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장 기독교인의 자유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한 교리는 필요하며, 이 자유에 포함된 세 부중에 서 첫 부분은 갈라디아서 1-3장에 있다. 1-3)
1. 자유에 대한 기독교인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 자의 자유를 말해야 하겠다. 복음의 가르침을 정리하려고 하는 사람은 이 제목에 대한 설명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필요한 일이며, 이것을 모르고는 양심은 거의 아무 일도 확신 있게 행할 수 없으며, 여러 가지 일에 머뭇거리고 위축되며 항상 불안과 동요를 느낀다. 자유는 특히 칭의에 따르는 것이 그 칭의의 힘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참으로 하나님을 신중하게 경외하는 사람은 이 교리에서 오는 비길 데 없는 유익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불경건하고 루키아노스(Lukianos)적인 인간들, 즉, 비꼬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이 교리를 교묘한 말로 희롱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취한 자들이어서, 어떤 파렴치한 일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여기서 이 문제를 논하는 것이 적합하겠다. 앞에서 몇 번 이 문제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일이 있으나, 자세한 논의는 지금까지 미룬 것이 유익했다.
그 이유는 이 방자한 인간들에게 제때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하자마자 정욕이 끌어 오르거나 큰 소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을 버려두면 가장 선한 일까지도 가장 사악하게 더럽힌다. 어떤 자는 이 자유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께 대한 일체의 복종을 버리고 거리낌 없는 방탕 생활에 뛰어든다. 또 어떤 자는 자유를 무시하고 그것이 모든 절제와 질서와 분별을 폐기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혼란 중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기독교적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이런 위험 사태의 원인을 일소할 것인가?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나 복음의 진리나 영혼의 내적 평화를 모두 바르게 알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교리의 이 중요한 부분이 삭제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동시에, 보통 제기되는 어리석은 항의에 대처하는 것이다.
2.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성도들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칭의에 대한 확신을 얻는 데 있어서 율법에 의한 의를 일체 잊어버리고 율법을 뛰어넘어 더욱 전진해야 한다. 우리가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칭의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버리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율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즉, 행위를 전혀 계산하지 않아야 한다. 의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사소한 행위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행위의 분량이나 한도를 측정할 수 없고, 율법 전체에 대한 채무자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논의할 때에, 율법을 일체 언급하지 않으며, 행위에 대한 생각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받아들이며, 우리 자신을 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보아야 한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의롭게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하고 무가치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양심에 확신을 얻고 싶으면 율법을 일체 배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서 율법은 신자들에게 불필요하다고 추론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그것은 율법이 비록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신자들의 양심에 관계할 수 없을지라도, 신자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끊임없이 가르치며 충고하며 권고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일은 매우 다르므로, 우리는 바르게 또 양심적으로 구별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생활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우리의 전 생활에는 어떤 경건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살전 4:7, 엡 1:4, 살전 4:3 참조). 이때에 신자들에게 의무를 알려 주며 거룩과 결백에 대한 열의를 일으키는 것은 율법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려갈 때에 무엇이라고 대답하며 어떤 확신으로 설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양심이 고민할 때에는,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한 완전성이 전연 미칠 수 없는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의로서 제시해야 한다.
3. 갈라디아서에 있는 주장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의 논증은 거의 전부가 이 점을 증빙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의식에서 해방되는 자유뿐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해석가들이다. 그들이 인용하는 구절들이 이 점을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1-4). 이 구절들에는 확실히 의식에서 벗어나는 자유보다 더 고상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나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의식을 논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그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폐지된 율법의 옛 그림자를 다시 그리스도의 교회에 끌어들이려고 애쓰는 거짓 사도들과 논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이 논쟁 전체의 근본이 되는 고차원적인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저 유대교적인 그림자가 복음의 명료성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에, 그는 모세의 의식에서 예시된 일들이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나타났다는 것을 밝힌다. 그 다음에, 이 순종이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데 도움이 된다는 극히 사악한 관념을 저 사기꾼들이 일반 신도들에게 불어넣었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강경한 태도로, 신자들은 율법의 행위로, 더욱이 저 무가치하고 유치한 것들로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모든 사람을 위협하는 율법의 정죄에서 풀려났다는 것과(갈 4:5),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 문제는 당연히 우리가 논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바울은 신자들의 양심은 자유를 얻었다고 다짐하여, 그들이 불필요한 일에 의무를 느끼지 않도록 한다.
