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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2권.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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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 저주받을 짓은 모든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한다

 

(인간의 본성은 너무 부패하여서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완전히 재생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1. 육신이 인간의 전부이다

 

그러나 인간이 영혼의 두 가지 능력과 그 영혼을 가진 인간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이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서 사람을 설명하는 것을 보는 것인 가장 좋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3:6)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인간 전체를 묘사한다면(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인간은 분명히 하나의 초라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사도가 증언하는 것과 같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6-7). 그렇다면, 과연 육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생각뿐이며 하나님의 공정한 법에 찬동할 수 없고, 간단히 말하면 죽음의 열매 이외에는 아무것도 낳을 수 없으리만큼 사악한가? 인간의 본성에는 육체 외에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면, 거기에서 어떤 선한 것을 꺼낼 수 있는가를 당신은 시험해 보라. 혹자는 말할 것이다. 육이라는 말을 영혼의 감성적인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고상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와 사도의 말씀에 의해 철저하게 반박된다. 사람은 ""이므로(3:6)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3:3) 주님의 말씀이다. 신체적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영혼은 그 일부분만이 개조된다고 해서 다시 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새롭게 되어야만 다시 나는 것이다. 두 구절에 나타난 대조법이 이 점을 확인한다. 영과 육은 완전히 대립되어, 중간적인 것이 있을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영적인 아닌 것은 모두 "육적"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중생하지 않고는 결코 영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나면서부터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육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가능한 모든 의혹을 일소해 준다. 옛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간다"(4:22) 설명한 다음에 바울은,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4:23)고 우리에게 명령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법하고 사악한 욕망은 영혼의 감성적인 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자체에도 있으며 그러므로 마음도 새롭게 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는 조금 전에 인간성의 모든 부분이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것을 그려 보였다. 이방인들은 모두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4:17-18)고 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아직 그의 바른 지혜와 공의에 합치하도록 개조하시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사도 바울의 이 말이 해당된다는 것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점은 그가 곧 첨가한 비교를 보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거기에는 그는,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 하였느니라"(4:20)고 경고한다. 실로 이런 말씀을 대할 때에 우리의 맹목 상태와 그 결과로 일어나는 악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길은 그리스도의 은혜뿐이라고 결론하게 된다. 이사야도 그리스도의 나라를 약속할 때에,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60:2)라고 하면서, 교회에 대하여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시리라"(60:19)예언했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 위에만 비치고, 교회 밖에는 어두움과 무지한 맹목 상태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여기서의 그의 증거이다. 나는 사람의 허무성에 관한 도처에 있는 말씀들, 특히 시편과 예언서에 기록된 말씀들을 일일이 지적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다음의 다윗의 발언은 참으로 위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허무와 함께 사람을 저울에 달면, 들려 허무보다 경하리로다"(62:9, 의역).인간의 생각은 모두가 우매하고 경망되며 헛되고 패악하다고 조롱을 받으니 인간의 오성은 여지없이 깨뜨려진 것이다.

 

2. 인간의 타락에 대한 증거로서의 로마서 3

 

마음에 대한 정죄에 대해서도 이에 못지않게 엄격한 비난이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17:9). 나는 간결하게 하고자 한 구절만으로 만족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우리 본성의 전모를 보여 주는 가장 맑은 거울과 같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교만을 없애고자 몇 가지 증언을 하였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참조, 14:1-3; 5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참조, 5:9)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참조, 140:3)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참조, 10:7) 그 발은 피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참조, 59:7)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참조, 36:1; 3:10-16,18). 사도 바울은 이런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으로 어떤 특수한 사람이 아닌 아담의 후손 전 인류를 공격하는 것이다. , 어느 한 시대의 부패한 것을 고발한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의 바울의 의도는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단순히 그들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피할 수 없는 큰 재난에 휩쓸렸으며, 하나님의 자비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치려 한 것이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이 몰락하고 파멸한 것을 근거로 증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 증언들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여기에 묘사된 바와 같은 것은 타락한 풍습이라는 결함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본성이 부패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 자체는 타락하고 버림받은 자이므로 주의 자비를 받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하는 사도 바울의 논법은(3:23이하) 성립될 수가 없다. 나는 바울이 이 말씀들을 부적당하게 주워 모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하여 굳이 그 적합성을 증명하고 애쓰지는 않겠다. 도리어, 예언자들에게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바울의 독창적인 발언들이라고 가정했다. 우선 그는 사람에게 아무 의도, , 아무 성실이나 순결이 없다고 하였고, 다음에 총명이 없다고 하였다(3:10-11). 참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므로, 하나님을 떠나 배반했다는 것은 총명이 없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 결함이 있다. 바울은 덧부쳐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떨어져 나가 부패했으며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단언한다. 만일 이런 점들이 인류의 유전적인 천품이라면, 우리의 본성에서 어떤 선한 것을 찾는 것은 무익한 행위이다. 물론, 이런 사악한 모든 특징들이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인정은 하면서도, 나는 이 히드라(hydra, 희랍 신화에 나오는 머리가 아홉 달린 뱀, 근절하기 어려운 큰 재앙을 뜻함)와 같은 화근이 이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몰래 숨어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육체 내에서 병의 원인과 요소가 있을지라도, 비록 통증은 아직 격심하지 않더라도 그 병이 자라나고 있다면 그런 몸을 건강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영혼에 이렇듯 많은 죄악의 열병이 있는 이상 그 영혼을 건전하다고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비교는 모든 점에서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병든 신체에도 아직 조금의 생명력은 남아 있는데 이 죽음의 심연에 빠진 영혼은 여러 가지 죄악의 짐을 졌을 뿐 아니라 선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은총은 때때로 정화시킬 수 없는 곳을 제한한다

