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장 우리에게 베푼 가장 큰 은혜에 대한 섭리의 교리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과거와 미래의 언급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해석. 1-5)
1. 하나님의 방법의 의미
더욱이 인간의 성향은 쓸데없이 교묘한 것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이 교리를 유익하고 바르게 계속 사용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어려움에 말려들어 거의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만물을 배정하셨는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여기서 간단히 논의하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와도 관계된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는 만물의 결정적 원리로서 이 섭리는 때로는 매개체를 통하여, 때로는 매개체 없이, 때로는 모든 매개체와 반대로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향한 자신의 관심을 나타내시되, 특히 더욱 친근히 보호하기를 원하시는 교회를 지배하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경계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려는데 있다. 그런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가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하나님의 자애로운 사랑과 자비 혹은 엄격하신 공의가 종종 섭리의 전 과정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모든 사건의 원인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사가 운명의 맹목적인 충동에 의하여 운행된다고 하는 사상이 슬그머니 잠입하기도 하고, 또는 육신의 생각이 우리를 선동하여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공처럼 던져서 가지고 우롱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 항변하게도 한다. 실로 우리가 만일 정숙하며 침착한 마음으로 기꺼이 배우려 하기만 한다면 그 최종적인 결과는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계획을 세우는데 최상의 이유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실 것이다. 혹은 자기 백성에게 인내를 가르치시며 혹은 저들의 사악한 감정을 바르게 하시고 방종을 억제하시고 혹은 자기 부인을 실천케 하시고 혹은 나태에서 일으키시며 또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불경건한 자들의 교활함을 낮추게 하시고 그들의 책략을 전복시키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실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원인이 감추어져 있으며 우리의 생각이 미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윗과 함께 부르짖어야 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그러므로 우리가 비참할 때, 죄가 언제나 마음에 떠오르며 형벌은 우리가 회개하도록 자극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그리스도는 각자가 응당히 받아야 할 형벌보다는 오히려 아버지의 은밀하신 계획에 더 많은 권위를 두어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에 대하여,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불행이 출생에 앞선다고 하는 경우, 마치 무죄한 사람을 어떻게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자비하신 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우리의 본성은 소리친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밝으면 이 이적에서 아버지의 영광이 빛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그리스도께서는 증거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겸손을 소중히 여김으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해명하시지 않도록 힘쓰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밀한 심판을 존중하여 그의 의지를 만사의 가장 공정한 원인으로 생각해야 한다. 짙은 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어두워지고 심한 폭풍우가 일어날 때 침침한 안개가 우리의 눈앞을 가리고 천둥이 귀를 때리며 공포로 우리의 모든 감각이 마비되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우리에게는 혼란해지고 뒤엉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하늘은 여전히 평온하고 청명하다. 그러므로 세계의 이 혼란한 상태가 우리의 판단력을 빼앗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지혜의 순수한 빛으로 모든 소동을 가장 잘 고안된 질서로 조정하심으로써 통제하신다는 것이며 그들을 바른 목적으로 향하게 하신다고 우리는 추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확실히 이 점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방자하게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해명을 요구하고 그의 은밀한 계획을 조사하여 알지 못하는 미지의 사실에 대하여는 죽을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보다 더 경솔한 판결을 내리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와 동등한 인간들에게는 겸손하여, 경솔하게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 오히려 우리의 판단을 보류하기를 더 좋아하면서, 마땅히 경외해야 할 하나님의 감추어진 심판에 대해서는 거만하게 욕설을 퍼붓고 있으니, 이보다 더 불합리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2.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은 경건히 준수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기를 지으신 이요, 우주의 창조주로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자가 아니면, 아무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올바르고 유익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에서 오늘날 공교롭게도 많은 개들이 이 교리를 독살스러운 이빨로 물어뜯으며 혹은 적어도 소리내어 짖고 있는데, 이는 저들은 이성이 명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나님에게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들은 할 수만 있으면 맹렬히 비난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지를 포함하고 있는 율법의 훈계로 만족하지 않고 우주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은 마치 우리의 가르치는 바가 다만 머리의 고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고, 또 성령이 도처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명백하게 말씀하지 아니하시며 무수한 표현 형식으로 이를 반복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소나마 살아있는 그들의 수치심이 그들을 억제하여 감히 하늘나라에 대한 모독을 토해 내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분방하게 날뛰기 위하여는 우리들과 싸우고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나 우주에서 발생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시 36:6)고 하신 성경의 말씀은 무슨 뜻으로 기록되었는가에 대하여 저들은 답변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율법에 잘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뜻을 멀리 구름이나 깊은 바다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고 모세는 말하고 있다(신 30:11-1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심연과 비교되는 또 하나의 은밀한 뜻이 있다는 것이 된다. 