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제 2 권
제1장 5~8장의 분석
롬 5:1-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5장은 새로운 대목의 도입/ 로마서 나머지 부분을 이해하는 열쇠.
4장에서 이신칭의의 교리에 대한 위대한 진술을 끝마쳤다.
롬 4:23-25,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5~8장은 특히 6~8장은 오랫동안 많은 논쟁과 오해를 불러일으켜 왔다.
일반론적 분해; 5:1~11/ 이신칭의의 결과, 12절~8장/위대한 성화/ 궁극적 영화와 궁극적 승리.
혼란은, ‘7장에 있는 사람’에 대한 억측과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사람’의 교훈에 의해 야기된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분해. 5장 첫 단락(1-11절)의 진정한 의미를 놓쳐버린 데 그 원인이 있다.
12절부터 나타나는 엄청난 교리에 대해 전혀 대처를 못한다.
사도는 6~7장에서 이 교리에 대한 두 가지의 반대의견들과 난제들을 처리하고 있다. 삽입구적인 말씀.
6장에서는, 첫 번째 반론을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물음으로 거론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원리를 진정으로 이해하면 모든 정성을 다해 스스로 완전해지려고 할 것이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7장에서는 율법의 참된 기능과 목적에 관련하여 제기되는 또 다른 반론을 거론한다.
이러한 두 난제를 처리하고 난 후 8장에서는 5장 말미에서 멈춘 위대한 주제로 다시 돌아간다.
8장의 대요지는 구원의 절대적 확실성과 최종성을 더욱 더 분명한 어조로 말해주는 데 있다.
6~7장에서 다루어지는 성화교리도 다르게 해석하여야 한다.
5~8장의 요지는 이신칭의의 결과 구원의 절대적 성격 즉 구원의 완전성과 구원의 최후 보장성을 보여줌.
12~21절에서도 성화를 먼저 다루지 않고 여전히 같은 구원의 확실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20-21절에서 율법에 관련된 교훈에 대한 반대 의견을 취급한다.
1절과 2절에서 이신칭의가 한꺼번에 세 가지 일을 해냈다고 말해 준다.
하나님과의 화평, 은혜에 들어감(축복의 자리),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함(소망).
1절에서 칭의의 결과를 다룬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저 ‘예수’가 아님에 유의하자.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그분 없이는 아무 것도 없다.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며 처음과 나중되시고
모든 것 안에 모든 것 되시는 분이시다. 그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드리자.
그분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 첫째로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바울은 다른 축복들은 다음의 문제로 미루어 놓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다른 축복들을 처음 자리에 놓고 사람들을 초청한다. 그들은 사람으로부터 출발해서 사람들의 여러 가지 필요, 고민, 문제, 욕구를 먼저 말하고는 그러한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오직 한 분인 ‘예수께 나오라’고 한다.
우리가 최초로 강조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맨 먼저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 그와 화해하기 전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어떤 축복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듣지 않으신다.’ 어떤 축복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늘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신분과 위치이다. ‘여러분의 인생은 안개와 같다.’ 갑자기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도 있다. 축복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바보다. 첫째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다음의 문제이고 그에 의존해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첫째 결과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화평을 누리자’가 아니고 ‘화평을 누린다’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의 화평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권면이 아니고 다만 우리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깨달으라고 명하고 있는 것 뿐이다.
‘하나님과의 평화’의 의미. 세상은 화평에서 떠나 있고 사람들은 불행한 가운데 마음의 평안을 원한다.
하나님과의 평화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화’(빌4:6-7)는 사람이 문제들과 고통과 시련으로 에워싸임을 당했을 때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지기 전에는 ‘하나님이 평화’를 가질 수 없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어떻게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의 객관적인 문제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평화는 주관적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신칭의를 방편으로 하여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화평을 누린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신칭의에 의해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존재하는 장애물이 제거되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관계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5장에서 8장까지 계속되는 이 커다란 대목의 출발점에 있다.
그 주제는 우리 구원과 영화의 절대적 확실성이다.
제2장 하나님과의 화평의 양면성
이신칭의 결과인 ‘하나님과의 화평’은 하나님편과 사람편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화평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두 인격이 관계되기 때문이다. 두 인격간의 관계이다.
화평을 얻으려면 하나님 측과 우리 측에서 어떤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율법 아래 있던 우리 자신의 신분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쏟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1:18).
칭의 즉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에 대해 이루어진 그것을 떠나서는 하나님과 사람간의 화평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코 이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역사를 무시해 버린다. 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고는 그들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완전 부정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이 있으려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한다.
롬 3:24-26,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가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에게 문제는 어떻게 단번에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러면서도 영원토록 변함없이 공의롭고 의로울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분을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시고 그가 짊어진 그 죄에 대해 진노를 부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스럽게 보시며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 자신께 우리를 화해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이 그것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원수이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도 무슨 일인가가 있어야 함은 필연적이다. 죄에 눈 멀고 마귀에 의해 제 정신을 잃은 결과로 우리는 모든 것이 잘 되어 있으려니 생각하고 종종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있다고 믿기도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상상력을 통해 하나의 신을 구상하여, 거기에 우리 자신의 사상을 투영하고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깨닫는 순간 고심하게 되고 하나님에게 원수된 본성이 드러나게 된다.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며 항상 신앙심이 깊고 경건한 자들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들은 자신의 상상에서 우러나온 거짓 화평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참 모습은 하나님과 원수이며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며 하나님의 생명책에 떠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에 대한 ‘고뇌깊은’ 공포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다.
분명하고 명백한 것은 그런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이 있으려면 사람이 먼저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공로의 결과로서만 모든 원수됨의 원인이 처리되어, 하나님이 사람과 화평한 것처럼, 사람도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다. 양편의 이러한 화해가 있어야 ‘하나님과 더불은 화평’이 존재케 된다. 죄와 타락으로 깨졌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가 다시 정립된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는 본문의 의미다.
이제 우리의 신앙고백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에 대해 두려워하는 우리 본래 상태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적의가 사라졌는가?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으니’ 우리는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이미 얻었고 그것을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점에 대해서 필연적으로 분명해야 한다.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8:1)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시금석이 있다. 1) 마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안돈된 상태에 있는가?. 존 번연은 18개월 동안 영혼의 고뇌에 빠져 있었다고 술회한다. 죄를 확실히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고민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화평은 맨 먼저 사람의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된 이 하나님의 길이 정말 모든 절실함을 채워주는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 칭의 교리를 포착하기 까지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화평도 존재하지 않는다. 칭의만이 화평의 유일한 길이다. 마음에 와 닿는 무엇이 있다. 그것은 교리와 교훈이다. 심령은 만족해진다. 마음이 복된 칭의교리를 파악하고 붙잡아 안식하지 못하는 한, 그 자체에 진정한 하나님과의 평화는 없다. 2) 이제 그는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알게 된다. 3) 자기 자신의 양심의 송사에 대해 답할 수 있게 된다. 4) 마귀의 송사에 대해서도 같은 확고함으로 대답할 수 있게 된다. 마귀가 결코 대변하지 못할 오직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이다.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다’(계12;11) 5) 더 이상 죽음과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6) 죄에 빠질때까지라도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의 얻었은즉은 부정과거로 단번에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주의 사항. 1) 믿음은 여전히 때때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침반의 바늘처럼 제자리로 돌아가는 이상 믿음이 있다는 증거다. 2) 믿음에는 언제나 확신의 요소가 있지만 늘 ‘완전한’ 확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3) 거짓 평화를 주의하라. 특징; ①믿음을 단순히 신념이나 명제와 진리에 대한 지적인 동조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산데마니안주의 이단. ②그리스도와 그의 공로에 의지하기 보다 자기 자신의 믿음을 의지하는 자들. 믿음을 일종의 자기들이 신뢰할 공로로 본다. ③결코 의심으로 고민하지 않는다는 사실. 가짜는 진짜보다 훨씬 뛰어나다. ‘지나치게 강건해’ 보인다. 지나치게 위장된 말을 하며 명랑한 사람들. 신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침통하고’, ‘냉정하며’, ‘경외심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③사죄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거룩하여지는 일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④죄에 빠질 때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 빨리, 너무나 쉽게, 자신을 치료한다.
참 화평의 특징. ①결코 재잘거리지 않고 마음을 가볍게 먹지 않는다. ②언제나 경이로움과 감탄으로 충만하다. 자기가 진정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자기를 주목하시고 그의 은혜로 자기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감격해 한다. ③겸손하다. 하나님과 우리 주님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언제나 솟아난다. 넘치는 찬양과 감사. ④언제나 자기 생활에 조심한다.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 조심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⑤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늘 선한 일을 하려고 애쓴다. 딛 3:8-9, “이것은 믿을 만한 말입니다(미쁘도다). 나는 그대가 이런 교리를 특별히 강조하여(굳세게 말하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일은 좋은 것이며 사람들에게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어리석은 논쟁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시오. 이런 것은 무익하고 헛된 것입니다.”
제3장 하나님께 나아감(은혜에 서 있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들어감을 얻었으며’ - ‘들어감’을 얻지 못한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들어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영단번에 일어난 일임을 강조한다. 성화는 진행과정이지만 칭의는 하나의 사건이고 한꺼번에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전혀 죄짓지 아니한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간주해 주신다고 선언하시는 한 사건이다. 우리는 죄사함 받고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혀진다. 그것은 요지부동한 일이다. 이 선언을 하시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에는 은혜 밖에 있었으나 이제는 그 안에 있다.
‘들어감’(나아감 access) - 신약전체에서 3번만 사용. 엡 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느니라’. 하나님께 소개하는 알현권과 들어갈 권리는 오직 완전히 그 안에만 있다. 그는 자기의 의로 우리에게 옷입혀 우리를 데리고 가신다. 우리는 그 안에서 이 특별한 신분에 부속된 모든 유익들을 얻었고 받았다. 그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도해 들여서, 우리가 전에 받을 수 없었던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은사들과 축복들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롬 6:14,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우리는 지금 ‘은혜 아래’ 있다. 전에는 ‘법 아래’ 있었다. 은혜의 자리로 들어왔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었으며 그분 앞에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은혜의 견지에서 보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스럽게 보시며, 우리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우리를 받으시기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받은 축복은 모두 은혜에 속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서있는 은혜 안에 있으며, 우리가 서있는 은혜로 말미암는다. 은혜는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사이며, 총애라고는 어떤 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보여준 호의이다. 법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가장 엄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이들에게 베풀어진 호의이다.
은혜에 서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벧후1장). 하늘나라 왕의 자녀들로 살고 있는가? 은혜와 능력이 그렇게 커서 누구든 그것을 다 못구할 분에게 속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살고 있는가? 오히려 궁핍한 자로 영적 빈곤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아주 악하고 죄스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요6:35). 허드슨 테일러는 이 진리를 깨달았을 때 그의 전체 체험이 변혁을 일으켰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오 그의 영광과 은혜의 모든 부는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다. 주님이 부단히 강조하신 것이 이 점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었다’(눅12:7). ‘믿음이 적은 자들아 솔로몬의 받은 모든 영광으로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우리의 매일 필요한 것을 공급하실 수 있다는 것은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성경에서 거듭 실증된 것이고, 모든 세대를 걸친 셀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계속되는 역사 가운데서 입증된 것이다.
‘어떠한 형펀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0-13).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19). ‘그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느니라.’ 이런 확증을 가지고 기도하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감을 철저히 확신하는가? 우리는 한 길에서 서성되는 걸인이 아니다. 연회석에 있는 다른 사람과 똑같은 권리를 가졌다는 것을 인식하라. 우리는 왕의 아들로 말미암아 소개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엡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요점은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서있는 것’ - ‘견고히 서다.’ 의 뜻. ‘견고히(확고하게) 서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느니라’. 은혜 안에 견고히 서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벗어날 위험이 없이 안전하다는 것이다. 사도의 가르침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나는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장 마지막). 우리는 담대함으로 우리의 머리를 쳐들어야 한다. 기도할 때도 온전한 확신으로 해야 한다. 구원의 확신은 우리 개신교 신앙의 영광이요 강조점이다. 로마카톨릭은 이를 부정한다. 그래야 교회와 사제를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의 은혜 안에 서있다는 이 위대하고 복된 진리를 붙잡을 때 우리는 영광스러운 구원의 확신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이보다 놀라운 것은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은혜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 그 안에 견고히 서 있게 된다는 것, 우리가 영원히 안전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긍지를 가지고 이것을 선언해야 한다.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그의 은혜의 넘치는 부요함’을 결코 잊지 말라. 극빈자처럼 살지 말라.
제4장 소망 안에서의 자랑과 기쁨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1.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환호와 기쁨과 긍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 보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속과 구원의 목표는 끝내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모습을 우러러 볼 수 있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17:24).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 베드로도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1:15-17). 바울도 3층천에 끌려 올라가 그 영광을 보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누구에게나 이 복이 옴을 의미한다. 우리 하나님의 존전에 서게 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되 어떤 것도 가림없이 볼 날이 오는 것이다.
2. 또한 그것은 우리 자신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화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만 영화에 대해서는 조금밖에는 말하지 않는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주는 자들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의 얼마가 인간 안에 있었다. 그걸 아담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다. 그러나 다시 이 영광을 소유할 것이다.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하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모든 부요함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것이 된 것이다. 8:18,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의 육체는 타락의 결과로 고난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롭게 될 때 우리 몸이 완전해 질 것이고 죄의 모든 흔적은 우리 몸에서 사라질 것이고 죄의 모든 열매가 없어져 우리 모두는 아름다움으로 영화될 것이다. 빌 3:21,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나니 그가 우리의 낮은(비천한)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몸의 구속을 전파하는 것은 기독교의 메시지의 주요한 부분이다. 요일 3:2,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대로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우리는 그와 같을 것이다!
3.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 영화가 이 세상에서 하나의 과정으로써 출발하였다는 분명한 가르침이 있다.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하늘을 향해 가는 중에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 일은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중생은 신적 생명의 씨앗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일어났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다면 이 영광의 일부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주 작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사역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 되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내세에 속한 것으로만 돌려서는 안된다.
골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여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아이작 왓츠, ‘은혜를 입은 사람들/ 땅에서 시작된 영광을 보았네’, 우리는 ‘황금길’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영광은 우리 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사도가 칭의에서 영화로 비약하는 태도에 주의를 집중시켜 드렸다. 여기 롬 5:1-2에서 뿐 아니라 8:30에서도 다시 그렇게 행한다. 우리 모두가 비약을 행할 것을 배워야 함은 실로 가장 중차대한 진수이다. 여러분은 칭의에서 멈추어서는 안된다. 여러분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영화된 것이다. 여러분은 이 비약이 기쁜가? 칭의만 취하거나 성화나 영화만을 취할 수가 없다. 그것은 전부이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든지이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나의 영화는 현재 나에게 있어 성화와 그 안에서의 칭의만큼 확실하다. 모든 것을 보증해 주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우리가 이미 하늘 보좌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자리를 같이한 것’(엡2장)이다.
우리가 1-2절을 확실히 알기까지는 다음 절로 나갈 아무런 자격도 없다. 묻는다.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무엇인지 알았는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은혜 아래 서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리고 은혜의 보좌 앞에 확신을 가지고 나가서 거룩한 담대함으로 기도하는가?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안에서 기뻐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어떠한 불확실한 점도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칭의의 원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로마 카톨릭처럼 비성경적인 것도 없다. 칼 바르트도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는 것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논박했다. 그의 신학이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인 면이 더 많기 때문이다.
존 케닉, ‘하늘에 계신 왕의 자녀들이여/ 너희가 나그네 길을 갈 때 즐거워하며 노래하라’.
아이작 왓츠, ‘주를 사랑하는 우리/ 가서 우리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아보세/ 하늘 왕의 자녀들/ 그들의 기쁨 널리 펴 말해서/ 우리의 노래들로 넘치게 하여/ 모든 눈물 마르게 하세/ 우리 위에 있는 더 좋은 / 세계로 임마누엘 땅을 지나(통하여) 행진해 가노라.’ 우리는 이 일에 확신을 갖고 그것을 놓치지 말자.
헨리 프란시스 라이트, ‘하늘의 영원한 날 네 앞에 있고/ 거기 하나님의 손이 너를 인도하리/ 땅위에서의 네 직분이 곧 끝나고/ 너희 순례의 길 빠르게 지나리/ 소망은 곧 기쁜 열매를 맺고/ 믿음은 곧 바라보게 되고/ 기도는 찬양으로 변하리.’
오늘의 교회가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못보고, 너무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 내키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를 알고, 우리가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보게 될 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자청해서 우리에게 올 것이다. 조지 휫필드와 같은 사람이, 영광을 알아 그것을 보고 그것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 그들은 모여들었다. 웨슬레나 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교회들은 비좁아서 노천에서 설교해야만 했다.