(둘째는, 율법의 강요를 받지 않고 기꺼이 순종하는 양심의 자유이다. 4-6)
4. 율법의 구속에서 벗어나면 신자들은 진실로 순종을 확립한다
첫째에 의존하는 둘째 부분은, 양심이 율법의 필연성에 강요되어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멍에를 벗은 양심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율법의 지배 하에서는 양심은 항상 전전긍긍하기 때문에 우선 이런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꺼이 순종할 생각을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이 뜻을 곧 분명하게 깨닫기 위해서 예를 들겠다. 율법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신 6:5) 이 일을 실행하려면, 먼저 우리의 영혼에서 모든 다른 감정과 생각을 없애버리며,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욕망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우리의 힘을 이 한 점에 집중시켜야 한다. 주의 길에서 모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전진한 사람도 이 목표로부터는 아직 멀다. 그들은 하나님을 진지한 애정으로 깊이 사랑하지만 그들의 마음과 영혼의 많은 부분에는 육적인 욕망이 차 있어서 그들을 끌어당기며, 하나님을 향한 급속한 전진을 방해한다. 그들이 분투노력하는 것은 사실이나, 육이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며 그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이와 같이, 율법을 완수하는 것같이 어려운 일이 없다고 느끼는 그들은 어떻게 해야 옳은가? 그들은 의욕과 열망이 있으며 노력도 하지만, 어떤 일에서도 요구되는 완전성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율법에 비추어 볼 때, 무엇을 해보아도 또 하려고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모두 저주를 받을 것뿐이다. 만일 누가 생각하기를, 그의 행위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전적으로 악한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에 있는 선한 점을 받아주시리라고 한다면, 이런 결론은 그를 속일 뿐이요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이다. 율법의 준엄성이 완화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는 율법은 모든 불완전을 정죄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선하다는 판정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그 행위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율법에 대한 위반이란 것을 깨달을 것이다.
5. 구속에서 해방됨으로써 우리는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율법의 표준으로 측정한다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율법의 저주 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저주밖에 기대할 것이 없는 일올 하기 위해서 가련한 영혼들은 어떻게 진지하게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일 율법의 이 엄격한 요구에서 아니, 율법의 전체적인 준엄성에서 해방되며, 아버지같이 인자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다면, 그들은 쾌활하게 또 열렬하게 응답하며 하나님의 지도를 따를 것이다. 요약하면, 율법의 멍에를 짊어진 사람들은 주인으로부터 매일 일정한 일을 하도록 명령을 받는 종과 같다. 종들은 명령받은 일을 정확하게 완수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주인 앞에 감히 나가지 못한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너그럽고 솔직한 대우를 받는 아들들은 불완전하고 흠이 있는 일까지도 아버지 앞에 내 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일을 완수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의 순종한 행위와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을 아버지께서 받아주시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자녀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봉사가 아무리 사소하며 졸렬하고 불완전 할 지라도, 지극히 자비로우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신다고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도 예언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 일을 확약하신다.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말 3:17). 여기에서 "섬긴다"는 말이 사용되는 한편, "아낀다"는 말은 분명히 "관대하다, 또는 인자하게 허물을 묵인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 우리에게는 이 확약이 절실히 필요하며 이것이 없으면 우리가 애쓰는 일은 모두 무익한 것이 된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하므로 한 것이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이 그에게 대한 공경을 표시한다고 인정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대해서불경이 되는지 또는 공경하는 것이 되는지를 모르고 의심하며 두려워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면서 행동할 수 있겠는가?
