. “남자답게 굴어라”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어려움을 참으라이러한 권면들을 신약성경에서 부단히 발견한다.

 

 

둘째 원리, 이 문제를 하나님을 섬기는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이요, 도구요, 무기라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고무되기만 하면 개인의 성결과 성화 문제는 해결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에 관하여 생각하고,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우리의 영적 상태를 느끼고 있다. 그것은 잘못된 접근 방식이다. 우리는 부르심의 차원에서 바라 보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위대한 나라에서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널리 만연되어 있는 불건전한 진료와 주관적인 접근방식에 대한 건전한 신약적 접근방식이다.

 

 

셋째 원리, 신약은 언제나 성결 교리와 성화 교리를 나타낼 때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 1-11절까지 이 일을 해왔다. 그리스도가 죄에 죽으셨기 때문에 그를 믿고 그에게 속한 우리도 역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다는 것이다. 사도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라고 한다. 이 말은 우리가 새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처럼 드리십시오. 우리는 우리 속에 새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신자와 같은 죄인의 신분이 아닙니다. 불신자는 자신의 힘과 능력 밖에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새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그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죽을 몸 안에 있는 죄와 우리 밖에 있는 죄를 저항할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그렇게 말하며, 아주 담대하게 죄를 저항하라고 한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행동할 것을 요청한다. 그렇게 권면하고 명령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할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생명과 능력과 힘과 권능을 받았기 때문에, 신약이 아주 논리적으로 조리가 맞게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너희 지체를 죄나 불의를 위한 무기로 드리지 말라”.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여러분과 제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다른 무엇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당신을 위하여 그것을 하실 수 있도록 하시오라고 가르치는 병원이나 진료소로 가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에 종사하고 있다. 우리는 싸워야 한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게 하셨다. 우리가 믿고,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 능력을 받는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화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생각나게 하고, “, 이제 가자, 그 일을 하라고 말한다.

 

 

넷째 원리, 다른 모든 것을 생각하기 전에 언제나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의 메시지가 그것이다. “죄인 중 괴수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제일 큰 관심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성결이 아니다. 우리의 첫째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에 와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순서를 뒤바꾸는 경향이 있다.

 

자신에 관해 너무 많이 관심을 기울인다. “나는 여기서 죄와 싸우고 있으며, 패배한다. 죄가 너무나 힘이 센데 비해 나는 너무 약하다. 어디에 나를 이기게 하는 방법이나 다른 무엇을 가르치는 교훈은 없는가?”

 

나는 승리의 생활을 원하고 해방되기를 원한다’ ‘나는 이 ~을 원한다’. 모두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요, 모두가 주관적이다. 신약성경은 결코 그것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우선적이면서 최고로 생각할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은 이 방식으로 삶을 바라볼 때만 이다. 거룩함에 대한 참된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비참하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거룩해짐의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거룩할 때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6). 우리는 제1차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해져야 한다. 성결과 성화에 관한 어떤 교훈들은 하나님의 영광부터가 아니고 우리와 우리의 필요들로부터 출발하는데, 이것은 비성경적이고, 심각하게 비영적이다. 제가 볼 때 그런 주관적인 접근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수년동안 방황하게 하는 것 같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그런 타이틀 자체가 그릇된 접근을 암시한다. (handbook to happyness,영적치유의 핵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어떻게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가 더 훌륭하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상태와 감정들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의하여 좌우되어야 한다. 아마 성결의 가장 높은 수준은 욥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때 도달되는 것이다. (13:15)“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하나님의 영광이여!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가르침에서 맨 먼저 눈에 띄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성결과 성화에 관한 모든 관심의 최고 이유여야 한다.

 

 

14절은 중요하면서 영광스러운 진술이다. 6장의 첫 번째 대목의 마지막 구절이다. 1절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이요, 첫 대목의 요약이다. 잘못된 해석은 12,13절에서 말한대로 행하면 그 결과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아니다. 심각하게 오해한 것이다.

 

그것은 명령이나 권면이 아니다. 그것은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씀이다. 바울이 이미 하라고 한 일을 하도록 용기를 주는 말씀이다. 12,13절의 권면과 명령을 이행하기 위한 근거를 말한다. 어째서 내가 죄로 나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내 지체를 죄에게 드리지 말아야 하는가?

 

대답은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엄하고 적극적인 권리주장이다.

 

바울은 현재 나에게 사실이고 미래의 내게 사실이 될 것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죄가 우리를 주장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고 말한다. 죄가 여러분을 주관치 못할 것이다.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그 은혜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그 은혜는 정복될 수 없는 것이다. 영원하고 끝까지 가는 것이다.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죄에서 완전히 구원받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완전하고 흠없고 부끄러울 것이 없이 영화된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성결에 대하여 가장 큰 자극제가 되는 것은 신약에 의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 안에서 성결을 이룩하게 하는 신약적인 방식이다. 신약은 우리가 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그 일을 하실 것이라고 말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신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진리들을 깨달으라. 그 진리들을 깨달아 죄를 대적하여 서라.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말게 하라. 너희 지체를 죄에게 드리지 말라. 너희가 은헤 아래 있고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라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과 영화가 확실하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성결을 북돋아 주고 자극하고 고양시키는 것은 없다. 사도 요한이 말한 것에 전적으로 동조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여러분은 병원이나 진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교육과 이 정보와, 이 명령이 필요하다. 은혜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인식하라. 다시 새 언약의 조항들을 읽어 보라. 그리고 권리증서를 읽고 그것을 자랑하는 자처럼 살아가라. 자기의 모든 침체와 절망과 낙담을 잊어버리고, 장차의 영광을 바라보고 자신에게 말하라. “나는 낭비할 시간이 없어. 나는 영광을 기다리고 있어. 나는 그것을 고대하고 있어. 나는 서둘러서 그가 정결하신 것처럼 나 자신을 정결케 해야겠어. 난 장차 올 그 큰 날을 준비해야만 해, 그래서 내가 그 앞에 서게 될 때 부끄럽지 않아야지”. 성결과 성화의 가장 큰 촉진제가 이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방식이다. 이것들을 깨달으라. 이것들은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를 볼 것이고, 그와 같을 것이다. 여러분의 몸이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깨닫게 되면, 여러분은 죄를 미워하고 죄에 속한 모든 것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죄를 저항하고 마귀를 대적할 것이다. 그리고 마귀는 여러분을 피할 것이다”. 여러분의 좌우명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니라가 될 것이다.

 

15장 생명으로 설명된 소유권

 

 

(6:15-16) (15)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6장의 첫 대목인 1-14절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였다면 성화에 관한 신약 교훈의 진수를 포착한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의 성화와 영화를 보장한다. 성화는 체험이 아니고 성경의 권면들을 행하는 것이다. 이 교리들을 알고서 그전보다 죄를 더 미워하게 되었는가?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대면할 때 새로운 확신을 주었는가? 은혜 안에서 자라는 일과 주를 아는 것에 진보하였는가?

 

그것이 진리로 거룩하여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교리를 아는 것이 죄에 대한 우리의 전체 태도를 변화시킨다. 죄가 우리를 공격하고 넘어뜨리려고 위협할 때, 이 진리를 앎으로 죄를 정복하고 이길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죽을 몸에 남아서, 세상과 마귀 안에서 우리를 대적하는 죄를, 더 큰 확신과 더 큰 확증과 더 큰 승리감으로 저항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제까지의 교리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이 교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제발로 서서 자기가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지를 깨닫도록 하는 교리이다. 또한 이 교리는 은혜의 왕노릇의 능력 아래 그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이 교훈은 그로 하여금 승리케 하고, 그의 승리를 즐거워하게 한다.