만일 우리가 이 영광에 대해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교회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영광을 느끼는 면에서 무언가 모자라고, 그 영광을 기뻐하지도 않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교회 밖에 있다. 만일 그들이 우리들의 얼굴을 통해 반영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휘를 알았다면,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 속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를 보았을 때처럼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들기 시작할 것이다. “이 사람들을 보라.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장벽’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사건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저들의 삶과 성품의 놀라움을 보라.” 그들은 우리의 비밀을 알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위한 처방은 고후 4:17-18이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내 주위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주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그분의 얼굴을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들여다보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영광을 보고 있는 한 그 외의 모든 것은 경한 환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는 말한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2). 만일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보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다른 것에 너무 많은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신문을 너무 많이 보고 있다. 텔레비전이나 세상과 세상의 외면적인 것에만 너무 많은 시선을 두고 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서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시선을 돌리고 그것에 온 정신을 집중시키라. 그것은 의지와 훈련의 노력을 요구한다. 거기에다 여러분의 애정을 쏟으시라. 그것은 성경연구에 열심을 내고 그것을 묵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 말씀을 통해 주님을 찾으시라.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그를 나타내시기를 구하라.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을 여러분에게 나타내시기를 간청하라. 여러분이 그에 대해 어렴풋한 그림자를 붙잡기만 하면, 그리고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포착하기만 하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자랑한다”고.
제5장 환난과 믿음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5)
‘이뿐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우리를 기다리는 그 영광을 받기로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또 다른 증거가 환난이다. 그리스도인은 혹독하고 날카로운 시험과 환난을 겪어야 한다. 이것은 지극히 중요한 과제다. 신약성경 가운데 이 주제보다 더 자주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없다. 주님께서 친히 그 문제를 주님의 공생애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기 시작하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바울,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14:22). 이 세상에서의 시험과 고통과 시련을 대하는 방식보다 그 사람의 신앙고백을 시험하는 더 중요하고 예리한 시금석은 없다. 시련과 환난은 단순한 감정이거나 심리적인 체험에 종막을 고한다. 시련과 환난은 ‘신앙주의’와 참된 믿음 사이를 분간해준다. 일종의 신앙주의만 갖고 있는 사람은 시험과 환난이 올 때 전부 실패하게 된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들어난다.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13:21).
‘환난’은 역경과 압박과 곤경과 어려움과 질병 또는 핍박을 의미한다. 시련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1) 불평이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으며 자기가 혹독하게 당한다고 느끼지 않고 자기의 신앙을 전혀 의심하거나 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2) 단순히 철학적인 태도로 역경들을 견뎌내는 것만도 아니다. 자기에게 닥친 환난을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체념하는 것만은 아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금욕주의에 불과한 스토아주의가 아니다. 용기와 굉장한 의지의 노력으로 스토아 철학은 환난을 통과하여 나간다. 그리스도의 태도는 그것이 아니다. 적극적인 체념이 아니다. “다만 이 뿐만 아니라 역시 환난 중에도 즐거워(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자랑하고 즐거워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3) ‘중에도’라는 말이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훨씬 초월한다. 사도는 우리가 그 때문에 그로 인해서 기뻐한다는 것이다. 환난에도 불구하고, 환난 가운데에서라도가 아니라, 우리가 당한 환난 때문에 환난으로 인해서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약의 보편적인 가르침이다. 주님,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41). 사도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궁핍과 환난과 곤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12).
벧전 4:12-14,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사도는 우리가 환난을 좋아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변태성격적인 자기학대를 가르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이 비참해질 때 행복해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믿음을 행사하여 환난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시련과 환난이 올 때 처음에는 고민하고 불안해 한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그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 그러나 거기서 멈추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 환난을 처리하기 위해 전진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지식과 통찰이다. 환난과 고난을 기뻐하고 자랑할 수 있는 이유는 환난이 인내를 이루는 줄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중요한 단어는 ‘이룬다’이다. 고후 4:17,“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인내란 정절을 의미한다. 참아내는 능력을 말한다. 확고부동한 것을 의미한다. 사도는 환난이 이런 인내와 계속 견뎌냄을 산출한다고 한다. 시험과 환난은 늘 잊고 있기 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주님께 간청하게 하여 더 큰 능력과 이해를 요구하게 한다. 또한 우리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보게 해준다. 우리가 생각했던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케 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균형 있고, 더 깊이 있고, 더 크고 진실한 관점을 가지게 되는 이다. 그 결과 더 큰 시험이 올 때 흥분하여 당황하지 않는 견고한 사람들이 된다. 세상에서 우리는 많은 환난을 당할 것이고 그 환난들은 우리들을 도와 견고케 해줄 것이다. 환난은 인내를 이루기 때문이다.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 연단은 ‘증명’, ‘인정됨’을 의미한다. 인내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로 인도한다. 환난은 우리를 테스트하고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인내는 훌륭한 시금석이다. 그 시험에 합격하는 사람은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내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정받았는지 거짓 신앙고백은 아닌지 결정하는 시금석과 시험을 제공한다. 시련과 환난이 어떻게 이 일을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서 12장에서 채용된 논리이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라.” “만일 너희가 징계를 받지 않으면 사생자요, 아들이 아니니라”(히12:8). 바로 그 점이 왜 그리스도인인 그가 시험받을 때 기뻐해야 하는가의 이유이다. 그러므로 시험은 여러 면에서 좋은 것이다. 환난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줄 뿐 아니라 동시에 나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시험하고 증명한다. “그가 나를 죽일지라도 나는 그를 믿겠노라”(욥). 그가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다. 사단에게 ‘이것이 나를 완전하고 나를 영광으로 이끌어주는 방법이다. 나는 그것을 필요로 한다. 다듬어질 필요가 있는 근성과 성품이 있는 것이다. 아직도 내 속에는 불순한 것이 있다. 주님은 나의 유익을 위해서 이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너희의 믿음이 금보다 귀하다”(벧전1:7)고 했다. 금을 단련할 때 어떻게 하는가? 용광로 속에 집어 넣어서 불순한 모든 찌꺼기를 태워 없애서 순수한 금만을 얻게 된다. 환난과 시련도 그런 일을 한다.
환난은 우리를 시험하고 증험하고 우리 안에 참된 것을 제외하고 전부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비행기를 만들거나 다리를 놓을 때 강철은 그 강도를 시험해 봐야 한다. 시험을 통과한 후에 우리의 믿음이 이전보다 훨씬 낳아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믿음은 순수하게 되고 더 강해진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루나니”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인정받게 한다. 연단은 다시 소망으로 인도해서 소망을 이루게 한다.
그 소망은 2절에서 언급한 소망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중에(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바울은 소망으로 시작하여 소망으로 끝난다. 시련과 환난은 처음에 우리가 가졌던 소망에 대한 확신을 보다 더 확실하게 한다.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은 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고난의 용광로를 지난 다음, 시련과 환난을 통과한 다음 나는 전에 가졌던 것보다 더 큰 소망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이 환난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소망을 강하게 하며, 우리들로 하여금 더 큰 소망의 확신을 가지게 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의 독생자의 형상을 완전히 본받게 하도록 이끌어 가기를 원하신다. 환난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또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어떠한 시련과 어떠한 부족에도 충분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권능에 대한 생생한 체험을 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절대적인 증거를 주는 것이다. 우리는 환난을 주신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나는 전보다 나아졌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확신케 되었다.
제6장 부끄럽게 하지 않는 소망
1-2절에서 사도는 이신칭의의 결과인 우리 구원의 확실성과 최종성을 보여주려 한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져다 줌과, ‘은혜 안에 서 있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함으로써이다. 3-4절에서 우리가 당하는 시험과 환난이 그 소망을 요동케 하기는 커녕 그것을 더욱 확신케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절정이 5절이다.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이 세상에서나 최후 심판날에 부끄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1차적으로 이 세상에서 결코 부끄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무엇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시련과 문제들과 환난과 고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망을 갖고 있으면 결단코 부끄럼을 당치 않을 것이요 부끄럼도 느끼지 않을 것이요 절망하지도 않을 것이요, 밑으로 뚝 떨어졌다고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바울은 딤후 1:2에서 “이를 인하여 내가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냐하면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과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에 관해 분명치 않은 사람은 환경을 부끄러워한다. 1:8에서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라”고 한다. 1장 말미에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메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 했느니라”.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은 곡언법이다. 이는 긍정 대신 부정법을 사용함으로 적극적인 것을 역설하는 방법이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바울이 정말 의도하는 바는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거나 부끄러워할 일이기는 커녕 오히려 그 정반대라는 것이다. 그것을 자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이 소망을 얻을 것을 아는 사람은 시련과 환난들을 극복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자랑할 것이고 그것을 영예롭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한다”는 것은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하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우리는 환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자랑할 수 있다.
이는 전 역사를 통해서 성도와 순교자들의 보편적인 간증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였다. 그것을 알고 확신했다. 그래서 죽어가면서 잔인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순교의 비결은 자기들이 어디를 가고 있는가를 정확히 알았던 데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다가가고 있는 영광을 보았고 그 영광을 어렴풋하게 나마 체험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영광을 확신했던 것이다. 우리들에게 이 최종적인 확신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매우 위대한 진술이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사도는 “때문이다”고 그 이유를 댄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흘러 넘침’은 ‘파부어졌다’의 의미이다. 행 2장에서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17). 33절이하에서,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그것은 풍부하여 용솟음쳐 일종의 성령의 ‘흘러넘치는’ 모습을 그려준다. ‘안에’는 매 부분에 침투하여 흘러나오기까지 채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됨됨이와 성품의 핵심이다. 정서와 느낌, 감수성을 내포한다. 성령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 속에 붓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렇게 해줌으로 그것을 받은 사람마다 환난 중에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신 것이지 논리의 귀결로써 도달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지적인 추론을 초월하여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성령에 의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확신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중대하고 가장 큰 가치를 지닌 것이다. 슬프게도 20세기에 있어서 이 가르침처럼 무시를 당했던 진리의 국면은 없다고 확신한다. 이것은 ‘믿음으로 그것을 가지라’고 하는 해로운 가르침이 낳은 열매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해주시는 것이다. 베드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관계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가능한 최고의 확신 형태이다. 추론할 수 없는 확신의 형태이다. 성령께서 그것을 우리 마음에 부은 것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몇 가지 간증을 말씀 드린다. 1797년에 죽은 헨리 벤, 어린 다섯 자녀를 두고 아내가 죽은 직후에, “확증이 어떤 추론이나 논리로써 된 것이 아니고 자각과 내 영혼에서 육체적인 눈에 비치는 태양처럼 비추이는 하나님의 빛에 의하여 된 것이다.” “저는 내게 주신 성령의 권능으로 소망에 겨워있다. 제가 환난 가운데서 더욱 더 즐거워한다. 곧 슬픔의 사람은 마른 땅에 강물과 같고 흑암 중에도 노래를 부른다.”
찰스 시므온, “이것은 그것을 받지 못한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대부분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확신에 차서 누리는 하나의 축복이다.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묘사해야 좋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로 영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에 의해 일으켜진 마음에 인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메드리의 존 프레처, ‘주님은 “나는 자신을 나타내리라”고 하신다. 그것은 성령께서 오실 때 현실화될 일에 관한 주님의 약속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맛보았고, 그것을 느꼈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 심령에 인침을 통해 느끼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것은 직감적인 무엇이요, 체험적인 것이다. 그것은 감정과 느낌에 영향을 준다. 그것은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것이지, 간접적이고 중개를 통한 것이 아니다. 분명히 성경 전체에서 이보다 더 값진 것은 없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듣는 것이 얼마나 적은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이 체험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려 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받아야 한다.
폐병을 앓다가 36세의 나이로 죽은 리차드 로바츠, “내가 3주일전 병이 악화되고 난 뒤 주님께서 가까이 계셔서 당신의 사랑을 아주 비상한 방법으로 내 영혼에 확증시키셨다. 나는 나의 무가치함과 지난날의 불신앙을 깨닫고 깊이 겸손해졌다. 그러나 만세반석 위에 굳건히 서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몸에서 내가 떠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가지 일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즉 내가 전에 하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한 것같이 느꼈던 바로 그 위대한 일이다.”
토마스 굳윈, “주님께 그것을 간청하라. 주님께 그것을 간청하라. 그것을 구하고 포기하지 말라. 이것은 눅 11:13을 그 나름대로 표현한 것이다. 굳윈처럼 주님께서 친히 나타내 주십사고 구하시고 간절히 바라라. 그에게 구하라. 적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 그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그리고 이렇게 간절하게 그를 찾는 이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약속하셨다. 지난 역사의 모든 성도들은 헨리 벤이 묘사한 바와 같이 부어진 사랑과 이 ‘직감적’인 지식을 간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연역의 논리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 생명의 중심에서 솟아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이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서 비추는 태양빛 아래 있는 것처럼 그 사랑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부은 바 되었는가? 여러분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고 있는가? 내가 볼 때 그것은 기독교와 교회를 창설했던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오순절 날의 사람들에게 일어났고 전 교회 역사를 통해서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어났다. 그것은 진정으로 그것을 찾는 이들에게 일어났다. 왜 여러분이 그것을 몰라야 하는가? 왜 하나님의 사랑의 햇빛 속에서 여러분이 녹아지기 위해서 온 우주의 어느 것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더 확실히 알지 않는가?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라.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7장 성령과 확신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 함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확신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고,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산출된 확신이 최고의 것이이라고 했다.
1 성령은 예외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 성령을 받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너희 안에 계시느니라”(요4장).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2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이 우리 구원에 대한 최종 보장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과, 그가 우리의 최종적인 영화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증명한다는 것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만큼 확실하게 이루어 나가시고 끝마치시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1) 그것은 중생한 증표가 된다. 중생의 사역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앞서 행하신 일이다.
논리상 그것을 분리하여야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은 중생의 증거이다. 우리가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받았다는 사실, 성령으로 낳았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의 최종적인 완전성에 대한 보증이다. 우리는 은혜에서 떨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인 됨을 중지할 수 있다는 것은 해괴한 망상이다. 중생한 사람이 범죄하고 타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이며, 여전히 거룩한 신성의 분참자인 것이다. ‘씨’가 그 안에 있고 언제까지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최종적인 영화를 보장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이 그 구원사역을 보증한다.
2)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임재가, 우리가 계속 믿음 안에 있고, 우리의 믿음이 간직되고, 하나님과 언제나 함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보증서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시나니”(빌2:12-13).
만일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 안에서 처음 일을 시작하기만 하고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기셨다고 하면 어느 누가 자기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게을러 잘 잊어버리고 모두 세상의 영향을 잘 받고 유혹에 아주 약한 존재들이다. 내가 계속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 끝내 하나님 앞에 확실히 선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증하겠는가?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이다. 성령은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일하시고 ‘뜻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성령은 나를 끊임없이 감화하고 끌어주고 책망하고 말씀의 맛과 그것을 열망하는 맘을 준다. 성령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방법들로 우리를 감화하신다. 여러분의 영혼이 메마른 중에 있는 어느 시기에 갑자기 성경구절이 여러분의 마음에 떠오르든지 찬송가의 어느 구절이 생각나게 하신다. 성령은 거룩한 열심을 창조하고 마음을 인도하고 지시한다. 그러므로 그가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은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이며, 끝까지 그럴 것을 보증한다. 나의 신실함이 아니라 나를 붙잡고 있는 권능이다. 하나님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끝까지 우리를 붙잡고 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8장)
3) 성령은 또한 우리의 성장을 보장한다. “너희를 위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6-19). 성령은 이상의 모든 일을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우리의 성장과 발전의 보증이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이2:27).
4) 우리 안에 성령의 거하심은 우리가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그 영광으로 어김없이 들어가도록 하는 보증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인가? 대답은 오직 하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를 성화하고 죄를 제거하시는 것은 성령의 독특한 사역이다. “당신의 진리로써 그들을 거룩하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3.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그것은 ‘예수가 주’라는 말을 입으로 되뇌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진실로 온전한 기독교 신앙고백이다. 주님의 인격에 대해 확실한 진술을 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광의 주님이라고 말하는 있는 것이다. 성육신 교리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교리에 자신을 의탁하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주님이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두 품성이 혼합되지 않은 채 있노라. 바로 이것이 예수는 주라고 말하는 의미의 일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도 포함한다. 그는 만물의 주인이시오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고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지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그가 여기 땅위에 계실 때 이루신 역사와 관계를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주님이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은즉”(고전6:19-20). 그가 나를 사셨기 때문에 나의 주님이시오, 그가 나를 속량했고, 나의 구원의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나의 주님이시다. 나는 죄와 마귀의 노예였는데 그가 나를 사셨고 나는 그에게 속해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 매인 바 된 종”으로 자신을 묘사했다.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여러분이 해낼 수 있는 가장 온전한 진술 중 하나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격위, 사역, 그의 생애, 죽음, 장사지냄, 부활, 승천, 높아지심의 교리를 다 포함하고 있다.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을 믿는가? 하나님께서 불건전한 자와 죄인을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위에서 속죄하신 희생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을 믿는가? 여러분 자신과 영원한 미래를 그에게 맡겼는가? 여러분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성령은 여러분 안에 계신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적인 증표이다.