6. 은혜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은 신자들은 남은 죄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또 히브리서 기자가 거룩한 조상들이 행했다고 기록한 모든 선행을 믿음에 돌리며, 믿음만으로 그 행위들을 판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히11:2이하, 11:17 기타). 로마서에는 이 자유에 대해서 유명한 구절이 있다. 바울은 거기에서,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롬 6:14), 죄가 우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론을 전개한다(롬 6:12,14). 그는 그 앞에서 신자들에게 그들의 "죽을 몸에" 대해서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게"하며(롬 6:12),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충고했다(롬 6:13). 그러나 신자들은 자기들이 아직도 정욕이 가득한 육체를 지니고 있으며, 죄가 자기들 안에 살고 있다고 항의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에서 해방된 이 자유의 위안을 첨가한다. 그가 한 말의 뜻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다. "신자들은 아직 죄가 근절됐다든지 또는 의가 자기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남아 있는 죄를 언제까지나 노여워하시는 듯이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이유는 없다." 그들은 은혜로 인하여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서 판단되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니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추론하는 사람들은 이 자유의 목적이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격려하는 데 있기 때문에 그것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무익한 일들"로부터의 자유 : 로마서에 의한 증명. 7-9)
7. 기독교인의 자유의 셋째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 자체로서는 "무해 무익한" 외부적인 사물에 관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종교적 의무에도 얽매여 있지 않고, 그런 사물을 때로는 이용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이용하지 않는 것은 전혀 무방한 일이다. 그리고 이 자유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것인데, 만일 모른다면 우리의 양심은 결코 평안히 쉴 수 없으며 미신도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육식을 자유롭게 먹는 일과 휴일 문제와 옷 입는 문제 등에 대한 논의를 상기시킨다고 해서, 이것을 무익하고 경박한 행동이라고 보며, 우리를 몰상식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양심은 한 번 함정에 빠지면 멀고 복잡한 미로에 들어가,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트, 내의, 냅킨, 손수건등에 아마포를 써도 좋겠는지를 의심하게 되면, 다음에는 대마포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고, 드디어 거친 삼베에 대해서까지 의심이 생길 것이다. 또한 식사할 때에 냅킨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는 손수건이 없어도 괜찮겠는가의 문제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맛있는 좋은 음식을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면, 결국은 검은 빵을 먹거나 보통 음식을 먹거나 간에, 더 나쁜 것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불안을 느낄 것이다. 단 포도주를 보고 놀라는 사람은 양심에 꺼림칙해서 맛없는 포도주도 마시지 않을 것이고, 결국 보통 보다 맑고 좋은 물까지도 입에 대지 못할 것이다. 속담에서 말하듯이, 요컨대, 길에 있는 짚을 밟아도 나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대한 논쟁이 벌어지데 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어떤 것을 쓰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가 하는 것과 우리가 무엇을 계획하거나 실행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어떤 사람들은 낙심해서 반드시 깊은 혼란의 와중에 빠진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일정한 길이 없으므로 제멋대로 멸망의 길을 걸어간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의심에 휘말려든 사람들은 어디를 보아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 뿐이기 때문이다.
8. 하나님의 선물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쓰는 자유
바울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한다(롬 14:14).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만일 우리의 자유가 하나님 앞에서 근거가 있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다면 모든 외적인 일들은 우리의 자유에 속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미신적인 생각이 우리 앞에 장애물을 제시할 때는, 대체로는 정결한 것도 우리에게 더러운 것이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緣故)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2-23)고 덧붙여 말한다.
이런 혼란 가운데서 무슨 일이든지 자신 있게 행하는 사람들은 대담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양심에 반대되는 여러 가지 일을 강요에 못 이겨 할 때에, 큰 두려움으로 마음이 압도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도 감사할 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감사에 의해서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고 증거한다(딤전 4:4-5).
그런데 내가 말하는 이 감사는 하나님의 선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비와 양선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사용하는 좋은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좋은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셨다는 명확한 신념을 지니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우리는 이 자유가 향하는 방향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선물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목적에 따라 아무 양심의 거리낌이나 마음에 불안을 느끼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확신이 있으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평화를 얻을 것이며,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선택의 자유가 있는 모든 의식이 포함된다. 이런 의식들에 대해서 우리의 양심은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강요를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 의식들이 교육적 목적으로 사용 되도록 자신의 주관 하에 두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9. 기독교인의 자유를 탐식(貪食)과 사치에 악용하지 말라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전적으로 영적인 것임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이 자유의 힘은 완전히 하나님 앞에서 무서워 떠는 양심을 진정시키는 데 있다. 이는 신자들의 양심이 죄의 용서에 대해서, 혹은 우리가 끝내지 못한 일이나, 우리의 육의 허물로 더러워진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해서, 혹은 무해 무익한 것들의 사용 문제에 대해서 불안과 동요와 고민을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을 자기의 정욕대로 악용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이런 자기의 욕망을 변호하는 구실로 삼는 자들이나, 자유는 사람들 앞에서 쓰지 않으면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약한 형제들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를 행사하는 자들은 모두 자유를 왜곡되게 해석하는 것이다.
