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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교회사 : 선교의 위대한 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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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I. 선교의 위대한 세기

19세기는 유럽과 미국의 힘이 폭발적으로 팽창한 시기였다. 이 힘은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세계는 아직도 원시 시대에 살고 있는 지역이 대부분이었기에 근대 국가를 탈피하고 현대에 들어서는 이들 나라는 넘치는 힘을 식민지 개척에 쏟아 붓고 있었다. 유럽 정신은 곧 기독교 정신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기독교도 전 세계를 향해 팽창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때의 기독교는 식민지주의와 함께 유럽과 미국에서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서구외의 지역에서도 영혼을 구원하고 그 영혼들을 바른 삶으로 인도했다.

1. 19세기 상황

소위 이 ''위대한 세기''에 유럽과 미국은 번영하였다. 물질세계의 지배와 이에 대한 지식의 증가는 사람들의 생활에 큰 변혁을 가져와 산업 혁명을 일으켰다. 인구는 급증하고 도시들이 계속 세워졌다. 자본주의, 사유 기업, 공개경쟁, 자유방임, 국가 통제의 극소화 등이 지배적인 사회분위기였다. 그 결과로 부는 급성장했다. 하지만 빈부의 격차도 무섭게 벌어졌다. 이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모순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아주 낙관적이었다.

사실 이 번영에 기본적인 힘을 제공한 것은 기독교였다. 하지만 가톨릭 국가들은 대체로 쇠퇴하고 반면에 개신교국은 강해졌다. 개신교의 가르침이 자본주의에 영향을 준 것이다. 영국과 네덜란드, 독일 그리고 미국은 복음적 각성 시기를 맞이하였다. 신앙 성장은 곧 사회로 미쳐 복지 국가의 건설로 이어졌다. 19세기 미국은 자국을 자선 제국(The Benevolent Empire)이라 부를 정도로 모든 신자, 곧 거의 전 국민이 구제와 선교에 열정을 모았다.

해외 선교 활동도 왕성해졌다. 이 시대 선교 사업은 교회가 속한 국가의 힘을 배경으로 하는 강력한 것이었다. 선교사를 많이 보내려면 우선 나라가 강하고 그 나라의 교회가 또한 강해야 했다. 여기에 헌신한 선교사들의 신앙적 모험 정신과 희생이 덧붙여져야 했다. 이런 것들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면서 교회사가 래토레트가 말한 대로 ‘위대한 세기’가 시작된다. 구미의 힘과 함께 그 힘을 가능하게 한 복음이 전 세계에 밀려들어갔던 것이다. 특별히 영국인들이 가장 강력하게 일했다.

선교사는 선교부에서 파송하였다. 선교사들을 보내기 위해서 모금을 하고 그를 훈련시키고 파송하며, 선교사들이 필요한 것들을 지속적으로 보급해 주었다. 그리고 선교사가 임지로 떠난 뒤에는 그 선교사가 본국에서 해결해야 할 모든 문제를 담당하였다. 반면에 선교사는 선교부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고 선교지의 상황에 대해 철저히 보고해야 했다. 선교사 숫자가 많아질수록 선교부는 더욱 확장되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선교부를 운영하려면 교회의 뒷받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전에는 소수의 헌신자들이 천신만고 끝에 외국의 한 나라에 가서 그 지역 사람들과 평생을 지내면서 선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선교 대상 국가들은 유럽 나라들에 의해 이미 문호를 열었다. 그 중에 많은 나라들은 구미와 통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이제 어느 정도의 국가 보호 아래 조직적인 선교를 감행할 수 있었다.

전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는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성공한 예는 극소수였다. 본국 교인들의 몰이해와 선교사들의 고된 작업 속에 겨우 대표적인 지역에 대한 언어 이해와 성경 번역이라는 도구가 갖추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말까지는 구미 개신교 선교회들이 거의 전 세계를 누비고 들어갔으며, 거의 모든 교단이 이 사업에 참여했던 위대한 시기였다. 이 일은 구미 열강들의 식민지 분할과 같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제3세계의 문명이 뒤떨어졌음을 절감하였고 복음과 동시에 서구 문명을 심으려고 했다. 많은 선교사들은 복음과 서구문명을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선교지에 가서도 현지인들과 섞이지 않고 끝까지 서구인으로 산 이들이 많았다. 이들에 의해서는 별로 훌륭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선교를 잘한 선교사는 현지인들의 심성을 연구하여 거기에다 서구 문화보다 복음을 심은 이들이었다.

