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장 기도 : 믿음은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기도의 본질과 가치 1-3)
1. 믿음과 기도
지금까지 논의를 통한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인간에게는 선이란 것은 전혀 없고, 구원에 도움이 될 것도 전혀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곤란에 빠진 자기를 구해낼 힘은 자기 밖에서 구해야 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이 계시는 기꺼이 또 거저 주신 것이라는 설명이 후에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께서는 불행한 우리에게 행복을, 궁핍한 우리에게 모든 부를 주시겠다고 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보고를 우리에게 열어 보이시고, 우리의 믿음이 전적으로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우러러보며, 우리의 모든 기대가 그를 의지하며, 우리의 소망이 전적으로 아들에게 밀착하여 안식을 얻게 하신다. 이것은 삼단 논법으로 이끌어낼 수 없는, 저 은밀한 숨은 철학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눈을 뜨게 하여 그 빛을 보게 하신 사람들만이 이 철학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다(시 36:9).
그러나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교훈을 받은 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에게 없는 것이 모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있게 하셔서(골 1:19, 요 1:16 참조) 마치 우리가 넘쳐흐르는 샘물에서 물을 퍼내듯 은혜를 그리스도께로부터 얼마든지 얻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줄 아는 것들을 찾으며, 기도로 그에게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좋은 것의 주인이시며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신 것과, 그에게 구하라고 상기시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의 앞에 가서 달라고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땅 속에 감추인 보화가 어디 묻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어도 그 보화를 무시하는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등한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사도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정하였다. 믿음이 복음에서 나는 것과 같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훈련을 받는다(롬10:14-17). 그는 조금 앞에서도 꼭 같은 뜻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마음속에 복음의 증거를 인치는 영, 즉, 양자의 영이(롬 8:16), 우리의 정신을 고무시켜 감히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소원을 아뢰게 하며, 말로 다할 수 없는 탄식으로(롬 8:26), 아무 의심 없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롬 8:15).
그런데 이 마지막에 언급한 점을 우리는 앞에서 이미 간단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이제 더 자세히 논해야 되겠다.
2. 기도의 필요성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 곁에 우리를 위해 저장되어 있는 보물에 우리의 손이 닿으려면 기도의 힘을 빌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교통이 있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약속하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었고, 필요한 때에는 또 약속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체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서 직접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대해도 좋다고 약속하신 것은 또한 기도를 통해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다. 주의 복음이 우리에게 가리켜 주었고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본 보화를 기도로 파낸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가, 그리고 기도를 드리면 그것이 얼마나 많은 방면에서 유익한가? 이는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유일한 안전한 요새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데 있다고(욜 2:32 참조) 하늘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의 일들을 지켜보시며 보호하시는 그의 섭리와, 약하고 거의 쓰러지려고 하는 우리를 지탱하는 그의 힘과, 비참하게 죄에 눌려 있는 우리를 받아들여 은혜를 입혀주시는 그의 인자하심이 우리와 함께 있기를 기원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전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으로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도함으로써 기원한다. 따라서 우리의 양심에 특별한 평화와 안식이 온다. 우리는 긴급히 필요한 일을 주 앞에 알리고 나서, 우리의 어려운 일들을 주께서 샅샅이 아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또 주께서는 우리를 가장 잘 돌보아 주실 의사와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확신하고 완전히 안심한다.
3. 반대 의견 : 기도는 없어도 되지 않는가? 기도해야 하는 여섯 가지 이유
그러나 어떤 사람은 상기시켜 주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점에서 곤란을 당하고,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지를 아시지 않느냐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마치 우리의 목소리로 깨우시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졸고 계시거나 심지어 주무시고 계시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시는지를 모른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명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 때문이 아니고 우리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것, 자기들에게 이익이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며, 이 인정을 기도로 증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당연히 받을 것으로 여기시는데 이 입장은 정당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제물을 드려 하나님을 경배할 때에, 그 유익도 우리에게 돌아온다. 따라서 저 거룩한 조상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 있게 찬양하면 할수록 그 은혜를 받기 위하여 기도하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엘리야의 예만 보아도 넉넉할 것이다. 그는 아합 왕에게 비를 분명히 약속한 후에, 하나님의 뜻을 확신했지만 그래도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고 애써 기도하며, 사환을 일곱 번 보내서 확인하게 했다(왕상 18:42). 이는 자기가 한 예언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생기가 없어지거나 태만해지지 않도록 소원을 하나님께 알려드리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 감각이 무디고 마비되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을 지켜보시며,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도와주시는 때도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기도하는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을 항상 찾으며 사랑하며 섬기겠다는 소원과 열의가 우리 마음속에 불 일 듯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되려면 곤란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거룩한 군원의 닻으로 믿고 그에게 달려가서 피난하는 습관이 붙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 알려드리지 못할 부끄러운 욕망이나 소원이 우리 마음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되려면 하나님의 눈앞에 우리의 모든 소원을 내놓으며, 우리의 속마음을 토로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때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은혜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시 145:15-16 참조). 넷째로, 우리가 구하던 것을 얻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주셨다는 확신으로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명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동시에 다섯째로, 기도로 얻었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더욱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끝으로, 우리의 연약한 정도에 따라서 습관과 경험으로 그의 섭리를 확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며, 우리가 곤란한 때에 그에게 빌 길을 친히 열어주신다는 것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언제나 도와주시며, 말씀으로 달래시는 것이 아니고 즉각적인 도움으로 지켜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결코 졸거나 게으른 일이 없으시면서도, 게으른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잠자며 게으르신 것 같은 인상을 주시는 때가 많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훈련시키셔서, 우리가 그 분을 찾으며 그분께 간구해서 큰 유익을 얻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을 기도에서 떠나게 하려고,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일을 지키시며 우리가 귀찮게 간청하는 것은 무익한 짓이라고 떠들고 있으나, 그들의 행동은 너무도 미련하다. 이는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라고(시 145:18) 하신 주의 증거가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말로 떠들어대면서, 주께서 언제든지 기꺼이 주시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간구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짓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께서 자진해서 너그럽게 주시는 바로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기도로 그것을 얻는 것으로 인정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신다. 이 점에 대해서 시편에 있는 저 인상적인 말씀이 증거하며, 여기에 해당하는 비슷한 구절들이 많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벧전 3:12, 시 34:15). 이 문장은 경건한 이들의 구원을 스스로 열심히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태한 경향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믿음의 훈련을 제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곤란하고 눈먼 자들을 돕기 위해서 지켜보고 계시지만, 우리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더 잘 증명하시기 위해서 우리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려 하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는 것과(시 121:4), 그는 마치 우리가 게으르고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우리를 잊어버리신 듯이 활동이 없으시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다 사실이다.
(올바른 기도의 법칙. 4-16)
첫째 법칙 : 경외. 4-5
4. 하나님과의 대화에는 경건한 초자연성이 필요하다
정당하고 합당한 기도를 드리기 위한 첫째 법칙은, 하나님과 대화하려는 사람에게 합당한 정신과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 자세를 바르게 하려면, 우리를 곁으로 이끌어 하나님을 바르고 순수하게 주시하지 못하게 하는 육신적인 근심과 생각을 버리고 전심전력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정신 자체를 초월해야 한다. 내가 여기서 요구하는 것은 정신이 세상적인 것을 초월하여 어떠한 근심으로도 여러 가지 괴로움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큰 근심으로 인하여 기도할 열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이 깊은 구덩이에서 죽음에 직면해서 근심은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를 향하여 고통을 호소하는 것을 본다(시 130:1 참조).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것은 원래 떠돌아다니는 우리의 정신이 이질적이고 외부적인 염려 때문에 이리저리 끌리거나, 하늘을 잊고 땅에 얽매이는 일이 없도록, 모든 염려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그 자체를 높이 초월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눈멀고 미련한 이성이 고안 해내는 것을 일체 하나님 앞에 가져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정신은 그 허무한 본성의 한계 안에 붙들려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순결한 상태를 목표로 비약해야 한다.
5. 무례하며 불경건한 기도를 배척함
두 가지 일에 우리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자기의 능력과 노력을 기도에 바쳐야 하고, 흔히 그렇게 하는 것처럼 산만한 생각으로 주의가 흩어지지 않아야 한다. 경외하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경박한 태도는 하나님께 대한 공경과는 가장 반대되는 것이다. 정신을 집중하기 어려울수록 우리는 더욱 노력해야 한다. 사람은 아무리 기도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도 쓸데없는 생각들이 어느새 스며들어 기도의 진행을 막거나, 굴곡이 많은 곁길에 들게 하여 앞으로 나감을 더디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과의 친밀한 대화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는데,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혼합함으로써 그분의 크신 인자하심을 모독하는 것이 얼마나 합당치 못한가를 여기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마치 보통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같이, 기도 중에 하나님을 소홀히 하고 이리저리 뛰어 다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엄하심을 깊이 생각하여, 세상적인 걱정과 애착을 일체 버리고 나서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들만이 충분하고 합당한 기도 준비를 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두 손을 드는 형식이 생긴 것은 생각을 높이 비약시키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다고 사람들이 느꼈기 때문이다. 시편에서도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라고 하였다(시 25:1).성경에서는 "기도하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예컨대, 사 37:4). 이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찌끼 위에" 주저앉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렘 48:11, 습 1:12 참조).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그럽게 대하시고, 우리의 근심 걱정을 자신의 가슴에 털어놓으라고 친절하게 권할수록, 하나님의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이 은혜를 무시하는 우리의 죄는 더욱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은혜를 더 중시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며, 정신과 노력을 정성스럽게 기도에 바쳐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의 정신은 이 여러 가지 장해물과 굳세게 싸워서 이기고 초월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 이상의 것을 구하지 말라는 또 다른 점을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을 그의 앞에 쏟아놓으라고 하셨지만(시 62:8, 시 145:19 참조), 우매하고 사악한 감정은 무엇이든지 날뛰게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경건한 사람들의 뜻에 따라 행동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나, 그들의 방자한 뜻에 양보하시기까지 인자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점에서 중대한 죄를 짓는 것이 보통이다. 경솔하고, 몰염치하고, 무례한 태도로 합당치 못한 일을 하나님께 감히 조르며, 어떤 망상이든지 닥치는 대로 뻔뻔스럽게 하나님 앞에 내놓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우둔하고 우매해서 사람 앞에서도 말하기를 심히 부끄러워해야 할 지극히 추악한 욕망을 감히 하나님 앞에 모조리 털어놓는다. 이런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행동은 세속 문인들도 희롱하며 미워하기까지 했지만, 이 죄악의 세력은 언제나 강력했다. 그래서 야심가들은 쥬피터(Jupiter)를 수호신으로 택했고, 인색한 자들은 머규리(Mercury)를, 지식을 탐하는 자들은 아폴로(Apollo)와 미네르바(Minerva)를, 군인들은 마르스(Mars)를, 음탕한 자들은 비너스(Venus)를 택하였다.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지금도 친구끼리 농담과 잡담을 할 때보다 기도 중에 불법한 욕망을 더 관대하게 버려두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친절한 대우를 이렇게 조롱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시며 우리의 소원을 그의 권력에 굴복시키며 억제시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이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고 한 말을 굳게 지켜야 한다.
성령이 올바른 기도를 도우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기에는 너무도 능력이 역부족하다. 따라서 보조 수단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정신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집중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간절히 거기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둘 다 훨씬 낮은 곳에 서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둘이 다 기력이 없어 낙망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대 방향으로 끌려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약한 우리를 도우시려고 우리 기도의 교사로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기도에 있어서 바른 것이 무엇임을 알려 주시며 감정을 조절해 주신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께서 직접 기도하시거나 탄식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확신과 소원과 탄식을 일으키시고, 우리의 타고난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을 생각하게 만드신다. 또 바울이 신자가 성령의 지도로 하는 탄식을 "말할 수 없는"것이라고 형용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기도의 훈련을 참으로 받은 사람들은 기도 중에 맹목적인 불안으로 마음에 혼란이 일어나며 가슴이 답답하여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를 모르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말하려 해도 그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주저할 뿐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특별한 은혜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태만을 감싸면서, 기도하는 일을 하나님의 영에게 떠맡기고, 자신은 본래 빠지기 쉬운 무관심 상태에 머물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맡아 주실 때까지 우리는 졸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불경건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무기력하고 침체된 자기를 혐오하며 성령의 도움을 구하자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라고 권하면서도(고전 14:15), 동시에 깨어 있으라고 우리게 권고한다. 바울이 말하려는 뜻은 성령께서는 우리를 고무하여 기도를 이루도록 힘을 주시지만, 우리 자신의 노력을 방해하거나 정지시키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일에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를 시험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둘째 법칙 : 진심으로 자기의 부족을 느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 6-7
6. 필요성을 느끼면 모든 비현실성이 배제된다
둘째 법칙은, 우리는 기도할 때 언제나 자신의 무력을 느끼며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얻고자 하는 진실한, 아니 강렬한 소원을 기도에 첨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를 드릴 때에 마치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듯이, 일정한 형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중얼거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간구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치명적이 되기 때문에 기도가 그들의 곤란에 대한 필요한 대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마음은 냉담하여서 여전히 습관적으로 이 의무를 이행하며 자기가 구하는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막연하고 몽롱하게 자기의 부족을 느껴서 기도를 하게 되지만,그 느낌이 현실 문제가 되지 못하고, 그 기도가 자기에게 부족한 것에서 해방되겠다는 열의를 일으키지 못한다.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또는 적어도 자기가 죄인이란 생각이 없으면서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사람의 거짓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보다 더 가증하고 저주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그것은 분명히 직접 하나님을 희롱하는 것이다. 그러나 방금 말한 것과 같이, 인류는 너무나 부패하고 타락해서, 기도라는 행동만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것을 기원하는 때가 많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도 다른 데서 오리라고 확신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미 가졌다고 믿고 있다.
이것보다는 덜 심한 듯하면서도 역시 허용할 수 없는 결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야겠다는 한 가지 원칙이 몸에 습관이 되어서, 아무 명상도 없이 기도를 중얼거린다. 진정으로 갈망하며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얻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원하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이 특히 삼가야 할 일이다.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구하는 일들은, 얼핏 보기에는 우리 자신의 필요를 위한 것이 아닌 듯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열의와 성의를 가지고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컨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때(마 6:9, 눅 11:2), 우리는 그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일을 위해서 주리고 목마른 사람같이 정성껏 기도해야 한다.
7. 기도가 우리의 일시적 기분에 좌우되는 때가 있는가?
우리는 항상 똑같은 절박감을 품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그것을 인정한다. 야고보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약 5:13) 구별해서 말하였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너무나 게으른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도록, 필요한 때에는 하나님께서 더 아픈 자극을 주셔야 한다. 다윗은 이것을 "주를 만날 기회"라고 부른다(시 32:6). 그가 다른 데서도 자주 가르치는 것과 같이(시 94:19 등), 곤란과 불안과 공포와 그 밖의 시련이 우리를 가혹하게 압박할수록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는 듯이, 우리는 더욱 자유롭게 그에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울이 우리는 "무시(無時)로‥‥‥기도"해야 한다고 한 것도(엡 6:18, 살전 5:17) 옳은 말이다. 아무리 일이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어디를 보나 기뻐할 일들이 주위에 가득하더라도, 기도해야 할 필요성이 없는 순간은 없다. 포도주와 곡식이 풍부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지 않는다면 그는 떡 한 조각이라도 맛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지하실과 창고들도 그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위험이 순간마다 우리를 노리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공포심 때문에도 기도를 하지 않는 때가 없어야 할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 이 사실을 더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자기의 많은 죄를 알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 죄와 벌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급히 도움을 받지 않아도 좋도록, 시험이 우리에게 휴전을 제의하는 때가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생각하는 열성이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점령해서, 같은 기회가 항상 우리에게 있도록 해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한 것은 이유가 없는 일이 아니다. 나는 아직 견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뒤로 미룰 것이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살전 5:17) 권고하며, 우리의 태만을 책망하는데, 그것은 이 끊임없는 주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법칙은 하나님께 대한 위선과 교활한 거짓을 기도에서 배제하며 멀리 추방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하신다고 약속하셨고(시 145:18), 전심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을 만나리라고 말씀하셨다(렘 29:13-14). 그런 이유로 자기들의 추악한 것을 즐기는 자들은 전혀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바른 기도에는 회개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에 하나님께서 죄인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다고 하며(요 9:31), 그들의 기도는(잠 28:9, 사 1:15 참조) 그들의 제물과 같이(잠 15:8, 21:27 참조)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라는 말씀이 많다. 자기의 마음에 빗장을 지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귀가 닫힌 것을 발견하며, 마음이 냉혹해서 하나님의 엄격한 처사를 도발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관용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사야서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경고의 말씀이 있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5). 또한 예레미야서에서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렘 11:7, 8:11)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일평생 더럽히는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자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최고의 수치로 여기신다. 따라서 이사야서에서 유대인들에게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라고 책망하신다(사 29:13).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도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 분께 대한 경배의 모든 부분에서 거짓은 가증한 일이라고 선언하신다. 야고보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약 4:3) 한 말은 이에 적용된다. 곧 다음 글에서 알게 될 일이지만, 경건한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는 그들의 가치 유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요한 이"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요일 3:22) 경고한 것은 무용한 일이 아니다. 악한 양심은 우리 앞에 열려져 있는 문을 닫히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성실하게 경배하는 사람들만이 올바르게 기도하며, 그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하려고 준비할 때에는 자기의 악한 행실을 혐오하고, 거지와 같은 처지와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이것은 회개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셋째 법칙 : 자기 신뢰를 버리고 겸손하게 용서를 빌라. 8-10
8. 우리는 겸손하게 자비를 빌기 위하여 기도한다
여기 우리는 셋째 법칙을 첨가한다. 즉,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은 겸손하게 영광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며, 자기의 영광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의 가치를 일체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곧, 자기 신뢰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가치를 티끌만큼이라도 주장해서 허영과 교만에 부푼다면, 하나님 앞에서 멸망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 순종하여 모든 교만을 없애버린 예를 여러 번 말한바 있는데 그들 모두는 거룩할수록 주 앞에 나갈 때에 더욱 겸손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칭호를 주셔서 칭찬하신 다니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矜恤)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8-19). 다니엘은 어떤 사람들 같이 정도를 벗어난 말을 하면서 대중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들 가운데 섞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한 개인으로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빌면서 그로부터 피난처를 구한다. 그는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自服)하고"라고 하는(단 9:20) 웅변적인 말을 한다. 다윗도 자기의 예를 들어 이 겸손한 태도를 가르친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이와 같은 모범으로 이사야도 기도한다.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 이니이다"(사 64:5-9).