바울 또한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3-34; 참조, 시 40:13-14). 실로 율법과 복음은 우리의 감각을 훨씬 초월하는 신비를 그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말씀으로 계시하기를 원하셨던 이 신비를 우리가 이해하도록 하시기 위해 신자들의 마음을 "총명의 신"(사 11:2)으로 조명하시기 때문에, 이제는 심연이 없었고, 다만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길,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등불(시 119:105), 생명의 빛(요 1:4; 참조, 8:12), 확실하며 분명한 진리의 학교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방법은 당연히 심연이라고 불리며, 이는 그것이 우리 생각에는 감추어져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경건하게 경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세는 몇 마디 말로 이 둘을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율법을 열심히 깊이 묵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도록 그가 우리에게 어떻게 명하는가를 보게된다. 욥기에도 역시 이 숭고한 교리가 기록되어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있다. 즉, 욥기의 저자는 우주의 구조를 상하로 두루 살피면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장엄하게 논술하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첨가하였다.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욥 26:14). 이런 방법으로 그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 있는 지혜와 그가 인간에게 주신 지혜를 구별하였다. 그것은, 자연의 신비를 논할 때 지혜는 하나님께만 알려지고 "모든 생물의 눈에는 숨겨졌다"고 그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욥 28:21). 그러나 조금 지나서 그는, 하나님의 지혜는 탐구되기 위하여 일반에게 알려졌다고 부언하였으니,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욥 28:28)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뜻으로 어거스틴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상의 질서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선한 의지로 율법에 의거하여 행동하지만, 그러나 다른 점에 있어서는 율법에 의거하여 움직여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불변의 율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우주 통치의 권리를 쥐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이를 견실과 겸손의 율법으로 삼아 하나님의 최고의 권위에 복종하게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의지를 의의 유일한 법칙이며 만물의 가장 공의로운 원인으로 간주해야 한다. 실로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궤변 철학자들이 지껄이고 있는 절대적 의지, 즉, 불경하게 또는 모독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권능을 분리시켜 놓은 그런 절대적 의지가 아니라, 만물의 결정적 원리가 되는 섭리인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지만, 이 섭리에서는 옳은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3.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책임을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들은 지난날의 불행을 이유로 하나님께 불평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호마(Homer)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가멤논(Agamemnon)이 "죄의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우스신과 운명의 여신에게 있다" 라고 말한 것처럼 그들 자신의 죄책을 하나님께 뒤집어씌우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운명에 의하여 유괴된 것처럼, 그들은 플라우투스(Plautus, 고대 로마의 희극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젊은이가 "만사는 불안정하며 운명은 그가 원하는 대로 인간을 몰아친다. 나는 나 자신을 절벽으로 끌고 가서 거기서 내 생명과 재산을 파괴하겠다"라고 한 것처럼 자포자기하여 자신을 파멸 속에 던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또 다른 실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악행의 구실로 삼지도 않을 것이다. 리코니데스(Lyconides)는 다른 희극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동자였다. 나는 신들이 그것을 원하였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만일 신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이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경에서 탐구하며 배우기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이에 도달하려고 애쓸 것이다. 동시에, 저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갈 준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교리에 대한 지식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다는 것을 성실하게 보여줄 것이다.
불경스러운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불합리의 혼란을 일으켜 하늘과 땅을 거의 혼동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죽을 시간을 정해 놓으셨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열심히 자신을 지켜도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은 강도에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위험하다는 길로는 감히 가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이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의사를 부르기도 하고, 또한 지치도록 약을 너무 복용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거친 음식을 삼가며, 어떤 이는 다 낡아서 무너져 가는 집에서 살기를 두려워한다. 요컨대,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모든 방법을 고안해내며 열심히 그 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지를 시정해 보려고 시도한 이상의 모든 치료는 헛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삶과 죽음과 사, 건강과 질병, 평화와 전쟁, 그리고 인간이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대로 혹은 얻으려 애쓰거나하고, 혹은 피하려 하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확실한 작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들은 또한 신자의 기도는 무익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릇된 것이라고 결론짓고, 이 기도는 이미 영원 전부터 작정해 놓으신 것을 주시도록 주님께 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미래와 관계된 모든 계획은 인간의 생각과 상관없이 자신의 원하시는 대로 작정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를 부정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현재 발생한 것을 모두 하나님의 섭리의 탓으로 돌리고, 분명히 그 사건과 직접 관계있는 인간의 책임에 대하여는 눈을 감아 버린다. 살인자가 한 선량한 시민을 죽였다고 하자.
