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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2권.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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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 이제 인간은 선택의 자유를 빼앗기고 비참한 노예의 신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논제의 위험성들 : 관점을 수립. 1)

 

1. 이제부터 우리는, 죄가 처음 인간을 노예로 만든 후, 죄의 지배력은 모든 인류에 미쳤을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영혼도 완전히 사로잡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우리가 노예 상태로 전락한 후로 모든 자유를 빼앗겼는지, 아니면 자유가 아직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과연 그 힘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보다 자세하게 검토해 보아야겠다. 그러나 이 문제의 진상를 보다 쉽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제 나는 논의 전체가 향해야 하는 목표를 설정하겠다. 오류를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양쪽에서 오는 위험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올바른 것이 전혀 없다고 들을 때에 즉시 이 사실을 구실로 자기만족에 빠진다. 자력으로는 의를 추구할 수 없다고 듣기 때문에, 그런 추구는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듯 외면해 버린다. 인간에게 사소한 것이라도 공로를 돌리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예를 빼앗게 되며, 사람은 파렴치한 자기 과신으로 인하여 파멸하게 된다. 어거스틴은 이 두 가지 위험성 모두를 지적한다.

이같은 두 위험에 충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있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선은 전혀 없으며 심히 비참한 궁핍이 사방에서 인간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비록 그렇지만 없는 선을 추구하며 빼앗긴 자유를 추구하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하는 편이 그의 천품에 최고의 고상한 덕성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보다 태만한 그를 더 날카롭게 자극하며 분발시킬 수 있다. 이 둘째 점의 필요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첫째 점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것을 나는 본다. 인간이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릇된 자랑을 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영예의 표시들이 뚜렷했을 때에도 인간이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이 그 자신의 배은망덕으로 말미암아 최고의 영광의 자리에서 극도의 치욕된 상태로 떨어진 지금은 더욱 겸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최고의 영예의 최정상에 올라 있을 때에도,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밖에 사람에게 돌린 것이 없다(1:27).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이 그 자신의 선행들로 인해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았을 때에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했으며, 받은 축복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며 적어도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지혜와 덕목에 대한 신뢰를 전혀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동시에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그러므로 진실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는 사람들은 우리의 파멸에 신성 모독을 첨가하는 사람이다. 만약 우리의 자신의 힘으로 싸우라고 가르치는 것은 갈대로 우리를 높이 드는 것과 같아서 갈대와 비교하는 것조차 과대평가인 것이다. 이런 일들에 대하여 허망한 사람들이 생각하고 지껄이는 것은 모두가 연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반복해서 자유 의지는 옹호자들에게서 힘을 얻기보다는 그들에게 짓밟히는 편이 더 많다는 매우 타당한 말을 하곤 했다. 이 점은 서론의 의미로 말해 둘 필요가 있는데, 사람 안에 하나님의 힘을 쌓아 올리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이 밑바닥에서부터 뿌리 뽑혀져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이들은 이런 논쟁은 쓸데없다고 하지는 않더라고 전적으로 위험한 것이라고 해서 심히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근본 문제인 동시에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고 생각된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말하는 자유 의지론에 대한 비판. 2-9)

 

2. 철학자들은 이해력을 신뢰한다.

 

위에서 우리는 영혼의 능력은 지성과 심정에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이 두 부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겠다. 철학자들은, 거룩한 빛이 가득하여 가장 효과적인 의견을 알리며, 우월한 힘이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성이 지성 안에 있어서 등불과 같이 모든 생각을 비추며 왕과 같이 지배한다고 상상하는데, 이 견해는 그들 사이에서 대체로 분명하게 일치되어 있다. 그들은 또한, 감각에 의한 지각은 우둔하며 보는 것이 희미해서 항상 땅에서 기어 다니고 저속한 일에 얽매이며 결코 진정한 식별을 하는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고 상상한다. 만일 욕망이 이성에 복종하고 감성에 굴복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덕을 추구하게 되고 바른 길을 계속하며 의지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욕구가 감성의 노예가 될 때, 그 욕망은 감성으로 인하여 부패하고 타락하여 마침내 정욕으로까지 전락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내가 위에서 말한 능력들은 지성과 감각과 욕망 또는 의지(이 마지막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영혼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이런 철학자들은, 지성에는 이성이 있으며 이성은 선하고 복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주도적인 원리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성은 그 자체의 우수성을 견지하며 자연이 부여한 힘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저 저속한 충동에 대하여서는, 감성은 사람을 오류와 망상으로 이끄는 것이지만 이성의 채찍으로 길들이며 점진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3. 무엇보다 철학자들은 의지의 자유를 주장한다.

 

때때로 인간이 자기 안에 이성이 지배하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심히 어려운 일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철학자들은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쾌락의 유혹을 기뻐하며 혹은 행복에 대한 망상에 속기도 하고 혹은 무절제한 기호의 습격을 받아, 플라톤의 말과 같이, 여러 밧줄에 매인 듯 여러 방향으로 끌린다. 따라서 우리의 악한 견해와 악한 관습으로 인하여 자연이 우리에게 준 희미한 빛이 곧 꺼져 버린다고 키케로는 말한다. 이런 병들이 일단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그때는 아무도 그 맹렬한 힘을 쉽게 억제할 수 없다고 철학자들은 인정한다. 그들은 서슴지 않고 이 병들을 사나운 말에 비교한다. 병거를 모는 사람이 병거에서 떨어지듯이 이성이 혼란될 때에 이 병들은 아무런 억제도 받지 않고 마구 날뛴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은 선행과 악행을 우리의 능력으로 좌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면 그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그들은 말한다. 또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능력에 달렸다면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자유 선택으로, 우리는 하는 일을 하고 피하는 일은 피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고 싶을 때에 어떤 선한 일을 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어떤 악을 행한다면 그것을 피할 수도 있다. 참으로 어떤 철학자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신들의 선물이지만 우리가 선하고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는 일이라고 방자하게 호언하기까지 한다. 또한 코타(Cotta)의 입을 통하여 키케로가 한 말도 여기에서 왔다. "사람은 모두 자기 힘으로 덕을 얻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이 결코 그 현명한 것을 이유로 하나님께 감사한 일은 없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의 덕에 대하여 칭찬을 받으며 자기의 덕을 자랑한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은사이고 우리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조금 뒤에 그는 말한다. "행운은 하나님께 구하되 지혜는 우리 자신에게서 구하라는 것은 모든 인간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모든 철학자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지성 안에 있는 이성은 바른 행위를 위한 충분한 인도자며 이성에 순종하는 의지는 악한 일을 하도록 감각의 선동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유로운 선택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지도자인 이성에 따르며 결코 방해를 받지 않는다.

 

4. 일반적으로 교부들의 생각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자유의지를 인정했다. 자유 의지란 무엇인가?