그들이 의지한 확신은 한 가지밖에 없었던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자기들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돌보아 주시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예레미야도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배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렘 14:7)라고 했다. 예언자 바룩의 말이라고 하는 것을 쓴 사람이 누구였던 간에, 그의 말은 참되고 거룩하다. "자기의 악이 큰 것을 슬퍼하여 고독하고 머리를 숙이고 기운이 없는 영혼‥‥‥‥굶주린 영혼, 그리고 힘없는 눈이 주여,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나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 당신 앞에 우리 기도를 쏟아놓으며 당신 앞에서 자비를 비옵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의로웠기 때문이 아니옵나이다"(바룩 2:18-19), 그렇지 않고 당신께서 자비하시므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당신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바룩 3:2).
9. 죄의 용서를 비는 것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간단히 말하면, 올바른 기도의 시작과, 그 준비는 겸손하고 성실하게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간구하는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너그러운 화해를 얻기까지는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얻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용서하시지 않은 사람들에게 호의를 보이실 수 없다. 그러므로 시편의 여러 곳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믿는 자들이 이 열쇠로 기도의 문을 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윗은 죄의 용서를 빌지 아니하는 때에도 "여호와여 내 소시(小時)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시 25:7). 또"나의 곤고(困苦)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라고 기도했다(시 25:18). 이것을 보면 우리는 매일 최근의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잊고 있은 듯한 죄까지도 고백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그 예언자는 다른 곳에서 자기의 중대한 죄 하나를 고백하고 나서, 자기가 그 죄에 감염된 곳, 곧 모태(母胎)를 말한다(시 51:5). 이것은 타고난 부패성을 근거로 자기의 죄책을 경감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전 생애의 죄들을 종합해서 더욱더 엄격하게 자기를 정죄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더욱 쉽게 받고자 한 것이다. 우리는 성자들이 항상 많은 말로써 죄의 용서를 빈 것은 아니나, 성경이 전하는 그들의 기도를 자세히 검토한다면,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기소할 생각을 얻게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언제든지 우선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고자 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의 양심을 조사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근심 걱정을 솔직하게 토로할 용기가 생길 수 없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믿지 않는다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마다 무서워 떨 것이다.
사람들이 벌을 면하기를 기원할 때에 특별한 고백이 하나 더 있다. 즉, 그들은 동시에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원인은 그대로 두고 결과만을 제거하려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병든 사람이 자신에게 나타난 증세만을 치료하고 병의 원인 자체를 등한시하는 미련한 짓을 배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외적인 표징으로 우리에 대한 호의를 증명하시는 것보다, 우선 우리에게 대해서 호의를 가지시는 것을 최대의 관심사로 삼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이 순서를 유지하는 것이 그의 뜻이며 만일 우리의 양심이, 그와의 완전한 화해를 느끼며 그를 전적으로 "사랑스럽게"(아 5:16) 여기지 않는다면, 그가 우리에게 선을 행하시더라도, 그것은 그다지 유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답도 우리에게 이 일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기로 작정하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9:2).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특히 원해야 할 것,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셔서 그의 은혜 가운데 두시기를 원하고 그 다음에 화해의 열매로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셨다.
그러나 특히 현재의 죄를 고백하여 모든 죄와 벌이 용서되기를 간구하는 동시에, 기도가 용납되도록 하는 일반적인 전제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기도는 값없이 주시는 자비를 근거로 삼지 않으면 하나님께 결코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한이 한 말은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러므로 율법 하에서도 우리의 드리는 기도가 용납되게 하기 위해 죄의 대속으로 기도를 성별했다(창 12:8, 26:25, 33:20, 삼상 7:9 참조).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먼저 그들의 부정한 것을 깨끗이 씻어버린 다음에, 하나님의 자비만을 믿고 기도를 드리지 않는 다면, 그들은 이 큰 특권과 영예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경고하려는 것이었다.
10. 자기의 의를 말할 것인가?
그런데 성도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빌 때에 간혹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듯하다. 예컨대 다윗은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라고 했고(시 86:2), 마찬가지로 히스기야는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했다(왕하 20:3, 사 38:3 참조). 그들이 이런 말로 표현하려고 한 뜻은, 자기들이 중생하여 하나님의 종과 자녀인 것이 증명되었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그의 눈이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신다"는 것을 가르치신다(시 34:15). 또 사도 요한을 통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고 가르치신다. 이 여러 구절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행위의 공로에 따라서 기도의 가치를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진실하며 정직하며 무죄하다는 것을 바르게 의식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신자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이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눈을 뜨게 된 장님이,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듣지 아니하신다고 한 말은(요 9:31)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온 것이다. 성경에서는 "죄인"이란 말이 보통은 의에 대한 아무 욕망도 없이, 자기의 죄 가운데서 안주하며 잠자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찾으려고 해도, 동시에 경건에 대한 갈망이 없으면, 아무도 열렬하고 진지한 기도를 드릴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약속과 성도들의 증거는 부합하는데, 이 성도들의 증거에서 그들이 자기들의 순결이나 무죄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바라는 것이 자기들에게서 나타났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또 성도들이 하나님의 힘으로 원수들의 불의에서 구제되기를 원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원수들과 자기들을 비교하면서, 보통 이런 종류의 기도를 드린다. 이런 비교에서 그들이 자기들의 의로움과 순진함을 내세움으로써 문제의 공정성을 보아서도 도움을 주시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움직이시게 했다고 하여, 그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맑은 양심을 가짐으로써, 주께서 진정한 경배자들을 위로하시며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주신 약속들로 자기의 입장을 확인하는데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이 복을 그들의 마음에서 빼앗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장하려는 것은,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고 믿는 그의 확신은 다만 하나님의 관용을 근거로 한 것이며, 자신의 공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넷째 법칙 : 확신있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라. 11-14
11. 소망과 믿음은 공포심을 극복한다
넷째 법칙은, 이와 같이 우리는 진실로 겸손한 마음에 정복되고 압도되더라도, 동시에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있으리라는 확고한 소망을 품고 기도하도록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는 것과 그의 공정한 벌을 느끼는 것은 외관상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일이다. 그러나 자기의 악행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뿐인 것을 생각하면, 두 가지 심리는 서로 잘 조화된다. 우리가 이미 주장한 바와 같이, 회개와 믿음은 뗄레야 뗄 수 없이 굳게 결합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우리의 공포심을 일으키고 다른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그와 같이 기도에도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 이 일치점을 다윗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표현했다.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시 5:7) 그는 하나님의 인자에 믿음을 포함시키면서 한편으로는 경외를 빼놓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공경하지 않을 수 없게 할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를 깨닫고 모든 교만과 자기 신뢰를 잊어버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신"이란, 모든 불안에서 해방되어 감미롭고 완전한 평안으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평화로운 평안을 느끼는 것은 모든 일이 소원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그들에게는 아무 근심도 없고, 어떤 욕망도 타오르지 않고,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성도들을 가장 잘 자극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드는 기회는 그들이 자기의 부족을 느껴 마음이 괴로운 때이다. 이런 때에 그들은 극도의 불안을 느껴 거의 미칠 듯 하다가 이런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들 위에 비쳐 마침내는 믿음으로 인해서 불안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의 곤고한 처지에 눌려 신음하며 장래의 더 큰 곤란들을 두려워하여 고민하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곤란을 참을 수 있게 되며 위로를 얻으며 앞으로 곤란을 벗어나리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의 기도가 두 가지 감정에서 시작하며, 그 두 가지를 내포한다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즉, 그는 현재의 곤경에서 신음하며 앞으로 다가올 곤란을 두려워하여 불안해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피난처를 얻으며, 언제든지 그가 도와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은혜를 기원하면서도, 그것을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믿음 부족함에 극도로 노여워하실 것이다.
기도와 믿음
그러므로 기도는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인도를 따른다는 것이 기도를 위한 한 법칙이며, 이 법칙을 확립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과 가장 잘 조화가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모두 이 원칙에 유의하도록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다른 곳에서도 같은 말을 확인하신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 야고보의 말로 이것과 일치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약 1:5-6). 여기서 그는 믿음을 의심에 대치시킴으로써 믿음의 힘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의심과 혼란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에 응답이 있을는지 없을는지 확신이 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고 그가 첨부한 말도 주목할 만하다(약 1:7 참조). 그는 이런 사람들을 바람에 밀려 이리저리 요동하는 바다 물결에 비유한다(약1:6). 그래서 다른 구절에서 올바른 기도를 "믿음의 기도"라고 부른다(약 5:1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믿는 대로 주신다고 자주 말씀하셨는데(마 8:13, 9:29, 막 11:24), 이 말씀은 믿음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얻는 것은 모두 믿음으로 인한 것이다. 지혜 없는 사람들은 그다지 주의하지 않으나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 10:14)라는 바울의 말의 의미도 바로 그러한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는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믿음에서 기도가 시작하는 것을 점진적으로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부르는 것은 오직 복음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알게 된, 아니, 그것이 깊이 계시된 사람들에 한 한다고 분명히 주장한다.
12. 기도가 허락된다는 확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반박함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상의 요구 조건을 전연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시고 인자하시다는 굳은 확신을 가지라는 요구 조건을 우리가 신자들에게 가르칠 때에, 그들은 이것을 가장 불합리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진정한 기도를 드려본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믿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부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믿음의 힘을 마음 깊이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이런 사람들은 공상밖에 해본 일이 없는 것이 분명하므로, 그들을 상대로 논의할 가치가 어디 있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요구하는 확신의 가치와 필요성은 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서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양심이 대단히 무딘 사람이므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바울이 한 말을 굳게 지켜야 한다. 복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비를 알게 되고, 그 자비가 자기들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들이 아니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없다(롬 10:14).
그러면 예컨대 이런 기도를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오 주여, 저는 당신이 저의 기도를 들으실는지 의심합니다. 그러나 불안에 견딜 수 없어 당신께로 도망을 갑니다. 제게 무슨 가치가 있다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성도들의 기도와는 다르다. 성령께서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도 그렇지 않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사도는 우리에게 명령한다(히 4:16). 그는 다른 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간다고 가르친다(엡 3:12).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에 효과가 있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구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신념을 두 손으로 굳게 붙잡아야 한다. 이 점은 주께서 친히 명령하시고, 모든 성도들이 모범으로 가르친다. 만일 굳건한 믿음이란 말을 쓸 수 있다면, 그런 믿음에서 생겨난 기도,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소망에 뿌리를 박은 기도, 이런 기도만이 하나님께 용납된다. 사도는 믿음을 말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나, 확신뿐 아니라, 담대하게 또는 자유롭게라는 말까지 첨가한다. 이런 말로 그는 우리와 불신자들을 구별하려고 한다. 불신자들은 우리와 섞여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만, 그것은 우연한 일이다. 본 교회는 시편에 있는 대로 기도한다.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시 33:22). 다른 데서 예언자는 같은 조건을 설정한다. "내가 아뢰는 날에‥‥‥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시 56:9),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이런 말들을 보면, 소망을 첨가하지 않는 기도는 허공에 던져진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망은 망대와 같아서, 우리는 거기서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본다. 바울이 주는 충고의 순서도 여기 부합한다. 그는 신자들에게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엡 6:18) 권하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명령하기를,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한다(엡 6:16-17).
여기서 독자들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을 회상하기 바란다. 즉, 믿음은 우리의 불행과 궁핍과 부정과 결합된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는다. 신자들은 무거운 죄의 짐에 아무리 심히 눌리고 고민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무서워 할 죄과가 아무리 많을 지라도 여전히 하나님 앞으로 나간다. 이런 느낌이 있으면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에게로 가는 길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기도를 제정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만하게 굴거나 우리에게 있는 어떤 것을 높이 평가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를 고백한 후에, 자녀가 곤란한 문제들을 부모에게 털어놓듯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고통을 호소하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우리의 죄는 당연히 우리가 기도하도록 견딜 수 없는 아픈 자극을 줄 것이다. 예언자는 자기의 체험으로 이 점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내가 주께 범죄 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시 41:4).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이런 창은 우리에게 치명상을 입힐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극히 은혜로우신 아버지께서는 비할 데 없는 자비로써 이런 경우에 적합한 치료제를 첨부하셔서, 우리의 모든 혼란을 진정시키시며 근심을 덜며 공포심을 없애버리신다. 그리고 장애물은 물론이고 평탄하지 못한 곳까지도 없이 하여 스스로 길을 준비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친절히 이끄신다.
13.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 기도의 원동력이 된다
우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심으로써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 경우에, 주께서는 우리의 불경한 완고함을 책망하신다. 시편에 있는 말씀 보다 더 정확한 명령은 생각할 수 없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시 50:15). 그러나 경건 생활의 의무 중에서 기도처럼 성경에서 자주 명령하는 것이 없으므로, 나는 이 점을 자세히 논할 필요가 없다. 주께서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신다(마 7:7). 그러나 이 명령에는 약속이 첨가되었다. 이것은 필요한 일이다. 이 명령에 순종해야할 것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쉽게 받아 주시며 우리가 가까이 가는 것을 환영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점을 확인한다면, 직접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을 피하려고 애쓰는 자들은 반역자이며 완고할 뿐만 아니라, 약속을 불신하기 때문에 불신앙의 선고를 받게 된다. 위선자들의 행동을 보면 이 점이 더욱 뚜렷하다. 그들은 겸손하고, 온유한 모양을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교만한 태도로 무시하며 하나님의 친절한 초대를 의심하여, 하나님께 드릴 예배의 주요 부분을 빼앗는다. 옛날 사람들이 모든 거룩한 일은 제물을 바치는 데 있다고 생각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거절하시고(시 50:7-13), 사람들이 곤란한 때에 자신을 부르는 것을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언급하셨다(시 50:15).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것을 요구하시며 정성스러운 순종을 명령하시는 때에, 의심의 깃발이 아무리 우리를 유혹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도피할 구실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성경에 항상 나오는 하나님을 부르라는 많은 명령의 말씀은 모두 우리에게 확신을 불어넣기 위해서 우리 눈앞에 세운 깃발들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시고 우리가 오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비할 데 없는 경솔한 짓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친히 길을 열어 주신다.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9).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경배하는 사람들 보다 앞서 가시며, 그들이 따라오기를 원하시며 그가 친히 명령하시는 아름다운 곡조에 감화되어 그들에게 두려움이 없어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안다.
특히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 돌리는 찬미이다. 우리는 이 찬미의 내용을 믿고 모든 장애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 65:1-2) 하나님께서 이런 찬미를 받으셨다는 것처럼 기쁘고 반가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찬미는 간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허락하시는 것이 그의 성품에 가장 잘 맞는 일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 이것을 근거로 삼아 예언자는 소수의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문이 열려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시 50:15)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을 상대로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법칙에 따라서 다윗은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약속을 이행하실 것을 주장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하신 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삼하 7:27). 이 말을 보아서 우리는 이 약속이 다윗에게 용기를 주지 않았다면 그는 두려워했으리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에서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라는(시 145:19) 일반론으로 무장한다. 사실 우리는 시편에서 이러한 경향을 불 수 있다. 즉, 계속되던 기도의 문맥이 중단되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혹은 그의 선하심으로, 혹은 그의 신실한 약속으로 그 기도의 문맥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얼른 보기에 다윗이 이런 말들을 부적당한 곳에 삽입시켜 기도의 흐름을 절단하며 기형으로 만든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자들은 새로운 연료를 공급하지 않으면 열성이 식는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명상하는 것은 결코 무용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을 본받아 시들어 가는 우리의 정신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도록 적당한 것을 삽입하며, 이 일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14. 확신을 가지며, 무서워 떨 것이 아니라 경외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심히 감미로운 이 약속에 대해서 우리가 냉담한 태도를 취하거나 전혀 느낌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로를 헤매기를 좋아하며,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물 없는 웅덩이를 파며(렘 2:13),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운 은혜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고(잠 18:10) 솔로몬은 말한다. 요엘은 장차 올 무서운 파멸을 예언한 다음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2, 롬 10:13)라는 인상적인 말을 첨가한다. 이것이 사실은 복음의 진행 과정에 대한 말씀인 것을 우리는 안다(행 2:21). 백 명에서 한 명도 하나님께 접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라고(사 65:24) 친히 선포하셨다. 다른 데서 하나님은 꼭 같은 영예를 전 교회에,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에 주신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시91:15).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나는 모든 구절을 인용하지 않고, 다만 두드러진 것들을 택하려 한다. 이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친절하게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지를 맛볼 수 있으며, 이렇게 예리한 자극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태만하며 머뭇거릴 때에 우리의 배은망덕이 얼마나 완고한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 145:18)라는 말씀을 항상 귀에 쟁쟁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사야와 요엘에서 인용한 말씀과 같다. 거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겠다고 확약하시며, 우리가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는" 것을(벧전 5:7, 시 55:22)고 향기로운 제물같이 기뻐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아무 주저함이나 두려움 없이 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는 이 약속의 특별한 열매를 받는다. 하나님의 존엄하심을 생각하면 우리는 떨게 될 것이지만, 이 약속의 말씀이 있으므로 이 말씀을 믿고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가장 다정스러운 이름을 황송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사하신다.
