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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교회사 : 신정통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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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II. 신정통주의

자유주의는 기독교를 과학에 복종시켰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 특히 인간 속에 내재되었기에 인류는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성에 대한 이러한 자부심은 인간이 만들어 낸 엄청난 악, 바로 세계 대전 앞에서 무너졌다. 이 전쟁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는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초월하심도 깨달았다. 그러나 자연 과학에 사로잡힌 자유주의의 후손들은 다시 옛날의 정통 신앙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양쪽을 다 거부하며 신정통주의라는 중간노선이 나타나게 되었다.

1. 배경

19세기 후반‘역사적 예수’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랑케의 새로운 역사 방법, 즉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며, 있던 그대로의 과거를 재현하려는 운동은 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인간 예수에 대한 신화를 다 벗기고 실제의 예수를 살펴보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새로운 역사 연구 방법에는 초자연이나 영적
인 영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과는 예수님을 순전히 보통 인간으로 보는 것이었다.

수없이 많은 예수전이 씌어졌다. 여기서는 복음서의 내용이 온전히 다 수용되지 않았다. 기적을 벗긴 예수는 하나의 보통 인간이었다. 그러한 그가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의 지도자는 리츌이었다. 그의 목표는 ‘교리적 그리스도에서 역사의 예수로’였다. 하지만 여기 보통 사람 예수는 스승으로 가치가 있어야 했다.

역사 비평은 예수님에게 입혀졌던 신화의 찬란한 옷을 벗겼다. 그러나 벌거벗은 예수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자기들 생각에 예수가 본래 입었으리라 생각되는 거친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역사 연구는 차츰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역사가 완전히 과학적일 수가 있겠는가? 몇 천 년
전의 과거를 재현하는데 어떻게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다시 해낼 수 있겠는가?

학자들은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의해서 나타난 예수는 예수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역사가 자신의 이해를 투영해서 상상한 예수일 뿐이었다. 19세기의 사고와 문화에 젖은 자기의 두뇌 속에서 만들어진 상상의 인물일 뿐이었다. 이러한 인간적인 이해의 투사체가 무슨 구세주가 될 수 있겠는
가? 현 시대의 눈으로 과거의 사람을 볼 게 아니라 그 시대의 눈으로 보아야 했다.

그래서 19세기의 부르조아적이고, 도덕적이며, 관념론적인 표현의 예수는 잘못되었기에 후기 유대교의 묵시 문학의 분위기에서 보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요하네스 바이스와 알버트 슈바이처였다. 바이스는 예수님이 임박한 무서운 종말과 초자연적인 새 창조를 기대했다고 주장했다. 슈바이처도 예수님을 당시 시대의 인물로는 자신의 죽음이 이 종말의 시작을 주리라 착각했다고 말했다.

이렇듯 ‘역사적 예수’가 19세기 사람들의 이상적인 인간을 투사한 것이라면, 바이스나 슈바이처의 방법은 1세기 유대의 상황에서 예수님을 상상해 본 것이었다. 여기 덧붙여서 ‘종교사학파’들은 예수님과 초기 기독교를 후기 헬라의 신앙과 관습에서 이해해 보려고 하였다. 리츌은 기독교의 역사적인 고유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종교사학파에서 볼 때 기독교의 현상은 비역사적인 것이었다.

종교사학파는 무엇인가? 종교사학파의 학자들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똑같이 원시 상태부터 차츰 진화해 가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이 보기에 초기 기독교는 절대로 특별한게 아니었다. 기독교는 고유한 것이 아니라 후기 유대교, 동방의 종말론, 헬라의 신비주의, 영지주의, 스토아 사상 등이 모여져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행히 기독교는 새 종교가 필요한 때 나타났을 뿐이었다고 저들은 보았다.

보우셋은「주 그리스도」라는 책에서 기독교가 원시 상태의 종교에서 헬레니즘이라는 환경 속으로 들어간 다음에 예수님이 주로 불리었다고 주장했다. 이때 비로소 예수님은 이방 제의의 신들처럼 경배되었고, 또 그 신들이 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기독교도 다른 모든 종교들처럼 원시 상태가 있었고, 제의적, 신비적 단계로 진보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는 상대화되었다.

이러한 상대화는 유명한 트뢸취에 의해서 더욱 심화되었다. 그는 하르낙이 주장했던 기독교의 본질을 비판했다. 하르낙 식의 사랑이라든지, 온 인류의 형제화라든지 하는 기독교의 본질이란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중인데 무슨 본질이 있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기독교는 추상화된 개념으로 축소시킬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그러한 개념이 발전한 역사이며, 그 모든 것이었다.

