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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교회사 : 프린스턴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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Ⅸ. 프린스턴 신학

뉴저지의 한 조그만 동네 프린스턴에 대학이 세워지고 1812년에는 신학교가 세워졌다. 이곳에서 미국 전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많은 목사와 선교사들이 배출된다. 개교 이래 백년 이상 프린스턴의 교수들은 성경과 개혁 신앙을 옹호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프린스턴 신학은 정통 신학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이 신앙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주어 정통 신앙의 토대가 되었다.

19세기 신학계는 크게 나누어 양단간이었다. 학문을 강조하는 이들은 쉽게 자유주의에 물들었고 신앙을 얻고자 하는 이들은 부흥 운동에 빠져들었다. 자유주의는 이성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반면에 부흥 운동은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신앙의 체험을 강조할수록 더 주관적으로 되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신앙을 정리해 주면서 자유주의와 싸운 것이 프린스턴 신학이었다.

프린스턴 신학은 칼빈주의를 공식적 체계로 삼아서 당시의 새로운 신앙적 요구에 응답하고 있었다. 칼빈의 가르침은 이전부터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 신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흐르고 계몽주의와 영국과 미국의 부흥 운동을 통과하면서 그 맥을 지키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었다. 이 두 극단, 자유주의와 광신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당시 기독교 신앙의 관건이었다.

유럽에서는 영국을 제외하고는 자유주의 분위기가 훨씬 지배적이었다. 본래 보수적이던 영국 사람들도 신앙에 대해서 전처럼 확고하지는 못했다. 독일과 프랑스는 훨씬 심했다.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 낭만주의를 거쳤고 이제 막 자유주의가 절정을 향해서 오르려는 참이었다. 미국은 국가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유럽의 모든 전통들이 흘러 들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대각성 이후 미국에서는 여러 차례 큰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부흥회에서 강조되는 것은 인간의 결단이었다. 특히 19세기 초 찰스 피니의 부흥회에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었다. 부흥사들은 외쳤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정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아무 일도 하시지 못합니다. 결정하십시오.”

이러한 강조가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부득이하게 설교할 때에는 이렇게 사람들의 결단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찰스 피니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예정론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인간에게는 회개할 능력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자기가 속한 장로교를 떠났다. 그의 이러한 가르침은 곧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인위적인 부흥회를 이끌어 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많은 부흥사들은 신앙의 체험을 얻는 데 집회의 목표를 두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복음에 대한 메시지보다는 되풀이해서 찬송하고 금식하고 기도하며 어떤 신비한 체험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당연히 설교도 그런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굉장한 소란 속에 집회가 진행되었다.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외형만 보아서는 그 사람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었다. 울고불고 펄쩍펄쩍 뛰고 뒹굴고 이상한 소리를 지르고 하는 현상이 수없이 나타났다. 그러나 바른 부흥회는 그런 뒤에 반드시 사람들이 변화되었다. 삶이 변하고 언어와 행동도 순화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요란한 과정을 통해서 굉장한 체험을 했어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바른 부흥회가 아니었다.

부흥회의 참된 핵심은 사람들의 마음을 집중시킨 뒤에 회개와 중생을 주는 그리스도의 도를 주었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다. 심령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의미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느냐 하는 메시지였다. 예정론을 비난하든 찬성하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해주신 일이 무엇인지 순수하게 말하느냐 않느냐가 문제였던 것이다.

부흥 운동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찬반양론이었다. 개신교는 언제나 이 두 전통으로 이어져 왔다. 복음의 뼈대인 교리를 바로잡고 전하려는 것과 그 복음의 내용을 경험하려는 것의 두 전통이다. 장로교는 부흥회에 대해 찬성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나뉘어 논란을 거듭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 프린스턴 신학교는 교단과 공부하러 온 학생들에게 적절한 지침을 주어야 했다.