 

교회의 저술가 모두가 죄로 인하여 인간에게 있는 이성의 건정성에 중대한 손상이 있었으며, 악한 욕망으로 인하여 의지가 심한 노예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들 중에는 지나치게 철학자들에게 가까이 간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중에서 초기 사람들이 인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목적과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나는 본다. 첫째로, 인간의 무력을 솔직하게 고백하면 그들과 대립 관계에 있던 철학자들의 조롱을 받았을 것이다. 둘째로, 선에 대해서 이미 무관심한 육체에게 나태할 새로운 구실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상식적 판단으로 어리석게 생각될 것을 가르치지 않기 위하여, 그들이 성경의 교리와 철학자들의 신념을 조화시키려고 타협시켰다. 그러나 둘째 점, , 나태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점에 그들은 특히 유의했다. 이 점은 그들의 말에서 나타나 있다. 어디선가 크리소스톰도 다음과 같은 표현을 썼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우리의 권한에 맡기셨으므로 우리에게 자유로운 결정과 선택을 허락하시며 원하지 않는 사람을 억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사람으로 받아 주신다." , "악한 사람도 원하기만 하면 선한 사람으로 변하는 일이 많으며, 선한 사람도 나태해서 타락하여 악하게 된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본성에 선택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연성을 부담시키시지 않고 적당한 치료법을 제공하시며 모든 것을 환자 자신의 판단에 맡기신다."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일도 바르게 할 수 없다. 그와 같이 우리의 몫을 바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늘 은혜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앞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도움에만 의지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도 동시에 바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가 많이 쓴 표현 중의 하나는, "우리는 우리의 것을 드리자. 그러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이다"하는 표현이다. 제롬도 이와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시작할 뿐이고 하나님께서는 완성하신다. 우리는 힘써드리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

확실히 이런 발언들은 덕에 대한 인간의 열의를 과대평가한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오직 나태하기 때문이라고 논하지 않으면 우리가 타고난 나태를 분발시킬 수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이 일을 했는가는 후에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인용한 이 의견들이 전혀 거짓이라는 것도 조금 뒤에 아주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도 교부들 특히 크리소스톰이 인간의 의지력을 찬양하고 있는데, 어거스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고대 교부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주장이 다르며 혹은 동요하고 또 혼란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저서에서 어떤 확실한 것을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각 사람의 의견을 정확하게 나열하지 않고, 이 문제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점만을 여기저기서 무작위로 인용할 것이다.

그들의 후대의 다른 저자들은 각각 인간성을 교묘하게 옹호하노라고 자랑하고자 했지만 점점 타락하여, 마침내 사람은 감성부분에서만 부패하고 이성은 완전무결하며 의지 또한 대부분 손상이 없다고 하게 되었다. 동시에 "사람의 자연적인 천품은 부패되었지만 초자연적인 천품은 제거되었다"고 하는 그 유명한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백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나도 본성의 부패상을 분명하게 가르치고자할 때에는 이 말로 만족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하고 초자연적 능력도 빼앗긴 그 사람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주의 깊게 고려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랑한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너무도 철학자들과 같은 말을 했다. 라틴 사람들은 인간이 여전히 올바른 것같이 항상 "자유의지"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헬라 사람들은 더욱 외람된 말을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사람은 각각 자기 손에 힘을 쥐고 있는 것처럼, 자력 또는 자주라고 불렀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천품으로 받았다는 원칙을 모든 사람이 일반 민중까지도 믿었다. 그러나 명성을 원하는 일부 사람들도 이 원칙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이 말의 영향력을 검토하고 그 다음에 성경의 단순한 증언에 의해서, 인간은 그 본성에 따라 선악간 어떤 가능성이 있는가를 결정하겠다.

모든 사람의 글에 자유 의지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지만 그것을 정의한 사람은 거의 없다. 대체로 교회 저술가들은 오리겐이 제출한 정의에는 찬성하는 듯이 보이는데, 오리겐은 자유 의지는 선악을 구별하는 이성의 능력이며 선악을 선택하는 의지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은총의 도움을 받아서 선을 택하며 은총이 없을 때에 악을 택하는 이성과 의지의 능력을 자유 의지라고 한 어거스틴도 오리겐과 의견이 다르지 않다. 베르나르두스는 자유 의지를 정교하게 말하고자, "의지의 불멸의 자유와 이성의 틀림없는 판단 때문에" 그것은 "찬동"이라고 더욱 모호한 말은 했다. 안셈의, "공정을 위한 공정을 유지하는 능력"이라는 유명한 정의도 그다지 명백하지 못하다. 그 결과롬바르드와 스콜라 학자들은 어거스틴의 정의를 더 좋아했는데, 그것은 어거스틴의 정의가 더욱 분명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총이 없으면 의지는 자체만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생각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더 좋거나 혹은 설명을 더욱 자세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첫째, 선악을 구별하는 것은 이성이 하는 일이며 따라서 의지라는 명사는 이성을 가리키는 데 써야 한다고 그들은 의견을 일치했다. 그리고 '자유로운' 이라는 형용사는 좌우 어느 쪽이든 택할 수 있는 의지에 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토마스는, 원래 자유는 의지에 속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자유 의지는 "선택 능력" 이라고 불리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지성과 욕구의 혼합으로 생긴 것이지만 보다 욕구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자유 결정의 힘이 있는 자리라고 가르치는 곳이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이성과 의지인 것이다. 그들이 이 두 가지에 각각 얼마를 돌리는가를 보는 것이 우리가 다음에 할 일이다.

 

5. 교부들이 생각한 "의지""자유"는 여러 가지였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속하지 않은 중간적인 것을 대개 인간의 자유로운 의견에 속한 것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영적 중생에 돌렸다. 이 점에 대하여 '이방인의 소명'이라는 저서의 저자는 감성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의 세 가지로 의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처음의 두 가지는 인간이 넉넉히 받았으며 마지막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옳은 생각인지는 나중에 적당한 곳에서 논하겠다. 지금은 단지 다른 사람들의 발언만을 반박 없이 간단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교부들은 자유 의지를 논할 때에 먼저 사회 활동 또는 외부적 활동을 위해서 자유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대한 복종을 촉진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한 것이다. 나는 이 둘째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보지만 처음의 문제도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 자신의 의견을 잘 표명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스콜라 학자들은 세 가지 자유를 구별하여, 첫째는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 둘째는 죄로부터의 자유, 셋째는 불행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한다. 처음 것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것이므로 결코 빼앗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두 가지는 죄로 말미암아 잃어 버렸다. 나는 기꺼이 이 구별에 찬성하지만, 필연성과 강제를 혼동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이 차이점의 범위와 이것을 염두에 둘 필요성은 다른 곳에서 밝혀질 것이다.

 

6. "역사하는" 은혜와 "협력하는" 은혜란?

 

만약 이것을 인정한다고 할 때, 사람이 선행을 할 수 있으려면 자유 의지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은총, , 참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이 중생을 통하여 받는 특별 은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은총은 평등하고 아무에게나 차별 없이 분배된다고 하는 광신자들에 대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인간은 이 선을 행할 힘을 완전히 박탈당하였는지 빼앗겼는지, 아니면 비록 미약하지만 아직은 다소의 힘이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 곧 자체만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지만 은총의 도움을 얻으면 자기 몫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명제집의 저자는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가 선행을 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은총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는 처음 종류를 "역사하는" 은총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선을 행하려는 뜻을 효과적으로 가지도록 마련하다. 둘째 것을 "협력하는" 은총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하나의 보조로서 선한 의지를 따른다. 이 구분에서 내가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선에 대한 효과적인 욕망을 하나님의 은총에 돌리면서도, 인간들은 자기의 본성에 따라 효과적이 되지 못하는데 도선을 추구한다고 암시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베르나르두스는 선한 의지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단정하면서도, 인간은 자기의 충동으로 이런 종류의 선한 의지를 추구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롬바르드는 어거스틴에게서 이 구별을 얻어 왔노라고 하지만. 이 생각과 어거스틴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 부분 또한 애매모호하여 부패한 해석의 원인이 되었으므로 나는 싫어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조하는 은총과 우리가 협력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 은총을 멸시함으로써 그것을 무력하게 만들든, 그렇지 않고 그것에 복종해서 확인하든지 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방인의 소명의 저자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성의 판단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은총을 버릴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공로가 되는 행위이다. 그리고 성령의 협력이 없이는 할 수 없었을 일이, 자기의 의지로는 할 수 없었을 사람들의 공로로 인정된다." 내가 이 두 가지 점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 것은, 독자 여러분으로 하여금 비교적 건전했던 스콜라 학자들과 나의 생각에 얼마나 많은 차이점이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우리와 더욱 가까운 시대의 궤변가들은, 그들이 고대에서 더욱 멀어졌기 때문에 나와의 차이가 더욱 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분에서, 적어도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자유 의지를 사람에게 인정하는가는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선과 악을 행하거나 생각하는 능력이 동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강요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롬바르드는 마지막으로 단언한다. 롬바르드에 의하면, 비록 우리가 악해서 죄의 노예가 되었고 또 죄를 짓는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경우라도 이 자유는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7.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인이지만 강제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자유 의지론을 확립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이런 종류의 자유 결정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선과 악을 선택하는 힘을 동등하게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강요를 받지 않고도 자기의 의지로 악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로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것에 훌륭한 이름을 붙여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인간이 강제로 죄를 섬기는 것은 아니지만 자원해서 노예가 되었으며, 인간의 그 의지는 죄의 족쇄로 묶여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고귀한 자유인가? 사실 나는 말다툼을 몹시 싫어하며, 그 말다툼으로 교회는 쓸데없이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어리석은 뜻이 있는 말과, 특히 치명적 오류와 관련된 말을 피하는 데는 신중하기로 나는 굳게 결심했다. 나는 묻고자 한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자신이 바로 자기의 마음과 의지의 주인공이며 자기의 힘으로 선악간 어느 쪽으로든지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혹자는 일반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열심히 경고하기만 하면 이런 위험성은 제거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기꺼이 허위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사람의 성향이며, 긴 강화에서 진리를 깨닫기보다는 한 마디 말에서 오류를 얻는 편이 더 빠른 것이다. 우리는 자유 의지라는 이 말에서 너무도 확실하게 이런 경험을 한다. 고대 저술가들의 뒤를 이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배들의 해석을 무시하고 이 말의 어원적 의미에만 집착하여 파멸적인 자신에 빠지고 말았다.

