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장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의 일을 이용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굴복시켜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더러움에서 분리되어 순결을 유지하신다
1. 단순한 "허용"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사탄과 모든 악인들을 굴복시키기도 하며 하시며 끌어내기도 하신다는 다른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한층 더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활동하시면서 어떻게 그들의 범죄에 의해 오염되지 않으시는지, 심지어는 하나님이 그들과 더불어 일을 하시면서 어떻게 모든 죄책을 면할 수 있으시며 나아가서는 그가 사용하시는 자들을 어떻게 정당하게 정죄 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육적인 생각으로서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서 "행하는 것"과 "허용하는 것"의 구별이 생겨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탄과 모든 불경자들은 하나님의 지배와 주권 하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어떠한 목적에도 그들의 악을 지도해 나아가시고 또 그들의 악한 행동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신다고 하는 이 난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거짓을 지지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의 모든 그릇된 점을 밝히려고 부정하게 힘쓰지만 않는다면,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에 놀란 자들의 겸손함은 아마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와 명령으로 눈이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맹목으로 인하여 후에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은 저들에게 불합리하게 보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허용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속임수로 그 난점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명백한 말씀으로 자신이 그 일을 하신다고 주장하심으로써 그러한 핑계를 거절하신다. 하나님의 은밀한 명령이 없이는 인간으로서는 아무 일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시고 자신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결정하신 것 이외에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결정해도 인간으로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명백한 증거들이 입증해 주고 있다. 앞에서 우리가 시편에서 인용한,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라는 말씀은 분명히 인간의 행위와 관련된 말씀이다. 이 시편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전쟁과 평화의 참된 조정자라고 한다면 그리고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다고 한다면, 누가 감히 인간은 하나님 모르게 혹은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동안 맹목적 충동에 의해서 닥치는 대로 무리하게 행동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는 특수한 증거들에 의해 더욱 분명하게 밝혀지게 될 것이다.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천사들처럼, 사탄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난 것을 우리는 욥기 1장을 통해서 알고 있다(욥 1:6, 2:1). 실로 그 방법이 다르고 그 목적이 달랐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지 않으셨으면 사탄은 어떠한 일도 착수할 수 없었다. 그런데 경건한 인물을 괴롭히기 위해 허락이 공공연하게 첨가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시련의 장본인은 하나님이시며 사탄과 사악한 도둑들은 다만 그 대행자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욥 1:21)라는 말씀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 경건한 인물을 미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스바 사람은 잔인하고 사악하게 침입하여 남의 재산을 약탈하였다. 욥은, 자신이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 빈곤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나 사탄이 무엇을 꾀하든, 하나님께서 그 열쇠를 쥐고 계시며 그들의 수고를 돌려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저 불신의 왕 아합이 기만당하도록 작정하셨다. 그러자 이 목적을 위해 마귀는 자기가 봉사하겠다고 하였다. 이 마귀는 모든 선지자의 입에서 거짓말을 하는 영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을 받고 보냄을 받았다(왕상 22:20,22). 아합의 무분별하고 미치광이와 같은 행위를 한 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이, 단순히 허용만이라는 허황된 공상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자가 할 일을 작정도 아니하시고, 일을 수행하기 위해 사역자들에게 명령도 아니하시고, 다만 허락만 하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획책하였으며, 빌라도와 그의 병사들은 그들의 광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엄숙한 기도에서, 모든 불경자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행 4:28)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이것은 이미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행 2:23)이라고 설교한 것과 일치된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은 태초부터 모든 것을 아시는 분으로서 명확한 지식과 정하신 의지에 따라 유대인들이 행한 것을 결정하셨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또한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일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8)고 이와 같은 뜻의 말을 하였다. 압살롬은 근친상간으로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가증스런 죄를 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자신의 처사라고 말씀하셨다. 곧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삼하 12:12). 예레미야는 갈대아 사람들이 유대에서 행한 잔인한 일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고 말하였다(렘 1:15, 7:14, 50:25 및 그 밖의 여러 구절). 