한편으로는 유럽에서 밀려들어오는 자유주의 물결을 학문적으로 막아내면서 동시에 신앙의 체험을 존중하고 그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도록 만들어 주는 일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지금까지도 정통 신학의 토대가 되고 있는 소위 프린스턴 신학이 시작된다. 이 신학은 알렉산더에 의해서 시작되어 하지에 의해서 체계가 잡히고 워필드에 의해서 강화되고 방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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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치발드 알렉산더

1812년에 설립된 프린스턴 신학교의 최초 교수였던 아치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1772-1851)는 저명한 목사요 부흥사였다. 알렉산더는 버지니아주 랙싱턴 근처에서 태어나 리버티 홀 아카데미(현 워싱턴 앤드리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직후에 그레이엄(William Graham) 밑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794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그로부터 2년 뒤에 햄프턴 시드니대학의 학장이 되어 10년간 학장직을 맡았다. 1807년 초에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대교회인 필라델피아 파인스트리트교회 목사가 되었다. 1812년 소집된 총회는 프린스턴신학교 설립을 가결하였으며, 알
렉산더를 그 신학교의 초대 교수로 선출하였다.

그는 프린스턴에 온 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후계자인 찰스 하지는 선생을 너무나 존경해서 아들 이름을 아치발드 알렉산더 하지라고 했을 정도이다. 하지의 아들도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다.

알렉산더는 당시의 신학 풍조 속에서는 개혁 신앙을 올바른 전통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앙을 돕는 이성 그리고 광신이 아닌 신앙 체험이 그의 이상이었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낭만주의를 거쳐서 자유주의 세력이 팽창하고 있었고 미국에서는 부흥회 운동이 한창이었다. 자유주의나 부흥회운동이 인간의 의지나 감정을 강조하는 주관적인 신앙을 가르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알렉산더는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분명하게 선포할 책임을 느꼈다. 그의 시대에 신자가 된 사람들은 신앙 체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관적인 체험과 교리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해줄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이 일을 아주 실제적으로 해결했다. 즉 신앙의 체험을 교리에 복종시키도록 요구하였다. 체험이 제멋대로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프린스턴 신학이 추구하는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 그것은 당시의 회의적 이성주의나 감정에 치우친 부흥회주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신앙의 열정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자유주의나 감정주의 어디에도 빠지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도의 객관적인 요소와 개인이 경건 생활에 적용하는 주관적 요소의 긴장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주관적인 이성이나 감정은 반드시 객관적인 성경의 권위에 의지해야만 했다. 아무리 체험이 분명하고 생생해도 그것은 항상 성경에 의해서 옳고 그름을 시험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절대로 이성과 부조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을 최상으로 사용하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밝혀진 정확무오한 진리의 교리를 받아들일 때이다. 그것이 이성이 주어진 최대의 목적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의 자유주의의 도마 위에서 잃어버려져 가고 있는 성경의 권위를 바로 세워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성경의 완전 영감을 주장하였다. 성경은 그 내용이 사실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다. 성경의 기적들은 모두가 사실이고 진실이다. 과학적으로 볼때도 너무 정확한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 덧붙여져서 성경은 영감을 받아서 기록된 특별한 책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성경 기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하나님의 영감은 그들이 잘못하지 않도록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기자들은 자신의 경험과 이해를 가지고 사실들을 기록한다. 아기가 뒤뚱대며 걸음마를 옮길 때 그 바로 뒤에서 아기를 따라가며 넘어지지 않도록 붙드는 아버지를 생각해 보라. 이때 성령은 그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인간일 뿐인 성경 기자가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한다.

그러다 보니 성경의 진실성과 영감은 서로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기자는 관찰을 통해서 당시의 사건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그의 기억 속에 분명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사건을 기술할 때쯤에는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정확이나 실수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만약 그 내용이 틀림이 없으려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영감을 받은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영감을 받지 않고 쓰거나 말하는 것처럼’ 그들 스스로의 문체나 표현 방법을 그대로 가지고 성경을 기록하였다. 영감은 지식이나 글, 어느 면에서나 인간의 실수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정확성, 틀림없는 정확성’ 이것은 어떤 기록에서나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바로 그 정확성이 성경에 적용된 것이다.

알렉산더는 위와 같이 성경의 완전 영감을 주장함으로써 자유주의자들 앞에 성경의 권위를 바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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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찰스 하지

알렉산더의 뒤를 이은 찰스 하지(Charles Hodge,1797-1878)는 필라델피아에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나 프린스턴에서 공부하였고, 1815년에 그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819년에 신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는 프린스턴의 대표 교수로서 이성의 힘과 성경의 권위에 대해 더욱 강조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나은 장로교 및 프린스턴 전통의 설립자로 인식되고 있다. 아무도 그처럼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46년간이나 일한 이가 없고 그만큼 영향을 끼친 이도 없다. 그는 바로 프린스턴 신학의 조직자였다.