첫째 종류의 인간들이 현재 더 많은 죄를 짓고 있다. 사치를 누릴만한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호화찬란한 연회와 몸치장과 저택을 즐기며, 이웃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을 가지려 하며, 부유한 것을 굉장한 자랑으로 생각한다. 이런 모든 일을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변호하며, 이런 것은 무해 무익한 일이라고 한다. 나도 무해 무익하게 사용한다면 그들이 하는 말을 인정하겠으나 이런 일들을 탐내며 크게 자랑하며 낭비하는 때에는, 그 자체로는 용인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죄악 때문에 더러워진다.
바울의 발언은 무해 무익한 것들을 잘 구별한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 1:15). 무엇 때문에 이제 위로를 받고 배부르고 웃고(눅 6:24-25), 상아 침상에서 잠을 자며(암 6:4), "전토에 전토를 더하며"(사 5:8),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포도주를 갖추는(사 5:12)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하는가? 확실히 상아와 금과 재산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로 사람이 쓰도록 허락된 것, 아니 지정된 것이다. 우리는 웃지 말라거나, 배부르지 말라거나, 조상이 물려준 재산에 새로운 것을 더하지 말라거나, 음악을 즐기지 말라거나,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거나 하는 명령을 받은 일이 없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물질이 풍족하며, 열락과 쾌락 속에서 뒹굴며, 배불리 먹으며, 현재의 쾌락으로 머리와 정신이 몽롱하며, 항상 새로운 쾌락을 갈구는 것, 이런 짓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을 버리라. 무절제한 낭비를 그르치는 허영과 교만을 버리라. 맑은 양심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깨끗이 쓸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이렇게 각성하며 절제할 때에 사람은 이런 복된 선물들을 합당하게 쓰는 법을 깨달을 것인데, 이런 절제가 없으면 평범한 쾌락까지도 지나친 것이 된다. 옷은 초라해도 마음이 고귀한 사람이 많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자색 옷과 비단 옷을 입었어도 마음이 단순하고, 겸비한 예가 있다. 그러므로 생활이 빈곤하거나 보통이거나 부유하거나 간에, 사람은 각각 그 처지대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생활을 위해 공급해 주신 것이요 사치하라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법칙은 다음과 같은 것인 줄로 알아야 한다. 즉, 바울과 함께,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만족할 줄 알며, 낮아질 줄도 알고 높아질 줄도 알며,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배부르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모든 형편에 대처할 줄을 알아야 한다(빌4:11-12).
(기독교인의 자유와 약한 형제들과의 관계 그리고 형제들을 넘어지게 하는 문제. 10-13)
10. 기독교인의 자유를 남용해서 약한 사람들을 해하는 것은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하는 일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자유가 안전하지 않다는 듯이, 무분별하고 어리석게 그들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다. 이런 경솔한 행동으로 그들은 약한 형제들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굉장히 많다. 독자들은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금요일에 고기를 먹는 자유가 없다면 자기들에게 자유가 없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고기를 먹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들이 가진 잘못된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들은 자유로 인하여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런 새 것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만 그것을 얻는다는 것과, 그 자유를 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사하지 않는 것도 자유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고기를 먹거나 계란을 먹거나, 붉은 옷을 입거나 검은 옷을 입거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는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고도 오히려 여분이 있다. 자유는 원래 양심을 위한 것인데 양심은 이제 자유롭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앞으로 평생 고기를 먹지 않고, 한 가지 빛깔의 옷만을 입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자유는 감해지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자유이기 때문에 맑은 양심으로 먹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형제들의 약한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가장 위험한 잘못이다. 우리는 약한 형제들을 참으며,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해를 줄 경솔한 일은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자유를 선언하는 것이 중요한 때가 있다고 한다. 나도 그것을 인정한다. 주께서 약한 자들을 돌보라고 특별히 우리에게 명령하셨으므로, 우리는 이 일을 포기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서 이 한도를 지켜야 하겠다.