 

 

이재 두 번째 대목(15~23)으로 넘어 온 것이다. 바울은 진리에 충성하였고 교리를 설교하였기 때문에 무섭고 극심한 반대에 직면해야 했다. 법 없이 은혜 아래 있다고 하면,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예나 지금이나 이 교리가 지극히 위험하다고 한다. 법 없는 방종과 무범함을 조장할 거라고 한다. 또한 이 교리로 인하여 율법폐기론으로 빠져드는 자들이 있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이신칭의를 전혀 설교하지 않는 설교자들이 많이 있다.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윤리와 도덕을 설교할 뿐이다.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죄 짓다의 바른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고의적으로 고집스런 죄를 의미한다. 죄의 상태에 계속 머물고, 계속 죄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나 가끔 죄 짓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정된 죄의 생활을 의미한다. ‘죄와 함께 동행하는’, ‘죄 가운데 고정되어 있는’, 죄 안에 계속 거하고 있는것을 의미한다. 요일 3장의 죄짓다라는 말의 의미를 잘못 아는 것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실족케 하는 것은 없다.

 

법 아래”. 율법을 지키느냐 한지키느냐에 우리 구원이 달려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그는 법 아래 있다. 그는 자기의 공로로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우리 구원이 우리 행위와 공로로 결정된다는 입장에 우리가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에 속한 것이요, 은혜에 의한 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런 추측 자체가 전혀 생각조차 할 값어치가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사도가 쓰고 있는 단어는 종이 아니라 노예이다. 그는 사실상 사람의 죄의 노예든지 은혜의 노예든지 하라고 말하고 있다. 6장의 전체 논증은 은혜의 왕노릇은혜의 권세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노예주, 또한 노예 주인의 의하여 행사되는 것 같은 권세이다. 죄는 그러한 권세를 행사한다. 은혜도 그러하다.

 

 

혹시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죄에 대칭하여 순종이란 말을 놓고 있다. 아주 의도적이다. 그 목적은 한 순간이라도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메시지에 사람이 죄의 삶을 영위케 하는 것이 있다고 추측하는 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기이하고 기괴한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 우리가 무법하다거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법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 법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 것이라고 저는 답변한다. 오히려 그것은 순종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율법 없는 자가 결코 아니지만, 옛 의미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무율법주의자라는 의미도, 전혀 율법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언제나 이런저런 율법 아래 있다. 이 모든 것은 순종이라는 말로 추측할 수 있다. 이 순종이라는 말은 사도가 16절에서 죄의 반대로 사용한 말이다.

 

 

흥미로운 요점이 있다. 사망의 반대는 생명인데 사도는 를 말하고 있다. 의도적인 것이다. ‘대신 생명을 썼더라면 그는 자신의 가르침과 충돌되었을 것이다. 순종이 생명에 이른다고 말한다면,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6장 마지막 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라고 한다. 영생은 순종의 결과가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순종이 의에 이르고, 순종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영위케 하였던 의의 생활로 인도한다고 말한 것은 아주 옳다.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순종은 바로 그 의로 인도한다.

 

 

16절은 논증인데 몇가지 전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우리 자신들을 어떤 권세에 드린다면 그 세력의 노예가 된다. 내 자신을 어떤 권세에 판다면 나는 그 권세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내가 속하게 되는 권세는 자기의 노예를 향하여 주는 소유주의 권세이다. 전체적이고 독재적인 권세이다. 그 권세는 내가 행할 바어내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결정한다. 둘째, 두 궁극적인 전제주의적 세력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죄요, 하나는 순종이다. 이것이 사도의 대주제이다. 그는 5:12부터 그것을 시작했다. “두 지위만 있을 뿐이다. 아담 안에 있든지 그리스도도 안에 있든지 뿐이다”. 5:21에서 죄의 왕노릇 아래 있어 사망에 이르든지, 은혜의 왕노릇에 속하여 의에 이르러 영생에 이르든지 둘 중 하나이다.” 중간지대란 없다. 모든 인류는 죄의 노예든지 순종의 노예든지이다. 셋째, 죄와 순종, 이 두 세력은 전적으로 다르고 서로 철저하게 반대되어 있다. 이것이 논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둘 다 노예 소유주요 상전이다. 죄와 순종의 차이는 마귀와 하나님의 차이이다. 지옥과 천국의 차이이다. 이 편은 무법천지와 모반이요, 저편은 하나님의 의와 진리이다. 본질상 그들은 영원토록 반대이다. 죄의 결과는 사망을 산출하고 순종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인 의를 산출한다. 넷째, 둘의 노예가 동시에 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은혜의 노예이면서 동시에 죄의 노예일 수 없다. 그들은 서로 충돌하고, 서로 배제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에게 속한 노예가 될 수 없다”(6:24). 다섯째, 결국 우리가 행하는 바에 따라 우리의 주인이 누구이며, 우리의 지위가 무엇인가를 선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바로 인하여 이다! 그의 생황방식이 죄의 왕노릇 아래 있는지, 은혜의 왕노릇 있는지를 보여준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7:15). 그들의 열매로 알아 보아야 한다. 선과 악은 섞이지 못하고 섞을 수 없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1-32).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듭나고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 안에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본성은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것은 순종과 의와 거룩한 삶에서 스스로를 보여준다. 그것은 죄를 계속 짓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하거니와”(요한121:6).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2:4). 그것이 신약성경에서 성결과 성화를 가르치는 방식이다. 진료소에서 편안히 쉼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죄의 노예든지, 순종의 노예든지이다. 너희 신앙고백이 어떠할지라도, 너희의 이해와 지식이 어떠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의의 열매를 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웃음거리요, 거짓말이요, 전혀 무가치한 것이다.” 거짓된 도전을 해오는 자를 변박하고 물리치는 방식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는 그가 살아가고 행동하는 방식에 의하여 그가 누구의 노예인지를 선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이것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거듭난 사람은 그 안에 나쁜 열매가 아닌 좋을 열매를 내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은혜의 노예요, 순종의 노예요, 하나님의 노예라면, 그것을 저절로 나타날 것이며, 반드시 순종하는 행위와 거룩한 행동에서 스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왜냐하면 은혜가 우리를 주관하고, 은혜가 자기의 목적을 이룰 것이며, 무엇보다 순종과 의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16장 믿음과 순종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5)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성경 가운데 크게 뛰어나고 가장 중요하고 중추와 같은 구절. 15절의 질문에 16절의 보편적 원리로 답하고 그것을 17절에서 적용하고 있다. 우리를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어 하는 두 세력이 있다. 누구든지 동시에 이 두 세력 모두 아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다(16).

 

 

17절은 성경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보여준다. 세 원리로 나누어 강해한다.

 

 

1) 그리스도인은 큰 변화를 이룩한 사람이다. ‘너희전에는 그런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아니하다. 너희는 이제 전적으로 다른 입장에 있다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한다. 5:12-21에서 바울은 우리가 아담의 자녀로 태어났으며 아담의 본성을 물려 받은 것을 입증하였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본성으로 그러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는 어떤 큰 변화를 가져와야 할 필요가 있다.

 

 

신약은 너희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삶의 개선이나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고 한다. 중생, 새로 지음받은 것이 진수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창조물)이라”. 이것은 구원에 관한 신약의 전형적이고 특이한 용어이다. 특히 강조해야 할 것은 이 변화의 크기이다. 우리는 반드시 일어난 변화의 위대함에 대한 어떤 합당한 변화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인격 전체에 영향을 주는 변화이다. ‘너희가 순종하였다’-의지가 있다. ‘마음으로부터’-정서가 있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이지가 있다. 기독교가 이단이나 거짓 종교와 운동과의 차이이다. 이지와 지성에만 흥미를 느끼는 철학자들이 있다. 감정과 정서의 영역에만 감동시키는 운동들이 있다. 의지에만 직접 호소하는 윤리적인 교훈과 운동들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딤전1:11)은 어찌나 크고 위대하든지 그것은 전인을 수반하고, 전체 인격을 다룬다. 우리의 마음과 이지와 의지가 감동되지 않았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2) 이 변화가 너무 커서 소유권의 완전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소유권의 완전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본질상 죄의 노예였다. ‘죄의 종이더니’.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다’(시편) ‘사탄의 지배 아래 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하였다. 자연인이 자유를 운운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애석한 것이 없다.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죄의 노예로 태어났다. 노예라는 증거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아들과 영광스런 복음을 믿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노예 주인이 그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우리는 모든 이들과 같이 진노의 자식들이다. 전적인 죄의 노예요, 마귀의 노예요, 어두운 나라의 노예이다. 물론 노예 중에 난폭한 죄를 짓지 않는 훌륭하고 의젓한 노예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해야 할 일에 얽매여 있다. 관습의 노예요, 사회의 노예이다. 마귀는 우리가 노예인 이상 외모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다른 쪽이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전에는 그러하였으나 이제 더 이상 결코 그렇지 않다.

