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
맨 처음 율법 하에서 조상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 다음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제 1 장 아담의 타락과 반항으로 전 인류가 저주에 떨어지고 그 원상태가 부패하였다 : 원죄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 맨 처음 율법 하에서 조상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 다음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참으로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알면 자기 자만이 없어진다. 1-3)
1. 자아에 대한 그릇된 지식과 바른 지식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옛날 격언이 역설한 것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사에 대한 모든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수치라고 한다면,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필요한 일들을 결정할 때 비참하게도 자기기만에 빠지고 심지어는 눈뜬 소경이 된다는 것은 더욱이 혐오스런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 교훈은 정말로 귀중한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를 더 이상 악용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어떤 철학자들은 이것을 악용하여, 자기 자신을 알라고 권하면서 자기의 가치와 우수성을 아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을 허망한 자신과 자만을 부풀게 만드는 것만을 자기 속에서 관찰하기를 바란다(창 1:27).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첫째로 창조시에 우리가 무엇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관대한 호의를 계속하시는가를 생각하는 데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선천적인 우수성이 원래의 상태를 유지했더라면 얼마나 위대했을까를 아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것이 조금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묵인 하에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아담의 타락 이후에 불행하게 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일을 알 때에 우리의 모든 자랑과 자기 확신이 사라지게 되며 우리는 진심으로 겸손하게 되고 수치심으로 위축될 것이다. 태초에 자기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창 1:27) 우리의 마음속에 선에 대한 열의와 영생에 대한 명상을 넣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수(野獸)와 구별하는 인류의 위대한 고귀성이 우리의 우둔함과 미련으로 인하여 매몰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성과 이해력을 부여 받은 것을 감사하고, 거룩하고 정직한 생활을 함으로써 궁극적 목표인 복된 영생을 향하여 매진해야 한다.
그러나 최초의 우수성을 생각할 때, 반드시 그것과 대조되는 우리의 추악하고 부끄러운 상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사람과 함께 우리는 원상태에서 타락한 것이다. 이 일이 근원이 되어 우리 자신에 대한 중오심과 불쾌감, 그리고 동시에 진정한 겸손이 생기며, 이로 인하여 우리가 완전히 잃어버린 선을 각자가 하나님 안에서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겠다는 새로운 열정의 불길이 일어난다.
2. 인간의 본성은 천성적으로 거짓된 자기도취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자신을 반성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서 자기의 능력을 믿는 모든 것들 빼앗으며 자랑할 만한 모든 것들을 빼앗고, 우리를 순종으로 인도하는 지식을 구하라고 요구한다. 지혜와 행동의 진정한 목표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원칙을 지켜야 한다. 수치심으로 우리를 위축시킬 수밖에 없는 우리의 비참한 빈곤과 수치심을 생각하기보다는 우리의 선한 특징들을 생각하게 하는 원칙이 얼마나 유쾌한 것인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사실 사람의 본성은 다른 사람에게 아첨을 받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없다. 따라서 자신의 천성이 높이 평가되는 것을 알 때에 사람들은 자기의 천성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으며, 사람들은 이 점에서 대개 씻을 수 없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맹목적인 자애(自愛)는 모든 인간의 천성이므로, 자기들의 천성에는 가증하다고 여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사람들은 가장 자연스럽게 믿어 버린다. 따라서 사람은 선하고 복된 생활을 할 풍부한 능력을 타고 났다는, 이 완전히 허망된 견해가 아무 외부의 지지가 없어도 일반적으로 자기 스스로 신뢰를 얻는다. 비록 비교적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하나님께도 조금은 양보를 해서 만사를 자기의 공로라고 하지 않는 듯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공로를 분배한 결과에는 자랑과 과신의 근거가 여전히 그들 자신에게 있게 된다.