2) 또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아간 줄을 알거니와”(요일3:14).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궁전에서 사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것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면 저는 여러분이 성령을 모시고 계신 사람들이라고 확신한다. 여러분이 성도의 교제와 대화를 좋아한다면, 여러분이 영혼과, 구원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하늘과 오는 영광을 얘기하길 좋아한다면 여러분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말씀 드린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일을 좋아할 리가 없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가? 거룩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게 되기를 원하는가?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신 증거다. 그리스도를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원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여러분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증거다.
3) 성령의 열매로 여러분을 시험해 보라.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5:22-23). 그 열매들이 나타나는가?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신 증거다.
그 아들과 그의 영광스런 사역이여! 그리고 다음에는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안에서 다가올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지키시고 예비하시는 것이다. 성삼위일체의 삼위는 그 일에 다 종사하시고 우리에게 관심을 두시고 우리 구원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신다. 이상 다섯 절의 말씀은 기본적인 믿음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다시 가미시켜 준다. 이 모든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초석이다. 믿음은 소망으로 연결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믿음은 소망을 낳고 우리가 소망을 더욱 분명하고 명확하게 가질수록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두 짝의 삼위일체를 아는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을 말이다. 여러분은 이 믿음을 행사하고 있는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깜박임만이라도 있는가?
제8장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히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하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롬5:6-8)
1-5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의 큰 확신을 누린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어떤 환난도 그것을 요동케 못한다.
6-11절은 더욱 큰 구원의 확신을 우리에게 주고자 한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우리 구원의 확실성과 최종성에 대해 더 큰 확신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논증한다. 6~8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적극적인 진술을 하고 해설을 붙인다. 9~10절에서 그 진술로부터 나오는 필연적인 추론을 끌어낸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 8장에서 진술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영화로 도약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에 대한 커다란 확신을 준다.
그래서 그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6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구절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 구절보다 더 큰 진술이 없음을 서슴없이 말씀 드린다.
요 3:16에 대한 바울의 주석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6절은 정말 모든 것을 말하고 실로 완벽한 진술이다. 7-8절은 그것을 정교화시킨 것이다.
이것은 3:24의 되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훌륭한 교수법의 진수는 반복이다. 우리가 너무 잘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한 성도들의 큰 특징은 언제나 자기들을 향하신 그분의 사랑을 깨달은 것이었다.
제1원리는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사랑에 속한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진노와 죄인을 향한 사랑 사이에는 갈등이나 상반된 것이 없다. 두 가지가 함께 있다.
같은 하나님 안에 죄에 대한 증오와 동시에 죄인을 향한 영원한 사랑이 함께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기약한 대로”는 ‘약속된 때에’ 또는 ‘마땅한 때에’이다. 만물과 사람이 창조되기 전,
하나님은 이 권위있고 영광스러운 구원의 길을 상세하게 계획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가 차매”(갈4:4)도 같은 것을 말한다. 우리의 사랑은 감정에 끌리기 쉽고 변덕스럽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하고 영원하다. 구원은 영원에서 계획되었다.
우연적으로 발생하거나 불시에 생긴 무엇이 아니다. 하나님은 시종을 통째로 아셨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하셨다는 사실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거가 없다.
이 ‘때가 찬’ 때는 정확히 어느 때인가?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1:9).
사람이 자신을 구원할 가망이 없다는 것이 명약관화하게 입증될 즈음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이 온전히 작용해 볼 기회를 충분히 누려봤던 바로 그 시점이다.
이 율법을 그들은 1400년 동안 소유해 왔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육체가 하나도 없음’이 입증되도록 이 기나긴 시간이 사용된 것이다. 헬라철학도 율법과 똑같은 기회를 충분히 누려봤던 시점이었다. 사상사의 저 위대한 전성시대와 궁극적인 실제에 관한 연구시대가 막 지나갔던 때이다. 역시 같은 방식으로 로마 문명과 법률, 문화도 그들 나름대로의 기회를 가졌었다. 이집트의 겨대한 문명도 역시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다. 앗수르나 바벨론과 중국문명도 그러했다.
세상은 자신을 구할 모든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데는 모든 방면에서 ‘적기’였다. 사람은 실패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인 것이 틀림없다.
“그리스도께서”- 교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보내졌는가? 그리스도!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가능하다.
그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독생자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4:19).
하나님의 아들이 영원함과 영광에서 죄와 굴욕과 비극과 슬픔의 세계에 오신 것을 자세히 읽어보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도다”- 이는 가장 중요하다. 그분의 생애도, 가르침도, 기적도 아니고,
사도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고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죽으셨다.
그가 오신 것은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을 인하여”“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3:9).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다면 어떤 사람도 구원하시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경건치 않은 자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죽음이란 마지막 행동이요 최종적인 것이다. 죽음의 모양도 특이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십자가형은 수치스럽고 모욕적이고 불명예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참으로 아는 데는 여기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8:32). 하나님은 우리 모든 자를 위하여 그를 넘겨준 것이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상의 확증이다.
십자가로 나아가서 그것을 쳐다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해 보라. 조명과 이해를 주는 성령을 구하라.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그것을 작정하셨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는 “십자가의 죽음에 복종하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빌2:5-8).
세 번째 원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측량해 보는 또 다른 방식은 주님께서 그 일을 해준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가 얼마나 깊은가를 재보는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세 어휘- ‘연약함’, ‘경건치 않은’, ‘죄인들’.
‘연약함’은 ‘전적 무능력’을 의미하며 우리가 전적으로 어떤 영적 능력도 전혀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영적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에게 미련하게 보임이요 알 수도 없음이라”(고전2:14).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한다”
그는 영적으로 죽어 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다.
‘연약하다’의 다른 국면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의란 ‘더러운 넝마’와 같다. 바울이 자랑하던 바리새인의 의는 배설물이요 해로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께 복종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할 육체가 없으니 이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본질상 우리는 율법에서 요구하는 의를 행할 능력이 없다. ‘연약하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우리의 무능과 무력을 깨닫는 정도에 달려 있다. 사도에 따르면 그것을 깨닫는 길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는 말씀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죄의 결과로 오염되었고, 부패하였고, 어리석어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죄를 짓는다.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영구한 사랑에서 기인한다.
원래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연약하게’ 되었다.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을 뿐 아니라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위해 죽게까지 하셨던 것이다.
사랑, 그 놀랍고 거룩한 --.
제9장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롬 5:6-11,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는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닮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3:24).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어야 했다. 형상은 지성과 이해, 이성과 능력,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가능성 등으로 이루어진다.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무서울 정도로 손상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주신 바 사람의 진실한 신성성과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영광이었다. 죄의 결과 그것은 흐트러지고 사람은 경건치 않게 되었다.
‘경건치 않은’의 두 번째 의미는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지 않았을뿐더러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없다. 10절,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인간은 본성적으로 노골적으로 하나님과 반대이다. 그래서 하나님이나 율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사람들이 그러한 불경건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 자체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입증해주지 못한다. 그 하나님은 그들 자신의 상상의 신이며 그들 자신이 생각해 낸 고안물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서 주신 계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개념을 가질 수 없다. “나를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구약의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 그리스도는 구약 전체를 믿었다.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이다. 한 하나님이시다. 불경건함을 드러낼 뿐이다.
그 사람이 경건한 사람인지를 알아보는 시금석은 그가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방식을 믿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자신이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오직 자기를 위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공로에만 전적으로 의지할 필요성을 알고 있는지. 그것이 시금석이다.
그리스도는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서 죽으셨지 바리새인을 위해서는 죽지 않으셨다. “나는 내가 저 사라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찬양하고 있었다. 자신을 아주 경건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
‘의인’과 ‘선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의인은 정직한 사람, 율법을 지키는 사람, 행동에 있어서 아주 바른 사람이다. 선인은 의인일 뿐 아니라 사랑에 의하여 통제받는 사람이다. 바를 뿐 아니라 그 이상이다. 옳고 바르기만 한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람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인을 위해서는 그에게 끌린 나머지 ‘난 그를 위해서 죽을거야’라고 말하기 까지 한다. 역사는 이에 대한 많은 실예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다”고 말한다. “확증하였다”. 어떤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이다. 우리는 의인도 아니고 선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죄인들이다. 우리에게는 사랑을 받을 만한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고 입증하신다. 우리는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했고 반역했고 공격했고 그의 율법을 조롱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따위의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던 것이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의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장).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디도서 3장도 같은 표현을 한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않은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의 종노릇한 자요, 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그와 같았고 하나님의 공의 아래서 진노를 받을 만 했고 심판과 그의 보시는 앞에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보내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철저하에 인식했던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들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깨달았던 사람들이었다. 누가복음 7장에서 어떤 죄지은 여자와 바리새인 시몬이야기가 나온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으니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녀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과 주님에 대한 자기의 진 빚을 깨달았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자기의 죄스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전혀 무가치한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논증을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거가 있다. 우리는 불경건했고 연약했고 죄인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세상에 보내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그 치욕의 죽음을 당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의 피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흘려졌다.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대가없이 얻은 것이며,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전적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사도가 주장하는 바이다. “그는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 우리 안에는 죄밖에 있는 것이 없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것이 모두 은혜에 속한 것은 “누구도 자랑하지 않게 함이다”. 우리의 공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우리와는 어떤 식으로도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도는 이 사람들이 자기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바라고 즐거워하기를 원한다. 또한 그들이 자기들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이해하고 포착할 때에 그것을 기뻐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제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증거가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풍부한 확신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어떤 국면에서라도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달려있는 것이다. 나의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 그것에만 달려 있고 내 안에 있는 아무것에도 달려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고 확증할 수 있다. 왜? 하나님은 변치 아니하시며 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 내 구원의 값없는 특징, 내가 연약하고 불경건했고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것, 또한 내 그러한 모습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죽었다고 하는 사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구원의 확신에 대한 궁극적인 터가 된다. 나는 이 근거 위에서 내가 지금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구원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아울러 내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과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것이다. 이 사도의 위대한 논리적이고 변증적인 명확성을 분명히 인식했는가?
사무엘 데이비즈는 “용서하기에 너무 큰 범죄들, 무례한 벌레”라고 자기를 표현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이었지만 “우리와 우리 죄를 위해서” 그리스도는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다. 우리가 연약하였을 때 뿐 아니라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비열하고 저주받은 자들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을 때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는 죽으셨다! 오직 할 말은 이것 뿐, “주와 같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누구리오? 그처럼 넘치고 값없는 은혜를 가진 자 누구리오?”
제10장 더욱더
롬 5:9-10,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 두 절은 구원의 확신이나 구원의 최종성에 관한 논증에서 볼 때 성경 전체에서 가장 최고의 진술이다. 이것을 초월하는 확신의 방법이 단 하나 있는데 5절(“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의 성령 자신의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증거다. 8:16도 같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이것은 가장 최고의 확신의 형태이다.
여기서 사도는 십자가와 죽음의 주제를 또 다룬다. 십자가의 테마는 무한하다. 영원토록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을 주제이다. 십자가를 건성으로 보아 넘기는 사람은 십자가를 진정으로 안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더욱‘이라는 표현에 주의를 집중하자. 5:15-17에서도 다시 발견한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15절).”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라“(17절).
이것은 논리와 합리를 적용한 것이다. 이 합리와 논리의 요소는 사도의 서신에 있어서 독특한 특징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감정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사도처럼 진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이며, 분별있게 살 줄을 아는 사람이다. 위대한 사도로부터 총명한 논리와 예리한 분별력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명백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논리적 필연성에 의해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온다는 사실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절에서 역설하는 요점은 보다 큰 것이 사실이라면 보다 적은 것은 필연적으로 사실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9절은 6-8절에서 끌어낸 결론을 진술한다. 10절은 더 상세하고 더욱 더 강한 어조로 되풀이한다.
“진노하심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장래를 가리킨다. 심판날에 와야 하는 것이다. “구원받는다”의 어휘는 성경에서 세 가지 다른 시상과 의미에서 쓰여진다. 첫째로,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미 죄책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 둘째로, 아직도 구원을 받고 있다. 죄의 세력과 오염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있다. 바로 이것이 “성화”이다. 현재 우리 가운데서 계속되고 있는 진행과정이다. 셋째로, 전적으로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이다. 최종적으로 완벽하게 구원받을 날이 온다.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뿐 아니라 우리의 몸 자체도 죄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화”이다.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된다.’(유24절).
우리가 최종적이고 완벽한 구원을 받게 될 것에 대한 논증을 사도는 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은 논증의 기초이다. 그것 때문에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롭다함을 함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것이다. 법률적이고 법정적인 용어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히고 그리스도의 예복을 입혀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 존전에 그리스도의 의를 가지고 서는 것이다. 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에 대해 사도는 어휘를 다양화하고 있다. 3:24, “우리가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 자 되었다”. 3:28,“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이제 9절에 갑자기 도입된 표현이다.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다”. 10절에 “그는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되었은즉”이라고 한다. 이해를 못하면 혼란에 빠지기 쉽다.
칭의를 가능케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칭의는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칭의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의와 그의 죽음을 포함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대한 복종,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다. 이것이 중요한 요점이며 핵심이다.
칭의를 가능케 한 것은 그것을 구원의 방편으로 제정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혜는 칭의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옳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이라는 통로와 매개체를 통하여 온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이 이 모든 것을 해결했는가?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히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그의 피 흘리심과 쏟아부은 그의 생명이다. 사도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칭의에 있어서 진수는 십자가에 일어난 그 일이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칭의를 가능케 한 것은 바로 그의 죽으심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방법을 생각해내고 계획해서 그것을 수행하도록 주님을 보내신 것이다. 그 은혜는 믿음을 방편으로 하여 우리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의 피요, 그의 죽으심이요, 그의 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모든 것의 기초는 우리 주님 자신과 우리를 위하신 그의 구속사역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중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겠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이다. 하나님께서는 불경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 불경건한 자는 중생되어 있지 않다. 실제로 중생은 동시에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은 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이 맨 먼저 우리를 중생시키지 않는다. 우리가 중생했으니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경건치 않은 자를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의롭하신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성화로 인해서 우리의 선한 행실, 우리의 죄로부터 벗어남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은 즉”이라는 구절은 우리가 항상 지켜볼 위대한 푯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를 위해 자기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의 죽음에 내주시기까지 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도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논증이다.
사도의 주장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이 구원의 방도가 하나의 완벽한 총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있으면 그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도는 이 논증을 즐거워하는 것이 틀림이 없다. 구원의 모든 단계는 완벽한 전체의 부분들이다. 사도는 1-2절에서 이미 말했던 사실 즉 칭의가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칭의를 조달해 주셨다면 우리는 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최종적이고 완벽한 구원에 관해 아무런 근심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고 경건치 않았고 죄인들이었다. 10절에서 ‘원수’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여기 영원한 의요 거룩함을 지닌 하나님이 계신다. 우리에게 이르는 맨 처음의 일은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일이다. 우리의 심판은 이미 끝났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 관한 근본적인 선고를 내리신 것이다.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망의 모든 세계로부터 생명으로” 옮겨졌다. 우리는 결단코 다시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칭의가 얼마나 엄청난 사실인지 아는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의롭다 하실 때 그는 그 사람에 관한 최종적인 선고를 내리고 계시는 것이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안전한 사람이요, 영원토록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것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그를 정죄하겠는가?”(8:23,34). 칭의는 우리가 포착하거나 체험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중대하고 영광스러운 사건이다.
마틴 루터가 의의가 뜻하는 바를 깨달았을 때 그 깨달음이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이 교리를 인식함에서 온 것이다.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음을 최종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1-2절에서 이미 말씀드렸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그 은혜 안에 서 있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보고 즐거워하는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영은 하나님께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바로 그렇게 아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논증은 칭의 안에 이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제11장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발전된 논증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였을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관해 무엇인가를 해놓으셨다.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진술이다. 상호관계와 태도가 전쟁과 적의의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법적인 입장에서 하나님과 원수 되는 신분에 서 있었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을 때 우리를 위해 그런 일을 행하셨다면 새로운 상태에 있는 현재의 우리를 위해서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하시겠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11:28에서 유대인들에 대해,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라고 한다.
‘화목’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있기 전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의 변화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그 안에서 원수였을 동안에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태도가 자기 아들을 보내사 너희를 위해 죽게 하셨을 정도라면 하나님께서 지금 너희를 그 자녀로 여겨주시는 일은 쉽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셨을진대 결단코 그것을 무효화시키실 리가 만무하다. 이 대목은 모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것이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 전체의 논조는 만일 우리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만 하면 구원의 확실성과 최종성을 알게 되리라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의 말씀은 좀더 명확히 아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이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18). “그는 죄를 알지 못하신 자로 우리를 위해 죄를 삼으셨다”(21).