이러한 이유로 느브갓네살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려졌다(렘 25:9).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꾸중(사 7:18 혹은 5:26)과 나팔소리(호 8:1)와 권위와 명령으로 말미암아 불경자들이 전쟁의 자극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습 2:1 참조).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사람들을 진노의 막대기요(사 10:5), 손으로 휘두르는 도끼라고 하셨다(마 3:10 참조).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무너짐은 하나님 자신이 하신 일이라고 하셨다(사28:21). 다윗은 하나님께 불평을 토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의로우신 심판장이라고 인정하였으며, 시므이의 저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라고(삼하 16:10)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삼하 16:11). 우리는 성경의 역사에서 발생하는 사건마다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자주 발견한다. 예를 들면, 열 지파의 배반과(왕상 11:31), 엘리의 아들들의 죽음과(삼상 2:34). 또 그와 비슷한 많은 사건이 있다. 성경을 적절하게 배운 사람이라면, 내가 많은 증거들 가운데서 다만 몇 개의 증거만을 제시한 것이 바로 간결을 도모한 때문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몇 개의 예증만으로도, 하나님의 섭리의 자리에 단순한 허용이라는 것을 대치시키는 자들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지껄이고 있는가를 매우 명백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은 망대 위에 앉아서 우발적인 사건들을 기다리고 있는 분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결정은 인간 의지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2. 하나님의 충동이 어떻게 인간에게 전해지는가?
여기서 우리는 은밀한 충동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솔로몬은 왕의 마음이 하나님의 기쁘심에 따라 임의로 인도된다고 하였는데(잠 21:1), 이 말은 확실히 인류 전체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 말은 "우리 마음의 생각은 하나님의 은밀한 영감에 의하여 하나님의 목적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과 같은 중요성을 가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사람의 마음속에서 내적으로 일하지 않으신다고 하면, 그가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겔 7:26), "만민의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욥 12:24; 참조, 시 107:40) 하신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계된 말씀들을 우리는 여러 곳에서 자주 읽게 된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공포로 그 마음을 점령당하게 될 때 두려워한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아무도 모르게 사울의 진영을 떠났는데, 즉,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이었다(삼상 26: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하시며(사 29:14), 저들을 쳐서 현기증이 나게 하시고(신 28:28; 참조, 슥 12:4), 잠자는 영으로 저들의 눈을 감기시며(사 29:10), 광기로 저들을 채우시고(롬 1:28), 저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다(출 14:17)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분명한 증거를 요구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은, 마치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버리심으로써 사탄에게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처럼 이 여러 구절들 역시 하나님의 허용과 관계된 구절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해결은 너무도 어리석은 해석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이 어두워지고 그들의 정신이 나간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의하여 되어진 것으로 성령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롬 1:20-24).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으며(출 9:12), 또한 그 마음을 더욱 완강하고(출 10:1) 굳게 하셨으며(출 10:20,27, 11:10, 14:8)고 성경은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표현을 회피하면서, 어리석은 트집을 내세우는데, 즉, 바로는 자신의 마음을 완고하게 했다고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출 8:15,32, 9:34) 그 마음을 완고하게 한 원인은 하나님의 의지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행동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일한다는 두 사실이 미처 서로 완전하게 모순된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나는 저들의 반대를 반박한다. 왜냐하면, 만일 완고하게 하는 것이 단순한 허용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본래 완고하게 된 동기는 바로에게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바로 왕이 수동적으로 완고하게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빈약하고 어리석은 해석이겠는가? 이 외에도 어느 경우에도 성경은 그런 생트집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출 4:21)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은 뜻으로 모세는 가나안 주민들에 대하여 저들이 싸우러 나아간 것은 주께서 저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수 11:20; 참조, 신 2:30). 다른 예언자도 이와 똑같은 사실을, 여호와께서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시 105:25)라고 반복하여 말하였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사 10:6).