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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교회사 : 근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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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 근본주의

근본주의(fundamentalism)는 20세기 초엽 미국의 여러 교파 안에 나타난 보수주의 신학운동 또는 보수주의 신학의 경향을 가리킨다. 자유주의자들 또는 현대주의자들이 19세기의 고등 성경비평학을 도입하고, 기독교를 현대과학 및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는 현대적 종교를 만들려고 시도했음에 대항하여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완전 축자영감과 무오성을 골자로 하는 정통적 기독교의 입장을 변호했다. 근본주의 운동은 자유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 침례교도와 장로교도 및 보수주의 인사들이 총망라하여 구성된 연합 전선적인 움직임이었다. 근본주의 운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 것은 1909년부터 1915년까지「근본주의 총서」(Fundamentals) 12권이 출판된 때이지만, 근본주의 운동의 기운은 1870년대에 이미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1. 근본주의 운동의 두 조류

근본주의 운동은 근본주의 연구의 권위자 쌘딘 교수(Ernest R. Sandeen)가 지적한대로, 19세기에 형성된 두 조류의 보수주의 신학운동인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와 프린스턴 신학(Princeton Theology)이 현대주의와 대항하여 공동전선을 이루므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 세대주의

세대주의는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이라고 불리는 영국의 조그만 분파운동에서 기원했는데 이 운동의 창시자는 존 다아비(John Nelson Darby)였다. 다아비와 그의 추종자들은 1820년경부터 영국 국교의 전통과 율법주의에 불만을 품고 매주마다 따로 모여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형식이 없는 예배를 드리며 신약교회의 정치와 예배를 재연하려고 했다. 다아비의 세대주의 운동은 1840년경부터 미국에 소개되어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다아비 자신이 1862년부터 1877년에 이르는 16년 동안 7차례나 미국을 방문하여 그의 세대주의를 전파했다.

세대주의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강조함과 아울러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를 7세대로 구분하여 놓고 각 세대를 독특한 방법으로 다스린다는 ‘세대주의’를 가르쳤다. 세대주의자들은 에덴동산의 시대를 무죄시대, 노아까지의 시대를 양심시대, 아브라함까지의 시대를 인간통치시대, 모세까지의 시대를 약속시대, 그리스도까지의 시대를 율법시대, 재림까지를 은혜시대, 그리고 그 후의 시대를 천년왕국시대로 구분했으며, 여섯 번째 시대인 현세에 속한 모든 제도적 교회와 교파들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재림 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가르치며 임박한 재림을 강조했다. 그들은 현존 종교 지도체제를 배도의 중심으로 보고 의로운 남은 자들은 항상 조소와 멸시를 당한다고 했다. 참교회는 항상 소수의 택자로 구성되며 큰 교단과 동일시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떠한 조직체도 될 수 없고 개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사귐으로 남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세대주의가 미국에 널리 보급된 방법은 1878년부터 개최되기 시작한 ‘성경 및 예언 사경회’(Bible and Prophetic Conferences)를 통해서였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1883년부터 1897년까지 나이아가라에서 모인 ‘나이아가라사경회’였다. 한편 1880년부터 노스필드(Northfield)에서 개최된 디엘 무디(D. L. Moody)의 부흥사경회는 세대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세대주의의 영향을 입게 되었고, 무디 자신이 세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결국 그의 부흥사경회는 세대주의 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95년에 개최된 ‘나이아가라 사경회’는 기독교 신앙의 5대 근본신조를 채택했는데 그 내용은 ① 성경의 무오 ②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③ 그리스도의 대속 ④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⑤ 천년 왕국 전의 임박한 재림이었다. 세대주의는 스코필드 관주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의 출판 및 성경학교들의 설립으로 점차 그 영향력을 널리 펴 나갔다.