사람은 자존심이 골수에 박혀 있으며,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매혹적 언행을 가장 기뻐한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반 대중 앞에서 인간성을 가장 듣기 좋은 말로 찬양한 사람의 말을 사람들은 듣기를 좋아하고 그에게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를 만족하게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인간의 우수성에 대한 이런 예찬이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그것은 자기도취 이외의 아무 성과도 없으며 참으로 거기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속여 결과적으로 철저한 파멸로 몰아넣는다. 우리가 모든 허탄한 보장을 믿고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숙고하며 계획하고 시험하며 착수할 때에, 우리가 노력을 시작하자마자 건전한 이해력과 진정한 덕성이 우리 자신을 버리고 없어지며, 그래도 경솔한 돌진을 계속해서 드디어 멸망에 빠진다면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든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끝에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한 특징만을 생각하라고 하면서 우리를 만류하는 교사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자기 인식이 향상되지 못할 것이며, 도리어 최악의 깊은 무지 속으로 빠질 것이다.
3. 자기 인식에 대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주요 문제
그러므로, 지혜의 둘째 부분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라고 하는 인류의 공통된 판단과 하나님의 진리는 일치한다. 그러나 그 지식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상의 큰 차이가 있다. 육신적인 판단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주 잘 아는 것 같다. 사람은 자기의 이해력과 정직함만을 믿고, 담대하게 덕을 닦으려고 노력하며 모든 죄악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탁월하고 존귀한 경지를 향해서 정성껏 노력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을 표준으로 하여 자기를 세밀히 검토하는 사람은 결코 용기와 자신을 과신할 이유를 찾아 낼 수가 없다. 자기 성찰이 깊어 가면 갈수록 더욱 낙심하며, 드디어는 일체의 자신을 맡기고 인생을 바르게 지도해 줄 것이 자기에게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시조 아담에게 주시고 또 참으로 우리의 가슴에 의와 선을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킬 우리의 본래의 고귀성을 잊지 않기를 바라신다. 이는, 우리의 처음 상태나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영생을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식은 우리의 교만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만을 꺾고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그러면 최초란 무엇인가? 우리의 타락 이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의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의 무리와는 완전히 멀어진 상태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불행한 처지가 싫어 신음하며 신음 중에서도 저 잃어버린 고귀성을 사모한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안에서 기뻐할 원인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에게 믿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동의를 한다면, 이제 우리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기 인식을 분류해 보자. 첫째로, 자기가 창조되며 귀한 천품을 받은 것은 무슨 목적이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 지식에 힘입어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내세 생명에 대하여 명상할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둘째로, 자기의 재능을, 아니 재능의 부족함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 부족함을 알게 될 때에 사람들은 극도의 정신적 혼란으로 땅에 엎드릴 것이며, 끝내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될 것이다. 첫째 점을 고려하면 자기의 의무의 성격을 인식하게 되며, 둘째 점에서는 그 의무를 실천하려는 자기의 능력의 한도를 알게 된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교훈을 절차가 요구하는 대로 각각 논하겠다.
(담의 죄로 인간이 최초에 하나님께 받은 것을 상실하였고 전 인류 파멸을 가져왔다. 4-7)
4. 타락의 역사는 죄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창3장) : 믿음이 없음
하나님께서 엄한 벌을 주신 죄는 가벼운 것이 아니라 흉악한 범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인류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벌을 야기시킨 아담의 이탈에는 어떤 종류의 죄가 있었는가를 생각해야한다. 아담의 죄를 탐욕에 의한 무절제라고 하는 일반적인 생각은 유치하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과실을 먹지 않는 데 최고의 미덕이 있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것과 같다. 그때의 축복받은 그 기름진 땅에는 여러 곳에 즐거움을 주는 것들로 풍성했고 또한 풍성했을 뿐만 아니라 즐길 수 있는 종류도 굉장히 많았을 텐데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깊이 고찰하여야 한다. 아담의 복종심을 시험하기 위해, 그리고 아담에게 자신이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 아래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었다. 나무의 이름만 보더라도, 그 하나님 명령의 유일한 목적은 그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악한 정욕으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동안은 영생을 바랄 수 있다고 한 약속과 그와는 반대로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맛보기만 하면 죽음이 있으리라고 한 무서운 경고가 그의 믿음을 시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으로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단정은 옳다. 사람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바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태초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가 기록한 유혹의 성격에서 보다 완전한 정의를 얻어야 한다. 부정한 생각이 있었기에 여자는 뱀에게 속아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다. 