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불경하고 완고한 인간을 가르쳐서 자발적으로 순종케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들이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명령을 그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기나 하였던 것처럼 그들을 굴복시켜 자신의 심판을 시행하시고자 하신 것이었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명확한 결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사실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자주 사탄의 중재 활동을 통하여 악한 자에게서 활동하시지만,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충동과 허용에 의해서 그에게 허락되는 한에 있어서만 자기 일을 수행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사울은 악한 영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 악령은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삼상 16:14)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 사실은 사울의 광란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복수에서 온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또한 사탄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한다고 성경은 말한다(고후 4:4). 그러나 유혹의 사역이 하나님 자신에게서 오지 않는다면(살후 2:11), 진리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 이 일이 어디서 오겠는가? 첫째 이유에 의하면 "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로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어니와"(겔 14:9)라고 하였고, 둘째 이유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롬 1:28) 가장 무서운 정욕에 사로잡히도록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복수의 근본적인 창시자이시고, 사탄은 다만 그 복수의 대행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제2권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와 그 예속을 다르게 될 때에 다시 논의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필요한 만큼만 간단하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의지는 만사의 원인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모든 계획과 일에 대한 결정적 원리로 삼으며, 하나님의 섭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선택자에게서 그 힘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유기자를 복종케 하기도 한다라고.
3. 하나님의 의지는 통일체를 이룬다
지금까지 나는 성경에서 명백하고 공공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들만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말씀에 악의에 찬 불명예의 낙인을 주저 없이 찍으려는 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종류의 비난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지를 구실 삼아 겸손하다는 칭찬을 받고자 한다면, "내게는 다르게 보인다"느니 혹 "이런 문제에는 참견하고 싶지 않다"느니 하는 식의 가벼운 한 마디로 하나님의 권위를 반대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교만이 달리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공공연히 저주한다면, 하늘을 향해 침을 뱉음으로써 얻는 유익이 무엇이겠는가? 실로 이와 같은 건방짐의 실례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대마다 불경한 사람들과 참람된 사람들이 있어서 교리의 이 부분을 반대하여 입에 거품을 물고 큰 소리로 떠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들은 성령께서 오랜 옛날 다윗의 입을 통해 "주께서……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라고 하신 그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윗은 방종한 사람들의 광기를 간접적으로 비난하였는데, 그들은 더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항하여 논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정죄할 권능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말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그들이 아무리 하늘나라에 대하여 참람된 말을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 비방의 안개를 깨끗이 거두셔서 자신의 의를 화려하게 빛내신다고 간단하게 경고하였다. 우리의 신앙도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기초하고 있어서온 세상을 이기기 때문에(요일 5:4), 높은 곳에 서서 이들 비방의 안개를 경멸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첫째 반대는 쉽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하면 결국 하나님께는 두 개의 상반되는 의지가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저들의 반대 내용이다. 그것은 율법에서 공적으로 금지하신 것을 그의 은밀한 계획에서는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답변하기 전에, 나는 독자들에게 이러한 트집이 나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목표로 한 것임을 거듭 경고해 두고자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경건한 욥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되어졌다(욥 1:21)고 확실하게 고백하셨다. 그가 도둑들에게 약탈을 당했을 때, 그들의 불의한 행동과 악행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채찍이었음을 인정하였다. 또 다른 곳에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삼상 2:25)고 말하고 있다. 다른 선지자도 역시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라고 부르짖고 있다. 그리고 남의 흠잡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태한 허용에 의해서만 모든 일이 발생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이 만사의 창시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는 이미 명백하게 입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빛과 어두움을 지으시고 평안과 환난을 지으신다고 말씀하신다(사 45:7). 그리고 자신이 시키지 아니하시면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암 3:6). 내가 저들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원해서 하시는가 아니면 마지못해 하시는가를 저들이 말하는 일이다. 그러나 모세가 가르친 대로, 우연히 자루에서 빠진 도끼에 맞아 죽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시키신 대로 되어진 것이었다(신 19:5; 참조, 출 21:13 ).