11. 넘어지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러면 여기서 나는 실족하여 넘어지게 하는 일에 대해서, 그것을 어떻게 구별하며, 어떤 것을 피하며, 어떤 것을 무시할 것인가를 논하겠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자유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후에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분명한 지지가 있고 말의 뜻을 바르게 표현한다는 한도에서 "걸리게(걸림을 준다) 한다"는 것과 "걸린다(걸림을 받는다)"는 것을 보통 구별하는데, 나는 이 구별을 찬성한다.
우리가 경박해서, 혹은 방종해서, 혹은 경솔해서, 바른 순서나 장소에 어긋나는 어떤 불미한 행동을 함으로써 무지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넘어지게 할 때에, 그것은 걸리게 하는 것이라고 불려진다. 우리의 허물로 인해 그들이 걸려 넘어지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가 행위자에게서 유래할 때 그것은 그가 걸리게 한다고 일컬어진다.
악한 행동이나 부당한 행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악의로 또는 악한 의도로 그 행동을 변하여 넘어지는(죄를 짓는) 기회를 만들 때 그것을 걸린다고 말한다. 여기에 걸리게 "하는 것"은 없지만, 악한 해석가들이 그렇게 이해한다. 첫째 종류의 걸림에서는 약한 사람들만이 넘어진다. 그러나 둘째 종류의 걸림에서는 악한 성품과 바리새적 교만을 가진 사람들이 넘어진다. 따라서 하나는 약자의 걸림이요, 또 하나는 바리새적 걸림이라고 부르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약한 형제들의 무지를 고려하면서 자유의 사용을 조절할 것이다. 바리새적 엄격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약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양보할 것인가를 알려준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라고 그는 말한다(롬 14:1). 또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롬 14:13). 이밖에도 같은 뜻을 가진 구절들이 많은데, 여기서 말하기보다 각각 적절한 때에 찾아보는 것이 적당하겠다. 요점은,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1-2)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9),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 10:25),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고전 10:29,32),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우리가 자유를 얻은 것은 우리의 약한 이웃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니 사랑은 모든 일에서 우리를 그들의 종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우리가 충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다음에 사람들과도 화목하게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걸림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 하는 데 대해서는, 주의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주께서는 그들이 소경이면서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니, 그대로 버려두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마 15:14).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주의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되었다고 주님께 고했는데(마 15:12), 주님께서는 그들과 그들의 걸림을 무시하라고 대답하셨다.
12. 기독교인의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며 올바르게 포기하는데 대하여
우리가 누구를 약한 자로 보며 누구를 바리새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냐 하는 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문제는 풀리지 않은 채로 있게 될 것이다. 만약 이 구별을 없애 버린다면, 걸림을 주는 문제에 관해서 자유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를 알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때에 자유는 항상 큰 위험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유를 어느 정도로 조절하며 어느 정도로 걸림의 대가로 치뤄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바울은 교훈과 실천으로 가장 분명한 정의를 내렸다고 나는 본다.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가려고 했을 때에 그에게 할례를 행했다(행 16:3).
그러나 디도에게는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다(갈 2:3). 그가 한 행동은 다르나 목적은 같다.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을 때, 그는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19-20),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22)라고 하였다.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효과적일 때 그것을 제한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 한 우리는 자유를 적당히 제한할 수 있다.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한 까닭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 2:3-5). 거짓 사도들의 부당한 요구로 인해 약한 형제들의 양심의 자유가 위태롭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주장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언제든지 사랑을 추구하며 이웃의 덕을 세우는 데 유의해야 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무엇보다도 명백한 규칙은, 이웃의 덕을 세우는 결과가 될 때에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고, 이웃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에는 자유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그랬던 것같이 자신도 자유를 포기하는 지혜를 가졌노라고 하면서도,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결코 그 지혜를 적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의 평온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체 자유를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웃의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이웃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간혹 그들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만큼 중요한 때가 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외적인 일에 대한 자유의 권한을 그에 게 주신 목적은, 그가 모든 사랑을 실천하는데 더욱 예민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13. 