 

너희가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노예이다.”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었다는 것.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사람은 언제나 노예이다. 그는 죄의 노예로 태어났고, 두 번째 출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사람은 죄와 사단의 노예이거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거나 둘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 신자는 전에 옛 어둠과 죽음의 나라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빛의 나라의 법과 권세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는 마귀에게 속하여 있었으나 이제는 의와 순종과 하나님 편에 속한 모든 것의 종이 된 것이다. 이 점이 분명한가? 가장 큰 변화이다.

 

 

이 큰 변화가 어떻게 오는가? 하나의 즉각적인 매개체는 교훈의 본이라고 사도는 말한다. 교훈의 본이란 교리의 형태’, ‘교리의 양식이라고 변역할 수 있다. 이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에 고통이 오고 부흥이 지체되는 것이다. 교훈의 본의 본질, 내용이 무엇인가? 단순히 죄사함의 메시지 만은 아니다.

 

복음전도의 메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1:16-18)“(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냐하면)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복음 전도에서 죄문제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지 않아야 한다. 그 다음에 구원을 성취하려고 하는 인간의 사력을 다하는 노력인 전적으로 소용없음을 말해야 한다. 바울은 1,2장과 3장에서 이 일을 한다. 그 다음에 이 완전한 절망과 소망없음과 낙담 가운데서 피할 길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그것이 메시지요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이다. 그것이 그 큰 변화를 가져온 즉각적인 매개체이다.

 

 

누가 그것을 사용하는가? 하나님의 성령은 이 말씀, 메시지, 이 교훈의 본을 가지사 우리를 그 속에 넣으시고, 그 교훈의 본이 우리에게 역사한다. 부분은 우리를 짓되 그 모양 그대로 지었다. 성경과 복음의 말씀은 즉각적인 매개체요, 사용된 기구이다.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의 최종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과 확실성은 내가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며, 그가 나를 옛 죄의 틀에서 건져 내어 이 새 틀에 넣었다는 바로 이것이다. 새 틀은 그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내가 완전해지기까지 그 속에 나를 넣어두셨다.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여 우리를 짓기 시작하면, 그는 중도에서 그만 두고 떠나시지 않는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 확신함이라”(1:6). 나는 결국 점이나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그런 것이 없을 때에야그 틀에서 나올 것이다. 나는 완전해지고, 거룩해질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닮게 될 것이다.

 

 

3)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의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교훈의 본을 믿었다가 아니고 순종하였다고 말한다. 교훈을 지적으로 믿기만 하는 것은 생명에 아무런 것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아직도 죄의 노예들이요, 전적으로 육신적인 사람들이면서 성경읽기를 즐기고, 다른 이들의 말잇기 퍼즐하는 것처럼 교리를 가지고 희롱하는 자들이 있다. 칭의와 성화를 따로 떼어 놓는 것처럼 비성경적이고 적적으로 악한 것이 없다.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보편화된 가르침이다. 성화도 칭의처럼 믿음으로 받으라고 한다. 그것은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다. 사람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그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에 순종하는 것이다. 믿음은 마음으로부터의 순종이다. 필연적으로 어떤 변화된 삶으로 인도하지 않는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최고 목표는 단순히 우리를 용서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니무엇을 위하여?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2:10).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은--”무엇을 위해?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2:14).

 

 

믿어 순종케 하려고”(16:26).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1:22).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순종이다. 순종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 믿음은 어느 것이든지 쓸모없는 것이다. 마음으로 순종한다. 순종은 더디거나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 그 요구에 있어서 너무 엄중하다고 느끼는 것은 불쌍한 일이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 깊은 변화를 겪은 사람이다. 그는 교훈(교리)속에 있다.

 

 

그것이 무엇을 가르치는가? 회개할 것과, 죄를 떠나 임박한 진노를 피할 것’,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순종할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원한 노예요, 행복한 노예이다. 따라서 그의 최상의 욕망은 하나님과, 우리 죄 때문에 세상에 오셨던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찬양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죄의 노예들이었던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출되어 이 신성한 틀, 교훈의 본에 넣어졌고, 그 결과 우리는 그의 모든 지시를 마음으로 순종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다.

 

17장 새생명의 원리

 

 

(6:16-18)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6,17절에서 자기의 논증을 매듭 짓고 18절은 그리스도인의 지위를 요약한 것이다. 18절이 진리이니까, 19절의 호소를 할 수 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18절은 권면이 아니다. 스스로 죄에게서 벗어나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죄에서 자유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지위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이다. 두 번째 체험에까지 나아간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진리인 것이 아니다.

 

 

죄에게서 해방되어를 문자 그대로 우리 속에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죄가 남아 있지 않다거나, 우리는 완전히 죄와 관계를 끊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죄된 본성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옛 사람과 죄의 본성 사이의 구분을 기억하라. 우리는 옛 사람과 영원무궁토록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그것은 죄의 본성에 관해서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12절에서 상고한 바와 같이 죄의 본성은 아직도 우리의 죽음 몸에남아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시험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하고 있지 않으며, 결코 죄된 몸’, ‘죽을 몸에 남아 있는 죄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다시는 고통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 우리는 의의 노예이고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에서 벗어났고, 구원받았으며, 더 이상 종의 지위에 있지 않다.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어떤 사람도 죄의 노예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이 복음을 믿는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가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분명히 위대하고 중대한 진술이다. 그것은 6장 전체의 논지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권능과 왕노릇하는 세력으로서의 죄의 노예가 아니다. 그는 더 큰 세력에 의해서 그로부터 해방되었다. 적극적인 국면은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 잘된 번역은 너희가 의에게 노예로 인치게 되었느니라이다. 여기서 의란 단순히 도덕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준 원래의 의, 가장 고도의 도덕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옳음, 성결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우리의 지위는 우리가 의에게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의 권세와 통치와 의의 영향 아래로 왔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우리가 중생하는 순간부터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켜 놓는 것은 얼마나 철저하게 비성경적이고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 죄의 노예인 것을 멈추는 순간부터 우리는 의의 노예인 것이다. 중간지대는 없다. 한쪽에서 벗어나는 순간 다른 쪽에 있는 것이다. 다시 난다는 것은 새생명의 윈리가 우리 안에 놓여진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의의 원리이다.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시 우리 속에서 일하기 시작한 원리요, 그것은 신적인 권능과 함께 일한다. (2:12-13)“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5: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4:5)“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생명의 씨앗을 넣으시는데 그것은 의의 씨앗이다. 그것이 우리 속에서 일하고 있으며, 성령께서 그 일을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점없고 흠없게 되기까지 그 과정은 계속되어 나갈 것이다.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 일을 행하신다.

 

 

어느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종하지 않는다면 징계와 벌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어려움에 처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하여 황폐하여질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신적 사역의 전부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완전케 하며 거룩하게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진리를 통하여 못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하실 것이다. 우리는 의의 노예 신분 아래 있으며 그래서 그가 그것을 시행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지위이다. 우리는 틀 속에 넣어지게 된 것이다. 은혜가 우리를 꽉 붙잡았으며 우리를 죄의 사슬과 죄의 왕노릇에서 건져냈으며, 그리고 그리스도께로 영광스럽게 포로로 잡히게 했다. 그것은 의에 대하여 노예가 되게 하였다. 그것은 은혜의 권능이요,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은혜의 왕노릇이다. 우리는 그 은혜의 위엄과 견고한 팔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구속은 도덕에 대하여 필수적이다. 사람은 본성으로 죄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엄청난 죄의 힘에 의하여 조정받는 강력한 충동을 가진 피조물이다. 그는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며 죄의 왕노릇 아래 있다. 지적 휴메니스들은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믿는 것보다는 훨씬 부도덕하다. 완전히 자기중심적이다. 죄는 나면서부터 본성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가공할 능력이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어둠을 사랑하며 그의 마음의 깊은 곳에서부터 빛을 싫어한다. 본성적으로 완전히 소망이 없다. 선한 충고나 교육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기를 구원할 어떤 이, 구원을 필요로 한다. 그의 근본적인 필요는 선한 것을 행할 힘이다.