그들은 이 살인자야말로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한 자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남의 물건을 도적질했다던가, 혹은 간음죄를 범했다고 하자. 그들의 말대로 하면, 주께서 예지하시고 정해 놓으신 것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섭리의 대행자이다. 부모 중 한 분이 병들어 누워있는데, 아들이 치료를 게을리한 채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의 죽음만을 기다렸다고 하자. 그로서는 영원 전부터 그렇게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을 반항하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라고 해서 그들은 모든 범죄를 미덕이라고 부른다.
4. 하나님의 섭리를 구실로 인간의 신중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솔로몬은 미래 일에 대하여 논하면서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섭리와 쉽게 조화시켰다. 즉, 그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지배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 없이 이런 일 저런 일을 대담하게 계획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이 말씀은, 우리가 앞날을 준비하며 모든 문제를 정리할 때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의하여 방해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의지에 항상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삶의 한계를 정해 주셨으며 동시에 그것을 잘 돌보도록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는 생명을 보존하는 수단과 도움을 예비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위험을 미리 알 수 있게 하셔서 불의의 습격을 당하지 않도록 경계와 대책을 마련해 주셨다. 이제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명백해졌으며, 따라서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의 보호를 위탁하셨다고 하면, 우리는 마땅히 이를 보호해야 한다. 그가 만일 우리에게 구조의 수단을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그가 우리에게 미리 위험을 경고하시면 우리는 무모하게 그 속에 뛰어들어서는 안되다. 하나님께서 대비책을 마련해 주시면 우리는 마땅히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위험도 그것이 운명적인 것이 아닌 한 우리를 해하지 못할 것이며, 그것이 운명적인 한 이에 대한 여하한 대비책도 필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위험이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벌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물리치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비책을 마련해 놓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의 섭리와 질서와 얼마나 일치한가를 검토해보자. 위험이 운명적인 것이 아니면 주의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피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위험을 경계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독자들은 결론지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 위험이 독자에게 운명적인 것이 아니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경계하도록 명하시는 것이다. 생명의 보존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에 부응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숙고하고 경계하는 기능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이 아주 명백하다는 것을 이 어리석은 자들은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그들은 게으르고 태만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과하신 재난을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다. 조심성 있는 사람은 자신을 보살핌으로써 임박한 재난을 해결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생각 없이 무모한 짓을 하여 파멸한다. 그런데 만일 우매와 신중이 다 같이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일체의 미래사를 의심스러운 사건들로 대항하게 하시며, 준비하셨던 예비책으로 끊임없이 반대하도록 하기 위해, 그것들을 감추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 미래사들을 극복하게 하시거나 우리의 모든 염려를 초월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노출된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된 수단으로 표현하신다.