그 다음에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결할 방도를 모색하셨다는 것과, 우리를 더 이상 원수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해 주실 용의가 있는 사람으로 여겨주신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그 일 다음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귀추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졌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화목을 이루시고 관계상의 변화를 가져오는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였을지라도 사랑하셨던 나머지 그의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시고,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던 것이다.
독생자의 경우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님과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 가운데 한 단순한 동안이나마 아버지와 아들의 교통이 끊겨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뼈를 깍는 아픔의 부르짖음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도의 논증은 더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이 바로 그 점을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을 당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왜 하나님에게는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는 길 외에는 다를 방도가 없었을까? 오직 한 가지의 답변만이 있을 뿐이다. 3:26의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다. “하나님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맞세워 놓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전존재로서 행하신다. 언제나 사랑하시면서 동시에 언제나 공의로 행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공의나 의와 상관 없이 행사된다고 해서는 안된다. 또 그의 공의나 의가 그의 사랑과 서로 떨어져서 행사된다고 해서도 안된다. 이 속성들 사이에 어떤 칸막이를 두어서는 아니된다. 하나님은 거룩이시오, 빛이시오, 그 안에는 두려움이 조금도 없으시다. 화목제물이 그렇게 필수적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독생자 안에서 죄를 형벌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보실 수 있으시고 우리를 값없이 용서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공의는 만족되었다.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여 하심이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그의 모든 영광스런 속성들이 함께 발현되는 것이다. 갈보리 언덕에서 그 아들의 죽으심과 예수의 피에서 공의와 사랑이 그 영광을 입고 모두 함께 비춰 나오고 있는 것을 본다.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더”. 이제 부자관계가 되었다.. 내가 원수되었을 때 나를 위해 가장 큰 일을 하신 하나님께서 갑자기 나를 포기하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을 그만 두게 하시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일을 상상해 본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 자체에 대해 모욕이 되는 것이다. 그의 사랑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을” 사랑이다.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온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을 뜻한다. 일단 칭의만 이루어지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온다.
10절의 마지막 표현, “우리가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라”. 다른 번역들은 “우리가 그의 생명 안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도의 진술은 우리가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by)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by'에 해당한다. 그것은 어떤 일이 행해지는 조건이나 상태를 말한다. 히 7:22-25,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신고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내가 죄에 빠지면 나는 사귐을 잃어버리는 것일까? 아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다.”(요일 1장).
우리는 그에게 접붙여졌고 그의 생명을 누리고 그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우리는 세상과 육체와 마귀와 싸워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를 파멸시킬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만일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는 우리를 떠나가게 하시지 않는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통과하여 결국 즉 영광에 이르게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공의와 영원한 의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었다면 그가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보다 작은 문제들에게 낭패당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벌써 그 자신의 죽으심 가운데서 그것들을 정복하셨다. 마귀는 힘을 잃었다. “세상의 임금들이 쫓겨났다”(요12:31). 그리스도는 승리하셨고, 그는 영광 안에서 살아나셨고, 우리는 그 안에 있다.
바로 그 주장이다.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는 그에게 연합되고 그 안에 있고 그의 몸의 여러 지체들과 그의 살과 뼈의 부분들이 되었다. 우리는 그의 생명 안에 있고 그리스도에에 접붙인 바 되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12절부터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않다는 커다란 원리를 다루어나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그 첫 실마리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기 때문에 영구히 안전한 것이다.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생명 안에서(‘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는 잘못된 번역) 구원을 얻을 것이라”. 우리는 그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며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었다.(엡2:5-6).
“의롭다 하신 자를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위엄에 찬 논증을 풀어나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가 우리의 위대한 구원을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12장 하나님을 자랑하지 못하는 이유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었은즉 회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0-11)
2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나니”, 3절에서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와 같은 표현으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이다. 이 말의 가장 좋은 번역은 “자랑한다”이다. 차이가 나는 것은, 2,3절은 이생과 죽음 너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것을 기대하고 자랑하는 것이고, 11절의 자랑은 하나님 자신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 “사람의 최고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원토록 그를 기뻐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를 사랑하고 찬양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쁨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시 33편,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라.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 34편, “내가 여호와를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 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시 103편,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찬송하라”
마리아 찬가(눅1:46-47),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네”.
그분을 자랑하는 필연적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가 소유하여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9절의 말씀대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이다. 하나님과 화목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또 그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고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 그런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자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자랑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즐거워하지 못하고 자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행위나 노력 선행을 자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는다.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들의 찬양은 자신들을 향한 것이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자랑할 수 없다.
또한 우리 자신들의 검은 마음과 악한 성질을 너무 지나치게 생각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랑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자기자신의 본성의 비열함과 어리석음 전혀 깨닫지도 못하는 쾌활하고도 경박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거짓된 기쁨이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다.
칭의의 절대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해서 마땅히 그래야할 정도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자랑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이루어진 사역의 완전성과 충족성이 한꺼번에 이루어졌다는
‘전체성’을 알지 못해서 그렇다. 우리의 성경 읽기는 너무나 겉핥기식이다. 성경을 성급하고 엉성하게 읽어치우는 것은 거의 유익을 주지 못한다. 거룩해지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데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이것들을 시간을 들여서 깊이 연구해 보아야 한다. 현대적인 그리스도인과 옛 그리스도인이 차이이다. 그들은 ‘주를 기뻐하는 것’에 관해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경박한 타입의 그리스도인은 결코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에 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자랑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본질과 그의 존재 그의 성품 그가 행하신 일을 숙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은 1-11절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9번이나 언급한 사실을 알았는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자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기뻐하는 것은 모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을 깨닫는 정도에 달려 있다.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생활에서 논리와 논증은 중대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옛사람에 속한 이성이나 논증이 아니다. 신앙 안에서 신앙으로부터 나온 신앙에 이르는 합리이다.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출발하여 그로부터 그의 추론을 끌어내는 것이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담대하게 논리적으로 생각해 나갔다. 논리적으로 추리해 나가는 것은 가정이 아니고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다. 여러분과 내가 하나님을 자랑하도록 인도해주는 위대한 계시로부터 추리하거나 추론하여 논리적 귀결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해한 적이 없거나 우리가 참으로 그것을 인식하기 조차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쁨과 확신이 부족한 그리스도인은 진리에 대해 명확하지 못하거나 무언가 보다 잘못된 것이 그에게 있기 마련이다. 그는 진리를 나타내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부끄러운 줄을 알라! 우리는 확신하지 못하고 기뻐하지 않을 권리가 없다. 확신한다는 것은 오만이 아니며 기뻐하지 않는다고 겸손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했다. 그러면서도 9-11절에서 놀랍게도 확신하고 있는 것을 보라.
겸손에 관해서라면 6-8절이 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여러분 자신을 그렇게 말한다면 그보다 겸손할 수 없다. “경건치 않았다”고 자신을 말하는 것은 그보다 더한 악담을 말할 수 없다. 거기다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는 말은 더한다. 이렇게 자신에 대해서 전혀 소망이 없음을 느끼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의지한다. 그리고 자기의 구원을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을 값없는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겸손과 기쁨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겸손과 기쁨은 보조를 같이 하는 것이지 정반대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난 거짓되이 기뻐하는 것이 두려워, 그리고 오만해지면 어떡하지”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오해한 사람이다. 참된 자기 검증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해준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이루신 완성된 사역을 알게 되고 결국 기뻐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의 자기검증이 기쁨으로 끝나지 못한다면 그것을 그릇되고 거짓된 검증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하며 우리는 양면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서만 멈추지 말고 비참함과 실패와 절망의 땅과 진흙 구덩이에서 머물러 있지 말고 그를 바라보라. 하늘을 보고 그를 자랑하고 그의 영광스런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하늘보좌 그리고 그의 다시 오오심을 생각하라. 그리고 그의 영광스런 나라!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항상 기뻐하라”.
그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이르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아드님은 오셔서 사역을 완전히 마치셨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영원전부터 계획하셨다가 시간 세계에서 실현하실 구원을 적용시키기 위해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성부께 영광, 성자께 영광, 성령께 영광. 위대한 여호와 삼위일체 영광 영광 영원토록. 아멘.
제13장 새로운 대목의 서론적 강해
롬 5;12-21
“그러므로”로 시작하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가? 그 열쇠는 10절 끝에 있는 한 작은 낱말에서 발견된다.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는 잘못된 번역이다. 그것은 ‘그의 생명 안에서’로 번역되어야 한다.
영어 개정역은 “그의 살으심 안에서”(in his life)로 했다. 우리는 ‘그의 살으심으로 인해’ 구원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 안에서’ 구원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화목은, 죄의 용서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여겨주신다는 선언에로 인도할 뿐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하여, 우리는 끝내 그의 생명 ‘속에서’ 구원을 받는다. 만일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와 우리 죄에 대한 심판에서 구출해 내셨다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우리를 분리시켰던 모든 것에서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그와 그의 생명에 연결됨으로 말미암는다.
사도는 10절의 논증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과 최종성을 보여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에 대한 궁극적인 증거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그 관계를 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12-21절도 이를 위해서 첨가된 것으로 본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다. 그러나 그 점은 단번에 그 전 위치와 그전 위치를 가져오게 한 원인을 생각하게 한다. 지금 사도는 그것을 다루어나가기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그러므로’란 말을 도입한 것이다. 그는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아담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므로’란 말로 표현된 관계성은 아주 분명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 구원이 용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전체 지위와 입장에 근본적인 변화가 왔다는 것을 계속 강조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나 전에는 ‘아담 안에’ 있었다. 바울은 우리 구원의 확실성과 최종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10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강조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그 문제에 관심이 있다. 구원의 확실성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에 달려 있다. 그래서 이것을 아주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상세하게 다루고 어떻게 신자와 모든 인류가 전에는 아담 안에 있고 지금은 이신칭의의 결과로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한꺼번에 구원의 필요성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방법의 영광과 완벽성을 나타내 준다. 실로 12-21절은 9-10절의 ‘더욱’의 속편이며 특별히 10절 끝에 있는 ‘그의 생명(살으심) 안에서’라는 표현의 해석이다.
저는 12-21절의 대목이 로마서의 심장부라고 담대하고 주장하고 역설한다(니그렌에 동조).
첫째, 이 대목은 앞에 진술된 모든 것의 요약이다. 사도는 여기서 새로운 방법으로 그 모든 것을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8장 끝까지 계속되는 진술의 시작이요 서론이다. 이 대목은 로마서 전체에서 가장 중차대한 부분이다. 이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허튼 소리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담에게 있었던 일과 우리와 아담과의 관계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모두 타락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믿는 모든 자에게 구속이 있다. 바로 이 문제가 이 대목의 주제이기 때문에 ‘그러므로’란 말로 그 주제를 도입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값없는 구원을 선물로 받아들이기가 언제나 어렵다. 사도는 여기 새로운 대목에서 그 점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전 인류의 내력은 우리와 아담의 관계의 차원과 우리에게 아담의 죄가 전가된다고 하는 면에서만이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류를 하나의 머리와 대표를 통해서 다루셨다.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전체 내력은 아담과 인류와의 관계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달려 있다.
둘째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아담과 우리의 옛관계가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표상을 제시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14절,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아담은 그리스도의 표상이요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아담을 이해하면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담과 인류와의 관계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구속받은 자와의 관계에 대한 그림자이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다(고전15:45). 아담은 첫째 사람이요 그리스도는 둘째 사람이다(상47절).
아담은 첫째 아담이요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이다. 인류에게 두 머리만 있을 뿐이다.
우리들 각자는 ‘아담 안에’ 있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의 머리이다.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이라고 한다. 진실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시대와 새 왕국과 새 질서를 함께 들여오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의 권속과 자녀의 일원이 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의와 기쁨과 평화 속에 결코 파괴되지도 않고, 아무도 우리를 그로부터 끊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새로운 세계 속에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하며 새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결정지어진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처한 상태와 지위의 영광들을 소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일들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면 이 진리들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단지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영역에 속해 있으며 새 인종의 일원이며,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자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기업을 받을 자라!”
이 중차대한 대목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는 무엇인가? 1) 원죄의 교리이다. 성경 가운데서 원죄교리에 대한 전형적인 구절이 여기에 있다. 이 대목은 원죄 교리의 충추와 중심이요 표준구이다. 2) 창세기 1~3장의 역사성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이 대목은 창세기의 설화를 문자 그대로 사실과 역사로 받아들인다는 전제 하에 나온 것이다. 3)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과 계약을 통해서 사람을 다루신다고 가르치는 ‘언약신학’의 차원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이 대목은 바울의 모든 서신서들 중에서 가장 광범한 영역을 다루고 있다. 성경 전체에서 비추어 보아도 그러할 것이다. 바울은 뒤돌아서서 구속의 모든 파노라마의 장관을 구경하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는 우리는 아담 안에 있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토록 그 안에 있는 것이고 그 안에서 안전이 보장된다. 8장 마지막 절에서 “다른 아무것이라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으리라”고 하는 것이다.
구원에는 “안에 있다가 밖에 있다” 하는 것이란 없다. ‘아담 안에’ 있거나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 만일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영원한 보장을 받고 영원히 그분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제14장 12~21절의 개관적인 분해
이 문단의 가장 중요한 논증, 주요 핵심은, 우리 모두가 날 때부터 아담에 연관되어 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여기서의 대 원리이다. 우리는 그 점을 확고히 붙잡아야 하며
우리 마음 가운데 맨 앞자리에 그것을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틀린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나무는 보면서 숲은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넓은 안목, 조감적인 관찰은 각각의 세부적인 난제들을 이해하고자 할 때 진수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가르쳐지는 위대한 진리는 우리와 아담과의 관계가, 본질적인 원리면에서
현재의 우리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같다는 것이다.
12절에서 비교가 시작되어 끝나지 않고 하나의 삽입문(13~17절)을 넣어 계속해 나간다.
15~17절은 13~17절의 주요 괄호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삽입문이다.
18~19절에서 바울은 결국 12절에서 시작을 했으나 삽입문으로 중단된 비교를 분명하게 결말짓고 있다.
‘그런즉’은 12절의 진술을 다시 거론하고 반복하는 것이다.
19절에서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래서 모든 것을 끝마친 것이다.
20절과 21절에서 더 깊은 요점이 도입된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일종의 추신이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율법이 가입함으로 은혜의 우월성이 훨씬 더 영광스럽게 비췰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죄의 본질을 알고 이해하고, 죄가 인류에게 어떠한 것을 가져다 주었는지를 알게 되고
죄가 모든 각인에게 예외없이 미쳤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수록
넘쳐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더 경탄하게 될 것이다.
12절은 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전체 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힌 구절에 속한다.
세상은 두 가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혀 있다.
첫째는, 죄의 보편성이다. 인류는 대부분 올바른 일보다는 그릇된 일을 하기 좋아한다.
둘째는, 사망의 보편성이다. 여러분이 첫 호흡을 시작할 순간 그것은 종말로 인도하는 호흡의 첫 단계이다. “모든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다”(히9:27). 진화론에 따르면 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죄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은 12절에서 발견된다. 사도는 “죄”를 의인화하고 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죄가 왕노릇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죄가 어떤 자질이 모자란 것이 아니며
소극적인 국면에 속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며 일을 만드는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다.
죄가 들어와서 다스리고 통치하고 왕노릇하여 엄청난 행동을 하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죄의 의인화는 성경적 교훈의 특징이다. 죄가 마귀의 인격을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도는 죄를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패하고 오염된 본성, 부단히 ‘표적을 맞히지 못하는 것’,
더 나아가서 불순종과 범죄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는 것의 의미한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하는 태도이며 혐오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죄의 정확한 국면은 다음과 같다.
1) 죄란 새 통치 원리가 사람의 삶에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타락한 상태에 있다는 것과 우리가 부패하여졌으며
우리의 습관이나 실제 행동들은 이 통치 원리에 의해 조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죄가 행한 일을 묘사한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동사는 ‘침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세상에 침입하여 들어왔다. 인간의 생명 속에 덮치고 들어왔다. 죄는 침입자이다.
하나님은 세계를 완전하게 창조하시고 그것을 낙원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다. 그때는 죄가 없었다. 그러나 최가 들어온 것이다.
사도는 이 엄청난 구절에서 우리를 타락의 교리와 만나도록 이끌어 간다.
인간은 원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생활을 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을 하고 만 것이다.
죄가 들어와서 범죄를 유발하는 반역과 부패한 생의 과정으로 나아가게 했다.
죄의 보편성은 타락의 교리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설명된다.
3) “또한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사망을 가져온 것은 죄이다. 죄는 죽음이란 재난의 원인이다.
죽음은 법칙이다. 죽음은 벌로써 온 것이다.
죽음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것이다.