 

앞에서 이미 답변했던 것과 같은 문제가 이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다.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자기의 천성에 따라 일생동안 덕을 추구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도덕적 행위에는 실수도 많았었지만, 나는 조금도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들의 열렬한 성실은 그 천성에 어느 정도의 순결성이 있음을 증언했다. 이런 덕행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은, 행위의 가치를 논할 때에도 자세히 말하겠지만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논의를 전개하는 데에도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말하고자 한다. 이런 예들은 인간성이 완전하게 부패했다고 판단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경고하는 듯이 보이는데, 어떤 사람들은 천성에 고무되어 여러 가지 훌륭하고 뛰어난 행위를 했을 뿐 아니라 일평생 아주 고결하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본성이 부패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총이 움직일 여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은총은 본성을 정결하게 만들지는 않을지라도 내면적으로 억제하는 은총이다. 만일 주께서 각 사람의 마음이 정욕대로 날뛰는 것을 방임하신다면, 바울이 모든 인간성에 있다고 비난하는 악한 것이 모두 자기 자신 안에 참으로 있다는 것을 증거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14: 3; 3:12).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여러분 자신은 "발이 피흘리는 데 빠른"(3:15) 사람들 편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손이 도둑질과 살인으로 더럽혀진 자,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는"(3:13), 행위가 무익하고 썩었으며 살인적인 자,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자, 가장 깊은 마음속이 썩은 자, 눈이 술책만을 찾는 자, 욕설할 생각이 간절한 자, 한 마디로 모든 부분이 무한한 사악을 행할 태세인 자가(3:10-18)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모든 영혼이 바울이 담대하게 단언하는 악행들에 얽매어 있다면, 주께서 인간의 정욕이 자체의 경향대로 방탕하는 것을 허락하신다고 가정할 때의 결과를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아무리 미친 짐승도 이렇듯 제멋대로 날뛰지는 않을 것이며, 아무리 물살이 빠르고 급한 강이라도 이렇게까지는 광포한 홍수를 터뜨리지 않을 것이다. 주께서 그 선택하신 사람들의 이런 병들을 고치신 것에 대하여는 곧 설명하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는, 그들을 제어하는 것이 만사를 유지하는 데 유익하다고 예견하시기 때문에 굴레를 씌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억제하신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추악상을 대체로 감추지 않으면서도 법이 무서워서 제한을 받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직한 생활 태도가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어느 정도 그것을 추구한다. 어떤 사람들은 일반 수준을 넘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우수한 인물이 되려고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섭리로 패악한 인간성을 제어하셔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막으시지만, 그렇다고 인간성을 내면적으로 정결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니다.

 

4. 하나님이 주신 재능은 정직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타락한 채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카밀루스(Camillus)와 카틸리나(Catilina)를 동등시해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인간성은 열심히 연마할 때에 전연 선한 점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카밀루스의 예가 증명한다고 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참으로 카밀루스의 고결한 천품들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그 자체로 볼 때에는 마땅히 칭찬할 만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천품이 어떻게 인간의 본성이 선했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우리는 그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만일 자연인이 이런 뛰어난 도덕적 완전성을 가졌다면 확실히 인간성에는 덕을 함양할 능력이 없지 않다고 추론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만일 그 마음이 사악하고 비뚤어져 전혀 정직성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또 카밀루스가 자연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의 마음이 역시 부패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외면상으로는 가장 고귀하고 성실한 사람도 언제든지 그 본성은 부패의 경향이 강한 것인즉, 그래도 우리는 이 점에서 인간성에 선을 행하는 힘이 얼마나 있다고 할 것인가? 덕성이 보이는 반면에 그 죄악의 인상도 깊은 사람을 유덕하다고 칭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인간의 의지가 자체의 패악성을 여전히 벗지 못하고 있는 동안은 바른 일을 추구하는 능력이 그 의지에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쉬운 해결책이 있으니, , 이런 것은 인간성에 공통한 천품이 아니라 원래 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모양과 정도로 내려 주시는 특수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어떤 사람은 천성이 고귀하고 어떤 사람은 본성이 비열하다고 한다. 동시에, 양편을 인간성의 보편적 타락 상태에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특수 은총을 베푸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베풀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새 사람으로 만드셨다"(삼상 10:6).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호머의 전설을 인용하여, 왕가의 자손은 날 때부터 특색이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유익을 위해서 지배자가 될 운명인 사람들에게 영웅적 성품을 주시는 때가 많다. 역사상 유명한 위대한 지도자들의 성품도 여기에서 왔다. 일반 서민들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아무리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항상 자기의 야심에 쫓긴다면 이 오점이 모든 덕성을 오염시켜 하나님의 은총을 완전히 잃게 만들기 때문에, 세속 인간들의 탁월한 점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무가치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열의가 없으면 정직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열의가 없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리스도 위에 강림하리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은(11:2) 실로 당연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떠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며, 이 두려움은 "지혜의 근본"인 것이다(111:10). 허망한 외관으로 사람을 속이는 미덕들이 정치적 집회에서는 칭찬을 받고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겠지만, 하늘 심판대 앞에서는 전혀 의롭다함을 얻을 가치가 없을 것이다.