5.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사악함을 무죄로 하지 않는다
역시 그들은 경솔하게 또는 그릇되게 과거의 사건들을 모두 하나님의 들어난 섭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발생하는 사건들이 다 섭리에 좌우되기 때문에 절도나 간음, 그리고 살인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의 간섭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묻는다. 주께서 빈곤으로 벌하고자 하셨던 자의 물질을 약탈한 도둑이 어째서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주께서 생이 끝나도록 하신 자를 죽인 살인자가 어째서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이런 자들이 다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있는 것이라면, 어째서 그들은 형벌을 받아야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마음의 악한 성향에 의해 자극을 받고 오직 자신의 악한 욕망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배우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전진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어디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선포하신 뜻을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행동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가 명령하신 것뿐이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계명과 반대되는 일을 하면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고집이며 범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를 원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물론 나도 이를 그대로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는 목적으로 악을 행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일을 우리에게 명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생각지 않고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할 정도로 방종과 정욕에 깊이 빠져 앞 뒤 분별없이 행동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악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명령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위대하고 무한하여 하나님은 악한 도구를 선을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을 충분히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의 이론이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살펴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죄를 범할 수 없다고 하면서 범죄자가 형벌을 받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도둑과 살인자 및 다른 행악자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정하신 심판을 수행하신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 사실이 그들의 범죄에 무슨 구실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한다. 어째서 그런가? 그들은 그들과 동일한 불의에 하나님을 연루시킬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로 그들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의 결백을 밝히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을 비난할 수도 없다. 그들은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모두가 악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생각을 합법적으로 사용하시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수단으로 해서 일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태양의 열로 부패되고 노출된 시체의 악취가 어디서 오는가를 묻고 싶다. 그것이 태양 광선으로 말미암아 되어졌다고 모든 사람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그 악취가 광선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와 같이 악의 실질과 죄책은 사악한 인간에게 있다. 이럴진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악인의 봉사를 사용하신다고 해서 어떻게 그가 어떤 불결한 것과 계약을 맺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멀리서 하나님의 공의를 비방할 수는 있어도 이에 도달하지는 못하는 이 개와 같은 뻔뻔스러운 행동을 추방시켜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에 대한 명상 : 섭리의 작용을 깨달을 때 오는 행복. 6-11)
6. 믿는 자의 위안이 되는 하나님의 섭리
그러나 이상의 여러 비방들, 곧 광인들의 헛소리는 섭리에 대한 경건하며 거룩한 명상으로 쉽게 쫓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명상은 경건의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으로서, 이 명성을 통해서 우리는 가장 좋고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만사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발생되며 무엇 하나도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물의 근본 원인으로 바라보며 2차적인 원인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위치에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따라서, 하나남의 특별 섭리가 자신을 지켜 보호하시며, 따라서 자신에게 선과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판명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일어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다음으로는 다른 피조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가 양쪽을 모두 지배하신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확신한다. 그들이 선하든 악인이던, 인간에 관한 한 그 계획, 의지, 노력, 능력이 모두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원하시는 방향으로 향하게 하시며 또 원하실 때는 언제든지 그것들을 제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 섭리가 신자의 행복을 돌보신다는 증거하는 매우 분명한 약속들은 수없이 많이 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살펴 주시기 때문이다(벧전 5:7).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 91:1).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 2:8). "나는 너의 방패요"(창 15:1). "너로 … 놋 성벽이 되게 하였은즉"(램 1:18),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사 49:15). 실로 성경역사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길을 이처럼 열심히 돌보아 주심으로써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시 91:12) 하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반 섭리를 말하는 자들, 곧 하나님은 개개의 피조물들을 특별하게 돌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견해를 방금 위에서 거절한 것처럼, 이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 특별한 돌보심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후에(마 10:29) 곧 이어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적용하셨다. 즉, 우리는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여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철저하게 돌보신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마 10:31). 그리고 주님은 이 사실을 더 확대하여,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다고 확신시키셨다(마 10:30). 머리털 하나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질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나는 단순히 인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자신의 거할 곳으로 택하셨기 때문에, 교회를 다스리실 때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특수하게 표현하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7. 번창하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종은 이런 약속들과 실례들을 통해서 힘을 얻게 될 때에,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이 조정되는 혹은 남을 헤치지 못하게 그들의 악의가 억제되든 다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접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호감을 가지는 사람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애굽 사람의 눈앞에서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기(출 3:21)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원수들의 사악함을 분쇄하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때로는 그들에게서 분별력을 빼앗으심으로써 그들이 건전하며 온건한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만드신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합을 속이기 위해 사탄을 보내어 모든 선지자의 입을 거짓 영으로 채우게 하신 일이 있었다.(왕상 22:22). 또한 하나님께서는 젊은이들의 충고를 통해 르호보암의 정신을 흐리게 하였으며 마침내 르호보암은 자신의 미련함 때문에 그 왕국을 빼앗기게 되었다(왕상 12:10,15). 때로 그들에게 분별력을 주시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놀라게 하시고 낙담케 하심으로써 그들이 생각한 바를 원하거나 계획하거나 혹은 수행할 수 없게 하신다. 간혹 그들이 자신들의 정욕과 광기가 자극하는 일을 행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적절한 시기에 그들의 광포를 꺾으시며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치명적이었던 아히도벨의 모략을 사전에 분쇄하셨다(삼하 17:7,14).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모든 피조물들을 지배하시며 심지어는 사탄까지도 다스리신다. 그리고 이 사탄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허락과 명령이 없이는 욥에 대하여 감히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욥 1:12).
