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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1권.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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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장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보존하시며 섭리로써 그 모든 부분을 다스리신다

 

(철학자들의 의견과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주장된다. 1-4)

 

1. 창조와 섭리는 분리될 수 없다.

 

더욱이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단번에 완성하신 순간적인 창조주로 삼는다는 것은 차디찬, 그리고 무미건조한 사상이다. 그리고 우주가 처음 시작될 때와 다름없이 그 후 영속적인 상태에 있어서도 똑같이 하나님의 권능이 빛나고 있음을 우리가 안다는 점에서 우리는 망령된 이교도들과 달라야 한다. 비록 경건치 못한 자들의 마음도 천지를 관찰할 때 창조주에게 그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게 되지만, 그러나 신앙은 그 자체의 특수한 방법으로 창조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하나님께 둔다.

우리가 앞에서 인용한 사도의 주장,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11:3)라는 말씀은 바로 여기에 속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면 아무리 마음으로 이해하고 말로 고백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창조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에 일단 마주치게 될 때에 거기에 그대로 멈추게 된다. 기껏해야 그러한 일을 이룩하신 창조주의 지혜, 권능, 선을 판단하며 정관 할뿐이다(이것들은 이미 명백한 자명한 진리이며 원하지 않는 자들까지도 그렇게 하도록 한다). 더욱이 육신의 생각은, 보존하며 조정하는 어떤 일반적인 활동이 있는데 여기에서 운동의 힘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육신의 생각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힘이 있으며 이것은 만물을 유지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은 이보다 훨씬 더 안으로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시라는 것을 발견한 즉시 그가 만물의 통치자요 보호자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보편적인 운동에 의하여 천체와 그 각 부분을 운행하시며,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드신 만물은 하찮은 참새 한 마리까지도 유지하시고 양육하시며 보호하시는 통치자요 보존자이신 것이다(10:29). 그리하여 다윗은 우주가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고 간단히 진술한 후에, 즉시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33:6)라고 섭리의 영속적인 과정을 기술하였다. 곧 이어 그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33:13)라는 말씀을 추가하였으며, 그 뒤에도 이와 똑같은 의미의 말씀이 따른다. 모든 사람이 그처럼 명확하게 판단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만일 하나님께서 우주의 창조주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인간사를 돌보신다는 것은 믿지 못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돌보신다는 확신이 없이는 우주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을 아무도 신중히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이 가장 좋은 순서에 따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우리를 인도한 것은 타당하다 하겠다. 일반적으로 우주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은밀한 영감으로 생기를 얻는다고 철학자들은 가르치며 인간의 마음도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저들은 다윗이 모든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도달한 곳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 ,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 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104:27-30). 실로 저들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17:28)고 한 바울의 진술에 동의한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바울이 주장하는 은총에 대한 진지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저들은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인 사랑을 알게 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돌보심을 조금도 맛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운명이나 우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차이점을 보다 더 명백히 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의 가르치는 데로 하나님의 섭리는 운명이나 우연한 사건과는 정반대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세상만사가 우연히 발생한다는 견해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공통적인 신념으로 되어 왔으며, 오늘날 역시 모든 사람들은 그와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부패한 견해로 말미암아 섭리에 대하여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확실히 흐려졌으며 뿐만 아니라 거의 매몰되다시피 되었다. 사람이 강도나 짐승을 만났다고 하자. 바다에서 갑작스런 강풍을 만나 파선을 당했다고 하자. 집이나 나무가 넘어져 압사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광야를 방황하다가 굶주림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자. 파도에 밀려 표류하던 중 마침내는 항구에 다달아 아슬아슬하게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했다고 하자. 인간의 이성은 이 모든 사건들을 그것이 번영이든 불행이든 모두 운명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10:30)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은 자라면 누구나 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 원인을 볼 것이며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에 따라 만사가 지배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생물들은 각각 본래 자신의 특성을 부여받았다고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현재의 손으로 지배되지 않는 한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효력을 계속 부어 주시는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에 따라 그것들을 이런 일 저런 일에 적절하게 사용하신다.