종교사학파들에게 기독교는 영원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역사의 여러 운동처럼 새롭게 변하는 것이었고, 신적인 생명력이 역사 안에서 항상 새로운 개개의 사건에서 자신을 현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통일되지도 않았고, 보편적일 수도 없었다. 기독교도 이러한 법칙대로 보편적이지도 않고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기독교는 유럽 문명과 함께 흥하고 망할 상대적인 것이었다.

역사를 ‘일어났던 그대로’보자는 운동에서 시작된 역사 비평학은 스스로의 약점 때문에 모든 진리를 상대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일어났던 그대로 복원시키는 일을 상대적인 인간이 하기 때문이었다. 이 상대화는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정신이 온전치 않은 신비주의자요, 종말주의자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다른 종교처럼 원시 상태로부터 진화되어 온 종교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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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기 신학

자유주의 신학은 20세기 초에 들어와서 그 스스로 허구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계몽주의 때부터 일어났던 빛나는 인간 이성에 대한 예찬은 19세기에 와서 절정에 달한다.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이 신의 한 부분인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리하여 인간과 신의 차이는 단지 양적인 것이요, 그것도 차츰 좁아드는 것으로 착각했다. 결과는 인간의 수준으로 신도, 구원도 끌어내린 것이었다.

이성의 발달로 그리고 인간의 계몽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조금씩 실현되어 갈 것이라는 부르조아적 낙관론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가장 이성이 뛰어난 유럽 사람들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는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대량 살상하는 무서운 무기를 만들었을 뿐이었고, 온 세상은 인간의 집단적인 악에 의해서 참담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이 위기를 맞이하여 젊은 목사 칼 바르트는 폭탄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은 1919년「로마서 강해」라는 작은 책으로 나타났다. 곧 이어 스위스와 독일의 많은 신학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특히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 연구를 출판했다. 당대 인간에 대한 낙관론을 거부하고 비극의 심연에 빠져있는 어두운 인생을 묘사했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신정통 신학자들의 눈을 열어 준 것이었다.

바르트는「로마서 강해」를 통해서 자신의 관심은 “어떻게하면 하나의 인간으로서 엄위하고 높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였다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경 자체를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선배들이 볼 수 없었던 진리의 영역이 있었다. 그는 선배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의 말에 치중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19세기는 인간 절대주의 시대였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가르쳐 온 자유주의와 결별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행복한 날들이었던 19세기의 실제적 종말이 1914년 임했다. 나 자신에게 그 해 8월의 어느 날은 암흑의 날이었다. 그 날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황제 빌헬름 2세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놀랍게도 나는 그들 가운데서 이제까지 신앙적으로 존경했던 스승들을 발견했다.” 이제 그에게 세상의 위기는 임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스승의 성경 해석, 역사에 대한 가르침을 전면 부정하게 됐다.

또한 바르트는 키에르케고르나 도스토에프스키의 실존주의와 프란즈 오베르벡이나 불룸하르트 등의 정치신학, 마르하이네케 등의 헤겔 후 신학들에도 영향을 받았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영향을 그에게 끼친 것은 성경이었다. 그가 직접 교구에서 목회를 하면서 성경을 읽은 데서 그는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11년 스위스 사펜빌에서 목사가되었다. 바르트가 그의 친구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과 이 당시에 교환한 서신들을 보면 이러한 상황들을 보다 더 잘 알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연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설교학을 약간 개선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실제로 설교를 하고자 한다면, 이는 단지 우리들 자신의 영성의 흥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이어야만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적어도 19세기 신학에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제 알았다. 19세기의 자유주의가 무슨 오류를 범했던가? 그것은 하나님을 멋대로 생각하고 인간을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요 본성이 선하므로 바르게 교육시키면 의롭게 살 수 있으리라 착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인 이해가 아니었다. 바울과 어거스틴의 가르침의 중심에 표현된 복음의 내용이 아니었다. 또한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다시 명확하게 밝혀졌던 구원의 길도 아니었다. 인간은 악하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죄인이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믿음으로만 구원될 대상이었다. 근본이 악한 인간들은 절대로 그 악한 본성에서 선한 것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르트는 인간과 하나님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았다. 그것은 양이 아니라 질의 차이였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절대로 건널 수 없는 무서운 간격이 있었다. 인간에게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없다. 가능성도 없다. 단지 하나님에게서 인간에 이르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무능한 인간은 죄의 노예로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었다.

이제 바르트는 루터와 칼빈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그리고 2천년이나 내려온 정통 신앙의 가치를 깨달았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종교였다. 거기에는 아무런 구원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통 신앙은 분명히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보여
주며 구원의 길도 열어 준다. 이것이 자유주의에는 없었다. 단지 인간의 현실에 대한 여러 가지 인간적인 이해만을 더해줄뿐이었다. 그것도 자꾸 변해 왔다.