이웃을 사랑한다는 구실로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걸리게 함을 피하는 문제에 대해서 내가 한 말은 모두 중간적인 무해 무익한 일들에 관한 것이다. 꼭 해야 할 일들을 걸리게 함이 무서워서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의 자유를 사랑보다 아래 두어야 하는 것과 같이, 사랑 자체는 믿음을 완전히 지키면서 그 아래에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사랑을 제단에 이르기까지라도(마 5:23-24 참조) 고려하는 것이 합당하다. 즉,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을 노하게 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반드시 소동을 일으키며, 무슨 문제든지 조용하게 처리하지 않고 난폭하게 다루는 사람들의 무절제를 우리는 용인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온갖 악한 일의 괴수 노릇을 하던 자들이 이들에게 걸림이 되지 않도록(고전 8:9 참조) 행동하겠노라고 할 때에, 우리는 그런 말도 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은 이웃들의 양심을 악으로 인도했으며, 특히 그들 자신은 여전히 같은 진흙탕에 갇혀 있어 빠져나올 희망이 없다. 또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실천의 모범을 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들은 젖을 먹여야 된다고 상냥한 태도로 말하면서, 사실은 이웃을 그들의 가장 악하고 치명적인 생각 속에 빠지게 한다.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을 젖으로 먹였노라고 한다(고전 3:2). 그러나 만일 그 때에 교황주의자의 미사가 고린도 신자들 사이에 있었다면, 바울은 젖을 주기 위해서 희생을 드렸을 것인가? 그랬을 리가 없다. 젖은 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꾀어서 잔인하게 죽이면서도 그들에게 음식을 먹이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허위를 일시 용인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언제까지 그런 젖을 자녀들에게 먹일 것인가? 자녀들이 경한 음식을 먹을 정도로 자라지 못했다면 훌륭한 젖으로 키우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내가 그들을 더 날카롭게 공격하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들의 진부한 주장은 반박할 가치조차 없으며, 건전한 생각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미 당연한 멸시를 받고 있다. 둘째로, 나는 이미 특수 논문들에서 충분히 증명한 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독자들이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사탄과 세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게 만들려고, 또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아무리 애쓸지라도, 우리는 굳세게 전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위험이 앞에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서 손톱만큼도 벗어날 자유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용인하시지 않는 일을 시도한다는 것은 어떤 구실 하에서도 불가하다는 사실이다.
(전통과 정부에 대한 자유와 양심의 관계. 14-16)
14. 모든 인간적법에 대하여 양심은 자유롭다
우리가 이미 서술한 자유의 특권을 받은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 양심이 이제 한 경지에 도달했다. 즉,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자유롭기를 원하시는 문제들에 관해서 여러 가지 관례의 올무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인간의 권한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큰 은혜를 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를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양심도 그 받은 유익을 빼앗겨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께서 큰 희생으로 얻어 주신 것을 우리가 경시해서는 안 되는데 이는 그가 금이나 은이 아닌 자신의 피로 그 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벧전 1:18-19). 바울은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사람에게 예속시킨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갈 2:21 참조). 갈라디아서의 몇몇 장에서는, 만일 우리의 양심이 그 자유를 확고하게 지키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희미하게 되며 심지어 말살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전력을 다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의 양심이 법과 규칙에 얽매인다면(갈 5:1,4 참조), 양심은 확실히 자유를 잃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문제이므로 더 자세하고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규정한 것을 폐지하는 문제에 관해서 한 마디라도 말이 나면, 마치 인간의 모든 복종이 동시에 제거되고 타도되는 듯이, 한편에서는 선동적인 사람들이, 또 한편에서는 중상자들이 즉시 큰 소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15. 두개의 왕국
그러므로 우리는 이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먼저 사람에게는 이중의 통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영적인 통치로서 여기서 양심이 경건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배우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통치로서 여기서는 인간으로서 또 시민으로서 사람 사이에 유지해야 할 여러 가지 의무를 배운다. 보통 이 두 방면을 "영적" 및 "세속적"인 관할권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부적당한 명칭은 아니다. 첫 번째 종류의 통치는 그 뜻이 영혼의 생활에 속한 것이요, 둘째 것은 현세 생활에 관한 것, 즉, 의식뿐 아니라, 거룩하고 고결하고 절제 있게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법률을 제정하는데 관한 통치이다. 전자는 마음속에 있고, 후자는 외면적인 행동을 규제한다. 하나는 영적인 나라, 또 하나는 정치적인 나라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구별한 것과 같이, 이 둘은 항상 각각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 한 쪽을 고찰할 때에는 다른 쪽은 염두에 두지 않아야 한다. 이를테면 사람에게는 두 세계가 있으며, 두 세계가 각자 다른 임금과 다른 법률의 권위 하에 있다.