이와 같은 지식을 가지게 될 때 여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결과를 보면, 번영할 때에는 감사한 마음을, 역경 속에서는 인내를,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는 놀라운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건 아니면 무생물을 통해서 도움을 받았건 간에 일체의 번영과 인간의 욕망 전체를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는 마음에, "그들의 마음을 내게로 기울여 나를 사랑하게 하시고 그들을 나와 연합하게 하여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의 도구가 되게 하신 것은 분명히 주님이시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풍성한 열매를 거둘 때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호 2:21-22)라는 말을 생각할 것이다. 그는 다른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축복만이 모든 번영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많은 증거들을 통해서 교훈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8.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 모든 역경에서 우리를 돕는다.
어떤 역경에 닥쳐올지라도 그는 즉시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손으로 인내와 마음의 평온을 그에게 가장 깊이 새겨 주실 것이다. 만일 요셉이 형제들의 배신을 계속 생각하였더라면 그는 형들에 대한 형제의 사랑을 보여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그들의 불의를 잊었기 때문에 그는 온유와 관용을 보일 수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형들을 위로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라"(창 45:7-8). "당신들은 나를 헤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욥이 자기를 괴롭힌 갈대아 사람들을 주시하였더라면, 그에게는 복수의 불길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주께서 하신 일로 여기고,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이와 같이, 시므이가 다윗을 협박하고 또 그에게 돌을 던졌을 때, 다윗이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더라면 아마 그는 부하들에게 자신이 받은 모욕에 대한 보복을 당장 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지시가 없이는 시므이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부하들을 진정시키면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하신 것이니 그로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1)고 말했다. 다른 곳에서도 그는 자신의 지나친 슬픔을 억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해하신 연고니이다"(시 39:9). 만일 분노와 성급함에 대하여 이 이상 더 효과 있는 치료법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명상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크게 유익할 것이며 그 마음에 항상 다음과 같은 생각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주의 뜻이니 마땅히 참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뜻을 반항함이 부당할 뿐만 아니라 주께서는 정당하고 유익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뜻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이상의 말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부당하게 해를 받았을 경우, 우리의 고통을 악화시키고 우리 마음에 복수심을 자극시키는 그들의 사악함을 무시해 버리고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갈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원수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악을 행하였든지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며 그의 의로우신 섭리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는 것도 확실히 믿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바울은 우리가 받은 상처에 대하여 보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엡 6:12), 영적인 원수 곧 마귀에 대한 것(엡 6:11)이라고 지혜로운 교훈을 주었는데, 우리들로 하여금 그 싸움에 스스로를 대비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분노의 충동을 진정시키는데 가장 유용한 교훈은, 하나님은 마귀와 모든 행악자들을 대항해서 싸우려고 무장하시며 우리의 인내를 연단시키기 위하여 경기의 심판자로 앉아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는 재난과 고난이 인간의 간섭 없이 일어날 때에는, 모든 번영은 하나님의 축복을 그 근원으로 하여 흘러나오고 모든 재난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하는(신 28:2이하:15이하) 율법의 교훈을 상기하자. 그리고 우리는 이 무서운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를 대항할진대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배나 더 칠지라"(레 26:23-24).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우리의 아둔함을 죄라고 책망하고 계신다. 사실 우리는 인류의 공통된 이해에 따라 번영이건 재난이건 모든 사건을 다만 우발적인 것으로 생각할 뿐,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를 받고도 예배할 줄 모르며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선한 일과 악한 일이 하나님의 명령 없이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예레미야와 아모스가 그들을 호되게 훈계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애 3:38; 암 3:6).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선언도 역시 이와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사 45:7).