그러므로 불순종이 타락의 시초였다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다. 바울도 이 점을 확인하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가르친다(롬 5:19).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목해야 할 점은 처음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 반역한 것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빠졌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진실을 무시하고 허위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경외심을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으려 하지 않으면 그의 존엄 또한 우리 사이에 거하시지 않을 것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경배도 여전히 완전하게 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불순종이 타락의 근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 야심과 교만이 배은망덕과 함께 생겨났으니, 아담은 받은 것 이상을 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신 그 위대하고 풍성한 은혜를 파렴치하게 경멸했기 때문이다. 흙의 아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도 또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지 않는 것을 사소한 일로 보았으니 이 얼마나 해괴하고 흉악한 태도였는가! 사람이 자기를 만드신 이의 권위를 멀리하는, 아니 오만하게 자기의 멍에를 벗어버리는 그 변절이 추악하고 가증한 죄라면, 아담의 죄를 관대히 보려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단순한 변절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비루한 결단과 결합한 것이었다.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탄이 하나님을 중상모략하여 하나님에게 허위와 시기와 악의가 있다고 한 데 찬동한 것이다. 끝으로, 배신으로 인하여 야심이 생겼으며 야심은 참으로 완강한 불순종의 모태가 되었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버린 사람은 정욕이 이끄는 대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그 때에 사탄에게 귀를 열어 주었기 때문에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참조, 렘 9:21), 오늘날 우리가 같은 창문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 앞에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는 버나드의 가르침은 옳다. 왜냐하면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감히 하나님의 권위에도 결코 거역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모든 정욕을 억제하는 가장 좋은 굴레는 다른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의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종은 일이라는 생각과 행복한 생활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러한 좋은 굴레가 된다. 그러므로 아담은 악마의 모독적 언사에 휘말려 한껏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소멸시킨 것이다.
5. 제일 첫 번째의 죄가 원죄이다
아담이 그의 창조주와 연결되어 있던 것이 그에게 영적 생명이 되었던 것과 같이, 창조주에게서 멀어진 것은 곧 영혼의 죽음을 말한다. 아담이 하늘과 땅의 전체적인 자연 질서에 위배했을 때, 그 반역으로 인해서 인류를 파멸에 다다르게 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롬 8:22)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한다(롬 8:20). 원인을 찾는다면, 사람이 사용하기 위해서 창조된 피조물은 확실히 사람이 받을 벌의 일부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전체에 편만한 저주는 아담의 죄에서 흘러 퍼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퍼지더라도 불합리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저 하늘 형상이 그에게서 없어진 후에 이 벌-처음에 그를 훌륭하게 장식했던 지혜와 힘과 성결과 진실과 공의가 없어지고 그 대신에 무지와 무력과 불결과 허영과 불의 등의 가장 추악한 병들이 생겨난 벌-을 받은 것은 그 사람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후손까지도 끌어넣어 같은 불행에 잠기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물려받은 부패이며, 이것을 교부들은 "원죄"라고 불렀다. 여기서의 "죄"라는 말은 본래의 선하고 순수했던 본성을 잃어 버렸다는 뜻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많은 분쟁이 있었다. 한 사람의 죄책으로 모든 사람이 그 죄책을 맡게 되어 죄가 보편적인 것이 된다는 것은 상식과 가장 거리가 먼일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 문제에 대한 초대 교부들의 언급이 모호한 원인이었던 듯하다. 적어도 그들의 설명은 충분한 설명이 부족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Pelagius)는 겁내지 않고, 아담의 죄는 그 자신의 손실을 초래했을 뿐 후손은 해하지 않았다는 모독적인 망상을 들고 나섰다. 사탄은 이 궤변을 가지고 이 질병을 덮어 가리워서 고칠 수 없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처음 사람으로부터 그의 모든 후손에게 죄가 전달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증언에 의해서 증명되자(롬 5:12), 펠라기우스는 그 전달은 모방에 의한 것이지 번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그러므로 선한 분들이(그 중에서도 특히 어거스틴이) 우리는 외부에서 나타난 사악으로 인해서 부패한 것이 아니라 모태로부터 타고난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이점을 부인한다는 것은 지극히 파렴치한 짓이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와 카엘레스티우스(Caelestius)외 무리가 모든 다른 점에서 파렴치한 짐승들이었다는 것을 저 거룩한 분의 경고에서 깨닫는 사람은 그들의 무모한 태도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은(시 51:5)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그는 자기의 부모의 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인애를 더욱 칭송하기 위해서, 자기는 잉태된 때부터 악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에게만 있는 일이 아님이 분명하며, 따라서 그는 인류의 공통된 처지를 대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순종한 씨의 후손인 우리는 날 때부터 죄에 전염되어 있는 것이다. 진실로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을 보기 전에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웠고 오염이 많았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욥기서에서 말하고 있다(욥 14:4).