 

8. 어거스틴의 "자유 의지론"

 

교부들의 권위가 우리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들은 항상 이 말을 쓰면서 동시에 이 말에 대한 그들의 해석도 분명하게 밝혔다. 우선, 어거스틴은 주저하지 않고 의지는 "부자유"하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는 의지의 자유를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하는데, 그 주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직 어느 누구도 감히 의지의 결정을 부정해서 죄를 변명하려고 하지 말라."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사람의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욕망이 수갑을 채우고 정복했기 때문이다."라고 분명하게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의지가 죄악에 빠져 정복을 당했을 때에 인간의 본성은 그 자유를 잃기 시작했다. , 인간은 자유 의지를 악용하여 자기와 및 자기의 의지 모두를 잃어 버렸다. , 자유 의지는 노예가 되어 그 결과 지금은 의를 행할 힘이 없다. , 하나님의 은총이 해방하지 않은 것은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 율법이 명령하고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하듯이 행동할 때에는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지 않지만, 성령께서 돕고 사람의 의지가 비록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에 의해 해방되어 복종할 때에는 하나님의 의는 실현된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대하여 사람은 자유 의지의 큰 힘을 받고 창조되었으나 죄를 지음으로써 잃어 버렸다고 다른 곳에서 간단하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다른 구절에서, 자유 의지는 은총에 의해 확립된다는 것을 밝힌 후에, 은총이 없어도 자기들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맹렬하게 꾸짖는다. "그러면, 어찌하여 비참한 인간들은 자유를 얻기도 전에 감히 자유 의지를 자랑하며, 또는 이미 자유를 얻었다면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것인가? 자유 의지란 말에 자유가 내포된 듯한 사실을 그들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그러므로 그들이 죄의 노예라면, 무슨 까닭으로 그들은 자유 의지를 자랑하는가? 사람은 자기를 정복한 사람의 노예가 된다. 이제 만약 그들이 자유함을 얻었다면, 어찌하여 그들은 마치 자기의 노력으로 된 일인 것처럼 자랑하는 것인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고 하신 분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리만큼 그들은 자유로운가?" 참으로, 그는 다른 곳에서 이 말의 사용을 조롱하는 듯이 보이다. 그는, 의지가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해방되지는 않았다고, 곧 의로부터는 자유로우나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이 말을 다른 곳에서 반복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붙인다. 사람은 의지의 결정에 의해서만 의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구주의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지 못한다. 사람의 자유는 의로부터의 해방에 불과하다는 그의 단정은 그 어리석은 이름을 적절하게 조롱하는 듯이 보인다. 이 말을 사용하면서도 나쁜 의미로 해석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이 문제를 가지고 그를 괴롭히지 않겠다. 그러나 이 말을 보존하는 데는 반드시 큰 위험성이 따르며 따라서 폐기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 큰 도움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은 이 말을 쓰지 않기를 원하며, 나의 조언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도 이 말을 피하기를 바란다.

 

9. 교부들 사이에 있는 진리의 음성들

 

아마 내가 어거스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교회 저술가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애매모호한 말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저술에서는 아무 확실한 것도 얻을 수 없다고 나는 인정했는데 이것이 내게 대한 큰 오해를 일으킬 것 같다. 그들은 모두가 나와는 반대 입장이므로, 내가 그들에게서 이 문제에 대하여 발언을 못하도록 빼앗으려고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에게 간단하고 성실하게 알려 주려는 것 외에는 내게 아무런 다른 의도도 없다. 이 문제에 대하여, 교부들의 의견을 따른다면 일반 신자들은 항상 불안 중에서 허덕일 것이다. 때로 이 저술가들은, 인간은 자유 의지의 힘을 빼앗겼기 때문에 은총에서만 피난처를 구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또 어떤 때에는 사람에게 자신의 무장을 제공하거나 또는 제공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모호한 생각을 가르치면서도 그들은 인간의 덕성을 없는 것으로 또는 낮은 것으로 평가하였으며, 모든 선행에 대한 공로를 성령께 돌렸다. 그리고 이 점을 증명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제 나는 분명히 이런 생각을 가르친 발언을 몇 개 소개하겠다. 어거스틴도 자주 반복한 키프리아누스의 말이 있다.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아무것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사람은 자기의 권리라고 할 것이 전혀 없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할 줄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거스틴과 유케리우스는 생명나무를 그리스도라고 해석하면서 이 나무에 손을 내미는 사람은 살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선악을 아는 나무를 의지의 결정이라고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긴 사람이 이 나무 열매를 맛보면 죽을 것이라고 한다. 이들의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은 모두 날 때부터 죄인일 뿐 아니라 온통 죄덩어리라고 하는 크리소스톰의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면, 사람이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죄악이라면, 그의 의지의 힘에 어느 정도로 효과가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떻게 선행에 대한 공로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나눌 수 있겠는가? 다른 저자들에게서도 이런 종류의 말을 얼마든지 많이 지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 유리한 것만을 택하고 나와 의견의 다른 것을 간교하게 묵살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겠기에, 나는 이들 증언을 파하겠다. 그러나 나는 감히 단정한다. 간혹 그들이 자유 의지를 지나치게 찬양한 때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자기의 덕성에 대한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자기의 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있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치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이제 나는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그 진상을 간략하게 설명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든 자기 칭찬을 버려야 한다. 10-11)

 

