Ⅹ. 사회복음주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미국의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자들 가운데서 일어난, 사회를 기독교화 하려는 운동을 가리켜 사회복음주의(Social Gospel) 운동이라고 한다. 사회복음주의는 개인의 구원과 아울러 사회공동체의 구원을 추구했다.
사회복음주의 운동의 배경을 열거하면, ①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가 내세를 강조한 데 비해 근세의 계몽주의가 현세를 강조한 것, ② 종교 개혁자들의‘소명론’이 17, 18세기에 이르러 세속적 직업과 활동의 긍정적 의미를 강조하게 된 것, ③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새 교회와 새 나라 안에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한 것, ④ 복음주의 각성운동이 선교와 노예폐지 운동을 통해 이와 같은 비전을 강화한 것, ⑤ 자유주의 신학이 윤리와 실천을 강조한 것, ⑥ 맑스의 사회주의가 기독교의 사회, 경제적 무책임을 통박하며, 경제 및 계급투쟁을 이상적 사회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1.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마우리스(F. D. Maurice), 킹슬리(Charles Kingsley) 등의 지도하에 일어난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Christian socialist movement)은 교회의 실패를 인정하면서 노동자 계급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산업사회 속에 뿌리박고 있는 깊은 죄악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교회는 의로운 사회질서를 창조해 나아가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역설했다. 이들은 영국과 유럽의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교황 레오 13세(Leo XⅢ, 1878-1903)와 피우스 11세(PiusⅩⅠ, 1922-1939)는 사회 개혁을 위한 종교 활동을 공적으로 인정했다.
2. 미국의 사회복음주의 운동
19세기 말엽에 시작하여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절정을 이룬 미국의 사회복음주의 운동(Social gospel movement)은 사회 개혁이 개인들의 변화와 아울러 복음의 명령임을 강조했다. 이와 같은 사회복음주의 이념은 미국 청교도들의 건국이념에서 비롯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신대륙에서, 기독교 국가에서,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에서 실현시키려고 했던 것이 청교도들의 꿈이었고 소원이었다. 이 꿈은 부흥운동, 선교운동, 노예폐지운동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듯했다. 미국의 사회복음주의운동이 발전하게 된 직접적 원인들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1) 사회주의와 노동조합의 도전
미국 노동조합의 지도자 사무엘 곰퍼스(Samuel Gompers)는 1898년에 말하기를 교회는 노동자의 복지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노동자를 괴롭히며 돈을 하나님으로 삼은 자본가들만 옹호한다고 비난했다.
2)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자유주의 신학이 하나님의 임재, 인간의 거룩함, 윤리와 도덕실천 등을 강조하며 사회변혁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나타냈다. 특히 예일대학교의 실천신학자 호레이스 부쉬넬(Horace Bushnell, 1802-1876)은 사회적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내세웠다. 부쉬넬은 말하기를 죄는 사회적이며 덕도 사회적이라고 했다. 사람이 사회와 고립돼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회 안에서 사회와 더불어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또한 자유주의 성경학자들이 ① 아모스나 미가와 같은 선지자들이 사회정의를 부르짖은 점을 지적하며 강조했고, ② 부, 가정, 국가, 무저항 등에 대한 예수의 교훈을 정치, 사회적 문제에 적용시켜 해석했으며, ③ 예수의 메시지의 중심이 하나님의 왕국임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왕국을 현세의 진정한 이상으로 해석했다.
3) 사회문제의 심각한 대두
산업사회의 발전에 따른 모순, 사회 및 가정생활의 파탄, 실업자의 증가, 노동자의 불만, 자본가들의 개인주의, 인권의 경시 등등 심각한 사회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회복음주의 운동이 발전했다.
3. 워싱톤 글래든
사회복음주의 운동의 선구자요 아버지로 불리우는 워싱톤 글래든(Wahshing Gladden, 1836-1918)은 부쉬넬의 영향을 받은 회중교회의 목사로 그의 저술을 통해 자본(Capital)과 노동(Labor)과의 관계를 단순한 ‘경제’(economic) 문제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윤리 및 종교적 문제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본과 노동과의 협력을 강조했다.