6. 원죄는 모방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부모의 불결이 자녀들에게 전달되어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출생할 때부터 이미 오염되어 있다는 말을 우리는 듣는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 조상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원천을 찾지 않는다면 이 오염의 시초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담은 시조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성의 뿌리였으며 따라서 그가 부패한 때에 인류가 당연히 부패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해서 이점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9).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이 우리에게 회복되었다(롬 5:17). 이런 관점에서 펠라기우스파들은 어떤 어리석은 주장을 할 것인가? 아담의 죄가 모방에 의해서 전파되었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혜택을 주는 것도 그 의가 우리 앞에 모범을 보이고 우리가 그것을 모방하기 때문인가? 누가 이런 모독을 참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와 그에 따른 그의 생명이 전달 또는 나누어져서 우리 것이 된다는 것이 논의할 여지가 없는 일이라면, 의와 생명은 아담에게서 상실되어 졌다가 그리스도에게서 회복된다는 결론이 따른다. 또 죄와 죽음은 아담을 통해서 은밀히 들어왔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없어진다는 결론이 따른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다"는 말은(롬 5:19) 결코 모호한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보면, 아담은 우리를 자기의 멸망에 끌어넣어 자기와 함께 멸망하게 만들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은총으로 우리를 다시 구원해 주신다.
이렇게 진리의 빛이 투명하기 때문에, 이제 나는 더 이상의 길고 자세한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부활에 대한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고자, 아담 안에서 잃어진 생명이 그리스도안에서 회복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전 15:22). 그는 우리가 모두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선언함으로써 동시에 우리가 죄의 병에 전염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불의의 책임이 없는 사람에게 정죄가 미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려는 뜻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 발언의 다른 부분으로, 거기에서 그는 생명을 얻을 희망이 그리스도에게서 회복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일이 나타나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의 의의 능력을 부어 주시는 그 놀라운 교제뿐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른 곳에서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롬 8:10). 따라서 "우리는 아담과 함께 죽었다"라고 하는 말은 해석할 길이 하나밖에 없다. 즉, 아담은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이 불행과 멸망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성까지도 같은 파멸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의 죄책 때문이 아니라 그의 죄책은 우리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며 그가 빠진 그 부패를 모든 후손에게 감염시켰기 때문이다.
바울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한 것은(엡 2:3), 모든 사람이 이미 모태에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면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바울이 "본질"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대로가 아니라 분명히 아담에게서 부패한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죽음의 창시자라고 하는 것은 가장 부당한 생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를 부패시키고 그것이 모든 후손에게까지 감염되고 만연된 것이다. 우리의 하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악하고 타락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 3:6), 따라서 사람이 거듭나기까지는 모두 그 앞에 생명의 문이 닫혀 있다고 하신다(요 3:5).
7.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되는 죄
오염은 주로 영혼에 있는 것이므로, 자식의 영혼은 아버지의 영혼에서 유전된 것이냐고 하는 문제는 무척이나 교부들을 괴롭혔는데, 이 문제를 이해하려고 애써 논의할 필요는 없다. 주께서 인간성에 부여하시고자 하신 은사들을 아담에게 위탁하셨다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 따라서 야담이 그 받은 은사들을 잃었을 때에, 자신만이 잃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잃어버리게 한 것이다. 아담이 잃어버린 은사는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받은 것이며, 그 은사는 한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 주셨다는 말을 들을 때에 누가 영혼의 전이에 대해서 의심할 것인가? 그러므로 아담이 타락했을 때에 인간성이 벌거숭이가 되고 빈궁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나, 아담이 죄에 전염되었을 때에 감염이 인간성에 잠입했다고 하는 것은 조금도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다. 썩은 뿌리에서 썩은 큰 가지가 나왔으며 여기서 나온 작은 가지에 부패가 전달되었다. 이와 같이 부모에게서 자녀가 부패했고 자녀는 다시 그 후손에게 대대로 병을 옮겨 주었다. 바꿔 말하면, 아담에게서 시작한 부패는 선조로부터 후손에게 전달되어 끊임없이 흘러간 것이다. 전염은 육이나 영혼의 본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전염은 처음 사람이 자신뿐만 아니라 동시에 후손을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천품을 가지며 또 잃어버리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다.