10. 자유 의지론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을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본장의 서두에서 한 말을 한 번 더 반복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곧 자기의 참화와 빈곤과 벌거벗음과 치욕을 깨닫고 완전히 압도된 사람은, 그렇게 됨으로써 자기에 대한 지식이 가장 많이 진보한다는 말이다. 인간들이 자기에게 없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도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한 그들에게서 자기의 것을 너무 많이 빼앗길 위험성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자기의 정당한 소유가 아닌 것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사람은 반드시 허무한 자신으로 자기를 잃어버리며 하나님의 영예를 찬탈하여 신성 모독의 무서운 죄를 짓게 된다. 참으로 이 욕망이 우리의 마음에 침입해서 하나님 안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것을 찾으라고 강요한다면, 그 때에 우리는 우리의 처음 조상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기를"(3:5) 원하라고 권고한 바로 그 모사가 우리에게 이 생각을 암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자기를 높이게 하는 것이 악마의 말이라면, 원수의 조언을 듣고 싶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의 말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물론 자기의 힘이 많아서 자기를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 허무한 신념에 속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교만을 철저하게 꺾어 버리는 중요한 성경 구절에 귀를 기울여 그 만류를 받아야 한다. 예컨대, "무릇 사람이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17:5). , "여호와는 말의 힘을 즐거워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도 기뻐 아니하시고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147:10-11). ,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40:29-31). 이 모든 구절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원한다면 아무리 작은 힘일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생각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4:6; 참조, 벧전5:5; 3:34).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약속들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44:3),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55:1). 이 구절들은, 자기의 빈곤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을 얻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유사한 구절들도 있다. 예컨대 이사야서에,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리라"는 말씀이 있다(60:19). 틀림없이 주께서는 종들에게서 해와 달의 빛을 빼앗으시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만이 홀로 그들 안에서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므로, 그들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도 믿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11. 참된 겸손만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 철학의 기초는 겸손이라고 한 크리소스톰의 말은 항상 나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말은 나를 더욱 기쁘게 한다. "웅변술의 제일 중요한 원칙은 무엇이냐고 하는 질문에 대하여 어떤 수사학자는 '화술이다'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교훈들을 내게 묻는다면, 나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그리고 항상 '겸손'이라고 대답하겠다."

그러나 그가 다른 곳에서 단정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 자기에게 어떤 덕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랑과 교만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어거스틴은 겸손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겸손 이외에는 자기가 피난할 곳이 없다고 진심으로 느낄 때에 그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자신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람은 원래 사탄이다. 사람의 복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 우리 자신의 것은 죄뿐이 아닌가? 너 자신의 것인 죄를 버리라. 왜냐하면 의는 하나님께로서 오기 때문이다." ,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도 인간성의 능력을 중요시하는가? 그것은 상하고 부서지고 혼란하고 망하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고백이지, 거짓된 자기변호가 아니다." , "누구든지 자기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자기에게서는 도움을 얻을 수 없다고 깨달을 때에, 그의 안에 있는 무기는 파기되고 전쟁은 끝이 난다. 모든 불경건의 무기를 우리는 부수고 태워 버려야 한다. 우리는 아무런 무기도 갖지 않은 상태로 있어야 하며 우리 자신 안에 아무 도움이 없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힘이 약해질수록 주님께서는 더욱 기꺼이 우리를 받아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시편 70편을 해석할 때에, 하나님의 의를 알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의를 기억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밝힌다. 결국 우리 자신은 죄악에 불과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설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권리에 대하여 하나님과 대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돌리는 것만큼 우리의 행복이 손상을 입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높아지시는 것과 같이, 우리의 낮음을 고백하는 것은 그의 자비의 힘입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아직 아무런 확신도 없는 사람이 기꺼이 굴복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진정한 겸손에 자기를 굴복시키기 위하여 그 능력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자애와 야심이라는 병을 버리라고 요구할 뿐이다. 이 병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이 어둡고 자신을 과대평가 하는 것이다(참조, 6:3). 오직 나는, 이 병을 버리고 성경이라는 진실한 거울 속에서 비추어 자기를 바르게 인식하라고 요구할 뿐이다(참조, 1:22-25).

 

(인간의 천성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 오성 12-17)

 

12. 초자연적인 천성들은 소멸되었고 자연적인 천성들은 타락했지만, 인간을 야만적인짐승과 구별할 만한 충분한 이성은 남아 있다

 

실로 어거스틴의 의견이 상식화된 것을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 그 의견은 사람의 자연적인 은사는 죄로 인하여 사람 안에서 부패하였으나 초자연적인 은사는 사람에게서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장의 후반부는, 하늘 생명과 영원한 복락을 얻는데 충분했을 믿음과 광명의 의를 의미한다고 일반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졌을 때에 동시에 영적 능력, 곧 영원한 구원을 얻을 희망으로 받은 은총을 빼앗겼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쫓겨나 영혼의 축복스러운 생활에 속하는 성질들이 온통 소멸되었으며, 중생의 은총에 의하여 처음으로 회복된다는 결론이 된다. 이런 성질은 곧,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성결 및 의에 대한 열성이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회복시켜 주시므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된다.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질들은 제거된 것이라고 결론할 수 있다. 그러나 지성의 건전성과 마음의 성실성도 동시에 제거되었다. 이것이 곧 자연적 은사의 부패이다. 오성 또는 이해력과 판단력이 의지력과 함께 다소 남아 있기는 하지만, 무력할 뿐 아니라 깊은 암흑 속에 빠진 지성을 완전히 건전한 지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의지가 타락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선악을 구별하며 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인 이성은 자연적인 은사이며, 따라서 이것은 완전히 말소될 수 없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약화되고 일부분은 부패되어 기형적인 잔해가 남았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한다(1:5). 이 말에는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이 표현되었다. 첫째로, 인간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에 아직도 어느 정도 희미한 빛이 번득인다. 그것을 보면 사람은 이성적 존재이며 천부의 이해력이 있다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그러나 둘째로, 이 빛은 짙은 무지가 덮어 질식시키므로 효과적으로 나타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의지도 사람의 본성과 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았지만, 사악한 욕망에 긴밀히 결속되어 있어서 바른 일을 추구할 수가 없다. 이것이 완전한 정의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음에 인간의 영혼을 오성과 의지로 구분한 데 따라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해, 먼저 오성의 능력을 검토하겠다.

인간의 오성은 항상 맹목 무지하다고 단죄하며 아무 대상도 지각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역행할 뿐 아니라 상식적인 경험과도 반대된다.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려는 일종의 욕망이 인간성에 내재한 것을 보며, 이미 그 진리를 맛보지 않았다면 사람은 그것을 동경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오성은 원래 진리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지각 능력이 있다. 동물에게 이 은사가 없다는 것은 그들의 본성이 둔하고 비이성적이란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이 동경은, 그대로 두면 곧 허무한 데 빠지기 때문에 경주에 참가하기도 전에 시들어 버린다. 실로 사람의 지성은 둔감하여, 바른 길을 지속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오류 사이를 헤매며 어둠 속을 더듬는 것같이 자꾸만 넘어지다가 마침내 길을 잃고 사라져 버린다. 이와 같이 인간의 지성은 진리를 추구하며 발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폭로한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허무에 눌려 가련한 수고를 하고 있는데, 때때로 마땅히 힘써 알아야 할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공허하고 무가치한 것을 탐구하여 자기의 어리석은 호기심으로 괴로움을 당하면서 특히 이해해야 할 문제들에는 전혀 주의를 돌리지 않는다. 사실 이런 일들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세속 저술가들이 항상 이 타락상을 비난하고 있지만, 그들도 역시 거의 전부가 같은 타락에 빠져 있다. 그리하여 전도서 전체를 통해서 솔로몬은 사람들이 능통하다고 자처하는 연구 부문들을 열거한 다음에 결국 그것을 모두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단정한다(1:2,14, 2:11; 기타).

 

13. 세상적인 일과 인간 사회의 형태에 관한 오성의 능력

 

그러나 오성의 노력은 아무 결과도 없을 정도로 언제나 무가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아래에 있는 일들에 오성이 주의를 돌릴 때에 더욱 그러하다. 이와는 반대로, 오성은 위에 있는 일들을 탐구하려는 관심이 없으면서도 거기에 대하여 다소의 경험을 하는 총명이 있다. 그러나 위에 있는 일들을 탐구할 때에는 그 기능이 균등하지 못한데, 지성이 현세의 영역을 넘을 때에는 자체의 무력을 확실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에 대하여 지성이 그 능력의 정도에 따라 전진할 수 있는 범위를 더욱 분명하게알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땅의 일을 이해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늘의 일을 이해하는 것이다. "땅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나라, 진정한 공의, 또는 내세의 정복에 속하지 않는 일을 의미한다. 그것은 현세에 관해서 의미와 관련이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세의 범위 내에 국한되었다. "하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진정한 의의 본성과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의미한다.