 

 

역사적 증거가 있다. 구속 교리의 진리를 가장 깊이 깨닫던 시대가 영국이 아는 가장 위대한 시대였다. 가장 최선의 법과 질서와 도덕에 대한 최고 관심을 보이고 선한 행실과 행동을 가장 많이 나타냈던 때가 개신교 개혁이 있은 바로 다음 세대인 엘리자베스 시대였다. 또한 청교도 시대에 도덕에 대하여 그처럼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구속교리를 믿고 그 교리들에 지배되고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을 프랑스 혁명과 같은 혁명에서 구한 것은 구속의 교리들을 믿었던 웨슬리의 복음적 대각성이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개인들의 증거도 있다. 죄의 노예였으며 전적으로 어리석고 야비하고 부도덕한 자들이 새 삶을 영위하였다는 역사의 큰 증거들이 있다. 그들이 믿었던 구속의 교리가 그들의 삶에 큰 능력으로 임한 것이다.

 

 

지적으로 학문적으로 선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현명한 신사들이 완전히 실패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절망적인 실패자를 구원할 유일한 힘은 구속의 힘뿐이다. 하나님만이 그를 도울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문제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데 있다. 신약성경의 교리들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자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말하는 교리들이다. - 성육신의 교리, 구속의 교리, 대신 속죄의 교리. 새생명과 새 본성과 새 탄생과 새 출발을 주신 것을 가르치는 중생과 회심의 교리.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을 우리 속에 살게 하시고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힘을 주신다는 교리로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구원받고 자기 발고 서게 되는 방식이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오직 이들 기독교 교리들로 말미암아 알 뿐이다. 이것을 떠나서는 구원도 없고 도덕성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율법으로도 죄를 깨달을 수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것이 들어왔고 이 구속, 이 하나님의 은혜, 이 의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값없는 은혜로 임하였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왜냐하면 우리안에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그것이 우리 안에서 도덕과 성결을 향한 욕망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구속이 도덕에 대하여 반기를 든다고 하지만, 신약성경은 구속이 사람 속에 의를 향한 주림과 목마름을 창조해낸다고 말한다. 신약은 구속이 도덕과 성결에 대하여 사모하는 마음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삶의 최고 동기, 소위 사랑과 감사의 심정을 산출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행하셨음을 깨닫는다. 또한 은혜에 보답하려고 한다. 도덕과 성결에 대한 가장 위대한 자극은 우리를 위하여 죽었고 우리 대신 자신을 내어 주신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욕망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구속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힘을 공급한다. 모든 성도들이 증거하고, 모든 순교자들의 죽음이 완전하게 증거한다. 아이삭 왓츠, “, 놀랍고 신기한 사랑에 내 혼과 생명, 내 모든 것을 다 드리네”. 이것은 강제가 아니다. 즐거운 자유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다. 그것은 고역이 아니다. 그를 섬기는 것은 완전한 자유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주를 기뻐한다는 것은 구속의 교리를 이해하고 그것의 능력을 체험하며 사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18장 영적 분별력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일상 생활에서 취한 친숙한 예화를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첫째, 주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유추나 예화들은 결코 즐기기 위해서나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영광받기 위하여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예화 노트를 들고 기록하는 사람들은 밑바닥이 들어나는 것이다.

 

 

예화 사용의 두 번째 이유는,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피하고 막기 위해서이다. 그들이 진리를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를까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하니까 의에 대해서 절대로 자유롭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아니, 그렇지 않다. 지금은 너희가 의에게 노예가 되었으며 의의 노예로 잡혔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 이상 법 아래 있지 아니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어떤 사람도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지 않기를 너무나 바란 나머지 그리스도인은 죄의 노예가 아니면 동시에 의에게 노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화를 사용하는 세 번째 이유는, 예화와 유추의 사용하는 것은 위와 같이 도움을 주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예화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왜곡할 우려도 있다. 기독교 생활에는 일종의 노예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옛 노예성과는 다르다. 거기에는 유사성이 있으나 여전히 차이점이 있다 죄 아래서의 노예성은 강하게 무장된 사람에 의해 행사된 지배를 동반한다. 마귀와 악의 주권과 지배와 통치와 왕노릇 아래 있는 것이 죄인의 진상이다. 그것은 가장 악한 전제주의 독재 형태이다. 거기에는 전혀 자유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노예가 된 이 노예제도는 다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추와 예화가 충분히 만족한 것을 전달해 주지 못한다.

 

 

우리와 의와의 관계에는 독특하고 놀라운 성질이 있다. 동시에 그것은 노예제도와 자유의 요소를 병합한다. 이 관계에도 노예제도의 강제가 있기는 하나 이전의 노예제도의 강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의 노예이다. 사랑의 요소가 들어오고 그것은 모든 상황을 변화시킨다. 사랑 안에 있는 자는 물론 노예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산다. 그의 사랑의 대상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다. 자원한 노예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 그것은 더 이상 가공할 폭군이 아니라, 사랑이요, 사랑의 폭군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신앙의 역설이요, 전체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대한 역설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폭군 아래 있는 사람이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사랑의 관계 안에 있다.

 

 

사도는 여기에서 이 역설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순종의 필연성은 두 경우에서 다 보장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의의 권능 아래 있다. 전에는 죄의 권능 아래 있었다. 그는 이제 의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다. 율법 아래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는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라고 결코 말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는 지금 강권적이고 강제적인 의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이다.

 

 

예화와 유추를 사용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너희 육신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너희 이지와 지력이 약하므로 사람의 예대로 말한다고 말하지 않음에 주목하기 바란다. 육신은 죄에 의해서 영향받고 부패되고 통제받는 사람의 모든 기능을 의미한다. 그것은 육체적인 몸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의 도움이 없는 본성적인 인간의 기능을 의미한다. 성경의 교훈에 의하면 사람이 본성으로 당하는 고통은 그가 지력이 모자라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의 문제는 그의 이지 하나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진리를 이해하고 믿고 따를 능력과 가능성의 결핍에 있다. 타락의 가장 파괴적인 결과는 영적 이해력을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이 점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2, 3장에서 잘 논술하였다. 사람들이 큰 천성적인 능력을 가지고 큰 지능과 큰 이지와 좋은 두뇌와 큰 지식과 큰 이해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독교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사도는 역설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사람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자기의 무식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결코

 

두뇌가 놓은 것이나 나쁜 것을 추켜 세우지 않아야 하며, 지식이 있거나 없거나를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영적 분별의 문제들은 성령에 의해서 소개될 수 있는 영역에 속해 있으며, 그 영역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의 결과로 안내를 받아야만 한다. 그것은 영적인 영역이다.

 

 

사도는 진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난제란 육신의 연약함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지가 아니다.

 

그것은 타락한 본성이다. 영적 이해력을 상실케 한 것은 이 타락한 본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이 예화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떠나서는 영적 진리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조명을 받은 뒤에는 이해력의 정도에 있어서 여러 종류의 다양성이 있다. 제가 의도하는 바는 성령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기능이 우리에 의해서 개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전3:1)“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고전2:6)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여러 단계로 차이가 나게 하는 것은 그들이 성령에 의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이 권능과 기능을 사용하는 데 성공하고 실패하는 정도에 따른 것이다.