태양의 힘보다 더 놀랍고 더 빛나는 힘을 가진 피조물은 없다. 태양은 그 빛으로 온 지구를 비출 뿐만 아니라 그 열로 모든 생물을 양육하고 소생시키니 이 얼마나 위대한가? 그 광선으로는 땅에 풍요함을 불어넣지 않는가? 태양은 땅에 있는 씨앗들을 따뜻하게 하고 그것들이 파랗게 싹트게 하며 그것들을 키우고 강하게 하고 또한 신선한 자양분을 공급하여 마침내는 줄기를 일게 하지 않는가? 태양은 식물에 계속 따뜻한 온기를 공급하여 꽃을 피우고 다시 꽃에서 열매를 맺게 하며, 그 다음 뜨거운 열로 열매를 무르익게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수목이나 포도나무도 태양의 따뜻한 열로써 처음에는 싹을 틔우고 잎사귀를 내며, 다음으로는 꽃을, 그리고 이 꽃에서 다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위한 전적인 영광을 요구하시기 위해, 태양을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빛이 있게 하시고 땅이 각종 풀과 과실로 충만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1:3,11,14).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태양의 창조 이전에 존재한 것들의 원리 혹은 필연적 원인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태양 없이도 스스로 일하시는 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으셨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기도할 때 태양이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과(10:13), 히스기야 왕을 위해서 태양의 그림자가 십도 물러갔다는 것을(왕하 20:11; 38:8) 우리는 성경에서 읽게 된다. 그런데 이 몇 가지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태양의 매일의 출몰은 자연의 맹목적인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자신의 부성적인 은총을 새로이 기억할 수 있도록 태양의 운행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입증하셨다.

겨울이 지나면 봄으로, 봄 뒤에는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그러나 이 계절의 순서에는 매우 커다란 그리고 한결같지 않은 다양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새롭고 특별한 섭리가 매년, 매월, 매일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3. 하나님의 섭리가 만사를 지배하신다

 

그리고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능을 주장하시는 동시에 이 전능을 우리가 인식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전능이란, 궤변가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공허하고 게으르며 거의 무의식적인 그런 것이 아니라 주의 깊고 효과적이시며 활동적이시고 계속 일하시는 그런 전능을 말한다. 실로 전능은 한번 정해진 수로를 따라 흐르도록 강에게 명하는 그런 혼란한 운동의 일반적인 원리가 아니라 개개의 특수한 운동을 향해 작용하는 권능이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확실히 활동할 수 있으시되 때때로 일을 중단하시고 한가하게 앉아 있다든가 혹은 그가 이미 정해 놓은 자연의 질서를 일반적인 충동으로 계속 운행시키시기 때문이 아니라 천지를 섭리로 다스리시며 자기 뜻에 따르지 않고는 아무 것도 발생하지 못하도록 만물을 조정하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시편에는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115:3)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확실하고 계획된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말을 철학자들의 방법으로 해석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운동의 기원이요 원인이기 때문에 그를 제1동인(動因)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는 역경을 당했을 때 신자는,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통치가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일에 확대된다면 이를 자연의 영향 하에 둔다는 것은 유치한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실로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자연 법칙에 의하여 만물이 자유로운 과정에 따라 생성되도록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좁은 한계 내에 제한시키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영광을 박탈하는 것 못지않게 자기들에게서도 가장 유용한 교리를 빼앗아 버린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일 하늘, 공기, , 물 등의 운동에 예속되었다고 하면 아마 인간보다 더 비참한 존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각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선하심은 매우 무가치하게 약화될 것이다. 다윗은 아직 어머니의 젖을 먹는 어린아이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웅변으로 찬양하기에 충분하다고 외치고 있는데(8:2)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즉시 하나님의 돌보심에 따라 준비된 젖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떤 어머니의 젖은 풍부하나 어떤 어머니의 젖은 거의 말라 있다는 것은, 경험이 명백히 입증해 주는 것인 만큼 이것은 우리의 눈도, 우리의 감각도 피할 수 없는 일반적인 사실이다. 어떤 아기에게는 더 풍부하게 젖을 먹이시고, 어떤 아기를 위해서는 불충분하게 먹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바로 찬양하는 자들은 여기에서 두 가지 유익을 얻게 된다. 첫째, 하늘과 땅을 소유하시며 모든 피조물을 진심으로 순종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축복하시기에 풍부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점이다. 둘째, 유익은 저들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 안전하게 쉴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재난이 어디서 오든 그것들을 다 자신의 의지에 예속시키시고, 자신의 권위로 극도로 광포하고 또 온갖 장비를 갖춘 사탄을 억제하시며 우리의 안녕과 반대되는 것은 모두 그의 명령에 복종시키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위험을 만날 때마다 반복적으로 느끼는 억제할 수 없는 미신적인 공포는 다른 방법으로는 조정할 수도 진정시킬 수도 없다. 만일 우리가 피조물에게서 위협을 받으며 강한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마치 그 피조물에게 우리를 해칠 수 있는 어떤 고유한 힘이나 있는 것처럼, 혹은 그것들이 우연하게나마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처럼, 또는 하나님께는 그것들의 해로운 행위를 물리치고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무서워 떤다고 하면, 이것은 미신적으로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10:2)고 명하였다. 확실히 그는 모든 공포를 다 정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별들이 통치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행복과 불행은 별들의 결정과 징조에 달려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고 공상한다. 따라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한 분 하나님이 아니라 별이나 혜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신앙에서 피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 피조물에게는 기이한 힘, 기이한 활동, 기이한 운동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따라 모든 피조물은 지배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아시며 원하셔서 결정하시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섭리의 본질