처음 것에는 정치와 모든 기계공작 기술과 문예가 포함된다. 둘째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 뜻에 합치하게 하는 원칙에 대한 지식이다.

처음 종류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인간은 본성이 사회적 동물이므로, 타고난 본능적 충동에 의하여 사회생활을 육성하며 보존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사회생활상의 공정성과 질서에 대하여 보편적인 생각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단체 생활은 모두 법에 의하여 다스려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법의 원칙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법에 관해서는 모든 민족과 모든 개인이 한결같이 합의하게 된다. 교사와 입법가가 없어도, 법의 씨앗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곧 발생하는 분쟁과 충돌에 대해 나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절도범과 강도와 같은 일부 사람들은 모든 법과 권리를 뒤집고 모든 법적 제재를 깨뜨리면서, 자기들의 정욕만이 법으로 행세하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공정하다고 인정한 것을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며(이것은 더욱 흔한 허물이다), 다른 사람들이 금지한 일을 칭찬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사람들이 법을 미워하는 것은, 그 법이 선하고 거룩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경솔한 정욕에 미쳐서 명백한 이성과 싸우는 것이다. 오성으로는 시인하는 것을 정욕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이러 종류의 갈등은 공정성에 대한 천부의 개념을 말살시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법의 여러 부분에 대하여는 서로 논쟁하면서도 공정성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며,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지성이 무력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 지성은 바른 길을 따르는 듯이 보일 때에도 절름거리며 비틀거린다. 그러나 사회 질서의 씨앗이 모든 사람 속에 심어져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은 현세 생활을 정리하는 데는 이성의 빛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한다.

 

14. 학술과 예술에 관한 오성

 

다음으로 학술과 예술에 관해서, 우리는 모두 이것을 배울 만한 어느

정도의 적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인간의 총명이 나타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모든 학예를 배우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한 방면에 분명한 재능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인류의 공통된 능력을 확실하게 알려 준다. 어느 한 가지를 배울 힘과 능력뿐만 아니라, 각 방면에서 새로운 것을 고안하며 선배에게서 배운 것을 더욱 연마 완성하기도 하는 힘과 능력이 인간에게는 있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플라톤은, 이런 이해는 회상에 불과하다고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이해력의 시초가 인간성에 선천적으로 있다고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증거는 사람 속에 선천적으로 있는 오성에 보편적으로 이해력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이 선()은 보편적이므로, 여기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인정해야 한다. 자연의 창조주께서는 저능아들을 창조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이 감사하는 생각을 많이 고취하신다. 하나님의 빛이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편만하지 않을 때에 인간의 영혼은 어떤 천품을 발휘할 것인가 하는 것을 이들을 통해서 보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빛은 모든 사람에게 선천적인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진 은혜의 선물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학예를 발견하거나 조직적으로 전수하거나 학예에 대한 오묘하고 탁월한 지식이 있다는 것은 소수 사람들의 특색이므로 이것은 공통한 총명에 대한 증거로서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이것은 경건한 사람들과 불경건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부여되므로 선천적인 능력으로 인정하는 것이 옳다.

 

15. 과학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세속 저술가들이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쓴 것을 보면, 거기에는 진리의 훌륭한 광명이 비치고 있다. 이 광명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지성은 비록 그 완전 상태에서 타락하고 부패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훌륭한 능력을 아름다운 옷과 같이 입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을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인정한다면, 진리가 그 어디에서 나타나든 우리는 그것을 결코 거부하거나 멸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을 모욕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영의 선물을 경시하는 것은 곧 영 자신을 경멸하며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고대 입법가들이 사회 질서와 규율을 아주 공정하게 수립한 데 대하여 우리는 그들 위에 진리가 비쳤다는 것을 부정할 것인가? 자연을 훌륭하게 관찰하며 교묘하게 묘사한 철학자들이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었다고 할 것인가? 변론술을 생각하고 조리있는 화법을 가르친 사람들을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할 것인가? 의학을 발전시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전력한 사람들을 우리는 미친 사람들의 허튼 소리라고 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싶은 존경심을 가지지 않고는 이런 문제들에 관한 고대인들의 저술을 읽을 수 없는데, 그들의 탁월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경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일은 훌륭하다 또는 고귀하다고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이런 배은망덕을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이교의 시인들도 이런 일을 하지 않고, 신들이 철학과 법률과 모든 유익한 기술을 발명했다고 인정했다. 성경에(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한 사람들은 아래에 있는 일을 탐구하는 데는 참으로 예리하고 투철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성이 그 진정한 선을 빼앗긴 후에도 주께서는 많은 선물을 인간성에 남겨 두셨다는 것을 그들의 예를 보아서 깨달아야 한다.

 

16. 예술과 과학에 관한 인간의 재능도 역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다.

 

동시에, 인류의 공동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누구에게나 주시는 가장 훌륭한 은혜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는 브사렐과 오홀리압의 총명과 지식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그들에게 넣어 주신 것이었다(31:2-11, 35:30-35). 그러므로, 인간 생활에서의 가장 훌륭한 일들에 대한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멀어진 불경건한 사람들과 하나님의 영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묻는 것 역시 정당한 물음이 되지 못한다. 신자들 속에만 하나님의 영께서 계시다는 발언은(8:9) 성결의 영에 관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결의 영에 의해 하나님의 성전으로 성별되는 것이다(고전 3: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성령의 권능으로 만물을 채우시고 움직이시며 살리신다. 그리고 이렇게 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법칙에 따라 각 종류에 부여하신 그 성격에 따라서 하신다. 우리가 자연 과학과 논리학과 수학과 그 밖의 학술의 도움을 받으며 불신자들의 활동과 봉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이 도움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이런 학술을 통해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이 태만에 대한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초등학문에서(참조, 2:8) 진리를 이해라는 큰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를 참으로 축복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이 모든 이해력과 거기에 따르는 지식은, 만일 진리의 견고한 기초가 그 밑에 없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것이라고 우리는 즉시 첨가해야 한다. 그 이유는, 아담이 타락한 후에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사람에게서 제거된 것과 같이 남아있는 자연적인 은혜들도 부패했다고 하는 어거스틴의 참으로 옳은 가르침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점에서 명제집의 선생과 스콜라 학자들은 그에게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말은 은사들이 저절로 더럽혀질 수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사람이 오염된 후에는 그의 은사들은 깨끗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은사를 이유로 칭찬을 받을 수도 전혀 없었다.

 

17. 12-16까지의 요약

 

이상을 요약하면, 우리의 본성에 이성이 고유하다는 것을 인류 전채에서 볼 수 있으며, 마치 동물이 감정을 가진 점에서 무생물과 다른 것과 같이 이성은 우리들과 동물들을 구별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모자라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이 결함이 하나님의 전반적인 은총을 덮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일을 볼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을 하나님의 자비에 돌려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타락으로 인해 우리의 본성은 완전히 파멸되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판단력이 월등하다. 또 어떤 사람은 기술을 배우면 곧 깨닫는 총명이 있다.

이런 차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한 은총을 보여 주시며, 하나님의 온전한 자비심에서 흘러 들어온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게 하신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우수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가의 공통한 본성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나타내시려는 것이 아닌가? 이 은총은 여러 사람을 그냥 지나감으로서 그 자체는 어느 사람에게도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선언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그 소명에 따라 특별한 활동을 하도록 감동을 주신다. 사사기에 이런 예가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도록 부르신 사람들에게 "주의 신이 강림하셨다"고 한다(6:34). 요컨대, 모든 특별한 사건에는 반드시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다. 이렇게 때문에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용사들이 사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삼상 10:26). 사울이 왕으로서 성별될 것을 예언했을 때에, 사무엘은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고 했다(삼상 10:6). 그리고 이런 일이 정치의 전과정을 통하여 계속되었다는 것은 후에 다윗에 대하여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한 것과 같다(삼상 16:13). 똑같은 일이 다른 곳에서 특별한 행동에 관해서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호머까지도, 인간들의 타고난 능력이 우수한 것은 각각 제우스신이 주었을 뿐 아니라 "날마다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찍이 특별한 재능과 기술이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우둔해지는 것을 볼 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수중과 뜻 아래 있으며 하나님께서 매순간마다 그들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총명한 자의 지식을 빼앗으며(참조, 12:20)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신다"라고 한다.(12:24; 참조, 107:40).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 흔적을 보며, 이 흔적이 인류 전체와 다른 피조물들을 구별한다.