 

 

히브리서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확증시켜 준다. 5장에서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우리 구주에 관한 교리를 좀더 말해주지 못한다고 한다. 계속해서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도다고 말한다. 그들이 선악을 분별할 능력을 행하지않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들은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기를 좋아하고, 그 결과 히브리서 기자는 꼭 전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더 깊은 교훈과 더 높은 교리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고 있다. “나는 구원을 받았으니 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다 잘 되었다. 나는 그 밖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신학자가 아니다. 나는 신학에 관한 위대한 책들을 읽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식으로 어린아이로 남아 있을 권리가 없다. 또한 그의 영적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권리도 가지고 있지 못한다. 여러분은 또 그러나 나는 실천적인 사람이야. 나는 위대한 일꾼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그런 식으로 구분시키는 권리가 없다. 은혜 안에서와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욕망이어야 한다. 성경을 연구할 때 읽을 수 있는 책중 가능한 한 가장 좋은 책을 읽으라. 그리고 될 수 있는대로 깊고 심오한 지식을 얻으라. 나아가 여러분의 지각을 행사하라. 왜냐하면 영감된 저자들에 의하면, 그렇게 하지 않고서 전체 진리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여러분이 어린아이로 남아있고, 자라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하면, 젖으로, 수저로 떠먹이기를 계속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 교리의 단단한 고기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복되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받는 자는 더욱 풍성하여질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여러분 이 교리를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더 얻게 될 것이고, 얻게 되면 얻게 될수록 더욱 이해하고 계속해서 그렇게 나아갈 것이다.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기 전에 강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은 자라고 발전하고, 우리의 영적 지각을 행사하는 것이다. 언제나 시작부터 끝까지 자라지 않고, 발전하지 않고 내내 동일한 채로 남아있는 그리스도인을 관찰하는 것처럼 큰 비극이 없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될 것이라”.

 

 

질문한다. 우리는 어떤 유의 식물을 먹고 있는가? 아직도 젖을 먹을 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고기에 맛을 붙이지 시작하셨는가? 아니면 이지가 성령의 조명 아래서 확장되고,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기뻐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상숭배와 싸워야 한다.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기능을 행사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기꺼워하는 마음을 가졌고 진정한 욕망을 가졌다면, 성령께서 언제나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여러분은 은혜 속에 자라날 뿐 아니라 주를 아는 지식에도 자라날 것이다.

 

19장 하나님의 합당한 요구들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이 권면은 논리적으로 18절의 교리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지체는 우리 자신이다. 몸의 행동적인 부분은 물론 이지와 상상과 마음과 느낌과 감수성을 내포한다. 중요한 요점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새로운 지체나 기능들을 받지 않는다. 사람이 회심 전에 가진 재능과 힘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여전히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는 같아질 수가 없다. 우리의 지체, 우리의 능력과 성질과 기능을 가지고 이제 그것들을 새로운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이단들은 개성들을 묵살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다. 제자들의 성격들이 다양한 것을 보라. 사람의 진수가 되는 개성은 회심에 의하여 바뀌지 않는다. ‘같이(as)’-‘또한(so)’이다. 기독교가 만드는 차이란, 그의 능력과 기능과 성질들을 전보다 더 좋고 더 부지런한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데 있다. 어떤 한 가지로 획일되려고 해서는 안된다. 같은 두 꽃이 없고 같은 두 동물이 없다. 우리는 결코 같아지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같은 결과를 내는 것은 기계이다. 우리는 물론 우리의 개성이 제멋대로 굴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의 개성을 십자가에 못박아서는 안된다. 바울은 열심 있는 박해자였고, 이제 열심 있는 전도자가 되었다. 이 기계화된 세상에서 콩깍지 속의 콩처럼 만들려고 하는 시도에 대해서 저항할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증명이요,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이것은 이 성결과 거룩의 교리를 다루는 신약적인 방식의 특징이다. 성결과 성화에 있어서 로마서 6장처럼 오해되는 것이 없다. 이 특별한 본문에서 우리는 원리들을 뽑아낼 수 있다.

 

 

1원리. 이것은 하나의 권면이고 명령이라는 것이다. 전에 너희가 드렸던 것처럼 지금도 드리라고 한다.

 

2원리. 명령이기 때문에 분명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굴복시키기만 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게만 안주하며 승리가 주어지는 신기한 방법을 붙잡으려고 모든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옛 생명에서 너희는 너희 지체들을 사용함으로 능동적으로 죄를 지었다. 그와 같이 새생명에서도 능동적이 되어라. 저절로 행해지도록 기다리지 말고, 너희의 지체와 기능과 너희의 수단을 사용하여 이런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3원리. 앞으로 일어날 일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것을 기초한 권면이요 명령이라는 것이다. 18절은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하였다. 이제 그것은 일어난 일이다. 그 권면과 명령이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체험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우리가 이미 중대한 체험을 하였다고 말하며, ‘그러므로--’라고 말한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의의 왕노릇이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으며, 의의 권능과 힘이 이미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다른 체험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 물론 당신은 실패하고 있고 승리할 리가 없어요. 왜 그렇지요? 당신이 그것을 스스로 하려고 노력해 왔고 진력했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당신에게 가능한 또 다른 체험, 두 번째 회심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요. 당신은 그 모든 고투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모든 노력과 애씀에서 해방될 또 다른 체험을 가질 수 있어요. 그리하여 더 이상 실패의 삶을 살아가지 않을 것이고 승리의 생활을 시작할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의 결정적인 체험을 하였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 안에있게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체험이다. 여러분은 그 체험을 가진 것이다. 그것을 가졌기 때문에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르게 할 또 하나의 체험에 관하여 일언반구도, 가장 조그마한 암시도 없다. 사실 그것과 정반대이다. 이미 체험을 가졌으니 이제 그것을 의지하여 행동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신약을 관통하는 교훈이다. (2:12-13)“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이 우리로 행하게 하신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 주셨으니”(벧후1). “주신 바 되었다고 말하지, 어떤 다른 체험을 말하고 있지 않다. (벧후1:10)“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4원리. 신약의 성화 방식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지위와 위치를 깨닫게 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너희다워라는 것이다.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으므로, ‘너희다워라는 것이다. 신약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이제 남은 것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라는 교훈을 발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6:1-10의 논증이 그것이다. 무언가 더 필요하고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는 말은 이곳 어디를 살펴보아도 암시조차 없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요, 그것이 이미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이 명령, 이 권면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5원리. 이 요구가 전적으로 이치에 맞는 일이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옛날 자신을 옛생명에 드렸지만, 이제 자신을 새생명에 드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앞에 놓인 마땅한 이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치적으로 생각해보고 그에 맞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2:4). 여러분은 옛 것에 반응하였었는데 이제는 새로운 것에 맞추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노예로 순종하는 것은 우리가 전에 죄에 대하여 순종하였던 것보다 훨씬 더 커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였던 것같이 --또한(as--even so)이다. 그렇다. 그러나 그리스도 때문에 훨씬 더 커야 한다! 새로운 상전과 그 상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 때문에 더 커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일깨워 흔들어 행동하라는 호소이다. 휴식하라는 호소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 영적으로 매우 나약한 사내 같음때문에 거의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데 큰 곤란에 빠져있다고 저는 거듭 확신한다. 어떤 교훈들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신약의 어느곳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군인 막사의 분위기 속에서 전력으로 싸우고 남자답게 담대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시간을, “같이 --또한하여야 한다. 옛날 죄에게 드렸던 것같이 의에게 거룩함에 드려야 할 것이다.

 

정력을. 종일 일하고 밤새 춤추고 아침에 출근하였듯, 밤예배, 말씀 공부에 헌신하여야 할 것이다.

 

열심과 참을성에서. 옛 죄의 생활에서 바친 열심과 인내에 비하여, 성경을 공부하고 경건서적을 읽는데 열심과 인내를 드리고 있는가. 물질에서도. 사도의 의도는 지체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기능, 능력 잠재력 가진 모든 것- ‘--과 같이--또한이라는 논리애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거룩에 대한 신약의 방식이다. 그것은 우리의 이지와 의지 또한 우리의 남성다움에 호소한다. 우리는 이것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철없는 자들이다. 감상적이거나 유악한 면이나 심리적인 지름길이 전혀 없다.