4)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모든 각 개인에게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의 사실은 보편적인 것이 되었으며 우리 모두 죽으러 태어나게 된 것이다.
5)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이 이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 인간성이 그래서가 아니다.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거나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나 인간성을 대표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한 사람’ 한 개인을 말하고 있다.
실로 이 대목의 전체 요점은 한 사람 아담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이다.
바울이 12~19절에서 12번이나 ‘한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도는 인간성이 아니라 한 인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정직하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읽어보면
창세기 1~3장의 문자 그대로의 역사임을 바울이 믿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 주님도 역시 그것을 믿으셨다. 주님은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구약을 믿으셨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주님은 ‘한 사람’을 믿으셨다.
간추려서 말하자면, 여기의 교훈-성경 전체의 교훈-은 죄와 죽음이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간 생명과 인류의 노정 가운데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의 아담을 부정하면 모든 기독교의 존재 이유와 기독교 메시지는 허무한 것이 되고 만다.
성경은 하나로 일관한다. 그 모두는 서로서로 놀라운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에 하나의 위대한 테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과 인간 세상이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인간이 어떻게 잘못되었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얘기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성경은 역시 우리들에게 어떻게 하면 인간이 바로 될 수 있는가를 말한다. 아담? 그리스도? ”아담 안에서 그러한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도 그러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전 것에 관심을 집중하고 그것이 나의 모습이라고 고집하며 거기에 머무는 한
영적인 침체를 벗어날 수 없고, 새로워질 수 없다.
성령을 소멸하게 되고, 성경을 부인하게 되고,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이 이루신 일을 부정하게 되고,
그래서, 주님의 생명으로 은혜 안에서 왕노릇하는 삶을 살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털어버리고 일어서야 한다.
연약함을 붙들고 합리화하고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담 안’으로 되돌아가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상속자의 영광을, 소망으로 붙들고 즐거워하며 일어서야 한다.
구원은 ‘아담 안’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 그분의 생명과 영광을 사는 것이다.)
제15장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의 의미
두 가지 가능한 해석이 있다.
하나는 모든 이들이 실제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다(죄를 짓지 아니한 영아의 죽음은?).
다른 하나는 우리가 모두 죄의 본성을 가졌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다-칼빈.
여기서 사용한 시제는 부정과거형으로, 역사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사건에 단번에 이루어진 행동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13~14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이 말의 의미는 율법은 죄가 범법이라는 점을 증명해준다는 것이다. 5:21,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13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모세 율법이 규정하지 않더라도 죄란 있을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것을 죄로 여기시며 그것을 죄로 대우하신다는 것이다. 죄는 여전히 죄이다. 그러나 율법이 명백하게 주어지기까지는 그것이 범법으로 여겨지거나 계산되지 않는다. 율법이 없을 때는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고 죄가 범법으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의 기간 동안에 사망이 왕 노릇한 것을 보니 죄를 죄로 취급하고 계셨던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사도의 논증은 사망이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것 같이 죽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요, 그들의 죽음은 반드시 죄의 결과였음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아담은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의 법에 대해 죄를 지었다. 그러나 영아들은 죄행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죽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해석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 해석을 받아들이면, 아담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병행선과 우리의 관계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실제로 죄지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구원받는 자마다 그들이 실제로 선행을 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신칭의의 교리는 버려지게 된다. 영아들의 경우와 병행선의 중요성 때문에 모든 사람이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
칼빈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모든 이들이 죄인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이들이 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우리 모두는 아담으로부터 오염되고 부패하고 죄있는 본성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누가 감히 칼빈의 설명을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칼빈을 교황의 자리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실수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사도는 “우리 모두 죄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지, 우리 모두가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매우 중요한 요점이다.
만일 우리가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죄있고 정죄된 자로 여겨지고 그래서 사망이 우리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다른 편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는다고 말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을 내내 말해왔다.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 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중생했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은 것도, 우리가 성화되어서 의롭다 함을 얻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로마교회의 오류요 허위이다. 칭의와 중생은 함께 가지만, 중생되었으니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순서는 칭의가 중생에 앞서야 한다. 사람을 의롭다 하시기로 작정하실 때 하나님은 이미 그를 중생시키기로 의도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을 ‘불경건한 채로’ 의롭다 하시며 ‘죄인이며 원수인 그대로’ 의롭다 하신다. 이 병행선은 칼빈식의 설명을 완전히 배제한다.
위의 두 주장을 거절한다면, 우리의 해석은 어떠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사망의 왕노릇은 그것을 입증한다. 사망은 죄에 대한 심판의 일부이다. 사망은 언제나 죄책과
정죄를 전제한다. 실제적인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영아들까지도 특별한 죄책이 있음이 틀림없다.
무슨 죄의 책임인가? 바울은 역설하기를, 그들은 죄를 세상에 끌어들인 행동 즉 한 사람 아담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담의 죄가 전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개혁주의 교파에서 받아들이는 해석이다. 모든 사람은 아담의 원죄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12-14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15절에서 19절까지 아담의 한 범죄 행동에 대한 진술을 다섯 번이나 반복한다.
15절에서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모든 이들이 죽었다고 말하지, 간접적으로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들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16절에서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 있었고, 우리 모두는 우리의 머리요 대표인 아담 안에서 죄지었다.
17절에서 ”한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그것은 명백하다.
완전한 병행선을 이루면서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18-19절에서도 더더욱 분명하다. 18절, “그런즉(앞의 것들을 요약하는 말이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완전한 병행구이다.
병행선의 한쪽 편에서 진리인 것은 병행선의 다른 쪽에서도 진리이다. 우리는 “죄인”으로 정해졌다고 말하고 있지, 칼빈처럼 죄짓기 쉬운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
바울이 말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아담의 한 불순종의 행동이 우리 모두를 죄인으로 정해 놓은 것과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도록 정해 놓으신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칭점이 있는 것이다. “아담이 오실 자의 표상이기” 때문에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물론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죄있는 본성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우리를 정죄하고 사망에 우리를 복종케 한 것은 우리 모두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과 우리 모두 죄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죽음은 언제나 죄책과 현실적인 죄에 대한 심판이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에게까지 미치는 죄의 보편성은 우리 모두 아담 안에서 죄지었고 아담이 범죄했을 때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로서만 설명될 수 있다.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나 그의 생명과 그가 행하신 은혜를 입는다.
오늘날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은 아담이 죄지을 때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죄와 사망이 전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임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비에 싸인 문제이며 기이한 현실이다. 우리는 이 말씀들이 영감받은 종들의 통하여 온 것이며 정확무오하다는 것을 믿는다.
이 경탄할 만한 병행구에서 발견하였듯이 우리는 그 논증을 따라갈 수 있다. 그것을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연약할 때에, 경건치 않았을 때에, 원수였을 때에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기뻐한다.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하자.
제16장 우리와 아담의 관계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만일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면 정확히 말해서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한가? 우리는 아담과 어떤 관계인가? 사도가 한편으로는 우리가 아담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현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담과 전 인류와 정확한 관계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요한 답변이 있다.
‘사실주의적 관점’- 아담이 인간 본성의 총체라는 것. 그 한사람 아담 안에 모든 인간의 본성이 있었다는 것. 그 안에 전 인간성이 있었고, 그 이후 모든 사람 속에 있었던 인간성은 그 전체 인간 본성의 부분이라는 것이다. 전체 내의 각 부분들은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할 때 저지른 그 범죄와 함께 저질러졌다고 한다. 이 견해는 기독교 내의 저명한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었다.
저는 인간 본성을 수리적으로 나누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고, 또한 각 개인의 인간 본성은 아담 안에 있었던 본래의 전체 인간성의 파편들에 불과하다고 하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다.
그 주장은 히브리서 7:1~10을 근거로 한다. 특히 9~10절, “또한 10분의 1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10분의 1을 바쳤다고 볼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아브라함이 그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칠 때 레위는 이미 그의 조상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던 것처럼 아담이 범죄하여 율법의 정죄와 그 벌 아래로 들어갔을 때 전 인류가 아담의 허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망이 아담(과 전 인류)에게 이르렀다는 것이다. 아담과의 관계만을 생각하는 것이 ‘사실주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두 가지 일(아담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은 분명히 함께 거론되어야 한다. 그들은 평행선이다.
‘대표적인 관점’- 아담은 우리의 연대적 머리요, 대표라는 것. 연합적 의미에서의 연대원리를 강조한다.
아담이 인류의 ‘자연적적인’ 머리일 뿐 아니라 그에 첨가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전체 인류의 총수요 대표로 여겨주셨다는 것이다. 만일 아담이 복종하면 아담 개인으로 큰 축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모든 그의 후손들도 그 축복을 누릴 것이고 만일 죄를 지을진대 그에게서 나올 모든 사람들은 아담에게 임할 파국과 비참에 휩쓸려 들어갈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아버지의 죄를 자손에게 주어 삼사대까지 이르게 한다”.
이 두 사상은 분명히 12절에서 가르쳐진다. 분명한 것은 바울은 여기서 우리 모두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고,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했을 때 지은 아담의 한 범죄사실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아담의 그 한 죄를 우리 자신들을 포함한 전 인류에게 전가시켰던 것이다. 아담은 죄를 지었고 그래서 우리 모두 죄지은 것이다. 이는 원죄교리의 진수이다.
우리는 세상의 첫사람 아담과 우리의 관계에 의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을 의심할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도 똑같이 의심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여러분이 저에게 “아담의 죄가 내게 전가되다니 그것이 공정한 것인가?”라고 한다면 저는 그 대답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여러분에게 전가되는 것이 공정한가?”라고 묻겠다.
가장 현대적인 주석가들은 이 관계들은 철저하게 부인한다. - ‘로마서 5:12~21은 전형적인 랍비투의 교훈에 불과하다. 과학과 인류학은 그것이 불가능하며 처음에 한 사람 아담만이 있었던 게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아담과 같은 한 개인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창세기 3장의 내용은 실제적인 역사가 아니다. 바울은 무지하여 큰 실수와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복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복음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죄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율법주의적인 유대 사상이요, 공의와 진노와 심판에 관한 모든 사상들은 다 틀린 것이다.
만일 사도가 어느 하나의 문제에라도 실수를 범하였다거나 단지 그 당시의 무지 때문에 그러했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무엇은 안 믿을지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결국은 자신을 결정의 권위자로 세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마다 주장들이 다른 것이다. 그들은 학식과 학문을 자랑하지만 그들의 목장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영혼은 한 영혼도 없다. 그런 가르침은 교회들을 비웃는 일 밖에는 하지 못했다. 우리의 이해력과 이성을 최종적인 규제와 최종적인 권위로 내세우기 시작할 때 따라오는 결과가 그렇다.
성경의 권위란 무엇인가? 사도들의 권위는 무엇인가? 이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벧후 1:21). 사도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들을 언급하며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의 교훈’에 관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른다”(벧후 3:15~16)고 했다. 그는 바울의 서신들은 ‘사사로운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에게 독특한 권위를 부여했다. 사도 바울 자신은 자기가 가르친 것이 그 자신의 교훈이나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계시에 의해서 받은 것이라 했다(갈 1:11~12). 에베소서 3장에서 그의 모든 교훈은 그와 다른 사도들에게도 나타난 바 된 것이라고 말한다.
12절 마지막 소절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다. 이는 사도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의 진술은 아담과 아담 안에서의 우리의 타락은 역사적 사실성에 대하여 말하며,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그는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요, 예표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우리의 관계 속에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 속에서도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유사성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유사성은, ① 하나님은 아담을 우리의 머리와 대표로 지명하였다.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신약의 여러 곳에서 보듯이 그의 사역과 우리의 대표됨을 위해서 보내셨고 지명하셨다.
② 그가 인류와 인간성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양편에 다 해당된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니라”(45절).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다. 인류에게는 두 머리만이 있을 뿐이다. 첫째는 아담이었고, 둘째요 마지막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마지막 아담이다. 그리스도 다음에 그를 이어올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고 인류의 머리로 지명받는 다른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③ 아담과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으므로 각자는 언약적 머리이다. 아담과 맺은 언약은 이렇다. “네가 어떤 조건들을 지키는 한 나와 교제의 삶을 계속 누릴 수 있다. 저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금지조항이다. 만일 네가 그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정확히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자기 아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를 자기 백성의 머리와 대표로 지명하시고 언약을 맺으셨다. 언약은 만일 그가 백성들의 좌를 담당하시면 그는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율법에 복종하여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고 이 백성들의 죄를 지시고, 그들의 담당할 벌을 담당하시면 그들은 해방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될 것이다. 그것이 구속언약이다.
④ 각자 그의 모든 자손을 대표했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⑤ 각자 자기가 한 일의 효과와 열매들을 자기 자손에게 물려 주었다는 것이다. 아담의 죄와 그 결과들은 우리 모두에게 예외없이 이르렀다.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를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미쳤다.
우리의 유사점은 잠시 거기에 멈춘다. 사도는 역시 대조점, 비유사점, 아담과 그리스도의 머리격 사이의 차이를 계속 보여준다. 바울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 은혜의 값없는 선물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더욱더’ 알린다. “그러나 그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한쪽에서 ‘많은 사람’과 다른 쪽에서 ‘많은 사람’은 동일한 것인가? ‘모든’ 사람이란 의미도 같은 것인가?
같다면 만인구원론자가 될 것이다. 여러분은 이 ‘많은’(many)과 ‘모든’(all)을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이 난제들에 직면하여 바울은 그가 그렇게 기뻐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더’ 넘침을 계속 보여준다.
(17장,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 18장, ‘보편구원론 비판’)
제17장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롬 5:15)
진수가 되는 차이는 우리는 육신적으로 아담에게서 나왔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영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구약과 신약 사이의 명백한 대조를 참고함으로써 이 점을 예증할 수 있다. 구약의 경우는 모든 것이 물질적이다. 축복도 그가 소유한 소와 양과 낙타의 수로 나타난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와 정반대다. 구약에서는 진리가 외형적이고 물량적이고 물질적인 방법으로 선양되과 신약에서는 영적으로 선양된다. 구약에서는 육신적인 혈통으로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영적으로 다시 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할 수 없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노니”. 범죄와 은사란 낱말 자체가 대조를 이룬다. “범죄”의 결과는 사망이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12).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장)
“은사”는 값없는 선물이다. 그 은사를 설명하는 것이 이어지는 말씀이다. ‘더욱’의 의미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이므로 그의 한 행동의 결과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 ‘더욱더’는 사망과 생명 사이의 대조를 이룬다. 사망이 확실하다면 생명은 얼마나 더 확실하겠는가? 다른 의미는, 만일 하나님의 공의가 심판을 가져왔다면 그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은 ‘더욱더’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우리를 위해서 해 놓으신 일은 단지 우리를 아담 안에 있었던 곳으로 회복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을 주셨다. ‘더욱더’이다. ‘더욱더 많은 복 받았네’.
이 ‘더욱’을 낸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혜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전혀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을 향해 축복하고 은혜롭도록 이끌어주는 하나님의 성품이요 속성이다.
은혜는 무엇을 가져오는가? ‘은혜’란 ‘선물’을 가져온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은혜로 말미암는 선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사도는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넘쳤으리라’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 어휘를 어찌나 좋아했던지 17절과 20절에서 그것을 반복한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은혜의 ‘넘치는’ 특징이 사도를 사로잡고 깊이 감동시켜 이 장엄한 웅변을 토하게 한다.
사망은 끝이고 종말이다.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생명으로). 인도한다. 그것은 넘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한다. 발전하고 번성하고 계속 증가하는 것은 바로 생명의 본질이다. 은혜는 항상 흘러넘친다. 은혜는 잴만한 기구도 없고 한계도 없고 한정 지을 수도 없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그의 넘치는 은혜”(엡 2장). “그리스도의 측량못할 풍성”(엡 3장).
우리는 아담의 신분보다 더 나은 신분을 가지는 입장으로 옮겨진 것이다. 우리는 아담이 결하고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아담은 그리스도 안에 없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생명 밖에 있었던 것이다. 성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본성을 자신의 것으로 바꾸셨다. 아담은 결코 그런 처지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연합되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져 무죄하고 완전했다. 그러나 그는 시련기에 처해 있었다. 거기엔 그가 타락할 가능성이 있었고 타락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시련의 상태에 있지 않으며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없다고 저는 말씀드린다. 우리는 그것을 초월해 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바울은 그 일이 이미 우리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망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하늘 보좌에 그와 함께 앉힌 바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련기에 있지 않고 떨어져 나갈 수 없다. 그것이 아담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이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그 영광의 소망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거기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가 없느니라”(요 10:28-29).
성도의 최종에까지 이르는 견인은 우리를 향해 넘치는 하나님의 더욱더 많은 은혜로 인해서 보장되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8-39). 우리는 단지 아담의 본래 상태로 회복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고양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것을 보장하셨다. 그래서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여일 확신한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 그는 아버지의 독생자이다. 낳은 분이지 창조된 분이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는 피조물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우리는 지금 바로 그분에게 연합되어 있다.