 

 

(그러나 우리가 중생하기 전까지는 영적 분별력을 완전히 상실되었다. 18-21)

 

18. 우리의 오성의 한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 통찰에 대하여 인간의 이성은 무엇을 분별할 수 있는가를 분석해야겠다. 이 영적 통찰에는 주로 세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 우리에게 대한 아버지 같은 그의 자비, , 우리의 구원을 아는 것, 하나님의 율법을 표준으로 삼아 우리의 생활을 정돈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처음 두 가지 점에서는, 특히 둘째 점에서는 가장 위대한 천재들이라 할지라도 두더지보다 더 눈이 어두웠다. 물론 철학자들의 글에는 곳곳에 하나님에 대한 유능하고 적절한 발언이 있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발언들에서는 항상 일종의 경솔한 상상이 엿보인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참으로 주께서는 그들에게 자기의 신성을 조금 맛보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무지를 구실로 자기들의 불경건을 숨길 수 없게 만드셨다. 또 어떤 때에는 그들이 어떤 발언을 하게 만드시고, 그런 고백을 함으로써 스스로 고침을 받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관찰 태도로 인하여 사물을 보아도 진리로 향하지 못했으며, 진리에 도달할 수는 더욱 없었다. 그들이 어두운 밤에 들판을 걸어가는 사람과 같아서, 번갯불이 사라지고 다시금 그는 밤의 암흑 속에 빠진다. 빛의 도움으로 길의 방향을 잡을 수는 더욱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 저술의 여기저기에 진리의 작은 물방울을 몇 개 우연히 떨어뜨리는 수가 있더라도, 그것을 더럽히는 해괴한 거짓말이 얼마나 많은지! 요컨대, 그들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확실하게 느낀 일조차 없다.(이러한 확신이 없으면 사람의 오성에는 무한한 혼란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성은 이 진리, , 진정한 하나님은 누구신가, 또 그는 우리들에 대해서 어떤 종류의 하나님이 되려고 하시는가를 이해하는 진리에 접근하거나, 또는 접근하려고 노력하거나, 심지어는 이 진리를 직접 목표로 삼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

 

19. 요한복음 1:4-5 나타나 있는 인간의 영적 맹점을 증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자신의 통찰력에 대한 그릇된 생각에 취해, 거룩한 일에 대한 우리의 통찰력이 전혀 맹목적이고 어리석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따라서 이 사실을 증명하는 데는 논의보다 성경의 증언을 사용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얼마 전에 인용한 구절에서 요한은 이 점을 아주 훌륭하게 가르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1:4-5) 인간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찬란한 광명이 비추기 때문에 작은 불꽃이나 적어도 불똥이 없을 때가 없으며, 이런 조명이 있는데도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다고 요한은 가르친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관하여서는, 사람의 예리한 지성은 맹목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어두움"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사람에게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한다(1:13). 이것은 육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만한 높은 지혜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확언하신 것과 같이,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계시였다(16:17).

 

20.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그 택하신 사람들에게 중생의 영을 통해서(참조, 3:5) 주시는 것은 모두 우리의 본성에는 없는 것이며,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아무 의심을 생각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예언자들을 따라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36:9).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는 사도 바울의 확언 또한 같은 뜻이다. , 세례 요한은 제자들이 놀라는 것을 보고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3:27)고 외쳤다. 요한이 "은사"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이 주는 일반적인 천품이 아니고 특별한 조명 이라는 것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천거한 자기의 말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 그의 불만을 보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주께서 그의 영을 통해서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다면, 내가 한 말은 사람들의 마음에 거룩한 일들을 알려 줄 힘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렇게 말한 것이다. 모세까지도 백성들의 건망증을 비난하면서, 하나님에게서 은사를 받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 아니하셨느니라"(29:3-4). 만약 하나님의 행사를 보는 일에서 우리는 "장애"라고 그가 말한다면, 이 이상 더 표현할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기겠다고 약속하시며 이것을 특별한 은총이라고 하신다(24:7). 분명히 이것은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비춰 주셔야만 영적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이 점을 인정하셔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6:44). 무슨 까닭인가?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산 형상이시며(참조, 1:15), 이 형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광채가 완전하게 계시되지 않았던가?(참조, 1:3) 그러므로, 우리의 눈앞에 그 형상이 밝히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눈이 우리에게 없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을 가장 잘 묘사한 말씀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땅에 내려오신 것은 인간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계시하시려는 목적이 아니었던가?(참조, 1:18) 그리고 그는 그의 사명을 충실히 다 하시지 않았는가? 분명히 다하셨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적 스승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리스도를 전파하더라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께로부터 배운 사람들만이 그리스도께로 온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듣는 것과 배움인가? 물론, 성령께서 놀랍고 특별한 능력으로 우리의 귀를 듣게 만들며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셔서, 이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라고 밝히신다. 교회의 갱신을 약속하실 때에, 그는 구원을 하기 위해 모으신 사람들은(54:7)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고 가르치신다(6:45; 54:13).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심을 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특별한 일을 예언하신다면, 불신자들과 세속 사람들도 함께 참여하는 교훈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령의 비추심을 받아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들의 앞에만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바울은 이 문제를 진실하게 논의하고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말한다(고전 1:18 이하). 모든 인간적인 지혜의 미련함과 허무함을 공격하여 철저하게 분쇄한 다음에(참조, 고전 1:18이하) 그는 단정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누구를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인가? 자연의 광명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적 신비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왜 그런가? 나태하여 그 신비를 무시하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 신비들은 사람이 통찰할 수 없도록 깊이 숨겨졌기 때문에, 오직 성령의 계시에 의해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께서 비추시지 않으면 신비는 미련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과 귀와 마음의 능력을 초월한다고 찬양했다(고전 2:9). 참으로 그는 사람의 지혜를 휘장에 비교하고, 이것이 마음을 가려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셨다"고 사도는 선언한다(고전 1:20). 아직도 우리는 이 세상의 지혜에 예리한 통찰력이 있다고 하며 그것에 의해서 사람이 하나님과 하늘나라의 비밀한 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략할 것인가? 이런 광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21. 성령의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은 암흑이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사람에게 없다고 하는 것을 다름 곳에서는 기도의 형식으로 하나님께만 돌린다. "하나님, 영과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구하노라"(1:17). 이제 우리는 모든 지혜와 계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을 듣는다. 그는 또 무슨 말을 하는가?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라고 한다.(1:18). 그들에게 새로운 계시가 필요하다면, 그들 자신은 눈이 먼 것이 확실하다. 다음에는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운운한다(1:18-19). 사람의 마음은 자기의 소명을 알 만한 이해력이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인정한다.

여기서 펠라기우스파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의 교훈으로 사람의 이해력을 인도하시며, 이런 인도를 받지 않고는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얻게 하시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사람의 우매 또는 무지를 시정하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전혀 터무니없는 말이다. 다윗에게는 율법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필요한 모든 지혜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는,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자기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기원한다(119:18). 분명히 그의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 위에 비칠 때에 해가 땅 위에 솟아나지만, "빛들의 아버지"라고 하는 분이(1:17) 눈을 뜨게 하시거나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그 말씀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성령께서 그 빛을 비추시지 않는 모든 곳은 암흑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은 가장 훌륭하신 선생으로부터 충분히 올바른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받은 교훈을 그들의 마음속에 가르칠 진리의 영이 필요하지 않았다면(14:26), 그 선생은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을 것이다(1:4).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우리가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약속하심으로써 그 결핍을 증명하신다면 하나님의 은총의 조명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누구든지 서슴치 않고 인정해야 한다. 이 이상의 이해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의 무지를 알지 못하므로, 그만큼 더 무지한 것이다.