 

그러면 첫째로, 섭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땅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하늘에서 팔짱만 끼고 지켜보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쇠의 관리자로서 모든 사건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독자들은 인식해야 한다. 이와 같이, 섭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눈 못지않게 그의 두 손에도 관련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에게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22:8)고 하였을 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장래의 일을 예지하신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난국과 당황케 하는 일을 언제나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그 미지의 사건에 관한 걱정을 맡기고자 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섭리는 행위로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단순한 예지에 대하여 크게 떠벌리는 것은 지나친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 하겠다. 내가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혼란되고 잡다한 통치로 보는 사람들의 오류는 그렇게 심하게 조잡하지는 않은 편이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운동에 의해서 천체와 그 각 부분을 회전시키시며 운행시키시되 피조물 하나하나의 활동을 특수하게 지도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도 용납될 수 없는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편적이라고 하는 이 섭리에는 모든 피조물이 우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나 인간이 그의 자유 선택에 따라 이쪽 혹은 저쪽으로 향하는 것을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없다고 그들은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음과 같은 구별을 지어 놓았다. , 하나님께서는 권능으로 인간에게 운동력을 불어넣어 주시고 이 운동력에 의해서 인간은 자신 안에 뿌리박고 있는 본성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계획에 따라 스스로의 행위를 조정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주와 인간사 그리고 인간 자신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스려지기는 하나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들 생각의 요점이다. 하나님은 게을러서 활동하시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에피큐로스 학파(이 질병은 항상 세계에 충분하다)와 이에 못지않게 어리석은 사람들, 곧 하나님은 공중의 상반부(上半部)는 다스리시고 그 하반부(下半部)는 운명에 맡긴다고 공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말하지 않겠다. 말 못하는 피조물들까지도 그 엄청난 광란에 대하여 충분히 부르짖고 있지 않는가?

 

("일반적" 섭리와 "특별" 섭리)

 

그러므로 이제 나는(거의 일반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견해를 반박하고자 하는데, 이 견해는 하나님을 일종의 맹목적이며 애매모호한 운동으로 인정할 뿐 하나님께서 무한한 지혜로 만물을 지도하시며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배치하시는 사실들을 그에게서 박탈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견해는 하나님을 이름만의 우주의 통치자일 뿐 실재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지배력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묻고 싶다. 지배한다는 것은 지휘하는 것들을 결정된 질서에 따라 권위로 지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그러나, 우주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제정하신 자연의 질서를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드신 피조물 하나하나를 특별히 돌보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이 인정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들이 말하는 일반 섭리에 대하여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겠다. 마치 만물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일단 결정하신 것은 저절로 운행되어 나가는 것처럼 여러 종류의 사물이 자연의 은밀한 충동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참고할 수 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17:28)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할 뜻으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1:3)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구실로 해서, 의심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확실하고 명백한 성격의 증거로 확증된 그 특별 섭리를 부당하게 가르치고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확실히 내가 말한바 있는 휘장으로 그 특별 섭리를 가리는 자들도, 많은 것들이 하나님의 특별 간섭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저들은 이것을 특수한 행동에만 잘못 국한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개개의 사건들을 조정하시며 이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결정된 계획서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연히 발생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성경이 입증하는 특별 섭리의 교리. 5-7)

 

5. 하나님의 섭리는 또한 개개의 사건들을 지도하신다

 