축복은 그를 통해서 그의 순종을 통해서 우리에게 왔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축복은 없다. 그를 떠나서는 어떤 구원도 없다. 십자가의 죽음은 연극의 한 장면이 아니다. 그것은 있어야 되는 일이었다. 그것이 오직 한 길이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이것을 요구한다. 신적이며 영원한 졵재의 성실은 그것을 꼭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엑 독점적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만 온다. 그의 피가 흘려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가 다시 사시지 못하셨으면 거기엔 넘치는 은혜도 없었고, 우리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이란 말도 없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한 사람- 참 사람이요 참 하나님이시고 한 인격 속에 양성을 가지신 신인 그리스도 예수- 을 통하여 온 것이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니라”.
이 ‘넘치는 은혜’와 ‘더욱더’를 체험하고 있는 사람으로써 살 때만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로 향하여 올 것이다. ‘은혜의 풍성’을 즐거워하지 않는 삶은 일종의 죄악이다. 여러분이 왕자의 삶을 누리도록 되어 있는데 거지로서 싼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우리들은 결코 빈궁하게 살아나가게 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하늘나라 왕의 자녀’들이다. 여러분의 머리를 들라. 그리고 여러분의 생애와 체험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을 보이면서 세상을 살아나가시라. 그럼으로써 그의 은혜를 선포하고 그를 선향하시라.
제18장 보편구원론 비판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롬 5:15)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많은”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었으니 “많은” 사람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느냐의 문제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론을 보편구원론이라고 한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사도는 17절에서,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만에 해당된다고 한정하고 있다. 21-22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하고 있다. 전부가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만 해당 된다.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믿는 자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
성경은 시종일관 인류를 구원 받은 자와 버려진 자로 근본적으로 구분한다. ‘알곡’과 ‘죽정이’.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양’과 ‘염소’.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해야 한다. 어느 특정한 일개의 진술 위에서 하나의 원리를 발견하려 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는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그것은 하나의 완벽한 전체다. 어디서나 일관하고 있다. 만인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성경에 어느 한 곳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을 읽고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관찰하며 우리 자신을 그것에 철저히 굴복시키는 일이다. 신 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바로 이 점이 우리가 갈 수 있고 또 가야하는 한계선이다.
죄에 빠진 인간의 진정한 고통은 그가 언제나 이해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죄는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다.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않고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의 작은 마음을 숙이고 말해야 한다.
“물론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나의 본성이 그것과 반대되어 있다. 할 일이라곤 한 가지밖에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말씀하셨던 분에게 자신을 복종시킨다. 그의 마음의 하나님과 한 마음이다. 난 그분이 구원 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를 구별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를 믿는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든지 그것은 옳고 공의롭고 선하고 거룩하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안다. 난 이해할 수 없다”.
갈수록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주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을 블평하는 무서운 죄를 아주 무의식적으로 짓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나 취할 입장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창 18:25, 시 145:17).
언젠가 우리는 영광 안에서 지금 우리들을 당황케 하는 이런 일들 중 어느 것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기독교인들이 성경 교훈 가운데 난제에 부딪히게 될 때 갑자기 세상적인 방법으로 돌아가 철학이 늘 물어왔던 어리석은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을 볼 때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은혜 아래로 와서 계시의 영역으로 들어온 뒤에 갑자기 이성과 인간적 이해의 영역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여간 서글프지 않다. 이 시점에서 진정한 이해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믿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최종적인 종합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재와 성품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만족해야 함을 가르쳐주고 지시하고 있다.
사도의 교훈은 명백하다. 성경에는 보편구원론적인 교훈은 없다. 그것은 옛 사람의 철학적 사고방식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순전함’에 계속 있도록 하시길 원한다.
제19장 한 범죄와 많은 범죄
(롬5:16-17) (16)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바울의 목표는 아담이 한 일에 비해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 해놓으신 일의 영광스러운 우월성을 보여주는 데 있다.
“같지 아니하니”. 아담의 불순종, 아담의 범죄를 우리 대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완벽한 역사에 대조하고 비교하려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아담의 한 범죄가 정죄에 이르렀고 다른 쪽에서는 ‘많은’ 범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행동에 의해 장악된다. 심판은 죄의 결과이다. 그것은 정죄에 이른다.
이 점을 명백히 해야 한다. 그 아담의 범죄가 우리를 아담이 한 일과 죄를 스스로 따라 하도록 우리를 끄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결국 우리 자신을 정죄의 아래로 끌고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것은 정죄의 심판이 아담이 지은 한 죄의 결과로 온 것이라는 점이다. 아담의 한 범죄 결과로 우리 모두 아담으로부터 죄의 본성을 물려 받았는데 그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받은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바울은 정죄에 이르는 심판이 ‘한 죄’에 대해 내려졌다는 것이다. 사도의 역설은 아담의 ‘한 죄’의 결과로 유죄선고가 온 인간세계에 내려졌다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다른 쪽으로 옮겨간다.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노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심판의 반대가 은사이다. 은사는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값없는 은혜와 값없는 선물을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의 전적인 죄악성과 절망과 전적으로 쓸모없음을 안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값없는 선물은 심판에 반대된다.
의롭다 하심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그 한 범죄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지은 모든 죄, 많은 범죄에 관해서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우리를 위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전에 저지른 모든 죄와 범죄로부터도 구원받고 깨끗함을 받은 것이다.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은 그 안에서 모든 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한 범죄와 많은 범죄를 대조하여 그 점을 나타낸다.
최종적인 대조점은 ‘정죄’의 반명제인 ‘칭의’이다. 정죄가 법정적인 용어이듯이 값없는 은사의 결과로 나오는 반대도 법정적 즉 칭의의 법률적인 선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재판장으로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17절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죄는 심판에 회부되고 심판은 정죄에 이르렀으나 내려진 심판은 ‘사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나니”.
구원은 칭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는” 곳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사망이 왕노릇하였다”. 그리스도와 상관 없는 이 세상의 삶을 이 구절보다 더 완벽하게 압축시키는 진술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전 인류는 이 한 사람 아담의 죄의 결과로 사망의 폭군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던 것이다. 아담이 타락한 이래 사망은 전 세계 위에 왕 노릇했다.
세상은 공동묘지이다. 세상은 죽음과 우울과 종말의 장소이다.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 ‘받은 그들이’ 우리가 태어나기 아주 오래 전, 몇 수천년 전에 에덴동산에서 우리에게 있었던 일과 상반된다. 우리는 거기서 알지 못하게 죄를 지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받는다. ‘받은 그들’이다. ‘의의 선물’을 받았다. 그것은 우리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사죄보다 훨씬 더 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계산되고 우리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혀진다. 타락하지 않은 아담은 의로웠다. 아담은 결코 자기에게 미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지 못했다. 그가 잃은 것은 그 자신의 의였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인간의 의- 타락 전의 아담이 가졌던 의-만을 되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은 것이다. ‘더욱더’ 풍성함과 넘쳐 흐르는 그 사실에 온전한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확신-을 얻었나니”(히10:19). 그것은 모두 우리가 의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죄의 용서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주어졌고 옷입혀졌다.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라”는 무슨 뜻인가?
-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생활 속에서 그리고 지금 여기 현실 세계에서 왕 노릇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5-6).
-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준다”(히2:15).
- 죄가 그리스도인 위에 왕 노릇 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롬6:14).
- 더 이상 죄와 마귀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마귀를 대적할 수 있고 그를 도망치게 할 수 있다는 의미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피하리라”(약4:7).
- 넉넉히 이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장)
빌 4장의 영광스러운 진술도 같은 의미이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1-13). 바울은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고 있다. 그는 죄와 사탄과 생명과 사망 그 외 모든 것을 제압한 것이다. 그는 정복자 이상이다.
-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일들이 오고 있다. 우리의 현재 왕 노릇은 그에 대한 ‘첫열매’의 ‘시식’(始食)에 불과하다. 우리는 “영광과 존귀와 영원함과 평강”을 기대한다(롬2&,10).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나라를 상속하라”(마25:34). “장차 올 세상은 천사들에게가 아니라 ‘구원의 상속자들’에게 복종케 하신다”(히2:5).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계1:6).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5:10).
예수 그리스도는 왕중의 왕으로 묘사된다. 그럼 왕들은 누구인가? 여러분과 제 자신이다.
우리는 그와 함께 왕 노릇할 것이며 세상을 판단하고 천사를 판단할 것이다.
성부와 함께 최고의 왕관을 쓰신 성자와 함께 우리도 왕관을 쓸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전망이다.
‘더욱더’란 말과 ‘넘치다’란 말을 계속 사용하는 것은 놀랄 일이다.
그리고 그가 그 모든 것의 값없음과 충만함을 강조하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바로 이 순간에 주님이 이미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았다는 것 그래서 어떤 것이 우리를 대적할지라도
지금 여기 이 세상 삶에서 왕 노릇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는가?
그리고 우리는 늘 자신을 그와 함께 세상과 천사까지라도 판단할 자로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아멘.
제20장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인의 확신
(롬5:18-19)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5장 전체와 특히 12~21절 위대한 문단의 목적은 이신칭의의 완전성과 충족성을 보여주는데 있다.
18~19절은 13~17절의 사상을 자기 의중에 두고 모든 중간의 논증을 요약함과 동시에
12절에서 시작한 원래의 진술을 매듭 짓는다. 이신칭의는 확실하고 필연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5:1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는 말로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동일한 진술을 각 절 마다에서 정교화시켜 왔으며 그 절대적 확실성을 입증하였다. 이신칭의는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진리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었으면 우리의 최종에까지의 구원은 확실하고 분명하며 아무것도 구원을 빼앗아 갈 수 없고 그것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을 사도는 역설하고 있다.
사도는 8장의 절정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점을 말하고 논증해 간다. 8장 마지막에서 38-39에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한다. 5~6장의 대주제는 구원의 확신이다. 우리는 결코 그 점을 망각해서는 안되며 5:12이하에서 성화를 거론한다고 하는 해석에 잘못 인도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바울의 주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의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실성과 최종성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한 원리는 하나님께서 개별적으로 구원의 문제를 다루시기도 하지만 연대적으로 또한 한 총체의 한 부분들로 취급하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한 백성에게 속해 있으며 아담이 우리의 연대적 머리였던 것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의 연대적인 머리요, 대표라는 개념을 붙잡아야 한다. 사도가 다시 우리에게 지적해 주려고 하는 것은 아담 안에서의 우리의 존재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존재 사이의 차이이다.
18절에서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한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나아가서 19절의 상반부에서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라고 한다. 18절은 모든 사람이 죄인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고 19절은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다는 것이다. “된”은 ‘~의 범주에 넣다’ 혹은 ‘어느 특정한 신분으로 임명하다’를 의미한다.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담의 한 범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죄인으로 정해졌고 죄인으로 여져졌음을 역설한다. 같은 강도와 같은 의미로 19절의 하반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의인되었고 의인으로 정해졌다.
사도는 이렇게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여러분에게 일어난 것이 사실이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일어난 일도 역시 사실이라는 것을 알라. 만일 한쪽이 확실했다면 다른 한쪽도 동시에 확실하다는 것을 인식하라. 아니 더욱더 확실한 것을 알라. 왜냐하면 여기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구원의 모든 은사는 오직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때문에 우리에게 온다. 나의 나됨이 전적으로 아담에게서 왔듯이 내 모든 의와 나의 그리스도인 됨은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17절에서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였고 19절은 그 점을 더 강하게 진술하고 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되었다’라는 말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라. ‘정해 놓았다’, ‘~의 범주에 넣다’, ‘법적으로 ~으로 여기다’의 의미이다. 아담과 우리의 관계에서와 똑 같다.
우리의 구원이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우리를 구원한 것이 우리가 그에게로 옮겨지는 것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개별적으로 처리하신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천만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전부 이루어진 것이다. 즉 그의 생애, 죽으심, 부활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면 나는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일어나고 그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게 된다. 그것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렇게 하는 한 우리의 구원의 확신과 확실성은 결코 동요될 리 없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 모든 것은 내 것이 된다. 내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나의 의롭다 하심과 내 의와 내 거룩하게 됨과 아울러 최종적 구속이 되신다. 나는 그리스도를 쪼갤 수 없다.
그는 한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내가 그 안에 있다면 그의 모든 복락이 내게 온다.
“아, 그러나 내가 내일 죄를 짓게 되면?” 그래도 난 의인이다. 우리의 신분에 관한 한 그 전의 신분으로 ‘아담 안’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아담 안’에 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 바울은 다음 두 절에서 보여줄 것이지만 특별히 6~7장에서는 더욱더 명백히 보여줄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죄지을 수 있다 하더라도 율법 아래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과는 영원히 관계를 끊은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뜻이다. 절대로 이 점을 명백히 해야 한다. 나는 의인으로 규정 되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여겨 주시는 방식이다. 나는 이제 그의 권속이다.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요, 이제 내가 죄지을 때 다시 율법을 거역하여 죄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죄짓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죄수의 행위가 아니라 자녀의 행위이다.
지금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사랑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다. 내가 죄 지을 때 의인됨이 멈추는 것이 아니다. 비록 내가 무가치한 자라 할지라도 여전히 나는 의인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언하셨다. 나를 그 범주에 넣으셨고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한때는 의인 중에 있다가 다음에는 ‘아담’안에 있다고 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얼마나 괴이한 것인가? 그 사상은 어리석고 물론 전적으로 비진리이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실 때 우리는 의롭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새로운 신분이다. “아무도 그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상이 이 중대한 두 절의 논증이다. 이 논증을 정말 인식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테스트하는 방법이 있다. “난 확신한다고 말하기를 꺼려한다. 왜냐하면 내 자신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난 내일이나 후년에 죄를 지을 수 있어” 이런 투로 말하는 것은 곧 논증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여러분과 저의 구원은 오직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에 근거한 것이다.
복음은 순전히 도덕적인 사람에게는 위험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은혜를 더하게 할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 놀라운 진리를 알고 어찌나 놀라고 기뻐하던지 그것을 받기에 필요한 어떠한 노력도 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보라. 여러분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그에게로 옮겨졌고, 접붙여졌고 그 안에 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의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여러분을 죄인으로나 아담 안에 있는 것으로 보시지 않는다. 복음의 전체 요지는 바로 그것이다. 여러분은 ‘비참한’ 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비참한 죄인’이라 부르는 것은 이 전체 논증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는 ‘비참한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의인이다. 여러분이 죄에 떨어지고 실수할 때 여러분은 가족의 영역에서, 사랑의 관계에서 그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는 우리의 신분을 바꾸지 않는다. 우리의 서있는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대한 관계도 변하지 않는다. 언제나 자신을 오직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보라. 마치 전에 오직 전적으로 아담 안에 있었던 것처럼.
제21장 율법의 기능
(롬5:20-21) (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사도는 12~13절에서 율법을 언급했다. (롬5:12-13)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며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사망이 왕노릇했다.
‘율법이 들어온(가입한) 것은’ ; 죄를 따라서 들어왔다. 율법 자체는 죄와 구원처럼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첨가된 것이요 하나의 특별한 기능을 위해서 때가 차매 들어온 것이다. 첨가된 ‘따라 들어온’ 것이다.
율법이 따라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부터 연원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율법은 이 ‘죄를 더하게 하기 위해, 즉 ’증가케 하기 위해‘ 혹은 ’늘리기 위한‘ 것이다. 율법은 구원의 방도로서 의도된 것이 결코 아니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갈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설교자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할 기회를 주셨다고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러면 우리로 죄를 더 많이 짓게 하기 위해 고의로 율법이 들어왔다는 뜻인가? 그럴 수 없다. (약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 율법은 죄의 지식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① 나에 대해 죄를 규정짓기 때문에 율법이 죄지식을 증가시킨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죄짓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죄를 짓는다. 율법의 임무는 죄를 법전화시켜 주고 죄를 규정지어준다. (롬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롬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② 율법은 우리들로 하여금 죄의 진정한 본질을 그 깊이대로 이해하고 알도록 도와준다. (롬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이 나에게 죄의 깊이와 죄의 어리석음, 죄의 참된 본질, 죄의 심히 죄됨을 가르쳐준다. 율법이 없이는 이것을 알 도리가 없다. 율법이 우리를 가르쳐 우리를 비춰 주었을 때 우리는 세상에 들어와 우리 모두 위에 폭군 노릇을 하는 이 가공할 죄에 놀라게 되는 것이다.
③ 죄가 아담의 범죄 이후 우리 전체 성품을 왜곡시켰다는 그 가공할 힘을 가르쳐준다.