 

(죄와 무지를 동일시하는 플라톤을 부정한다. 그러나 죄는 미혹에 의해 생길 수 있다. 22-25)

 

22.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증거는 인간이 변경할 수 없는 것이며, 올바른 지식을 주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영적 통찰의 셋째 방면, , 올바르게 살아가는 원칙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의로운 행위에 대한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은 말이다. 때때로 인간의 지성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더 높은 일들보다 오히려 이 일에 대하여 더욱 민감한 듯이 보이는데, 이는 "율법 없는 이방인이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리라"는 사도 바울의 증언이 있기 때문이다(2:14-15). 만일 이방인들이 그 본성에 따라 그 마음에 율법에 의한 의가 새겨져 있다면, 우리는 물론 그들이 인생행로에서 전혀 맹목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연법에 의해 사람이 행위의 바른 표준을 충분히 배운다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목적으로 사람에게 이 법 지식이 부여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렇게 한다면, 이성과 진리의 목표를 향해서 이 지식이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인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즉시 나타날 것이다. 바울의 말의 전후 관계를 본다면 이 점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앞에서, 율법 안에서 죄를 지은 사람은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으며 율법이 없이 죄를 지은 사람은 율법 없이 멸망한다고 말했다. 이방인들이 우선 심판을 받지 않고 멸망한다는 것은 부당하게 생각될 것이겠기에 그들에게는 양심이 율법을 대신한다고 바울은 즉시 첨부한다. 이것은 그들이 공정한 정죄를 받는다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자연법은 사람들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자연법은 공정과 불공정을 충분히 식별할 수 있는 양심의 깨달음이며, 사람이 무지를 구실로 삼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그들 자신의 증언에 의해 유죄를 증명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자연법에 대한 정의로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관대하기 때문에, 악한 일을 할 때에는 될 수 있는 한 죄의식에서 마음을 멀리하려고 하기가 쉽다. 플라톤이 그의 프로타고라스에서 우리는 오직 무지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일 사람의 위선이 죄를 교묘하게 은폐하여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마음이 악하다는 것이 인정되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프라톤의 발언은 옳은 발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죄인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자기의 고유한 능력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그것에 붙잡히게 되며, 싫든 좋든 간에 간혹 눈을 뜨도록 강요되는 것이 아니면서도 그 능력을 모르는 체하는 것이 용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만 무지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그릇된 말이다.

 

23. 선악에 대한 판단은 임의적으로 행해지는 한 그 판단은 애매모호하다

 

일반적인 정의나 문제의 본질에 관해 지성이 속는 일은 아주 드물지만, 거기서 더 멀리 가려고 할 때에, , 원칙을 특수한 경우에 적용할 때에는 틀리기 쉽다는 데미스티우스이 가르침은 더욱 옳다. 일반적인 질문을 한다면, 누구나 다 살인은 죄악이라고 단언할 것이다. 그러나 원수를 죽이려고 계획하는 사람은 살인을 좋은 일로 생각한다. 간음자는, 일반적으로 간음을 정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자기의 간음을 자랑한다. 이와 같이, 사람은 무지하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를 당하면 방금 설정한 일반적인 원칙을 잊어버린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시편 57:1에 대한 해석에서 어거스틴이 훌륭한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데미스티우스의 원칙에는 예외가 없지 않다. 악행의 수치가 양심을 심히 억압하기 때문에, 선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가지는 것이 아니면서도 일부러 사악에 돌입하는 때가 있다. 이런 심리에서 나오는 말의 일례를 든다면, "나는 무엇이 더 좋은가를 알고 또 시인하지만 나쁜 편을 따른다"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절조와 무절제를 지혜롭게 구별했다. "무절조가 득세할 때에는 혼란된 정신 상태 또는 격정이 지성의 특수한 지식을 빼앗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분별하는 악도 자기의 비행에서는 간파하지 못한다. 정신 혼란이 가라앉으면 곧 회개하는 마음이 돌아온다. 그러나 무절제는 죄를 깨닫더라도 소멸되거나 분쇄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완고하게 그 상습적인 악행을 택하며 계속한다."

 

24. 인간의 지식은 율법의 첫째 돌판에 관해서는 완전히 어긋나나, 둘째 돌판에 관해서는 비난받는 경우에서만 어긋난다

 

선악을 구별하는 일반적인 판단을 들을 때에, 우리는 그것이 모든 점에서 건전하며 완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심정에 공정과 불공정을 구별하는 능력이 주입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무지를 핑계로 삼지 못하게 하려는 것에 불과하며, 그 결과로 반드시 개개의 경우에 진리를 식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정도의 이해력이 있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떨기 시작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다. 그리고 완정한 의의 표준인 하나님의 율법으로 우리의 이성을 측정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이성이 맹목인 것을 깨달을 것이다. 확실히 그것을 첫째 돌판의 중요한 점들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

예컨대 하나님을 믿으라, 그의 고귀성과 의를 올바르게 찬양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라, 그리고 안식일을 바르게 지키라는 점들이다(20:3-17). 자연적인 지각에 의지하는 사람이 이런 일들과 이와 비슷한 일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느낀 일이 있는가? 세속적인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할 때에는, 그 허망하고 사소한 짓들을 버리도록 아무리 말해도 항상 다시 그리로 되돌아간다. 물론 그들은, 성실한 의도가 동반하지 않는 제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에 관해서 어떤 관념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증언하지만, 거짓된 방법을 고안해서 곧 이 관념을 부패시킨다. 경배에 관해서 율법이 명령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결코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기 힘으로 깨닫지 못하며 경고에도 유의할 수 없는 지성이 훌륭한 분별력을 가졌다고 말할 것인가? 둘째 돌판에 있는 교훈들에 대하여(20:12이하) 사람들은 좀더 이해력이 있는데, 이 교훈들은 그들 사이에 생활을 유지하는 일과 더욱 긴밀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간혹 인내심이 없는 것을 본다. 성품이 가장 우수하다고 하는 사람도, 불공정하고 지나치게 거만한 지배는 벗어버릴 방법만 있다면 참고 견디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이 하는 일반적인 판단은, 이런 지배를 참고 견디는 것은 비굴하고 비열한 인간의 특색이며 체면을 아는 자유인은 이런 지배를 떨쳐 버린다고 한다. 철학자들도 받은 손상에 대하여 보복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 과도한 교만을 비난하시며, 사람들이 수치라고 생각하는 인내를 자기 백성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려고 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육욕을 고려하지 않는데, 자연인은 정욕이라는 자기의 병을 인정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빛은 사람이 이 심연에 들어서고 부를 때에는, 극히 천한 표징으로 외부에 나타나는 격동들을 의미한다. 마음을 조용하게 건드리는 악한 욕망을 그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25. 매일같이 우리가 잘못된 길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

 