운동의 시작은 하나님께 있지만, 그러나 만사가 자연적 경향의 강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혹은 우연히 발생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낮과 밤, 겨울과 여름의 서로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그 각자에게 각각 일을 지정하시고 일정한 법칙을 제정해 주신 한, , 그것들이 순탄한 행로를 따라 계속 동일한 과정을 유지하여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한 달이 지나면 또 한 달이 오고, 한 해가 지나면 또 한 해가 오는 한, 하나님의 사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심한 무더위에 심한 가뭄이 겹쳐 땅의 농작물을 태워 버리며, 어떤 때에는 때 아닌 비로 곡식이 해를 입고 또한 우박과 폭풍우로 불의의 재난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으로는 생각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날씨의 맑고 흐림, 그리고 추위와 더위에 대하여 그 기원을 별들의 근접과 다른 자연적 원인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별문제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부성적인 사랑이나 심판을 표시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어떤 통상적인 힘을 넣어 주시고, 이것으로 인류에게 식물을 공급하신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인류에 대하여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매우 빈약하고 속된 허구이다. 이것은 마치 어느 해의 풍작이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아니며, 흉년이나 기근이 하나님의 저주와 복수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오류를 반박하기 위해 모든 논증을 수집한다는 것은 너무 지루한 일이니 하나님 자신의 권위로 만족하자. 하나님께서는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이슬과 비로 땅을 적실 때마다 자신의 은총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라고 거듭 말씀하셨으며(26:3-4; 11:13-14, 28:12), 또 그의 명령으로 하늘이 철과 같이 굳어지고(26:19), 곡식밭이 충해와 다른 재앙들로 손상을 입게 되며(28:22), 우박과 폭풍우로 전답이 해를 당할 때마다(28:2; 2:17) 이것들은 하나님의 확실하고 특수한 보응의 표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만일 이 사실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이 없이는 한 방울의 비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

실로 다윗은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147:9) 하나님의 일반 섭리를 찬양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근으로 동물을 위협하시기도 하는데, 이것은 모든 생물을 때로는 적게 먹이시고 때로는 더 많이 가장 좋아 보이는 음식으로 먹이신다는 것을 충분하게 선언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미 위에서 내가 말한 대로, 이것을 특별 행위에 국한시킨다는 것은 유치한 일이다.왜냐하면, 성부의 뜻이 아니면 보잘 것 없는 작은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10:29). 하나님께서 명확한 계획에 따라 새들을 날게 하시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마땅히 선지자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113:5-6)

 

6. 하나님의 섭리는 특히 인간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우주가 특별히 인류를 위하여 세워 졌음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도 역시 이 목적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10:23). 솔로몬도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20:24)라고 말하였다. 사람은 자신의 타고난 성향에 따라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되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인다고 그들로 말하게 하자.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면 그 길을 선택하는 자유는 인간 편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이 없이는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 이것을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와 솔로몬은 권능뿐만 아니라 선택과 결정을 모두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저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다른 곳에서 솔로몬은, 마치 하나님의 손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정하는 자들의 이 경솔함을 훌륭하게 책망하고 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16:1,9).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한 마디도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며 어리석은 일이다.

실로 성경은 하나님의 결정이 없이는 세상에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가장 운명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들도 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들면 부러지는 나뭇가지에 그 밑을 지나던 행인이 맞아 죽었다고 하자. 이보다 더 우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달리, 살해자의 손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21:13). 마찬가지로, 제비를 뽑을 때 맹목적인 운명에 맡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를 허락지 아니하시고, 그 제비의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다고 하신다. 조약돌을 무릎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거기에서 집어 올리는 것은 그들 각자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우연으로 돌려질 수 있는 것도 하나님 자신에게서 온다고 증언하셨다(16:33). 솔로몬은 이와 동일한 목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난한 자와 포악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29:13; 참조, 22:2). 솔로몬은 여기서, 가난한 자와 부자가 다 같이 이 세상에서 섞여 살고 있지만 그들 각자의 처해 있는 상황은 하나님에 의하여 정해져 있으며, 따라서 온 인류에게 빛을 주시는 하나님은 결코 맹목적이 아니시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가난한 자에게 인내할 것을 권고한다. 왜냐하면, 자기 운명에 만족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지워 주신 짐을 벗어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른 선지자도, 어떤 사람은 비천한 자리에 처해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높임을 받는 것이 인간의 수고와 운명의 탓이라고 하는 경건치 못한 자를 꾸짖는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75:6-7). 하나님께서 자신의 재판장의 직무를 벗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이들의 높임을 받고 어떤 이들이 멸시를 당하는 것은 정녕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그는 여기서 논증한다.