 

5. 인간은 강제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짓는 것이다

 

의지는 죄의 속박을 받아 노예 상태에 빠졌으므로 선을 향해서 나아갈 수 없으며, 더욱이 선에 전력을 다할 수는 없다. 이런 움직임은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시초가 되며, 성경은 이 전향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돌린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만일 자기를 "돌이키는"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로 "돌이키게"해 주시기를 기도했다(31:18). 그러므로 예언자는 또한 같은 장에서 믿는 백성의 영적 구속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다"(11)라고 하였다. 분명 이것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마귀의 멍에 아래에서 살고 있는 한, 죄인을 단단히 묶어 놓은 족쇄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의지는 남아 있어서, 가장 절실한 욕구로 죄를 향하여 기울어지며 달음질한다. 이것은, 사람이 이 필연성에 몸을 맡겼을 때 의지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의지의 건전성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의지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으로, 선을 결심하면 이익이 되고 악을 결심하면 손해가 된다. 그러므로 단순히 결심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악을 결심하는 것은 부패한 본성이 하는 일이며, 선을 결심하는 것은 은총이 하는 일이라고 베르나르두스가 가르친 것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자유를 빼앗긴 의지는 필연적으로 악으로 끌려들거나 인도된다고 말하는 나를 너무 지나치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말에는 거룩한 분들이 한 말과 어긋나거나 어울리지 않는 점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필연과 강제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말을 싫어한다. 가령 그들에게,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선하시지 않은가? 악마는 필연적으로 악하지 않은가?"하고 질문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신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신이신 것과 선하신 것은 똑같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악마는 그의 타락으로 완전히 선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악한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가령 어떤 신성모독하는 자가, 하나님은 자기의 선한 성격을 보존하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므로 선하시다고 해서 찬양을 받으실 자격은 없다고 모독한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곧 대답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지 못하시는 것은, 힘에 의한 충동을 받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무한히 선하시기 때문이라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선을 행하실 때의 하나님의 자유 의지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악한 일 밖에 할 수 없는 악마는 자기의 의지로 죄를 짓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사람에 대하여, 사람이 필연적으로 범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해서 의지 행위의 정도가 적다고 말할 것인가? 도처에서 어거스틴은 이 필연성에 대하여 말했는데, 카엘레스티우스(Caelestius)가 그에 대하여 트집을 잡으면 반박했지만 어거스틴은 주저치 않고 단언했다. "사람은 자유로 죄에 빠졌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형벌인 부패는 자유를 필연성으로 변절시켰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할 때는 언제나 죄의 필연성인 속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구별의 요점은,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패했을 때에,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은 것이지 마지못해서 또는 강요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심정의 가장 간절한 욕구에 의한 것이지 힘에 의한 강제로 인한 것이 아니며, 그 자신의 정욕의 선동으로 한 것이지 외부로부터 강요를 받아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인간의 본성은 너무나도 부패해서 움직이면 반드시 악한 일 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결국 인간은 죄를 짓는 필연성에 예속되어 있다고 분명히 말하는 것이다.

베르나르두스의 글에도 어거스틴의 생각과 같은 것이 있다.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이 자유롭다. 그러나 죄의 개입으로 인해 인간은 일종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성이 아니라 의지가 해를 입은 것으로서, 그렇더라도 그의 선천적인 자유는 박탈되지 않았다. 자기의 의지고 하는 일은 또한 자유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뒤에, "죄로 인해 타락한 의지는 어떤 추하고 이상한 방법으로 자체의 필연성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필연성은 의지의 필연성이면서도 의지를 변명하지 못하며, 의지는 그릇된 길로 끌려가면서도 필연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이 필연성은 일종의 자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에 그는 말한다. 우리는 다른 멍에의 압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발적인 노예 상태의 멍에를 멘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웠던 의지가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된 것이니, 노예인 점에서 우리는 가련하고 의지에 관해서는 변명할 길이 없다. 그의 결론은, "그래서 영혼은 한층 더 이상하고 악한 방법으로 일종의 자발적이며 잘못된 자유로운 필연성에 지배되며, 동시에 노예이며 자유롭다. 필연성 때문에 노예이며 의지 때문에 자유롭다. 그리고 더욱 이상하고도 한탄스러운 것은, 자유롭기 때문에 영혼은 유죄하고, 유죄하기 때문에 노예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독자들은 내가 신기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할 것이다.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찬동을 얻어 어거스틴이 옛날에 가르쳤고, 거의 천 년 후에도 수도원들에서 보존되었던 생각에 나는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롬바르드는 필연성과 강제를 구별하지 못하고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다.