자녀는 부모의 순결에 의해서 거룩하게 될 것이므로(참조, 고전 7:14), 경건한 부모에게서 자녀가 부패를 이어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펠라기우스파는 말한다. 그러나 이 궤변에 대한 논박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녀는 부모의 영적 중생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육적 번식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과 같이, 죄 있는 불신자든 죄 없는 신자든 사람은 썩은 본성에서 자녀를 낳기 때문에 무죄한 자녀가 아니라 유죄한 자녀를 낳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어느 정도 부모의 성결에 참여한다는 것은 특별한 축복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받은 보편적 저주가 먼저 있었다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죄책은 자연에서 오고 성결은 초자연적 은총에서 오기 때문이다.
(원죄는 본질이 타락한 것이며 벌을 받아야 하지만 창조된 본질에서 온 것은 아니다. 8-11)
8. 원죄의 본질
불확실한 일,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원죄의 정의를 내려 보도록 하자. 나는 여러 저술가들이 제시한 여러 가지 정의들을 연구하려 하지 않고, 다만 내가 보기에 가장 진리에 맞는 듯한 것만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원죄는 우리의 본성의 유전적 타락과 부패인 것 같으며 영혼의 모든 부분에 만연되어 첫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만들고, 다음에는 성경에 "육체의 일"(갈 5:19)이라고 한 행위를 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울이 자주 죄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에서 나오는 행위, 예컨대 간음, 우상 숭배, 도둑질, 미움, 살인, 열락 등을 그는 "죄의 열매"(갈 5:19-21)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런 행위를 보통 "죄들"이라고 부르며, 바울 역시 그렇게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분명히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의 본성은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패하였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의와 결백과 순결 외에는 어느 것도 용납하시지 않는 하나님께 당연한 정죄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의 범행으로 인하여 받는 책임이 아니다. 우리가 아담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죄 없고 책임 없는 우리가 아담의죄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가 그 저주에 함께 말려들었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죄책이 있게 만들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으로 인한 심판이 우리에게 왔으며, 또한 그가 전염시킨 것이 우리 안에 있어서 이것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어거스틴은 죄가 유전에 의하여 우리 사이에 전파된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알리기 위해 죄를 자주 "타인의 죄"라고 부르지만 동시에 죄는 각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사도 바울도 가장 명쾌하게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증언한다(롬 5:12). 즉, 그들은 원죄에 빠져 쌓였고 그 오점들로 더럽혀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젖먹이들까지도 모태에서부터 저주를 받았지만 그 책임은 다른 사람의 허물이 아니라 자기의 허물에 있는 것이다. 아직은 그들에게서 불의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불의의 씨는 그들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의 본성 전체는 죄의 하나의 씨앗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죄로 인정된다는 결론이 된다. 허물이 없으면 처벌도 없을 것이다.
둘째, 이 부패는 우리 안에서 없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열매-이미 앞에서 언급된 육의 일을 하는-를 맺는데, 이는 마치 뜨거운 용광로에서 불꽃과 불똥이 튀어나오며 샘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시초의 의의 결핍"을 원죄라고 정의하는 사람들은 이 용어의 의미를 전적으로 이 정의에 포함시키지만 그 위력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은 선이 결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결코 그냥 있도록 놔두지 않는 각종 악을 생산할 능력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원죄를 "육욕"이라고 말한 사람들은 적절한 단어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사람에게 있는 것은 이해력으로부터 의지에 이르기까지 또 영혼으로부터 육체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육욕으로 더럽혀지고 가득 차 있다고 하는 것보다 전적으로 인간은 육욕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첨부하는 경우에 그러하다.