 

 

6원리. 성결생활과 관련하여 어려움을 겪고 실패를 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진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진상을 깨닫기 위해서는 진리를 아는 길밖에 없다. “저희를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 영적 세계에 독특한 치료법은 없다. 있다고 하는 것들은 다 가짜 치료법이다. 여러분 자신을 끌어내어서 ‘--과 같이 --또한을 실천해야 한다. 나의 지체들을 사용해야 한다.

 

영적 세계에는 건강을 위한 지름길이 없다. 가장 중요하고 첫째되는 일은 우리 자신에 관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옛날에는 어떤 자였으며, 이제는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렸다. 이것이 모든 신자들의 옛 상태였다. 부정은 죄의 더러움이다. 율법을 어기게 하는 것은 속에 있는 부정함이다. 부정은 불법과 무법을 불러온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상태에 있지 않다. 아직도 노예지만 너희 지체를 의에게 드리는 노예이다. 깨끗함과 순전함과 정직함과 선함과 의로움에 대하여 노예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생명은 본질적으로 바르고, 곧고, 명예롭고, 진실하다. 그것은 꼬이거나 부패하지 않다. 의이다! 그것을 실천해간다면 그것은 거룩함을 불러온다. 의와 성결 사이의 차이는 의는 주로 우리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고, 거룩은 주로 우리의 상태와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그 안에서 순전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속에서, 생활 속에서 순전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헌신적이고,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에 대하여 더욱더 일치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과 이지를 조정하여 우리가 믿는다고 부장하는 바를 실천하였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며, 거룩함에서 자라게 된다. 우리는 하늘나라 왕의 자녀이다.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하고 그에 따라서 우리를 부르신 것과 주의 이름을 자랑할 때, 우리는 의로운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거룩으로 진전되어 나아갈 것이다.

 

신약은 어디서나 성화에 대하여 이 원리들을 가르친다. 나를 위하여 보혈이 흘려졌다- ‘그러므로내 모든 것과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옛 악한 방향으로 쓰여졌던 것같이, 이제 일어나서 이 거룩한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여러분은 그러나 내가 어디서 그것을 행할 힘을 얻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미 모든 것을 받았다. 여러분에게는 또 다른 체험이 필요치 않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받았으며,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안에있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책임회피자요, 철없는 아이요,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이요, 진실로 거짓말쟁이이다. 그것이 성결과 성화에 관한 신약의 강론 방식이다.

 

20장 거룩한 삶을 위한 논증들

 

 

(6:20-21) (20)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성결과 성화는 언제나 하나의 논증 결과요, 추론의 결과, 논리 과정의 결과이다. 그것이 기독교 교리를 나타내는 신약의 방식이다. 여기서 사도는 거룩하고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할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다. 사도는 언제나 명령과 교리를 병행시킨다. 좋은 예는 에베소서 4장이다. 신약성경에서 교리와 직접 연합되지 않는 성결 교훈은 없다. 그것은 교리로부터 연역해 나오는 것이다. 20, 21절은 19절의 권면과 명령을 뒷받침해주는 이유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 권면은 18절의 진술에서 직접적이고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20, 21절애서 불신자, 즉 죄의 생활의 진상을 보게 된다. 20절은 비그리스도인의 상태와 조건을 말해준다. 그들은 죄의 노예와 종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누구든지 죄의 노예라는 진리를 결코 잊지 말라.

 

사도는 5장 끝에서부터 그것을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죄는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다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의 비극의 핵심이다. 노예는 흔히 자기들이 노예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이 죄의 상태에 있는 가장 큰 비극이다. 그들은 죄의 노예일 뿐 아니라 의에 대하여 자유한 자들이다. 매우 충격적인 구절이다. 매우 쉽게 오해될 수도 있는 말씀이다. 그것은 모든 율법과 제재와 금지조항에 절대적으로 자유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율법 아래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전적으로 악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16절의 기본적인 논리에 의하면 우리는 죄의 노예이든지, 의의 노예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22절을 보면 의미가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이것은 분명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 의에게는 종이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는 말은 죄의 지배와 통제와 조정과 다스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불신자에게 다 해당된다. 그가 얼마나 존경과 도덕적으로 추앙을 받든지 관계가 없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 모두에 관한 보편적인 진술이다. 사도의 역설은 도덕성과 단순히 윤리적 종교를 가진 측면과, 기독교를 구분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현대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구별 중 하나이다. 기독교 진리의 가장 큰 원수는 그리스도인은 아니면서 소위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나는 기독교 윤리는 믿지만 교리에는 관심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가 십자가에 못박임을 믿지 않는 자, 속죄의 절대성을 믿지 않는 자는 전혀 불신자요, 가장 위험한 사람이다. 주님께서 옛 바리새인들에게 경고하셨듯이 호되게 비난받아야만 한다.

 

 

20절은 그 차이를 알게 해준다. 비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의에 대하여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인간적인 의미에서 공의와 의와 공정이라고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들은 성경의 라는 의미와 관계가 없다. 그를 조정하는 것은 자신이고, 그 자신의 생각과 사상과 철학이 그를 조정한다. 그는 궁극적으로 죄와 사단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스도인은 그와 반대로 의의 지배와 조정을 받는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2-3). ‘복종하다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는 말의 반대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며 그것이 지배한다. 자유하다는 말은 그것이 우리 위에 왕노릇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 삶의 주도적인 원리가 아님을 뜻하고 있다.

 

 

불신자이면서 소위 도덕적인 사람의 의는 자신의 선함과 도덕에 불과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 세상의 훌륭한 사람들의 진상이다. 세상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한다. 바울은 훌륭했던 자기의 옛 삶을 향해 말한다. (3:7-8)“(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의 즉음 없이도 지낼 수 있다는 사람들의 정직과 선함과 도덕주의를 묘사하는 바울의 방식은 분토, ‘배설물이요, ‘헛된 쓰레기이다.

 

 

의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종이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선한 도덕적인 사람들은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기의 표준에 의하여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의롭지 못하고 의에 대하여 외인이다. 이 사실을 증명하는 아주 간단한 방식이 있다. 의와 하나님의 의에 관해서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를 정확히 알고 자기의 부족과 자기의 절망적인 궁핍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들의 표준을 따라 사는 이들은 스스로에게 잘 만족하고 주님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같다. 자기의 작은 윤리적 표준이 적당하다고 여기며 기독교 교리가 전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독선이다.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어떤 개념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부족을 예민하게 깨닫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 시작한 사람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5:6). 그 선하다는 사람들의 말과 그들의 고집과 독선을 보라. 그들은 자기 만족을 드러내고 겸손이나 온유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들은 전적으로 의의 영역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의의 영역 밖에 있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 밖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보다 더 소름끼치는 일은 없다.

 

 

21절은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유형을 세 가지로 말해 준다. 첫째, 열매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때에 너희가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전적으로 유익함이 없는 삶이요 무가치한 삶이다. 솔로몬은 모든 것을 다해 보고 결론 짓는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인생의 가치와 열매와 유익을 평가할 시금석은 즐거움과 행복이 될 수 없다. 11장의 등불과 같이 비춰지는 말씀.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그런 낙은 계속되지 못하고, 잠깐이다. 확실한 시금석은 참된 만족이 있는가이다. 우리는 모두 두 부름, 세상과 기독교의 부름에 직면해 있다. 어느 부름이 만족을 줄 수 있느냐, 이지와 마음과 영에 만족을 주느냐이다. 성 어거스틴은 명석한 철학자요, 애써 쾌락과 만족을 찾으면서 부도덕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결론에 도달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이것에서 싫증을 내고 저것을 취한다. 영화관에서 텔레비전으로, 최근의 대유행을 향해 돌진하지만 그것은 오래 전에 사라졌던 것이며, 원을 돈다. 만족의 시금석은 견고한 것이다.