다음으로 이렇게 많은 권유를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즉, 우리의 기도와 의지할 것은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며, 기도의 가치와 기도가 실현되리라는 소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었고 또 그 약속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다른 데서 지지를 받을 필요가 없고, 이리저리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거룩한 조상들과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거룩하였다고 해서 칭찬을 받았으나, 우리에게는 거룩한 점이 없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는 기도하라는 공통된 명령을 받았고 공통된 믿음을 가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한다면, 이 점에서 당연히 그들의 동료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청하여 친절하시겠다고 선포하심으로써 극도로 가련한 사람에게도 구한 것을 얻으리라는 소망을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저 일반적인 표현 양식에 유의해야 한다. 일반적이므로(세상에서 말하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도 제외되지 않는다. 조건은 하나뿐이다. 즉, 우리의 마음이 성실하며, 자신에 대해서 만족감을 느끼지 않고, 겸손하며,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거짓말로 하나님을 부르는 위선이 그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지극히 은혜로우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온갖 방법을 다해서라도 우리를 자신에게로 오도록 권하실 뿐 아니라 그에게 오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다윗의 기도 태도도 이로 인한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삼하 7:27-29). 또 다른 데서는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라고 했다(시 119:76).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의 무장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므로 두려워하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그들은 조상들을, 특히 야곱을 본받는다.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를 감당할 자가 못 된다고 고백한 다음에(창 32:10),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더 큰 일을 구할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창 32:11-12 참조).
그러나 불신자들은 구실이 무엇이든 간에, 곤란한 때에 하나님께 피하여 그를 찾으며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새로운 신이나 우상을 만드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이 하나님께 돌아갈 영예를 빼앗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의 근원이심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경건한 사람들을 근심 걱정에서 해방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동안은 조금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무장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순종 이상 더 기뻐하시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앞에서 담대한 기도 정신은 공포, 경외, 염려 등과 잘 조화되며, 엎드린 자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이와 같이 조화되지 않는 듯한 표현들이 서로 훌륭하게 부합된다. 예레미야와 다니엘은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한다(렘 42:9, 단 9:18). 다른 곳에서도 예레미야는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렘 42:2)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자들은 자주 "기도를 올린다"고 하기도 한다. 히스기야가 자기를 위하여 예언자의 중보 기도를 청하면서 한 말도 같은 것이다(왕하 19:4). 다윗은 자기의 기도가 "향과 같이" 올라가기를 갈망한다(시 141:2). 바꿔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보호에 기꺼이 몸을 맡기며, 그가 너그럽게 약속하신 도움을 서슴지 않고 간구하지만 수치감을 버린 듯이 경솔한 자신감으로 의기양양해 지지는 않는다. 도리어 약속의 계단을 밟아 올라갈 때에, 여전히 자기를 낮추어 기원자의 태도를 견지한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기도도 들어주신다. 15-16)
15. 사악한 기도를 들으신다
여기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평화롭고 고요하지 못한 생각에서 나온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이다. 요담은 충분한 까닭은 있었으나, 격분과 복수심에서 세겜 주민들의 멸망을 기원했고, 후에 그대로 되었다(삿 9:20). 그 저주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제력이 없는 격분을 시인하시는 것같이 보인다. 삼손도 이런 격정에 못이겨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 16:28)라고 말했다. 의분도 다소간 섞여 있었지만, 지배적인 것은 타는 듯한, 따라서 사악한 복수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허락하셨다. 이런 것을 보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한 법칙대로 하지 않는 기도라도 효과가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보편적인 법칙은 개개의 예에 의해 폐기되지 않는다. 그리고 간혹 특수한 충동을 받은 소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배려가 있었다. 제자들이 엘리야의 예를 따르도록 경솔하게 청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답에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도 모르는구나"(눅 9:55, 어떤 고대 사본에는 이 말이 있음역자 주)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기도라 해서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것이 아니며 실례를 보더라도 성경의 교훈은 분명한 증거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하나님께서는 불행한 사람들을 도우시며, 부당한 고통을 받아 그의 도움을 간구하는 사람들의 신음을 들어주신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의 불평과 호소가 그의 앞으로 올라갈 때에, 비록 그들에게는 티끌만큼도 받을 자격이 없을지라도, 그는 그의 심판을 단행하신다. 부당한 압박을 받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여 허공을 치듯 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들의 잔인, 강탈, 폭행, 정욕 및 기타 죄악을 벌하시며, 그들의 당돌함과 광분을 억압시키시며, 그들의 포악한 권력을 전복 시키셔서 눌린 사람들을 도와주신다는 것을 증명하신 일이 얼마나 많은가? 믿음이 없이 하늘에 닿지 못하는 기도라도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시편에서는 분명히 가르친다. 여기에서는 곤란을 당한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자연적인 감정으로 토로한 기도를 구별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에게도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증명한다(시 107:5, 13,19). 하나님께서 이렇게 친절하신 것은 그들의 기도가 받을 만하다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런 경우에 의해서, 불신자들의 기도가 버림을 받지 않을 때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는 것을 역설 또는 명시하시려는 것이며 동시에 불신자들의 호소도 때로는 유익한 것을 보고 진정한 경배자들이 더욱 더 기도하도록 격려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을 떠나거나, 혹은 불신자들이 소원대로 된 것을 보고, 그들이 큰 이득이라도 얻은 것같이 시기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아합이 회개하는 체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셨다는 말을 했다(왕상 21:29). 이것은 하나님의 선민들이 그 분의 노여움을 풀려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는 곧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증명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106편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호소를 들어주시는 것을 보고서도 유대인들이(시 106:8-12)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완악한 본성으로 돌아간 것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신다(시 106:43, 106:13이하 참조)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사사기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이 울 때마다, 비록 그들의 눈물은 거짓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셨다(삿 3:9 참조).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어주시는 하나님께서는(마 5:45), 동기가 정당하고 곤경에서 구출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면, 그 애원을 무시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것과 같다. 더 큰 구원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과 사무엘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 어려워 보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시하지 않으셨는데도 소돔을 위해서 기도했고(창 18:23), 사무엘은 분명한 금지 명령이 있었는데도 사울을 위해서 기도했다(삼상 15:11). 수도가 파멸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 예레미야도 같은 행동을 하였다(렘 32:16이하). 그들의 기도는 거절되었으나,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온건한 독자들이 만족할 만한 해답이 있다. 즉, 무가치한 자에게도 자비를 베풀라고 하신 하나님의 보편적 원칙에 비추어 볼 때에, 이 특별한 경우에는 그들의 의견이 잘못되었으나, 그들에게 전혀 믿음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현명한 말을 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는 일을 기원할 때에,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믿음으로 하는 기도라고 하겠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다. 그 뜻은 감추어 있고 변함없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어 주신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현명하신 결정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계획에 따라 사건들의 결과를 조정하셔서, 믿음과 과오가 섞여 있는 성도들의 기도가 수포로 돌아가지 않게 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들 자신의 변명은 될 수 있으나 타당한 모범으로 삼을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적당한 정도를 지나친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착실한 약속이 없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는 조건이 붙어야 한다.
이런 경우에 다윗의 말은 적절하다. "깨(Awake)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시 7:6). 여기서 그는 현세적인 어떤 은혜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16.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우리의 기도는 응답된다
유의해야 할 점이 또 하나 있다. 나는 올바른 기도를 위한 법칙 넷을 말했으나, 그것은 너무 엄격하게 요구할 것이 아니다. 완전한 믿음이나 회개가 없을 때, 열성과 올바른 기원이 없을 때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를 거부하시리라는 것이 그 원칙들의 뜻이 아니다.
나는, 기도는 경건한 자와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대화이나 우리는 경외와 겸손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잡다한 요구를 함부로 늘어놓거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를 넘어 탐내는 일이 없도록 하며, 생각을 고상하게 하여 하나님을 순결한 마음으로 공경하며, 하나님의 존엄성이 우리에게 무가치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다.
이 법칙을 충분하게 또 올바르게 실행한 사람은 없다. 일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다윗의 불평에도 무절제한 경향을 보이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가 고의로 하나님께 간하거나 하나님의 판단에 항의했다는 것이 아니라, 약해서 넘어질 듯한 그로서는 자기의 슬픔을 하나님의 품에 내던지는 것밖에 달리 위로를 얻을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심결에 중얼거리는 말을 다 관용하시며 우리의 무지를 용서하신다. 참으로 이런 자비를 베푸시지 않는다면, 기도할 자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려 했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열성과 인내로 기도했지만 감정이 격동하였으며 아니, 때로는 끓어 넘쳤다. 이것은 우리가 설정한 첫째 법칙과 조화되지 않는 일이다.
특히 시편 39편의 끝을 보면, 이 거룩한 자는 격렬한 슬픔에 휩쓸려 거의 자제력을 잃어버린다.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 39:13). 이 절망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손을 거두셨기 때문에 자신의 죄악 속에서 썩을 생각밖에 하지 않는 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고의로 격정을 폭발시키거나, 보통 악인들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기를 원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진노를 견딜 수 없다고 불평할 뿐이다. 이런 시련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과 잘 조화되지 않는 기원도 입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고, 성도들도 합당한 일과 유익한 일을 충분히 생각해보지 못하는 예가 있다. 이런 결점이 있는 기도는 모두 배척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성도들이 자기의 죄를 슬퍼하며 자기를 책하며 즉시 올바른 자신으로 돌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신다.
그들은 제 2 법칙에 관해서도 죄를 짓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냉담한 자기와 재차 싸워야 하며, 자기의 부족과 불행에 대한 느낌도 그다지 절실하지 않아서 열렬한 기도를 드릴만 한 자극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은 자주 기도에서 멀어지고 거의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이 점에서도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무기력하고 불완전한 기도, 또는 중단되고 막연한 기도는 거부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높이 들릴 때에 한해서 그의 기도는 합당하다는 이 원칙을,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의 마음에 심어두셨다. 여기서 두 손을 드는 형식이 생긴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이것은 모든 시대와 백성에게 공통된 형식이며, 지금도 실행되고 있다. 그러나 두 손을 들 때에 자신의 마음이 그대로 땅에 붙어 있는데도 냉담한 자기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용서를 구하는 문제에 대해서, 신자들이 이 문제를 경시하지 않지만, 기도에 참으로 능숙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윗이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痛悔)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라고 말한 제사의 십분지 일도 드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사람은 항상 이중의 용서를 빌어야 한다. 하나는, 많은 죄를 지은 줄 알면서도 그 느낌이 미약해서 자기를 혐오하는 생각이 당연히 있어야 할 정도로 절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자기의 죄를 올바르게 슬퍼하고 완전히 낙심하여 그 회개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신 경우에, 그들은 심판자이신 그의 진노가 자기들에게 내리지 않기를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신앙의 연약함과 불완전은 신자들의 기도를 부패하게 만든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결점을 용서해주신다. 그 분께서는 마치 그들의 믿음을 소멸시키기로 굳게 작정하신 것처럼 어려운 시련으로써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신다. 그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시련은, 마치 기도 자체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듯이,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때이다(시 80:4, 79:5 참조). 예레미야가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라고 할 때에(애 3:8) 그는 격렬한 불안에 사로잡혔던 것이 분명하다. 성경에는 이런 예가 무수해서, 성도들의 신앙은 의심이 뒤섞여 있고 또 의심으로 혼란 상태에 빠지므로 믿고 바라는 중에도 무심코 신앙의 결핍을 드러낸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수록, 성도들은 더욱 더 노력해서 자기의 결점을 시정하며, 기도의 완전한 표준에 매일 더욱 접근해야 한다. 또한 동시에 치료책을 강구한다는 것이 도리어 새로운 병을 만들어 깊은 재난에 빠진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포함된 많은 결점을 하나님께서 무시하시지 않는다면, 공정한 입장에서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타기(唾棄)하실 것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은 신자들이 무슨 일이든지 자신 있게 자기를 용서하게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엄격한 자기 응징을 통하여 이런 장애를 극복하도록 노력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사탄이 그들을 기도하지 못하도록 모든 길을 막으려고 애쓰더라도, 그들은 장애를 돌파해야 한다. 비록 모든 장애를 배제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즉시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지만 그것을 향해서 분투하고 노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용납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 17-20)
17.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
아무도 하나님 앞으로 나갈 가치가 없다. 우리는 수치감과 공포심에 못 이겨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이 수치감과 공포심에서 해방시키시려고 친히 그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대언자와(요일 2:1) 그의 앞에 있는 중보자로(딤전 2:5, 히 8:6, 9:15 참조)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인도로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아무것도 거절하실 리가 없는 것과 같이, 아들이 우리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그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하는 것도 거절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다. 또한 내가 믿음에 대해서 위에서 가르친 것은 모두 이 점과 관련시켜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신다는 약속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기원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희망도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으면 기도의 유익과는 단절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두려운 존엄성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 순간 떨지 않을 수 없으며, 자기의 무가치를 느끼고 멀리 도망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나타나셔서 두려운 영광의 보좌를 은혜의 보좌로 변화시켜 주시기까지는 우리는 떨 수밖에 없다. 사도의 교훈에도 우리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서 자비와 은혜를 받으며, 필요한 때에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이 있다(히 4:16).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명령이 있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다 들어주신다는 약속이 있는 것과 같이, 특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명령이 있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요 16:24).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요 16:26), 그리고 "너희가‥‥‥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하나님께 청하는 사람들은 완고하게 그의 명령을 멸시하며 그의 뜻을 무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구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약속이 없는데, 이 점은 분명하고 논박할 여지가 없다. 참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라고 말한다(고후 1:20). 즉, 모든 약속이 확인되고 실현된다는 것이다.
18.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승천하신 후에는 자신의 중보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명령하신 그때의 상황에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6:26).
처음부터 중보자의 은혜가 없으면 기도하는 사람들이 응답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가르치신 것을 보면 성소 안으로 들어간 것은 제사장뿐이었고, 그는 두 어깨에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메고, 같은 수효의 보석이 달린 흉패(胸牌)를 가슴에 붙이고 들어갔다(출 28:21). 그리고 백성은 멀리 떨어져 성전 뜰에 서 있었고, 거기서 제사장과 함께 기도를 올렸다. 참으로 제물까지도 그 가치는 기도를 확인하며 강화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장차 있을 일을 예시한 이 율법의 의식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도록 금지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필요하며, 이 분이 우리를 그 두 어깨에 메고 그 가슴에 달고, 우리 대신에 하나님 앞에 나타나셔서, 우리의 기도가 그에게서 실현되도록 하신다. 그뿐 아니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불결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그것에 피를 뿌려 정하게 하신다고율법의 의식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성도들은 무엇을 얻고자 할 때에 제물에 소망의 근거를 둔 것을 우리는 안다. 기도를 용납하게 하는 것은 제물이란 것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네 모든 소제(素祭)를 기억 하시여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시 20: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중보로 노여움을 푸시고 경건한 자들의 기도를 받으셨다고, 우리는 추론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무엇 때문에 제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시작할 새로운 시기를 정하셨는가? 이 은혜가 지금은 더욱 빛나는 것처럼 우리 가운데서 더욱 인정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는 같은 뜻으로 조금 전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요 16:24)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제자들이 중보자의 직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모두 이 기본적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승천하신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하여 이전보다 더 확실한 변호자가 되시리라는 것을 아직 분명히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떠나는 것을 슬퍼하는 제자들을 특별한 은혜로 위로하시기 위해서 중보자의 직분을 취하시고, 그들이 지금까지 받지 못한 특별한 복을 받게 되리라고 가르치셨다. 즉, 그들은 그의 보호를 믿고 더욱 자유롭게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복을 누리리 라고 하셨다. 그래서 사도는, 이 새로운 길을 그리스도의 피로 성별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히 10:20). 만일 우리만을 위해서 예정된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이 은혜를 우리가(속담같이) 두 팔로 껴안지 않는다면, 우리의 완고한 불순종은 더욱 용서받을 길이 없을 것이다.