9. 중재하는 원인을 경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사람은 제 이차적 원인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자기에게 유익을 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자들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그 인간적 친절에 대한 감사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충심으로 그들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느끼고 기꺼이 자신의 의무를 인정하며 할 수 있는 대로 또는 기회가 허락되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감사하기를 노력할 것이다. 요컨대 그는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존경할 것이다. 그는 또한, 자기가 그들에게서 유익을 얻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을 통하여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임을 알게될 것이다. 만일 이 경건한 사람이 태만하거나 경솔하여 무엇인가 손실을 입었다면 그는 이것이 주님의 뜻에 따라 발생된 것으로 결론을 내리겠지만, 역시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릴 것이다. 만일 잘 돌보아줄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호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고 생각하자. 그 사람이 이미 넘을 수 없는 한계에까지 도달했음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를 이유로 그가 자신의 죄를 가볍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그 사람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그가 죽은 것은 자신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자기의 탓으로 여길 것이다. 살인이나 절도범에게 기만과 고의적인 악이 개재되었을 때, 그는 이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여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범행에서 그는,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악이 각각 스스로를 명시하는 대로 양자를 똑똑히 응시할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미래사에 관하여 그는 이런 종류의 이차적 원인들을 고려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안녕을 위해 사용할 인간적 도움이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원조를 청하는 데 있어서 그들과 상의하기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며 게을리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기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모든 피조물은 주께서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신적 섭리의 합법적 기구로 사용할 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떤 결과로 낙착될 것인가가 불확실하기 때문에(주께서 모든 일을 자기를 위해서 준비하신다는 것을 아는 일 외에는), 그는 지성과 이해가 도달할 수 있는 한,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을 열심히 동경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획을 세울 때 자신의 의견대로 하지 아니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정당한 목표로 향하게 되도록 하나님의 지혜에 자신을 맡기고 복종시킨다. 그러나 그는 외부의 원조가 있으면 그것으로 안심하거나 또는 그것이 없다고 해서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두려워 떨 정도로 외부적인 원조를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의 섭리만을 굳게 신뢰하고 있으며, 또한 현재의 일에 몰두한다고 해서 섭리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떨쳐버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요압은 전쟁의 결과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부르심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더욱이 그는 전쟁의 결과를 하나님의 결정에 의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삼하 10:12). 이러한 인식은 우리에게서 무모함과 자만심을 제거하고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도록 할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의 마음을 참된 소망과 신뢰와 용기로 가득하게 하실 것이며,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위험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경멸할 것이다.
10.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면 인생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측량할 수 없는 행복을 보게 된다. 인간의 생활은 수많은 악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무수한 죽음의 위기에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이외의 일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수많은 질병을 담는 그릇으로서 사실상 몸속에 질병을 보유하거나 그 원인을 배양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수많은 형태의 파멸 원인에서 모면할 수 없으며, 죽음에 둘러싸인 삶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추위를 만나든 더위를 만나든, 인간은 위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므로 우리는 이외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어디로 눈을 돌리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체의 대상은 신뢰할 가치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공공연하게 위협하고 절박한 죽음으로 협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다. 배를 타 보라. 우리와 죽음 사이에는 단 한발자국의 거리가 있을 뿐이다. 말을 타 보라. 한 쪽발이 미끄러지면 우리의 생명은 위태롭게 될 것이다. 도시의 거리를 걸어가 보라. 지붕 위의 기왓장과 같이 많은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무기가 우리의 손에 있든 친구의 손에 있든 역시 해악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보는 사나운 동물들은 모두가 다 우리를 죽이기 위해 무장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즐겁게만 보이는 정원에 몸을 감추려고 해도, 거기에도 때로는 뱀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가옥은 계속 화재의 위험을 안고 있어, 낮에는 가난해지지 않을까. 밤에는 우리 위에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하는 위협을 느끼게 한다. 우리의 밭은 우박과 서리, 가뭄 그 밖의 재난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불모와 이에 따르는 기근으로 우리를 위협한다. 해독과 복병, 약탈과 공공연한 폭행에 대하여는 여기서 말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들은 때로는 집에서도 우리를 괴롭히고, 때로는 멀리까지 따라다닌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존재가 아니고 무엇인가? 왜냐하면, 살아 있으나 반은 죽은 것과 다름없고 그런 사람은 마치 예리한 칼날이 항상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는 것과 같은 허약한 마음으로 불안하고 활기 없는 한숨을 내쉬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간혹 있을 뿐 언제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있는 일도 아니며 그렇다고 갑자기 있는 일도 아니라고 혹자는 말할 것이다. 나도 이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건들이 역시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생애가 그들의 생애와는 다른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의 실례를 통해서 경고를 받기 때문에, 이런 사건들이 우리에게도 발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와 같은 공포보다 더 무서운 재난을 달리 상상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하나님께서 가장 고귀한 피조물인 인간을 맹목적이며 무모한 운명의 공격을 받도록 내버려두셨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인간이 운명의 지배하에 있을 때 느끼게 될 그 비참함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11.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든다
더욱이 하나님의 섭리의 빛이 일단 경건한 사람에게 비칠 때, 그는 지금까지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극단의 불안과 공포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근심에서 구원과 해방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운명을 당연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자신을 담대하게 의탁하기 때문이다. 경건한 사람이 받는 위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만사를 권능으로 보존하시고 권위와 의지로 지배하시며 지혜로 조정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발생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고 천사로 하여금 돌보게 하셨다는 것과 통치자인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 않는 한 물이나 불이나 칼이 자신을 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도 그에게 위로가 된다. 그리하여 시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 91:3-6).