④ 죄의 무시무시한 속임수를 가르쳐 준다. (롬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그를 도울 양으로 주어진 율법이 그로 하여금 더욱더 죄짓게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율법 밖에 없다. 요약하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는다.” 율법을 설교하는 것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오늘날 세상이나 교회에 있어서 최대의 골칫거리 중 하나는 사람들이 마땅한 바대로 죄지식을 갖지 못한 것이다. 죄가 아주 가볍게 그리고 느슨하게 취급된다. 율법에 의해서 주어지는 죄의 지식이 없으면 그들은 피상적인 복음전도로만 만족할 것이다. 성경은 죄의 깊이와 어리석음 그리고 죄의 심한 속임수를 가르친다.
이를 확실히 알았던 시대에 영적 부흥이 있었다. 사람들이 불의와 죄의 깊이를 깨달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한다.
2. 율법은 죄에 대한 자각을 증가시켜 준다.
자기의 그릇된 것의 그릇됨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그가 더 큰 지식을 배우게 되었을 때이다. 율법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더 깊이 깨달아 후회하게 한다.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와 하나님의 율법에 우리 자신을 대적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윗,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 내 죄과가 주 앞에 있사옵나이다”. 현대의 선한 도덕적인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죄인이며, 죄인으로 살아왔다는 지적에 분개한다. 그들이 죄를 깨닫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그들을 자기의 선을 하나님 때문에 또한 그의 영광을 위해 하는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은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선한 도덕적인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의 피의 필요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죄와 율법의 관계에 대한 교훈을 빼버린 설교는 심각하게 잘못돼 있다. 인간을 하나님과 대면시켜 주어야 한다.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기 위해 주일에 한 번도 참석치 않은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사람은 가장 큰 죄인이다. 이것을 가르쳐주고 이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은 율법이다.
(마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첫째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관계 ,우리의 태도이다. 이웃에 대한 태도는 언제나 그 다음이다. 그것은 두 번째 계명이다. 그것은 첫째 계명에 ‘뒤따라’ 온다. 행위가 처음 오지 않는다.
이 교훈을 가르쳐 주는 것은 율법 밖에는 없다. 우리의 근본적인 실패를 깨닫게 해주고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죄스러운가를 알게 한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
3. 율법은 실제적으로 죄를 짓게 하고 죄속으로 밀어넣는다.
죄가 우리들에게 해온 일과 죄가 우리의 본성을 악용해 왔고 그렇게 우리의 심정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을 하지 말라는 바로 그 율법이 우리들 안에서 그 일들을 더욱 많이 하도록 정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롬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죄에 대한 지식은 어떤 사람이 죄짓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사람이 그 죄에 대한 지식을 알면 알수록 그것을 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기가 더 쉽다. 학교에서의 성교육이 그렇다. 율법은 “의롭고 선하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다. 율법에 무언가 나쁜 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선한 그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할 함이라”. 죄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이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율법 뿐이다.
4.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갈3:22-24)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초등교사는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가 충분한 수업을 할 수 있는 학교에 데려다 주는 사람이다.
2, 3백년 전의 위대한 설교자들은 ‘율법작업’이라 불렀던 일을 위해서 긴 시간을 소비했다. 오늘날은 율법에 관해 많은 것을 듣지 못한다. 오늘날 교회가 현재 상태에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 거기에 기인된 것이다. 우리 설교가 너무 피상적이다. 구원의 영광을 만끽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의 깊이에 관해 무엇인가 알아야 한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는 더욱 넘쳤기” 때문이다.
만일 20절의 앞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20절의 하반절은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스러움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거짓된 선지자처럼 되지 말자. (렘6:14) (렘8:11)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율법의 사역을 떠나서는 은혜의 본질과 능력을 깨달을 수 없다. 그는 먼저 죄가 넘쳤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율법은 사도가 말하는 바대로 죄가 더하게 한다. 그 다음에 ‘그의 은혜’를 누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토록 헤아릴 수 없는 그 은혜를 더욱더 만끽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다.
제22장 흘러넘치는 은혜
(롬5:20-21) (21)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첬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이 두 절 말씀은 1:16에서 이 지점까지 줄곧 말해왔던 모든 것의 요약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한 구원의 방도에 대한 놀라운 요약이다. 복음의 놀라운 요약. 이 두 절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6~7장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6~7장은 5:20과 21에 대한 확장된 주석이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만 머무르지 않고 사도는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한다. ‘더욱 넘치다’는 비교급의 표현이 아니고 최상급의 표현이다.
‘흘러넘쳤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가르치는 원리는 정확히 죄가 일한 정도에만 대처하여 역사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것은 은혜의 쪽에서 상대를 삼켜 버리고 훨씬 위로 초월하여 흘러넘치는 것이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 이 진리를 고수해야 하며 명심해 두어야 한다.
21절의 ‘사망’과 ‘영생’의 두 단어, 그 차이는 ‘더욱더’란 진술에 나타나 있다.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에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롬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 다음에 절정에 이르게 된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그는 1:16의 서론에서 선언하였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의 위대함과 영광스러운 그 넘침의 특징 때문이다. 그는 이 ‘더욱’이란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함으로 위대함의 국면을 나타내가고 있다. 그는 이 승리감으로 가슴벅차다.
만일 ‘더욱더’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진정한 구원관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칭의는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구원의 원천이요, 샘이다. 모든 축복은 그로부터 흘러나온다.
또한 같은 정도로 우리는 ‘더욱’과 흘러넘침의 원리를 붙잡아야 한다.
진정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서다.
이 확신이 있어야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할” 수 있는 소망을 갖는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다. 저는 성경을 강의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성경은 설교되어야 하고 그 메시지는 적용되어야 한다. 구원을 기뻐하고 있는가? 그 생각으로 가슴 벅차 있는가?
진리를 체험으로 깨달았는가? 죄에 대항하는 은혜의 진리를 즐거워하고 있는가?
사도의 관심과 열망은 그러하다. 모든 세기의 성도들은 언제나 이 진리를 붙잡고 있었다.
마틴 루터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알기 까지는 아주 비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난 뒤부터는 노래하기 시작했다. 존 번연은 자서전의 이름을 “죄인 중 괴수를 향한 넘치는 은혜”라고 하였다. 베드로가 풍부함! 넘침! 단순한 충분함이 아니다. 솟아남! 영원토록 솟아남!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엡2:7).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
참된 구원의 개념. 죄악의 깊이와 은혜와 자비와 긍휼의 높이를 알게 되는 것은
이 두 면을 함께 고려할 때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두 신분 가운데 어느 한 편에 들었다.
‘죄 아래’ 있든지 ‘은혜 아래’ 있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죄의 다스림과 지배를 받고 살든지, 은혜의 왕노릇을 받고 살든지 어느 한 편에 속해 있다.
죄가 자기에게 해 놓은 일, 아니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에게 한 일을 명확히 알지 못하면, 어떤 사람도
은혜의 영광과 위대함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갖지 못한다. 율법에 대한 합당한 설교가 없다면 은혜와
구원에 대한 진정한 개념도 없게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안타깝게도 복음적인인 교단이라고 하는 곳에서까지도- 가장 크게 결하고 있는 부분이 찬양과 영광이다. 우리는 율법의 작업을 게을리했고, 성급하게 ‘결신’으로 사람들을 몰아 세우기에만 바빴던 것이다. 위안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굉장한 고통을 겪고 난 뒤이다. 하늘의 영광을 가장 크게 맛보는 사람은 지옥에 뻗친 그림자를 맛보았던 죄인이다. 그것은 성경을 꿰뚫고 흐르는 원리이다.
눅 7장에서 눈물과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씼은 여인은 바리새인인 시몬보다 주님을 훨씬 사랑하였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였다.” 그리스도를 떠나 있는 인류는 “죄의 왕 노릇 아래 ” 있다.
죄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 아래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세상은
죄의 ‘통치’ 아래 있다. 죄는 하나의 폭군이다. 죄의 통치와 폭군 밑에 노예가 된 것이다.
(엡2:1-2) “(1)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퐁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사하는 영이라”
이것이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세상 사람들의 비극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죄는 인간의 불타는 정욕에 의해 왕 노릇하고 인간을 정욕과 음탕의 피조물로 취급한다.
죄가 왕 노릇 할 때 사망도 왕 노릇한다.
한 생명이 죄에 의해 다스림을 받을 때에 비극은 피할 수없이 결과되는 것이다.
아,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의 절망이여! 살아있는 사망이다!
우리의 심령이 비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할 때 긍휼로 가득 차야 된다.
죄로부터 완전한 해방과 자유와 구원은 은혜가 개인들의 심령 속에서 왕 노릇 하기 시작할 때,
은혜가 대 부흥시기에 왕 노릇 하기 시작할 때 뿐이다. 물론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때 죄가 우리 안에서 왕 노릇 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죄와 사탄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놀라운 은혜 안에서 행하신 일은
우리들로 하여금 더 선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한 것 뿐 아니라 우리를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탄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
‘더욱 넘쳐 흐르고’ 우리를 자유케 한 하나님의 은혜의 넉넉함의 성질을 깨달음으로써
기쁨으로 노래하고 있는가?
제23장 은혜의 왕 노릇
(롬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21절은 20절과 함께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21절은 20절의 주해이기 때문이다. 21절은 어떻게 해서 “죄가 더 심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하는 것이 진리인가를 설명해준다. 동시에 그것은 로마서 처음부터 이 지점까지의 모든 내용에 대한 하나의 결정적인 요약이다. 복음의 총체를 하나의 크고 감동적인 서술로 묘사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바울의 목적은 죄가 더해짐에 따라 은혜는 더욱더 넘쳐 그 죄를 삼켜버린다는 것이다. 죄가 인류에게 행한 일이 어떻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행한 일은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그의 의도는 계속 되풀이하는 ‘더욱더’에 의하여 드러났다. 바울이 여기서 채용하는 특별한 방식은 죄와 은혜를 의인화시킨다는 것이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 같이”.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사도는 로마 교인들이 은혜의 왕 노릇의 성격들과 그 왕 노릇의 영광과 은혜의 왕 노릇 안에 있는 ‘더욱더’의 요소를 깨닫기 소원하고 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에게 강력한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 확신을 가지는 유일한 길은 먼저 논증을 파악하고 그 진리를 객관적으로 아는 것이다. 사도는 그의 칭의교리를 강하게 부각시켰고 칭의를 받았다면 그는 끝내 안전하며 확신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원한다. 그 모든 것이 칭의 안에 있다. 그는 한꺼번에 은혜의 영광과 은혜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21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진술 가운데 하나이다. 저는 같은 본문을 되풀이 말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물론 그렇다. 그것은 제가 강단에서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잘하는 일이다. 저는 사도 바울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사도의 확증은 은혜가 죄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은혜는 죄의 유일한 적수이다. 은혜는 받을 만한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진 호의이며,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보여준 자비이며, 값없이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은 죄에 대한 대안도 아니며 그것을 목적하지도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죄 아래 있든가 ‘은혜 아래’ 있든가 이다.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다. 죄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은혜의 능력과 은혜의 법과 왕 노릇의 아래 있는 것이다.
구속의 역사는 죄에 대해 은혜의 승리로 끝나는 역사이다. 모든 성경은 이에 대한 것이다. 성경은 주로 두 세력 간의 투쟁의 역사이다. 은혜만이 죄를 침노하여 땅을 빼앗기에 넉넉한 오직 유일한 세력이다.
“은혜가 왕 노릇한다”고 사도는 말한다. 한 인간은 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그 안에서 은혜가 왕 노릇하기 시작한다. 죄인이 처해 있는 위치가 비극인 것은 그가 죄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진정한 고통은 단지 그들이 음주와 도박, 춤 등 나쁜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인류의 진정한 비극은 그가 죄의 노예이며,
스스로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것은 은혜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우리의 노력이나 애씀이나 행동을 보조하기 위해서 따라다니는 것처럼 들어온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로마 카톨릭은 은혜란 인간 이성과 행동과 열심을 보조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은혜가 단순히 우리에게 제공된 것이 아니다. 은혜는 역사한다. 죄가 우리의 생명 안에서 하나의 세력이었던 것같이 은혜도 우리의 생명 속에서 한 세력이 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은혜는 역사하되 왕으로 역사한다. 왕으로서 다스린다. 그것은 죄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안에서 왕 노릇 하는 것처럼 은혜도 정확히 같은 식으로 그리스도인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이다. 사도의 전체 의도는 은혜가 최상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어휘는 원수들을 정복하는 것을 암시해준다. 만일 은혜가 더욱 크게 왕 노릇하려면 죄와 많은 대적들을 정복해야 한다. 우리를 통제하고 통제 아래서 우리를 보호한다. 우리를 지켜주고 견뎌내게 하는 것은 은혜이다. 은혜의 세력은 전능한 힘이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에서 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구원의 서정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은혜는 처음부터 끝까지 왕 노릇하고 조종한다.
엡2장,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의 모든 부분이 전부 은혜에 속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내게 맡겨졌다면 실패할 것이다.
은혜의 왕국이 설립되고 개국된 것은 ‘창세 전’이었다는 것이다. 은혜는 시작되기 건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이에 열린 영원한 회의에서 그 권좌를 받은 것이다. 인간이 죄 때문에 멸망당해야 하는가?
은혜가 가입되고 전할 때가 되어 은혜가 즉위하여 권좌를 차지한다는 것은 신적인 결정이었다.
그것이 구속언약이다. 그것이 은혜 왕국의 시작이다.
“은혜가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려 함이라”. 의가 중추적이고 기본적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15,17).
(롬3:24-26)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의는 그리스도의 의이다. 그는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 오셨다. 인성을 입으셨다.
그는 율법에 복종하셨고 높이셨다. 그리고 일점일획까지 다 이루셨다.
그런 다음 십자가 상에서 율법이 죄에 대해 내리는 심판을 받으셨다. 율법은 옹호되었고 높여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의 분을 퍼부으셨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심에 있어서 정당하시고 의로웠다. 더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간주하고 우리에게 전가시켰다. 그것이 은혜가 왕 노릇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언제나 ‘의 안’에 왕 노릇한다. 그것은 율법과 공의를 높여주고 만족시켜 주고 완성시켜 준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은헤와 의가 분리되지 않아야 함은 매우 중요하다. 여러분이 그것들을 분리하는 순간 해괴한 결과를 가져온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히4장). 은혜가 왕노릇(보좌)한다. 보좌는 율법이 시행되고 공의가 베풀어지고 권력이 행사되는 곳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보좌는 은혜의 보좌이다. 은혜는 보좌에 첨가된 요소이다. 양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두 면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보좌에 가까이 있다는 것과 우리가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은혜라고 하면서 보좌는 잊어버리고 친숙하게 “친애하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는 담대함과 확신과 확증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가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 말들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좌는 은혜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이 두 국면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은혜의 왕노릇의 위대한 특징과 은혜가 왕 노릇하는 보좌는 의라는 것을 기억하자. 은혜는 하나님의 의와 상충되지 않는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면서 용서하실 수 있는 방법, 그가 의로우신 채로 계시면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하시는 방편이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3:26).
나는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나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은혜의 보좌’이며 또한 ‘의의 보좌’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아들을 내어 주실 때” 그리고 우리의 죄를 완전히 해결하셨을 때 하나님의 독생자 안에서 하신 일 때문에 그것은 은혜의 보좌이며 역시 ‘의의 보좌’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것에 비추어서 생각할 때나 기도할 때나 생활할 때,
이 복된 확신을 가지기를 허락하셨다.
제24장 은혜의 왕노릇의 계획
(롬5:20-21) (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은혜의 왕노릇의 영광과 승리는 구원 방식의 영광과 경이로움이다. 은혜의 왕노릇은 영원히 견고할 뿐 아니라 영원히 계획되었다. 모든 단계, 모든 부분과 세밀한 것이 우리가 흔히 부르는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영원한 도모 가운데서 결정되었다. 그 다음에 정책이 결정되었다. 이 진리를 확고히 붙잡으라. 그것이 구원의 확신에 대한 성경적 원리의 매우 필수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바에”(행2:23) 의한다고 했다.
은혜는 약하지 않다. 그것이 의롭기 때문에 강하다. 은혜는 율법을 파괴하거나 손상시키지 않는다. 은혜는 감상적으로나 감정의 차원에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은혜관이다. ‘은혜의 왕노릇’이란 용어자체가 그 힘과 능력을 알게 한다.