 

인생의 유익과 가치를 결정하는 시금석은 세워주는 어떤 것이 있는가? 실질과 양식과 생명력을 주는가? 인간존재로서 내가 발전하는 데 도움을 주는가? 사실상 내 마음을 채워주고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을 행하도록 하는가? 그것이 나를 성장시키고 고양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밖에서는 삶을 고양시키는 것이 하나도 없다. 시험할 또 하나의 시금석은 내 삶의 방식이 나로 하여금 훗날의 종말을 예비케 도와주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불신자의 삶에 관한 사도의 두 번째 진술은 그것이 수치의 삶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이제는 너희가 밤의 자녀가 아니고 낮의 자녀들이라”. 밥이라느 말 자체가 거기에 속한 수치에 대하여 말한다. 거기에 수반되는 사기와 거짓말과 불행이 있다. 거기에 더 나아가 수치감을 잃기까지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8:12).

 

 

21절 끝맺는 진술, “그 마지막은 사망이라”. 죄는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9).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혼자 버려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일만큼 무섭고 떨리는 일은 없다.

 

 

이상의 논증들이 거룩한 생활을 논할 때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해야 하는 일들이다. 그것이 바로 죄를 억제하는 길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이것을 여러분의 마음 앞에 끊임없이 간직하고 있는가? 죄와 시험에서 건져줄 기가 막힐 어떤 공식과 체험을 찾고 있지는 않는가? 그것은 성경을 부정하고 영감받은 사도의 교훈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는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싸우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여러분은 옛 죄의 삶의 성질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그 옛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런 삶을 산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그것이 죄를 피하는 길이다.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더 거하겠는가? 그 삶이 전혀 무익하고 가치 없고 열매 없는 삶을 의미하는데 어떻게 죄에 계속 거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언제나 사망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알면서 죄에 계속 거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성결과 성화에 관한 사도적인 방식이다. “주님을 바라보고 그 안에 거하라가 아니다. 시험이 올 때 옛 죄의 삶을 바라보고 그것을 분석하고 묻고 대답하라.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내 마음을 끄는 이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불가능하고 생각할 수조차 없어. ‘그럴 수 없느니라나는 내가 살았던 열매 없고, 이제 내게 대단히 부끄러운 삶에 속한 것은 어떤 것이든지 생각할 수조차 없어.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죽음과 영의 생명에 대한 죽음 밖에는 가져오지 않아.”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우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리지 못하게 하고 우리 지체를 의에게 드려 거룩함에 이르게도와주는 것이다.

 

21장 그리스도인의 자유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1. 심오한 변화. 이 위대한 선언, 장엄한 그리스도인의 묘사는, 그리스도인은 심오한 변화를 겪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 말은 기독교의 위대한 말이다. 21절의 그때가 그리스도인에겐 이제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그때지금을 이야기할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완벽한 전환이다. 더 이상 그때가 아니고 이제이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일어난 변화이다. 그의 영광스러운 역사가 이룬 차이이다. 그는 시대를 B.C.A.D.로 나눈 분일 뿐 아니라, ‘그때지금을 구별한 분이시다. 그리스도인은 그러나 이제는을 자랑하도록 되어 있다. 이 말을 냉담하게 말하는 사람은 그것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한 사람이다. 이 말이 우리를 감격시키거나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의 위치를 재검검하는 것이 좋다.

 

 

이 위대한 변화에서 강조할 사항은 1) 변화의 완전성이다. ‘그때이제는 완벽한 대조이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점차적으로 변하는 단계가 없다. 더 이상 예전의 사람이 아니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전에 살아왔던 방식으로 살아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논증의 진수이며 변화의 절대적인 성격이다. 2) 이 큰 변화는 우리에게 이루어진 무엇이며, 우리들에게 일어난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 여러분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받았다. 고로 하나님께 대하여 노예로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의 행동이고 오직 그만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스스로 낳을 수 없다. 우리는 거듭나지는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요,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2. 변화의 본질. ‘죄에게서 해방되어자유케 되었고’. 우리는 이미 자유케 되었고, 우리의 것이 되었다. 어떤 일들을 행하면 자유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네게 자유를 줄 체험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그의 논증의 주요 요지이다. 여러분은 죄로부터 해방된 것이 사실이 아닐진대 그리스인일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있는 자이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와 함께 살아나서 그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죄로부터 자유케 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일어났다. 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의상 이미 죄에서 해방된 자들이다. ‘죄에 대하여 죽고’, ‘죄에게서 해방되고란 말씀은 우리가 더 이상 죄의 통치 아래 있지 않으며 그 영역 안에 더 이상 있지 않으며, 그 폭군 아래 더 이상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물론 죄 없는 완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죄에 대하여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가 우리 죽을 몸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죄는 죽을 몸에 왕노릇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게는 왕노릇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죽을 몸에 죄가 왕노릇하고 통치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히 구원받았다. 그러나 나의 몸은 여전히 비천한 몸이다. 죄있는 몸이다. 그것은 아직도 영화된 몸이 아니다. 장차 영화된 몸이 될 날이 온다.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상전이 아니고 귀찮게 구는 존재이다. 골칫거리일 뿐이다. 비그리스도인 안에 있어서 죄는 정상에 있으며, 그는 그 아래 있다. 그리스도인의 지위는 자기가 정상에 있으며, 죄는 그를 끌어니리려고 애쓰는 아래에 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을 때, 그는 전적으로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으나 길 건너편에서 소리지르는 마귀가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마귀에 저항할 수 있는지위에 있다. 비록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할 수 있고 물리쳐서 그를 사라지게 할 수 있다(벧전5:8,9).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 그러나 악한 자가 저(그리스도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하였다(요일5). 우리를 향해 큰소리를 치며 위협할 수 있고 유혹할 수 있다. 그러나 만지지는 못한다! 우리는 그의 영토 밖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만나며 붙잡을 수 있는 가장 자유를 주는 사상이다. 이것은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진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여러분은 그렇게 해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더 나아가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노예가 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주인에게 속해 있고, 새 영토에 있으며, 새 나라에 있다.

 

옛 영역으로부터 하나님의 노예에로의 완벽한 이주가 이루어졌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여러분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다.” 여러분은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의에게 종이 되었는데 이제 22절의 진술에서 산의 정상에 이르러 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 순종만이 아니라 교훈의 본이나 의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종(노예)”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에 관한 참다운 진리이다.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노예가 되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성결과 성화의 비결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체험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 된 것을 이해하고 우리가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결과 성화에 대한 열쇠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 살 아무 권리가 없으며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지을 권리가 없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우리 상전이시오, 우리 주인이 비난하고 미워하는 것을 행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은 마치 적과 내통하고 있는 군인과 같다. 죄를 짓는 것은 괘씸한 일이다. “사람의 최고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무엇이 가장 크고 첫째되는 계명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22:37,38).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의 것이며, 영원토록 그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킨다”(2:17).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된다. 나는 열심히 소멸되어야 한다. 우리는 동정을 구하고 어떤 갑작스런 구출방법과 치료방법을 열망한다. 사도의 교훈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노예이며, 하나님께 속해 있다.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적게 이야기하고 그분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라. 우리가 할 일은 그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하길 원하는지 아는 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다운, 군대명령과 같은 것이다.

 

 

성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그분은 내가 하는 말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고 하였다. “사람의 모양대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8). 그것이 그가 세상에서 살아간 방식이었다. 성결과 성화의 절대적 완전성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여러분과 저는 그와 같아야 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체험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노예이며 전적으로 그의 임의에 따라 사는 자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 요구가 어떠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그가 행하신 방식대로 부딪쳐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며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순종의 극치이다! 그는 우리가 추종해야 할 분이다. 그것이 모본이요, 모범이다. “하나님의 종이 되었으니라”. 여러분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육체의 연약, 시험의 강력에 대하여 너무 많이 말하지 말라. 여러분이 누구인지 어떠한 자인지를 깨달으라. 여러분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을 깨달으라. 여러분은 자기 몸을 함부로 쓸 권리가 없으며, 잘못 사용할 권리가 없다. 자신을 애처롭게 생각하지 말라.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변케 하는 어떤 신기한 구출방식을 기대하지 말라.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노예인 우리의 신분은 안전하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없느니라”(10:28).