2) 프린스턴 신학

프린스턴 신학은 프린스턴신학교가 설립된 1812년에 탄생하여 1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아취볼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찰스 핫지(Charles Hodge), 에이 에이 핫지(A. A. Hodge) 등에 의해서 성경의 절대 권위를 강조하는 칼빈주의 신학으로 발전 형성되었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이 자기의 진리를 계시하려고 하실 때 오류가 있는 책을 통해서 계시하셨을 리가 없다고 말하며 성경원본의 문자적 영감과 무오성을 강조했다. 미국 장로교 총회는 1892년 성경에 대한 프린스턴 신학의 입장을 공식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성경의 절대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교수들(Charles A. Briggs 등)을 신학교에서 제명시켰다. 1910년에는 장로교 총회가 기독교 신앙의 5개 근본신조를 채택하여 교단의 모든 목사들이 받아들이게 했는데 그 내용은 ① 성경의 무오 ②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③ 그리스도의 대속 ④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⑤ 그의 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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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근본주의 운동의 발전

1) 근본주의 총서

19세기 말엽부터 세대주의자들과 프린스턴 중심의 칼빈주의자들은 공동의 적인 현대주의와 대항하기 위해 연합전선을 이루어 때때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함께 해 나아갔는데(물론 상기 두 운동의 신학적 체계가 서로 조화될 수 없었고 따라서 프린스턴 신학자 워필드는 때때로 세대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Presbyterian and Reformed Review에 싣곤 했다.) 특히 1909년부터 1915년까지는「근본주의 총서」라는 12권으로 된 책자를 출판하여 근본주의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아갔다.

「근본주의 총서」는 로스엔젤스의 부유한 기독실업인 형제인 리만 스튜워드와 밀톤 스튜워드가 희사한 25만 불의 자금으로 300여 만 부가 출판되어 무료로 배부되었는데, 성경의 축자영감과 무오성을 강조하는 29편의 논문들을 중심으로 정통적 기독교의 근본 요소들(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부활, 재림 등)을 변호하는 논문들이 모두 90편 실렸다. 암지 딕슨(Amzi C. Dixon), 루벤토리(Reuben A. Torrey), 엘모 해리스(Elmore Harris), 루이 마이어(Louis Meyer)가 편집을 담당했고, 영국, 미국, 캐나다의 저명한 보수주의 신학자 64명이 집필을 담당했는데 집필자들 중 19명이 세대주의자, 3명이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D. J. Burrell, C. R. Eerdman. B. B. Warfield) 그 외 많은 사람들이 장로교, 침례교, 화란 개혁교, 회중교, 감리교, 감독교 등 다양한 교파에 속한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근본주의 총서」는 고등 비평학을 비롯한 현대 과학적 입장(다윈의 진화론)과 현대 이단들의 오류를 공격하고 기독교의 근본요소들을 변호함과 아울러 복음전파와 세계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12권은 전적으로 복음 전파와 세계 선교에 관한 논문들을 실었다.

2) 세계 기독교 근본주의 협의회

제1차 세계 대전 후 자유주의 신학의 성장과 공산주의의 위협 및 경제 공황 등의 사회적 불안은 근본주의자들을 한층 더 굳게 결속시켰고, 그 결과 1919년‘세계 기독교 근본주의 협의회’(World''s Christian Fundamentals Association)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계속 성경의 권위와 천년왕국 전의 임박한 재림을 강조하며 현대주의와 진화론을 공격했고, 미국교회협의회(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s America) 의 연합운동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니온신학교의 교수와 뉴욕 제일장로교회의 설교자로 활약하던 침례교 목사 포즈딕(Harry Emerson Fosdick)은 1922년“근본주의자들이 승리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해외 선교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을 공격했고, 미국 장로교단 안의 근본주의자들은 결국 포즈딕목사를 뉴욕시 제일장로교회에서 축출하고 말았다.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의 논쟁은 차츰 미국의 각 교단 안에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장로교와 침례교는 그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장로교 안에는 근본주의자들의 과격한 입장을 반박하며 신학적 관용을 주장하는 온건한 형태의 자유주의 세력이 점차 그 영향을 미치게 되어 1924년 1월에는 1274명이 서명한 ‘어번 확인서’(Auburn Affirmation)가 나타나게까지 되었다. 이 선언의 주 내용은 총회가 어떤 교리를 본질적인 것으로 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과, 총회가 선언한 5개조의 교리가 성경과 표준들이 인정하는 유일한 이론들은 아니라는 것으로서, 이는 총회가 선언한 5개조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반격은 한층 더 심각해졌다. 프린스턴신학교는 이 논쟁의 중심부가 되었고 탁월한 신약학 교수 그레샴 메이쳔(J. Gresham Machen)은 그의 명저「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를 통해 현대의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님을 주장하며 정통적 기독교만이 참 기독교임을 명쾌하게 변증했다.