플라톤이 모든 죄를 무지에 돌린 것을 우리가 위에서 비난한 것은 당연하다. 그와 같이, 모든 죄에는 계획적인 악의와 타락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우리는 배척해야 한다. 선한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 일이 많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경험으로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다. 우리의 이성은 무수한 형태의 속임수에 압도되며 무수한 오류에 빠지고 또 무수한 장애물에 부딪치며 무수한 곤란을 만나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를 바르게 인도할 수 없다. 참으로 바울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라고 함으로써(고후 3:5), 인생의 각 방면에서 우리의 이성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밝힌다. 그는 의지나 감정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무슨 일을 바르게 행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생각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근면과 통찰력과 이해력과 신중성은 완전히 부패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일을 고안하거나 준비할 수가 전연 없을 정도인가? 우리가 모든 천품들 중에서 가장 귀중한 천품이라고 생각하는 예리한 이성을 빼앗기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빼앗길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너무도 가혹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혜있는 자들의 생각은 헛것으로 아시며"(고전 3:20; 참조, 94:11),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시는 성령께서는(6:5, 8:21) 이 일을 가장 적합하다고 보신다. 만일 우리의 본성이 생각하고 선동하고 자신하고 시도하는 것이 모두 항상 악하다면, 어떻게 우리가 성결과 의만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께선 기뻐하실 일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우리 마음에 있는 이성은 어느 쪽으로 향하든 간에 무참하게 허무에 빠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도 이 무력함을 알고 주의 계명을 바로 배울 만한 깨달음을 얻기를 기도했다(119:34). 그가 새로운 이해력을 얻고자 한다는 것은 자기의 본성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뜻한다. 한 번 만이 아니라 그는 하나의 시에서 거의 열 번씩이나 같은 기도를 반복한다(119:12, 18, 19, 26, 33, 64, 68, 73, 124, 125, 135, 169). 이렇게 되풀이함으로써 이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곤란한가를 암시한다. 다윗이 자기만을 위해서 구한 것을 바울은 자주 모든 교회를 위하여 간구한다.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1:9-10; 참조, 1:9). 그러나 사도 바울은,이 일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라고 할 때마다 동시에 이 일이 사람의 능력의 범위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확언한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거스틴도 이성에는 하나님께 속한 일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여, 우리의 눈을 위해서 햇빛이 필요한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에 조명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빛을 보기 위해서 눈을 뜨는 것은 우리 자신이지만, 마음의 눈은 주께서 열어 주시지 않으면 닫힌 그대로 있다고 덧붙였다. 또 성경의 교훈을 보면 우리의 마음은 어느 하루만 조명을 받고 그 후에는 자기 힘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방금 바울에게선 인용한 구절이 계속적인 전진과 성장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 뜻을 적절한 말로 표현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119:10). 거듭나고 진정한 경건에서 적지 않은 전진을 한 그였지만, 이미 받은 지식에서 후퇴하지 않기 위하여 그는 매순간 계속적인 인도가 필요하다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자기의 허물로 잃어버린 바른 정신이 회복되기를 기도한다(51:10). 처음에 주셨다가 우리에게서 일시 빼앗으신 것을 다시 주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선한 일을 결심할 힘이 없다. 26-27)

 

26. "선한"것과 "용납할 수 있는"것을 동등시하는 자연적인 본능은 자유와는 관련없다

 

이제 우리는 결정의 자유를 특히 좌우하는 의지를 검토해야 한다. 선택은 오성보다 의지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우선 철학자들은 모든 사람이 자연적인 본능에 의하여 선을 추구한다고 가르치며, 이 견해는 일반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인간의 의지의 고결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이 점을 알기 위해, 우리는 자유 선택의 능력은 이런 욕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욕구는 마음이 숙고한 결과가 아니고 자연적인 경향에서 생기는 것이다. 스콜라 학자들까지도 이성도 몇 가지 가능성을 신중히 고려 비교할 때에만 자유 의지가 활동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들의 뜻은, 욕구의 대상이 선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또 선택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먼저 신중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사람에게 있는 이 선에 대한 자연적인 욕망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사실 욕망은 사람과 동물에 공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동물들도 잘 살기를 원하며, 그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어떤 선한 것이 나타나면 그들은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런데 훌륭한 영원불멸의 본성, 곧 이성이 있으면서도, 인간은 자기에게 참으로 선한 것을 이성으로써 선택하고 열심히 추구하지도 않으며 또 이성을 가지고 신중히 고려하거나 지성을 경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동물과 같이, 이성이나 숙고함이 없이 본성의 경향을 따른다. 그러므로, 사람이 본성의 충동으로 선을 구하게 되느냐 또는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의지의 자유와의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 대신에, 사람이 바른 이성으로 선을 식별하고 그것을 알고 선택하며 또 선택한 다음에는 그것을 따른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오해를 경계해야 한다. 첫째, 여기서의 "욕구"는 의지의 충동이 아니라 본성의 경향을 의미한다. 둘째, ""은 덕성이나 공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들이 잘 될 때와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요컨대, 사람은 선한 것을 따르고 싶어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영원한 복락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성령의 충동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평안에 대한 사람의 자연적인 욕망은 의지의 자유를 증명하지 못한다. 금속과 돌에 그 본질을 완성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에게 의지의 자유가 있다는 증명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의지가 다른 점에서 완전히 또 깊이 부패해서 악한 것밖에 생산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으면 상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어서 선한 욕망을 낳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

 

27. 우리의 의지는 성령이 없다면 선을 추구할 수가 없다

 

우리가 효과적으로 결심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처음 은총에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영혼에 자발적으로 선을 갈구하는 능력이 있지만 너무도 미약해서 확고한 의도가 되거나 노력을 분발시키지 못한다는 생각인 것 같다. 오리겐과 다른 일부 고대 저술가들에게서 취한 이 견해가 스콜라 학자들에게 공통적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그들은 사람을 소위"단순한 자연"으로 고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말도 사람을 그와 같이 묘사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7:19,18).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여기서 추구하는 논법을 전적으로 곡해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투쟁은 논하고 있다(5:17에서는 더욱 간단하게 언급한다). 그것은 신자들이 끊임없이 느끼는 영육간의 투쟁이다. 그러나 영은 자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서 온다. 더욱이 바울이 중생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분명한 것으로, 그가 자기 안에 아무 선도 거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는 곧 자기의 육을 의미한다는 설명을 첨부했기 때문이다(7:18) 뜻은 무엇인가? 그의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본래 내 안에서 선이 거하지 않는다. 나의 육에서는 아무 선한 것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악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는 변명이 따른다(7:20). 이 변명은 영혼의 대부분이 선으로 기울어진 중생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그리고 첨부된 결론은 이 문제 전체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속의 법과 싸우는도다"(7:22-23). 성령에 의해 중생했으면서도 아직 육의 잔재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마음속에서 이런 투쟁을 할 것인가?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비록 한때는 이 구절을 사람의 본성에 관한 것이라고 해석했었지만 후에 그 해석은 잘못이며 부적당하다고 해서 철회했다. 그러나 만일 사람에게 은총과 별도로 선을 행하는 어떤 충동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충동이 아무리 적은 것일지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고후 3:5) 사도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모세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의 계획은 악할 뿐이라고 선언하시는 주님께서는(8:21)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들이 한 구절을 잘못 해석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의 의견에 오랜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8:34)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존중하자. 우리는 모드 본성이 죄인이며, 따라서 우리는 죄의 멍에를 지고 있다. 그러나 만일 사람 전체가 죄의 세력 하에 있다면, 분명 그것은 죄의 중요한 자리인 의지가 필연적으로 가장 든든한 차꼬로 속박을 받고 있다는 말이 된다. 성령의 은총을 받기 전에 어떤 의지의 작용이 있었다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2:13)라는 바울의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소위 "준비"라고 말하는 생각을 일체 버리도록 하라. 신자들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도록 자기들의 마음을 인도해 주시기를 기원하는 때가 있으며 다윗도 여러 구절에서 그렇게 했지만, 이런 기도를 하겠다는 욕망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이 점은 다윗의 말에서 추론할 수 있다. 자기 속에 정한 마음이 창조되기를 원할 때에(51:10), 그는 물론 그 창조를 자기가 시작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말을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을 앞질러 모든 일을 하셨다. 이제 그대들은 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기 전에 행동을 취하라. 어떻게?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받았다는 것을 고백하라. 그대들에게 있는 것은 모두 그에게서 온 것이며 모든 악은 그대들 자신이 근원이라고 고백하라." 그리고 조금 뒤에, "우리의 것은 죄 의외에 아무것도 없다"라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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