이 시대의 주인공은 그 누구보다도 선교의 개척자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활동하여 다른 선교사들이 들어갈 길을 열었다. 때로 어떤 선교사들의 활동은 당시 동료 선교사들이나 본국 선교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많았다. 그래서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고, 간혹 선교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선교를 계속해야만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방법들이 오히려 이 위대한 세기를 가능하게 한 큰 힘이 되었다.

2. 선교의 개척자 캐리

18세기 말 영국 노트햄프턴의 침례교 목사들은 선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2명의 목사들이 칼빈주의 침례교 선교 단체를 창립하고 모금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이 단체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87쪽으로 된「이방인들의 구원」이란 소책자로 선교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캐리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1701년에 태어난 그는 가난하고 험한 젊은 시절을 보낸 뒤, 1785년 조그만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캐리의 좌우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였다. 이 말씀은 스스로를 몰아서 선교사가 되게 한 것이다. 선교회가 조직되고 그가 선교사로 뽑히자 온 가족은 반대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그의 아내도 그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캐리의 생각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그는 5개월을 항해하고 지친 상태로 1793년 마침내 인도의 뱅갈에 도착하였다.

그들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가족은 병에 걸려 신음하고 아들 하나는 죽었다. 캐리의 아내는 정신 이상이 되었고 죽을 때까지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상적인 선교의 꿈은 사라지고 있었다. 캐리는 농장의 지배인으로 일하면서 말을 배웠다. 7년 동안이나 일했지만 인도인 개종자는 하나도 없었다. 낙망의 나날 속에서도 그는 성경을 번역했고 틈만 나면 설교하였다. 학교도 세웠다. 1795년에는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얼마 후에 새로운 선교사가 도착하자 캐리는 캘커타 근방에 있는 덴마크령 세람포로 옮겨갔다. 이 지역은 곧 인도에서 침례교 선교의 중심이 된다. 캐리는 남은 생 34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여기에는 10여명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차츰 이곳은 캐리의 지도로 모범적인 선교지가 되어갔다. 선교사들은 초대 교회처럼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토요일 저녁에는 함께 모여 서로 사랑하도록 기도했다. 그때부터 그의 사역은 성공적으로 되어갔다.

학교가 세워지고 인쇄소도 만들어졌다. 번역 사업도 꾸준히 진행되었다. 여기서 캐리는 뱅갈어, 산스크리트어, 마다리어 등 3개의 언어로 성경을 완역하였다. 여러 다른 언어와 방언들로 된 신약성경과 쪽 복음을 번역하였다. 이 번역 작업은 이전의 가톨릭 선교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본래 가톨릭에서는 말씀보다 의식에 중요성을 두었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성경 번역 작업은 선교에 가장 강한 힘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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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람포에 선교회가 세워진 지 1년도 안되어 개종자가 나타났다. 계속 개종자는 생겼지만 전도는 매우 느렸다. 침례교 선교회가 시작된 지 약 25년이 지난 1818 년에 600명의 세례 교인과 수천 명의 신자가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캐리는 1819년 세람포 대학을 세웠다. 37명의 인도인으로 학교를 시작했는데 그 절반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리하여 인도에서는 이때부터 교회 지도자와 복음 전파자가 양성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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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국의 내지 선교회

1854년 약관 22세의 젊은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가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중국 선교에 실패하여 거의 문 닫게 된 중국 복음화 협회(Chinese Evangelization Society)에서 파송되었다.