 

(의지의 전환은 내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이다. 6-14)

 

6. 인간이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음은 구원의 일에 무엇보다도 잘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오직 주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성의 부패를 시정하며 치료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주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실 때에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주시는 것이므로, 그가 우리 안에 하시는 그의 능력이 나타날 때에 즉시 우리의 빈곤상이 밝혀질 것이다. 사도가 빌립보 사람들에게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1:6) 했을 때에, 그말은 "착한 일의 시작"이 회심의 맨 처음임을 의미하며 그 처음은 의지에 있다는 것을 뜻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의 선한 일을 시작하실 때에는, 먼저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의에 대한 사랑과 소원과 열의를 일으켜 주신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의를 향하도록 기울이고 다시 형성하여 인도하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견인불발의 정신을 확립시키심으로써 그 사업을 완성하신다. 혹자는 자체의 힘이 약한 의지를 돕기 위하여 주께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다고 할지 모르나, 성령께서는 이런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하여, 의지가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른 곳에서 언명하셨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 속에 두고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36:26-27). 인간의 의지는 완전히 개조되며 갱신되어야 하는 것인데, 어느 누가 감히 연약한 의지를 하나님의 도움이 강화해서 선을 택하려는 효과적인 노력을 하게 만든다고 말할 것인가?

만일 돌이 부드러워서 어느 정도 굽히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면, 나는 사람의 마음도 그 불완전한 점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충하면서 바른 일에 복종하도록 개조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에, 우리 마음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하지 않는 한 전혀 선한 것을 짜낼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켜 바른 일을 열망하게 만드실 때에 돌이 변하여 살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은 말살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그것을 대신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의지는 말살된다. 그러나 의지가 의지로서 말살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처음 본성에 속한 것은 사람이 전향할 때에 완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의지가 새로 창조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의지가 지금부터 있기 시작한다는 뜻이 아니라 악한 의지가 선한 의지로 변한다는 뜻이다. 또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나는 단정한다. 같은 사도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고후 3:5)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약학 의지를 돕거나 부패한 의지를 바로 잡아줄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의지를 만들어 내기도 하신다고 한다(2:13). 이것을 볼 때에,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의지에 있는 선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깊은 뜻으로 사도는 다른 곳에서,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고전 12:6).

그는 여기서, 전우주적 지배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많이 가진 모든 선한 일에 대하여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라고 함으로써 영적 생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한다. , 신자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다른 말로 같은 뜻을 표현한 일도 있다(고전 8:6). 여기서 그는 분명하게 새로운 창조를 찬양하며, 그 새로운 창조는 우리에게 공통된 본성에 속한 것을 모조리 쓸어버린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대조를 깨달아야 한다. 이 대조를 그는 다른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면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이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가르친다(2:10). 모든 선한 일의 시초는 둘째 창조에서 오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둘째 창조를 얻으므로, 우리의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증명하려고 하였다(참조, 2:5). 그러나 극히 작은 능력이라도 우리 자신에게서 왔다면 우리도 다소의 공로를 나누어 받겠지만, 바울은 우리의 공로라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면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이니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10)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논한다. 이 말은 선행의 모든 부분은 그 시초의 움직임부터 하나님께 속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예언자도 시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이므로 하나님과 나눌 수 없다고 말한 후에, "우리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다"라고 첨부한다(100:3). 문맥으로 보아 이것은 그가 영적 생명의 시작점인 중생에 대하여 말하는 것임이 분명한데, 이는 그가 이어서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100:3). 또 그는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 마땅한 찬양을 드릴 뿐 아니라 우리가 구원 사업에 참가했다는 생각을 명백히 일체 배제한다. 이것은 마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인간에게는 자랑할 점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7. 믿는 자가 은총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다; 의지는 먼저 은총을 통해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의지가 그 본성으로는 선을 버리며 오직 주의 권능에 의해 회심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의지는 일단 준비된 다음에는 그 회심에서 독자적인 구실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을 것이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보면, 모든 선행에는 은총이 먼저 앞서지만, 의지는 은총의 인도자로서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종자로서 그 뒤를 따른다는 말이 있다. 이 거룩한 분은 전혀 악한 의도가 없이 말한 것인데, 롬바르드가 전혀 엉뚱하게 왜곡을 하여 이러한 생각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내가 이미 인용한 예언자의 말과 그 밖의 구절들에는 두 가지 점이 분명하게 지적되어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첫째로, 주께서 우리의 악한 의지를 교정, 아니 말소하신다. 둘째로, 주께서 친히 악한 의지를 주님께로부터 난 선한 의지로 바꿔 주신다. 은총이 의지를 앞지른다는 의미에서, 나는 사람의 의지를 "수종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개조된 의지는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의지가 수종자가 되어 앞서가는 은총에 복종하는 것을 사람의 공로로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크리소스톰의 글에 "의지가 없으면 은총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은총이 없으면 의지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우리가 방금 바울의 말에서 본 바와 같이(2:13), 은총이 의지까지도 움직인다는 것을 부정하는 생각이다. 인간의 의지를 은총의 수종자라고 한 어거스틴의 생각은 선행에 있어서 은총에 다음가는 임무를 의지에 배당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원의 제일 원인을 사람의 공로에 돌리는 펠라기우스의 극악한 주장을 반박하려는 것뿐이었다.