그의 성격 중에 가장 특이한 면 하나가 한결같다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프린스턴의 태도이기도 하다. 약 3천 명의 목사들이 그에게 교육을 받아 미국 전역의 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의 경건 생활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고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더욱 강해져 갔다. 그의 경건은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언제 어디서나 같았고 변함이 없었다.

열네 살에 프린스턴 대학에 들어간 그는 신학교의 교수들에게 더 큰 감명을 받는다. 그들에게 영향을 받아 그는 중생의 뜨거운 체험을 하게 된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가 시작되면서 알렉산더가 취임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연설을 들으면서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한다. “대학을 마치면 나는 저분에게 신학을 배우리라.” 이 일은 4년 뒤에 이루어졌다.

대학을 마치고 1819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학교로부터 성서 신학의 강사가 되라는 제안을 받았다. 3년 뒤에 그는 정식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해 그는 결혼하여 반세기 이상을 신학교 옆에 있는 집에서 보냈다. 여기에서 그는 여덟 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중 두 명은 훗날 같은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하지가 쓴 세 권의 조직 신학은 현대 정통 신학의 뼈대를 세워 준 셈이 되었다.

1826년 그는 가족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프랑스나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2년 간 배운 뒤에 그들의 방법이 신앙에 큰 해를 끼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독일의 신학자들이 신앙을 설명함에 있어서 성경보다 철학의 체계를 따르는 데 동의할 수 없었다. 신앙을 오묘하게 만드는 것 같았지만 결국 인간의 생각수준으로 떨어지게 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알프스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고 그것을 평생 유지하여 신앙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그 순간 눈을 들었다. 내 주위에는 거대한 반구형 극장이 높이 하늘까지 닿아 있었다. 알프스였다. 잠시 후 내 삶의 잘못되고 불분명한 개념들이 그 영광스런 실재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이 위대하고 장엄한 자연을 만든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고도 장엄한 분이랴!

오랜 공부 끝에 그는 알렉산더의 입장을 그대로 전수하여 합리주의, 주관주의 양극단을 지양하고 그의 신학을 펴나갔다. 그의 조직 신학 서두에 하지는 두 오류에 대항해서 자기의 방법을 세우고 있다. 그에게 신학이란 과학이었다. 모든 과학에 방법론이 있듯 신학에 적용되는 방법론은 귀납법이었다. 과학의 내용이 자연의 사실인 것처럼 성경은 신학에 내용을 주는 사실을 제공했다.

하지는 알렉산더의 성경관을 그대로 되풀이하면서 더욱 강화시켰다. 성경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가 볼 때 성경은 개신교 신앙의 규칙이고 하나님이 만드신 진리의 창고이다. 만약 철학이 계시와 모순될 때는 철학이 성경 진리에 복종해야 했다. 왜냐하면 철학이 인간 지성의 결론이라면 성경은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 기자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특별한 감동을 주어서 자신의 뜻을 틀림없이 전달하도록 하셨다. 물론 한자씩 불러 준 것을 받아쓰게 하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영감은, 신자의 마음에 단순한 영적 조명이나 성화의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초자연적인 영향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책들과 내용들은 똑같이 영감으로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부분이 똑같은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부분이 덜 중요한 부분을 해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도덕이나 신앙 진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과학이건 역사건 지리에 관한 것이건 모두 사실의 진술이다.”주께서도 “성경은 폐할 수 없나니”라고 하심으로 스스로 영감설을 증거하고 계신다.

이렇게 해서 프린스턴 신학은 개혁자들, 특히 칼빈과 튜레틴의 전통에 서 있음을 명백히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는 알렉산더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토대로서 성경의 권위를 확실히 세우고 있었다. 동시에 그 성경으로부터 구원의 도리 뿐 아니라 삶의 도리를 찾아내고 있었다.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인간이 만든 철학에서 모든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덤빈것과 대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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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벤자민 워필드