“노예제도가 사라져 가는 지금 자유노동에 관한 관심이 대두되고 있다. 그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그것은 경제의 문제뿐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윤리적 문제라고 하겠다. 그것은 종교의 핵심을 다룬다. 강단에서 그문제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해야 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교회의 기능을 확대하게 했고 교회는 부의 축적과 사용에 있어서의 ‘정직’과 ‘관용’을 말해야 할 뿐 아니라 노동자에 대한‘정의’(justice)를 강조해서 말해야 한다고 했다. 교회는 이제 사회 정의를 수립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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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월터 라우쉔부쉬
사회복음주의 운동의‘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불리는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h, 1861-1918)는 1861년 뉴욕에서 독일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뉴욕의 제2독일침례교회 목사로 11년간(1886-1897) 봉사하면서 뉴욕시 서부 끝 ‘지옥의 부엌’(Hell''s Kitchen)이라고 불리는 험악한 곳에서 일하는 독일이민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통해 인간의 비참과 경제적 모순을 통감했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자기의 경건주의적 신앙이 너무 무력함을 느끼며 자기의 신앙과 성경의 교훈을 재반성하는 가운데서 새로운 확신에 도달하게 되었다. 1889년부터 노동자들의 문제와 관심사에 대한 자기의 입장을 피력했다. 1892년에는 몇몇 젊은 목사들과 함께 ‘왕국의 형제단’(Brotherhood of the Kingdom)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여름마다 한 주간씩 모여 예수의 윤리적 및 영적 가르침을 연구했다(1914년까지).
라우쉔부쉬는 1907년 ‘기독교와 사회적 위기’(Christianity and the Social Crisis)를 저술하므로 사회복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1917년에 저술한 ‘사회복음의 신학’(A Theology of the Social Gospel)에서 그는 사회복음을 다음과 같이 주창했다.
“사회복음은 이제는 예언적이거나 부차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 지향적인 사회 종교 공동체 안에서만 새로운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지금 사회복음은 정통적인 것이 되었다.…사회복음은 오래된 구원의 메시지이지만 보다 확대되고 보다 심화된 메시지이다. 개인주의적 복음은 마음에 있는 죄성을 보게 했지만 사회질서의 죄성은 바로 보지 못하게 했다.…사회복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집단적 죄를 뉘우치게 하며 보다 민감한 양심을 가지게 만든다. 사회복음은 나라들의 구원을 믿었던 옛 선지자들의 신앙을 불러일으킨다.
사회복음은 개인존재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했다. 즉 사회를 개인들이 모인 집합체로 보는 대신 개인들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했다. 인간간의 관계를 연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매우 중요시했다.
1) 라우쉔부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 메시지의 중심이었다.
즉, 사회복음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현존하는 사회의 기관들로부터 성장된다고 생각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현존하는 사회질서를 파괴하므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항존하는 인간사회의 기관들을‘구속’하므로 온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우쉔부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히 인간의 노력만으로 설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기원이나 발전이나 성취에 있어서 신적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될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적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노력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부분적으로 현세에서 천천히 실현되고 있는데 사람이 그 실현을 도울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데 하나님과 협력하거나 그 발전을 방해하도록 되어 있다.”
2) 사회복음은 특히 경제정의에 관심을 가졌다.
조직화된 죄의 세력이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곳이 불의한 산업사회라고 했다. 따라서 개인의 중생만을 호소하는 것은 부족하고 사회개조를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3) 사회복음은 사회 과학적 연구를 강조한 결과 사회학이 신학교 교과 과정에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4) 사회복음은 기독교 교리를 새로운 사회의 비전에 비추어 새롭게 진술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노력이 라우쉔부쉬가 1917년 예일대학교에서 행한 강의들에 나타나 있는데, 그 강의들이 후에 ‘사회복음의 신학’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여기 나타난 라우쉔부쉬의 신학적 관점은 그 당시 유행하던 감상적 낙관주의를 따르지 않았고, 또한 그 당시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학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죄를 깊이 인식하며 죄가 사회적으로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개인적 및 사회적 생활의 위기를 인식하며 회개하고‘악의 왕국’에 대항해서 싸
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우쉔부쉬는 또한 자유주의자들과 같이 죄를 이기주의로 정의했다. 하나님을 독재적인 군주로 이해하면 안 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민주적’인 아버지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임재는 사회적 공동체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임재는 또한 모든 인종의 영적 일체성의 기초가 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종교적인 고집, 정치적 세력, 정의의 파괴, 군사주의, 계급차별 등의 보편적 사회악과 싸우는 것으로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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