이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자유에 대한 복음의 교훈을 사회질서에 잘못 적응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외부적인 통치에 관해서 인간 사회의 법에 복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자유롭다고 해서 모든 육적 예속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아니다.
다음에, 영적인 나라에 적용되는 듯한 제도 가운데도 착오가 있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그런 제도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하므로 합당하다고 인정할 것과,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과를 구별해야 한다. 세속 정치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하겠다. 교회법에 대해서도 지금은 말하지 않겠다. 자세한 논의는 제 4 편에서 하는 것이 더 적당하겠고, 거기서는 교회의 권한도 논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논의에 대한 결론을 말하겠는데,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문제 자체는 그다지 불분명하거나 복잡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외부의 법정과 양심의 법정을 선명하게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곤란을 당한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벌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양심을 위해서도 정부에 복종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에(롬 13:1,5) 문제가 더욱 곤란하게 된다. 바울의 발언 때문에 양심은 세속적 법에도 매인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조금 전에 말한 것과 이제부터 영적 통치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전부 부정될 것이다.
이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 양심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원을 더듬어 정의를 내려야 한다. 사람이 마음과 이해력으로 사물에 대한 지식을 파악하며, 그 사물을 "안다"고 하는 것이 "지식"이란 말의 유래이다. 그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일종의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감각이 사람에게 결합된 증인같이, 하나님 앞에서 고소를 당할 죄를 감추지 못하게 할 때에, 이 감각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양심은 사람이 마음속에 아는 것을 숨기지 못하게 하며, 도리어 그것을 추궁해서 드디어 유죄를 선언하기 때문에, 사람과 하나님과의 일종의 중간적 존재이다. 바울도 양심을 이런 뜻으로 이해하고,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라고 말했다(롬 2:15-16). 말하자면, 단순한 지식이 사람 속에 숨어살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을 하나님의 법정으로 끌어가는 이 지식은 일종의 보호자이다. 즉, 사람의 모든 비밀을 찾아내서 하나도 흑암 속에 묻혀 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임명된 보호자이다. "양심은 일 천명의 증인이다"라고 하는 옛 격언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같은 이유로 베드로도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을(벧전 3:21) 마음의 평화, 즉, 그리스도의 은혜를 확신한다면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나타날 때의 마음의 평화와 동일시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는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라고 하는 것은(히 10:2), 우리가 해방 또는 무죄 방면 된 것으로 인정되며, 죄가 다시는 우리를 고소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16. 양심의 구속과 자유
그러므로 행동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과 같이, 양심은 하나님을 상대로 한다. 맑은 양심은 곧 심령의 내면적 성실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곧 율법의 완성이라고 한다(딤전 1:5 참조). 후에 같은 장에서, 어떤 사람들이 착한 양심을 버렸기 때문에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다고"(딤전 1:19) 말함으로써, 바울은 양심과 이해력이 얼마나 다른가를 가르친다.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을 섬기려는 활발한 심령과, 경건하며 거룩하게 살려는 진실한 노력을 의미한다.
이따금씩 양심을 사람들에게도 상관시키는 일이 있다. 누가가 전한 바에 의하면,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언명한다(행 24:16). 그러나 이것은 선한 양심의 결과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에 한 말이고, 원래는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양심은 하나님만을 상대로 한다.
그러므로, 어떤 법이 양심을 구속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전혀 생각 없이 법이 그 사람을 구속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을 순결하고 깨끗하게 해서 모든 정욕을 배제하라고 명령하실 뿐 아니라, 음란한 말이나 방탕한 행동을 일체 금지하신다. 나의 양심은 사람이 지상에 한 명도 없더라도, 이 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무절제하게 사는 사람은 형제들에게 나쁜 모범을 보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책으로 그 양심이 묶여 있다.
그 자체로는 무해 무익한 일들에 대해서는 다른 고려를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는 남을 넘어지게 만들 일을 일체 하지 않아야 하는 동시에, 양심은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에 대해서,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고전 10:28-29)라고 말했다. 이미 경고를 들었으면서도 이런 고기를 먹는 신자는 죄를 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하시는 대로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형제를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신자는 여전히 양심의 자유를 유지하고 있다. 이 법은 외면적인 행동을 구속하면서도 양심의 자유는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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