당면 문제를 논의하는 데는, 은총이 모든 공로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어거스틴은 주장했다. 그리고 그 동안 은총의 영속적 효과라는 다른 문제는 도외시했는데, 다른 곳에서는 이 문제를 아주 훌륭하게 논하였다. 주님께서는 원하지 않는 사람이 원하게 되도록 먼저 활동하시며 원하게 된 사람의 결심이 헛되지 않도록 뒤를 따르신다고 어거스틴은 여러번 말하지만, 모든 선행의 근본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발언들은 너무도 분명하므로 긴 논평이 필요하지 않다."사람들은 우리의 의지 안에서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것인 무엇을 얻기 위해 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나는 알 수 없다"라고 그는 말한다. 펠라기우스와 카엘레스티우스에 대한 논박(Against Pelaius and Caelestius)이라는 저서의 제 1 편에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하신(6:45)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인간의 선택 능력은 도움을 받아서 마땅히 할 일을 알 뿐만 아니라 알았기 때문에 또한 행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율법의 문자가 아닌 성령의 은총으로 가르치실 때에, 그 결과로 사람은 그 배운 것을 앎으로써 깨달을 뿐만 아니라, 원함으로써 구하며 행함으로써 얻는다."

 

8. 성경은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점에 와 있으므로, 나는 성경의 아주 분명한 구절을 몇 개 들어서 문제를 요약하겠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성경을 일부러 왜곡시킨다고 하는 비난을 물리치기 위하여, 성경에도 얻었다고 주장하는 그 진리에는 저 거룩한 분, 어거스틴의 증언도 없지 않다는 것을 밝히겠다. 우리의 견해를 지지하는 성경 구절들을 일일이 다 거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므로, 나는 아주 간결하게 정선된 구절들만을 들음으로써 여기저기에 있는 나머지 구절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길을 준비하겠다. 그러나 이 기회에 나의 견해가 어거스틴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도 결코 시기상조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에게 최고의 권의를 인정하는 것은 정당하다. 물론 하나님만이 선의 근원이라고 믿는 데는 쉽고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리고 선으로 기울어진 의지는 선택받은 사람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의 원인은 사람 밖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사람에게 있는 바른 의지는 그 자신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1:4) 그 기쁘신 뜻에서 흘러 왔다는 결론이 된다. 여기에는 비슷한 이유가 하나 더 있으니, 곧 선을 결심하여 행하는 것은 믿음에서 유래하므로 우리는 신앙 자체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믿음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고 선포하므로, 전심으로 악으로 기울어지도록 태어난 우리가 선을 원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이키는 방법으로 "굳은 마음"을 그들에게서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는(36:26) 두 원칙을 정하셨을 때에, 우리를 의의 방향으로 돌이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것을 말살시켜야 하며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온전히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뜻을 분명하게 증언하셨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한 곳에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라"(32:39) 하시고, 이어서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리라"(32:40)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에스겔서에서는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리라"고 말씀하신다(11:19). 그는 여기에서 우리의 회심은 새 영과 새 마음의 창조라고 확언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에 선하고 바른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모두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뜻을 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개조되지 않은 우리의 의지에서는 선한 것이 생길 수 없으며, 개조된 후에도 우리의 의지가 선한 것은 우리 자신이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항상 같은 결론이 따르기 때문이다.

 

9. 성경에 나타난 기도는 우리의 축복의 시작과 계속과 결말이 모두가 하나님께로서만 온다는 것을 특히 보여주고 있다

 