19. 그리스도께서는, 신자 상호간의 중재에 있어서도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 유일한 통로는 그리스도이시므로(요 14:6), 이 길에서 벗어나며, 이 통로를 버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바른 길이 없다. 하나님의 보좌에 그들을 위해서 남아 있는 것은 진노와 심판과 공포뿐이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인을 치셔서(요 6:27 참조) 우리의 지도자와(마 2:6) 머리로(고전 11:3, 엡 1:22, 4:15, 5:23, 골 1:18) 삼으셨으므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에게서 떠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적어 놓으신 표지를 파괴하거나 훼손하려고 꾸준히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중보자로 제정되었고, 그의 중보에 의해서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로우신 분, 기도를 쉽게 들어주시는 분이 되신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들은 서로 중재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이런 기도를 통해서 상호의 구원을 하나님께 호소한다. 사도가 이런 기도를 언급했으나(딤전 2:1), 신자들의 상호 중재 기도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우리들이 한 몸의 지체로서 서로 자발적으로 아무 이해타산이 없이 사랑하며, 그 사랑하는 감정이 넘쳐 중재 기도로 나타나는 것같이, 그런 기도는 또한 한 머리와 관련이 있다. 이런 기도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지 않으면 아무 기도도 사람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는 우리가 교회에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하는 모든 중보 기도는 저 유일 한 중보 기도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확정된 원칙으로 여겨야 한다. 참으로 특히 이 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배은망덕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각각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호소하는 것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연히 거절하셔야 할 사람들을 자신의 교회의 변호인들로 임명하셨는데, 그 사람들이 각각 자기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남용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행위이니, 그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20.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며 불변한 중보자이시다
그리스도는 구속의 중보자요, 신자들은 중보 기도의 중보자라고 지껄이는 궤변가들의 무의미한 말을 들어 보라. 마치 그리스도께서는 일정한 기간 동안에 한 번 중보 직책을 다하시고, 영원불변하는 중보 직책은 종들에게 맡기셨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영광의 작은 일부라도 그리스도께로부터 베어 내는 사람들은 물론 그를 친절히 대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매우 다르다. 이 사기꾼들을 무시하는 성경 말씀은 단순하여, 경건한 사람들을 만족시킬 만하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요일 2:1) 요한이 말할 때 그 뜻이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만 우리를 위해서 대언자가 되셨다는 것인가, 또는 그리스도께서 항상 계속적으로 중보하신다는 것인가?
바울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고(롬 8:34) 주장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다른 곳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고(딤전 2:5) 할 때에, 그는 조금 전에(딤전 2:1-2) 말한 기도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라고 말한 후에 바울은 이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을 첨가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중보(中保)도 한 분이시니"라고(딤전 2:5) 하였다.
어거스틴도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에 의하여 서로 다른 사람을 권고한다. 그러나 진정한 중보자는 한 분 뿐이시다. 그를 위하여 중보하는 사람은 없으나,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중보하신다"라고 동일한 설명을 한다. 사도 바울은 머리되시는 주님 밑에 있는 탁월한 지체였지만 그 역시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였으며, 교회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진정한 제사장은 상징적으로 휘장 뒤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명백하고 확고한 사실로 하늘의 내부 성소, 곧 실재(實在)하고 영원한 성결의 자리에 이르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롬 15:30, 엡 6:19, 골 4:3). 또 그는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 자처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요구한다.
그 이유로서 그는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라고 한다(고전 12:25-26). 이렇게 모든 지체가 지상에서 애써 일하면서 서로 다른 지체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그들보다 먼저 승천하신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로 올라가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다(요일 2:2). 만일 바울이 중보자였다면 다른 사도들도 그러했을 것이요, 만일 중보자가 여럿이라면 바울 자신이 "하나님은 한 분 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고 한 말은 성립되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면(엡 4:3)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한다(롬 12:5). 어거스틴은 다른 구절에서 같은 말을 한다. "그러나 당신이 대제사장을 구한다면, 그는 하늘 위에 계신다. 그는 거기서 당신을 위해서 중보라고 계신다. 또한 당신을 위해서 땅에서 죽으셨다"(히 7:26이하 참조).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를 위해서 애원하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도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실 때에는 그의 죽음의 힘이 우리를 위한 영원한 중보 기도로서의 효과를 가진다고 이해한다(롬 8:34 참조).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늘 성소에 들어가시며, 이 세상의 종말까지(히 9:24이하 참조) 홀로 백성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시며, 백성은 멀리 바깥뜰에 머물러 있다고 이해한다.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한 그릇된 교리를 배척함. 21-27)
21.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중보의 영광을 빼앗는다
육신으로 죽고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 성자들에 대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기도를 드릴 때에, 그들이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를(요 14:6) 통하지 않고 다른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거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다른 이름으로 받아주신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꿈에도 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우리를 모든 것에서 소환해서 오직 그리스도께로 돌아가게 하며,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기를 원하신다(골 1:20, 엡 1:10). 그러므로 그를 떠나서는 들어갈 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멀어질 정도로 성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접근하려고 애썼다는 것은, 미친 짓은 아니더라도 우매의 극치였다.
그러나 어떤 시대에는 이런 일이 보통이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지금도 이른바 교황 제도가 번창하는 곳에서는 이런 짓을 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그들은 대개는 그리스도를 무시하면서 빈번히 성자들의 공로를 내세우며 그들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 묻노니, 이것은 그리스도께만 속한다고 우리가 이미 주장한 그 유일한 중보자로서의 지위를 성자들에게 이전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조작한 소위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해서 누가 누구에게 한 마디라도 계시했다는 것인가? 그것이 천사였는가? 마귀였는가? 성경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근거로 조작을 했는가? 참으로, 항상 하나님 말씀에 근거가 없는 도움을 구하는 것이 인간의 지혜요, 그런 때에 그것은 자체에 신앙이 없음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러나 성자들의 중재를 기뻐하는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할 때 그들이 불안에 눌려 있다는 사실에서 이것이 유래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만으로는 부족하다든지, 또는 그리스도께서는 너무 엄격하신 것같이 느낀다. 첫째로, 이 혼란한 심리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며 유일한 중보라는 칭호를 그리스도에게서 빼앗는다. 그러나 이 칭호는 하나님께서 독특한 특권으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이며, 그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 또 그들은 이런 일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탄생의 영광을 흐리게 하며 그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들어 결국 그가 하신 일과 받으신 고통에서 그가 당연히 받으셔야 할 찬양을 박탈한다. 그의 행적과 수난 당하신 것을 보면 그 분 만이 중보자이시며, 또 그렇다고 생각해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내던져 버린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버지로 나타나시는데, 그들이 그리스도를 형제로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에 대해서 형제애를 가지셨고 그의 사랑에 비교할 만한 인자하고 다정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형제로서의 그리스도를 분명히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만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우리를 그에게로 보내면, 그의 안에 우리를 든든히 세운다. 암브로시우스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우리의 입이시며 그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께 말한다. 그는 우리의 눈이시므로 그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를 본다. 그는 우리의 오른손이시므로 그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께 우리 자신을 바친다. 그가 중간에 개입하여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나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교회에서 공중 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말을 붙이는 것에 대하여 항의한다면 이런 항변은 무가치한 핑계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를 죽은 사람들의 기도나 공로와 뒤섞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혀 무시하고 죽은 사람들의 이름만을 부를 때와 마찬가지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모독이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모든 예배 때의 글과 성가와 산문에서 죽은 성자들에게 온갖 영예를 돌리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22. 성자 숭배
그러나 우매의 정도가 심해져서 지금은 명백히 미신으로 기울어진 이 경향은 제지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방자하게 되기가 십상이다. 성자들의 중재를 생각하게 된 후로 사람들은 각 성자에게 특별한 기능을 돌리고, 일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이 성자에게 또 어떤 때는 저 성자에게 중재를 기원한다. 그 다음에 각 사람이 어떤 한 성자를 자기의 수호신으로 정하고 그의 보호를 신뢰하게 되었다. 옛날 예언자가 이스라엘을 책망한 것처럼(렘 2:28, 11:13), 도시의 수에 따라 신을 설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구수에 따라서 신을 정하였다.
그러나 성자들은 모든 소원을 하나님 뜻에만 관련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명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자들이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지 않고 어떤 다른 기도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자들에 대해 우매하며 육적이며 모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들이 성자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와는 매우 다른 것으로서 각 성자는 자기를 숭배하는 자들에 대해서 사적인 편애를 품었다고 한다.
그리고 끝으로, 성자들을 돕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의 구원을 결정하는 사람으로 생각해서, 그 앞에 기도하는 무서운 신성 모독을 여전히 감행하는 자들이 지금도 아주 많다. 가련한 인간들은 정당한 입장에서, 곧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질 때에 이렇게까지 타락하게 된다.
이런 무신앙의 더 큰 기괴한 일은 그것이 하나님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것을 논하지는 않겠다. 바르바라(Barbara), 카타린(Catherine), 기타 성자들의 조각이나 그림 앞에 엎드려 그들은 "우리 아버지"라고 중얼거린다. 사제들은 이런 미친 짓을 고쳐 주거나 억제하기는커녕 도리어 이득의 냄새를 맡고 그것을 시인하며 장려하면서 이런 추악한 죄악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면 엘리기우스(Eligius)나 메다르드(Medard)에게 하늘에서 내려와 종들을 도와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또는 자기들의 원하는 대로하도록 거룩한 동정녀가 그 아들에게 명령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구실로 변호하려는가? 고대의 칼타고 회의에서는 제단 앞에서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지했다. 당시의 거룩한 사람들은 악습의 세력을 완전히 꺾지 못했으나, 적어도 극단화를 방지해서, "성 베드로시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는 식의 기도로 공중 기도를 더럽히지 않도록 한 것 같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광을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에게 서슴지 않고 옮기게 되었으니, 이 악마적인 거만이 얼마나 더 광범위하게 퍼졌겠는가?
23. 성경의 혼란한 해석은 성자들의 중보 기도를 지지하려고 이용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중보 기도의 기초는 성경의 권위에 있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그들은 천사들이 기도했다는 기사가 성경에 자주 나온다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의 기도가 천사들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세를 떠난 성자들과 천사들을 비교하고 싶으면, 천사들은 부리는 영이 되었고 구원을 얻을 후사를 섬기는 임무를 받았다는(히 1:14) 것을 증명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길에서 우리를 지키는 임무가(시 91:11) 천사들에게 위촉되었고, 천사들은 우리를 둘러 진치며(시 34:7), 우리에게 경고와 격려를 하며 우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이런 임무를 천사들은 받았지만, 성자들은 받은 일이 없다. 죽은 성자들과 천사들에 대해서 성경이 그 직무를 여러 가지로 구별한 것을 보더라도, 그들이 천사와 성자를 터무니없이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재판관 앞에서도 변호사 자격이 없는 사람은 감히 변호인의 임무를 행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성경에 직책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변호인들을 하나님께 강제로 떠맡기려고 하는 이 벌레 같은 인간들은 어디서 이 위대한 면허를 얻은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돌보는 직무를 천사들에게 맡기셨다. 그 결과로 그들은 성회에 참석하며, 교회는 그들이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를 보고 경탄하는 무대가 되었다(엡 3:10). 특히 천사들에게 속하는 것을 다른 데로 옳기는 사람들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정하신, 침범해서는 안 되는 질서를 어지럽히고 부패하게 만든다.
그들은 그 민첩한 두뇌로 다른 증거를 끌어온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라고 하셨다(렘 15:1). 그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이 산 사람들을 위해서 중재한다는 것을 모르셨다면 어떻게 이런 말씀을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하셨겠느냐고 묻는다. 나의 추론은 그와 반대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대로 모세나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중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중재한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이 직접 나오게 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어떤 성자가 그 일을 하리라고 믿을 수 있는가? 모세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 일을 훨씬 잘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중재했다고 할지라도"(렘 15:1 참조)라고 하셨으므로, 죽은 사람들은 확실히 산 자들을 위해서 중재한다고 논쟁자들이 이런 무가치한 궤변을 계속한다면, 나는 더욱 그럴 듯한 추론을 하겠다. "만일 모세가 중재했다고 할지라도"라고 하였으니, 자기 백성이 극도로 곤란했을 때에도 모세는 중보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더욱 더 다른 사람은 중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온유함이나 인자나, 아버지 같은 관심 등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모세에 훨씬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궤변가들은 냉소함으로써 자기들을 훌륭히 무장시킨 줄로 생각한 바로 그 무기에 상처를 입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간단한 발언을 그와 같이 곡해한다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주께서 하신 말씀은, 내가 전에는 모세나 사무엘 같은 사람들의 기도를 잘 들었으나,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이 백성의 변호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에 불과하다. 에스겔서에 있는 비슷한 구절에서도 아주 분명한 뜻을 알아낼 수 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그 자녀를 구하지 못하고 다만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겔 14:14). 여기서는 "만일 이 셋 중의 둘이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하는 뜻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셋째 사람, 즉, 다니엘은 그 때에 살아 있었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청년 시대에 경건의 가장 훌륭한 증거를 보였다.
그러므로 성경에 분명히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문제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또한 바울은 다윗에 대해 말할 때에, 그가 기도로 후손들을 도왔다고 하지 않고, 다만 그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겼다고 했다(행 13:36).
24. 죽은 성자들은 세상의 근심 걱정에 관계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일생을 통해서 순전히 경건과 자비의 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서 경건에 대한 욕망을 모조리 빼앗을 것이냐?"고 항의한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조사하려는 호기심이나 욕망이 없다. 그와 같이 아마 그들도 여러 가지 특별한 욕망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이 일에만 뜻을 정하고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는 신자의 구원에 못지않게 악인들의 멸망이 포함된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사랑은 물론 그리스도의 몸이 가지는 친교의 범위 내에 머물며, 그 교제의 성격이 허락하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 그들이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역시 그들의 안식을 버리고 지상의 근심 걱정에 끌려들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항상 그들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하다.
그리고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남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고 해서(딤전 2:1-2, 약 5:15-16) 성자들에게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신자 상호간의 기도는 그들이 서로 곤란과 짐을 나누는 동안 그들의 사랑을 촉진하는 데 이바지한다. 그리고 이것을 행하는 것은 주님의 교훈이 있기 때문이며, 주의 약속도 있기 때문이다. 주의 교훈과 약속 이 두 가지는 언제든지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죽은 이들의 경우에는 이런 이유들이 하나도 없다. 주께서 그들을 우리에게서 데려가셨을 때에, 그들과의 접촉점을 우리에게 전혀 남겨놓지 않으셨으며(전 9:5-6),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그들에게도 우리와의 접촉점을 남겨놓으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 믿음으로 우리와 연결되었으니, 그들이 우리에게 대해서 한결같은 사랑을 지금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묻노니 우리의 음성을 들을 만한 귀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또는 우리의 곤란을 지켜볼 만한 밝은 눈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누가 알려주었는가? 사실, 우리의 반대자들은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가 성자들에게 비치고 그 빛에 의해서 성자들은 마치 거울 속을 들여다보듯이, 인간 만사를 눈여겨본다고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지껄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특히 그들같이 담대하게 주장하는 것은, 우리 머리 속의 몽롱한 상태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한 판단의 내부를 뚫고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을 하며 성결을 짓밟는 것이 아닌가? 성경은 우리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지혜와 원수가 된다고 자주 언명한다(롬 8:6-7 참조). 또한 우리의 헛된 생각을 전적으로 정죄하며(엡 4:17), 우리의 이성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우러러보라고 명령한다(신 12:32 참조).