3) 진화론 논쟁

미국 근본주의 역사에서 특기할만한 사건의 하나는 1925년에 있었던 테네시주 데이톤의 고등학교 교사 존 스콥스(John T. Scopes)의 재판사건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의 활약으로 테네시주를 비롯하여 오클라호마, 플로리다. 미시시피, 아칸사스 등이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것을 주법으로 금했는데, 스콥스는 주법이 금한 진화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기소 당했다. 검사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과 변호사 대로우(Clarence Darrow)와의 대결 상황이 미국 전역에 보도되었다. 근본주의의 대변자 브라이언은 창조론의 입장을 변호하기는 했으나 설득력이 없었고, 대로우는 명석한 이론과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브라이언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테네시주 대법원은 결국 기소 사실을 기각하고 피고 스콥스가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내렸으나 그 당시 사회 여론은 대로우 편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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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래샴 메이첸

진화론 논쟁의 결과 근본주의 운동은 좌절을 경험하게 되었다. 1930년「크리스챤 쎈츄리」는‘사라지는 근본주의’라는 논설문을 게재했는데, 근본주의는 미국교회에서 잊혀지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근본주의 운동이 소멸되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로부터 보수주의 신학 교수진의 퇴진으로 근본주의 운동은 새로운 양상을 띠며 발전했다. 프린스턴신
학교의 자유주의화에 항의하여 메이첸(Machen), 윌슨(Wilson), 엘리스(Allis), 밴틸(Vantil) 등의 교수들이 사표를 던지고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신학교를 세우고 개혁주의적 근본주의 운동 또는 근본주의적 개혁주의 운동을 펴 나아갔다. 메이첸은 북장로교회의 해외 선교사업이 자유주의화 함에 항의하여 독립선교부(Independent Foreign Missions Board)를 조직했고, 1936년에는 메이첸을 비롯한 100명의 목사들이 북장로교를 떠나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를 새로 구성했다.

5) 신근본주의 운동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근본주의 운동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했다. 근본주의 대 자유주의 논쟁은 결국 교단 및 신학교의 재구성, 성경학교를 비롯한 복음주의 기관들의 설립및 각종신앙운동의 발생을 초래했다. 한편 근본주의자들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생기게 되어 교단의 분열은 거듭되었고 근본주의 운동은 보다편협하고 배타적인 분파운동으로또는복음주의적 신앙운동으로발전해나아갔다.

메이첸의 지도하에 새로 조직된‘미국장로교회’안에 기독교인의 자유, 천년전 재림설 등의 논제를 둘러싸고 격론이 일어났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메이첸 후계자들은 세대주의를 그 운동에서 제해야 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ire)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신학교의 세대주의 공격은 궁극적으로 천년전 재림설에 대한 공격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1938년 매킨타이어를 중심으로 하는 ‘성경장로교회’(Bible Presbyterian Church)가 세워졌고, 훼이스(Faith)신학교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분리하여 새로 세워졌다. 이는 근본주의 운동이 ‘칼빈주의적 근본주의’와 ‘세대주의적 근본주의’로 양분되어감을 보여주며 자유주의와 대항하여 함께 싸우던 신학 투쟁이 근본주의 대 근본주의의 싸움으로 변화되어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3. 근본주의 운동에 대한 평가