 

7. 하나님의 섭리는 "자연" 현상을 조정한다

 

나는 또한 개개의 사건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성격을 일반적으로 증거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바람을 일으켜 많은 메추라기를 자기 백성에게 보내주셨다(16:13 ; 11:31). 요나를 바다에 던지려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강한 바람을 보내 광풍을 일으키셨다(1:4). 하나님을 우주의 통치자로 생각지 않는 자들은 이것을 사물의 통상적인 과정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 없이는 바람이 일어나지도, 불지도 못한다고 추론한다. 한편, 만일 하나님께서 구름과 바람의 행로를 원하시는 대로 지도하시며 이 가운데서 자신의 특별한 권능을 실제로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다고 하면,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104:3-4)라고 하신 말씀은 사실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역시 바다가 강한 바람으로 거센 파도가 일 때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 임재에 대한 강력한 증거임을 성경에서 보게 된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107:25).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107:29). 다른 곳에서 그는 풍재(風災)로 백성을 치셨다고 말씀하셨다(4:9).

이와 같이 또한 인간에게는 본래의 생식력이 주어져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자손이 없게 내버려두고 어떤 사람에게는 많은 자손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것을 특별한 은총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참조, 113:9). 이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127:3)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야곱은 그의 아내에게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30:2)라고 했다. 이 논의를 곧 끝맺는다면, 우리가 음식으로 양육된다는 것보다 더 평범한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땅의 소산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지만 또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8:3; 4:4)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사람이 힘을 얻는 것은 풍부한 떡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하신 축복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을 제하여 버리겠다"(3:1)고 위협하시는 것과 같다. 실로 일용할 양식을 위한 진지한 기도(6:11),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애로운 손길을 우리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양육하심으로써 한 가족의 가장 훌륭한 아버지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신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136:25)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 도다"(34:15)라는 말씀과, 또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34:16)라는 말씀을 성경에서 읽게 된다. 우리는 이 두 말씀에서, 천상 천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어떤 모양으로든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자. 여기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 섭리는 피조물 가운데서 역사하여 자연의 질서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놀라우신 계획으로 본래의 명확한 목적에 순응하도록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

 

(운명, 우연, 우발성에 대한 토론. 8-9)

 

8. 섭리의 교리는 스토아 철학의 운명론이 아니다

 