25. 족장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적당하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옹호하려고 성경에 있는 다른 증거들을 가장 사악하게 왜곡한다. 그들은 야곱이 자기 자손들도 자기 이름과 자기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했다고 한다(창 48:16). 우선 우리는 부른다는 이 형식이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것이었는가를 알아야 하겠다. 그들은 조상들에게 도와달라고 부른 것이(기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선례는 성자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조금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우매한 자들은 미련하게도 야곱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이나 그 부르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형식까지도 유치하게 오해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이 말은 성경에 여러 번 나온다. 이사야에는 여자들이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그 보호 하에서 살 때에, 남자의 이름으로 칭함을(=부름을) 받는다고 나와 있다(사 4:1).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른다는("칭한다"는) 것은 그가 자기 민족의 조상임을 말하는 것이며, 자기들의 시조로서 그에게 경의를 표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야곱이 이렇게 한 것은 자기 이름을 퍼뜨리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자기의 후손이 완전한 복을 얻으려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언약을 계승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후손들이 최고의 복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의 혈족으로 인정되기를 기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들에게 언약을 계승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후손들로서는 이런 기억을 기도에 삽입함으로써 죽은 이들의 중재 기도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언약을 생각하시도록 한 것이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성도들이 조상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언서에서 교회가 이구동성으로 증거한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上古)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사 63:16). 이렇게 말하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첨가하였다.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사 63:17). 그들은 중보 기도를 생각한 것이 아니고, 언약의 유익에만 유의하였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주 예수께서 계시고, 그의 손으로 영원한 자비의 언약을 맺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 언약을 확인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에 다른 이름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러한 성경 말씀이 족장들을 중보 기도자로서 확인한다고 이 훌륭한 교사들은 주장하고 있으니,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많은 중보 기도자들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교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가장 낮은 자리도 그들 사이에서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가? 저 교사들이 어떤 종류의 찌끼에서 그들의 대변자를 만들어내는가는 세상이 잘 안다. 교사들은 내게 대답해 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보다 앞에 두셨고, 최고의 영광의 자리에 올리셨는데, 아브라함을 버리며 묵살하는 것이 어떻게 합당하단 말인가? 이런 관습은 고대 교회가 알지 못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관습이 새로운 것이란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옛 족장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을 좋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이름이 다양하면 최근에 생긴 부패한 관습을 용서받을 것같이 생각하는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을 위해서" 백성에게 자비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있다고(시 132:10 참조) 항변한다. 그러나 이것도 그들의 과오를 지지하기는커녕 도리어 강력하게 반박한다. 다윗이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는 모든 성도들과 구별되어, 그의 손을 거쳐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확립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언약을 고려한 것이고 사람을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를 선포한다. 다윗이 그리스도의 예표(豫表)인 점에서 본다면, 다윗에게 특별했던 것은 확실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26. 우리가 기도해야만 하듯이 성자들도 기도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자들의 기도에 응답이 있었다는 말이 자주 있는 데서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왜 응답이 있었는가? 물론 기도했기 때문이다. 예언자의 말에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시 22:4-5)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저들을 본받아 기도하여 저들과 같이 응답을 받도록 하자.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은 당치 않은 불합리한 추리를 해서, 이미 기도에 응답을 받은 사람들만이 앞으로도 응답을 받으리라고 한다. 야고보의 말은 얼마나 더 훌륭한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17-18).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가? 야고보는 엘리야에게 독특한 특권이 있었으므로 우리가 그 특권에서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고 추론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경건하고 순수한 기도의 무한한 힘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도 그와 같이 기도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이런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굳게 믿지 않는 다면, 우리는 기도를 들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예비하신 뜻과 호의를 악의로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실 때에 어느 한 사람이나 몇 사람에게만 한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시겠다고 언급하셨다.
반대자들은 성경에 많이 있는 경고를 고의로 멸시하는 듯 하므로, 그들의 무지는 더욱 용서할 수 없다. 다윗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 권능을 독점했으므로 우리가 그의 요청에 의해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뜻이었는가? 다윗 자신은 아주 다른 주장을 한다. "주께서 나를 후대(厚待)하시리니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시 142:7),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저를 비웃어 말하기를"(시 52:6, 64:10),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 34:6). 시편에는 이런 종류의 기도가 많고, 다윗은 자기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충분히 들어주심으로써 의인들이 수치를 당하지 않으며, 그의 예를 보고 용기를 얻어 소망을 가지게 되도록 하나님께 호소한다. 이제 한 가지 예만 더 드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하도록 하자.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시 32:6). 이 성구를 내가 더욱 기꺼이 인용한 것은, 교황 제도를 옹호하기 위하여 고용된 논쟁가임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들이 이 구절이 죽은 자들의 중보 기도를 입증하는 것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기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때, 하나님의 온유와 인자하심에서 생겨날 결과를 보여주려고 한 것인데, 이 고용된 논쟁가들은 다윗의 뜻이 다른 데 있었던 것같이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유의해야 될 점이 있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경험은 그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하는 데 비상한 도움이 된다.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여러 가지 은혜를 확신의 근거로서 회상하는 구절들이 많으나, 시편의 독자들은 잘 알겠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인용하지 않는다. 야곱도 자기의 예를 들어 같은 뜻을 가르쳤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창 32:10). 그는 약속을 말하지만, 약속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자기에게 대해서 변하심이 없으리라는 것을 더욱 용기 있게 믿으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달라서, 너그러우심에 싫증을 느끼지 않으시며 힘이 다하는 일이 없으시며, 그 자신의 성품으로 인하여 존귀를 받으실 분이시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현명하게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시 31:5)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은 믿을 만 하시다고 첨가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영원히 불변하지 않으시다면, 그의 은혜를 받더라도 그를 믿으며 그에게 기도할 만한 충분히 확고한 기대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실 때마다 우리에 대한 호의와 신의를 예시하시며 증명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희망과 기대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거나 속이지 않을까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27.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한 교리를 결론적으로 논박함
종합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 관해서, 성경이 가장 중요시하여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의 의무를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모든 제물은 그 다음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기도를 다른데 드리는 것은 분명한 신성 모독이다. 따라서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다.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 하셨으리이까"(시 44:20-21). 또한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만을 기뻐하시며,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야 할 것을 명령하신다. 끝으로, 말씀을 기초로 한 믿음은 올바른 기도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멀어지는 기도는 즉시 부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의 어느 곳을 보더라도, 이 영예는 하나님께만 속한다고 하였다. 중보하는 직무에 대해서는 그것이 그리스도특유의 일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중보자가 성결케 하시지 않은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신자들이 서로 교우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밝혔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이 중보를 믿으면서 자기와 다른 교우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뿐 아니라, 이 중보의 직무를 죽은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우리는 가르쳤다. 그 이유는 성경에는 죽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한 곳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상호간의 의무를 다하라고 자주 권하지만,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사실, 야고보는 서로 죄를 고백하며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약 5:16) 두 가지 권고를 결합하여 언급함으로써 무언중에 죽은 사람들을 제외하였다.
그러므로 이 과오를 정죄하는 데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 즉, 올바른 기도는 믿음에서 생기며,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생기며(롬 10:14,17), 하나님의 말씀에는 상상에 불과한 중보 기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자를 자기들의 대언자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미신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형식의 기도가 가득하나, 이런 중보 기도의 예는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황주의자들은 그것이 없으면 아무 기도도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뿐 아니라, 이 미신은 분명히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들은 대언자로서의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못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에게 이런 자격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둘째 점을 쉽게 증명하는 것이 그들의 뻔뻔스러운 주장이다. 그들은 성자들의 변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도, 고작 제시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우리가 하나님께 친밀하게 접근할 가치가 없다는 것뿐이다. 우리가 무가치한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 불발한 우리의 결론은 이것이다. 즉, 영국에서 숭배하는 성자 죠지(George)나 히폴리투스(Hippolytus)나 이와 비슷한 유령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도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아무런 일도 하실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도의 종류 : 개인기도와 공중기도. 28-30)
28. 개인기도
기도는 원래 간원과 간구에 한한 것이지만, 기도와 감사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한 이름으로 총괄하는 것이 편리할 듯하다. 바울이 열거하는 것은 처음 종류에 속한다(딤전 2:1 참조). 요구하며 간구함으로써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널리 드러내며 그의 이름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구하며,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은혜를 구한다. 감사를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에 합당한 찬양을 돌리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좋은 일을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에 돌린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두 가지를 합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였다(시 50:15). 양쪽을 항상 사용하라는 성경의 명령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무거운 빈곤의 짐과 체험상의 사실에 비춰보더라도, 우리를 사방에서 압박하는 곤란은 많고 또 강력해서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신음하며 탄식하며 애원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거룩한 자들은 역경을 모르는 경우에도, 자기의 죄책감과 무수한 유혹의 침범에 직면하므로, 아무리 거룩한 자라도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찬양과 감사의 제물을 드리지 않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또 주셔서, 우둔하고 태만한 우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하시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한다면,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은혜는 크고 많으며 어디를 향하나 강력한 기적이 많이 보여 우리는 거의 압도될 정도이므로, 찬양과 감사를 드릴 이유와 기회가 언제든지 있다.
이 일들을 좀더 충분히 설명한다면, 이미 충분히 증명한 바와 같이, 우리의 소망과 재산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기 때문에, 그의 복을 얻지 못하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소유는 번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과 모든 소유를 항상 하나님께 맡겨야 하며(약 4:14-15 참조) 우리가 결정하는 것, 말하는 것,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손과 뜻 아래서, 즉, 그가 도우시리라는 희망으로, 결정하며 말하며 행해야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믿고 계획을 세우며 실행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서 무슨 일을 착수하는 사람들도 같은 저주 아래 놓여 있다(사 30:1, 31:1 참조). 또 우리가 여러 번 말한 것과 같이,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그를 바르게 공경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그에게서 받을 때에 항상 감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순전히 너그러우신 뜻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들에 대해서 우리가 끊임없이 찬양과 감사를 드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받아 쓸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결론도 나온다. 바울이 모든 것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딤전 4:5) 증거할 때에, 그는 동시에 말씀과 기도가 없으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서 거룩하며 순결하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한다("말씀"을 그는 환유법에 의해서 "믿음"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너그러우신 은혜를 깨닫고, 아름다운 말로 "새 노래"를 그의 입에 두셨다고 공언한다(시 40:3). 그의 이 말에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그 침묵은 곧 원망을 의미한다는 암시가 자연히 포함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마다 그에게 감사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야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선포하면서, 신자들에게 새로운 특별한 노래를 부르라고 역설한다(사 42:10). 같은 뜻으로 다윗은 다른 데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 51:15). 히스기야와 요나도 그들이 구원을 얻은 결과에 대해서 같은 형태로 증명한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여 노래하리라고(사 38:20, 욘 2:9) 하였다.
다윗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 같은 법칙을 지시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시 116:12-13). 교회는 다른 시편에서 이 법칙을 따른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여 우리를 구원하사‥‥‥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시 106:47),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시 102:17,18,21). 사실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시도록 간구하며, 자기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얻을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감사할 의무를 가지며,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사용하고 선포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래서 호세아는 교회가 앞으로 구속을 받을 것을 말한다.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호 14:2)
하나님의 은혜는 찬양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자연히 신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어 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라고 말한다(시 116:1).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자기가 경험한 도움을 말하면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한다(시 18:1). 이 감미로운 사랑에서 흘러나온 찬양이 아니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감사와 결합되지 않은 간구는 모두 사악하다고 한 말의 뜻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그는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한다(빌 4:6) 불평, 권태감, 초조감, 비통, 공포 등의 마음 상태에서 기도를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신자들에게 감정을 조절하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즐겁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한다. 여기서는 거의 반대되는 것들을 결합해서 완전히 실행하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때마다 더욱 거룩한 연관을 지어 우리에게 그를 찬양할 의무를 지우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로 우리의 기도가 성별되며, 그렇지 않으면 부정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마찬가지로 사도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찬미의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면서(히 13:15),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기 전에는 우리의 입은 부정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이것을 보면, 교황주의자들이 대부분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를 "대언자"라고 부르는지 모르고 있으니, 그들은 이상하게 홀려 있는 것이라고 추론하게 된다.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는 이유는(살전 5:17-18, 딤전 2:1,8 참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때와 모든 장소와 모든 일에서 끊임없이 소원을 하나님께 알려 드리며, 모든 것을 그에게서 바라며, 모든 일을 위하여 그를 찬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인데 이는 그 분께서는 우리에게 찬양하며 기도할 확실한 이유를 주시기 때문이다.
29. 공중기도의 필요성과 위험성
끊임없는 기도는 특히 개인의 사적 기도에 관한 것이지만, 교회의 공중 기도에도 어느 정도로 연관된다. 그러나 공중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찬성하여 합의된 방법에 따르지 않으면, 끊임없이 드릴 수 없고, 또 그런 공중 기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점을 나는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을 정하게 되는데 하나님께는 어느 시간이라도 상관없지만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적당하도록 일정한 시간을 합의하여 결정하며, 바울의 말대로 교회의 모든 일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고전 14:40) 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각 교회가 가끔 어떤 감동을 받아서 더욱 자주 기도하며,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더욱 큰 열성으로 기도하는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견인에 대해서는 끝에 가서 논하려 한다.
그런데 이 문제들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금하신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것과는(마 6:7) 아무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금하시는 것은 기도를 계속하는 것이나 긴 기도나 깊은 감정이 섞인 기도가 아니다. 그가 요구하시는 것은 많은 말, 유창한 말로 하나님의 귀를 자극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거나 사람을 설복하듯이 하나님을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위선자들은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개선식에서 하듯이 기도에서 호화찬란한 외식(外飾)을 보인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 저 바리새인은(눅18:11) 마치 이런 기도로 거룩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어보려는 듯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칭찬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지금도 교황주의자들 사이에는 같은 이유로 빈말의 반복이 유행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짧은 기도를 자꾸만 되풀이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어떤 사람들은 공중 앞에서 태산같이 많은 말로 자기선전을 한다. 교회가 하나님께 대한 이런 유치한 조롱을 금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들리는 기도는 진실해야 하며, 마음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부패한 요소와 근사한 것이 또 있는데, 이것도 그리스도께서는 동시에 배척하신다. 위선자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많은 목격자가 있기를 갈망하며, 시장에 자주 다니면서 기도하여 세상의 환호를 잃지 않으려고 한다(마 6:5). 우리는 이미 기도의 목표에 대해서 말했으므로, 즉, 하나님을 찬양할 때나 그의 도움을 간구할 때나, 우리의 진심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으므로 기도의 본질은 정신과 마음에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또는, 기도는 원래 속마음이 감동된 것이요, 그 감동 받은 것을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롬 8:27 참조) 쏟아 놓으며 펼쳐 놓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늘 교사께서는 최선의 기도법을 정하셨을 때에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데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면, 은밀히 보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들어주시리라고 하셨다(마 6:6). 빈말과 허식적인 기도로 사람들의 호의를 얻고자 하는 위선자들을 멀리하라고 하신 주께서는 또한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더 훌륭한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 주께서 이런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신 뜻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마음속으로 침잠할 수 있는 고요한 곳을 찾아 모든 생각을 집중하며, 마음속으로 깊이 파고들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성전이어야 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감동시키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속 가까이에 계실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다(고후 6:16 참조).
주의 말씀은 다른 곳에서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기도는 은밀한 것임을 가르치시려는 것이다. 기도는 주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의 무수한 근심 걱정에서 멀리 떨어진 고요한 상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도 기도에 더욱 집중하시고자 할 때에는 항상 군중으로부터 멀리 떠나 고요한 곳을 찾아가셨다. 주께서는 이렇게 행하심으로써 우리가 이런 보조 수단을 경시하지 않도록 깊은 인상을 주고자 하신 것이다. 원래 너무도 불안정한 우리의 마음은 이런 수단으로 기도에 더욱 열성을 기울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필요한 때에는 군중 속에서도 기도하기를 꺼리지 않으셨다. 그와 같이, 우리도 필요하다면 어디서나 깨끗한 손을 들어 기도해야 한다(딤전 2:8). 끝으로, 우리가 생각할 점이 있다. 신자들의 거룩한 집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은밀한 곳에서, 또는 자기 집에서 기도한다는 뜻도 모르는 자이다. 또 단독으로 사적인 기도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밀한 판단보다 사람들의 의견을 더욱 존중하기 때문에 아무리 쉬지 않고 공중 기도에 참가하더라도 장황한 기도를 드릴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교회의 공중 기도를 멸시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일찍부터 그런 기도를 영예로운 명칭으로 장식하셨는데, 특히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부르셨다(사 56:7, 마 21:13). 이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려는 뜻은 기도하는 일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활이며, 성전을 깃발같이 세워 신자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에 참가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특별한 약속도 첨가되었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시 65:1). 예언자가 이 시에서 알리고자 하는 것은 교회가 드리는 기도에는 반드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기쁜 노래를 부를 기회를 항상 주시기 때문이다. 율법의 그림자는 없어졌으나 지금도 확실히 옛날과 같은 약속이 우리에게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의식으로 우리들 사이에 믿음의 단결을 조성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확인하셨을 뿐 아니라, 바울도 보편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인정한다.
30. 하나님의 성전은 교회 건물 자체가 아니고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신자들의 공기도를 명하시므로, 우리에게 는 이 공기도를 드릴 공공의 성전이 있어야 한다. 이런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기도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주의 명령에 따라 자기 골방으로 들어간다는 거짓 구실을 만들 기회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 구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마 18:19-20). 즉, 공기도를 멸시하시지 않는다고 확언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주님의 뜻은, 이런 공기도에는 외식(外飾)이나 무가치한 인간적 영광을 추구하는 생각이 없어야 하며, 마음의 은밀한 곳에 진지하고 성실한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교회 건물의 합당한 사용법이라고 한다면, 또 사실이 그러하므로,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정식 장소라든지, 교회 건물에 어떤 비밀한 신성성이 있다든지 하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수백 년 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교회 건물 자체에 계시며, 거기서는 우리 기도를 더 가까이 들어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 건물 자체가 거룩하므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서 더욱 거룩하게 만드는 것처럼 꾸몄다. 하나님의 진정한 성전은 우리 자신이다. 그러므로 그의 거룩한 성전에서 기도하고 싶으면 우리 자신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 미련한 생각을 유대인이나 이교도들에게 일임 해두자. 우리가 받은 계명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장소를 구별할 것 없이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요 4:24) 구하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성전이 기도와 제물을 드리는 일에 제공된 것은 사실이다. 그 때에는 진리가 숨겨졌었고 이런 그림자에 의해서 비유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진리가 산 현실로 우리에게 나타난 지금은 우리가 물질적인 성전에 집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성전 건물 안에 가둔다는 조건으로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정한 성전의 모양을 명상하는 훈련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손으로 만든 성전 안에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사야와 스데반은 엄숙하게 책망하였다(사 66:1, 행 7:48-49).