 

 

3. 변화의 결과. “거룩함에 이는 열매를 얻었다는 것이다. 옛 생활과 얼마나 즉각적인 대조인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가 있다. 그 전에는 없었다. 중생의 과정이 없다면 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있기 때문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1,5). 만일 여러분의 삶에 어떤 열매도 없다면 그것은 헛된 것이다. 그것은 다만 말로만의 신앙고백이며, 신앙주의의 형태에 불과하다. 만일 생활에 아무 변화도 없다면 그는 정말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열매를 낸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 “영생에 이르는 열매라고 하지 않고 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다.” 그것은 성결이요 성화이다.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음행과 살인과 술취함과 방탕과 호색과 그 밖의 갈5장에 열거된 것 같은 죄에서 멀리멀리 옮지는 것을 말한다. 거룩에 대한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바쳐지는 것이다. 성전의 거룩한 그릇들을 보라. 그것이 하나님을 섬길 목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졌기 때문이다. 율법이 주어졌던 거룩한 산은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산이며,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산이다. 성결은 느낌이나 체험이 아니고, 하나님께 대하여 바쳐지는 것이며, 그를 섬길 양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새 걸음이요, 새 생활이다. 그것은 의롭고 거룩하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셨던 것과 같이 사는 삶이다.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품성들이 더욱더욱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의 성화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주장은 사도의 가르침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진적이고 진전해 가고 더욱더 그리스도와 닮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때때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가 처음으로 곧바로 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상을 앞에 두고 넘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시 산 기슭으로 내려 가는 것은 아니다. 성화는 진행해 가는 과정이요,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더욱더 그 사랑하시는 아들의 형상에 가까워가는 것이다.

 

22장 궁극적인 결과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장은 기독교 교리와 구원 방식에서 볼 때 로마서의 중추가 되는 장이요 사활을 좌우하는 장이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때, 그리스도 예수를 기뻐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한 해방을 기뻐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도 멍에 아래 있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장은 참된 해방에로의 길을 보여주는 장이다.

 

 

23절은 6장 전체의 논증의 요약이다. 5장 마지막 절 21절의 반복이기도 하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23절은 구원의 복음에 대한 하나의 위대한 진술이다. 사도는 복음 전체를 한 절로 진술하는 것을 즐긴다. 이 진술의 표면에 드러나는 세 가지가 있다.

 

 

1) 이 세상에 온 사람은 누구든지 두 가지 가능성만이 있다는 것이다. 사망이든지 영생이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이든지 반석 위에 지은 집이든지이다. ‘넓은 문으로 가든지 좁은 문으로 가든지 이다. 재물을 섬기든지 하나님을 섬기든지 둘 중 어느 하나이다.

 

 

2) 이 두 가능성들은 완전히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흑 아니면 백이다. 영적 영역에는 희끄무레한 면이 없다. 이 색조에서 저 색조로 점차로 변해가지 않는다. 완전히 다르고, 절대적으로 다른 색깔이다. 그리스도인은 새 생명을 가지고 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3) 두 영역은 본질적으로 각자 내적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각자는 언제나 자기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둘은 각자 냉혹한 법칙에 의하여 아주 필연적인 귀결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길을 출발하였으면 완전히 다른 운명에 도달하게 된다. 20,21,22절에서 다른 차이점들을 강조한 바 있다. 22절 끝에서 마지막을 강조하였다.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절은 그것의 재강조이다. 다른 삶의 종말에 관심을 두고 있다.

 

 

사도의 대조를 세 가지 제목 밑에 분류할 수 있다.

 

1) 우리가 섬기는 상전이다. 노예제도의 유추이다. 죄라는 상전이든지 하나님의 상전이든지 이다. ‘죄의삯’-한 상전, ‘하나님의 은사’- 다른 상전이다. “그러나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죄든지 하나님이든지 이다. 지금 이 순간 세상의 모든 개인은 죄에 대한 노예든지 하나님의 노예든지 둘 중 하나이다. 중간지대란 없다. 영적 세계에서는 누구의 땅도 아닌 지역이 없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누구를 섬기느냐, 누구를 위하여 살고 있느냐, 죄냐 하나님이냐는,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위한 대싸움의 중추신경이다. 사람들은 아주 멋지고 아주 많은 교양을 갖추고 텔레비전에 나와서 말하는 훌륭한 사람들, 선행과 윤리에 대하여 아주 박식하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사도는 그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다할지라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 만일 그가 하나님과 그 영광을 위해서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죄의 노예라는 것이다. (고후11:13-15)“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우리는 선함의 외양만으로 미혹당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들인가를 결정짓는 것은 우리가 섬기는 상전이 누구인가에 따른 것이다.

 

 

2) 두 상전을 섬기는 조건이다. 한쪽은 이요, 다른 한쪽은 은사이다. 율법, , 사망은 언제나 함께 간다. 한편으로는 율법이 냉혹한 법적인 방식으로 결정한 삯과 배급을 가지고 있다. 죄를 짓는 영혼은 죽으리라고 율법은 천명하고 있다. 그것이 주어지고 받은 할당량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은사’, ‘값없는 은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전혀 다르고 완전히 정반대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은혜는 공로에 따라 베풀어지는 은총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것을 받을 만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다. 이것은 시종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원리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죄와 은혜 사이의 큰 대조 중 가장 영광스러운 국면이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것이 전체 구원방식의 진리이다. (3: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 각각 이르게 되는 마지막이 다르다는 것이다. 죄가 이르게 되는 결국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사람이 불순종하는 순간 그는 영적으로 죽은 것(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다. 그것은 육체적인 죽음도 내포한다. 죄의 삯, 죄가 이르게 되는 마지막은 계시록 20장의 둘째 사망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분리이다. 하나님이 없는 자의 궁극적인 운명이다. ‘불못과 유황못에 던져지고 짐승과 마귀 자신도 던져지게 되는 곳이다. 죄의 노예들이 가는 종착역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노예들의 마지막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다’. 영원은 영원토록 다른 이들과 같이 계속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상으로 영생은 특별히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하나님의 존전에서 살아가고, ‘하나님을 보며’, ‘어린 양의 빛 안에서살고, 영원히 완전히 거룩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결국 영화롭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복되신 주님과 같아질 것이다(3:1,2). 사도는 그것이 면류관을 받을것임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딤후4: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여러분과 저는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완전 성화이다. 우리는 점도 티도 주름잡힌 것이나 그런 것들이 없이될 것이다. 우리는 황홀한 정경을 즐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죄가 없을 것이고 탄식함이나 슬픔이나 눈물이나 이별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섞이지 않는 절대적인 영광이요,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 자신의 완전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모든 방면에서의 충만한 삶을 의미한다. , , -전인이 죄의 모든 자취나 흔적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완전히 영화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담까지도 누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영생은 이 세상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영생을 얻는 것이다.

 

 

대조점은 셋이다. 곧 두 상전, 두 섬김의 차원, 우리가 도달할 두 목적지이다. 사도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라는 말을 하지 않고는 말을 끝내지 않는다. 결코 그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이 우리에게 온 길과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던 길을 상기시키는 것을 빠트리지 않는다. 5장 마지막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6:11,“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 생명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서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제공되고 약속된 복된 장래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도, 그 안에서, 그 때문에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의 결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분의 흠없는 순종의 삶, 우리 대신 받은 속죄, 희생, 죽음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죄는 더 이상 권세와 통치와 지배권을 우리에게 행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 그리고 믿는 우리에게 대한 그의 능력이 지극히 크심을 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있으며, 나는 그 안에 있다. 그는 포도나무요, 나는 가지이다. 그는 머리요, 우리는 그 몸의 지체이다. 그분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받는다. 성령은 우리를 성경으로 인도하여 주고, 우리의 이해하는 힘을 열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열으신다. 우리의 거룩함을 이루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그의 역사는 점진적이다. 성화는 계속 되어 나간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2:10)“--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이신칭의의 전체 목적의 마지막은 영생인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긍휼과 그 은혜에 넘치는 부요때문으로 돌려져야 한다.

 

 

우리는 이 은혜가 우리 전체를 사로잡아, 필연적인 결과로,

 

우리 지체를 불의와 죄의 무기나 종으로 드려서는 안 된다. 우리 지체를 드려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토록 하라. 우리의 영화와 영광을 묵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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