같은 뜻을 우리는 거룩한 분들의 기도에서 읽을 수 있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여 그 모든......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게 하시기를 원하오며"(왕상 8:58)라고 솔로몬은 기도했다. 그는 우리의 마음이 완고한 데 대하여, 우리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 한 선천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반역하는 것을 자랑한다고 밝혔다. 시편에서도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옵소서"(119:36) 똑같은 기도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완고한 불복종으로 이끌리는 마음의 악한 마음과 순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에 대한 시정이 대조되어 있는 점에 항상 유의해야 한다. 일시 은총의 인도를 잃었다고 느낀 다윗이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을 때에(51:10), 이는 자기의 마음이 불결한 것으로 속속들이 가득 차 있으며 자기의 정신이 부패하고 비뚤어졌다고 인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그는 자기가 원하는 정결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부름으로써 과거에 받은 정결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지 않았던가? 만일 이 기도야말로 경건하고 거룩한 성품의 표징이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대한 반박은 어렵지 않다. , 다윗이 이미 어느 정도 회개를 했지만 이는 자기가 경험한 가련한 파멸 상태와 이전의 상태를 비교한 것이라는 간단한 반박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떠난 사람의 처지에 자기를 두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중생의 은혜로 주시는 것을 모두 자기에게도 달라고 적절한 기도를 드린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죽은 것 같은 자기가 다시 창조되며 사탄의 소유권에서 해방되어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실로 우리의 교만의 방종의 정도는 해괴망측하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곧 모든 일을 쉬라는 것보다 더 준엄한 주님의 요구는 없다(20:8이하; 5:12이하).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일을 그만 두고 하나님의 일에 그 정당한 자리를 드리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한다. 우리의 몰지각이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겠다고 분명하게 증언하신 은혜를 사악하게 묵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15:5)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15:1).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4).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포도나무 가지를 줄기에서 끊어 수분을 빼앗으면 싹이 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우리 자체로는 과실을 맺을 수 없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의 본성에서 선을 행할 가능성을 찾아서는 안 된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15:5) 결론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자립하기에 너무 약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시며 최소한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조차 일체 배제하신다. 그리스도께 접붙여질 때에 우리도 포도나무와 같이 열매를 맺는다. 땅의 습기와 하늘의 이슬과 생명을 주는 태양열에서 포도나무는 성장에 필요한 힘을 얻는다. 그와 같이, 선행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 우리에게 돌아올 몫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가지에는 이미 수액이 가득하고 결실하는 힘도 내포되었으며, 따라서 그 자체에 있는 것으로 어느 정도의 충당을 하기 때문에 땅이나 뿌리에서 모든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어리석은 주장은 미련하고 쓸데없는 괴변이다. 그리스도의 뜻은 간단명료하다. ,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런 선한 일도 할 수 없으므로, 그에게서 떨어질 때 우리는 마르고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뜻으로 다른 데서는,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5:13). 이런 이유로 우리가 이미 인용한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린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

선행의 처음 부분은 결심이며 다음 부분은 그것을 수행하는 강한 노력이다. 그리고 두 부분은 모두 그 근원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결심이나 수행에서 우리 자신의 공로를 주장한다면, 이는 우리가 주의 공적을 빼앗는 것이 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한 의지를 도우신다고 말한다던 우리에게 무엇이 남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의지를 만드신다고 하면 의지에 있는 선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밖에 있게 된다. 그러나 선한 결심까지도 우리의 무거운 육에 눌려 일어설 수 없기 때문에 이 곤란한 싸움을 이기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는 정신력이 공급되며 이것은 뜻을 이루는 데 충분하다고 사도는 덧붙여 말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가 다음 구절에서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것은 하나님뿐이라"(고전 12:6) 가르치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말에는 영적 생활의 전과정이 포함되었다. 다윗도 주의 진리에 행할 수 있도록 주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한 다음에, 곧 이어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라고 첨가한다(86:11, 119:33 참조). 이 말씀은, 심정이 바른 사람들도 여러 가지로 마음이 산란하여 견인의 힘을 얻지 못하면 곧 사라지거나 타락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자기의 행보를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한 다음에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라고 싸울 힘도 주시기를 기도한다(119:133). 그러므로 이런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선행을 시작하시며 또 완수하시는 것이다. 의지가 올바른 일을 사랑하고 열렬히 원하며 그것을 추구하려고 분발하며 움직이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리고, 선택과 열심과 노력이 흔들리지 않고 성공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나, 끝으로 이 모든 일을 사람이 꾸준히 계속하며 최후까지 인내하게 하는 것도 모두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10. 하나님의 활동은 우리가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첨가할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를 움직이시는 방법은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가르치며 믿어 온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신 다음에 거기에 대한 복종이나 항거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했으나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지의 방향을 효율적으로 결정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사람은 이끌리기를 원하는 사람이다"라고 크리소스톰이 자주 반복한 이 말을 부인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손을 내미시고 우리가 그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인간에게 아직 순결한 상태가 남아 있었을 동안에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질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결심하시며 역사하실 수 없다면 자유 의지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사람이 실제로 분명히 보여 주었으니,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 이렇게 적은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우리 자신이 감사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을 희미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도가 가르치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선한 의지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마치 자기의 소유물인 듯이 성령으로 지시하며 다스리며 주관하며 지배하신다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참으로 주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 새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에스겔을 통해서 약속하시는 것은, 그들이 그의 교훈대로 살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또한 실제로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11:19-20, 36:27).