여기서 또한 성도의 영광스러운 확신이 솟아 나온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시 118:6).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 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4).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 27:1).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시 27: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시 23: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송하리이다"(시 71:14). 그들이 이와 같은 굳은 확신을 가지는 것은, 세계가 우연히 도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실은 어디서나 주께서 일하고 계심을 알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의 행복이 사탄이나 행악자의 공격을 받았을 때 섭리를 기억하거나 명상함으로써 힘을 얻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그들은 곧 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탄과 모든 행악자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굴레를 씌운 것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억제를 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고 명령하시지 않는 한 우리를 해칠 어떠한 음모도 꾸밀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을 꾸민 후에라도 준비할 수 없고, 충분히 계획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수행하는데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사탄과 그 무리들은 하나님의 쇠사슬에 속박을 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봉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있다는 것도 기억하도록 하자.
이러한 생각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넘치는 위로를 줄 것이다. 그들의 분노를 야기시키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방향을 돌리고, 그것을 지도해 나가는 것이 주님께 속하는 일인 것처럼, 또한 그들이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방종하게 기뻐 날뛰지 않도록 그 정도와 한계를 정하시는 것도 주님께 속한 일이다.
이것을 확신한 바울은 어떤 곳에서는 자신의 여행이 사탄의 방해를 받았다고 말하고(살전 2:18),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허락으로 되었다고 말하였다(고전 16:7). 사탄에게서 그 여행의 장애물이 왔다고 말했다면 마치 사탄이 하나님의 계획 그 자체를 뒤집어엎을 수나 있는 것처럼 사탄에게 막대한 권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그의 모든 여행을 허락하시는 주관자라고 말하였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사탄은 그가 꾸미는 어떤 일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똑같은 이유에서 다윗은, 인생을 끊임없이 변전시키는 말하자면 회전시키는 각양의 변화 때문에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 31:15) 라고 하면서 이 피난처에 자신을 맡긴다. 다윗은 "인생행로", 혹은 "때"라는 말로 단수로 기술할 수도 있었음에도 "시대"(times)란 복수어를 사용하여, 인간의 상태가 아무리 불안정하더라도 계속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다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음을 밝히려 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르신과 이스라엘 왕이 유다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군대를 연합하였을 때 유다 온 지방을 멸망시키고 황폐하게 하기 위해 밝힌 거센 불붙는 나무처럼 보였지만, 예언자는 이를 보고 그것은 겨우 연기가 나는 정도에 불과한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사 7:4)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바로가 부와 권력과 강한 군사력 덕분에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러나 바로 자신은 바다의 악어로 비유되고 그의 군대는 고기로 비유되었다.(겔 29: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통솔자와 그 부하들을 갈고리로 잡아다가 그가 원하시는 곳으로 끌어가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요컨대,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 이상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만일 독자가 주의를 기울인다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가 최대의 비참이라는 것과 이에 대하여 아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라는 것을 쉽게 알게 될 것이다.
(반대에 대한 답변. 12-14)
12. 하나님의 "후회"에 대하여
성경의 어떤 구절들이 방해가 안되었다면 섭리의 교리가 신자들에게 순수한 가르침과 위로를 준다는데 대하여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말하였다고 본다(왜냐하면, 어떠한 것도 천박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지 못하며 또한 이것을 만족시키기를 원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이 구절들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계획은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고 현상계의 상황에 따라 변화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첫째, 하나님께서 후회하신 것으로 언급된 실례가 몇 군데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한탄하셨고(창 6:6),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삼상 15:11). 또한 자기 백성이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면 즉시 그들에게 내리기로 결정하셨던 재앙을 돌이키시겠다고도 하셨다(렘 18:8). 둘째, 하나님의 작정 중 얼마가 폐기되었다고 언급된 곳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하여 40일 후에는 니느웨성이 멸망한다고 선언하셨지만, 그후 그들이 회개하자 이전보다 더 은혜로운 선언을 그들에게 내리셨다(욘 3:4,10).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선고하셨지만 히스기야의 기도와 눈물에 감동을 받아 그의 생명을 연장해 주셨다(사 38:1,5; 왕하 20: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결정으로 인간사를 결정하지 아니하시고, 각자의 공로나 또는 하나님 자신이 공평 타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데 따라 매년, 매일, 또는 매시간, 이런 일, 저런 일을 결정하신다고 많은 사람은 주장한다.