(노래와 일상 언어로 사용하는 문제. 31-33)
31. 기도 중에 말하며 노래하는 문제에 대하여
여기서 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기도 중에 쓰여지는 말과 노래는 심령의 깊은 느낌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나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입술이나 목에서만 나오는 것이면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킨다. 이런 짓은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남용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엄성을 조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사야의 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말은 미치는 범위가 더 넓지만 여기서 말하는 잘못된 점을 책망하는 데도 관련이 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마 15: 8-9).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사 29:14).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말과 노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마음의 감동과 관련된 것이면 극력 장려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깨어 있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여러 가지 보조 수단으로 지탱하지 않으면 불안정하며 쉽게 변하며 해이하여져 여러 방면으로 흩어져 버린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신체 각부에서 어느 정도로 빛나야 하므로, 노래와 이야기를 통해서 혀가 이 일을 하도록 맡겨진 것은 특히 합당하다. 혀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전하며 선포하도록 독특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혀는 주로 공중 기도에서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이런 기도는 신자들의 집회에서 하는 것이며, 이런 기도로 우리는 한 공통된 음성과, 이를테면 같은 입으로 모두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한 영과 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공개적으로 해서, 모든 사람이 각각 서로 그 교우에게서 신앙 고백을 받으며, 교우의 행위에서 권유와 고무를 얻도록 한다.
32.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문제
겸해서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문제를 논한다면, 이 관습은 심히 오랜 것일 뿐 아니라 사도 시대에도 있었다. 이것은 바울의 말에서 추측할 수 있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 마찬가지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말한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처음 구절에서 바울은 음성과 심령으로 노래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다음 구절에서는 신자들이 서로 덕을 세울 수 있는 신령한 노래를 장려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밀라노 교회는 암브로시우스 때에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 관습이 세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때에 밀라노 교회는 발렌티니아누스의 모친 유스티나가 정통 신앙에 맹렬히 반대해서, 사람들이 평소보다 더욱 끊임없이 기도에 전심할 때였다. 그 후에 서방 교회들은 밀라노 교회를 본받았다.
이는 조금 전에 어거스틴이 이 관습은 동방 교회에서 왔다고 말한 이유이다. 그는 또 저서 재고론(Retractations) 제 2 권에서 말하기를, 아프리카에서는 한창때에 이 관습을 시작했다고 한다. "호민관을 지낸 힐라리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칼타고에서 최근에 시작한 이 관례에 대해서 악의를 품고, 기회 있는 때마다 비난 공격을 했다. 그 때의 노래는 성체를 들기 전 또는 성체를 사람들에게 나눠줄 때에, 성찬대 앞에서 시편에 있는 성가를 노래하는 것이었다. 교우들의 권고로 내가 그에게 답변했다."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합당하고 엄숙한 태도와 조화를 이룬 노래를 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행동에 확실히 위엄과 운치를 더하며, 우리의 마음속에 기도하겠다는 진정한 열성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곡조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가사의 영적 의미에는 마음을 덜 기울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어거스틴도 이 위험성을 많이 염려해서 어떤 때는 아타나시우스가 지킨 관례가 확립되기를 원했노라고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음성에 억양을 적게 붙여서, 노래를 한다기 보다 말하는 것같이 들리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노래에서 받은 유익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어거스틴은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므로 이렇게 적당한 정도를 지킨다면 노래를 부르는 것은 확실히 대단히 거룩하고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곡한 노래는 교회의 존엄성에 합당치 못한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
33. 기도는 일상용어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공중기도도 종래의 관습 같이 라틴 사람들 사이에서는 헬라 말로, 프랑스나 영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라틴말로 드릴 것이 아니라, 온 회중이 아는 국어를 사용해야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온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교회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사랑이나 친절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바울의 권위와 그가 한 분명한 말에서 다소 감동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전 14:16-17).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이 조금도 거침없이 방자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면, 해괴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사도의 솔직한 비난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외국어로 장구한 기도를 고고하게 드리지만, 그 말의 뜻은 자신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그는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고 말하였다.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능력을 받고 방언과 지성, 즉, 이해력을 분리함으로써 은혜를 남용하였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공중기도에서나 개인기도에서나 이해력을 동반하지 않은 말은 하나님께서 심히 불쾌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느낀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지성은 열렬한 생각으로 불붙듯하여 방언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인기도를 위해서는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외가 있다면 마음속에 남용되는 힘이 부족해서 기도를 제대로 못할 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동이 압도적이어서 자연히 방언의 행동이 일어날 때이다. 가장 훌륭한 기도도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느낌이 격동된 때에 방언이 말로 터져 나오며 다른 지체들은 어떤 동작을 하게 된다. 한나가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는 것도 원인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삼상 1:13), 모든 성도들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항상 하는데, 그런 때에 그들의 기도는 단편적인 말로 되어 폭발한다.
기도할 때에 보통 보는 몸짓, 예컨대 무릎을 꿇고 모자를 벗는 것 등은 하나님을 더욱 공경하기 위한 것이다.
(주기도문 : 처음 세 기원에 대한 해설. 34-43)
34.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이 된다
이제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더욱 확실한 방법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기도의 양식 자체를 배워야 하는데, 하늘 아버지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해서 그것을 가르쳐주셨다(마 6:9이하, 눅 11:2이하). 우리는 이 양식에 의해서 아버지의 무한한 인자하심과 관용에 감사해야 한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어린이들이 어려운 근심 걱정이 있을 때마다 부모의 보호 아래로 달려가 피난처를 얻는 것같이, 우리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찾으라고 경고하시며 역설하신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지를 우리의 빈곤이 얼마나 심한 것인지, 무엇을 구하는 것이 공정한지,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지 등 충분한 인식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없는 능력을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보충해 주셨다. 즉,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기도 양식을 정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기도해도 좋은 것과, 우리에게 유익한 것과, 우리가 구할 필요가 있는 것을 모두 한 도표에 적은 듯이 우리에게 제시하셨다. 이 친절하신 가르침에 의해서 우리는 큰 위안을 받게 된다. 곧, 우리가 구하는 것이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으며,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며, 조금도 부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얻는다. 우리는 거의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기도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기술이 없는데다가 성취되면 도리어 자기들에게 해로울 일을 구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어떤 고대 시인의 말을 빌어, 가장 훌륭한 기도라고 생각한 것을 결정하였다. "제우스 신이여, 우리가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를 상관하실 것 없이 가장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그리고 좋지 못한 일들을, 비록 우리가 원하더라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명령하소서." 참으로 우리의 욕심대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짓이라고 판단될 만한 총명이 이 이교도에게도 있었다. 동시에 그는 우리 인간의 불행을 밝힌다. 성령이 바른 기도 양식을 가르쳐주시지 않는다면(롬 8:26)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 때에 반드시 위험한 일을 초래할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기도 양식을 성령으로부터 배운다는 이 특권을 우리는 더욱 존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친히 우리 입에 말씀을 주셔서 우리 마음에 일체의 동요가 없게 하였기 때문이다.
35. 구분과 중요한 내용
이 기도의 모범 양식에는 여섯 가지 기원이 포함되었다. 일곱 제목으로 구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찬성하지 않는 것은 복음서 기자가 반의 접속사(αλλα, 마 6:13역자 주)를 사이에 넣은 의도는 두 부분을 결합하려는 데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저희들이 유혹의 압박을 받게 버려두실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무력한 우리를 도우셔서 넘어지지 않게 구해주옵소서"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고대 교회의 교부들도 우리와 의견이 같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일곱째 자리에 첨가된 것은 해석상으로는 여섯째 자리에 넣어야 한다.
이 기도는 그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중요시 하지만, 처음 세 기원은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점에만 유의하고 소위 우리 자신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남은 세 기원은 우리 자신을 돌보는 일에 관련되며,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구해야 할 것에 대해 특히 배정되었다. 그래서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할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배하는 것이 자유로운 마음에서 하는 일인지, 그렇지 않으면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인지를 하나님께서 시험하려 하시므로, 우리는 이 기원을 드릴 때에 우리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목표로 삼아 이 한 가지 일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 기원과 같은 부류의 다른 기원들에 관해서도 꼭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
또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하는 대로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면 그 결과로 우리 자신도 거룩하게 성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이익에는 눈을 감아, 전혀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사적 이익을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된 때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세 가지 일을 여전히 원하며 기도해야 한다. 모세와 바울이 한 일을 보면, 그들은 자기를 생각하거나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맹렬한 열의로 자기의 멸망을 갈망하는 것을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멸망하는 것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출 32:32, 롬 9:3).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할 때에도 우리 자신의 유익을 기원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면 이 양식도 구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주기도문을 해석하기로 하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6. "우리 아버지"
우선 우리는 바로 우리가 전에 말한 사실에 봉착한다. 즉, 우리는 모든 기도를 다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 다른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놓는다.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사람이 누군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은혜의 자녀로 삼아주시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예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참 아들이시지만 그 자신의 소원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로 주셨는데 이는 우리를 양자로 삼으신 이 위대한 복을 우리가 확고한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양자로 삼으신 그 은혜에 의해 본래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요 1:12) 말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우리가 그를 대할 때에도 이렇게 부르기를 원하신다. 이 한없이 다정한 이름으로 그는 우리 마음에서 모든 불신감을 없애려 하신다. 아버지의 사랑 이상으로 더 큰 사랑은 아무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한 그의 무한한 사랑을 증명하시는 데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요일 3:1) 부르는 것 이상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사람의 선함과 자비를 초월하는 것과 같이, 그의 사랑도 육신의 부모의 사랑보다 더 위대하며 훌륭하다. 따라서 땅에 있는 모든 아버지들이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잊으며 자기 자녀들을 버린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시 27:10, 사 63:16 참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딤후 2:13). 우리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라는 약속을 받은 바 있다. 예언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낯선 사람이나 외국 사람에게 보호를 청하여 몸을 맡기려는 아들은 동시에 반드시 자기 아버지의 잔인한 처사나 빈곤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이, 만일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 이외의 다른 데서 도움을 구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빈곤이나 수단의 결핍이나 잔인성과 지나치게 엄격함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37. "우리 아버지":이 호칭 형식은 우리를 격려할 것이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비록 친절하시고 인자하시지만, 우리의 죄 때문에 매일 우리를 불쾌하게 생각하시게 되므로, 우리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만일 인간 사회에서 어떤 아들이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을 때에, 변호인을 시켜서 자기 일을 호소하게 하며, 중재인을 시켜 화해하려고 하며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보다, 자기가 직접 아버지 앞에 나가서 겸손하게 탄원하는 태도로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의 자비를 간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한다면, 이런 때 그 아버지로서는 아들의 간청에 감동되지 않은 체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비의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는(고후 1:3 참조) 어떻게 하실까? 그 분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호소보다 직접 애원하는 자녀들의 눈물과 신음에 더욱 주목하시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직접 호소하라고 권고하신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아버지의 자비와 친절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공포심에서 행하는 일이며, 거기는 절망적인 심리의 흔적이 없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 풍부하신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비유로 묘사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눅 15:11-32). 어떤 아들의 마음이 아버지를 떠나, 그의 재산을 방탕한 생활에 낭비하고(13절), 모든 일에서 그에게 큰 죄를 지었다(18절). 그러나 아버지는 두 팔을 벌려 아들을 껴안고, 그가 용서를 빌기 전에 먼저 용서하며,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알아보고 기꺼이 달려가 맞이하며(20절) 위로하고, 다시 사랑받는 아들로 만든다(22-24절). 사람에게도 이렇게 큰 애정이 있다는 것을 보이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서 기대해야 할 사랑이 얼마나 더 풍부한가를 가르치신다. 그는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모든 아버지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다정한 아버지이시다. 문제는 은혜를 모르고 반역하며, 사악하고 완고한 우리가 그의 자비를 여전히 믿고 전적으로 그를 의지하는 데 달렸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자신이 그러한 아버지라고 하는 확신을 더욱 강화시키시기 위해서 우리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분명하게 부르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아버지, 당신은 자녀들에 대해서 풍성하고 위대한 애정을 품으셨고, 언제든지 그들을 용서하시고자 하십니다. 이러하신 아버지를 가질 가치가 없는 저희들이지8?당신께서는 우리를 향해 아버지로서의 애정만을 품으신 것을 확신하며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의 자식들인 저희는 당신을 부르며 기도를 드리나이다."
그러나 우리의 좁은 마음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양자된 것을 보증하실 뿐 아니라, 이 일에 대한 증거로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큰 목소리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갈 4:6, 롬 8:15).
그러므로 어떤 주저하는 생각이 우리 앞을 막을 때마다, 우리는 이 공포심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청하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면서 그의 지도로 담대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해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38. "우리 아버지":이 호칭 형식은 우리와 교우들과의 친교를 확립한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교훈은 각각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고 모두 공통적으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들 사이에 큰 형제애가 있어야 한다는 경고를 준다. 왜냐하면 자비와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다는 똑같은 권리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동등한 자녀이기 때문이다. 한 아버지께서 우리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아버지가 되시며(마 23:9), 우리가 얻는 좋은 것이 모두 그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당연히 우리를 서로 분리시키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며, 필요한 때에는 얼마든지 기꺼이 또 진심으로 서로 나누지 못할 것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도움의 손을 뻗치기를 원한다면, 이 합당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형제들에게 가장 큰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은 가장 훌륭하신 아버지의 보호가 그들 위에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들을 총애하신다면 다른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아버지께 대한 우리의 의무이다. 인간 사회에서 한 가족의 아버지를 진정으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동시에 그의 가족 전체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백성과 가족과 그리고 그의 기업에 대해서까지도 아버지께 대한 것과 똑같은 열성과 애정을 품는 것이 마땅하다. 이는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존중하셔서 독생자의 충만(엡 1:23)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즉, 현재 눈에 보이며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을 기도 중에 기억해야 한다는 법칙과 일치해야 한다.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정하셨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잘 되기를 원하며 바라는 것이 인정을 받을 일일 뿐 아니라 경건한 태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보다 믿음의 가족 곧 바울이 모든 일에 있어서 특히 우리에게 부탁한 사람들에 대해서(갈 6:10) 특별한 애정을 품는 것이 마땅하다. 요약하면, 우리의 모든 기도는 우리 주께서 그의 나라와 그의 가족 사이에 이루어 놓으신 공동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어야 한다.
39. 기도와 자선을 비교함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나 어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때에도 우리의 마음이 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으려 하거나 피하려 하지 말고, 모든 일을 거기에 관련시키라는 뜻이다. 이런 기도는 각각 개인적으로 드리지만 그 기도가 이 목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것은 공통된 기도이다. 다른 일과 비교하면 이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일반적인 명령을 내리셨다. 그러나 자기들이 알고 또 보기에 가난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사람이 이 명령을 지키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을 모두 알 수도 없고 모두 구제할 수도 없으므로 고통 받는 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을 빠뜨리게 된다. 그와 같이, 교회라는 공동 사회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특수한 기도를 드릴 때, 즉, 하나님께서 잘 알려 주신 사람들의 곤란이나 자기 일을 위해서 구체적인 기도를 드릴 때,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도와 자선은 모든 점에서 같은 것이 아니다. 아낌없이 주는 일은 궁핍한 것이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기도를 통한 도움은 아무리 먼 곳에 있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라도 줄 수 있다. 이런 도움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포함한, 따라서 저들도 포함한, 일반적인 기도 양식을 통해서 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이 그 당시 신자들에 대해서, 다툼 없이 어디서나 깨끗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역설한 사실을 들 수 있다(딤전 2:8). 바울이 다툼은 기도의 문을 닫는다고 경고한 것은 신자들이 서로 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를 드리라는 뜻이었다.
40.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늘에 계시다는 말씀이(마 6:9) 첨부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우리는 그가 울타리 안 같이 둥근 하늘 안에 둘러싸여 갇혀 계시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솔로몬은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왕상 8:27). 예언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은 그의 보좌요 땅은 그의 발등상이라고 말씀하신다(사 66:1, 행 7:49, 17:24 참조). 이렇게 말씀하시는 뜻은, 그가 어떤 특수한 공간 내에 갇히신 것이 아니고 만물에 편만(遍滿)하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둔한 우리의 지성은 그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보다 더 숭고하거나 존엄한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늘"이란 말로 그의 영광을 표시하게 되었다. 우리의 감각 기관들은 어떤 것을 지각하면, 그것을 그 장소와 결부시키는 것이 보통이므로 하나님을 모든 공간을 초월한 곳에 둔다.