이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6:45)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은총은 그 자체만으로 효력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어거스틴도 이와 같이 주장을 한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은총을 거절하시지 않는다고(내가 잘못 안 것이 아니라면) 오캄(Ockham)은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이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무차별적으로 생각하시지 않는다. 물론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모두 그 사랑이 주어진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마침내 그 사랑을 구하게 되는 것은 하늘 은총의 입김이 불어 주신 사람들뿐이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받으실 찬양을 조금이라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거듭나서 하나님의 인도로 움직이며 주관된다는 것은 분명히 선택된 자들의 특권이다. 이런 이유로, 결심한다는 행동의 일부는 자기가 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어거스틴이 바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또 거저 택하심에 대한 특별한 증거를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본성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지만 은총은 그렇지 않다"라고 그는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시는 사람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주신다고 하는 견해를 어거스틴은 재치가 있으면서도 깨어지기 쉬운, 반짝이지만 허망한 유리와 같은 궤변이라고 불렀다. 다른 곳에서 그는 말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왔습니까? 믿음으로 왔습니다. 그렇다면 바른 길을 발견한 것은 자기라고 생각하는 동안에, 그 바른 길에서 벗어나 멸망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의 자유 선택으로, 자유의사로 여기에 왔다고 말합니다.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자만하십니까? 이것도 여러분이 주어진 것임을 알고 있습니까? 주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6:44)고 하십니다. 또 우리는 요한의 말에서,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효과적인 지배를 받기 때문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른다는 확고부동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라"고 한다(요일 3:9). 여기서는 굳은 지조가 효과적으로 견인지구(堅忍持久)의 의지를 낳는다고 단정하므로, 궤변가들이 몽상하는 중간적인 움직임 곧, 사람이 자유로 수락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하는 중간적인 움직임이 분명히 배제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11. 궁극적으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개별행동에 대한 보상이나 보충이 아니다

 

세상이 극악한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다면, 틀림없이 인내를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로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처음 은총을 받아들이는 동안은 각 사람의 공로에 따라서 인내심이 분배된다고 하는 이 오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멸시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나중의 이런 견해를 일소할 때에 처음의 견해 또한 자연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이중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처음 은총을 감사하며 그 은총을 합당하게 사용하는 데 대한 보상으로 선물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 외에도, 그 은총은 혼자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협력할 뿐이라고 첨부하기 때문이다.

처음 논점에 대하여, 우리는 마땅히 다음과 같이 믿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 종들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기쁘고 좋은 것으로 보시기 때문에 그 일을 더 큰 은총을 더하여 계속할 만한 것으로 보셔서, 매일 새로운 은총의 선물을 쌓아 올려 그들을 풍성하게 만드시는 것이라고. "무릇 있는 자는 받게 되리라"(25:29; 19:26)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25:21,23; 19:17)는 말씀이 그와 같은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두 가지 점을 경계해야 한다. 첫째로, 처음 은총을 합당하게 사용한 데 대한 상급으로 나중의 은총들을 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의 노력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이 효과를 나타내게 만든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상급을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안 된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 먼저 받은 은총을 선용할수록 뒤에 따르는 은총이 더욱 많다는 이 축복이다. 그러나 이 선용하는 것 역시 주님께로부터 오는 일이며, 상급은 하나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은혜에서 오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하는 은총과 협력하는 은총이라는 케케묵은 구별을 그릇되고 부당하게 악용한다. 물론 어거스틴도 이러한 구별을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역사로 시작하신 일을 협력으로 완성하신다고 아주 적절한 정의로 완화시켰다. 그것은 같은 은총이지만 그 효과의 모습이 다른 데 따라 이름이 달라졌다.

따라서 그는 은총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누어 쌍방의 행동이 일일이 서로 합치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은총이 점점 더하여진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그가 다른 곳에서, 사람의 선한 의지보다 하나님의 많은 은사가 먼저 있고 사람의 선한 의지도 그 은사의 하나라고 말한 것은 이 문제와 관련돼 있다. 따라서 의지가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 것은 전연 없는 것이다. 이 점을 바울도 분명하게 말했다. 그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한 다음,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13) 이 두 가지 일을 하신다고 첨부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은 거저 주신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대부분 우리가 처음 은총을 받은 후에는 우리 자신의 노력이 그 뒤에 오는 은총과 협력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내가 대답을 한다면 그들이 주님의 권능으로 일단 의에 복종하게 된 다음부터 우리는 자기의 힘으로 전진하며 은총이 하는 일을 따르는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하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의 은총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그 은총을 따르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준비 태세는 어디에서 오는가? 어느 곳에서나 시종 일관하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처음에 복종하는 심성을 만드시고, 다음에 그것을 함양하며 그 지조를 더욱 강화시켜 인내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그들의 주장이 사람에게는 동료로서 하나님의 은총과 협력할 고유의 힘이 있다는 뜻이라면 그들은 가장 가련한 망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12. 인간은 단 하나의 선행도 하나님의 은혜와 무관하게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 없다

 

무지한 그들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자기들의 뜻에 맞도록 곡해한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이 발언을, 자신을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낫다고 말하면 너무 교만하게 보일 것 같았기에 바울은 그 공로를 하나님의 은총에 돌림으로써 자기의 발언을 수정했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그 수정 내용을 보면, 자기를 은총 안에서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라고 불렀다는 것이었다. 다른 점에서는 훌륭한 사람들이 이 어렵지 않은 문제에 많이 걸려 넘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도는 주의 은총이 자기와 함께 수고해서 자기를 동역자로 만들었다고 쓴 것이 아니라. 수고한 공로를 전부 은총에만 돌리는 의미에서 이 수정을 한 것이다. "수고한 것은 내가 아니요 나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모호한 표현 때문에 그들은 속았고, 특히 라틴어 번역이 졸렬해서 헬라어 관사의 표현력을 잃어버렸다, 만일 축자적으로 번역한다면, 그는 은총이 자기의 동역자였다고 말하지 않고 그에게 있는 은총이 모든 것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이 점을 분명하게 그러나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사람의 선한 의지가 하나님의 은사보다 앞서는 때가 많지마는 모든 은사보다 앞서는 것은 아니다. 앞서는 그 의지 자체도 그런 은사의 하나이다. 그 이유는 성경에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59:10, 참조, 58:11), "그의 인자하심이 나를 정녕 따르리니"(23:6)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는 사람이 원하게 되도록 은총이 그를 앞지르며, 원하는 사람의 소원이 헛되지 않도록 그의 뒤를 따른다. 베르나르두스도 어거스틴과 같은 생각으로 교회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제가 아무리 싫다 하더라도 저를 이끌어 원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걸음이 느린 저를 이끌어 달리게 만드소서"