그는 18세 때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중국을 목표로 의학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선교사가 되기 위한 극기 훈련도 하였다. 그는 생각했다. “중국에 가면 도움 얻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의지할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다.”그래서 그는 기도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선교지에 도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테일러의 돈은 바닥이 났고 선교회로부터 후원금도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런던 선교회 지역에서 몇 달을 지냈다. 그곳의 선교사들은 너무 사치스럽게 살고 있었다. 그는 외국인 거주 지역을 벗어나서 판잣집으로 옮겼다. 결국 중국에 도착한 지 1년이 지나 그는 내륙 깊숙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선교사가 전혀 가본 적이 없는 조그만 마을에 머무른다. 그만의 방법대로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는 중국옷을 입었다. 그리고 변발을 하고 머리를 검게 염색하였다. 그리고는 중국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그가 생활하는 모습이 다른 선교사들 눈에는 치욕스럽게 보였다. 선교 본부에서도 그에 대하여 대단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이미 그는 정기적인 후원금이 아닌 부정기적이고 개인적인 후원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결국 3년이 지나지 못해 중국 복음화 선교회와는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그 후 그는 마음대로 여행하며 선교하였다.

1865년 그는 중국 내지 선교회를 창설하였다. 그때 그가 세운 원칙은 다른 선교 단체들의 것과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이 선교회는 초교파적이다. 둘째, 공식 교육이 부족한 이들도 선교사가 될 수 있다. 셋째, 선교회의 본부는 영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넷째, 선교사들은 중국식 복장을 해야 하며 가능하면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겨야 한다. 다섯째, 선교회의 일차적 임무는 언제나 복음 전파이지 의료나 교육 활동이 아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지 선교회는 성장했다. 중국과 본국 양쪽의 이해 부족, 불성실한 동료들과의 마찰, 약한 건강, 1870년 아내와의 사별 등으로 테일러는 대단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그의 선교 사업은 왕성해져 갔다. 선교사 후보생들은 구름처럼 몰려왔다. 서북 변방에서 시작된 선교 사업은 1882년까지 중국의 모든 성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였고 거의 모든 성에 선교사가 상주하게 하였다. 테일러는 1905년 중국에서 잠들었다.

내지 선교회는 선교사가 중국 땅 어디에나 갈 수 있다는 확실한 가능성과 용기를 보여 주었다. 1914년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선교회가 되었고 전성기인 1934년에는 1368명의 선교사가 활동하였다. 1964년부터 내지 선교회는 해외 선교회(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로 바뀌어 아시아 선교에 주력하고 있다. 이것도 19세기 테일러와 그의 동료들이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4. 아프리카 선교

수백 년 동안 아프리카는‘백인의 무덤’으로 알려져 왔다. 그토록 많은 선교사의 목숨을 요구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아시아에 비해 출발이 늦었지만 아프리카에서 더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개신교의 아프리카 선교는 18세기 말에 시작되었지만 남쪽 오렌지 강 이남의 해안 지방 몇 곳에 국한되었다. 그러다가 차츰 그 이북으로 그리고 내지로 확대되어 갔다. 아프리카 지역은 선교사들이 식민지주의와 야합하였다는 비판을 특히 많이 들었던 곳이다. 로버트 마펫 같은 선교사는 복음이 전파되어야 서구식으로 사고가 진행되고 산업이 증대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후에 리빙스턴은 선교 활동과 상업 활동을 병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유럽의 문명이 아프리카인들의 생활수준과 도덕 수준을 높일 것이라는 전제에서 나왔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아프리카의 장래는 유럽 문물이 얼마나 들어오느냐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복음과 기독교 문명을 혼동한 셈이었다. 아니면 적어도 문명화가 되면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 더 쉬워지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오직 소수의 선교사들만이 선교 사업이 식민지 쟁탈과 병행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 시기에 대표적인 선교사는 물론 영국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영웅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이다. 그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아프리카 내지에 접근이 가능하도록 길을 닦은 사람이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정도로 존경받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성과는 다르게 소심하고 변덕이 심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선교 사역에도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아프리카로 집중시킨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1840년 27세에 도착한 아프리카는 그가 평생 밝혀 낼 신비스런 이상향이었다. 그가 결혼한 상대는 위대한 아프리카 선교사 로버트 마펫의 딸이었다. 하지만 그의 여행벽으로 가족은 행복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가족들을 영국으로 보내고 평생을 홀로 여행하였다. 그리고 포르투갈인들과 아랍인들의 악질적인 노예무역을 목격하고 그 흉악상을 전 세계에 고발하기도 하였다. 그는 아프리카를 구하는 방법은 복음을 주고 상업을 바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리빙스턴의 최초 탐험은 잠베지 강을 따라 중앙에서 북서쪽으로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환등기를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여 후에 들어올 다른 선교사들의 길을 예비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평생을 통해서 계속되었다. 그가 선교 사업에 남긴 업적은 크게 세 가지이다. 아프리카의 길을 찾아낸 것이요, 아프리카 선교의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요, 아프리카에 대한 선교열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리빙스턴이 개척하고 발견해 낸 길들을 따라서 선교사들은 별로 어려움이 없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노예 무역상들이 더 많이 그 길을 이용하였다. 그의 세번째 탐험이자 마지막 탐험은 나일 강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었는데, 그 탐험에는 단 한 명의 백인도 동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1873년 어느 날, 그는 자기 침대 옆에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숨졌다. 그를 사랑하는 아프리카인들은 그의 심장을 아프리카에 묻고 몸은 미이라로 만들어 영국으로 보내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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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세아니아 군도의 선교