워필드(Benjamin Warfield, 1851-1921)는 켄터키 주 렉싱턴 근처에서 유서 깊은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프린스턴 대학에 들어간 뒤 문학 분야에서 학위를 받고, 스무 살에 프린스턴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처음에는 자연 과학에 몰두해 영국과 독일로 유학을 갔다. 그러다 진화론의 가설에서 떠났다. 증거가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수학과 물리학에 집중하였다. 에딘버러에 갔다가 다시 하이델베르크로 옮기고는 신학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일 년 뒤에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에 등록하여 목사 훈련을 받았고,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유학하였으며(1976-1877), 볼티모어 제일 장로교회의 부목사가 되었다. 1878년 피츠버그의 웨스턴 신학교에서 신약성경 언어와 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1879-1887년까지 웨스턴 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학문적인 명성을 높였다. 그 후 프린스턴으로 옮겨서 34년의 여생 동안 하
지의 후임 교수가 되어 변증신학을 가르쳤다. 1887년 취임 시에 그는 프린스턴의 전통을 잇겠다고 선언하였다. “내 안에 찰스 하지의 능력은 없어도 그의 신학은 있습니다. 나는 재능을 다해 이 신학을 앞으로 만날 학생들에게 강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워필드는 신학과 성경을 주제로 많은 책을 출판하였고, 수많은 소책자들과 연설문들을 발행하였다. 히브리어, 헬라어, 현대 언어들에 능통하였고, 교부학, 신학, 신약 비평학에도 정통하였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높이 평가한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워필드가 프린스턴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때는 신학적 상황이 선배들 때보다 한층 더 정통 기독교에 불리했다. 성서 비평학과 진화론이 미국에 수입되어 꽃을 피우고 있었다. 비평학으로 이성과 계시의 분명한 구분은 없어지고 성경은 인간의 체험 수준으로 설명되었다. 다윈이 가르친 자연 선택에 의한 적자생존 사상은 전통 신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완전 타락과 부합될 수 없었다.

여기에 반대하여 전통적인 기독교를 방어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그의 변증학에 분명히 표현되었다. “만약 신학이 하나님의 과학이라면 그것은 주관적인 경험이나 사상들을 다루는 게 아니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다루는 것이다. ”신학의 주제가 하나님의 지식이라면 그것은 객관적 사실 위에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논리에 어긋남이 없어야 했던 것이다.

성경에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탄생, 삶, 죽음, 부활 그리고 하늘의 제사장 되심에서 절정으로 나타난다. 거기에 덧붙여서 그러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설명이 주어졌다. “설명 없는 사실은 신앙을 줄 수 없다. 그리고 다른 설명은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사실과 그것의 설명인 교리 위에 서 있다.”

신학은 정확한 사실과 바른 설명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무오한 성경에서 나온다. 신학자는 이것들을 정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거기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 복음으로 선포해야 한다. 그의 소명은 “구주와 함께 분깃을 나누며 그 소중함을 발견해 그분을 굳게 붙들고 성령의 감동에 굴복”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려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진리와 자신의 관계를 연구해야 한다.

그의 이러한 가르침은 현대 신학의 방법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었다. 현대 신학은 우선 성경을 인간들의 신앙 고백으로 본다. 당연히 내용상 맞지 않는 게 너무 많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내용을 읽는 사람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법칙을 적용해 진위를 가리고 그것이 주는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성경이 계시로서의 객관성은 사라지고 읽는 이의 이해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대항해 워필드는 선배들을 따라 성경의 영감설을 주장했다.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그는 축자영감을 주장했다. 이것은 시인이 받은 영감이 아니다. 신자들을 회개하게 하거나 성화시키는 성령의 일반적인 영향도 아니다. 초자연적인 것으로 기록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되게 하는 영향이다. 그러므로 한마디씩 모든 말씀이 완전히 무오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무오함이 사본이나 번역판에까지 미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성경 기자가 처음에 쓴 그 원본만이 무오하다는 말이다. 인쇄술이 없던 시절, 한 줄씩 베끼거나 그 후에 다른 나라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기자들이 쓴 그대로의 원본은 사라지고 없다. 그러므로 원본에 가장 가까운 사본을 찾아내어 조심스럽게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워필드가 보기에 성경의 영감성과 무오성은 해석의 근본 원리이지 기독교의 근본 원리는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진리됨이다. 즉 하나님께서 무오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도리와 그 내용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이것 없이 성경의 영감성이나 무오성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러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복된 소식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더 관심을 써야 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렇듯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프린스턴 신학은 1929년까지 유지되었다. 그 후에는 밀려들어오는 자유주의 물결을 더 이상 대항하지 못한다. 새로운 교수들이 들어오면서 결국 학교의 기본적인 신학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레샴 메이첸과 몇몇 동료들에 의해서 끝까지 방어되던 프린스턴 신학은 결국 중단되었다. 그리고 그 과거 시절은 구 프린스턴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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