하나님의 후회하심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곧 하나님께 무지, 오류, 무력을 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후회하심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고의적으로 또는 기꺼이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발생할 것을 알지 못하신다든가 이를 피할 수 없으시다든가 혹은 조급하고 경솔하게 결정짓고 이를 즉시 후회하신다고 말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께서 뜻하시는 바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성령은 후회를 말씀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변개치 않으신다는 것이다(삼상 15:29). 그리고 사무엘상 15장에서 이 둘이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양자를 대조해 보면 외관상으로는 모순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충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는데, 이때의 마음의 변화는 비유적으로 기술된 것이다. 곧 이어,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라는 말씀이 첨가되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불변성은 사실적으로 명백하게 선언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질서는 영원한 것이며 동시에 모든 후회를 초월하신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까지도 이를 증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도 다음과 같이 외쳤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13. 성경은 인간의 이해를 돕고자 하나님의 "후회"를 말한다
그러면 "후회"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명히 그것은 하나님을 인간적인 용어에 따라 서술하는 다른 모든 표현방식과 똑같은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둔하여 존엄하신 하나님에게까지 미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그에 대한 묘사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능력에 맞도록 그 묘사가 낮추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묘사를 낮추시는 방법은 자신의 존재하는 그대로가 아니고 우리가 그를 지각할 수 있는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신다. 하나님께는 마음의 혼란이 전혀 없지만 죄인에 대하여는 분노하신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고 말할 때, 언제나 그것을 하나님께 무슨 감정적인 동요가 있는 것으로 상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러한 표현은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경험에서 취해진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는 항상 흥분하고 노한 사람의 용모를 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회"라는 말을 행동의 변화 이외의 어떤 다른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행동의 변화로 자신의 불만을 증거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변화는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것에 대한 정정을 뜻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정정은 후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있어서, "후회"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동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나 의지가 번복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결의가 변경된 것도 아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그 변화가 아무리 갑작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영원으로부터 예견하시고 흡족해 하시며 작정하신 것을 끊임없이 방법으로 수행해 나아가신다.
1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확고하게 실행하신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하여 멸망을 선고하신 후 그들이 회개하자 그들을 용서하셨다는 것과(욘 3:10),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선고하신 후 히스기야의 생명을 더 연장하셨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이것이 하나님의 작정이 폐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사 38:5). 폐기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이 암시되었다는 것에서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단순한 확언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무언의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결과를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왜 요나를 니느웨 사람들에게 보내어 니느웨 성의 멸망을 예언하게 하셨는가?
또, 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히스기야에게 그의 죽음을 암시하셨는가? 멸망에 대한 예고가 없이도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과 히스기야를 다 멸하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들의 죽음을 미리 경고하여 그 죽음의 다가옴을 멀리서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은 어떤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목적이란, 그들을 멸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회개케 하여 멸망을 받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40일 후에는 니느웨가 멸망할 것이라는 요나의 예언은 실상 멸망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히스기야의 장수의 소망이 끊어졌던 것은 보다 오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주께서 그와 같은 위협을 통해 두려워하고 있는 자들을 회개케 하며, 그들의 죄값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피하게 하고자 하셨던 것을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상황의 성질은 우리로 하여금 그 단순한 암시 속에 한 무언의 조건이 포함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 사실은 또한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 실례에 의해 확증된다. 아비멜렉왕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하자 주께서는 그를 책망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위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창 20:3). 그러나 이비멜렉이 변명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창 20:7). 하나님께서 첫 번째 말씀에서 아비멜렉의 마음을 심하게 때리심으로써 자신을 만족하게 하려 하셨고, 두 번째 말씀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명백히 표현하셨는데, 이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다른 구절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전에 선언하신 바를 취소하셨기 때문에 그의 최초의 목적이 폐기되었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형벌을 경고하심으로써 그가 용서하고자 하는 자들을 회개케 하실 때에, 이는 자신의 뜻을 변경하거나 자신의 말씀을 변경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영원한 작정을 가능케 하시기 때문이다. 다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한 음절씩 설명하지 않으시는 것뿐이다. 실로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말은 진실한 것으로 존속되어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 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 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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