9. 죄는 전 인류를 전복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이 의의 원천을 버린 후에 죄가 영혼의 모든 부분을 점령했다고 나는 말한다. 저속한 욕망이 그를 유혹했으며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불신앙이 바른 지성의 보루를 점령했고 교만이 마음속 깊은 밑바닥에까지 침투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나타나는 부패를 소위 감각적 충동에 국한시키는 것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또는 그 부패를 "불쏘시개"라고 부르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감성" 부분만을 유인 선동해서 죄에 끌어넣는다고 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는 완전한 무지를 폭로했다. 그는 부패가 있는 자리를 찾아내는 데 있어서 바울이 증언하는 것과 같이 육에 있다고 말하면서 육의 본성에 고유한 것이 아니고 육에서 더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바울이 영혼의 본성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만이 초자연적 은총에 반대한다고 가르쳤다는 말과 같다. 바울은 부패는 영혼의 일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는 치명적인 들지 않은 순결한 부분은 없다고 가르치면서, 이 점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는 부패한 본성을 논할 때에, 눈에 보이는 욕망의 과도한 충동을 비난한 뿐만 아니라 특히 지성의 눈이 멀고 마음이 썩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로마서 3장은 단지 원죄에 대한 것을 나타나게 한 것에 불과하다(1-20절). "새롭게 함"에서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영은 옛 사람과 육에 반대하며, 영혼의 저속한 감성적 부분을 시정하는 은총을 표시할 뿐 아니라 모든 부활의 완전한 개혁을 포함한다. 따라서 바울은 동물적 욕망을 없애라고만 명령하지 않고 거기에 더하여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고 요구한다(엡 4:23). 다른 곳에서도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같은 권고를 한다(롬 12:2). 그러므로 영혼의 탁월함과 존귀성이 특히 빛나는 부분이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심히 부패하기까지 해서 치유를 받으며 새로운 본성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된다. 우리는 죄가 어느 정도로 지성과 심정을 모두 점령했는가를 곧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인간 전체가 마치 홍수를 만난 듯이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압도되어 죄를 면한 부분은 하나도 없으며 사람에게서 출발하는 것은 모두 죄로 돌려 받아야 한다는 것만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바울의 말과 같이, 육으로 향하는 생각은 모두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롬 8:7), 따라서 사망인 것이다(롬 8:6).
10. 죄는 우리의 천성이 아니고 우리의 천성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인간은 본성이 악하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자기들의 허물에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은 물러가도록 하라. 아담의 상하지 않고 부패하지 않은 본성에서 하나님의 작품을 찾아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의 부패속에서 그것을 찾고 있다. 우리의 멸망은 하나님이 원인이 아니라 우리의 육의 죄책이 그 원인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처음 상태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미리 예방하셨다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더 잘 마련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서 불평해서는 안 된다. 이런 반론은 뚜렷한 지나친 호기심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경건한 사람은 멀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점은 후에 적당한 곳에서 논하게 될 예정의 비밀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멸망한 원인을 본성이 타락한 데 돌리는 것을 잊지 말고 본성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그 분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이 치명적 상처가 본성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상처가 외부로부터 온 것인가 또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죄로 인하여 상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 이외의 것에 불평을 돌릴 이유가 없다. 성경은 이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했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 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라고 전도서는 말하고 있다(전 7:29). 분명히 인간의 멸망은 그 책임을 인간에게만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를 얻었음에도 어리석은 인간은 허무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1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성"의 "자연적인" 부패
그러므로 인간은 선천적으로 타락했으며 부패했지만 본성에서 타락이 유래 된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우리는 그 타락이 본성에서 흘러 온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유래 된 첨가된 성질이라는 것을 가리키려고 한다. "선천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타락이 거의 상속권과 같이 모든 사람을 속박하고 있으므로 악행에 의해서 얻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근거가 없지 않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바울은 말한다(엡 2:3). 자기가 지으신 가장 작은 것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고귀한 피조물을 적대시하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자체가 아니라 피조물의 부패를 미워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다고 하는 주장이 올바른 것이라면, 사람은 선천적으로 타락했으며 결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 관련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없는 곳에서 우리의 육을 필연적으로 지배하는 죄들을 "선천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니교도들의 어리석고 경박한 생각은 소멸된다. 그들은 사람에게 약한 본질이 있다고 상상하면서, 악의 원인과 시초를 의로우신 하나님께 돌린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 목적으로 인간을 위하여 감히 다른 조물주를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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