정통 신학으로 갈 것인가? 그러나 바르트는 자유주의의 아들이었다. 그는 역사 비평학을 통해서 성경은 인간의 손으로 쓴 오류투성이의 문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전통적 신앙을 인정했지만 이미 비판을 받았던 정통 신학은 그대로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정통 신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정통 신학이다. 축자영감설을 인정하지않는 정통 신앙, 바로 신정통 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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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존주의와 변증법

바르트의 신학 방법인 실존주의와 변증법은 키에르케고르(1813-1855)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루터교를 국교로 하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루터교 가정에서 7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키에르케고르는 부친의 처음 부인이 세상을 떠나기 4개월 전에 부친과 하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때문에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항상 우울했고, 이 우울증이 그의 아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약간 곱사등에다가 유약한 몸을 지닌 우수의 철학자로서 학문과 예리함에 있어서 천재성을 일찍부터 보이기 시작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 1830년에 코펜하겐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철학과 문학에 더 큰 흥미를 느껴서 그의 석사학위논문을 ‘아이러니의 개념’에 관하여 썼다. 그리고 그는 신학 분야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의 천재성은 그로 하여금 학교공부로 만족할 수 없게 하였다. 그는 몇 가지 인생의 문제들 때문에 정신적 위기에 떨어졌고 종교적 실존, 특히 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싸워야 했다. 첫 번째 사건은 아버지가 죄를 고백한 사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하녀와의 불륜관계로 키에르케고르가 태어났음을 그에게 고백하였다. 두 번째 사건은 그의 약혼의 파기였다. 그는 1837년 레기나 얼선을 만나 사랑에 빠져 약혼에 이르렀으나 어느 날 갑자기 파혼하였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그의 일기에는 ‘하나님의 거부’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아마도 그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는 그의 약혼녀와 결혼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정신적 위기감
이 그로 하여금 심미적이고 실존적인 작품을 남기게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19세기 초반 사람이었으나 자기 시대에는 빛을 볼 수 없었다. 한 세기나 일찍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미친 그의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오늘날 그는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불려진다. 초기 바르트의 신학은 키에르케고르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책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을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세 단계로 보았다. 그것은 실제로 그의 생애와도 같았다. 심미적 단계는 미를 추구하면서 사는 생활이다. 이는 충동적인 삶이다. 여기에는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없다. 반성도 없다. 그저 찰나적인 삶의 원리로서 관능을 따라서 움직이는 삶이다. 동물적인 삶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급기야 실망과 초조 속에서 좌절하고 말게 된다. 물 위에 던진 돌이 물을 차고 날지만 몇 번이나 튀겠는가? 결국 좌절의 심연에 빠지고 만다. 좌절 속에서 경험하는 실존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이다. 이 무의미와 절망 속에 빠져 버리고 말 것이냐 아니면 삶의 의미를 찾아서 다음의 단계로, 곧 윤리적인 단계로 도약할 것이냐, 이것은 참으로 실존의 문제였다.

윤리적 단계의 사람은, 심미적 생활은 죽음에 처한 인간이 선택할 길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윤리적으로 살 것을 결심한다. 그렇다고 생과 죽음과 무의미가 덜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이런 두려운 일에 대한 불안을 짊어지고 산다. 하지만 관능적으로 자신을 잃고 뒹굴 수는 없다. 그래서 자유를 가진 인격체로 자신을 바라본다. 인류애를 발휘하며 꿋꿋이 운명과 싸우며 죽어간다.

이것이 비극적인 영웅주의이다. 넘어지고 쓰러지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간다. 까뮈의「페스트」에 나오는 의사와 같은 삶이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은 좌절하고야 만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여기서 또 한 번 선택의 길이 열린다. 자기의 운명을 지고 싸우다 죽을 것이냐, 아니면 영원자요 절대자인 하나님에게 자신을 의탁하며 살아날 것이냐.

다음의 도약 단계가 종교적인 단계이다. 종교적 단계도 둘이다. 자기를 포기하고 절대자에게 맡기지만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고 자기의 노력, 자기의 의, 자기의 선행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려는 단계가 있다. 이것은 율법적인 단계요 바리새인의 단계이다. 이것 역시 있는 힘을 다해서 노력은 하지만 역시 한계에 도달
한다. 인간은 자기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 단계인 자기 몸 전체를 정말로 내던지는 참 종교적인 단계로 나아간다. 구원이신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에 자기 몸을 던지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논리가 지배하지 않고 역설이 움직인다. 여기서는 모든 윤리적인 차원을 뛰어넘는다. 윤리와 모순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단계이다. 높은 바위에서 끝없는 심연에 몸을 던지는 전적인 모험이다.