이 교리를 비난하려고 하는 자들은 이를 스토아 학파의 운명론이라고 하여 비방한다. 어거스틴도 한때 이러한 비난을 받은 바 있었다. 우리는 용어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운명이라는 말에 용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울이 피하라고 가르친 망령되고 공허한 말 중의 하나이며(딤전 6:20), 또한 사람들이 이 비방하는 말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억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이 운명론을 믿고 있는 것처럼 거짓되게 또는 악의에 찬 비난을 받고 있다. 우리는 스토아 학파처럼, 자연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인과(因果)의 계속적인 관계와 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일련의 연속에서 파생되는 필연이라는 것을 고안해 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멀고 먼 영원으로부터 그가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지혜로 작정하시고 일단 작정하신 것을 지금은 권능으로 수행하시는 만물의 지배자요 통치자로 삼는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무생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계획과 뜻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로 다스림을 받아 지정된 목적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독자는 물을 것이다. 아무 일도 운명적으로나 우연적으로는 발생하지 않는가? 나는 이에 대하여 대답한다. ()바실(Basil), "운명"이나 "우연"이라는 말은 이교도들의 용어로서 경건한 신자들의 마음은 절대 그런 것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진실하게 말했다. 왜냐하면, 모든 성공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하고 재난과 역경이 하나님의 저주라고 한다면 인간사에는 운명이나 우연이라는 말이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말도 이상적인 말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아카데미 학파에 대한 논박(Against the Academics)이라는 나의 책에서 자주 운명이라는 말을 언급한 데 대하여 나 스스로 유감으로 생각한다. 물론 나는 이 말을 사용할 때 어떤 여신이나 혹 다른 것을 나타내려고 뜻한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외부적 사건에 있어서의 우연적 결과를 나타내려고 한 것뿐이다. '포르튜나'(fortuna, 운명)란 말에서 '우연히'(forte), '아마'(forsan), '혹시'(forsitan), '어쩌면'(fortasse), '뜻밖의'(fortuito)라는 말들이 나왔는데, 이것들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말들이며 따라서 모두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이 말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고, 흔히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은밀한 질서로 말미암아 조정되는 것이며 "우연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의 이유와 원인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실로 그렇게 말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런 식으로 운명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나는 후회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아주 나쁜 습관에 젖어 있어서, 당연히 "이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이다"라고 할 것을 "이것은 운명이 뜻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어거스틴은 만일 무엇이든지 모두 운명에 맡겨버린다면 세계는 목적 없이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만사가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자유 선택으로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주장했지만, 곧 이어 그는 인간은 섭리에 종속되어 있는 동시에 또한 섭리의 지배를 받는다고 충분히 논증하면서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명령 없이 발생한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일은 없다는 원리를 취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되는 대로 발생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는 또한 어떠한 우연한 일도 인간의 의지에서 기인된다는 것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서 한층 더 명백하게,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의 원인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자주 사용한 "허용"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가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락이 없이는 어떠한 사건도 발생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의지는 만물의 최고의 원인이며 제일 원인이라고 그가 증명한 데서 가장 잘 나타날 것이다. 확실히 그는, 한가하게 높은 망대에 앉아서 이것저것 허락하기를 즐겨 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공상하지는 않았다. 그가 간섭이라고 말하는 의지는 말하자면 현실적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을 떠나서는 원인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9. 모든 사건의 참된 원인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의 우둔한 마음은 하나님의 섭리의 높이까지 미치기에는 너무나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어떤 구별을 지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만물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확실한 분배에 따라 제정되었으나, 그것들이 우리에게는 우연적이라고 구별을 지으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운명이 세계와 인류를 지배하며 만물을 되는대로 상하로 굴러가게 한다는 그런 생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어리석은 생각은 마땅히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들의 질서, 이유, 목적, 필연성은 그 대부분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감추어져 있고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님의 의지로 발생하는 것들도 운명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자체의 성질에 따라 생각되든 우리의 인식이나 판단에 따라 평가되든, 그것들은 표면상으로는 다른 모습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상인이 일단의 정직한 사람들과 함께 숲 속에 들어갔다가 잘못하여 일행을 잃고 헤매다 마침내는 강도를 만나 살해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선견(先見)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작정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각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오랫동안 연장될 것인가를 하나님께서 선견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다"(14:5)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의 능력에서는 이모든 것이 우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는 그런 죽음의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성질상 우연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섭리가 운명을 다스리시며 그 목적을 향해 운명을 지도하신다는 사실 또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똑같은 평가는 미래의 우발적인 사건에도 적용된다. 일체의 미래사를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그 일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되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 속에서 그 미래사를 붙잡고 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견하시지 않은 것은 그 어떠한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확고부동한 신념으로 남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운명"이라는 말이 전도서에서 자주 사용되었는데(2:14-15, 3:19, 9:2-3,11) 인간은 처음 보아서는 깊이 감추어져 있는 제일 원인을 통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성경의 이 가르침은, 그 어떤 섬광이 흑암 속에서 항상 비취지 못할 정도로 인간의 마음에서 소멸되지는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블레셋의 점장이들도, 비록 의심하여 흔들렸을망정 그들은 액운을 일부분은 하나님의 탓으로, 일부분은 운명의 탓으로 돌렸다. 그들은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삼상 6:9)고 말하였다. 어리석게도 그들은 점()에 속아 운명을 의지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불행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감히 생각하지 않으려고 자제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께서 섭리의 고삐로 모든 사건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키시는 가는 다음과 같은 놀랄 만한 실례에서 명백해질 것이다. , 다윗이 마온 황무지에서 함정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 나라를 침략하게 되어 부득불 사울은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삼상 23:26-27).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종의 안전을 염려하셔서 사울의 가는 길을 방해하셨다고 하면, 블레셋 사람들이 갑자기 또는 뜻밖에 싸움을 걸어 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연으로 보이는 것도 신앙은 그것을 하나님의 은밀한 추진이었다고 인정한다.

언제나 똑같은 이유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변동이 하나님의 손의 은밀한 활동에서 온다는 것은 분명히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은 필연적으로 발생되지만, 그 필연은 절대적인 것도 아니며 그 자체의 특수한 성격으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뼈를 좋은 실례로 들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소유하셨던 만큼 온전한 사람이라면 그의 뼈가 부러질 수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뼈를 부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하였다(19:33,36). 여기서 우리는 다시 상대적 필연과 절대적 필연, 마찬가지로 결과적 필연과 결과의 필연의 구별이 학파들간에 분별없이 고안된 것이 아님을 본다. , 하나님께서는 성자의 뼈를 부러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드셨으나 실제적으로는 이를 부러지지 않게 하심으로써,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을 자기 계획의 필연으로 제안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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