마지막 선교지는 태평양의 섬들이었다. 이 아름다운 지역은 1,500개의 섬들로 이루어졌다. 이 섬들에 선교사가 도착한 것은 18세기 말인데 본격적인 선교는 19세기에 이루어졌다. 이 지상 낙원처럼 보이는 섬들에서는 식인 풍습, 유아 살인, 일부다처 및 성적 타락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원주민들은 거의가 무당 종교를 믿고 있었다. 그리고 본래가 순진한 원주민들은 유럽 선원들에 의해 쉽게 농락과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일세기가 다 지나기 전에 이 지역 거의 전체가 복음화 되었는데, 이는 대중 운동(people movement)이라는 방법을 통해서였다. 이것은 한 종족의 제일 높은 사람이 개종하면서 종족 전체가 신자가 되는 그런 방법이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유럽 사람들은 군함이나 총포의 위력으로 밀고 나가서 왕을 설득하고 결국은 국민 전체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들을 자행하였다. 제국주의의 물결은 이 태평양의 모든 섬들도 서구 여러 나라의 영토로 분할시켜 버렸다.

거의 모든 섬이 비슷한 과정으로 선교가 진행되었지만 타히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796년 헨리 노트(Henry Nott)가 영국에서 이 섬에 도착했을 때 섬의 성적 타락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선교사들이 배를 저어 접근했을 때 그들을 마중한 것은 창칼이 아니고 벌거벗은 처녀들이었다. 처음 여기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여자들의 집요한 유혹에 못견디어 함께 그들과 타락하거나 섬을 떠났다. 노트도 결국 원주민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그 유혹을 이기고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타히티 왕은 반대파를 없앨 수 있는 무기를 구하려고 선교사들을 환대하고 기독교로 전향할 뜻을 비쳤다. 선교사들은 망설였다. 하지만 반대파들이 그들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하는 수 없이 왕에게 무기를 제공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왕과 그의 부하들에게 성경과 함께 총을 주었다. 많은 선교사들이 전쟁 중에 이 섬을 떠났지만 노트는 계속 남았다. 그리고 반란군은 진압되었다. 동시에 왕은 노트의 요구대로 조상 대대로 섬기던 우상을 버렸다.

그의 우상은 모두 열두 개였다. 이것들은 런던에 보내져 전시되었다. 그리고 큰 감동을 일으켜 기부금을 모을 수 있었다. 왕은 우상을 버린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세례 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처를 여러명 두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7년이란 세월을 고민한 끝에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하여 1819년 모든 국민이 보는 가운데 왕과 신하들은 세례를 받고 섬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동시에 유아 살해, 식인 풍습, 전쟁 등도 사라졌다.

하와이에 선교를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선교회였다. 태평양의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하와이 역시 유아 살해와 식인 습관은 흔한 일이었고, 정령 숭배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하와이는 1778년에야 서방 세계에 알려졌는데,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타히티로부터 북아메리카의 서해안으로 항해하는 중에 이 낙원 같은 섬을 발견했던 것이다.