그래서 그를 찾으려고 할 때에 우리는 육체와 영혼의 모든 지각을 초월해야 한다. 둘째로, 이 표현에 의해서 우리는 그를 부패하거나 변하지 않는 영역으로 높인다. 끝으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의 위대한 힘으로 우주 전체를 포용하시며 유지하시며 지배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크시며 또는 높으시며, 이해할 수 없는 본질을 가지셨으며, 무한한 위력을 가지셨으니 영생 불사하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말을 들을 때에 우리의 생각은 높이 비약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에 대해서 자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꿈꾸게 되고, 우리의 작은 척도로 그를 재며, 그의 뜻을 우리의 감정에 일치시키려고 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가 그의 섭리와 권능으로 천지를 지배하신다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요약한다면, "아버지"라는 이름이 우리의 눈앞에서 그려 주는 하나님은 우리가 확신을 품고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라는 다정한 이름은 신뢰감을 일으킬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의심스러운 거짓 신들에게 끌리지 않게 하는 힘이 있으며, 우리의 마음이 독생자로부터 천사들과 교회의 유일한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을 허락했다. 둘째로,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어서 온 우주가 그의 지배하에 있으므로, 그리고 그는 기꺼이 우리에게 즉각적인 도움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공연히 그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반드시 하게 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사도는 말한다(히 11:6).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낮은 자들에게도 그의 섭리가 미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이 초보적인 지시에 의해서 바울은 우리가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준비 교육을 한다.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라고(빌 4:6) 명령하기 전에 그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빌 4:6),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빌 4:5) 서두를 끄집어낸다. 이것을 보면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는 것을(시 34:15, 벧전 3:12 참조) 확신하지 않는 사람들은 분명히 마음의 의혹과 혼란으로 자기 마음속에서만 기도를 되풀이할 뿐이다.
41. 첫째 기원
첫째 기원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것이다(마 6:9). 이 기원의 필요성은 우리의 큰 수치와 관련이 있다. 우리의 배은망덕과 악의로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며, 할 수 있는 한 우리의 참담함과 미친 듯한 불경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는가? 비록 모든 불경한 사람들이 신성 모독적인 방자한 행위로 영광을 흐리게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은 여전히 거룩하게 빛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니"(시 48:10). 예언자의 이 선언은 정당하다.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진 곳에서는 그의 권능도 나타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위력, 선하심, 지혜, 공의, 자비, 진리 등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땅에서는 그의 거룩하심을 부당하게 빼앗고 있으므로, 그것을 옹호할 힘이 우리에게 없을지라도, 적어도 기도 중에라도 관심을 가지라고 명령하신다.
요약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연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거나 생각할 때에는 언제나 반드시 최고의 경의를 품어야한다. 이와 반대되는 현상은 지금까지 너무도 흔했던 신성 모독이며, 이것은 지금도 세상에 만연되어 있다. 우리 사이에 조금이라도 경건한 기풍이 있다면, 이 기원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다른 이름과는 관련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될 때에, 거룩은 그 순수한 영광을 나타낸다. 우리가 여기서 받은 명령은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이름을 수호하셔서 모든 경멸과 불경을 물리치실 뿐 아니라, 전 인류를 복종시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게 만드시기를 기원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부는 교훈으로, 또 일부는 행동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므로 우리가 그를 거룩히 받드는 것도 이 두 가지 방면에서 그의 것을 그에게 돌리며, 따라서 그에게서 오는 것을 모두 받아들일 때에만 가능하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의 표지를 각양각색의 업적에 새겨 놓으셨으므로, 우리는 그의 자비심뿐만 아니라 그의 엄격하심도 찬양해야 하며, 이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 사이에서 그 정당한 권위를 가지게 될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의 우주 통치의 어디를 보아도 그가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원에는 다른 목적도 있는데, 그것은 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모든 불신과 불경이 일소되며, 소멸되며, 거룩하게 받드는 일을 흐리게 하고, 약하게 만드는 모든 비방과 조롱이 추방되며, 모든 모독 행위를 침묵시키고, 존엄하신 하나님께서 더욱 더 빛나시게 되는 것이다.
42. 둘째 기원
둘째 기원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것이다(마 6:10). 이 기원에는 새로운 점이 없지만, 첫째 기원과 분리시킨 데는 훌륭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가장 중대한 일에 대해서도 태만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문제의 성질상 철저히 이해되어야 했을 것이 사실은 그렇게 되지 못한 때에는 우리는 거기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주기 위해서 논의를 연장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모두 사로잡아 마침내 완전히 격멸 시키시기를 기원한 다음에, 거의 똑같은 기원을 하나 더 첨가한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마 6:10).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의는 전에 있었지만, 여기서 간단히 반복하겠다. 사람들이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과 지상 생활을 경멸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구하기로 약속하며 하늘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할 때에, 거기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는 두 부분이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항거하는 모든 육의 정욕을 그의 영의 힘으로 바로 잡으신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의 법도에 맞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이 기원을 드릴 때에 순서를 바르게 지키는 것은 자신의 일부터 처리하는 사람들뿐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평화스러운 상태를 어지럽게 하며 그 순결을 더럽히는 일체의 부패를 자기에게서 깨끗이 씻어버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왕의 홀(笏)과 같으므로, 우리는 여기서 모든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그 말씀에 기꺼이 복종하도록 만드시기를 하나님께 기원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일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은밀한 감동을 통해서 그의 말씀의 역사를 나타내시고, 그 말씀이 마땅히 받을 높은 영예를 받게 되는 때이다. 그 후에 우리는 불경한 자들 곧 하나님의 권위를 미친 듯이 한사코 거역하는 자들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전 우주를 굴복시킴으로써 나라를 세우신다. 그러나 방법은 여러 가지이니, 즉, 방자한 자들을 길들이시며, 길들일 수없는 자들은 그 교만을 꺾으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계 각지로부터 자기 앞으로 모으시도록, 교회와 교인의 수효를 늘리시도록, 교회에 각종 선물을 주시도록, 교회 사이에 바른 질서를 확립하시도록, 그러나 순수한 교리와 경건의 원수들을 모두 타도하시도록, 그들의 계획과 노력을 분쇄하시도록이런 일들을 매일 기원해야 한다. 이것을 보아도 매일 전진하도록 열심을 다하라는 명령이 무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간사는 순조롭게 추악한 죄를 말끔히 씻어버리며 완전한 고결에 도달하며 성장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오실 때까지 완전성의 실현은 지연된다. 그 때에는 바울이 가르친 대로,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것이다(고전 15:28).
이와 같이, 이 기도는 우리를 세상의 부패에서 물러서게 하려는 것인데 이 세상의 부패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그의 나라가 우리 안에서 번영하지 못하게 한다. 이 기도는 동시에 육을 죽이려는 열심을 일으켜야 한다. 끝으로 이 기도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나라를 확장시키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겉사람이 낡아지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후 4:16).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가 그의 의에 순종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그의 빛과 진리를 더욱더 찬란하게 빛내심으로써 사탄의 나라의 어두움과 거짓이 소멸되는 때에 이루어진다. 그 때가 오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그의 영의 도움으로 그들을 바른 생활로 인도하시며, 그들의 인내력을 강화시키신다. 그러나 원수들에 대해서는 그 악한 음모를 전복시키시며, 그 전략과 기만 술책을 폭로하시며, 그 악의에 대항하시고, 그 완고한 태도를 억압하시고, 드디어 자신의 입김으로 적그리스도를 죽이시며, 그리스도 강림의 광채로 모든 불경건을 멸망시키실 것이다(살후 2:8).
43. 셋째 기원
셋째 기원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것이다(마 6:10). 이 기원은 하나님의 나라에 의존하며 하나님 나라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 하신다"는 뜻을 쉽게 또는 즉시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 때문에 따로 첨가된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왕이 되신다고 하는 것을 이 기원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도 불합리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뜻이 아니다. 또한 만물을 주관하시며 그 목적을 향하여 인도하시는 은밀한 뜻이 아니다. 사탄과 사람들이 하나님께 맹렬히 대항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그들의 공격을 물리치실 뿐 아니라, 그것을 도리어 이용하셔서 이미 결정하신 일을 실행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복종하는 하나님의 다른 뜻에 주목해야 한다. 또 그래서 하늘과 땅을 비교한 것이다. 시편에 있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하며, 열심으로 그의 명령을 이행한다(시 103:20). 그러므로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은 아무 것도 행해지지 않으며, 천사들도 완전히 평화롭고 공정한 생활을 함께하고 있는 것과 같이, 지상 생활도 이런 표준을 따르며 모든 고난과 사악이 제거되기를 우리는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 일을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육의 욕망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의 감정을 하나님께 복종시키지 않는 사람은 그의 뜻에 안간힘을 써서 대항한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부패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또 이 기도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우리를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과 심령을 창조하시도록(시 51:10)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신의 것은 완전히 없애버려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가 되는 것 이외에는 어떤 욕망의 자극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요약하면,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심령을 주관하실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의 내적인 이끄심을 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을 싫어하게 된다. 그 결과로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과 모순된 우리의 모든 감정을 허망하고 무력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첫째 부분의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주기도의 처음 세 기원을 보았다. 이 기원을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목표로 삼고, 자신이나 자신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비록 이런 기도로 인하여 우리 자신에게 풍성한 유익이 오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여기서 기원하는 일들은 우리가 원하고 구하지 않아도 때가 오면 나타날 것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원하고 구해야 한다. 또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적지 않은 가치가 있다. 이렇게 기원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영예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다고 열렬하고 성실하고 철저하게 맹세를 한 종과 자녀임을 증거하며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이렇게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시키겠다는 이 소원과 열의를 품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와 종으로 인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이 일들은 실현될 것이므로, 그 결과는 그들에게 혼란과 멸망을 가져다 줄 것이다.
(마지막 세 기원의 해설. 44-47)
44. 넷째 기원
다음에 있는 둘째 부분에서 우리는 자신의 일에 관계한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서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다(고전 10:31)우리에게 유익한 것만을 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처음 세 기원을 요구하시며, 우리를 전적으로 자신에게로 이끄셔서 우리의 경건을 입증하신다. 그 다음에야 우리 자신의 일을 돌보도록 허락하시는데, 거기에는 제한이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는 모두 그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해야 한다는 의도가 없이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아무 것도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며 죽는 것보다 더 합당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롬 17:7-9).
그러나 이 기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모든 것, 즉, 음식과 의복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평안한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에 일임하여 그가 먹여 주시고 보호해주시도록 한다. 우리의 지극히 은혜로우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육신까지도 보호하고 지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시며, 빵 한 조각, 물 한 방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기를 기대함으로써 우리가 이런 사소한 일로 믿음을 실천하게 하신다. 그 이유는, 우리는 악하여 우리의 영혼보다 육신에 대해서 더 민감하며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영혼을 위탁하고도 여전히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입을까 하고 육에 속한 일을 염려하며, 포도주와 양식과 기름이 풍부하게 자기 앞에 없으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많다. 그림자 같은 짧은 현세의 생명이 우리에게는 영원불멸의 생명보다 이렇게도 더 중요하다. 하나님을 믿고 육신을 위한 근심을 단연 포기한 사람들은 즉시 그보다 더 위대한 일들 곧 구원과 영생까지도 하나님에게서 기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때로는 우리를 심히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기대한다는 것은 신앙의 적지 않은 단련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의 골수에 박힌 이 불신앙을 버릴 적에, 우리는 큰 유익을 얻는다.
어떤 학자들은 "초실체(超實體)적인" 빵에 대해서(마 6:11) 철학적으로 논하고 있으나, 그들의 생각은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유수같은 이 짧은 인생에서 하나님께 양육자의 직무를 맡기지 않는다면 이 기원은(마 6:11) 불완전한 기도가 될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이유는 모독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인 것이 당연한데, 땅의 근심 걱정에 관심을 둘 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이 일에 끌어넣는다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한다.
이런 생각은 마치 아버지의 축복과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음식에서까지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딤전 4:8) 한 말씀은 쓸데없는 기록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죄의 용서가 신체의 영양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낮은 것을 앞에 두셔서 우리를 점진적으로 남은 두 가지 기원으로 천상 생활에 속하는 기원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셨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우둔한 것을 고려하셨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배정해 주신 정도로 만족하고 부정한 계략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도록, 우리는 다만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된다고 명하셨다. 동시에 우리는 그 양식이 선물로서 우리의 것이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모세의 글에, 하나님의 복이 아니면, 노력이나 노고나 우리의 손만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했다(레 26:20, 신 8:17-18 참조). 사실 음식이 풍부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영양 있게 변하도록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는 가난한 사람 못지않게 부자에게도 필요하다. 풍부한 포도주와 양곡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마시지 않으면, 사람은 주리고 목말라 넘어질 것이다.
"오늘" 또는 다른 복음서에 있는 것과 같이, "날마다"라는 말과 "일용할"이라는 형용사는, 곧 없어질 것에 대한 무제한적인 욕망을 억제한다. 우리에게는 보통 이런 욕망이 한정 없이 불타듯 하며, 여기에 다른 악이 더 붙게 된다. 우리는 소유가 필요 이상으로 풍부할 때에는 쾌락과 오락과 허식과 기타 사치에 허비한다. 그러므로 그날그날 쓰기에 충분할 정도로만 구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오늘 우리를 먹여주시니, 내일도 틀림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아무리 물건이 풍부히 들어와서 창고에 곡식이 가득하고 지하실에 포도주가 가득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하루에 필요한 것만을 기원해야 한다. 주께서 복을 주셔서 우리의 소유가 계속 불어나게 하시며 유효하게 만드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모든 소유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해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손에 있는 것까지도 주께서 시간마다 조금씩 우리에게 주시고, 그것을 쓰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은 자부심이 강하여 좀처럼 믿지 않기 때문에 광야에서 그의 백성에게 만나를 양식으로 주면서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 특별한 증거를 보이셨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신 8:3, 마 4:4)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이 예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물질적인 수단으로 생명과 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만, 그의 권능만이 그 생명과 힘을 유지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래서 그는 보통 반대되는 예를 들어 우리를 가르치신다. 즉, 가끔 빵의 힘을(또 지팡이의 힘이라고도 하신다) 꺾음으로써 먹는 사람들이 배가 부르지 않고 쇠약해지게 하시며(레 26:26) 마시는 사람들이 목이 마르게 하신다(겔 4:16-17, 14:13 참조).
그러나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제한적인 욕망으로 무수한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이나, 소유가 풍부한 것으로 만족하거나 산적한 재물을 믿고 아무 근심도 없는 사람들이 이 기도를 드린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처음 종류의 사람들은 이 기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기 원하는 것을 사실은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혹은 철저히 싫어하고 미워한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자기들의 탐욕을 감춘다. 그러나 기도는 마음속에 숨은 생각까지 온통 쏟아놓는 것이라야 한다. 또 둘째 종류의 사람들은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을, 즉, 자기들이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 분께 구한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라고 할 때에,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우리의 권리에 의해서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신 8:18 참조)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나 내가 언급한 점도 배척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정당하고 무해한 노고에 의해서 얻은 것은 우리 것이라고 부르지만, 사취(詐取)한 것과 강탈한 것은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을 해하면서 얻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달라고 요구한다는 사실은, 그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임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든 간에, 우리 자신의 기술과 근면과 손으로 얻은 것같이 보이는 때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우리의 수고가 참으로 좋은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복이 있을 때 뿐이기 때문이다.
45. 다섯째 기원
다음에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한다(마 6:12). 이 기원과 다음 기원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요약하신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구원을 위해서 맺으신 영적 언약도 두 부분만으로 성립한 것과 같다.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라는 것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라는 것이다(렘 31:33-34, 33:8 참조).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우선 죄의 용서를 말씀하시고, 곧 이어 둘째 은혜를 첨가하신다. 즉, 하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며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를 지탱하셔서, 우리가 모든 시험에 굴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빚"이라고 부르신다. 이렇게 용서를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저히 빚을 만족하게 치를 수 없는데, 이 용서는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에서 온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빛들을 너그럽게 탕감하시며, 우리에게 그것을 갚으라고 요구하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자비로 스스로 만족을 거두신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놓아 우리의 몸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롬 3:24 참조). 그러므로 자신이나 타인의 공로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이런 만족으로 죄의 용서를 산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에 전혀 참여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 기원을 드릴 때에 자기들에 대한 고발에 동의할 뿐이며, 심지어 자기의 증거로 자기에 대한 정죄를 확정시킨다. 왜냐하면 용서의 은혜로 풀림을 받지 않으면 자기들은 빚진 자임을 고백하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경멸하며, 자기의 공로와 만족을 하나님께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자비를 비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요구하는 것이다.
자기는 완전하여 용서를 빌 필요가 없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귀의 유혹을 받아 과오에 빠지는 사람들을 그들의 제자로 삼도록 내버려두라. 다만 그들이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빼앗은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가르치시며 죄인만을 받아주시기 때문이다. 아첨하는 말로 죄를 장려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자는 아무리 육의 죄악을 벗어버리더라도 항상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위험성이 있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모든 세밀한 의무까지도 이행하여 하나님 앞에서 아무 오점이 없는 순결함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기를 원하며, 이 일을 위하여 열성을 다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우리 속에 그의 형상을 점진적으로 회복하시며, 그렇게 하시는 동안에 우리의 육에는 항상 다소의 오점이 남아 있도록 하셨기 때문에, 대책을 강구하실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권위에 의하여, 평생 죄의 용서를 빌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면, 그들에게서 모든 흠을 스스로 제거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신진 교사들을 누가 용납할 것인가? 그들은 완전한 무흠(無欠)이라고 하는 유령으로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며, 모든 죄를 제거할 수 있다고 다짐한다. 요한에 의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요일 1:10).