1) 성경 신봉주의

근본주의 첫째 특성은 무엇보다 성경에 대한 절대적 충성이라고 하겠다. 근본주의 운동이 고등 비평 및 진화론과 같은 현대 과학을 비판하고 성경의 영감에 무오성을 변호하며 일어난 운동이므로 근본주의가 성경을 절대적 내지 배타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고 타당한 일이다. 근본주의자들의 성경에 대한 전투적 충성은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고 하겠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근본주의자들 특히 신근본주의자들의 절대적 및 배타적 신봉에는 심각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면 근본주의자들은 주초를 하는 것이 무조건 죄라고 단정한 후 주초를 하는 사람들을 모두 비성경적 신자로 정죄한다. 주초 문제는 심각하게 취급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교회 규범과 덕에 속하는 문제이지 구원이나 성경성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또한 일부 개혁주의적 근본주의자들은 조용히 기도하고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단정한 후, 손뼉치고 찬송하든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정죄한다. 물론 성경은 ‘손바닥을 치며’ 찬송하고(시 47:1) ‘부르짖으며’ 기도하라(렘 33:3)고 말씀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에게 적절한 성경 구절만 택한다.

성경의 절대권위를 믿고 사랑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배타적 성경 신봉주의는 경계해야만 한다. 나의 성경 해석만이 절대적이라는 교만은 매우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2) 배타성과 분파성

근본주의, 특히 신근본주의의 두 번째 특성은 배타성과 분파성이라고 하겠다.

매킨타이어 박사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부터 분리하여 나가서 훼이스신학교와 성경장로교회를 세운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으나 그 이후 커버넌트신학교가 분리되고 ICCC와 ACCC가 서로 나뉘어지고, 해리스와 매크레이와 랩 등 신학자들이 다투며 분쟁과 분열을 거듭한 것은 유감스런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칼 헨리 박사는 신근본주의의 ‘부정적 사고방식’을 지적하며 비판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며, 신근본주의가 ‘명분 있는 싸움에서 사사롭고 초라한 싸움으로, 대국적인 투쟁에서 지엽적이며 말초신경적 분쟁으로 옮겨가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기술했다. 결국 초기 근본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었던 연합정신이나 인격적 고매함이 사라지고 상호 비판과 정죄를 일삼는 배타적 분리주의로 발전한 것이다.

3) 반사회, 반문화주의

신근본주의의 세 번째 특징은 반사회, 반문화주의라고 하겠다. 신근본주의가 문화적 관심이 박약하고 사회참여의 행동이 별로없는 것은 경건주의와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신근본주의자들은 금주운동과 병원과 고아원 경영과 빈민구제 등을 하면서도 사회문제나 윤리적 이슈들에 대하여는 너무나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근본주의 운동이 본래 고등비평이나 진화론과 같은 현대과학에 대항하고 사회 복음주의를 비판하며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변호하면서 일어난 반동적 운동이었으므로 현대 과학일반과 현대 사회 및 문화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근본주의는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주권을 제대로 높이지 못하고 그 하나님의 주권이 세상 안에 실현되어야함을 가르치는 변혁주의적 문화관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개혁주의와 구별된다. 그러나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신봉할 정도로 강조한 것은 역사적 개혁주의와 상통하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신학의 위기가 신 개념의 상실과 성경관의 변질에서 왔다고 분석할때, 근본주의의 성경지상주의는 높이 평가할 만한 신학의 장점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만약 근본주의가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변호하고 강조하는 데 모든 정력을 다 소비하고, 기도와 목회와 선교에 대한 정열을 상실했다면 그것은 오늘의 교회에 아무 도움을 주지못하는 하나의 역사적 유물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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