미국 선교회는 1819년 10월, 7쌍의 부부를 하와이로 파송하였다. 다섯 달 동안의 항해 기간 중 앤도버 신학교를 졸업한 히램 빙햄(Hiram Bingham)이 그 선교팀의 리더가 되었다.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저들은 거의 발가벗다시피 한 원주민들의 영접을 받아 경악하였으나 선교적 상황은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그 당시 하와이에는 커다란 사회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왕이 즉위한 것이었다. 그는 우상숭배와 인간을 희생하는 제사를 금지시켰으며, 오랫동안 질질 끌어오던 부족들간의 전쟁도 끝날 것 같았다. 이런 가운데 선교사들은 입국을 허락받았으며, 기독교 선교사로서의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와이 선교는 원주민들을 기독교 문명의 단계로 끌어올리려는 선교사들과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원주민들의 거부감, 동족인 백인 선원들이 원주민 여자들을 마음대로 농락할 수 없게 된 데에 대해 반발하여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방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와이에서의 선교사역은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어갔다. 교회들과 학교들이 설립되었으며, 기독교 신앙에 대해 더 알려는 사람들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런 학교들 중에는 시빌 빙햄(히램 빙햄의 부인) 여사가 세운 여자 학교도 있었다. 그 학교에는 추장부인들이 많이 등록했는데,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1823년에는 왕의 어머니가 세례를 받기도 했다. 아마 가장 극적인 개종 이야기는 한 추장의 부인이었던 카피올라니(Kapiolani)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녀는 많은 하와이인들처럼 펠레(Pele) 여신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 여신은 킬라우에아(Kilauea) 화산의 분화구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돌아온 뒤 그녀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지켜보는 가운데 화산에 올라가 분화구 용암 속에 돌멩이들과 소위 신성하다는 열매를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구경꾼들에게 돌아와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증거하였다. 이 사건은 선교사들이 모두 합세하여 펠레신을 공격한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기독교를 전할 수 있게 한 극적인 사건이었다.

하와이 선교를 시작한 지 10년이 지났을 때, 선교사들은 섬의 구석구석까지 펴져나갔으며, 1837년에 이르자 선교사들의 수는 60여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열심히 사역하고 헌신적이며 굳건한 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하였는데, 이 기초적인 사역이 끝나자 커다란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40년 경 로마 가톨릭 신부들이 들어옴으로써 개신교 선교지가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가톨릭의 타협적인 선교방법이 청교도적인 개신교의 선교방법보다 잘 먹혀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브래드포드 스미스는 “헌금을 요구하는 대신 가톨릭 사제들은 선물을 주었는데, 특히 어린이들에게 세례 줄 때 큰 효과를 보았다. 그들은 설교 없이 짧게 미사를 마쳤으며, 음주나 흡연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고, 어떤 죄인들에 대해서도 면죄를 약속했으며, 누구나 다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서양식의 훌륭한 저택에서 살
지 않고 하와이인들과 똑같이 생활하였다.”고 설명하였다.

개신교 선교가 주춤한 것은 로마 가톨릭의 유입 이외에도 빙햄 부부의 귀국과 몇몇 선교사들의 물질주의 때문이었다. 몇몇 선교사들은 토지와 부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선교사의 소명을 저버린지 오래였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선교사들도 소위 부업으로 토지를 갖고 있어서 선교사역에만 전적으로 매달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한때 2만 명을 넘어섰던 하와이 교회는 크게 쇠퇴하여 5,000명도 안되게 약화되었다. 선교사들은‘문명화’를 가져다 준 사명은 완수하였으나, 그 문명을‘기독교화’하는 보다 어려운 과업에서는 결국 실패했던 것이다.

19세기에는 유럽의 힘이 전 세계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힘도 그러하였다. 여기 기술하지 않은 곳 가운데 선교 역사에 큰 장을 마련한 예로는 일본, 한국 그리고 동남아가있다.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19세기의 선교는 힘의 선교였다. 본국의 강력한 인적, 물적 지원과 정부의 강력한 힘이 그 밑바탕이었다. 그리고 여러 선교 영웅들의 지혜와 희생적인 봉사가 전 세계 모든 지역에 복음을 심었다.

19세기는 유럽의 힘으로 선교를 수행한 시기였다. 이때 거의 모든 지역에 선교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다. 선교사들은 본국의 힘으로 강하게 선교를 수행할 수 있었다. 재정적 뒷받침은 물론이고 정치적인 압력도 선교를 위한 방법으로 작용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선교를 수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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