은혜의 계획은 두 가지 주요 면에서 본다. 사실적인 역사적 측면이 있다. 은혜는 시간 세계의 영원한 도모 가운데서 모든 것을, 그 모든 단계들을 결정했다. 은혜의 계획이 처음으로 발표된 것은 창3:15이다. 은혜의 통치에 대한 첫 번째 공표이며 거기에는 선지자적 예언이 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를 원수되게 할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 ‘원시복음’이면서 사실상 복음 자체이다. 은혜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목표이다. 구원역사의 시작이다.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 셋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 셋은 아벨이 죽은 후에 태어난 아들. 은혜의 계획의 외적 사역과 관련한 분리와 구분이 있다. 하나님은 셋의 혈통에서 노아라고 하는 사람과 그의 가족을 택하여 내신다. 다 합쳐서 8명이었다. 은혜의 통치의 계통이다. 다음에 아브라함으로 이어진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끝내고 끌어내고 구별하여 다른 나라로 인도해 가신다. 이삭의 얘기. “이삭에게서 네 씨라 칭하리라” “네 씨(이삭)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12:12; 22:18). 이삭은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을 가진다. 은혜의 역사는 에서로 이어가지 않는다. 야곱의 계보가 약속의 노선이다.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로 바뀐다. 특별한 민족의 시작을 본다. 이스라엘은 12 아들을 가졌다. 그들 가운데 유다가 택하여진다. 다음에 그 계통에 베레스가 나온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은혜의 왕노릇의 계획과 능력을 나타낸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죄와 근친상간이었다. 베레스를 따라가면 다윗의 아버지가 나오고 다윗에 이른다. 다윗은 장남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택한 사람이다. 그의 많은 아들 중 솔로몬이 택함 받는다. 어떤 실수도 없이 언제나 적재적소에 마땅한 인물을 뽑아내는 은혜의 특별한 프로그램이다. 솔로몬 때로부터 나사렛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다윗의 동리”에 태어날 때까지 분명한 목적과 정확하게 진행되어 나간다.
시간적 요소를 본다. 하나님께서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하기 때문에 어떤 일들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읽게 된다(창15:16). 이스라엘 자녀들이 포로로 잡혀 있는 정확한 기간이 4백년인 것을 훨씬 전에 아브라함에게 알리셨다(창15:13). 다니엘서 9장에 메시야가 태어날 정확한 때가 언제인지를 보게된다. 바울은 말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13:32). 은혜의 날이 시작되기도 전에 하나님께 알리신 바 되었다.
구약은 주님에 관한 모든 것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고 신약에서는 예언들의 성취를 보게 된다. 은혜가 왕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명백한 계획과 절대적인 통제를 암시한다. ‘왕 노릇’은 고삐를 쥐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모든 세목들이 필연적으로 전진해 감으로써- 한 단계 한 단계, 한 일 한 일, 한 부분 한 부분-이루어지게 되고 결국은 목적을 완성하고 이루는 것이다. 왕 노릇과 은혜는 함께 일했다. 은혜가 이 이상하고 신비로운 방법으로 왕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실패와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쓰여진 각인들의 크고 심한 죄에도 불구하고 그 계획은 원래 영원한 도모 가운데서 계획된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유다의 근친상간, 다윗의 살인죄와 간음죄.
왕 노릇의 요소가 아니라면, 은혜의 세력이 아니라면 전체 목적은 좌절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녀들의 상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사실상 바르게 되었다. 왕노릇의 역사적 국면은 성경 역사로써 끝난 것이 아니고 교회의 긴 역사와 기록에서 그것은 분명하게 보여졌다. 정규적인 목회사역. 남녀들이 부름받고 천국 백성이 되고 있다. 그러나 왕노릇은 교회의 대부흥 가운데서 더욱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은혜의 왕노릇’이 아니었다면 사람은 시작하자마자 교회의 역사를 끝나게 했을 것이다
각 개인들의 구원 계획도 창세 전에 전부 결정되었다. 구원의 서정이 그것이다. 로마서 8장은 모든 순서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고 있다. (롬8:28-30)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일을 계획하신다. 무한하신 능력을 가지고 위대하고 영원한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의 계획에 따라서 일하신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법칙’이라 부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같은 진리가 하나님의 나라에도 해당된다. 구원역사에 있어서도 정확하고 계획적이다. 구원은 ‘미리 아심’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개인들을 아시고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호3:2). 다음은 ‘미리 정하심’이다. 그가 예정받고 선택되지 않았으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벧전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선택 그 다음은 ‘효과적 부르심’이다. 그 다음에 중생이 온다. 동시에 아들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권속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넣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그것은 은혜의 계획의 외적 사역의 일부이다. 다음은 칭의이다. 우리는 믿음을 행사하기 때문에 의롭다함을 받은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다음에 성화, 마지막은 영화이다.
하나님은 경이롭고 영광스러운 이 모든 단계들을 계획하셨다. 은혜가 매 단계마다를 주장하신다. 만일 은혜가 주장함을 멈추면 전 과정이 붕괴될 것이다. 그것을 시작한 것도 은혜이고, 그것을 계속하는 것도 은혜이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얻었나니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은혜이다. 이 은혜의 왕노릇의 계획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은혜의 왕 노릇의 세력. 계획이 서 있으니 그것을 수행해 나갈 비상한 능력이 있다. 은혜가 왕 노릇함이 매우 능력있는 통치가 되지 못한다면 상황은 완전히 절망적일 것이다. 구원계획은 개벽부터 대적자 마귀의 저항을 만난다. ‘이 세상 신’.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 창 6장에서 온 세상이 그의 능력 아래 있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에서, 바벨론 포로. 그들의 상황은 전혀 소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남은 자가 예루살렘과 가나안에 돌아왔다. 오직 은혜가 왕 노릇의 힘에 의한 것이다. 개인적인 사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실패와 죄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사용하실 수 있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그 행진이 계속 되고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어느 때에는 어떤 무서운 힘이 일어나고 기독교가 아주 소멸돼 버린 것 같이 보일 때가 여러 번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원수들을 태양이 아침 안개를 흩어버리듯이 흩으셨다. 왕들과 군대들과 제국들과 지옥 권세들이 그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게 녹아버렸다.
오. 왕 노릇하는 은혜의 힘이여! 그래서 현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놀라고 흥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독교는 오늘날 아주 쇠미한 상태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에도 여러 번 그랬다. 이 계획을 좌절시킬 수 있거나 은혜의 통치와 그의 근원적인 계획가 졀정된 목표 사이를 이간 시킬 수 있는 악마의 괴수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은 아무것도 없다. 여러분은 ‘은혜의 왕 노릇 만큼’ 확신을 주는 어떤 것을 알고 있는가?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 위대한 계획이 위대한 영역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는가? 이 위대한 목표는 그의 무한한 은혜 안에 있으며 우리들을 포함하고 있다. 여러분 자신을 보지 말라. 목적을 보라. 계획을 보라. 은혜의 왕노릇을 보라.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의 발걸음을 반석 위에 든든히 세웠다는 것과 아무것도 그것을 흔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복되도다. 은혜의 왕 노릇이여!”
제25장 은혜의 왕노릇의 권능
(롬5:20-21) (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은혜의 왕 노릇’의 힘이 죄의 세력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은혜의 ‘더욱더’와 ‘넘침’과 ‘흘러넘침’으로 은혜의 압도적인 힘을 강조하고 있다. 구약 역사 가운데서 은혜의 왕 노릇 계획을 수행하셨다. 개인들의 경우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었다. 개인들의 약점과 무지와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택하여 쓰셨다. 죄의 가공할 힘과 노예 신분과 죄의 군주와 왕 노릇에서 어떤 사람이 구속되고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죄와 마귀의 힘보다 훨씬 더 큰 은혜의 왕노릇 밖에는 이 일을 할 수 없다.
죄의 퉁치와 지배 아래 있는 한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은혜의 능력을 본다.
1) 은혜의 세력이 정복해야 하는 첫 번째 것은 우리의 영적인 죽음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너희를 살렸도다”(엡2:1).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채 이 세상에 태어난다.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그 의미는 우리 모두는 영혼의 관심에는 죽어있고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죽어 있으며 영적인 일에 대하여 죽어있다는 의미이다. 은혜는 이 죽음의 상태를 극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2)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이 정복되어야 한다. 자연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8:7).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한다”(고전2:14). 어떻게 핍박자요 모독자요 행악자인 다소 사람이 가장 큰 전도자가 되었는가? ‘은혜의 왕 노릇’ 때문이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한다. “효과적인 부르심”. 불가항력적이고 효과적인 은혜와 부르심이 효력을 발생한다. 우리의 적대감은 제거되고 우리의 죽음은 우리를 소생시키고 우리에게 생명을 넣는 은혜의 권능 있는 역사에 의해 정복되는 것이다. 은혜가 불가항력적이 되지 못한다면 어떤 구원도 없을 것이다.
3) 은혜의 힘은 자기 죄를 인식하고 통회하게 한다. 은혜의 힘이 그를 쳐서 땅바닥에 뒤접어 엎을 수 있다. 아무것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오만한 다소 출신 바리새인으로 하여금 “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 줄 안다”고 말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은혜의 힘이다.
4) 은혜는 계속 우리에게 진리를 설득시켜 나간다. 우리의 생각과 이해 위에 역사한다. 그 결과 늘 조롱하던 진리를 보게 되고 갑자기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붙잡기를 열망한다. “살리심” “중생”도 은혜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예증한다. 우리를 신자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살리시고 영광 가운데서 하늘에서 자기 오른 편에 앉히시는데 사용하신 것과 같은 능력이다. 은혜가 인간을 다루어 변화시키기 위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끌어올린 힘을 행사한다고 바울은 말한다(엡 119-23).
은혜의 힘은 ‘제지하는 힘’이다. 성령의 구원하는 역사를 훼방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이 자제하는 은혜의 능력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필요하다. 우리를 붙드시고 금하시는 은혜의 능력 그리고 우리의 불멸의 영혼을 상케하고 위태롭게 할 것들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은혜의 능력에 감사하자.
5) 은혜의 능력은 성화시키는 은혜 혹은 우리가 성화하는데 역사하시는 능력이다. 육체 안에 거하고 있는 죄에 대항하여 나타나는 은혜의 능력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롬7장). 나 스스로 구원하지 못한다. 그에 대한 유일한 답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리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로다”. 이것이 바로 은혜가 역사하는 힘이다. 그것이 나를 성화하고 내 속에 거하는 죄에서 나를 건져내는 은혜의 능력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우리는 “그의 능력이 우리의 죄를 다스리는 것”(아이작 왓츠)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자.
6) 우리가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지켜 주시는 은혜’이다. 우리를 영원토록 공격하고 위협하는 우리의 대적자 세상과 육체와 마귀로부터 지켜주시는 것이 은혜의 능력이다. (약4:4-5)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마귀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 다음으로 세다. 마귀는 ‘세상 신’, ‘공중 권세 잡은 자’,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 거룩한 천사들은 마귀를 조롱하지 않는다. 모세의 시체를 놓고,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유9). 어떤 그리스도인도 마귀를 조롱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마귀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그가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오직 은혜의 통치하는 권세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벧전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우리를 ‘찾아 발견한’ 능력, 우리를 사망과 적대감에서 건져낸 능력만이 우리를 정결하게 지킬 수 있고 지킬 것이다. 우리에게 시련과 환난이 닥쳐와도, 어둡고 위협적인 모든 것에 둘려싸여 있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지키실 것이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기뻐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바울은 환난이나 시련 가운데서도 ‘약한 것들을 자랑’할 수 있다고 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약할 때에 강해진다고 한다(고후12장 육체의 가시).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신33:27). 이것이 바로 은혜의 힘이다.
7) “권능을 주시고 견뎌내게 하시는” 은혜. 성도가 최종에까지 견뎌내는 것(성도의 견인)을 가능케 하고 보장해 주는 것은 오직 왕 노릇하는 은혜의 능력 밖에 없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리돌을 놓을 때에 누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슥4:7). 머리돌이 확실히 놓여지게 될 것은 은혜가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끝까지 이루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다”(요10:28)고 말한다. 은혜의 왕 노릇은 죄와 마귀의 그것보다 무한정하게 더 능력이 있다. 아무 것이나 아무도 우리를 그에게서 낚아챌 수 없고 그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롬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순간에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자리잡고 있다. ‘하늘 보좌’에 앉아 있다(엡2:6). 그것은 그렇게 확실하다. 견인케 하는 은혜, 권능 있게 지켜나가는 은혜! 만일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모든 조직은 무너진다. “그의 자비하심으로 시작하신 일/ 그의 능력의 팔로 이루시리” “그의 손에 있는 생명책에/ 내 이름 지울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은혜의 표로/ 그의 가슴에 새겨져 남아 있으리라” (토프래디).
우리에게 왕 노릇 하는 은혜의 능력을 베푸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것이 확신의 터전이다. 주께서 결코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막11:22의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신실함을 붙잡으라”로 번역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붙잡으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결코 놓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붙들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를 붙들고 있는 나의 약한 손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나를 붙잡고 있는 그의 강한 손이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2).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오더라도 그가 우리를 결코 놓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능력이 무한하고 영원한 능력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그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빼앗아갈 자가 없다.
오, 복되고 능력있는 은혜의 왕 노릇이여! 그것을 느끼는가? 붙잡고 있는 그 힘을 느끼는가?
우리의 안전보장을 아는가? 그것은 모두 은혜의 능력 안에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자.
제26장 넘치는 은혜의 승리
(롬5:20-21) (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은혜의 왕 노릇과 은혜의 승리와 영광을 고찰했다. “왕 노릇하다”는 “왕으로써 다스린다”의 뜻이다.
은혜는 항상 주고 죄는 항상 빼앗아 간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무도 그에게 주는 사람이 없었다”.
죄는 항상 고갈시키고 우리로부터 탈취해간다. 죄가 아주 많이 주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다. 인간을 피곤케 하고 기진시켜버리는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거짓되고 위선적이 되도록 충동질해 놓고는 결국은 그를 낙담케 만들어 놓는다.
은혜의 특징은 주는 데 있다. 주되 국왕답게 준다. 은혜에는 인색한 것이란 전혀 없다. 주되 값없이 준다. 주되 풍성하게 준다. 존 번연은 “죄인 중 괴수에게 베푸신 넘치는 은혜”라고 했다. 은혜의 특징이다.
사도는 3:24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했다. 5장에서 “더욱” “넘치는” “흘러넘침”의 말로 계속 강조하고 있다.
은혜의 ‘관대함과 아량’ 흘러넘침에 대한 진술들이 있다. (요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4:13-14)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신다”(고9장). 에베소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1:7),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2:7),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3:8).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아주 많은 것을 포기하고, 고되고 어려운 길을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믿게끔 하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벧전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보다 더한 것은 없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 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이를 수행하기 위한 이 여러 각양 은혜로써 우리는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다르니”(롬12:6).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은혜는 교회와 그 교인들의 봉사 안에서 왕 노릇한다. 교회가 건설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 위한 것이다.
“영생에 이르게 함이니라”. 은혜의 궁극적 승리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표는 영생이다. (엡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유1:24-25)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은혜의 퉁치의 최종적인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은혜의 통치는 우리를 점도 티도 흠도 없이 될 최종적인 완성에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은혜의 최종적인 승리는 베드로가 말한 장래의 그 큰 때에 보여질 것이다. (벧후3:9-10)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마지막에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주 위에 있는 죄의 악한 자국들이 완전히 불에 타서 녹아질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거하게 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은혜의 왕 노릇 아래 있는 인간의 최종적이고 영원한 상태로 인도될 것이다. 우리는 완전해질 것이고 우리는 영화롭게 될 것이며 온 세상이 영화롭게 될 것이며 영광스런 하나님의 존전에서 영원히 있게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은혜의 왕노릇이며 극적으로 도달할 지점이요 은혜의 최종적인 승리가 될 것이다.
사도는 은혜를 인격화시켜서 표현해 왔다. 죄와 은혜를 힘의 갈등으로 대조해 왔기 때문이다. 사실상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는 것을 묘사해 왔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 그분을 바라볼 때 은혜의 가장 고상하고 가장 영광스런 국면들 모두가 명백하게 보여진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구속하는 은혜의 놀라움과 승리와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은혜는 그로 하여금 낮아짐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은혜의 진정한 특징을 본다. 인색하지 않음과 모든 것을 본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이 은혜의 왕노릇의 특징을 아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의 심정에 있었던 것은 은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망을 무너뜨렸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었다.”(고전15:54). 무덤에서 일어나신 후에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
(히1:3)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이시오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이다”. 그는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인간 역사의 전 과정을 움직이고 다스린다. 교회의 장래에 대해서나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관해 아무 걱정도 말라. 그것은 모두 그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모든 것이 그의 권세 아래 있다. 그는 불가불 왕 노릇한다. 그는 이 순간에도 왕 노릇하고 있다. 우리는 절대로 그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계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그는 하나님과 그를 믿는 우리 신자들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향하여 전능한 능력으로 싸우신다. (계19:19-21)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계20: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계20:14-15)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이상이 주께서 죄에 대한 은혜의 최종적인 승리를 성취할 방법이다. 그 모든 것이 일어나게 될 때 (고전15: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그의 모든 원수는 정복되고 파괴될 것이다. “그 다음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거기 있지 않더라”.
(계21:1-4)“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것은 승리가 이루어질 때 오는 것이다. 이 모든 영광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확실히 인도해 가실 영광이다. 은혜가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르게 될 영생이다.
-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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