우리는 키에르케고르의 중심 사상을 역설이라는 단어에서 본다. 여기에서 “진리는 주관이다.”라는 실존주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같은 백만 원짜리 수표라도 사람에 따라서 가치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신앙도 객관적으로 정보를 받고 같은 경험을 갖는 게 아니다. 신앙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기에 주관적인 것이다. 또한 결단 역시 실존하는 개개인들이 주관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 키에르케고르의 신앙관이 나타난다. 신앙은 논리가 아니고 역설이며 합리가 아니라 비합리인 것이다. 후에 그의 사상은 신앙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이들에 의해 이용되기도 한다. 그는 신앙의 대상이 비합리적이거나 부조리하지 않다고 못박는다. 역설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지혜로는 그것이 부조리요 역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주관적인 결단이 요구되는 모험이라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했다. 신앙은 그들이 말하는 식의 이성의 한계 속에 있는 것도, 합리적인것도 아니었다. 또한 ‘일어났던 그대로’의 객관적인 역사 기술도 가능한 게 아니었다. 그는 이런 주제넘은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의 신학은 20세기에 와서 실존주의자들이 만든 모든 혼란과 무의미의 시작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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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칼 바르트의 신학

바르트(1886-1968)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금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배웠다. 그러나 그는 1909년 제네바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교수들에게 배웠던 자유주의 설교는 교인들에게 아무런 양식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강단에 오를 때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위선과 회의를 통렬하게 느꼈다.

그는 친구요 목사인 투르나이젠과 이 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들은 신앙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 연구를 시작했다. 그래서 바르트는 ‘성경 안에 있는 신기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로마서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발견하고 자유주의의 잘못된 입장을 깨달았다.

「로마서 강해」출간 이후 에밀 브룬너, 루돌프 불트만, 프리드리히 고가르텐, 투르나이젠 등이 그를 지지했다. 물론 이들은 후에 서로들 의견에 많은 차이를 보여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이들은 1922년부터「시대의 사이에서」라는 신학 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여 1933년 폐간될 때까지 새 시대의 독일 신학을 이끌어 갔다. 그들의 입장은 신정통이 되었다.

바르트와 신정통 신학자들은 키에르케고르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헤겔의 변증법 곧 정반합 식의 단순한 이론을 배척하고, 진리와 진리 사이의 변증법적인 긴장에서 진리가 깨달아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유한과 무한의 중간점에 있다. 그러므로 양쪽을 다 잡고 있는 것이다. 인간 속에는 부정과 긍정이 함께 있다. ‘예’와 ‘아니오’가 서로 해석되고 의지되며 발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인으로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종으로서 누구에게나 종속된다. ”바르트의 이 말은 루터의 말과는 의미가 다르다. 루터는 인간이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 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양극단 사이에서 계속 예, 아니오를 반복하면서 달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교리주의나 신비주의에 빠지지않는 유일한 방법이라 했다.

바르트의 이러한 방법은 자유주의자와 전통적인 신자들 양쪽 모두에게 혼란을 줄뿐이었다. 그에 의하면 진리는 항상 움직이고 있는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는 것이다. 그의 애매한 방법은 역사관에 더욱 잘 나타난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의 과학적인 역사관에 반대하였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그 결과는 그들이 범한 오류에 그대로 빠지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 비평학자들과 똑같이 성경을 보았다. 그는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다른 것들과 똑같이 인간의 문서이다.” 왜 그런가?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증거자로서의 기능과 그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서 우리처럼 진정한 역사적인 인간들이었고 행위에 있어서 죄악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말이나 글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었고 실제로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번역을 제안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확실성과 명확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해진 성경 구절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확실한 근거 위에 서 있다.” 오류와 불확실 그것이 성경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보다는 그것이 주관적으로 인간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신구약에 기록된 성경의 역사는 절대로 실제 역사가 아니다.”라고 바르트는 선포했다. 특히 성경의 초자연적인 사건들, 예를 들어 부활이 그러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재림은 둘 다 같은 것이지만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이 역사에서 실제 일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관심은 정말로 무엇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관심사인가?

그는 말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실제 역사냐 아니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의 실제 의미는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지 잘 증명된 역사적 보고를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를 듣고 내리는 인간의 결단이 자유주의자들의 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신정통주의자들은 분명하게 자유주의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과거를 재현할 수 있고 예수님의 일생도 완벽하게 재구성하리라는 생각은 인간 자신만큼이나 허구였다. 신정통주의자들은 그것을 거부하였다. 그리고는 그들 이론에 의하면 정확하지 않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주관적인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진리는 주관이었다. 구원은 이렇게 여전히 인간 수준의 차원에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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