이와 같이 누가에 의하면, 헤롯과 빌라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과 계획에 의한 예정으로 이루시려고 작정하신 바를 행하기 위하여 공모하였다고 온 교회는 주장한다고 한다(행 4:28). 만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 박혀 죽음이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구속은 어디서 올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는 그 자체 스스로 모순을 지니는 것도 아니고 변하는 것도 아니며 원하는 바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지가 하나이며 단일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여러 모양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무능력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행하실 바를 원하기도 하기고 원하지 않기도 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소명을 "감추었던 비밀"(엡 3:9)이라고 말하고, 곧 이어서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엡 3:10)가 나타나 있다고 첨가하였다. 하나님의 지혜가 "다양하게"(고대의 해석가들은 이를 여러 가지 형태로 번역했음) 나타난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거나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거나 하시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둔한 이해로 인해 하나님 자신에게 무슨 변화가 있다고 꿈꾸어야 하겠는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금하신 바를 어떻게 이루어지도록 하셨는가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우리들의 정신적 무능력을 생각해야겠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빛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딤전 6:16)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곧 그것이 흑암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경건하며 겸손한 사람들은 모두 다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의견에 쉽게 동의한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을 인간은 가끔 선한 의도에서 원한다 그 예로, 선량한 자식은 자기 아버지가 살아 계시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와 반대로 그가 죽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으로 원하시는 것을 인간은 악한 뜻으로 원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악한 자식이 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원하고 하나님께서도 이를 원하시는 경우가 있다. 즉, 전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을 원하지만 후자는 하나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전자의 자식으로서의 경건은, 그가 비록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는 다른 것을 원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동일한 것을 원하는 후자의 불경건보다는 훨씬 더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와 일치한다.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 것이 합당한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각자의 의지가 향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는데, 여기에 따라 그것이 시인되기도 하고 부인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악한 인간의 악한 의지를 통하여 자신의 의로우신 의지를 성취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 전에, 타락한 천사와 모든 악한 자들이 태만하여 자기들의 생각에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행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저들은 전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하나님의 의지에 반항하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의지는 저들에게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의 행사는 크시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의지를 찾았다"(참조, 시 111:2). 그러므로 그 방법이야말로 놀랍고 형언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이어서, 비록 하나님의 의지에 반대되는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아니하시면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허락지 아니하시면 하나도 그대로 되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마지못해 허용하시지 않고 기꺼이 허용하신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악에서 선을 만드시지 않는 한,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악의 행위를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믿지 않는 자의 행위를 이용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비난당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역시 다른 반대도 해결되거나 또는 스스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인데, 그 반대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불경자의 행동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계획과 의도까지도 주관하신다고 하면 결국 하나님은 모든 악의 창시자이시며,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작성하신 바를 수행하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때문에, 그들이 정죄를 받는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속에는 하나님의 의지와 그의 교훈이 잘못 혼동되어 있는데, 이 양자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는 수없이 많은 실례들에 의해서 명백하게 보여지고 있다. 그 예로, 압살롬이 아버지의 후궁들을 더럽혔을 때(삼하 16:22), 하나님께서는 이 파렴치한 행위를 통하여 다윗의 간음죄를 벌하려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이유로 해서 그 사악한 아들에게 근친상간의 죄를 명하신 것은 아니었다. 아마 다윗으로서는, 그가 시므이의 저주에 대하여 말한 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가 하나님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삼하 16:10-11), 그러나 그 뻔뻔스러운 개가 마치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고 있다는 것처럼 그 순종을 칭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의 말을 하나님의 채찍으로 인정하고 참을성 있게 그 징계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확고하게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즉, 하나님은 행악자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은밀한 심판으로 작성하신 것을 성취하시지만,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교훈에 순종이나 한 것처럼 용서받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실상, 그들은 자신들의 정욕에 따라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파괴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왕으로 선택된 것은(왕상 12:20), 인간의 사악한 행동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리고, 불신실하게 다윗의 가문을 배반한 것으로 인해서 국민의 경솔함과 광기가 정죄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이 기름부음 받을 것을 원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호세아의 말 가운데 얼핏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한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알지 못하시며 또한 원치 않으시는데 그 나라가 세워졌다고 탄식하셨다(호 8:4).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분노함으로 여로보암을 왕으로 주셨다고 말씀하셨다(호 13:11). 여로보암의 통치는 하나님의 의지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한편 하나님께서 저를 왕으로 삼으셨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명백하다. 즉,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멍에를 내팽개치지 않고는 백성들은 다윗의 집을 배반할 수 없었다는 것과 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망은을 이처럼 벌하시는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반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목적을 품으시고 정당하게 이 변절을 원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여로보암도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아들에게서 왕국의 일부를 빼앗기 위해 대적을 일으키셨다고 성경의 역사는 말하고 있다(왕상 11:23).