 

13. 어거스틴은 또한 인간의 의지가 독자적으로 활동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현대의 펠라기우스파, , 소르본느의 궤변가들이 고대인 전체가 우리를 반대한다고 하는 그들의 상투적인 주장을 하지 못하도록, 어거스틴의 말을 직접 들어보기로 하겠다. 우리에게 대한 이런 비난은 그들의 조상 펠라기우스를 모방한 것임이 분명하다. 어거스틴 자신도 펠라기우스 때문에 같은 처지에 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내가 여기서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면서 간단히 언급하려는 것을 그는 발렌티누스에게 보내는 책망과 관용이라는 글에서 더욱 자세히 논술한다. "만일 아담이 선행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면 그는 그렇게 행할 은총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원하고 소원할 수 있는 힘이 주어졌다. 처음의 자유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였으나, 우리의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는 더 큰 자유다." 롬바르드는 이것을 사람이 영원불멸을 얻은 후에 있을 완전성에 대해서 어거스틴이 말한 것이라고 잘못된 해석을 했지만, 어거스틴 자신은 이런 생각을 막기 위해서 조금 뒤에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의혹을 제거해 준다. "확실히 성도들의 의지는 성령의 큰 감동을 받아서 나타나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렇게 결심하게 만드시기 때문에 그들은 결심한다. 그런데 그들이 심히 약한 가운데서도 의기 충천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자(고후 12:9). 만일 그렇게 심히 약한 그들의 의지를 그 자체의 힘에 맡겨서, 만일 결심한다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능력을 얻으라고 버려두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결심하게 되도록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렇게 될 때에 그들의 약한 의지는 그 많은 시험에 굴복하고, 따라서 뜻을 관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약한 의지에 도움을 주시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동요하거나 분리됨 없이 전진하게 하시며, 따라서 아무리 약할지라도 지치지 않게 하시는 것이다." 그는 그 다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향에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반응하는가를 자세히 논한다. 참으로 그는 주께서 사람들 자신의 의지를 써서 그들을 이끄시지만, 그들의 의지는 이미 하나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특별히 원하는 증언을 어거스틴으로부터 들어보도록 하자. ,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받거나 거절하거나 자유로 선택하도록 은총을 제시하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그 선택과 결심을 다 만들어내는 것도 바로 이 은총이며, 그래서 거기에 따르는 선행은 은총의 결과와 결실이다. 그리고 은총에 복종하는 의지는 은총이 만들어낸 의지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우리의 모든 선행을 실현하는 것은 은총뿐이다"라고 말했다.

 

14.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는 전적으로 은혜에 의존시킨다

 

다른 곳에서 그는 은총은 의지를 빼앗지 않고, 악한 의지를 선하게 변화시키며, 선한 의지를 돕는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은 마음의 움직임이 없이 외부의 힘에 의해서 끌려가듯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감동을 받아 진심으로 복종한다는 것이다. 은총은 선택된 사람들에게 특별히 그리고 거저 주신다는 뜻을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보니파티우스에게 써 보냈다.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은총을 주신 사람들에게는 행위의 가치에 따라서나 의지의 가치에 따라서 주신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 주신 것입니다. 은총을 주시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 때문에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같은 편지에서, 사람이 처음 은총을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그 공로에 대해서 다시 은총을 더 주시는 것이라는 생각을 그는 강경히 논박한다. 그는 우리의 행동은 일일이 은총이 필요하며, 은총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며, 그래야만 은총이 참으로 은총이 된다는 것을 펠라기우스가 인정하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가 발렌티누스에게 보내는 책망과 관용이라는 책 제8장에서 한 말보다 더 간단히는 요약할 수 없다. 거기서 어거스틴은 우선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에 의해서 은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해서 자유를 얻는다. 같은 그 은총에 의해서 기쁨을 받으면 사람의 의지는 지속하게 되며, 불굴의 용기로 강화되며, 은총의 지배를 받는 동안은 결코 멸망하지 않지만, 은총에게 버림을 받으며 즉시 패망한다. 주의 거저 주시는 자비에 의해서 선으로 전향하며, 일단 전향하면 끝까지 선에 머무른다. 사람의 의지가 선을 향하게 되는 것과 방향이 정해진 후에 선에 머무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린 일이며, 사람의 어떤 공로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 자유 의지라고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의지는 하나님께로 전향하거나 하나님 안에 머무를 수 없으며, 의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은총에 의해서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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