또 이 악한들은 이런 노력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구원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일부를 말살하고 파괴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언약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킨다. 그들은 지금까지 결합되어 있던 것을 분리시킴으로써 모독 행위를 자행할 뿐만 아니라, 가련한 영혼들을 절망 상태에 몰아넣어, 불경건하며 잔악한 짓을 한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완전히 반대되는 나태한 상태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자신과 동류들을 속이는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강림을 갈망하는 것은 동시에 죄의 멸절(滅絶)을 구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항변하나, 이것은 심히 유치한 생각이다. 주기도의 처음 부분에서는 최고의 완전성이 우리 눈앞에 제시되고, 다음 부분에서는 우리의 무력한 상태가 제시된다. 이와 같이, 이 두 부분은 훌륭하게 서로 조화되며, 우리가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동시에 우리의 곤경을 위해 필요한 대책을 경시하지 않게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끝으로,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도 용서를 받기를 기원한다(마 6:12). 즉, 행동으로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거나 말로 모욕하는 등,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를 해한 모든 사람을 우리가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것같이, 우리도 용서받기를 기도한다. 그것은 위법이나 불법에 대한 죄책을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있는 일이다(사 43:25 참조).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분노와 미움과 복수심을 기꺼이 버리고, 부당한 처사를 기꺼이 말끔하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만일 우리가 현재 우리를 해하거나 이미 해한 모든 사람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서는 안 된다. 우리 마음에 미워하는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복수를 계획하며 해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면, 심지어는 우리의 원수의 호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각양 호의를 보이며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런 우리가 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지 말라고 비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하시라고 빌기 때문이다(마 7:12 참조). 참으로, 이 기도의 뜻은, 우리가 하지 않는 일을 우리에게 하시지 마옵소서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이 기도를 드린다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끝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조건을 붙인 것은, 우리가 남을 용서하니 우리도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마치 우리가 받을 용서의 이유가 있음을 말하듯 하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일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위로하시려는 뜻도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미움과 시기와 복수심을 깨끗이 없애버린다면, 우리는 그렇게 남을 용서해준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것도 그만큼 확실하다고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이 조건을 한 표로서 첨가하신 것이다.
이 표의 또 다른 의도는, 주께서 그 자녀들 가운데서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시려는 것이다. 즉, 복수심이 강렬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약하여 항상 적의를 품고 행동하며, 자기들에게 오지 않기를 기원하는 진노가 다른 사람들에게 임하도록 조장하는 사람들을 자녀들 가운데서 제외시키려고 하신다. 주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감히 주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점은 누가복음에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훌륭하게 표현되었다(눅 11:4).
46. 여섯째 기원
여섯째 기원은(마 6:13),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율법을 우리 마음에 새기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대응하는 것이다(잠 3:3, 고후 3:3).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반드시 끊임없는 싸움과 어렵고 괴로운 투쟁이 따르기 때문에, 이 기원에서 우리는 승리를 얻는데 필요한 무장을 갖추며 보호를 받기를 추구한다. 이 기원에서 우리가 받는 지시는, 성령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도움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혜는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우리를 굽히시며 지도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성령의 도움은 사탄의 모든 전술과 모든 맹공에 대해서 우리가 절대로 굴복하지 않게 만드시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런데 시험의 모양은 참으로 각양각색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악한 생각은 시험이다. 우리의 육욕이나 사탄의 선동으로 우리의 생각이 율법을 범하려 할 때 그것은 시험이다. 또한 그 자체로서는 악하지 않은 것들도 마귀의 간계에 의해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날 때에, 시험이 된다(약 1:2,14, 마 4:1,3, 살전 3:5 참조). 이런 유혹들은 좌우에서 오는데, 바른편에서 오는 것은, 예컨대 재물, 권세, 명예 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보기에 찬란하고 좋은 듯해서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며, 그 감언이설로 마음을 미혹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간계에 걸리고 그 감미로움에 취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왼편으로부터 오는 유혹들은, 예컨대 빈곤, 치욕, 경멸, 고난 등이다. 사람들은 이런 곤란을 당하여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절망 상태에 빠져 확신과 소망을 버리고, 드디어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멀어진다.
우리의 육욕이 일으키거나 혹은 마귀의 간계에 의해서 제시되는 두 가지 시험과 싸워 굴하지 않게 하시기를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우리를 지탱하시며 격려해주시고 그의 힘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우리의 원수가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불어넣든 간에 그 악한 적들의 모든 공격에 대항하여 굳게 서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어떤 일이 생기고 일의 결과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더라도, 우리가 그것이 선한 결과로 변할 수 있기를, 즉, 순경(順境)에서 교만하지 않으며 역경(逆境)에서 낙심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시험이 전혀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분발하도록 자극을 받으며 시험에 의해서 압력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너무 활동하지 않아서 태만해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 시험이 오기를 원한 것은 불합리한 일이 아니었고(시 26:2 참조), 주께서 날마다 그의 선민을 시험하시는 것도 이유가 없는 일이 아니다(창 22:1, 신 8:2, 13:3). 이런 때에 주께서는 치욕과 빈곤과 고난과 기타 곤란으로 선민들을 징계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탄의 시험은 서로 다르다. 사탄은 사람을 시험하여 멸망시키며 정죄하며 혼란에 빠뜨리며 낙심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연단시키심으로써 그들의 성실을 시험하시며, 실천을 통해서 그들의 힘을 확실하게 만드신다. 그리고 억제하지 않으면 방종에 흐르며 한정 없이 자만하는 육의 세력을 꺾으시며 정화하시며, 달군 쇠로 지지듯이 하신다. 그뿐 아니라, 사탄은 무장과 준비가 없는 사람을 습격해서 불시에 타도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험과 동시에 벗어날 길도 마련하시며, 그가 가하시는 모든 것을 그의 백성이 꾸준히 참고 견딜 수 있게 하신다(고전 10:13, 벧후 2:9).
"악"이라는 말을 마귀로 해석하느냐 또는 죄로 해석하느냐 하는 것 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실, 사탄 자신이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원수이며(벧전 5:8), 더군다나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죄로 무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기원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시험에도 정복되거나 압도되지 않고, 도리어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적대 세력에 대항해서 주의 힘으로 굳게 설 수 있도록 하옵소서 하는 것이다. 이 기원의 목적은 우리가 주의 돌보심과 보호를 받아 안전한 입장에서 모든 유혹에 굴복함 없이, 도리어 죄와 죽음과 지옥의 문과(마 16:28) 마귀의 나라 전체를 견디고 이기려는 것이다. 이것이 악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위대한 용사인 마귀와 싸우는 것이나, 그의 힘과 공격을 견디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희롱이 될 것이다. 이 싸움을 위해서 자신감 있게 전투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상대하는 원수가 얼마나 사나우며 무장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미친 듯이 날뛰는 사자의 입을 피하는 것같이(벧전 5:8) 마귀의 세력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 주께서 우리를 임박한 죽음에서 구해내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귀의 날카로운 이와 발톱에 찢기고 그에게 삼키우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가 잠잠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할 것이다"(시 60:12, 시 107:14 참조). 능력과 자유 선택의 힘을 가졌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원하는 대로 그것을 믿게 버려두라. 우리는 하나님의 힘만을 의지하고 굳세게 서는 것으로 만족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기도에는 얼른 보기보다 더 깊은 내용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사탄과 싸우는 것이라면, 성령이 충만해서 우리의 약한 육을 완전히 버리기까지는 결코 승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과 죄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새롭게 우리에게 풍부하게 내리고 더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드디어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히 충만해서 모든 악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되리라고 예상한다.
야고보의 증거와 같이(약 1:13), 우리를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반대되는 일이므로, 하나님께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를 굴복시키는 모든 시험은 원래 우리의 정욕이 그 원인이며(약 1:14), 우리의 정욕이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의문은 이미 부분적으로는 해결되었다. 또 야고보가 말한 것은 우리는 자신이 죄를 지은 줄을 알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그 죄를 하나님께 전가하는 것은 무익하며 부당하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좋다고 생각되실 때, 우리를 사탄에게 넘겨주시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배교자의 심리와 추악한 욕망에 빠뜨리시며, 시험에 빠지게 하시는데,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판단은 공정하지만 우리는 알 수 없는 때가 많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원인을 확실히 아시지만 사람은 모르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 점을 생각하며, 또 하나님께서 배교자의 눈을 어둡게 하시며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셔서 그의 복수의 확실한 증거를 보이시려고 하시는 때가 많은 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믿게 된다면, 우리는 이 기도가 부적당한 표현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47. 결론
특히 우리 자신과 우리의 소유물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이 세기원은 우리가 전에 말한 점을 분명히 알려 준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공개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교회 일반의 덕을 세우며 신자 상호간의 교제를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된다는 것이다. 각 사람은 자기 개인에게 무엇을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이 함께 양식과 죄의 용서를 얻으며,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담대하게 기원하며 받으리라고 확신해야할 이유가 첨가되어 있다. 이것은 라틴어 번역에는 없지만, 빼지 않는 것이 여기서는 합당하다. 즉,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그의 것이라고 하였다(마 6:13).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의 견고하고도 평온한 안식처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의 가치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한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중얼거리는 것조차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우리는 비록 가련하고, 무엇보다도 무가치한 것들이며, 아무 칭찬할 점도 없는 자들이지만, 언제나 기도할 이유가 있으며, 언제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우리 아버지께서 빼앗을 수는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끝에 가서 "아멘"이란 말이 첨가되었다(마 6:13). 이 말은 하나님께 구한 것을 얻고 싶다는 열의를 표명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이미 실현되었고, 속이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므로 앞으로도 반드시 모두 실현되리라는 우리의 소망이 강화된다. 또 이런 소망은 우리가 전에 제시한 기도 형식과 일치한다.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단 9:18-19). 이런 말에 의해서 성도들은 그들이 기도하는 목적을 표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서 기도를 들어주실 이유를 구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그런 목적을 얻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며,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확신도 오로지 하나님의 본성에 근거를 두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결론적인 고찰 : 주기도의 완전성과 다른 말을 쓰는 자유에 대하여. 48-49)
48. 지켜야 할 표준으로서 주기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과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온통 이 기도 형식에 포함되어 있다. 이 기도문은 우리의 최대의 교사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를테면 기도의 표준이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선생으로 정하시고, 그의 말씀만을 들으라고 하신다(마 17:5).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였으며(사 11:2), 사람이 되셔서는 위대한 지혜의 사자로서 사람들에게 보냄을 받으셨다(사 9:6, 28:29, 렘 32:19의 융합).
그리고 이 기도는 모든 점에서 완전해서, 이것과 관련을 지울 수 없는 외부적인 것이거나 이질적인 것을 첨가한다는 것은 불경한 짓이며 하나님의 시인을 받을 수 없는 짓이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요약하신 것은 그에게 합당한 것, 그가 기뻐하시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요컨대 그가 기꺼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이 범위를 넘어 다른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원하는 사람들은 첫째로,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에 무엇을 첨가하려는 것이니, 이런 짓은 광적인 모독에 불과하며,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의 범위 내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면서 자기들의 날뛰는 욕망대로 멀리 빗나가 헤맨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믿음이 없이 기도하므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런 기도는 모두 신앙과는 관계없이 하는 것이니,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 굳게 서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근거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 보이신 표준을 경시하고 자기의 욕망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힘껏 싸우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터툴리안이 주기도를 "합법적 기도"라고 부른 것은 옳은 말이며 훌륭한 말이다. 그는 은연중에 모든 다른 기도는 법 밖에 있고, 따라서 금지를 당한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49. 우리는 주기도의 용어의 형식보다 내용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이 기도의 형식에 구애되어 그것이 일점일획이라도 변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는 우리가 사용해서 유익을 얻을 다른 기도들이 여기저기 많이 있고, 용어는 많이 다르나, 그 기도들은 같은 성령이 만드신 것이다. 같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암시하시는 기도는 많으나, 그 용어가 주기도와 비슷한 것은 없다. 우리가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이 기도에 요약되어 포함된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구하거나 기대하거나 요구해서는 안 되며, 설사 용어는 전혀 다를지라도 뜻이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모든 기도와 경건한 이들이 드리는 기도는 주기도와 관련시켜야 한다. 참으로, 이 기도같이 완전한 기도는 달리 찾아 볼 수 없으며, 더 완전한 것은 더군다나 없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생각해야 할 것과, 사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이 기도에서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또 그 구조도 지극히 정밀해서, 아무도 개선해보겠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 요약하면, 이 기도는 하나님의 지혜가 가르치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을 가르치셨고. 필요한 것을 원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특정 시간에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데 대하여. 50-52)
50. 일정한 시간에 기도함
우리는 우리의 심령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앙망하며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고 위에서 말했으나, 우리는 연약해서 여러 가지 보조수단으로 지탱하며, 나태해서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으므로, 각각 이 기도의 실천을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들을 지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 시간들이 오면 반드시 기도를 드리며, 그 시간에는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완전히 기도에 바쳐야 한다. 그런 시간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일과를 시작하기 전, 음식을 먹으려 할 때,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먹고 난 때, 밤에 자려고 할 때이다.
그러나 시간들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시간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빚을 갚는 듯이, 그리고 시간 이외에는 갚을 빚이 없다는 듯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규칙적으로 시간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일종의 훈련이며, 따라서 이 연약함은 훈련을 받아야 하고 계속 자극을 받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곤란을 당할 때, 우리는 속히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특히 주의해야 한다. 또 자신이나 타인의 일이 순조로운 것을 보면 반드시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함으로써 그의 손이 도와주신 것을 인정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어떤 특수한 일에 묶어 두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어느 때에, 어느 장소에서, 어떤 방법으로, 무슨 일을 해달라고 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주기도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법을 제정하거나, 어떤 조건을 가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과 방법과 때와 장소 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결정하시도록 일임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마 6:10). 이런 말로 우리는 우리의 뜻을 하나님 뜻에 복종시키며, 우리의 뜻을 재갈로 제어하듯 함으로 해서 감히 하나님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원을 조정하시며 지도하시도록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시킨다.
51. 기도는 인내로 참으면서 계속하라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복종하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의 법칙에 지배되도록 한다면, 우리는 기도를 참고 계속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욕망을 보류하고 주를 기다리면서 참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주께서 나타나시지 않더라도 항상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며, 사람들이 보기에 주께서 무시하는 것 같은 기도들에 대해서도, 결코 들으시지 않은 것이 아님을 적당한 때에 말씀하시리라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 요구에 응하시지 않더라도, 우리가 낙심해서는 안 된다는 한결같은 위로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열성에 도취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의 첫 요구를 들으시고 곧 도와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노하시고 적의를 가지셨다고 속단하고서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희망을 일체 버리고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평온한 마음으로 우리의 희망을 뒤로 물려가면서, 성경이 강력히 권장하는 견인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시편에서 보면, 다윗과 기타 신자들은 기도에 거의 지치고, 듣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많은 말로 허공만 치듯 한 때에도, 기도를 그만두지 않는다(시 22:2).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 믿음이 모든 사태를 초월하지 못하면, 그 말씀의 권위가 효력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악한 언행으로 하나님을 괴롭혀 노엽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과 어떤 조건하에 계약을 맺는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마치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는 종인 듯이, 자기들이 정한 법으로 하나님을 얽매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즉시 복종하시지 않으면 격노하며 불평을 말하며 항의하며 중얼거리며 하나님께 대해서 미친 듯이 날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자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는 자비심으로 허락하시지 않는 일을 그들에게는 허락하신다. 이스라엘의 자손이 이 점을 증명하는데 그들의 기도를 주께서 들어주시지 않은 편이, 고기와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삼키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다(민 11:18,33).
52. 응답이 없는 기도가 있는가?
그러나 오래 기다린 후에도 기도에서 받는 유익을 감각으로 알 수 없거나, 기도의 결과를 지각할 수 없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을 확신하게 만든다. 즉, 유익한 것을 얻었다는 확신을 준다. 우리가 곤란한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곤란한 우리를 돌보아주시겠다고 자주 또 확실하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빈곤한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며, 고난 중에 있는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이다.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의 백성의 기대와 인내에 실망을 안겨 주실 수 없다. 우리에게는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대신하실 것이다. 이는 모든 좋은 일이 그 안에 있고 심판 날에, 즉, 그의 나라가 나타나는 때에 그는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허락하실 때에도 반드시 우리가 원한 그대로 응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는 듯하면서도,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요한이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5)고 한 말의 의미도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공연한 말을 많이 한 것같이 보이지만, 특히 유익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원대로 하시지 않는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친절히 잘 들어주시며, 그의 말씀을 믿고 가진 소망은 결코 우리에게 실망을 주지 않겠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이 인내심에 의하지 않으면 오래 서 있을 수 없으므로, 이 인내심으로 하여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주께서 그 백성에게 가하시는 시험은 가볍지 않으며, 훈련도 쉽지 않다. 그들을 극단으로 모는 때가 많으며, 그렇게 몰린 그들이 진창에 빠져 하나님의 다정한 은혜를 맛볼 때까지 거기 오랫동안 있게 하신다. 그리고 한나가 말한 것같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신다(삼상 2:6). 괴로움을 당하고 고독하고 거의 죽게 된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유의하시며 현재의 불행을 끝나게 해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소생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용기를 잃고 절망 상태에 빠지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이 소망을 고수한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잠시도 기도를 쉬지 않는다. 기도는 끊임없이 참고 계속하지 않으면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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