독자들은 이들 두 사실을 주의 깊이 생각해야 한다. 백성들이 한 왕의 지배를 받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나라가 둘로 나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열의 시작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선지자는 예언과 기름 부음을 통해 아무런 생각도 않고 있는 여로보암의 마음에 왕국 계승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는데, 확실히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바가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의지에 반대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이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명하신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백성의 반역은 정당하게 정죄되고 있다. 저들이 정죄된 이유는, 저들이 하나님의 의지를 반대하여 다윗의 집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후 르호보암이 백성의 소원을 거만하게 멸시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이 첨가되었다.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고한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더라"(왕상 12:15). 신성한 통일이 분열된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지를 거스르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열 지파가 솔로몬의 아들에게서 떠났는가를 유의하기 바란다. 이 외에도 이와 비슷한 실례가 또 하나 있으니, 즉, 아합의 아들들이 살해당하고 그의 후손이 모두 멸절당한 것은 백성들의 동의, 곧 저들의 조력에 의해서 된 것이었다(왕하 10:7). 참으로 예후는 "여호와께서……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 종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왕하 10:10)라고 진실 되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사라미라의 백성들이 이 일을 도와준 데 대해서 꾸짖고 있다. "너희는 의롭도다 나는 내 주를 배반하여 죽였거니와 이 여러 사람을 죽인 자는 누구냐"(왕하 10:9)라고 그는 묻고 있다. 만일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동일한 행동에 인간의 죄가 나타나는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가 빛나고 있는가를 나는 이미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의 답변만으로도 언제나 충분할 것이다. "성부는 성자를 내어 주셨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육체를 내어 주셨으며 유다는 주님을 관헌들에게 내어 주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있어서, 어째서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인간은 죄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동일한 행동을 하지만 그러나 동일한 근거에서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충동에 따라 불법을 저지르는 때에도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주장에 만일 어떤 사람이 불만을 가진다면, 그들은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사악한 자의 마음속에서도 자신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시되 그들의 공적에 따라 보응하시니, 어느 누가 이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확실히 유다의 반역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친히 성자를 내어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 죽게 하셨다고 해서 하나님께 범죄의 책임을 돌린다는 것은 구속의 명예를 유다에게 돌리는 것에 못지않게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이 심문에서 묻고자 하시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었던가 혹은 무엇을 하였던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려고 생각하였던가이며, 그리하여 그들의 계획과 의지를 참작하려 하셨다고 올바르게 지적하였다.
이것이 조잡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해력을 초월한다고 해서 성경이 명백히 입증하는 진리를 거절한 점에 있어서 자신의 완고함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를 잠시나마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아는 것이 인간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셨다면, 결코 예언자나 사도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것이 공공연히 선포되는 것을 비난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혜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모든 것을 비난하지 않고 공손하며 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만하게 조롱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떠들고 있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이 이상 더 오랜 시간을 소비하여 반박할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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